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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멘터리 전쟁史] 186부 동아시아 전쟁사 이자성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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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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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편집]

말년[편집]

같이 보기[편집]

이자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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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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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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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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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그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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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구름그위에서 이자성은 반란군은 예정보다 빠른 3월 17일 북경성 밑에 도착하니 북경성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북경성에는 15만 4천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 명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명의 천계 7년(1627)으로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에 출병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 해부터였다. 명나라는 청나라와 계속되는 싸움으로 막대한 군비를 감당해야 했고 세금을 과..베스의 기원지 고대 이집트의 오락의 신.구름그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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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그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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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 리브레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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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 배경
    2 전개

    2.1 전반기
    2.2 후반기(1639년~1644년)
    2.3 난의 종결 (1644~1646년)

    3 평가

    3.1 명
    3.2 이자성군

    4 각주

    1 배경[편집]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100여년 가까이 누적된 명 제국의 사회질서 붕괴와 변혁, 이에 따른 혼란, 그리고 계속되는 암군의 등장으로 인한 통치체제 약화라고 할 수 있다.
    명 제국의 기본적 농촌사회질서는 이갑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 본인부터가 농민 출신으로, 농민반란을 통해 원을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상적인 농촌공동체 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갑제 역시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만 부역과 조세의 의무가 부과되었기에 농민들은 이갑제 체제에서 이탈, 즉 호적을 올리지 않고 유랑을 시작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세부담이 과중해지고 다시 유랑민이 늘어나고 이러한 악순환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더군다나 명 제국 최대의 치욕인 토목의 변, 그리고 북로남왜로 대표되는 이민족의 침략 등에 맞서기 위해 명 제국의 군사비는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명 말기에 이르면 상인과 지주층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 의한 부의 축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자영농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이탈하는 유민들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1505년 정덕제의 즉위를 시작으로 그 이름도 찬란한 명나라 4대 암군의 기나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덕제는 아바타 놀이 말고는 특별히 암군이라 부를 소지가 없었지만 가정제 치하 45년은 도교 신봉에 빠져 국고를 열심히 축내고 도교를 추종하는 권신이 조정을 좌우하면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북로남왜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유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황제가 이 모양 이 꼴이고 조정도 권신이 좌우하니 대책같은 걸 세울리가 없었다.
    가정제 사후 5년간의 짧은 시간이 지나고 명나라 암군중에서도 톱을 달리는 만력제 치하 48년이 시작되면서 명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첫 10년은 장거정의 개혁으로 명이 중흥하나 했지만 장거정이 죽자마자 만력제가 신나게 장거정파를 숙청하면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후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업무거부, 즉 파업을 단행하였고 이 시기에 만력 3정으로 대표되는 대외전쟁과 만력제 무덤 공사로 막대한 재정까지 축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1620년대까지 명은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다. 명 중후반기 이후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인, 지주층의 성장으로 늘어나는 재정부담을 어떻게든 막아주고 있었고, 과거를 통해 유입되는 인재들과 이들이 기반이 된 관료층은 어떻게든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남왜의 걱정은 사라졌고, 명은 모든 전력을 후금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 위기만 넘긴다면, 어떻게든 명 제국은 되살아날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62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시아 모든 국가들을 휩쓴 대기근이 닥쳐왔다. 국가별로 시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25년~30년에 걸쳐 명, 몽골, 후금,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화북지방의 기근이 극심했는데 1627년 섬서성 일대의 대기근이 결정타였다. 이때의 기근은 유랑민들과 빈농들에게 결정타였고 이들은 말 그대로 먹고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봉기한다. 농민반란으로 건국된 명 제국이 농민반란으로 몰락이 시작되었다.

    2 전개[편집] 2.1 전반기[편집] 1627년 섬서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반란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급료와 식량을 받지 못해 탈영한 군인, 급료를 받지 못하고 실직자가 된 빈민과 전직 관리 등이 대거 가담했다. 이 봉기와 군세가 조직화된 것은 1628년의 일로, 왕가윤(王嘉胤)이 봉기하며 군세를 조직했고, 유력한 지도자 없이 도적떼에 불과했던 각지의 반군들이 왕가윤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631년 왕가윤이 진압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이미 반란군에는 유능한 부장급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고,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고영상(李自成)이 왕가윤의 뒤를 이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633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며 섬서, 산서 두 성을 차지한 고영상의 군대는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한때 전멸 위기에 처했으나 같은 해 겨울에 황하의 결빙을 틈타 산동, 하남으로 탈출하고 반란의 규모를 크게 불렸다. 이후 고영상은 틈왕을 자처하였고, 이를 위협적으로 본 숭정제는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했다.
    당시 반란군 토벌의 중책을 맡은 인물은 홍승주(洪承疇)로, 태자태보와 병부상서를 겸임하며 하남, 산서, 섬서, 호광, 사천의 군사전권을 맡을 정도로 숭정제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리고 이 절대적 권한을 가진 홍승주는 대군을 이끌고 1635년 위남 전투에서 고영상의 군대를 말 그대로 영혼까지 털어버렸다. 위남 전투의 패배로 고영상의 군세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이듬해인 1636년 섬서순무 손정전(孫傳庭)에 의해 지도자 고영상이 체포,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이 무렵 남은 반란군은 수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고 말 그대로 반란은 끝난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부장급 지도자 중 장헌충(張献忠)과 나여재(羅汝才)는 투항했고, 이자성(李自成)만이 투항을 거부하여 틈왕을 자처하였으나 이자성마저 1638년 동관 전투에서 홍승주와 손정전이 이끄는 진압군에게 참패하여 부하 17명만을 데리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사실상 반란의 명맥이 끊긴 상황에서, 이자성을 구원한 것은 숭정제와 숭정제를 압박한 청이었다. 같은 해 9월, 청의 군대가 금주를 포위했고 숭정제는 반란도 진압되었겠다, 자신이 가장 믿고 신임하는 최고의 에이스 홍승주를 전격적으로 계료총독이라는 대청전쟁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639년 출병시켰다.
    그러나 이자성은 아직 살아 있었고, 항복한 장헌충과 나여재도 후일을 기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이 전력을 모아 청과의 전쟁에 임하는 동안, 이들 농민반란 지도자들은 하남으로 이동하여 세를 모으고 재궐기한다.

    2.2 후반기(1639년~1644년)[편집] 이자성 등 반란군 지도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이점은, 명의 근본적인 사회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 데다 기근까지 계속되어 정부에 불만이 많는 유민들이 하늘처럼 많다는 것이었다. 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
    여기에 이암(李岩),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과 같은 지식인 집단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단순한 농민반란군 수준이었던 이자성군은 본격화된 반군조직이자 명을 대신한 새로운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석권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고 관아의 재물과 곡식을 백성들에 나누어주면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으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장헌충과 나여재의 군대도 화남 지방으로 진출한다.
    1641년은 명나라에게 있어 실로 치욕스러운 해였다. 2월 장헌충군은 대치하던 양사창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북성 최대의 요충인 양양을 함락하고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였다. 양왕 주익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후 홧병으로 숨진다. 직후 나여재는 장헌충과의 불화로 이탈하여 이자성에 합류하지만 결국 이자성에게 죽는다. 이로서 장헌충은 호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같은 해 이자성은 낙양을 함락한 뒤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후 복왕 주상순을 삶아 죽였다.(…) 명 황실에 속한 왕 두 명이 반란군에 잡혀 끔살당한 것이다. 그걸로 부족해 양대 반란세력이 중원 한복판을 차지하며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642년 이자성은 격전 끝에 개봉을 함락시켰고, 1643년에는 좌량옥(左良玉)을 격퇴하고 동관에서 손정전을 전사시키며 1638년 동관 전투 패배를 설욕했으며 상양을 점령하여 양경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상양왕이라 자칭하였다. 같은 해 무창을 함락한 장헌충도 스스로를 대서왕이라 칭하였으며 이후로 이자성군은 순, 장헌충군은 서라는 국호를 쓰며 사실상의 국가체계를 갖추게 된다.
    운명의 1644년, 이자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1644년 초 서안을 함락한 이자성은 서안을 수도로 삼는 대순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칭제하여 황제가 되었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에 맞선 명 왕조에서는 조정 신료들이 남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자체적인 방위력이 없는 실정이었는데, 명의 마지막 남은 군사력은 모두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지휘를 받으며 청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남경 천도를 거부했는데 이자성군이 북경에 육박한 상황에서 안전한 천도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북경을 포기할 경우 당시 명의 유일하다시피한 군사력인 산해관의 오삼계군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점이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명 왕조의 유일한 살길은 청이 내부문제로 철군하고, 그 틈을 타 오삼계군이 북경으로 돌아와 이자성군을 격파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1644년 4월 23일,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曹化淳)이 투항했고, 이틀 뒤인 4월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자결하고 명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3 난의 종결 (1644~1646년)[편집]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군은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그동안 엄격했던 규율이 일시에 무너졌고 신나게 약탈을 시작했다. 이는 북경 시민들 및 지식인, 관료 및 신사층들을 적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자성은 숭정제의 내탕금을 빼앗아 부하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금성을 함락하고 보니 내탕금이 없어서(…) 약탈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 이자성군의 책사 역할을 했던 이암과 우금성간의 갈등까지 일어났다.
    한편,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을 멸망시키긴 했지만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자성은 최우선적으로 오삼계를 회유하여 산해관에서 청과 대치하는 현 상황을 유지코자 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자성의 회유를 거부하고 역으로 청에게 투항한다.
    이자성은 청군이 오삼계군에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겠다는 의지로 출병하여 일편석에서 격전을 벌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으나, 접전의 와중에 청군이 등장하여 대규모 돌격을 감행하자 전세가 크게 기울고 참패하고 만다.
    이후 이자성은 청-오삼계 연합군으로부터 북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북경을 포기하고 후퇴, 화북 각지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맞서 싸웠으나 여러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사실상 재기불능에 빠졌고, 1645년 6월에 최후를 맞이한다.
    한편, 이자성과 행동을 달리했던 장헌충은 촉 지방으로 후퇴하여 역시 결사항전하였으나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배, 멸망당한다.

    3 평가[편집] 3.1 명[편집] 명 제국이 이자성의 난에서 끝내 패배한 이유는 내부적인 사회모순은 둘째 치더라도 외부의 강대한 적(청)을 맞서싸우며 동시에 내부의 적까지 상대해야 했다는 치명적인 전략적 불리함에 있었다. 당장 오삼계군이 자유롭게 이자성군 진압에 나섰다면 이자성군은 영혼까지 털렸을 것이다. 그 전에, 홍승주를 중간에 소환하지만 않았어도 이자성은 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의 유능한 장수들이 하나둘 전열에서 이탈한 것도 컸다. 홍승주는 대청전쟁을 위해 차출되었다가 포로로 잡힌 후 청에 귀순했고, 양사창은 후반기 반란군 토벌의 최고책임자이자 최고의 전략가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사망하였다. 양사창 사후 반군 진압에 나선 장수 중 가장 뛰어났고 사실상의 최고지휘권을 갖고 있던 손정전은 숭정제와 조정의 무리한 출병요구에 불리한 상황에서 억지로 출병했다 패하여 전사했다.

    3.2 이자성군[편집] 이자성이 명 왕조를 뒤엎은 이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펼칠 마스터 플랜이나 비전이 전무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이는 사실 가혹한 평가다. 이자성은 명 왕조를 멸망시키고 채 1달도 안 되어 북경에서 쫓겨났다.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민심수습책을 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 설령 청이 아니었더라도 이자성은 강남의 남명 정권과 계속 전쟁을 펼쳤어야 했다.물론 실제 역사에서 남명이 하는 짓 보면 이자성이 남명까지 순식간에 정복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자성군에도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닌데 특히 지휘권이 일원화되지 않아 이자성의 순과 장헌충의 서라는 양대 세력이 공존하였다는 건 심각했다. 이는 이자성과 장헌충이 사실상 독립된 세력을 갖게 되면서 벌어진 일인데 때문에 두 세력은 청과 오삼계군의 공세에 개별적으로 저항하다가 각개격파당했다.

    4 각주

    리브레 위키,이자성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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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배경[편집]

2 전개[편집]

3 평가[편집]

4 각주

이자성의 난 - 리브레 위키
이자성의 난 – 리브레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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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李子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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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성(李子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33년에는 중군병마사가 되어 적괴(賊魁) 거복(居卜)·왕심(往心)을 죽여 용문창(龍門倉)의 난을 평정하였다. 다시 6월에는 동경(東京)주 02)에서 반란을 일으킨 최산(崔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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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성(李子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33년에는 중군병마사가 되어 적괴(賊魁) 거복(居卜)·왕심(往心)을 죽여 용문창(龍門倉)의 난을 평정하였다. 다시 6월에는 동경(東京)주 02)에서 반란을 일으킨 최산(崔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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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李子晟)


	
    이자성(李子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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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 이자성의 난 – 제타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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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이자성[ ]

2 이자성의 난[ ]

3 같이 보기[ ]

4 참고[ ]

이자성, 이자성의 난 - 제타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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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의 가수 겸 연기자에 대해서는 이홍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자성(李自成, 1606년 9월 22일 ~ 1645년 5월 17일)은 명 말기 농민군 영수이다. 아명(兒名)은 이홍기(李鸿基). 명을 멸망하게 한 주요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이자성의 난 [ 편집 ]

숭정제가 즉위하던 시기 명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숭정제가 즉위하고서 기근이 들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데다가 청군도 나날이 격렬하게 침공했다. 명의 장군 원숭환이 청군을 늘 방어하여 왔으나 숭정제는 원숭환을 의심하여 죄를 물어 죽인 탓에 청군을 방어할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시기 틈왕(闖王) 고영상을 계승한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大順, 순나라)이라 칭하였으며, 그 농민군 세력이 북경에 육박하였다. 숭정 17년인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이자성이 농민군을 지도하여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는 신무문으로 나와 매산(煤山)에서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숭정제는 당시 향년 33세였다.

1644년 5월 27일 청의 도르곤은 명의 숭정제가 죽자 투항한 명의 장수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서 북경에 진입해 천명을 선포하였다. 북경에서 섬서 상락으로 철수한 이자성의 농민군 세력은 급속히 약화했다. 1645년 이자성군은 청에 동관(潼關)마저 빼앗기자 양양을 거쳐 호북성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서 남명의 좌양옥(左良玉)과 연합하여 청군에 대항하여 형세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좌양옥이 청군과 전투 도중 갑작스레 병사하여 기회는 무산되었다.

말년 [ 편집 ]

우창과 강서에서도 청군에 패배한 이자성군은 현재 호북 통산(通山)인 통성(通城)으로 퇴각하였다. 구궁산(九宮山)에서 명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가 있으나,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에 관련 기록을 보면, 탈출이 어려워지자 자결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 탈출하여 호남성 상덕인 석문(石門)에 소재한 협산사(夾山寺)에서 승려가 되어 1674년까지 살아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같이 보기 [ 편집 ]

명나라의 멸망과 이자성의 난 – Sciencetimes

‘사이언스타임즈’와 ‘국방일보’가 지난해 6월 29일 MOU를 맺고 콘텐츠를 제휴하기로 했다. 이로써 사이언스타임즈의 과학·창의교육 콘텐츠가 70만 국군장병들에게 보급되고, 국방일보의 글로벌 이슈에 관한 우수 콘텐츠를 유기적으로 활용하게 됐다. 이에 사이언스타임즈는 국방일보에 연재 중인 ‘기후와 전쟁, 역사와 기상’을 연속 게재한다.

기후와 전쟁 “역사 속 가지 않았던 길들. 기회를 놓쳐서 파국을 맞았던 사례들,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이 배운다!”

레이황이 지은 책 ‘1587년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에서 던져주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주 조그마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글을 시작한다. “회의를 한다는 소식에 궁궐로 달려온 명나라 대신들은 잘못된 전갈이라는 말을 듣고 허탈해하며 돌아갔다” 너무나 사소한 듯 보이는 이 사건에서 그는 명나라의 몰락을 본다. 황제와 대신과 인민들 모두가 무력한 시스템 속에 안주하면서 서서히 멸망의 길로 다가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해에는 아무 일도 없었을까?”

16세기 말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의 위력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지구 표면의 평균기온이 3℃ 내려가면 대기 중의 수분이 20% 감소돼 심한 한재(旱災)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당시 유럽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기후가 한랭해지면서 심한 한재가 몰아닥쳤다. 거의 매년 발생한 극심한 한파와 가뭄으로 기근이 계속됐다.

1622년부터 8년간 한파·가뭄 지속

“희종 천계 2년에서 사종 숭정 2년 사이(1622~1629), 8년간 내내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았다. 숭정 6년(1633), 서안에 가뭄과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다. 몹시 가물어 한 말의 쌀값이 1000전이나 했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섬서통지)

여기에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구하기 위해 출병했던 군사비와, 청나라와의 계속되는 싸움에도 엄청난 군비가 들어갔다. 명나라는 군사비를 염출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을 가혹하게 물렸다. 기근으로 세금을 도저히 낼 수 없었던 백성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기근과 함께 농사짓는 백성이 줄다 보니 기근은 더욱 심해졌고, 더 많은 농민들이 반란 집단에 가세하게 됐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의 반란은 1627~1628년, 섬서성 북부 지방에서 2년 동안 극심하게 발생한 한해로 시작됐다. 먹고 살 길이 없었던 백성들이 기아 폭동을 일으켰다.

기아가 얼마나 심각했었는가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정부 군사들에게도 군량이 공급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결국 정부 군사들까지 반란에 가담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반란 세력 중 가장 강했던 집단은 고영상이 이끄는 세력이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그의 부장으로 반란군을 지휘했다. 1636년 고영상이 죽으면서 이자성은 반란군의 수령으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기세 등등 명나라와 맞섰지만 곧 정부군의 진압에 밀려 패퇴를 거듭했다. 이자성이 다시 힘을 되찾은 것은 한발과 폭풍으로 민심이 다시 흉흉해지면서다.

이자성 50기만 거느리고 하남 진출

1640년 9월, 이자성은 겨우 50기만을 거느리고 출진해 호북을 거쳐 하남으로 진출했다. 하남을 반란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매우 현명했다. 당시 하남 지방은 수년 동안 한발과 폭풍 등 자연 재해로 농토가 황폐하고 곡가가 치솟아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금을 과중하게 매겼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백성들 앞에 이자성이 나타나자 농민들은 다투어 이자성의 휘하로 모여들었다.

이자성은 우선 백성들의 불만을 해결해 주는 일에 진력했다. “농토를 고루 나눠 주고 세금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말을 논밭에 놓아 농작물을 짓밟거나 쓰러뜨리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살인을 한 자는 죽인다” “부녀자를 겁탈한 자는 중형에 처한다” 짓밟히고 무시당했던 농민들은 환호했다.

또한 점령하는 곳마다 부잣집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눠 줬다.

이자성은 남양을 함락시킨 후 개봉 공략에 나섰다. 개봉은 명나라의 상징적인 도시였다. 따라서 명나라의 병부시랑(국방차관)이 사령관이 되어 수비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몇 달을 힘을 다해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자 이자성은 수공작전을 사용하기로 한다. 여름철 장마 때 내린 비를 가둬 뒀다가 일거에 무너뜨려 개봉을 물에 잠기게 하겠다는 것이다. 황하 지역의 둑을 높이 쌓아 놓았다가 1642년 9월에 둑을 무너뜨렸다. 무너진 둑 물은 노도처럼 들이닥쳐 개봉의 북문을 무너뜨렸다. 1644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이자성은 서안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스스로 대순왕이라 칭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승승장구하던 이자성의 반란군은 1644년 3월 19일 북경을 함락시켰다. 명나라는 16제 277년 만에 멸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1587년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해였을까? 도대체 명나라 황제는 무엇을 놓쳐 멸망의 길로 들어섰던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을 휩쓸던 한재와 기근을 정확히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기근으로 민심이 명나라에서 떠난 것이 결정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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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의 난

이자성의 난 – 1631년

중국의 명(明)나라는 역참(駅站)이라 불리는 역마제도로 전역을 다스렸는데, 명말 숭정제(崇禎帝)의 통치때 경비절감을 위해

이를 폐지하자 역참제에 기대어 살던 많은 백성들이 일을 잃고 유랑민이 되거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연안부(延安府) 미지현

(米脂縣, 현재의 陝西省)출신의 이자성(李自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천계 7년(天啓7年, 1627년), 숭정원년(崇禎元年, 1628년)에 섬서에서 발생한 큰 가뭄으로 인해 반란이 빈발하자 이자성도 여기에

참여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만주족(滿州族)의 대책에 쫓겨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이에 편승한 반란군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산서(山西)를 제압하고 북직예(北直隸, 현재의 河北省)까지 압박할 정도였다.

그 후, 관군의 반격으로 밀려나 하남(河南)으로 이동한 반란군은, 수령 고영상(高迎祥)을 필두로 그 휘하에 장헌충(張献忠)이

있었는데, 이자성은 고영상 배하의 무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때 작전회의인 형양대회(滎陽大会)에서 관군에 대해 전군이

일치해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각을 드러내 이듬해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한 고영상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되었다.

이자성은 고영상이 이름한 침왕(闖王)이라는 칭호를 이어받아 반란군의 수괴가 되었다. 그러나 고영상의 죽음으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는 약해져 이자성의 반란군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 섬서성으로 퇴각하여 다시 산 속으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이자성군을 눌렀다고 본 관군은 호광(湖廣)으로 이동하여 장헌충군을 토벌하러 이동하는 바람에 이자성군은 기사회생해

하남을 제압했다.

그 곳에서 거인(挙人, 향시를 통과한 과거합격자)이던 이엄(李嚴)과 만나, 균전(均田, 토지 균등분배)과 면량(免糧, 세금면제)의

기치를 이엄으로부터 제안받아 이 두 구호와 엄정한 군율로 인해 농민의 지지를 받은 후 삽시간에 수십만의 대군으로 팽창했다.

(이엄은 청나라 시기에 창작된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또, 우금성(牛金星)등, 지식인들을 진영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는데, 기세가 오른 이자성군은 숭정 14년(1641년)에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만력제(萬歷帝)의 제 3 왕자였던 복왕(福王), 주상순(朱常洵)을 처형했다. 복왕은 만력제에게 총애받아

사치를 즐겼는데, 이로 인해 많은 세금을 거더들여 낭비했기에 민중들의 분노를 샀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개봉(開封)을 함락하고 숭정 16년(1643년)에 양양(襄陽)에서 대원수(大元帥), 이어서 신순왕(新順王)이라 칭한 이자성은

6부 등의 국가로서 제도를 정비한 후 다시 서안(西安)을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숭정 17년(1644년)에 서안으로 입성한 이자성은

국호를 순(順, 혹은 大順이라고도 함)이라 칭하고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정한 후 현지에서 순왕(順王)이 되었다.

2월에 이자성군은 북경(北京)을 목표로 북벌을 개시하여, 3월에 북경을 함락시켜 숭정제를 자결로 몰아넣은 다음,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에 입성했을 때 백성들은 물론 관군까지 숭정제를 버리고 대열을 갖추어 환영했다고 한다.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다시 황제가 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의식의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입성 후 이자성군은 살인귀로 유명한 장헌충의 군대가 합류하면서 엄정했던 군율도 무너지기 시작해, 약탈, 강간, 살인이

횡행하였다. 이 때 동북지방에서 만주족인 청(淸)에 대한 전선 기지였던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에

투항했다.

그 후 이자성군은 도르곤과 오삼계가 이끄는 청군과 격돌하면서 대패해 북경을 버리고 달아났다. 입성한지 40일간의 짧은 천하였다.

다시 이엄과 우금성이 획책으로 이엄을 살해하고 청군에 투항하면서 이자성은 서안, 통성(通城, 현재의 湖北省)으로 달아났다가

영창 2년(1645년)에 구궁산(九宮山)에서 현지 농민들에게 맞아죽었다.

하지만 이자성이 승려로 변장해 강희(康熙) 13년(1674년)까지 살아남았다는 전설도 있다. 한편 살아남은 이자성군의 잔당은

남명(南明)에 들어가 청나라에 저항을 계속했지만 강희 3년(1664년)에 모두 토벌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시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고 숭정제의 원수를 갚고 오랑캐(만주족)로부터 한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청대에 이자성은 반역자로 취급되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역적의 수괴라는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1944년에 역사가인 궈모루(郭沫若, 곽말약)에 의해 이자성을 기의군(起義軍)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도 처음엔 역적설로 취급했지만 궈모루의 주장에 동감해 이자성을 농민반란 지도자로서 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이자성의 재평가와 순조(順朝)의 연구가 진행되어지게 되었다.

지금도 북경에서는 이자성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 후 황제로 즉위한 다음, 교자(餃子)를 매일

즐겨먹었다. 경단 교(餃)라는 문자는 교(交)와 이어져 끝을 만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사직이 영원하기를

빌었기에 춘절밖에 교자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이자성은 이 금기를 깨고 매일 교자를 먹었기에 자신의 순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출처 : 고단샤 <소설 이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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