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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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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편 – 대한성서공회

[시편 25:4 ]. 책갈피. 개역개정 제 25 편 다윗의 시 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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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korea.or.kr

Date Published: 8/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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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시편 25. 25. 1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2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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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5/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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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화) “시편 25:1-22” / 작성: 정한조

그래서 이 시편은 다윗이 어떤 특정한 일을 겪어서 그 때의 상황을 하나님께 시로 올려드린 … 오늘 본문 25편이 9-10편에 이은 2번째 시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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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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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 KLB – 인도와 보호를 위한 기도

(다윗의 시) … 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기도합니다. …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를 의지합니다. …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 주의 길을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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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7/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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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편 & 성경주석

시 25편은 답관체 시편, 곧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지어진 시들 중 두 번째 것이다(참조 76쪽). 이 시는 탄원과 신앙 고백과 참회와 같은 헌신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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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2/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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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25편) – 숭실교회

오늘 시편 25편을 노래하는 다윗이 그렇습니다. 25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시인데요. 다윗이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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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spch.net

Date Published: 7/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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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편 1-10절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편 25편에는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극심한 고통과 아픔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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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njin0207.tistory.com

Date Published: 7/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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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에서 드리는 기도 Part II(시편 25편) – 유평교회

그랬기에 이러한 시편을 많이 썼을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25편에서는 고난 중에 우리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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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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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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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25 편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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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EUXjPxaXNck

[시편 25:4 ]

제 25 편

다윗 의 시

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께서 경외하는 자를 친애하심이여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YouVersion

25

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2018/05/22(화) “시편 25:1-22”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25:1-22

찬송가 375장 ‘나는 갈 길 모르니’

신앙고백 전에 드리는 3중 간구(1-7절)

오늘 본문에는 표제어가 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어떤 상황이나 배경 속에서 지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곡조를 따라서 연주하거나 어떤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라는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다윗이 어떤 특정한 일을 겪어서 그 때의 상황을 하나님께 시로 올려드린 기도라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지난 시절에 겪었던 반대자들이나 대적자들의 박해를 기억했고, 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 시편은 다윗이 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지은 시입니다. 그리고 150개의 시편 중에서, 각 절이 히브어 알파벳 순서로 시작되는 ‘알파벳 시편’ 또는 ‘답관체 시편’이 모두 8편이 있는데, 오늘 본문 25편이 9-10편에 이은 2번째 시편입니다.

1-7절에는 신앙고백 전에 드리는 세 간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 간구를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 간구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로 시작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러러보나이다”가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는 자신에게 부끄러웠던 때가 있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전에 그런 부끄러웠던 기억이 전혀 없었다면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또한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말도 다윗은 대적들에게 처절하게 패배를 당했고, 대적자들은 대승을 했다며 축하연을 벌이는 것과 같은 때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생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대적자들에게 짓눌려 수치를 당하지 않는 최고, 최상의 삶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아도 동일합니다. 혹 인생길에서 수치를 당하거나 패배하는 삶을 살게 되어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온다면, 그 후회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거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주님을 바라보는 삶보다 더 복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앙고백 전에 드리는 두 번째 간구를 4-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다윗은 주의 도를 보이시고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의 도’와 ‘주의 길’은 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와 우리말이지만, ‘도(道)’가 ‘넓은 길’이라면, ‘길’은 ‘좁은 길’입니다. 또한 ‘도’가 인생의 전체 길이라고 한다면, 길은 매일 매일 걷는 걸음과도 같습니다. 또한 ‘도’가 인생길의 전체적인 계획과 전략이라면, ‘길’은 매일의 실천과 전술과도 같습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주의 도’가 ‘내 길에 빛’이라고 한다면, ‘주의 길’은 ‘내 발의 등’과도 같습니다. 주의 길과 주의 도가 함께 있어야 매일의 삶을 신실하고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고, 인생 전체의 방향도 휘어지지 않고, 주님을 향해 똑바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 전에 드리는 세 번째 간구를 6-7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반면에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은 기억하지 말아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다윗이 젊은 시절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은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다윗의 눈에 띄는 큰 죄는 2가지입니다. 밧세바 사건과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더 의지하려고 했던 인구조사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생의 후반부에 있었던 일입니다. 밧세바 사건은 49세 가량 때의 일이고, 인구조사는 죽기 3년 전인 67세 정도 때의 일입니다. 젊었을 때의 가장 큰 실수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 다니다가 아말렉 가드의 아기스를 찾아간 일로 생각됩니다. 그 외에는 성경에 기록된 허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에서 ‘죄’와 ‘허물’이 모두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사람들은 잘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와 미끄러진 허물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가능성’입니다. 나이가 든 사람보다 훨씬 더 큽니다. 물론 선해질 가능성도 크고, 악해질 가능성도 큽니다. 반면에 젊은 시절의 가장 큰 약점은 경험부족에서 오는 ‘미숙함’입니다. 그래서 실수가 많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돌아보아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젊은 시절에 미숙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말아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다윗의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주님의 말씀에 매여 순종하는 삶이 가장 바른 삶일 뿐만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삶입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신앙고백(8-15절)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선하고 정직하시다고 고백합니다. ‘선하다’는 ‘좋다, 후하다’의 뜻이고, ‘정직하다’는 ‘바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좋고 후하시기만 하시다면, 우리는 응석배기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바르기만 하신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가 한없이 어려운 분으로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시고, 바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하면 할수록 우리는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8절, 9절, 12절에 에 반복해서 ‘가르치다(교훈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만 하면 반드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복이 있는지를 14-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친밀함’은 ‘대화하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다’의 뜻입니다. 특히 ‘한 가족이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를 뜻합니다. 바른 가족 간의 대화에는 두 가지의 큰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친밀함입니다. 업무관계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대화를 나누며 함게 웃을 수 있지만, 그 때는 상대를 웃게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고, 또 우습지 않은 이야기에도 웃어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다릅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함께 웃습니다. 상대를 웃게 만들기 위해서 연습하지 않아도 됩니다. 둘째로 가족들 사이에는 가족들만 아는 내용으로 비밀스러움도 있습니다. 즉 가족들만이 공유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더욱 가족을 가족 되게 만들어주고, 깊은 유대감을 만들어 줍니다. 밖에는 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가족들 간에만 누릴 수 있는 관계를 하나님과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_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게 되고,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비밀이 많아지면 자신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신앙고백 후에 드리는 7중 간구(16-22절)

다윗이 하나님은 선하시고 정직하신 분이심을,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서, 16-22절까지, 7절에서 각 절마다 간구를 드립니다.

16절에서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17절에서는 고난에서 끌어내어 주시기를, 18절에서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19절에서는 원수들이 자신을 많이 미워하니 지켜봐주시기를, 20절에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기를, 21절에서는 성실과 정직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시기를, 22절에서는 환난에서 속량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 중에서 16-18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다윗은 자신의 실상을 바라보며 ‘돌이켜 주셔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자신하며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 살다가, 하나님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이 고백을 합니다. 즉 등은 자신이 돌렸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돌이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을 향해 살다 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고, 자신이 하나님을 외면하며 살았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마음에 근심이 많다’는 것은 외적인 짓눌림으로 인해서 마음에 있는 길이 좁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의 길이 본래는 왕복 8차선 고속도로와 같았었는데, 마음의 길가에 쌓이는 짐으로 인해서 지금은 골목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곤고와 환난이 자신의 죄와 상관있음을 고백하며 죄를 사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래야 대적자들로 조롱과 수치를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21절입니다.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실과 정직으로 자신을 보호해주시기를 바란다기 보다는 자신의 인생이 성실의 길과 정직의 길로 가도록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완전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켜 주십시오. 주님, 나는 주님만 기다립니다.”

이러한 간구를 드린 다윗은 자신의 간구대로 한 평생 성실과 정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다윗과 우리의 다른 점입니다.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왕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까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솔로몬이 떠올렸던 것은 아버지 다윗의 삶과 신앙이었습니다. 그 때에 솔로몬이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왕상 3:6)”라고 말했었습니다. 아들 솔로몬이 보기에도 아버지 다윗은 성실과 정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를 짓습니다. 2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

1-21절의 모든 간구는 다윗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이 다윗만의 고백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고백이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마디로 다시 정리를 하면, 하나님께 메여 있는 것보다 더 복된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여 있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매임이 나를 보호하는 최고의 은총이 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매임으로, 그 매임을 통해서 주님의 보호와 자유를 누리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신뢰하려고 했을 때는 패배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는 순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에는 우리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넘어질 때가 허다했음도 고백합니다. 바라옵나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따라 우리를 기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바라옵나니, 우리가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과 친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건강한 가족들의 밥상 교제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한평생 성실과 정직한 길로 나아가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한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매인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 우리에게 크고 작은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 매어 놓은 은총의 매듭인 것을 기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한 날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와 같은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언제이었습니까? 그리고 그 때를 어떻게 넘어오셨습니까?

2. 지난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잊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3. 다윗은 자신이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드렸고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앙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매여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시편 25편 & 성경주석

<시편 25편 서론>

다윗의 시.

시 25편은 답관체 시편, 곧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 지어진 시들 중 두 번째 것이다(참조 76쪽). 이 시는 탄원과 신앙 고백과 참회와 같은 헌신의 분위기가 담겨 있는 기도이다. 답관체 시들이 다 그렇듯이 이 시도 사상의 논리적 전개를 보여 주지는 못하고 그저 여기저기서 수집되어 알파벳순으로 정리된 독립적인 헌신의 표현들을 그 구성 요체로 하고 있다. 이 헌신의 표현들은 주로 하나님이 겸손하여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자들을 인도하고 가르치신다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이 시는 히브리어 글자 수(22)만큼의 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자들은 알파벳순으로 각 절의 맨 앞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이 엄격한 형태로부터 일탈된 것들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처음 두 절은 둘 다 알파벳의 첫 글자로 시작된다. 둘째와 여섯째와 열아홉째 글자는 사용되지 않았다. 18절과 19절은 둘 다 스무째 글자로 시작된다. 22절은 열일곱째 글자로 시작된다. 시 34편도 어느 정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본시의 주된 경향은 대적의 핍박과 자신의 죄과 때문에 시인이 당한 수난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눈물로써 회개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만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도 구원을 간구하는 중보자적 자세를 보인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모든 인생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악의 길에서 돌이켜 구원의 축복을 얻기를 바라신다.

<시편 25편 개역한글>

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3.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8.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11.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1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13.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15.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19.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시편 25편 성경주석>

25:1 주를.

첫 절에서 명상의 분위기가 형성된다(참조 시 86:4; 143:8).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이 절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alep)로 시작된다.

25:2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실패하였다면 그는 원수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절은 알레프로 시작된다. 둘째 글자인 베트(bet)는 이 답관체 시에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이 절의 둘째 단어가 베트로 시작된다. 어떤 학자들은 첫째 단어가 1절의 완성되지 않은 한 행(行)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25:3 주를 바라는.

참조 시 27:14; 37:34.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도를 받기 위하여,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그분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확대하여 거기에 모든 경건한 신자를 다 포함시킨다.

25:4 보이시고.

우리가 영적인 깨달음을 원한다면 우리의 길을 비추어 주는 하나님의 빛을 가져야만 한다. 모세는 그 같은 빛을 위해서 기도하였다(참조 출 33:13). 시인은 이 같은 필요를 늘 인식하고 있다(참조 시 27:11; 86:11; 119:33).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찬미가 524장, 뉴먼[Newman])는 이 같은 생각을 표현한 아름다운 기도찬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깨닫기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지혜롭게 규제하기 위하여 그의 뜻을 깨닫고자 간구하는 것이다.

25:5 주의 진리.

사람인 우리가 진리로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것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진리(참조 시 36:1~3; 86:11).

25:5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참조 3절 주석.

25:6 영원부터.

하나님의 인자하신 뜻은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다. 이 답관체 시에는 히브리어 글자 와우(waw)가 나오지 않는다. 이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에서 와우의 다음 글자인 자인(zayin)으로 시작된다.

25:6 기억하옵소서.

다윗은 과거에 받은 복들에 근거하여 미래에 받을 복들을 기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다윗의 가장 아름다운 특성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끊임없이 회상하는 것이다.

25:7 소시의 죄.

여기서 시인은 자기 아들이 어렸을 때 행한 어리석은 행위들을 용서하는 이 땅의 아버지의 성향을 생각하며 하늘 아버지께 자신의 어렸을 때의 철없음을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듯하다(참조 욥 13:26, 여기서 욥은 자신이 어렸을 때 지은 죄들로 인해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신다며 그분을 비난한다). 시인은 6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위하여 간구한 후, 죄가 그 자비를 쫓아 버릴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는 이 절에서 용서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25:7 허물.

히브리어 프샤임(pes∨a‘im), “반역”, “반란.” 따라서 죄를 의미한다.

25:7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그 자신에게 어떤 선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이 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선하심을 칭송한다.

성숙한 삶 속에서 우리의 죄의 무게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긍휼하심”, “인자하심”, “선하심”(6, 7절) 등과 같은 말 속에 표현된 하나님의 넓은 사랑에 우리 자신을 의존한다. 이 절은 시인이 자신의 만년에 이 시를 썼음을 암시하고 있다.

25:8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시인은 기도로부터 하나님의 품성과 사람을 대하는 그의 방법들에 대한 명상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우므로 훌륭한 교사로서 책망하고 징벌하고 또한 바른길로 인도할 것이다.

25:9 온유한 자.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겸손은 그리스도인이 오르는 성장의 사닥다리의 첫 번째 발판이다(참조 마 18:3).

25:9 공의로.

진리와 의무와 올바른 삶의 방법에 대한 바른 평가를 통해서.

25:9 그 도.

“오 여호와여, 저의 도가 아니라 여호와의 도를 따라 하소서!” 이것이 겸손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기도가 되어야만 한다.

25:10 증거.

참조 시 19:7 주석.

25:10 인자와 진리.

하나님의 성품의 두 특성인 동정과 신실함을 의미하는 용어들(참조 시 85:10; 요 1:17의 “은혜와 진리”).

25:11 중대하오니.

시인은 자신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참조 롬 5:15~21) 그에게는 오직 선하신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죄가 값없이 용서될 수 있도록 무한한 사랑이 한 길을 예비하였다.

25:11 주의 이름을 인하여.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명상에서부터 그 자신의 죄에 대한 회상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 인자와 진리가 나타나 보이도록 용서를 위해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참조 10절). 그는 자신이 언약을 깨뜨렸을까봐 두려워한다.

25:12 그 택할 길.

하나님은 그가 바른길을 선택하도록 그를 가르칠 것이다. 사람은 자동인형이 아니다. 그에게는 선택의 능력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는 그의 선택의 능력이 올바른 방향으로 행사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길을 선택한다(참조 시대의 소망, 668). 이 절에서 시작하여 일련의 새로운 사상이 제시되고 있다.

25:12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하나님은 그를 경배하는 사람을 위하여 큰일들을 행할 수 있다. 이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올바른 길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분의 계명의 길을 보여 준다(참조 시 119:30, 173; 요 7:17).

25:13 평안히.

문자적으로 “선함 중에.” 인도자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의 곤혹스러운 처지와 대조되는 안전한 상태를 의미함. 회개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안락하고 평안하게 거하는 사람과 같다(참조 시 34:11; 37:25).

25:13 거하고.

문자적으로 “밤을 지내고.”

25:13 그 자손.

(「제임스왕역」에는 “his seed”[그의 씨]로 되어 있음-역자 주). 그의 후손.

25:13 상속하리로다.

참조 출 20:12; 레 26:3~13. 의인들이 땅을 상속할 것이라고 하는 영원한 목적이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환경으로 인해 저지당하고 있다(참조 롬 8:19~24; 마 5:5).

25:14 친밀함.

히브리어 소드(sod), “은밀한 이야기”, “특별히 절친한 친구”, “절친한 사람들의 집단.” 여기서는 “우정”이 의지를 타나내는 것일 수도 있다(참조 「개정표준역」). 의인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즐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의 비밀을 말씀해 주신다(참조 잠 3:32 주석).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다(참조 대하 20:7; 창 18:17).

25:14 언약.

참조 10절.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행복과 구원 증진을 위하여 그들과 맺은 계약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들이 다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25:15 여호와를 앙망함은.

참조 시 141:8. 영적 분별력이 마음의 습관적 상태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의 눈은 항상 여호와를 바라보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바라보는가?

25:15 그물에서 벗어나게.

참조 시 9:15; 10:9; 31:4. 만일 우리가 의도적으로 함정에 말려들고자 시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건져내고 구원하겠다고 약속한다.

25:18 사하소서.

히브리어 나사(nasa’). 이 단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들어 올리다”, “제거하다”, “가지고 가버리다” 등의 세 가지 기본적 의미들 중 하나로 쓰인다. 이 단어는 많은 구절에서 용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창 50:17; 출 10:17; 32:32 등). 나사는 또한 대신 죄를 담당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담당해야 했다(레 10:17). 대신 죄를 지는 것과 용서는 별 차이가 없는 개념들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들 중 하나인 아이로(airo-)가 요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라는 구절에 나온다.

이 시가 정상적인 답관체 시의 형식을 따랐다면 이 절은 코프(qop)로 시작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대신에 히브리어 알파벳에서 바로 그 다음 글자인 레쉬(res∨)로 시작된다. 이와 동시에 레쉬는 또한 그 글자가 마땅히 위치해야 할 자리인 19절의 첫 부분에도 나온다.

25:19 원수.

참조 시 3:6, 7; 5:8; 6:7, 10; 7:1, 6; 17:9 등.

25:19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다윗의 원수들은 끊임없이 그를 파멸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25:20 내 영혼을.

즉 “나를”(참조 시 3:2; 16:10 주석).

25:20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참조 2절 주석.

25:21 성실과 정직.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완전하다는 특성들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일찍이 그는 자기 죄의 중대함을 개탄한 적이 있다(11절).

이 절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taw)로 시작한다.

25:22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 이 시가 이제까지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던 것에 반해서 여기서는 시인이 자신의 탄원을 확대시켜서 거기에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시킨다. 시인으로서는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면서 거기에 그의 백성을 위한 기도를 첨가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었다. 공중 예배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절이 이 시 전체를 예배드리는 회중이 사용하기에 적절한 시로 만들어 준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2020.05.24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25편)

2020.05.24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25편)

사하소서!

본문말씀: 시편25:4-11

오늘은 시편 25편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는데요. 한 가지 엉뚱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고 싶으신 분 혹시 계신가요? 고난 받기를 좋아하시는 분 혹시 계시나요? (진짜 엉뚱한 질문이지요?) 당연히 고난을 받기를 원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고난 받기 좋아하니까, 고난을 주세요!”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 제 정신인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당연히 고난당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고난이 때때로 우리에게 유익이 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고난을 섭리적 고난이라고 부르는데요.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고난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러한 섭리적 고난의 예를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셉이 그렇습니다. 참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참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형들이 그것을 시기해서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렸습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인정을 받아서 종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고,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옳은 일을 했는데,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2년 이상을 억울하게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여 주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고통의 기간이 13년이었어요. 그것도 억울한 고통의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셉의 신앙고백입니다. 창세기 45장 7절과 8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주어진 고통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요셉 자신이 당한 고통은 오히려 큰 유익이 되는 고통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요셉과 같이 거창하지는 않아도 여러 성도님들을 보고 “고통이 때때로 유익이 되는구나! 하나님의 섭리적 고난이 있구나!”라는 사실을 목격하였습니다. 가장 많은 경우가 어떤 경우냐면요?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때입니다. 소위 말해서 잘 나갈 때는 자신을 믿고 교만합니다. 그러다가 고난의 일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가? 그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무릎 꿇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한때 신앙이 뜨거웠어요. 그런데 세상의 일이 바쁘다. 몸이 피곤하다. 그런 핑계로 신앙생활이 게을러졌어요. 그러다가 고난의 일이 닥쳤습니다. 그 고난 앞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는 회개하면서, 예전에 가졌던 열심을 회복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요. 요즘 우리교회에 여러 환우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고난을 통해서 더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오히려 은혜를 발견하는 측면이 있다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싫은 일인데요. 때때로 그 고난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 25편을 노래하는 다윗이 그렇습니다. 25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시인데요. 다윗이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이유는 지금 너무도 힘든 고통의 현장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16절과 17절을 보십시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지금 다윗은 고난을 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마음에 근심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 고난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절에 보시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하고요. 19절과 20절에도 보면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이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지금 다윗이 당하는 고통은 원수들 때문에 당하는 고통입니다. 많은 원수들이 지금 다윗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영혼을 지켜주소서.” 그러잖아요. 여기서 영혼은 생명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원수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원수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도 견디기 힘이 드는데, 이보다도 더 힘든 일은요? 그 고난의 현장 에 있는 다윗이 너무도 외롭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있는 다윗을 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다윗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다윗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혼자 원수들에 둘러싸여서, 생명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그래도 누군가 옆에 있어주어서, 조금이라도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면 그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 다윗은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그러니 더 고통스러운 거에요.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다윗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좀 전에 읽었던 16절에서 다윗이 “하나님!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눈을 혹은 몸을 돌려서 나를 바라봐 주세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다윗은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요. 1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5절 종반절에 보면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15절을 보시면,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지금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고 계시냐면요? 다윗을 외면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눈길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도 애타게 기도하는데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그런 경험 있으시지요? 집에서 부부싸움을 했어요. 사모님이 완전 삐지셨어요. 그래서 눈길도 주지를 않아요. 말을 걸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싸하지요? 사는 기분이 아니지요?) 지금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죽을 상황에서 오로지 희망은 하나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하나님마저 외면하고 계시니까,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지금 다윗은 고난의 끝장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요? 바로 이 순간에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일면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닥쳐온 엄청난 고난의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을 통해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을 원망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난을 섭리적 고난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특히나 다윗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결론이 무엇이냐면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는 기회로 삼으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

7절.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18절.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이 구절들에서 다윗은 지금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적 고난으로 승화시킵니다. 먼저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돌아봅니다. 심지어는 젊은 시절에 지었던 죄와 허물도 기억해냅니다. 그리고는 그 죄의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회개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사하소서!”라는 표현의 의미가 굉장히 의미심장한데요. 히브리어 원어로 “나사”라는 말인데, “들어 올리다. 가지고 가다. 그래서 깨끗이 치우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이 기도는 “하나님. 나의 죄를 다 치워주십시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 하나님께서 죄를 다 치워주시면, 죄가 없는 정결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 그 소망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게 다윗의 엄청난 믿음이에요.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을 통해서 좌절하지도 않고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기회로 삼지도 않고요. 오히려 섭리적 고난으로 승화시켜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회를 삼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다윗에게서 배우는 믿음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적극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다윗이 가진 믿음이 무엇일까? 하는 겁니다. 회개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가는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지금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가지고 나아가 “사하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긍휼하심은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이고, 인자하심은 “헤세드”, 사랑하심입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리는데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둘 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긍휼하심이라는 말에 늘 은혜를 받아요. 어원이 “레헴”이에요. 그 기본뜻이 우리의 신체의 일부에요. 남자들은 없고, 여자들만 있어요. 아이를 잉태하는 “태”에요. 저는 가끔 집사람이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볼 때에, 10달 가까이를 자신의 배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던 여자들과 남자들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어쩌면 엄마가 아빠보다 자녀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전에 한번 말씀드렸지요?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 1편을 보세요. 자식이 망나니에요. 돈 때문에 복면을 하고는 아빠, 엄마를 무참하게 살해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게 아들이라는 것을 직감해요. 그래서 죽어가면서도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그 망나니 같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아들의 손가락에서 떨어진 손톱을 주어먹습니다. 이게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에요. 그게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향한 마음이 그렇고요. 우리를 향한 마음이 그래요. 다윗은 자신의 죄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망아니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염치불구하고, 그 죄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서 “사해주세요.” 기도하고 있어요. 무슨 믿음이 있어서 그럴까요? 자신이 아무리 망나니 같아도, 긍휼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 저와 여러분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문을 맺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고난이 찾아옵니다. 참으로 힘이 드는 일입니다. 요즘 코로나 19가 우리를 얼마나 힘이 들게 만드는지 몰라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라도 오늘 다윗처럼 고난 앞에서 그저 좌절하지도 마시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오히려 다윗처럼 고난을 섭리적 고난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음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이 내게 은혜였다.” 그렇게 놀라운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코로나 19가 지금은 우리를 너무도 고통스럽게 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다윗과 같이 이 고난의 때를 믿음으로 이겨내며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기회로 삼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제목:

-하나님!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 성도님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좁은 길에서 드리는 기도 Part II(시편 25편)

주제 : 좁은 길에서 드리는 기도 Part II

본문 : 시편 25편

설교자 : 최종혁

시편 25편은 히브리어의 abc에 해당하는 문자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답관체 시입니다. 3행시를 지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글자의 순서에 맞추어 글을 쓰다보면 주제를 일치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시편에도 그러한 어려움이 부분적으로 나타납니다. 지난 시간에는 좁은 길, 고난의 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시편 중에 고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시편은 총 15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왜 실제 시편에는 이러한 고난에 대한 시가 많을까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편은 다윗의 시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고난을 많이 겪었던 사람이지요. 오랜 세월 도망자로 살았고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뒤에도 대적들로 인해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자신이 범한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했고 자신이 믿는 신앙 때문에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랬기에 이러한 시편을 많이 썼을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25편에서는 고난 중에 우리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당하는 고난도 있고 자신의 죄 때문에 경험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 고난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죄책감과 외로움, 괴로움 등입니다. 이것은 다윗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고난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실까요?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사람처럼, 문제를 스스로 다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를 찾아가서 맘껏 하소연을 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25편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고 그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구하는 기도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인도하심’, ‘죄용서’, ‘보호하심’입니다.

구원(2~3, 17, 20, 22절)

다윗은 먼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2-3),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17),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20),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22).

“구원”은 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서 구원은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충분히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이기적인 기도는 아닙니다. ‘고난이 우리 삶에 필요한가?’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우리가 항상 고난을 추구하고 고난 가운데 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 자체를 원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의미 역시 아닙니다.

성경에서 고난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고 믿음이 자라게 합니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났을 때 그들의 믿음이 어디 있는지, 고난은 그들의 믿음의 성숙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찾게 하고 의지할 수 있게 합니다. 또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이가 어려움 당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항상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싫어하는 것을 절대 주지 않지는 않습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들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아이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먹기 싫어하는 음식도 먹으라고 합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 잘못을 하면 때려서라도 그것이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정말 싫어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잘못을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영광 돌리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고난 자체를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 있을 때, 그 상황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꼭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가 자주 잊는 것입니다.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인도(4~5절)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4-5).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이 시편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다윗의 다른 고난의 시를 보면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호소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조금 특별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8-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12-14). 다윗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뜻을 보여주시는지 언약을 나타내시는 지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기본적으로 힘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힘든 것을 통과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나 유익을 바라보며 힘든 것을 참는 것이지 힘든 것 자체를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입니다. 본성적으로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생각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에 중심에 근본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서 올바르게 드러나시고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감정적이 되기 쉽고,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여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투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 뜻에 따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의 예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는 사도 바울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7-10).

바울에게 고난이 있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족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오히려 그 고난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난 중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 우선순위는 자신의 평안함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더욱 드러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지금의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언제나 옳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도 시련 중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2-8).

시험 중에 있을 때 감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바라봤던 사람은 성경에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감동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고난에 공감하고 어려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난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는지 배워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큰 일을 앞두고 우리는 그런 기도를 자주 합니다. 그런데 삶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어려움 중에서도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위해 차에 뛰어들 수는 있는데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큰 일뿐만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작은 일들, 사소한 일들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다면 용서할 수 있도록, 회개할 수 없다면 회개할 수 있도록, 내가 참을 수 없다면 참을 수 있도록, 고난 중에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일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이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내 삶에서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도를 구해야 합니다.

자백(7, 11, 18절)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11),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8). 죄에 대한 자백은 전체 내용에서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내가 어떤 자인지 안다면 죄에 대한 고백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음을 알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죄를 범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죄를 숨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죄가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됐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경우가 있고, 죄를 인정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는 경우, 다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회개보다 죄에 대해 변명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경우는 죄책감에 빠져서 회개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첫 번째와 같은 잘못의 대표적인 예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지적했을 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 변명했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아담은 하와에게 핑계를 댔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죄책을 떠넘겼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변명이 회개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도 동일했습니다. 사울은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계속해서 변명하며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죄가 명백해진 상황에서도 그는 “부득이하게” 그렇게 했다고 하고 “백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했다고 변명합니다. 우리도 죄에 대해서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잘못에 대해 지적하면 뻔한 변명을 하는 것을 보며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죄책감에 빠져서 회개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세상 모든 죄를 담당하셨어도 내 죄는 담당하지 않으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가 너무 커서, 너무 많아서, 너무 반복되어서 주님께 가져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교만한 생각이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너무 작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때 하나님은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시는 것을 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교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죄책감과 자책에 빠지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고난 자체가 죄로 인한 결과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저 ‘죄 지었으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어차피 용서하시니까 죄는 마음껏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 비통해 하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서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옵니다. 그의 고난이 죄의 문제와 연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보호(15~16, 19~21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15-16),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19-21). 두려움, 외로움, 근심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은 누군가 나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구합니다.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다윗의 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손 내밀고 계십니다. 때론 그 손에 회초리를 들고 계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 다른 데를 보시거나 떠나시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이 여기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더 귀 기울이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호의를 베푸셔서 환난에서 벗어나기를 혹은 그 안에서 보호 받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의 편보다는 원수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원수들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신다면 그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구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내가 주를 바라오니”, 21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20절). 그것을 구하며 다윗은 동시에 확신합니다(3절). 기도에 있어서 그런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누가 그런 확신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지를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다윗이 좁은 길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가끔 우리는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조금은 무기력함 가운데 말할 때도 있는데,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볼 것 다해보고 안되면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전혀 없어서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본다”(15)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17). 좁은 길에서는 항상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폭풍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바람과 거센 파도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눈은 항상 여호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죄가 문제라면 자백하십시오. 두렵고 떨린다면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십시오. 외롭고 괴롭다면 하나님의 동행을 구하십시오. 그 상황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안에 있는 그분의 뜻을 알기를 구하십시오.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며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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