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에서 가나안 까지 거리 | 알기쉬운 성경지리 5회 [출애굽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 129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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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홍해에서 시내산까지
3. 시내산에서 약속의 땅 앞까지
4. 오랜시간 광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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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애굽 에서 가나안 까지 거리

  • Author: WOONGS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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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5. 6. 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ZvL_1NT4Xg

‘만나’의 의미 / 출애굽기 16장 13절 – 21절

오늘 본문에는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약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아무리 양식을 많이 가지고 나왔다 하더라도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 반 정도가 지났기 때문에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져서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애굽에서 그냥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는 약 320km정도고 실제로 행진한 거리는 약 640km정도입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걸어서 한 달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넉넉하게 한 달 반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예상이 빗나간 겁니다.

우리들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행복하게 살려고, 평안하게 살려고, 안전하게 살려고 보험도 들고, 연금도 들고, 적금도 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준비하면 평안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준비하면 안전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행복하게 살려고, 평안하게 살려고, 안전하게 살려고 열심히 비축하고 준비했는데 내 힘으로 비축해 놓은 행복이, 내 힘으로 비축해 놓은 평안이, 내 힘으로 비축해 놓은 안전이 얼마 오래 가지 못해서 떨어질 것 같아서 불안해합니다.

지금 당장에는 굶지 않지만 앞으로 굶을 것 같아서 불안하고, 지금 당장에는 아프지 않지만 앞으로 아플 것 같아서 불안하고, 지금 당장에는 문제가 없지만 노후에는 살기 힘들 것 같아서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지금 비축해 놓은 행복과 평안과 안전이 곧 떨어질 것 같아서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가리켜 광야에 비유하고 사막에 비유합니다.

광야와 사막의 특징은 결핍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이사야 43장 19절에서 약속하시기를 그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

을 떠나

광야

로 갈 때 처음부터

광야

에서

40

년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간 것이 아닙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오래 있어야 한 달 반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식량을 한 달 반치만 가져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광야의 결핍을 만나고 사막의 결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메추라기 로 먹이시고 , 어떤 때는 만나 로 먹이시고 , 어떤 때는 바위에서 터져 나온 생수 로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입고 나온 옷은 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양식이 떨어져 인생이 결핍의 광야가 되고 결핍의 사막이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길을 내주시고 강이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만나는 그렇게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시나이 반도 내륙 지방에서 흔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연지벌레라고 하는 벌레에서 나오는 분비물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에 떨어진 다음에 기온이 내려가는 밤중에 단단하게 굳는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침에 그걸 모아서 먹을 수 있답니다.

그런데 이 알맹이들은 온도가 조금만 올라도 녹기 때문에 해가 뜨면 얼마 있지 않아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특별하게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시나이 반도 내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침마다 먹을 수 있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 장정만 60만 명입니다.

아이들과 여자들을 다 합하면 족히 200만 명이 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이신 사건이 초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말에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이 말하기를 광야에서 60만 명은 고사하고 한 가족도 살 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비슷한 현상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3460년 전에 광야에서 경험했던 만나 사건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 만나 사건은 절대로 모든 사람들이 평범하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만나는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의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만나

가 품고 있는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데 그 채우시는 방법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채우실 때도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채우실 때도 있다는 것

입니다

.

예를 들면 만나를 주시는 방법과 같은 방법입니다.

본문 13절로 14절을 보겠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고 그 이슬이 마른 다음에 보니까 그 자리에 빵가루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둬다가 먹었더니 그것이 식량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먹기는 먹지만 그것의 이름은 모릅니다.

그래서 “이게 도대체 뭐야?”라고 서로 물었는데 이것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만나’의 뜻이 ‘이게 도대체 뭐야?’라는 뜻입니다.

‘이게 도대체 뭐야?’라고 할 정도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 필요로 하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로는 ‘입는 것’과 ‘먹는 것’과 ‘살 곳’, 즉 의(衣) 식(食) 주(住)의 문제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어떤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필요로 합니다.

의(衣)식(食)주(住)의 문제와 안전의 문제,

젊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 필요를 자기가 채우려고 애굽에서 나올 때 있는 힘껏 먹을 것을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길어야 한 달 반의 필요를 채울 뿐이었습니다.

그 이상의 필요를 채울 능력은 그들 자신에게 없었습니다.

그 이상의 필요는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채워주시는 방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채우는 방법까지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느 대학을 가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하나님, 저 아무개랑 꼭 결혼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하나님, 저 어느 회사에 꼭 취직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하나님, 저 빚을 다 갚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방법까지 내가 결정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저 내가 결정한 방법대로 움직여주시기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필요를, 나의 부족한 것을 그냥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면 물론 내가 생각했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채우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가 생각한 방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때가 더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잔치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뜻이고 기쁨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인잔치를 하고 있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문제가 곧 닥쳐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는 중단될 것이고 기쁨도 중단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마리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 잔치가, 그 즐거움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인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만 말하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방법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드신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던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기도가 잘 안 된다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기도가 잘 안 되는지 아십니까?

나의 필요를 말씀드리는 동시에 해결방법까지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해주시기를 원하니까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방법까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 찬양이 생각났습니다.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내 찬양 받으실 주님

내 맘을 주께 활짝 엽니다 내 찬양 받으실 주님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찬송의 옷을 주셨네

내가 하는 일은 그냥 주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나의 필요를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

내가 하는 일은 그냥 주님을 향하여 나의 마음을 활짝 여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근심을 찬송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와 그의 시종이었던

게하시

를 보십시오

.

아람나라의 군대가 엘리사 선지자와 시종이 있는 도단 성을 겹겹으로 포위했습니다.

이 때 이 광경을 본 사환 게하시가 우리는 이제 다 죽었다고 울고불고 하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뭐라고 기도합니까?

열왕기하 6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자신의 필요를 자신의 능력으로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없게 되면 걱정을 하고, 두려워하고, 낙심을 하고, 절망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보호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 못할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만나로 먹이시는 하나님’이란 무슨 뜻입니까?

방법까지 우리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신다고요?

빌립보서 4장 19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 다음

만나가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통해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입니다

.

본문 21절을 보겠습니다.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나를 매일 아침마다 주셨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표현에 의하면 ‘일용할 양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한 달 치를 한꺼번에 주시거나, 두 달 치를 한꺼번에 주시지 않으시고 왜 번거롭게 매일 매일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많이 주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매일 만나를 거두면서 매일 매일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셨고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매일 영의 양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매일 매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와 교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16장에는 만나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일 동안은 한 사람에 1오멜 씩 만나를 거두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순종하여 식구 한 사람에 1오멜 씩 만나를 거두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않으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멜’이라는 단위는 애굽에서 사용하던 단위로 2.2리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더 거두어다가 아침까지 남겨두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이들이 왜 더 거두어다가 남겨두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린 만나가 내일은 안 내릴 수도 있다고 하나님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6일째 되는 날에는 안식일 것까지 해서 이틀 치를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순종하여 식구 한 사람에 2오멜 씩을 거두면 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나갔다가 헛걸음을 했습니다.

이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너무 욕심내어 거두지 말 것과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불순종하여 거두는 것은 헛수고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명령이 그렇게 어려운 명령이 아니라 단순한 명령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거두면서도 과연 내일도 만나가 내릴까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도 나가면 만나를 거둘 수 있을까 나가봤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의 노력과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매일 주심으로 매일 교제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시편 8편 4절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대로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생각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자기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에 ,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기 때문에 , 하나님께서 나를 참아주시고 기다려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역대상 17장 16절에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복이 쏟아져서 만사가 잘 풀리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저는 다윗의 이 고백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다윗은 목동 출신입니다.

목동은 당시 직업 중에 가장 비천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천한 목동 출신인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도 자기가 왕이 된 것이 자기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이길래 저를 이렇게 존귀한 자들같이 여기셔서 왕까지 되게 하셨습니까?”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변질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 이렇게 돈을 버는 이유는,

내게 지금 이렇게 집이 있는 이유는,

내게 지금 이렇게 직장이 있는 이유는,

내게 지금 이렇게 사랑하는 가정이 있는 이유는,

내게 지금 이렇게 건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온전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중에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염려하지 않는 사람,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여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아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초라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우리 앞을 가로막은 인생의 요단강을 하나님의 말씀을 메고 담대하게 믿음과 순종의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우회 (출 13:17~22)

이스라엘의 우회 (출 13:17~22)

❚거룩한 우회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길이 막혀 있고 표지판에 “우회하시오”(迂廻, 멀 우, 돌 회 자를 쓰며 영어로는 detour라고 하지요)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길은 안 되니 다른 길, 먼 길로 빙 돌아가세요.”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시간도 낭비하는 것 같고 “지금 바쁜데 왜 돌아가라는 거야?” 하고 솔직히 짜증도 나지요. 하지만 그 우회하라는 표지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든지 안전 문제가 있든지 말입니다. “에이 재수 없어, 바쁜데 뭐야” 하고 그 길로 강행하게 되면 산사태로 끊긴 길을 만나든지 큰 코 다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집 부리고 내 뜻대로 하려고 들지 말고 “돌아가시오” 하고 좋은 말로 할 때 잘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회(detour)입니다.

성경에도 이 ‘우회’가 나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로 못 가고, 이 길이 분명히 지름길인데, 이 길로 가면 빠른데 하나님이 ‘우회’라는 안내 표지판을 세우고 빙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시간 낭비 하는 것 같고 내 뜻대로 못 가서 짜증나지만 실은 그 안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들어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회하는 길은 멀고 귀찮지만 반드시 운전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돌아가기 귀찮다고, 혹은 내 본디 계획과 다르다고, 비효율적, 비생산적이라고 그 길을 강행하여 가면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답답하고 오래 걸리더라도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면 꼭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성경에 나오는 우회를 ‘거룩한 우회’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또 신앙생활 하면서 때로는 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천천히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빠르다고, 효율적이라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매미는 가을 한 달 동안 맴맴 울기 위해 애벌레로 땅속에서 6년에서 17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예수 믿고 돌아오는 데 수십 년 걸린 분이 있습니다. 왜 이제야 예수 믿게 되었는가, 왜 이제야 하나님께 돌아왔나 후회도 되고 그 긴 세월이 허송세월 같고 아까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좀 멀리 돌아왔을 뿐 이제 주님께 돌아왔으니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어떤 분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며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갑니다. 흥선 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력이 권력을 쥐고 똑똑한 왕족들을 제거하던 시절에 상가 집에 찾아가 밥을 빌어먹고 미친 척 하면서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결국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바로 고종 임금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힘든 길, 먼 길을 빙 돌아간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이 다 깊은 뜻이 있어서 우회 표지판을 세우고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한 우회’입니다. 오늘부터 이 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우회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우회’ 즉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 길로 빙 돌아가게 하신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길치 이스라엘

먼저 성경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안 물어봐서 그랬답니다. 저는 정말 ‘길치’입니다. 길눈이 어두워서 길을 정말 못 찾아요. 그래서 운전할 때 이만저만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길을 잘 못 찾고 잘 잊어버려 돌아갈 때가 많습니다. 대개 부부 중 하나가 길눈이 어두우면 다른 하나는 밝아서 잘 찾아간다는데 저희 아내도 어지간한 길치라서 우리 부부가 함께 길을 찾아가려면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길을 잘 물어보는 편입니다. 길을 찾아가다가 잘 모르면 차를 잠시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가게에 길을 물어봅니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 피우고 안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어떤 부부는 길 찾아가다가 운전하는 남편이 부인 말 안 들어서 부부싸움 하고 이혼까지 했다나요?

오늘 본문에도 ‘길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광야에서 똑바로 가면 며칠이면 갈 길을 못 찾아 헤매서 자그마치 40년이나 걸립니다. 그런데 길을 못 찾아서, 길눈이 어두워서 40년을 헤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헤매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성경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간 거리는 얼마 안 됩니다.

출애굽 해서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320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곧바로 가면 1주일이나 열흘 정도 걸릴 거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약자와 가축도 딸렸으니 아무리 천천히 갔다 쳐도 한 달 이상 걸릴 거리가 아닙니다. 지금 성지순례를 가면 차로는 불과 몇 시간이면 가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거리를 40년이나, 그것도 장정만 60만 명, 남녀노소 다 치면 거의 200만이나 되는 인원이 헤매고 다녔다니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이런 계산까지 했더군요. 가나안 땅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20킬로미터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평균 22미터, 시간 당 1미터도 못 간 셈인데 밤마다 텐트 치고 아침마다 걷어 가나안 땅을 향해 북동쪽으로 하루 22미터씩 거북이, 아니 달팽이 속도로 갔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다못해 200만 명을 한 줄로 죽 세우기만 해도 수십 킬로미터는 될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사실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200만 이스라엘 백성이 열흘이나 넉넉잡고 한 달이면 갈 길을 일부러 40년 동안이나 헤매게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지만 하나님이 마음먹으시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윤형방황’(輪刑彷徨)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똑바로 걷지 못하는데 100미터쯤 가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이 현상을 바로 ‘윤형방황’이라고 합니다. 여러 해 전 중앙아프리카에서 행방불명 된 등반가가 13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과일과 풀뿌리로 연명하며 하루 12시간씩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길을 잃어버린 장소와 그를 발견한 장소는 약 6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12일 동안 12시간씩 걸었다고 가정하면 약 250킬로미터를 걸은 셈인데 결국 6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 안에서 뱅뱅 맴돌며 250킬로미터를 헤맨 것입니다. 세상에도 이런 현상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마음먹고 일부러 그렇게 헤매게 한다면 까짓 40년이 문제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안 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마음먹으시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일부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빙빙 돌며 헤매게 하셨는가? 열흘이나 한 달이면 갈 길을 그 많은 백성이 40년 동안이나 빙빙 돌다가 결국 스무 살이 넘어 출애굽한 장정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다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거룩한 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우회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함께 살펴봅시다.

❚우회의 이유

무엇보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방황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4장 3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열두 명의 정탐군을 가나안 땅에 파견합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의 정탐군이 보고를 하는데 그 가운데 열 명은 야단났다고 보고합니다. 정말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맞는데, 포도송이 하나를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들고 와야 할 정도로 비옥하고 좋은 땅인데 문제는 거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엄청나게 세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성읍은 크고 견고한데다가 사람들 자체가 덩치가 크고 강해서 우리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은 엄청나게 큰 거인들이라서 우리가 그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다면서 우리가 쳐들어가면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겁을 줍니다. 열두 정탐군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아니라고, 비록 그들이 강하게 크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요 먹이라고 보고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 나머지 열 사람의 말을 믿습니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맹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참 좋지만, 저도 민주주의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뭐냐? 다수결이라고 반드시 옳은 결정을 하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다수가 어리석은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도 10대 2라는 절대 다수의 보고를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은 결정을 합니다.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왜 우리를 이곳 광야까지 끌고 나와서 죽게 하냐고, 지금이라도 그냥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배은망덕한 백성들에게 크게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징벌을 내리시는데 정탐군들이 정탐한 40일을 하루 당 1년씩 쳐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40년 동안 올바른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빼고 열 명의 정탐군을 비롯한 모든 성인은 광야에서 다 죽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민수기가 말씀하는 광야 40년 방황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벌을 받아서 그 가까운 거리를 40년 동안이나 헤맨 것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물론 징벌의 의미도 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했고 열 명의 정탐군이 비신앙적인 잘못된 보고를 했습니다. 벌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징벌 이전에 이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방황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보호와 훈련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

첫째, 광야 40년 방황은 보호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출애굽기 13장 17절을 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분명 빠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17절에 나오는 ‘블레셋 길’입니다. ‘블레셋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리 잡고 살던 애굽의 고센 땅에서 가나안을 잇는 가장 짧고 좋은 길로서 약 250킬로미터의 해안 길입니다. 아주 좋은 지름길이요 넓게 뻥 뚫린 완전 하이웨이입니다. 이 길로만 가면 열흘이나 한 달 안에 충분히 가나안으로 가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1970년 중엽에 도단(T. Dothan)이라는 이스라엘 고고학자가 가자 지역을 발굴하면서 놀라운 발견을 합니다. 발굴 과정에서 애굽의 변경 수비대가 이 블레셋 길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애굽은 이 요충지대를 관리하기 위해 변경 수비대를 파견하고 곳곳에 요새를 건축해서 튼튼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깝고 좋은 길이라도 이 길로 가면 틀림없이 이 애굽 수비대와 전쟁을 치를 것이 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애굽의 최정예병들이 구축한 견고한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가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늘 광야에서 조금만 불편하거나 힘들면 투덜대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틀림없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것입니다. 겨우 애굽을 벗어났는데 여기서 또 애굽 군사들을 만난다며 두려워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큰 징벌을 하나님께 받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하시고 가까운 길을 놔두고 험하고 먼 광야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먼 길로 돌아가게 한다고 해서 결코 그들을 방치하거나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21~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이 광야 40년 방황 동안 한 번도 이스라엘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방치하지 않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배고플 때는 만나를 내리시고 목마를 때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십니다. 무서운 적군이 쳐들어오면 하나님은 친히 여호와 닛시, 이스라엘의 깃발이 되고 총사령관이 되셔서 그들을 물리치게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방황 동안 단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키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일부러 우리를 먼 길로 돌아가게 하거나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답답할 수 있습니다. 짜증도 납니다. 왜 가까운 길 놔두고, 왜 편한 길 놔두고 나를 이렇게 멀고 힘든 길로 가게 하냐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사랑의 보호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 오늘부터 학교 갈 때 늘 다니던 그 길로 가지 말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길로 가렴.” 왜 그랬을까요? 늘 다니던 길은 가깝지만 요즘 차들이 워낙 쌩쌩 달려서 사고가 많이 납니다. 불량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초등학교 2학년 녀석이 “엄만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래요? 이제 나도 다 컸으니 알아서 갈 겁니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엄마의 깊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계획을 모르고 불평하고 짜증내며 자기 고집대로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 계획입니다. 우리가 철이 없을 때 이 계획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론 반항하고 내 고집대로 강행하려고 합니다. 좀 멀리 돌아가는 것이 귀찮고 힘들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반드시 큰 코 다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멀리 돌아가는 길을 하나님이 나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그 먼 길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지키고 인도하십니다. 언제나 나와 동행하고 나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니까 그 길이 좀 멀고 힘들어도 안심하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소년을 용사로 키우기 위해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디안 소년들을 야생동물들이 들끓는 숲속에서 밤을 지내게 하는 시험을 통해 훈련을 함으로써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습니다. 이 시험 날 밤, 짐승들이 우는 캄캄한 숲속에서 소년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하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자기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자기를 지키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 뜻에 절대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길로, 좀 멀고 힘들더라도 순종하여 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방황은 훈련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광야로 통과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편안하게 살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기간 광야에 묶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 훈련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그 훈련 프로그램은,

첫째로, 앞서 말씀드린 순종 훈련입니다. 기본적으로 늘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것이 몸에 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대로 가나안에 빨리 들어가게 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가나안 땅에 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징벌을 받아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0년 동안 그들을 헤매게 하시면서 순종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둘째, 말씀 훈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머물게 한 이유는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사는 생활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해 자그마치 1년 동안 거기에 살게 하면서 십계명을 주고 율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광야생활 내내 만나를 주셨지만 육신의 양식인 만나만 준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주며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에서 광야 40년을 회고하는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셋째,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만 바라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니 백성들은 40년 내내 이 구름기둥, 불기둥이 가면 따라 가고, 멈추어서면 함께 멈추어 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천막을 치고 살았던 그들은 언제든지 떠나갈 준비를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위만 바라보고 산 것입니다. 하늘만 바라보는 삶이었습니다.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늘만 바라보고 살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넷째, 길을 묻는 훈련입니다. 설교 첫머리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황한 이유가 길을 안 물어봐서였다고 했지요? 진짜입니다. 길도 잘 모르면서 고집 세고 자존심 세서 안 물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정글 한복판을 탐험하는데 가이드가 키가 큰 잡초와 무성한 덤불을 칼로 자르며 길을 안내했습니다. 아무리 가도 끝도 없어 보이는 정글입니다.

그는 더위와 피로에 지쳐 말합니다. “여기가 어디요? 도대체 어딜 가는지 알고나 가는 거요? 길은 어디 있소?” 노련한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길입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들은 반드시 셰르파라는 네팔인 안내인을 데리고 갑니다. 그곳의 길과 지형에 익숙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험한 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길을 물어야 합니다. 가장 길을 정확하게 아는 분에게 말입니다.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하나님의 자녀로 준비하는 훈련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왕자들은 아주 혹독하고 철저한 훈련과 교육을 받습니다. 왕자에 걸맞게, 장차 왕이 되기 위해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인 독수리는 일부러 새끼를 천 길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립니다. 맹수의 왕인 사자도 새끼들을 절벽에서 밀어버립니다. 왕이 되려면 훈련 제대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왕의 자녀가 되어 왕으로 살려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기나긴 훈련,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그 자녀요 백성인 이스라엘을 순종 훈련, 말씀 훈련,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 길을 묻는 훈련,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우회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절대 빠른 길, 편한 길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지름길만 찾아 가려 하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훈련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혹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우회하시오”라는 표지판을 세워놓고 돌아가게 하시더라도, 때로는 힘든 길, 외로운 길, 실패의 길을 가게 하시더라도, 또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시더라도 그것은 절대 징계도, 여러분을 미워해서도 아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을 더욱 능력 있고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한 과정임을 기억하시고 우회하여 묵묵히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 길을 가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가나안 땅까지 40년이나 걸려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준비하던 지인이 궁금한 듯 물어 왔습니다. 한국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산티아고 길 코스도 길게 잡아 40일이면 다 걷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에서 가나안 땅까지 어떻게 40년이나 걸렸냐는 겁니다.

거리가 좀 멀었나? 사람이 남녀노소 합쳐 수백만 명이었으니 느릴 만도 했겠지….라는 이유를 대 봐도 4년도 아닌 40년은 너무 과장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40년이라 기록되어 있고, 교리반에서도 40년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지도를 보고 확인해 봤습니다. 세계전도를 펼쳐 놓을 필요도 없이 모니터에 구글지도를 불러 놓고 산티아고 길과 이집트 나일강 주변에서 홍해(수에즈 쪽의 해협)를 거쳐 이집트 시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지방까지 대략 줄을 그어 비교를 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왼쪽)에서 나와 가나안(오른쪽)으로 이동할 때 40년 동안 헤맨 광야. (이미지 출처 = Flickr)

지리적으로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 경로를 최단 코스로 잡아 본 길과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 산티아고 길이 배는 더 길어 보였습니다.

탈출기와 신명기를 읽어 보신 분들은 설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40년이나 걸릴 이유가 없는 길을 그토록 오래 헤맸던 것은 짧게 갈 수 있는 길을 안 가고 “뺑뺑이”를 돌았기 때문입니다. 마땅한 지도가 없었다고 해도, 그 많은 사람 중에 홍해를 건너 지중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상들의 고향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은 적잖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야웨께서 보여 주시는 징표에 의지해서 긴 여정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약속된 땅 가나안에 하루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여행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긴 여행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해 한 가지 모범답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련시키시려 했다는 설명이 되겠습니다. 사람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줬는데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자존감도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달리 설명하면, 노예 신분이 아니라 정작 노예근성에서 해방되는 데 그만큼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40년은 물리적 시간일 수도 있지만, 노예생활을 경험했던 세대가 다 사라져 버리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고대라는 점을 감안하여 한 세대를 스물 해로 본다면, 두 세대가 새로 생겨나도록 광야를 헤맨 것입니다.

스스로 설 줄 모르고, 얻어 터져도 먹여 주기만 하면 주인에게 순종하도록 길들여진 사람들. 하느님께 기대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와 그가 숭배하는 신에게 기대는 어리석은 이들. 그들이 스스로 설 때까지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또 한 번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선각자요 지도자로서 그 노예들을 이끌어 낸 모세마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하느님도 히브리인들의 뼛속에 박혀 있는 그 몹쓸 근성을 없애는 데 그만큼 인내심을 발휘하셨어야 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제에서 해방을 맞은 지 일흔 해가 지났고 이제 여든 해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졌습니다. 요즘은 결혼도 늦게 하는 편이니 한 세대를 넉넉 잡고 마흔 해로 본다면, 두 세대인 여든 해는 족히 지나야 우리도 새로운 역사를 열게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밀려듭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그랬듯이 삶의 터전을 떠나서 전혀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는 이상, 해방 직후에 해결하지 못한 친일 부역자들의 후손과 그들의 정신은 집요하게 새로운 역사를 여는 데 발목을 잡을 테니까요.

우리 민족이 진정 해방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까요?

박종인 신부(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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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이동 시간 고려하여 성경 다시 읽기(7)

▲ 하얀색 선이 고센을 출발하여 누웨이바까지 이동하였다고 하는 루트를 따라 표시된 것이다.

출애굽 당시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것도 아주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걸어서 이동하였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낙타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걸어서 가든 낙타를 타고 가든 일반적인 경우 하루 이동 거리를 20킬로미터나 많아야 30킬로미터로 계산했다. 게다가 날씨와 기후,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달라졌다.

고센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 누웨이바까지 ‘사흘 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했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억지스런 추론일 뿐이다. 고센 땅 라암셋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웨이바 홍해까지 400킬로미터를 걸어서 사흘 만에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길은 4~5일은 족히 걸렸을 거리다. 물론 그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을 탔을 가능성은 없다. 그것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이나 나귀·낙타를 타고 이동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 열하루 길(신 1:2)이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발 알라우즈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는 한 달은 족히 잡아야 할 멀고 험한 길이다.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접경 지역 가까운 쪽, 오늘날의 이집트 영토 안에 있는 에인 께데스 지역이나 그곳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에인 꾸데이라트를 지목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같이 의견을 모으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펴가면서 자연스럽게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를 페트라 인접한 곳으로 언급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왕국 시대의 이스라엘 경계 설명과 배치된다. 민수기 34장을 보라. 특별히 남쪽 경계를 묘사하면서 “너희 남방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광야니 너희 남편 경계는 동편으로 염해 끝에서 시작하여 돌아서서 아그랍빔 언덕 남편에 이르고 산을 지나 가데스 납방에 이르고 또 하살에달을 지나 아스몬에 이르…”고 있다(민 34:3~4)고 적고 있다.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 인근 지역에 위치한다면 에돔 왕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이스라엘 땅에 포함시키는 성경해석의 오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 47장 19절에서 이스라엘의 남쪽경계가 가데스라는 언급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역사상 이스라엘 남쪽 경계가 사우디의 미디안지역까지 내려간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저자는 이스라엘 영토가 요르단의 남부 에돔 지역은 물론 사우디 북서 해안 지역을 포함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민수기 20장 16절에는 가데스가 에돔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이라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가데스가 만약에 저자의 주장대로 알라우즈산 아래에 있었다면 에돔의 영역이 미디안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또 다른 주장이 되는 것도 허점이다. 민수기 13장 22절에 보면 점탐꾼이 가데스에서 하맛 어귀까지 정탐하는데 40일(25절)이 걸렸다고 하는데 알라오즈산 옆의 가데스에서 정탐했다면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성경상의 다메섹) 북쪽 하맛 근처까지 가는 데만도 족히 40일은 걸렸을 것이다.

오늘날의 가나안은 무엇입니까?

가나안으로 알려진 땅은 오늘날 레반트 남부 지역에 위치했습니다. 이스라엘,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요르단, 시리아와 레바논 남부 지역. … 이 지역에 대해 알려진 최초의 이름은 “가나안”이었습니다.

또한 가나안은 이집트인가?

가나안의 이름은 크고 번영한 고대 국가 (때로는 독립, 때로는 이집트의 지류) 오늘날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의 레반트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페니키아라고도 불렸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돔과 고모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과거 반도였던 알 리산 남쪽의 얕은 물 아래 또는 인접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해 중부 그것은 이제 바다의 북부와 남부 분지를 완전히 분리합니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 이전에 가나안 땅에 누가 살았습니까?

가나안, 역사 및 성서 문헌에 다양하게 정의되어 있지만 항상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지역. 원래의 이스라엘 이전 거주자들은 가나안 사람. 가나안과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구약뿐만 아니라 기원전 15세기경의 설형 문자, 이집트, 페니키아 문헌에 나옵니다.

가나안은 애굽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까?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총 직선 거리는 8482KM(킬로미터)와 583.09미터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의 마일 기준 거리는 5270.8 마일.

오늘날의 에덴동산은 무엇입니까?

창세기에는 동산과 관련된 네 개의 강인 비손, 기혼, 치데겔, 비랏이 분명히 나와 있는데, 이는 그 위치가 현재 이라크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 “에덴 동산 또는 낙원은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장소로 개념화됩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찾았습니까?

사해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에 이르기까지 악명 높은 도시에 대해 많은 위치가 제안되었습니다. 고고 학적 유적지나 폐허는 지금까지 소돔이나 고모라로 확실하게 결정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에덴동산의 물리적 장소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는 여전히 흐르는 두 개의 잘 알려진 강입니다. 이라크 오늘. 성경에는 그들이 앗수르, 즉 오늘날의 이라크를 거쳐 흘렀다고 합니다.

성경은 가나안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창세기 9 : 24-27

그는 말했다. 저주받은 [가나안]; 그는 종의 종이 되어 그의 형제들에게. 그가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하시리니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시리로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다.

가나안에는 누가 살았습니까?

가나안 사람들 고대 문헌에 따르면 현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의 일부를 포함했을 수 있는 지역인 가나안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자들이 가나안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은 그들이 접촉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서 비롯됩니다.

아브라함은 왜 가나안으로 갔습니까?

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나중에 알게 된 가나안이라는 미지정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으며, 그로부터 반복되는 약속과 그의 “씨”가 땅을 상속받을 성약을 받았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도보로 며칠이 걸리나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에 해당 40 일 동안 정탐꾼들이 그 땅을 두루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차지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을 인도하여 사십 년.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쳤습니다. 모세가 120세였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산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을 보았습니다.

요셉이 가나안에서 애굽까지 얼마나 멀리 갔습니까?

그들은 65킬로미터의 여정을 거쳐 이집트에 도착하여 4년 동안 살았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인 BC XNUMX년 요셉이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꿈을 꿨습니다. 가족은 나사렛으로 여행을 갔다. 최소 170km.

소돔과 고모라는 가나안에 있습니까?

Tall el-Hammam이 신화적인 소돔과 고모라 지역으로 확인된 것은 소돔 땅이 비옥한 요르단 강 평야 남쪽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된 성경의 일부 구절에 대한 해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

많은 사람들이 소돔을 떠나기를 주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롯이 떠나기를 주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망설였을 때, 그 사람들이 그의 손과 그의 아내와 그의 두 딸의 손을 잡고 안전하게 성읍 밖으로 인도하여 .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천사는 그들을 강제로 그 도시를 떠났습니다. 사위들이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디에 묻혔습니까?

서안 지구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동굴은 족장과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리브가, 레아의 매장지입니다. 유대 신비주의 전통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묻힌 에덴동산의 입구이기도 하다.

에덴동산이 에티오피아였나?

진정한 에덴동산은 아프리카 국가인 보츠와나, DNA의 주요 연구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우리 조상의 고향이 북쪽의 잠베지 강 남쪽에 있다고 믿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어떤 언어를 사용했습니까?

아담의 언어, 유대 전통(미드라심에 기록됨)과 일부 기독교인에 따르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그리고 아마도 하와)이 사용한 언어입니다.

화산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습니까?

사해 지역에 위치한 소돔과 고모라는 강한 지진이나 홍수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그러나 화산 폭발로 인해 멸망한 두 정착지에 대한 신선한 기억으로 인해 인구는 이 두 사건을 병합하게 되었습니다.

영어에서 고모라 의 뜻은 무엇인가요?

: 악덕과 부패로 악명 높은 곳.

아담과 하와가 죽었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범법 때문에, 아담과 하와도 영적인 죽음을 겪었다. 이것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걷거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와 그들의 자녀들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을 방문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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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업데이트: 5일 전 – 작성자: 9 – 기여자: 16 – 참고 문헌 : 42 인터뷰 및 게시물; 13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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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진입

가 나 다 라

숙곳 히브리 민족이 이 첫 야영지를 떠난 후에 주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출 13:20~22).

마라 주께서 마라의 물을 고치셨다(출 15:23~26).

엘림 이스라엘이 열두 샘가에 천막을 쳤다(출 15:27).

신 광야 주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먹이셨다(출 16).

르비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웠다(출 17:8~16).

시내 산(호렙 산 또는 예벨무사) 주께서 십계명을 계시해 주셨다(출 19~20).

시내 광야 이스라엘이 성막을 지었다(출 25~30).

광야에서의 진영 모세를 도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장로 칠십인이 부름을 받았다(민 11:16~17).

에시온게벨 이스라엘이 에서와 암몬의 땅을 평화롭게 통과하였다(신 2).

가데스바네아 모세가 약속의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다. 이스라엘이 거역하였고 그 땅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였다. 가데스는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의 주 진영 구실을 하였다(민 13:1~3, 17~33; 14; 32:8; 신 2:14).

동쪽 광야 이스라엘은 에돔하고 모압과 더불어 싸우기를 피하였다(민 20:14~21; 22~24).

아르논 강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아모리 족속을 멸하였다(신 2:24~37).

느보 산 모세가 약속된 땅을 바라보았다(신 34:1~4). 모세가 그의 마지막 세 가지 설교를 전하였다(신 1~32).

모압 평지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나눌 것과 그 주민을 쫓아낼 것을 말씀하셨다(민 33:50~56).

요단 강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요단 강을 건넜다. 길갈 근처에 요단 강 바닥에서 가져온 돌로 요단 강이 갈라졌던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수 3:1~5:1).

출애굽에서 가나안입성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들

출애굽기에 대한 매일성경묵상을 마치면서, 출애굽과 광야 40여년의 여정과 가나안 땅으로의 진격의 여정들을 다시 돌아볼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여정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출애굽에서 가나안 입성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들

위의 지도에 붙어 있는 번호를 따라 발생한 사건들을 순서대로 요약하였습니다.

1. 유월절

집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출애굽을 할 수 있었으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 사람들의 집에는 장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슬픔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밤에 이스라엘은 급하게 애굽을 나가게 됩니다.

출애굽기 12: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출애굽기 12장 31절-51절 출애굽 경로, 인구 그리고 연대, 성경 배경 주석 정리

2. 요셉의 시신

요셉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시신을 애굽 땅에서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요셉의 시신을 들고 나갔습니다.

출애굽기 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출애굽기 13장 1절-22절, 출애굽 경로와 구름기둥 불기둥, 성경 배경 주석 정리

3. 홍해를 건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의 정예 전차 부대가 추격해 오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황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시며 홍해를 반으로 가르시고 이스라엘이 건너가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출애굽기 14장 15절-31절 홍해를 건너다, 매일성경 본문 배경주석

4. 애굽 전차 부대의 추격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간 후, 애굽의 전차 부대도 홍해 속으로 들어와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그러나 곧 홍해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애굽의 최정예 전차 부대는 홍해 속에서 수장되고 맙니다.

출애굽기 14:23,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들이 다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바다 가운데로 들어오는지라

5. 쓴 물이 달게 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물을 찾았지만, 그 물은 쓴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지자 물이 달아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라에서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출애굽기 15:23-25,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6. 물 샘을 발견하다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에서 풍부한 물과 그늘이 있는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마른 이들은 이곳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애굽기 15장, 새벽설교 및 매일성경큐티를 위한 본문 개요와 해설

7. 만나와 메추라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또한 고기가 먹고 싶다는 이스라엘에게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6:13-15,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출애굽기 16장 만나와 메추라기, 새벽설교 및 매일성경큐티를 위한 본문 개요와 해설

8. 반석에서 물이 나다

목이 말라 또다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반석을 지명하시고 그 반석을 모세가 치자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하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르비딤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9. 모세의 손이 올라가다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나온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짜기에서 칼을 들고 아말렉과 싸웠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언덕에서 기도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는 모세가 기도하던 언덕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7:11-13,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출애굽기 17장 이스라엘의 배반과 아말렉 전쟁, 새벽설교 준비를 위한 주제 선정 및 주석 정리

10. 십계명을 받다

시내 산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모세는 하나님께 십계명 두 돌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십계명을 통하여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께서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시기로 언약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출애굽기 33장, 하나님의 등을 보이시다 – 구조와 해설, 새벽설교 주제

11. 금송아지를 숭배하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으며, 모세는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십계명 돌판을 다시 받게 됩니다.

출애굽기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신상과 그 신학적 의미 – 성경사전

12. 성막을 세우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이들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성소를 세우게 됩니다. 성소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로,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13. 메추라기와 재앙

하나님께서는 탐욕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풍을 통하여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몰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으로 치셨으며, 이 곳 이름은 기브롯 하다아와라고 불렸습니다.

민수기 11:31-34,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그 날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열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진영 사면에 펴 두었더라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14. 미리암이 나병에 걸리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함으로 인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신들과도 말씀하시며 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진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민수기 12:9-10,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15. 12명의 정탐꾼들이 돌아오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출발했던 12명의 정탐꾼들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 점령하자고 말합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이었던 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민수기 13:23-25,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16. 완악한 이스라엘이 패배하다

정탐꾼들 중에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고, 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셨고 많은 이들이 거기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게다가 억지로 가나안으로 올라가다가 아말렉인과 가나안인들에게 패배합니다.

민수기 14:40-45,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17. 고라와 반역자들을 땅이 삼키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지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거역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똑같이 권위가 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향로를 가기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고 명령하셨고, 이 일로 인하여 반역자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민수기 16:31-33,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18. 모세가 바위를 강하게 내리치다

물이 없다며 또다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바위를 지명하셨고 모세가 그 바위를 치지만, 분노로 인하여 강하게 두 번 내리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민수기 20:10-11,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9. 아론의 죽음

아론은 나이가 들어 호르산에서 죽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0:27-28,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20. 놋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에돔 땅을 우회하려다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고 이 일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고 그 놋뱀을 보는 자마다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1:7-9,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1. 전투가 벌어지다

모세가 죽기 전, 요단강 동쪽 지역의 땅을 정복하게 됩니다. 아모리 왕 시혼을 물리치고 헤스본을 비롯한 동쪽의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민수기 21:21-26,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리이다 하나 시혼이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그의 백성을 다 모아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와서 야하스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치므로 이스라엘이 칼날로 그들을 쳐서 무찌르고 그 땅을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 점령하여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니 암몬 자손의 경계는 견고하더라 이스라엘이 이같이 그 모든 성읍을 빼앗고 그 아모리인의 모든 성읍 헤스본과 그 모든 촌락에 거주하였으니 헤스본은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도성이라 시혼이 그 전 모압 왕을 치고 그의 모든 땅을 아르논까지 그의 손에서 빼앗았더라

22. 모세가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다

아론과 마찬가지로 반석에서 물을 내는 사건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여,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고,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신명기 34:1-5,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23. 요단강을 건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된 이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갑니다.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밟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게 됩니다. 40여년 전의 홍해의 사건이 다시 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 3:12-17,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24. 여리고를 점령하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그리고 7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은 양각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성을 질렀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호수아 6: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참고할 글들

사도행전 7장 54절-8장 3절, 스데반의 순교와 복음의 확장 – 묵상과설교

출애굽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로 정리한 도표와 중요 인물들 – 성경연대표도표지도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다 – 성경의 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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