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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1:5-6, 사도행전 17:23, 34, 마태복음 6: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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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 바울의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 (사도행전 17:16-34)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Source: waynesvillechurch.org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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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특징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특징 17장 16-34절은 아테네에서의 복음 전도 이야기로써, 바울이 순수하게 구약적 배경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 …
Source: shelter4souls.tistory.com
Date Published: 6/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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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 설교 – 오목천교회
아레오바고 설교. (사도행전 17장 16~34절).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기와 미움은 대단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의 거리가 80km인데 약 200 …
Source: omch.kr
Date Published: 7/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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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 다음블로그
2015년 9월7일 월요일 말씀묵상 ♧.hwp 2015년 9월7일 월요일 말씀묵상 ♧ 성경:사도행전17:22-34(신218P) 제목: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22.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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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 법정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다른 문화권과 접촉할 때 그 전파와 …
Source: www.ecumenian.com
Date Published: 10/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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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 신학논단 – DBpia
사도행전 #바울 #아레오바고 설교 #본문 분석 #Acts of the Apotles #Paul #the Areopagus Speech #Text Analysis.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Source: www.dbpia.co.kr
Date Published: 1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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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성경에서 아레오바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이 아테네인들에게 설교한 장소에 관해서는, … 아레오바고스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서쪽 언덕의 이름 …
Source: 4thstcog.com
Date Published: 1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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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님의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 – 언약교회
바울 사도님의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 관리자. 작성일 2021-04-18 16:40. 조회 133. 좋아요. 0. 사도행전 17:16~34 장용량 목사.
Source: covenantchurch.or.kr
Date Published: 6/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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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레오 바고 설교
- Author: 라모린다 생명말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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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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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 바울의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 (사도행전 17:16-34) – Korean Baptist Church of Waynesville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
본문: 사도행전 17:16-34
02/14/2021 주일 낮 설교
사도 행전에는 많은 20여개의 설교문과 연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한 설교와 연설, 변증은 11개 가량 되는데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전도 설교는 사도 행전의 다른 설교와는 차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덴(아테네)에 거주하는 헬라인들, 신화와 우상을 숭배하는 그리스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증거한 복음 설교라는 점에서 다른 설교와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데살로니가로 부터 쫓아 온 유대인들로 부터 핍박을 받아 급히 몇몇 형제들의 도움으로 급히 배를 타고 그리스 반도 남쪽에 위치한 아덴(아테네)으로 피하게 됩니다.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함께 사역하고 있었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두고 혼자 아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덴이 어떤 도시인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아덴은 B.C 5세기경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등과 같은 철학의 대가를 배출한 곳으로, 당시에도 정치적인 권력은 잃었지만, 철학, 문화, 예술 등 헬라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소와 더불어 세게 3대 대학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아덴은 수많은 신전들, 사당들, 신상들, 제단들로 가득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거대한 금과 상아로 된 아테네 여신상이 서 있었는데, 그 상의 번쩍이는 창 끝은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외 다른 곳에는 그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의 상들, 주피터, 비너스, 머큐리, 바카스의 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17:16) ‘격분하다’(paroxyno)는 졸도나 간질 발작(paroxysm)에 쓰이는 의학 용어로서 ‘노하게 하다, 성나가 하다, 화를 돋구다’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속이 뒤집어 진’것입니다.
바울은 혼자서 아덴 시내를 거닐다가 온갖 우상으로 뒤덮힌 도시를 본 후에 그의 마음속에 의로운 분노가 치밀러 올랐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통상적으로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의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 대한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는 동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북왕국이 사마리아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또 다른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켰습니다.’ 즉 우상 숭배를 일삼는 백성들에 대해 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울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영광과 찬송을 우상들에게 바치는 것을 보고 바울은 속이 끓어 올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전도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상 숭배자들에 대해 이러한 마음이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지금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피조물에 불과한 해와 달과 별들을 섬기고, 사람이 만든 조각상이나 신화에 나오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이 가졌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치관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바라 보면서, 황금 만능주의와 뉴에이지 사상, 포스트 모던니즘이 지배하는 이 시대를 바라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영혼들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을 떠난 이 시대와 세상에 대하여 ‘의로운 분노’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가졌던 마음의 고통과 안타까움이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바울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먼저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장터(marketplace)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며(reasoned)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하며(disputed) 복음을 전하였고, 지식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
오늘 설교는 바로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다가 그들에 의해 붙잡혀서 아레오바고라는 곳에 가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한 복음 설교입니다. (뉴욕 맨하튼 리디머 교회, 팀 켈러 목사)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강가에서, 감옥에서, 장터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피쿠루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당시 대표적인 두 철학 체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에피쿠로스(Epicurus, 주전 341-270년)의 후학들이 세운 학파로서 삶의 주된 목적이 쾌락과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행복은 순간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만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지만, 바울 시대 무렵 좀 더 감각적인 사상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유물론자들이나 쾌락주의자들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제논(Zeno, 주전 320-263년)의 후계자들로서 사람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고 자신의 자족과 자립을 깨닫고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전성기에는 몇가지 훌륭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에피쿠로스 학파처럼 바울 시대에는 거만한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다!”) 이런 스토아 학파의 사상은 오늘날 뉴에이지 추종자들이나 범신론자들과 일맥 상통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서서 복음을 전한 아레오바고는 문자적으로는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아레스는 전쟁의 신(로마, Mars)입니다. 이후 아레고바고는 법정이나 회의가 열리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이 회의를 통해 그리스가 도시 국가를 통치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아레고바고 회의는 종교와 도덕 분야에서만 권위를 행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덴의 법정, 의회와 같은 곳에서 그것에 모인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살펴 보기 전에 전도 대상자들인 아테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몇가지 기록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가득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지적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전하자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며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new teaching)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17:19)라고 하며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갑니다. 21절에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the latest ideas)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의 복음 설교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22-31)
바울의 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2-23절은 서론,24-29절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 존재됨에 대해서, 30-31절은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론 (22-23)
서론에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일컬어 “너희를 보니범사에 종교심이 많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칭찬과 경멸의 내용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종교적이고 헌신적인’라는 의미도 있고, 부정적으로는 ‘귀신을 두려워하는, 미신적인’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아덴을 다니며 발견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에 대해 언급합니다. 아덴 사람들은 축복을 놓치거나 심판을 당할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서까지 우상을 만들어 세워 두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아테네 인근에서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는 비문이 적힌 제단들이 많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너희가 알지도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으로 전도 설교의 서론을 마무리합니다.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함 (24-29)
바울은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합니다.(존 스토트 목사, 사도행전 강해 참조)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 계시->특별 계시)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천지의 주재(author)이시다. 인격적 창조주(<->스토아 학파, 범신론)이시며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의 인격적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그 분이 피조물인 인간들이 만든 신전에 살고 계신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유지하는 분이시다. (25)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생명을 공급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한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26)
인류는 한 조상(혈통)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온 땅에 거하게 하시며, 민족들의 흥망성쇠의 정확한 때(카이로스)를 계획하셨으며, 각 나라가 차지할 일정한 지역을 정하셨다. 즉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설계자시다. (<->에피쿠로스 학파, 만사가 우연에 의해 좌우)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동력이며 존재 이유이시다. (28)
28-29절은 당시 유명한 두 명의 시인의 작품에서 인용한 것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이것은 그레데 시인 에피메니데스(주전 600년경)의 ‘크레티카’에서 인용한 것.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인생의 목적 발견할 수 없다.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시다. (29)
‘우리가 그의 소생(자손)이라’ 이것은 시칠리아 시인 아라투스(주전 315-240년)의 ‘매노메나’와 클레안테스(주전 331-233년)의 ‘제우스 찬양’에서 인용한 것. 구속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의 아버지이시지만, 창조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으며,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도록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자손)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이나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다”(29)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형상이나 조각품으로 대체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 (30-31)
사도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영적 무지(‘알지 못하는 신’ 경배)에 대해서 폭로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증거한 이후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하나님이 알지 못하였다거나 그들의 변명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관대한 자비로서 그들이 받아 마땅한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의미-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이어서 설명하기를 “이는 정하신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부활)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1)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다시 오셔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심을 믿고,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이 진리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하는 가장 확실하고 ‘믿을 만한 증거’가 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종교심은 많으나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는 아테네 지식인들에게 만물을 창조하시고 살아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주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지식인들의 관심사와 익히 잘 아는 문학 작품등을 인용하여 복음의 진리를 이끌어 내고 있으며, 사변적인 지식으로 구원 얻을 수 없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아테네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였습니다. 32절에 보면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믿지 않고 배척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영혼 불멸은 인정했지만, 죽은 몸의 부활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아직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믿지는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들어보고 나중에 판단하겠다는 말이지요.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을 시간은 항상 ‘바로 지금’입니다. 미루면 구원받을 기회는 지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몇사람이 바울을 ‘가까이 하여’(‘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것에 달라붙다/연합하다’) 믿었는데, 그 사람들의 이름은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라는 여인이었고, 무명의 몇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 전도의 열매는 많지는 않았지만, 이방 세계에 큰 도전을 주는 사건이었고,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아덴 아레오바고 전도 설교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도전은 무엇입니까?
첫번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영혼들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기진한 영혼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과,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세상에 대한 탐욕을 보고 우리 마음 속에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열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두번째는 복음을 전할 때 전도 대상자의 관심사로 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바울이 헬라 철학과 문학과 예술에 심취한 아덴의 지식인들에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하고, 문학 작품을 인용하여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였던 것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음 문을 열수 있는 소재와 환경을 이용하여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도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베드로, 스데반, 바울 모두 복음 전도 설교의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됨을 분명히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복음 설교를 듣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믿는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사도행전 17장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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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특징
17장 16-34절은 아테네에서의 복음 전도 이야기로써, 바울이 순수하게 구약적 배경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모델을 제시한다. 먼저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논리적 흐름을 살펴보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신 이야기(23절)로 시작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소개하며(24절), 종국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한다(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바울은 진리라는 측면으로 접근해 가는데,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24-25절), 인간에 대한 진리(26-29절),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진리(30-31절)를 선포한다.
바울은 앞서 13장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13:26)과,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13:43절)에 설교한 바 있다. 이 설교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를 개관하되, 13:17-22절에는 구속사의 준비(구약 배경), 23-3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예수님 소개), 38-41절에서는 믿음에의 촉구 (적용)를 했었다.
그러나 17장에서는 에피 쿠르스 학파, 스토아학파와 논쟁함에 있어 그들의 철학적 기반과 이해를 이용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을 보게 된다. 철학자들과 논쟁할 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와 함께 복음을 제시함을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눈높이에서,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의 눈높이에서 복음을 설명했다.
그는 에피 쿠르스 학파의 철학과 스토아학파의 철학 중 복음과 접촉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복음에 대한 거부감과 반발의 수치를 낮출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해갔다. 또한 접촉점과 유사점으로 복음의 문을 열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복음과 그들이 믿는 철학과의 공존할 수 없는, 심판과 부활을 선포함으로 복음의 탁월성과 구별성으로 그들에게 도전했다(31절).
누가의 아레오바고 설교 평가
17장에서 누가는 복음이 이방사회에 전파될 뿐 만 아니라, 이방 사회의 고위층에도(4, 12절) 전파됨을 기술하였고, 아레오바고 설교 이후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노 루시오도 믿게 됨도 언급한다. 누가는 바울을 통해 이방 사회에서 복음이 사회적 경계선을 넘어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17:7절에 바울 일행을 정치적인 반역 무리, 소요 집단으로 보는 것에 대해, 누가는 이미 지식인, 고위층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변증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고, 더불어 복음이 다양한 사회적, 철학적 경계선을 뛰어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의 선교 정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하였고, 헬라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복음을 설명하였다. 또한 회당에서나, 거리에서나, 다양한 장소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가난한 자들로부터 사회 고위층에 이르기까지, 계층의 경계선에 갇히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함에 있어 우리 자신들이 먼저 가지고 있는 많은 경계선들을 먼저 부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주며, 복음을 전할 때 대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배경에 대한 이해, 접근 방식에도 다양함이 필요함을 교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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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7일 월요일 말씀묵상 ♣.hwp
2015 년 9 월 7 일 월요일 말씀묵상 ♣
성경 : 사도행전 17:22-34( 신 218P)
제목 :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이는 사람으로 혹 1)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헬, 신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할렐루야!어제 주일에 받으신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시고 한 주간 동안도 행복한 은혜의 삶을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 제목 }***“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
어제 말씀(행17:16-21절)은 우리가 아덴에 대한 바울의 처방을 중심으로 오늘의 우리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여 보고 그 해결의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1. 아덴의 영적 상태의 진단 .
마치 의사처럼 그들의 영적 상태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아덴은 우상이 가득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을 영적으로 보고 그들에게 말씀을 증거 하였듯이 우리들도 자신의 모습과 가정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2. 아덴에 대한 바울의 처방 .
바울은 아덴의 문제점은 우상이 가득차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처방은 바로 복음입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바울은 아주 간단하게 18절 하반절에서 복음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 예수님 ] 이 바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
둘째는 18 절 하반절에서 [ 몸의 부활 ] 이 바로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
끝으로 우리는 내 안에 무엇이 가득 차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2000년 전 바울이 아덴을 향한 처방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과 몸의 부활이 바로 우리들을 위한 처방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상으로 가득 찬 나의 심령, 나의 가정, 나의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사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죄악된 세상을 변화 시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 행 17:22-34)
본문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그가 베뢰아에서 전도하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는데 데살로니가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혼자서 아테네에 갔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아직까지도 철학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물론 바울이 아테네에 왔을 때는 과거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은 여전하였습니다.
또한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는 아테네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도시를 둘러보았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로부터 받은 첫 인상이 어떠합니까?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태양의 신, 달의 신, 바다의 신, 대지의 신, 우레의 신, 바람의 신, 포도주의 신에 이르기까지 기능별로 다양한 신들을 섬기면서 행여나 빠진 영역이 있을까 우려하여 방어 장치로 “ 알지 못하는 신 ” 을 위한 제단을 설치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여러 신들의 제단을 돌아 마지막으로 “알지 못하는 신” 제단에 향을 피운 후에 신전을 나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의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 알지 못하는 신 ” 의 정체를 밝혀주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제일 먼저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을 벌이는데 그중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사후의 심판과 내세를 부정한 반면 ,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창조를 부인하고 생명의 발생이라든가 운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역시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며 비꼬았고 또 몇몇은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면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 말쟁이 ” 로 번역된 spermologos 라는 단어는 “ 씨앗을 줍는 사람 ” 이라는 뜻입니다 .
씨앗을 주은 다음에 집에 가져와 분류도 하지 않고 여러 곡식이 뒤섞인 추수를 거두는 어리석은 농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을 체계 없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워 모은 지식을 말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들어 그가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하여 토론을 하기 위하여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그리스인들의 전쟁의 신 “ 아레스 ” 의 언덕을 의미합니다 .
로마인들은 이 신을 마르스라고 부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고라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도중에 있습니다. 아레오바고가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만약 바울이 동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을 했다면 각종 신을 섬기는 파르테논을 마주 보면서 설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약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전도사역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1. 알지 못하는 신 (22-23 절 ).
바울은 아레오바고에 섰습니다.아레오바고는 당시 공적인 재판이 열리는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드디어 아덴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바울은 그들 신의 단에서부터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범사에 종교성이 많음을 인정하면서,알지 못하는 신이라고까지 새긴 단을 예로 들어 그 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사실 성경의 계시가 없다면 아무리 위대하신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신”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한계 많은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을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알려 주시지 않는다면,알지 못하는 신과 관계할 수 없는 인간은 무지 가운데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암흑 가운데 빛이 있다는 사실만 알뿐, 그 빛을 누리거나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전도의 접촉점으로 삼아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바울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4-29 절 )
1). 창조주 ( 創造主 ) 이시요 천지 ( 天地 ) 의 주재 ( 主宰 ) 이신 하나님 (24-25)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 ( 主宰 ) 시니 손으로 지은 전 ( 殿 ) 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4-25 절 )
24-25절에서 바울의 분명한 하나님 관(觀)에 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모든 의욕을 잃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좀처럼 탈진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외출했던 루터가 집에 돌아와 보니 부인 폰 보라 여사가 상복을 입고 잇었습니다. 깜짝놀란 루터가 묻습니다.
“어떻게 된거요?” 부인이 말합니다. “루터의 하나님은 죽었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여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침울하게 있을 수는 없어요. 당신이 그토록 힘이 빠져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니 당신의 하나님은 죽은게 틀림없지 않소?”
그말은 들은 루터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
헬라신들의 우두머리는 제우스 신입니다. 그러나 제우스 신 역시 헬라의 여러신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약 3만이 넘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여러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제우스 신이나 헬라 사람들이 섬기는 3 만개가 넘는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고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
그러면 꼭 묻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분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하라고 보내시는 하나님께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 할까요?” 물었을 때 하나님이 뭐라 하셨어요?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녀들과 같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가 있나요?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나요?
하나님 무시한다고 하나님이 무시당하십니까? 바울은 먼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임을 말씀합니다.
2). 사람과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26).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 ( 年代 ) 를 정하시며 거주 ( 居住 ) 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며 ”(26 절 )
26절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몇 가지 더 설명하고 잇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당시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자랑한데 대해 바울은 인류는 모두 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한 조상, 한 혈통의 후손임을 강조합니다.
“한 혈통으로”는 “한 사람으로부터”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한 혈통이었던 인류가 왜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게 되었습니까?
인간의 죄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겠다는 욕심과 교만 때문에 언어와 문화와 혈통이 달라졌지만 본래는 한 사람 – 누구?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말씀입니다.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 본래는 엉겅퀴와 가시를 냈습니다.
남자는 땀흘려 일해야 했고 환경은 오염되어 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문제 해결의 길은 – 오염된 환경, 땅 문제등 –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역사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함께 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십니다.
27 절 후반절입니다 . “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
바울이 왜 이 말을 했을까요?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이 땅과 만물 사람을 창조하셨을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역사를 관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당시 희랍의 에피쿠로스 학파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다구요? 신(神)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의 역사를 전혀 간섭하지 않으니 있긴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바로 이점을 바로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3). 인간이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하나님 (27-29)
“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 ( 起動 ) 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 ( 考案 ) 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27-29 절 )
하나님은 인간이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가 있는 분입니다.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라는 표현은 어두움에서 무엇을 찾는 것 같이 불확실한 일 같지만 불가능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지만 그러나 가까이 계시기에 만날 수 잇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도 만나지도 못하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된 곳 , 엉뚱한 곳에서 만나려 합니다 .
29 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낸 – 한마디로 우상에서 만나려 한다는 것 – 잘못된 것입니다 .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는 찾는데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잘못된 곳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손으로 바쳐진 제물이나 받아서 먹고 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수많은 신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생명도 없는 우상숭배 –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을 때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였습니다.
아버지가 잔치집에 간 사이 동네사람이 아버지가 파는 우상 앞에 제물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어릴때부터 영성이 뛰어난 아브라함은 작은 우상은 다 부수고 큰 우상의 손에 몽둥이 하나를 쥐어주고는 제물을 큰 우상 앞에 놓았습니다.
돌아온 아버지 데라가 화가 나서 어찌 이리되었느냐고 묻자 우상들이 제물을 서로 먹으려고 싸움하다가 큰 우상이 모두 부숴 버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말합니다. “우상이 무슨 생명이 있다고 저희들끼리 죽이고 말고 하겠느냐?”
때를 놓치지 않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생명없는 우상을 왜 섬깁니까?”
하나님을 찾으려면 만나려면 제대로 알고 바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
자기 만족, 자기 중심에 빠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까 만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려 합니다. 물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참된 만족과 행복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 눅 17:21)
우리 안에 예수님 모시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 그곳에 천국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만나면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찾고 찾으면 만나주십니다. 참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만나주십니다.
3. 바울 설교의 결론 (30-31 절 )
1). 회개하라
30절을 함께 봅니다.
“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0 절 ).
“알지 못하던 시대”-어떤 시대를 말합니까? 복음이 전해지기 전, 예수가 이땅에 오시기 전에는 잘못된 것이 있어도, 혹 우상숭배가 있었더라도 미련함과 실수를 용서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다르다 이겁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우상을 숭배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참아주셨다. 잘못하긴 했지만, 무지해서, 몰라서 그랬기에 참으실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복음이 확실히 전해졌고 따라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에 아무도 예외없이 꼭 해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 회개하라 ” 회개해야 합니다 .
잘못을 뉘우치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회개해야 합니까?
2).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
31절을 함께 봅니다.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 ( 公義 ) 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1 절 ).
회개해야 할 몇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날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심판합니까? 재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히브리9: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 “ 믿음 ” 입니다 .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믿습니까?
바울은 심판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 예수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분명하게 만나지 않았습니까? 예수는 분명하게 부활하셧기에 분명한 심판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심판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회개하고 철저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4. 아덴 사람들의 반응 (32-34 절 ).
바울이 부활을 증거하자 아덴의 헬라인들은 조롱하기도 하고 다시 듣고자 하기도 하며,믿음을 갖기도 합니다.
바울의 아덴 설교에서 오늘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론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덴에서 바울의 설교는 실패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청중 가운데 일부는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고자 청했고(32절),그중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를 비롯해서 몇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나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은 아덴에서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 필패한 것뿐입니다.
***{결론}***
여러분!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약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전도사역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1. 알지 못하는 신 (22-23 절 ).
바울은 이 사실을 전도의 접촉점으로 삼아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바울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4-29 절 )
1). 창조주 ( 創造主 ) 이시요 천지 ( 天地 ) 의 주재 ( 主宰 ) 이신 하나님 (24-25).
2). 사람과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26).
3). 인간이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하나님 (27-29)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도 만나지도 못하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된 곳 , 엉뚱한 곳에서 만나려 합니다 .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
3. 바울 설교의 결론 (30-31 절 )
1). 회개하라 .
왜 회개해야 합니까?
2).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
4. 아덴 사람들의 반응 (32-34 절 ).
바울이 부활을 증거하자 아덴의 헬라인들은 조롱하기도 하고 다시 듣고자 하기도 하며,믿음을 갖기도 합니다.
여러분!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계시지 않고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분!
또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시고 땅에 살게 하시고 역사를 주셨다 사람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는데 찾을 의지가 약하던지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에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부활의 주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니 반드시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얻으라 하는 것이 바울 설교의 결론입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는 여러분 모두 회개하시고 거듭난 구원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 : 사도행전 17:22-34 절입니다 .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사도 바울의 복음의 열정을 본받아 복음을 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 행 17:24-25 절 )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다
오늘 우리는, 바울의 유명한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 연설을 전하는 본문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 본문말씀은, 우리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의미를 새삼 되새겨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의미심장하고 흥미진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고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는 신전이 서 있는 언덕으로, 성소로서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민주주의의 상징이라 할 만한 장소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아니라 그 아래 남서쪽으로 펼쳐져 있는 아고라 광장입니다. 시장과 행정기관이 자리 잡은 아고라 광장에는 항상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그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날마다 토론을 즐겼습니다(행 17:17). 그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행 17:21). 사도 바울도 바로 이 광장에서 아테네 사람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당시 아테네는 철학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행 17:18).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아고라 광장 사이에는 하얀 대리석의 언덕이 있습니다. 아레오파고스(아레오바고) 언덕입니다. 그곳에서 시비를 가리는 재판이 열렸던 까닭에 아레오바고 법정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아고라 광장에서 벌어진 바울과 아테네 사람들의 논쟁은 결말을 짓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말쟁이’이자 ‘외국 신을 선전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더 깊이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파고스 법정으로 인도하여 논쟁을 계속합니다. 오늘날 그 언덕에 오르면 그 때(주후 51년) 바울이 그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가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아레오파고스 법정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다른 문화권과 접촉할 때 그 전파와 수용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접근방법을 함축하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을 동시에 함축합니다. 다른 문화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야 하는지, 또한 그 다른 문화권 안에서 복음의 뜻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구약성서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들과 달리 전혀 다른 사고의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파하고자 하였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배타적이거나 정복주의적인 관점에서 그리스 문화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로서는 그럴 힘도 없었겠지만요. 그들의 전통과 사고방식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이 점은 정복주의적인 근대의 기독교 선교활동과 오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독단적인 전도방식을 반성하게 해줍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그리스인들에게서나 유대인들에게 공통되는 종교인식 내지는 신앙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저 그리스도교라는 이름 그 자체만으로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나 동시에 빠지는 종교적 함정을 뛰어넘어 진정한 구도의 과정으로서 종교 내지는 신앙을 역설했다는 것입니다.
신들의 언덕이요 권위의 상징으로서 아크로폴리스와 시민들의 광장이자 언덕으로서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고라와 아레오파고스의 대비되는 의미처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기존의 권위적인 가르침과는 명백히 대조되는 새로운 차원의 깨우침이었습니다.
바울은 과연 무엇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무엇을 지향했을까요? 바울은 처음 아테네에 이르러서 분노했다고 합니다.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17:16). 격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스스로를 절대화한 종교제도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특히 다신교는 사물이 신적 주체로서 절대화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이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기에 인간을 사물화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보편적인 윤리의식이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그 점을 꿰뚫어 보고 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그렇게 격분하는 감정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와 같은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당대의 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굳이 바울은 분노의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풍부한 종교성이 갖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의 풍부한 종교심을 존중합니다. 비아냥이 아닙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는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정작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그 사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열어두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아는 데서는 진정한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의 지식을 전부라고 착각하면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출발점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서 그 진정한 신앙의 가능성, 참 진리에 이를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알지 못하는 신의 실체를 알려줍니다. 그 신은 사람들이 지은 신전에 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 굳이 어떻게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온 우주에 편만하신 분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이 강조점은 성서의 지혜를 환기하는 것인 동시에 역시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도 깨우치고 있는 진실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를 지정해 그곳에 거룩한 집을 지어놓고 그 안에 신이 거한다고 생각하며, 그 집을 신전 또는 성전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하늘과 땅, 온 우주가 성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또한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일 뿐입니다(고전 3:16; 고후 6:16). 교회당은 결코 배타적으로 거룩한 공간으로서 성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모이는 집일뿐입니다. 신전에 집착하는 종교, 성전에 집착하는 종교, 제도의 권위를 내세우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실체를 전부로 아는 미숙한 종교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 백성을 그 안에 가둬둔다는 점에서 위험한 종교입니다. 바울은 그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 작자 미상, 「Paulus in Athen」 (19세기 경) ⓒWikiCommons
세 번째로 바울은, 그 하나님은 사람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시 그리스 철학자들도 이야기하는 진실입니다.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이 하나의 근원을 갖고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당시 통속화되어 있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신관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합니다. 마치 절대 권력자처럼 인간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는 존재로서 신에 대한 거부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제왕적인 권위로 치장된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제왕적 권위로 치장하는 것은 구시대 낡은 종교적 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받들어진 신은 마치 공예품처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신에 불과합니다. 권위로 군림하는 인간질서의 속성을 하나님에게 부여한 결과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 앞에 그 신도들을 줄 세우고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며 생명을 주시고 호흡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살리는 분입니다. 그 지도자를 마치 독점적인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생각하는 교회나 종교, 그래서 그 지도자가 하나님의 흉내를 내는 교회나 종교는 구시대의 악습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는 어울릴 수 없습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바로 우리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이 사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해주셨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그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는 시대와 그 경계가 다르다고 해서 그 속성에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대의 사람이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점에서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주전 3세기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바울은 이처럼 낡은 시대의 종교, 곧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신을 믿는 종교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도 충분히 공유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인들도 깨우치고 있는 진실에 공감하는 가운데 그렇게 설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30절에 이르러 바울의 입장은 반전됩니다. 엄밀히 말해 반전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굳이 반전이라 한다면, 이 대목에서부터 그리스인들이 말뜻을 잘 알아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가 구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믿었던 시대를 종식하고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진정한 하나님이 환히 드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진리 독점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신전, 가시적인 교회질서와 종교제도, 위엄 있는 사제와 종교지도자, 명문화된 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종교에서 벗어나, 이 땅의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살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사람들을 살려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전해들은 아테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마도 죽은 사람의 부활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모양입니다.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알고 영혼의 불멸을 믿었던 그리스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의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라고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말은 때로는 정중한 사양을 뜻할 때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 비웃었다는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진정성이 담긴 반응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충분히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곧 맹목적 믿음과 동일시될 때가 많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 안에서는 그런 믿음이 가장 순수한 믿음으로 칭송받아 왔습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 성찰이 없는 믿음일 뿐입니다. 자기중심적 욕망의 확장을 전도로 알고, 부흥으로 아는 것은 그와 같은 믿음의 풍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레오파고스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잘못된 자기 확신을 무너뜨리며, 진정한 진리의 세계로 안내해줍니다.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이렇게 반응한 사람들은 그 진리에 대한 개방성을 보여줍니다. 진정한 복음의 전파와 진정한 복음의 수용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태도에서 가능합니다. 새로운 신앙의 형성은 그 자리, 그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옹졸한 게 아닙니다. 인류역사에서 등장한 위대한 통찰들을 멀리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통찰들과 중요한 가치규범들을 배제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감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훨씬 깊어지고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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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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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성경에서 아레오바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 아레오바고스 설교, 사도행전 17:24) 또한 “아레오바고스”라는 용어는 나중에 현대 그리스의 고등 법원을 구성한 귀족 출신의 사법 기관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레오바고는 무엇입니까?
아레오바고 설교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와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설교를 말하며, 사도행전 17장 16~34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레오바고스의 설교는 성 바오로의 선교 경력에 대해 가장 극적이고 가장 완전하게 보고된 연설이며 사도행전 14장 15-17절에 기록된 리스트라의 짧은 연설을 따랐습니다.
아레오바고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기원전 4세기에 아레오바고스의 주요 기능은 살인 사건을 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스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대 아테네의 초기 귀족 회의인 아레오파고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의 낮은 언덕인 아레오파고스(Ares’ Hill)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아레오파고스 공의회는 아마도 왕의 조언자들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아레오바고에는 어떤 신화적 인물이 있었습니까?
아글라우로스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서 알치페라는 딸을 낳았다. 알키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우스에게 강간당했다. 아레스는 그 행위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아레오파고스라고 명명된 아테네 언덕의 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아테네의 형사재판 장소가 되었다.
바울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설교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테네인들에게 설교한 장소에 관해서는, 그의 설교의 사상을 그 구성원 중 한 사람(Dionysius Aeropagite)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가 고등법원의 기구 앞에서 설교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레오바고스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서쪽 언덕의 이름이었다.
바울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주되심을 전파했으며, 예수를 믿는 믿음이 그의 삶에 참여함을 보증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3절에 나오는 미지의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미지의 신 또는 Agnostos Theos(고대 그리스어: Ἄγνωστος Θεός)는 1913년에 처음 출판된 Eduard Norden의 이론으로, 사도행전 17장 23절의 기독교 사도 바울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을 바탕으로 XNUMX개의 주요 신들과 수많은 작은 신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을 숭배했습니다 …
아테네에는 몇 명의 신이 있었습니까?
그리스 판테온에는 XNUMX명의 주요 신이 있었습니다. 최고는 하늘의 신이자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였으며, 소와 떡갈나무를 신성시했습니다. 그의 두 형제 하데스와 포세이돈은 각각 지하 세계와 바다를 통치했습니다.
성경에서 화성 언덕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Areopagus 또는 Mars Hill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옆에 있는 맨 대리석 언덕입니다. 특히 바울 사도의 연설과 관련이 있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아레오바고스와 집정관 제도는 무엇이었습니까?
고전 이전 시대(기원전 5세기 이전)에 아레오파고스는 로마 원로원과 유사한 도시의 장로들의 회의였습니다. 상원과 마찬가지로 그 구성원은 고위 공직자(이 경우 집정관)로 제한되었습니다.
화성 언덕의 바위 근처에서 어떤 전설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레오파고스 언덕은 언덕 꼭대기에서 전쟁의 신 아레스의 시련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바울이 설교했던 화성 언덕은 어디입니까?
성 바오로가 설교했던 아테네의 화성 언덕 – 아레오파고스.
아테네에서 살인 재판소는 어디에서 만나나요?
법원은 때때로 아고라 주변에 있었고 어떤 때는 아직 재직 중인 관리에 대한 심각한 사건처럼 언덕 위의 열린 공간인 프닉스(Pnyx)에서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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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정승훈 목사 : 아레오바고의 설교 (Nov_17_2019, 성령 강림 후 스물세 번째 주일)
- 정승훈 목사
- 라모린다 생명말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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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승훈 목사 : 아레오바고의 설교 (Nov_17_2019, 성령 강림 후 스물세 번째 주일) | 아레오 바고 설교,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