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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4. 16 [하루 한 장]“내 손에 있느니라” (렘18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2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예레미야 18장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손길을 알게 하십니다
토기장이가 녹로를 돌리면서
진흙의 모양새를 잡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빚어가시는
섬세한 손길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진흙덩어리가
중간에 문제가 생기고 깨지면
토기장이는 포기하기 않고
다시 자신의 더 나은 생각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길을 계속 가면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우리에게 쓰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회개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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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수) \”예레미야 18:1-23\” / 작성: 백정수

본문 예레미야 18:1-23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일하시는 하나님(1-10) 유다 백성에 대한 죄와 심판에 관하여 지적하던 예레미야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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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3/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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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예레미야 18장 – 묵상과 기도

설교제목: 너희가 다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찬송가: 400장 험한 시험 물 속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18장 말씀은 모든 자연만물을 운행하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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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sumchurch.sg

Date Published: 6/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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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예배 설교 – 예레미야 18장 1-12절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장 1-12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당신의 주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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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torybible.kr

Date Published: 2/4/2021

View: 7852

08-06-2017 – 토기장이를 토기장이되게 하는 삶 [예레미야 18:1-6]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자 원하시는 가장 좋은 걸작품으로 제작되는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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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kumc.org

Date Published: 7/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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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목사 설교] 주는 토기장이 – 크리스천투데이

[예레미야 18장 1-6절].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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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4/4/2021

View: 5956

예레미야 18장.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

[렘 18장]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지만, 수없이 많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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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unmill.tistory.com

Date Published: 12/4/2022

View: 3256

토기장이 비유 (예레미야18장1절-12절) – Daum 블로그

설교엔 복음이 빠져있고 하나님 만족이 아닌 인간 만족만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의 주장 속엔 하나님 주권 사상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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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7/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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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8장 본문 나눔

2021년 2월 11일 예레미야 18장 토기장이 비유 … 예레미야 18,19장은 유다에 대한 12개의 심판 경고 설교 중에서 여덟 번째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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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yusikjung.blogspot.com

Date Published: 7/5/2021

View: 1429

예레미야 18장.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 – 벧샬롬교회

예레미야 18장.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 예레미야 18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4-07-22. 설교본문; 음성설교; 음성다운 · 설교 내용 PDF 다운로드.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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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레미야 18장 설교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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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4.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h7dgg6mAdaM

2019/05/01(수) \”예레미야 18:1-23\” / 작성: 백정수

본문 예레미야 18:1-23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일하시는 하나님(1-10)

유다 백성에 대한 죄와 심판에 관하여 지적하던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1-4)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보았던 광경은 무엇일까요? 3절에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녹로’ 즉 ‘돌림대’를 돌리며, 토기장이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일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일을 마친 것도 아니고, 또 일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가 자신의 일을 집중 있게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항상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처절한 문제들을 보면서 나만 씨름하고, 나만 이를 위해 괴롭고 애쓰는 것 같지만, 나의 하나님, 우리 가정의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모든 것을 위해서 일하시고 있습니다.

4절에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라고 했습니다. 터진다는 것은 히브리어 ‘웨니쉬하트’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토기장이가 자기가 원하는 그릇이 나오지 않을 때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반죽을 하여 그릇을 새롭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자 하나님도, 모든 만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광경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유다 백성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토기장이가 심혈을 기울여 그릇을 빚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조심스레 다루시며, 더 아름답고 온전하게 빚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때론 죄 속에 빠져있거나, 또한 삶의 여러 문제로 아프고 힘들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심령을 어루만지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주십시다. 하나님은 5절부터 10절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5-6)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유다백성이 심판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고 순종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나, 반대로 불순종을 하면 그들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과 개인,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6절에 “너희가 내 손에 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에서 문제의 파도들이 몰아치면, 우리는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다 끝내 그 문제의 파도에 휩쓸리거나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거할 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거할 때,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거하는 사람은 문제의 파도를, 마치 서핑 하듯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문제가 더 이상 나를 주관하지 않게 합니다.

(7-10)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그리고 7절부터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계획한 민족이, 만약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면, 하나님은 그 심판을 중단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반대로 복을 주시기로 계획한 민족이, 만약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기로 약속하신 복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작정하셨다가, 그 심판 대상이 회개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나서에 나오는 니느웨입니다. 타락했던 니느웨에게 멸망의 심판을 작정하셨지만, 요나가 선포하는 심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자, 그들에 대한 심판을 자비롭게 돌이키셨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할 때, 그들에게 약속하신 은혜를 돌이키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은 돌이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이키심의 전제조건은 우리가 온전한 길로 돌아설 때입니다.

돌이킴의 은혜(11-17)

그래서 11절부터 15절에 하나님은 유다백성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11-15)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절은 바로 11절의 후반 절입니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입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를 정의할 때, 일반적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을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회개가 단순히 지은 죄를 생각하고, 감정적으로 눈물 흘리며 뉘우치는 것으로 국한된다면, 이것은 회개가 아닌 단순히 일 뿐입니다. 성경에 말하는 진정한 회개란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나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2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악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죄인지 알면서도 습관적인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결국 죄의 중독에 빠진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나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온 ‘길과 행위’는 바로 ‘태도과 행실’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갈등을 빚는 경우는, 대체로 바르지 못한 ‘태도과 행실’ 때문입니다. 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내 중심적인 태도와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악취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중심이 아니라, 타인중심적인 태도와 행실은 누구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향기며,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길과 행위’라는 것입니다.

(12-17)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는 말에, 유다 백성들은 12절에 ‘이는 헛되니’라고 응답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어리석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헛되다’의 원어 ‘노아쉬’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았을 때, 그들의 미래는 더욱 어두워지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며, 결국 심판을 받아 절망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재확인해줍니다. 기독교 사상가 파스칼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모든 비참함과 불행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쏟는 자(18-23)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고자,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간곡히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기는커녕, 자신들에게 책망만 하는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로 치부하며, 그를 죽이기 위해 구덩이를 파기도 하였습니다. 실로 유다백성은 이렇게 분별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18-20)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동하면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대로 살면 이익보다는 손해를 보거나,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은 어려운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생각하면 신앙을 감당하기 어렵지만, 주님이 주신 소명을 생각하면, 그 길은 분명 은혜의 길이 될 것입니다.

(21-23)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21-23절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모함하는 유다 백성을 고발하며, 그들의 심판을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백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감안 할 때,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기도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레미야는 자신의 연약함에서 빚어진 생각과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고, 이를 하나님께 그대로 토로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사한 기도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지었던 시편 109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오로지 자신을 공격하는 사울에게 악한 말을 퍼부으며 저주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응답은 저주의 대상인 사울이 아니라, 다윗에게 먼저 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답답한 심정이 담긴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분노와 두려움을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만 쏟아놓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분노와 감정을 제거하여 주시고, 비어진 심령에 위로와 은혜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2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결코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는 복수의 칼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사람에게 쏟으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하나님께 쏟으면 은혜로 변화 됩니다. 혹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마음 속 깊숙이 있는 타인에 대한 분노, 미움, 원망 등을 숨기고 선별적으로 기도하지는 않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감정을 아시는 분이고, 우리의 불편한 감정을 하나님께로 쏟아버리길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쏟아놓을 때, 우리가 모든 것을 아뢸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마음을 위로와 은혜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고, 웅크리고 있는 죄악의 칼날들을 없애어, 죄의 지배력에서 벗어나, 은혜의 통치 안에 살아가면서 의의 무기로 가꾸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 도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손으로 저희를 붙잡으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일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하나님의 손 보다는 세상의 손을 잡으려 했으며, 생수의 강인 주님을 저희 마음에 채우기 보다는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는 죄 된 모습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아름다운 태도와 행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혹여나 우리 안에 있는 벗겨야 할 죄악의 감정들이 있다면 주님께로 쏟고, 은혜의 길로 살아가는 변화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이 내 삶에서 깊숙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손이 아닌, 세상의 손에 이끌린 적이 있다면 생각해봅시다.

3. 삶에서 진정한 회개를 위해 돌이켜야 할 부분이 무엇이고, 노력해야 할 태도와 행실은 무엇인가요?

4. 내가 하나님께 쏟아야 할 감정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작성 : 백정수)

[1월 5일] 예레미야 18장

설교제목: 너희가 다 내 손 안에 있느니라

찬송가: 400장 험한 시험 물 속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18장 말씀은 모든 자연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토기장이의 비유가 여기에 등장합니다.

렘 18:1-3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실물로 비유하여 보여주시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인상 깊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려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실생활과 관계 없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항들로써 비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득찬 것들은 모두 다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그의 교재들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 하신 것은, 토기장이의 집이 어떤 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진리를 확신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저 이론으로만 말씀하심보다, 그로 하여금 실제로 가서 견학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보든지, 거기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교재들에 대하여 견학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야 말로 참 교육이고 산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당대의 모든 시대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살길을 보여주고자 토기장이의 집으로 예레미야가 내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알기 원하시는 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인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렘 18: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하나님의 주권은 잘못된 인간을 가지고도 선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잘못된 뜻을 돌이키기 전에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롬 8:28)도 이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십니다.(마 3:9).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은 순전히 그가 선한행위만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연약하고 누추하고 부끄러운 삶의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그를 인도했기 때문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우리의 삶을 막 살아도 된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시고 값을 치루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손에 있어서 인간은 진흙과 같습니다. (욥 10:9, 33:6; 사 29:16, 45:9, 64:7). 그러므로 인간은, 평안할 때에 교만할 필요 없고, 환난 때에도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진흙인 줄만 알고 절대의 겸비와 절대의 신앙을 파수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취할 그의 온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을 다 돕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만족시키려면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은 덜 신경쓰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크신 손으로 우리 개인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분의 크신 손 안에서 다스리십니다. 바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렘 18:5,6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그분의 손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감사의 소식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쓰고 의지를 발동하여 계획하고 실행하는 철두철미한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좌지우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사실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은 한 인생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렘 18:7 내가 어느 민족에게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한 나라와 민족을 뽑아내기도 하시고 부수거나 멸하기도 하시며, 건설하거나 심어지는 것 이것은 한 지도자의 똑똑함이나 선량함으로 무지함과 무능력함으로 인한 것으로 우리가 착각하면 안됩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이고 계획 속에서 모든 인생과 사물과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을 우리는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 순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적인 모습을 하나님께 비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부강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된 것도 한 민족이 게을르거나 자원이 부족하거나 한 모든 것은 물론 표피상의 이유로 분석될 수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이야기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토기장이와 그가 돌리고 있는 녹로 그리고 진흙을 보여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말씀을 통해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우리의 인생, 우리의 자녀, 우리의 일자리, 우리의 집,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나라와 민족은 때로 수치를 경험하기도 축복을 경험하기도, 평안함과 만족감, 불안함과 고단함 등등 여러가지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려고 몸부림 칠 때에는 오히려 그로인하여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많은 선지자와 믿음의 선친들이 그랬듯이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극심한 고난과 어려움 축복과 환희 평안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우리의 감정과 신앙이 기복과 흔들림이 없이 살 수 있을까요? 바로 매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면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만 의지했기에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었고, 하박국 선지자도 아무런 열매도 소출도 없는 척박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예레미야 18장 1-12절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8장 1-12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당신의 주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흔히 어떤 대상에 대해 “내 손안에 있다”고 종종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사람들의 뇌리에 떠오르는 이야기는 손오공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국 명나라 때에 집대성하여 지은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기 전 원숭이들의 왕이던 때에 많은 도술을 익혀 하늘나라를 소란스럽게 하다가 부처님과 도술 내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손오공은 단번에 10만 8천리를 날수 있다는 근두운을 타고 날아가 커다란 기둥 다섯 개가 있는 곳에 이르러 거기다가 “제천대성 여기에 이르다.”라고 쓰고는 오줌을 눈 뒤 되돌아와서는 하늘 끝까지 갔다 왔다며 그의 능력을 자랑 하였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 기둥들이 당신 손가락이고 손오공의 능력이 자신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보잘것없는 것임을 말했습니다. 절대자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말할 때 이 이야기는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말과 함께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본문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절과 2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토기장이들은 예루살렘 서쪽을 흐르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왜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토기장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10회 이상 토기장이를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45장 9절은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고

로마서 9장 21절에서도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토기장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그에게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에 갔을 때 약속하신대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먼저는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3절과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녹로로 토기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토기장이의 손에서 만들던 그릇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에서 페트릭스 웨이지와 데미 무어가 그릇을 만드는 중에 그 그릇이 망가졌던 장면과 같은 것입니다. 토기장이는 자신이 만들던 그릇이 터지자 그것으로 자기가 원하는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신 것은 토기장이와 흙의 관계에서 토기장이가 원했던 것을 만들려다가 그 흙이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뭉쳐 다른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토기장이식의 주권을 행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5절과 6절에서 이 상황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그것이 터지면 다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그릇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너희”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터진 그릇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터진 그릇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이 터졌다는 것은 온갖 죄와 우상숭배를 저지를 뿐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사야는 이사야서 5장에서 포도원의 노래를 통해 말했습니다. 그 노래에서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기대했는데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얼마나 진지하게 기다렸냐면 열매가 맺혔을 때를 대비하여 망대를 만들고 그것을 수확할 것을 기대하며 술틀을 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릇이 터졌을 때 토기장이는 다른 그릇을 만들었듯이 하나님은 포도원의 담장을 허물어 짐승들에게 먹힘을 입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들을 향한 기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라고 완료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으로 정의 된 존재답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기록된 성령이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를 맺어야 하는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갈5:19-21)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것은 본문의 말씀처럼 터진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터진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터진 이스라엘과 터진 우리들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은 토기장이가 다른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복주시겠다고 했던 처음의 계획과 다르게 대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7절부터 10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7절부터 10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이 본문의 말씀은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동일한 원리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복 주시기로 했지만 그들의 행위가 바르지 않고 돌이키지도 않는다면 뜻을 돌이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고 반대로 심판하려는 계획 가운데 있었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온전히 행하면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심은 본문 말씀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아합왕을 아실 것입니다. 아합은 두로의 공주였던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바알신앙을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에 들어오게 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이었습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은 아합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아합이 겸비하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취소하셨습니다.(왕상21:29)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송아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섬길 때 하나님을 그들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철회하셨습니다.

반대로 복 주시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하셨던 사건도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복을 약속받았던 백성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오랜 심판 가운데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씀하신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토기장이가 다른 그릇을 만들 듯이 하나님은 선민이었던 이스라엘을 치실 계획을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은 재앙의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말은 빨리 돌이키라는 경고나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것은 재앙의 말이 되지만 그 말을 듣고 돌이키면 그것은 당사자에게 유익을 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이 소리가 들려집니다.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지금 가려는 길은 바르지 않은 길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진정으로 복이 있는 자입니다. 일상의 소리나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복과 돌이킬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돌이키라고 쉼 없이 말씀하심에도 그들은 더욱 강퍅해 져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여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계속해서 짓고 심판 받게 된 원인이 본 절에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의 말씀을 헛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아쉬”라고 하는데 이는 “소망이 없다. 절망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절망하고 소망이 없다”고 여기는데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멸망 할 때에 롯의 두 사윗감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소리를 농담으로 여겼다가 그 성과 함께 죽었습니다.

또한 엘리사 때 아람군사에게 사마리아가 포위되어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자신을 잡으러 온 장관에게 엘리사는 곧 놀라운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7:1)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장관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장관은 다음과 성문을 열다가 백성들에게 밀려 넘어져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헛되게 들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행하였습니다.

인간의 계획은 허무한 것입니다. 썩은 갈대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행한다는 말은 인간의 계획과 힘을 의지하여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17장 5절에서도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께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2장 22절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마음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했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했다는 것은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가 강퍅하게 행하여 이스라엘의 노역을 더 고되게 시켰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강퍅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13절부터 1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14) 하십니다. 레바논은 갈릴리 북편에 높이 솟아있는 산맥인데 만년설로 인하여 차고 시원한 풍부한 물이 사시사철 마름이 없이 흘러내렸던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변함이 없으시고, 다함이 없는 사랑과 은혜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 분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2:13)를 선택한 격입니다. 이처럼 어리석고 미련하게 행한 족속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는지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15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옛길과 곁길”이 등장하고 있는데 성경에는 길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계시해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옛길”이란 하나님께서 창세기로부터 보이신 일관된 구원의 길이요, 그 옛길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 등 선진들이 걸어간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요 14:6) 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복음을 “십자가의 도”(고전 1:18)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이 길 외에는 구원의 길이란 달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녀 이스라엘은 그 옛길을 버리고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 죄의 길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아십니까? 다윗은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30:7)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비취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7장 24절에서는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께 등을 향하고 얼굴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길을 버리고 곁길로 행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본문에서 한 가지를 더 말씀 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가 사람들에게 살해 위협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선지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선지자를 죽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의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방법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은 지금까지 말씀 드린 네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여기고 자신들의 계획대로 행하며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선지자를 죽이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당신의 손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말씀하심으로 그 죄에서 돌이켜 복된 길로 가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반대로 우리들은 들에 풀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살아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임을 알고 그렇게 행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입술과 삶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일을 간증하고 기쁨과 감사로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토기장이를 토기장이되게 하는 삶 [예레미야 18:1-6]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할 즈음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동족들에게 잔혹한 예언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남유다를 멸망하실 것을 작정하셨고, 이제 너희들은 바벨론에게 망하여서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한 예언을 하는 예레미야에게는, 망해가는 동족으로 인해서 오는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게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토기장이 집으로 가게 하셔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게 하십니다.

한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오더니, 그것을 녹로에다가 올립니다. 녹로라고 하는 것은 회전할 수 있도록 만든 둥근 테이블을 말합니다. 토기장이는 녹로 위에다가 진흙을 올려놓고, 테이블을 빙글빙글 돌립니다. 그리고 돌고 있는 진흙 덩어리를 토기장이가 손으로 만져주니까 어떤 모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유다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고, 유다백성들은 그 토기장이 손안에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임을 알려 주시고자 하십니다. 지금 남유다백성들이 멸망의 위기 가운데 있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때에도 서로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할 때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에 저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서울에 있는 신학교를 다녔고, 주말에는 철원 고향에 내려와서 고향 교회 전도사로 이년간 섬겼습니다. 매 주말마다 긴 여행을 해야 했지만, 집과 교회를 찾는 다는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말에도 여느 때와 같이 서울에서 철원으로 시외버스를 타고와서, 시내버스로 갈아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낯이 익은 제 또래의 남자가 저를 보더니, “혁이야, 오래간 만이다. 잘 지냈냐?”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낯이 잊고, 저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것으로 봐서 중학교나 고등학교 동창인가 보구나 생각하고, 대화를 하다가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어, 그래 너도 잘 지냈냐? 나는 잘 지내고 있는데, 요즘 너는 뭐하며 사냐?”라고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얼굴에 애매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합니다. “혁이야, 왜 그래? 너나 몰라, 전에 함께 수련회 갔던, **교회 형이잖아~”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서야, 그 선배가 다니는 교회랑, 우리교회가 함께 연합수련회를 해서 알게 되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배를 알아보지 못해서, 참 민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 때에, 제대로 된 관계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는 부모가 어떠한 분인지, 부모는 자녀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관계를 맺어야 문제가 없습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도 내가 대하는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 때에, 제대로 대할 수가 있고, 그 관계도 온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남유다 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은 존재고, 유다백성들은 진흙과 같은 존재임을 눈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토기장이로 비유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고, 우리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속에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대하면서 살아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행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토기장이와 같은 존재임을 직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곧 유다백성들은 진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신이 만들기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듯이, 하나님도 유다백성들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 수 있는 주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토기장이의 주권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를 보니까, 토기장이가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주저함없이 진흙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진흙이 원하는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터지자, 그 진흙을 다시 뭉개더니 다시 다른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진흙으로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당신께서 쓰실 그릇을 만들고자 하신 것입니다. 어떤 그릇을 만들지에 대한 그 계획은 토기장이에게 있습니다. 그 모양이 잘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 진흙반죽을 다시 터트려서, 또 다른 그릇의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것도 토기장이의 주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 가운데서 특별히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만들어 사용하시려고, 이스라엘을 녹로위에 놓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양대로 빚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만드시고자 하시는 그 손길을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자 모양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대로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토기장이 되심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이로 인해서 망하게 된 것입니다.

2.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토기장이의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창세기 2: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이 땅의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값진 보석이나 단단한 쇠로 만들지 않고 진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부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살다가 죽으면 그 육신이 땅의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로 만드셔서, 늘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를 의지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와 계획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토기장이가 되어서 내 삶을 내가 설계하고 그 일을 이루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1)스스로 토기장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은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자들이 주장하기를,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연약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의지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신이라는 존재를 가상적으로 만들어서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이나 이 세상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이 신이라는 허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무신론자는 당연히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계획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고, 자신이 마치 토기장이와 같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2)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 중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토기장이와 같이 여기고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기도 합니다. 이미 내 인생의 설계도를 다 만들어 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도 그 기도하는 내용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건 이렇게 해주시고, 저건 저렇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제 소원을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듯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하나님이 토기장이가 되셔서 당신의 뜻대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을 거부하고, 내가 토기장이가 되어 내가 만들고자 원하는 삶을 빚어가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과 같은 존재가, 토기장이의 행세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토기장이 집에라도 찾아가서 하나님의 토기장이 되심과 사람이 진흙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기를 사람들에게 원하십니다.

우리는 현재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결정해서 만들어 진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보면서 하나님의 토기장이 되심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태어날 부모를 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외모를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많은 것들이 내가 계획하기도 전에 이미 주어졌고, 내가 계획한 것들이 있어도 반드시 내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 깨달아야 할 것은, 나의 삶을 계획하고 주관하고 계시는 주권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관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러한 상황과 모양으로 만드셔서 무엇에 쓰시고자 하시는지에 관심하며 그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유다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혁이야,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네가 내 손에 있느니라” “너는 내 손바닥안에 있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토기장이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결국 토기장이의 손바닥 안에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녹로위에 올려진 존재입니다. 그 녹로위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하나님의 만져주심으로 하나씩 모양이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로 당신의 뜻하신 대로 만들고자 원하시고, 저와 여러분은 녹로위에 올라가 있는 진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지어짐을 받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만들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떠한 모습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마치 녹로위에 올려져 있는 진흙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어떠한 모양으로 빚으시고, 사용하시고자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해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빚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모양으로 우리를 빚으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빚으시고자 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토기장이 되게 하는 믿음은 우리를 삶을 주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아 주저될 때도 있지만, 그 때 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손에 나를 맡겨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삶보다 더 가치있는 삶을 계획하시고 만들어 가시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토기장이로 모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하나님이 빚으시고자 원하시는 사용받는 인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빚어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토기장이되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사야 64:8절에,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예레미야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이것입니다. 주는 토기장이시요, 우리는 진흙입니다.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만들고 계십니다.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빚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쓰시고자 빚고 계신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창조자로 믿고, 나의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구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제대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처해진 환경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불평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모습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잘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도 만드시고, 우리 가정도 하나님의 원하시는대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우리교회와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지금도 말들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시고자 원하시는 가장 좋은 걸작품으로 제작되는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를 진흙으로 만드시고, 우리의 삶을 계획하시고 주장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무지하여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어그러진 인생을 살아도, 사랑으로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의 토기장이임을 온전히 깨닫고, 우리의 삶을 맡겨드리게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만드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당신께서 만드시고자 하시는 그 삶이 더욱 가치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사람 손에 쥐여져서 사용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는 부모와 자녀, 가정과 교회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헌금기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십년을 지낼 동안 하루도 굶기지 아니하시고 일용할 만나로 먹이시고, 그 신발과 옷이 해어지지 않도록 그 필요를 공급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동일한 은혜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주신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으로 물질을 성별하여 주님아에 드립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작정헌금, 주일헌금, 선교헌금, 각종 헌금을 드리는 성도의 손길과 가정, 그리고 이 예물이 사용되어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또한 심은 것에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가 맺어지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사업이 들어가나 나가나 복을 받게 하시고, 그 받은 복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사용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세상을 풍성케 하는 복의 통로가 되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에 믿음의 터전인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세워주셨고 한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이곳에 불 같은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혼에 부흥이 있도록 하시며 어떠한 환난과 시험가운데서도 주의 뜻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있는 성도요 교회로 살게 하옵소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전도하며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하시며, 악의 물결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이 구원받고 안식할 수 있는 방주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자 수고하는 당신의 일꾼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이 교회의 거름이 되게 하시며, 더욱 많은 이들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당하는 교회요 성도가 되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병삼 목사 설교] 주는 토기장이

날짜: 2015년 2월 22일

본문: 예레미야 18:1~6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주는 토기장이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예레미야 18장 1-6절]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so the potter formed it into another pot, shaping it as seemed best to him)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인도하심을 가로막는 것들…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지고 2015년 첫 번째 변화산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에 우리의 사활을 걸어야 할 것이며, 이것이 거짓이라면 빨리 다른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모든 원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해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해 판교 테크노밸리 축제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우리 교회 청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방에서 정신없이 올라온 부모님을 앞에 놓고 입관예배 설교를 하는데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었습니다. 35살의 나이가 너무 죽기에는 젊은 나이가 아닌가요? 게다가 청년부에서 리더로 섬기는 그 청년이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것이 아닌가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저에게 잊히지 않는 아픈 추억이 있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너무나 착했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 앞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다른 사람의 인생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불가능한 대답. 그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마태복음 10장 29~31절에 참 놀라운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 하찮게 보이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의 광대한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어찌 우연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그 죽음 가운데도 하나님이 인도하심이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그 죽음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삶이 나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면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오류를 잘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청사진” 아닌가요? 그 계획대로 살아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말입니다. 이미 우리를 향한 계획을 세우셨다면 우리가 하는 어떤 결정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오스왈드 샌더스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이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건축가는 집 설계를 의뢰한 고객 중 상당수가 막상 설계에 들어가면 자신이 이미 설계도를 그려놨으니 한번 봐달라고 도안을 내민다고 불평했다.

그들이 정말 원한 것은 전문가의 설계도가 아닌, 자신의 설계도를 전문가가 인정해주고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부분만 보완해주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인생의 위대한 건축가를 찾아가지만, 그 분의 계획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가 세운 계획을 인정받는 일에 치중한다. 실제로 그들은 주님의 인도하심과 지도가 아닌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한국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긍정적 사고”라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이야기이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무척 많이 팔렸습니다. 그 책을 보면 정말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생각하고 기대하라고, 하나님의 축복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고,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대하고 크다고.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축복이 정말 하나님의 계획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축복보다 중요한 것은 축복을 받을 자로 사는 것임을 잘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런 질문으로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긍정적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앞서 갈 수 있는가?”

오스왈드 샌더스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오해를 9가지로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1. 내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내가 원하지 않는 힘든 일을 강요하실 것이라는 오해이다.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2. 비합리적인 일을 하도록 요구하신다는 오해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비합리적은 일을 강요하시겠는가, 물론 그분의 생각이 한없이 깊고 넓으셔서 이해 안 되는 일을 요구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3. 우리가 바라는 일을 방해하실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타당하다면 기쁘게 들어주실 것이라고 거듭 밝히셨다.

시편 37편 4~5절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4. 하나님의 뜻을 간과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면, 영원히 ‘차선의 인생’만을 살게 될 것이라는 오해다. 이 오해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가장 명확하게 답을 해 준다. 토기장이가 빚고 있던 그릇이 터져버려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는다. 토기장이는 다시 그릇을 만든다. 차선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용도로 만드시고 있음이 분명하다.

5. 인도하심의 형태는 성령이 우리 생각이나 마음에 주시는 인상의 형태로서 강렬한 감정을 동반한다는 오해다.

6. 우리의 직감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오해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의 직관은 우리가 모은 정보보다 신뢰하기 어렵다.

7. 일이 잘 풀리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신호이므로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는 오해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도망가는 요나에게 때맞춰 배가 준비되어 있었음을 기억하라.

8. 기회의 문이 닫히면 다 끝났다는 오해이다. 그러나 때론 정문만 닫혔을 뿐 뒷문이나 창문이 열려 있을 수도 있다.

9. 머리를 비웠을 때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오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마음을 비우라는 식의 조언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시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는 의미가 결정된 미래를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결정과 선택은 우리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우리를 다시 빚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다는 것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좀 알아야겠지요. 너무나 타락하고 패역한 세대 이스라엘을 보며 예레미야는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 나라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보니 도무지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망가진 진흙을 다시 빚는 토기장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다시 빚은 그 토기가 ‘최고의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망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선택을 토기장이의 손에 맡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말은, 우리의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의 계획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토기장이에게 온전히 맡길 때 최고의 작품이 나올 수 있음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사야 64장 8절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언젠가 국민일보 ‘겨자씨’란에 실렸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교회 가족 찬송경연대회에서 한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를 틀렸습니다.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이어 목사님 가정이 찬송을 불렀는데 목사님도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를 쭉 읽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가족 찬송경연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 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다음 차례로 우리 가족이 찬송을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은 남의 허물을 가려주려고 나의 허물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인생을 살다 보면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실수들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허물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허물에 대한 계획은, 우리의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계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부끄러움조차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는 계획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우리 속에 찾아올 수 있나요?

저는 적어도 여러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안에 많은 허물이 있기에, 그리고 제 삶의 가장 큰 가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말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함은 저를 참 힘들게 합니다.

지난해, 그리고 올 초에 찾아온 제 몸의 연약함은 저를 참 우울하게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우울증’ 증세가 저에게도 찾아온 것이죠. 매일 이렇게 아프게 살아야 하는가? 나 스스로 노력해도 나를 control 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때 우울함을 극복하는 것이 말씀을 보는 일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는 일이고, 열심히 노력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울함은 나 스스로 나를 어쩌지 못하는 절망감에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 인생이 너무나 힘들고 버겁다고 생각할 때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 “토기장이의 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 삶이 ‘긍정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을 그렇게 진지하게 물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토기장이의 의견이 best라는 말입니다.

“Best”란 무엇일까요? 장인의 작품입니다. 작품은 복제되지 않습니다. 복제되는 순간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의도된 손길이라면 그 흠집조차도 흠이 아니라 ‘포인트’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이 망가졌다고 느껴지는 인생의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고난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셨다면, 그리고 그 시간 가운데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게 하셨다면 그 흔적이 작품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우리의 삶을 최고(best)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하는 말은 아닐까요? 너무나 세련되고 매끄러운 모습을 보면서 말입니다.

“위작”이 무엇인가요? 아무리 완벽하게 작품을 흉내 내도 가짜입니다. 중요한 것은 흉내가 아니고 누군가를 닮아가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만든 작가의 손길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유명한 몽마르뜨 언덕에서 멋진 미술 작품을 발견했답니다. 그래서 기대를 하고 샀답니다. 몇 년 후에 저 화가가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고, 이 작품이 그 값을 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고 말입니다.

다음날 다시 그곳을 방문했답니다. 그림을 더 사면 좋겠다고, 그런데 너무도 실망할 일이 생겼는데, 자신이 산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 화가가 아주 빠르게 또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멋져 보이던 그림이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입니다.

세련되고 멋진 그림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혹 우리는 아름다움과 세련됨으로 치장된 작품이 쉽게 마음이 쏠리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인생이란, 순간순간에 삶의 진지한 흔적이 묻어나는 토기장이의 숨결이 느껴질 때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살아가기로 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삶의 최고(best)가 아니라 토기장이의 의견이 best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본문 4절입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so the potter formed it into another pot, shaping it as seemed best to him)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로우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살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리라는 확신이 필요할 뿐입니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생각나는 말씀이 있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가나 혼인 잔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모든 이가 잔치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의 말입니다. 이전의 포도주보다 새로 만든 포도주가 더 맛있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에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를 영어 성경에는 “as seemed best to him”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일까요? 토기장이입니다.

‘베스트’는 그릇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용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었던 인생이 망가졌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55장 8~9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욥기는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지혜자의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동방의 의인 욥에게 찾아온 고난의 문제였습니다. 이 고난의 문제는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난을 겪은 욥을 찾아와 위로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욥은 답답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고난을 죄의 문제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찾아온 고난은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다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기 23장 10절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너희도 “진흙처럼” “내 손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인도하시고 보게 하신 것이 무엇인가요? 본문 3~4절입니다.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닐까요?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물었던 물음이 있습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계서 이르시기를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우리가 부르심을 받고 영적인 체험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내 삶의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실망하지 않을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인도의 선교사 E. 스탠리 박사는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시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겁니다. 혀를 만드시고 서로 대화할 능력을 주신 분이 우리와 말씀하시고 대화하려 하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진흙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손안에서 빚으신다면 당연히 우리 삶의 기대가 있지 않겠습니까?

호기심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는 물음은 신뢰와 기대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마음,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영성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영혼의 양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행동이나 말 또는 외모나 지식, 그리고 우리의 성공이나 인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죽고 난 후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관심 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하시며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두려움 없이 하나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십시오. 우리는 흔히 조건 없는 사랑과 조건 없는 허용을 혼동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시지만, 배반, 폭력, 증오, 의심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악의 표현들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심으려 하시는 사랑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란, 우리가 악한 것을 말하거나 생각할 때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실종된 자식의 귀환을 부모가 기다리듯 그렇게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슬플 때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 항상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6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토기장이가 망가진 그릇을 다시 만들었듯이, 내가 너희를 다시 만들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깨어진 질그릇처럼 되었지만, 다시 만들어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가 회복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변화산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가장 명확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빚으실 내 인생에 대한 기대입니다.

깨어진 질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안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에 소망과 기대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살아 있는 한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입니까?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이번 변화산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보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니 그 어둠의 장막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게 될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변화산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는 특별한 시기가 필요합니다.

자동차를 타다가도 때가 되면 오일도 갈고 타이어도 바꾸어야 합니다. 엔진도 점검해야 합니다. 돈이 들고 시간이 들어도 필요한 시간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진지하게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내 인생에 깨어지거나 금이 간 것은 무엇인가?

2. 나를 가장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바뀐 내 모습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백지를 놓고 “하나님 그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담대하게 물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루하루를 통해 그 계획들이 하나님의 계획인지 확인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예레미야 18장.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

[렘 18장]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기에 우리가 믿을 수 있지만, 수없이 많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습니다. 하나님은 원칙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대응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가르침을 줍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토기장이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메시지

1) 토기장이의 집으로 예레미야를 보내시는 하나님

2) 토기장이가 녹로로 일하는 것을 보는데,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다가 터지니,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다.

3) 메시지: 토기장이가 하듯이 내가 못하겠느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 너희는 내손에 있느니라.

(1)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어 멸하려 하더라도,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그 민족에게 내리려고 하던 재앙에 대해서 뜻을 돌이킨다.

(2)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고 할 때에, 그들이 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그들을 복주리라는 뜻을 돌이킨다.

(3)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여,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고 경고하였더니 이 백성은 말하기를 헛소리 마세요.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고 말한다.

2.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과 심판

1) 너희는 이런 일이 있는지 여러 나라에 물어보라.(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2)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한다. (옛길에서 넘어져 곁길로 가는 것)

3) 그들의 땅으로 말미암아(큰 멸망을 당하므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

4)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길 동풍으로 함같이 하리라. 내가 재난의 날에 그들에게 등을 보이리라.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3.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다.

1) 백성들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고자 한다. 그 하나 없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2) 예레미야의 탄식: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구덩이를 팠고, 그들은 선을 악을 갚습니다.

(1)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게 하려고 주의 앞에서 그를 위해 유익한 말을 한 저를 기억하여주시옵소서.

(2)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며, 그들의 아내는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게 하시며, 장정은 죽임을 당하며 청년은 전장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소서.

(3)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라. 그들의 악을 사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소서.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을 다시 나의 표현으로 풀어쓰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시청각교육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신다. 예레미야를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낸다. 그리고 토기장이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가 보게 하신다. 토기장이는 그릇 하나를 만들다가, 그릇이 터지자 그 진흙을 다시 뭉개더니 임의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

하나님도 토기장이와 같이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진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처음에는 멸하시려고 했다가도 그들이 악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그러나 어떤 민족은 세우려고 하셨다가도 그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은 재앙을 내리시려고 하시고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라고 하셨음에도 그것을 헛소리인줄 알고 계속해서 악을 행한다. 너무나 어처구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멸하고, 원수들 앞에서 부끄럽게 하시기로 작정하신다. 그들이 고난 당하는 날에도 등을 돌리며, 얼굴을 향하지 않을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호소한다. 이 백성들을 향해서 열심히 변호하고 이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했던 예레미야를 사람들은 오히려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는 모습을 볼 때, 예레미야도 한계를 느낀다. 그는 두려움가운데 하나님께 신원한다. 이들에게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이들을 철저하게 심판해 달라고 오히려 신원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의 중보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견된 것에 대한 생각들]

1. 신실하신 하나님?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일향 믿을 만한 분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노골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뜻을 마음대로 바꾸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잘 안되면, 임의로 그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은 얼마든지 바꾸시는 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강조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대로 그 뜻을 바꾼다고 할 때, 우리는 불안하다. 부모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못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늘 불안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이 아니시다. 예측할 수 있는 변화요 은혜로운 변화요 공의로운 변화인 것이다. 경직된 획일, 기계적인 예정이 아닌 것이다.

심판을 하시려고 하다가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 마음을 돌이키시는 변화다. 잘 세우려고 하시다가도 교만하고 악을 지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마음을 접으시는 변화다. 하나님은 문자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기초적인 상호 신뢰를 위해 언약을 통해서 룰을 정하지만, 문자에만 매이지는 않으시고 얼마든지 그 안에서 은혜로운 융통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원칙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변절자로 보일지 모이지만,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진정한 원칙주의자들은 없다. 그 스스로도 그 원칙을 다 지켜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2. 중보자들까지도 포기한 예루살렘과 유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레미야의 미흡함을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고, 올무를 놓으려 하자 그동안 이 백성을 위해서 중보하고 기도하며 눈물 흘리던 예레미야가 갑자기 돌연 변해서, 자기 백성들을 저주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저주는 매우 잔인할 정도로 하나님께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미흡합을 볼 것인가? 아니다. 어쩌면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들의 완악함을 봐야 할지 모른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말은 우습게 여긴 자들이다. 그들이 이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선을 악으로 갚는 행위이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어떻게 하든 중보하려고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다. 나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미흡함을 보는 것이 아닌,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의 악함을 더 깊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마지막 자기 편이었던 예레미야까지(중보자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었는가!! 이 백성은 더 이상 중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백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최후의 중보자까지 우리를 등진다면 우리는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만큼은 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히 6:4-6) 나를 위한 마지막 편까지 등돌리게 하는 어리석음은 삼가해야 한다.

이 땅에서 부모는 나의 마지막 편이 아닌가 싶다.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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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 비유 (예레미야18장1절-12절)

몇 년 전 평신도가 쓴 책 한 권이 현대 교회에 쓴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옥한0 목사님의 아들이 쓴 ‘부족한 기독교’란 책 시리즈 입니다.

미국에서 세일즈를 하며 자기계발과 심리학 책을 섭렵한 그는 요즘 교회 설교가 그런 내용들과 똑같다고 지적합니다.

설교엔 복음이 빠져있고 하나님 만족이 아닌 인간 만족만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의 주장 속엔 하나님 주권 사상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빠진 현대 기독교는 심리학과 엔터데이먼트와 성장을 위한 마케팅으로 채워있다는 것이 그는 꼬집어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갖고 우주와 나를 다스리지 못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국가와 민족과 인생의 주권자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죄악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며 자기 인생의 주인행세를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을 심고 뽑으시는 분이 누군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됨을 믿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안전하고 풍성한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가 약속된 줄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오늘 본문의 핵심인 인생에 대한 하나님이 주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에서의 핵심은 우리 인생에 대해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편139장13절을 보면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라고 증언합니다.

지음을 받은 존재는 지은 자에게 종속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20세기 저명한 저술가인 아서 핑크는 그의 책 하나님의 주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리스도인에게 힘과 안정을 줬던 진리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이 마치 외국어처럼, 고대어처럼 돼 버렸다‘

오늘 날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얘기하면 왠 검정고무신 시절 얘기냐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겼고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시는지요.

무슨 소리냐 내 인생은 내 것이지 어떻게 남에게 맡기느냐

내가 무슨 로봇이냐

이런 생각이 속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거 아닙니까?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고 나름 헌신하는 성도들 중에도 내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자청해서 이러 저러한 일들을 선심 쓰듯 한다면 모를까 그게 내 의무라니 별로 기분내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위해 하나님이 시중을 들어주셔야지 마땅하단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하시면 내 스타일에 안 맞는 인생이 나올까 왠지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의 본성이 절대로 하나님께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를 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섭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려하는 청소년기 자녀들을 키워 본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독립할 능력도 없는 데도 부모의 간섭이 싫고 독자적으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나에 대한 권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로 심판당할 나를 십자가의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주님을 영접해 구원을 얻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이사야 43장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 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주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입니다.

그 권리는 진흙으로 무엇이든 자신이 선택한 형상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권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십니다.

우리는 토기장이 손 아귀에 잡혀있는 흙 반죽 같은 존재들이란 말씀이죠.

실제 창세기1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서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지와 자연을 다 만드시고 갑자기 위에서 인간을 만들어 뚝 떨어뜨리신 게 아니라 지구 가운데서 물질을 취하여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의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 육체는 지구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분명히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셔서 만들어졌습니다.

육체는 땅에 속해 있지만 우리의 영은 신령한 세계 곧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과 소통을 할 수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 창조하신 목적을 이사야43장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 처지를 인정하고 나면 마음 편해집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지으신 주인이 되시는 걸 인정하고 나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내 인생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온갖 이론과 학설을 가져다 붙이며 원숭이가 조상이라고 우길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렴 하나님의 가문이 낫지 원숭이 가문이 낫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게 우리의 영광이요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 인생을 마음 놓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기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4절에 보니 토기장이가 만들던 그릇의 형태가 무엇 때문인지 파상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릇이 망쳐진 게 흙 잘못이냐 솜씨가 부족한 도공의 잘못이냐를 놓고 따진다면 그게 아직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한 사람의 고단한 억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이시고 우리가 한 줌 흙임을 인정한 사람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입니다.

불면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릴 한 줌 흙과 같은 우리를 빚어서 쓸만한 그릇을 만들어 가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정말 화장을 하고 가루가 된 유골을 뿌릴 때 보면 인간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릇으로 만들어져가던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서 터졌다는 것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4절 말씀 후반부 처럼 토기장이가 그 진흙덩어리를 이용해서 무언가 쓸만한 것을 다시 만든다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리 그릇이 못되고 망가져 버린 인생도 하나님 손 안에 있을 때 쓸만한 그릇으로 다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15세에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강0우박사의 인생 역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을 맞아 실명하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마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기가 막힌 절망에 몇 번의 자살시도도 해봤습니다.

주님이 그를 구하러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는 없는 것 보다 지금 가진 것을 감사하며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정말 희망의 불빛 하나 없이 앞이 캄캄한 그의 인생이 주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시각장애인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부시 행정부 7년간 백악관 직속 장애인권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냈습니다.

그의 큰 아들 강진0 씨는 세 살 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도 눈 뜬 아버지를 갖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는 같이 야구도 못하고, 운전도 못해요.

아버지 눈 좀 뜨게 해 주세요’

강 박사는 아들의 기도를 듣고 아픈 마음을 갖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지금은 고칠 수 없다. 그러나 미래에 의학이 발달해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 눈을 고쳐주면 어떻겠니?”

어려서부터 아버지 눈 고쳐주는 생각을 꿈으로 간직했던 큰아들은 하버드를 졸업하고 세계적인 안과의사와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모두 쓸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고 터졌던 인생들일지 모릅니다.

형편없이 뭉개진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다시 만지셔서 쓸만한 그릇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범죄한 인간을 영영 버리시겠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대로 고쳐서 쓸만한 그릇으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온전한 그릇이 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직 아무렇게나 뭉쳐져 하나님의 손 안에서 빚어지고 있는 한 웅큼의 훍덩어리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옛날의 내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형태가 터져버린 파상의 고통을 겪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쓸 만한 그릇으로 만드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꼭 알맞은 귀한 그릇들로 지어 주실 줄을 확신하며 우리 한 몸을 안심하고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주권을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주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면 우리 인생에 실패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선택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절대적인 타락으로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삶을 주님의 뜻대로 경영해 나가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에게 양도하셨다는 뜻이죠.

그러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은 주권을 갖고 정의로운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주권조차도 하나님은 행사하시길 미루고 회개를 기다리고 기다리심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8절과 10절에서 사람의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겠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결과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악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돌이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9절에 보면 민족이나 국가나 개인의 가정이나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지 않는다면 유익하게 하시려던 복을 돌이키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도 국가의 흥망 성쇠와 개인의 인생에서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유럽의 패권을 쥐었던 나폴레옹황제가 러시아 정복을 떠나기 전날 밤, 그는 러시아에 대한 정복 계획을 한 귀부인에게 자신만만한 투로 설명했습니다.

그때 그 부인이 “각하, 사람이 계획은 하지만 성패는 결국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부인, 나는 계획도 하고 이루기도 합니다.”라고 거만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러시아 원정은 크게 실패했고 그것으로 그의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추방당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비소중독으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이사야 14장 24절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우리 삶의 고통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행동들과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한 복의 박탈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곤고한 인생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주를 위한 고난인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그런 대우을 받을 만큼 쎄지도 못합니다.

우리 고난이 기도하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나태함의 결과인 경우고 내 죄성 대로 방종한 삶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 때문인 고난이 많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위해 약속하고 준비하셨던 유익한 것들을 우리가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늘 부족하다 해도 우리 구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거짓말 좀 하고 속을 썩일지라도 그 당시 미운생각이 든다해도 근본적인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러나 용돈인상은 없습니다.

사준다고 약속 했던 최신형 스마트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 그들을 유익하게 해주시려던 복도 보류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되고 더 형통한 것 처럼 보이십니까?

아니요, 우리 눈에 보이는 한 두가지 화려한 성공을 보고 그들의 행복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후지이 가오루가 쓴「엔딩, 나의 인생에 후회가 있다」라는 책은 인생에서 누구보다 일찍 성공했지만 스스로 몰락해간 사람들 26명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클래식으로 미국 음악을 만들어낸 조지 거쉬인은 천재적인 음악가였지만 거만하고 오만한 성격에 모든 친구가 떠나고 뇌종양으로 쓸쓸히 죽음을 맞았습니다.

벤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안무 배경 음악이 그의 작품입니다.

오스카와일드는 젊은 나이에 인기작가가 되었지만 동성애에 빠졌고 술과 쾌락으로 지내다 종양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헤밍웨이 또한 명성을 얻었지만 신앙을 버리고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권총으로 자살을 했죠.

슬픔이여 안녕이란 소설을 쓴 최고의 여류작가 프랑소와즈 사강 역시 부정적인 삶의 태도로 결국 알콜중독과 약물남용으로 비참한 삶을 마감합니다.

아무리 인정받는 재능을 갖고 화려한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을 놓쳐 버리면 돈도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행복을 갖다 주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 마음에 원하는 것이 결핍되었을 때 마음이 괴롭습니다.

필요한 돈이 부족하고 원하던 소원을 이루지 못했을 때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러나 딱히 부족하거나 염려스러울 일도 없는 데도 불안하게 가라앉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있는 일도 아닌 막연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뿌연 안개 처럼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참 신기하게도 우리 마음이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어보면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 게 아니라 십중팔구 점점 침체되는 것을 느껴보셨습니까?

정말 마음이 불편한 이유 없는 불만족이 어느새 묵직하게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괜히 모든 게 불편하고 부족하게만 느껴집니다.

이사야서28장20절 말씀처럼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기뻐할 것도 없고 걱정해야 할 것 투성이인데도 우리 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구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려고 할 때 잔잔한 기쁨과 평안이 우리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의 뜻을 따라 순종한 끝에는 반드시 축복이온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김병0교수는 경제논리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결코 가난해 질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자라고 하면 돈이나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을 생각하지만 부에는 재능이나 경험, 성품 같은 무형재산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령 영국축구선수 베컴이 그의 전 재산1600억을 몽땅 잃어버린다 해도 축구공 하나만 있으면 풍족히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죠.

경제학에서는 이런 능력을 인적자본이라고 부르고 개인의 부의 구성요소에 포함시킵니다.

무형자산까지 포함 해 부를 정의한다면 기독교인이야말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약속 된 이 많은 복을 무형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 결코 가난해 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무형자산을 늘리는 것이 주의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기독교인으로서 부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주께 순종한 만큼 우리의 자산은 증가한다는 말씀이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엄청난 무형자산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계속 가난에 머물러 있기가 어렵다는 것이 경제전문가의 결론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은 국가가 오랫동안 빈곤에 허덕이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선진국의 특징은 무형자산이 발달해 있다는 것이죠.

그 무형자산의 발달에 기독교가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각국의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 분석한 연구들에 따르면 기독교인 수가 많아질수록 인적 자본의 축적은 많아지고 경제 성장은 촉진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다만 우리의 행위에 따라 그 복과 화가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을 보면 마치 토기장이가 만들던 그릇을 망가뜨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도 당장에 그러실 수 있다고 시작됩니다.

그런데 말씀의 끝은 11절에 나와 있듯이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아름답게 하라입니다.

불순종하고 악한 이스라엘을 향해 당장에라도 심판을 내리실 것 처럼 시작하지만 결국 그러니 제발 좀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한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들의 글이 전체 4분의1에 해당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 등 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죄목을 세세하게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호소하는 내용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마음과 뜻을 밝히신 것이 성경입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더 이상의 하나님의 뜻을 물을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상황마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다 나타나있습니다.

성경을 늘 가까이 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읽고 묵상하면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그 때 그 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귀한 말씀 중 그 많은 분량이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짓는 각종 해괴한 죄악들을 조목 조목 지적하고 회개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에 우리가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 만큼 우리가 온갖 죄에 쉽게 동조하고 늘 죄를 짓는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정말 행복하고 만족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갈라 놓습니다.

죄 가운데 있으며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은 절대 죄가 있는 자리에 풍성한 영적 은혜를 내려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더러운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가 있는 자리라면 주님은 기꺼이 자신의 거룩한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예레미야선지자를 데리고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레미야야, 어서 가자, 저기서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그곳에 토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심혈을 기울인 토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물레에서 그릇을 만들 때 잠시만 딴 생각을 해도 여지없이 그릇이 파상됩니다.

공방은 도공의 뜨거운 열기와 구슬 땀으로 후끈 달아올랐겠죠.

여기저기엔 도공의 생각에 미달 된 토기들의 파편이 널려있었을 겁니다.

가끔 우리가 영화 같은 것을 통해 보면 도예가는 자신의 원하던 그릇이 나오지 않을 경우 비장하게 도자기를 깨뜨려 버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나라 분청사기란 도자기의 명인 정0수씨가 있습니다.

그는 40년을 넘게 분청사기에 매달렸고 명인이 되었지만 그동안 자기 마음에 꼭 드는 그릇이 단 한 개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릇에 나를 심어 나를 그대로 나타낼 수 있을까

그 한 점 그릇을 위해 흙 속에다 자신을 심는다고 그는 말합니다.

단 한 개라도 마음에 꼭 드는 그릇을 만들 수 있다면 자기 인생에 후회가 없다는 그의 말에서 도공이 얼마나 혼신을 다해 그릇을 만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공을 다 들여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정성을 다해 우리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도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는지 모릅니다.

한 개의 그릇을 빚을 때 마다 온 정신을 심고 마음을 들여 온전한 것을 기대하는 도공의 마음과 같이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빚으시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께 노예가 더 필요한 게 아닙니다.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 이해하시죠?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면 하나님도 내리려던 징계에서 돌이키십니다.

가끔씩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인생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를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시길 고백하며 매일 주님과 동행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새 그릇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할 때 그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귀한 그릇으로 빚어가실 줄 믿습니다. 아멘.

전도서12장1절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 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예레미야 18장.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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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18장.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 (찬 549)

1. 먼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말씀이다(1~10).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자기 백성을 세우고 허무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하신다. 예레미야는 거기서 토기장이가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그릇을 만들고 깨기도 하면서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4).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행하실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신다(5~10). 또한 정하신 뜻을 돌이키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 속에서 행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고 하시면서 그 결과가 어떨 것인지도 알려주신다(11~12). 이스라엘 족속은 결코 듣지 않고 자기들의 행하던 악을 계속해서 행하고 살겠다고 할 것이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

3. 악행의 결과는 패망과 수치다(13~17). 13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하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실 것이다(17).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을 배신하지 않는데,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살아가니 이것은 이방인 중에서도 가증한 일이 될 것이다(13).

4. 백성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고난을 당하고 그 속에서 기도한다(18~23).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반역이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에 대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많은 제사장과, 지혜자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데, 예레미야 하나 없앤다고 해서 말씀이 끊어지거나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예레미야를 독설로 고통스럽게 하기 시작했다(18). 그들은 ‘혀로’(말로) 예레미야를 공격하고 예레미야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기로 마음을 모은 것이다. 역사 속의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이와 동일한 결과를 경험했었던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보려고 애를 썼건만, 그들은 오히려 악으로 선을 갚고 있다고 하나님께 호소한다(20). 예레미야는 모든 원수갚는 것을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맡기며 호소한다(21~23).

5.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임하겠는가? 세상 만사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면, 내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마치 모든 것이 나의 노력과 열심과 행운에 달려있는 것 처럼 믿으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주권은 운명론적 결정론이 아니며, 하나님은 인격이시기에, 우리의 수없이 많은 실수도 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바뀌어질 수 있다. 문제는 회개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우리 삶에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대로, 하나님께서 명하시는대로 살아가야 할 일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았기에 모든 원수갚음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였다. 당신도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당신이 직접 갚아주어야 직성이 풀리는가?

6. “하나님 아버지, 저희 인생의 모든 일과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에 저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회개할 줄 아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저희가 당하는 모든 일의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평강을 누릴 줄 알게 하시며, 모든 원수갚는 일도 주님께 의탁하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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