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의 의미 | 부활절 성서학당 성경 속 ‘부활’의 의미 모아보기ㅣ신우인, 최정권, 송태근, 구미정ㅣ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76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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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맞아, 부활의 의미를
신우인 목사, 최정권 목사, 송태근 목사, 구미정 교수와 함께
예수님의 부활 사건부터, 부활의 의미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두개인과 논쟁하셨던 부활까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의 의미들을
모아 모아 함께 공부하며 묵상해보아요! : )
00:00:00 부활, 구원의 완성 (신우인 목사 요한복음 43강)
00:38:11 부활, 신령한 몸 (신우인 목사 요한복음 44강)
01:14:07 부활, 마지막 드라마 (최정권 목사 신앙의 근원 18강)
01:51:24 부활의 권력 (송태근 목사 빌립보서 13강)
02:29:05 부활에 대해 논쟁하시다 (구미정 교수 마가복음 4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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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왜냐하면 부활체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데, 범죄하여 하나님이 ‘정녕 죽게 하신 바로 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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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4/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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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성경적 의미 | NYCKCG –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성경적 의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RESURRECTION, 일어남), (엥게르시스, 일으킴)이란 낱말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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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yckcg.org

Date Published: 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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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하나님의 광대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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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1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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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칼럼] 부활의 의미 – 크리스천투데이

부활은 일시적 소생과 대비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소생한 여러 사람들이 있다. 엘리사가 소생시킨, 수넴 여인의 아들이나, 예수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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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1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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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연합감리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기독교 신앙을 믿습니다. 부활은 단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 새 창조의 한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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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umc.org

Date Published: 1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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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특집] 부활의 의미와 상징 – 가톨릭신문

사전적 의미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蘇生)을 뜻하는 부활은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안에서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한다. 부활은 신비다. 다시말하면 부활은 전체 구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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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tholictimes.org

Date Published: 5/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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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부활의 의미 – 국민일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불의와 악의 세력을 무력화시킨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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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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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 주간기쁜소식

2020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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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goodnews.or.kr

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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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 – 기독신문

부활은 사망의 권세가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새벽 여명이다. 부활절 아침에 사망 권세에 승리하신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만남, 새로운 식탁, 화해와 새로운 사명 위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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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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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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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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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성경적 의미 제1회 예수님은 왜 죽어야 하셨나

제2회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나

제3회 예수님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셨나

제4회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이 무엇이 다른가

제5회 예수님의 부활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제6회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부활할 때에 왜 또 다시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까? 그리고 우리가 부활 시에 뵙게 될 예수님의 모습에서 ‘정녕 죽음’의 흔적에 가슴이 저미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1) 하나님의 형상의 보존과 회복으로서 부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든 고통(출생, 성장, 그리고 죽음)을 체휼하신 것은 놀라운 사건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랍고 의미 있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며, 그 부활체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데, 범죄하여 하나님이 ‘정녕 죽게 하신 바로 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는 인간의 ‘처음 모습’이 하나님께서 매우 의미 있게 만드신 형상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창 1:27).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도 인간의 모습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골 1:15, 3:10, 히 1:3). 범죄하여서 정녕 죽는 죽음 아래 있게 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자신(아담)의 형상을 닮은 자녀를 낳게 하시고(창 5:2~3), 그들을 통해서 태어난 생명의 귀중함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 때문이다(창 9: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2)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영생과 영벌 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향은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 그러나 이 부활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육적인 부활체를 입게 된다(행 24:15). 그러나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의인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에 참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악인은 사단과 함께 심판을 받고 영원히 지옥에 거하게 된다(요 5:29, 행 24:15).

심판의 부활을 입게 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를 피해서 죽기를 원해도 영생하는 부활체이기 때문에 죽지 못하고 고통 중에 거하게 된다(계 9:6, 6:15~16).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오히려 저주스러운 사건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들에게는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은 불변의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심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표현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더 좋았을 뻔한 사람들이다(막 14:2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다. 아담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와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하며,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세상에 관한 일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들은 출생과 죽음에 관한 필연적인 사실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자신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녕 죽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기쁜 소식(복음)’인 것을 믿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은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롬 1:17). 그러나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 자신이 심판의 부활로 가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5~16).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계 9:6).

3) 부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명이 있음을 알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심은 모든 것의 완성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완수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인류의 부활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세상에서의 사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말이란 이 세상의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벧후 3:13, 계 21:1~2).

중요한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된다(요 5:25~29, 행 24:15)는 사실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둘째는 생명의 부활을 하여서 천국에 거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이 세상에서의 행위에 맞는 상을 주신다는 사실이다(마 5:12, 6:1, 10:41~42, 막 9:41, 눅 6:23, 35, 고전 3:8, 14, 요이 1:8, 계 11:18, 계 22:12). 여기서 말하는 상(미스도스; reward, wage)은 ‘임금, 삯, 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따라 주시는 상이다. 이 상은 천국에서의 또 다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상은 천국에 가는 사람은 누구나 받게 되기 때문이다(계 11:18, 22:12, cf.마 20:1~16). 그러나 분명히 구별은 있다. 이 구별은 아마도 천국에서의 직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마 10:41~42, 고전 3:8, 계 22:12). 천국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찬송하는 것이 곧 인간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기 때문에 어떤 직임을 맡게 되어도 기쁨이 넘치는 곳이다(계 5:12~13, 7:12, 19:5~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4) 부활체에 있는 흔적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조금은 깨달을 수가 있다. 첫째로 우리의 질고를 지시는 예수님을 알 때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병자들을 고치신 것이 세상의 사람들이 능력이나 기술로 고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 사람들이 병을 고치는 것은 병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능력이나 기술을 가지고, 그들에게 베푸는 심정으로 고치지만 예수님은 그 병자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지심으로 고치셨다는 것이다. 곧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만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모든 질고와 고통까지도 담당하심으로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셨다”(마 8:17, cf.사 53:4).

둘째로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든 인류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설명이 있었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성경 구절로 대신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마지막으로 부활체에도 존재하는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볼 때 그 고난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을 수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체를 보이시면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셨다. 신령한 몸이신 부활체에까지도 그 십자가의 고난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아마도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뵈올 때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때에 그 몸에 있는 고난의 흔적 때문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들이 신령한 몸과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천국!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온전해진 하나님 나라! 그러나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모습이 예수님의 몸에 있는 고난의 흔적일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보는 순간 우리가 당했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하신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가슴이 미어지는 감동으로 말미암아 흘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씻어 주실(계 7:17, 21:3~4) 하나님께서 그 감동의 눈물도 씻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이나 슬픔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부활의 성경적 의미

자료실 구약자료 신약자료 예배자료 절기자료 설교자료 일반자료 이단자료 교회행정자료 컴퓨터 공부방 절기 자료 부활의 성경적 의미 부활의 성경적 의미 성경적 의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RESURRECTION, 일어남), (엥게르시스, 일으킴)이란 낱말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한다. 그것은 나사로의 경우처럼(요11:38) 일시적으로 되살아 나는 때도 있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영화로운 영생으로 되살아날 때도 있다. 그리고 크리스챤도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일으킴을 받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성경은 또한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다가 죽은 자의 몸과 영이 부활하여 영원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마 10:28; 요 5:28,29; 행 24:15). “부활”이란 낱말의 용법을 분류하여 보면, 보통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참고: 마 22:31, 눅 20:37, 행4:21 7:32 23:6 24:21 26:23, 고전 15:12). 신자들의 부활은 “의인들의 부활”이란 말이나(눅14:14, 행 24:15), “생명의 부활”이란 말이나(눅 14:14, 행 24:15), “생명의 부활”이란 말로(요5:29), “악인의 부활”이란 말로(행 24:15)표현되었다. 신앙고백문에 자주 나오는 “몸의 부활”이란 표현은 성경에 입각한 것이다(마 27:52, 롬 8:11,고전 15:35,42-44, 빌 3:21).초대 교부들과 신앙고백문들이 증거한 초대 교회는 “육의 부활”이란 구절을 도입하였는데, 이 귀절은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신앙고백문 속에 나온다. 교회가 이 표현을 채용한 것은 많은 이단들이 몸에 대한 영원한 미래를 부정하면서 죽은 자”란 낱말을 “죽은 영혼들”이란 뜻으로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몸이 부활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죽은 자는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강조하였다. 이 표현은 성경 자체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를 보존해야 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은 “몸의 부활”이란 표현 속에 나오는 “몸”이란 낱말이 신체적인 몸을 배제한 “자아”나 “인격”을 뜻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I. 절대 무오한 성경의 지식 이교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지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엡2:12,살전4:13).헬라 철학은 “영혼의 불멸성”을 가르쳤다. 영혼은 신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육은 물질이므로 약하며,여기에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헬라 철학은 생각하였다. 헬라인들은 바울의 부활 설교를 조롱하였다(행17:32).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현대적인 영혼의 불멸성론으로 환원시켰다. 즉 인간의 참된 “자아”는 물질적이고 유령같은 영적인 몸 속에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 있어서 종말은 “영원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현세의 삶을 끝낸 뒤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신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Church Dogmatics III/2,698 ff. III/3,99ff. 257ff.).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영혼은 신적인 것이 아니며 불멸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그 존재의 전국면에 걸쳐 “심히 좋았”으며 그 몸과 영으로 영생할 운명을 부여받았다(창3:22).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몸과 영이 죄와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허용한 것이다(요6:4011:24-26,고전15:54-56). II.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역사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마22:29,고전6:1415:38 고후1:94:14).이러한 역사는 주의 사자를 통하여 실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란 예언자와 사도들이다(왕상 17:17 ff.왕하 4:32 ff. 행20:10).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했다(요5:216:3940).예수 자신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 그는 생명과 불멸성을 드러내었으며(딤후1:10), 그가 영광 가운데 부활한 것은 크리스챤의 부활은 보증하는 것이다(고전15:20-23:47-49,살전4:14 ff.)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모른채 살다 죽어 간 자들을 일으키신다 할지라도,그들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행한 구속사업은 본질적으로 구속적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 그들을 일으키실 것이다(요5:26-30). 각자는 그의 손으로부터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심판을 받을 것이다. 고후5:10). III. 구약에서 본 부활과 부활에 대한 희망 A. 역사기록

구약에 보면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아들(왕상 17:17ff),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ff), 그 시체가 엘리사의 묘실로 던져진 남자 등 세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그 과부의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충분한 실증을 구할 수가 없다. 이 세 가지 경우의 부활이 지상의 삶으로 잠정적으로 되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실례들은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도 있는 하나님 여호와의 전능하신 권능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돈독하게 만들었다. B. 부활에 대한 증거가 초기에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는 점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는 구절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구절은 퍽 후대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희망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강조하였으며(출 20:12),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미래가 있다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오직 점진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할 때까지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완전한 희망을 알지도 못했고 향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참 신자들은 모세가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신32:39)라고 노래한 그들의 강대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즉 그들의 몸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 이생의 삶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몸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라고 한 것은,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양자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말하였다(11:19). 한편 히브리서 11:8-16절에 보면, 족장들은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기대하였으며, 가나안 보다 “더 나은 본향”을 원했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에 따라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구절들이 비록 초기의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이 부활에 대한 희망은 나중에 가서 하나님의 부활의 권능이 뚜렷이 나타났을 때 더욱 커졌던 것임에 틀림없다(III의 A)을 보라)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영생을 얻은 에녹(창5:22-24,히11:5)과 엘리야(왕하 2:1112)의 “승천”도 몸과 영을 가진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향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이스라엘적 희망의 원천을 고대 “세계의 민간 전승”이나 “일반적인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이론 및 여타 지방에서의 가르침에서 찾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이에 대하여 지지할 수도 없는 일이다(IDB,I, p,41). C. 구약에 표현된 부활에 대한 희망

이 점에 관하여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할 구약의 주요 구절들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는 우선 사무엘상 2:6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한나의 노래를 고찰해 보겠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한나가 실제적인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가는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항상 행하시는 바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6절은 여호와께서는 음부의 문 앞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거둘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보존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이 항목에서 다루고 있는 이 구절과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대한 세밀한 해석에 관해서는,The Nature of the Resurrection Body[1964]를 보라). 한편 욥은 말하기를(19:25-27),”내가 알기로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하였다.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부분 논리정연한 사상의 흐름을 보아 이른바 사후(post-mortem)해석론이 정당한 것 같다.

즉 욥은 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자(히<꼬엘>)로 일어나셔서 그를 변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RSV은 ‘밉베사리'(mibbesari)란 히브리적 표현을 “나의 육으로부터”(from my flesh)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후 욥은 다시 회복된 육 바깥에서 그 자신의 눈으로 신적인 심판관이 그를 변호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정신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부활에 대한 이러한 희망이 생각될 수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문제성이 있다. 한편 시편 16:9-11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다. 9절에 나오는 ‘신체기관의 평행구’는 이 세상에서 몸(또는 육체-인격)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9절 하반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요 불가결하다. 그러나 여하튼 “이는…”으로 시작되는 10절은 미래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은 생명의 완전한 승리를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용어로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그의 부활시에 드러낼 영광스러운 영생을(행 2:26ff, 13:35ff).예언자적으로 볼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번에는 이사야 25:8절 상반절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했다.

이 구절은 행간 사이에 적어 넣는 간결한 평주가 아니며, 열국에 퍼진 탄식과 슬픔의 베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7절과는 자연스럽게 연속된다(참고. 삼하 15:30, 에 6:12, 렘14:3).이사야 25:8절 하반절은 이 상징적 베일이 없어져야 하는 까닭을 여호와가 죽음 그 자체를 완전히 멸절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만민을 위하여” 마련된 종말론적인 연회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묘사한 6절의 틀 속에서 8절은 여호와의 위대하신 날에 죽음이 절대적으로 파괴될 것에 대하여 명확히 이야기한다(참고 고전 15:54, 계21:4). 한편 이사야 26:19절에 보면,”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고 했다.14절과 비교해 볼 때(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미래에 부활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이 죽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19절은 의롭게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예언하는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롭게 죽은 자들이란 13절에 나오는 “다른 주들” 아래에서 죽어 간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뜻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반적”인 부활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결코 일반적 부활이 그 당시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누릴 위안은 오히려 일반적 부활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참고 25:8 절 상반절). 에스겔 37:1-10절은 이미 마른 해골(뼈)골짜기의 환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뼈들은 생명을 잃은 채 서로 떨어져 있었으나 성령의 강한 능력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는데 이것이 곧 부활을 뜻한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이 환상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회복할 것에 대한 예언이며(11-14절),이는 죽은 자가 장차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통속적인 신념을 전제한다고 한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에 대해 실증자료를 댈 수는 없다. 또한 다니엘도 12:2,3절에서 부활을 예언하였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가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다. 선지자 다니엘은 가까운 장래에 전례 없었던 환난을 당할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로하였다.(1절).이들 중 대부분은 여호와를 위하여 목숨을 내 던져야 했었다. 이러한 순교자들은 영광 속에서 육으로 부활한다는 확신에 의하여 위로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를 부인한 자들은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입을 것이었다. 물론 이 구절에는 죽은 자들 일반의 부활이라는 사상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다니엘이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여야 할 동포를 위로하고자 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예언은 종말론적인 몸의 부활 신앙에 대하여 확고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 다음 호세아 14:13절은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선포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말투로 죽음과 무덤에 대한 완전한 승리에 관하여 말했다(고전 15:55).물론 이것은 호세아 13:14절이 죽은 자의 부활을 예언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 대한 심판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14절을 자연스럽게 해석하여 보면 에브라임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러므로 죽음과 음부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여호와도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위에서 말한 바의 결론을 내려보자. 구약은 매우 명료한 것으로부터 조금 모호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다양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지 이교 사상으로부터 채용한 것이 아니다. IV. 정경 이외의 자료에서 본 부활 고대 유대교 및 기독교 시대의 비정경 자료에도 (사해 두루마리,탈굼,탈무드.외경 및 위경) 부활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이 표방하는 개념과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이 구절들에 대하여 논의할 수 없다(T. H. Gaster, IDB,IV, pp,41-43을 보라). V. 신약에서 본 부활 A. 명사 및 동사

헬라어 아나스타시스는 죽은 자의 영적인 부활이나(눅 2:34 참고. 엡 2:15:14) 육적인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예수와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에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신약 도처에 이에 관한 구절이 나와 있다). 한편 헬라어 엥게르시스(문자적으로는 깨어남”이라는 뜻)는 오직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마 27:53). 이러한 명사와 상관되어 흔히 쓰여진 동사에는 아니스테미와 엥게이로가 있는데, 이 동사는 타동사로서(‘일으키다’란 뜻이다) 하나님의 주도권과 활동을 강조하며, 특히 예수의 부활이나(행 2:24,32. 3:26. 17:31), 활기를 띠게끔 자극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신약 곳곳에 나옴: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자주 사용되었음). B.역사기록

1. 예수의 부활과 상이한 죽은 자들의 부활. 예수 자신은 야이로의 딸(막 5:35ff. 및 평행 귀절), 과부의 아들(눅 7:11ff), 나사로(요 11:11ff)등 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신 적이 있다. 예수가 사망하였을 때 죽어 있었던 성자들이 많이 일어났다(마 27:52,53). 한편 베드로는 도르가를 일으켰고(행 9:36ff.) 바울은 유두고를 일으켰다(행 20:9ff).

예수가 죽은 자를 일으키신 것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예수를 통하여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준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마 11:5, 눅 7:22, 요 11:25).잠자던 성자들이 신비스럽게도 많이 일어섰다는 기사도 이와 똑같은 방향을 취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도르가와 유두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여러 가지 치료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행 3:6, 16:18, 고후12:12, 참고 마 10:8).이 모든 부활은 예수가 갖고 있었던 부활의 권능을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부활은 오직 죽을 수밖에 없는 현세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종말이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2. 예수의 부활은 금요일 저녁 예수가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인 일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이 만인과 상이한 것처럼 여타의 부활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성육신 한 하나님이요(요 1:14), 죄 많고 잃어버린 인류를 상징하는 마지막 아담이요(롬 5:12ff, 고전 15:45ff),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유일한 중재자요(딤전 2:5), 죽음의 권세를 가진 악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요(히 2:14, 요일 3:8),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딤전 1:15).

이러한 능력을 갖고 계셨던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죽으셨으며(롬 4:25),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rausom)으로 주셨으며”(딤전 2:6),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고”(롬 4:25),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 1:4). 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셨으며(빌 3:21),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롬 6:9). 그는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는 “대제사장이며(히 7:16),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되고 영광스럽고 무궁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요 3:16; 6:56ff; 11:25,26; 14:19, 고후 13:4, 딤후 1:10, 계 1:18).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의 부활과 부활하신 주의 현현을 최초로 기록하였다(고전 15:3ff, 참고 11:23). 바울에 의하면 복음서의 설교와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헛될 것이라고 한다(고전 15:17).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입각하고 있는 세부적인 빈 무덤 및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 기사는 복음서에 나온다(마 28장, 막16장, 눅24장, 요20,21장). 예수의 부활에 대한 완전한 논의에 관해서는 부활(예수 그리스도의)을 보라. C. 죽은 자의 부활.

1.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모두 일으키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신약은 죽은 자 모두의 부활을 명료하게 가르친다. 즉 신약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간에 오로지 그들의 업적에 따라 그들 자신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활할 것을 가르친다(요 5:28,29; 행 17:31, 롬 14:10, 고후 5:10, 계11:18, 20:11-15).

하나님이 지향하는 목적은 인간이 그의 몸이 없이 존재하는 중간상태일 리가 없다(히 12:23, 계 20:4). 인간의 전체성(즉 몸과 영)은 영원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각자가 그 몸 안에서 행한 바와 관계될 것이다(고후 5:10). 그러므로 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마 10:28, 25:34, 요 3:36, 5:29, 계 20:15).

비록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행 17:31)가 죽은 자를 모두 살리겠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신자들의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보증될 것이다(고전 15:20ff, 살전 4:14). 고린도전서 15:22절의 빛 안에서 보면, 22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사람 모두를 뜻하는 것 같다. 성경의 본질은 구원의 복음이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관해서 신약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저 위대한 부활장(고전 15장)은 오직 신자들의 부활만을 강조한다. 2. 그렇다면 죽은 자는 언제 부활하는 것일까?

신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전 15:51,52, 살전 4:16), 죽은 신자들의 부활은 주의 재림 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되살아나자마자 즉시 변화될 것이다. 만세에 걸친 신자들은 모두 영광된 성자들의 연합을 구성하며, 공중에서 그들의 구속자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 처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그 아버지의 나라로 환영받아 들어간 후(마25:31-40), 이들은 불신자와 타락한 천사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마 25:41ff, 고전6:23). 불신자들이 신자들과 동시에 부활할 것인지, 아니면 일부 학자가 주장하듯이 조금 나중에 부활할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주제는 부활이 하나의 일반적인(통전적인) 몸의 부활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부분적인 부활이었다가 얼마 후 나중에 가서야 몸 전체가 부활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적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동안 끝까지 신실하였던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는 계시록 20:4절 이하를 그 전거로 내세운다.

한편 오직 몸의 부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계시록 20장을 별도로 치며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서로 구별하는 내용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계시록 20:5절의 “첫째 부활”을 실신한 성자들이 죽고 난 후 즉시 중간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는 단계로 이해한다(참고, 빌 1:23, 히12:22). VI. 몸의 부활. A. 육적인 몸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소위 과학적인 근거에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이다(참고 마12:24). 또한 이들은 몸을 죄의 원천이거나 죄의 본거지로 간주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으로 부활하거나 “천사와 같은” 비물질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한다. 비록 성경(특히 바울서신)에서 “육”이란 낱말이 종종 인간의 악한 본성을 뜻할 때도 있지만, 이러한 육적인 몸이 악하다거나 죄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악한 것은 인간의 인격적 중심인 마음(kardiva, 카르디아)이라고 했다(창 8:21, 막 7:14ff, 롬 2:5). 육적인 몸은 윤리적으로 보면 중립적인 매체이다.

그것은 신자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고전 6:15), 성령의 전이며(고전 6:12,13).일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몸”이라는 낱말은 인간의 “자아”나 “영적인 인격”을 뜻한다고 단정하는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한 실증자료를 댈 수가 없다. 죽은 자가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 “살과 뼈”를 지닌 몸으로 부활하신 사실에 의하여 보증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만질 수도 있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눅 24:38-43, 행 10:41).

예수는 승천하실 때에도 이러한 육적인 몸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 1:1, 빌립보서 3:21, 계시록 1:17절에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부활한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같은 것이므로(고전 15:49, 빌 3:21, 요일 3:2)이들도 또한 육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참고 고전 15:35-42). 그리하여 인간은 그 전체성에 있어서 구원받을 것이며 새로운 땅에서 살아갈 것이다(사 65:17ff, 66:22, 마 5:5, 계 21:1-3). B. 육의 부활을 부정하는 듯한 성경 구절들

예수는 사두개 사람들에게 부활한 성자들은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마 22:30, 막 12:25).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부활 이후에는 결혼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러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0:36절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을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구절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발생하는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자녀들을 재생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부활한 몸의 본성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제거된다는 뜻도 들어 있지 않다. 고린도전서 15:44절에 보면, 부활한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부활한 몸이 영으로 구성된 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령한 몸”이라는 말이 보다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부활한 몸이 성령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5:50절에서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도 없고” 라고 말했는데 학자들은 이 구절이 육적인 몸의 부활을 배제한다고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상 사도 바울은 이와는 전적으로 판이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혈과 육”이란 표현은 몸의 “본질”(실체)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전체성(몸과 영)이 덧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마 16:17, 갈 1:16, 엡 6:12, 히 2:14). 이것은 고린도전서 15:50절의 의미와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평행 구절인 50절 하반절에서 사용된 “썩은 것”이란 낱말은 인간 전체가 썩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것이 몸의 본질임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맥 전체를 살펴보건대, 덧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영광스럽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는 처음에 불멸하고 멸망당하지 않으면,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탈바꿈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구절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셈이 된다. C. 동일성과 변화.

비록 부활한 몸이 육적인 몸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몸과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몸의 존재 조건에 관해서는 변모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재림할 때 아직 살고 있는 자들의 몸이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여기서 ‘불가불’이라는 말을 주목하기 바란다. 이러한 변화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한 신자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15:47-49). 여기서 말하는 “새 영광”이란 그리스도의 영광과 같은 것이며(고후 3:18), 개개인의 신자가 현세에서 주에 대하여 헌신한 바에 따라 달라질 그러한 영광이다(단 12:3, 고전 3:14,15, 고후 9:6).

이러한 변화는 기적적이고 장엄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무덤 이쪽 편에서 이에 대하여 적당한 사상을 형성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하여 신뢰할 만큼 세부적으로 묘사할 수도 없을 것이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절기 자료 . Bookmark the permalink No. Title Writer Date 9 부활의 성경적 의미 yookyung1 2017.08.28 8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yookyung1 2017.08.28 7 부활신앙은 상징 아닌 복음의 핵심이다 yookyung1 2017.08.28 6 사순절(Lent : 四旬節) yookyung1 2017.08.28 5 종려나무(the Palm) yookyung1 2017.08.28 4 사순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 yookyung1 2017.08.28 3 추수감사절[청교도들의 감사] yookyung1 2017.08.28 2 고난주관과 가상칠언 webmaster 2016.03.19 1 종려나무(The Palm Tree) webmaster 2016.03.19 < Prev 1 Next > 스크롤 끄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예수님의 부활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중요합니다. 첫째, 부활은 하나님의 광대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위에서 주관하고 계신다면, 그분은 죽은 자들을 일으킬 힘이 있으십니다. 만일 그분이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분은 우리의 믿음과 예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생명을 창조하신 분만이 죽은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고, 죽음 자체의 끔찍함을 되돌릴 수 있으며,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하고 무덤에서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4-55). 하나님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생명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예수님의 주장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그분의 부활은 그분의 사역을 입증해주는 “하늘으로부터 오는 표적”이었고 (마태복음 16:1-4), 그분이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권한까지도 가지고 계심을 입증하는 증거였습니다 (요한복음 2:18-22). 수백명의 증인들이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린도전서 15:3-8) 그분이 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성품과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결코 썩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시편 16:10), 예수님은 죽은 후에도 조금도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 13:32-37 참조). 바울이 “이 사람 (예수님)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도행전 13:38-39)고 전할 수 있었던 근거도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가장 극명하게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미리 알려준 구약의 예언들을 입증시켜 줍니다 (사도행전 17:2-3).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마가복음 8:31; 9:31; 10:34).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도 부활에 대해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는, 구주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의 소망도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의 믿음은 “쓸모 없게” 될 것이며, 복음은 완전히 무력해 질 것이고,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4-19).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25)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것 이상의 일을 하십니다; 그분 자체가 생명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힘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그의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5:1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갖게 되면서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15:53-57).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20)이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죽음 이후의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인 인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중요합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죽음을 초월한 창시자를 가지고 있으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똑같이 죽음을 초월할 것을 약속합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무덤에서 끝을 마친 사람이나 선지자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무덤은 그분을 붙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살아계시며, 오늘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히브리서 10:12).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다시 오실 때, 믿는 자들의 부활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확증은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전서 15:55에 나오는 위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호세아 13:14 참조).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은 이제 주를 향한 우리의 섬김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활에 대한 그의 담론을 마무리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8).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부활할 것을 알기 때문에, 주께서 그러셨던 것 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과 위험을 견딜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0-3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약속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을 기꺼이 내려 놓았습니다.부활은 모든 신자에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성경의 말씀에 따라 셋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4).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그분이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되어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합니까? 부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명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몸이 죽은 채로 남아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될 것을 보증합니다.

[오늘의 설교] 부활의 의미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무서워서 도망갑니다. 그리고 삼일동안 두려워 떨며 숨어 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변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예수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전하는 제자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제자들에게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하자 제자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고 답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변하게 했을까요. 더 나아가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 복음을 전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무엇이 그들을 두려움 없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불의와 악의 세력을 무력화시킨 사건입니다. 당시 불의한 세력은 서로 공모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 시신을 무덤 속에 봉인한 다음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갇혀 계셨던 이틀 동안 사탄의 권세는 승리의 찬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불의와 악의 세력을 무력화시켰습니다. 궁극적인 승리자는 참과 진리임을 증명한 사건이 바로 주님의 부활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악이 승리하는 이 시대를 살지라도 분명히 최후 승리는 주님께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실재를 바로 알고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활의 힘을 삶의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좌절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예수님의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이 선포되면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을 힘 있게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악과 불의가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정의와 진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이 세상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살아갈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안해용 목사(서울 더불어한교회)

부활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2020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장차 부활할 걸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 점점 몸이 약해지는데 주님 나라에 가서 새로운 몸을 입는다는 주님의 약속이 너무나 감사하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죄의 형벌이 영원히 끝나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과 예수님이 이루신 온전한 죄 사함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는 믿음의 깊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고 미리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거짓말할 리가 없는데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는 “그가 진짜 예수님인지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만져봐야 믿지 그렇지 않으면 난 믿지 못하겠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직접 그를 찾아가셔서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었을 때 비로소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왜 본 것으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에게는 더욱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도 부활을 얻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서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의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이제 너희 모든 죄를 다 해결했다. 내 손에 못 자국을 봐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봐라. 너희 죄를 대신해 내가 벌을 받은 것이다” 하시며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사람들이 똑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는지 우리 다 같이 생각해 봅시다.

19세 때 군 입대 신검을

1962년 5월 제가 19세 때 삶이 너무나 어려워 육군기술하사관에 지원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누구나 지원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저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신체검사 때 치과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군의관이 제 카드에 한 사인이 다른 지원자들의 것과 다른 것을 알고 ‘아, 내가 불합격했구나’라고 직감했습니다. 바로 군의관을 찾아갔습니다. “군의관님, 좀 도와주십시오. 이번 기술하사관 신체검사에 꼭 합격하고 싶습니다.” “뭣 하러 군대 빨리 가려고 해요? 영장 나오면 가요.”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어금니 같으면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앞니는 뻔히 보여서 절대 안 됩니다.” ”저는 그렇게 기술하사관 시험에 낙방한 후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되지? 다른 사람들은 다 되는데…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 간절했는지 모릅니다.

마음 속에 늘 죄 의식이

그 당시 저녁마다 친구들과 모여서 놀다가 배가 고프면 남의 집 과수원에 들어가 사과 서리, 참외 서리를 하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너무 후회되어 매일 새벽예배에 가서 죄 용서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 마음속에 죄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씀을 알아도 ‘내 죄가 사해졌다? 아니야, 나는 죄가 많아’ 하며 늘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1962년 10월 7일, 그날도 새벽예배에 가서 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마쳤는데 갑자기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성경의 분명한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이 제 마음속에 계신 삶과 그 전의 삶은 서로 비교할 수 없이 달랐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저녁마다 친구들과 모여서 놀며 나쁜 짓을 했었는데 구원받은 후에는 친구들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고 집에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죄가 사해졌다는 성경 말씀이 분명히 믿어지면서 변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여러분, 제가 그냥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믿으려고 노력해서 예수님을 믿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정말 진실하게 살면서 죄 사함을 받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가 하는 일이 남들 보기에도 괜찮아서 그들이 저를 똑똑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게 하시면서 제게 소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이런저런 어려움과 고난을 주십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태어나서 19살까지 잘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저를 그렇게 이끌어 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도록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자신을 믿으면 분명히 망할 수밖에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표적과 기사를 보이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실과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듣기만 해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릅니다.

선지자 생도의 아내

열왕기하 4장에 선지자 생도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지자 생도의 아내는 남편과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자기 인생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며 선지자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생도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하고 싶어서 믿음을 가져보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 없이 선지자 학교에 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나가기로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 있으면 오히려 누가 될 것 같아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아무 길도, 방법도 없어서

이렇게 선지자 생도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을 키우려고 악착스럽게 일을 하면 할수록 빚이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빚쟁이가 찾아와 두 아들을 종으로 팔아서라도 돈을 받아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은 것만으로도 힘든데 두 아들마저 종으로 팔리고 나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선지자 생도의 아내는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까 고민하다가 남편이 있었던 선지자 학교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종으로 팔리게 된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이 생도의 아내가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선지자 생도의 아내는 남편과 자신의 방법을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여자는 어떠한 방법도 없게 되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익하고 연약한 지를 깨우쳐주는 일을 하십니다.

돌아가신 前 가나 대통령

2012년 가나 IYF 월드캠프에 참석했다가 故 ‘존 아타 밀스’ 가나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개막식에서 축사하신 영부인께서 행사를 마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목사님, 지금 대통령께서 많이 위중하십니다. 기도해 줄 수 있습니까?”라고 부탁하셔서 대통령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제게 “의사들이 제 병을 치료하고 있지만 갈수록 병이 심해지는 걸 보니 곧 죽음이 가까운 것 같은데 제가 대통령이지만 죄가 있어서 지옥을 가야 하는 게 두렵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 대통령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한 후 “대통령님이 죄인인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으니 죄인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죄의 형벌은 죄 지은 사람이 아니라 재판관의 판결로 정해집니다. 가나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대통령님의 죄도 재판장이 정하시는데 그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대통령님의 죄를 판결한 판결문이 있는데 읽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대통령이 깜짝 놀라시며 “그게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을 펴서 읽어 드렸습니다.

판결문 형식으로 쓰여져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며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23절도 믿어야 하지만 24절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최종 판결하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우리나라 유명한 변호사 한분에게 로마서 3장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그분이 깜짝 놀라며 “목사님, 이 말씀은 판결문 입니다. ‘피고는 죄를 지었다. 징역 10년을 살아야 마땅한데 이러이러해서 5년을 선고한다’라는 판결문 형식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저는 대통령께 말씀을 전했습니다. “대통령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하셨습니다. 가나 전(前) 대통령께서는 “왜 나는 이런 말씀을 지금까지 몰랐을까?” 하셨습니다. “대통령님, 이제 대통령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가 씻어진 걸 믿습니까?” “예. 목사님, 나는 거룩합니다. 나는 의롭습니다” 하시며 너무나 기뻐하셨고 그 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부활의 참된 의미

여러분, 부활의 참된 의미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셨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의롭게 됐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습니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손의 못 자국을 봐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봐라. 이마의 가시 자국을 봐라. 바로 네 죄를 사하기 위해 이렇게 벌을 받고 이렇게 피를 흘리고 이렇게 못 박혀서 너희 죄를 눈보다 더 희게 씻었다.”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하십니다.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를 부인하는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가 죄인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했습니다”라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우리 죄가 남아있다면 실패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조롱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하는 일을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손끝만큼도 남김없이 완벽하고 깨끗하게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일에 실패하지 않았다고 복음을 만방에 전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주님, 죄인입니다’라면서 웁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 죄를 못 씻었다는 것인데 정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입니다.

세계기독교지도자연합(CLF)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리가 죄를 지으니까 죄인이지. 어떻게 죄가 없어?”라고 하거나 “예수님이 죄를 사하긴 했어. 그래도 우리가 또 죄를 지으니까 죄인이야”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이미 지은 죄는 사했고 다시 범한 죄는 못 사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저도 죄 사함을 받고 나서야 그동안 교회에서 듣고 배웠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근차근 읽고 또 읽었는데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성경의 지식과 말씀이 정말 달랐습니다.

우리는 2017년에 세계기독교지도자연합(Christian Leaders Fellowship, 이하 CLF)을 설립하고 미국 뉴욕에서 기독교 지도자 모임을 가졌습니다. 약 700명의 목사님들이 참석하셔서 일주일 동안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는 복음을 듣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는데 현재까지 약 24만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말씀을 듣고 죄 사함을 받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작년 12월 19일 서울 여의도에서 530명의 한국 기독교 지도자를 초청해서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분들이 모두 감동을 받고 우리 선교회와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못 사한 피가 아니라 우리 죄를 흰 눈보다 더 희게 씻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오늘 부활절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을 증거해야

오늘은 2020년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가 하나도 없다. 깨끗하다.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죄인이라고 말하지 마. 내가 죄를 영원히 깨끗하게 하나도 남김없이 다 씻었어. 너는 거룩하고 온전해!” 여러분, 지금까지 죄 속에서 헤매었지만 이 말씀을 따라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밝고 복된 삶을 살게 되길 바랍니다. 이런 놀라운 사실을 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도 사단에게 속아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패했다는 말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시다. 예수님은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죽으셨고 분명히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고 외치며 증거합시다. 그러면 오늘 부활절은 너무너무 아름답고 귀한 부활절이 될 것입니다.

값 없이 의롭다 하신 주님

여러분, 현재 전 세계 200만 명 가량이 인터넷에 접속해서 2020 한국 부활절 연합예배 영상설교를 시청 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참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내 모든 생각을 다 지우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 사실을 믿읍시다. 로마서 3장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만왕의 왕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면 우리가 의롭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시면 우리는 거룩합니다. 이 성경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는데, 우리 죄를 사하지 못한 예수님을 믿지 말고 우리 죄를 눈처럼 희게 씻으신 예수님을 믿읍시다. 부활절을 맞아 모든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칠 줄 믿습니다.

– 2020 한국 부활절 연합예배 영상설교 – (20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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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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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하기 김은홍

십자가 없는 부활이란 없다!(No Cross, No Crown!) 진부한 표어이지만,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에겐 전혀 진부하지 않다. 공허한 듯하지만, 십자가의 수난을 감내하는 공동체는 이에 실제적으로 감격한다. 매년 맞이하는 부활절은 이벤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용솟음치는 생명의 원천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부활은 수난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성이 강하다. 부활은 한 개인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교리에만 제한될 수가 없다.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과 더불어 그 공동체를 통한 타락한 창조 세계의 변혁과 갱신을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 구속 드라마의 우주적 사건이다. 예수 부활은 그리고 역사적이다.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이를 초대 기독교의 창작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로는 어떻게 기독교가 생성되었으며, 왜 예수를 메시아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세계에 선포하였는지, 설명할 도리가 전혀 없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일한 대답을 제시하였다. 수치스런 십자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을 평가하고 오늘날 우리를 위한 의미를 파악하는 노력은 기독교 공동체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먼저 예수의 부활을 1세기 유대교의 맥락에서 철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활 사상을 부인한 사두개파와, 사후에 육체가 없이 영혼의 계속적인 존재를 신봉하였던 필로나 쿰란 공동체에 비해 바리새파의 개혁 프로그램은 몸의 부활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들은 사후 새롭게 된 육체로 살아가되, 보다 포괄적인 부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셔서,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고 압제자들과 사악한 자들을 타도하며, 이 세계를 고대하며 이전에 이미 죽어왔던 모든 의인들이 바로 이러한 새로운 날을 향유하게 하기 위하여 육체적 생명을 회복하실 것이다. 이러한 부활 사상과 마카비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부활 구속 사상의 배경에는 에스겔 37장 1-14절과 다니엘 12장 2-3절, 이사야 26장 19절 등이 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 진정한 평화와 정의의 실현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가 되신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은 다가 올 온전한 구속과 의의 시대를 상징하는 ‘메시아 시대’나 ‘하나님 나라’와 같은 환유적 표현으로 발전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위대한 선지자가 다시 살아날 것인데 그는 바로 엘리야이다’는 대중적인 미신과 공상이 왜 예수의 사역 기간에 등장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그러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가 죽음에서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선포할 때에, 무엇을 주장하는가? 이 주장은 당시 유대인들이 위대한 지도자, 선생, 특히 잔인한 죽임을 당하였던 어떤 이가 살아났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통치가 이뤄졌다는 신념을 표현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또한 성경을 믿고 약속의 성취를 갈망하던 제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대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바, 천지개벽을 통하여 모든 의인들의 부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성취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빌라도와 가야바, 헤롯은 악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여왔던 ‘다가올’ 새로운 시대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뤄졌으며, 예수는 메시아라고 선포하였다. 어떤 자칭 메시아가 이방 권세자들의 손에 십자가에서 죽었으면 영원히 신임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가 메시아라고 증인으로서 선포였다. 왜 그런가? 부활은 신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사건은 제한된 자원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행할 수 없다. 오직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그들은 부활의 산 증인들이었다(행 2.32; 고전 15.4-8). 그들은 신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증인들이었다. 부활의 참된 성경적 증거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흔히 빈 무덤이 부활의 참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빈 무덤은 변증 신학의 발견이지, 초대 교회의 증언의 핵심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부활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의 인격과 주장과 행위들을 ‘옳다고 인증(認證)’하신 사건이었다(롬 1.3-4). 따라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였다, 예수가 주라고 선언하였다. 예수 부활은 바리새인의 신학과 같이 현재와의 연속성만 주장하거나, 플라톤 철학에 바탕을 둔 필로의 주장과 같이, 현재와의 불연속성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부활 전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다 포괄한다. 이는 현재의 불의하고 타락된 구조 속에 부활의 능력이 움트며, 현재를 변혁시키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변형된 육체의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이는 새 창조의 신호탄이자, 창조 세계가 새로워진다는 선언이다.예수의 부활이 하나님의 옳다고 인증하심이라는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바대로 올바르게 메시아의 사역을 성취하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의 행위와 주장과 인격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순복하며, 비난을 받으며, 섬기며, 낮아지며, 자신을 비우되 종이되기까지 비우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을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를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셨다. 가야바의 종교법정은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빌라도 법정은 민중 선동가로 정죄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판결을 하여 십자가 처형을 하였지만,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은 그를 옳다고 인정하시고 부활시키셨다. 따라서 부활은 십자가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선언한다(골 2.14-15; 고전 15.17).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활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보증만이 아니다. 역사와 종말과 관련되어져 있다. 부활은 예수가 이제 살아 계심으로 그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는 말은 오순절의 진리이지 부활의 메시지가 아니다. 먼저 예수의 부활의 의미는 예수를 메시아로 하나님이 옳다고 인증하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는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가 성령이 기름 부으신 소명에 철저하게 순복하여야 할 궁극적 이유를 제시한다. 역으로 십자가의 소명을 철저하게 지고 따르는 교회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공동체이며,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하심을 받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예수의 부활은 현재와의 종말론적 연속선상에서 새 시대의 도래를 실제적으로 가져오는 분기점이다. 예수 부활은 현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를 위한 희망을 주지만 현재 삶에 대한 목적과 의미를 제시한다. 부활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의 현재 실존이 비록 고통과 갈등을 하더라도 무한정하게 의미가 있다. 바울에게 부활은 우리 실존과 고립되고 기이한 기적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세상을 다루시는 창조와 언약의 하나님의 이야기가 절정을 이루고 메시아적 사역의 초점이기에, 역사의 변혁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새 창조라는 관점에서 전인적이고 우주적으로 새롭게 다시 정의하며 현재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다. 부활은 사망의 권세가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새벽 여명이다. 부활절 아침에 사망 권세에 승리하신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만남, 새로운 식탁, 화해와 새로운 사명 위임이 있었다. 이는 새벽을 깨우는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이다. 새 창조는 부활을 통해 사망 권세가 폐위되고, 타락과 불의의 눈물이 씻어지고, 모든 종노릇함이 소멸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힘을 제시한다. 바로 이 소망으로 인하여, 현재 시간은 엄청난 의의를 가득 담고 있다. 부활의 의미는 결코 개인화될 수 없다. 개인적인 부활 소망은 이러한 새 창조의 소망 내에 그 정당한 자리를 차지한다.부활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교회는 하나님 아들이 가져오신 새 창조의 변혁에 참여한다. 부활은 고백하는 공동체로 하여금 변혁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참된 평화와 정의, 화해와 치유의 사역에 부활 공동체는 새 창조와 미래에의 희망을 제시하며 역동적으로 참여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부활이 교회에게 부여한 소명이자 위임 명령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롬 8.1-11)의 영이 부활의 능력을 신앙 공동체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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