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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금호동성당 사순음악피정
12-주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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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무위키:대문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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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를 아십니까? < 신학 < 기사본문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를 아십니까? 예수의 마지막 말에 대한 탐구. 기자명 이석희; 승인 2009.03.25 18:09. 바로가기 복사하기 본문 글씨 줄이기
Source: newsnjoy.or.kr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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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3월 31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친 이유
찬송 : ‘만왕의 왕 내 주께서’ 151장(통 138) ·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본문 : 마태복음 27장 45~50절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8/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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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에 대한 이해
#마태복음 27:46 ·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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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승 칼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기독일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군에 속한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
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5/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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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리폼드 투데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
Source: www.reformedtoday.net
Date Published: 4/7/2021
View: 8366
[권혁승 칼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크리스천투데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군에 속한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1/6/2022
View: 6158
가상칠언(4)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씀은 신비롭고 기이하여 자칫 오해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는 어떤 뜻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5/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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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 다니
- Author: Michael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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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7. 5.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d6IAPn0HbhM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를 아십니까?
버림 당한 예수 이야기, 마지막 말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바크다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는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를 인용해 말했다. 그는 시편 22편 1절 다윗의 기도를 자신이 죽기 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인용하며 숨을 거둔다. 이 구절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음역 때문에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만이 쓰고 있다. 즉 ‘다윗의 시’로 나타난 히브리어 문장 중 예수는 시편 22편 1절을 히브리어 그대로 발음했던 것이다. 윗 문장은 히브리어를 읽는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Father’를 한국식으로 말하면 ‘파더’라고 하듯 ‘Father’를 한국식 발음 ‘파더’라고 복음서 기자는 발음 그대로 적은 것이다.
어느 날 나의 책을 편집하다 한 전화를 받았다. 저를 위해 늘 기도해주시는 안양에서 부동산을 하시는 한 아주머님이었다. 나는 늘 그분을 “어머님”이라고 불렀다. 그 어머님은 늘 나의 신앙 상태를 체크하고 “기도를 더 해보세요!”, “하루에 세 번씩 예배를 드리세요”라고 맑은 목소리로 충고했고 그때 마다 나는 그 말을 실천하려 고군분투한다.
그분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은 미국 보스턴대학교에 의예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학과에서 톱이 되었다. 연일 주목 받는 마른 체격의 꼬마 아이에게 뿜어져 나오는 맑은 두뇌와 영혼은 그 어머님과 무척 닮았다. 교만이라고는 전혀 없이 늘 겸손함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삶을 즐기는 그녀에게는 딸을 대하듯 나를 아들처럼 좋아해주시고 전화한다. 그래서 늘 고맙다.
미국에서 늘 통화하던 그 작은 딸이 엄마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엄마! 혹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묻자 어머님은 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대답했다고 한다. 보스턴에 있는 딸아이는 “예수가 한 말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인지 혹은 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목사님이랑 전도사님도 그 의미를 진정 알지 못해요”라고 말했다고 그 어머님은 내게 전했다. 난 불현듯 그 꼬마 숙녀의 안타깝고 가냘픈 목소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혹시 그 구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려 줄 수 있어요?”라고 어머님은 내게 물었다. 나도 그러한 과제로 과거 10대, 20대에 끊임없이 고민했으나 늘 제자리였고 헛수고했다. 누구 하나 정확한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스턴에 있는 그 꼬마 숙녀 역시 나와 같은 번민에 쌓여 있던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어머님에게 “시편 22편에 대해 읽어 보시면 대답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 다시 전화 한 결과, 시편 22편의 의미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했고 미국에 있는 꼬마 숙녀에게 편지를 다시 보냈다고 했다.
사실 그에 대한 정확한 해설을 하는 곳은 전무했다고 해야 할까? 불과 얼마 전 나 역시 그 문제로 성경 복음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주석과 다양한 경로로 그 의미를 추적하기도 했다. 보다 정확한 주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문이 많았던 대학교 시절에는 주석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고 그만큼 정보가 부족했다. 정확한 의미를 말하는 곳은 없었다.
이러한 대학생 시절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전화를 끊은 후 난 과거를 생각하며 해답을 다시 찾았다. 과거의 의문점을 시작으로 단서를 찾는 탐정처럼 구약과 신약을 넘나들었다. 적어도 내게 있는 단지 몇몇 주석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실로 예수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가장 필요한 시간에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데 대한 절대 고독감과 심각한 위기적 심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가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고 무거운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호크마 주석의 ‘마 27:46’ 일부분 –
“마가는 십자가 위에서 외치는 일곱 마디 말씀 중 오직 한 마디 말씀만 기록해 놓았다. 이 외침은 예수가 단순히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 것도 아니다. 예수의 부르짖음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법적인 의미에서 버림을 받았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호크마 주석의 ‘막 15: 34’ 일부분-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모든 조롱과 멸시와 침 뱉음을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시편 22:6절은 조롱 받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 그레이스 종합 주석의 ‘마가복음 제 28강’ 일부분 –
마가는 이 장면을 써 넣으면서 다음 구절에 넣을 다양한 자들의 반응을 생각한 듯하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를 부른다”(막 15:35)고 말하고 다른 자는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 끝에 꿰어 마시게 하려고 했다. 그만큼 십자가의 높이는 갈대를 올려야 할 정도로, 땅에서 2~3피트 위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들의 행위를 막고 제동을 걸며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주는지 보자”라고 예수의 구원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예수는 큰 소리를 지르고 돌아가셨다. 마태복음 저자는 “그의 영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가 죽자 바로 예루살렘의 거룩한 장소인 ‘성소’가 둘로 쪼개지는 이적이 나타나고 백부장 역시 이러한 기이한 일을 지켜보다가 예수의 사건에 심히 두려워하여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말이다. 성소뿐만 아니라 당시 무덤들이 열렸고 잔다고 표현하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니 두려울 수밖에.
이렇게 당시 예수의 죽음을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 복음서의 저자처럼 오늘날 예수의 말 한마디에 다양한 의미와 목마름이 존재한다. 그의 마지막 말을 놓고 그를 ‘실패했다는 인간 중에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반대로 그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오히려 칭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진정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마음속에 그가 진정 구약에서 말한 ‘메시아’이며 ‘인자’임은 부인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외침은 예수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의 신음 소리를 마치 하나님이 그를 버린 듯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응답이 없다는 것은 곧 기도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있고, 오히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점은 버림을 받았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 앞 십자가의 예수는 죽었다. 이 사건을 바라본 유대인들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했다.
예수를 본 자들은 다 그를 비웃었으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건져주실 것 아닌가?”(시 22:8)라는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예수가 죽어가면서 그렇게 말하는 대목은 자신의 전 ‘삶’과 ‘여생’을 시편 22편의 문장들 속에 담아 두어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참된 의미를 전달하고자 예수의 버림에 대한 문장이 시편 22편에 담겨 있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어났다.
예수를 미워하는 자들이 피를 빼버리는 드라큘라처럼 혹은 입을 벌려 달려드는 사자처럼, 그에게 달려들어 무언가를 노리기 시작한다. 결국 그의 피와 물은 땅 아래로 흡수되었고 예수의 마음이 밀랍 인형 같이 녹아버리며 혀가 입천장에 떡하니 붙어 말 한마디 못하는 그의 심정을 표현한 문장이 시편 22편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시 22:15) 혹은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22:19)라고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과 동일하게 여기기에, 그 시편 22장 1절을 인용하였다고 확신한다. 시편 기자와 예수 모두 하나님에게 철저히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주 철저히 말이다. 사실은 예수가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올바른 바이다.
그래야만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우리가 그를 찬송할 수 있다. 십자가 죽음을 회피하여 그가 버림받지 않았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결코 성취되지 못 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지 못할 뻔 했다. 그가 죽었기에 우리는 살았고 그가 자신의 길을 피해갔다면 우리는 진정 죽은 목숨이다.
다른 주석들처럼 만약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예수가 우리 안에 결코 존재하지 못할 근거가 제공되는 셈이다. 시편 22편 저자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하나님께 하소연 한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품에서 자랐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미 조상들의 구원의 은총을 힘입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버리기 시작한다.
구약의 유대인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예언자들처럼, 예수도 철저히 버림을 받았다. 그것이 하나님 계획의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내버려 두어야 했다. 그 하나님은 얼마나 아파하였을까? 버리고 싶은 자식 하나 없듯이 열 손가락 깨물면 안 아픈 데가 없다. 세상을 임대하여 정복하고 다스리라 명령하였거늘 이들은 자기 잇속만 채우며 하나님을 등졌고 그 결과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인 자신의 아들을 땅 아래로 보내는 것을 허락해야 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신의 아들을 버리지 않으면 세상을 자신의 품으로 돌이키지 못함을 아시고 자신의 아들까지 버려야 했다.
이는 가슴 아픈 일이다. 부모의 심정처럼 버리고 싶지 않은데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너무 가슴을 저민다.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 예수가 구약의 예언을 모두 이루었고 성취하였기에 우리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버리는 대신 연약하고 두 마음을 품은 우리를 받아 들였다. 또한 그로 인해 역할을 완수하고 돌아온 예수 자신의 아들도 다시 얻는다.
역사가 시작되면서 하나님도 우리를 받아들이기 싫은 적이 많았다. 구약을 보면 늘 방탕한 나그네처럼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어 이방신을 섬기고 본래의 아버지를 잊어버린다. 그렇다고 본래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이방신과 여호와 하나님 두 신을 동시에 섬기는 교활한 자로 전락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땅 위에 살고 있기에 잠시 발을 담그는 것은 용납할 수도 있다는 두 마음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둘로 쪼개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고 이내 우리를 향해 화를 버럭 내신다 해도 별로 나쁠 것 없다. 그런 적도 한두 번 아니다.
그럼에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선사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는 구약의 ‘예언과 언약’과 ‘저주와 핍박’을 동시에 바라보게 하였다. 그 결과 시편 22편을 지은 저자의 마지막 구절에 도달하면서 그러한 ‘저주와 버림’에 관련한 사실들은 뒤엎고 반전을 거듭한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 22:27~28) 이 말이 참 내게 가슴으로 와 닿는다. 시편 저자는 버림받았던 과거의 씻을 수 없는 기억의 상처를 덮어 이제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나라 백성들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예배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상상으로 이제 시편의 저자는 세상이 풍요롭고, 걱정과 근심 없이 살아가는 최고의 모습을 본 듯하다. 이 마음을 예수는 보았을 것이다. 그는 미래를 볼 줄 알았다. 자신이 이룩하고자 했던 목표도 알고 있었다. 예수가 이룩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라는 시편의 마음과 동일하다. 그가 이룩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 마음이었기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땅에서의 이룩함’이 동일시되어 기도 제목이 이루어진다.
시편 저자는 그의 나라를 이룩하고자 야곱의 모든 자손들에게 “하나님께 찬송하고 그를 경외하자”고 부탁한다.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고 격려한다. 그 이룩하려는 목표의 희생양이 바로 시편의 저자가 언급한 여호와를 향한 마음이다. 그는 희생양으로 세상을 이길 한 인자를 지목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는 고백처럼 예수는 이제 울부짖었고, 자신의 일을 마치자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신 결과,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을 따를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그래서 시편 22편 마지막 대목에서는 이제 완성을 나타낸다. 저자는 누군가가 이 땅 위에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하였고, 이윽고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라며 십자가의 완성을 이룩하였다는 것을 ‘예수의 삶과 부활’에서 엿볼 수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의미는 무엇인가? * 처음부터 힘든 나날들을 지내며 인정받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는다.
* 허물이 없다는 예수께서 우리 모두의 고통과 아픔을 멀리 던지셨다.
*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나 죽음의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셨다.
* 피조물에게 비난과 모욕을 인내하면서 목표를 이루고자 참아냈다.
* 모든 것을 이루고 백성들이 자신을 위해 예배하게 된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 (실수 하는 것은 인간이고, 용서 하는 것은 신이다)
– Alexander Pope (알렉산더 퍼프, 1688~1744, 영국 시인이자 비평가 )
[가정예배 365-3월 31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친 이유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 어떤 이들은 육체적 고통이 너무 커서 이렇게 외쳤다고 해석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의 단절이 너무 고통스러워 외쳤다고 해석합니다. 여러 가지 해석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많은 이들이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절망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시편 22편을 알면 이런 오해가 풀립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1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6~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18절) 등 시편 22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욕적인 사건을 미리 예언하듯이 너무나 정확하게 똑같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듣는 순간 구약에 정통한 이스라엘 사람은 자연스럽게 시편 22편 전체를 떠올립니다. 반면 시편 22편 후반부는 전반부의 절망적인 분위기와 완전히 반대 내용이 나옵니다. 27~29절 말씀은 “온 세상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에게 돌아올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그를 경배하리라. 여호와는 왕이시므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신다. 세상의 모든 교만한 자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며 자기 생명을 살리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모든 인류가 그에게 경배하리라”고 합니다.예수님은 절망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친 것이 아닙니다. 시편 22편 후반부의 밝은 미래, 앞으로 올 소망을 보여주기 위해 이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 사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노래하다 절명하셨습니다.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소망을 노래하고 희망을 전파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낙망을 노래하고 절망을 전파하는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조용한 성격을 넘어 천성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문제를 잘 집어내고, 부족한 부분을 잘 보는 날카로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유전적 기질을 가졌든 하나님께선 우리가 절망 가운데 희망을, 낙담 가운데 소망을 선포하는 삶을 살길 소망하십니다.기도 : 십자가 위에서조차 희망을 선포하신 예수님, 우리도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낙담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소망을 선포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주기도문박현욱 목사(수원창대교회)
예수님의 기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에 대한 이해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편 22편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신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아람어 육성 구절들을 다양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상7언 중 하나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역시 예수님이 아람어로 발언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마태, 마가의 본문을 살펴보면 헬라어 문장으로는 세부사항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원문인 헬라어 본문으로 직접 살펴 보겠습니다.
[권혁승 칼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시간대별로 구성된 가상칠언의 구조적 특징은 첫 세 말씀과 마지막 세 말씀이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앞부분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면, 뒷부분은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 말씀이다.
첫 번째 말씀인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두 번째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보라 네 어머니라”는 가족인 어머니와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마지막 세 말씀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다. 다섯 번째인 “내가 목마르다”는 육체과 관련된 것이고, 여섯 번째인 “다 이루었다”는 삶의 목적과 관련된 문제이며, 마지막 일곱 번째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이들 두 종류의 말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네 번째 가상칠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대칭구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 말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군에 속한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네 번째 가상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중심단어, 곧 ‘버렸다’와 ‘어찌하여’의 정확한 의미 파악이 필요하다.
첫째로 ‘버렸다’로 번역되는 아람어 ‘사박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이다. ‘아자브’는 ‘내어버리다’는 뜻인데, 단순한 내어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께 완전히 등을 돌리셨고, 예수께서는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용어 대신 ‘하나님’을 사용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라면 ‘하나님’은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지금 예수께서 부르짖고 있는 탄식의 상대인 하나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개인적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적인 엄정한 관계가 우선하는 분위기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께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리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기 위함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예수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둘째로, ‘어찌하여’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어찌하여’는 예수께서 사실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강조되었던 것이라 매우 잘 알고 있는 자명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누군가가 남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대속의 원리도 잘 알고 계셨다. 매년 대속죄일마다 한 마리 양을 아사셀 양으로 삼아 사막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잘 알고 계셨다. 지금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 일을 직접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어찌하여’라고 물으신 것일까? 히브리어에는 두 종류의 의문문이 있다. 하나는 몰라서 묻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의문사는 ‘왜’라고 번역되는 ‘마두아’이다. ‘안다’라는 뜻의 ‘야다아’에서 파생된 ‘마두아’는, 사실을 알고 싶어서 물을 때 사용한다. 또 다른 의문문은 내용은 잘 알면서도 더 깊은 차원의 이유를 알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사용되는 의문사는 ‘라마’이다. ‘라마’는 ‘라’와 ‘마’의 결합인데, 히브리어 ‘라’는 ‘for’로 번역되는 전치사이고 ‘마’는 ‘what’으로 번역되는 의문사이다. 그러므로 ‘라마’는 ‘for what?’이란 뜻이다.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찌하여’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현재의 그 일에 대한 동의와 인정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자신에게는 일시적인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일로 인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지는 죄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내다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평생 동안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 일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외친 ‘어찌하여’ 속에는 인간 구원과 그 결과로 주어질 복에 대한 선언과 찬양이 함께 담겨 있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 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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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가상칠언(架上七言, Seven Words from the Cross) 중 네 번째 말씀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당시에 듣던 유태인들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가상칠언을 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있을까? 공관복음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제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직접 증언할 제자는 없을 것 같은데,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십자가 밑에서 있었던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요 19, 26-27, 28, 30, 셋째 말씀, 다섯째 말씀, 여섯째 말씀).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는 년도는 AD 30년(33세) 4월로 추정하고 있으며,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을 때에, 십자가 주변에 있던 유태인들은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마 27:47, 막 15:35) 하였다. 즉 당시 유태인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사도 요한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후일에 그 해석을 알았기 때문에, 바로 그 말씀 뒤에 해석을 부가하였다. 그러나 그 해석을 듣지 못한 유태인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먼저 역사적 예수의 발언을 들은 당시 유태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였다면 결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관용을 외쳤는데, 관용의 시대가 된 우리시대에는 이해가 되지 않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관용이 전혀 없다.
“인간 언어는 해석될 수 있다(language universality)”는 기본 전제가 성립될 수 있을까? 신비 언어, 계시 언어는 인간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 이성으로 계시 언어는 해석할 수 없다.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는 성경해석에 특수 해석학을 제언하였다. 인간이 계시로 습득된 언어를 전달할 때에 계시를 받은 자 외에 자연 이성으로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1세기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언어학이나 기술이 발달해도 계시 언어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사실과 진술(주장)이 일치하지 않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실을 진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인간은 사실을 진술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다. 인간이 사실을 습득하여, 그것을 전달할 때에는 그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론에서는 사실과 진술의 일치를 결정할 때가 있는데, 그러한 해석이 문자 계승이다. 문자를 그대로 습득하는 방식을 성경 해석에서는 많은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진술하셨다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접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우리가 얻은 임마누엘도 결코 떨어지지 않은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실(아버지께서 버리지 않으심)과 다른 진술(버리셨나이까?=버리셨음)을 하셨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신 것인가? 인간 언어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이 아니라, 진리와 감동을 전달하는 기능이다. 예수께서 자기가 버림받으심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이 속죄제물이 되심을 알리시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께서 어린양으로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지 않음으로 주해하였다. 예수께서 속죄제물이 되시는 단독의 형태는 구주는 오직 주 예수라는 것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예수를 AD 1-30년까지로 제정하였다. AD 1-30년은 쉬운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30년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AD 30년으로 십자가를 규정하지만, 탄생년도는 BC 4년이기 때문이다. AD 1-30년으로 신학을 할 때에는 복음서의 90%는 해당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가 진짜 예수 탐구를 위해서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선언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예수의 유기를 위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인용하는데(막 15:34, 『교회 교의학』 IV/1(화해론), §. 57)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성경(마가복음 15:34) 진술을 사실로 수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 진술을 사실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증거하는 진리로 수용한다.
사실에 근거한 진술이 진리를 증거할 수 있다. 허구를 근거한 진리 전달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 진술을 사실 묘사로 보지 않고 계시로 평가한다. 계시에 근거하지 않은 진리 체계에는 가변성을 두지만, 진리에 근거한 진리에는 불변성을 둔다. 즉 우리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증거하지 않고, 계시에 근거하여 진리를 증거한다. 사실에 근거해서 전달한다는 주장은 선한 양심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전달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우리가 사실, 선한 양심이라는 것은 타인을 해칠 목적이나 자기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술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뜻은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심을 외치는 시편 22편의 말씀의 성취를 선언하신 것이다. 죽음에 임박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심을 신원하는 것을 위로하시며, 결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웅변하신 복음이다. 그 일을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직접 죽음에 직면하셔서 유태인에게 외치셨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엘리야를 부른다고 잘못 이해하였다. 지금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고 오해한다. 속죄제물이신 어린양께서 처참하게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죄를 향해서 진노하심의 엄중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며, 그 죄인인 당사자를 구원한 구주의 이름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선언하는 말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읽고 들은 사람은 자기 구주의 이름을 알며,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제물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오직 주의 십자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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