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의 춤 | 다윗의 춤 – M.I.C Worship 상위 100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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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춤 – M.I.C Worship
작사 강현석 작곡 강현석
엔진을 켜고
주님께 달려갈 시간
준비됐으면 내게 말해
1 2 3 4 Let’s go
이걸론 안돼
조금 더 용기를 내봐
준비됐으면 내게 말해
1 2 3 4 Let’s go
이 시간 주만 높이리
할 수 있다면 춤을 춰서라도
이 시간 주만 높이리
온 맘 다하여 영원히
이 시간 주만 높이리
할 수 있다면 춤을 춰서라도
이 시간 주만 높이리
온 맘 다하여 영원히
엔진을 켜고
주님께 달려갈 시간
준비됐으면 내게 말해
1 2 3 4 Let’s go
이걸론 안돼
조금 더 용기를 내봐
준비됐으면 내게 말해
1 2 3 4 Let’s go
1 2 3 4 Let’s go
이 시간 주만 높이리
할 수 있다면 춤을 춰서라도
이 시간 주만 높이리
온 맘 다하여 영원히 (X4)
온 맘 다하여 영원히
온 맘 다하여 영원히

[ Credit ]Vocal 이사무엘, 최진영, 한 별
Keyboard 이라니, 김윤주
A. Guitar 강현석
E. Guitar 이재승, 강현석
B. Guitar 허준범
Drum 김승주
Composed by 강현석
Producer 강현석
Arranged by 강현석, 이라니
Mixed by 정석현(studio-d)
Mastered by 정석현(studio-d)
Recoding 정석현, 강동균
Album Design 박혜원
Team Manager 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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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춤(대상15:29) – 네이버 블로그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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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29/2022

View: 6175

다윗의 춤과 찬양

다윗의 춤과 찬양. 사무엘하 6장 12절~23절. 베들레헴의 한 촌락에서 이새의 아들 중 8번째 태어난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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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ome.ks.ac.kr

Date Published: 6/13/2021

View: 7552

[스크랩] 다윗의 춤, 삼하 6:12b~20 – Daum 블로그

다윗의 춤, 삼하 6:12b~20 문제 제기: 당신은 이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다윗도 언약궤가 들어올 때에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3/30/2022

View: 7670

다윗의 춤 – 두란노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올 때 다윗은 하나님께 경배하며 옷이 벗겨질 정도로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삼하6:12-14).

+ 더 읽기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8/8/2021

View: 6448

[오늘의 설교] 왕이 춤을 추다 – 국민일보

그런데 무엇이 왕인 다윗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한 것일까요?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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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2/25/2022

View: 2207

주 앞에서 춤을 추어라 < 김재성의 느낌 있는 성서 ... - 뉴스앤조이

다윗의 춤은 법궤 앞 즉 주님 앞이라는 분리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로 예배인 것이다. 예배는 그 자체로 끝나야지,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3/27/2022

View: 9154

다윗의 춤/엠아이씨 워십(M.I.C Worship) – 벅스

다윗의 춤 … Let’s go 이 시간 주만 높이리 할 수 있다면 춤을 춰서라도 이 시간 주만 높이리 온 맘 다하여 영원히 이 시간 주만 높이리 할 수 있다면 춤을 춰서라도 …

+ 여기에 표시

Source: music.bugs.co.kr

Date Published: 3/8/2022

View: 1694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다윗 – 한마음교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다윗 성으로 모시게 된 것이 너무 기뻐서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통치 초기에 블레셋의 공격을 어떻게 물리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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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gmission.org

Date Published: 6/3/2022

View: 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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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춤 - M.I.C Worship
다윗의 춤 – M.I.C Worship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다윗 의 춤

  • Author: MIC Worship
  • Views: 조회수 3,0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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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5. 1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scjM04WcNU

다윗의 춤(대상15:29)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대상15:29)

”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삼하6:16)

​아버지가 살아계실때의 일이 기억속에 잔잔히 남아 있다.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는 아들목사의 교회에 오셔서 작은 부흥회에 참석하셨다.

나는 몇명안되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전에 준비찬송을 열심히 불렀다.

성도들이 은혜를 더 많이 받도록하기 위해 부흥회때에는 박수치며 목청을 다해 찬송을 부른다.

열심히 찬송인도를 하던 중 자리에 앉아계시던 아버지께서 천천히 일어나시더니 앞으로 나오신다.

나오시더니 덩실덩실 찬송에 맞춰서 춤을 추신다.

아버지는 원래 그렇게 흥이 있으신 분이 아니었다.

매우 침착하시고 논리적이고 이지적인 분이셔서 감정에 휘둘리시는 분이 아니셨다.

그런데 혼자서 10여분동안 찬송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울음이 울컥 올라왔다.

아버지의 춤사위는 마치 성령에 취한 사람처럼 부드럽게 눈을 감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춤을 추는 것같았다.

아버지가 춤추는 모습은 생전처음이며 마지막이었다.

나는 예배가 끝난 후 아버지에게 왜 춤을 추셨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부흥회를 베풀고 열심히 찬송하는 모습을 보시고 아버지는 평생 해보지 않은 춤을 자연스럽게 추신 것이다.

기쁨과 평안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취하셨을 것이다.

​ 다윗은 왜 자신의 옷이 벗겨져서 치부가 드러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춤을 췄을까?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여부스족속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제일 먼저 공략하여 시온산성을 빼앗고 시온산성 다윗성이라 칭했다.

이로써 다윗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훗날 솔로몬은 예루살렘성전을 세우게 된다.

아마도 다윗은 여부스사람들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아 그곳에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세우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쳤던 모리아이며 다윗이 하나님에게 번제를 드렸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던 곳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골고다였다.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은 왜 영광스러운 곳이 되는가?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도록 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다윗은 20여년간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는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 다윗성에 모셔오기로 결심한다.

여호와의 궤는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가져갔다가 블레셋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벧세메스로를 통해 이스라엘로 귀환하여 기랼여아림에 들어가서 20년동안 방치되었던 것이다.

다윗이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마음이 아파했을까?

다윗이 힘이 없어서 여호와의 궤를 가져올 수 없었지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다윗성을 짓고 여호와의 궤를 제일 먼저 모셔오고자 한 것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이 세워질 것과 그리스도께서 인류구원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실 것을 영적으로 알고 있었을까?

다윗의 시편을 보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이 되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궤가 모셔져야 한다.

여호와의 궤가 없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다윗은 3만여명의 사람들을 준비하고 새수레를 준비하여 악사들의 연주와 노래와 함께 성대하게 여호와의 궤를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운반해왔지만 수레를 끌던 소들이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펄쩍 뛸때 웃사가 법궤를 만짐으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잘못된 방법으로 여호와의 궤를 운반한 댓가로 법궤 수레를 이끌던 웃사가 여호와하나님에게 침을 당하여 죽게 된다.

​다윗은 두려움으로 떨면서 더 이상 법궤를 다윗성으로 운반하지 못하고 근방에 있는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간 두었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큰 복을 내리심으로 다윗은 다시 여호와의 궤를 모셔오기로 결심한다.

두번째로 법궤를 모셔올 때 다윗은 모세의 율법을 상고하여 여호와의 궤를 수레에 싣지 않고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을 성결케 한 후에 어깨에 궤를 메게 하고 노래하는 레위인들이 뒤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찬양을 하도록 하여 이스라엘무리들은 뒤에 따르게 하고 다윗은 제사장들과 함께 베에봇을 입고 춤을 추면서 자신의 성 다윗성에 여호와의 궤를 모셔들이게 된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무리들과 함께 ​모셔오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을 다윗성 창문을 통해 본 미갈이 속으로 업신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업신여겼다(despised)는 것은 경멸하고 깔봤다는 뜻이다.

​미갈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미갈은 가족을 축복하려고 들어오는 다윗왕에게 수치스럽다고 빈정거렸다.

방탕한자( vulgar fellow )​는 아주 천박한 상놈이라는 뜻이다.

염치없이​( shamelessly )파렴치하게 뻔뻔스럽게

자기몸을 드러내다( disrobing )​ 아마도 다윗이 춤을 출때 베에봇이 벗겨졌던 것같다.

그냥 다윗의 행동을 보면 마치 술먹고 취한 사람이 창피한지도 모르고 미친듯이 춤을 추다가 옷이 벗겨져서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 다윗의 대답이 가관이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6:21-22)

다윗이 옷이 벗겨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춤을 춘 것은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한 것이고 여호와께 드리는 최고의 제사이며 예배라고 말한다.

여호와앞에서 더 낮아질 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집종앞에서는 높여주실 것이라는 고백이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신 자의 예배를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는 여호와앞에서 더욱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아마도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장차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부활을 이루실 예루살렘성에 모셔드릴 때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에 취한 다윗은 자신의 춤사위를 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거룩한 춤을 추었던 것이다.

어쩌면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격식을 갇추고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여호와의 궤를 옮기며 왕의 영광을 드러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왕의 위엄을 세우지 않고 철부지 아이처럼 굴었다고 빈정대는 미갈의 태를 닫으셨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다윗의 춤은 하나님앞에서 어린아이같이 뛰놀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참 믿음을 가진 자의 거룩한 춤이며 성령의 춤이다.

[스크랩] 다윗의 춤, 삼하 6:12b~20

다윗의 춤, 삼하 6:12b~20

문제 제기: 당신은 이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다윗도 언약궤가 들어올 때에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 당신도 그렇게 춤을 춰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신나게 춰라.

찬양 인도자나 부흥 강사들이 소위 “분위기가 조용한” 성도들에게 흥겹게 춤을 추도록 유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멘트이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쭈뼛대며 일어나 주변을 살핀 후 음악에 맞추어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곳 저곳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빠르게 움직이다가 땅이 꺼져라 방방 뛴다. 처음에는 내가 춤을 추는가 싶더니, 곧 춤이 춤을 추고, 결국 춤이 나를 춘다. 교회당 안은 나이트 클럽과도 같은 분위기가 되고, 사람들은 흥에 겨워진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도 잘 알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을 목도할 때 마다 가슴 한 켠이 아련해 진다. 다윗이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는 현상이 자꾸 외형적으로만 해석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위와 같은 멘트를 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1) 다윗이 춤을 추기 바로 전에 무엇을 했는지, (2) 춤을 추기 전에 언약궤를 맨 사람들과 몇 걸음씩 걸었는지, (3) 춤을 어디에서 추었는지, (4) 춤을 출 때에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5) 어떤 춤을 추었는지 등을 말이다. 우리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 채 다윗이 바지가 내려가도록 춤을 추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춤을 춘다면 우리의 춤은 다윗이 추었던 춤과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춤을 춘 이유에는 위에 던져진 질문들에 합당한 답이 있었다. 그것이 다윗의 춤을 거룩하게 만든 것이다. 잠시 삼하 6:12b~16, 20을 보자.

…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이제는 위에 언급된 질문들에 맞는 답을 하나씩 찾아보자.

첫 번째 질문: 다윗이 춤을 추기 바로 전에 무엇을 했는가? 여섯 걸음을 행보한 후 소와 살진 송아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 후에 힘을 다해 춤을 춘 것이다. 보시다시피 춤이 먼저 나온 것이 아니다. 춤 전에 여섯 걸음의 행보와 제사가 먼저 있었다. 신학자들마다 이 의미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의 해석을 내놓는데 압도적인 해석은 다윗이 오벧에돔의 집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 내내 여섯 걸음씩 행보한 후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춤을 추는 행위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1] 오벧에돔에서 다윗의 성까지는 약 20Km이다. 이 거리를 가는 동안 여섯 걸음씩 행보한 후 소와 살진 송아지를 죽이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해 보자. 길은 동물의 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엄숙하고 숙연한 자세로 마음의 옷깃을 여몄을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있는 힘껏 춤을 춘 것이다. James Sime의 말을 들어보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피범벅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피로 얼룩진 시온의 길과 피로 흐르게 된 강, 도륙된 짐승들의 시체 더미와 뜨겁게 타오르는 제단의 불은 다윗의 춤과 어울리지 않는 대비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2]

그렇다. 다윗은 피로 얼룩진 길 위에서 춤을 췄다. 그의 춤은 준비 없이 만들어진 경거망동한 춤사위가 아니라 희생된 동물의 피 위에 세워진 거룩한 예배였다. 교회당 안에서 춤을 추려는 성도들은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다윗의 춤이 동물의 피 위에 세워진 예배였듯이 우리의 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져야 하는 예배라는 것을 말이다. 찬양 인도자들이여, 제발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에게 “예수님 안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며 춤을 추게 만들지 말라. 보혈 밖에서 추는 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춤이 아니라 춤을 위한 춤일 뿐이다. 그들이 옷이 아니라 살갗이 벗겨지게 춤을 춘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질문: 다윗이 춤을 추기 전에 언약궤를 맨 사람들과 몇 걸음씩 걸었나? 여섯 걸음이다. 왜 여섯 걸음일까? 신학자들마다 거의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는데 여섯 이란 숫자에 들어있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하여 해석하는 것이다.[3] Sunny Philip의 해석을 들어보자.

여섯 이란 숫자는 사람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의 힘을 다하여 여섯 걸음을 갔고, 그 후에는 하나님 없이는 한 걸음도 가지 않겠다는 의미로 멈춰 선 것이다. 그가 또 한 번의 여섯 걸음을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힘을 주실 것을 바라며 말이다. 그렇게 그는 제사를 통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4]

Robert D. Bergen도 여섯 걸음의 의미를 안식일과 연결시키며 언약궤를 옮기는 여정을 “다른 여정들과는 다르게 성별(聖別)”하는 중요한 의미라고 말한다.[5] 이렇듯 여섯 걸음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의미한다. 다윗은 이러한 의미들 속에서 하나님께 힘껏 춤을 춘 것이다. 그저 기분이 좋거나 흥분이 돼서 춤판을 벌인 것도 아니요, 분위기에 취해서 춤을 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당 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대다수의 춤들을 보면 이런 의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저 드럼의 비트가 흥겹고, 노래의 곡조가 자극적이기 때문에 춤을 춘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와 그 분과 맺고 있는 화목한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고, 춤을 위한 춤이 추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과 그 분과의 화목한 관계를 생각하며 그 분께 춤을 예배로 승화하여 드린 것임을 말이다.

세 번째 질문: 다윗의 위치는 어디인가? 여호와 앞이다. 다윗이 춤을 춘 위치는 여호와 앞이었다. 성경에서 “여호와 앞”이라는 표현은 중대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의미는 피조물들의 자리이다. 욥 1:6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라는 표현이 있고, 계 7:15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되어 있으며, 시 61:7에는 [왕 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거주”한다고 되어있다. 반면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위치는 성부 하나님과 대등한 옆이다. [6] 이처럼 성경은 피조물과 하나님의 자리를 명확히 구별한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한 채 다윗의 위치를 보라.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앞이다. 그는 지금 절대자의 앞에 선 피조물로써 그 분께 춤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춤을 추다가 흥에 겨워 하나님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춤의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췄다. 요즘 일반적인 교회의 찬양 집회 때 보이는 춤이 사람을 추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 않나? 이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라. 마치 광신자 같다.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을 연상케 한다. 나도 없다. 너도 없다. 하나님도 안 계시다. 그저 춤에 취해 춤을 춘다. 내가 춤을 추고, 춤이 춤을 추더니, 결국 춤이 나를 추는 격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치고, 벌렁 누워서 구르며, 춤을 춘 후에는 방금 부른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지는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 이들의 춤은 다윗이 추었던 춤과는 사뭇 다른 춤임에 틀림 없다.

네 번째 질문: 다윗의 복장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에봇을 입고 있었다. 에봇은 제사장이나 레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입던 조끼와 같은 것이었다. 그 에봇을 왕 다윗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윗은 왕이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왕은 절대 권력가였다. 왕은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았고, 누구를 섬기지 않았으며, 누구를 위해 춤을 추지 않았다. 오히려 절을 받고, 섬김을 받으며, 춤을 구경했지 그것들을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왕보다 높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 속의 왕 다윗은 에봇을 입고 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만 입는 에봇을 말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왕으로 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대신 일개의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예배자로 선 것이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이 때문이 아니었던가?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 거드름을 떨지도 않았다. 절대자 앞에 선 피조물로써 겸손하게 그 분께 춤을 드렸다. 다윗의 춤이 아름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왕이 왕임을 내세우지 않은 채 절대자께 드린 예배자의 춤이었기 때문이다. 선지자 미가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다윗은 겸손하게 그의 하나님과 함께 행했다. 그것의 그의 춤을 예배로 승화시킨 것임을 잊지 말자.

다섯 번째 질문: 다윗은 어떤 춤을 추었는가? “춤”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빙빙 돌다’는 뜻의 카라(??????)이다.[7] 성경에 오직 두 번만 사용되는 이 단어는 삼하 6:14와 6:16에서 다윗의 춤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사용되었음을 아는가? 구약 성경에는 “춤”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많이 있다. 라카드(?????), 마홀 (??????), 메홀라 (???????/????????), 훌(????), 힐(????), 그리고 하가그(?????)등 이다. 이 모든 단어들에는 각각의 다른 의미들이 있지만 이음동의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카라(??????)는 예외다. 카라(??????)는 오직 언약궤를 옮길 때에 추었던 다윗의 춤을 가리키기 위해서만 사용 되었다. 이는 중요한 사실을 언지한다. 왜 언약궤를 옮길 때 추었던 다윗의 춤만 카라(??????)로 묘사된 것일까? 이 춤은 다른 춤과는 구별된 것이기 때문인가? Robert Jamieson의 말을 들어보자.

히브리인들 에게는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한 춤이 있었다. 그 춤은 하나님의 좋으심과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엄숙한 절기와 같은 때에 하나님께 드려졌다.[8]

그렇다. 다윗이 여섯 걸음을 걸은 후 피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향해 힘껏 추었던 카라(??????)는 막춤이 아니였다. 디스코 장이나 나이트 클럽에서 추는 그런 류의 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춤은 구별된 춤이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드려진 춤이었다. 성소에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질 수 있었던 향이 있었듯이, 다윗에게도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춤이 있었다. 그것이 카라(??????)이다. 이 춤이 정확히 어떤 안무로 이루어 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춤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충동적 춤이 아니”[9]기 때문에 관광 버스에서 술에 거하게 취한 할머니나 할아버지들께서 추시는 춤이나 교회당 안에서 무질서하게 뛰면서 구르는 춤과는 거리가 먼 것만큼은 확실하다. 요즘 많은 찬양 인도자들이 교회당 안에서 나이트 클럽에서 추는 춤을 그대로 추면서 “누구를 위해서 추느냐가 중요하지 춤의 모양새가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시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만약 삼하 6장에 있는 다윗의 춤을 예로 들면서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반증할 것이다. 삼하 6장에 있는 다윗의 춤은 이러한 주장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다윗의 춤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춤이었다. 이 춤은 아무때에, 아무를 위해서, 그냥 흥겹다는 이유로 추어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했던 향처럼 하나님께만 드려진 춤이 다윗의 카라(??????)였다.

끝으로: 이러한 모든 과정으로 준비한 다윗은 드디어 언약궤를 성으로 모셔온다. 그 때 그가 느꼈던 감격과 기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래 시간 동안 준비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진행했으며, 기쁨과 경외가 한데 어우러진 여정을 막 끝낸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벅찬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하나님 앞에서 힘껏 “뛰놀며 춤추”다가 옷이 벗겨졌다. 이것은 그가 경거망동하게 행동했기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을 잊고 춤을 위한 춤을 추었기 때문도 아니다. 드럼의 비트가 흥겹고, 곡조가 자극적이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열심대로 춤을 춘 다윗을 옷이 감당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막춤을 요구하는데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나는 교회당 안에서 다윗처럼 춤을 춰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춤은 거룩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기에 드려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당 안에서 막춤을 추기 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윗의 춤은 제의적 피 위에 세워진 거룩한 예배였고,

다윗의 춤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지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만들어 진 예배였으며,

다윗의 춤은 전능자 앞에서 드려진 피조물의 예배였고,

다윗의 춤은 높으신 하나님을 향한 겸손의 예배였으며,

다윗의 춤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진 구별된 예배였음을 말이다.

이러한 의미 속에서 드려지는 춤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Polzin, Ryken, Longman, Garland, Spence-Jones, Day, Youngblood, McCarter, Carlson 그리고 De Wette등이 이와 같은 해석을 한다. 이러한 해석이 석연치 않았던 Keil와 Delitzsch도 이런 해석의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위의 구절은] 길을 가는 동안 여섯 걸음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진 것이라고 받아 드려진다. 몇 천 마리의 소와 살진 송아지가 하나님께 드려졌을 것이다.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2, 592).” 그러나 John Peter Lange는 이러한 해석을 반대하지만 히브리어의 광범위한 사용법을 무시하고 만들어진 것인지라 받아들여질 수 없다 (A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s: 1 & 2 Samuel, 418.).

[2] James Sime, The Kingdom of All-Israel: Its History, Literature and Worship (London, James Nisbet & Co., 1883), 288.

[3] McCarter, R. A. Carlson, Robert D. Bergen, Youngblood, etc.

[4] Sunny Philip, Becoming a Person of God: Understanding the Process (New York: AuthorHouse, 2011), 132.

[5] Robert D. Bergen, 1, 2 Samuel, vol. 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331.

[6] 막 16:19, 눅 22:69, 롬 8:34, 골 3:1, 히 12:2, 벧전 3:22

[7] Francis Brown, Samuel Rolles Driver, and Charles Augustus Briggs, Enhanced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ak Harbor, WA: LRS, 2000), 502–503.

[8] Robert Jamieson, A. R. Fausset, and David Brown,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Whole Bible (Oak Harbor, WA: LRS, 1997), 2 Sa 6:14.

[9] James E. Rosscup, An Exposition on Prayer in the Bible: Igniting the Fuel to Flame Our Communication with God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08), 496.

by 이상환

출처 : http://sanghwanlee.com/…/%EB%8B%A4%EC%9C%97%EC%9D%98-%EB%A…/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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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왕이 춤을 추다

사무엘하 6:12∼15, 21∼22

오늘 본문은 다윗왕이 춤을 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왕이 춤을 춘다는 것은 왕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체면을 땅에 떨어뜨려 놓은 자로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많은 군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위인들과 함께 기뻐하며 춤을 춘 것입니다.

다윗은 시온 산성을 빼앗아 수도로 삼았을 때도 춤추지 않았고 자녀들을 많이 낳게 되었다고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춤을 추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 때에도 춤을 추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왕인 다윗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한 것일까요?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비록 지난번에는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죽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법도대로 궤를 메고 옮기고자 하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레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춘 것은 그 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곧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심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춘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섬겨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춘 것입니다. 그가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힘이요, 반석이요, 구원의 뿔이라며 찬양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 왕으로 하여금 왕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게 한 것은 세상의 명예나 지위가 아니었으며, 많은 소유나 성취감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주신 기쁨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죄 속함을 받음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산 소망을 주심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혹시 생활의 염려에 짓눌려서 기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혹 어떠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라면 자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됨으로써 기쁨의 생활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혹 주님을 떠나 있기 때문이라면 돌이킴으로써 다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근심케 한 것 때문이라면 다시 성령님께 포커스를 맞추면서 살아갑시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힘쓸 때에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임형두 목사 광주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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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6:12~26)

다윗은 주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다.

다윗은 평범한 집안 출신이다. 위로 형들이 일곱이나 있는 막내이며 양을 치는 목동이다. 그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물건을 전해 주러 갔다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쾌거를 거둔다. 그가 싸우러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형도 말렸고, 사울 왕도 걱정을 하였다. 골리앗은 가소롭다는 듯이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고 하면서, 돌 하나를 무릿매로 던져서, 골리앗의 이마를 맞혀서 쓰러뜨린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다윗은 골리앗에게 객관적인 전력으로 봐서는 질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개 목동이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다윗을 묘사할 때 자주 나오며, 마치 다윗의 특성처럼 되어 버렸다(삼상 16:18; 18:12, 14, 28).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사이며, 용감한 군인이며, 말도 잘하고, 외모도 좋은 사람인데다가,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16:18)

그는 또한 겉모습보다 중심이 좋은 사람이다.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해 다윗의 집에 갔을 때, 그는 주님이 정하신 인물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 집 아들들을 하나씩 데려오라고 하였다. 사무엘은 첫아들의 인물이 준수하고 키가 크므로, 바로 그가 주님이 세우시는 인물이구나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사무엘에게 그가 아니라고 하시면서,“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고 하신다. 그리고 나서 다윗이 오자 바로 그라고 하셨다. 다윗은 겉모습보다는 중심이 좋은 사람이라 하겠다. 중심이 좋은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며 진실하며 믿음직한 사람일 것이다.

오늘날 자녀교육에서 우리가 제일 신경 쓰는 것은 무엇인가? 다들 겉으로 보이는 성과나 많이 공부시키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다윗이 큰 인물이 된 것은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니다. 주님이 그와 함께하셔서다. 또 겉모습보다 중심이 좋아서 택함을 받았다. 우리 자녀들이 주와 동행하게 하고, 중심이 좋은 사람으로 가르치는 것이 신앙교육이다. 이 신앙교육이 모든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다윗은 일 속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베들레헴 근처에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치면서 자라났다(삼상 17:15). 사무엘이 왕을 세우려고 다윗의 집에 갔을 때도 다윗의 형들은 다들 집에 있었지만 다윗은 양 떼를 치러 나가고 없었다. 막내지만 형들보다 더 열심히 집안 일을 한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했을 때, 사울왕은 다윗에게 ‘네가 너무 어려서 어떻게 싸우겠느냐’고 했지만, 다윗은 굽히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 하였습니다…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주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삼상 17:34~37)

아무리 어린 사람이지만,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지고 말하니 사울도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고, 그를 출전하게 하였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의 용맹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그의 믿음도, 모두 양 떼를 치는 경험 속에서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일 속에서 잔뼈가 굵으면서, 다윗은 매사에 일을 잘 처리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다윗은 사울이 어떤 임무를 주어서 보내든지 맡은 일을 잘 해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온 백성은 물론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그 일을 마땅하게 여겼다.”(삼상 18:5)

40대 이상인 분들은 대개 어린 시절에 집안 일을 도우며 자랐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대개 형편들은 어렵고 식구는 많고 하여 온 식구들이 함께 농사를 짓거나 집안일을 돕지 않으면 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자녀들을 한 명만 낳으니까 귀하게 키운다면서 일은 거의 시키지 않고 그저 공부만 시키는데, 그러다 보니 일을 배울 기회가 많지 않다. 위로 형들에 치이기도 하고, 양들을 치면서 용기와 신앙을 얻은 다윗처럼, 오늘 우리의 자녀들도 부딪치는 인간관계 속에서 살게 하고 일의 경험 속에서 살게 함으로써, 맡은 일을 잘 해내는 유능한 인물들로 자라게 해야 하겠다.

다윗은 음악과 시에 능한 사람이다.

그는 수금을 잘 탔다고 한다. 사울왕은 심한 두통을 앓곤 했는데 다윗은 그때마다 음악을 연주하여 왕의 고통을 덜어주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뮤직 테라피’를 한 것이라 하겠다. 시편 3~41장은 비교적 다윗 자신의 시들이 많이 들어 있는 다윗의 시 묶음이다. 이 시들을 읽어보면,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시가 곧 찬양이요 기도이다.

요즘 교육 풍토는 문학 같은, 소설 읽거나 시 쓰고 그러면 대학 못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국영수 중심으로 미술·음악 시간 다 없애버려서 노래는 유행가나 좋아하고 드가가 누군지 르느와르가 누군지도 잘 모른다. 주일학교부터 찬송가 배우고 성가대하면서 노래하고 주님 찬양하다 보면 그리고 절기마다 연극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하다 보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면 그들은 다재다능한 사람들로 자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로 자라게 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미 종합 예술이다. 찬양은 음악으로, 기도는 시로, 설교는 연극으로, 또 교회 건축과 미술로 표현되는 것이다.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

다윗은 형을 일곱이나 둔 막내이다. 어려서부터 형들에게 치이면서 자랐다. 귀공자로 자란 것이 아니라 양 떼를 치면서 자랐고, 그가 말하듯이 그렇게 사자나 곰하고 싸움을 하면서 컸다. 다윗은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샀고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사울왕에게 호감을 사서 경호대장이 되기도 하였다.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은 유명한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요나단은 아버지를 배반해가면서 다윗을 구출해주었다. 제사장 아비멜렉도 목숨을 걸고 위기에 처한 다윗을 도와준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게 된 것도 그가 그렇게 많은 泳殆“?치이고 낮은 자리에 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얼마나 다급했으면 원수인 블레셋 족에게로 가서 자신을 의탁한 적도 있다. 그 곳 왕은 다윗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받아 주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왕에게 다윗에 대해 경계심을 풀지 말라고 하였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서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미친 척을 하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 그 왕은 다윗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가 미친 줄 알고 경계심을 풀었고, 그 사이에 다윗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삼상 21:11~13).

꼭 중국 고사 손빈과 방연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다. 이런 데서 다윗이 젊은 시절에 얼마나 위기를 많이 겪고 고생을 많이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다윗이 행운아라고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살아남기 위해서 미친 척까지 해야 했던 그런 처절한 때도 있었다. 그의 시들 가운데는 주님은 그가 피할 산성이라는 구절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것은 그의 길고 처절했던 도망과 망명 경험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렇게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그는 거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자녀들이 고생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고, 무엇이든 스스로 해결하게 두지 않고 부모가 대신해서 해주려고 하고, 뭐든 돈으로만 하려고 해서 아이들을 약하게 만드는 풍토를 반성해야 한다. 요즘은 청소년들의 자살 소식이 너무나 자주 뉴스에 나와서 이제는 사람들이 조금은 무감각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도 한 고등학생이 시험 커닝을 하다 들키자 교실에서 뛰어내려서 죽었다고 한다. 너무 공부에 대한 압박감만 있고, 위로 상승하려는 욕구만 있고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경험을 못하다 보니 약간의 충격이나 긴장, 창피스러움이나 실패에 대해 견뎌내는 힘이 없고 쉽게 자포자기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물을 기르는 방법은 이와는 다르다. 다윗을 맨 밑바닥까지 체험하게 하신다. 모세를 입양아로 자라게 하시고 그 궁궐에서 쫓겨나게 하시고, 미디안 광야에서 단련시키신다. 야곱을 집에서 나오게 하시며 돌베개 베고 자는 온갖 수고와 역경을 이기게 하시고 뼈가 부러지는 씨름을 하게 하심으로써 신앙의 인물로 기르신다. 우리는 흔히 유태식 육아법이니 해서 머리 좋게 교육하는 법만 관심하는데, 이런 시련 속에서 인물을 키우는 하나님의 인물 교육법 신앙 교육법을 우리가 배워서 교회에서 가르치고 가정에서 가르쳐야 한다.

춤추는 왕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수도로 정한 다음에, 그 곳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법궤를 싣고 가던 소들이 뛰고 법궤에 손을 댄 사람이 죽는 등, 그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법궤를 성 밖의 한 곳에 머무르게 했다가, 석 달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성 안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다윗은 너무나 기뻐서 큰 축제를 벌였다. 그는 법궤를 멘 사람들이 몇 걸음을 옮겼을 때,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다. 그리고 다윗은 모시로 만든 작은 옷만을 걸치고, 법궤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삼하 6:14). 한 나라의 왕이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춘다는 것은 일상적인 일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의외의 일이었는지는 다윗의 아내 미갈이 하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삼하 6:20)

이에 대하여 다윗이 미갈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주께서 나를 뽑으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삼하 6:22)

그가 비록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왕이지만, 목동인 그를 왕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 앞에서라면, 찬양하고 기뻐 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라면 더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다윗의 다윗다움, 또는 그의 신앙의 비밀이 나타난다.

다윗이 자기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한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는 본래 목동 출신이니까. 명절이나 축제 때면 신명나게 어울려 춤을 추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춤을 추며 자랐을 것이다. 그가 시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가 ‘끼’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겠다. 하지만 다윗의 춤은 이런 끼를 넘어서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점잖게 앉아서 찬양할 수만은 없다고 한다. ‘주님 앞에서’라면 기뻐하며 뛸 것이라고 한다. 그의 춤은 그저 끼를 발산하는 춤이라기보다는, ‘주님 앞에서’ 추는 춤이다. 성서는 다윗이 ‘법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삼하 6:14).

‘주님 앞에서’라는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백성들 앞에서는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왕이지만, ‘주님 앞에서’는 여전히 양치는 목동이요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어떤 신분에 있든 간에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벌거벗은 존재로 선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주님 앞에 설 줄 알고 춤 출줄 아는 다윗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이요, 진정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다.

호모 루덴스

호이징거는 <호모 루덴스>(춤추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춤출 줄도 놀 줄도 모르고 일밖에 모르는 현대 문화를 비평하였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사실은 놀이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놀이의 형식적 측면을 이렇게 규정한다. 첫째, 놀이는 현실적인 다른 목표를 의도하지 않고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하여 하는 활동이다. 둘째, 놀이는 일상과 분리된 특정한 시간, 공간 속에서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술래잡기 놀이는 놀이 성원들이 약속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만 하는 것이다. 즉, 놀이 참여자들은 이 전봇대에서 저 전봇대까지만 움직일 수 있다든가, 점심 먹을 때까지만 한다는 식으로 규정을 한다. 또한 이 놀이공간 안에서는 일상과는 다른 규칙이 통용된다. 술레는 쫓는 자이고 나머지는 술레를 피해 도망가야 한다는, 일상에 없는 규칙들이 시행되는 것이다. 이 규칙들을 놀이 성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놀이는 더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놀이의 셋째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엄격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호이징거는 제의도 이러한 놀이의 특징을 갖는다고 하였다. 사실 축제들은 대개 교회의 제의들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나라 명절도 제의가 가장 중심에 있다. 그리고 휴일을 뜻하는 홀리데이(holyday)라는 말도 거룩한 날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것을 예배에 적용해본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그 자체로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가지 목적 외에 아무런 목적도 있어서는 안된다. 예배를 통해서 지식을 얻거나, 은혜를 받거나, 친교를 가지는 것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냥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기쁜 놀이로 예배에서 사람들은 그런 은혜를 선물로 풍성하게 받을 수 있다. 반대가 되어선 안된다. 선물을 받기 위해서 기를 쓰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께 예배는 뒷전이고 우선은 자기 소원을 빌고 병을 고치고. 자기 욕심을 구하기 위해 예배드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또한 교회 예배 역시 일상과 분리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교회에서도 어떤 경우에도 규칙과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오늘의 본문 맨 끝 부분(23절)을 보면, 다윗의 아내 미갈은 그렇게 다윗을 비난한 일로 죽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고 한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미갈에게 동정이 갈 것이다. 공주의 신분으로 천한 출신인 다윗과 결혼하였으나, 다윗은 자신의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남편이자 원수인 셈이다. 다윗에 대하여 미갈이 가졌을 애증의 감정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다윗이 주님 앞에서 춤 추는 것을 체신머리 없는 짓이라고 비난한 것은 옳지 않다. 다윗의 춤은 법궤 앞 즉 주님 앞이라는 분리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로 예배인 것이다. 예배는 그 자체로 끝나야지, 거기에 애증의 감정이든 체면이든 질투든, 이런 외적인 것이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어린이들 교육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재미있게 노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춤은 무용과에 가기 위해 노래는 음대에 가기 위해 그림은 미대에 가기 위해서만 한다. 중고등학교에서는 그런 목적이 아니면 공부 시간에 미술도 음악도 없애고 영수국만 하자고 한다. 모든 게 입시가 목적이 되다 보니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없다. 춤출 수가 없다. 주일학교가 비록 일주일에 한번 짧은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자녀들이 춤출 수 있도록 해 주어야겠다. 그래서 장차 그들이 다윗처럼 주님 앞에서 춤을 출 수 있도록 길러야겠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약점도 많았고, 잘못한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늘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우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신앙의 모범이 된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서는 의미가 그저 두려워하고 조심한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힘차게 춤을 추는, 주님 앞에서 놀이를 하고, 주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었다는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활기차고 생명력 있는 신앙의 모범이 된다 하겠다.

우리 자녀들을 이 세상 교육에만 맡기지 말고 신앙으로 기르시기를 바란다. 다윗 같이 주 앞에서 춤을 출 줄 아는 멋있고 신앙심 깊고 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아이들과 청소년으로 기르시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겠다. 주 앞에서 춤을 추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온전히 고백할 수 있고 털어놓을 수 있어야겠다. 우리가 어떤 신분이든 얼마를 가졌든 간에 주님 앞에서는 다윗처럼 온전히 낮아질 수 있어야겠다.

“나는 언제나 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 주님 앞에서 온전히 벌거벗은 존재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에는 가장 낮은 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언제나 나이가 몇 살이든 상관없이 주 앞에서 힘차게 춤을 출 수 있는 어린이같고 다윗같은 신앙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다윗의 춤/엠아이씨 워십(M.I.C 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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