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야요이 어린시절 | 정신분열증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예술가가 된 92살 일본 할머니 상위 155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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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자 조각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들은 미즈타마라 불리는 물방울을 모티브로 세계관을 넓혀갑니다. 일본의 자랑이기도 한 그녀는 국가에서 주는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어요. ‘호박’ 같은 작품은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죠? 파라다이스 호텔이나 제주도 본태미술관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녀는 조현병으로 불리는 정신분열증을 아주 어려서부터 앓고 있습니다. 작품은 정신분열증이 표현된 산출물이라고도 볼 수 있죠. 쿠사마 야요이의 숨겨진 작품관에 대해 해설합니다.
5월 19일 그녀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가 한국에서 개봉합니다. 영화를 통해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뉴욕에서 명성을 떨치기까지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직접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참고 글 –
이주헌 미술평론가, 쿠사마 야요이 인물특강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71
BGM – Soft Da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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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 나무위키:대문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 쿠사마 야요이. 일본의 아티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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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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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마 야요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사마 야요이(1929년 3월 22일 ~ )는 일본의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등 야요이의 어린시절은 자신의 상태를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12/2022

View: 4102

강박증을 예술로 승화시킨 쿠사마 야요이(くさまやよい …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을 추구할 뿐이다. – 1985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くさ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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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onestart.tistory.com

Date Published: 3/2/2022

View: 2188

개인의 상처와 시대의 질곡을 극복해 온 노대가의 열정과 의욕

쿠사마가 자신의 작품의 원천으로 지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 … 건너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쿠사마 야요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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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ljin.com

Date Published: 3/2/2022

View: 7904

쿠사마 야요이 연대별 대표작품 소개 – Colorful Life

어린시절 그녀가 그린 그림에는 반점같은 물방울이 화면을 뒤덮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2. 초기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학창시절부터 그림 …

+ 여기에 보기

Source: prunnnn.com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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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쿠사마 야요이 어린시절

  • Author: 발칙한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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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We6P2XLj_k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쿠사마 야요이(1929년 3월 22일 ~ )는 일본의 조각가 겸 설치미술가이다. 쿄토시립 미술 공예학교(현 교토예대) 졸업.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출생, 1957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 일본으로 돌아온 야요이는 나이 48세부터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에 구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진행해오고 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일본관에 초대일본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2004년 도쿄모리 미술관에서 KUSAMA TRIX 전을 오픈하였다. 시드니 비엔날레(2000), 타이페이 비엔날레(1998) 등 다수의 대형 국제전시를 비롯, 총 100여 회의 단체전 및 100여 회의 개인전을 오픈하였다. 문학활동으로는 20여권의 시집 및 소설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생애 [ 편집 ]

어린시절 [ 편집 ]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나 자란 쿠사마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다. 1926년 히로히토 국왕의 왕위 계승, 1931년 만주 침공 그리고 당시의 불길한 전운 모두가 구사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소녀 시절을 전쟁 상황 속에서 보냈으며, 실제로 군수 공장에서 낙하산 재봉 일을 하기도 했다.[1] 그녀의 상태를 병이라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등 야요이의 어린시절은 자신의 상태를 이해받지 못한 채 깊은 상처 속에 지나가게 되었다. 일본의 부유한 가정에서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열 살무렵부터 심한 착란증상을 보였다. 환영을 보기 시작하며 발작과 착란에 시달렸으나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이 부족한 탓’이라며 체벌을 가했다.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고 강박증에 시달리던 구사마는 어린시절 치유받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다.

작가시절 [ 편집 ]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물방울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 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자신의 환영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하던 그녀는 1952년 23세 때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호 박사는 그녀의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쿠사마에게 자신의 병적 정신 상태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후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개의 물방울 무늬 오브제를 깔아놓는다. ‘개당 2달러!’였던 쿠사마의 사인이 적힌 수많은 물방울은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장을 받게한다..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강박증을 예술로 승화시킨 쿠사마 야요이(くさまやよい, Kusama Yayoi, 1929~)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수을 추구할 뿐이다.

– 1985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くさまやよい, Kusama Yayoi, 1929~)

스토리온의 ART & LIFE 또다른 영상

http://program.interest.me/storyon/artandlife/2/Board/View?b_seq=1

쿠사마 야요이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였다

강박신경증과 편집증 그리고 불안신경증으로 인한 병을

자신 스스로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에서 그녀의 활동이 예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둠속에서 밀려오는 공포와 같은 영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괴로움. 하얀 좁쌀들이 벽을 타고 흐르던지 평면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들.

하나하나 모두 벽에서 끄집어내려고 하기위해 스케치북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잠을 잘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있다.

쿠사마 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 마츠모토시에서 출생하고,

1947년 교토시립예술학교에 입학해 1952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쿠사마는 이 전시를 통해 현재까지 지속해오는 작업의 모티브인 유기적으로 연결된 망(net)과 점(dot)

등으로 이루어진 250여 점의 작품을 발표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호박에 대하여

호박은 애교가 있고

굉장히 야성적이며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사로잡는다.

나, 호박 너무 좋아

호박은 나에게는

어린시절부터 마음의 고향으로서

무한대의 정신성을 지니고

세계 속 인류들의

평화와 인간찬미에 기여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호박은 나에게는 마음속의

시적인 평화를 가져다준다.

호박은 말을 걸어준다.

호박, 호박, 호박

내 마음의 신성한 모습으로

세계의 전 인류가 살고있는 생에

대한 환희의 근원인 것이다.

호박 때문에 나는 살아내는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

그녀는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본 뒤, 눈에 남은 잔상이 온 집안에 보이는 경험을 하게된다. 둥근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계속해서 시선과 자신의 신체에까지 따라붙었던 땡땡이 무늬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하게되는 작업의 중요하고도 유일한 소재가 된다. 자신의 환영을 가지고 계속해서 작업하던 그녀는 1952년 23세 때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시호 박사는 그녀의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쿠사마에게 자신의 병적 정신 상태를 깨닫게 해주었 이후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녀는 초청받지 못한 작가로서 전시장 앞 잔디에 약 1500여개의 물방울 무늬 오브제를 깔아놓는다. ‘개당 2달러!’ 였던 쿠사마의 사인이 적힌 수많은 물방울은 관람객의 관심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초청장을 받게한다.

나는 나를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년시절에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 1985 쿠사마 야요이

그녀의 작품에서는 무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무한 거울 방 이라는 설치작품인데

끈임없이 이어지는 무한속에서의 반복과 그 속에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준다.

밑에있는 작품은 소멸의 방이라는 설치작품이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관람객이 직접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수 많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쿠사마 야요이가 느끼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고 스티커를 붙여나가는 과정에서 도트가 채워져

최초의 방의 모습은 소멸되어버린다.

무한공간 ㅡ 무한증식

뉴욕에서 어느 날 캔버스 전체를 아무런 구성없이 무한한 망과 점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내 붓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넘어 식탁, 바닥, 방 전체를 망과 점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 손을 봤을 때, 빨간 점이 손을 뒤덮기 시작했고 내 손에서부터 점이 번지기 시작해서 나는 그 점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 점들은 계속 번져가면서 나의 손, 몸 등 모든 것을 무섭게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고 응급차가 와서 벨뷰병원에 실려갔다. 의사가 진다하기를 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고 정신이상과 심장수축 증상에 대한 진단이 나왔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나는 조각과 퍼포먼스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내 작업의 방향 변화는 언제나 내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쿠사마 야요이

예술가가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벽면을 타고 끊임없이

증식해가는 하얀 좁쌀 같은 것들을

벽에서 끄집어내어 스케치북에 옮겨 확인하고 싶었다.

현재 쿠사마야요이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오는 06월 15일 까지 하고있다.

도트로 된 옷을 입고가면 레스토랑 10%을 D.C 해준다니 가서 직접 경험해보자 !

[Opinion] 정신병을 예술로 승화한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 [미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노란 호박에 수많은 검은색 점이 그려져 있는 이 작품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실제로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로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쿠사마 야요이’하면 떠오르는 이 작품은 <호박>이다. 그녀는 항상 호박의 모티프는 ‘자신’이며, ‘자아’라고 한다. 그녀에게 호박은 어린시절 교감하던 자연을 상징하고, 순수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호박은 그녀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고 말한다.

작품 <호박>을 포함한 쿠사마 야요이의 많은 작품에는 그녀만의 아픔과 괴로움이 담겨있는데, 이는 그녀가 앓고 있는 정신질환을 말한다. 쿠사마 야요이는 어린시절 집안 사업을 책임지는 어머니의 지속적인 폭력, 아버지의 잦은 외도로 인한 불우한 가정사와 전쟁이 일어나는 불안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10살 때 심각한 정신 착란 증상을 처음 겪게 되었다. 다음은 그 당시 그녀가 남긴 글이다.

“어느 날 나는 테이블보에 새겨진 붉은 꽃무늬를 보고 있었는데, 그 무늬들이 훨훨 날아 온방을 채우고, 내 육체와 우주를 가득 채우는 환상과 둥근 물방울 무늬가 공중을 떠다니다가 저에게 붙는 환각을 경험했어요.” – 쿠사마 야요이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질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시절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정신질환을 가진 채 성장했다. 23살에 그녀는 나가노 대학의 교수인 니시 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음을 알게되었다. 니시 마루 시호 박사는 환영으로 나타나는 물방울 모양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작업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 이후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물방울 모양을 미술적 소재로 삼아 작품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으로서 예술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나를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시절 시작되었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추구할 뿐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의 강박관념적인 정신질환을 소재로 한 그녀의 작품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의 뉴욕활동 초기 시절 제작한 <작품 No.F>이다. 멀리서 보면 섬세한 단색조로 보이고, 가까이서 보면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이 캔버스를 가득채우고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은 하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유기적 결합을 통해 존재하다는 의미로 끝없는 그물망을 만든다. 그녀의 강박관념을 표현한 이 미니멀리즘 작품은 이후 그녀의 작가적 모티프를 형성하게 된다.

<무한의 거울 방> 시리즈는 작품 안에서 감상을 하면 무한성을 느낄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울 속에서 반복과, 그 속에 있는 나의 반복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담는 작품이다. 쿠사마 야요이는 작품을 하면서 내 삶의 표면, 내 강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이어갔지만, 오브제와 캔버스는 한계가 있었고, 이후 무한에 대한 표현으로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쿠사마 야요이가 느끼는 환영과 환각의 반복과 무한함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어, 그녀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이름은 <소멸의 방>이다. 하얀색의 빈 방에 방문하는 관람객에게 스티커를 부여해서 방 안에 아무곳에나 붙이게 하고, 이렇게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서 최초의 방이 점차 소멸해가는 참여예술이다. 예술 작품을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는 미술관의 절대적인 규칙을 허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시작해 점차 물방울 무늬의 스티커가 증식해가는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질환의 증상이다. 관람객이 이 작품에 직접 참여하는 그 시간만큼은 쿠사마 야요이가 겪는 정신적 환영에 같이 시달리면서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

쿠사마 야요이에게 ‘작품’은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자, 병을 극복하는 치료요법의 예술 활동이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시달려온 정신질환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며 강박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있다. 그녀가 겪는 헛것이 보이는 기괴한 환각과 학대를 당했던 아픔, 개인적인 집착과 강박관념은 완전히 치료되지 못하는 그녀의 정신질환임과 동시에, 예술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그녀만의 경쟁력이다.

현재 그녀는 1977년 뉴욕에서 일본으로 돌아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병원 내에 쿠사마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품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그녀의 삶에서 보여지는 예술에 대한 애정과 끈기는 지금 힘든 사회를 살아가는 2030세대 현대인에게 더욱 큰 위로와 극복 에너지로 돌아오게 되며서 작품의 매력을 더 부각시키는 기능으로 순화한다고 생각한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쿠사마 야요이는 올해 84살이다. 보통의 경우 이 나이의 사람들은 지나온 삶을 회고하고 정리하면서 다가올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게다가 어떤 이는 이 나이를 맞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쿠사마의 경우에는 이와는 무척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쿠사마는 초기 일본의 활동에서부터 미국, 유럽, 남미, 호주, 중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60년 넘게 회화뿐 아니라 콜라쥬, 조각,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최근에도 쿠사마는 국제적 규모의 전시를 여러 번 개최하여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고 있으며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와 같이 새롭게 순회가 예정된 전시가 계획되는 것도 있다. 2011년에 발간된 작가의 자서전 에서 쿠사마는 자신을 아직도 성취해내야 하는 일이 있는 작가(aspiring artist)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작품 활동과 저술활동을 통해 자신이 아직도 이세상의 구석에 몰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고통스런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을 극복해내고싶어한다는(‘to triumph over the pain of feeling cornered and trapped,’) 의욕을 내보였다.

쿠사마가 자신의 작품의 원천으로 지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환각(hallucination)이다. 환각은 우리의 오감에 모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감각과 다르게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인 자극이 없이도 스스로 드러나서 마치 실제로 어떤 상황과 현상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끼며 그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이러한 환각을 체험하는 상황은 안정적이고 정상적인 상황이기보다는 뭔가 불안정하고, 결핍과 신경쇄약이나 공포 등이 그 촉발원인으로 개입되는 상황인 경우가 적지 않다. 쿠사마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과 관련하여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호안 미로는 카탈루니아에서 파리로 이주해 온 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 하루에 말린 무화과 몇 개로 끼니를 대신하면서 배고픔을 참아냈는데, 이 때 그는 정자를 죽이는 피임약물이 수프 위에 둥둥 떠다니는 환각을 체험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쿠사마 역시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에 동물이나 식물들이 자신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듣는다든지 자신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 주변으로 오로라처럼 빛이 발산되는 시청각적 환각을 경험하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작가의 성장배경을 살펴보면 쿠사마에게는 환각을 촉발하는 요소가 어린 시절부터 가족 내에 상존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 일본 나가노 지방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의 체벌과 욕설이 수반되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자살충동과 망상에 빠져 그리 행복하지 못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린 쿠사마에 대한 모성의 결핍은 쿠사마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버려진 느낌이었다는 자서전의 고백에서 그 심각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쿠사마의 어린 시절은 2차대전 전쟁중이었으며 10대에 들어서면 2차세계대전의 당시자인 일본이 처한 전쟁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라서 쿠사마가 아니더라도 그 시대를 살던 일본인이라면 누구라도 전쟁의 공포 속에서 불안과 결핍의 시간을 지내야 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전쟁의 막바지에는 어린 쿠사마 마저 군수공장에 반강제적으로 불려가 낙하산 재봉 작업을 해야 했었다.

어머니에 비하여 아버지는 쿠사마에게 위협적이기보다는 무심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아버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모습처럼 쿠사마의 아버지도 여성 문제로 아내와 다투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여러 차례 보여주는 가장이었으며 어린 쿠사마의 형제들과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는 무책임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사의 경험으로부터 쿠사마는 결국 남성에 대한 혐오와 거부의 심리를 키워 나아가게 된다. 쿠사마의 작품 가운데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돌기들은 이러한 남성혐오와 더 나아가 남성성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 작가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출품작 가운데 2004년작인 <영적 재생의 순간(The moment of Regeneration)>이나 2012년작인 <천국으로 가는 계단(Ladder to Heaven)>과 같은 작품들은 원래 쿠사마가 갖고 있는 남성성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과 태도를 담고있다고 볼 수 있다.

쿠사마에게 어린 시절의 불행과 불안에 대한 중요한 탈출구 가운데 하나는 그림이었다. 작가는 20대 초반 시절부터 일명 폴카점(Polka Dot)이라는 점무늬 패턴과 그물망처럼 사방으로 연속되는 패턴(작가는 이러한 작품을 ‘infinity nets’라고 불렀다)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쿠사마가 10살 때인 1939년에 그린 두 점의 연필 드로잉 소품에는 이미 작가의 성숙기에 대표적 표현 기법으로 자리잡는 이러한 점들과 유사한 패턴이나 그물망 형식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쿠사마가 작품화면 속에 점을 도입하는 것을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작가 부모의 가업인 씨앗 배양작업에서 일상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씨앗이나 배양과정에서 뿌려주는 물(방울)을 점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환원하여 작품에 도입한 것으로부터 폴카점으로 진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녀에게 무한으로 증식되는 점과 그물의 패턴은 곧 우주의 무한함과 영원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1959년 뉴욕의 브라타(Brata)화랑에서 열린 첫 미국 개인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그물’이 곧 자신의 과거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 전시에서 도널드 저드는 쿠사마의 그물 작품 한 점을 구매하였다).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마주하는 어린 소녀의 무의식적 방어기제는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가서 현실을 이탈하는 환상과 공상을 무한대로 증식시켜 나아가는 것이었을 거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쿠사마는 회화 100여 점, 조각 8점, 설치작품 6점 내외, 그리고 영상 작품을 출품했는데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 2008년작 는 이런 의미에서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작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표 역할을 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성으로서의 쿠사마를 자연스런 남녀관계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평생을 통해 쿠사마는 자연스런 이성으로서의 남자친구를 갖지 않았다. 오직 한 번의 예외가 있다면 26살 연상의 미국작가 조셉 코넬(Joseph Cornell)과의 플라토닉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는데, 미술잡지 Artforum과의 인터뷰에서 쿠사마는 그들 둘 사이의 관계가 10년 정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쿠사마가 성적 접촉을 싫어하는데 마침 코넬이 성불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쿠사마에게 정신적으로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으며 1972년 코넬이 사망하자 쿠사마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앞서 쿠사마가 27살인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데에는 미국의 케네스 칼라한(Kenneth Callahan)과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대학에서 일본화를 공부한 쿠사마는 당시의 일본미술계의 위계적 질서와 도제적 수업분위기에 실망을 느끼고 있던 차에 1955년 우연히 오키프의 화집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편지와 자신의 수채화 작품을 보냈다. 동시에 쿠사마는 칼라한에게도 자신의 작품과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던 쿠사마에게 오키프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왔고 칼라한은 쿠사마의 작품에 매료되어 이듬해 시애틀에서 그녀의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쿠사마는 이 일에 고무되어 마침내 1957년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 채로 일본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향했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쿠사마는 집 뒤편 강둑에서 그때까지 제작했던 수천 점의 작품들을 불태워버리며 미국에서 보다 나은 작품 활동을 하겠노라는 비장한 결심을 하였었다.

시애틀에서 한 해를 머문 뒤 쿠사마는 뉴욕으로 이주하였는데 곧바로 대담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면서 현지 작가들과의 교류에 돌입하여 당시 뉴욕의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주류에 편입된다. 1961년 쿠사마는 도널드 저드와 에바 헤스가 살던 건물로 이사하였고 그 일을 계기로 이 작가들과 깊은 친분을 쌓게 되는데 특히 에바 헤스는 쿠사마와 절친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자서전에서 쿠사마는 자신이 이 때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쿠사마 야요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하였다.

쿠사마의 평면과 입체 작품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반복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일정한 패턴이 무한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의 성격은 부분적으로 팝아트적 특징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환각에 입각한 초현실적인 성격과 단색조의 대형 화면에 기계적인 반복을 전면적으로 작품에 적용하는 면에 있어서 미니멀아트의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1963년부터 쿠사마는 거울을 이용하여 작품이 차지하는 공간의 볼륨을 무한대로 확장시킴으로써 확산을 통한 강박증의 희석과 이를 통해 새로운 미학적 의미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여정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쿠사마의 작품은 주제면에 있어서 다분히 개념적이면서 내용적으로 페미니스트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반복에 의한 주제의 객관화(depersonalization)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공포와 불안을 일상의 평범한 소재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번에 출품한 (1994)나 (2008), (2008), (2011)과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개념에서부터 출발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쿠사마가 1960년 전후로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남성 작가 중심으로 활발하게 미술의 담론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1961년 를 출간하여 젊은 작가들의 전위적 실험미술을 옹호하였고, 플럭서스 운동에 가담한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64년이었다. 같은 해에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에 쿠사마도 팝아트,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1965년에는 록펠러재단에서 지원하는 창작지원금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그 당시 작품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듯이 창작에 몰두하였는데 이번에 출품된 과 같은 설치작품은 쿠사마가 그 무렵 미국의 작업실에서 작품 제작에 집중하면서 사방 벽과 천정까지 모두 점들로 뒤덮이는 환각을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으로 탄생시킨 설치 작품이다.

1966년 쿠사마는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장 앞 야외에서 이라는 제목으로 1500개의 플라스틱 공을 설치하고 한 개에 1200리라(약 2달러)에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이듬해에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라는 주제로 누드 인물들을 통해 보디페인팅 형식으로 작품을 펼쳐 보여주는 해프닝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뉴욕의 주요 장소에서 벌인 이러한 해프닝 작업은 뉴욕 미술계뿐 아니라 일반인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끌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1968년 쿠사마는 영상 작업에 착수하여 이라는 회사와 라는 프러덕션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반대운동으로 누드 퍼포먼스를 기획하기도 하면서 당시의 동료작가들과 미디어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쿠사마 야요이는, 그녀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의 말처럼 미디어와의 접촉에 매우 민감하며 상당히 정성을 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점무늬 의상에 오렌지색이나 ,코발트색과 같은 강렬한 색상의 가발을 쓰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작가의 연출된 듯한 모습은 작가의 강한 자아와 정신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태도로 인해 미디어는 그녀를 사실적으로 보도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신비화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될 수도 있다. 쿠사마는 작품활동 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일찍이 뉴욕에서 활동할 때부터 작업도중 과로로 정신적 문제가 발생하여 종종 병원신세를 지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진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자품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는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쿠사마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행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이어진 정신적인 위기와 고통을 창작활동을 통해 극복해낸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녀의 지나치리만큼 연출된 듯한 미디어와의 접촉 모습이 작품을 떠나서 작가의 개성에 집중하게 하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는 이들도 있다. 일찍이 쿠사마가 23세 때인 1952년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는 쿠사마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내렸었다. 그리고 1962년 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쿠사마는 주변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모방한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작업실 창문을 가리고 작업을 하기도 하였으며 결국 신경쇄약으로 병원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자서전에서 쿠사마 자신도 스스로의 정신 상태에 대해 문제가 있었음을 고백적으로 서술하여왔고 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자진하여 도쿄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활하기도 하였다.

뉴욕에 머물던 동안에 1970년 잠시 일본을 다녀간 쿠사마는 이 무렵부터 작품활동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78년 라는 첫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 이번에 출품된 영상작품 는 이 환각적인 자서전적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상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쿠사마는 작품제작보다 문학활동에 시간을 더 많이 쏟게 되며 소설과 시에 몰입하여 많은 작품들을 출간한다. 이외에도 쿠사마는 최근까지 수십 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시화집 등을 출판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쿠사마의 작품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1966년 베니스에서 퍼포먼스를 벌인 지 27년만에 마침내 1993년 일본 대표로서 공식적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다. 그 후 쿠사마는 타이페이, 시드니, 발렌시아 등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열리는 수많은 비엔날레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쿠사마는 이제 이러한 활발한 활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하게 되었으며 일본 교육부와 외교부 장관상을 받을 뿐 아니라 200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쿠사마의 작품 제목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들을 발췌해보면 Love, Soul, Forever, Eternal 등이 발견된다. 이러한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은 영원한 사랑, 정신적인 사랑, 사랑의 영원성, 무한한 정신세계 등인데 쿠사마의 작품들 역시 작가가 관심을 두는 주제인 이러한 표현의 범위 안에서 ‘예술에 내재한 진리’(truth in art)의 추구를 위해 반복적으로 창작되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쿠사마는 판화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몇 년을 주기로 자신의 판화집 총목록을 책으로 펴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자신의 판화 작업을 작품 속의 점이나 그물망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것처럼 작품이 판화기법을 통해 수적으로 확장되는 것과 유사한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평면과 입체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점으로 덮여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명쾌하면서도 모호하다. 반복되는 점과 그물망 무늬는 매우 노동집약적이고 강박적이어서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랑한 리듬감과 묘한 에너지의 발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들은 얼핏 보기에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함이 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랜 연륜에 의해 이루어진 단순함의 무게를 쉽게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쿠사마는 평론가들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지만 적극적으로 상업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점차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아 200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그녀의 작품이 510만 불에 낙찰됨으로써 당시로서는 살아있는 여성 작가 가운데 가장 비싼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쿠사마는 점차 상업화랑으로부터 초청을 받기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고시안 화랑에서 2009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최근까지 이 화랑의 전속작가로 활동하였다.

쿠사마의 작품들은 화화나 조각의 성격과 함께 디자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쿠사마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디자인적인 요소는 그녀의 작품을 미술관이나 화랑을 벗어나 백화점의 디스플레이나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에 접목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쿠사마는 2012년 5월 루이비통의 아트디렉터 마크 제이콥스와 협업하여 가방과 손지갑 등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물방울 무늬를 응용한 제품들을 출시하기도 하였다.

최근 쿠사마는 바쁜 해외 전시 일정 가운데에도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2013년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 힐즈에서 열린 롯폰기 아트 나이트(Roppongi Art Night)에서 쿠사마는 자신의 모습을 거대한 풍선으로 형상화한 <야요이짱>과 개를 형상화한 <린린>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작가는 이 작품들을 통해 사랑과 예술을 믿어온 지난날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 등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에 있지만 커다란 희망을 갖고 우리들의 인생을 살아가자”고 호소하였으며 “나의 물방울은 사랑과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작가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평생 자신을 붙잡아 온 환각과 불안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쿠사마는 고령에 악화된 건강을 이겨내면서 현재까지 그것을 물감과 펜과 연필로 묘사해내는 작업을 꾸준히 지속해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쿠사마는 마침내 어린 시절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환각과 불안을 작품 속에 녹여 넣어 자신의 의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이 창조적 표현이나 치유와 위안의 상징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2012년 7월 자신의 고향인 일본 나가노 현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영원의 영원의 영원(永遠の永遠の永遠)’전에 참석한 구사마는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자작시를 읽으며 거기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쿠사마는 여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필사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나이를 이렇게 먹어버린 것이 유감이지만…. 저는 오랫동안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러한 쿠사마의 작품 이력을 살펴보고 나면 이번 대구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평생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역경을 극복한 노대가의 열정과 의욕을 가시화한 더욱 더 의미 있는 전시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 연대별 대표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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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을 한번쯤 들어보셨나요? 현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현대미술 아티스트로서 그 작품들이 고가에 거래되면서 화제가 되며 가끔씩 뉴스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이름입니다. 오늘은 쿠사마 야요이의 연대별 대표작품과 그의 예술활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쿠사마 야요이

1. 유년기

쿠사마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의 유복한 집안의 넷째 딸로 태어납니다. 어릴때부터 정신적인 병으로 인하여 꽃에게 말을 걸거나 본인의 목소리가 개 소리로 들리는 등 환상과 환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두려움을 잠재우는 수단이 되었고 어릴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신경쇠약 증이라던가 강박증이었다던지의 추측이 많습니다만 어린시절 아버지의 가정에 대한 태만과 그로 인하여어머니의 히스테릭으로 학대를 받았고 이에 의한 정신질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무제 1939년 작

오늘날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에서 상징성을 나타내는 물방울은 그 환각을 통해 보였던 물방울 모양을 표현한 것이 시초가 되었습니다. 어린시절 그녀가 그린 그림에는 반점같은 물방울이 화면을 뒤덮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2. 초기 일본에서의 작품활동

학창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해 그림실력이 높이 평가받아 교토시립의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다만 세밀한 묘사 등 정형화된 미술화법을 가르치는 교육에 질려 학교에 잘 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이 무렵 49년 이후부터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화를 그만두고 감정이나 느낌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추상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좌) 잔몽 1949년 작 (우) 태양 1953년 작

1952년 마츠모토시 제일공민관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이 개인전에서 신슈대학의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니시마루 요카타씨가 참석하게 되고 그 후 학회에 쿠사마야요이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등 그녀가 미술 평론가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첫 개인전을 개최한 후 미술평론가의 지지를 얻어 도쿄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여 주목을 끌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55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 18회 국제 수채화 비엔날레에 일본대표로 참석하게 되고 이 전시를 본 시애틀의 한 미술관으로부터 제의를 받아 57년에는 첫 해외 개인전이 개최되었습니다.

3. 뉴욕에서의 전성기

이듬해인 58년부터는 유럽을 대신하여 예술의 중심지가 된 뉴욕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미국에서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지만 조각가인 도널드 저지나 영상작가인 조지프 코넬 등을 알게되어 서서히 조각작품이나 설치미술을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쿠사마 야요이와 조지프 코넬과는 72년 조지프가 사망할때까지 연인이자 파트너로서 함께 생활합니다.

뉴욕에서의 쿠사마 야요이 Infiniti Nets Yellow 1960년작 The Man 1963년작

검은 바탕을 두른 거대한 캔버스에 작은 호를 여러개 그려 2M, 4M 가량의 화면을 가득채워 완성한 작품이 대표작인 무한한 그물 Infinity net 입니다. 무한한 공간을 표현한 이 작품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물방울이나 그물모양의 표현방식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현지의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은 후 미국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하게 됩니다.

무한한 거울의 방 1965년작

나르시스의 정원 1966년 작 자기해소 1967년 작

이 시기에는 새로운 표현방식의 일환으로 평면적인 회화 뿐만 아니라 입체 작품에도 도전하게 됩니다. 의자나 테이블, 식기에 이르기까지 흰 패브릭을 설치해 덮은 작품으로 소프트 스컬프처라고도 불리는 오늘날 유명한 입체예술 섬유예술의 표현방법 중 하나입니다. 65년에는 방의 사방을 거울로 둘러싸고 바닥 일면을 소프트 스컬프처로 채운 설치미술을 발표하여 무한한 세계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보여주었습니다.

쿠사마 해프닝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평화나 사랑을 호소하는 반전운동이 미국에서 큰 사회현상이 되고 있던 67년경부터 쿠사마는 독자적인 전위예술 퍼포먼스인 ‘해프닝’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벌거벗은 남녀가 춤을 추는 가운데 그 몸에 물방울을 그리는 퍼포먼스입니다. 이는 생명의 원자 중 하나를 뜻하는 물방울을 그리면서 인체도 자연도 원자의 하나로 돌아가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자기가 소멸되어 우주로 돌아간다는 새로운 표현이었습니다.

4. 다시 일본으로

1973년에는 오랜 연인과 아버지가 잇달아 사망하고 쿠사마 야요이 본인의 원래 앓고 있던 정신적 질병까지 겹쳐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며 안정되지 않는 시기가 계속되고 ‘해프닝’이라는 전위예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일본국내의 비판에 의하여 귀국 후에는 그다지 큰 활동을 하지 않고 조금씩 잊혀지는 듯 했습니다.

자살한 나 1977년 작

다만 이 시기에는 문학창작활동을 계속하여 78년에는 맨해튼 자살미수 상습범이라는 작품을 발표합니다. 이후 쿠사마 야요이는 99년까지 14권의 소설을 출간하였으며 그 중 크리스토퍼 남창굴은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창작 부문에서도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았습니다.

회화부문에서는 일본 귀국 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게 된 것이 판화작품인데 물방울에 줄선 그녀의 대표작인 호박 등의 모티브의 작품도 이때부터 많이 그려지게 됩니다.

5. 다시 예술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다.

잊혀지는 듯 하던 쿠사마 야요이가 다시 세계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발생합니다. 1989년 뉴욕에 새롭게 설립된 국제 현대 미술센터의 오프닝전으로 쿠사마야요이 회고전이 그것입니다. 또한 무한한 그물이 전후 미술사의 공백을 메우는 귀중한 작품임이 실증되어 다시한번 작가로서 평가받아 주목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93년 국제 미술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일본 대표작가로 선택되어 이 미술전에서 첫 일본인 여성작가로서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98년에는 로스엔젤레스, 뉴욕, 도쿄 등 개인전을 순회하면서 다시 미술의 최전선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Infinity Nets 1990년 작 호박 1999년 작

6. 우리의 영원한 영혼

2009년부터는 ‘우리의 영원한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대형회화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2017년까지 500점 가까이 제작된 회화 시리즈는 압도적인 예술로서의 패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영혼은 쿠사마 야요이 예술의 집대성이며 계속되는 창작활동은 향후 쿠사마야요이 표현활동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좌) 나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 2015년 작 (우) 사랑의 행방 2014년 작 (좌) 마음 2015년 작 (우) 나에게 사랑을 더해서 2015년 작

쿠사마 야요이는 시대를 앞서가는 행위예술가였으며 당시 보수적인 성격의 본국인 일본의 예술계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주목받은 현대미술가였습니다. 일찍이 1960년대 미국에서 반전,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쿠사마 해프닝”이라는 전위예술로 큰 예술적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 쿠사마 해프닝은 남녀 나체의 몸에 그녀의 상징이기도 한 물방울 무늬를 그려넣거나 페인트를 뿌리는 행위예술로 게재제한이 있어 포스팅할 수 없지만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www.phaidon.com/agenda/art/articles/2016/march/21/did-yayoi-kusama-conduct-the-first-gay-wedding/

그녀는 90세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정력적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미국 TIME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어릴때부터 가지고 있던 정신질환의 일종인 환영과 강박을 예술로 풀어냈던 예술가로써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어 앞으로의 활동이 여전히 기대되는 쿠사마 야요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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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열정

쿠사마 아카이브 포스터 /콜론비아츠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이보다도 유니크한 예술가가 세상에 또 있을까. ‘쿠사마 아카이브’ 전시가 국내 최초 ‘콜론비 아츠 갤러리’에서 열린다. ‘무엇이 쿠사마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들었을까,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기까지 그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콜론비아츠 갤러리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 전을 기획, 온라인 전시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회에서는 대표작인 ‘호박’ 등의 조각 작품, 물방울 무늬와 그물 패턴 등의 회화 작업들이 주로 전시되어 왔고 최근 쿠사마의 그림이 23억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시는 이러한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인생의 발자취에 중점을 두고, 어떤 인생의 여정이 지금의 쿠사마를 만들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플루어 쇼’ 오리지널 포스터 /콜론비아츠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는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와 이후 도쿄 세이와 정신병원에 종신 환자로 입원 후 현재까지 병원 근처 신주쿠의 작업실에서 펼쳐 온 삶의 여정을 조망할 수 있는 전시 포스터, 책, 잡지, 사진 등의 오리지널 인쇄물과 컬래버레이션 아트상품, 조각 등의 오브제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콜론비 아츠 갤러리 안선영 대표는 “쿠사마는 세계적인 기업과의 콜라보, 비엔날레, 갤러리 전시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모든 작품들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며, “여러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 모든 수집품도 일관된 색깔과 흐름을 보여 아카이브 자체가 하나의 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술품을 왜 수집하는가’, ‘누가 미술품을 사는가’라는 질문부터 ‘동시대 미술 수집가의 역할’에 대한 다소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살기 위해 예술에 매달렸던 사람,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 /오드

조각과 설치미술이 주인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의 현대 화가로 회화, 공연, 영화, 패션, 시 소설 등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 이후에 대두한 현대미술의 경향 중 하나인 개념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페미니즘, 미니멀리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추상표현주의의 일부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이며, 때로는 성적이다. 일본에서 온 예술가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중요한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유년기의 쿠사마는 식물 묘목장, 종자 농장을 소유한 상인 부모님의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호박 그림을 즐겨 그렸고 가끔 환상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 당시 그리고 만든 작품은 이후 그의 앞길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쿠사마는 그림이나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머니가 그것들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서둘러 그린 후 치워버리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가 순종적인 주부의 역할을 하길 바랬으며 쿠사마는 어머니가 자신을 학대한다고 생각했다. 또 아버지에 대해서는 ‘밖에서 여자들과 많이 노는 타입’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어머니가 자신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바람을 염탐하도록 시켰다고 말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일종의 ‘성’이 평생의 경멸하는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그는 특히 남근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나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항상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그 누구와도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섹스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이 내 안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암울한 어린 시절은 자연히 그의 예술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점은 영감이자 예술이다, 덴마크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flickr

쿠사마는 10살 때 ‘섬광, 오오라, 혹은 점으로 울창한 들판’이라 묘사했던 환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 환상 속에는 쿠사마에게 말을 건네던 꽃, 그가 예술가로써 살아가는 과정, 영원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자기망각’등이 포함되어 있다. 꽃밭에 서 있던 쿠사마는 끝없는 점들로 이루어진 들판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환상을 겪었으며 그의 예술은 그가 환상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의 가족과 자신의 마음 속으로부터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집 근처 강가를 덮고 있던 매끄럽고 하얀 돌에 매료되었으며 그가 봤던 돌들이 점(dot)에 대한 지속적인 집착을 낳았으며, 또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 끼친 영향이라 말한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 공장으로 가 일본 군인들을 위한 낙하산을 바느질하고 조립하는 일을 하다 제2차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그는 공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가끔 이야기하며, 공급 경보가 매일 울리고 대낮에 미국 전투기들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있어 사춘기는 ‘닫힌 어둠 속’ 이었다 회고한다.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은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시기 즈음, 그는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자유에 대한 개념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1948년 교토 시립 예술 공예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서양 문화를 배격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쿠사마는 천 년 전의 전통 일본 기술과 재료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일본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스타일에 실망했던 쿠사마는 1950년대 마츠모토, 도쿄에서 연달아 자신만의 그림 전시회를 열며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경향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쿠사마는 주로 종이에 수채화 또는 기름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벽, 바닥, 캔버스에도 그리다가 나중에는 집안의 물건, 나신의 어시스턴트까지 대상을 확대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폴카 도트, 즉 물방울 무늬를 동원해 작품을 만들었다.

수많은 점의 향연, 인피니티 네트 /flickr

그의 거대한 물방울 점, ‘인피니티 네트 Infinity Nets’는 그의 환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대규모 작품인 ‘인피니트 네트’는 환상을 암시하는 일련의 네트와 점으로 뒤덮인 모습이다. 그는 그림에 온통 점을 더함으로써 자신과 작품 자체를 더 큰 우주로 끌어당기고, 우주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처럼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의 지구는 우주에 있는 백만개의 별 중 하나인 물방울일 뿐이다. 폴카 도트(물방울 무늬)는 무한대를 향한 하나의 과정이다. 폴카 도트로 자연과 우리의 몸을 지우면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라고 전했다.

쿠사마의 ‘플라워’ 설치 전시물 /flickr

1954년, ‘Flower’란 작품을 소개하며 쿠사마가 언급한 코멘트는 인상적이다. “하루는 식탁에 있는 식탁보의 붉은 꽃 패턴을 보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똑같은 무늬가 천장, 창문, 벽을 덮었고 급기야 방 안, 내 몸과 우주를 덮었다. 나는 마치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 속에서 회전하며 곧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겁이 났다. 나는 빨간 꽃의 마법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내 밑에 있는 계단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곧 나는 발목을 잡혀 계단에서 떨어졌다”

도쿄와 프랑스를 거쳐, 쿠사마는 27세가 되던 해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다. 숨막히는 가정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의 대표 여성 작가인 조지아 오키프에게 ‘화가의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란 편지를 보냈고 조지아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나라에서 예술가는 먹고 살기 어렵다’ 라며 쿠사마에게 일종의 경고를 했지만, 그와 더불어 조지아는 쿠사마에게 미국으로 와 누구에게든지 당신의 작품을 보여주라는 충고를 한다.

당시 쿠사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일본에서 미국으로 돈을 송금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쿠사마는 일본 사회가 너무 작고, 비굴하며, 봉건적이고, 여성을 경멸하는 사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떠날 결심을 한다.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며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화가 난 쿠사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의 많은 작품들을 파기했고, 기모노에 지폐 달러를 덜렁덜렁 꿰맨 채 태평양을 건넜다. 쿠사마는 곧 시애틀로 이사해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의 전시 /flickr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뉴욕 미술계는 많은 여성 딜러들조차 여성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꺼릴 정도로 남성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리더로 활약했으며 무정부주의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에게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쿠사마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남성 작가들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기성 미술계에서는 외면을 받았지만 그는 전략적으로 그의 후원자들을 만나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61년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미술가 도널드 저드, 조각가 에바 헤세가 있는 건물로 옮겼고 에바 헤세와는 친한 친구가 된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독특한 단발 가발과 화려한 패션을 한 채 대중 앞에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Infinity Mirrored Room /flickr

I’m Here, but Nothing /flickr

그는 그의 ‘인피니티 룸 Infinity room’ 작업을 계속했다. 많은 거울이 정렬된 특별 제작된 방 안에는 다양한 높이에 매달린 수십개의 네온컬러 볼이 있다. 관람객들은 거울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을 반복적으로 보며 끝이 없는, 무한의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쿠사마의 ‘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I’m Here, but Nothing’ 전시는 간단한 가구가 있는 방 벽에 수백 개의 네온 물방울 점이 빛나고 있다. 이것은 자신과 방 안의 모든 것이 지워지며, 무한한 공간이 생기는 착각이 드는 결과를 낳는다.

Accumulations /flickr

반복되는 형태에 대한 쿠사마의 관심은 어수선한 캔버스와 사물을 특징으로 하며, 그의 작품 ‘집적 Accumulations’으로 표현된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우편 스티커, 계란 상자 등을 이용해 마치 혹과 같은 형태로 행과 열을 만들어 배열했다. 나중에는 남근으로 장식된 기성품 조각을 만들며 이 시리즈는 절정에 달한다. 많은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이 남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그의 페미니즘적 경향이 보인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쿠사마의 작품을 연구해 온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는 ‘만약 대다수의 여성이 자신의 주관성을 부인하며 지배에 복종하는 구조가 있었다면 쿠사마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쿠사마의 남근을 이용한 작품들은 남성 지배적인 세계에 대한 억압의 진술처럼 보인다. ‘집적’은 그의 과거, 초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혼란, 남근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공황을 반영한다. 이 작품은 팔리진 않았지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그의 특별한 성격과 성향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6년까지 쿠사마는 거울, 조명, 여러 설비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재정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설상가상 이 당시 쿠사마는 과로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많은 남성 예술가들은 그의 이 창의적인 시도를 모방했다. 루카스 사마라스, 앤디 워홀 등의 백인 남성 예술가들은 쿠사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작품을 만들었고, 이 남성 예술가들은 유명해졌다.

Peep Show /flickr

1966년 쿠사마는 획기적인 전시인 핍쇼(Peep Show)를 개최했는데, 핍쇼는 관람객이 머리를 내밀 수 있는 내향 거울로 만들어진 8각형의 방으로 관객들이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설치물로써는 처음 하는 시도였다. 이것은 쿠사마가 계속 탐구해 온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예술 방향을 바꾼 루카스 사마사르는 훨씬 더 권위 있는 갤러리에서 자신의 거울에 비친 설치물을 전시했다. 물론 쿠사마의 핍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쿠사마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마땅히 벌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돈도 이 작가들만큼 벌 수 없었다. 한때 배신과 좌절감이 너무 심해진 나머지 쿠사마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쿠사마는 센트럴 파크, 브루클린 브릿지 같은 눈에 띄는 곳에서 종종 나신으로 나타나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그 일례로, 그는 리처드 닉슨에게 베트남 전쟁을 중단하지 않으면 자신과 섹스를 하게 될 것이라며 공개 편지를 쓰기도 했다.

현재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 전시 중인 Narcissus Garden /flickr

196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공식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쿠사마는 1,500여개의 미러볼을 행사장 정원에 허락없이 설치하기도 했다.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이라 불리는 이 퍼포먼스 아트에서 그는 허영심의 상징인 미러볼을 저렴한 아이스크림 값마냥 단돈 2달러에 팔았다. 고가의 미술품만 상대했던 당시 비대중적인 예술계를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쿠사마의 작품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많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을 시행하기도 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의미로 나체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뉴욕 신문에 실린 그의 모습을 보고 시민들은 그가 자신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며 관심을 끈다고 비판했다. 점점 더 낙담하던 그는 1973년, 다시 일본에 돌아와 강제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의 우울증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는 본능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소설, 시 등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았으며, 그의 작업실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종종 ‘예술이 아니었다면 난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것’이라 밝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여러 편의 소설, 시집, 자서전 등을 출간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가 뉴욕을 떠난 동안 1990년대 후반까지 그는 예술가로써 잊혀진 존재였지만 그에 관한 많은 회고전이 그를 다시 세상에 떠오르게끔 해 주었다.

쿠사마 야요이의 분신과도 다름 없는 호박 /flickr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본관이 성공을 거둔 데 이어 검은색 점 무늬로 장식한 그의 대표 작품인 ‘노란 호박 Great Gigantic Pumpkin’을 만든다. 이 호박은 그에게 일종의 분신이며 자화상 그 자체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호박이 좋다. 그 유머러스한 모양과 따뜻한 느낌, 그리고 인간과 같은 특성 때문이다. 나는 호박의 그런 인상을 표현하고 싶어 호박을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호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Infinity Mirror room /flickr

그는 예술가로써 끊임없이 일했다. 2012년 전시회에서는 여러 개의 아크릴 캔버스 작품들을 전시했고, ‘인피니티 미러 룸 Infinity Mirror room’의 무한한 공간을 탐험하는 것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거울로 정렬된 정육면체 모양의 방과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으며 조명이 깜박인다. 이 형태는 삶과 죽음을 의미했다. 쿠사마는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이 환경, 이 방을 자신의 오랜 꿈의 표현으로 보았다. ‘유리를 통과한 앨리스처럼 나 쿠사마는 환상과 자유의 세계를 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후 하이네 온스타드 박물관, 노르웨이 현대미술관, 스웨덴의 현대미술관, 핀란드의 헬싱키 미술관을 돌며 100개 이상의 작품과 대규모 미러 룸 설치 관객들을 맞이했다. 1960년대 쿠사마의 실험적인 패션 디자인을 발표한 것을 포함해 만든 이후 대중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초기 작품 몇 개도 같이 선보였다. 2017년에는 도쿄에 야요이 박물관을 개관해 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Walking Piece /OTA FINE ARTS, TOKYOYAYOI KUSAMA STUDIO INC.

18개의 컬러 슬라이드로 연속된 이미지인 ‘워킹 피스 Walking Piece’에서 쿠사마는 기모노를 입고 우산을 든 채 뉴욕 거리를 걷는 모습이다. 기모노는 전통적인 일본 문화에서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한 관념이자 성역할 같은 것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검은색이고, 겉만 흰색으로 칠했을 뿐 가짜 꽃으로 장식한 것이다. 쿠사마는 미지의 탐험을 하며 사람들이 없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는 이유 없이 울다가, 걸으면서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퍼포먼스는 아시아계 미국 여성들이 끊임없이 직면하는 고정 관념들을 포함한다. 쿠사마는 세계 최대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분류해 보는 부조리를 보여줌으로써 백인 미국 관객들이 그를 분류하며 보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그는 뉴욕 회색의 텅 빈 거리를 걸으며 이민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했다.

예술로 증명하는 자신의 존재, 쿠사마 야요이가 존경받는 이유

Infinity Net White No28 /Christie’s.

최근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매출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발표한 ‘2021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상반기 결산’과 ‘낙찰총액 상위 5순위 작가별 KYS미술품가격지수 분석결과’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낙찰 총액은 약 121억원으로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이미 세계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경매 낙찰가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쿠사마의 ‘무한 그물(White No28)’은 2014년 71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한 바 있다.

최근 그의 작품 세계를 그린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가 개봉 중이다. 쿠사마의 삶, 작품 세계를 담은 최초의 영화로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 관심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호박’을 비롯해 인피니티 네트, 인피니티 미러 룸과 더불어 초기 회화 조각품, 설치미술까지 그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오드

특히 그의 목소리로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아티스트가 되기까지의 여러 일화를 직접 듣는 것도 별미일 것이다. 힘겨운 삶을 예술로 마음껏 표현하며 치유하려 노력했던 그는 30년간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단지 예술이 좋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한다. 그저 죽을 때까지 예술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의 열정으로 하여금 한없는 존경을 받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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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아요이를 보는 세 개의 시선

/upload/arena/article/202101/thumb/46960-438925-sample.jpg 3 / 10 Song of a manhattan suicide addict, 2010-present, Image ⓒ Yayoi Kusama Song of a manhattan suicide addict, 2010-present, Image ⓒ Yayoi Kusama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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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라는 모순을 넘어

아티스트의 시선 by 정희민(미술가)

미지라는 단어는 얼마나 매혹적이며 무책임한가.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광포한 불확실성을 매일 껴안으며 살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불확실성을 거부하면서도 갈망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쿠사마 야요이를 이야기할 때 강박장애나 환시 등의 몇 가지 단어들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점을 생각해볼 때, 야요이는 그가 가진 영향력만큼이나 어쩌면 가장 강력하게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일지 모른다.

환시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 그는 모순 그 자체다. 고통을 부르짖으면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고통 속에 내던지는 모순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때 나는 비로소 그 작품의 과격함 뒤에 가려진 연약한 아름다움에 한발 다가갈 수 있었다. 기괴하게 몸을 배배 꼰 채로 입을 벌리고 있는 꽃, 점으로 뒤덮인 꽃이 가득한 벽면을 바라보는 여성. 가부장제 속 여성이 아니라 작가이기를 원했던 야요이가 여러 차례 혼담을 거부하고 고집스럽게 그림을 그렸던 초년 시절의 일화는 그 시절 그가 남긴 형상들만큼이나 남다른 자의식을 보여준다. 야요이는 27세의 나이에 “너무 작고, 너무 비굴하고, 너무 봉건적이며, 여성을 경멸하는” 일본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떠난다.

1950년대의 뉴욕이라는 무대는 혈혈단신 아시아 여성에게는 지독히 외로우면서도 충분히 도전적인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 백지 같은 공간에 막 당도한 젊은 시절 그의 눈에는 성공에 대한 확신과 기대, 작품이 주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는 저명한 아티스트들의 스튜디오 근처에 작업 공간을 얻고, 메이저 갤러리의 문을 거침없이 두드렸다. 백인 남성이 주류를 이루었던 미술계에서 빠르게 자리 잡을 만큼 전략가이기도 했던 그의 뉴욕 입성이 완전히 불운했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야요이의 작품은 전시의 기회를 얻었고 호평을 받았으나, 범인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어떤 관심도 충분하지 않았다. 젊음의 패기로 가늠하던 가능성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여 있음을 완전히 감지해내기까지는 1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동료 작가들에게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작품에 응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 지칠 대로 지친 야요이는 잦은 병치레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 잊히는 것과 각인되는 일의 두려움 사이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는 그 충동의 힘으로 또다시 작품을 제작했다. 이방인으로서의 지독한 좌절을 맛보고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 생존을 위한 지리멸렬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어린 야요이가 보내는 미약한 신호들을 놓지 않았고 작품을 통해 때로는 바다가, 때로는 그물이, 때로는 펄펄 나는 나비가 되었다가 꽃이 되었다.

초년 시절부터 이어진 ‘무한 그물’을 통해 야요이가 반복적으로 가두고 드러내며 촘촘히 어루만지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작품을 통해 무아지경을 얘기하지만 스스로 한 번도 자기를 지운 적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었을까? 나는 야요이의 연약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그 연약함을 지켜내고자 했던 순진한 선택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때로 길을 잃었고, 상심했고, 숨어버렸다가도 금방 그림으로 돌아왔다. 애지중지 다듬고 길들인 고통을 재료 삼아 선을 긋고 형상을 빚어냈다.

자신조차 헤아릴 길 없는 욕망을 가까스로 긍정하고 주장하며 야요이가 밟은 미지의 땅은 어떤 욕망도 어떤 소명도 닿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는 고요한 명상의 공간이리라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 광활한 땅 한가운데서 그는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고 싶다’고 읊조린다. 나는 천재성이나 위대한 예술은 믿지 않지만, 고통은 실재하기에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위대함을 믿는다. 예술은 모든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삶을 선택하는 작가들의, 나의 순진함 속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upload/arena/article/202101/thumb/46960-438928-sample.jpg 3 / 10 Yayoi Kusama, Infinity Mirrored Room-Love Forever, 1966/1994. Installation view, YAYOI KUSAMA , Le Consortium, Dijon, France, 2000 Image ⓒ Yayoi Kusama Yayoi Kusama, Infinity Mirrored Room-Love Forever, 1966/1994. Installation view, YAYOI KUSAMA , Le Consortium, Dijon, France, 2000 Image ⓒ Yayoi Kusama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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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저항

정신과 전문의의 시선

by 신동근(마마라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동국대학원 예술치료학과 겸임교수)

섬 전체가 미술관인 일본 나오시마섬의 선착장에 내리면 제일 먼저 동그란 점이 박힌 커다란 빨간색과 노란색의 호박 조형물이 눈에 띈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이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그 기묘한 매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혹자는 야요이의 예술이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고 하고, 혹자는 그의 정신질환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를 보며 그의 트라우마와 정신질환을 추정해볼 수 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야요이는 아버지의 외도로 부부싸움을 자주 겪었다. 어머니는 어린 야요이를 통해 아버지를 감시하게 했고, 아버지의 외도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남근과 결혼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성장한 야요이는 부잣집에 시집가라는 부모의 제안을 뿌리치고 혈혈단신 뉴욕으로 떠나 갖은 노력 끝에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키고 성장한다. 그러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도둑맞기 일쑤였고,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밀려나 결국 일본으로 귀국한다. 고국에서도 홀대받던 그는 정신병원에서 지내며 예술을 이어가는데 세상은 점차 그녀를 재발견하며 주목한다.

야요이의 생을 내밀히 접근한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추측해보자면 그는 ‘강박신경증’을 앓고 있었다. ‘강박’이란 머릿속에 침습하는 생각을 말하는데, 그 생각이란 오염, 질서, 숫자, 불확신 같은 것이 있고 그로 인해 청결, 정돈, 숫자 세기, 확인하기 같은 행동이 뒤따르는 정신 병리를 말한다. 그에겐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강박이 있었고, 반복적인 패턴의 그물 무늬와 점은 강박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격적으로는 손상된 자존감을 높이려는 자기애와 타인의 관심을 끄는 연극적 성향이 일부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뺏겼을 때나 예술계의 관심에서 벗어났을 때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는 등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국 일본에 돌아오고 우울증이 극심해져 환각 경험도 하던 당시에는 ‘정신병적 증상을 동반한 우울증’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정신질환이 있었기 때문에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이 독창성이 있다는 주장은 그의 뛰어난 천재성 앞에 너무나 초라한 가설일 뿐이다. 그의 창조성에 대해 심리적으로 들여다보자.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를 겪은 야요이는 꽃밭에서 꽃에 의해 압도되는, 즉 자연에 파묻혀 자신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파멸의 공포(Fear of Annhilation)’라고 하는데 이런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야요이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는 사물에 집착하며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와 같이 두려움을 느낄 때 그 감정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역공포 반응(counterphobic reaction)’이라 하는데 흔히 두려울 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고소공포가 있는 사람이 암벽등반 같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요이의 역공포 반응은 압도되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그물과 점으로, 남근에 대한 두려움은 남근의자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죽음의 테마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응시하는 눈의 테마로 이어진다.

쿠사마 야요이의 삶은 기존체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연속이었다. 그는 미술 대신 예절 교육을 가르치며 순종적인 여인이 되라는 보수적인 집안에 반기를 들었고, 기존 예술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며 세계 미술사 최초로 전시에 거울을 활용하거나 보디 페인팅을 시도했으며 최초의 동성 결혼식을 진행해주기도 했고, 남들이 전쟁에 찬성하며 광분할 때 전쟁에 반대하며 나체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그의 역공포 반응도 기존 공포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었던 것이다.

조현병 환자의 작품을 최초로 분석한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한스 프린츠호른은 예술의 근원으로 ‘장식’ ‘모방’ ‘상징’ ‘놀이’ ‘표현’ ‘정리정돈’ 6가지의 욕구를 들고 있는데 쿠사마 야요이의 인생과 작품을 보니 여기에 한 가지 욕구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도전과 저항 욕구’라는 쿠사마 야요이의 선명한 욕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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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에서 벗어난 쿠사마 야요이 보기

큐레이터의 시선 by 김해주(아트선재 부관장)

쿠사마 야요이는 너무나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대중적인 유명세와 더불어 점을 찍어 구성하는 작업의 형태가 각인된 나머지 그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선명한 노란색, 빨간색 호박 형태에 점이 그려진 야외 조형물이 세계 곳곳에 랜드 마크로 놓이며 익숙해진 것도 한몫한다. 한편 실내 설치 작업들은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크기와 중심이 없는 강박적 반복 모티브로 인해 관람자에게 압도적 몰입감을 준다. 야요이가 연출한 영화 <자기소멸>(1968)이란 제목처럼, 보는 이를 그 무한 반복 속에 소멸되어가는 개체로 담근다. 몽환, 영원, 신비를 암시하는 그 작업들은 너무 직관적이어서 부연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들이 조명받기 시작하며 작가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겨우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29년에 태어난 작가는 무려 60년 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작년에 보았던 덴마크의 안무가이자 퍼포머 메테 잉바르트센의 퍼포먼스 ‘69 포지션’ 덕분이었다. 이 작업은 전시장처럼 꾸민 무대 위에 관객이 올라 영상과 이미지, 텍스트를 바탕으로 섹슈얼리티와 공적 영역 간의 관계를 질문하는 잉바르트센의 퍼포먼스를 따라가는 형식이었다. 첫 장면은 1960년대 주요 퍼포먼스들부터 시작한다. 영화<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에도 등장하는 작가 캐롤리 슈니먼과 잉바르트센이 주고받은 이메일이 그 출발점이다. 나체 퍼포머들이 날것의 고기들과 뒹구는 제의적 장면을 연출한 캐롤리 슈니먼의 유명한 퍼포먼스 ‘미트 조이’(1964)에 대해 슈니먼은 “이 같은 감각의 제의를 심화시킨 문화적 배경은 끝나지 않는 베트남 전쟁의 잔인성이었습니다. (…) 그러나 당시의 암울한 저류와 괴로움, 불안은 ‘섹스, 러브, 로큰롤’이라는 클리셰로만 남았습니다”라며 당시 작업 배경과 이후의 허탈함에 대해 설명한다. 이어 잉바르트센이 소개한 작업은 월스트리트 주식 시장 앞에서 알몸으로 춤추는 이들의 몸에 땡땡이 무늬를 그리며 “주식은 사기다. 주식을 불태워야 한다. 월스트리트맨을 땡땡이 무늬로 뒤덮어라”를 외쳤던 야요이의 작업 ‘월스트리트에서의 해부학적 폭발’(1968)이었다. 전쟁에 대한 반대이자 신체에 대한 해방으로서 나체 퍼포먼스를 실현한 슈니먼과 그 동료들처럼 야요이도 “이 아름다운 몸들을 왜 전장으로 내몰아야 하는가”라며 알몸 시위를 한 것인데, 특히 주식거래를 전쟁을 동조, 촉발하는 기계라며 저항의 의미로 거래소 앞에 섰던 것이다. 퍼포먼스는 시작 15분 만에 경찰에 저지당한다. 야요이는 이듬해에 이번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모던 미술 무덤에 대한 생각’이라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의 조각 공원에서 알몸 시위를 벌인다.

모마가 살아 있는 작가들보다는 사망한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소개한다는 것에 반발하며 “현대미술관에서 도대체 무엇이 현대적인지 나는 못 찾겠다…. 죽은 전시가 죽은 미술을 소개하는 동안 살아 있는 작가들은 죽어간다”라고 강력히 발언한다. 내가 잘 몰랐던 야요이의 모습이다. 영화<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에서 특히 내게 흥미로웠던 부분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안은 채 1957년 뉴욕으로 혈혈단신으로 떠나 1972년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15년간의 시간이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던 가족과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굳건히 서보자 노력했다. 그러나 여성이자 아시아인으로서 가진 이중 제약과 서구의 이국주의적 시선이라는 또 다른 억압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의 중심이었던 당시의 뉴욕에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행위예술의 자장을 흡수하며, 자신의 작업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말이지 무던히 애썼다. 성소수자들과 연대하고, 반전운동을 벌이고, 미술관의 보수적인 전시 형태를 비판하는 등 세상의 변화를 바랐던 싸움에 적극적으로 합류하기도 했다. 자기 내부 세계에 대한 강박에만 갇히지 않고, 외부에도 관심을 돌렸다는 측면에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는 야요이의 작업 전반에서 매우 특이한 시기다.

그러나 그 후 야요이는 뉴욕 생활을 접고 15년 만인 1972년 일본으로 돌아온다. 귀국 이유는 보수화되어가는 미국 사회와 미술계에 절망한 탓일 수도 있고, 전위적이고 과격한 작업들을 이어가다 길을 잃어서일 수도 있다. 당대의 유명 남성 예술가들이 각종 제도의 지원을 받아 명성과 기회를 얻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아웃사이더 취급받던 야요이는 결국 일본으로 되돌아왔고, 그녀의 해프닝에 대해 선정적인 보도만 전해진 일본에서 역시 그는 작가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내가 일하는 아트선재센터에서는 2003년 쿠사마 야요이의 한국 첫 개인전이 열렸다. 당시 하루 관람객이 천여 명에 이르러 미술관 앞에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 형형색색의 동그라미로 방을 채운 10점의 설치 작품들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고, 이는 쿠사마 야요이의 이름을 한국에 알리는 데도 일조했다.

다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가 열린다면, 나는 작가의 과거 작업들, 특히 1972년 일본으로 귀국하기 이전의 쿠사마 야요이를 재조명하고 싶다. 화려한 색감과 땡땡이 무늬,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작가로만 설명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클리셰에 다시 그를 가둬놓는 것이 될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초기 작업을 돌아보는 것은 한 여성 작가가 그를 둘러싼 사회와 연결되려 노력하지만 여전히 불화하는 고통을 겪으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싸움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를 통해 현재 작품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원색은 결국 죽음과 두려움의 세계에 대한 콘트라스트로 나오는 강렬한 생의 의지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4} Peter Moore, Photo of Yayoi Kusama with ‘My Flower Bed’ in her NYC studio, c. 1965 ⓒ 2018 Barbara Moore / Licensed by 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Y

/upload/arena/article/202101/thumb/46960-438926-sample.jpg 3 / 10 K with Orgy mag ⓒ Harrie Verstappen K with Orgy mag ⓒ Harrie Verstappen 전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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