Top 38 엠마오 로 가는 두 제자 The 12 Top Ans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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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as Choir]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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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누가복음 24:13-35)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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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설교(7)]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우리들의 이야기(눅 24:13~35) –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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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설교(7)]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우리들의 이야기(눅 24:13~35) -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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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고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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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칼럼]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뉴스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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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영성칼럼] 우리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뉴스제이 우리는 김두완 작곡, 작사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생각하며 부르곤 합니다. 1.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 주 … 【뉴스제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대해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의 기사를 말하고 있습니다(눅 24:13-35, 막 16:12-13).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고 제자들인데 부부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글로바(Cleopas, 눅 24:18)와 마리아(Mary, 요 19:25)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약 25리(11km, threescore furlongs) 되는데, 오늘날 “엘 쿠베이베”(El-Qubeibeh)가 성경의 ‘엠마오’(윤사무엘 목사,겟세마네교회,겟세마네신학교,절망,슬픔,부활,예배,엠마오,예루살렘,김두완 작곡,막달라 마리아,글로바,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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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 Bib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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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 | Bib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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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설교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눅2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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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설교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눅2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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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설교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눅2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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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Korean Church in Cambridge – 말씀 모음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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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Korean Church in Cambridge - 말씀 모음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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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김연균 – 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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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김연균 - 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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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 24:13-35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실을 앞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앞에서는 언급만 했을 뿐이며(막 16:12) 여기서 비로소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첫 달 즉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그 날 일어났다.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였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확실하지 않다. 9절 말씀으로 보아 그는 열 한 사도와 함께 있던 자였다.

(1) 두 제자의 목적지와 대화 내용: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2시간 쯤 걸리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갔다(13절).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아침에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들은 허탄한 말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14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다.

(2)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매 그들은 좋은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15절). 예수께서는 낯선 사람인양 우연히 같은 길로 가게 된 것처럼 꾸며 함께 동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그러한 일에 열중하고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오셔서 그들 중의 하나가 되신다. 이같이 신앙과 사랑이 잘못된 두 사람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삽겹줄”이 된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면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 보지 못하거늘(16절). 어쨌든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은 훨씬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3) 그리스도는 그들을 알고 계셨으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하고 주고 받은 대화:

친구들이 신분을 감추거나 변장을 하고 만났을 때처럼 그들도 여기서 질문을 주고 받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처음 하신 질문은 그들이 슬퍼하고 있는 데 대한 것이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① 그들은 슬펐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잃었으며, 주님께 걸었던 기대가 무너져서 실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본을 포기했다. 그래서 무슨 수로 그것을 보충해야 할지 몰랐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믿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뻐해야 할 때인데도 슬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좋은 친구와 좋은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슬픔을 밖으로 표현함으로써 평정을 되찾게 된다. 같이 울어줌으로써 서로 위로를 받는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

②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 물으셨다.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귀의 상태로 들어가셨지만 자기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다정하셨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슬픔을 아시며 그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보고 괴로워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교적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다. 지나치게 소심한 것보다는 건전하나 사고를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다. 또한 우리에게 동정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슬픔 가운데 있는 친구를 발견하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 같이 그들의 슬픔을 알아 주도록 하자.

2) 그 일을 알지 못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물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18절). 글로바가 그리스도께 정중하게 답변했다. 우리에게 정중한 자들에게 우리는 정중해야만 한다. 그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때였다. 그런데 글로바는 이 낯선 사람이 자기들을 해치려고 접근한 것이 아닌가하고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니! 당신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예루살렘에서 우리 주님이 당하신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는 이 낯선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 주고 싶어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걸 보고는 그냥 두지 못했던 것 같다. 낯선 사람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자들이 예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는 가진 자와 가진 것을 쓰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글로바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소란해졌으며, 거기 살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대답하는 대신 그리스도는 그들이 아는 바에 대해 물으셨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19절). 이렇게 해서 자신을 더 낯선 사람처럼 꾸미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예비되어 있는 기쁨에 비하여 자기가 받으신 고통을 가볍게 여기셨다. 그가 얼마나 태평하게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뒤돌아보는지 살펴 보라. 그분에게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그분에게는 너무나 쓰라리고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일이뇨’하고 묻는다. 그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그 신비를 깨닫게 해 줄 것이다.

4)그러자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하였다.

19절 이하에서 그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잘 살펴 보라.

① 그들의 말 속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요약 되어 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선지자이며,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선생이셨다. 그는 영광스러운 이적 곧 자비의 이적을 많이 베푸심으로써 이를 확증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분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②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20절).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③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그분께 대한 실망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그에게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를 기대하였다. 바라는 것이 늦어지면 실망하게 되지만 바라던 것이 무너지면 절망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속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죽음으로써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마치셨으므로 그들은 어느 때보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④ 그들이 지금 놀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다시 살아나셔서 사흘 전에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셨던 것 같이 영광 중에 모습을 드러내시리라고 기대했던 날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잠잠하기만 합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대단찮게 말하고 있다(22,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지 그들이 환상을 보았을 뿐인 것 같습니다. 왜 흔히 여자들은 그런데 쉽게 빠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도들 중 몇 사람도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으셨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가 살아나셨다고 생각할 이유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모두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⑤ 주님은 얼굴로 그들에게 알리시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 그는 구약을 잘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 그리스도는 그들을 미련하다고 하셨다. 악한 자라는 뜻이 아니고 연약한 자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이 미련하다고 책망을 받은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더디 믿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더디 믿으며 한번도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선입견으로 멀리하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둘째로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좀 더 정통하고 성경에 나와 있는 만큼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정통하다면 가끔씩 우리를 사로잡는 당혹함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야말로 그가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로는 그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오해를 벗겨 주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신다.

첫째, 메시야는 이런 고난을 당하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가 받으신 고난은 그가 메시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가 메시야됨을 실제로 증거하는 것이다.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결코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이런 고난을 당하신 다음 그는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그는 부활하실 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것을 자기의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세상이 생기기 전 그에게 있었던 바로 그 영광이다. 그는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그런 다음에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우리에게도 먼저는 가시 면류관을 그 다음에는 영광의 면류관을 기대하라고 명하신다.

㉢ 그는 구약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며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셨다(27절).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자기가 받은 고난을 통해 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가르쳐 주셨다. 모든 성경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산재해 있다. 예언이든지 약속이든지 기도든지 또는 다른 형식으로든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얻지 못하고서는 성경 어느 부분도 통달할 수가 없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천을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섭리에 따라 그때는 막연했지만 지금은 장막이 벗겨지고 신약이 구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훌륭한 성경 주석가이시다. 특히 자기에 관한 성경에 있어서 성경을 연구할 때는 조직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점차 밝아지기 때문이다. 하나니께서 얼마나 빈번하게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족장들에게 아들에 관해서 말씀하셨으며 또 그 족장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좋다.

(4)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을 가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나 성경 강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았어야 했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설교와 강해가 퍽 마음에 들어서 여행이 빨리 끝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1) 그들은 예수께서 함께 머무시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8절). 예수께서 더 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함께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예수께서는 더 가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초청하며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끈질기게 졸라대는 일을 멀리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강권하여 말했다. 함께 유하사이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기쁨을 맛 본 자들은 더욱더 그것을 열망하게 되며,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동행해 주실 뿐만 아니라 밤 중에도 함께 계셔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예수는 그들이 조르는 바대로 들어 주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29절).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간청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셨다(계 3:20).

2)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31절).

그는 길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계속하신 것 같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식사 준비는 곧 끝났을 것이며, 그 식사는 빈약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즐겁게 해 주셨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과 내내 이야기를 나눈 분이 예수이심을 알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 즉 그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자 비로소 그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이적적인” 음식도 아니며 성만찬에서와 같은 “성례적인” 음식도 아니다. 단지 보통 음식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와 같은 행동을 취하심으로써 특별한 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섭리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라고 가르치신다. 음식을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식탁의 상좌에 모시며, 음식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것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자. 그가 떼어 주신 음식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받도록 하자. 그들은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줄 보게 되었으며 그를 알아 보았다. 안개는 걷히고 장막은 벗겨졌으며 그분이 주님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실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그분의 모습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습은 틀림없이 그분에게만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과 은혜로 자신을 알리신 방법에 주목하라. 그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여심으로써 그 일을 완전히 이루신다. 계시를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된다.

3) 그리스도는 저희에게 얼핏 보이신 후 가버리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순간적으로 보게 된다. 즉 우리가 그를 보지만 잠시 후에는 다시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다.

(5)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나누던 대화를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1) 그리스도와 대화하면서 받았던 느낌을 각자 돌이켜 본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설교를 돌이켜 보면서 의견을 나눈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었다. 그들이 비록 설교하시는 분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설교는 매우 단순했다. 게다가 그 설교로 인해 그들의 마음 속에는 “거룩한 빛”과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다. 내내 자기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셨던 분이 바로 자기들이 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자 비로소 이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 어떤 설교가 유익한 설교일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교와 같이 단순한 설교이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성경적인 설교여야 한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또한 성경으로 자기들의 지식과 신앙의 원천을 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만 유익한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일 특히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하며, 그로 인해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생겨나며, 거룩한 소원에 사로잡힐 때 우리 마음은 뜨거워진다.

2) 그들은 이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했다(33절).

그들은 곧 그 즉시로 일어났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알리시자 그들은 너무나 기뻐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이었지만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의 흔들리는 신앙을 강건케 하며 그들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만 안심할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 이루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 주신 바 된 사람들이 당연해 해야 할 의무이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 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들에게 가서 그 기쁨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① 그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열 한 사도와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자들이 밤 늦게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이 두 사람이 들어가자 기쁨과 환희에 차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해 주었다(34절).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본 사실은 고전15:5에 나타난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는 여자들에게 그 사실을 특별히 베드로에게 전해서 그를 위로하라고 명령했다(막16:7). 또한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바로 그날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베드로가 그 사실을 전하며 자랑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기뻐하며 말한 사실이다. 주님은 여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

② 그들이 본 것을 말함으로써 부활의 증거를 더 확실히 했다(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을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길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기서는 길에서 된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말씀으로 인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마침내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이주일의 설교(7)]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우리들의 이야기(눅 24:13~35)

예수 부활을 믿으면 담대해집니다

변화된 제자의 모습이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진 것을 말하더라”(눅24:35)

▲ 김태일 목사

들어가는 말

2013년 부활 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있었던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예루살렘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 만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우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과거에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도 사도들과 끝까지 함께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13절)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지금 예루살렘 성을 등지고 떠나 서쪽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리로 가야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마 28:7, 10) 갈릴리는 이스라엘 땅 북부 지역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자면 동쪽에 있는 여리고 성으로 돌아가거나 북쪽 사마리아 성을 지나서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이와는 전혀 반대 방향인 서쪽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들었으나 (22절~24절) 믿지 못하고 동쪽이나 북쪽이 아닌 서쪽 엠마오로 갔던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과거에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이제 이런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따르셨습니까? 교회 다니는 분들께서 과거에는 열심이 있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변함없이 주님을 끝까지 헌신하며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인생 끝날까지 변함없이 따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현재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으나 지금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 대한 자기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절망과 실의에 빠져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절망과 실의에 빠진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2절~24절) 25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두 사람을 꾸중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는 사람들로서 어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절망과 실의에 빠질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님의 역사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우리가 현재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중 글로바 이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제자가 만일 나라고 하면, 식탁에 앉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나의 모든 근심, 걱정, 염려가 다 한 순간에 봄 눈 녹듯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어떤 고통이나 아픔이나 실망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소망과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히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믿으면 이처럼 낙심과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2013년 부활절 기간에 이런 놀랍고 기쁨이 넘치는 은혜를 맛보아 아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이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33절에 보면 이 두 제자는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부활을 믿게 되자 그 즉시 부활의 증인이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틀림없이 이후에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36절 이하에 보면 이 두 제자는 열한 제자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번 더 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후에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 120여 명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초대교회 성도들 중 대표적인 성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되돌아 간 예루살렘 성은 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도시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아직 그대로 권세를 잡고 있었고 예수님을 죽인 로마의 군병들이나 그 군중들이 그대로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이처럼 담대해집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용사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고 증거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해서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왜 그렇게 담대했습니까? 부활 신앙 때문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믿으므로 믿음의 선조들처럼 담대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과거는 어떠했으며 현재는 어떻습니까?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변화된 모습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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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지 마십시오

상세 본문

어릴적 교회에서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쉬운 기타 코드로 구성된 이 곡은 두 사람이 화음을 맞추기에 손색없는 곡으로 교회 찬송 경연대회에 자주 등장했던 곡이었습니다.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로 알려진 이곡의 본래 제목은 ‘엠마오의 두 제자’ 이고 작곡자는 한국 교회음악의 거장으로 알려진 ‘본향을 향하네’의 고)김두완 박사였습니다.

어릴 때는 음을 뽐내느라 의미도 모른 채 불렀던 이 곡은 성장하면서 종종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엠마오는 어디이며 두 제자는 왜 그곳으로 가던 중이었을까?

작곡자는 왜 그들이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다 표현했을까?

노래는 개인의 간증이든, 성경의 이야기든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엠마오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地名)이고 그 길을 가고 있던 사람들은 실존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이며 왜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을까

두 사람이 엠마로로 가던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부활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무참히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을 여러차례 이야기 하셨고 유대인들 조차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무덤앞에 돌문을 막았건만 정작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중 한명의 이름은 글로바이고 다른 한명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글로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아래 있었던 여러 마리아 중 한명의 남편과 같은 이름이지만 동일 인물인지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알던 제자들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른 제자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을 뿐 아니라 자주 언급되지도 않고 자주 나오지도 않는 예수의 제자들도 다 흩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엠마오로 가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오해했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에게 그들은 예수신줄 알지 못하고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분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정치적인 예수로만 그분을 이해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정치가는 힘을 잃은 순간 모든 것을 잃습니다. 아무도 그들곁에 있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며 엠마오로 떠났던 것입니다.

가서는 안될 곳 엠마오

성경에 등장하는 곳 엠마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60스타디온 (약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위치는 불명확합니다.

엠마오는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의 고향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있던 대상이 사라지자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했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난주에 부활절을 보낸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수십번의 부활절을 보내면서 이 두 사람 보다 더 빨리 엠마오로 가곤 합니다.

여전한 걱정과 절망, 그리고 불안과 초조로 가득한 삶으로 여전히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빨리..

부활을 몰랐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알고 부활절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줄 아는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며 절기행사를 치루듯 아무 감동과 감사 없이 그날을 보내곤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누구보다 더 빨리 엠마오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치 예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려면,

예수남께서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과 예언자들의 모든 예언이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다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무턱대고 읽는 것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주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모르는 분의 전화는 온통 질문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질문에 대한 답을 서로 찾아가며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집회금지명령에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예수의 보혈이 나를 덮고(cover)있기 때문에 나는 안전하다고 말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발언을 했던 목사는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보혈이 나를 덮는다고 표현한 그분은 마치 마블 영화처럼 어떤 외부의 공격으로 부터 나를 지켜주는 쉴드로 보혈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말 그대로 혈액입니다. 혈액은 뇌에 산소를 공급하고 심장을 뛰게 합니다. 보이지 않게 일하며 서로 역할을 감당하도록 돕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내 안에 흐른다는 것은 내 몸에는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말하는 회사의 CEO보다 더 엄청난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생명이요, 가치관이요 인격이요 삶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혈을 흘려 주시고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피로 (수혈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삶입니다.

다시 예전의 삶으로, 예전의 엠마오로 돌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예수님의 탄생은 매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도 매일입니다. 부활하신 영광도 매일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절기에, 명절에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의 고통과 예전의 걱정 근심, 예전의 소망이 없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싶습니다.

이번주가 바로 그 시작입니다.

엠마오로 가지 마십시오. 다시 시작하십시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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