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 예꼬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유아유치부│성경동화 9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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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폴랄라야^^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 오고 있어!
예꼬친구들 받고 싶은 선물이 엄청 엄청 많지?!
그런데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니까!
우리 예수님의 이야기를 같이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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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마가복음 15:1-47) – Daum 블로그

다른 하나는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만 함께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있어도 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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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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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본문 : 마 13:53~58)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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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sinnews.com

Date Published: 9/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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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3월 25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 국민일보

[가정예배 365-3월 25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기사. 찬송 : ‘갈보리산 위에’ 150장(통 135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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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5/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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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막 15:24-28) – 목회자료 – 기멀전

눅23:42 말씀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십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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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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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 정필도목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20190414 본문 / 요한복음 19:17~24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대제사장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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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ildo.kr

Date Published: 6/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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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사야 53: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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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4/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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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 YES24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리틀성경동화-52이동. 유재덕 글 / 한창수 그림 | 한국톨스토이 | 2014년 06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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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8/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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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미 – 하나님의 약속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항상 관념이 있어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구속하실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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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light-of-truth.org

Date Published: 3/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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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꼬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유아유치부│성경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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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 Author: 예꼬TV Yekkoclub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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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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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바이블 하우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마가복음 15:1-47

세상에는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종류는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함께 있지 않으면 잘 보이는 사람입니다 . 다른 하나는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만 함께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함께 있어도 잘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 조용히 자기 일을 할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한 일들까지도 묵묵히 대신 해줍니다 . 그래서 모든 일이 순조롭고 , 사람들 간에 다투는 일도 없습니다 .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 그래서 그 사람의 존재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 잘 보이지 않습니다 . 그 사람의 가치도 모릅니다 . 하지만 그 사람이 없어지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됩니다 . 갑자기 일은 엉망진창이 되고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며 싸웁니다 . 그제서야 그 “ 보이지 않던 사람 ” 을 기억하며 그를 다시 보게 됩니다 . 그를 그리워하며 찾게 됩니다 . 비로소 그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 어떤 이는 자기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늘 다른 사람을 탓하며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 그래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고 다투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 또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드러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 이 요란함으로 인해 멀리서도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 오직 그가 자리를 떠나야 조용해지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기조차 싫어합니다 . 우리들은 모두 후자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전자의 경우 , 곧 함께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함께 있지 않으면 잘 보이는 사람이 될 것을 가르칩니다 .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경우의 “ 극단적인 본보기 (extreme model)” 가 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공부할 말씀은 “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 입니다 . 묵묵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예수님께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이사야 53:7)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 이사야 53:12b)

십자가는 “ 기독교 신앙의 중심 ” 입니다 . 고린도전서 1:22-24 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을 그냥 “ 그리스도 ” 라고 부르지 않고 “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 라고 부릅니다 . 그리고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 ” 라고 합니다 . 유대인들에게는 저항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예수님께서 절대로 “ 하나님의 능력 ” 이 되실 리가 없었습니다 . 오늘 본문에서 이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여 능력을 보이라고 조롱합니다 . “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29,30) “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 (31,32). 헬라인 총독 빌라도 또한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에 잠잠하시며 자신을 위해 아무런 변명도 하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미련하고 답답해 보여 채근했습니다 . “ 아무 대답도 없느냐 ?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 (5)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무력하게 ,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 그래서 이 예수님은 이들에게 “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 ” 이 되셨습니다 ( 로마서 9:33; 베드로전서 2:8). “ 하나님의 능력 ” 이란 “ 사랑의 능력 ” 이며 , “ 하나님의 지혜 ” 란 “ 구원의 지혜 ” 를 말합니다 . 그리고 우리는 오직 “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 을 통해서만 이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과 구원의 지혜를 깨닫고 누릴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앙의 중심이 되지 않을 때 ,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시는 것입니다 .

로마 시대에 십자가 형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로서, 주로 중대한 죄를 지은 노예나 전쟁 포로들에 대해서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 이 사형법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 경고 ” 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나 광장에서 시행되었습니다 . 죄수는 자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으며 ,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 여러 가닥으로 된 채찍에는 쇠나 뼈 조각들이 달려있어서 몸을 휘감으며 살을 찢었다고 합니다 . 그리고 옷을 벗긴 후 두 발을 포개어 세로 기둥에 못박고 양 손목을 가로 들보에 못박아 고정시켰습니다 . 죄수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수시간 길게는 수십 시간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 삼시 곧 아침 아홉 시에 못박히셔서 제 구시 곧 오후 세 시가 넘어서 운명하셨습니다 .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 또 예수님의 좌우에 강도 둘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 이는 예수님을 이런 강도들과 같은 흉악한 죄인들 중 하나로 취급하여 더욱 수치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 아직 가장 큰 괴로움이 남아있었습니다 .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잠잠히 고통을 참으시던 주님은 마지막 때가 되어 큰 소리를 지르십니다 .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이것은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하시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 사실은 이것이 진정한 죽음의 의미입니다 . 예수님께 육체의 고난과 죽음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 영적인 죽음 곧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분리 ” 였습니다 .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얼마나 큰 고통일까요 ? 그 고통의 크기는 예수님의 “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크기 ” 만큼 클 것입니다 . 그러니 오직 예수님만이 아시겠지만 , 그것은 아마도 천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도 수억 배 더 크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은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향하여 똑바로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 빌라도가 예수님께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 네 말이 옳도다 ”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 이 대답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 죄 ” 를 인정하시는 것이었습니다 . 누가복음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 “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 ( 누가복음 23:2).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로마 황제 가이사에 저항하여 사람들을 선동하는 반역자로 거짓 고소한 것입니다 . 빌라도는 이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자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서 “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고 ……” 하시며 자신의 무죄함을 설명을 하셔야 했지만 , 순순히 “ 네 말이 옳도다 ” 하셨습니다 . 그리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런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는 기이히 여겼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로마 군병들로부터 많은 희롱을 당하시고 , 또 십자가 위에 계시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부터 , 그리고 심지어 자신과 함께 좌우에 못박힌 강도들로부터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 사람들은 예수님께 “ 자신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보이라 ” 고 했습니다 . 이것은 정말 부인하기 힘든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마저도 참으시고 계속 십자가 고통가운데 머물러 계셨습니다 .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형수가 겪는 극심한 육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최소한의 자비로 , 마취제 역할을 하는 “ 몰약을 탄 포도주 ” 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3).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마저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고난은 당하셨지만 , 그 고난을 덜기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말 100% 정금보다 더 순결한 “The Cross” 였습니다 .

38 절 이후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된 것입니다 . 성소의 휘장이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성소 (Holy Place) 와 지성소 (Holy of Holies) 사이에 드리워진 커튼을 말합니다 .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 이곳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한번만 몸에 희생의 피를 바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 이곳을 막고 있는 커튼이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 여기서 “ 찢어졌다 ” 를 의미하는 단어는 마가복음 1:10 절에서도 쓰였는데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 “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 ( 마가복음 1:9,10). 여기서 “ 하늘이 갈라졌다 ” 는 표현이 “ 휘장이 찢어졌다 ” 는 말과 서로 상응합니다 . 곧 예수님의 세례 곧 십자가 죽으심으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된 것입니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심으로 ,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으신 고통의 크기는 예수님의 “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크기 ” 만큼 크다고 했습니다 . 왜 예수님께서 이런 고통을 당하신 것일까요 ? 이는 주님께서 또한 “ 그만큼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 그런데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 오랜 동안 ” 이 형용 못할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의 죄 때문에 , 마치 문둥병자와 같이 그것이 고통인줄도 모른 채 , 하나님을 떠난 그 무서운 죽음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이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 딸로 회복되고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어둠에서 빛으로 ,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 영원한 저주에서 영원한 축복으로 , 지옥의 나락에서 은혜의 천국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 예수님의 한없는 은혜가 바다 같이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 잠잠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 처럼 묵묵히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 또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우리를 평안한 생명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 우리가 매 순간 공기를 호흡하며 , 물을 마시고 , 음식을 먹는 것처럼 , 또 매일 해가 뜨고 , 철을 따라 비가 내리고 , 초목이 자라는 것처럼 ,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의 생명이 되며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 만일 이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떠난다면 , 우리의 삶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할 것입니다 . 그때라면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 바로 지금 , 아직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 때에 ,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이루신 이 놀라운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 우리 가운데 이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막 15:24-28)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막 15:24-28)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막10:45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20:18∼19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26:2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갈3:13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벧전3:18에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가 말씀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막15: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십자가에 못 박고.”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도 참혹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일 경우, 아무리 큰 죄를 짓더라도 십자가의 형벌은 주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순교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반면에 사도 베드로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더 이상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못 박는 망치소리, 손과 발에 생긴 못 자국, 못 박힌 곳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대한 설명이 전연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만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의 감동을 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광경을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감동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았고 활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좋은 땅이면, 우리의 마음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잘 자라서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감동을 바라지 말고 늘 하나님의 감동을 소망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감동만이 우리의 심령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감동만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 후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눈 방법을 설명합니다.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그 당시 로마의 군인들이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 죄수의 유품은 군인들이 나누어가졌습니다. 험한 일을 한 대가였습니다. 이와 같은 관례에 따라, 빌라도의 군인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습니다.

요19:23∼24 말씀을 보면, 여기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23절 말씀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입는 옷은 다섯 깃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머리에 쓰는 두건입니다. 둘째는 몸 밖에 걸치는 겉옷입니다. 셋째는 허리를 동이는 띠입니다. 넷째는 신발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몸 안에 입는 속옷입니다.

당시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군인들은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었습니다. 죄수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형장으로 끌고 갈 때, 두 명의 군인들이 앞서 가면서 죄수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의 군인들은 뒤에서 따라가며 죄수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의 군인들도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의 옷을 두건과 겉옷과 띠와 신발의 네 깃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아서 각각 한 깃씩 얻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속옷이었습니다.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입는 내의처럼, 목 부분과 양팔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어서 입으면 되는 옷이었습니다.

계속해서 24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이 때 응하여진 성경은 시22:18 말씀입니다. 시22:18에서 다윗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은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았고, 예수님의 속옷은 누가 얻나 제비를 뽑았습니다.

다윗은 예수님보다 천 년이나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행2:29∼30 말씀이 밝히고 있듯이, 다윗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막12:36 말씀처럼,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장차 십자가 앞에서 일어날 일을 정확하고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하셔서, 성경을 응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또한 우리에게 영화로운 천국을 영원한 기업으로 잇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을 그것을 알지 못하고, 기껏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행여 예수님이 오늘의 우리를 보시면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같은 기도를 드리지는 않으실까요?

현대판 빌라도의 군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는 내 것을 바치면서 예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런데 내 것을 바치기는 아까워하면서, 교회돈을 쉽게 생각하며 허튼 데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러한 사람이 바로 현대판 빌라도의 군인일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이 물음에 우리 각자가 진솔하게 대답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막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빌라도의 군인들이 골고다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시각은 제삼시가 되었을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제삼시는 우리 식으로 하면 오전 아홉 시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아홉 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때가 되기까지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전날인 목요일 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대신할 새로운 예식인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 날 밤이 늦은 시각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그 곳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다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이끌고 온 무리에게 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맨 먼저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안나스에게 끌려가셨습니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예수님을 정죄할 거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가야바는 자기 집으로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는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님을 쳐서 거짓 증언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증언은 예수님을 정죄할 증거로 채택되지를 못했습니다.

급기야 가야바는 예수님을 유도 신문하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실대로 말씀하시자, 그는 예수님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공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습니다.

그런 후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하인들도 손바닥으로 쳤습니다. 그런 동안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금요일 새벽, 날이 새자마자 공회가 또다시 모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심문과 판결이 합법적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잠시 의논한 후, 곧 바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그에게 넘겨 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심을 알고서, 당시에 갈릴리를 관할하던 분봉 왕 헤롯에게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은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희롱한 후에, 예수님을 도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고자 하여, 무리에게 바라바와 예수님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했습니다.

때마침 빌라도에게 그의 아내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그 사이에 공회 의원들은 그 곳에 모인 무리를 선동했습니다. 그들은 무리에게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하게 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 지르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유대인에 의해서 세 번, 또한 이방인에 의해서 세 번 도합 여섯 번의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끌고 뜰 안으로 가서 예수님을 채찍질했습니다. 그리고는 온 군대를 모으고 함께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게 했습니다.

그들은 짐짓 예수님에게 인사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예수님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온갖 희롱을 다 한 후, 그들은 예수님에게 입혔던 자색 옷을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도로 입혔습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끌고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심신은 이미 말로 다 할 수 없이 지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시던 도중에, 때로는 멈추기도 하시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하셨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성 밖에서 와서 성 안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은 그를 붙들어서,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함께 지웠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을 위하여 동정의 눈물을 흘리지 말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회개의 눈물을 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 군인들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끌고 성 밖에 있는 형장인 골고다에 이르렀습니다. 요19:20 말씀과 같이, 그 곳은 성에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곳까지 이르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쉽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끝까지 온전히 겪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드디어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각은 금요일 제삼시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오전 아홉 시였습니다. 그 때가 되기까지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 날 오후 세 시가 되면, 성전에서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같은 시각에 숨을 거두셔야 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무덤에 장사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야 마12:40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사흘 동안 땅 속에 계시다가 삼 일 만에 살아나시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모든 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섭리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적은 자연 법칙이 잠시 깨뜨려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섭리는 자연 법칙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은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모든 것을 재빨리 진행하셨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준비된 것도, 또한 군인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지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우리의 가는 걸음이 늘 평탄하고, 우리의 하는 일도 항상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막15: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있는 죄패의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요19:19 말씀을 보면, 보다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죄패에 쓰여 있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그리고 요19:20 말씀처럼, 이 내용은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세계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모두 다 그것을 읽도록 함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빌라도에게 소리 질렀습니다. 이에 따라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들은 빌라도가 쓴 예수님의 죄패가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요19:21 말씀처럼, 그들은 죄패의 내용을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쳐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19:22 말씀처럼, 빌라도는 자기가 쓸 것을 썼다고 하면서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기를 괴롭힌 유대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빌라도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밝히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중 하나도 예수님의 죄패를 읽었을 것입니다. 눅23:42 말씀입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왕으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막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은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두 강도 중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좌편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운데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막15:7 말씀과 같이, 이들 두 강도는 바라바와 함께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에는 본시 바라바가 못 박혀야 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강도와 같은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28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 28절을 보면, 괄호 안에 “없음”이라고 표기했습니다. 후대 사본들 중에는 이런 말씀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 일렀으되 저가 범죄자와 같이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보다 초기의 사본들에는 이 말씀이 없습니다.

아마도 어떤 서기관이 앞 절의 말씀을 기록하다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하신 사53:12 말씀이 응하여졌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 사실을 성경의 여백에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후대의 몇몇 사본들이 본문 안에 넣어버렸습니다.

사53:12 말씀처럼, 예수님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도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사, 성경이 응하여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 앞에도 두 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크고도 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해서 지옥에 떨어져 영원토록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 위에 굳게 섭시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힘써 복음을 전합시다. 이번 한 주간도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며,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2019-04-1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20190414본문 / 요한복음 19:17~24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대제사장에게 예수님을 넘겼습니다.본문 요한복음 19장 17~18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재판 받으신 곳에서부터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넓지 않습니다. 길이는 1㎞가량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그 길을 올라가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밤을 새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붙잡혀 가셔서 재판을 받으시고 매를 맞으시고 여러 가지로 시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올라가다가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실 때마다 로마 군인들은 채찍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시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해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습니다.구레네 시몬은 자신이 원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후에 구레네 시몬의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부인은 사도 바울을 잘 도왔습니다.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로마서 16장 13절에 보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레네 시몬의 가정과 사도 바울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주님과 복음을 위한 일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억지로 한다고 해도 복이 됩니다.자신은 생각이 없는데, 주변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신학교에 가고 목회자가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복이 됩니다.사업에 계속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먹고사는 것에만 전념하니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갔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북한에서 피난 오면서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하나님, 살려주시면 목회자가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여 목회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목회자가 되었든지 주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한다면, 자신에게 복이 됩니다.본문 요한복음 19장 17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골고다 언덕의 밑에 뼈가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 뼈를 아담의 뼈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이 해골을 의미하는 골고다가 되었습니다.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후 사람은 죽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로마서 5장 14~19절에 보면,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그런데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죄로 인해 죽는 것도 저주이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한 모습으로 죽는 것은 저주 중의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13~1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모든 죄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이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죄가 아무리 많아도,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 받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받은 축복이 많습니다. 우리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모두 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나음을 받았습니다.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만 속량된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받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해주셔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1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믿음이 약하여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넘어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말씀대로 살면 모든 복을 받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변화됩니다.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모든 복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행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세상에 많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기쁨이 넘치고 행복하면, 소화가 잘 됩니다. 잠도 잘 잡니다. 건강에 좋습니다.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전도가 저절로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 믿으면 저렇게 되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으려 할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받은 복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우리는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엉터리로 살았다 해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본문 요한복음 19장 18절에 보면,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양쪽에는 강도들이 각각 못 박혔습니다. 이 강도들처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누가복음 23장 39~43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두 강도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조롱하다가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에 있던 강도는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이 강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구원 받았습니다.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시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예수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강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강도는 평생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니 염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강도는 자신을 기억해달라고만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강도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우리가 회개하면 죄만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도말해주십니다.우리는 분명히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해주십니다.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해주십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한 사람의 죄를 용서 받을 뿐 아니라 그가 범한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범한 죄가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전혀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마치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그리고 우리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 축복입니다.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고 말했습니다.우리가 죄 가운데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 보면,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로마서 3장 10~11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마태복음 16장 16~17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요한복음 1장 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셔서 구원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십니다.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명패를 붙였습니다. 그 명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어있었습니다. 명패는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되어있었습니다.대제사장이 명패를 보고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항의했습니다. 대제사장의 말대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다면, 예수님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정말 예수님께서 제정신이 아니라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이유는 없습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의 명패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가 죄인이 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대제사장에게 “내가 쓸 것을 썼다(요 19:22)”라고 대답했습니다.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고쳐주실 때에 맹인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마 9:27, 20:30, 막 10:47, 눅 18:38, 39)”라고 말했습니다.마가복음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 3:11)”라고 말했습니다.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똑바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귀신은 예수님을 알 뿐, 예수님께 전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귀신은 예수님을 똑바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 3:11)”라고 말했습니다.그러나 유대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도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고린도전서 2장 8절에 보면,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누가복음 23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마태복음 5장 44~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로마서 12장 14절에 보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을 축복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어야 합니다.우리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감동 받을 것입니다. 전도가 저절로 될 것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한일서 3장 10절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요한일서 3장 14절에 보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본문 요한복음 19장 23절에 보면,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가운데 신음하실 때에 십자가 밑에서는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서로 가지려고 하다가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당시 십자가형을 집행할 때에는 먼저 죄수의 옷을 다 벗겼습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여 정신없게 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세웠습니다.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가시관까지 쓰셨습니다. 그래서 얼굴에도 피가 흘렀습니다. 채찍질을 당했으니 채찍에 맞은 곳에서 피가 흘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그런데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서로 가지려고 제비를 뽑았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로마 군인들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입니다.본문 요한복음 19장 24절에 보면,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은 것은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기록되어있는 시편 22편 18절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미래를 알고 살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루십니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삽니다. 성령께서는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오늘 주신 말씀이 평생의 복이 될 줄 믿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한 주간 기도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하고 감사하고 결심함으로 큰 은혜와 복을 받게 하여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말 씀 : 예레미야 39:17-18, 로마서 6:6-10

서론

유명한 유대인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는 ‘죄로 인한 결과(Whatever Become of Sin?)’라는 책에서 현대인에게 죄의 개념이 사라진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그는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다”, “다 그럴 수 있지”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죄의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우리의 사고를 반성하고 죄에 대하여 더 민감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죄란 어떤 것입니까? 작지만 큰 죄도 많고, 사람들이 악해지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탈법이나 편법을 너무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도 매일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예사로 여겨 안전을 위협합니다. 최근 불거진 원자력발전소 불순부품 문제를 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악한 일을 했는지 ‘원전 마피아’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런 악을 조장하는 일이 이제는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회도 깨끗하고 안전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하여 무딜 때에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단 선지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듣고 그는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되어 회개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는지 베벼개를 적시며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죄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의 짐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죄의 압박 때문에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죄에 대한 민감성이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편 78:38에는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긍휼하심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이셨고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조문은 사람에 대한 두 번째 조문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누구에게나 가장 절실한 기도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암송문이 아니라 실천문입니다. 암송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실천해야 참 기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죄’라는 말을 마태는 ‘빚’으로, 누가는 ‘죄’로 표현하였습니다. 마태의 표현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라는 말입니다. 죄란 빚입니다. 내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갚아줘야 하는 큰 빚입니다. 이 빚을 예수님은 갚을 수 있고, 십자가에서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가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조 원 정도 됩니다. 일백 데나리온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요즘 돈으로는 500만 원 정도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고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 전역에서 로마에 낸 세금이 일 년에 800달란트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필연입니다. 누구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하는 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죄의 몸이 죽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6절에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비결은 십자가에서 옛 사람인 죄의 몸이 죽어 죄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옛 사람이 죽습니다. ‘십자가’에 박혀야 죄의 몸이 죽어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으로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십자가 사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죄 사함의 사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 삶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며 자유입니다.

에베소서 4:22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야 새 사람을 입습니다.

파충류나 곤충을 보면 허물을 벗고 새 단장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허물을 벗어야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허물을 벗는 것은 아니지만 헌 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습니다. 밤에 잘 때 입는 잠옷을 벗어야 아침에 일하는 새 옷을 입습니다. 헌 옷을 그대로 입고 새 옷을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하여 헌 옷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4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바로 십자가상에서 만들어집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집니까?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집니다.

죄란 히브리어로 ‘아본’입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입니다.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사야 53: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가지 못하고 각자 자기 길로 갑니다. 과녁에서 한참 빗나가 살고 있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아직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던 경우입니다. 세상에는 죄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죄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죄인이라고 인정해야 사함도 받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말하는 의인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최대 역설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죄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치유 받지도 못합니다.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도 받지 못합니다. 용서함을 받는 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죄를 알고 용서함을 받아야 진정한 자유도 있습니다.

어떤 소녀가 자신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회는 술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살아 있는 성자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면담이 끝나자 주교는 진짜 소녀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는지 검사해보자고 하였습니다. “네가 다음번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지난번 고해성사에서 무엇을 고백했는지 그분께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주교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얘야, 예수님을 만나서 내가 뭐라고 고해성사를 했는지 여쭤봤니?”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잊어버렸다고 하시던데요”. 주님의 죄 사함이란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다 용서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7절에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면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의입니다. 이것이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의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은 아담 이후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보다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니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특별한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죄의식과 죄의 고백은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죄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죄의식을 많이 가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의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전투기의 항법사 폴 버거만은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유의 죄의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유대교는 죄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와 인간에 대한 죄입니다. 성경의 율법인 토라에는 56종류의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여러 종류로 나누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죄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무슨 죄든 다 범할 수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인격적 세력이 있습니다. 틈새를 만드는 재주꾼인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틈새를 벌어지게 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틈새를 다시 없애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인간 사회는 개선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재창조하십니다. 이 재창조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로를 잇는 긴 막대기와 가로를 잇는 막대기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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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미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저는 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이 성경 구절을 종종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보혈로 온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저도 그 덕분에 하나님 앞으로 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가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면 전 벅찬 감동을 느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굴욕과 고통을 참으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감동하면서도 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고 모든 일을 이뤄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천지가 개벽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사탄의 권세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해 내실 수 있으실 텐데 왜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방법으로 인류를 구속하신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형제자매와 목사, 장로님께 답을 구했지만 제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 안에 있는 자매님과 깨달음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제 중에 저는 마음속에 갖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고 자매님과 함께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자매님은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진리의 기묘함이 숨어 있답니다! 예전에 저도 그런 고민에 휩싸인 적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 책에서 이것과 관련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제 고민은 해결되었답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구속하신 건지 같이 보도록 할까요?” 그러면서 자매님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항상 관념이 있어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구속하실 때, 사탄에게 ‘나는 전능하다. 네가 감히 인류를 나에게 안 주겠다고? 반드시 나에게 줘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기만 하면 해결됩니다. 하나님께는 권병(역주: 권세)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 준다고 말씀하시기만 하면 사람에게는 죄가 없게 될 텐데, 이런 일은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마디 말씀을 하시니 천지 만물도 다 생겼는데, 이 일은 왜 해결하시지 못합니까? 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까?”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한 면도 있고, 실제적인 면도 있다. 실제적인 면은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하여 땅에서 33년 반 동안 거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피를 흘리며 가장 심한 고통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죽음에서 부활하였는데, 부활은 전능한 면이다. 하나님은 어떤 예시로, 또는 피를 좀 흘리거나 비를 좀 내리는 것으로 그것이 곧 속죄제라고 말씀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친히 말씀이 육신 되어 온 인류와 접촉하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류에게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하였다. 그 사실로 인류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구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였는데, 하나님이 확실히 사람을 구원한 그런 증거가 있게 하였다. …영은 피를 흘릴 수 없고 육신만이 피를 흘릴 수 있는데, 그 보혈이 바로 속죄제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육신이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 인류를 대신해 고통을 담당했다. 영은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기에 인류를 대신해 고통을 받을 수 없고, 사람의 죄를 속량할 수 없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한 것으로, 실제적인 그 일면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이다. 왜 그를 하나님이라고 하고, 전능한 면이 있다고 말하겠느냐? 일을 할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한 면이 있고, 실제적인 면도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바로 그의 실질이며, 그의 실제적인 면에도 그의 실질적인 면이 있다. 이 두 방면은 서로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은 후 자매님은 제게 이렇게 교제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는 건 하나님의 전능함과 실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천지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는 관념이 없지만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서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실제는 항상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자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사역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가 애굽을 떠나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막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와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셨을 땐 요나에게 니느웨 성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실제 사역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분부를 듣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쳐 여호와로부터 숨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선 파도를 일으키시어 요나는 배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고, 물고기에게 잡아 먹힌 후에도 사흘간 살아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율법시대 말기,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굴레를 쓰고 매일 죄 속에서 살아가 율법으로 정죄 되고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졌습니다. 그때 그들에겐 영원한 속죄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성육신하시어 직접 인간 세상으로 오셨고 실제로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죄에서 구속해주셨고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을 향해 40일동안 나타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중 어느 단계의 사역을 하시든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확실한 증거이자 사탄의 권세를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증거로 사탄이 고개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매님이 읽어주는 구절을 듣고 자매님과 나누고 나니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전능하심뿐만 아니라 실제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줄만 알았지 하나님께서 왜 성육신하시어 친히 인간 세상에 오시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는 몰랐어요. 이제야 하나님의 사역에서 전능하심과 실제가 공존하는 것이고 뗄래야 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늘 교제가 빛비춤이 정말 크네요.” 자매님은 웃으면서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실제적이신 것이라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도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몇 년 동안 갖고 있던 의문이 드디어 해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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