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9장 28절 | ◆레위기19장◆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드려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끊임없이 신신당부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뭣이중헌디 (쉬운성경) 469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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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장은 너무나 너무나 알려드릴 내용이 많아
너무나 너무나 과한 자막으로 눈이 피로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그리고 쫌 졸릴수도……ㅠ ㅋㅋㅋ
저의 모든 레위기영상은 성서원/스토리텔링성경책을
참고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오늘도 시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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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 레19:27,28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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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9:28,Leviticus 19:28 KLB;NIV – 죽은 자를 애도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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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9:28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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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신은 성경적인가? – 베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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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는 거룩한 삶의 4대 실체 (레위기 19장 1-8절). (알림) 온새기 월요일말씀과 홈페이지 주일설교의 차이.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설교를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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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레위기 19장 28절

  • Author: 란스 다이어리 Ran’s Diary 성경 그리고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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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3.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1tjgDO3gAw

레19:27,28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가?

(레19:27,28)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가?

구약성경강해(9) / 레위기강해(9)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27,28)

질문이 더 문제다.

오래 전 한국의 유명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목회 초기엔 도시 빈민을 섬겼고 반독재 투쟁을 해서 투옥도 되어 당시 청년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대학교에서 강연한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학생들로부터 거의 매번 신자가 술 담배를 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럼 기독 청년이 기껏 그런 질문 밖에 할 것이 없느냐 신앙을 그렇게 협소하게 접근하지 말라는 꾸중 아닌 꾸중부터 하고는 답변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홈페이지를 통해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받으면 답변을 하면서 그 목사님과 같은 언급을 빠트리지 않습니다. 그런 질문들 중에는 신자가 머리에 염색을 해도 되는지, 몸에 문신을 해도 되는지 등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는 생활 여건과 방식이 아주 단순했습니다. 오늘날은 하루가 멀다 않고 새로운 이슈들이 발생합니다. 신자들의 삶도 복잡하고 다양해진 인간 사회의 환경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명시적 규정이 없는 일들이 자꾸 생기므로 신앙적으로 궁금증은 늘어나지만 주위에 물어봐도 뾰족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술 담배를 하거나 몸에 문신하는 것보다 더 문제입니다. 죄송하지만 말씀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목사들의 잘못이 큽니다. 기독교 신앙을 도덕이나 율법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바람에 신자들도 그렇게 길들여졌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선한지 악한지 둘 중 하나로만 구분하여 시행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의 거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그렇고 그것이 전부이지만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는 전혀 다릅니다.

신자 본인과 그 행하는 일과 사람들과의 만남과 소속된 공동체는 평생토록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를 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신자의 개인적으로 체험적인 친밀한 관계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말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명하는 계명을 실천하더라도 정작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로 구제와 십일조와 기도와 봉사에 최고로 열심을 내어도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이 없고 대신에 자신의 의를 앞세우고 은근히 교인들의 칭찬을 즐기고 사람들이 자기 쪽으로 모이는 것을 이용 내지 방치하는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의인이라고 칭찬을 받으나 구원도 받지 못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으나 심령을 꿰뚫어보는 아니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만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을 보면 나중에 도대체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성전 중앙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던 바리새인은 종교로 자기를 치장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한 위선자였습니다. 예수님께 영생을 물으러 온 젊은 부자 관원은 하나님보다 돈과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그 두 사람 다 하나님이 외면하셨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반면에 사람들 보기에 비천하고 어리석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도무지 수준이 낮아 상대하기 싫은 사람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전 구석에서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의 긍휼만 바란 세리처럼 자신의 모든 죄를, 심지어 살인죄라도 내려놓고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기쁘게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의 집에서 유숙하여 교제하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지침이 없는 신앙상의 문제나 질문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형성 유지 성숙시키는데 장애가 되는지 아닌지로 따지면 쉽게 정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술 담배는 십자가상의 살인강도의 예에서 보듯이, 구원 받는 데 전혀 문제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술에 취하거나 숙취가 지속되면 기도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에 지장을 받습니다. 술 담배로 건강을 잃으면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과 사역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 했지 완전한 금주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독으로 금단현상까지 가지 않는 한 본인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스스로 조절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머리에 염색을 하고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술 담배만큼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명을 수행하는데 직접적인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신자가 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레위기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데 반성경적인 해석이 됩니까? 레위기가 문신을 금하는 이유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레위기의 구조와 기본 주제를 제대로 아셔야 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 자해하지 말라.

레위기는 17장까지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제사법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후 18장부터는 여호와 신앙을 삶과 연결하여 실천하는 계명들입니다. 그 실천적인 지침을 말씀하기 전에 전제를 하나 두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절대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레18:3)

그들은 종교적으로 음란한 규례를 따랐습니다. 자연히 일상의 생활방식에도 오염이 되었고 죄책감은커녕 죄라는 인식도 없이 예사로 행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그 더럽고 추한 풍속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기가 금지하는 사항들 전부가 가나안 족속들이 예사로 범하고 있는 종교적 도덕적 죄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본문은 먼저 머리를 둥글게 또 수염도 그렇게 깍지 말라고 합니다.(27절) 자기들 신을 기념하고 숭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문신으로 번역된 28절 초반 말씀은 원어로는 “몸을 칼로 베지 말라” 즉, 자해(自害)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것도 죽은 자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장례식의 한 절차라는 뜻은 아닙니다.

열왕기상 18장에 자해의 대표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알신의 선지자들, 가나안 족속이 아닌 유대인들 450명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보다 못해 혹시 너희 신이 주무시는지 모르니 깨워야 하지 않느냐고 조롱 섞인 힐난을 했습니다.(왕상18:27)

그러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며, 놀랍게도 규례 즉, 자기들의 공식적인 제사 절차에 따라서 피가 흐르도록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왕상18:28) 건장한 남자 사제 450명이 동시에 그랬으니 야쿠자들이 집단으로 서약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끔찍하고 기괴한 모습이었겠습니까? 사탄이 분명히 우롱하며 조종하는데도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히려 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끝내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 신이 주무신 것도 아니요 아예 실존조차 않는데 기도 응답은커녕 찍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에게 인간으로 최대한의 치성을 바치려는 것입니다. 자녀를 불 태워 바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어떻게든 기도하는 대로 응답해 달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내용을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줄 수 없다면 제발 훼방만은 하지 말라고 그 신의 심술과 분노를 잠재우려는 것입니다. 어쨌든 내 뜻대로 하고 싶은데 인생을 살다보면 뭔가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힘이 뭔지 정확한 실체도 모르고 알 수도 없으니 일단 아무 형상이라도 만들어 놓고 인간끼리 스스로 결단하여 힘을 내거나 서로 위로하려는 짓거리일 뿐입니다.

레위기 본문에서 죽은 자를 위해 자해하는 의미는 바알 선지자들이 신을 부르거나 기도 응답을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죽을 자를 위해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럼 그 죽은 조상 덕에 후손도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뭔가 굉장히 익숙한 생각 아닙니까?

한국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을 기념 회상하고 그 유지를 이어받는다는 취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귀신이 후손을 돌보아주기에 때 맞춰 절하고 음식을 바쳐야 한다는 믿음으로 제사 드리기에 반 기독교적이며 신자는 참여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문신하지 말라는(28절) 것은 가나안 족속들은 문신이 악귀를 쫓는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직폭력배들이 자기들 힘을 과시하여 겁을 주고 자기 단체를 결속하려는 의미와 달랐습니다. 또 젊은이들이 순전히 멋지게 남들보다 튀어 보이려는 의미도 아니었습니다.

이 또한 뭔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부착합니다. 혹시라도 흑암의 세력이 나를 무너트리러 올 때에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 목걸이가 우상이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완전히 허사로 만드는 죄입니다. 신자에겐 이미 성령이 내주하여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는 기본적 사실도 모르는 탓이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 믿어 구원 얻었는지 재점검해봐야 합니다.

미국의 스킨헤드 백인 폭주족들이 십자가나 독일 나치 문신을 온 몸에 합니다. 악귀를 막을 수 있다는 인식이 전혀 없는 완전한 무신론자들이라면 그냥 멋으로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신자가 부적의 의미로 십자가 목걸이 하고 다니는 것이 영적으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은혜를 잊지 말겠다는 뜻으로 또 목걸이를 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십자가 장식으로 택했다는 순진한 의도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요컨대 신자라면 삶의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의 영적 진리와 연결해서 정확히 해석해서 삶에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사항

신자가 몸에 문신이나 머리를 염색해도 되느냐는 질문은 정말로 예수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을 안다면 구태여 할 필요가 없는 질문입니다.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과 특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실제로 매일의 삶에서 말씀과 기도로 교제 동행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해(自害)는 피가 생명에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는 성경적 진리를 구태여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신자 아니 인간이라면 해선 안 되는 짓입니다. 반면에 문신과, 너무 과하게 해서 자해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염색은 각자의 믿음에 맡기면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성숙한 신자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실존하지 않기에 우상제사에 바쳐진 고기라도 실제로는 더럽혀진 것이 아니므로 신자라도 마음껏 먹을 자유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진리를 모르고 왜 우상에 바친 고기를 신자가 먹느냐고 따지고 시험에 드는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위해서 자신은 평생을 두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청년들이 염색하고 문신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계없습니다. 악령을 퇴치한다는 인식이 없이 단순히 치장하기 위해서 즉, 교회 다니는 청년들도 순전히 멋을 내려는 의미라면 해도 됩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신자가 문신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거나 교회의 분위기를 해칠 우려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 바로 선 청년 신자라면 바울처럼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남들이 그렇게 한 것을 두고 비난 정죄는 물로 하지 말라고 금해선 안 됩니다. 이미 문신을 조금 지나치게 한 신자에 한해선 그것도 담임 목사가 예배 시간에만 조금 가려지는 옷을 입고 오시라고 개인적으로 간곡히 부탁하는 정도로 그쳐야만 합니다.

심각하게 따져볼 질문 하나

지금껏 말씀드린 것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대신에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 주일예배에 온몸에 문신을 한 조폭 출신이 메탈 체인을 치렁치렁 달고 그것도 얼마 전에 살인죄와 성폭행 죄를 저질러서 전자발찌를 달고 참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은 아무런 내색 않고 다른 정상인이 처음 교회를 찾아오는 것처럼 새로 신자 한 명이 늘 것을 기대하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우고 반갑고도 따뜻하게 맞아줄 자신이 있습니까? 그 상대가 우리에게서 두려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주저한다는 부자연스러운 낌새를 하나도 느끼지 않게 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나 다른 모임에 갔을 때에 자기들을 쳐다보거나 대하는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생전 처음으로 자기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인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다시 강조하지만 주일 예배 드리고, 기도 간절히 하고,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개인적 친밀한 관계를 맺고서 그런 바탕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의식과 행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예수님의 이름이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1:26에는 안디옥 교인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원어의 뜻이 바로 “작은 예수”입니다. 크리스천 즉 신자는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당시 아무도 상대도 않았고 혹시 눈에 보이면 멀리 도망갔던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서 교제 했습니다. 온몸에 추한 냄새가 나고 썩어가는 문둥병자들을 만나 손으로 만지며 고쳐주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팔자가 기구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 같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고 유대인들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은 곳을 찾아가 구원해주었습니다. 너무 무서워 근처에 가지도 않은 군대귀신 들린 자도 찾아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민족의 배반자라고 아예 저주 받던 삭개오는 그 집에서 같이 누어자면서 교제를 나눴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사람들 쪽에서 먼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호응하며 따랐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불치병을 치유해준 기적과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은혜와 기도해주는 따뜻한 사랑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평생 처음으로 정상인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상상도 못하는 유대인 랍비에게서 말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아주 큰 사랑이 아니라 아무 가식이 없고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정상인 대우였습니다.

제가 잘 아는 엘에이에 있는 한 사람은 길을 가다가 히잡(무슬림 여인이 머리를 가리는 수건)을 쓴 여인이나, 터번을 쓴 중동 남자나, 몸에 문신하고 체인을 단 청년이나, 홈리스 들을 보면 꼭 먼저 다가가 전도지를 전합니다. 홈리스들에겐 포켓에 있는 돈을 꺼내 햄버거라도 사먹으라고 전해주고 때론 입고 있는 옷도 벗어줍니다. 그런 자들을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고 싫어하는 기색도 주저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아무도 못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소외되고 고달픈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분도 아주 무섭고 싫어서 쉽게 그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오직 예수를 모르는 그들이 너무 불쌍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각오로 큰 용기를 내서 다가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도리어 자기를 잘 대해준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마음이 아주 여리고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학대당한 사람들이 많은데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술술 잘 털어놓는다고 합니다. 자기들에게 특별히 더 잘해주는 것은 아니라 정상인처럼 대해주는 사람을 처음 혹은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면서 말입니다. 항상 박대 외면만 당했던 사람들이라 진정으로 사람답게 대해준다는 것을 그들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능력이나 믿음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전도지와 함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면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여 영과 영으로 교통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을 마음 문을 열게 만들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항상 “Jesus loves you!”라는 말을 잊지 않고 건넨다고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바꾸지 못할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문신하라고 미장원에 데려다 주어라.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더러 당장에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최소한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대해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인 돈, 권력, 외모, 가문, 학벌 등으로 더 이상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정도의 믿음은 우리 모두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남들이 싫어하고 미워하여 상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것도 충분히 미움을 받을만한 잘못과 허물을 범했음에도 차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합니다. 홈리스들이 냄새가 나고 추해도 박대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잘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상인처럼만 대해주어도 됩니다.

솔직히 그것마저 무리일 수 있습니다. 주변의 이웃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그래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과 허물이 있어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하고 최소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제 곧 청소년기에 도달해 머리에 염색하고 몸에 작은 꽃이나 하트 모양으로 문신하고 싶다고 조를 수 있습니다. 그럼 무조건 안 된다고 야단치지 말고 오늘 말씀드린 성경적 원리를 잘 기억해두었다 그대로 가르치고 가능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타이르십시오.

그래도 친구들이 다 하니까 자기도 꼭 하고 싶다면 허락하시고 미장원에까지 직접 아빠가 차를 태워주고 그 돈을 지불하십시오. 그럼 반드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우선 미장원 문 앞에서 아이가 먼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빠 말이 맞는 것 같아. 나 문신 안 해도 되. 그냥 돌아가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문신을 했다면 바로 아빠의 주님 닮은 사랑 때문에 대학교에 가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교회 출석을 성실히 할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믿는 신자가 어떻게 문신을 할 수 있어. 하나님도 싫어하고 율법으로 금지했어. 교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아빠가 장로인데 아빠 체면도 있지 절대로 못해!” 야단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도덕도 종교도 아니라 원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사람들 앞에서 체면만 가장 앞세운 대표가 바로 성전에서 기도한 바리새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외면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것이므로 원죄에 묶여 있다는 뜻 아닙니까?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종교적 위선을 부모에게서 보았기에 대학교에 가면 교회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로 현실적으로 고달픈데다 어렸을 때 말도 안 되는 학대를 당해 온갖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곳은 이민 사회가 적어서 비교적 눈에 안 띌지 몰라도 한국이나 엘에이에는 아주 많습니다.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이곳도 한국교민이 겨우 삼천 명에 불과한데 교회는 열 곳이 넘고 서로 상종하지 못할 자처럼 멀리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능력을 지녔는지 아는 것이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사랑이 필요 없는 자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고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 자기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나눠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에 때를 얻든 못 얻든 담대히 전하라고 말합니다. 그 뜻이 가게 영업시간 중에도 쳐들어가 무작정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몸에 문신한 자들이나 홈리스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담대히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볼 때에 도무지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낼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때를 못 얻을 것 같은데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즉, 때를 얻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입니다. 정말로 순종 헌신하겠다는 열심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가장 먼저 다른 이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한 마음을 신자에게 심어주십니다. 또 그럼 조직폭력배든 홈리스든 진정으로 먼저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문둥이들에게 전도하려 문둥이 촌에 들어가 결국 자기도 문둥이가 된 성자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또 미국에는 온몸에 문신한 오토바이 폭주족을 전도하려고 일부러 자기 몸에 문신하고 폭주족이 되어서 함께 어울리는 목사도 있습니다. 이 둘이야 말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 본체이면서도 타락하고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비참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하려고 그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직접 오셨지 않습니까? 신자가 문신을 해도 되는지 따져서 금지시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문신을 한 자들을 먼저 찾아가 주님 사랑으로 섬기는 것, 최소한 그들을 정상인으로 대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11/4/2018

레위기 19:28,Leviticus 19:28 KLB;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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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Copyright ©1973, 1978, 1984, 2011 by Biblica, Inc.® Used by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worldwide.

NIV Reverse Interlinear Bible: English to Hebrew and English to Greek. Copyright © 2019 by Zondervan.

레위기 19:28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 나는 여호와니라 !

‘You shall not make any cuts in your body for the dead nor make any tattoo marks on yourselves: I am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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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4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5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6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7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 8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9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1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 하지 말며

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13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찌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찌며

20 무릇 아직 속량도 되지 못하고 해방도 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그들이 죽임을 당치 아니할 것은 그 여인은 아직 해방되지 못하였음이라

21 그 남자는 그 속건제물 곧 속건제 수양을 회막문 여호와께로 끌어올 것이요 22 제사장은 그의 범한 죄를 위하여 그 속건제의 수양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것이요 그리하면 그의 범한 죄의 사함을 받으리라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27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28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29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30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33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35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기고] 문신은 성경적인가?

고린도전서6장12절에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실제적인 질문은, 그것이 죄인가? 이다. 질문에 즉시 답을 하겠다: 문신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문신 자체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점은 없다. 우상숭배 관습이나 이교도 풍습을 따를 때 잘못된(매우 잘못된) 것이다.

문신에 대해 논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레위기19장28절이다: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19장에는 다른 구절도 있다: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며”(레19:27).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레위인들에게 해당하는 계명들이다. 이러한 구약의 계명들을 연구해보면, 그 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변의 우상숭배 민족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레위기19장 전부를 읽어보길 바란다). 성경구절을 그 맥락과 상관없이, 혹은 다른 구절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인용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문신과 관련된 바로 이 구절이 단 하나의 구절을 특정해서 뽑아냄으로써 부정확한 율법주의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알다시피, 레위기에 나오는 많은 다른 ‘규칙들’이 오늘날 지켜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레위기 전체나 성경 말씀 자체를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우리가 성경의 주제가 무엇인지 세심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오늘날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말일 뿐이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건강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제정된 몇 가지 ‘율법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 당시에 문신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럽고 부상이나 질병, 혹은 사망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구절은 또한 죽은 자를 위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김으로써 영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 이교도의 풍습을 지칭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왜 문신을 해야 하는가?

각 개인은 문신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문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문신한 사람들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충성스런 신앙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신을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문신이 그저 멋있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무엘상16장7절 후반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옷이나 문신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나 헌신의 정도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로마서10장4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갈라디아서3장23-25절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그리스도가 새로운 언약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성경에서 읽은 것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 적혀있다고 들은 것 때문에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매우 잦다. 우리 모두가 성경을 스스로 읽으면서 주어진 주제에 관해 무엇이 씌어져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성경을 대충 혹은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대충 해석하는 경우는 성경에서 원하던 진술을 찾고자 하거나 그런 욕망조차 없을 때이다. 율법주의도 역시 나쁠 수 있다. 율법주의는 성경을 부정확하게 해석한 결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파괴적일 수도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나는 (매우) 보수적이다. 예를 들면, 나는 레위기의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맞다, 문신을 해도 된다. 다만 우상을 숭배하는 관습이나 이교도적 관행이 아닌 한도에서.’

기독교인에게 자신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가?

두말하면 잔소리다. 나는 내 몸이 “성전”이 되기를 분명히 원한다. 나는 이교적이거나 우상숭배적인 문신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 문제가 개재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경험이 모든 사람들의 경험이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품이 우리의 품과 같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교회 음악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취향이 우리와 같기를 기대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 모두가 독특하게 창조되었는데 말이다. 나는 문신을 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그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다.

문신이 죄인가? 아니다. 문신을 새기는 이교도적 관행이 죄인 것이다.

문신을 새긴 것 때문에 지옥에 가는가? 아니다. 회개하고 예수가 주님이시며 그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셨고 죽은 뒤에 부활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

그리고 동시에, 문신을 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이 구절이 문신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증거한다고 생각한다: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28).

하지만, 그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 레위기19장25-31절에는 이교의 신들을 숭배하는 다양한 풍습들을 금지하는 일련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고대 민족들(출애굽기32장1-6절, 민수기25장1-3절, 등)의 이교적 풍습들에 빠져들도록 늘 유혹을 당했기 때문에 이교적 제의의 모습을 띤 것이면 그 무엇이라도 행하지 않도록 금지 당했다.

살을 베거나 문신을 하는 것은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해 이교도들이 흔히 행하던 풍습이다. 그래서 맥락상 문신에 대한 금지는 피부 위에 새긴 표시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의 숭배관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문신과 그런 풍습들을 연계시킬 만한 일이 거의 없다.

문신을 금지하기 위해 인용되는 또 다른 구절은 사도바울이 썼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그러나 맥락상 고린도전서6장13-20절은 성적 부도덕에 관한 것이지 문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성경말씀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며, 문신을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증오나 폭력, 혹은 사악한 이미지를 묘사하는 문신이라면 성경의 원칙에 보다 명백히 어긋난다고 말할 수 있기는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문신하는 것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문신을 한 사람도 사용하실 수 있고 실제로 사용하신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성령이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 각 개인과 소통하시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는 다른 부담과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예민해야 할 것인지는 각 개인에게 달려있다.

기사출처: http://blogs.christianpost.com/guest-views/tattoos-are-they-godly-27451/

새벽설교노트 레위기 19:19-28 피세원 목사님 남가주사랑의교회 714-772-7777 Miracle Complex 714-563-2422 KDC

번호 All Categories 브레아 큐티 방 오늘의 큐티 본문 큐티 나눔터 큐티 공동체 소식 기도 나눔터 주일 큐티 나눔 큐티 간증/은혜 나눔 청년 큐티방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 주일 큐티 나눔 장애물을 극복하는 증인 heesong jang 2015/04/25 4983 115

이한규의 온새기&월새기

레위기 19장 1-8절

축복받는 거룩한 삶의 4대 실체 (레위기 19장 1-8절)

(알림) 온새기 월요일말씀과 홈페이지 주일설교의 차이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설교를 일부 발췌해서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로 보내는 날입니다.

오늘은 어제 주일설교의 약 60%를 발췌해서 보냅니다.

주일설교 100% 원문을 보기를 원하면 본 홈페이지 ‘주일설교’ 란에서 보시면 됩니다

어느 날, 한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찾아 화폭에 담으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목사님을 찾아 물었습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믿음이지요.” 이어서 지나는 군인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평화입니다.” 그 다음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두 젊은 남녀에게 묻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랑입니다.”그는 생각했습니다. “믿음과 평화와 사랑을 한꺼번에 그릴 수는 없을까?” 그런데 그 소재를 찾기가 쉽지 않아서 그날 그가 지친 몸으로 귀가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아빠!” 하고 달려오는데 그 아이들의 눈망울에서 믿음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구나!” 곧 아내도 따뜻이 맞아주었는데 그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게 사랑이구나!” 그때 모든 시름이 사라지면서 마음속에 깊은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가정임을 깨닫고 단란한 가정을 화폭에 담았습니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공동체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어떻게 끝납니까? 남녀를 창조하고 하나님의 주례 하에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세우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것도 가정의 중요성을 잘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첫 기적으로 가나 혼인잔치의 부족함을 채워주신 것도 가정의 중요성을 암시합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가정을 외면하고 다른 곳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는 것입니다.이제 부모와 자녀를 위해주고 형제자매를 위해주면서 먼저 가정에서 행복을 찾으십시오. 먼저 가족을 행복하게 한 후에 바깥의 큰 일로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처럼 서로 참아주고 이해하면서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면 인생 행복의 절반은 거저먹고 들어가는 셈이 됩니다. 거룩한 삶의 시작도 가정에서 비롯됩니다.가끔 명절에 전 가족들이 모이면 힘들게 사는 식구가 섭섭함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섭섭 마귀가 가장 많이 틈탈 때가 명절 때입니다. 그러나 받을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섬겨주겠다고 각오하면 섭섭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고 주려는 마음으로 무장해서 이번 명절을 상처를 주고받는 명절이 아닌 상처를 치유하는 명절로 만드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일 중의 하나는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가족을 아껴주고 참아주고 사랑해주는 일입니다.하나님은 성도가 하나임을 닮아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2절). 거룩한 삶이 무엇일까요? 거룩한 삶은 세상에 격리된 채 고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은 거룩한 삶이 어떤 삶인지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본문 3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기독교는 부모 공경을 무엇보다 중시합니다. 십계명에서 부모공경의 계명은 사람 관계에서 주어진 첫째 계명입니다. 기독교는 부모님 공경을 하나님 공경과 같은 개념으로 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복 받는 일은 불가능합니다.어떤 사람은 개는 끔찍이 아끼면서 부모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외면하다가 돌아가신 후에 제사 드린다고 야단합니다. 늙고 힘없는 부모는 줄 것이 없지만 혼령이 된 부모는 복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조차 이기주의의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그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잘하려고 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십시오.어떤 사람은 교인들이 명절 때 부모 제사상에 절을 안 하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불효일까요? 옛사람들이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부모의 혼령이 제사상을 찾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입니다.물론 귀신 자체는 존재합니다. 마지막 때는 그 활동이 더 활발해집니다. 요즘 강신술과 무속신앙과 신점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속인들이 어떻게 귀신을 쫓아냅니까? 굿을 하거나 심하면 사람을 가둬 놓고 살구나무 가지로 마구 때리면서 “너 몇 년도에 들어왔어! 누구야! 나가!” 하고 소리칩니다. 그러면 사람만 아프지 귀신이 나갑니까? 어떤 때는 더 맞기 싫으니까 “그래! 나갈래.”라고 하는데 그것이 귀신이 나간 것입니까?!어떤 무속인은 죽은 사람의 혼령이 말하는 것처럼 애처롭게 눈물 흘리면서 귀신을 물러가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 방법에 귀신이 순순히 나가줄까요? 정말 귀신이라면 더 붙어있고 싶을 것입니다. 왜 무속신앙에서 그런 방법들을 쓸까요?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죽은 자들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거나 사람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영매들이 죽은 사람의 혼령과 교통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혼령으로 위장한 귀신입니다.기독교에서 왜 제사와 절을 반대합니까? 제사상을 받는 혼령이 만일 있다면 그 혼령이 돌아가신 부모의 혼령이 아니라 ‘부모의 혼령을 위장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혼령을 위장하고 있는 존재에게 절하지 않고 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리며 부모님 뜻을 기리고 그 뜻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것이 왜 불효입니까?돌아가신 부모님의 입장에서 봐도 명절에 큰 제사상과 큰절을 받는 것보다 자녀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형제우애를 실천하며 사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처럼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최고로 섬겨드리고 돌아가시면 부모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고 믿음도 좋은 사람이고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은혜를 잊고 잘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질 때 말했습니다. “조카야! 네가 먼저 택해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다.” 그때 롯은 “삼촌! 제가 어떻게 먼저 택해요. 정 함께 못한다면 삼촌부터 택하세요.”라고 해야 정상인데 삼촌의 은혜를 망각하고 먼저 좋은 땅을 덥석 챙겼습니다. 그 땅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입니다. 결국 그는 유황불로 모든 것을 잃습니다. 살면서 ‘당한 원한’은 빨리 잊고 ‘받은 은혜’는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거룩하고 복된 삶입니다.본문 3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왜 성도가 안식일을 지킵니까? 하나님이 그의 지켜주실 것을 철저히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안식일을 지키는 삶은 믿음의 대표적인 표식입니다.사람들은 보통 안식일을 무엇을 하지 말라고 제정한 날인 줄 알지만 사실상 안식일은 하나님이 최고의 축복을 주시려고 제정한 날입니다. 실제로 주일예배를 통해 얼마나 많은 축복이 임합니까? 그처럼 안식일은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날이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능력을 받는 날입니다.사람은 적절하게 쉬어야 합니다. 몸을 쉬지 않고 굴리면 반드시 병이 생깁니다. 저는 작년 말부터 매주 월요일에 네트영어 2강좌를 마치면 허파와 기관지 주위의 장기가 조금씩 깎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네트영어를 쉬겠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몸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쉼이 없으면 언젠가 병으로 쓰러집니다. 그런데 요즘은 육신인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큰 문제입니다. 지금 세상은 마음이 병들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매일의 삶이 죄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TV에서 뉴스만 봐도 얼마나 마음이 심란해집니까? 드라마는 이중 삼중으로 뒤틀린 인간관계를 묘사하며 악한 본성을 자극합니다. 그처럼 인간사회를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나쁜 드라마는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제일 원흉입니다.또한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조급하고 쉽게 분노하고 쉽게 낙심하면서 조금씩 정신병 증세가 있습니다. 그런 병들이 주일 예배 때 치유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그런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이 치유 받고 기쁨과 평강을 얻어 누리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질병도 신기하게 치유될 것입니다. 그처럼 일과 휴식의 밸런스를 잘 갖추는 것도 거룩한 삶입니다.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구절에서 ‘헛것’은 ‘우상’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상은 손으로 만든 신상뿐만 아니라 돈, 권력, 자녀 등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그것들이 우상이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큰 고통과 불행이 찾아오지만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면 큰 축복과 행복이 주어집니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자 이삭은 살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백배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사렙다 과부가 선지자에게 먹을 것을 바치자 그녀에게 먹을 것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자녀를 축복해주시고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돈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말을 타 종교를 멸시하라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일전에 부산에서 노숙자들을 돌보며 사는 한 스님이 거리에 앉아 탁발을 할 때 붉은 조끼를 입고 붉은 십자가를 든 전도자가 다가가 다짜고짜 그 스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누군가가 찍어 인터넷에 올리자 많은 네티즌들이 공분했습니다. 그런 무례한 태도를 주님이 원하실까요? 왜 교인 중에 그런 무뢰한이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극단적인 신앙 때문입니다.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신’은 ‘신상’이나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힘을 정의로 아는 무력주의도 결국 ‘다른 신’이고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기복주의도 결국 ‘다른 신’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은 성도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지금 욕망의 신에 빠진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부자가 되는 것만 가르치지 말고 부자가 되는 원리와 더불어 나누고 절제하는 삶도 가르쳐야 합니다. 십자가가 없는 영광은 참된 영광이 아닙니다. 편견은 반드시 안티를 낳습니다. 교회는 우리 밖의 불쌍한 양들도 존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방식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이제 돈과 권력과 명성을 쫓는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채우십시오. 사랑은 ‘자기 초월능력’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다 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초월적인 사랑을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초월은 ‘높아질 때’도 이뤄지지만 ‘낮아질 때’도 이뤄집니다.이제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될 수 있는 ‘자기’를 극복하고 낮추십시오. 자기를 대단한 줄로 여기면 자신이 상대를 위해 참고 살아주는 것이라고 여기다가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면 결국 폭발하면서 행복이 순식간에 망가집니다. 반면에 자기를 부족하게 여기면 자기와 살아주는 상대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더 위해주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니까 결국 행복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처럼 ‘자기’라는 우상을 잘 극복하는 것도 거룩한 삶입니다.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화목제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거나 서원할 때 자원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당시 화목제는 근동 지방에서 행하던 귀신 숭배 제사와 혼동될 위험이 컸기에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바르게 드리라고 한다고 명령합니다. 이 구절에서 ‘열납되도록’이란 말은 ‘마음에 들도록’이란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기쁘게 화목제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과정과 방법도 중요합니다.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 왜 화목제물을 이틀까지는 먹을 수 있고 3일째는 먹지 못합니까? 심지어는 그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성물을 더럽힌 죄로 여겨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합니다(8절). 언뜻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형식적인 명령 같지만 그래도 순복해야 합니다. 정해진 형식과 말씀에 기쁘게 순복하는 것은 감사와 헌신 이상으로 중요합니다.오늘날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잘못된 방법으로 섬길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목적이 좋아도 과정이 나쁘면 잘못된 것이고 결국 실패작이 됩니다. 그래서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야 합니다. 요새 교회에 이방종교 의식이 얼마나 많이 침투해 있습니까? 어떤 때는 기독교인지 무속종교인지 혼동됩니다.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1980년대에 신학교 다닐 때부터 귀신 쫓는 집회를 많이 쫓아다녔고 80년대 말에는 ‘넘어뜨리는 사역’을 하는 세미나에 자주 참석했습니다. 그때 세미나에서 훈련을 많이 해야 넘어뜨리는 능력이 커진다고 배워서 갓 결혼한 사모님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넘어뜨리는 사역의 임상실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세미나에서 배운 대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라고 소리치면서 “슉!”하고 입으로 강한 바람소리를 냈습니다.사모님이 처음에는 남편 목사님을 격려해주려고 억지로 넘어지기도 했지만 매번 그렇게 하는 것이 양심에도 걸리고 속도 상하고 자존심도 상해서 어떤 때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성령을 거역한다고 야단쳤습니다.또한 세미나 강사는 성령을 거역하면 센 마귀가 들어간 것이니까 그냥 말로 하면 안 되고 욕을 해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에게 쌍 시옷 자가 들어가는 욕을 하면서 귀신을 물리친다고 했습니다. 그런 욕을 들을 때마다 사모님은 너무 상처가 되어서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잘해줄 때는 최고 남편인데 귀신 쫓는다고 할 때는 당장 헤어지고 싶었습니다.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목사님은 30대에 서울에서 몇 백 명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는데 그 뒤 목회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섬기는 교회를 사임하고 여러 곳을 전전했습니다. 생활형편도 어려워져서 어느 때는 잠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서 한강 고수부지에서 누가 먹다가 남긴 음식물을 먹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성도 몇 명을 섬기며 조용히 목회하지만 차라리 지금이 더 안정적으로 보이고 부부관계는 훨씬 더 좋습니다.사랑은 예절입니다. 규칙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가깝다고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됩니다. 가까울수록 더 예절을 지키고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존중해야 합니다. 가장 골치 아픈 신앙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서 무례하게 말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도 아니고 성령의 열매는 더욱 아닙니다.이제 치우치지 말고 때로 다투더라도 도를 넘지 마십시오. 부부싸움에도 5대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인격모독적인 말이나 욕은 없어야 합니다. 둘째, 아무리 화나도 이혼 얘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아무리 화나도 손찌검이나 물건을 부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넷째, 조상이나 상대 집안을 거론하는 비열함도 없어야 합니다. 다섯째, 싸운 후에는 곧 풀어야 합니다. 오랜 감정싸움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처럼 부부 간에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예절입니다.“사랑이 예절이다.”란 말을 경박한 영성론자들은 유교적인 윤리나 도덕이라고 공격하지만 사실상 그 말에는 깊은 신앙과 영성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에 치우친 기본이 안 된 모습입니다. 왜 성도가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에 빠집니까?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치우치고 밸런스를 잃으면서 성도다운 모습이 사라지고 갈등만 커집니다. 어떻게 그 갈등의 원인을 뿌리 뽑습니까?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에 순복해야 합니다.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교인 간에 갈등이 생깁니다. 요새 교인들의 생각과 요구가 얼마나 다양합니까? 어떤 교인은 자녀들의 기독교 교육에 관심이 많고, 어떤 교인은 치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교인은 가정행복에 관심이 많고, 어떤 교인은 선교와 구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교인은 더 많은 찬양을 원하고 어떤 교인은 조용한 예배를 원합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어떤 교인은 교육시설을 확충하자고 하고 어떤 교인은 피아노 소리가 좋지 않으니 피아노부터 바꾸자고 합니다.대형교회에서는 그런 다양한 욕구를 충족할 부서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지만 소형교회에서는 어느 한쪽의 요구가 희생되어야 합니다. 그 경우에 어느 한 쪽으로 결정해도 순복하고 따라야 합니다. 순복은 모든 축복의 씨앗이 됩니다.어느 날, 한 자매가 아파트 계단에서 사모하던 청년 전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갈게요.” 전도사가 처음에는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잘 몰랐지만 나중에 목회하면서 그 말이 성경적인 순복을 압축한 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처럼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겠다!”는 그 한 마디가 그 후 33년의 결혼생활을 지켜주었고 그 목사님은 33년 전에 한 사모님의 그 말을 늘 생각하며 항상 더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순복이 곧 축복입니다. 즉 순복은 축복을 부르는 최고의 영적인 인프라(기반시설)입니다.크게 부흥한 교회들을 보면 하나 같이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함께 가겠습니다.” 그런 굳건하고 선한 고백 한 마디가 소명의식을 낳고, 그 소명의식이 땀과 열정과 창조성과 지혜를 낳고, 결국 큰 축복을 낳습니다. 그러면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다시 그 축복을 섬기는 교회를 위해 사용하면서 교회부흥을 단기간에 이뤄낸 것이 부흥한 교회들의 한결같은 공식입니다.결국 순복의 영성을 가진 한 사람의 마음과 입술에서 나온 한 마디의 순복의 고백이 성공과 승리와 축복을 위한 역사적인 전환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그 한 마디의 순복의 고백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과 입술에서 꽃피워지길 바랍니다.살다 보면 때로 불편한 말씀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마음을 닫지 않고 그 불편한 말씀과 진지하게 대면하면 영혼이 커지는 은혜를 입습니다.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치듯이 받기 싫은 말씀이 마음의 병을 고칩니다. 그처럼 단단한 말씀도 순복의 영성을 가지고 실제 삶으로 잘 소화해낼 때 말씀 속에 담긴 생명력과 능력을 얻습니다. 항상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 어둔 세상을 밝히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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