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프 역사 | [골프] 골프의 역사와 그 시작 #2.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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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골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0년, 즉 고종 37년 황실의 고문으로 온 영국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원산 바닷가의 세관 구내에서 6홀의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겼는데, 이후 1927년에는 서울 컨트리 클럽의 기초가 마련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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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GOLF)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요?
골프는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봅니다.
골프에 대한 기원과 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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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자료실 | 중문골프클럽 | 한국관광공사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는 연덕춘(延德春)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7세 때부터 골프를 배웠으며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서 골프수업을 받고 3년 만에 일본 오픈경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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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jungmungolf.visitkorea.or.kr

Date Published: 10/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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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프 역사 – 네이버 블로그

한국의 골프 역사 · 년 조선철도국에 의해서 효창원 내 · 홀 규모의 골프코스인 경성 골프 구락부가 처음 개설된 것을 국내 골프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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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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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프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 FT스포츠

해외에서 시작된 골프가 어떻게 한국에서 시작되고 인기를 얻었을까라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의 골프는 1983년 정부 세관 관리로 영국인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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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ftimes.kr

Date Published: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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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2 한국 골프의 역사

도입· 보급. ❖ 골프라는 형식과 거의 비슷한 “격방”이라. 는 전통놀이는 조선시대 초부터 성종에 이르기까. 지 왕실에서 행해짐. Ⅱ. 한국 Golf 의 역사[1]-개화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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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kocw.net

Date Published: 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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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골프장 100년 역사의 궁금증이 풀리다 – 골프산업신문

한국 근대 스포츠사학자 손환 교수(중앙대 체육교육과)가 한반도 골프장의 효시와 역사를 정리한 ‘한국 골프의 탄생’을 출간(도서출판 민속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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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lfin.co.kr

Date Published: 3/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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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프역사 3회] 대한민국 골프 140년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우리나라에 골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80년대 영국인에 의해서였다. 1880년 원산항이 개항되자, 영국인들이 중국의 세관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18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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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golftimes.co.kr

Date Published: 4/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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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프역사 – 우리나라 골프장 원조(元祖)는 어디일까?

1896년 당시의 강원도 원산에 영국인들이 세웠던 최초 6홀 규모 골프코스가 있었다고 하며, 1921년 정조대왕 3남 문효세자의 능터인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 건설된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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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ldagenews.bstorm.co.kr

Date Published: 2/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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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역사 – (주)골프코스디자인그룹 뷰

1953년 11월11일 발족했던 서울 컨트리클럽은, 한국의 골프를 본궤도에 올려 놓으려는 10여년간의 끈질긴 추진으로, 많은 역경과 우여곡절 끝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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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gca.com

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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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프 역사 116년 조망

한국 골프 역사 116년 조망. 원산에 상주했던 영국인들이 1897년 유목산 중턱에 6홀 규모 간이 코스. 만든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코스로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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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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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골프의 역사와 그 시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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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한국 골프 역사

  • Author: 골프타임 Golf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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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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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상화

다음은 골프의 역사에 관한 설명이다.

골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네덜란드의 아이스하키 비슷한 놀이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늘날과 같이 골프가 조직화된 것은 15세기 무렵으로, 1860년 영국에서 선수권대회가 열렸으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한국에 골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0년, 즉 고종 37년 황실의 고문으로 온 영국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원산 바닷가의 세관 구내에서 6홀의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겼는데, 이후 1927년에는 서울 컨트리 클럽의 기초가 마련되기도 했다.

골프는 그동안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서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들어 박세리 선수의 세계적인 명성과 활약으로 차츰 대중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박세리 선수는 골프를 통하여 국위를 널리 선양한 면이 있으며,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세계 무대에서의 활약이라는 희망과 꿈을 심어 줌으로써 미국 메이저 리그의 박찬호 선수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남자 골프는 아직도 세계 무대에서의 활약이 미진하며, 미국의 타이거 우즈 선수가 인기나 성적면에서 거의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한국에도 김종덕·최경주 선수 같은 프로골퍼가 있어 그 활약상이 기대되며, 여자 선수로는 박세리 외에도 박지은, 김미현, 재미동포 펄신 등의 활약이 기대된다. 1996년 국내 프로골퍼로 데뷔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 박세리 선수는 불과 1년여 만에 1997년 미국LPGA(여자 프로골프협회) 프로테스트 예선에서 본선 1위를 차지하였으며, 1998년 5월 미국 LPGA 우승, 7월 US 여자오픈, 자이언트 이글클래식 우승 등 무려 4개 대회를 석권하며 골프 여왕으로 떠올랐다. 이어 박세리는 1999년 11월 15일 끝난 금세기 마지막 LPGA투어 공식대회(페이지넷 투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1999년에도 4승을 기록, 2년 연속 4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슈퍼땅콩’ 김미현 선수는 1999년 9월 7일 미국 LPGA투어 스테이트 팜레일 클래식에서 당당히 우승함으로써 올시즌 신인왕을 확정지은 데 이어 10월 11일 베이싱 클래식에서도 우승, 데뷔 첫해에 2승을 기록하면서 또 하나의 ‘골프여왕’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한국의 골프 역사

(사진출처 : 중앙일보)

세계대전과 6.25를 거치며 국내 골프코스는 식량 확보를 위한 농경지, 또는 비행장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폐장과 복구를 반복하였습니다. 이후 1953년 ‘서울컨트리구락부’ 창설, 1954년 ‘대통령배 한국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대회’와 오픈 경기의 효시인 ‘한국 골프 선수권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 골프는 본격적인 발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59년 ‘한국골프협회’가 설립되었으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의 해산 지시로 한국골프협회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지게 되었으며, 1965년에 이르러서야 한국골프협회는 정식으로 출범하였고, ‘국제골프연맹’과 ‘아시아 아마추어골프연맹’에 가입함으로써 국제 골프계와의 교류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 약 20개의 골프장이 새롭게 개장하면서 서울, 부산 중심에서 수도권 및 전국으로 골프가 확산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계기로 골프장 설립에 대한 인허가 조건이 완화되어 골프장은 양적인 성장과 함께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0년대에는 골프장 취득세 인하, 외국인 골프장 투자 허용, 골프장 이용요금 자율화 등 제도적 지원으로 골프장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으며, 국내 선수들의 각종 해외 대회 우승으로 한국 골프에 대한 인지도도 크게 상승하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세계 골프 무대를 이끌 정도로 큰 선전을 지속하고 있는 한국 남여 골퍼의 수가 급증하며 이를 따라 골프에 입문하는 주니어 선수들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축 골프장이 급증하면서 골프 수요에 비해 공급이 초과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에 골프장 부킹이 과거보다 용이해지면서 골프비용도 하락하여 골프 인구는 점점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골프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라는 과거 인식은 점차 약해지고 있으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나아가 국민체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료출처 :데카시스템 사업보고서 중)

한국의 골프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해외에서 시작된 골프가 어떻게 한국에서 시작되고 인기를 얻었을까라고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의 골프는 1983년 정부 세관 관리로 영국인들이 고용되면서 원산 바닷가에 있는 세관 구내에 6홀의 코스를 만들어 경기를 한 것이 시초이기 때문에 원산 골프코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1905년 세관업무가 일본으로 이관되면서 서양인들이 관리를 철수했고 영국인이 지냈던 주택에서 신문지에 포장된 여러 개의 낡은 골프채가 발견되었고, 1920년 대한 암흑기에 경성 골프 구락부의 회원이었던 일본 골프 역사학자 다카하다가 증언한 자료를 보면 ‘한국은 일본 골프보다 수년 앞섰고 조선은 일본의 골프 발상지다’라고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가 그 후로 골프의 궤도에 오른 것은 고종 황제의 아들 영친왕이 골프장 대지로 군 자리 땅을 무상으로 대여해 주었고 6,500야드 18홀의 서울 컨트리클럽이 1929년에 개장되면서부터이다.

일반인에게 골프가 보급되기도 하면서 1924년 경성 골프 구락부가 형성 되었다. 이때 골프를 가르칠 지도가 없어서 일본에서 지도자를 초청하여 경기를 지도 받고 시범경기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50명 골퍼가 탄생되었다.

그 뒤 1937년 조선 골프연맹이 결성되었고 1941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연덕춘이 일본 오픈 대회에서 26세의 나이로 우승을 하게 되면서 1986년에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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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골프장 100년 역사의 궁금증이 풀리다

[신간안내] 한국 골프의 탄생 / 손환 지음 / 민속원 펴냄

한국 근대 스포츠사학자 손환 교수(중앙대 체육교육과)가 한반도 골프장의 효시와 역사를 정리한 ‘한국 골프의 탄생’을 출간(도서출판 민속원)했다.

책에는 한반도에 골프가 어떻게 소개됐는지, 골프장은 어떻게 세워졌는지, 한반도 전역에 골프장이 어떻게 건설됐다가 사라졌는지 등이 담겼다.

한반도 최초 골프장은 1921년 세워진 효창원골프장(용산)이다. 처음엔 6개 홀만 지어졌다가 나중에 9개 홀로 확장됐다. 전장은 2322야드였다.

가장 긴 홀은 385야드(파4), 가장 짧은 홀은 188야드(파3)였다. 하루 그린피는 1엔, 월 회비는 5엔, 연회비는 25엔이었다. 손 교수에 따르면 당시 금 두 돈 시세는 10엔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50만원 안팎이다. 1엔이면 지금 5만원 정도로 볼 수 있다. 4개 클럽을 세트로 빌리는 비용은 50전, 즉 2만5000원 정도다.

효창원골프장은 개장 2년 만에 공원화되면서 사라졌고, 대신 청량리골프장이 세워졌다. 16개 홀인데 17번·18번 홀을 1번, 2번 홀과 중복으로 사용해 18홀제로 운영됐다. 청량리 골프장은 1929년 없어졌고 대신 군자리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18홀 군자리 골프장은 소나무 숲과 연못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코스를 자랑했다. 군자리골프장은 1970년대 초반 사라졌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이 들어섰다.

이 책에는 경성 골프 구락부(클럽)를 시작으로 지방 곳곳에 생긴 구락부 임원명단과 형태, 재정 상태 등이 다뤄졌다. 대구, 원산, 평양, 부산에 생긴 골프장 모습도 빠짐없이 담겼다. 골프장 건설과 구락부 설립은 일본인들이 주도했고 친일파도 가세했다고 손 교수는 전했다.

캐디 얘기도 나온다. 한반도에 골프장이 세워진 때부터 경기보조원은 지금처럼 ‘캐디’로 불렸다.

당시 자료들에 따르면 한국 캐디들은 볼을 열심히 찾고 다음 샷을 잘 칠 수 있게 볼이 떨어진 지점 근처 러프를 재빠르게 정리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저자의 우연한 기회, 끊임없는 사료수집에 대한 열정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손 교수는 “25년 전 일본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 쓰레기통에서 ‘광복 이전 조선 골프의 발상과 발달’이라는 논문을 발견했다”며 “그걸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관련 사료를 찾으면서 연구한 걸 이 책에 담았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이 책에 소개된 초기 골프장은 모두 사라졌다”며 “이 책이 한국 골프의 뿌리를 찾고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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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프역사 3회] 대한민국 골프 140년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골프타임즈=정노천 골프칼럼니스트] 인간이 사는 어느 시대든 놀이는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하며 진행돼 왔다. 놀이는 소통과 공감의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인간의 삶이든 놀이 없이는 공동체 영위나 삶의 질을 쉽게 상승시키지 못한다. 놀이 행위는 소속감과 자아 정체성을 확보하는 동시 삶과 인간관계 형성을 꾀하는 유대감으로 승화된다.

첫 골프 플레이의 흔적

사실 원산해관 곁을 지나다니며 세관업무를 담당하던 서양인들이 목책을 치고 만든 코스에서 스윙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촌로들은 클럽을 휘두르는 낯선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했고 또 그렇게 시늉도 해 봤을 것이다. 그 당시 조선인들은 논밭에 나가거나 일반 외출 시에도 빈 지게를 지고 작대기를 휘두르고 다니는 것을 자주 봤던 모습이다. 그 촌로들이 목책으로 둘러싸여 접근은 못했지만 멀리서나마 그들의 스윙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갖고 있던 지게 작대기로 앞에 놓인 돌이나 둥근 물건들을 툭 치며 흉내를 냈을 것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어떤 이는 외국인 해관 근로자들이 여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해관구내에 코스를 만들어 놀이삼아 클럽을 휘둘렀다는 것을 우리 골프의 시작이라고 잡는 것도 못마땅해 하는 이도 있다. 사진이나 확실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다.

이미 우리민족에겐 발해나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를 관통하면서 골프의 전신(조완묵 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격구’나 ‘장구’라는 형태의 공치기 놀이가 행해져 왔다. 그것도 국가적인 무과시험의 일종으로 행해지고 엄격한 룰과 도구 등이 갖춰진 골프놀이였다고 주장하면서 사실 골프의 원형임을 주장한 학자가 조완묵 씨 였다.

그 당시 사회적인 조류와 시원적인 사료를 무시해버리고 현대적 골프의 규격화라는 프레임에만 맞춘다면 그것 또한 골프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우리

골프의 파이를 축소하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그런 논리라면 몇 십 년,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르게 되면 지금의 골프 역시 그때 그 시대에 맞게 규칙이나 도구 및 스윙 행태가 바뀔 것이고 그럼 그때도 오늘 날의 이 골프형태를 유사 골프로 치부해버리고, 우리 것이 아니라고 내팽개치고 말 것인가 묻고 싶다. 어쨌든 과거의 공치기는 옛 골프로 한정 지어놓더라도 이 땅에서 조선의 조정이 의뢰한 한 나라의 기관(원산해관)에 근무하면서 체류했던 서양인의 세관원이나 선교사들 혹은 당시 우리나라 근무자들이 함께 즐길 수도 있었을 골프라는 놀이. 이 땅에서 자기들 나라의 고유 놀이인 골프채를 휘둘렀다는 사실은 이 땅에 골프 상륙이고 흔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오늘날 이 땅에서 일으킨 골프의 씨앗과 우리의 골프자산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골프 효시를 논할 때 애써 우리 것을 홀대하고 남의 나라의 것만 추켜세우는 사대적인 사고나 치졸한 이론에만 치우쳐 평가절하하거나 때로는 자기 과시욕도 지양해야할 태도라고 본다.

우리나라가 일백 년 넘은 오랜 골프 역사를 가졌다는 것은 다른 스포츠 역사에 비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일천한 타 스포츠의 노력에 비해 이 사회에 끼친 골프의 영향력은 홀대할 수만 없을 것이다. 민족사의 부침과 함께 끈끈히 이어온 골프의 생명력이 1800년도 말 원산코스를 시작으로 현재 500여 개의 골프장이 건설되고, 600여만 명을 헤아리는 골퍼가 이 땅에 정착하게 되기까지는 숱한 수난과 골프만의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코리아의 1등이 세계의 1등(여자프로골프)’이라는 등식을 만들고 세계 골프계를 주도하는 위치다. 이러한 국가적 블루칩을 살려서 골프 한류가 이 나라의 국위선양에 큰 역할을 해나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활성화해가야 한다. 기록이니 구전이니 소모적인 논란보다는 한국골프의 올바른 방향 설정과 세계화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리드할 것인지에 힘을 합치는 게 미래 한국골프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경제성장의 상징성, 골프 룰 매너의 준수에 의한 사회 계몽성, 골프를 통한 한류의 씨앗, 골프를 통한 세계시민성 획득 등 골프가 주는 가치를 국력의 역량으로 증폭시켜야 한다. 한국 골프사(史)에서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걸어온 선각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향후 우리나라 골프의 사회적 역할론과 골프문화의 형성 그리고 건전한 발전의 길을 모색해야 할 계기로 삼아야 할 시기라고 본다.

초창기 국내 골프의 도입

우리나라에 골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80년대 영국인에 의해서였다. 1880년 원산항이 개항되자, 영국인들이 중국의 세관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1880년부터 1905년 사이의 기간 동안에 최초의 원산골프코스가 영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세계 각지에 진출해 있던 영국인들의 생활 풍속상 거주하던 곳마다 반드시 골프코스를 두었던 점을 감안 한다면 앞에 말한 골프 역사는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과 일본의 골프역사의 시발점을 만들었던 영국인이 당시 한국의 관세징수사무를 맡게 된 과정을 확인하고 싶다면 일본관세협회 발행의 ‘세관백년사’를 방증자료로 제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골프소사(小史)에 의하면 “구한국 정부시대에 외국인들이 개항도시인 원산의 세관구내에 6홀의 골프코스를 건설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곳 세관특구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마을노인들로부터 구전됐을 뿐이며, 또한 원산근교의 외인촌과 황해도 구미포에서 위와 비슷한 골프코스가 존재했지만, 한국인의 출입뿐만 아니라 일본인까지도 출입이 통제됐다고 했다. 그 후 원산이 시세의 확장에 따라 시가지 확장건설을 하게 되어 주택을 철거하던 중, 영국인이 살던 집 다락에서 낡은 골프채가 발견되어 구전되어오던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1897년 세관구내 해변에 조성된 골프코스는 일본보다 6년이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 촌로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말을 일본의 골프사학자의 기록에 남겼을 뿐이지만 당시의 원산골프장은 크게 화제를 모았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사료들은 전해 내려온 구전을 뒷받침 해 준다.

최근 골프계의 소장학자들에 의해 1913년도 구미포 외인촌의 휴양지를 비롯해 각각의 선교사 전용 골프코스들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한국 골프 기원설의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한 국사편찬위원회 강인구 편사연구관을 이처럼 구전에 의존하면서 사실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국골프 기원설은 향후 다각도로 검토되고 보완될 필요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원산해관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던 서구 외국인들에 의해 골프가 도입됐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골프코스의 위치를 전혀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충분해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골프코스의 발전과정을 천착한 손환(중앙대) 교수는 우선 원산해관 기원설에 대해서, ‘한국의 골프도입은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 외국인에 의해 6홀의 코스가 원산세관구내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구전으로 전해질뿐 사실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향후 검토할 문제’라고 잠정 결론을 내리고 그 기원설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신문기사와 문헌자료를 찾아내 원산해관 골프코스 기원설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조상우(호서대) 교수는 ‘한국 최초의 골프코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외국인들에 의해 원산해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면서 대한골프협회의 주장에 좀 더 비중을 둔다. 이러한 주장은 다카하다에 의해 <조선골프소사>에서 서술된 내용을 적극 해석하면서, 원산해관 골프코스는 원산해관이 개청되어 외국인 세관원들이 정착하여 생활하는 과정에서 도입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카하다의 원산해관 도입설’이라고 명명하는 결론을 제시한다.

조상우 교수의 ‘원산해관 도입설’의 주된 근거는 아직까지 원산해관 골프코스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지만,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폴, 말레이시아, 홍콩, 인도 등 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골프 도입 과정을 봤을 때 원산해관이 설치되어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세관들이 거주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논거로 하고 있다.

결국 그 주장의 요점은 대한골프협회에 의해 시작된 최초의 한국골프코스로서 <원산해관 기원설>을 <원산해관 도입설>로 재정립한 점이다.

이들의 주장은 서양인들의 습성이나 당시 지역민들의 구전이나 클럽 발견 그리고 골프사가 다카하다의 기록 등을 근거로 원산코스에 대한 설득력은 있으나 구체적인 자료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지적하고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영국인들에 의해 들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누가 어떤 골프를 즐겼고 코스사정이 어땠는지 확실한 자료가 전수되지 못한 것이 흠으로 남는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골프의 시원(始原)으로 오늘날 한국골프의 뿌리를 찾고 내일의 골프문화를 수립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대신 손환, 조상우 교수 등에 의해 당시 발간된 신문이나 사료 등을 들춰 그 당시 이 땅에 들어 온 선교사들이 만든 골프코스를 발굴해 내면서 더 많은 골프자료들을 확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이 발굴한 자료를 보면 선교사들은 조선의 각 지역에 거주하며 그들의 종교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문화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생활양식도 전했다고 한다. 이들은 생활양식과 문화적 수준이 당시 조선과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낯선 땅에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은 조선에서 병을 앓거나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안식년을 갖거나, 일본이나 중국으로 휴양을 떠났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친 심신과 풍토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황해도 구미포, 원산 갈마반도, 지리산 노고단, 금강산 온정리 등에 그들의 휴양 시설을 만들며 부대시설로 골프장을 지었다. 이는 일본 골프사학가 다카하다의 기록을 반증한다고 조상우 교수는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현재 한국 골프계에선 원산해관 골프코스는 1900년 즈음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는 형편이다. 자료상의 한계점 때문에 아직 최초 골프코스의 위치를 확정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원산해관 골프코스에서 처음으로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골프를 했거나, 구미포 골프코스나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에서 로스(J.B. Ross) 박사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골프를 했을 것이라는 팩트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게 조상우 교수의 설명이다.

사실상 우리는 외국인 가운데 누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골프를 했을까 하는 문제보다는 최초의 한국인 골퍼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에 더 주목하게 된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앞에 놓여진 2가지 전제조건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는 ‘원산해관 골프코스’ 또는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가 위치했던 원산항이라는 공간이고, 또 한 가지는 골프에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던 로스 박사가 원산에 체류하기 시작한 1901년이라는 시간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때, 그 장소에서 골프코스 또는 외국인 골퍼들을 접할 수 있었던 한국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조 교수는 제기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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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노천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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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3 홈 > 골프장설계 > 골프란? > 골프의 역사 골프코스 | 골프의 역사 VIEW ▶ 골프의 기원 | 영국골프의 시작 | 미국골프역사의 태동 | 일본골프 역사 | 한국골프 역사 1. 골프의 기원 골프의 기원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방의 목동들이 행하였던 민속 놀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기원전 네덜란드 지방에서 어린 아이들이

즐겨하던 코르프(Kolf)라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그리고, ?煮? 로마 시이저왕이 즉위했던 당시(기원전 100년 ~ 44년),

로마군인들이 필라파가니가(Pila-Paganica) 스코틀랜드성을 정복했을 때, 한 방향으로 구부러진 스틱으로 새털공을 치며 즐기던 놀이가 스코틀랜드에 남아 골프의 전신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코르프(Kolf)라는 경기가 골프의 전신이라고 주장하는 설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그린 풍경화에 지금의 골프채와 비슷한 도구로 둥근 공을 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주로 담으로 둘러쌓인 장방형의 구역(60피트x25피트)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크리켓이나 아이스 하키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6세기 네델란드의 풍경화 스코틀랜드 지방 목동들의 민속 놀이에서 유래되어 골프로 발달되었다는 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스코트랜드의 한 양치기가 한가한 시간에 초원에 굴러 다니던 돌맹이를 양몰이용 지팡이로 후려친것이 우연히 토끼굴 속으로 굴러 들어갔는데, 이를 바라보던 다른 목동이 호기심이 생겨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않았고, 여러번 시도 끝에 겨우 넣을 수 있었다. 그 후 목동들은 이 놀이를 자주 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체계화된 것이 오늘날의 골프라고 하는 설이다.

양들이 노닐던 초원은 페어웨이(Fairway)가 되었고, 풀밭의 돌맹이는 골프공(Ball)으로, 군데군데 뚫여 있던 토끼굴은

홀컵(Hole Cup)이 되었으며, 목동들의 지팡이는 골프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골프의 기원은 확실히 증명할 수 없고, 전해오는 설에 불과하다.

확실한 기원은 없으나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꾸준히 발달해왔다는 사실은 인정되며, 또한 사실과 함께 문헌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원이 스코틀랜드에서 전해진다. 게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57년에서 1491년 사이에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통과한 몇가지 법령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457년,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2세가 국민들이 골프에 너무 몰두하여 영국과의 전쟁에서 국가방위에 필요한 무예연습과 신앙생활을 너무 게을리 하기 때문에 12세이상 50세까지의 국민에게 고우프(Gouf)를 금지한다는 의회의 기록이 있다. 2. 영국골프의 시작

1754년 제정된 현존하는 최초의 골프 규정집

스코틀랜드 목동들의 놀이는 처음에는 서민들의 놀이로 성행하다가 골프 금지령이 내려진 후에는 특권층인 왕족만이 할 수 있었다. 여러차례의 금지령과 해제과정을 거듭하다가 국민의 권리가 차차 인정되면서 평민들도 골프를 즐길수 있게 되었다.

골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4세로써. 그는 1502년, 퍼스(Perth)지방에 있는 활 제작자로부터 한 세트의 골프채와 공을 구입하여 골프를 즐겼으며, 1567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그녀의 남편 찰리경이 죽자마자 세튼하우스(Seten- house)에서 골프를 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1592년, 리스(Leith)지방에서는 일요일에 골프치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엔드류스의 대주교는 주민들에게 골프치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한편, 17세기 영국 빈센트(Vincent)지방에 있는,현재의 웨스터 민스턴 학교 운동장이 된 터틀 필드 (Tuttle Field)에서 골프 경기가 열렸다고 전해진다.

이 터틀 필드는 학생들에게 업 필드(Up Field) 라고 불리어졌던 곳으로 정규코스와는 차이가 있었으며,이때의 경기방식도 현재와 달랐다고 전해진다.

18세기에는, 최초의 골프 클럽이라고 할수 있는 세인트 앤드 류스와 협회가 생겨났고, 골프 규칙을 제정하였으며, 골프 용품 제작자들이 나타났다. 때문에 훗날 에든버러 골프 클럽의 명예 회원이된 리스의 골퍼들이 진정한 창시자들이라고 볼수 있다.

이들은 1744년에 에든버러시에서 제공한 실물 크기의 은으로 만든 골프 클럽을 놓고 경기를 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골프 규칙을 만든 사람들은 리스의 골퍼들 (Gentlemen of Leith)이다.

그들은 골프 규칙을 13개 조항으로 만들었고, 사교위주의 세인트 앤드 류스라는 골퍼들의 모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이후 1834년에 왕 윌리엄4세가 이 협회의 후원자가 되면서 세인트 앤드 루즈는 로얄 앤 애인션트 골프 클럽(Royal and Ancient Golf Club)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후 다른 클럽들도 생겨났으며 서로 교류를 갖기 위해 모임을 개최하였다.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는 최초의 경기는 1766년에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블랙히스(Black Heath)에서 열렸다고 한다.

세인트 엔드류스, 프레스트 윅, 머셀버그, 노스버윅과 같은 클럽에서 경기를 개최하였는데, 세인트 앤드류스 출신의 앨런 로버슨(Allen Robertson)이 1859년에 사망하기까지 가장 훌륭한 선수였으며 최초의 프로 골퍼라고 전해진다. 3. 미국골프역사의 태동 1888년 2월 22일, 뉴욕주 요커(Yonker)시 목장언덕에서 6명의 사람이 모여 난생처음보는 골프채를 가지고 실험적인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골프가 시작된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미국은 1870년대와 1880년대의 ‘암흑기’를 지나, 미국

역사의 개발과 번영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서,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고, 포드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허던 때이다.

이렇게 미국의 문화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엔드류 카아네기(Andrew Carnegie)가 말한‘고문명의 부속물’인 골프가 들어온 것이다. 미국에서의 골퍼는 두사람의 스코틀랜드 이주민 이었던 로버트 록허트(Robert Lockhart)와 죤 레이드(John Reid)를 통하여 들여왔다. 록 허트는 상인이었으며, 레이드는 모트 하벤(Mott Haven)에 있는 모트 아이언 워크(J.L.Mott Iron Work)사의 경영자였다.

록 허트는 사업상 고향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돌아올 때마다 친구들에게 독특한 선물을 준비했다.

친한 친구인 레이드에게는 더욱 더 많은 선물을 선사했다.그는 테니스 라켓과 볼(Ball)을 들여온적도 있었으며.이 두사람은 죤 레이드의 정원에 코트를 만들고, 작은 테니스 클럽을 만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1887년 늦 여름, 록 허트가 스코트랜드를 방문했을때, 골프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세인트 엔드류스의 Fife and Royal Burgh 를 방문했다. 그 때 세인트 엔드류스(St.Andrews)의 로얄 엔 에이션트 골프클럽(Royal and Ancient Golf Club) 전임 프로 골퍼이며, 브리티시 오픈(British Open)에서 네 번이나 우승한 탐 모리스(old Tom Morris)의 상점에서, 그는 6개의 클럽과 24개의 골프볼을 구입했고. 뮤셀부르크 링크(Musselburgh Link)에서 골프경기를 배웠다. 여기서 록 허트는 기본적인 골프규칙을 배웠다.

1887년 늦은 가을, 영국으로부터 골프 장비가 도착했을 때 록 허트는 레이드에게 선물하기전에 시험적으로 골프를 해보았다.

그 때의 상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떤 역사학자는 록 허트가 공공장소에서 골프를 하여 구속되었으며, 레이드가 보석 신청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록 허트의 아들 시드니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강변에서 골프를 즐겼으며 구경하던 경찰이 몇번 공을 쳐 보았을 뿐 구속되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실험적인 골프를 마치고, 그는 친구인 죤 레이드에게 골프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골프 역사의 뒤로 사라졌고, 골프를 이어받은 그의 친구인 죤 레이드는 ‘ 미국 골프의 아버지 ’ 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록 허트는‘미국에 골프를 처음 들여온 사람’이고, 죤 레이드는‘미국에서 골프를 영속하게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죤 레이드와 그의 친구들은 골프에 대한 첫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부터,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골프를 즐겼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총을 피하기 위하여 브로드웨이 쇼너드 플레이스(Broadway and Shonnard Place)의 북동쪽에 위치한 30에이커(약 120,000㎡) 넓이의 초원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 곳은 독일인의 소유의 초원이었는데, 그 독일인 주인은 그들이 자신의 땅에서 골프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으며,그때부터 죤 레이드와 그의 친구들은 매주일마다 골프경기를 하게되었다.

1888년 11월14일, 독일인 소유의 초원에서 골프 경기를 마친 다섯 사람

(John Reid,Harry Holdbrook, Kingman H.Putnam,Henry O.Tallmadge,John B.Upham)은 존 레이드의 집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저녁모임을 가졌다.

미국 골프의 아버지라 불려진

죤 레이드(John Reid) 이 모임의 목적은, 이들이 즐기던 게임을 영원히 존속시키기 위한 대책마련을 위한 모임이었다. 여기서 죤 레이드는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동료애를 다지는 동시에, 유지를 위해 기금을 제공할 수 있는,클럽을 만들것을 제안하게 된다. 여기서 죤레이드는 만장일치로 회장이 되었으며, 다른 동료들은 임원진이 되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미국골퍼의 원조가 되었던 스코틀랜드의 St.Andrew의 이름을 따서 St.And- rew`s라고 지었으며, 골프를 미국에 처음 들여왔던 로버트 록허트(Rovert Lockhart)를 클럽의 첫번째 회원으로 추대했다. 그들이 회의를 하면서 작성했던 Minute Book of the Golf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몇 가지의 규정은 미국 골프의 ‘대헌장’이 되었다. 바로 이 날, 1888년 11월14일이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골프가 시작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1892년 4월, St.Andrew’s 클럽은 모임이나 골프 경기의 장소를 북쪽으로 4블럭 떨어진 35에이커(약 140,000㎡) 넓이의 사과밭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로 옮겼다. 이곳은 주변 경치가 아주 좋았으며, 언덕에서는 뉴 저지

(New Jersey)의 허드슨(Hudson)강과 페리사이드(Palisade)가 내려다 보였다. 그들 단체가 ‘애플 트리 갱(Apple tree Gang)’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곳에는 첫번째 티와 마지막 그린 가까이에 사과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그곳은 클럽 회원들이 사과나무 가지에 코트와 점심바구니를 걸어놓고 쉬는 휴식의 자리가 되었다. 둘러앉아 쉬는 나무의자는 클럽라운지의 역할을 하였다. St.Andrew’s클럽에서 첫 게임을 했던 져지 오브라이언 (Judge O’Brien)은 그 곳의 사과나무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하여, 그가 1894년 쉰쿡 힐스 골프클럽(Shinnecock Hills Golf Club)을 방문했을 때, 사과나무가 없어서 골프코스 같지가 않다고 말했다고한다. 이렇게 하여 미국내에서의 골프는 다른 뉴욕(New York)지방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1894년까지 Meadow Brook on Long Island, Richmond on Staten Island, Ardsley, Knollwood, Rye, White Plains 등의 많은 골프코스가 만들어졌고, 뉴 저지의 허드슨강 건너에는 레이크 우드,피트슨,몬트 크레어,모리스 컨트리(Lakewood,Paterson,Montclair,Morris Country)들이 생겼다.

새롭게 생겨난 골프 코스들은 애플 트리 갱(Apple Tree Gang)과 같이 나인홀(9 Hole)이었다. 1890년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코스들는 18홀로 규모가 커졌으며, 더욱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1888년 당시에 St.Andrew’s 클럽은 미국에서 유일한 골프장이었는데,

10년 후에는 급격히 늘어나 19세기 말에는 골프 클럽의 수가 1000여개에 달하게 되었다 4. 일본골프 역사 일본인으로서 최초의 골퍼는 生絲 무역상인 新井領一郞이라고 한다. 新井은 1900경 무렵, 뉴욕 교외의 골프코스에서, 건강을 위하여 요양중 무료한 시간을 이용하여 골프 경기를 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사람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골프하기를 권장하였다. 村井保固, 林愛收穫 등도 얼마 뒤에 그에게 골프하기를 종용받아 골프를 시작했던 것 같다. 新井에 뒤이어 1,2년 뒤, 松平慶民, 加藤泰通 등 영국에서 유학중이던 학생이 골프를 시작했으며, 1903年에는, 田中善三郞이 뉴욕 교외의 코스에서 골프를 시작했으며, 영국과 미국에서 거주하였던 재외 일본인들 사이에서 일제히 골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미국과 영국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이, 후에 일본으로 돌아가 동경의 駒澤에, 일본인만의 골프클럽을 조직하였고, 영,미에서 배우고 느낀 골프를, 일내에 전파하였던 것이다.

일본내에, 처음 골프장이 생긴 것은, 新井領一郞이 뉴욕에서 골프를 시작한 직후인 1902년 경으로 18홀의 정규코스가 아닌 9홀 코스가 오픈된 것은 1903년의 일이다. 이 해 5월 24일은, 일본 골프사에 기록해야 할 神戶 골프클럽의 六甲 코스가 개장되었던 날이다. 영국인 그루므(gluemoo)가 피서지를 찾아 六甲의 산을 답사하고, 거기에서 골프장 건설에 적합한 부지를 선정하여, 처음은 4홀로 플레이 하였지만, 이것을 9홀로 연장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름다운 초여름의 六甲山 위에, 그 당시의 兵庫縣 知事인 服部一三의 시구에 의하여, 일본에 처음 골프·토너먼트 경기가 행해졌다. 일본 최초의 골프장인 六甲 골프장(1903년경) 1918 駒澤 코스에서 개최되기까지 11년간은, 대부분은 외국인만의 일본 아마츄어 선수권 대회였다. 일본인만의 골프장으로서는 최초인 동경골프장은, 1914 駒澤에 9홀의 코스를 오픈했다. 당시, 미국, 영국에서 골프를 기억하고 귀국한 골퍼들이 많아졌으며,이들은 일본인만의 코스를 건설하고자 하는 여론이 대두 되었다. 이것이 동경 골프장이 생기게 된 동기이다. 1915년에는 마침내 동경 根岸의 일본과 영국 대항 대회를 駒澤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일본의 천황은 1917년 高輪御前에서 골프를 시작할 수 있어, 뒤에, 新宿御苑에서 골프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1922년 무렵의 기록에 남겨지고 있다. 골프가 천황를 비롯한 왕족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은, 골프의 고귀성과 정결성을 나타낸 것이었다. 우연히 1922년 영국황태자 가 일본을 방문하고, 駒澤에서 일본 천황과 9홀의 매치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국민들이 골프라고 하는 경기 자체를 알게되고 많이 알려지게되었다.

일본 골프계 최고기관이 일본 골프협회(Japan Golf Association. 약칭 J.G.A.)는 1924년 10월에 설립되었으며, 일본 최초의 오픈 선수권 대회는 1927년 5월 28,29일 양일에 걸쳐 개최되었다.

일본에 최초 골프붐을 일으킨 것은 1930년경이다. 북쪽은 북해도로부터 규슈 나가끼에 걸치는 일본전 국토에 약 30개 코스가 생기는 등 합쳐서 40개 코스에 달하였다. 많은 선수들이 미국이나 영국등지에서 많은 경기 참가와 함께 국제적인 우호의 역할도 하게 된다. 미국프로협회가 1935년 일본의 프로팀을 초대해 제1회 일,미 대항경기를 개최한다고 발표한 뉴스가 1934년 9월 일본에 입전되고 일본골프계를 놀라게 했다. 赤星六郞은 제1회 일본 오픈 챔피언에서 골프의 천재로까지 일컬어지지만, 코스 설계가로서도 뛰어난 천성을 보였다.

그는 각지에 코스 설계를 했지만 전문코스 설계자가 없는 일본에는 꼭 그가 필요하게 생각되며, 1936년 7월, 코스설계를 위한 영 미 여행에 나섰다. 영국에서는 3개월간 머물렀으며, 여러 골프장을 돌았지만, 골프왕국의 자리가 미국으로 넘어간 오늘날, 영국 코스에는 배울만한 곳은 적다고하며, 예정을 당겨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에 도착한 赤星은 왕래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는 골프 코스설계 전문가가 없다. 나는 미력하나마 미국에서 배운 것을 일본코스에 응용하고 싶다.」赤星의 겸허한 태도는 인터뷰한 미국 신문기자에게 호감을 받았다.

그는 영미 코스견학중 각지에서 플레이했다. 게다가 빌린 클럽을 사용해 익숙치 않은 코스라도 로열 리버풀 샌디로지에서는 74, 델몬트에서는 70, 올림픽 코스에서는 71의 스코아를 내고, 언제나 변함없는 명인의 기술을 보였다. 1945년 세계 제 2차 대전의 종결에 의해, 진주하고 있던 미국군은 일본의 구락부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파멸의 상태가 되고 있던 골프 코스는 재차 힘차게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후 일본의 골프붐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1959년에는 120에서 130개의 골프코스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골프에서 후진국으로 보이는 일본은 언제쯤엔가 세계 골프국가 중에 얼굴을 내밀고 1948년에는 미국 스포츠지의 보도에 의하면 그 코스 수는 세계 제8위에 랭크되고 있었다. 5. 한국골프 역사 우리나라에 처음 골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80년대 영국인에 의해서였다. 1880년, 원산항이 개항되자, 영국인들이 중국의 세관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1880년부터 1905년 사이의 기간동안에 최초의 원산 골프 코스가 영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확실히 증명할 수 는 없었다. 조선골프소사(朝鮮골프小史)에 의하면 「구한국 정부시대에 외국인들이 개항도시인 원산의 세관 구내에 6홀의 골프코스를 건설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곳 세관특구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마을노인들로부터 구전되었을 뿐, 보다 확실한 기록은 없었다. 그후 원산이 시세의 확장에 따라 시가지 광장건설을 하게되어 주택을 철거하던 중, 영국인이 살던 집 다락에서 낡은 골프채가 발견되어 구전되어오던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1897년 세관구내 해변가에 조성된 골프코스는 일본보다 6년이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에 한국 골프 협회에서 발간한 ‘한국골프사’에서, 한국 골프의 역사는 한국골프의 창시기, 조국광복과 한국골프, 한국골프의 전환기, 한국골프의 성장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한국 골프의 창시기

1917년에 조선철도국(朝鮮鐵道局)은 만주철도주식회사로 이관되었다.

조선철도국의 安藤又三郞이사는 대련만철본사(大連滿鐵本社)에 출장중, 성포골프코스의 광대하고 쾌적한 플레이 현장을 보고, 경성에도 골프코스를 건설할 것을 구상하게 되었다. 다각도로 연구검토한 결과, 철도국 직영의 조선호텔 숙박객에 대한 서비스 및 외래객 흡수책의 일환으로 호텔부속 골프코스를 건설할 것을 결정하고, 철도국관리하에 건설계획이 추진되었다.

이렇게 하여 효창원 골프코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당시의 회원들은 골프 규칙이나 에티켓을 알지 못했다. 1922년 6월에 정무총감 有吉忠一가 부임한 이후 플레이 방식이 개선되었다.

그는 골프에 관심이 많았으며 영국식 골프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관민을 통하여 많은 골프 애호가를 배출하게 되었다. 효창원 골프 코스가 공원으로 유입됨에 따라, 골프 코스는 청경리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철도국과 호텔로부터 골프 코스는 완전히 독립하여 건설되었으며, 1924년4월20일 설계나 자금투자를 달리한 사단법인 경성골프 구락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대구(1923), 평양(1928), 원산(1929),부산(1932) 골프코스등이 차례로 개장을 하게 되었다.

1937년 9월 23일, 경성 골프구락부에서는 조선골프연맹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규약과 임원이 결정되었다. 이사장, 상무이사, 이사가 1명씩 선임되었으며, 대구, 평양, 부산, 원산골프코스에서 이사 각 1명씩을 선임하고, 정식으로 조선골프연맹이 발족하였다. 골프연맹의 창설활동은 활발하였으며 골프의 밝은 전망을 볼 수 있었다. 최초의 한국인 골퍼는 1924년 청경리 골프코스에서 등장하였으

며, 1929년에 개장한 군자리 골프코스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골퍼들이 경기를 개최하고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군자리 골프코스에서 최초로 캐디가 등장했다고 한다.

2) 조국의 광복과 한국골프

세계 제 2차대전으로 골프 코스는 농경지로 변모하였으며, 광복후 4년만에 골프코스를 복구하게 된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군자리 골프코스가 복구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장 시공은 연덕춘 프로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농경지를 경작하던 소작농들의 잦은 시위로 코스 복구 작업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소작농들의 요구를 일부 수렴하고 지원을 하기로 하여, 복구 공사는 1949년 5월 완전히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복구 1년만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으로 코스는 또다시 황폐화 되었다. 6.25동란이 지나고, 1954년 7월,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군자리 골프코스는 전장 6,750 야드, 파72의 국제 규격으로 재복구 되었다. 그리고, 1953년 11월11일, 한국 골프사상 최초로 우리 손으로 이룩한 군자리 골프코스를 운영해 나갈 사단법인 서울 컨트리 구락부를 창설하였다. 군자리 골프코스폐장에 앞선 마지막 경기인한국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1972) 이를 발단으로 1955년에는 부산 컨트리 구락부가 발족되었다. 1954년, 대통령배 한국 아마추어 골프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958년 6월12일, 군자리 골프 코스에서는 제1회 한국 프로 골프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군자리 골프 코스는 한국골프의 활성화를 도모하였으며, 해외교류의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한국 골프의 전환기

서울 컨트리 클럽 군자리 코스는 한국골프의 총본산 역할을 해야했으며, 서울 컨트리구락부에 의해 운영되었던 골프계는 제4회 월드컵 골프 경기 참가를 계기로 하여 한국내 골프 대표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1965년 9월 14일에 개최 되었던 한국골프 협회 창립 준비위원회 회의록에는, “한국골프협회는 1959년에 창설 되었으나 4.19의거당시 각 정당, 사회 단체의 해산지시에 따라 유명무실상태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수록되어 있다. 1959년, 골프계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 골프 협회가 발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골프의 대표기관으로서의 그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재정, 운영면에서 여건이 미흡하였다. 1960년, 한국골프협회는 4.19 학생 의거로 각 정당, 사회단체의 해산 지시에 따라 창립1년만에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한동안 소강상태었던 골프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되는데, 1965년 9월 14일, 한국 골프 협회의 재창립을 조속히 추진하려는 동호인들이 모여, 협회 창립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창립 활동을 하게 된다. 1965년 9월14일 개최된 협회 창립 준비 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협회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1965년 9월23일 가진 한국 골프 협회 창립 총회에서 총대의원 13명중 12명의 출석으로 개회를 선언하였다. 1953년 11월11일 발족했던 서울 컨트리클럽은, 한국의 골프를 본궤도에 올려 놓으려는 10여년간의 끈질긴 추진으로, 많은 역경과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65년 9월23일, 조국광복 후 최초로 한국 골프 협회가 출범하였다. 사단법인 한국 골프협회 설립 허가 신청서를 관계당국에 제출, 동년 5월 3일부로 허가를 받음으로써 합법적인 대표기관으로 행사하게 되었다. 1965년에 창립한 한국 골프 협회의 시급한 과제는 한국 골프의 위상을 세계 골프수준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65년 12월17일, 협회는 국제 골프 연맹과 아시아 골프 연맹에 한국 골프 협회의 창립을 통고함으로서 국제 골프계와의 경기와 교류를 추진히였다.

이때부터 각종 국제 경기에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1959년에서 1976년 사이에 국내 골프의 전망을 밝게 본 기업들이 골프장을 활발히 건설하게 되었다. 최초의 한양 컨트리 클럽(1964)을 필두로, 태능 컨트리 클럽(1966), 안양 컨트리 클럽(1968;현 안양 베네스트 골프클럽),용인 컨트리 클럽(1970; 현 양지 컨트리 클럽), 수원 컨트리 클럽(1975) 등 20여개의 골프장이 이 기간 내에 건설되었으며, 이 시기가 우리나라 골프사의 육성기라고 할수있는데 그 이후 골프 코스 건설이 수도권 주변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우리나라 골프 발전의 많은 기념비적인 일들을 해온 군자리 코스는 1970년 12월4일, 정부 방침에 따라 급작스럽게 어린이 대공원으로 개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서울시측은 시가지가 앞으로 확장하게 될 전망이므로, 군자리 코스의 위치는 골프 코스로서는 적당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1972년 10월 31일, 40 여년간의 우여곡절을 이겨내었던 군자리 골프코스는 골프동호인들이 착찹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단법인 한국 프로 골프 협회에서는 1968년 5월 17일, 연덕춘, 박명출, 배용산, 한 장상, 이일안, 조태운 프로 골퍼들이 모여,‘한국 프로 골프 협회 창립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각종 경기를 치르면서, 프로 골퍼의 부단한 기술 향상과 국제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하였다.

1968년 5월 22일, 한국 프로 골프협회 제1차 이사회를 허정구 이사의 사회로 개최함으로써 한국프로골프협회 출범 제1호 임원단의 구성을 보았다. 명문 골프장의 합리적인 운영과 골프장을 통한 관광 사업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전국 골프장의 이사장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 골프장 사업 협회가 1974년 1월 1일 창립하게 된다. 또한, 한국 시니어 골프 선수권 대회 등의 각종 국내 골프 경기가 1970년 대에 시작되었다. 협회의 창립과 골프 코스 건설 등, 골프발전을 위한 골프계 인사들의 활발한 활동은, 우리 나라 골프가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4).한국골프의 성장기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에는 더 많은 골프코스 건설이 추진되었다.

1979년에 제주도 오라골프장이 개장되었으며, 경주에서는 조선 컨트리 클럽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80년에는 경기도 정아 골프 코스, 82년에 창원 골프장, 83년에 광주 골프장 등이 연이어 건설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대중화되는 경향을 나타냈다.경기 사업을 살펴보면, 1984년에는 각종 경기 사업이 22종목으로 늘어났다. 골프 경기와 협회의 경기 사업은 본 괘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한 제9회 아시안 게임에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됨으로써 우리 나라 경기 사업의 활성화를 도모하였으며, 쥬니어 신인 골퍼의 수와 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1984년 제2회 쥬니어 학생골프 선수권대회에는 대학생을 포함하여 100명 가까운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여성 골퍼들의 증가로 한국 아마추어 부녀 골프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다.

제3회 대회에는 30여명, 5회(1980)에는 50여명, 8회(1984)에는 84명의 여성 골퍼들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경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오란씨 오픈 선수권 대회, 쾌남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 연합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 부산, 삼양, 수원, 동해 오픈골프 선수권 대회 등 한국 골프의 대성장기를 이루었다. 특히, 매경 오픈 선수권 대회는 매일경제신문사가 우리 나라의 골프를 건전한 국민 스포츠로 육성하기 위해 1982년에 창설했다. 또한, 1982년도 제29회 월드컵 국제 골프 선수권 대회(멕시코)에서 최상호선수가 개인전에서 5위를 차지함으로써 국위를 선양하였다. 국제 골프 연맹은 대회의 세계화를 위하여 각국에 골프 외교를 벌였다. 1980년대는 여자선수들의 대회 참가로 여성 골퍼의 지위 향상과 함께 골프계의 발전이 거듭되었다.

한국 골프 협회는 미래의 한국골프를 짊어지고 나갈 꿈나무들을 육성보호하기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쥬니어 골프교실이다. 한국골프협회는 학생 및 쥬니어 골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골프 협회, 영국 R&A, 그밖에 30여개국 골프 단체와 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해가면서 한국 골프 경기 일정 안내와 골프장 시설소개, 그리고, 현행 문화체육부에서 발행한 한국소개화보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1984년, 골프장 28개소, 연간 내장객수 130여만명이던 것이, 97년에는 운영 중인 골프장이 112 개소, 연간 내장객이 800 여만명을 넘어섰다. 이렇게 골프 인구는 계속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에 있으며, 국민체육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프로 골프 분야에서는 박남신, 이강선, 김종덕, 구옥희와 같은 많은 우수한 선수들이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 골프의 국제적 위상 또한 높아져서 국제적 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등(강욱순 프로, 1997년 APGA, 오메가 투어 우승)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다.

삼성물산의 박세리 선수 는 최근들어 삼성그룹의 후원과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하여 미국 4대 메이저 대회중 2개(98년 멕도널드 미국여자 프로골프 챔피언 쉽 우승,98년 US여자오픈 우승)를 석권하는 놀라운 위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로서 우리나라의 골프 위상은 세계무대로 발돋움 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박세리 선수의 세계제패(1998년 US 여자오픈우승)

한국 골프 역사 116년 조망

<창간 특집>

한국 골프 역사 116년 조망

원산에 상주했던 영국인들이 1897년 유목산 중턱에 6홀 규모 간이 코스

만든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코스로 전해져

우리나라에 골프가 언제 들어왔을까? 이에 관한 명확한 사료는 없다. 대한골프협회(KGA.회장 허광수)가 2006년 펴낸 『사진으로 보는 한국 골프사』에 따르면 한국에 골프가 전래된 것은 1897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1876년 조선은 운요호사건으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고, 그 결과로 1880년 함경남도 원산항이 개항했다. 이 후 한국의 해관 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해관 안 유목산 중턱에 6홀 규모의 간이 코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훗날 시가지를 확장하면서 외인촌을 철거할 때 다락방에서 쏟아져 나온 클럽세트며, 그들이 골프를 즐겼다는 내용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그때 클럽을 포장한 신문지가 1897년도에 발행된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골프는 그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1940년 11월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골프소사」에서 골프사가 ‘다카하다’가 밝히고 있다. 그는 1973년 일본 ‘월간골프’에 ‘조선은 일본 골프의 발상지다’고 발표했고 한국 골프코스가 1901년 개장한 일본 최초의 골프코스인 고베 록코산 코스보다 수년 앞서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골프가 전래된 시점을 1897년으로 치면 올해로 꼭 116년이 된다.

취재 김대진 편집국장 사진 박형진 기자

골프역사 116년, 그동안 한국 골프는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초창기 제대로 된 골프장도 없던 시절에서 오늘날 500여개에 달하는 골프장에 470만명에 달하는 골프 인구, 50여명의 남녀 선수들이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 미국 프로 무대(PGA, LPGA)에서 활약하는 골프 강국이 됐다.

1960년 이전 국내 골프장

효창원 골프코스는 일제강점기 때 만든 전장 2,300야드 9홀 규모였다. 1919년 착공해 1921년 6월 1일 개장했다. 당시 조선호텔 이용객을 위한 부속시설로 만들어졌다. 7홀만 사용했던 이 코스는 외국인 내장객만으로 적자를 면키 어렵자, 법인체인 경성골프구락부를 조직하게 된다.

효창원 골프코스를 설계한 H.E Daunt는 1915년 일본아마추어골프선수권 챔피언이자 일본 고베 록코산 골프코스 회원으로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인 러시아계 영국인이었다.

경성골프구락부는 효창원 골프코스가 공원으로 편입되며 개장 3년만에 폐장되자 청량리 골프코스를 1924년 12월 개장했다.

청량리 골프코스는 조선 왕조 이 왕가의 능림으로 전장 3,942야드, 파 70의 18홀 코스였다. 이때부터 한국인 골퍼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1925년 국내 공식대회인 전조선 선수권이 홀매치 플레이로 열렸다. 청량리 골프코스를 설계한 사람은 제1회 일본 아마골프 우승자 이노우에였다.

그러나 이 청량리 골프코스조차 폐장되면서 다시 군자리 골프코스를 1930년 개장하기에 이른다. 군자리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군자리로 그 이전에 말과 양을 기르던 곳이었다.

군자리 골프코스는 유능 일대 30만평에 전장 6,160야드 파 69의 정규코스로 일본인 아카보시가 설계했다. 당시 군자리 골프코스의 시설물들은 기둥을 주제로 기와를 올린 한식 건물이 주류를 이뤘다. 클럽하우스는 일제강점기 박람회 때 조선관으로 사용하다가 군자리 골프코스로 이축한 것이었다. 그 후 주한 미군이 사용하던 중 난로 과열로 소실됐다고 한다.

이 무렵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골프코스가 개장했다. 1923년 대구 골프코스가 9홀 규모로 개장했고 1928년 평양 골프코스가 개장했다. 이어 1929년에는 원산 송도원 골프코스에 이어 1932년 부산 골프코스가 각각 9홀로 개장했으나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때 폐장됐다.

군자리 골프코스도 이때 폐장됐다가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1950년 5월 우리 손으로 복원했지만 1개월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또 다시 문을 닫았다. 이후 휴전으로 복원이 시작됐다. 1953년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를 창설하고 1954년 18홀(파 72), 6,750야드 국제규모로 재개장했다. 서울컨트리구락부는 군자리 골프코스를 1972년 어린이대공원으로 자리를 내주고 고양시에 있는 36홀의 한양골프장 주식을 인수, 이전했다.

1956년에는 부산 해운대에 9홀 2,610야드 규모로 부산컨트리클럽이 개장했다. 그러나 이 코스는 주택지구로 편입되면서 부산시 노포동에 18홀 6,402야드 규모로 이전해 재개장했다.

1960, 70년대 골프장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경제성장으로 골프인구가 늘어나자 1964년 한양컨트리클럽이 문을 연데 이어 제주, 태능, 뉴코리아가 1966년, (구)관악(현,리베라)이 1967, 안양베네스트가 1968년 속속 개장했다.

1970년에 용인(현 양지파인)과 부평(현 인천국제)에 이어 1971년에는 부산과 동래(현 동래베네스트), 그리고 남서울이 각각 개장하는 등 1970년대말까지 총 22개의 골프장이 문을 열었다. 이후 1980년대에 용인프라자와 중문 등 20개가 추가 개장해 국내 골프코스는 1980년대 말까지 42개가 조성됐다.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 국내 골프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골프장의 지형, 레이아웃과 클럽하우스

초기 대도시 근교에 있던 골프장, 지금은 전국적으로 확산

바다 매립지나 해안가, 산악지대에 조성된 골프장도 많아

골프장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골프장의 지형, 레이아웃과 클럽하우스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초기 골프장은 주로 대도시 근교에 자리를 잡았다. 청량리나 효창원 골프코스 등이 그랬다. 부산과 대구 등 큰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대도시 근교의 부지가 주택지구 등으로 수용되면서 골프장은 대도시 근교에서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산지 지형으로 옮겨가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또 2000년대를 전후해 바다 매립지에 건설되는 골프장도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천 영종도에 자리잡은 SK72GC를 비롯해 군산CC 등이 매립지에 건설된 대표적인 골프장이다. 남해안과 서해안에는 아름다운 해안가에 조성된 골프장도 여럿 있다. 또 강원도 등 일부 산악지대에는 하이원CC처럼 해발 500m가 훨씬 넘는 고지대에 만든 골프장도 있다. 또 제주도에 있는 수많은 골프장은 물론 드비치CC(거제도)와 아일랜드CC(대부도)처럼 섬에 건설된 골프장도 있다.

골프장 레이아웃, 과거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게 설계

난이도 높아졌으나 골프 치는 묘미는 훨씬 좋아져

골프장 레이아웃도 달라졌다. 과거엔 일자형 홀이 많았으나 요즘은 홀이 중간에서 좌우로 꺾인 도그렉홀도 많아졌다. 또 과거 골프장이 비교적 평지에 일자형으로 평탄했다면 요즘은 높낮이가 심하고 홀 중간에 워터 해저드나 벙커를 많이 배치한 홀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최근에 문을 연 고급 골프장들은 대개 많은 벙커와 워터 해저드, 좁고 어려운 그린 등으로 난이도를 높힌 홀이 많다. 뿐만 아니라 페어웨이도 과거 평지처럼 평탄한 곳이 주류였으나 요즘은 페이웨이의 폭도 좁아지고 울퉁불통하게 기복을 둬 골프를 치는 묘미를 더하고 있다. 그린도 평평한 그린에서 2단, 혹은 3단 그린으로 경사를 심하게 만든 곳이 늘어나고 있다. 한때 홀별로 2개의 그린을 뒀던 투그린이 유행했으나 요즘은 다시 원그린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클럽하우스도 다양한 양식으로 고급화돼, 내부에 에스컬레이트까지 갖춘 하우스도 등장

클럽하우스도 예전에 비해 규모가 커지고 훨씬 고급화됐다. 오래 전에 건설된 클럽하우스는 최근 리모델링을 통해 내, 외부를 고급화하고 있는 추세다.

초기 군자리 골프장의 클럽하우스는 전통적인 기와집 형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화재로 소실되고 재건되면서 현대식 양식 스타일로 바뀌었다.

현재 국내 골프장 클럽하우스는 양식 콘크리트 건물이 주류다. 그러나 일부 골프장은 한식형태로 지은 곳도 있다. 또 일부 골프장은 외국인 건축가가 설계를 맡으면서 아주 독특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여주에 있는 해슬리나인브릿지CC는 클럽하우스가 독특하고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있다.

또한 유명산에 위치한 아난티클럽서울CC는 하우스 입구가 옛날의 거대한 고분 입구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클럽하우스안에 에스컬레이터까지 설치돼 있을 정도로 독특하고 이색적이다.

2013년 5월 현재 국내 운영중인 골프장 473개, 건설중인 골프장만 100개

골프장 총면적 남한 면적의 0.5%, 총 홀수 1만개

2013년 5월 현재 운영중인 골프장은 473개다. 이 가운데 회원제 골프장이 225개, 퍼블릭(대중제) 골프장은 215개다. 군 골프장은 33개다. 공사중인 골프장도 100개나 된다.

군 골프장을 제외하고 운영중인 골프장 440개의 총 홀수는 8,315개. 건설중인 골프장 1,718개홀을 더하면 총 홀수는 1만 96개홀이다. 18홀 골프장으로 환산하면 운영중인 골프장은 461개, 건설중 100개, 전체 561개가 되는 셈이다.

면적으로 따지면 운영중인 440개소의 총 면적은 414㎢로 남한 면적(9만 9,373㎢)의 0.5%에 해당한다. 건설중인 골프장 96㎢를 더하면 510㎢나 된다.

지역별 골프장 수는 군 골프장을 제외하고 경기도가 157개(운영중 138개, 공사중 19개)로 가장 많고, 다음은 강원도 71개(운영중 53개, 공사중 18개)다. 제주도는 운영중인 골프장이 40개다.

시·군별로는 용인시와 여주군이 각각 29개, 22개로 골프장이 가장 많다.

제주도와 광역시 등을 뺀 전국 8개 도의 행정구역상 시·군은 모두 150개. 이 가운데 80%에 달하는 120개 시·군에서 1개 이상의 골프장을 운영중이거나 건설중에 있다. 이를 150개 전체 시·군 평균으로 나누면 1개 지역당 3개의 골프장이 있는 셈이다.

퍼블릭 골프장 비중(홀수 기준)이 2001년 15.9%에서 2011년말에는 32.2%로 높아졌고, 5년 후인 2016년에는 48.6%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회원제 골프장의 비중은 2001년 81.7%에서 2011년 63.6%, 2016년에는 47.9%로 떨어질 전망이다.

퍼블릭 골프장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골프회원권 가격 폭락에 따른 입회금 반환 사태, 신규 회원권 분양난, 운영적자폭 확대 등으로 회원제의 퍼블릭 골프장 전환이 급증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골프장 증가와 함께 골프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90년대 이후 국내 골프장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골프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갤럽이 2013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나흘간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21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골프를 칠 줄 안다는 응답이 18%로 나타나 우리 국민 5명 중 1명 정도가 골프를 칠 줄 아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골프 인구는 1992년 2%에서 2000년 5%, 2007년에는 9%로 증가했고 이후 6년간 2배인 18%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골프 인구를 성별로 보면 남성은 29%, 여성은 8%여서 남녀차가 컸다. 연령별로는 40대가 25%로 가장 많았다.

골프를 칠 줄 안다고 말한 응답자 223명 가운데 최근 1년간 필드나 골프연습장, 스크린골프장 이용 경험을 물은 결과, 48%는 필드에 나간 적이 있다고 답했다. 골프연습장 이용경험은 63%, 스크린골프장 이용 경험은 60%였다.

20여년 전인 1992년, 우리 국민의 72%는 골프를 사치스러운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의견은 18% 수준이었다. 그러나 국제 대회에서 한국인 골프 선수들의 활약이 늘고 골프 인구도 늘면서 골프에 대한 인식도 상당부분 바뀐 것으로 조사됐다.

골프가 사치스러운 운동이냐고 물은 결과, ‘사치스러운 운동’ 48%, ‘사치스럽지 않은 운동’ 47%로 팽팽하게 양분됐다. 추세를 살펴보면 1992년 이후 지금까지 골프가 사치스러운 운동이라는 인식은 크게 감소했지만 2007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줄지 않고 있다.

골프는 입문 후 첫 라운드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골프에 대한 인식은 연령별로 차이가 커서 고연령일수록 사치스러운 운동이라고 인식한 반면 저연령에서는 사치스럽지 않은 운동이라는 인식이 더 많았다.

◈ ‘골프 배울 의향 있다’ 29%그렇다면 골프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현재 골프를 칠줄 모른다고 답한 993명에게 앞으로 사정이 허락된다면 골프를 배울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배울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29%였다. 2007년과 비교하면 11%p 감소한 수치다.

골프를 배울 의향이 있는 사람의 비율은 20대와 30대, 학생, 화이트칼라에서 40% 전후로 비교적 많았으며 40대 이상에서는 30%에 미치지 못했다. 지난 6년간 골프 인구가 급증하면서 관심 있는 중장년층 상당수가 이미 입문했기 때문으로 풀이됐다.

2012년 현재, 국내 골프인구 470만명, 2007년 대비 195만명(4.6%) 증가

20세 이상 인구 10명 중 1.5명 골프친 경험 있다

1인당 월 평균 골프활동 지출액 48만원, 1회 라운드비는 25만원선

대한골프협회가 경희대학교 골프산업연구소와 공동으로 전국 16개 시·도 20세 이상 성인 남녀 4,7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2년 한국의 골프 지표’자료에 따르면 20세 이상 인구 3,315만명 중 골프인구는 약 470만명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1.5명꼴로 전체의 14.2%였다. 이 가운데 남자가 여자보다 골프를 많이 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40대가 가장 많았다. 다음이 50대, 30대, 20대, 60대 순으로 나타났다.

2012년 한해 골프 참여인구는 12.1%, 약 401만명이었다. 골프를 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용품비를 제외하고 1인당 월 평균 약 48만원이었다. 골프활동을 위해 매월 1조 9,248억원이 지출됐으며 연간 총 지출액은 23조 976억원으로 나타났다.

국내 골프인구 중 골프장, 실내 골프연습장, 실외 골프연습장, 실내 스크린은 모두 남자 40대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용장소에 따른 월 이용빈도를 보면 골프장의 경우, 월 2회, 실내 골프연습장은 월 3회, 실외 골프연습장은 월 4회, 실내 스크린은 월 1회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골프 참여인구 중 남자 91~100타, 여자는 101~110타가 가장 많아

골프 인구의 평균 타수는 남자가 91~100타(25%), 여자는 101~110타(28.5%)였다. 특히 81타에서 100타 미만의 골퍼들이 주로 골프장과 실외 골프연습장을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내 스크린은 111~120타를 기록하는 골퍼들이 많이 이용했다.

골프를 치는 목적도 40대 이상은 ‘친분을 위해’, 20대와 30대는 ‘취미활동을 위해’서라고 답변했다. 여성골퍼는 ‘건강을 위해’ 골프를 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잠재 골프 참여인구 950만명, 30대 남녀 골프 배우겠다는 의사 가장 높아

골프를 배울 의사가 있는 잠재 골프 인구는 950만명(33.4%)으로 조사됐다. 연령별로는 30대(34.6%)와 40대(30.9%)가 높게 나타났다. 우리나라 20세 이상 인구 3명 중 1명이 골프를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 여자 30대가 골프를 배울 의사율이 가장 높았다.

2012년 해외 골프관광객 123만명, 1인당 평균 지출비용은 175만원

해외 골프관광 총 지출액 6조 148억원

2012년 골프를 친 3명 중 1명인 123만명이 해외 골프관광객이었다. 연인원 344만명이 해외에서 골프를 친 셈이다. 골프 관광을 위한 여행기간은 3박 4일이 가장 많았다.

1인당 해외 골프관광 비용은 평균 175만으로 연간 해외 골프관광 총 지출액은 6조 148억원이었다. 해외 골프관광 국가로는 태국(30.4%), 필리핀(24.5%), 중국(18.8%), 일본(8.3%) 순이었다.

골프연습장과 골프숍

세계 최대 규모의 SKY72 드림레인지 등 전국에 1,200여개 실내연습장,

실내연습장만 4,300여개 달해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연습장은 1960년대 초 중구 명동 (당시 대연각호텔 뒤편)에 위치했던 ‘무학성골프연습장’이다. 이 연습장은 건물 실내에 꾸며졌는데 규모는 4타석이었고, 사장은 국악인 안비취씨였다. 그는 골프 실력도 상당 수준이었고 골프에 관심이 많았으며 당시 한국은행 총재 등 정·관계 인사들과 자주 라운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최초의 실외 골프연습장은 남산 자유센터골프연습장으로 60석 규모로 1967년 개장했다. 비거리도 230m 안팎이었으며 요즘처럼 안전망을 치거나 철탑을 세우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당시 골프연습장을 이용한 골퍼들이 내는 월 레슨비는 5천원 정도였다. 프로 골퍼들이 지도했으며 이용객은 주로 정 관계와 재계 인사들이었다.

그 후 철제탑을 세운 골프연습장이 비원에 개장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되면서 골프연습장은 점차 도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골프연습장은 그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현재 우리나라에는 세계 최대의 골프연습장인 SKY72GC 드림골프레인지가 있다. 비거리 400야드에 자동타석이 300개나 되고, 별도의 천연잔디타석도 있다. 또 칩샷과 벙커샷, 퍼팅을 연습할 수 있는 숏게임 콤플렉스도 갖추고 있다.

국내 주요 골프장에는 회원이나 내장객들을 위한 연습장을 운영하고 있다. 정규 골프장과는 별도로 파3 연습장과 함께 운영하는 곳도 많다. 정규 골프장에 딸린 골프연습장은 도시 주변에 있는 골프장과 달리 대개 주변 환경도 좋고 시설도 상대적으로 잘 돼 있는 곳이 많다.

한국골프장연습장협회에 따르면 2011년말 현재 전국에는 5,580개의 연습장이 있다. 이 가운데 실내연습장은 4,351개, 실외연습장은 1,208개, 옥탑연습장이 21개이다.

골프숍은 전국에 수천개 산재, 브랜드별 전문매장을 비롯해 골프장 클럽하우스 매장, 백화점과 대형할인점 골프숍, 아울렛 형태의 브랜드 집단 매장도 곳곳에

골프숍은 1967년 문을 연 서울 중구 저동의 서울골프상회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후 골프숍은 골프인구 증가와 함께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현재는 정규 골프장은 물론 파3 연습장과 웬만한 실외 골프연습장에는 거의 대부분 골프숍이 있다. 또 전국의 유명백화점, 대형할인매장 등에는 거의 빠짐없이 골프숍이 들어와 있다.

이와 별도로 도심지나 도시 외곽지역에는 골프용품 브랜드별 전문매장이 있고, 골프숍이 여럿 모여 있는 아울렛 형태의 매장도 각 지역에 산재해 있다.

스크린골프장

실내에서 화면을 보며 골프를 즐길 수 있어 시간과 돈 절약

전국대회 등 각종 대회도 열려, 직장인을 중심으로 청장년층에 특히 인기

필드에서 골프를 치는 전통적인 골프 외에 실제 골프장을 본뜬 화면으로 실내에서 골프를 즐기는 스크린골프도 최근 급속하게 확산돼 인기를 끌고 있다.

스크린골프는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직장인을 중심으로 특히 청장년층에게 인기다.

스크린골프는 골프를 실내에서 즐길 수 있도록 제작된 시스템이다. 골프 시뮬레이터라고도 한다. 스크린골프는 플레이어가 친 볼의 탄도, 방향, 거리, 스피드, 회전 등을 판독해 데이터화시키는 센서,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영상을 보여주기 위한 하얀 광목천으로 된 스크린, 그리고 프로젝터, 컴퓨터, 스윙플레이트, 오토티업기, 퍼팅시뮬레이터, 모션카메라 등으로 구성돼 있다.

스크린골프는 초기 평면 화면에서 최근에는 실제 골프장을 3차원 영상으로 구현한 최신형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또 플레이트도 페어웨이와 러프, 그리고 벙커를 구분해 샷을 할 수 있도록 다양화되고 있다.

스크린골프장은 도심지나 외곽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웬만한 곳에는 들어서 있다. 골프존을 비롯한 한국의 업체들이 전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크린골프는 일반 필드에서 치는 골프처럼 각종 대회도 개최되고, 동호인 모임도 결성돼 있다. 또 필드 골프와 달리 꼭 4명을 채우지 않아도 되고 많은 인원도 한꺼번에 경기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이용하기에 아주 편리한다. 직장인 모임이나 학교 동기 모임 등 각종 모임에서 뒷풀이로 스크린골프를 즐기는 사례도 늘고 있다.

캐디

1920년대 효창원 골프코스에선 고의적삼에 고무신을 신은 까까머리 앳된

소년들, 요즘은 멋진 유니폼을 차려 입은 2, 30대 젊은 여성들이 주류

캐디도 변화가 심했다. 초기 캐디들은 주로 남자였다. 1920년대 효창원 골프코스에서 플레이하는 사진을 보면 골퍼는 조끼까지 갖춰 입은 정통 신사복 차림이었고 캐디는 고의적삼에 고무신을 신은 앳된 소년들이었다. 모자도 없이 천진난만하게만 보이는 까까머리였다.

사진을 보면 소년 캐디들이 요즘 파3 연습장에 가면 웨지와 퍼터, 그리고 숏 아이언 한 두 개 정도를 넣을 수 있는 작고 간편한 클럽백 같은 것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캐디라고 하기 보다는 그저 클럽을 들고 따라다니는 심부름꾼 역할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효창원 골프코스 플레이 사진- 소년 캐디 초점)

예전 캐디들은 골프백을 어깨에 매거나 수동카에 싣고 걸으면서 경기를 진행했다. 때문에 하루에 2라운드(2게임)를 하면 피곤하고 지치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골프장이 전동카로 운영되면서 경기를 진행해 한결 수월하고 부드러운 진행을 할 수 있게 됐다.

캐디의 성별도 지금은 여성 캐디가 압도적으로 많다. 남녀 캐디가 있는 골프장도 있지만 상당수 골프장은 여성 캐디 뿐이다. 골프장별로 통일된 멋진 유니폼을 갖춰 입은 2, 30대 여성 캐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부 고급 골프장엔 대졸 학력의 고급 인력을 캐디로 채용하는 곳도 있다.

캐디가 봉사료로 받는 피(Fee)도 최근엔 팀당 12만원까지 높아졌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8월 14일 현재 팀당 캐디피를 12만원 이상 받는 곳은 18홀 이상 국내 골프장 325곳 중 31.4%인 102곳이었다. 특히 회원제 골프장은 227곳 중 40.1%인 91곳이 팀당 12만원을 받았고, 퍼블릭 골프장도 98곳 중 11.2%인 11곳에서 12만원을 받았다.

이처럼 캐디피의 인상과 함께 캐디도 고소득 전문 직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캐디피가 인상되면서 골퍼들의 부담도 늘어났다. 일각에선 ‘캐디선택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쉽게 도입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골프 장비와 복장

초기 클럽은 감나무 같은 나무 소재를 우드클럽의 헤드로 활용,

볼도 밤나무 등으로 만들어

최근엔 각종 첨단 소재로 만든 다양한 클럽 나와

골프 장비와 복장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1920년대 사진을 보면 초기 골퍼들의 골프 장비는 요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였다. 먼저 클럽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것 같다. 요즘은 최대 14개까지 허용되지만 초기에는 그 절반 안팎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 파3 숏홀 연습장에 가면 볼 수 있는 하프백 정도 크기의 골프백을 들고 다녔다. 클럽수가 요즘의 절반 정도이다 보니 클럽백의 크기도 단연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클럽(골프채)의 소재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우드클럽 헤드를 감나무, 오얏나무, 살구나무와 같은 과수나무를 주로 사용했다. 우드클럽이라는 명칭도 헤드를 나무로 쓴 데서 연유했다. 당시 우드클럽의 특징은 헤드와 타면(페이스)이 얇고 길었다. 어떤 클럽은 클럽헤드의 힐에서 토우까지 6인치가 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언클럽은 헤드는 아이언으로 하되 샤프트는 나무였다.

아이언이나 금속 합성 소재가 발달하지 못한 예전에는 헤드나 샤프트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소재가 없었다.

클럽헤드의 형태도 초기에는 망치나 갈퀴형, 수뢰형 등 다양한 형태였다. 그러다가 서서히 지금의 클럽 모양으로 단순화됐다. 헤드의 크기도 계속 커져 지금은 비공인 500cc까지도 나와 있다. 다만 국제적으로 공식 인정된 헤드 크기는 460cc까지다.

골프볼도 초기에는 너도밤나무 등으로 만든 우드볼이었다. 그러다 새의 깃털과 가죽으로 만든 패더리볼이 나오고, 뒤이어 현재와 같은 딤플을 새긴 형태의 볼이 등장했다. 골프볼의 소재는 합성고무와 우레탄을 비롯해 각종 첨단 소재가 총 동원되고 있다. 최근에는 타구 감감각과 비거리, 컨트롤 기능을 더욱 향상시킨 파이브피스볼(5겹볼)까지 등장했다.

골프복장도 초기엔 조끼까지 갖춰 입은 정장 신사복 차림에 중절모자를 써,

지금은 골프 전용 웨어에 신발, 양말, 모자, 선글라스까지 착용해 패션화

골퍼들이 입는 복장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초기 골퍼들은 주로 정장 차림이었다. 조끼까지 차려입은 신사복에 일반 구두를 신었다. 모자도 골프용 모자가 아니라 일반 중절모를 많이 썼다. 1900년대 초기만 해도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극소수였기 때문에 골퍼들을 위한 복장이 별도로 생산되거나 판매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접어들면서 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골프 인구도 늘어나 골퍼들이 입는 복장도 서서히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남자 골퍼의 경우,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쓰는 스타일이 일반화됐다. 골프웨어 산업은 2000년대 이후 국내 골프인구가 급증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국내 브랜드뿐 아니라 외국계 브랜드가 여럿 들어와 그야말로 골프웨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골프 웨어뿐 아니라 모자, 신발, 양말, 관련 화장품, 선글라스 등 골프용품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요즘 투어 프로들의 경기를 보면 특히 여자선수들은 최신 패션웨어에 신발, 모자, 선글라스 등으로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한국을 빛낸 골프 선수들

한국을 빛낸 골프 선수들은 수없이 많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남녀 선수들은 세계 무대를 누비고 있다. 특히 여자골프는 9월 5일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박인비를 비롯, 4위 김인경 , 5위 유소연, 7위 최나연, 9위 박희영 등 10위 안에 5명이 들어갈만큼 성장했다. 그동안 여자 골퍼들이 받은 누적 상금도 엄청나다. 한국 골퍼의 위상을 드높이고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한없는 자신감을 심어줬던 박세리는 LPGA 상금만 1,194만 달러를 벌어들여 가장 많은 상금을 받았다. 현재 LPGA에서 뛰고 있는 현역 선수 중 최나연, 박인비, 신지애, 김인경, 한희원, 장정은 모두 5백만달러 이상의 누적 상금액을 기록하고 있다.

남자의 경우, PGA에서 8차례 우승했던 최경주가 세계 랭킹 106위다. 그동안 받은 상금액은 2,837만달러다. 양용은은 메이저 대회인 PGA챔피언십 우승(2009) 등 두 차례 우승을 포함, 총 835만달러를 받았다.

영친왕, 유능 부지 30만평 기부 등 한국 골프 태동기에 크게 기여

한국의 골프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영친왕(이은)이다. 그는 나라를 잃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는 동안 근심을 잊기 위해 골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핸디캡은 25, 이후 영친왕은 유능 부지 30만평을 골프장 건설을 위해 무상으로 임대해 주는 한편 당시 2만엔을 하사하는 등 한국 골프가 태동하는데 이바지했다.

한국인 골퍼가 처음 등장한 곳은 청량리 골프코스다. 윤호병씨를 비롯해 한상룡, 박용균씨 등이 있었다. 장병량 선수는 한국인 골퍼로서 처음으로 일본인 골프 아성을 깨고 1936년 경성골프구락부 챔피언이 됐다. 그는 1937년과 1938년에도 우승, 3연패를 기록했다.

한국 프로골퍼 1호 연덕춘 선수, 한국인으로서 일본과 한국 오픈 동시 제패

한장상, 김승학 등 뒤이어, 1990년 이후 최경주와 양용은 등이 PGA에 진출

한국 프로골퍼 1호인 연덕춘 선수는 17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골프유학을 했다. 1935년 22세에 프로자격증을 땄다. 이후 1941년에 일본오픈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에 버금가는 쾌거였다. 그는 1958년 한국오픈에서도 국내 첫 우승을 차지하는 등 초창기 한국골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연덕춘에 이어 한장상, 김승학이 한국 골프의 계보를 이어갔다. 한장상은 1967년 한국오픈에서 우승했고, 1972년 일본오픈에서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우승했다. 김승학은 1968년 한국오픈에 이어 1973년 아시아골프써킷겸 필리핀오픈, 1978년 한국오픈 겸 아시아써킷대회에서 우승했다. 조태운은 1974년 한국오픈에서 우승했다.

1980년대 이후 최상호, 김종덕, 강욱순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대 이후 최경주와 양용은, 노승렬, 배상문 등이 PGA에 진출해 활동하고 있다.

구옥희, 일본과 미국 무대에서 활동하며 한국 여자프로 골프 개척,

박세리, LPGA 25승의 화려한 전적으로 ‘박세리키즈’ 낳아

현재 세계 여자랭킹 1위 박인비 등 10위 안에만 한국인 5명 등 수십명 활약

여자 프로골퍼로는 구옥희가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으나 2013년 7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과 해외에서 총 44승이라는 불멸의 금자탑을 쌓았고 2005년에는 KLPGA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한국 여자골퍼로는 LPGA 최초 진출자이자 최초우승자이며 JLPGA 최초우승자이기도 하다.

박세리는 2007년 USLPGA, 세계골프, KLPGA 명예의 전당에 동시 입회한 한국이 낳은 걸출한 스타다. 국내 대회에서 7회 우승했고 LPGA에서만 25승을 거뒀다. 그는 이른바 ‘박세리키즈’를 낳은 선수로도 유명하다.

이 밖에도 고우순, 원재숙, 강수연, 김미현, 박지은, 한희원, 신지애, 최나연, 박인비 등 여자 선수들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현재 국내에는 수백명의 남녀 프로골퍼들이 활약하고 있다. KPGA와 KLPGA에 등록된 선수들은 물론 프로 지망생까지 폭넓게 분포돼 있다.

아마추어 골퍼도 각종 세계대회서 우승, 준우승 하며 국위 선양

아시안게임에선 남녀 합해 총 12개의 금메달 사냥해

KGA가 1990년대 초반부터 실시한 국가상비군 육성제도와 선수육성 프로그램이 한국 골프의 급성장에 크게 기여

아마추어 선수들도 각종 대회에서 입상, 한국의 골프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1994년 세계여자아마추어골프팀선수권대회(프랑스)에 박세리, 김미현, 권오연 선수가 출전해 준우승을 했고, 1996년 필리핀대회에선 강수연, 한희원, 김경숙 선수가 우승해 한국아마추어골프의 저력을 과시했다. 한국여자팀은 2000년 독일에서 개최된 대회에서도 준우승했다.

이후 2010년 제24회 세계여자선수권대회에서 단체 우승과 개인전 1, 2, 3위를 싹쓸이한데 이어 2012년 제 25회 세계여자선수권대회에서도 단체 우승해 2연패를 달성했다.

남자팀은 1996년 세계아마추어골프팀대회 개인전에서 서종현 선수가 준우승했다. 2012년 제28회 세계남자선수권대회에선 단체 3위에 입상했다.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 선수들이 맹활약, 2006년 도하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자팀의 김경태와 김민휘가 각각 개인전 금메달, 남자팀이 단체전 금메달을 땄다. 1986년 서울과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선 남자 단체전 금메달과 동메달에 이어 김기섭과 김현우가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자팀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원재숙이 개인전 금메달을 딴 이래 2006년 도하와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 류수연과 김현수가 각각 개인전 금메달을 땄다. 여자팀은 이 세 대회와 2002년 부산대회에서 모두 네 차례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밖에 개인전에서 이종임(1990년 베이징), 강수연(1994년 히로시마), 김주미(2002년 부산)가 은메달을, 송채은(1994년 히로시마), 장정(1998년 방콕), 박원미(2002년 부산), 최희영(2006년 도하), 김지희(2010년 광저우)가 동메달을 각각 획득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아시안게임 골프부문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8개, 동메달 8개 등 총 28개의 메달을 획득해 가장 많은 메달을 기록했다.

이처럼 한국 남녀 아마추어 골프선수들이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국위를 선양한 이면에는 대한골프협회(KGA)가 1990년대 초반부터 실시한 국가상비군 육성제도와 선수 육성 프로그램이 크게 이바지했다.

골프관련 단체

대한골프협회(KGA) 주축으로 KPGA, KLPGA 등 여러 단체가

한국 골프 발전 위해 노력

초창기 골프단체는 일제 강점기인 1937년 경성, 대구, 평양, 부산, 원산 골프코스 등 5개 골프장이 결성한 조선골프연맹이다. 1953년 서울컨트리구락부가 창설되고 1959년 한국골프협회가 발족했으나 4·19 당시 사회단체 및 정당 활동 금지로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서울컨트리구락부가 국제대회 등 행정 업무를 맡아 처리해오다 1965년 4월 아시아·태평양골프연맹(A-PGC) 가입과 함께 서울, 한양, 부산 등 골프장들이 주축이 돼 1965년 9월 한국골프협회가 출범하게 된다. 초대 회장은 박두병씨가 맡았고 이듬해 5월 문교부에 사단법인 한국골프협회로 등록인가를 마쳤다. 1982년 인도아시안게임에 골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1985년 협회 명칭을 대한골프협회로 변경했다. 1986년에는 대한체육회에 가입했다.

대한골프협회(KGA. 회장 허광수)는 한국 골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골프 스포츠의 진흥과 보급, 국민체력 향상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대한골프협회는 9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산하에 4개 연맹(한국초등학교골프연맹, 한국중·고등학교골프연맹, 한국대학골프연맹, 한국실업골프연맹)과 16개 시·도협회가 있다.

대한골프협회는 국위선양을 위해 세계적인 골프스타 발굴을 위해 국가대표 및 상비군선수 육성은 물론 골프장의 코스레이팅 및 슬로프레이팅을 실시하고 있다. 또 공인 핸디캡증명서 발급, 규칙 제정과 보급, 골프 관계 법규 개선사업 등도 벌이고 있다.

대한골프협회는 2013년 현재 총 20개의 대회를 주최 또는 주관하고 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회장 황성하)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회장 구자용)는 한국 프로골프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다. KPGA는 1968년 11월 창설됐다. KLPGA는 1978년 KPGA내에 여자프로부로 시작해 1988년 2월 KPGA에서 독립해 창립했다.

KPGA는 올해 각각 56회째를 맞는 KPGA선수권대회와 한국오픈을 비롯해 총 14개의 투어프로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KLPGA는 정회원 890명 등 총 1,762명의 선수가 등록돼 있으며 KPGA보다 더 많은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박인비, 최나연, 유소연, 박희영, 신지애, 전미정, 안선주 등 여자선수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데 힘입어 KLPGA대회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KPGA와 KLPGA가 주최하는 투어프로대회에는 수많은 갤러리들이 모여 선수들의 경기모습을 지켜본다.

이밖에 골프장 경영인들의 단체인 한국골프장경영협회(KGBA. 회장 박정호)가 1974년 창설됐다. 올 현재 266개사가 가입해 있다. 그 외 한국대중골프장협회(KPGCA. 회장 강배권), 한국골프연습장협회(KGCA. 회장 정대용), 한국골프용품협회 등의 골프 관련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들은 모두 소속된 회원들의 권익 보호와 정보 교류, 대외적인 창구로 활동하며 한국 골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골프 매스컴

방송, 신문, 골프전문지 등 골프 관련 보도 크게 늘어나

국내 골프가 발전해오면서 골프 관련 매스컴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골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 TV채널에서부터 신문, 전문잡지 등 매체도 다양해졌다.

골프전문 케이블 TV방송은 현재 J골프와 SBS골프가 있다. 이 두 방송은 국내 대회뿐 아니라 PGA와 LPGA를 비롯한 일본과 유럽 등 해외 투어프로대회를 중계하고 있다. 또 레슨 프로그램과 골프 소식도 다양하게 편성해 방송하고 있어 아마추어 골퍼들에게도 인기다.

그 외 공중파와 케이블 TV 등 일부 방송도 국내외 큰 대회가 있을 때는 중계 방송에 나서는 등 골프 프로그램을 편성해 방송하기도 한다.

종합일간신문의 골프 기사도 크게 늘어났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고정소식란에 가끔씩 보이던 기사가 19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지면의 양과 게재 회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스포츠지들이 경쟁적으로 창간되면서 골프지면이 크게 확대됐다.

1998년 박세리 선수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자 일간지들이 1면 톱으로 다루면서 골프기사의 1면 등장이 본격화됐다. IMF로 온 국민들이 실의에 빠져있던 당시 박세리의 우승 기사는 1면 스트레이트 기사에 3면 해설 기사, 그리고 사설까지 곁들인 완벽한 종합 선물세트였다. 같은 날 상당수 일간지엔 박세리의 우승을 축하하는 대기업의 축하광고가 1면 하단에 5단짜리로 실렸다.

올들어 박인비 선수가 LPGA에서 나비스코챔피언십과 LPGA챔피언십, US여자오픈 등 메이저 3연승을 기록하자 다시 1면 기사로 등장했다. 요즘은 골프기사가 스포츠면의 톱기사로 실리는 것은 전혀 낯설지 않다.

골프 소식만을 전하는 주간신문도 생겨났다. 1990년 창간된 레저신문을 비롯, 한국골프신문 등이 발행되고 있다.

월간 전문잡지는 10여종이 넘는다. 올해 창간 18주년을 맞는 골프가이드를 비롯, 골프다이제스트, 골프매거진 등이 골프와 관련한 다양한 내용을 담아 매월 발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 잡지는 해외에서 발행되는 유명 골프잡지와 라이센스계약을 맺고 기사와 사진을 전용게재하고 있다.

골프 관련 간행물, 영화, 드라마 등 줄이어

골프장도 개방해 지역민들과 소통, 새로운 골프 문화에 앞장서

초기 골프서적은 주로 레슨 이론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해외 번역물을 비롯해 소설, 에세이 등도 출간됐다.

최근에는 만화로 엮은 레슨서적은 물론 영상 비디오, 사진 중심으로 엮은 골프안내서 등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골프 간행물이 봇물을 이루는 것과 함께 골프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도 시도됐다. 1980년대 말에는 코스 잔디 관련 논문들이 발표됐고, 그 이후 해외 유학파들이 늘어나면서 골프 기술이나 심리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골프 관련 박사 논문들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골프가 인기를 끌고 골프 인구가 급증하면서 골프가 영화나 TV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역전에 산다’ ‘공공의 적’ 등의 영화와 ‘라이벌’ 같은 TV드라마에서 골프가 등장했다.

이같은 흐름과 함께 골프장들도 최근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일반인들에게 개방, 여러 가지 문화행사를 갖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서원밸리CC의 그린콘서트, 아난티클럽서울의 숲속영화음악감상회, 대구CC의 음악회, SKY72에코소풍행사, 제주중문골프장의 달빛걷기행사 등이 대표적이다. 그밖의 다른 골프장들도 1년에 한 두차례 정기적으로 골프장을 개방해 어린이 사생대회나 자모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주민들과 소통을 하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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