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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표상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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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특별한 약속\”
성경구절 듣기 (창세기 15:1-21:7)
[구약] 창세기 (Genesis) 전체듣기, CBS 박명규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성경
https://youtube.com/watch?v=bQVGohpTBJQ\u0026feature=share\u0026t=2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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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아브람은 Av와 Ram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아버지는 높으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고귀한 이름이지만 때로는 거만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새로운 민족의 선조에게는 …
Source: lp.eteacherbiblical.com
Date Published: 2/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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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10) ‘아브람’을 … – 뉴스앤조이
하나님께서는 ‘큰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이란 이름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면서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2/13/2021
View: 8495
하나님은 왜 이름을 바꾸시는가? – 두란노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 그리고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부르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름을 바꾸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10/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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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 나무위키:대문
비교종교학에서는 이를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고 한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은 99세 때 하느님으로부터 새로 받은 이름이며 본명은 ‘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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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설교문]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창17:5)
아브람은 (אברם아브람 87)입니다.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אברהם아브라함 85)입니다.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
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3/17/2021
View: 5076
6. 아브라함과 사라의 개명, 할례 언약 – 구속사시리즈
본래 이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으로 개명되었습니다(창 17:5).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으로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며, …
Source: www.abrahampark.com
Date Published: 12/18/2021
View: 843
새 이름 새 인생(1) :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아브람’이란 ‘높으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들은 주로 한 집안이 다 모여 사는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한 집에 보통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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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브람 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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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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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브라함
אַבְרָהָם 족장 아브라함의 초상. 구에르치노 . 1657 작. 브레리 미술관 믿음의 조상 출생 성경 연대로 추산하여 기원전 2300~기원전 2000로 추산. 사망 175세로 사망 종교적인 위치 기독교/유대교 믿음의 조상
이슬람교 선지자 부모 데라 배우자 사라
하갈 (이집트 여종)
그두라 (첩) 자녀 이스마엘, 이삭,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친척 하란 (남자 형제)
나홀 (남자 형제)
야곱 (손자)
에서 (손자)
롯 (조카)
아브라함(히브리어: אַבְרָהָם, 아랍어: إبراهيم 이브라힘[*] BC 2166?~BC 1991?[1])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은 모두 그를 선조로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고, 유대교에서는 육신적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으로도 불린다.[2] 이슬람교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슬람을 창시한 이슬람 신앙의 최초의 인물로 간주한다.[3]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신앙의 큰 초석을 놓은 인물로 종교적으로 무척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이름의 의미 [ 편집 ]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인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다. 그 뜻은 ‘열국(列國)의 아버지(창세기 17:4~5)’이다. 원래 이름은 아브람(Abram – 뜻: 큰 아버지)이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브라함으로 개명한다.(창세기 17:5[4])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이야기 [ 편집 ]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11장에서부터 50장까지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 손자 야곱, 증손자 요셉까지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믿음의 조상이 된 사연 [ 편집 ]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아브라함. 요제프 몰나르. 1850.
아브람(당시의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버지인 데라의 집인 갈대아(칼데아) 우르를 떠나 약 909Km가량 떨어진 가나안으로 가게 된다.[5][6] 이 시절은 청동기 시대였고, 부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부족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부족의 멸족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이동한 곳에서 농지를 새로 개척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여기고 믿음대로 진행한 것이다.[7]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
100세가 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아들 이삭을 얻게 된다. 100세에 낳은 귀한 아들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서 고민 없이 바로 하나님께 바치려고까지 하는 것을 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만족하시고, 그로 인하여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이로 인하여 성경에 믿음의 조상으로 칭함을 받게 되었다.[8]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부활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히브리서 11:17~19)[9][10][11]
롯과 분가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 [ 편집 ]
재산이 풍족하고 일꾼들도 많아서 조카인 롯과 같이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아브라함이 롯에게 분가를 제안하고, 원하는 땅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롯은 소돔 쪽으로 이사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의 번영에 대한 축복을 받는다.[12]
잡혀간 롯의 구출과 십일조 [ 편집 ]
롯이 거주하던 소돔 지역의 왕은 그돌라오멜에 충성하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그돌라오멜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소돔과 고모라 등지를 쳐서 재물을 노획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중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사병 318명을 동원하여 롯을 구출하고, 소돔 왕의 빼앗긴 재물들도 모두 가지고 왔고, 이외 전리품들도 획득했다. 아브라함은 뺏은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려서 성경에서 등장하는 첫 십일조의 주인공이 되었다.[13]
하나님을 손님으로 영접하여 받은 축복 [ 편집 ]
아브라함은 손님으로 하나님을 맞는 축복을 받게 된다. 주거지인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의 텐트 앞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세 명의 행인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그 행인들 앞에 엎드려서 꼭 쉬고 가시라고 영접한다. 나무 그늘 아래 쉴 곳을 마련하고 쉴 수 있도록 준비한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고 떡을 만들고 발을 씻기고 대접을 잘 하였다.[14] 그분이 바로 하나님과 천사들이었다.(창 18:1) 이후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였고, 사라도 경수가 끊어졌고, 늙어서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사라는 장막 뒤에서 자녀를 생산하는 기쁨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라가 웃는 이유를 물어 보셨다. 사라가 웃지 않았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웃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식사를 마치시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며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결과 이삭이 태어났다.(창 21:1~3) 이 사건을 빗대어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라고 기록하였다.
아내 사라의 미모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 [ 편집 ]
이집트 왕에게 바쳐짐 [ 편집 ]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미모가 뛰어나서 아브라함이 위기 의식을 느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 이집트 왕이 사라를 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여 사라를 이집트 왕에게 바치고 재물을 얻는다. 그 이후 하나님의 재앙을 받은 이집트 왕은 둘이 부부 관계인 것을 알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재물과 함께 돌려보낸다.(창 12:15~20)[15]
아비멜렉 왕에게 바쳐짐 [ 편집 ]
소돔과 고모라 사건 이후 남방 그랄로 내려간 아브라함은 그랄 땅의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바친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아브라함과 사라가 부부인 것을 알고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고, 재물도 함께 주었다.(창 20장)
아브라함 상속자 선정의 문제 [ 편집 ]
아브라함은 풍부한 금은(창 13:22)과 삼백이 넘는 가신(창 14:14)을 거느린 부자였다.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는 올바른 상속자를 세워 재산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상속자를 구체적으로 지목한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가 유일하다.
이스마엘 탄생 시점 [ 편집 ]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탄생하기 전, 자식이 없었을 때 가신 중의 하나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내정하고 있었다.(창 15:2~3)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후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출산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스마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상속자로 생각하게 되었다.(창 17:18)
이삭 탄생 시점 [ 편집 ]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본처인 사라를 통해서 자녀를 생산할 것을 약속하시고, 100세에 이삭이 탄생하게 된다.(창 21:5) 이삭이 젖 떼는 잔치를 베푸는 날에 이삭을 괴롭히던 이스마엘은 그 어미와 함께 쫓겨나게 되고, 이삭이 상속자로 완전히 굳어지게 된다.(창 21장)
아브라함의 가족 관계 [ 편집 ]
노아의 10대손인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 밑에서 태어나 3명의 부인을 거느렸다. 본처인 사라,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 첩으로 맞은 그두라이다. 자녀는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 사라의 소생 이삭을 비롯해 그두라의 소생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이다.[16] 총 8명의 아들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 아들은 이스마엘이고, 둘째가 이삭이지만,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어 대부분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 외에도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에게도 재산을 주어 동방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창세기 25:5~6)[17]
가계도 [ 편집 ]
신약에서 아브라함 이야기 [ 편집 ]
신약성경에도 아브라함이 74회나 언급될 만큼 아브라함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중요한 인물에 속한다.[20]
하나님을 표상하는 인물 아브라함 [ 편집 ]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한 대목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표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22][23]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구원받는 백성들로 표상됨 [ 편집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갈라디아서 3:26~29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유업을 받고 복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구원의 요건인 믿음의 표본 [ 편집 ]
그리스도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종교이다. 믿음의 표본인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로 인한 그 행위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갈라디아서 3:9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 요한복음 8:39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야고보서 2:21
각 종교에서의 아브라함 [ 편집 ]
유대교 [ 편집 ]
유대교에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아비누”(אברהם אבינו –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불리며, 생물학적인 조상인 동시에 유대교의 조상으로 인정된다.[24]
하나님과 이름을 같이 나열할 수 있는 세 명(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에 한 명으로 하나님과 무척 깊은 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이슬람교 [ 편집 ]
이슬람에서 아브라함은 ‘이브라힘’으로 불린다. 아브라함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무함마드로 끝나는 선지자 계열에 중요한 연결자로 인식한다.[25] 꾸란(코란)에 등장하는 인물 중 모세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빈도를 기록하고 있다.[26]
그리스도교 [ 편집 ]
그리스도교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표상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27]
같이 보기 [ 편집 ]
[성경인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10)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창 17:1-2)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엷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의 침묵을 깨고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능하신 분’으로 소개하시면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13년의 공백과 ‘완전하라’는 말씀이 책망으로 보이고 저도 그렇게 보아왔습니다만, 아삽이 깨달았던 것처럼 자신의 우매무지하기가 짐승 같음을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시 73:22).
말씀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놓치고 곡해하는 것이기에 성경의 신중하고 정확한 해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를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길러내셨기에 참으로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한 분으로 소개하시기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능하심을 들고 나오시는 이유는, 이 전능하심이 전제(前提)되지 않고는 지금부터 하는 말씀이 성립되지 않을 뿐더러 아브람이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이며,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아브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신 것도 여기가 처음입니다. 물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이는 관계를 맺기 위함이고,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로는 땅과 후손을 주시겠다는 일방적인 약속만 해오셨지 아무것도 요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또 15장에서 ‘두려워 말라’(1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인격적 교제의 필요성 때문이었고, ‘너는 정녕히 알라’(13절)는 말씀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8절)라는 아브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아브람에게 일방적으로 약속도 하시고 보살피시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시며 상급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15:6). ‘의(義)로 여기셨다’는 말씀은 부족하지만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는 뜻으로, 언젠가는 완전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여겨주시는 수준을 넘어서 완전한 자로 서기를 기대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하심을 내세우면서 아브람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바로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엷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편무계약)이셨지만, 지금부터는 아브람이 언약 당사자가 되어 하나님의 맞은편에 서야 한다(쌍무계약)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행하는 자리에 서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며, 이어서 나오는 할례가 바로 아브라함이 언약 당사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의식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 하라’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3~8)
하나님께서는 ‘큰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이란 이름을 ‘많은 무리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면서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의 생애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의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부르신 후에 24년을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신 지금 그 이름을 바꾸시면서 언약의 당사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제까지의 ‘땅과 후손’에 대한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땅의 티끌 같고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번성하리라는 추상적인 그림 언어로 보여주셨던 것을 지금은 나라와 왕들이 너로 인하여 일어서리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새롭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구체화하여 마침내는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아브람을 부르셨고, 아브람은 말씀을 좇아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애굽의 곤경에서 구해주셨고, 때때로 나타나 격려해주셨고,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을 구해내도록 도우셨으며, 아브람은 그때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15장에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시면서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으리라’는 말씀을 아브람이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전에는 일방적인 관계였기에 문제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여호와를 믿은 아브람을 의롭다 하셨으니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분명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왜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실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의 하나님이요, 아브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아브람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지 그렇게 끝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단을 쌓지만 그러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아브람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믿고 칭의 단계까지 왔지만, 아직도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하고 그의 믿어지지 않는 약속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자리에 서는 날, 비로소 여호와는 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영원한 이름이요 표호’(출 3:15)라고 하시지만, 이들이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믿은 이후부터 이 호칭을 쓰시지 그 이전에는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이후에 함축적으로(창 22:12~18), 이삭은 정식으로 야곱을 축복한 이후(창 28:13)에, 그리고 야곱은 베냐민을 내려놓은 이후(창 43:13~14)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을 보신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 자식의 관계가 성립되고, 부모는 그 자식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누립니다. 그렇지만 그 기쁨과 만족은 자녀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미래를 배제한 지금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만일 아이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면 큰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같은 심정인 것입니다. 아브람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만, 그 모습으로 멈춘 아브람이 아니라, 성장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의 조상의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시는 것이고, 이삭을 향하여 칼을 빼든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시면서 만족해하신 것이며, 이제까지 반복하셨던 약속을 맹세로 굳게 하시며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창 22:9~18). 즉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그 약속을 완전히 믿고 이삭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에, 나도 너의 하나님이 되어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반복된 모든 약속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리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모두 유효한 것입니다.
‘할례를 받으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언약 의식입니다. 집에서 낳은 자는 8일 만에 할례를 하고, 사온 사람도 할례를 하라고 하십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간주해 죽인다고 하십니다. 참 무서운 언약 의식입니다.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면서 맺는 언약 의식과 다를 것이 없으며(창 15장, 렘 34장) 일방적인 편무계약인 것까지도 같습니다. 할례를 받는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언약의 내용을 이행하여야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놓쳐선 안 될 것입니다.
남자의 은밀한 곳에 할례를 하게 하신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에 하는 언약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살에 생긴 흔적은 지울 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기 때문에 영원한 언약이라는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둘째는 믿음은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한 내면의 세계이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 표’를 하며, 이 언약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생식기에 표’를, 그리고 믿음은 수시로 확증할 필요가 있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기에 ‘자주 보는 곳에 표’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고후 13:5).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런데 할례를 왜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라고 하시지만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일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혼자 행하실 일들이지 아브람이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번제를 드리라든가 십일조를 바치라든가 또는 안식일을 지키라든가 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왜 할례를 하라고 하셨는지가 불분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찬찬히 되짚어보면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 외에는 달리 요구하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완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제로 요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하면서 지켜야 하는 언약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정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시면서 이제까지와 달리 계약 당사자로 설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셨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근거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고 하셨고 할례를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온 것(12장)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15장)이고, 세 번째가 이름을 바꾸고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할례를 받는 것(17장)이고, 네 번째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향해 칼을 빼드는 것(22장)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하여 칼을 빼든 것은 바로 할례를 행한 언약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은 ‘여호와 앞에 완전하게 행한’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설교문]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창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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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창17:5)
● 명제 : 아브람은 거듭나기 전의 사생애 기간이고 아브라함은 거듭난 후의 공생애 기간을 의미한다.
● 목적 : 우리도 아브람과 같은 사생애의 기간과 아브라함과 같은 공생애의 기간이 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민족의 아버지이며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도 많은 믿음에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어주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안에는 있었지만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사생애를 의미하는 기간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온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온전한 구원을 받은 상태를 말하는 공생애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는 들어왔지만 율법의 행위에 빠져있는 사생애 기간의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모르면서 자신의 의에 빠져 열심을 내는 신앙의 기간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깨닫고 하늘로부터 거듭나는 아브라함과 같은 공생애 기간의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가 온전한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신앙의 정체성이 바뀐 것을 말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때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얻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현재 내가 아브람과 같은 사생애 기간의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니면 아브라함과 같은 공생애 기간의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에 있을 때의 신앙생활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횃불 언약 아래에 있었습니다.
창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아들이 없어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몸에서 나올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드렸습니다. 해가 지고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횃불을 통해서 언약하셨음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창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횃불이 고기 사이로 지나가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너의 자손에게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언약’ (ברית베리트 1285) 언약, 계약, 협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횃불을 통해서 아브람에게 후손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언약하시면서 계약서를 쓰듯이 계약과 협정서를 각각 나누어 가진 것을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간 것은 확실한 언약을 의미하며 둘 중에 하나가 계약을 파기하면 그 사람도 쪼개진 고기처럼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횃불 언약은 하나님이 지나가셨기 때문에 확실히 언약을 지키겠다는 다짐입니다.
(ברית베리트)라는 단어가 70인 역에는 (διαθηκη디아데케 1242) 언약. 유언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횃불 언약 아래에 있다는 것은 유언장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아직 자신의 것으로 땅을 소유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언약함으로 유언장을 써주셨습니다. 횃불 언약에 있는 사람들은 현재 상속을 받지 못하고 유언만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히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유원한 자가 죽어야 만이 상속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횃불 언약에만 있다면 구원을 유언으로만 받아 놓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상태의 신앙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땅을 상속받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유언한 자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에 유언장만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히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유효하고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습니다. 아브람과 같이 사생애 기간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천국을 언약받았는데 유언으로만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는데 아직도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을 때 유언장은 바로 효력을 발휘하여 천국을 내 것으로 상속받게 됩니다.
둘째, 아브람은 이스마엘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창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게 됩니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원하는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의 생각에 어쨌든 엘리에셀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자신의 씨에서 나왔으니 상속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생애 기간에 있는 신앙생활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율법적인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낳으매’ (ילד얄라드 3205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아브람과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많은 산고를 겪어서 이스마엘을 탄생시켰습니다. 그 아들은 아브람과 동침하여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생애 기간의 신앙생활은 자신의 능동적 행동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70인 역은 (τικτω틱토 5088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 낳다, 해산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으로 있을 동안에 낳은 아들은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육적 아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직설법은 실제로 육적 아들을 자신의 힘으로 낳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아브람과 같이 사생애 기간에 있을 때에 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육적 아들만 낳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삶은 하는 행동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만 짓는 행동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도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탄생이 되는데 마리아가 아들을 낳는데 예수라고 이름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낳으리니’라는 단어가 (τικτω틱토)입니다. 주님도 사생애의 육체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상속자를 주시겠다고 아브람에게 약속하셨지만 유언으로만 받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급하게 상속자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사래의 종인 하갈과 동침을 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사생애 기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만 하는 행동 자체는 하나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행동을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믿음이 유언받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유언한 자가 죽은 것을 믿지 못하니 결국 이스마엘만 낳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신앙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던 때가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입니다. 그 이후로 13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지 않고 자신의 정욕대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주의자들이 언약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유언장만 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상속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신앙은 아직도 원죄 가운데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할례 언약 아래에 있었습니다.
창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를 받으라’ (מול물 4135 동사, 닢알, 부정사절대형) 잘라내다, 할례를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나타나지 않다가 99세에 나타나셔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의 포피를 잘라내어 언약의 증표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닢알형은 할례를 받는데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 포피를 반드시 잘라내야 함을 말합니다. 부정사절대형은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포피를 잘라낼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포피를 잘라내야 합니다.
70인 역은 (περιτεμνω페리템노 4059) 할례를 행하다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περι페리 4012) ~을 위하여라는 뜻과 (τεμνω템노) 자르다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이 할례를 아브라함에게 받으라고 한 것은 너 자신을 위하여 할례를 행하여 포피를 자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할례는 아무나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자가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에 있을 때는 이스마엘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에게 할례를 행하였을 때는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주신 후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사생애 기간이기 때문에 할례 언약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할례 언약을 받으면 자신의 몸에 영원한 구원의 증표가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횃불 언약 아래에 있을 때는 구원에 대한 증표가 없습니다. 그럼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나서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할례가 없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도 아니고 천국도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골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아브라함의 공생애 기간에 들어온 사람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습니다.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아직도 아브람의 사생애 기간에 있다면 율법의 할례를 육체에 받음으로 천국을 유언으로만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나면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영원한 구원의 증표를 소유하여 천국을 상속받게 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사생애 기간에는 육적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생애 기간에는 영적 할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할례 언약을 받은 자들은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히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유언이 유효해졌습니다. 구약에서는 유언만 했지만 신약에서는 유언하신 분이 죽었기 때문에 내 것으로 상속되었습니다. 내 것으로 명의가 되었기 때문에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천국이 바로 나에게 상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만천하에 선포해야 합니다. 율법에 빠진 사람들은 아직도 아브람과 같이 사생애 기간을 살면서 유언만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교회에서 천국을 유언만 받고 있다면 평생 유언으로 끝나고 상속받지 못합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창21: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 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 하여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이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이삭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창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이 공생애 기간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이삭과 같은 생명을 허락해 주십니다. 사래도 사라가 되었을 때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낳은’ (ילד얄라드 3205 관사. 동사, 닢알,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뜻입니다. 사라도 사래의 사생애 기간에 있을 동안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하나님이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공생애 기간에 있을 때 생명을 낳게 되었습니다. 관사는 그 아들 이삭을 낳았다는 의미입니다. 닢알형은 사생애 기간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칼형으로 자신의 의지로 낳은 아들이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의지로 허락하여 낳은 아들을 의미합니다. 완료 시제는 사래의 사생애 기간에 있을 때는 전혀 주시지 않다가 사라의 공생애 기간에 있을 때 이삭을 온전하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남성은 사라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아들을 허락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70인 역은 (γινομαι기노마이 1096) 생겨나다, 일어나다, 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생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니 기적 같은 일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사래가 하나님이 나타나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주시니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신앙을 하는 자들은 어떤 신앙을 가지게 될까요?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전에는 아브람처럼 사생애의 신앙생활을 하던 자들이 하늘로부터 거듭난 후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됨으로 이삭과 같은 생명을 낳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가까워졌느니라’라는 단어가 (γινομαι기노마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생명을 얻는 기적이 나타난 것처럼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삭과 같은 영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허락한 온전한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무엇을 행하였습니까?
창21: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팔 일 만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증표를 만들었습니다. 하늘로부터 거듭난 사람들도 이삭처럼 구원의 증표인 그리스도의 할례가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구원의 증표인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럼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이름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이 99세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이제는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אברם아브람 87)입니다.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אברהם아브라함 85)입니다.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단어 중에 특이한 것은 (ה헤)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숨구멍이라는 상형에서 온 알파벳입니다. 아브람의 사생애 기간에는 숨구멍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숨구멍을 열어주시니 아브라함의 공생애 기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아브람처럼 아직도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유언으로만 받고 있는 상태입니까?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에는 지옥의 심판을 받는 신앙입니까? 이렇게 평생을 신앙생활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마엘만 낳는 신앙만 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무리의 아버지가 됩니다. 언약된 백성인 이삭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숨구멍을 열어주어 하늘로부터 거듭난 공생애의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원죄에서 숨구멍이 열리니 이삭과 같은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을 낳게 됩니다. 거듭난 후에 하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주님께만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신앙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 구원의 증표를 평생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람으로 있을 때는 구원의 증표인 할례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아브람의 죽어있는 사생애의 신앙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생명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을 하는 공생애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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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아브라함과 사라의 개명, 할례 언약
아브라함 99세, 사라 89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이후 13년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고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아니 엘 샤다이’로, 이것은 ‘네가 지금까지 믿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한 번 약속한 것은 아무리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이루는 존재’임을 아브라함에게 상기시킨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개명(改名)을 명하신 후, 할례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창 17:9-14). 본래 이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으로 개명되었습니다(창 17:5).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으로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며,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공적(公的)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장차 아브라함이 혈통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될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롬 4:16, 갈 3:7, 29).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할례’(circumcision)는 히브리어로 ‘물로트’, 헬라어로 ‘페리토메’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가 난 지 8일 만에 생식기 끝의 껍질을 베어 내는 예식입니다(창 17:12, 레 12:3, 눅 2:21).
창세기 17:10에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이자(창 17:14), 언약을 준수하겠다는 표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서(창 17:11), 언약의 징표가 몸에 흔적으로 남아 있어 항상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하도록 하신 중대한 예식입니다(창 17:13).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개명과 할례를 명령하신 후에, 바로 사라의 이름을 개명하시고 아들이 생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 17:16). 아브라함의 아내는 본래의 이름 ‘사래’에서 ‘사라’로 개명되었습니다(창 17:15-16). ‘사래’는 ‘여주인, 나의 공주’라는 뜻으로, 단순히 한 가정의 여주인이라는 의미이지만,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의 공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사라가 낳은 이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예시하신 것입니다(갈 4:26, 31).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할례 언약을 통하여 자손을 약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아들이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창 17:17-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 17:19)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할 자가 아니고 이삭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자라는 것을 확실히 선포하셨습니다.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도 열두 방백을 낳아 큰 나라가 되게 할 것이지만,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7:20-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습니다(창 17:22).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날, 아브라함은 곧바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할례를 시행하였습니다. “당일에” 아브라함 자신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집에서 생장한 자와 이방 사람에게서 사 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습니다(창 17:23-27).
박윤식 목사, “잊어버렸던 만남” (휘선, 2016), 111-113쪽 中
Abram and Sarai Renamed (Gen 17:5, 15-16);
The Covenant of Circumcision (Gen 17:9-14), 2067 BC, Fifteenth Year of the Covenant of the Torch
Abraham’s age, 99; Sarah’s age, 89
God kept His silence and did not appear to Abraham for 13 years after Abraham became Ishmael’s father at the age of 86. This can be understood as God’s response to Abraham’s unbelief.
At last, when Abraham was 99 years old, God appeared to him and proclaimed, “I m God Almighty” (Gen 17:1), ani- el sadday in Hebrew. This was a reminder that God would still fulfill His promise although Abraham did not believe, even in the most improbable circumstances.
God Almighty appeared to Abraham when he was 99 years old and gave him a new name before entering into the covenant of circumcision (Gen 17:9-14). God changed his name from Abram to Abraham, which means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Gen 17:5). The name Abram has a meaning of “exalted father” with a nattow significance of an individual father. However, the name Abraham, which means “father of a multitude of nations,” is more embracing and universal. This foreshadows how Abraham will become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in Jesus Christ without regard to their blood lineage (Rom 4:16; Gal 3:7, 29).
Then, God commanded the covenant of circumcision to Abraham. The word circumcision is mula in Hebrew and peritome in Greek. It refers to the Israelite practice of cutting off a male child’s foreskin eight days after birth (Gen 17:12; Lev 12:3; Luke 2:21).
In Genesis 17:10 God commanded, “This is My covenant, which you shall keep, between Me and you and your descendants after you: every male among you shall be circumcised.” Thus, circumcision was a sign of becoming God’s people (Gen 17:14) and their promise that they would adhere to the covenant. As proof of the covenant between God and the Israelites (Gen 17:11), the physical mark on the flesh was to serve as a constant reminder of the everlasting covenant with God (Gen 17:13).
After God renamed Abraham and instituted the covenant of circumcision, He renamed Sarai and said that she would have a son (Gen 17:16). Abraham’s wife, whose original name was Sarai, was given a new name sarah (Gen 17:15-16). The name Sarai means “a woman of high rank” or “my princess,” which pertained only to herself. However, the name sarah, which means “mother of nations,” is more embracing of others. This act of renaming Sarai also foreshows God’s redemptive plan to have Jesus Christ come in the line of Isaac, who will be born of Sarah, and that there will be many nations which will come to believe in Jesus Christ (Gal 4:26).
Although God Himself gave Abraham the promise of descendants through the covenant of circumcision, Abraham did not believe that he could have a son, and he confessed his wish for Ishmael to live before God (Gen 17:17-18). However, God clearly said, “No, but Sarah your wife shall bear you a son, and you shall call his name Isaac; and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him for an everlasting covenant for his descendants after him” (Gen 17:19). He reconfirmed that He would fulfill His covenant only through Isaac and not through Ishmael.
새 이름 새 인생(1) :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창..
새이름 새인생(1) :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창 17:1~16)
이름을 바꾼 사람들
부모가 자식을 낳아 이름을 지어줄 때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짓습니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 이름을 함부로 짓겠습니까? 저도 성도들 자녀 이름을 몇 번 지어본 일이 있습니다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름 뜻도 좋아야하고 부르기도 쉬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어떨 때는 뜻은 좋은데 부르기가 너무 어렵고, 어떨 때는 이름은 참 좋은데 성과 붙여 읽으면 아주 어색한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을 쓰고 심혈을 기울여 이름을 짓건만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상한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사자는 자기 마음에도 들지 않는 이름을 부모님이 지어주었다고 해서 평생 안고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법이 까다로워서 자기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도 바꾸기가 쉽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는 법이 바뀌어 누구든지 법원에 서류를 제출하면 개명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개명신청에 올라온 이름들을 보면 참 희한한 이름도 많습니다. 딸만 많이 낳아서 이젠 딸은 끝이라는 뜻으로 끝순이, 말자, 말순이 등으로 이름을 지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 형수님 이름도 ‘말희’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들을 간절히 원한다며 딸 이름을 원할 원(願) 사내 남(男) 자를 써서 ‘원남이’라고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도 이제 언제든지 이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심지어 누가 들어도 웃음이 나올만한 이름도 있습니다. 나죽자, 김치국, 임신중, 김창녀, 노숙자, 김광녀 등등 이름 뜻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성과 붙여 읽으면 영락없이 놀림감이 될 만한 이름들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야 이런 이름을 들으면 웃고 지나가거나 놀림감으로 삼곤 하지만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평생 이런 이름을 갖고 살며 받은 그 아픔과 설움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법이 바뀌어 이런 분들이 이름을 바꿀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실제 이런 분들 중에 개명신청이 받아들여져 바뀐 이름을 들고는 한 바탕 목 놓아 우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름 때문에 얼마나 한이 맺혀서 그렇겠습니까? 단순히 이름 하나 바꾼 정도가 아니라 이름을 바꿈으로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이 열리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유는 다르지만 이름을 바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자기 맘대로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또 이름 때문에 한이 맺혀서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주체나 까닭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같습니다. 앞에 설명한 이름에 한이 맺힌 분들이나 성경에서 이름을 바꾼 분들이나 모두가 이름을 바꿈으로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이름 몇 글자 바꾸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생의 목적이 바뀌고, 살아갈 이유가 바뀌는 한바탕 천지개벽한 일이 일어나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에서 이름 바뀐 분들은 누가 있습니까? 오늘 함께 살펴보겠지만 구약에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바뀐 경우가 나오고,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 경우도 나오지요. 신약으로 넘어가면 바요나 시몬이 베드로로 바뀝니다. 사울은 바울로 바뀝니다. 앞으로 다섯 주 동안 이 이름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분들이 왜 이름을 바꾸게 되었는지, 누가 바꾸도록 시켰는지, 바뀐 이름의 뜻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알아보다 보면 우리는 아주 큰 신앙의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다섯 주 중에서 첫 번째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격과 삶이 바뀌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이 약속을 믿고 정든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요. 이때가 그의 나이 칠십 오세 때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창세기 17장에 가면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가 되었을 때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뀐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단순히 이름 석 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본질 전체를 일컫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그 이름 속에 “너는 자라서 꼭 이런 사람이 되어라” 하는 뜻을 담아 짓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이름에는 저마다 이런 소망을 담은 깊은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 글자를 바꾸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지고, 삶의 목적과 존재이유가 달라진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이란 ‘높으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옛 사람들은 주로 한 집안이 다 모여 사는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한 집에 보통 3~4대가 다 함께 모여 살았지요. 그래서 그 대가족에는 반드시 가장 높은 어르신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일 뿐 아니라 그 대가족 전체를 이끌어가는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아브람’이란 바로 이 대가족 혹은 씨족 전체의 아버지, 대표자를 뜻하는 말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 집안의 가장’이요 ‘우리 집안의 가장 큰 어르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브람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는데 ‘아브라함’이란 오늘 본문 5절에도 나온 것처럼 ‘여러 민족의 아버지’ 또는 우리가 예전에 보던 개역성경에 나온 것처럼 ‘열국(列國)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것은 그를 한 집안의 아버지요 가장 수준에서 여러 민족, 모든 나라의 조상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이름을 바꿈으로 그의 삶은 한 가정을 잘 꾸리고, 우리 집안을 잘 살게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의 조상이 되고, 모든 민족을 잘되게 하는 엄청난 수준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삶의 수준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 것이지요.
복의 영향력이 넓어지다
둘째, 이렇게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은 또한 그의 지경이 넓어지고 영향력이 넓어진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역대상 4장에 보면 그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가 나오는데 야베스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 백성이나 택하신 사람에게 복을 주실 때 어떤 복을 주로 주시느냐? 그의 지경을 넓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경이란 본디 땅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차지한 땅을 더 넓혀주신다는 뜻이지요. 이 말을 들으면 복부인이나 부동산 투기하는 분들은 좋아하실 겁니다만 죄송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정말 땅을 넓혀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향력’을 넓혀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영향력이냐? 바로 ‘복의 영향력’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2절에 나오는 ‘복’을 옛날 우리가 보던 개역성경에는 ‘복의 근원’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전에는 아브람이 끼칠 수 있는 복의 지경, 복의 영향력이 고작 우리 가정, 우리 집안 정도였습니다. 그 이름 뜻처럼 아브람은 우리 집안만 복 받고 잘 살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다릅니다. 우리 집안만 아니라 열국, 모든 민족이 나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는 ‘복의 근원’야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 한 사람 때문에 내 후손 모두가 복을 받고, 모든 민족이 복을 받고, 내 주변 모든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의 영향력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나만 복 받고, 내 집안과 식구만 잘 살고 잘 먹으면 그만이었지만, 예수 믿고 내 삶의 변화된 후에는 복의 지경과 영향력이 엄청나게 넓어져서 나 한 사람 때문에 온 집안이 복을 받고, 교회가 복을 받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좋은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옵소서. 내 자녀가 자기만 출세하고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복의 지경과 영향력이 넓어져서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복 받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말입니다.
이름만 아니라 삶이 바뀌다
셋째, 하나님은 왜 처음에 아브람을 부르실 때부터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지 않으신 것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기왕 바꾸실 것이라면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에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며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약속하실 때 이름을 바꾸시는 것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이름을 바꾸지 않고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은 후 17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름을 바꾸게 하셨는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12장과 이름을 바꾸게 하신 17장 사이에 24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우선 아브람은 두 번이나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는데 아내 사래가 얼굴이 예쁘니까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해칠까봐 누이라고 속였다가 결국 바로에게 빼앗길 뻔하지 않습니까? 같은 남자로서도 참 창피한 일입니다. 자기 살겠다고 아내를 팔아넘기다니 얼마나 치사합니까? 아마 이 사건 이후로 아브람은 아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분명히 아들과 수많은 자손을 주시마 약속하셨는데도 그것을 못 기다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후손을 얻으려고 합니다. 아내의 여종인 하갈이라는 애굽 여인을 취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지 않습니까? 이 두 번의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아브람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 앞에서나 아내 앞에서 고개를 못 드는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부끄러운 실수만 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아주 의젓하고 믿음의 조상다운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조카 롯과 함께 살다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얼마든지 이 삼촌이 어른이니까 살 땅을 먼저 선택하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조카에게 우선권을 주고 의젓하게 양보를 합니다. 또 이방 왕들에게 포로로 끌려간 조카를 구하기 위해 집에서 훈련한 삼백 십 팔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쫒아가 구해오다가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기까지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아들과 많은 자손을 약속받을 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귀한 믿음까지 드러내게 됩니다. 이 24년 동안 어쩌면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았을까요? 그야말로 아브람은 한편으로는 의젓한 인격과 아름다운 믿음으로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그 다음엔 인간적인 실수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을 벌려 땅에 떨어지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겪게 하신 후에 그 이름을 바꾸신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름을 바꾸게 하시지 않고 실수도 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 실수를 극복하게도 하시면서 차근차근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름만 바꾼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 이름을 영화배우 장동건으로 바꾼다고 해서 제가 잘 갑자기 생겨집니까? 여러분 이름을 재벌총수 이건희라고 바꾼다고 해서 제가 갑자기 부자가 됩니까? 그건 아니지요? 이름 세 글자 바꾼다고 해서 제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이름 바꾼다고 해서 신앙이 갑자기 좋아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난 후 자기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바꾸는 분도 있습니다. 다윗이라고 바꾸기도 하고 바울이라고 바꾸기도 합니다. 물론 나도 다윗처럼 바울처럼 하나님 잘 믿고 싶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름만 바꾼다고 해서 정말 우리 신앙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름 세 글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바뀐 이름에 걸맞게 우리가 정말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게 하지 않고 이런 우여곡절을 다 겪게 하시고, 실수도 하고 또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게도 하시고, 또 실수하고, 다시 극복하고 하게 하시면서 아브람의 믿음을 점점 더 연단시키고 훈련시켜 정말 아브라함, 많은 민족 열국의 아버지요 믿음의 조상답게 바꾸어 가신 후에 구십 구세에 비로소 그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름이 바뀌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이름에 걸맞은 믿음과 인격을 갖추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한 집안의 아버지요 가장인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버지요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이 되려면 그에 걸맞은 인격과 믿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정말 우리의 지경이 넓어지고, 영향력이 커지고, 나 한 사람과 내 집안만 복을 받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일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변하고 내가 자격을 갖추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내가 안변하고 내가 자격도 못 갖추고서 이런 큰 복을 받고 능력을 갖기 원하는 것은 이름 세 글자만 바꾸고 하루아침에 잘생긴 영화배우나 재벌이 되기 원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저와 우리 성도들 모두가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거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지경을 넓히고 영향력을 넓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에서 이런 사람이 많이 나와야 내 가정이 변하고, 우리 교회가 변하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이 변하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믿음이 더 커져야 합니다. 인격이 변하고 삶의 목적과 이유가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뿐 아니라 우리의 전 인격과 신앙이 변하고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갈 수 있는 법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사래에서 사라로
이제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사라로 이름이 바뀐 이유를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셨을 뿐 아니라 그 아내 사래 또한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16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이 한 집안의 아버지라는 뜻인 것처럼 사래 또한 한 집안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의 이름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것처럼 아내 또한 ‘여러 민족의 어머니, 열국의 어미’라는 뜻을 가진 ‘사라’로 바뀌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앞서 우리가 이름을 바꾸려면 믿음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고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한다고 했는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바뀌려면 부부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가정이 바뀌고 삶이 바뀝니다. 그만큼 부부가 중요하고 가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분명 부부를 하나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육체적으로만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생각이 하나가 되고, 가치관이 하나가 되고, 비전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생각과 가치관과 비전이 하나 되지 못하고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면 진정한 부부가 아니요 그 부부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편 아브라함만 이름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아내인 사라 또한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남편이 한 집안의 가장 수준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열국의 아버지요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아내 또한 한 집안의 어머니 수준이 아니라 열국의 어머니요 믿음의 조상이며 복의 근원이 되어야 비로소 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이미 결혼한 분들과 앞으로 결혼할 분들은 다 명심하세요. 먼저 내 신앙이 자라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나만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남편이나 아내도 같은 수준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안 믿은 남편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저 사람 예수 믿게 해주세요” 수준으로 기도하지 말고 아예 “하나님, 저 남편이 아브라함 수준으로 믿게 하시고 저는 사라 수준으로 믿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부가 함께 변하고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그리고 자녀와 온 가정이 함께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위대한 믿음의 가정으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여러분 모두의 가정이, 배우자와 자녀가 기왕 예수 믿었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처럼 위대한 신앙인이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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