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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성서, Bible, Canon, Testaments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 66권= 구약 39권 + 신약 27권
그런데, 구약과 신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성경은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성경의 번역과 역사,
성경의 원본, 사본, 번역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성경을 \”잘\” 읽는 2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성경,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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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과 역사성 – Bookdown

Chapter 10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과 역사성 · 성경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단순히 오래 전에 사람의 생각으로 꾸며 낸 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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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ookdown.org

Date Published: 4/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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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역사성

제 목 : 성경의 역사성. 서현배(합동신학교). * 성경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 : Historicality). 1) 성경의 역사적 성격. 성경은 어떤 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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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ology.ac.kr

Date Published: 5/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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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역사학2. 성경의 역사성 – 기독일보

이 역사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와 세계관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다른 세계관들은 성경의 역사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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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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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역사성 – 김찬희 – 2018년 성서와 문화

성경의 역사성 김찬희 (클레어몬트신대원 은퇴교수, 신약학) 성경은 역사적 신앙 공동체의 산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신앙 공동체를 낳은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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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c.sbp.or.kr

Date Published: 3/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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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역사성 – 늘푸른교회

성경이 진실된 것인지 객관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성경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가 성경의 역사성을 검증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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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vergreenpromising.org

Date Published: 4/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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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사이언스] 신약성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10가지 고고학 …

인류의 역사는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나뉜다. 말 그대로 B.C.란 ‘예수 이전의 역사’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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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wikileaks-kr.org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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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역사성 – 긍정적 논증

이 영상에서 그는 진지한 역사학자라면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약성경은 원본일까’ 아티클에서도 예수 실존의 역사성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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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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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하나님의 역사성 – 미주 크리스천 신문

성경의 하나님의 역사성.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지나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질문 중에 하나가 역사성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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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press.net

Date Published: 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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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역사성 – 요다위키

기독교 신약성경이 역사적 예수와 사도시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인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까지 성경적 역사성을 확대할 수 있다. 이는 학자의 의견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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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da.wiki

Date Published: 7/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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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성경 의 역사 성

  • Author: NextGen Christian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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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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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역사학2. 성경의 역사성

기독일보

트윗하기 기독교 세계관과 신앙은 인간 역사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태어나심을 사실로 믿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은 유대인과 로마의 역사서에 의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 역사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와 세계관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다른 세계관들은 성경의 역사성을 공격함으로써 기독교 세계관의 기반을 공격하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그 공격의 내용은 다양하고도 방대하여 개인이 직접 연구하여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시도이다. 그에 대해 지금까지 기독교 측에서 답해왔던 내용들을 종합한 자료들을 확보하고, 우리 자신부터 그 진실성에 대해 진심으로 승복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그렉 길버트는 <성경을 왜 믿는가?>에서 대표적인 질문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현재의 성경이 원문의 내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가? 2) 필사자들이 원본을 우리에게 정확히 전달했는가? 3)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원래의 성경에서 빠지거나 추가된 것은 아닌가? 4) 성경의 기자들은 믿을 만한가? 5) 성경 기자들은 실제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제공한 것이 확실한가? 길버트는 이 질문에 대해 하나씩 설득력 있게 근거를 제공하면서 대답하고 있다. 리 스트로벨의 <성경은 역사다>는 13명의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 역사학자, 심리학자, 의학자, 변증학자들에게 신약성경의 사건들이 현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공격적 질문을 하여 그 답을 취재한 것이다. 크레이그 블룸버그(Craig Bloomberg), 브루스 메츠거(Bruce Metzger), 에드윈 야마우치(Edwin Yamauchi), 존 맥레이(John McRay), 그레고리 보이드(Gregory A. Boyd), 벤 위더링턴 3세 (Ben Witherington III), 게리 콜린스(Gary Collins), 도날드 카슨 (Donald A. Carson), 루이스 레피데스(Louis Lapides), 로버트 스타인 (Robert Stein),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게리 하버마스(Gary Robert Habermas), J.P. 모어랜드 (J.P. Moreland) 등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각 분야 전문가들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의 답변 중에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유용한 지식은 다음과 같다. 1)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20~30년 내에 바울서신이 기록되었고, 복음서들도 아주 이른 시기, 즉 최소한 60년 이내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2세기 초의 초대교부 파피야스나 이레니우스의 기록 등 성경 외의 기독교 문서들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2) 신약성경은 고대의 많은 문서 중에서 가장 많은 사본과 번역본이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발견되었고 사본간의 일치도가 아주 높다. 고대의 다른 역사서나 문학작품은 사본의 수도 적고, 가장 오래된 사본도 대체로 600년에서 1000년 이후의 사본이 있다. 반면 요한복음의 파피루스 기록은 AD 100~150년 정도로 거의 원본과 비슷한 시기의 기록이며, 사본의 숫자는 수 만개에 달한다. 3) 성경외의 역사적 기록과 사적인 편지 속에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기록이 풍성하게 남아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예수와 그 추종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4) AD 55~57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린도전서의 15:3~4에 기독교의 초기 신경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 AD 51년에 이미 확립되어 있던 것을 전달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예수의 부활신앙이 기독교의 아주 초기부터 공식적인 믿음의 기둥으로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성경에 대한 비판적 분석연구가 있다. 이들은 구약 특히 모세오경과 구약에 대해 공격적인 비평을 한다. 성경 비평은 고등비평과 하등비평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등비평은 성경의 원본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사본들의 내용으로부터 성경의 진정한 원문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반면 고등비평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성경의 각 책들은 실제로 언제 씌어졌는가? 누가 실제로 이 책을 썼는가? 이런 질문들은 반드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어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어떤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어떻게 편집했는지 이해해야하기 때문에 역사비평, 자료비평, 편집비평과도 같은 방향성을 가진다. 고등 비평가들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성경 영감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구약성경은 이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던 내용을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모세오경도 유대가 바빌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갈 때까지는 기록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모세오경이 모세가 실제 쓴 것이 아니라 10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BC 500 년경에 기록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이 수용된다면, 구약성경의 권위가 공격받을 수 있다. 신약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은 수없이 많은 사본자료와 다른 역사적 자료들로 그 주장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입증할 역사적 자료가 적기 때문에 고등비평의 비판에 대해 반박하거나 방어할 자료가 불충분한 것이 사실이다. 그렉 길버트는 “당신은 왜 성경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예수의 부활과 신약성경의 진실성에 근거해야 한다. “너희가 성경(구약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구약성경)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 눅 24:24. 그리고 누가복음 4:18~19 이사야를 인용한 사명선언 같은 신약성경의 구절들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 예언한 구약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역사적 신빙성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위에 기초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믿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묵상: 구약 성경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세계관-역사학1. 예수의 부활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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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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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성서와 문화

성경의 역사성

김찬희 (클레어몬트신대원 은퇴교수, 신약학)

성경은 역사적 신앙 공동체의 산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신앙 공동체를 낳은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가 성경을 낳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앙 공동체는 이 성경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며, 성경에 의하여 비판을 받으며, 성경에 근거하여 신학적 사고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회와의 관계는 국가의 헌법과 국민들과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비록 국민들이 헌법을 만들었으나, 그 헌법이 곧 그 국가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하여 주며, 국민들은 이 헌법에 의하여 시민으로서의 생활을 하며 다스림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신앙 공동체의 초석이므로, 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느냐에 따라 신앙 공동체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개신 교회에 여러 가지 많은 교단이 생겨나게 된 데에는 성경 해석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이해가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수 없이 많은 교단들이 성경의 역사성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를 하였다면, 오늘날과 같이 많은 교단이 생겨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역사적 공동체가 만들어 낸,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의 영감으로 쓰였습니다.”라는 정적靜的이요 통상적인, 성경에 대한 막연한 정의가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고백적인 정의보다도 더 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 속에 생동한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산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늘 하나님의 영감을 받게 하는, 지금도 생동감이 넘치는 책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과, ‘신약’이라고 부르는 크리스천들의 성경입니다. 물론 ‘구약’이니 ‘신약’이니 하며 부르는 것은 크리스천들의 고백적인 언어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은 히브리 성경은 옛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서’이기 때문에 ‘구약舊約’이라 부르며, 크리스천들의 경전은 이에 반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기독교인들)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서이기 때문에 ‘신약新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요즈음 학계에서는, 비기독교인들, 특히 유대인들을 의식하여 고백적인 언어인 ‘구약’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 대신 ‘히브리 성경(Hebrew Bible)’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먼저,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이 그 역사 속에 살아 역사役事하시던 야훼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약조인 성약(聖約 Covenant) 관계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백성이며 그의 뜻을 따라 살아야만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이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역하기도 하였는지를 신앙의 눈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나 선지자들의 글이나 성문서들 모두가, 그들이 겪었던 어떤 역사적인 정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때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우주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는 많은 복을 받았으나, 그를 반역하였을 때에는 국가가 멸망하는 비극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기쁠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괴로울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특히 민족의 비극, 곧 북 이스라엘이 인류 역사에서 사라진 일과 남유다 왕국이 멸망한 사실이 구약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주요한 테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역사성을 우리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변 국가의 영향으로 그들의 역사는 기복이 심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 역사의 정황이 변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도 때로는 달라졌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안에서 서로 상반되는 이야기들을 흔히 읽을 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성을 말하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구약이 한꺼번에 쓰여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수백 년이란 기간을 두고 형성된 문서라는 것입니다. 구약이 주전 8세기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기록된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는 사실만 보아도 구약의 역사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은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문서로서, 그 자체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경도 구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경전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써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하여 쓰인 것들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당면하는 신앙적인 문제들, 이에 비추어 일어나는 윤리적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글들을 썼습니다. 원래 우리에게 경전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의 필요에서, 때로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권면하기 위하여, 때로는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역사도 쓰고, 편지도 쓰고, 복음서도 썼습니다.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들자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벌하지 말고 잘 받아줄 것을 간절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전형적인 그 시대의 개인적인 편지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헬라 시대의 한 생활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어느 한 특정한 역사적인 생활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한 때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 교회 사정이 어떠하였는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어떤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이 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 전연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던 사실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2천여 년 후에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이 이 편지를 읽으며 신앙생활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한 역사적인 정황에서 써진 것이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는지를 이들 복음서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들은 하나의 신앙 고백서인 동시에 전도용 문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생활하시던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의 구원의 역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인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그들의 삶의 초점을 맞출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의 한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계시록도 로마 제국 시대가 낳은 산물입니다. 그 당시, 전 세계를 거의 제패하다시피 한 로마 제국 밑에서 황제를 신으로 모시지 않는다고 핍박받고 있던 크리스천들이 남겨놓은 글입니다.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강대한 국가 앞에 힘없이 죽어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굳건히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글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가 성경이라고 귀히 여기는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우리들에게 남겨 놓은 글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들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가졌던 믿음의 단면을 볼 수 있으며, 이것이 또한 우리에게는 표본이요 가이드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옛날, 포로로 잡혀 갔던 유대 민족이 바빌로니아 강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시가 있는가 하면, 로마 병사들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마지막 참혹상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이 없었더라면, 성경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역사적 사건이 있었기에 생겨나게 되었으므로, 그 역사적 사건들의 진상을 연구하고 파헤쳐 들어갈 때, 성경은 진정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영감을 주며 무한한 기쁨을 줍니다.

우리가 성경이 써진 역사적 배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어떤 역사적 역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현실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며 살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지금 우리가 처하여 있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의 삶인가 하는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우리 인류 역사 속에서 역사役事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이해하였던 하나님은 오늘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성약(聖約 covenant)은 새 이스라엘인 우리 크리스천에게도 오늘날 유효합니다. 그래서 옛 이스라엘을 구하여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기 때문에 성경의 역사성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WIKI 사이언스] 신약성서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10가지 고고학 발굴들(상)

바이블아키알러지리포트가 성서의 고고학적 증거 10개를 제시해 관심을 끌고 있다. [BAR]

인류의 역사는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나뉜다. 말 그대로 B.C.란 ‘예수 이전의 역사’이며, A.D.란 주의 해(Year of the Lord)라는 뜻으로, 예수가 탄생한 해를 의미한다. 예수의 등장과 함께 기원 후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고고학계에서는 성서의 사실성과 예수의 존재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란이 전개돼 왔다.

‘신약성서 속 예수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가’, ‘신약성서의 기술들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성서에 기록된대로 예수가 펼쳤던 기적들은 사실인가’,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만에 부활했는가’, ‘예수는 인류의 스승이었나, 구약성서에서 예언된 메시아였나’…

이런 가운데 성서고고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웹사이트 ‘바이블아키알러지리포트(BAR: biblearchaeologyreport.com)’는 최근 신약성경의 기록들이 실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 10개를 제시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기사는 연구자 브라이언 윈들이 그동안 밝혀진 고고학적 발굴들을 정리한 것이다.

1)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발꿈치뼈

로마의 십자가 처형을 가장 잘 입증하는 고고학 자료는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발꿈치뼈이다. 요세푸스나 플라우투스, 그리고 세네카와 같은 여러 고대의 작가들이 십자가 처형과 관련된 글들을 남기고 있지만 못이 그대로 박혀있는 발꿈치뼈야말로 로마 사형제도의 형태를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1968년 건설 인부들이 이스라엘 주택부의 명으로 예루살렘 북동부에서 땅을 파다가 우연히 몇 개의 묘지를 파내게 되었다. 급히 투입된 고고학자들은 이 묘지들에서 수많은 납골함들을 발견했는데, 어떤 함 안에 십자가에 처형된 성인 남성의 뼈들이 들어있었다.

1세기에 십자가에 처형된 저호하난의 발꿈치뼈. 발꿈치에 박힌 못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의 최후가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출처 : Ferrell Jenkins)

납골함 외부에 새겨진 이 남성의 이름은 저호하난 또는 여호하난(Jehohanan, Yehohanan)이었으며, 그의 오른쪽 발꿈치에는 십자가 처형의 흔적인 듯 녹슨 못이 지금도 박혀있다. 못은 구부러져있는데, 이는 못이 십자가 나무에 박히는 과정에서 옹이를 만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처형 후 희생자의 가족은 발에 심각한 훼손을 입히지 않고서는 사체에서 못을 빼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못을 그대로 둔 듯하다.

분석 결과 발꿈치뼈와 못은 AD 1세기의 것들로 판명되었으며, 저호하난은 십자가의 세로 기둥 측면에 발들이 걸친 상태에서 발꿈치의 못도 옆에서 박은 것으로 보인다. 뼈를 관찰하면 처형 당시 그의 다리가 부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발견으로 발에 못을 박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성경에 묘사된 십자가 처형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이와 더불어, 로마의 풍습에서는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는 정상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에 묻지 못했을 것이라는 비평가들의 주장을 확실하게 잠재울 수 있는 징표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비평가들은 예수의 시신은 저주받은 주검을 처리하는 집단 매장지에 내버려졌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 발견 덕택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희생자의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묘지에 매장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레일란드 도서관 파피루스 P52’는 요한복음서의 18장 31~33절과 37~38절을 담고 있는 파편(조각)이다. 이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신약성경 사본이다.(사진 출처 : JRUL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2) P52 사본(요한복음서 파편)

가장 연대가 오래된 신약성경 사본은 ‘레일란드 도서관 파피루스 P52(Rylands Library Papyrus P52)’라고 알려진 요한복음서의 파편(조각)이다. 이 사본의 파편은 줄여서 그냥 ‘P52’라고도 불린다. 이 파편은 가로 6Cm, 세로 8.9Cm의 크기로 한쪽 면에는 헬라어로 작성된 요한복음 18장 31~33절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른 쪽 면에는 37~38절의 내용이 적혀있다.

이 파피루스 사본은 AD 125~175 시기에 작성되었다. 사도 요한이 AD 1세기 후반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복음서를 썼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본 파편은 요한복음 원본이 작성된 때로부터 100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P52’는 버나드 그렌펠이 1920년 이집트에서 구매한 파피루스 문서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다가 1934년이 되어서야 다른 성서학자가 파편에 기록된 내용을 번역하고, 그것이 요한복음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침내 파편의 내용이 완전히 번역되고 출판된 이후 사람들은 이 파편이 얼마나 중대한 발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본 파편이, 요한복음서가 최초로 기록된 에베소서에서 꽤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 발견됨으로써 우리는 AD 2세기 초반부터 성경의 내용들이 베껴져서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레일란드 도서관 파피루스 P52’는 지금까지 발견된 5,800개가 넘는 헬라어 성경 사본(파편이든 완제품이든) 중의 하나이다.

한편, 지금까지 발견된 성경 사본들에는 라틴어로 작성된 1만여개의 사본과 다른 언어로 써진 9,300개의 사본들이 있다.

‘레일란드 도서관 파피루스 P52’는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을 원본과 연결시켜주는 가장 오래된 연결 고리에 속한다.

‘빌라도의 비문(Pilate Stone)’은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었음을 입증한다. (사진 출처 : JRUL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3) 빌라도의 비문(Pilate Stone)

신약성경 속에 등장하는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중 하나는 본디오 빌라도이다. 그는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 빌라도는, 복음서의 기록 뿐만 아니라 요세푸스나 타키투스, 그리고 필론 같은 고대의 저술가들도 언급했기 때문에 그의 역사성이 의심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빌라도의 실존은 고고학적 발견으로도 입증되었다. 1961년 가이사랴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 인근 원형경기장 발굴지에서 돌에 새긴 비문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석회석 벽돌은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에게 헌납한 봉헌물의 일부였다.

흥미로운 점은, 빌라도의 직함이 행정장관이 아니라, 알려진 바대로, 총독이었음을 빌라도의 비문이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55-120 추정)는 빌라도를 행정장관으로 잘못 지칭한 바가 있다.

총독과 행정장관은 임무는 비슷했지만 같지 않았다. 행정장관은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민간인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재력 있는 민간인 중에서 선발되었다. 하지만 총독은 로마 제국 영토 내 일정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언제나 군인 출신으로 선발되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본디오 빌라도를 묘사할 때 그냥 ‘영도자(to lead)’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hegemano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총독 직책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10 B.C.-A.D. 54) 때인 AD 40년대 초반 무렵에 폐지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2세기 초반에 활약했던 타키투스가 어째서 그의 시대에 사용되던 용어인 행정장관이라는 용어로 잘못 사용했는지가 설명이 된다.

결국, 빌라도의 비문은 빌라도가 실제로 유대의 총독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더욱 최근에는 빌라도라는 이름을 담고 있는 또 다른 유적이 발견되었다. 2018년, 이미 1968년과 1969년에 헤로디움(Herodium, 베들레헴 부근에 있는 헤롯 대왕의 요새 궁전) 터에서 발굴된 구리 반지를 깨끗이 세척하고 새롭게 사진을 찍고 분석한 결과 헬라어 비문인 ‘빌라도의(of Pilatus)’라는 문구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반지는 당시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 쉽게 발견되었는데, 빌라도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이 반지가 본디오 빌라도의 소유물이었거나 그의 하인 중 하나의 물건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빌라도의 비문이나 빌라도의 반지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되고 있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서 나온 ‘갈리오 비문’은 갈리오가 AD 52년 무렵 아가야의 총독이었음을 나타낸다. (사진 출처 : HolyLandPhotos.org)

4) 갈리오 비문(Gallio Inscription)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1년 반을 머물렀다. 사도행전 18장 12절에는 ‘그러나 갈리오가 아가야 주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 사람이 한패가 되어 바울에게 달려들어,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라는 대목이 나온다.

‘델포이 비문(Delphi Inscription)’이라는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갈리오 비문’은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서 발견된 9개의 파편으로 구성된 유적이다. 이 비문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10 B.C.-A.D. 54)가 기록했으며, 내용으로는 아폴로 신에 대한 신앙을 수호하는 글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나의 친구이자 총독인 갈리오(Junius Gallio)’를 언급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비문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AD 52년 1월과 8월 사이에 26번째로 최고사령관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와 관련해서 신학자이자 히브리어 교수인 앤드류 스테이만은 성서 연대기를 기록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속주의 총독은 항상 5월 1일 취임해서 1년 동안만 역임하였므로 우리는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AD 51년 5월 1일 취임해서 52년 4월 말 퇴임한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언급했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던 시기를 콕 집어낼 수 있다. 바울은 AD 51년 중순경 유대인들에 의해 갈리오 앞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결국, ‘갈리오 비문’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대부분의 사역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상당 부분을 정확히 추�

신약성경의 역사성 – 긍정적 논증

14) 12사도, 바울, 예수 동생 야고보 중 최소 2명은 K를 공언하다 순교했다.

12명의 사도들의 순교는 가톨릭 전승에 의해 전해지고 있고 그중 사도 야고보의 순교는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회의적이다.

베드로, 예수 동생 야고보, 바울에 관해서 네로의 박해와 그들의 고통과 순교에 대해 증언하는 1세기~3세기의 기록과 편지들을 발췌한다. 12사도, 바울, 예수 동생 야고보 중 최소 2명 이상이 순교했을 것, 이 정도는 역사학적으로 거의 확실해 보인다.

① 베드로 순교

안디옥 이그나티우스의 로마로 순교하러 가며 쓴 일곱 서신 中 서머나 교회를 향한 서신 中 1장 (AD110)

제1장 : 부활한 예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믿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수난을 당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 자신이 오히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믿는 그대로 될 것입니다. 즉 육체를 벗어나만 그들은 단순히 영혼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부활한 뒤에도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가서 ‘나를 만져보고 살펴보라. 내가 육체가 없는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만져보고 믿었습니다. 그의 육체와 영혼에 대해서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음을 경멸하고 또 초월했던 것입니다. 그는 부활한 뒤에도 육체를 가졌을 때처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고 그의 영혼은 성부와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안디옥 이그나티우스 : 폴리캅과 동시대 교부)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 교회사 (AD 324) 中 2권, 3권

제2권.

9장 사도 야고보의 순교

10장 사도들을 박해한 헤롯 아그립바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

22장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었으나 자신을 변론하여 무죄 선고를 받았다

23장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25장 네로의 박해 때에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제3권.

1장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 지역

2장 로마교회를 다스린 최초의 인물

– 2권 25장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 황제는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인물의 사악함을 묘사하는 것은 본 장의 목적과 어울리지 않으며, 또 그의 생애에 대한 기사는 이미 많이 제공되었으므로 누구나 그의 극단적인 광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광기 때문에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였고 심지어 절친한 친구들까지 무분별하게 살해했다. 그는 사신의 생포와 아내, 그리고 많은 가까운 친척들을 마치 이방인이나 원수들을 죽이듯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그가 범한 온갖 죄의 목록에 추가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그는 하나님을 대적한 원수임을 드러낸 최초의 황제라는 것이다. 로마인 터눌리안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당신들의 기록을 살펴보라. 당신은 이 신앙을 박해한 최초의 인물이 네로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모든 동방 세계를 정복한 뒤에 로마에서 모두에게 잔인함을 행사하였다. (중략) 이와 같이 네로는 공공연하게 스스로를 하나님의 원수로 나타내면서 맹렬하게 사도들의 살해를 추진하였다. 그의 박해를 받아 바울이 로마에서 참수되었고, 베드로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기사는 오늘날까지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이 로마시의 공동묘지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 . 그러나 제피리누스가 로마의 감독으로 있을 무렵에 태어난 가이우스라는 이름의 기독교 작가는 브리기아 분파의 지도자 프로클루스와 논쟁을 하면서도 이들 두 사도의 세상 장막의 위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그 사도들의 기념비를 보여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바티칸이나 오스티안 거리에 간다면 교회의 기초를 놓은 이 사람들의 기념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와 같은 시기에 순교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증명하였다 . ‘ 당신은 이처럼 이 권면에 의해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와 고린도에서 심어 놓은 번영의 씨앗을 섞어 놓았습니다. 이들 두 사도들은 고린도에서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교훈을 주었으며, 이탈리아에서도 거의 같은 방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순교했습니다. ‘” 내가 이 증언을 추가한 것은 역사적 진리가 더욱 확고하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 3권 1장

” 사도 베드로 는 폰투스와 갈라티아 비티니아와 카파도키아에서 유대인에게 설교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에 갔을 때,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고통받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 누가 예수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라리쿰까지 전파하고. 그리고 그 후에 네로 황제의 치하의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습니까? 이러한 사실들은 오리게네스의 창세기 주해 3 권을 참조하십시오 .”

(오리게네스 :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 (AD 250)

– 3권 2장

”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 뒤 처음으로 로마 교회를 맡은 사람은 리노(재위 64~79) 주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디모데에게 쓴 편지의 인사말에 리노의 이름을 언급했었습니다.”

클레멘스 1세의 첫째 서간 中 3장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AD 98)

” 우리 시대의 가까운 예를 듭시다. 교회의 가장 독실하고 정의로운 기둥들이 박해받아 비참하게 죽었고, 사도 베드로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순교했으며, 바오로(바울)도 마찬가지로 순교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그 뒤를 이었으며, 여자들도 영광의 최후를 마친 사람이 많습니다 . 도시들과 위대한 나라들의 파멸을 초래했습니다.”

(클레멘스 1세 : 제4대 교황(재위: 88년 ~ 99년)으로써 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클레멘스 1세는 베드로에 의해 사제 서품 및 주교 서임을 받았으며,[1] 1세기 말엽에 로마 교회 공동체를 사목했다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외경 베드로 행전 (AD 180-190)

“베드로는 로마인들의 박해를 피해 달아나라는 교우들의 말에 따라 변장을 하고 혼자 조용히 로마를 떠나고 있었다. 로마 성문을 벗어나자, 베드로는 아피아 가도에서 마주 오는 예수를 보았다. 베드로는 “Quo vadis, Domine?”, 즉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겠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그렇다. 베드로야,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정신을 번뜩 차리고 예수를 찬미하면서 다시 로마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교우들에게 돌아가서 자기가 본 환시를 전해주면서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 이때 베드로는 특이하게도 자청해서 머리를 아래로 두고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예수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터툴리안(Tertullian)의 Scorpiace (2세기 말)

“믿음의 꽃봉오리를 네로는 로마에서 피로 꽃피웠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묶여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터툴리안(Tertullian)의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2세기 말)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수난을 견디어냈다.”

② 예수 동생 야고보 순교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AD 95경)

페스투스가 죽었고, 알비누스가 부임했다. 그래서 그가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을 소집했고,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다른 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들이 법을 파괴한다는 죄명을 씌우고 돌로 죽이게 하였다. 하지만 가장 공정한 시민들과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싫어했다.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Book 20)

카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 교회사 (AD 324) 中 2권

2권 23장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주님의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많은 이들이 야고보라 불렸기 때문에 모든 이로부터 의인이라 불린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를 전해 받았다. (중략) 많은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믿었기 때문에, 유다인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모든 백성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기대한다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함께 야고보에게 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백성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길을 잃고 있으니 그들을 저지시켜 주시오. 그를 그리스도로 여기다니! 우리는 당신에게, 과월절을 지내러 오는 모든 사람을 설득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우리와 모든 백성은 당신이 의롭고 외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높은 곳에서 보이기 위해서 당신은 성전의 꼭대기에 서시오.’ 그래서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야고보를 성전의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외쳤다. ‘우리가 신뢰하는 의인이여, 백성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쫓아 길을 잃었으니, 우리에게 예수의 문이 무엇인지 알려주시오.’ 그러자 야고보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람의 아들에 관해 당신들이 나에게 묻는 것이 무엇이오? 그분은 하늘 위, 전능하신 분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고 그분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셔야 합니다.’ 많은 이가 동의하며 야고보의 증언을 찬송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아들.’ 다시 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 증언을 허용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러나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던져 그들이 두려워 그를 믿지 않게 합시다.’ 그러자 그들이 외치며 말하였다. ‘오! 오! 의인이 길을 잃었도다.’ 그리고 그들은 이사야의 성서 말씀을 이루었다: “의인을 없애자. 그는 우리를 방해한다. 이제 의인은 그가 행한 일의 열매를 먹는다. 그래서 그는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던져 버렸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의인 야고보를 돌로 쳐 죽이자.’ 그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당신께 청합니다, 주 아버지 하느님,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그는 순교하였다. 그들은 그를 성전 가까운 장소에 매장하였다. 그의 비석은 성전 옆에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곧이어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이것은 헤제시포가 오래 이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라 불린 예수의 형제 의인 야고보에게 한 행동과 그가 매우 의로웠음에도 유다인들이 그를 죽인 것에 대한 징벌로 일어났다.”

(사도들의 전설을 논했던 학자인 헤게시푸스의 저서 제5 권(AD180)을 인용한 것)

③ 바울 순교

①에서 유세비우스 기록과 클레멘스의 편지를 발췌했으며, 추가로 터툴리안도 그의 저서(2세기 말) Scorpiace 15장, The Prescription Against Heretics 36장과 Hippolytus on the Twelve 13장에서 기록했으며 일부를 발췌한다.

터툴리안(Tertullian)의 Scorpiace (2세기 말) 中 ch.15

크리스천의 눈으로 본 세상-:::::::: The Korean Christian Press ::::::::

성경의 하나님의 역사성

뉴욕빌라델비아장로교회 | 김혜천 목사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지나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질문 중에 하나가 역사성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예수님의 부활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성경은 역사적이다. 신화나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며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성경은 역사적인 사건의 역사적인 기록이다. 과연 성경은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것인가? 대답은 물론 ‘예’ 이다. 구약과 신약은 이미 많은 그리고 세밀한 부분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고고학이 성경을 지지하는가? 최근의 많은 고고학적인 발견들은 성경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그리고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의 도전을 잠재웠다. Grant Jeffrey 그의 저서 The Signature of God 에서 “학자들은 성경의 기록을 절대적으로 부정할만한 고고학적 증거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지난 1세기 동안 가장 뛰어난 유대인 고고학자로 Rivers in the Desert 라는 책을 쓴 Nelson Glueck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역사를 뒤집을 수 있는 고고학적인 발견은 없다”라고 했다. 심지어는 성경을 믿지 않는 고고학자도 아브라함 시대의 창세기의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데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성경의 역사적 문화적 정확성을 인정한다. 성경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의미심장한 중요한 고고학적은 발견들은 많이 있다. 그 중에 최근의 발견 몇 가지의 예를 들어 본다.

텔 단의 비석 The Tel Dan Stele이 있다. 여러 해 동안 학자들은 성경의 다윗 왕이 가공의 허구의 인물이거나 아니면 역사적인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왔다. 그런데 1993년도에 고대도시 텔 단을 발굴하던 중에 현무암 비석을 발견했다. 이 비석은 성경 바깥에서 다윗왕을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었다. 1 피트 정도 되는 크기인데 주전 9세기 중엽에 기록된 비석이었다. 이 비석은 바로 세우는 돌인데 중요한 성취를 기록한 기념비인데 거기에는 ‘다윗의 집 House of David’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다윗 왕국이 통일왕국으로 역사 가운데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여리고의 성벽은 여호수아 6장은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진 여리고 정복사건에서 나온다. 여리고의 존재는 발굴 작업으로 오래 전에 확인되었다. 성벽이 바깥으로 무너진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에 성벽의 높이는 적어도 12-15피트 정도이었을 것이다. 성벽이 바깥으로 무너짐으로 이스라엘 군대는 무너져 내린 성벽을 층계로 삼아서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쪽으로 무너졌다면 성벽을 넘어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여호수아 6:24은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고 했다. 고고학은 그 사실도 확인했다.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파괴된 부분은 바로 동쪽이었다. 고고학자들이 약 3피트 깊이 정도의 불탄 재와 잔재들을 발굴했다. 그리고 불탄 곡식들이 가득한 항아리들을 많이 발굴했다.

사해사본도 있다. 사해사본이 발굴되기 전에는 가장 오래된 구약의 사본은 주후 10세기의 사본이었다. 사해 지역의 쿰란에서 1947년부터 1956년 사이에 발굴된 사본들은 양피지와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주전 2백년부터 주후 70여년 사이의 사본들로서 사상 최대의 구약성경이 발굴되었다.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책이 다 발굴이 되었다. 다른 자료들도 함께 많이 발굴됨으로 예수님 당시의 종교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사해사본은 구약성경의 정확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빌라도의 헌정비 Pontius Pilate Dedication Stone도 있다. 1961년까지는 마태복음 27장에 나오는 빌라도의 역사성에 대하여 수많은 도전들이 있었다. 성경 외에는 자료를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주장이었다. 1961년 6월에 32인치되는 석회암 비석이 고대 가이사랴의 원형극장에서 발굴되었다. 이것은 주후 30년에 만들어진 비석으로 주변의 있는 신전을 황제에게 봉헌하는 비석인데 원형극장의 층계에 좌석으로 재사용되어 왔었다. 거기에는 라틴어로 ‘티베리움, 본디오 빌라도, 유대의 총독’ 이라는 비문이었다. 빌라도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비판이 잠재워졌다.

십자가 형벌이 있다. 학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의 정확성에 대하여 의심해왔다. 그 사형법에 대한 정확한 방법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형은 노예와 반도들을 향한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그들은 죄인을 나무에 못 박던지 아니면 묶어 두어서 죽게 버려두었다. 마태복음 27장의 형벌에 대하여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어떤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1968년도 이스라엘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못이 사형수의 발을 뚫고 나무를 관통하여 휘어진 상태로 발굴이 되었다. 십자가 형벌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증거들이 풍성하다. 신약성경의 사본의 숫자는 2만4천개가 더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본들이 얼마나 신뢰할만 한가? 그리고 그 사본들의 연도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서로 상충되는 내용은 없는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된다. 신약의 정확성은 확실하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5백명이 넘는다고 했다(고전15:5-8). (1)이러한 신약 사본들은 기록의 연도와 매우 가깝다. 그리고 그 사본들의 진실성은 당시에 살아 있었던 사건의 목격자들과 증인들에 의하여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2)신약의 대부분의 책들은 교부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Clement 95년, Ignatius 107년, Polycarp 110년 등이 많은 교부들이 신약성경에 대하여 증언했다. (3)대부분의 신약성경들은 초대교회의 변증가들에 의하여 인용되었다. Justin Martyr 133년, Ireneus 125년, Clement 150-212년, Origen 185-253년, Tertullian 160-220년, Hippolytus 165-235년, Eusebius 265-340년 등이 성경을 인용했다. (4)신약사본의 숫자는 고대의 어느 사본의 수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많은 사본이 존재한다. Plato는 6개의 사본이, Caesar의 Gallic Wars는 10개의 사본이, Homer의 Iliad 643개의 사본이 존재한다. 반면에 신약사본은 2만4천개가 넘는다. 비교할 수 없는 진실성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본들은 상충되지 않고 서로가 일치하는가? 신약의 성경은 모든 중요한 교리와 대부분의 자세한 부분에 일치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본들이 큰 부분에서 거의 모두 일치한다는데 동의한다. 약 92.2%가 일치한다고 한다. 차이가 있다고 주장되는 7.8%에서도 오직 1%가 의미심장한 차이라고 인정된다. 여기 의미심장한 차이의 예가 있는가? 데살로니가전서 2:7을 보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에서 epioi에서 한자가 틀리면 nepioi가 된다. 이것은 분명한 복사할 때에 발생한 오자임을 알 수 있다. 사본을 확증하는 외적인 증거들이 있는가? 여러 가지 역사적 자료들이 성경에 대하여 증거한다.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 요세프스의 저서들 속에서 신약과 그 인물들에 대하여 말한다. Tacitus의 연대기 Annals, Pliny the Younger의 편지, 루시언의 The Works of Lucian of Samosata, Celsus, 그리고 유대인 탈무드 산헤드린 43a 등이 있다.

그 외에도 62년에 순교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유골함이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예수의 형제 요셉의 아들 야고보’라고 새겨져 있다. 1955년에는 나사렛 도시가 재발굴되었다. 1990년도에는 가이바 비문이 발굴되었다. 1961년에는 빌라도의 이름이 발굴되었다. 누가가 언급한 이름들이 델피와 고린도와 다른 사이트에서 발견되었다. 사도행전의 누가가 기록한 바울의 행적을 따른 도시들이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발굴되었다. 1968년에는 십자가 형벌의 처형자가 발굴되었다. 1929년에는 고린도의 재무이었던 에라스도Erastus 라는 이름이 발굴되었다(롬16:23). 고린도의 포장된 길을 만든 사람이 바로 에라스도이며 그의 직책도 발굴이 되었다. 성경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죽은지 나흘 만에 살아나서 유대에서 사이프러스로 도망하여 라나카Larnaca교회의 감독이 된 베다니 나사로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석관에는 “나사로, 라나카의 감독, 4일동안 죽음. 예수의 친구”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역사적인 것을 확증할 수많은 든든한 증거들이 있다. 성경은 역사적이다. 성경의 하나님과의 조우도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들이다. 성경은 진리이다. 세상의 과학도 오늘까지 증거한다. 담대한 복음의 증거자가 되자. 이메일:[email protected]

성경의 역사성

역사적 사건과 성경적 사건 사이의 관계

성경의 역사성은 성경의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성경의 역사로서의 수용성뿐만 아니라 성서 서술의 문학적 형태를 이해하는 능력까지 다루고 있다. 기독교 신약성경이 역사적 예수와 사도시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인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까지 성경적 역사성을 확대할 수 있다. 이는 학자의 의견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성경의 저서를 연구할 때 학자들은 구절의 역사적 맥락, 저자에 의한 사건에서 비롯된 중요성,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서술과 그 밖의 역사적 증거의 대조 등을 고찰한다.

신학자 토마스 L에 의하면. 코펜하겐 학파의 대표인 톰프슨은 고고학 기록은 구약성서의 서술에 대한 희박하고 간접적인 증거를 역사로 빌려준다.[a][3][b][6] 고고학자 윌리엄 G와 같은 다른 사람들. 디버, 성서 고고학이 구약성서 이야기를 확인하고 도전했다고 느껴라.[7] Dever는 코펜하겐 학교의 급진주의를 비판해 왔지만, 그는 성서적 문자론자와는 거리가 멀며, 성서 고고학의 목적은 단순히 성서적 서사를 지지하거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의 연구 분야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8][9]

자재와 방법

원고와 통조림

성경은 복수의 원고에 존재하며, 그 중 어느 것도 사인하지 않으며, 여러 개의 카논이 존재하는데, 어떤 책이 포함되어야 할 충분한 권한이나 그 순서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성경 서적 참조). 다양한 아포크리파의 배제나 통합에 대한 초기 논의에는 핵심의 역사성에 대한 초기 발상이 수반된다.[10] 이오니아 계몽주의는 저스틴 순교자나 테르툴리안 같은 초기 후원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 두 사람 모두 성서의 본문이 다른 종교의 신화와는 다르며 (그리고 역사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학과 성경의 차이를 알고 있었으며, 예를 들어 마일리브의 파우스토스의 주장에 맞서 성서적 문헌의 역사성을 옹호했다.[11]

역사학자들은 성경이 고대 세계의 다른 역사(또는 문학) 출처와 다르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와 같은 역사성에 대한 의구심을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의 결과는 우리가 역사적 재건을 위해 고대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수반되는 문제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12]

고대에서 직접 살아남는 텍스트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복제되었다. 몇 번, 몇 번, 여러 번. 복사된 원고의 정확성을 판단하기 위해, 텍스트 비평가들은 그 기록들이 어떻게 역사를 거쳐 현존하는 형태로 전해져 왔는지를 조사한다. 초기 텍스트의 일관성이 높을수록 텍스트의 신뢰성이 높아지며, 수년 동안 내용이 변경될 가능성은 낮아진다. 또한 여러 권의 사본은 텍스트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일부 유형은 다른 유형보다 가상의 원본에 더 가깝게 판단된다. 차이점은 종종 사소한 변동을 넘어서며, 예를 들어 마크 16의 종료와 같은 역사성 및 교리의 문제에 중심적인 통로의 보간과 관련될 수 있다.[citation needed]

역사 쓰기 및 읽기

1957년 성서고고학 도옌(Doyen)인 W.F.올브라이트(W.F.올브라이트)

‘역사’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13] 예를 들어, 폴라 맥너트는 구약성서 서술은 “역사가 20세기에 이해된다는 의미에서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과거는 20세기 성경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성서 작가들에게도 현재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어쩌면 이상화된 미래로 여겨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14]

초창기부터 종교문서의 학생들은 경전의 일부분이 엄밀하게 일관된 일련의 사건들로 해석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탈무드는 3세기 스승 아바 아리카(Abba Arika)가 “토라에는 연대순서가 없다”[15]고 한 격언을 인용한다. 예는 종종과 토론과 나중에 유대인 성서 해설에 미세, 아브라함 J. 헤셸(1907-1972)에 그 사이의 랍비 이스마엘의 견해를 따를 것을 진행 중인 담론이 그런 deviat 랍비 Akiva(C.50– 135CE)의 더 신비한 접근법에 비하면”토라(유대교 율법)인간의 언어로 말한다”(90CE 태어난) 따라 제시되었다.i 온스는 더 깊은 질서나 목적을 나타내야 한다.[16]

근대에 들어서면서 성서사의 초점도 다양해졌다. W.F.와 관련된 성서 고고학 프로젝트. 근동의 고대 문헌과 물질적 유적을 통해 성경에 서술된 사건들의 역사성을 검증하고자 했던 올브라이트(1891~1971)는 고고학자 윌리엄 드버(1933-)가 기술한 보다 포괄적인 역사관에 비하여 보다 구체적인 초점을 두고 있다.[17] 데버는 성서 기록 해석에 있어서 그의 규율의 역할을 논하면서 신학사(신과 신자의 관계), 정치사(보통 ‘위대한 사람들’의 설명), 서술사(사건의 연대기), 지적사(탐구사) 등 성서 내의 여러 역사를 지적해 왔다. 사상과 그 발달, 맥락과 진화, 사회문화사(가족, 씨족, 부족, 사회계급과 국가에서의 사회적 토대를 포함하는 역사), 문화사(문화적 진화, 인구통계학, 사회경제적 정치구조와 민족성), 기술사(흥행하는 기법) ans 환경의 자원에 적응, 이용, 자연사(인류가 자연환경의 생태학적 사실을 발견하고 적응하는 방법), 물질사(인간의 행동변화의 상관관계로 간주됨)에 적응한다.[18]

서술적 역사와 신학적 의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첨예하게 다른 관점이 성경의 역사성을 평가하기 위한 특별한 과제를 제시한다. 성서적 문학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성서적 무절제와 무절제가 역사와 과학 분야의 주장을 배제하고 영적, 종교적, 또는 재선적 주제에 국한되어 있다고 부인한다. 우리는 또한 지구의 역사에 대해 과학적 가설이 올바르게 성서의 창조와 홍수에 교육을 뒤집는 데 사용될 수 있는데 부정했다.”[19]”History”하며, 다른 하나는 성서의 역사, 이러한 맥락의 사건들을, 확정된 명확한 틀을 의미하고 전지적 작가 medieva처럼 actions—comfortingly 친숙한 공유 사실들-으로 보인다. l 크로니클, 대체 계정 삭제,[20] 심리학적 해석 [21]또는 문학적 가식. 그러나 저명한 학자들은 정반대의 견해를 표명했다.

[T]창세기에서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될 생각도 없다.그것들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으로 확고한 표현이며, 그들의 진실은 그들의 사실성이나 역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애비에 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현실을 표현할 [22]수 있는 능력

현대 전문 역사학자들, 진행 중인 역사적인 개정론의 현상에 친숙한,”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의 그들의 해석으로, 그리고 학자들( 하지만 신성한)가 잠재적으로 모든 accounts—especially accounts—as 잠재적으로historica 편집 unreliable[23]모든 narrators를 참조하십시오. 텍스트의 연구에 정통한 새로운 발견 물과 생각을 허용하다.lly 시대와 환경에 의해 편향된 불완전한

히브리어 성경/구약성서

저자

주요 기사: 성경의 저자

성경의 역사적 권위의 중심축은 묘사된 사건들에 대한 주요 배우나 목격자들에 의해 구성되었던 전통이었다. 즉, 오순절은 모세의 작품이고,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개신교 개혁은 실제의 원문을 훨씬 더 넓은 청중에게 가져다 주었는데, 이는 계몽주의 시대의 시작이었던 17세기 지적 발효의 풍토와 결합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주장들에 가혹하고 회의적인 스포트라이트를 주었다. 개신교 영국에서는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그의 주요 저서 리바이어던(1651)에서 모세오크 황제의 저자임을 부인했고, 조슈아, 판관, 사무엘, 왕, 크로니클스가 묘사할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들이 있은 지 오래 후에 쓰여진 것으로 확인했다. 그의 결론은 내부 텍스트 증거에 머물렀지만 현대적 논쟁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논쟁에서 그는 “몇 권의 성경의 원작자가 누구였는지는 사실의 유일한 증거인 다른 역사의 충분한 증언에 의해 명백해지지 않았다”[24] 고 언급했다.

1682년 사이먼의 비평사 제목 페이지.

유대인 철학자 겸 팬테히스트 바루치 스피노자는 그의 신학-정치학 논문(1670년 출간)에서 홉스의 역사책의 입증에 대한 의구심을 재조명하고,[26] 이들 문헌의 최종적 수정은 에즈라(Chapter IX)의 후원 아래 특권 이후의 것이라는 제안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일찍이 암스테르담의 광견병 협회에 의해 이단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파문당했다. 프랑스 신부 리차드 사이먼은 1678년 “우리에게 오는 성경의 대부분은 히브리인들의 섭정에 보관된 고대행위의 요약본일 뿐”이라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가톨릭 전통에 가져왔다. 현대적 [27]감각

이에 대해 장 아스트록은 고전 세속적 문헌 분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펜타투치 출처 비판 방법을 적용하면서, 모세 자신이 수정했다고 주장한 네 가지 다른 원고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p 62–64)[28] 그의 1753년 저서는 1870년대에 다큐멘터리 가설을 공식화한 줄리어스 웰하우젠에서 최고조에 달한 비판으로 알려진 학교를 시작했는데,[29] 이 책은 이러한 내러티브를 자흐위스트, 엘로히스트, 신자학자, 프리스틀리 소스로 규정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가설의 버전은 그들이 작곡된 순서, 구성의 상황, 그리고 그들의 수정 날짜에 따라 다르지만, 그들의 공유된 용어는 토라의 복합적 성격과 기원에 대한 현대 이론의 틀을 계속 제공하고 있다.[30]

19세기 말에 이르러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오순절이 기원전 1000년(다비드 시대)부터 기원전 500년(에즈라 시대)까지 많은 저자들의 저작이며, 그 결과 어떤 역사가 담겨 있든 엄밀하게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장구적인 것이었고, 이는 당시 신선한 사이언티피아가 강화한 결론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성서 신화로 널리 분류되었던 것에 대한 반박

토라 (펜타테우치 주)

창세기 창조의 설화

적어도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 이르는 창세기 창조의 내러티브에 대한 비판의 기독교 전통이 있으며, 유대인의 전통도 성서적 원시사에 대한 접근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 영향력 있는 중세 철학자 마이 모니 데스와 철학 인류학”,보다는 역사적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이다 아담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은 것을 창조 전 남편 nihilo에 대한 회의적인 모호함을 유지했다.”[31일]그리스 철학자들 Aristotle,[32]Critolaus[33]과 Proclus[34]은 세계 영원한 의견이었다. 이 같은 해석은 개신교 개혁 이후 ‘복음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세기 전통적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다.[c]

1788년 제임스 허튼의 지구론(The Earth of Earth)을 출판한 것은 원시 지구와 선사시대의 궁극적인 권위자로서 창세기를 퇴치할 과학혁명의 중요한 발전이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창조 이야기 그 자체였고, 19세기 초까지 “모자이크 창조의 문자 그대로의 신뢰성에 대해 논쟁을 벌인 책임 있는 과학자는 없었다.”[36] 통일주의와 대재앙의 싸움으로 홍수는 새로운 규율 속에서 살아났다. 지질학회의 회장인 아담 세드윅이 1831년 대통령 연설에서 그의 이전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철회하기 전까지 말이다.

우리는 정말로 희석 이론이 처음 채택되기 전에 잠시 멈춰서서 우리의 모든 오래된 표면적인 자갈을 모자이크 홍수의 작용에 참조했어야 했다. 인간에게, 그리고 그의 손의 업적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그러한 퇴적물에 얽힌 전 세계의 잔재들 중에서 단 하나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37]

이 모든 것들은 찰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하면서 에덴 동산을 귀화하기 전까지 모든 역사적 맥락을 벗기는 어색한 입장에 놓이게 했다. 이 과학적 혁명에 대한 대중의 수용은 그 당시에는 고르지 못했으나, 그 이후 크게 성장했다. 주류 학계는 곧 오늘에 이르러 창세기 1-11이 실제 역사나 과학보다는 신학/심벌 신화를 대표하는 고도로 도식화된 문학 작품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28][page needed]

이스라엘 12 종족의 조상이었던 야곱의 아들 12명

주요기사 : 총대주교(Bible)와 창세기서

이후 수십 년 동안 헤르만 군켈은 펜타투치의 신화적인 측면에 관심을 모았고 알브레히트 알트, 마틴 노트와 전통사학파는 비록 핵심 전통이 진정으로 고대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서술은 허구의 프레임 장치일 뿐 현대적 의미에서는 역사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록 이 학교의 역사학 재구성에 의구심이 제기되었지만(특히 구전 전통이 주요 고대의 원천이라는 개념) 성경 역사성에 대한 비판의 상당 부분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군켈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인물들을 독창적인 신화적 토대가 없는 실제 인물들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추측할 수 있겠지만, 한때 “아브라함”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전설의 역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개인적 경건함의 그림을 보존하기 위해 그 전설이 그렇게 많은 세기의 거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실제로는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귀속하는 전설적인 서술자들의 종교다.

이것은 다양한 형태로 동시대 비판의 흔한 장소가 되었다. {{efn {{성서적 역사 및 이스라엘의 과거 인용

자신의 말로 학자들의 변화하는 견해 1970년대와 이후에 일어난 총대주교와 모계학자들의 극적인 연구 변화는 수십 년으로 분리된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두 작품의 인용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존 브라이트는 1950년대에 처음 쓰여진 역사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기원전 2천년에 실제로 살았던 씨족 족장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서술은 그것이 언급하는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그것이 족장들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다.”1 40년 후 장학금으로 상황을 평가하면서 2001년 윌리엄 디버는 “한 세기의 철저한 조사 끝에 모든 존경할 만한 고고학자들은 아브라함, 이삭 또는 제이콥을 ‘역사적 인물’로 믿을 만한 문맥을 회복할 희망을 포기했다”2고 결론지었다. 1. 이스라엘의 역사, 4번째 에드 존 브라이트 (루이스빌: 웨스트민스터 존 녹스, 2000), 페이지 93. 2. 윌리엄 G. 디버, 성서 작가들은 무엇을 알았을까, 언제 알았을까? 고고학이 우리에게 고대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Eerdmans, 2001), 페이지 98. … 이 후기의 문학작품으로서 역사적 인물. 이 논문의 근거는 새롭지만, 논문 자체는 알트와 노트가 갖고 있는 견해와 상당히 비슷했다. 톰슨, 반 세터스 등은 그 전통에 대한 2백만 년의 날짜에 대한 이전의 학문적 합의는 지속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와 증거의 조화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톰슨은 이스라엘 과거 연구에서 이러한 변화의 가장 대표적인 진술들 중 하나를 제공했다. “[N]ot는 가부장적 전통의 단 하나의 사건이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을 뿐이며, 그럴 것 같은 전통을 보여주지 못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의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창세기 문학적 전통의 형성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창세기 총대주교들에 대한 학자적, 대중적 작품 모두에서 흔히 언급되는 것과 같은 어떤 역사성도 거의 불가능하고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

미국에서는 올브라이트의 영향을 받아 성서고학 운동이 반격하면서 프레임 서술 내의 넓은 윤곽도 사실이라고 주장하여 학자들이 아브라함과 다른 족장들의 삶에서 나온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증명하거나 반증할 것을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없었지만, 이것들은 진정한 인디비였다. 고고학적 기록에서 입증된 문맥에 배치될 수 있는 이중자들 그러나 더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고, 예상된 발견이 실현되지 못함에 따라, 고고학이 사실 올브라이트 및 그의 추종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올브라이트의 죽음 이후 그의 가부장제 시대에 대한 해석은 점점 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한 불만은 토마스 L의 <가부장제 서술의 역사성> 출판과 함께 최고조에 달했다. 존 밴 세터스(John van Seters)[41]의 역사와 전통의 톰슨과[40] 아브라함. 문학학자 톰슨은 기원전 2천년에 가부장들이 살았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특정 성경 문헌이 어떻게 첫 천년의 조건과 우려를 반영하는지 주목했고, 반 세터스는 가부장적 이야기를 조사하면서 그들의 이름, 사회적 환경, 메시지가 강하게 시사했다고 주장했다. 철기 시대의 창조물이었다. 성서의 장학금과 고고학을 점차적으로 학자들 더 이상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 다음 years,[44][45]의 Patriarchal 이야기를 방어하려고 시도해 historical[43]로 유교사 회의 가부장적 담론을 고려할 수 있으나 위치 장학금 사이에서 인정하지 못하게 반 Seter와 톰슨의 작품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ars.[46]

오늘날에는 소수의 학자들만이 주로 종교적 신념의 이유로 이 틀 안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47] William Dever는 1993년에 이렇게 말했다.

[올브라이트]의 중심 논제들은 모두 뒤집혔는데, 부분적으로는 성서 비평의 진전에 의해 일부 더 진전되었지만, 주로 그 자신이 격려와 탄력을 준 젊은 미국인과 이스라엘인들의 계속되는 고고학적 연구에 의해 뒤집혔다. … 아이러니한 점은 장기적으로 ‘성경 고고학'[48]이 아니라 성서 연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새로운 ‘세컨더리’ 고고학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엑소더스

주류 장학생들은 더 이상 성서 엑소더스 계정을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엑소더스 이야기가 명백한 설정 이후 수 세기 동안 현재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데 동의한다. The Book of Exodus itself attempts to ground the event firmly in history, dating the exodus to the 2666th year after creation (Exodus 12:40-41), the construction of the tabernacle to year 2667 (Exodus 40:1-2, 17), stating that the Israelites dwelled in Egypt for 430 years (Exodus 12:40-41), and including place names such as Goshen (Gen. 46:28), Pi 톰과 라메스(엑소드). 1:11)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 60만 명이 관련되어 있다고 진술하였다(출고 12:37). 번호부에는 또 방랑 당시 사막에 있던 이스라엘인 수가 초생 2만2273명을 포함해 60만3550명으로 현대 추계로는 250만~300만 명에 달해 시나이 사막에서는 결코 지탱할 수 없었던 공상적인 숫자라고 적혀 있다. 고센과 같은 지역이 미확인되면서 지리가 모호하고, 펜타테우치에서는 연애에 대한 내적인 문제가 있다. 모세의 역사적인 이집트 원형을 확인하려는 현대적인 시도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집트 역사에서 어떤 시대도 출애굽기 성서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은 없다. 이집트의 전염병이나 홍해 건널목처럼 이야기의 일부 요소는 기적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에 어긋난다. 성경은 또한 엑소더스 서사에 관계된 파라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신왕국의 고대 이집트 문헌이 이집트에 사는 ‘아세아틱스’를 노예와 노동자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 민족들은 이스라엘 자손과 안전하게 연결될 수 없으며, 현대의 이집트 문헌에서는 성경에 기술된 것과 같은 대규모 노예 이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없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언급인 이집트 메르네파 비(기원전 1207년)는 이들을 가나안이나 그 주변에 배치한 것으로 보이며, 출애굽의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고학적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학자들은 출애굽기들이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는데, 켄튼 스파크스는 이것을 “신학화된 역사”라고 언급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집트 출신 소그룹들이 초기 이스라엘인들에 합류한 후 그들 자신의 이집트 엑소더스 이야기를 전 이스라엘에 기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d] 윌리엄 G. 디버는 요셉 부족과 이 집단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리차드 엘리엇 프리드만은 레위 부족과 구분한다.[62] 출애굽의 역사적 핵심을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가능한 출애굽 그룹을 람세스 2세 시대에 기원전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일부는 대신에 람세스 3세 시대에 기원전 12세기로 연대를 한다. 역사적 전통은 출애굽기 신화의 배경을 형성하는 것에 찬성하는 증거는 고대 Semitic-speaking의 사람들과 이집트 밖으로 나와 작은 그룹의 18,19왕조 동안 문서화된 움직임, 이집트의 민속과 문화의 출애굽기 narrative,[63]에 일부 요소와 이름을 모세, 아론과 Phine을 포함한다.가지다 이집트 태생인 것 같아 스콜라 교수는 몇 백 명에서 몇 천 명에 이르는 이 같은 대탈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연루됐을지 추정한다.

신역학사

주요 기사: 신공학자

많은 학자들은 ‘신학사’가 지리적·사회경제적 현실과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특정 정보를 포함한 고대 문헌과 구전 전통의 요소들을 보존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의 많은 부분은 전설적이고 많은 시대착오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65]

조슈아와 심판의 “콘크리트 서사”

주요 기사: 여호수아

역사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여호수아와 판관들에 묘사된 이스라엘인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서술이었다. 미국 올브라이트 학교는 정복에 대한 성경적 서술이 고고학적 기록에 의해 확인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20세기 대부분의 고고학은 베이틴(베델로 확인됨), 텔 에드 듀와르(Lel Ed-Duweir), (라치쉬로 확인됨), 하조르, 그리고 예리코에서의 발굴을 포함한 성경적 설화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66][67]

그러나 정복 서사의 결점이 나타났다. 가장 주목받는 예는 1930년대 존 가르스탕이 발굴한 ‘예리코의 함락’이다.[66] 가르스탕은 당초 성서 예리코 전투 당시의 무너진 담장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나 이후 파괴 시기를 훨씬 앞당긴 것으로 수정했다.[67] 캐슬린 케니언은 1950년대 초 발굴조사를 근거로 엑소더스와 파라오 람세스의 일상적인 데이트를 맞추기에는 너무 이른 16세기 중반( c. 기원전 1550년)까지 성벽이 무너진 도시의 파괴와 데이트를 했다.[68] 피오트르 비엔코프스키가 모든 발굴 조사 결과를 분석한 결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69] 1960년대까지 고고학 기록은 사실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정복에 대한 설명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당시 성경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기록했던 도시들은 무인도였다거나, 아니면 파괴되었다면, 단 한 번의 짧은 기간도 아닌 아주 다른 시기에 파괴되었다.[66]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에 따르면 정복 설화에 대한 합의는 20세기 후반에 포기되었다고 한다.[66]

그의 견해에 따르면, 조슈아 책은 수세기에 걸쳐 이질적인 집단들 사이의 몇 가지 독립된 전투를 털어놓으며, 인위적으로 그들을 단일 지도자인 조슈아에게 귀속시킨다.[70] 그러나 성서 기록이 고고학적 기록과 모순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기원전 1200년경부터 파괴층에서 발견된 텔하조르의 지층은 재앙적인 화재의 징후를 보이고, 현장에서 발견된 쐐기풀판들은 이브니 아디라는 이름의 군주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이브니는 히브리 성경에 언급된 가나안 지도자인 야빈(자빈)의 어원일 수도 있다.[71][72] 이 도시는 또한 파괴되기 전에 훌륭한 사원들과 호화로운 궁전들이 [72]위쪽 아크로폴리스와 아래쪽 도시로 갈라져 있는 웅장한 가나안 도시였던 흔적이 보인다. 핀켈슈타인은 하솔의 파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니라 후기 청동기시대 지중해 동부 전역에 걸쳐 문명이 전반적으로 붕괴된 결과, 내분, 바다 민족에 의한 공격, 그리고/또는 문명의 파괴의 결과라고 이론화했다.[72]

암논 벤 토르(예루살렘 히브루 대학)는 최근 불에 타 폭력적으로 파괴된 증거가 발견돼 성경에 대한 설명을 뒷받침한다고 보고 있다.[73] 2012년, 벤토와 샤론 주커먼을 이끄는 팀은 기원전 13세기부터 불에 탄 농작물을 보관하고 있는 3,400년 된 유저를 창고에서 발견했지만, 샤론 주커먼은 벤토르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 불타는 도시의 수많은 파벌들이 과도한 노력으로 서로 대립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e [74]포스 성서학자 리차드 엘리엇 프리드먼(조지아 대학)은 이스라엘이 하솔을 파괴한 것은 맞지만, 예언자 데보라가 하솔의 왕을 무찌른 <판사록>의 설명과 그러한 파괴가 더 잘 맞아 떨어진다고 주장한다.[75]

사무엘의 책

주요 기사: 사무엘의 책

사무엘 서적은 역사 및 전설의 출처를 모두 바탕으로 하며, 주로 신토노미에서 기술된 사건 이후 이스라엘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가나안인 파괴와 관련된 전투는 고고학 기록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이스라엘인 스스로가 가나안인 소그룹에서 비롯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76][77][78] 사무엘 서적은 너무 많은 시대착오적인 것들을 보여서 기원전 11세기에 편찬되지 못했다.[79] 예를 들어, 후대의 갑옷(1 사무엘 17:4–7, 38–39, 25:13), 낙타 사용(1 사무엘 30:17), 기병(전차와 구별되는 것)(1 사무엘 13:5, 2 사무엘 1:6), 철 픽과 축(2 사무엘 12:3), 정교한 포위 기술(2 사무엘 20:15), 등이 언급된다. 기원전 8세기 마지막 사분기의 이집트 제26왕조 이후 쿠시테스가 흔했던 날짜에 대한 증거를 분명히 제시하면서, 소집된 가관군 부대(2사뮤엘 17:1)와 2만 명의 사상자(2사뮤엘 18:7)와의 전투(2사무엘 18:7) 그리고 쿠시테 준군사관과 하인에 대한 언급이 있다.[79]

연합 군주제

현대 비판의 많은 초점은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기원전 10세기경 유대교와 사마리아를 지배했던 이스라엘의 연합왕정주의의 역사성이었다. 토마스 L. 예를 들어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 학자인 톰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전설들이 묘사하는 규모의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연합 군주제에 대한 증거도 없고, 예루살렘의 수도에 대한 증거도 없고, 팔레스타인 서부를 지배했던 어떤 일관성 있고 통일된 정치세력에 대한 증거도 없다. 우리는 사울, 다윗, 솔로몬이라는 왕들의 존재에 대한 증거도 없고,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성전에도 이런 초기의 증거도 없다. 우리가 10세기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 증거의 부족을 단지 고고학의 우연한 성질의 결과인 과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정보의 공백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10세기에 그러한 역사적 현실을 가리키는 공간도, 맥락도, 유물도, 기록물도 없다. 인구가 없는 국가를 역사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도시 없이는 수도를 말할 수 없다. 이야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기 시대 2a(군주기에 해당)에서 유다는 유대 언덕에 있는 작고, 대부분 시골이며, 불우한 정착촌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65] 이것은 도시화 되어가고 있던 위쪽 사마리아와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와 문자적 비판은 많은 현대 역사학자들이 이스라엘/사마리아 및 유다를 각각 세겜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뚜렷한 관련 단체로 취급하고 예루살렘에 수도를 둔 연합 왕국으로 취급하지 않게 만들었다.

유다에 위치한 철기 시대 유적지인 키르베트 콰이야파에서 발굴된 자료들은 영국 왕정 시대의 성서에 대한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스라엘 고대유물관리국은 “키르바트 케야파에서 발굴된 것은 기원전 11세기 후반 이미 유다에 존재했던 도시사회를 분명히 보여준다”고 밝혔다. 더 이상 유다 왕국이 기원전 8세기 후반이나 그 후기에만 발전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80]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의 위상은 주요 논쟁 대상이다.[65] 예루살렘의 가장 오래된 부분과 그 본래의 도시 중심부는 다윗 시로, 9세기까지 이스라엘인의 중요한 주거 활동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 하나의 구조를 형성한 계단식 석조구조와 큰 석조구조와 같은 독특한 행정구조에는 제1철에 기원을 둔 물질문화가 담겨 있다.[65] 기원전 10세기의 명백한 정착활동 부족에 대해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세기의 예루살렘은 국도가 아닌 유대 언덕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고 주장하고, 구시킨은 이 도시가 완전히 무인도였다고 주장한다. 아미하이 마자르는 (그가 믿는 대로) 다윗 시의 행정구조의 I/Iron IIA 연대가 맞다면, “예루살렘은 상당한 지역 정치의 중심지였을 수도 있는 강력한 성채를 가진 다소 작은 도시였다”[65]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 약 15-20번 정도 재건되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10세기 거주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쉽게 없어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은 철기 시대(아이언 IIb)의 후반부부터 중요한 건축물이 발견되었다고 지적한다.

이후로 텔 댄 태왕비의 발견은 9일에 또는 8세기로 기원전,”하우스 데이비드의”에 Judah[82][83]에서 군주의 왕조로 참고로 받아들여지(는 메사 석 비에 다른 가능한 참조 발생)[84]더mod 비록에 학자들, 대다수의 정치 형태를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다스려의 존재를 받아들이bytdwd이 들어 있는 데이트를 했어요. 규모 무엇 성경에 기술된 것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윗과 솔로몬이 시스요르단의 큰 부분과 아마도 트랜스요르단의 일부에 걸쳐 군림했다고 믿는다. [85] 윌리엄 G. 데버는 다윗이 이스라엘과 서안의 현 영토를 지배했을 뿐 침략한 블레셋을 물리친 것은 맞지만 다른 정복은 허구라고 주장한다.[86]

신약성서

예수님의 역사성

주요 기사: 예수님의 역사성

고대의 현대 학자들 대다수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것, 침례교 요한의 세례를 받고 로마의 판관 폰티우스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에 동의한다.[e] ‘역사적 예수님을 위한 질문’은 18세기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최근의 장학금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J. D.의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크로스언,[94] 제임스 D. G. 던,[95] 존 P. 마이어,[96] E. P. 샌더스[97], N. T. 라이트가[98] 가장 널리 읽히고 토론되었다. 그 문제에 관한 다른 작품들은 Dale Alison,[99] Bart D에 의해 출판되었다. 에르만,[100] 리처드 바크햄[101], 모리스 케이시.[102]

바울의 편지인 예수를 지칭하는 최초의 신약성서들은 대개 50년대 CE에 연대를 두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생애와 활동을 거의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것들이 예수의 목격자들로부터 바울에게 주어진 정보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것들은 예수의 삶에 대한 사실들을 결정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103]

사해 두루마기의 발견은 유대교 신앙의 다양성과 함께 기대와 가르침의 공유에 주목하면서 1세기 유대교 문맥에 빛을 발했다. 예를 들어 다가올 메시아에 대한 기대, 산 위에 대한 설교의 구태, 그리고 초기 기독교 운동의 많은 것들이 그 시대의 종말론적 유대교 안에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진다.[104] 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이전의 경우보다 훨씬 더 유대인의 뿌리 안에 집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현재 랍비니컬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66년에서 70년까지 유대인 반란이 일어날 때까지 살아남은 많은 가닥들 중 두 가닥에 불과하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105][106] 또한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할을 참조하라.

대부분의 역사 비평가들은 예수라는 이름의 역사적 인물이 갈릴리 시골 c. 30 CE에서 가르쳤으며,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초자연적인 행위를 했다고 믿었고, 로마인들에 의해, 아마도 반란을 위해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에 동의한다.[107]

복음서의 역사성

주요 기사: 복음서의 역사적 신뢰성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비록 “Q”, 로지아 또는 속담 복음서, 열정 계정 또는 기타 초기 문헌(복음서 목록 참조)과 같은 이전의 전통과 문헌에 기초하지만, 십자가에 못박힌 후 40~80년 [108]후 70~100년 사이에 성서 계정이 작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견해는 다른 학자들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 설명들은 증인에[109][110] 의해 편집되었다고 주장한다.[111]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 복음서가 예수의 시대에 유대에 있는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 문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징후를 나타낸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의견은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채 서술된 사건들과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모두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112][page needed][113][114] 그러나 의견은 다양하며 크레이그 블롬버그와 같은 학자들은 더 전통적인 관점을 받아들인다.[115] 어색하고 촌스럽다고 표현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마크의 복음서가 다소 문외한이나 심지어 조잡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116] 이는 낚시꾼인 성 베드로가 마크의 글에 끼친 영향 때문일 것이다.[117] 일반적으로 마태복음 및 루크복음서의 작가들이 마크를 출처로 삼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마커의 특이성과 부스러기가 변화하고 개선되었다.[116]

행위의 역사성

주요 기사: 사도행위의 역사적 신뢰성

고고학적 비문과 다른 독립된 자료들은 법이 관리들의 호칭, 행정 구역, 마을 집회,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신전의 규칙과 관련하여 1세기 사회의 몇 가지 정확한 세부사항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법전 묘사가 갖는 역사성은 논쟁의 대상이다. 행동들은 바울이 사실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자신을 묘사하는 방식과 다르게 바울을 묘사한다.[118] 율법, 바울 자신의 사도정신,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 등 중요한 문제에 관한 바울의 서한과는 행동이 다르다.[118]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법안의 그것보다 바울의 설명을 더 선호한다.[119]: 316 [120]: 10

고고학 및 역사사상의 학교

학술적 견해 개요

“성경의 기원은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다. 언제 쓰여졌지? 누가 그 곡을 썼습니까? 그리고 역사 기록으로서 얼마나 믿을 만한 일인가?”[121] 성경 본문의 교육을 받은 독서는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쓰여졌는지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많은 학자들은 오순절이 기원전 6세기 직후에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이 언제 쓰여졌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제안된 날짜는 기원전 15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다양하다. 한 가지 일반적인 가설은 요시야(기원전 7세기)를 가리킨다. 이 가설에서, 예를 들어, 엑소더스의 사건들은 마침내 편집되기 수 세기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이 주제는 성경과 교제하는 데까지 확대되어 있다.[citation needed]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성서적 증거 그 자체를 이용하여, 우리의 현재 버전이 잃어버린 오래된 문서 출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다큐멘터리 가설이다. 비록 수년에 걸쳐 크게 수정되었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가설의 어떤 형태를 받아들인다. 또한 이를 거부하는 학자도 다수 존재했으며, 예를 들어 이집트학자 케네스 키친과[122][123] 구약성경학자 월터 카이저 주니어는 [124]물론 R. N. Whybray, 움베르토 카수토, O. T. 알리스, 글리슨 아처, 존 세일해머,[125] 브루스 월트케 등이 있다.[126]

최대주의-최소주의 이분법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포로가 되기 전 성서 서술에서 언급된 사건들의 역사성에 대해 학술적으로 큰 논란이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근본적으로 아히스토리컬하다고 거부하는 학자들과 그것을 대체로 신뢰할 수 있는 역사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들, 즉 각각 성경적 미니멀리스트와 성경적 맥시멀리스트로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있다. 성서 장학금을 반대하는 두 학교로 나누는 것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이 분야를 양극화 논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로서 비근본주의적인 성서학자들의 강한 반감을 사고 있는데, 이 중 한쪽만 옳다.[127]

최근 막시말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의 차이는 줄어들었고, 새로운 학교는 이스라엘 역사탐구: 이스라엘 핀켈슈타인, 아미하이 마자르, 브라이언 B의 고고학과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 토론이라는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슈미트[128] 이 학교는 후처리 고고학이 미니멀리즘과 극대주의 사이의 중간지대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이 두 극단 모두 거부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고고학은 성서의 일부에 대한 확인과 일부에 의한 해석에 도전장을 내기도 하다. 그 증거를 면밀하게 살펴본 결과, 구약성서 제1부의 역사적 정확성이 요시야 시대에 가장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확성이 이 날짜로부터 더 뒤로 나아갈수록 더 많이 감소한다고 느낀다. 이는 본문의 중대한 수정사항이 그 날짜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citation needed]

성서 미니멀리즘

주요 기사: 성서 미니멀리즘

성경적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는 관점은 일반적으로 성경은 주로 신학적이고 사과적인 작품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은 아에티컬한 성격을 띠고 있다.[citation needed] 초기 이야기들은 수세기 후에 재구성된 역사적 근거를 가지기 위해 개최되며, 그 이야기들은 진실한 역사적 기억의 일부분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정의에 따르면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뒷받침되는 점들일 뿐이다. 이 견해에서 성경의 족장들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허구적이며, 족장들은 이후의 역사적 현실을 묘사하기 위한 전설적인 에피엠에 불과하다. 게다가, 성서 미니멀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의 12개 부족이 후대의 건설이었고, 다윗 왕과 사울 왕의 이야기는 후대의 이란-헬레니즘의 예를 본떠서 만들었으며, 이스라엘 연합이 유프라테스 왕국으로부터 제국을 지배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에일랏에게—존재했던 모든 것. 메사비석처럼 달리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우화적인 것으로 종종 거부된다.[citation needed]

언제 운동이 시작됐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1968년은 합리적인 날짜로 보인다. 올해 동안 코펜하겐에서 두 편의 수상 에세이가 쓰여졌다. 하나는 닐스 피터 렘체(Niels Peter Lemche)이고 다른 하나는 하이케 프리스(Heike Friis)가 쓴 에세이는 우리가 성경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재고하고 그것으로부터 역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주장했다.[129]

출판된 책에서, 성경적 미니멀리즘으로 알려진 현재의 사상의 학파의 초기 옹호자 중 한 명은 Giovanni Garbini, Storia e el’Israelle Antico (1986)로 고대 이스라엘에서 역사와 이념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발자국은 토마스 L을 따라갔다. 톰슨은 그의 장문의 이스라엘인 초기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헌 및 고고학적 출처(1992년)와 톰슨의 저서 P. R. 데이비스의 짧은 작품인 ‘고대 이스라엘을 찾아서'(1992년)에 명시되어 있다. 후자에서 데이비스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고고학적 유적으로만, 성경적 이스라엘은 경전으로만, 최근의 “고대 이스라엘” 재구성은 둘의 받아들일 수 없는 혼합물이라고 본다. 톰슨과 데이비스는 히브리 성경 전체를 바빌로니아 망명에서 돌아온 기원전 539년부터 성경이 배정하는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작은 공동체를 상상적으로 창조한 것으로 본다. 톰슨의 코펜하겐 대학의 동료 교수인 닐스 피터 렘체도 톰슨의 역사와 전통의 이스라엘인(1998년)을 포함해 톰슨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여러 타이틀을 따왔다. 같은 기관에 톰슨과 렘슈가 모두 존재하게 되면서 ‘코펜하겐 스쿨’이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다. 1992년부터 성서 미니멀리즘의 영향은 두 가지 이상의 관점을 가진 논쟁이었다.[135]

성서 최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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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포로가 되기 전에 성서 서술에서 언급된 사건들의 역사성에 대해 학술적으로 큰 논란이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에 대해, 최대주의 입장은 연합 왕정과 이스라엘의 초기 왕인 다윗과 사울의 설명은 대체로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입장이다.[136]

갈등 감소

2001년 이스라엘 핑켈슈타인과 닐 애셔 실버먼은 “발굴된 성경”을 출간했다. 고고학의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성서적 미니멀리즘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고 많은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소란을 일으켰다. 편집자 헤르셀 샨크는 성서고고고학 검토 25주년(2001년 3월/4월호)에서 선도적 미니멀리스트들이 이를 부정하고 “우리는 지금 모두 미니멀리스트”라는 주장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138]미니멀리즘이 죽어가고 있다고 주장한 몇몇 성경학자들의 말을 인용했다.[139]

자금이 넉넉한 (그리고 근본주의자인) “성경 고고학자”를 제외하면, 우리는 사실상 거의 모든 “소수주의자”이다. — Philip Davies.[140]

사실은 우리 모두는 미니멀리스트라는 것이다. 적어도 가부장적 시기와 정착에 관한 한 말이다. 내가 30여 년 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그 땅의 통일된 정복과 마찬가지로 족장들의 “실질적인 역사성”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요즘은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을 찾기가 꽤 어렵다.

사실, 최근까지 나는 웰하우젠 이후 이스라엘의 ‘최대주의자’ 역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최대론자’는 잘못된 것으로 증명될 수 없는 한 성서의 본문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널리 규정되어 왔다. 만일 그렇다면, 방금 주어진 정의에 따라 역사가 최대주의자가 아닌 존 브라이트(1980년)조차 이렇게 기꺼이 운용하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 Lester L. Grabbe.

2003년, 보다 극대화된 관점을 채택한 학자 케네스 키친은 ‘구약성서의 신뢰성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키친은 토라의 많은 (전부는 아니지만) 부분의 신뢰성을 주창했고, 확실한 말로 핀켈슈타인과 실베르만의 작품을 비판했는데, 그 이후 핀켈슈타인은 이에 대해 대응해 왔다.[citation needed]

제니퍼 월리스가 2006년 5월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에 실린 “성지에서의 그라운드”라는 글에서 고고학자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현재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로서, 기원전 13세기 말에 조슈아가 해고했어야 할 도시들 중 많은 수가 그 때까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 헤이저는 그 세기 중반에 멸망했고, 아이도 기원전 2000년 이전에 버림받았다. 심지어 조슈아가 나팔을 불면서 도시를 7바퀴 돌면서 성벽이 무너졌다고 전해지는 예리코(Tell es-Sultan)도 기원전 1500년에 파괴되었다. 현재 팔레스타인 당국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예리코 유적지는 한 세기 동안의 무과실 발굴을 증명하는 부서진 구덩이와 참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일부 최대주의자들은 이집트 제국이 13세기가 아닌 가나안을 지배하게 된 무렵인 2천년 중반에 여호수아를 핀켈슈타인이나 키친의 주장처럼 배치하고, 그 시대의 파괴 층을 성서적 설명의 확증이라고 본다. 13세기 중엽 하소르의 파괴는 법관록에 기록된 데보라와 바락이 수행한 후기 파괴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확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핀켈슈타인이 ‘아이’로 지칭하는 위치는 일반적으로 성서 아이(Ai)가 3천년에 파괴돼 매장된 곳으로 치부된다. 그 유명한 사이트는 적어도 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헬레니즘 시대부터 그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미니멀리스트들은 모두 이 사건들을 동시대로 연애를 하는 것은 그들이 보고한다고 주장하는 사건들이 있은 지 수 세기 후에 쓰여진 에티컬적인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핀켈슈타인과 실베르만 모두 다윗과 솔로몬이 기원전 10세기경 유다에서 온 진짜 현존하는 인물(왕들이 아니라 도적지도자나 산간지방 족장)[143][144]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예루살렘에 수도가 있는 연합왕정 같은 것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145]

성경은 아합과 동시대인인 여호사밧이 시리아와의 북부 왕국의 전쟁을 위해 인력과 말을 제공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아합왕의 누이 또는 딸인 이스라엘 공주 아달랴가 여호사밧(2왕 8:18)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하여 북방 왕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집은 이제 이스라엘 왕족인 사마리아 왕족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이 유다와의 결혼에 의한 북한의 인수를 의미한다고 제안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다윗이 추정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기원전 9세기에 우리는 마침내 시리아와 트랜스조단의 상당한 정복 영토를 가진 북쪽의 단에서 남쪽의 브레세바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합 군주제의 역사적 존재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통일된 군주국, 즉 진정한 통합 군주국은 다비디데스가 아닌 오므라이데스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닌 사마리아였다. — Israel Finkelstein and Neil Asher Silberman[146]

데이비드 구시슈킨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성서적으로 묘사된 연합 왕정을 따르는 사람들은 제한된 증거에 근거하여 그렇게 하는 반면, 미래에 실질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한다.[147] 군나르 레만은 데이빗과 솔로몬이 어느 정도 중요한 지역 족장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여전히 있으며, 당시 예루살렘은 기껏해야 부족 친족 집단들의 동맹이 사회의 기초를 형성한 인구 드문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나아가 그것이 기껏해야 작은 지역 중심지였다고 주장하는데, 유다 영토의 3~4개 중 하나였고, 다윗이나 솔로몬도 성경에 묘사된 제국을 통치할 인력이나 필요한 사회/정치/행정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148]

이러한 견해들은 윌리엄 G에 의해 강하게 비판된다. 드버, 헬가 웨이퍼트, 아미하이 마자르, 암논 벤토르.

고대 이스라엘에 있는 안드레 르메르 주: 아브라함에서 로마 사원의 파괴에 이르기까지, 솔로몬이 작은 도시국가보다는 비교적 부유한 ‘미니 엠파이어’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케네스 키친도 일반적으로 솔로몬과 함께 성경적 전통의 주제가 신뢰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핀켈슈타인은 보다 보수적인 아미하이 마자르와 함께 합의와 이견의 영역을 탐색하고 있으며, 이른바 미니멀리즘과 최대주의 학자들 사이의 논쟁의 강도가 줄어들고 있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128] 이 견해는 리차드 S에 의해서도 취해진다. Hess,[151] 이것은 사실 최대주의자와 미니멀리스트 사이에 다수의 관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잭 카길[152] 교수는 인기 있는 교과서가 독자들에게 최신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올바르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메건 무어 비숍과 브래드 E. 켈은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2011년까지의 기간 동안 각각 진화하는 접근법과 수행자 논란에 대한 개요를 그들의 책 성서적 역사와 이스라엘의 과거에서 제공한다.

참고 항목

메모들

^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성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의 상당 부분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한 가지 중요한 문제, 즉 이스라엘의 기원, 즉 이집트의 노예제 시대, 이스라엘 노예들의 이집트로부터의 집단 이탈,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한 가나안 땅의 격렬한 정복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성서적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희박한 간접 증거가 있으며, 정복에 있어서는 그에 반하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 강한 의견의 일치다. — Peter Enns. ^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히브리 성경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고고학적 증거의 많은 부분이 증명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 장소, 사물들은 언젠가는 존재했을 것이다. — Jonathan Michael Golden. ^ 그러나 누군가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구면이라는 것을 들고 있는 자들과 성경이 반대하지 않느냐 ? 천국이 살갗처럼 뻗어나가는 자들과 반대하지 않느냐 ? 그들의 진술이 거짓이라면 정말 반대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로 그들의 교리를 확립할 수 있다면, 우리는 피부에 관한 이 성경의 진술이 그들의 결론의 진실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 Davis Young. ^ “출애굽기가 성경에 기술된 방식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서술이 역사적 핵심을 가지고 있고, 고지대 정착민들 중 일부는 이집트에서 어떤 식으로든 왔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아카이아학은 역사성이나 e에 대한 논쟁에 실제로 기여하지는 않는다. 출애굽기 그 자체의 역사적 배경은 훌륭하지만, 실제로 그런 집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출애굽기 이야기를 모든 이스라엘에 기여했다. 필자는 그러한 집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집단기억의 발전과 본문(및 그들의 편집과정)의 저자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고고학은 불행히도 이 이스라엘 조상의 특정 집단의 연구에 직접 기여할 수 없다( Yet?).” ^ 바트 에르만은 2011년 현대 장학금 현황 리뷰에서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사실상 모든 유능한 고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그는 분명히 존재했다”[87]고 썼다. 리처드 A. 버릿지는 “예수는 교회의 상상의 산물이며, 예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하는 존경할 만한 비판적인 학자를 알지 못한다고 말해야겠다.”[88] 로버트 M. 프라이스는 예수가 존재했다고는 믿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이 대다수의 학자들의 견해에 어긋난다는 데 동의한다.[89] 제임스 D. G. 던은 예수의 존재하지 않는 이론을 “완전히 죽은 논문”[90]이라고 부른다. 마이클 그랜트(고전주의자)는 1977년 “최근 몇 년간 ‘심각한 학자가 예수의 비역사성을 감히 상정하지 못했다’거나 적어도 극소수만이 감히 예수의 비역사성을 상정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훨씬 강력하고, 실제로 매우 풍부한 증거를 처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썼다.[91] 로버트 E. 반보스트는 성서학자들과 고전사학자들은 예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한다. 데일리 야수, 칸디다 모스, 조엘 바덴에 쓴 글에는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사실 진짜 남자였다는 데 거의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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