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월 은 잔인한 달 | 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 되었을까? / T.S.엘리엇, 황무지 /The Waste Land, April Is The Cruelest Month, T.S.Eliot 153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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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황무지 #TheWasteLand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 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 T.S. 엘리어트, 『황무지』
* * *
안녕하세요? 오늘은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봄이 시작되는 사월을 일년 중 가장 잔인한 달로 영원히 각인시켜버린『황무지』는 현대시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지요. 사월은 비단 영국의 시인에게만 잔인한 달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도 4.19 학생 운동과 끔찍한 세월호 참사가 바로 라일락 꽃향기가 아른거리는 사월에 일어났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이 유명한 작품이 발표된 1922년은 문학사에서도 참으로 유별난 한 해였습니다.
1920년대에 나온 사상과 중요한 문학 작품은 거의 다 1차 대전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작가들이 같은 방식으로, 즉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반응할 것이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 1922년이 되자 새 지평을 여는 작품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T. S. 엘리엇의 『황무지』, 싱클레어 루이스의 『배빗』,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아홉 번째 권 『소돔과 고모라Ⅱ』, 버지니아 울프의 첫 실험소설 『제이콥의 방』,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엔리코 4세』 등등 20세기 문학의 주춧돌이 모두 놓였다.
–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Ⅱ』
이 무렵에 등장한 ‘문학의 새로운 형식’이 소위 모더니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쏟아져 나온 새로운 형식의 문학작품들이 비판하는 것은 특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황폐한 사회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란 곧 소유에 모든 가치를 두는 ‘탐욕으로 점철된 사회’였습니다. 바야흐로 한국 사람들이 그토록 분노해 마지 않는 LH 투기 사태 또한 그 근원을 따져보자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기적 이익에만 골몰하는 악취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일 테지요.
엘리엇은 1888년 신심이 돈독한 미국의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1914년에는 철학 연구를 계속할 요량으로 영국의 옥스퍼드로 건너갔습니다. 바로 그 무렵 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엘리엇은 유럽 대륙에서 평생을 함께 할 두 사람을 만납니다.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와 첫 번째 아내인 비비엔 헤이우드였지요.
엘리엇은 미국에서 건너온 선배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덕분에 실로 엄청난 도움을 받게 됩니다. 『황무지』라는 시는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거듭 났으며, 엘리엇은 이 특별한 시의 제사에 기꺼이 파운드의 이름을 올려 놓았습니다. ‘보다 훌륭한 예술가’라는 존경의 표현을 덧붙여서 말이지요.
이 어렵고도 난해한 현대시의 주요 관심사는 전후 세계에 있어서 삶의 핵심으로 간주된 불모성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엘리엇은 우리가 얼마나 밑바닥으로 떨어졌는지, 진보라는 것이 얼마나 가차 없는 추락일 수 있는지를 『황무지』를 통해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이 시는 제사(題辭), 죽은 자의 매장, 체스 놀이, 불의 설교, 수사, 천둥이 한 말의 여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소제목들은 한결같이 그저 어렴풋하기만 합니다. 시에 담긴 다양한 목소리는 여러 사람이 어우러진 합창으로 들리다가도 어떤 때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고, 또 어떤 때는 다양한 문화권의 고전에서 따온 구절로 말을 걸어옵니다. 어느 대목에서는 타로 카드 점쟁이한테 갔다가, 어느 순간 문 닫을 시간이 된 런던의 선술집에 들어와 있는가 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 속으로 곧장 무대가 옮겨지는 등 장소와 시간의 급작스럽고도 예고없는 변화를 특징으로 삼아 방대한 문화의 문학작품들을 건너뛰어 다닙니다.
이렇듯 황무지는 여러 시공간을 종횡무진으로 오가면서 인간의 정신적 메마름, 생산이 없는 성(性), 그리고 재생이 거부된 죽음을 노래합니다. 식물이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소생하는 계절의 순환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도 이어지는데, 고대의 다양한 신화와 종교와 철학을 깊이 연구했던 엘리엇의 여러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중요한 모티프가 바로 ‘죽음을 통한 재생’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시는 덜렁 한 번 읽는다고 해서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은 아니지요. 또한 이 시에는 시인이 직접 달아놓은 각주가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달려 있어서 마치 학술 논문을 읽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흔히 많은 평론가들이 이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평을 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상징이나 구체적인 대상 같은 것들만 알아보다가 한참 지나서야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비로소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게 되는 대가의 그림 같다고 말이지요.
비록 우리가 434행이나 되는 이 유명한 장시의 전체 그림을 두루 살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일부분은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영상의 앞부분에서 인용했던 싯구절의 바로 앞에 놓인 제사부터 잠깐 살펴볼까요?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

이토록 갈피를 잡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로 시작되는 『황무지』라는 난해한 시에 대해 제가 비로소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 건 『열정과 기질』이라는 책 덕분이었습니다. 그 책 속에는 어렵기로 소문난 『황무지』에 얽힌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우선 『황무지』와 에즈라 파운드에 얽힌 이야기부터 조금 살펴보지요.
『황무지』의 재발견
1968년 뉴욕 공립도서관의 버그(Berg) 콜렉션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진 초고가 발견되었다. 대개는 타자로 친 54페이지 분량의 초고 뭉치였는데, 군데군데 육필 원고도 끼어 있었다. …… 타자로 친 부분은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었다. 구어체 영어로 쓰인 대목도 많았고, 우아하고 심원한 문체로 쓰인 대목도 많았다. 각종 유럽어에서 산스크리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쓰인 시행이 페이지 곳곳에 널려 있었다.
20세기 영시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이 큰 작품이라 할 만한 『황무지』의 중간 초고였다. 세인트루이스 태생으로 영국에 정착한 시인이었던 T.S.(Tomas Stearns) 엘리엇은 1914년 경에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데, 수천 행에 이르는 초고를 완전히 끝낸 것은 1921년 말이었다. 그는 아내 비비언(Vivien)과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에 정착했던 시인으로서 가까운 친구 에즈라 파운드에게 초고를 보여주었다. 이 ‘우호적인 비평가들’은 엘리엇과 함께 작품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다. 특히 에즈라 파운드는 원래 길이를 반으로 줄여버릴 정도로 가차없이 수정하라는 제안을 했다. 엘리엇 연구자인 헬렌 가드너의 말을 빌면, \”파운드는 좋은 구절과 나쁜 구절이 함부로 뒤섞인 초고 뭉치를 한 편의 시로 만들었다.\”
엘리엇은 파운드의 도움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그는 『황무지』가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으리라 확신하고 미국에서 엘리엇의 출판권을 대리하고 있던 유능한 에이전트 존 퀸(John Quinn)에게 초고를 선물로 보냈다. 퀸은 원고를 받은 이듬해에 사망했고,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초고가 분실되었다. 엘리엇은 아주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45년 후에 초고가 발견된 일은 문학상의 미스터리를 밝혔음은 물론, 뛰어난 문학 작품의 탄생 과정을 통찰할 수 있는 값진 실마리를 제공했다. 즉, 우호적이면서도 솔직한 비판을 삼가지 않는 친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해준 것이다.
– 하워드 가드너, 『열정과 기질』, 제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402∼403쪽
엘리엇은 책을 좋아하고 문예에 밝고 기지가 풍부한 사람으로서 모든 면에서 ‘하버드 맨’으로 합당했던 인물이었지만, 결국 하버드의 무미건조한 분위기와 인문학을 경시하는 대학 풍토에 고통을 느꼈더랬습니다. 자신의 의식 내부에서 점차 소외감이 커지는 것을 느낀 엘리엇은 차츰 보스턴과 세인트루이스와 미국을 벗어날 궁리를 시작했습니다.
(이하 생략)
T.S. 엘리엇의『황무지』와 사랑 받았던 여자 시뷜라
https://blog.aladin.co.kr/oren/7103251
『열정과 기질』 창조적 천재’가 어떻게 길러지고 탄생되는가를 밝힌 책
https://blog.aladin.co.kr/oren/540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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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 됐을까 – 주간동아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4월만 되면 인구에 회자되는 토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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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ekly.donga.com

Date Published: 1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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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 찬란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T. S. 엘리엇 Eliot

모든 세상을 환히 비추고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4월. 정서적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4월은 오히려 잔인한 달이다. 또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졌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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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ebzine.koita.or.kr

Date Published: 7/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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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시 엘리엇 황무지: 4월은 잔인한 달 – 네이버 블로그

4월의 문턱에 서 있으니, 4월만 되면 생각나는 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from The Waste Land /T.S.E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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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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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석칼럼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다 – 한국경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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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kyung.com

Date Published: 8/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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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 되었을까? – 다음블로그

1.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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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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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브런치

농경사회에서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이때부터 바야흐로 봄이겠지만, 지구온난화와 현대인의 속도감이 더해진 4월은 봄과 여름이 널뛰는 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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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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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왜 잔인한 달일까 | 토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시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서구인의 마음속 넋두리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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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opa.co.kr

Date Published: 7/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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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4월은 잔인한 달 – 한국일보

해마다 4월이 되면 엘리엇의 장편시 ‘황무지’의 앞 구절이 회자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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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kookilbo.com

Date Published: 5/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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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칼럼] 잔인한 달, 4월이 주는 의미 – 신아일보

그것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이유야 문학적으로 해석할 일이겠지만 나는 매년 4월이 되면 “4월이 가장 잔인한 이유는 생명이 탄생하는 화려한 계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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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hinailbo.co.kr

Date Published: 12/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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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T. S. 엘리엇 – 문학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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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urnaltherapy.org

Date Published: 5/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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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1. 3. 3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a1Vs02zxWE

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 됐을까

T. S. 엘리엇(왼쪽)과 장 베르드날. [출처 · tseliot.com]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4월만 되면 인구에 회자되는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888~1965)의 장시 ‘황무지’의 첫 구절이다. 이 중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제주 4·3사건, 4·19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 유독 4월에 수많은 생령의 상실을 경험한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클리셰가 되다시피 했다.그럼 원작에서 4월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일까. 전통적 해석은 이렇다. 433행이나 되는 ‘황무지’는 종교적 신앙을 잃고(不信), 생식의 기쁨을 잃고(不毛), 썩어서 사라지길 거부해 재생도 불가능한(不活) 서구문명의 비극성을 노래한다. 봄은 생식과 부활(復活)의 계절이다. 하지만 진정한 생식과 재생이 불가능한 서구인에게 봄은 그 불가능성을 환기케 하기에 잔인하다. 또 공허한 추억과 덧없는 욕망을 일깨워 치명적 상처만 덧나게 하기에 더 잔인하다.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고문을 가하기에 가장 잔인하다.그렇다면 왜 3월이나 5월이 아닌 4월일까. 1922년 발표된 ‘황무지’는 기독교의 성경과 어부왕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고대 인도의 철학서 ‘우파니샤드’,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희곡, 보들레르의 시 등 다양한 텍스트를 빌려다 중의적 비유의 진수를 펼친다. 낭만주의의 주정주의에 맞서 주지주의를 주장한 모더니즘의 시대를 선포한 시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4월도 영문학의 시조로 불리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이 성지순례를 떠나는 시점을 따온 것으로 풀이된다. 엘리엇이 오랜 방황 끝에 영국 국교도로 개종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하지만 미국 시카고대 영문학 교수 제임스 밀러는 1969년 발표한 ‘T. S. 엘리엇의 개인적 황무지’라는 책에서 그 숨겨진 이유를 밝혔다. 밀러 교수는 엘리엇에 대한 전기적 연구를 통해 그가 1910년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난 장 베르드날이란 의대생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음을 찾아냈다.엘리엇보다 두 살 연하인 베르드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참전했다가 1915년 4월 발발한 갈리폴리 해전에서 전사했다. 충격을 받은 엘리엇은 그해 발레리나 출신인 비비언 헤이우드와 쫓기듯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불행으로 치달았고, 1921년 부부관계를 회복하고자 스위스 로잔 호숫가에서 요양 중일 때 ‘황무지’를 집필했다.엘리엇은 1934년 ‘늦은 오후 라일락 가지를 흔들며 룩셈부르크 공원을 가로질러 오던 한 친구가 있었네, 훗날 갈리폴리의 진흙에 섞여 들어간 한 친구가 있었네’라는 글을 남겼다. 4월이 왜 가장 잔인한 달인지, 라일락이 왜 추억과 욕망의 꽃인지가 설명된다. 게다가 ‘황무지’에는 페니키아의 전설적 뱃사람 플레바스와 익사에 대한 묘사가 여럿 등장한다. 5장으로 이뤄진 ‘황무지’ 4장은 제목부터가 ‘수사(水死·Death by Water)’다. 그 마지막 구절이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이다.밀러 교수는 이를 토대로 ‘황무지’를 지배하는 상실감이 서구문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베르드날을 잃은 개인적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엇 자신이 “황무지는 시대에 대한 비판의 산물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시”라고 밝힌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1981년 발표된 뮤지컬 ‘캣츠’의 유명 삽입곡 ‘메모리’도 베르드날에게 헌정한 엘리엇의 첫 시집 ‘프루프록과 그 외의 관찰’(1917)에 수록된 시들을 차용해 작사된 것이다.엘리엇은 개인적 감정을 반영하되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을 시작(詩作)의 출발로 봤다. 따라서 ‘황무지’는 엘리엇의 개인적 상실감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문명이 겪은 상실감과 결부해 확장된 문학작품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찬란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인문학 칼럼 – 찬란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T. S. 엘리엇 Eliot

인문학 칼럼 은 다양한 인문학적 정보와 콘텐츠를 깊이있게 다루어 읽을거리와 풍성한 감성을 전달하는 칼럼입니다.

글_ 박은몽 소설가

어디서 비롯된 말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너도 나도 인용하게 되는 말이 있다.

창의적인 말일수록 상황에 따라 이렇게 또 저렇게 다양하게 해석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런 말 중 하나가 바로 “4월은 잔인한 달”이란 말이다.

4월의 찬란함과 비통함을 동시에 전달해 주는 듯한 이 말은 바로 미국의 시인 엘리엇이 그의 대표작인 < 황무지 >에 쓴 시구이다.

미국 출신 작가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이 1922년 발표한 < 황무지 >란 시는 4월이 되면 더 생각나는 시다. 이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전개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무려 433행에 달하는 < 황무지 >는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제2부 체스 게임, 제3부 불의 설교, 제4부 익사, 제5부 우레가 말한 것의 총 5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부 첫 구절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 황무지 >는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가장 현대적인 시로 평가되고 있다.

엘리엇은 이 < 황무지 >를 발표하고 시인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고,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국내에서는 < 황무지 >보다 뮤지컬 < 캐츠 >의 원작자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두 시인이 만들어낸 예술, < 황무지 >

< 황무지 > 앞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에즈라 파운드는 엘리엇의 친구이자 시인이었는데, 엘리엇은 자신의 대표작 앞에 에즈라 파운드에게 시를 바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보다 나은 예술가”라는 극찬으로 치켜세우면서 말이다.

“보다 나은 예술가”라는 것은 단테의 < 신곡 >이란 작품에서 나오는 말로서 12세기 이탈리아 시인 다니엘을 찬양한 문구이다.

엘리엇은 고전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에즈라 파운드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엘리엇이 자신의 소중한 창작물의 서두에서 에즈라 파운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데에는 사연이 있다.

에즈라 파운드가 없었더라면 < 황무지 >라는 작품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황무지 >의 초고는 지금의 수 배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 방대한 분량을 지금의 < 황무지 >가 될 수 있게끔 고쳐준 사람이 바로 ‘에즈라 파운드’였던 것이다.

엘리엇은 1914년경에 이 작품을 시작했는데, 수천 행에 달하는 이 시의 초고를 끝낸 것은 1921년 말 경이었다.

특히 1921년 하반기 몇 달 정도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원고작업에 매달렸다.

이렇게 완성한 초고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보여주었는데, 에즈라는 가차 없이 줄일 것을 제안했다.

엘리엇은 파운드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수정 작업을 해 나갔고, < 황무지 >가 인정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서서히 확신하기 시작했다.

1968년 뉴욕 공립도서관의 버그 콜렉션에서 그 초고가 발견되었는데, 평범한 원고의 모습이 아니었다.

타자로 친 부분도 있고 부분적으로 육필 원고가 섞여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인의 심오한 문학, 철학, 언어에 대한 깊은 조예는 물론 여러 사람과 함께한 치열한 작업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천 행에 달하던 황무지 초고는 433행으로 정리될 수 있었고, 미국 출신의 엘리엇이라는 시인은 영국 시문학계에 분명한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정서가 메말라버린 현대의 ‘The Waste Land’

엘리엇은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 황무지 >를 작업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모든 것이 황폐하였는데, 특히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우울, 급속도로 진행되는 현대화로 인해 정서적인 황폐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엘리엇이 말한 황무지는 바로 전후 현대사회에서 보이는 정신적 황폐가 만연한 불모지를 암시한다.

엘리엇 스스로가 황무지가 상징하는 것에 대해 암시하려는 듯 작품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다. 죽고 싶어.”

희랍신화에서 쿠마는 유명한 무녀다.

그녀는 아폴로신에게서 많은 햇수의 수명을 받았으나 그만큼의 젊음도 함께 달라는 청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수명만 받고 젊음을 얻지 못했다.

그 결과 늙고 메말라 들어 조롱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죽음보다 못한 죽은 상태, 그것이 황무지인 것이다. 시인은 정서적 황폐에 빠진 전후 사회를 그러한 황무지에 비유하고 있다.

모든 세상을 환히 비추고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4월. 정서적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4월은 오히려 잔인한 달이다.

또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졌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찬란한 4월은 그 찬란함만큼 더 잔인한 달이 된다.

이처럼 시인이 고뇌를 통해 만들어낸 시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재창조되고 있다.

엘리엇은 정서가 황폐화된 현대사회를 꼬집었지만, 정작 자신의 난해한 시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깨우고 있다.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He who was living is now dead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간다 We who were living are now dying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While a little patience

– 엘리엇의 시 < 황무지 > 제5부 중에서

봄시 엘리엇 황무지: 4월은 잔인한 달

4월의 문턱에 서 있으니,

4월만 되면 생각나는 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from The Waste Land

/T.S.Eliot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황무지>로부터

/엘리엇

April is the cur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o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휘젓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었지.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 주고,

매마른 구근으로 작은 목숨을 먹여 살려 주었지.

겨울에서 느끼는 안정감과 포근함에서 깨어나

새롭고 그래서 불안한 변화를 겪어 내어야 하는

복잡한 마음을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봄이 오면

설레고 따뜻하고 싱그러운 분위기가 즐겁기도 하지만

계절의 변화 중 가장 큰 변화이기에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의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벚꽃이 피고

날씨가 완전히 풀릴

4월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 읽기에 좋은 시인 것 같습니다.

[박대석칼럼]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수천 만명의 사람이 사망한 100년 전, 종말론적 어조로 쓰여진 현대시의 고전 T. S. 엘리엇의 ‘황무지’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계절인 4월이 왜 ‘잔인’ 하다고 했는가?추운 겨울 꽁꽁 언 땅을 어린싹이 뚫어야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인가? 땅속 깊은 곳에 언 뿌리와 외부의 봄기운이 줄탁동시(啐啄同時) 해야 살아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다. 퍽 힘든 과정이다.어쩌면 시인은 추억이나 욕망이 얼어버린 한겨울을 오히려 따뜻하게 느꼈나 보다. 감각 없는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시인의 의식은 깨어지고 다시 황무지의 현실로 돌아오는 절망감 때문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나 보다.그러나 필자는 이 시의 핵심은 첫 구절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 아니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Lilacs out of the dead land)로 본다. 싫든 좋든 살벌한 현실 세계로 부활하기 때문이다.시인 박목월은 ‘4월의 노래’에서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라고 했다.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역시 현실 세계로 부활이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더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해라 그런가 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분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으나 여태 꽃 피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연은 매일 아침 좋은 말을 전해주시는 ‘마리아 킴’님이 지난해 필자에 보내온 글이다.

한국처럼 추운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고 한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을 ‘춘화현상(春化現象)’이라 한다. 튤립, 히아신스, 백합(百合),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런 얘기도 있다.

매년 가뭄과 폭우로 농사를 망치는 한 농부가 자기 마음대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하늘은 흔쾌히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농부의 말대로 해가 뜨고 비가 내렸다. 벼는 그 어느 해보다 잘 자랐다.

신이 난 농부는 벼를 베어서 쌀을 찌었는데, 웬일인지 모두 빈 쭉정이였다. 농부는 하늘에 따졌다. 하늘은 말했다. 난 네가 원 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 농부는 거친 바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꽃도 벼도 어려움을 겪어야 비로소 생명을 잇는 아름다운 꽃도 피고 열매도 만들어 영글게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과연 생물만 그럴까?

▲ 코로나로 인류가 추운 겨울에 묻혀있다.

오늘 현재 1억 2천9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28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아시아 개발은행(ADB)은 신종 코로나로 세계 경제 손실 규모가 최대 8조 8천억 달러(약 1경 818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의 22년간 예산과 맞먹는다.

사람들을 집에 가두고, 사람과 거리를 두게 하고, 입에는 재갈 같은 마스크를 물렸다. 수많은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비행기를 땅에 묶어 놓았다. 국가는 중세의 성곽처럼 문을 닫으며 지구의 질서를 멈추어 놓았다.

앞으로 이 사태가 얼마나 갈지, 얼마나 더 커질지 아무도 모른다. 지구에 존재하는 약 1조 개의 바이러스 중의 하나인 코로나가 19번이나 변종하며 만들어 놓은 일이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에 따르면 전염병 발생 빈도가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심하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에는 991건에 불과하던 것이, 1990대에는 1,924건, 2,000년에는 3,420건으로 많이 증가하였다.

앞으로도 이러한 발생 빈도의 증가 추세는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전염병의 발생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팬데믹 2.0’이 곧바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당장 현재 코로나도 단기간 내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내는 괴력을 보인다.

코로나 19 신종 바이러스는 자신이 살기 위하여 사람을 숙주로 택한 것뿐이다. 이런 환경을 누가 만들었을까? 그동안 사람들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 식물 등이 자기를 위해 있는 것인 양 잘못 알고 정복자 행세하며 마음대로 훼손하여 벌어진 일이 아닐까.

무서운 자연의 경고다.

인간은 급속하게 만든 백신으로 언 땅속 라일락 뿌리에 봄비가 스미게 하듯 부활하려 몸부림치고 있다. 이길 것이고 부활할 것이다.

신앙 세계에서도 내가 죽어야 성령이 산다고 하듯이, 인체 내 세포들도 매일 죽어야 새 세포가 나와야 산다고 한다. 죽어야 사는 것이다. 지금 인류는 그런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리라…

▲ 정치와 자식 교육

국민의 힘은 지난 총선을 포함해서 내리 4번이나 선거에 참패를 당했다. 지금은 감옥에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과거 선거에 지고 나서 여의도 공터에 천막을 만들었다.

추운 겨울, 스스로 천막에 들어가 선거를 진두지휘하여 선거에 승리,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까지 들었다.

더불어민주당에는 1987년 전후로 해서 혹독한 겨울을 지낸 사람들이 많다. 친구 집에 숨어서, 아스팔트에서 20여 년간 모진 세월을 보낸 586이다. 그들은 싸움과 선거에는 달통해 있다.

지난 총선까지 아직도 주류라고 착각하고 세상이 변한 것을 실감하지 못한 국민의힘 수준으로 현재의 여당을 선거에 이기기 어려웠다.

대중을 흡수하는고도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때로는 조직원들 스스로가 자기 팔다리를 자르는 희생을 감수하며, 같은 편이 흠이 있어도 똘똘 감싸 안을 줄 아는 지금의 여당을 이긴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필자는 지난해 4월 한 언론 칼럼에서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은 누가 당을 맡든 당의 살가죽을 벗겨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광야로 내몰아야 한다. 생존을 위한 본능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살가죽을 벗겨 새롭게 한다는 혁신(革新)이다. 나라를 위해서도 품격과 자기희생을 기본으로 하는 건강한 보수의 탄생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4월 7일 서울 및 부산시장 선거이다.

과연 언 땅속에 있었던 국민의힘 뿌리에 유권자들의 봄기운이 미칠지 두고 볼 일이다.

정치뿐이 아니다. 요즈음 자녀 한 명이 대세다. 자식 농사 역시 옥이야 금이야 온실에서 키우면 작은 바람에도 쓰러진다.

어려서부터 칼에 손이 베이기도 하고 거친 흙도 먹어보며, 배고픔도 알고 커야 제대로 알이 꽉 찬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인생의 긴 항로에서 모진 풍파도 이겨낼 수 있다.

언론에 자주 보는 자살 소식이 절대 미담이 될 수 없다. 애들이 배울까 두렵다.

생을 달리 한 그들은 아쉽게도 추운 겨울 땅속 잠든 뿌리가 버텨서 봄비로 깨어나는 부활의 의미를 미처 몰랐으리라…

코로나의 겨울은 인류의 의지로 끝이 나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듯 우리는 싫든 좋든 현실의 황무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사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부활의 달이다.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박대석

1.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1. The Burial of the Dead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이 시 마지막에서는 성령의 열매인 평화를 통하여 기억이 성령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성령이 떠올리는 추억, 회상 또는 기억은 ‘죽음과 부활의 고통’을 수반하므로 황무지인에게는 ‘붉은 반석’이나 ‘익사’처럼 두렵다.

부활의 봄은 가장 큰 고통을 주므로 ‘가장 잔인’하다. 그러나 살리는 고통이므로 잔인하면서도 인자하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으로 다시 산다는 생명의 신비다. 이 생명의 신비는 생명의 봄이 죽음의 겨울을 통해서 오는 자연의 순환에 나타나 있다[乾, 元亨利貞].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주지적, 상징적, 신화적, 문명 비판적

*제재 : 고대의 성배(聖杯) 전설, 원형 신화

*주제

① 현대 문명의 비인간성 고발

② 정신적 불모의 세계 속에서 벌이는 간절한 구원의 갈망

*특징

①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동시에 병치되어 있음.

② 독백 형식을 통해 시인의 내면 의식을 표현함.

③ 고대의 전설과 신화를 빌어 문명의 황폐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함.

*출전 : “황무지”(1922)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성배(聖杯) 전설’을 이용하여 20세기 유럽 문명의 황폐함을 ‘황무지’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전체 5부 중 제1부에서 시인은 죽음과 재생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계절인 사월이 잔인한 것은 작고 연약한 씨앗이 겨울의 언땅을 뚫고 밖으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억이나 욕망 없이 모든 것이 잠든 겨울이 오히려 따뜻하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행복했던 과거의 독일 생활을 회상하게 된다.

그 내용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여인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시인의 의식은 다시 황무지로 이어지고 황무지의 구체적 이미지가 제시된다. 여기에서 시인은 에스겔의 성경 구절, ‘인자(人者)여,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를 인용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겪었던 고난을 현대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이후의 행에서 시인의 명상은 행복한 사랑의 노래로 이어지고, 사랑이 생의 절정의 순간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이라는 절망적인 마무리로 이를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은 바그너의 가곡 ‘트란스탄과 이졸데’의 3막 24절을 인용한 것으로, 다시 황무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잠시나마 느꼈던 사랑의 꿈이 깨어지고 다시 황무지의 현실로 돌아오는 절망적 느낌을 준다. 이 시는 삶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여러 요소들, 즉 외로움, 공허함 등이 생생하게 나타나지만, 역설적이게도 부활에 대한 기대 의식도 함께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작품 연구실 이 시의 배경 – 성배(聖杯) 전설

‘성배 전설’에 의하면 어부(漁夫, 물고기는 생명의 상징) 왕은 저주를 받아 병들고, 성 불구가 된다. 그 결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는 강에 물이 마르고 들에는 곡식이 생산되지 않아 황무지가 된다. 이 저주는 왕이 나올 때까지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왕과 나라를 구하려면 마음이 순결한 기사가 황무지 한복판에 있는 위험 성당으로 가서 육체와 정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성배(聖杯, 최후의 만찬 때 쓰였고, 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렸을 때 흘린 피를 받았다고 하는)를 찾아내야 한다. 성배를 찾게 되면, 그 힘으로 어부가 왕이 회복되고 황무지에 다시 풍요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이와 같이 다양한 신화적, 종교적 자료를 사용해서 공허와 고독과 비이성, 무분별한 성(性)적 행각이 판치는 고대 황무지와 같은 근대 사회를 그려 내고, 그 사회가 재생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라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썩어도 덜 썪는다.”

ㅡ 채현국(고 효함학원 명예이사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음악×문예 03

T. S. 엘리엇, 「황무지(The Waste Land)」

4월이다. 깊은 봄이다. 지금은 달력에 표시된 날로만 남았지만, 농사가 시작되는, 양력 4월 4, 5일은 24절기의 하나인 청명(淸明)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이때부터 바야흐로 봄이겠지만, 지구온난화와 현대인의 속도감이 더해진 4월은 봄과 여름이 널뛰는 달이다. 낮에 피었던 벚꽃은 밤바람에 목숨처럼 분분히 날린다.

그럼에도 4월의 햇볕은 더없이 따뜻하다. 북향집의 창도 노르스름하게 환하다. 건너편 건물에 반사된 햇빛이 창으로 들어와 방 안은 조명 없이 충분히 밝아진다. 창밖 건물이 바짝 다가와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햇살의 농도와 따뜻함 덕분이 아닐까. 먼 산도 바싹 다가오는 이 계절엔 서먹하던 사람이 일순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차가웠던, 차갑다고 느꼈던 사람이 햇살을 등에 받고 환하게 부서지는 모습에 눈부셔 실눈을 뜨게 된다.

바다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

‘황무지’를 읽는다. 4월의 황무지는 시를 읽는 사람에게나 농사꾼에게나 황폐하다. 따뜻한 햇살은 거친 땅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읽는다. 아니 읽어야만 한다. 농민의 황무지 읽기는 ‘논밭을 갈다’이거나 ‘경작하다’일 것이다. 봄이 되면 겨우내 준비했던 작은 생명의 씨앗을 황량한 흙속에 정성껏 밀어 넣는다. 서두르지 않고 게으르지도 않게 시간을 호흡하면서 천천히 땅과 하나가 된다.

매년 맞는 봄이라 해서 농사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농사꾼의 손끝은 익숙하게 땅과 하나가 되지만 마음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순환의 시간은 땅을 예측하게 하고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게 해준다. 농민의 두려움은 오히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 있다. 이때 두려움은 종종 분노로 드러난다. 아스팔트에 심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분노는 좌절의 다른 이름이 된다. 앞으로만 죽죽 뻗은 망망한 아스팔트 길은 언제나 새로움을 요구한다. 거기엔 다시 돌아올 시간이나 계절 따위는 없다. 봄이 와도 그 봄이 아니다.

굴곡 없는 아스팔트를 달리는 사람에게 4월은 더없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지난해와 다르고 다음 해와도 다를, 언제나 새로운 4월. 그럼에도 이 계절이 잔인한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지난 4월들은 돌아온 계절에 겹쳐진다. 동백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 바다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 땅을 갈아엎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 기억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이 계절은 황무지다. 4월의 햇살이 겨울을 벗어난 사람들의 고통을 찌른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 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 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엘리엇, 「황무지」 부분

T. S. 엘리엇, 『황무지』, 황동규 옮김, 민음사, 2004

어딘지 모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직선의 시간 위에서 시를 읽는 사람들은 고통스럽다. 그 시간에는 그동안 만끽했던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예찬’ 그리고 ‘생과 자연의 하나 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외면의 편안함’과 ‘응시의 고통’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흘러 돌이킬 수 없으므로. 누구도 예외 없이 어딘지 모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위에 있으므로.

「황무지」의 화자는, 그러므로 고통스럽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제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근대의 시간 위에서 ‘4월’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따뜻”한 겨울에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붙들고 ‘외면의 편안함’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미 깨어 있는 화자는 “잠든 뿌리를 봄비가 깨”울 때조차 고통스러워한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도 그의 눈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순환의 시간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고 직선의 시간은 거부할 수 없다. 직선의 시간 위에서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그래서 더욱 고통스럽다. ‘구원’도 ‘힐링’도 ‘웰빙’도 기억의 고통을 삭일 수 없다. 결국 이런저런 대증적 요법에 마음을 맡긴 채 줄타기를 하며 위안을 바란다. 결국 그 곡예마저 유지할 수 없는 ‘깊은(Deep)’ 계곡에 ‘보라색(Purple)’ 고통의 ‘4월(April)’이 있다.

4월은 잔인한 시간

해가 빛을 내뿜을지라도

세상은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을 응시하네

4월의 비는 여전하고

계곡은 고통으로 가득 찼네

넌 내게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네

나는 잿빛 하늘을 쳐다봐

거기 어딘가에 푸른 하늘이 있어

잿빛 하늘 어딘가에서 너를 찾을 수 있어

왜 그래야만 하냐고 자꾸 물으면

난 통곡하며 말하리라 알 수 없다고

어쩌다가 순식간에 난 잊어버리고 미소 짓겠지

하지만 곧 느끼게 될 거야 끝없는 4월

외톨이 소녀 같은 4월을

내 마음 어두운 곳에서 난 모든 걸 명확히 알 수 있어

태양을 느낄 수 없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이럴 때 봄은 그저 어둠의 계절일 뿐이라는 걸

잿빛 하늘 어딘가에 푸른 하늘이 있어

잿빛 하늘 어딘가에서 너를 찾을 수 있어

왜 그래야만 하냐고 자꾸 물으면

난 통곡하며 말하리라 알 수 없다고

알 수 없다고

―Deep purple, 〈April〉 가사 전문

봄은 그저 어둠의 계절일 뿐

수사적 표현은 다르지만 Deep Purple의 〈April〉은 엘리엇의 「황무지」의 시적 어조와 분위기를 그대로 잇는다. 그 둘 사이의 세상은 끝을 향해 치닫는 광폭한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아우슈비츠’ ‘핵무기’ ‘4・3 제주’ ‘한국전쟁’ ‘중동전쟁’ ‘베트남전쟁’, ‘80년 광주’ 등등 숱한 제노사이드의 정거장을 거쳐왔다. 그 정거장에 ‘2021년 미얀마’가 더해진다. ‘지구 종말 시계’는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눈금을 사람들 눈앞에 디밀고 ‘째깍째깍’ 바늘 소리를 들려주지만 우리에게는 그 시계를 멈출 힘이 없는 듯하다.

“내 마음 어두운 곳에서 난 모든 걸 명확히 알 수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력함. 결국, 세상은 거대한 호스피스 병동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일 뿐이다. ‘지구 종말의 시간에 다다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달 4월을 고통 속에서 되살릴 수 있을까? Chris de Burgh의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에 나오는 4월의 눈동자를 지닌 소녀를 문전박대하는 겨울나라의 왕은 우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는 통곡도 없이 조용히 말할 수밖에, “알 수 없다고.”

https://youtu.be/FRp_KGtdQpU

4월은 왜 잔인한 달일까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뭔가 사연을 가진 표현으로 보입니다. 어디에서 유래한 말일까요? 왜 신록의 4월이 잔인하다는 거죠? 4월에 끔찍하게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이 말을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던 4·19 혁명. 수만 명이 희생당했던 제주 4·3 사건. 세월호의 참사도 4월에 일어났습니다…. 정말 4월에 특별히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쁜 일이 때를 가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보다는 한창 봄이 시작되는 때에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면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계절과는 뚜렷이 대비되어 더 끔찍하게 여겨지는 나머지 그런 표현이 나온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

사실 이 말은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지요. 한 편의 시 구절에서 비롯하였습니다.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Eliot)의 유명한 시 “황무지(The Waste Land)”가 그 출처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첫 행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대목만으로는 그 말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제대로 알려면 이 시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433행이나 되는 긴 시입니다. 시인이 직접 붙인 주석이 50개나 되는 어려운 시이기도 하고요. 핵심적인 주제를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삶의 목적과 의욕을 잃은 사람들의 역설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드는’ 달입니다. 라일락뿐만 아니라 만물을 겨울잠에서 깨워 주는 달이죠. 그런데 왜 시의 화자는 이 소생의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화자는 이유를 다음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고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는 겁니다.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봄보다는 겨울이 좋았다니까요. 눈이 대지를 덮어 세상의 고통과 더러움을 잊게 해주고 비축해 둔 식량으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생각이 전혀 낯설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실제로 그러한 감정을 경험하니까요.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경우입니다. 잘 자고 있는데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옵니다. 해가 떠서 창문을 밝힙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일하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 세상의 괴로운 일들 다 잊고 그냥 더 자고 싶습니다. 왜 아침이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잊고 더 편히 자고 싶은 사람에게 아침 햇살은 어서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우는 자명종처럼 잔인하기 짝이 없습니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20세기에 들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고 생명력을 가진 것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서구인들의 정신세계를 묘사한 시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시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서구인의 마음속 넋두리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시인은 삶의 방향과 의욕을 잃은 채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사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를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원래의 맥락과는 동떨어진 어법이 된 “4월은 잔인한 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원래의 맥락과는 동떨어진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엘리엇의 시 구절에서 표현을 빌렸을 뿐 딴 뜻을 가진 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묘사하려고 했던 것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토요에세이] 4월은 잔인한 달

해마다 4월이 되면 엘리엇의 장편시 ‘황무지’의 앞 구절이 회자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주었다.”

황무지는 기술문명에 갇힌 인간성과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 대한 허탈감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그런 황폐함조차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쟁은 잔인하다.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탐욕과 무지 또한 잔인하다. 그러나 그런 죽음과 절망조차 이겨내는 라일락의 소생과 마른 구근의 부활은 그래서 그냥 잔인한 게 아니라 ‘가장 잔인한(the cruelest)’ 4월의 고백이다.

4월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크고 핵심적인 전례인 부활절이 주로 있는 달이다. 부활은 죽음을 딛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부활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한다. 죽음보다 잔인한 것은 없다. 죽음이 꼭 생명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탐욕을 죽이고 오만을 죽이며 비인격성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삶으로 다시 살아난다. 죽음을 외면하고 부활만 바라보는 것은 맹신이며 무지일 뿐이다.

4월은 다시 우리에게 잔인할 수밖에 없다. 지워낼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작년 4월 16일, 세월호는 수백 명의 생명을 안고 물에 잠겼다. 그것은 자본의 탐욕과 정치의 무능이 빚어낸 재앙이고, 무엇보다 살려낼 수 있는 생명을 수수방관하고 수장시킨 부끄러운 시대의 민낯이었다. 대통령은 7시간이나 부재 상태였으며 정부는 갈팡질팡 헛짓만 했다. 온 국민은 TV로 물에 잠긴, 그러나 아직은 일부가 물 위에 떠있는 배를 망연자실 바라봐야 했다. 그 안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 자식과 가족을 둔 뭍의 가족들의 심정을 우리는 결코 온전히 헤아릴 순 없다.

벌써 한 해가 지났다. 기자회견에서 억지 눈물을 짜낸 대통령은 약속과 달리 유가족이 얼씬도 못하게 외면했고, 자칭 보수와 애국을 부르짖는 자들은 단식하는 유가족들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조롱하는 파렴치를 태연하게 보여줬다. 여전히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차가운 물속에 잠긴 원통한 영혼은 짐짓 모른 척하며 심지어 그저 교통사고일 뿐이라고 짓뭉개거나,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살아나지 못한다느니 이쯤에서 그만 접자느니 하는 무례와 야만으로 시간만 허송했다. 자신의 가족이 그 상태에 있다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국가와 정부를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서 정부는 조사의 대상이지 조사의 주체가 아니다!

봄이다. 얼어붙은 땅 속에서 숨 고르고 마른 가지 끝에 매달려 웅크리며 겨울을 버틴 꽃들이 부활하는 봄이다. 그 어떤 계절보다 봄이 특별한 것은 바로 그런 극적인 부활의 상징을 체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1년 내내 무기력과 무능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정부가 4월 선거를 앞두고 세월호를 인양할 수도 있다는, 그나마도 온갖 변명의 조건을 내걸고 신호를 보내며 여론을 떠본다. 비통한 심장을 안고 겨우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내리꽂는 잔인하고 몰상식한 이들에게도 봄은 똑같이 찾아온다. 과연 그들의 봄은 어떨지 궁금할 뿐이다.

엘리엇이 이 장면을 봤다면 뭐라 했을까?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봄이라고 하지 않을까? 죽음의 땅에서 다시 생명을 토해내는 4월의 부활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엘리엇조차 지금 우리의 세태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야만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 야만을 죽이고 ‘살림과 사랑’으로 죽은 우리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런 봄이고 그런 4월이다. 그러나 우리가 봄을 맞을 자격은 과연 있는지 두렵기만 하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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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칼럼] 잔인한 달, 4월이 주는 의미

임창덕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한 해가 벌써 4분의 1이 지나갔다. 연초 작심한 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봄기운도 완연해지고 겨우내 움츠린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삶의 의욕이 저절로 생겨나는 찬란한 계절이다. 그런데 영국 시인 엘리엇(T.S. Eliot)은 ‘황무지’라는 시(詩)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다. 시인은 이렇게 좋은 계절을 왜 잔인하다고 했을까.

그것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이유야 문학적으로 해석할 일이겠지만 나는 매년 4월이 되면 “4월이 가장 잔인한 이유는 생명이 탄생하는 화려한 계절이지만 여름 그리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라는 마지막 순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리스 신화와 잇닿아 있다. 땅의 생산력을 관장하는 만물의 여신은 가이아(Gaia)에게는 페르세포네(Persephone)라는 딸이 있었다.

딸은 지하의 신, 하데스(Hades)에게 납치됐고 가이아는 협상을 통해 3분의 2는 엄마인 가이아 품에, 3분의 1은 지하세계에 있는 것으로 합의한다. 재미있게도 대지의 신인 가이아에게 있는 동안은 곡식이 잘 자라고, 나머지 기간은 겨울로, 우리가 알다시피 곡물이 잘 자라리 않는다.

그리스 신화처럼 포근한 엄마의 품에서도 영원히 있을 수 없는 게 페르세포네 신세와 사람의 삶이 슬프게도 닮아 있다.

나는 가끔 아들, 딸을 볼 때면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키우는 재미도 느끼며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보면서 키우지만 인간의 숙명처럼 우리 아이들의 삶도 여느 삶처럼 죽음이라는 끝이 있음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가장 아름답게 태어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지만 결국 내가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하고 그리고 누군가를 떠나게 되는 시작인 것을 안다면 바로 태어나는 순간이 가장 잔인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늘 이별을 전제로 한다.

문득 시인 김영랑의 시(詩)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생각난다.

이 시에서 피면 곧 지고 말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봄을 여읜 슬픔이 있더라도, 떨어질 것을 알고 있지만 기다리는 것이다.

끝을 알지만 시작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따뜻한 봄날 피어날 꽃들이 피기를 기다리고 그 모습을 즐기지만 우리는 그 끝이 있음을 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오고 꽃들이 피기를 또다시 기다린다.

또 지게 될 것을 알면서 말이다. 그래서 4월은 가장 잔인한 것 같다.

모든 것의 시작이 곧 끝임을 알기 때문이다.

/임창덕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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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지난주 올 들어 첫 꽃을 보았습니다. 캠퍼스 길가에 노란 수선화 두 송이가 수줍은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는 어느새 푸르러진 풀 섶 속에 작은 제비꽃이 숨어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보아주는 이 있든 없든 말없이 성실히 피어있는 작은 꽃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나도 ‘살아서 살아있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을 흔드는 4월을 시인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합니다. 이 시는 4월이면 누구나 한번쯤 중얼거려보는 엘리엇의 유명한 시, [황무지]의 첫 구절입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고 생명수 같은 봄비가 무감각하던 겨울뿌리를 흔들어 망각의 잠에서 깨워주는데 왜 잔인한 달인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현대인을 메마른 불모의 대지 황무지에 사는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라고 말합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것은 참된 사랑에 접근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는 감각들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의식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일깨우면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봄이 때로는 진실의 태양빛처럼 너무 부시고 아려서 그만 눈을 감고 싶어집니다. 4월이 잔인하다든 것은 이렇게 살아있으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든 채 살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 그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에게 생명과 의식을 일깨우는 4월은 잔인하기만 합니다. 우리 모두 엘리엇의 또 다른 시 구절처럼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Humankind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존재들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4월입니다. 긴 겨울의 침묵을 깨고 어김없이 푸르러 오는 생명의 계절, 가끔 가던 길 멈추고 물어봅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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