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 장 설교 | 내가 이제야 알겠노라 (창세기 22:1-24)_주일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81223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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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야 알겠노라 (창세기 2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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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설교: 아브라함, 하나님을 보다 (창22:1-14)

창세기 22장 설교: 아브라함, 하나님을 보다 (창22:1-14). Jake’s Blog 2020. 10. 14. 02:15.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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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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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8 험을 이기는 믿음 (창세기 22장 1-19절) – 코너스톤교회

창세기 22: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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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cecc.com

Date Published: 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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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점 (창세기 22:1-14) – mission.bz

하나님의 관점 (창세기 22:1-14) … 아브라함의 신앙을 신약성서 히브리서 11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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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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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의 정상에서 만나는 축복 본문 / 창세기 22장 1~14절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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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5/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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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1-24절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

본문 : 창세기 22장 1~24절 주제 :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성장시키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 :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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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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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아브라함 설교말씀] 모리아 산의 번제(창 22:1-8)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22장 아브라함 설교말씀 중에서 번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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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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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 시험받는 아브라함 – 새벽기도 설교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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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창 22:1-19) – 유평교회

본문 : 창세기 22장 1-19절. 설교자 : 이병권. 창세기 22장입니다. 이제 드디어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삭을 바치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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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7/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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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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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설교: 아브라함, 하나님을 보다 (창22:1-14)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사람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방법을 고집한다고 하면, 절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우리 삶의 공간을 내어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나의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비워진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 확신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우리 마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철저하게 순종했던 사람을 꼽자면 아마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아브라함의 순종이 가장 잘 나타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을 더욱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무언가 의아합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의 기도 응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희생제사로, 즉 죽임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살던 시기의 축복은 다산과 풍요였습니다.

다시 말해, 농경과 목축을 하는 사회에서 노동력을 의미하는 자녀들을 많이 낳고, 농사하는 곡식과 열매가 잘 수확되고, 기르는 짐승들이 새끼들을 많이 낳는 것이 당시에는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불임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임가정은 저주 받은 사람으로 이해되었던 당시 상황 안에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위협을 무릅쓰고 새로운 땅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힘이 빠져서, 이제는 자녀를 가질 수 없을 것만 같던 때,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때, 새 땅에 도착한지 비로소 25년이 되던 해, 하나님께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허락하십니다. 우리 생각엔 늦었을지 몰라도, 그에겐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는 적절한 때였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이 바로 이삭이고, 이삭은 민족을 이루는 약속의 아들인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 약속의 아들을 이제 와서 바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상황을 겪게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살아가면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과 같은 심정을 종종 느끼게 됩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러한 상황이 찾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라고 나옵니다. 사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삭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살펴보시기 위해서 어려운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 그것이 이삭일 뿐이지 하나님은 애초에 이삭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가끔 우리의 삶을 괴롭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상황을 겪게 해주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너무 야박하시다면서 돈 몇 푼으로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돈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려 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이실 것입니다.

혹시 현재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내게 왜 이러한 일이 생겼나하고 의문이 드는 일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가 아니라 어떻게…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나는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내용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티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든램지라는 유명 요리사가 나왔는데, 충분하지 않고, 신선도가 그다지 좋지 않은 재료로 요리를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재료를 듣고, 음식 먹기를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고든램지가 요리했다는 말을 마치자, 사람들은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재료여도 고든램지가 만들었으면 분명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 이해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의 생각인가? 누구의 계획인가? 그 분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본문의 내용, 하나님 명령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인생에 가장 귀한 것,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 것 같습니까? 명령의 내용이 정해졌으면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정해진 명령을 어떠한 태도로 임하는 것인지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하는지가 그 다음 절부터 나오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얻은 자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일은 누구든지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다가온다면 사실 피하고 싶고 미루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우리가 언제 일찍 일어납니까? 예를 들어, 소풍가기 전날 우리는 일찍 일어납니다. 왜? 기대되고 기다려지기 때문이죠. 근데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났다? 제 생각에 아브라함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게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때로 상황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로 우리는 회피를 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언덕을 넘어가기 힘들다고 계속해서 주변만 돌다보면, 결코 언덕을 넘을 수 없습니다. 한번은 어렵더라도 정면으로 부딪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이 어려울 뿐, 한번 넘어가면 괜찮을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가족 중 한명의 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어려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명령에 대한 첫 출발 로 돌아가야합니다. 이삭을 바치라,, 이삭은 어디에서 왔는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사역을 시작하면서 받은 첫달 사례비를 첫 열매로 모두 헌금을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빠듯하게 살아가는 환경에서 한달치 사례를 전부 드리는 것이 주저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생각을 달리해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한달 늦게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기회를 누가 주셨는가 생각해보니, 당연히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 결단해야 할 때,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면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곳으로 가기까지 3일이 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 3일의 내용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무 일이 없었거나, 둘째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특이사항이 없으면 넘어갑니다. 다시 말하자면 3일 동안 아브라함은 순종에 대해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생각은 바뀌지 않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도착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아마 추측해 보건데 종들과 함께 갔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 불순종의 모든 가능성을 없앤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예정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삭과 함께 산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냐고 물어봅니다. 이삭이 굉장히 똑똑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뜨끔했겠지요?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실거라고 말을 하고 산 위로 마저 올라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아들 이삭을 묶어서 단 위에 놓았습니다. 이제 손으로 칼을 잡고 아들을 죽이고 불을 붙이면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쉽지 않았겠지요, 이삭에게 원래는 네가 태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태어났어. 뭐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아마 이삭도 어쩌면 울고 불고 난리를 쳤겠지요. 아빠 왜 이러세요, 아브라함이 설명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다소 급했는지 두 번 불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1절의 아브라함의 대답과 별 차이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차분해 보이고 오히려 놀란 쪽은 하나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정말 죽일 것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으니까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내가 이제 너의 마음을 알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을 죽여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조금의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이지만, 가족의 죽음을,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조금 신뢰한 것이 아니라, 더욱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11장 17-19절)

아브라함의 순종은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방금 읽은 히브리서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지 않고, 어려운 가운데서 더욱 신뢰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했던 때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의심되었던 때가 있으십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한테 이러실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원망이 되던 때가 있으십니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무너진 집도 다시 세우시고,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고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순종했던 이 사건을 기념하며,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준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레’라는 단어는 ‘보다’라는 단어가 수동형, 즉 다시 말해서 ‘보다 – 봤다 – 보여진’ 으로 변화되면, 똑같이 ‘이레’ 라는 단어가 됩니다. 이 되면 이레가 되기도 합니다. 즉, ‘여호와이레’라고 이름 붙여진 땅은 ‘하나님이 보여지신 땅’ 이라는 뜻이 되기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신다는 것은 어쩌면, 너희가 사랑할 때 나의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이 아닌가. 바로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순종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을 뛰어넘어 우리가 더욱 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인생의 큰 위기가 닥쳐와도, 많은 사람들이 이제 저 사람은 끝났네, 저 사람 이제 교회 안나오는거 아닌가 몰라 이런 말을 할 때, 보란 듯이 하나님 앞에 더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펴보면 크게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이고, 둘째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바로 순종을 통해서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더욱 신뢰할 때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삶은 결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은 곧 신뢰와 순종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때로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어려운 순간을 만났을 때,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우리 인생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어려운 때에 더욱 신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삶을 살아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관점 (창세기 22:1-14)

하나님의 관점 (창세기 22:1-14)

어느 도둑이 부잣집을 털고 다음 집에 들어갔는데 모자간의 얘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들아, 먹을게 하나도 없구나.” 너무 가난한 집이다 싶어 도둑놈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엄마, 그럼 똥이라도 먹어요.” 도둑은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어 문 앞에 돈 보따리를 놓고 나갔습니다. 나중 알고 보니 모자간에 화투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귀로 들었다고 다 들은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다 본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는 5속교회 체육대회 → 번성하는 2속교회 체육대회)

파란 썬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입니다. 빨간 썬글라스를 끼고 보면 온통 세상이 빨갛게 보이겠지요.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안경으로 세상을 봅니다. 여기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우리는 관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가진 많은 직간접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안경 즉 관점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인간이 쓰고 있는 안경들은 모두 죄로 물들고 오염되어 있기에 세상을 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보고 싶어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안경을 벗고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경 벗어 던지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안경을 내게 주십니다. 내 안경을 얼마만큼 벗어던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토미 테니는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책의 서문을 자신의 막내딸이 서너 살쯤 되었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가진 경험으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어린 딸이 엘리베이터를 타자 잘 장식된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층 한층 사람들이 밀려들고 엘리베이터 안이 사람으로 꽉 찼을 땐 예쁜 장식들 대신 사람들의 무릎, 허리띠, 엉덩이만 보였습니다. 그때 당황한 아이가 아빠 토미 테니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안아주세요. 답답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잘 보였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안아 아빠의 눈높이 만큼 올려주자 아이는 아빠가 보는 것만큼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토미 테니는 “아빠, 안아 주세요. 아빠 눈높이 만큼 보고 싶어요.” 이것이 신앙이요 기도요 예배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아빠의 품에 안겨 아빠와 같은 눈높이 즉 아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으로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이사야 40:31) 여호와를 앙망하는 열정적 예배는 우리의 관점을 높이 올려 줍니다.

오늘은 「베스트 셀러에 담긴 영혼의 양식」 그 여섯 번째 시간 토미 테니의 「하나님의 관점」이란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앞 벽면 예배센터엔 등이 하나 달려 있습니다. 이 등은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관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 오르면 아래 있는 것들은 뭐든지 크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집도 학교도 아파트도 산들도 작게만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높이 올라가면 이 땅에서 그렇게도 크고 중요하게 보이던 것들이 모두 작아 보입니다. 가정, 직장, 돈, 갈등, 고민, 문제 등등 모두가 작아 보입니다. 왜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에서 보는 것과 높은 곳에서 멀리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보일 수 밖에요. 때문에 신앙생활의 목표는 낮은 차원의 관점을 높은 차원의 관점 – 즉 하나님의 관점까지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관점의 산 – 모리아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내어놓고 예배와 헌신의 절정을 경험했던 사건입니다. 성경연구가 제임스 스트롱은 “모리아”라는 뜻이 “야(Jah)께서 보신다 – 야훼께서 보신다”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모리아”는 「하나님의 관점의 산」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가 모진 시험과 고난의 산 인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산, 하나님의 관점을 얻은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높은 시험의 산, 고난의 산으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이 나를 망하게 하는 산, 나를 죽게 하는 산인 줄 알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오르는 시험의 산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내 안경, 내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관점을 얻는 내 인생의 모리아 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신약 최대의 사건이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었다면 구약 최대의 사건은 모리아산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크다는 것입니다. 큰 시험을 주신 이유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기까지 시험은 고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아브라함을 잔인하리만큼 높은 벼랑 하나님의 관점의 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관점의 산 – 예배의 절정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관점을 주시기 위해서.

III. 하나님의 관점을 가로막고 있는 것: 우상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재산이 귀했겠습니까? 이제 와서 건강이 귀했겠습니까? 명예가 귀했겠습니까? 독자 이삭입니다. 가장 귀한 것, 생명 보다 귀한 것 –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내게 하나님의 관점을 빼앗아 가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건 우상입니다. 내가 지금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어 그것이 내 눈을 가리고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1. 본문 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 것” –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이요 우상이요 잘못된 관점이 될 수 있습니다.

보십시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끊임없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것이란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 무엇을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바치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신앙없이 그 무엇을 받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삭이라는 안경으로 그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하나님이요 곧 관점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그것을 내려놓으라 말씀하십니다.

2.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하나 뿐인 것 – 바로 아브라함의 급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치셨습니다. 잔인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신앙생활에 이 급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관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① 물질의 급소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물질이라는 관점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②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아가 급소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죽이기 전까지 하나님의 관점을 얻을 수 없습니다.

③ 자존심, 명예가 급소인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급소가 하나씩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관점이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자기관점이라는 우상이 십자가의 피에 적셔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치라고 말합니다. 짤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새싹이 돋아납니다.

IV. 예배: 관점의 변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를 아브라함이 순종하기엔 풀기 어려운 난제가 있었습니다.

번제란 제물의 각을 떠서 온전히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불로 태운다고 하여 화제라고도 하고, 온전히 태워 연기를 드리는 제사라 하여 온전 제사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시지도 않고 무조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겁니다.

가령 “이 땅에 죄악이 너무 관영하여 짐승으로는 안되겠다. 가장 소중한 네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겠다” 하셨다면 못 알아들을 아브라함도 아니지요. 혹 “그 아들은 내가 준 선물인데 네가 아들에게 빠져 하나님의 관점을 갖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도로 바쳐라” 하셨다면 “예, 드려야지요” 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앞으로 엄청난 복을 받기 위해서 커다란 희생제사가 필요하니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더라면 생각해 볼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 바치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해가 안되었을 것입니다. 용납이 안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확인되는 순간 왜?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왜 바쳐야 합니까?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진실한 성도는 언제나 “왜”라고 묻지 아니하고 “무엇을 할까요?”라고 묻는다.”

분명히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합니까?” 따지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왜?”를 묻지 않았습니다.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만 물은 것은 “무엇을?”입니다. 지금 여기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만을 물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주님, 제가 겪는 이 고난속에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게 이유를 묻지 말고 버려라.」

내 관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건을 보고 문제를 보고 인생을 보기로 결단하는 것 – 이것이 예배입니다. 성공적인 예배는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능력있는 예배를 경험한 사람은 인생의 두려운 현실위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달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보좌가 임합니다. 주님의 관점이 임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되고 그토록 시원하게 탁트인 고지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선사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 살고 있는 것은 나의 “이삭”, 나의 “우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자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으십시요. 당신이 모리아 산에 올라 성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순간 하나님은 당신을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문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미래를 보고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세상사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 크고 두렵게 느껴지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갈등할 것도 없고 힘들 것도 없고 풀리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기준과 가치가 이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V. 하나님 크게 보기(Magnify)

1. 아침에 일찍이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브라함도 인간이었습니다. 때문에 간밤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순종에의 길을 나섰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이 즉각적인 순종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허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날 밤은 몇 년처럼 길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인줄 알아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드리기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나귀에 실고 갈 물건들을 준비합니다. 장작을 쪼개는 노족장의 모습을 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환과 노족장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장작은 갈기갈기 찢기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보다 더 모질게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사흘길

순종은 순간적인 결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아들의 손을 붙들고 사흘길을 걸어야 하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은 브엘세바에서 45km정도 떨어진 곳이니 걸어가면 아마 3일쯤 걸릴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삼일간의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버리기 위해 그 자식을 끌고 사흘길을 걸어가는 아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광야 길 가는 아브라함을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브론 광야길은 적막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비의 마음보다 적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흘 길을 마치고 모리아산 아래 도착하자 하인들을 떼어놓습니다.

하인들이 순종과 예배에 방해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 어린양은?

아브라함은 걸림돌이 될만한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사흘길까지 무사히 마쳐 모리아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지금까지 모든 승리를 수포로 돌릴 수 있는 한 펀치가 날아옵니다. 바로 이삭의 이 한마디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버지의 동정 – 부성의 관점으로 자식을 보게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말은 – 지금까지 참고 참아 왔던 아버지의 심정의 뇌관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우리말 성경에는 “자기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만 원문에는 “위하여”라는 말이 없습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을 준비하시리라”입니다. 이 말은 위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장작더미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에 오르듯이 – 하나님의 아들이 등에 십자가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 골고다 언덕을 올랐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 죽으러 가는 이삭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아들 이삭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계시요 예언이었습니다.

언덕 정상에 오른 아브라함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장작더미 위에 눕힙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장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늙은 아비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올릴 때 몹시도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죽여 바치기 위해 그 자식을 들어야 하는 아비의 심정만큼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황급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11절-12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 이제야, 이제야! 자기의 마지막 우상,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이 순간까지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고 그의 신앙을 참된 신앙이라 말할 수 없으며 그의 판단을 하나님의 관점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당신의 “이제야”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마지막 남은 우상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이제야는 어느 순간, 어느 때 입니까? 언제까지 머뭇거리시겠습니까?

당신에게 마지막 하나님의 관점은 언제쯤 생길 수 있을까요?

나의 이삭, 나의 관점이 죽어지면 하나님의 관점이 살아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죽어 냄새가 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나님의 관점의 산 – 모리아는 세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가까이하는 산입니다. 모리아산은 돋보기 산입니다. 돋보기로 보면 작은 것이 크게 보입니다. 돋보기 산 – 모리아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크게 보이고 나의 문제는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의 안경으로 보면 하나님은 작게 보이고 문제만 크게 보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크게 본다. 확대하다”는 말을 영어로 Magnif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찬송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Magnify God – 하나님을 찬송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안경은 참 신비합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보입니다. 문제, 고난, 환란은 시시하게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만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분만 크게 보입니다. Magnify God! 하나님을 확대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할렐루야!

VI.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면?

보십시요. 자식도 죽이고 자기도 죽어 하나님께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죽이셨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 제물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면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을 확대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제나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눈이 있기 전에 빛을 준비하셨습니다. 코가 있기 전에 공기를 준비하셨습니다.

발이 있기 전에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입이 있기 전에 먹을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갈데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건강을 준비하시고, 마음이 공허한 사람에게 하늘 위로를 준비하시고,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평안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게 새힘을 주시고 근심있는 사람에게 평강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사죄의 은총을 준비하시고, 가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부요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의 내일을 보는 자세입니다.

어디서? 여호와의 산에서입니다. 아무 산에서나 바치면 되는게 아닙니다. 본문 2절에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입니다. 그곳이 여호와의 산입니다. 여호와의 산 – 모리아가 어디입니까? 이삭이 바쳐진 자리요 예루살렘 성전이 선 자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신 자리입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교회입니다. 여기가 여호와 이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이면 부지런히 달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을 바꾸어 하나님의 관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주일마다 이곳으로 달려와 하나님의 관점을 사 가지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VII. 하나님의 관점 그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얻다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신앙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모순될 때,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과 아들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모순될 때, 신앙과 현실이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무조건 하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신약성서 히브리서 11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삭을 바치는 이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성경상 최초로 부활을 신뢰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복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요.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분명히 아이와 “함께” 라고 말하고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말합니다. 둘이 가서 하나를 죽이고 둘이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내가 죽으면 하나님은 나를 살린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점, 신앙의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삭을 대신하여 준비해 주신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삭을 드리면 하나님은 내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고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까지 얻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결론입니다. 종종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 불평하다가 내 힘으로만 살려고 하다가 순종 한번 못해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잃게됩니다. 세상 다 얻고도 예수 잃으면 망한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얻어야 할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 그것은 세상을 내려놓고 내가 얻어야 할 신앙의 절정입니다.

이 시간 오염된 눈을 내려 놓으십시요.

죄로 물든 내 안경을 벗어 버리십시요.

예배의 절정 – 모리아 산에 올라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내려가십시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너를 보고, 나를 보고

문제를 보고, 세상을 보고

어제를 보고, 내일을 보십시요.

마지막으로 토미 테니의 절규를 외치며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 열정적으로 예배하라!」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

창세기 22장 1-24절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

본문 : 창세기 22장 1~24절

주제 :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성장시키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 :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신학적인 지식? 열정으로? 아니면 온 밤을 새우는 부르짖음으로? 아브라함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여러 번 실수를 했으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와 맺은 언약을 생각하고 그 언약이 실현되도록 끊임없이 그에게 역사하셨다. 그리고 본문은 그의 생애에 최고의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그 절정에 서있다.

요해 : 본문을 강해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다기보다는 철저한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임을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세 번이나 나온다(하늘의 소리1,11,15,). 이로 미루어보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게 된 것은 그의 믿음이 좋아서나 당시 고대근동의 인본주의적 인신제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본문을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400년 후 모세의 제도(레1:1-9)와 맥을 같이하면서 또한 2천년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요19:17,18)과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 직결되는 예표(豫表)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제물은 흠 없는 어린양이어야 한다는 점 , 제물은 자발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 , 그리고 제물은 희생되어 그 피가 뿌려져야 된다는 점 등이다 (히9:18-22).

21장 구분

1~2절 : 하늘의 소리 첫 번째 “아브라함아”

3~10절 : 믿음인가 객기인가?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

11~12절 : 하늘의 소리 두 번째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13~14절 : 준비 되어 있는 제물 “여호와 이레”

15~19절 : 하늘의 소리 세 번째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20~24절 : 며느리를 예비하셨다. “밀가가 …나홀에게서 자녀를 낳았다”

1~2절 : 하늘의 소리 첫 번째 “아브라함아”

“그 일 후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신앙의 논리에는 역설적(paradox)인 것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혹독한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하면(히12:8),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 나타난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에게서(엡2:2) 기원한 시험인데 이것은 인간을 타락과 멸망으로 유혹(誘惑-Temptation)하는 악의적(惡意的)인 시험이요(창3:1-6 마4;3 살전3:5), 또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試驗)인데 이것은 성도의 신앙(信仰)을 성장 성숙시키기 위한 시험(test)이다(출16:22-25; 20:20 신8:16 욥23;10). 그러나 사탄의 시험은 인간을 타락시켜 ‘ 하 나님으로부터의 소외를 ’ 도덕적으로는 ‘ 악으로의 예속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이다. 사단의 유혹적 시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때로는 인간의 내부(육체의 소욕을 따라)에서 때로는 외부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후11:4 요일2:16 약1:14,15). 여기서 아브라함의 시험은 그를 진정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으로서 인간적인 생각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야 하는 순종의 시험이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를 생각하며 성령님의 선하신 인도를 받도록 해야 한다(시23:3,4).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3중으로 강조된 점층법(漸層法)의 표현이다. 즉 소나 양이 아닌 사람, 그중에서도 이스마엘이 아닌 적자(嫡子)아들 이삭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100세 낳은 그 어약의 아들이자 유일한 혈통의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인신 제물로) 말씀이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을 다시 한번 이성과 신앙의 선악과 앞에 세워놓은 시험이었다.

3~10절 : 답변인가? 믿음인가?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저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했다고 하는 것은 아비의 심정을 무시한 너무 비인간적인 해석이다. 아마 그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적인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①노아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시면서 그토록 피 흘리는 것(살인)을 싫어하셨으며(창9:4-6) 하나님의 본성(本性)자체와도 어긋나는 이방의 극악한 관습인 인신 제물을 오히려 요구하심은 어찌된 일인가? ②거듭된 약속과 맹세 속에 겨우 태어난 유일한 약속의 씨 이삭을 이제 와서 다시 거두어 가심은 또한 어찌된 일인가? ③나에게 ‘많은 후손의 아비’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까지 해주셨던 하나님의 의도는 어떻게 된 것인가(창17:5)? 등등.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 모든 갈등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직접적으로 스스로를 계시(음성을 들려주심)하셨다. 결국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의 다시 한번 거듭난 신앙으로 역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막14:36).

그는 브엘세바(맹세의 우물)에서 모리아(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악지대)산이 있는 예루살렘까지(약80km) 삼일 길을 떠난다. 이 여정(旅程)은 마치 온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던 비아 돌로로사(골고다 언덕길)를 연상시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순종과 헌신의 길이요, 지성소를 향한 속죄의 길이었다. 훗날 모리아 산은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곳이기 때문이다(대하3:1).

모리야(מוֹרִיָּה)는 마르에(מַרְאֶה)와 예호와(יהוה)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보이신 곳’ 이란 뜻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을 지정하시고 선택하셨음을 의미한다.

“제 삼 일에” 지시받은 날로부터는 나흘째다. 이것은 유월절 양을 잡기 나흘 전 준비하라는 말씀과 완전 일치한다(출12:1-6).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행길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발자국마다 서려있는 아버지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사복음서의 뒷부분,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분이 길게 언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아이와 함께 돌아오리라” 사라와 및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고뇌 섞인 대답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죽은 것 같은 자신의 몸에서 기적적인 탄생을 체험한 아브라함(롬4:18-22)이 다시 하나님의 뜻을 믿고 독생자의 초자연적 부활을 소망하는 신앙고백으로 해석할 수 있다(히11:17-19).

“번제 나무을 취하여 그 아들이삭에게 지우고”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이삭에게 등에 지우는 이 장면은 하나님의 전(前) 계시의 상징적 요약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짊어져야할 죄악의 십자가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옮겨 지우는 대속(代贖)의 사역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사53:4-6 요일19:17).

“내 아버지여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질문은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불확실하고 암담한 세대를 살아가는 당시의 모든 인류가 애타게 부르짖는 질문이다. 그 어린 양은 어디에 있는가 ? 이 사건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수없는 어린 양을 죽였어도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사1:11-14). 그러나 복음 시대에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나오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명쾌하게 선포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어린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אליט יראה־לו 엘로힘 이르예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나는 고백이다. 인류사에 있어 가장 고통스런 아들의 질문에 대하여 가장 현명하고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으로 답변하고 있다. 이는 성부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할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심을 나타낸다.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두 사환을 아래 머무르게 하고 이삭을 데리고 제단으로 올라갔다. 나무를 벌여놓고 제물만 잡으면 된다. 그런데 제물이 없다. 이 순간 이삭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아들인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고 결박하는 것이 아닌가! 이삭은 어떠했을까? 이삭은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믿기 어려운 이삭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그렇게 순순히 결박을 당한 것은 아버지가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모습과 자신에게 변함없이 베풀어준 사랑에서 온 것이었을 것이다. 이삭은 아비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순종하며 몸을 맡겼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부하나님의 뜻대로 대속의 제물로 순복하셨다(사53:7 마26:47-56). 이삭은 제물이 되지 않았지만 성부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를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셨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성경 마태복음27장 45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이 부분의 해석은 성부 하나님께서 차마 눈뜨고 보실 수 없어 눈을 가리우시는, 이어서 땅이 갈라졌다는 표현 또한 가슴이 터지는 통곡하시는 문학적 표현으로 해석해야 한다ㅠ.ㅠ)

11~12절 : 하늘의 소리 두 번째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는 것은 사태의 긴박성과 함께 부르시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또한 이름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즉 아브라함은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통해서만이 영적으로 열국의 아비인 ‘아브라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3~14절 : 준비 되어 있는 제물 “여호와 이레”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한 수양을 필두로 수없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수없이 죽어간 짐승들은 오로지 한 사건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흠 없는 한 어린양의 영원한 제사, 즉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다(레1:4; 16:21,22 민3:12,41; 8:18 사53:4-6 고후5:21 갈3:13 벧전2:24).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대신(代身)의 역사(the history of substitution)이다. 여호와 이레는 8절에 근거하여 명명한 이름일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인 성도들을 항상 살피시고 그 뜻과 필요에 따라 미리 준비해 놓으신다는 뜻이다.

15~19절 : 하늘의 소리 세 번째 “네 아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시험 후 재확인된 축복으로서(창12:2,3,6; 13:14-16; 15:5; 17:1-8) 아브라함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진 약속이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맹세의 보증인은 맹세하는 자보다 더 커야 한다. 그래야만 맹세에 권위가 서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했다(삼하19:7; 21:7 왕상1:30; 2:8,23 느13:25 사19:18).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스스로를 가리켜 맹세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것이 가장 확실한 보증이었다. 즉 영원한 존재이신 자신을 담보로 맹세한 그 약속은 반드시 그리고 가장 엄숙히 시행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히6:13-17).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일차적 의미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자기 원수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성읍을 점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영적 의미는 장차 메시야를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 즉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며 모든 암흑의 세력들을 극복할 것이라는 의미다(갈3:7-9,14).

“네 씨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파악한 대로 복의 근원자가 될 어떤 특정한 ‘유한한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 씨’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0~24절 : 이삭의 아내를 예비하셨다. “밀가가 …나홀에게서 자녀를 낳았다”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족보이야기는 단지 과거 인물들의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구속 역사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밝혀주고 뿌리 깊은 역사성을 제공하는 복합적 기능을 담고 있는 역사기록의 축소판이다. 본문은 한마디로 아들 이삭의 배필인 며느리를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처음으로 동생 나홀의 근황 소식이다. 갑작스럽게 본 기사가 소개되는 것 같지만 이유는 나홀의 가문은 아브라함 가문과의 혈통의 보존의 결혼으로 아브라함 사후, 하나님과의 언약을 계속 이어나갈 이삭, 야곱 등의 언약적 혈통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브가와 라반을 낳은 브두엘이 본문의 등장하고 중심인물은 리브가이다(창24:15,29). 그 이유는 리브가는 후에 이삭의 아내가 되어 언약을 이을 야곱(쌍태)을 잉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라반은 야곱의 아내가 될 두 딸 라헬과 레아를 낳았다는 것까지 소급하고 있다.

◐본문을 통한 소고◑

~~~에 들어갈 단어가 무엇인지 맞춰보라!

~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

~ 쉽게 변하지 않는다.

~ 믿을 것이 못 된다.

~~ 집안에 거두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고 대답했으면 50점

나 자신이라고 대답했다면 100점이다. ^^

이러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정말 애쓰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고치고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가 본문 전체에 나타나고 있다.

첫째 : 상응하는 징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말 안 듣는 사람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 라는 속어가 있다. ^^ 인생막대기와 사람 채찍까지 징벌의 도구 사용하셔서 선택한 한 사람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다(삼하7:14,15).

둘째 : 전능하신 역사를 통하여 변화와 성장을 만들어 가신다. 꿈에, 전쟁에서, 불과 유황 등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그에게 역사하셔서 신뢰와 믿음을 성장시키신다.

셋째 :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갈대아우르에서 불러내신 그 날부터 현재까지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과 및 그와 약속한 언약에 있으셨다. ▷. 그가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큰 소리쳐도 만약 순종이 없다면 그 사랑은 입에 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증명되지 않은 사랑은 현실이 아닌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숱한 삶의 여정(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던 그 순간부터 ~ 지금까지)에서 하나님은 한 번도 실망시키거나 버리지 않으시며 인도하셨다.

넷째 : 이러한 질긴 인간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고 성장시키시려고 무던히도 인내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끝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거친 세월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때로는 그의 신앙이 하강곡선을 그릴 때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절대적 믿음이 아닌 조건적인 믿음)의 성장을 가져왔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는 믿음을 갖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 만약 나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고 마지막 3일을 자녀와 여행을 한다면, 아이와 어디를 가겠는가?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태어난 곳, 삶의 굴곡이 있었던 자리를 여행하고 싶다.

그리고

서로 돕고 우애하고 살아라.

힘이 되어 줘야한다!

지지자가 되어 주어라!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신뢰하라!’

@창세기22장 1-24절.hwp 0.04MB

[창세기 22장 아브라함 설교말씀] 모리아 산의 번제(창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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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22장 아브라함 설교말씀 중에서 번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제물로 받지 않고 어린양을 준비해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창 22:1-8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 명제 : 번제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였다.

♣ 목적 : 나의 삶에 항상 번제가 드려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자녀였고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시기를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땅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어느 날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브엘세바에서 17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번제는 עולה(올라 5930)입니다. 올라가다, 치료받다, 올려 보내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번제의 제사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제사이고, 제사를 통해서 영육이 치료되는 제사이며, 모든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올려 보내는 제사가 번제의 제사입니다. 그럼 번제는 어떻게 드려지는 제사입니까? 제사의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정결해야 합니다.

레1: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먼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조금의 흠이 있으면 반드시 제물로서의 가치가 떨어져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물로 드리라고 하셨고 수컷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반드시 피를 흘려 속죄가 있어야 합니다.

레1:4-5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고 피로 인하여 속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속죄가 되지 않으면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번제를 통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림으로 속죄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물에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안수하여 죄가 전가되게 했습니다.

3.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야 합니다.

레1:6-7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물은 반드시 각을 떠야 합니다. 각을 뜬다는 것은 뼈를 추리고 살을 발라내서 불에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이것이 번제의 제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지금까지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 인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과 자신의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 버린 것과 이삭을 주신다고 했을 때에 믿지 못한 모든 것을 번제를 통해서 깨끗하게 속죄하시기 위하여 이삭을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릴 때에 제물은 흠이 없어야 된다고 했는데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을 보면 이삭의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삭은 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삭의 삶을 보면 순종하여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번제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시는데 하나님께서는 피엘 강조능동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시험이 쉬운 시험이 아닙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시험을 하나님은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아야 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하여 강한 시험을 준비하셔서 이 시험을 통과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의 땅으로 가서 거기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עלה(알라 5927)입니다. 히필, 명령법을 사용하고 올라가게 하다, 들어 올리다, 라는 뜻입니다. 히필은 사역능동으로 시켜서 하는 것이고 이것이 명령법을 사용함으로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받으시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지역이 모리아일까요?

‘모리아’는 מוריה(모리야 4179)입니다. 이 말의 어근은 예호바에서 왔습니다. 여호와, 주님, 자존자, 영원한 자의 뜻이 있고, 감찰하다, 주목하다, 바라보다, 라는 뜻의 어근에서 온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모리아의 산으로 가라고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곳은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이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을 감찰하시고자 하셨으며, 어떻게 믿음으로 번제를 드리는지 주목하고, 바라보기로 하셨던 장소입니다. 이 장소는 훗날에 다윗이 번제를 드려 재앙을 멈추게 한 장소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한 장소가 됩니다.

이곳이 현재의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모리아의 한 산은 시온 산입니다. 이 시온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산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장소까지도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와서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고난이 있으면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이 히필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감동을 주신 것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도 강한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아브라함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 제사에 쓸 물건들을 준비했는데 이 준비를 피엘 강조능동으로 나무를 쪼개고 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데 모든 힘을 다해서 나무를 쪼개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번제의 제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예배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나오기 위해서 내가 모든 것들을 미리 준비하고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루 전날 기도하면서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심령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예배를 피엘 강조능동으로 준비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22:4-5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삼일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루에 장정이 길을 걸으면 20Km를 걸어간다고 합니다. 삼 일 길이라면60Km를 걸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고하고 애써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반드시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도 정성이 있고, 말씀도 정성이 있어야 하고, 기도의 순서를 맡은 사람도 정성껏 준비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을 기다리게 하고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둘만 산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은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예배하고’는 שחה(샤하 7812)입니다. 히트파엘, 미완료를 사용하고 있고 엎드리다, 경의를 표하다, 복종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최고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의를 표하기 위함으로 이삭과 올라간 것이고, 복종하기 위하여 올라간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의 제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기 위해서 경배하러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복종하여 기도하기 위해서 혼자 올라간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혼자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도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율법과 성막을 받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밧모 섬에서 유배되어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바쁘게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 없어집니다. 세상에 파묻혀 살다 보니 하나님을 만날 만한 시간이 없고 대화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나만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모리아의 산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 산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모리아의 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22:6-7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번제에 나무를 가져다가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십자가를 직접 지고 올라가시는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이미 알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아무 대답도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올라가신 것처럼 이삭도 현재 자신이 번제물이 될 것을 알고 나무를 짊어지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불과 칼과 번제에 쓸 나무는 있는데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준비하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친히 이삭을 살릴 것을 믿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창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숙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늘 흔들렸는데 많은 세월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의 연단과 훈련 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량까지 성숙되고 성장되어 가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도 믿음이 멈추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믿음이 점점 성숙되고 믿음이 굳건해져 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까지 성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번제를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께 올라가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모든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하늘로 올라가야 되고, 예배도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은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최고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하나님께 예배의 삶을 살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최고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이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기에 합당한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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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 시험받는 아브라함 – 새벽기도 설교

이삭의 출생이후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은 고통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이 점차 성숙해지고 가정에 평화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좀 행복하다 할 그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삭을 제물로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저울대에 올려놓은 하나님의 거룩한 시험이었으며, 보통 이 사건을 구약의 구속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믿음으로 승리하여 하나님께 복의근원이 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1. 본문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귀중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연단시키시고 좀 더 견고히 세우시기 위해 그를 시험하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아브라함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서 실질적으로 축복하시기 위하여 그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한마디로 말해서 “네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번제란 원래 제사에서 제물을 전체를 몽땅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아브라함으로서는 무척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는 즉각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 아브라함의 특징은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7절에 모리아 산을 향해 가는 도중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제물이 자신의 아들 이삭인줄 알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 드디어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산에 도착했습니다.

그 가는 길이 3일이었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이 3일이 참으로 생각이 많은 삼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지옥 길 같은 3일 동안에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장소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번제물로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가 번제 나무를 가지고 갈 정도라면 어린아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보다 힘이 더 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자신이 죽게 되는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결박하고 그를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차례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기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죽이기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작으로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 사자 굴에 들어간 다니엘, 불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순교, 사도바울까지… 그 뒤를 이은 우리 선배들의 목숨을 건 믿음의 모습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나라의 믿음의 선배들 중에서 이러한 신앙을 닮은 분은 “일사각오”를 고백한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시기 전, 마지막 설교에서 다섯 가지를 두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로부터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이 무서워 내가 의를 버리고 내 믿음을 버리지 않게 주님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거늘 어찌 내가 이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梧)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에서 나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둘째, 장시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두 번 받는 고난은 혹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견디기가 참 어렵습니다. 내 말 한 마디 타협하거나, 내 고개 한번 까닥 하면 이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어느 누구도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나같은 연약한 약졸이야 이루 말해 무엇하리요? 다만 내 주님만 의지하오니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셋째, 내 어머니와 내 처자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도 지중하고, 한 남편과 아비된 책임도 무거워 더욱 괴롭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알거늘 어린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지 아니할 수 없는 이 마음 한없이 괴롭습니다. 자비하신 내 주님께 부탁하오니 인정의 젖줄에 내가 얽매이지 않게 기도합니다. 순교자로서 갖춰야 할 초인적인 용기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 주시옵소서. 백성은 나라에 대한 충절의 의가 있고, 여인이라면 남편에 대한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가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에게 내 정절을 깨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도…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든 사형장에서든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내 주님께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이 곧 나의 집입니다. 죄악에 오염된 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케 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솔직하고 고귀한 믿음의 고백아닙니까?

저는 이 일사각오의 믿음의 고백을 보면서 지금 이 시대야말로 주기철목사님처럼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기나긴 고난을 이기고, 가족을 주님께 맡기고, 의에 살고 의에 죽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정말 절실히 필요로 한 때가 아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교회가 이러한 믿음위에 설 수 있도록 기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3.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0절에 아브라함이 제단에 놓인 이삭을 칼로 내리치려고 할 때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의 온전한 순종 앞에 이제 오히려 하나님께서 급해지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됩니다.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증되었을 그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부르고 그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제물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맡길 때 역사하십니다.

조금이라도 나의 욕심이, 나의 죄 된 마음이 남아 있다면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을 비우고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였습니다.

이삭은 그가 백세에 낳은 혈육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가장 귀한 아들 이삭까지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위를 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칭찬하시며 이삭 대신 예비한 숫양으로 번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시험에 당면하게 됩니다.

날로 번창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해 버리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가 목전에서 숨져 가는 등의 사건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은 큰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이 임한 것처럼 우리도 모든 시험을 믿음과 인내로 승리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창 22:1-19)

제목 :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

본문 : 창세기 22장 1-19절

설교자 : 이병권

창세기 22장입니다. 이제 드디어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삭을 바치는 사건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정말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라 별 다른 마음의 충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의 임무 중에 하나는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이 느꼈을 충격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은 아들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하나님의 약속의 결과로 얻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귀했을까요? 보통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손주 사랑이 끔찍함을 볼 수 있습니다. 손주들의 모습을 보면 마냥 좋은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얻은 이삭을 보며, 즐거운 일상,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오기 전에 너무도 잔잔하고 고요한 날이 지속되는 것처럼 그런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명령이 떨어집니다. 1절과 2절에 그 당황스러운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1-2)

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명령입니까?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그냥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 하나뿐인 아들,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들을 자신이 칼로 죽이고, 그 죽은 아들의 몸을 불로 태워야 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어떤 일이 사람에게 얼마나 충격이 될까하는 것은 그 일이 얼마나 큰일이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얼마나 대비가 되어있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지진이 있었고 그에 대한 피해가 있었습니다. 만약 똑같은 강도의 지진이 일본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분명히 일본은 우리나라만큼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진을 예상하면서 그에 대한 준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면 어떨까요? 그 충격은 훨씬 더 커집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했습니다. 이 아들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 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해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실 거라는 어떠한 예고도 없었습니다.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의 인생에 커다란 폭탄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좀 더 그 느낌을 살려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너의 유일한 아들 이삭, 그를 번제로 바쳐라.’

25년을 기다려 불가능한 상황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사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하갈로부터 얻은 이스마엘은 이미 떠나보내고 없습니다. 이 아들 말고는 없습니다. 사라가 다른 아들을 더 낳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자기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함을 알게 해준 아들, 초조함과 염려의 시간들을 기쁨으로, 행복의 웃음으로 바꿔준 약속의 아들, 그런데 이 아들을 이제는 죽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잃게 되는 아픔, 이삭을 죽여야 하는 충격적인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큰 어려움이 되는 일입니다. 이삭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질투하신 걸까요?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될까요? 자연스럽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어질 수 있는 상황 아닐까요?

사람 사이에서 아무리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더라도 말 한마디 잘못하면 정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관계가 틀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좋은 것 같다가 마음의 어려움이 되는 작은 일 하나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관계가 서운해지기도 하고 때로 다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 정도로 충격적인 일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이 일을 받아들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명령하신 걸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1절에 기록하고 있듯이 이것은 시험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테스트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보기에 알지만, 아브라함은 이것이 시험인 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인지 알기에, 창세기의 저자는 시작부터 이것이 시험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사건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의 시험은 악으로 이끄는 유혹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말하는 시험은 테스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시며 성장시키기 위해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문제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가장 어려울 수 있는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생명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삭이냐 아니면 이삭을 주신 하나님이냐, 선택의 문제인 것입니다. 둘 다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삭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삭을 쥐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시험 문제는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상황, 삶의 환경, 내가 처한 곳에서 시험을 만나고, 그 시험을 통과하기도 하고 때로 시험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지만,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내가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 내가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지, 지금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사람인지, 아니면 돈인지, 아니면 자존심인지, 내가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시험의 결과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내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

이렇게 시험이라는 것이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학교에서 치는 시험을 생각할 때,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시험이 좋다고 하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시험이 싫은데 시험이 필요 없는 거냐고 물으면, 그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시험은 싫지만 유익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시험도 그러합니다.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며,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며, 나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서 어떤 선택을 합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3)

아브라함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순종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두 종과 함께 이삭을 데리고 바로 떠납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아무런 갈등도 없었을까요? 아브라함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태어난 특별한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다른 종류의 인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감정 없이 움직이는 로봇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자식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여느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는 밤새 뜬눈으로 뒤척였을 것입니다. 여러 복잡한 생각과 두려움으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긴 밤을 지나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아브라함의 어떠한 감정이나 갈등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단호한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보면 정말 이 사람이 이삭의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꾸물거림이나 주저함 없이 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혹시나 하며 망설이거나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하며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삼일이나 걸리는 길을 곧장 나아갑니다. 충분히 마음을 바꿀 시간이 있었지만 돌이키지 않습니다. 다른 변명거리를 만들거나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냥 우직하게 말씀에 따라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정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뿐인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존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5)

아브라함은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자신이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미래를 계획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 두 가지는 조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 맞지 않는 모순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없었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내가 모르지만,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렇지만 내가 따르는 분에 대한 신뢰, 그분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순종의 걸음을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이삭은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그 아버지를 따라 걸어갑니다. 그러던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번제를 드린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께 질문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런 건 네가 몰라도 돼!”이렇게 질문에 답하는 걸 피할까요? 아니면 “그건 아빠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거라!” 이렇게 말을 돌릴까요? 아니면 솔직하게 “오늘은 니가 번제할 어린 양이다!” 이렇게 할까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 그 절정의 순간이 왔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서 긴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잔인한 최후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놓고, 이삭을 결박하고,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고,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아브라함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고 그것을 위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칼을 높이 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칼이 이삭에게 깊이 박히려는 순간, 천사의 다급한 소리가 들립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의 빠른 동작 때문에 천사는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을 것입니다. 이 천사의 등장으로 절망을 향해 가던 이야기에 밝은 햇살이 내리 비췹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그분이 대안을 제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합격을 주시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드셨습니다. ‘네가 그토록 소중한 하나뿐인 아들도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이제야 참으로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뿐인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겼으며, 자녀를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때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분의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인생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것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녀보다, 하나님이 우선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첫째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을 발견하고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어떤 고백을 합니까?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고백을 해보셨습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맞습니까?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십니까?

네!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놓치면 안 되고 저것도 버릴 수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나도 이런 게 필요하고 저런 게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그렇게 중요하다 싶은 것들을 챙기다보면 어느새 내 인생에서 하나님은 저 멀리 뒤로 밀려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걸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그 순간 그것이 더 중요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두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놓고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놓았을 때 그의 인생이 엉망이 되었나요? 아브라함이 엄청난 손해를 보고 그의 삶이 비참해졌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순종으로 인해 더욱 큰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그에게는 간증이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앞자리에 놓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최우선순위에 둘 때, 자녀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예배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식으로 될지는 몰랐지만, 그리고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첫째자리 둘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 믿음이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을 첫째자리에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가장 귀한 것이라도 기꺼이 주님 앞에 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을 최우선 순위에 두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장 눈에 보이는 손해가 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선택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시험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 각 사람의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시험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선택한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더 생명력 넘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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