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교수 자유주의 | [정택주] 김학철 교수의 정체 . 01 – 그는 누구인가? (Cbs 잘잘법,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 ,천국, 지옥, 자살, 설리, 구하라, 배교, 신앙, 의심, 정의, 심판) 28565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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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
지옥이 없다면 연쇄살인 강간마도 천국에 간다는 말.
기분좋고 멋져보이는 말이지만, 하나님을 정의는 없는 불의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나쁜 말.
지옥이 없다면 성경은 왜 필요하며 구원은 왜 필요하며 예수님은 왜 필요하며 십자가는 왜 필요하며 기독교는 왜 필요하며 교회는 왜 필요한가.
기독교를 무너트리는 자유주의의 정체.
인문주의와 멋진 인격 아래 감춰진 왜곡된 성경해석, 마귀의 함정.
영국교회가 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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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 교수의 정체 – 그는 누구인가? (CBS 잘잘법, 자유주의 신학의 위험성 ,천국, 지옥, 자살, 설리, 구하라, 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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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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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 Verbum

목회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신학을 탐구하는 성도들에게 자유주의 신학을 제대로 … 현재는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분당두레교회 담임목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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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erbum.com

Date Published: 1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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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신학자, 목회자 “손원영 교수를 지지한다” – 베리타스

연세대 김학철 교수는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성명을 내고 연서명을 … 손 교수 파면의 근거로 그가 해방주의 신학과 수정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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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eritas.kr

Date Published: 1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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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개신교, 신천지와 이단 전쟁 결말? – 한겨레

보수 교계가 진보·자유주의 성향의 신학적 흐름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며 … 김학철 연세대교수 는 “이단이 없었다면 기독 교리의 집약이자 신앙고백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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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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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주 – 나무위키:대문

자유주의 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약화시키거나 부정하는 불순한 행위”로 … 이 때문에 잘잘법 채널의 김학철 교수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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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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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목사님, 고대 근동 신화랑 창세기가 비슷하대요ㅣ김학철 교수 …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24강, 정태홍 목사.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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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news.com

Date Published: 3/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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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한종호 < 사람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 자유주의신학의 신봉자들과 좌경 세력,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 김영봉·김회권·임의진 목사나 김학철·구미정·백소영 교수가 주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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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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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역사적 바울 연구 – 두란노몰

그는 유럽 교회가 쇠퇴한 결정적인 이유 하나가 자유주의 신학이 끼친 영향임을 깨닫고 그에 맞서 복음주의 … 김학철 |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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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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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김학철 교수 자유주의

  • Author: 정택주Paul 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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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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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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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신학자, 목회자 “손원영 교수를 지지한다”

서울기독교대학교가 훼불사건에 사과한 점을 문제삼아 손원영 교수를 파면해 논란이 이는 가운데 동료 목회자 및 성직자들이 연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연세대 김학철 교수는 지난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손원영 교수를 지지한다’는 제하의 성명을 내고 연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개설 취지에 대해 “손 교수의 파면은 잘못을 저지른 한 기독교인의 행동을 동료 기독교인으로서 책임지려 한 데에서 비롯됐다”며 “우리는 동료 신학자와 목회자로서 손 교수님의 파면에 큰 고통과 연대감을 동시에 느낀다. 복음을 증언하고 시민 정신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오는 26일까지 연서명을 받아 여러 언론매체에 연서명과 그 취지를 담은 서한을 보낼 예정이다. 김 교수는 “매우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싶어 하나 이 성명서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성명이라 그 뜻을 다 담지 못한다. 다른 형태로 손 교수님의 파면에 대응하는 길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는 뜻을 전해왔다.

24일 자정 기준 224명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연서명에 이름을 올렸다. 아래는 김 교수가 낸 성명서 전문이다.

손원영 교수를 지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그에 근거한 신학에 의거하여 손원영 교수의 신학과 실천을 지지하며, 서울기독대학교의 이사회가 손 교수의 파면 결정을 철회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 드린다.

성서와 복음에 근거한 신학자

손 교수 파면의 근거로 그가 해방주의 신학과 수정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그 신학들은 서울기독대학교의 신학과 충돌한다고 한다. 이에 손 교수는 자신이 위에서 열거한 신학의 맹목적 추종자가 아니라고 밝혔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우리는 그의 책과 논문을 토대로 그의 해명이 신학적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그는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고통 받는 약자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복음을 변화된 상황에 맞게 적실하게 해석하고, 경직된 신학적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는 뛰어난 신학자, 특출한 기독교교육학자다. 이러한 그의 신학이 스톤·캠벨 운동을 지향하는 신학과 충돌할 이유가 없다. 도리어 그의 신학은 성서로 돌아가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 운동의 전통에 입각한 신학이다.

신뢰받는 기독교 선교를 실천한 신학자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그간의 선교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공격적이라고 비판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근본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선교는 사회적 지탄을 받아왔고, 이 때문에 점차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신망이 무너져온 것이 사실이다. 파면을 촉발시킨 것으로 알려진 개운사 불당 모금은 우상숭배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의 사회적 신망을 높인 선교 행위다. 많은 비기독교인들은 손 교수의 모금 활동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호감을 보인 이유는 명확하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아닌 것에 대해서도 연대 의식을 갖고 책임 있게 행동하려고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비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헌법 정신과 시민 상식

기독교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국교는 기독교가 아니며 도리어 우리의 긴 역사를 돌아볼 때 기독교는 근래에 이 땅에 온 외래 종교다. 우리는 겸손을 잃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이웃을 섬겨야 한다. 또한 이 땅의 헌법 정신과 시민 상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손 교수의 성실 의무 불이행을 지적하면서 열거한 항목에는 위의 정신과 상식을 볼 때 부적절하다고 지적할 만한 것이 있다. 성실 의무는

헌법과 시민 상식에 준할 때만 유의미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서울기독교대학 측 및 손원영 교수와 함께 이 기도를 드리기를 원한다. 지난 약 20년 동안 손원영 교수는 여러 보직을 통해 성심성의껏 서울기독대학교를 섬겼다. 이번 일이 서울기독대학교와 손 교수가 모두 복음 안에서 하나 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손원영 교수를 지지하는 목회자와 신학자 일동

혼돈의 개신교, 신천지와 이단 전쟁 결말?

[표지이야기] ‘다락방’ 이단 규정 철회와 신천지에 대한 범교파적 배격운동 등 ‘이단 논쟁’ 점입가경… 이단은 ‘종교적 진리’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할 수 있게 하는 ‘내적 타자’, 이단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어떤가

개신교의 이단 시비가 점입가경이다. 교단들 사이에 오가는 날선 공방에는 ‘사탄’ ‘마귀’ 같은 살벌한 언어가 난무한다. 시비의 발원지는 보수 교단의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다. 배타적 구원관 등을 이유로 거대 주류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았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도총회(속칭 ‘다락방’)에 대해 한기총 지도부가 지난 1월 이단 규정을 철회한 것이 발단이었다. 금품 로비설이 불거졌고, 한기총의 핵심 교단 중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의 목회자들마저 지도부를 성토하고 나섰다. 같은 교단 소속임에도 다락방의 이단 해제를 승인한 한기총의 전·현직 대표회장(홍재철·길자연)의 목사직을 박탈하라고 교단 쪽에 요구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기총의 핵심 간부 입에서 “과거 다락방에 내려진 이단 판결은 정치적 이유에서 나온 ‘괘씸죄 이단’”이란 말까지 나왔다. 교계의 이단 판결이 그들 말대로 엄밀한 교리적 기준에 따라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고백한 셈이다.

이단 판결, 엄밀한 교리적 기준이 아니었다

몸살을 앓기는 진보 교단도 예외가 아니다. 상대적 진보성을 견지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올해 부산에서 개최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대한 협조를 구하려고 반(反)WCC 성향의 보수교단 연합체인 한기총과 공동선언문을 채택한 게 사달이 났다. 선언문에는 △종교 다원주의 배격 △공산주의·인본주의·동성애 반대 △타 종교 신자들에 대한 개종 전도 허용 △성서 무오설(無誤說) 지지 등의 내용이 담겼다. 보수 교계가 진보·자유주의 성향의 신학적 흐름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며 들이댔던 ‘감별 기준’들이다. 진보 개신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거세게 반발했다. 한신대·감리교신학대·성공회대 교수들의 비판 성명이 이어졌다. NCCK 가맹 교단이면서 과거 보수 개신교단에 의해 ‘비정통’으로 매도당한 아픔이 있는 한국정교회에선 ‘쓰레기 합의문’이란 격한 반응이 나왔다. 합의문에 서명한 김영주 NCCK 총무가 사죄하고 합의문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파문은 진정됐지만, 보수 교회로부터 공공연한 이단 시비에 시달려온 비주류 교회의 신앙적 자존감은 다시 한번 상처를 입었다.

이단 판정을 받은 신흥 종파에 대한 배척도 눈에 띄게 강화되고 있다. 1960년대 개신교 신종파 운동에 뿌리를 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총회장 이만희)을 상대로 벌이는 범교파적 배격운동이 그 예다. 실제 지난 1~2년 전부터 많은 교회가 입구에 ‘신천지교인 출입금지’라는 현수막과 포스터, 스티커를 부착하고 대대적인이단 추방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여기엔 은밀하되 공격적인 신천지 특유의 선교 방식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있다. 신천지 교인 신분을 숨긴 채 기성 교회에 출석하며 신도들을 빼가거나, 규모가 작은교회에선 핵심 교직을 장악한 뒤 교회 자체를 신천지 소속으로 바꿔버리는 식이다. 교계 안팎의 이단 공방과는 거리를 둬온 기독교방송(CBS)마저 ‘신천지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지속적인 추방 캠페인을 펼칠 정도면, 이 신흥 종파에 대한 주류 개신교의 위기의식이 남다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단 시비는 교계 울타리를 넘어 정치적 논란으로 번지기도 한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기간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신천지 연루설을 둘러싸고 여야 정치권이 벌인 진실 공방은 이단 논란의 정치·사회적 휘발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당시 온라인상에는 박후보가 신천지 교회와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신천지 핵심 인사들이 박근혜 캠프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다는 주장이 빠르게 확산됐다. ‘새누리’라는 당명을 한자로 옮기면 ‘신천지’가 된다는 그럴듯한 풀이까지 덧붙여졌다. 새누리당은 “근거 없는 흑색선전”이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소문의 배후로 민주통합당을 지목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당시를 떠올리며 “자칫 이단 시비에 민감한 보수 개신교인들의 표심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한국 개신교계의 잦은 이단 시비는 목회자와 신도들이 ‘이단’이라는 종교적 표지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실과도 연관돼 있다. 유달상 편집인은 “특정 교회나 종파가 교계 주류로부터 이단으로 한번 지목되면 교세 확장에 막대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소속 신자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마저 단절돼버린다. 심지어 자녀들의 혼사마저 깨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니 이단 시비에 휘말린 쪽은 어떻게든 그 굴레를 벗어나려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다. 주류 교단의 ‘이단 감별사’들에게 로비를 하거나, 교단 실력자들과 접촉해 이단 해제를 청원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막대한 선거자금이 투입되는 교단이나 연합기구의 큰 선거를 전후해선 교계 안팎에서 ‘이단종파 자금 유입설’이 끊이지 않는다. 1970~80년대 ‘통일교 자금 유입설’로 주요 교단들이 분란을 겪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김학철 연세대교수 는 “이단이 없었다면 기독 교리의 집약이자 신앙고백의 기초인 사도신경도, 니케아 신조도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 로 스스로를 정립하게 만든 ‘거울’이자 ‘매개물’이 다름 아닌 이단 종파라는 얘기다.

누가 정통으로 공인받고 이단으로 단죄받는지는 헤게모니를 누가 쥐느냐에 따라 갈린다. 대체로 이단으로 몰리는 것은 소수파이면서 현행 질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이다. 이런 이유로 종교학자들은 ‘이단’보다 ‘섹트’, ‘소종파’라 는 중립적 표현을 선호한다.

서울 정동의 한 교회 게시판에 신천지 신도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한국 개신교계는 2년 전부터 범교파적인 신천지 배척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개신교는 주인 없는 종교”

눈여겨볼 지점은 왜 개신교계에서 유독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일부에선 교단(종단) 난립 문제를 꼽는다.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펴낸 종교단체 현황(2011년)자료를 보면, 소속 종단이 가장 많은 곳은 불교다. 265개나 된다. 개신교는 이보다 적은 232개다. 그럼에도 이단 논란의 빈도와 강도는 불교를 압도한다. 일반적 설명은 개신교 자체가 배타성이 강한 종교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종교’에 뿌리를 둔 유일신교의 특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같은 유일신교인 유대교나 이슬람에 비해 기독교, 특히 그 안에서도 개신교에 유달리 이단 논란이 잦은 이유는 쉬 해명되지 않는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진구 연구실장(서울대 강사)은 말한다. “이단 논쟁은 교리 해석을 둘러싼 갈등에서 파생한다. 그런데 같은 유일신 전통에 있더라도 유대교와 이슬람은 교리보다 행위(율법)를 강조하는 까닭에 이단 논쟁이 발생할 여지가 적다. 반면 기독교는 행위보다 교리를 중시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도 개신교, 개신교 중에서도 보수 교단에서 이단 논쟁이 격렬한 이유는 뭘까. 이어지는 설명은 이렇다. “가톨릭은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이 강조되고, 교황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위계구조 아래 통일성이 확보돼 있다. 하지만 개신교는 주인 없는 종교다. 성경과 교리 해석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크다.”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독특한 역사와 전통에서 그 배경을 찾기도 한다. 김학철 연세대 교수(신약학)는 “이단 논란은 초기 기독교부터 있었고, 기독교의 역사 자체가 이단 논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부단히 출현하는 소수 교설(敎說)과의 대결·투쟁 속에서 자신의 신학과 교리 체계를 세우고, 신자 집단에 허용되는 신앙의 테두리를 정교화해온 게 기독교라는 것이다. 그는 “이단이 없었다면 기독 교리의 집약이자 신앙고백의 기초인 사도신경도, 니케아신조도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스스로를 정립하게 만든 ‘거울’이자 ‘매개물’이 다름 아닌 이단 종파라는 얘기다.

종교학자들은 이단 시비를 개신교 신학자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이단은 종교현상이자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장석만 종교문화비평학회장에 따르면, 정통과 이단의 구분법은 종교적 신앙집단뿐 아니라 세속적 정치결사나 이데올로기 집단에도 존재한다. ‘사문난적’ 시비로 들끓었던 조선 후기 성리학이나 ‘정통-수정주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20세기 마르크스주의, 현대 정당 안에서 벌어지는 허다한 ‘법통 다툼’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 집단 내부에서 누가 정통으로 공인받고 이단으로 단죄받는지는 집단의 헤게모니를 누가 쥐느냐에 따라 갈린다. 대체로 이단으로 몰리는 것은 소수파이면서 현행 질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이다. 이런 이유로 종교학자들은 ‘이단’보다 ‘섹트’(Sect), ‘소종파’라는 중립적 표현을 선호한다.

양쪽의 진술을 종합하면, 이단이란 결국 ‘권력의 효과’이자, 권력을 지닌 세력이 ‘종교적 진리’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할 수 있게하는 ‘내적 타자(他者)’라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단은 추방되거나 박멸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권력이 있는 곳엔 항상 이단이 존재할 뿐 아니라, 지배 관계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선 없는 이단도 만들어내야 하는 게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신학자 김진호 목사는 “이단 자체보다, 이단을 만들어내는 주류교회의 욕망을 분석하는 게 우선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주류 질서에 반항한 숱한 소종파가 ‘사탄’과 ‘이단’의 이름으로 정죄받아온 한국 개신교사를 봐도 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우선 주목해야 할 시기가 1950~60년대다. 한국 교회에서 사탄론과 이단론이 가장 극성을 부린 때이자, 박태선의 전도관,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문선명의 통일교 등 오늘날 이단시되는 개신교계 소종파의 원류들이 대거 출현한 시기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살육의 후유증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기아와 질병, 자연재해가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여전히 옥죄던 시절, 교계 안팎에 거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인물이 나운몽과 박태선이었다.

다원주의적 교설을 펼치 거나(나 운 몽), ‘재림 예수’를 자처(박태선)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지만, 주류 교단의 배척 저변에는 평신도 출신 신비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교권 세력의 경계심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극단적 보수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극단적 소종파와 ‘안티 기독교’라는 안팎의 저항에 직면해 있다. 서울 명동에서 한 개신교인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펼침막을 들고 전도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단죄받자 종교적 게토로 전락하기도

나운몽은 1954년 자신이 세운 한국 최초의 기도원인 용문산 기도원을 거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열었다. 열광적 분위기에서 진행된 그의 집회는 신들림과 방언, 질병 치유 같은 신비체험이 속출했다. 전국에 제2·제3의 나운몽이 등장했고, 용문산과 비슷한 열광적 분위기에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기도원도 곳곳에 들어섰다. 이즈음 박태선이 주도한 서울 남산과 한강 백사장 집회도 수십만 군중을 끌어모았다. 나운몽처럼 전국 각지를 돌며 연 그의 집회에도 신비체험이 넘쳐났는데, 평신도뿐 아니라 기성 교단의 목사들까지 몰려와 그의 안수기도를 받을 정도였다.

이들에 대한 주류 교회의 대응은 배척과 파문이었다. 종교다원주의적 교설을 펼치거나(나운몽), ‘재림 예수’를 자처(박태선)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지만, 이런 대응의 저변에는 평신도 출신 신비주의자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교권 세력의 경계심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나운몽과 박태선에 대한 이단 판정에도 불구하고, 신비체험을 강조하고 신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인물은 꾸준히 등장했다. 잇단 이단 파문을 거치며 한국 개신교는 이단에 대한 규정을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나갈 수 있었다. 재림 예수나 메시아를 자처하는 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기독론적 이단’ 외에, 공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교회에 와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교회론적 이단),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성령론·계시론적 이단) 모두 이단의 범주에 포함하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연구자들은 이런 개신교의 이단 규정이 신비주의에 대한 교권세력의 뿌리 깊은 경계와 공포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신비주의의 핵심은 ‘체험을 통한 신의 인식’이다. 문제는 신비주의가 확산되면 교권이 무력화된다는 점이다. 성경이나 교회라는 기관, 성직자의 권위를 통하지 않고 ‘신과의 합일’을 통해 신의 메시지를 직접 듣는 것이 신비주의의 요체인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신비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교권·교리주의에 대항하는 두 개의 강력한 흐름을 형성해왔다. 한국 개신교에서 유영모·함석헌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그룹이나 신비주의적 소종파 모두 보수적 교권세력에 의해 줄곧 불온·이단시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신비주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점은 그것이 항상 하층민이나 소수자를 사회적 지지 기반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신비주의는 속성상 교육 수준이 낮고 현세를 초월하려는 열망이 강한 사람들에게 흡인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비주의는 종말사상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에 등장한 대부분의 개신교 소종파 운동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소종파 운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당대를 고통과 위기의 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현실이 이렇다면, 이단 시비와 관련한 교계와 사회의 대응 역시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교회사)는 “성찰과 회개를 통해 기성 교회와 목회자가 영적 권위와 도덕적 지도력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영성과 도덕적 건강함을 되찾으면 기성 교회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서 동력을 얻는 문제적 소종파들도 그 호소력이 자연스레 감소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김진호 목사는 “주류 교단의 경멸과 배척이 소종파들의 고립과 반발감을 심화시켜 건강한 발전 경로를 봉쇄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가 든 사례는 1960년대 박태선의 주도 아래 시작된 ‘신앙촌’ 운동이다. 고통받는 민중의 경제적 자립과 영적 구원의 열망을 받아안고 출발했지만, 교권 위축을 우려한 기성 교단의 배척과 공격에 맞서 폐쇄성을 강화하게 되고, 결국 소통과 갱신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자 교주의 카리스마가 지배하는 종교적 게토로 전락해버린 신앙촌의 전철을 되밟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증상은 좌절된 열망의 대체물”

‘신경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이지점에서 ‘이단’에 대한 경직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 적절한 참조틀을 제공한다. 프로이트가 볼 때 자아가 형성되려면 인간이 지닌 리비도적 충동이 적절한 수준에서 억압·통제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식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불쾌한 표상과 기억들은 무의식을 형성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무의식의 성분들은 틈만 나면 의식의 통제를 피해 교묘하게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신경증의 ‘증상’이 그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에게 증상이란 ‘좌절된 소망 또는 억압된 열망의 대체물(대리표상)’이란 결론이 가능하다.

비슷한 방식으로, 제도화(문명화)된 종교와 이단의 관계를 파악해보는 것도 여러모로 흥미롭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이 인정하듯,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나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길 희구하는 종말론적 충동은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적 열망의 중요 부분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 열망은 길들여지지 않은 리비도적 충동과 같은 것이어서, 종교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억누르고 걸러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방치할 경우 현실의 교권이나 세속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억압되고 추방당한 열정은 일정 조건(사회·정치적 혼란, 교권세력의 위축)이 형성되면 프로이트가 말한 ‘증상’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부단한 정죄와 박해 속에서도 출몰을 반복하는 소종파 운동이 그 증거다. 결국 ‘이단’이란 것도 제도화 과정에서 억압된 신앙적 열정이 느슨해진 검열과 감시의 틈을 비집고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사회적 증상’의 한 형식인 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단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든 인간은 잠재적 신경증 환자”(프로이트)이듯, ‘호모 렐리기우스’(종교적 인간)의 운명에 순응하는 한, 우리는 모두 잠재적 이단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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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종호 목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은 기득권을 버리는 일이며, ‘버리는 것’은 내세우지 않는 작업을 포함한다”고 했다. (사진 제공 복음과상황)

그는 요즘 ‘꽃자리’를 엮으며 마음껏 변두리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함께 모인 이들과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이 많다고 했다. 6월 7일 바로 그 꽃자리에서 한종호 목사를 만났다.

전병욱 목사의 교회 개척 소식이 화제다. 2000년부터 그를 ‘알아본’ 목사님의 견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의 이야기를 짧게 정리한다면.

설교 안에 목회가 전반적으로 녹아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의 정체성이 설교에 녹아 있다는 생각에 설교 분석을 시작했다. 당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전병욱 목사 개인에 대한 옹호나 비판이 아니었다. 그의 설교와 신학적 사고에 깊이 스며 있는, 또 거기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에 주목했다. 그것은 사실 한국교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이었다. 전 목사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걸머지고 나가는 젊은 목회자 세대의 대표 주자처럼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신학이 나사렛 예수의 삶이 지향하는 바와 배치되고, 각종 인문·사회과학적 분야에 무지한 문제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비판은 불가피했다. <전병욱 비판적 읽기>(뉴스앤조이)에도 썼지만 세속적인 성공주의, 엘리트주의 등을 강조하는 그의 설교는 청년들이 신앙 골격을 형성하는 데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또 신앙의 배타성, 독선주의를 은연중에 강하게 전달하는데, 그런 것들이 청년들의 신앙에 영향을 끼칠 경우,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둡다고 생각했다.

성추행 혐의가 그때부터 있었다고 들었다.

그의 설교 비평은 한두 번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때 <뉴스앤조이> 게시판에 전병욱 목사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자매가 글을 올렸다. 그것이 커졌다. 전병욱 목사가 연락을 해 왔다. <뉴스앤조이> 기자가 갔는데, 긍정도 부정도 않더란다. 그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일종의 병이었다. 다만 그때는 물증이 없으니까 ‘그럴 리가 있느냐’는 의견이 대세였다. 피해를 본 자매가 한둘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피해자들을 매도하는 분위기였는데, 녹취록이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물러난 것이다. 10년 만에 같은 사건이 났는데 돌출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문제가 이제야 터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한 회개, 혹은 구체적인 사죄의 언급 없이 교회를 개척한다고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런 사람이 교회를 개척하는데 사람들이 몰린다는 게 걱정이다. 전병욱 목사 측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로 명분이 생긴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고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집단을, 다소 심하게 표현하자면, ‘사병화(私兵化)’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찌 보면 그의 대중적 인기가 그를 망가뜨린 것이다. 한 개인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지지를 얻을 때, 그 이후에 오는 허전함이 있다. 그때의 고독감이 잘못된 방향으로 틀어지면 전혀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진다. 젊은 나이에 추앙을 받다 보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다시 대중적 인기를 안고 개척을 하려고 한다. 위험한 선택이다. 작년에 이동원 목사님 인터뷰할 때 그러시더라. 젊은 사람인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를 살리는 길인지는 분명하다.

그의 개척 소식을 듣고, 목사님의 활동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글쎄, 내가 집중할 수 있는 분야는 결국 그의 설교가 아닐까. 잘 알다시피 전병욱 목사의 목회 관심은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복잡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비전을 주는 데 있다. 그런 차원에서 전 목사의 설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강도와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최근 그의 저서인 <영적 강자의 조건>과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이상 규장)는 책을 보았다. <영적 강자의 조건>이 나약해지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승리와 성공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준다면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 주고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다. 이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누구도 이러한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험악한 생존 경쟁의 직업 전선에서 성서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어떤 가치와 목표를 사명으로 품을 것인가’이다. 이런 당면 과제 앞에서 전 목사는 도리어 시장의 논리 곧 현실이 요구하는 승패의 논리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승리의 위상과 좌표를 그려 주고 있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선과 의에 대한 본질적 충성보다는 남보다 더 빨리, 더 강하고, 더 높게 자신의 위치를 굳히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오히려 바로 이들 때문에 더 많은 소외와 빈곤과 착취와 모순과 부당한 압박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실현할 것인가, 정의롭고 선하고 평등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전 목사에게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뇌와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촉구와 격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는 패배자가 되더라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이상과 가치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나라 안에서 승리하는 자의 가장 소중한 모습이라는 점을 최대한 강조해야 하는데 전 목사의 메시지는 전혀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 질타는 할 줄 알지만 성서적 위로의 능력은 없고, 청년들의 감각에 맞는 언변과 수사에 능하지만 정작 자신의 죄는 극복하지 못한 이에게서 나오는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참 고민스럽다.

사실 전 목사뿐 아니라 교회 지도층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불미스러운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명성과 교회의 크기, 교회 정치 내에서의 영향력 등 ‘육신의 잣대’가 중심이 되고 있는 현실은 선한 의지에 상처를 주고, 새로운 뜻을 품은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낳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는 한국교회의 장래에 자신감을 갖기 어려울 뿐더러 예수운동의 근본으로 돌아가, 생명력 충만한 현실을 만들 수도 없다. 기득권을 누리는 교회의 현실로서는 하나님나라의 일꾼이 되는 일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됨은 기득권을 한없이 버리는 일이며, 그 버림은 또한 결코 내세우지 않는 작업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도층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기에 바쁘고, 그로써 개인적 명망을 쌓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 10년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으로 일할 당시, 한종호 목사는 필자를 주류가 아닌 소장파 학자들과 목회자로 재구성했다. 이는 신선하다는 반응과 함께 <기독교사상>의 독자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제공 복음과상황)

대중에게 호응을 많이 받는 설교일수록, 그것이 신학적·성서적으로 바른 것인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안 그러면 교인들이 피해를 입는다. 김진홍 목사의 역사관이 어떻게 굴절되었는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그는 당시 설교에서 미국 등 강대국에 줄을 잘 서야 산다고 가르쳤다. 이는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 세계를 향해 미국 앞에 줄 설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던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그대로 본뜬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밀실에 갇힌 예수>에도 언급했지만 그의 변화무쌍한 발언을 보면서 이제 “무늬만 개혁인 개혁적 종교 지도자”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김홍도 목사 같은 경우는 얼마나 많은 설교를 ‘비상식적인 내용’으로 채우나. 요즘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세습을 단행했던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의 참회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홍도 목사의 형인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가 교회를 세습했을 때 교회뿐 아니라 주요 언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때 김홍도 목사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세습을 비판하는 이들의 진의는 교회 파괴에 있고,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으려는 ‘적-그리스도 마귀’의 행위며 자유주의신학의 신봉자들과 좌경 세력,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설교인가. 그런데 교인들은 거기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세뇌가 되면, 다른 설교가 안 들어온다.

강준민 목사의 경우는 대중에게 매우 섬세하게 다가간다. 그는 자신의 성서 해석을 통해서 인생의 한 고비에 서 있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일깨우려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로써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로 일으켜 세운다면 기쁜 일이다. 문제는 그의 이러한 접근법이 마치 한때 유행했던 ‘적극적 사고방식’의 한 변형이거나 ‘세속적 축복론’의 계열에 속한 논의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강준민 목사와 같은 흐름 속에서 기독교 메시지가 이해될 경우, 우리는 시대의 거대한 장벽과 마주 서서 자신의 온몸을 던져 죽기까지 하셨던, 그래서 꺾이지 않는 생명력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 가진 의미를 끝끝내 깨우치지 못하게 된다.

김동호 목사는 김진홍, 김홍도, 강준민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설교자인 것 같다.

요즘 소위 고지론과 미답지론이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삼일교회 후임으로 내정된 송태근 목사가 인터뷰에서 한국교회 청년들의 의식 구조 속의 잘못된 고지론, 어설픈 고지론을 언급하자 김동호 목사가 페이스북에서 불을 붙인 모양이다. 지금 고지론 전도사인 김동호 목사와 논쟁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김동호 목사가 2003년 교회 게시판에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한 구구절절한 찬사’를 보낸 칼럼에 대해 그 생각이 변함이 없는지 묻고 싶다. 그건 ‘고지론자’가 품고 있는 뿌리 깊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역사의 비애와 극적으로 대결하면서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모순과 갈등, 고난과 비극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만나는 이마다 한국 사회의 고뇌를 이야기하고, 정세의 혼란을 말하며 한반도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김동호 목사의 글이나 설교에서는 절절한 고난에 대한 성찰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유의 설교에 의해 훈련된 기독교인들은 그래서 역사의 과제를 말하는 신앙을 회피하거나 적대한다. 그런 것 따위는 신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듯 말한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가 늘고 그와 함께 믿는 이들의 수가 증가한다 해도 그것은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사건일 뿐,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역사의 희망을 만들어 가지 못한다.

아직도 설교 비평에 대해서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느냐는 인식이 깔려 있다.

옛말에 ‘볕이 밝으면 그림자도 진하다’는 경구가 있다. 희미한 빛 앞에서는 그림자 또한 희미하나, 밝은 빛 앞에서는 그림자도 진해지는 법이다. 그 빛이 너무 밝아 그림자를 보지 못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명망 있는 설교자들의 그림자는 너무 밝은 빛에 가려, 빛인지 그림자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설교가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며 교권적 군림을 꾀해도, 삶과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유리되어 버려도, 메시지가 교묘하게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에도, 오도된 역사 인식을 주입시켜도 그 진한 그림자는 그만 빛에 매몰되고 만다. 세뇌당하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인 셈이다.

인기 있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다뤘기에 욕도 많이 먹었을 것 같다.

<뉴스앤조이>를 창간할 때 처음으로 ‘설교 비평’이란 악역을 맡으면서,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접했다. 당시만 해도 강단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지금은 다른 분들이 저보다 더 나은 설교 비평 작업을 해 오시기에 그때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졌고 받아들이는 분들 입장에서도 이런저런 견해를 피력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설교란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명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설교에 대하여 일반 평신도가 논리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정리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평신도가 설교를 비평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나 안목 없이 설교에 노출되면, 설교자의 일방적인 논리에 휘둘리거나 잘못된 신념을 갖게 된다. 은혜라는 것은 올바른 메시지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의 결과다. 잘못된 메시지에조차 무조건 ‘아멘’ 하는 것은 최면이나 오도(誤導)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하며, 어떻게 평신도들의 성서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도록 할 것인가, 수준이 달라진 평신도를 대하는 설교자의 설교가 질적으로 발전하도록 어떻게 견인하는가 하는 문제의식과 질문이 이어진다. 바로 이것이 설교 비평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 한종호 목사는 새로 시작한 꽃자리 출판사를 책과 관련한 현안과 교회 이야기를 나누는 장으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꽃자리 출판사는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밀실에 갇힌 예수>에 이어 불교, 개신교, 천주교 입장에서 현안을 분석하거나 풀어줄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 번째 책 출간을 계획 중이다. (사진 제공 복음과상황)

퇴근을 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빛과소금> 책임자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사무실로 다시 오라는 말이었다. 퇴근 중이니까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고 했더니, 급한 일이라고 지금 당장 오라는 거다. 사무실에 가니 나더러 <뉴스앤조이>의 이성규가 당신이었냐, 묻더라. 맞다고 했더니 회사와 온누리교회 비서실, 심지어 간암 수술을 위해 미국 LA에 있던 하용조 목사도 상당히 걱정하는 눈치여서 바로 사표를 썼다. 두란노가 추구하는 신앙과 ‘이성규’의 글이 보여 주는 그것은 함께 가기가 불가능했다. 다음 날이 수요일이었다. 두란노 직원들은 수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결론적으로는 깔끔하게 마쳤다.

10년 가까이 일한 <기독교사상>(기상)에서 그만둘 때는 ‘깔끔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다. ‘내쳐졌다’는 표현이 인터넷에 돌더라.

기상에서 일한 때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내 인생에 있어서도 좋았던 기억들이 많고,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에도 충분히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서 한편 감사하다. 나도 그런 배려를 잘 알고 있기에, 내 역량의 대부분을 남김없이 쏟았고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만두는 과정에 있어서의 매끄럽지 못한 일이 그동안의 좋았던 일을 다 뒤엎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출판국장(지금은 상무 겸 출판국장)이 부르더니 사장과 같은 생각이라면서 기상을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 한마디로 황당했다.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면서 사장의 얘기를 대신 전한다 하기에, 그 자리에서 이유도 묻지 않고 ‘알았다’고 했다. 인사권자인 사장을 만나서 얘기할 생각이었다. 사장을 직접 만나 그만두라는 이유가 뭐냐 물었더니,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필자’와 ‘경영’의 문제란다. 필자는 ‘주류 필자’를 쓰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내가 기상을 맡은 후 편집 방향이나 필자 선택에 대해 주변에서 좋은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당신 스스로 얘기하고선 이제 와서 필자가 문제라니,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기상에 연재했던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은 단행본(<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설교의 절망과 희망>)으로 묶여 당신이 사장으로 온 이래 가장 많이 팔렸다고 격려금까지 받았다. 그 외에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으로 호응을 받은 것이 한두 권이 아니었다. 정용섭·김기석·김영봉·김회권·임의진 목사나 김학철·구미정·백소영 교수가 주류인가? 적자 경영에 허덕이던 것을 흑자로 돌려놨더니 경영이 문제라고? 대한기독교서회는 1년 예상 매출 150억을 가까스로 90억대로 마감하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절 책임을 묻지 않고, 몇억 뿐인 기상의 예산을 가지고 문제 삼는 곳이다. 대판 싸우고 그 후 다른 부서로 발령을 내기에 그만두었다. 할 얘기는 많지만 그만둔 사람이 나와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싶다.

통합진보당 사태도 그렇지만, 기독교 안에도 진보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꼼수를 쓴다. 아주 안 좋은 정치꾼들이 너무 많다. 일종의 밀실이다. 밀실에서 소수의 몇 명이 이 판을 다 휘저을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한다. 내가 머물렀던 곳에서도 공적인 영역을 사유화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능해도 자기 사람이면 승진한다, 사고치고 나가도 내 사람이면 다시 불러 앉힌다. 기상에 있으면서 편집 방향을 주도적으로 결정해 왔지만, 못 한 것이 있다. 한기총 문제가 불거졌을 때, 창간 때부터 독자인 제주도 사는 어느 장로님이 한기총 문제를 특집으로 심도 있게 다뤄야 한다고, 기상에서 나팔을 불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진보 측 이해관계로 다루지 못했다. 당시 보수적인 기윤실이 한기총 해체 운동의 전면에 나섰지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NCCK 총무가 <국민일보> 인터뷰 기사에 순복음교회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조용기 목사 가족의 문제는 다루지 말자며 옹호하고 나서는 현실이다. 이 인터뷰 기사에 대해 <뉴스앤조이> 김종희 대표가 비판한 ‘NCCK 총무 보니 한기총 해체만이 능사 아니네’라는 글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상의 정신과 어긋나는 사람의 1년 연재가 나간 적도 있다. 낙하산으로 떨어진 필자였다. 어떤 사람인지 몰랐는데 첫 글이 나간 후 엄청나게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야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사람에 대한 기사가 <미디어오늘>에 나오기도 했다. 10년 동안 있으면서 가장 부끄러웠던 일이다.

두란노서원을 그만둘 때와는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상처가 크지는 않았는지.

두란노서원을 그만둘 때는 인간적인 면은 지켜 줬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당시 두란노서원 원장)는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힘들 수도 있다면서 상당한 금액의 격려금을 주기도 했다. (퇴직금과 합해서 <뉴스앤조이>에 다 부었지만) 꼭 돈 때문이 아니다. 함께 일했던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10년을 다닌 직장에서 직원들한테 인사도 못 하고 나왔다. 심지어 기상 편집위원들한테도 인사하지 못했다.

▲ 손석춘 교수와 김기석 목사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10년간 기상을 많이 바꾼 것에 대해서 지금은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지만, 초기에는 힘들었다. 표지를 인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가 많았을 정도니까. 과거에는 에큐메니칼 진영의 필자 일색이었다. 지금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활동하지만 진보 진영 못지않은 소신과 견해를 펼치는 이들이 글쓴이로 결합했다. 신선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평한 정용섭 목사, 실존적인 깊은 영성을 담아내면서도 역사와 현실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김기석 목사, 함석헌과 김교신을 옆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풀어놓은 백소영 교수, 성서 속의 숨결을 풀어낸 임의진 목사, 렘브란트와 성서를 연결하는 신선한 글을 쓴 김학철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김회권 교수도 1년 넘게 모세오경을 연재했다. 여기에 주류가 아닌, 소장파 학자들과 목회자들로 필자를 재구성했다. 글쓴이와 다루는 내용이 달라지니 독자 폭도 넓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꽃자리’라는 출판사를 냈다. 무슨 뜻인가.

구상의 시 ‘꽃자리’에서 가져왔다. 돗자리에 무늬가 들어가 있는 자리를 꽃자리라고 한다. 꽃이 떨어진 자리라는 뜻도 있다. 꽃은 떨어진 자리에서 열매를 맺는다. 꽃잎의 모양이 십자가도 되고,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류연복 선생님이 직접 글자를 써 주셨다. 그리고 나무에 직접 파서 오셨다.

특별히 출판사를 시작한 이유가 있으신지.

원래 옛날부터 책 마을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좋은 필자들을 모셔 글쓰기 강좌도 열고, 1박 2일로 책과 관련한 여러 현안과 교회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해 볼 참이다. 일하면서 얻은 제일 큰 자산이 사람이다. 인터뷰로 만나고, 소개에서 소개로 만나고. 제일 큰 힘이다. 그런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계속 미뤄 왔는데 ‘꽃자리’를 시작한 계기로 다양하게 시도해 보려 한다. 도메인(fzari.com)도 하나 만들어 놨다. 이 공간에서 나를 비롯한 7~8명의 필자들이 글을 쓸 것이다. 예를 들어, 전병욱 사건도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옛날처럼 날을 세운다기보다 그때그때 중요한 현안을 깊이 조명해 볼 생각이다. 지금 좋은 필자들이 모인다. 기상에서 하던 ‘나의 설교를 말한다’도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 ’20년 넘게 기독교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써 내려간 흔적’이라고 소개한 한종호 목사의 저서 <밀실에 갇힌 예수>.

얼마 전에도 만났는데 손석춘 교수와 김기석 목사는 지금도 이메일을 주고받는다고 하더라. 이 책은 일부러 ‘종교’가 아닌 ‘인문 사회’ 쪽으로 잡았다. 앞으로도 진보니 보수니 나누는 것보다, 여기저기 넘나들 수 있는, 오지랖 넓은 사람의 책을 낼 생각이다. 김회권, 김기석, 김민웅, 김영봉과 같이 외연을 넓혀 가면서, 신앙의 본질을 대중적으로 풀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나온 책은 직접 쓰신 <밀실에 갇힌 예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독교 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써 내려 간 흔적”이라고 표현했다.

한국교회의 실상은 너무 암담하다. 빛과 소금이 아니라 빛을 막는 두꺼운 암막이며, 소금이 아니라 세균이었다. 슬픈 현실을 막고자 하는 마음으로 써 왔던 글들과 새 글을 묶어 출판했다. 교회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니라 교권을 가진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인들이 예수를 따돌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밀실에 갇힌 예수를 광장으로 나오게 하려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앞으로 꽃자리에서 나올 책들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책을 계획하고 있는지.

다음 책의 콘셉트는 ‘잡설’이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의 입장에서 현안을 분석하거나 깊이 풀어 줄 수 있는 분들을 모시고 이들의 이야기를 담을 참이다. 서로의 종교 입장에서 공통분모도 있을 것이고, 갈등도 있을 것이다. 정리해서 책으로 내려고 한다. 하나님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하나님의 거시기>나, <성서의 에로티시즘>, <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그리고 설교 비평과 관련한 책들과 이현주 목사의 <불을 지르러 온 불>이라는 책을 내려고 한다. 이현주 목사의 책은 아주 결기가 넘치는, 결이 서린 글이다. 단상과 기도문으로 짜인 짧은 글인데, 다시 내고 싶다. 항상 돈이 문제지, 낼 책은 많다.

경제적인 상황은 어떤가? 매달 안정적인 급여를 받다가, 갑자기 ‘대표’가 되어 힘들 것 같다.

지금까지는 사는 데 특별히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조금 안 좋다. 지금 있는 이 사무실도 비워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다. 20여 년을 먹고, 책 사고, 그 돈을 아꼈으면 집 한 채를 샀겠지. 작년 11월에 급여 명세서를 처음으로 아내에게 보여 줬다. 20년 동안 급여를 한 번도 아내에게 갖다 준 적이 없다. 회사를 그만둘 때에도, 한 번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번에도 1년 해 보면서 말아먹더라도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하더라. 비빌 언덕이 있으니 개기는 것이다.

포기한 것인지, 지지해 주는 것인지.

포기김치를 많이 먹었더니. (웃음) 100퍼센트 지지해 준다.

신학을 공부하고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우연히 출판·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20년이 흘렀다. 그간 어떤 이들의 편을 들어 주며 살아왔나?

사람들은 늘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크든 작든 주도권을 잡고 싶어 한다. 나는 비주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눈길이 가는 것은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 바닥에서 주류는 아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 연대하고 편이 되어 주는 사람들과 함께 가고 있다. 역사는 주류와 강자가 써 나가는 것 같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상은 강자의 편에 붙어사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치지만 성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현실은 대세를 쥔 쪽에 서라고 하지만, 성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라고 한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약삭빠르게 사는 꾀가 많고, 강하고 부해져서 오만해진 자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것 같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길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비록 초라한 것 같고 대단할 것도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 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될 것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를 비교하면 시냇가의 나무는 아무것도 아닌 듯싶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드러내 보이는 생명의 힘을 소중히 여기는 이를 축복한다고 하시지 않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삶을 가난하다고 여기고, 힘없다고 생각하면서 내버리고 만다. 그건 착각이 아닐까? 하나님의 축복을 굳게 믿는 이들은 세상의 대세에 휘둘리지 않는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강자나 부자들의 오만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은 여전히 힘이 없어 늘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한다. 교회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거처가 과연 얼마나 되어 주고 있는 것일까? 거대 교회, 이른바 메가처치가 되기 위한 야망에만 집중하는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만 같다.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따르고, 권력이 되고 있으며 의로운 시인들을 추방하고 있지 않은가. 악인의 삶은 아무리 매혹적이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악인의 삶일 뿐이다. 성서의 시인들은 이 선과 악의 분별에 민감했다.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 이 세상을 돌이키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영혼이 시들지 않으며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축복을 바랄 것인지, 우리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달려 있다.

진행 및 정리 : 이범진 편집위원, <유코리아뉴스> 기자

본보 제휴 <복음과상황>,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도행전과 역사적 바울 연구

지난 세기에 대부분의 신약학자는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바울을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그 결과 사도행전이 제공하는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자료는 바울 연구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저자는 이런 추세에 맞서 사도행전의 바울과 서신서의 바울을 자세히 비교하는 가운데, 누가가 묘사하는 바울의 모습이 매우 신뢰할만하고, 따라서 사도행전이 묘사하는 바울이 곧 역사적인 바울임을 충분히 보여준다. 이 중요한 연구는, 누가가 묘사하는 바울의 모습이 매우 믿을만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도 바울과 그의 신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함을 확고히 한다.

출판사 서평

본서의 저자는 본래 선교사의 열정을 품고 유럽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다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그곳 교회의 실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유럽 교회가 쇠퇴한 결정적인 이유 하나가 자유주의 신학이 끼친 영향임을 깨닫고 그에 맞서 복음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바울 신학 연구에 매진한다. 본서는 그런 맥락에서 쓰인 것으로, 사도행전에 소개된 바울과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괴리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왔던 지난 세기의 비평적 연구에 대항하여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동일 인물임을 강력하게 논증한다.

1장에서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의 차이점을 부각하여 오랫동안 영향력을 끼친 필립 필하우어의 논지를 평가한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필하우어의 방법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필하우어는 누가와 바울의 기록을 그 둘 사이의 범위와 성격상의 차이점을 파악하지 않은 채 단순히 액면 그대로 비교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전도와 교회 개척을 중심으로 기독교 확장의 초기 역사를 기록했고, 바울은 개척 시기가 지난 후 교회에 생긴 이슈들을 다루기 위해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목적으로 편지를 썼다. 저자는 이 두 기록의 목적에 이러한 차이가 있음을 타당하게 지적하며 2장에서는 중요한 방법론을 소개한다. 곧 서로 비교가 가능한 대상을 비교하자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핵심적인 이 방법론은 바울 서신에 있는 “상기 형식”을 사용하여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던 시기에 전했던 내용을 재구성하는 통찰로 이어진다. 저자는 그렇게 재구성한 내용을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전한 설교와 비교했을 때 역사적 바울의 전도 설교의 모든 핵심 요소가 사도행전의 바울이 전한 설교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고린도와 갈라디아에서 전한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와 바울이 이 지역들에서 전했다고 서신서에 기록한 내용을 비교하여 서로의 상응성을 발견한다. 또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연설했던 “목회적인” 내용과 바울 서신에 담긴 목회적인 내용을 비교했을 때도 상당한 유사점이 드러남을 보여준다.

3장에서는 역사가로서의 누가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종종 제기되어온, 바울의 기록과 누가의 기록 간의 불일치점을 조사한다. 저자는 바울과 누가가 각각 침묵하는 주제가 그 두 기록의 양립 가능성을 실제로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또한 시기와 상황이 유사하지 않음을 강조하여, 사도행전에서 율법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바울의 모습이 갈라디아서 바울이 보여주는 모습과 모순되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층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저자는, 자신의 사도직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도직은 인간의 어떤 권위와도 무관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후기(後期)의 바울을, 누가의 바울 묘사 전체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타당하게 주장한다.

4장에서는 “우리-본문”을 살펴본다. 이 본문들에 근거하여 저자는 누가가 가이사랴에서 옥에 갇혀 있던 바울을 섬기려고 가이사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누가가 아마도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바울과 함께 로마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이것이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보고, 그렇다면 사도행전 15:40부터 사도행전 끝까지 이어지는 자료가 대부분 누가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거나 혹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로부터 직접 수집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했던 누가 문헌의 신뢰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누가가 기록한 내용의 신뢰성을 조사했다. 저자는 거기서 바울의 유대적 배경, 다메섹 도상 체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초기 생애, 선교여행 등의 분야에서 바울 서신이 제공하는 정보와 수많은 유사점을 발견한다. 이로써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모두 바울 사도를 열정적인 교회 개척자로 또 고난받고 박해당하는 선교사로 표현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원숭이의 엉덩이가 빨갛고 사과도 빨갛기 때문에 원숭이와 사과가 같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듯이,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의 서로 다른 범위와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양자를 액면 그대로 비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저자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기에 뒤따라오는 단추들도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두 가지 다른 유형의 문헌을 적절한 방법을 통해 비교했을 때 사도행전의 바울과 서신서의 바울이 놀랍게 조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결론은 바울 연구에 있어 사도행전의 자료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 본서는 보수적인 독자에게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이러한 결론이 왜 당연한지를 탁월하게 논증한다. 또한 비평주의 전통에 있는 독자에게는 자신의 논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도록 돕는다. 폴 리쾨르가 “비판이라는 사막을 넘어 우리를 다시 불러주길 바란다”(The Symbolism of Evil, 349)라고 말했듯이, 저자는 비평적인 연구를 넘어 리쾨르 같은 독자를 다시 부른다. 쉽게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신앙이나 어떡하든 믿지 않으려는 비평적인 사막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달궈진 지성이 어떤 것이지 이 책을 통해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서신들과 사도행전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차적 목적과 범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바울 서신에서 바울은 목회자이자 신학자로 보여지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복음 전도자와 교회 개척자로 부각된다. 따라서 누가가 말하는 바울은 복음 전도 설교자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 설교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바울 서신에서 (흔히 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킨 동요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가르침과 비교하는 것은, 비록 그 둘이 서로 모순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더라도, 방법론적으로 위험하다.

_서론 중에서

그는 바울의 네 가지 신학적 주제, 즉 자연 신학, 율법, 기독론, 종말론에 대해 누가가 묘사한 내용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이 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결론은 간단명료하다. 사도행전의 바울은 실제 바울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이 주요 주제에 있어서 누가가 구체적으로 바울 신학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세기 후반의 보편 교회의 교리였던 누가 자신의 신학적 교리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필하우어는 누가가 그리는 바울과 역사적 바울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강조했다.

_1장 필하우어와 사도행전의 “바울 사상” 중에서

학자들은 바울 서신에서 바울의 전도 설교의 핵심을 재발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들은 바울의 사상이 훗날 발전했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나중에 기록된) 서신에서 이러한 설교를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식으로 바울의 전도 설교를 재발견하려는 시도가 방법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지 대안적인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즉 그의 서신에서 바울이 첫 선교사역 기간에 회심자들에게 전한 설교와 가르침의 내용을 상기시키기 위해 사용한 상기 형식(reminder formula)을 특별히 유의하여 살핌으로써 바울의 전도 메시지의 본질적인 부분을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_2장 바울의 전도 설교의 재발견 중에서

첫 번째 차이는 누가와 바울이 각각 침묵하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누가는 바울의 아라비아 방문에 대해 침묵하며, 바울이 편지를 썼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헌금 모금에 대해 길게 글을 쓴 바울과 달리 누가는 이것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누가는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을 때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음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반면 실제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보았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침묵한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에서 예루살렘 공회의 법령을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는 그것의 전문과 배경을 기록하면서 바울이 자신의 대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루살렘 법령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한다.

_3장 차이점 이해하기 중에서

누가가 바울의 동반자였다는 사실은 확실히 “우리-본문”의 신뢰성은 물론 사도행전 전체에 기록된 내용의 신뢰성을 파악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다. 또 그가 사도 바울로부터 상당한 자료를 직접 수집했을 가능성도 열어놓는다. 누가는 함께 선교여행을 하면서 바울로부터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의 삶, 다메섹 체험, 선교여행, 로마 총독 앞에서 받은 재판 등에 관한 이야기를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우리-본문”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본문”은 누가 연구에서 18세기 이후로 가장 많이 논의된 부분 중 하나였고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_4장 “우리-본문”과 바울에 대한 누가의 묘사 중에서

녹스는 누가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묘사를 왜곡시켰다면서 세 가지 구체적인 영역을 강조한다. 누가의 첫 번째 경향은 교회 초창기에 예루살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녹스는 누가가 “기독교는 참된 이스라엘로서 진정한 유대교의 연장”이라는 점을 입증하려 애쓴다고 주장한다. 둘째, 누가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교회의 지시에 따라 사역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또한 그는 때때로 발생하는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 계속 연합하고 조화를 이룬 상황을 서술한다. 셋째, 누가가 제시한 자료는, 바울의 종교가 실제적인 의미에서 유대교이기 때문에 바울이 엄벌을 받아 마땅한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는 누가의 인식에 따라 정치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_5장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누가의 묘사 중에서

한국어판 서문 _ 19

영문판 서문 _ 23

약어표 _ 26

서론 29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의 성격 38

바울 서신: 후속 편지

사도행전: 복음의 메시지와 복음의 진보에 대한 기록

적절한 비교를 향하여 44

사도행전의 저자로서의 누가 47

1장 필하우어와 사도행전의 “바울 사상” 55

자연 신학 59

율법 67

율법과 할례에 대한 바울의 태도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

기독론 81

종말론 85

임박한 재림이 서신의 핵심 주제?

바울 서신에 있는 구속사

필하우어의 방법론에 대한 이의 제기 99

결론 105

2장 바울의 전도 설교의 재발견 108

방법론의 문제 110

“상기 형식”과 바울의 전도 메시지 116

고린도에서 전한 설교를 상기시키는 표현들

갈라디아에서 전한 설교를 상기시키는 표현들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설교를 상기시키는 표현들

로마와 골로새 교회를 ‘상기’시키는 표현들

바울의 전도 메시지에 대한 요약

사도행전의 바울과 실제 바울의 전도 설교 비교 133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전도 설교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의 상응하는 복음적 주제들

복음 전도자 바울

특정 지역에서 전한 전도 메시지 비교

결론 166

3장 차이점 이해하기 168

누가와 바울이 침묵하는 주제들 169

바울의 유대인적인 특성 묘사 180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횟수 188

바울과 예루살렘의 관계 193

예루살렘 공회에 대한 묘사

안디옥 사건 때의 관계

동역자의 교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권 이양

결론 211

4장 “우리-본문”과 바울에 대한 누가의 묘사 215

사도행전 16:10-17의 “우리” 219

사도행전 20:5-21:18의 “우리” 222

“우리-본문” 지역에서의 바울의 사역 229

고린도

데살로니가

빌립보

에베소

결론 236

5장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누가의 묘사 240

바울의 초기 생애 243

바울의 유대인적 배경

회심/소명과 중생 이후의 초기 시절

선교사로서 사도 바울 253

바울의 선교여행

교회 개척자 바울

박해받는 선교사 바울

바울의 동역자들

바울의 특징

결론 278

결론 281

연구의 요약 284

학문적 공헌 291

실천적 적용 295

참고문헌 _ 298

인명 색인 _ 316

성경 색인 _ 320

주제 색인 _ 342

사도행전의 바울에 관한 기록에 공정한 역사적 신뢰를 주면서,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을 비교·연구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귀중한 학문적 도약대가 될 것이다.

김경식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본서는 한 번 제대로 둑을 쌓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둑은 꽤 견고해 보인다. 그 둑을 쌓는 시도로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고, 이런 시도에 동참하고자 하는 후학들(신약학자, 목회자, 신학생)의 필독서다.

김동수 | 평택대학교, 한국신약학회 직전 회장

이 책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에 관한 기록이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음을 옹호하려는 대담한 시도다. 이 책이 역사적 바울에 관한 실증적 사실을 입증했느냐의 여부는 여전히 독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겠지만 사도행전의 바울 이야기를 완전한 누가의 창작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신중한 태도로 누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김학철 |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본서는 사도행전의 바울과 서신서의 바울이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정당한 시도로서 찬사를 받아 마땅하며, 동시에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각기 고유한 맥락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크나큰 공헌을 하고 있다.

류호영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최종상 박사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의 다차원적 관련성을 탐구하여 사도행전의 바울과 바울 서신의 바울이 연속적이며 동일한 역사적 인물임을 탁월하게 논증한다.

송영목 |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최 박사는 사도행전의 역사적 가치를 주장해 왔던 다수의 복음주의 학자들의 발자취에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사도행전을 균형 있게 연구하려는 목회자나 신학생들은 반드시 이 책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양용의 |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저자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의 랑데부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 방면의 중요한 주제를 논의하는 본서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윤철원 |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이 책은 사도행전의 역사적 바울을 바울 서신과 비교하며 연구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관한 비판적이고 치밀한 역사적 분석과 방법론을 배우고자 하는 신학도들에게 유익한 책이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이 책은 사도행전의 바울과 서신서의 바울을 그 생애와 주요 활동 및 핵심적 신학 사상 등을 아우르며 비교, 대조, 분석한 연구 저서로 그 세밀한 공력이 돋보인다. 이 책이 해당 주제에 대한 연구로 매우 풍성한 성취를 거둔 점을 높이 평가하며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차정식 | 한일장신대학교, 한국신약학회 회장

신학자이면서도 선교사이며 교회 개척자로서 조국을 멀리 떠나 오랜 세월 복음 사역자로 살고 있는 최종상 박사만큼 복음 전도자 바울의 다면적 초상을 피부적으로 더 잘 공감할 수 있는 학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한국교회와 신학교에 더욱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허주 |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ISBN 9791161291499

쪽수 352쪽

판형 152*225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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