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와 고넬료 | 베드로와고넬료 9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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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행 10:1~16) – 사도행전 큐티(수정)

오늘의 말씀 :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1~16). * 본문요약. 백부장 고넬료가 제 9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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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2/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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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 – 네이버 블로그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와 고넬료라는 인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있다. 위 인용문에 따르면 베드로와 고넬료는 거의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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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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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4월 17일] 고넬료와 베드로의 신앙 – 국민일보

기도 : 하나님 저와 우리 가족이 고넬료와 베드로처럼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최고로 존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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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0/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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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사도행전 10:1-23) < 목회 현장 ... - 크리스찬저널

고넬료와 베드로의 일화는 하나님의 사랑이 특정인(당시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백성들에게 향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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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jlogos.org

Date Published: 6/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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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고넬료 (행 10:24-38) – 목회자료 – 기멀전

베드로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나라 공안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갈릴리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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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5/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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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행 10:1-16) * 땅 끝까지 이르러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사도행전 10장 1~16절). [들어가는 말]. 어떤 사람이 동부에서 서부로 출장을 가게 되어 비행기를 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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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1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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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환상이해

어떻게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가를 지금 공부하고 있습니다. …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게 하고 또한 고넬료에게 천사를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게 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tbc10.tripod.com

Date Published: 10/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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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행10:34-43) 20180121 > 설교문 | 예수사랑교회

그 동안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 오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러나 성령을 모르던 저들 가족과 친척들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던 중에 성령 …

+ 여기에 보기

Source: www.jsmc.kr

Date Published: 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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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Sudeuk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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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bai98jCFI8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행 10:1~16)

* 오늘의 말씀 :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1~16)

* 본문요약

백부장 고넬료가 제 9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명합니다.

고넬료는 즉시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 한 명을 베드로에게 보냅니다.

그들이 도착할 무렵 베드로 역시 정오 기도를 하다가 환상을 봅니다.

베드로가 환상 중에 하늘에서부터 각종 짐승들이 담긴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는데,

하늘에서 이것을 잡아먹으라고 명하십니다. 베드로가 이런 부정한 것을 먹어본 일이 없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찬 양 : 197장(새 263) 이 세상 험하고

219장(새 540)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 본문해설

1. 고넬료가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남(1~8절)

1) 가이사랴 에 고넬료 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2)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유대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 어느 날 제 9 시 (오후 3시)쯤 그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를 밝히(분명히, 똑똑히,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가 보니 천사가 자기에게로 들어와서 “고넬료야!”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4) 고넬료가 천사를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하여 물었습니다.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바 되었으니

5) 지금 네가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을 데려 오너라.

6) 그는 피장(가죽 제품을 만드는 자) 시몬의 집에 묵고 있으니,

그 집은 바닷가에 있느니라”하였습니다.

7) 이 말을 하고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는 하인 두 사람과 자기 부하 가운데서 경건한 병사 하나를 불러서

8) 모든 일을 다 이야기해주고, 그들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 가이사랴(1절) :

가이사랴는 이미 빌립 집사가 먼저 선교한 곳입니다(사도행전 8:40).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104km 떨어진 곳으로,

총독 관저와 로마군 사령부가 주둔해 있는 지중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입니다.

– 고넬료(1절) :

가이사랴에는 5대의 로마 군대가 있었는데, 그 중 4대는 본토인이었고 1대만 로마인 부대입니다.

고넬료는 점령군인 로마군의 고급장교였습니다.

고넬료는 자신뿐 아니라 온 가족이 경건한 신앙 가족이었고,

유대인들에게도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제 9시, 오후 3시(3절) :

제 9시(오후 3시)는 유대인의 기도시간입니다.

그런데 로마 점령군 장교인 고넬료가 유대인의 기도시간을 지켜서 오후 3시에 기도를 합니다.

–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어서(4절) : 아나바이노

‘상달되다’에 해당하는 ‘아나바이노’는 ‘올라가다, 오르다, 일어나다’라는 뜻으로,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라갔음을 의미합니다.

기도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고넬료의 신앙과 행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2. 베드로가 본 환상(9~16절)

9) 이튿날 저들이 길을 가다가 욥바 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는데, 그 때가 제 6시(낮 12시)쯤이었습니다.

10)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었으면 했는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황홀경에 빠져 들었습니다.

11) 그는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12)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네 발 가진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13)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서 이것들을 잡아먹으라”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14)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제가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나이다.”

15) 그러자 두 번째로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

16) 이와 같은 말이 세 번 오고 간 뒤에,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9절) :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약 50km쯤 떨어져 있어서

장정이 걸어서 10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 그는 배가 고파(10절) :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 세 번 식사를 하는데, 아침식사는 아침 기도시간인 9시 기도를 마친 후에 하고,

점심 기도는 정오(낮 12시)에 하고, 저녁 식사는 해질 무렵에 합니다.

그런데 12시 정도 기도시간에 베드로가 배가 고프다고 했으니,

베드로는 아침 기도시간에서부터 12시까지 식사도 거른 채 기도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황홀경에 빠져(10절) : 엑스타시스

‘비몽사몽간(황홀경)’에 해당하는‘엑스타시스’는

‘무아지경, 비몽사몽, 환상, 황홀경’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경험하는 신비적 초월적 심리상태를 의미합니다.

* 묵상 point

1. 항상 기도하는 시간에 환상을 본 고넬료와 베드로

1) 공식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최초의 사건 :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1절)

그동안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일들이 몇 번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최초의 사건은

베드로와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이 일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고,

그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하기로 결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로 결의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의 이 고집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이방인 중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 고넬료와

예루살렘 사도들의 대표자인 베드로를 서로 만나게 함으로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사도행전 11장까지 그 과정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항상 기도하는 시간에 환상을 본 고넬료와 베드로

1)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고넬료와 베드로(2~3, 9~10절)

이 만남은 고넬료와 베드로가 각각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고넬료가 제 9시(오후 3시) 기도시간에 환상을 봅니다.

환상 중에 고넬료는 천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봅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고 말하고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고넬료는 즉시 하인 둘과 경건한 병사 하나를 욥바에 보냅니다.

2) 베드로에게 고넬료를 찾아가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13~16절)

그들이 욥바에 도착할 즈음 베드로 역시 정오(낮 12시) 기도시간에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다가 환상을 봅니다.

베드로는 환상 중에 하늘에서 큰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매어져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 그릇 안에는 각종 짐승들과 기는 것들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는 이런 부정한 짐승은 먹어본 일이 없다며 먹을 수 없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또 들려옵니다.

이런 말이 세 번 오고간 후에 그릇은 하늘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 묵상 :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넬료와 베드로 모두

자신들이 늘 하고 있던 정기적인 기도 시간에 환상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도 주시고 환상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 구원의 길이고 복을 받는 길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도 보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3.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4절)

천사는 고넬료에게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기도와 구제를 하나님께서 제물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기 위해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고넬료의 기도 : 매일 규칙적으로 드리는 기도(2절)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은

그가 유대인들의 습관을 따라 항상 규칙적으로 그 시간을 지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 어느 날 한 번 기도한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

항상 일정한 시간을 내어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기 위하여 스스로 정한 그 시간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더 존귀하신 분임을 나타내 보입니다.

2) 고넬료의 구제 : 항상 변함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는 구제(2절)

고넬료의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은, 그가 구제를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구제가 순전한 마음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했다는 것은

그 구제를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과시하게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조용히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제를 받는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남이 모르게 조용히 하는 구제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4.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

1) 고넬료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 : 베드로를 청하라(5~6절)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경건함을 인정하셨다면 그에게 그냥 성령을 부어 주시면 될 것을

왜 그곳에서 50km나 떨어져 있는 욥바에까지 가서 베드로를 청하여 오게 할까요?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큼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지를 보려한 것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피장(가죽 제품을 만드는 자, 갖바치)의 집입니다.

유대인들조차 들어가기를 꺼리는 자의 집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로마 점령군 고급 장교인 고넬료가

그런 자의 집을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특별한 분을 모시듯 정중하게 초빙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2) 받기 거북한 명령이라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아나니아에게 다메섹 직가의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도 아나니아에게 매우 거북한 명령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자기를 죽이려는 아합 왕을 찾아가라고 명하신 것 역시

아주 지키기 거북한 명령이었습니다.

● 묵상 :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복을 주실 때 복 주시기 전에 우리가 거북해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정말 자기 생명처럼 여기며 지키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묵상 중에, 설교를 듣는 중에, 대화중에,

어떤 때에라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즉시 순종하십시오.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1) 베드로의 고집을 꺾으시는 주님(15절)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거의 도착이 될 무렵 베드로 역시 환상을 봅니다.

그는 환상 중에 하늘에서 큰 그릇이 끈에 매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그 안에는 각종 부정한 짐승과 기는 벌레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는 이런 부정한 것을 지금까지 먹어본 일이 없다며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이 세 번 오고 간 후에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2) 신앙은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자기의 주관대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버리고 내 뜻대로 기어이 이루어지도록

떼를 쓰는 기도를 능력 있는 기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말씀에서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고 누누이 강조하며 말씀하셨는데,

그를 따른다는 사도들과 제자들이

아직까지도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 취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집을 꺾기 위해 주께서 또 한 번 이런 수고를 하셔야만 했습니다.

● 묵상 :

참된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반대로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나무뿌리를 셋을 뽑는다 할지라도 결코 능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그 기도처럼 내 뜻을 하나님께 아뢰기는 하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혹시 우리도 우리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것은 없는지 자신을 살펴봅시다.

* 기도제목

1. 항상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경건한 습관을 갖게 하옵소서.

2. 비록 내가 꺼리는 것일지라도

주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하게 하옵소서.

3. 혹시 아직도 주님 앞에서

꺾지 않고 있는 고집이 있는지

늘 자신을 살피게 하옵소서.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 사도행전 10장 1~23절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와 고넬료라는 인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있다.

위 인용문에 따르면 베드로와 고넬료는 거의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즉, 서로 비교적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둘이 각각 환상을 경험한 후 필연적인 끈에 이끌려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둘의 만남이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기에 사도행전의 작가(루가)는 이렇듯 극적인 장치를 배경으로 깔았을까?



일단 우선 위 굵은 글씨에 대한 해설을 먼저 해보자.



– 가이사랴(가이사리아) : 과거 헤롯 대왕에 의해 건설된 도시 이름이다. 그가 이 도시를 건설한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일단 정치적인 면으로 본다면 헤롯은 상당히 유능하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의 순수혈통이 아닌 헤롯이 거의 40여년을 유대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 배경에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사실 원수에 가깝다)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 당한후 안토니우스,레피투스,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을때 헤롯은 안토니우스 편에 섰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그를 찾아가 설득에 성공하여 결국 유대의 왕위까지 오르게 된다. 이에 보답하는 측면에서 헤롯은 옥타비아누스(후에 원로원에서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를 위해 도시를 건설하고 옥타비아누스(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다)의 이름을 붙여 그에게 헌정한다. 헤롯은 분명 수완 좋은 인물이었다.



– 고넬료(코르넬리우스) : 위 인용문에서의 주인공이 명망가 귀족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코르넬리우스는 로마의 명망가 이름이다. 대표적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장 이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코르넬리우스 가문 출신이다.



– 이달리아(이탈리아) : 지금의 이탈리아를 떠올리면 된다. 위 인용문의 시대적 배경으로 봐서 당시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거나 칼리굴라 혹은 글라디우스일 것이다. 이 시기에 로마는 지중해 전부를 손안에 넣고 지속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인데, 이 광활한 영토를 황제 직할지나 원로원 직할지 그리고 속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이런 명칭에는 이탈리아, 달마티아, 갈리아(카이사르가 정복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시리아, 히스파니아, 다키아 등등이 있다.



– 백부장(백인대장) : 대략 100명 가까운 병사를 통솔하는 로마의 군대 지휘관이다. 지금으로 본다면 위관급 정도일 것이다. 그 위로 천부장, 군단장 등이 있다. 복음서에 나오는 군대(레기온)는 로마 군 부대 단위의 명칭이다.(요즘으로치면 여단)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레기온)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 마가복음 5장 9절



- 욥바(욥빠) : 지중해에 면해있고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이스라엘의 도시 이름이다. 과거 사사기 시절에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족의 근거지 였다. 골리앗은 블레셋족 출신이다. 헌데 욥바와 가이사랴는 적어도 100km이상 제법 먼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럼 이제 본문 내용이 의미에 대해 얘기해보자.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베드로는 욥바라는 서로 멀리 떨어진 도시에 있었는데 각각 환상을 본 후 우연이 아니라 대단히 필연적(의도적)으로 만나게 된다.

둘의 만남은 환상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우선 고넬료의 환상은 너무 진부하여 설명이 내키지 않는다. 한마디로 뻔한 레퍼토리다.

하지만 베드로의 환상은 좀 다르다. 베드로가 진짜 환상을 경험했든 작가가 꾸며서 한 얘기든 관계없이 환상 내용엔 뭔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환상이란 하늘에서 큰 보자기에 담겨(?) 각종 네발 짐승과 날짐승이 내려온다.

그리곤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그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명령한다.

헌데 베드로는 불결하니 거부하였다.

불결하다는 의미는 그 짐승들이 율법에 의해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된 것들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되새김질을 안하는 짐승들이었나보다.

정결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헌데 다시 하늘에선 깨뜻한 것들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런 일이 세번이나 반복된다. 그리곤 짐승들이 하늘로 올려진다.



이 의미는 아주 간단한 얘기다.

즉,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과거의 율법에 얽매여 깨끗하고(유대인) 불결한(이방인) 것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말라는 뜻이다.

초창기 사도들은 유대지역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고 점차 해외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전도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런 활동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등의 기존 세력에 의해 차단 및 탄압 당하여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고, 결국 예수 종파의 운명은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느냐에 key가 주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할례와 율법이었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이방인의 식사에는 율법에 어긋난 음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환상 에피소드에선 그런 음식들을 먹으라 명령한다.

따라서 이 얘긴 결국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는 하층민의 무지랭이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갖춘 고넬료 같은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절실하지 않았을까?





사족1 – 로마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카이사르와 그의 양아들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훗날 정제(아우구스투스)와 부제(카이사르)의 호칭으로 사용된다. 독일의 카이저나 러시아의 차르가 카이사르에서 왔고, 또한 독일의 아우구스부르크라는 도시는 아우구스투스에서 왔다.



사족2 – 루마니아라는 나라 이름은 로마에서 왔는데, 유래는 로마제국이 최대의 영토를 가질때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이었고 그때 루마니아 지역이 로마에 편입되게 된다.(명칭은 다키아)



사족3 – 에스파니아라는 명칭은 로마의 속주명 히스파니아에서 왔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라는 명칭도 로마의 속주명에서 왔다.



사족4 – 로마제국의 전성기인 오현제(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우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에 황제는 다음 황제감을 눈여겨 봤다가 그를 양자로 삼고 그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방식을 택했다. 예외도 있지만.

하지만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불초 자식 콤모두스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이때부터 로마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과거 중국의 요-순 임금이 그런 방식을 택했다.(순 임금 다음이 하 왕조를 연 우 임금이다.)

그리고 공자와 함께 우리 모두는 그 시절을 태평성대의 시절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대통령이 선출되는 작금의 세태는 뭔가 문제 있는건 아닐까…?

5년 전엔 절망했고 지금은 관심도 없다 제길… 

 

[가정예배 365-4월 17일] 고넬료와 베드로의 신앙

찬송 : ‘기쁜 소리 들리니’ 518장(통 252장)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도행전 10장 24∼43절

말씀 :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들어오자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극진했던지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라”고 당황할 정도였습니다(26). 로마의 백부장인 그가 피지배 민족이요, 게다가 무식한 어부였던 사람을 이렇게 최고의 경의로 영접한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얼마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먼저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임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28).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열린 마음으로 자기의 상식과 관습을 내려놓는 사람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고넬료는 무슨 일로 자기를 불렀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나눕니다. 나흘 전 기도시간에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와 구제를 받으시고 기억하신다고 하면서 욥바에 있는 시몬 베드로를 청해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고넬료는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다시 한 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동일시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들은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됐고,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참으로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고 당신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두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34∼35).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들려준 짧은 설교는 복음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평의 복음”이라고 소개합니다(36). 또 갈릴리에서 시작해 유대 전역으로 퍼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성령과 능력의 기름부음을 받아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사람을 고치신 일’이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사역인 대속의 죽음과 승리의 부활에 대해 간증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라고 밝힙니다(42).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인 자신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해 전도하는 사명이 주어졌다고 밝힙니다. 또한 베드로는 모든 구약 선지자들이 증언한 것 역시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임을 부연하고 있습니다(43).

기도 : 하나님 저와 우리 가족이 고넬료와 베드로처럼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최고로 존중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또한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권지현 목사(서울 다음세대교회)

고넬료와 베드로(사도행전 10:1-23)

고넬료와 베드로의 일화는 하나님의 사랑이 특정인(당시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백성들에게 향한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고넬료를 통해 참 기독교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시고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이 쉽게 범하는 자기 고집과 아집의 모습을 돌아보게도 합니다.

고넬료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초대교회 선교와 확장에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당시 초대사도들은 구원의 대상을 유대인에 국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사도들과 이방인 사역에 앞장섰던 바울이 초기에 대립하였던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과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참 계획을 알게 하시고 잘못된 편견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회는 세상 속으로 향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점은 고넬료의 신앙과 그의 삶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고 4절에 보면 기도와 구제에 힘쓰는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절에 ‘항상’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기를 스스로가 바라며 그걸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인으로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억압할 수 있는 막강한 무력과 권력을 가졌지만 스스로의 것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중용의 도를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겸손하였습니다.

식민지 통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노예나 하찮은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같은 인간의 심정으로 그들을 공감하려 하였고 그들의 아픔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알고 따스함을 공유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참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함께 있으면 따스합니다. 정이 넘치는 사람이 바로 기독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진정한 구제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지켜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약자이지만, 흠이 있는 사람이지만, 죄인이지만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고 지켜주는 것이 바로 참 구제의 시작입니다.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가치관과 이념들이 때론 우리의 성장과 하나님의 사역을 거스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온 나라와 민족, 모든 백성에게 향함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익숙해져 있는 가치관과 율법과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오히려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환경과 학습과 신앙의 교육만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위의 환경들은 하나님과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하고 흠많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너무 맹신합니다. 우리의 의만 의라고 주장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고 더 큰 영적 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경계를 허물어갑니다.

이렇듯 신앙은 자신의 경계와 지경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어렵고 힘듭니다. 때론 의문이 일기도 하고 때론 불쾌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내가 성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임을 알고 담대히 이겨나가고 오히려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험에 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기도하며 구제하는 삶과 베드로의 지경을 넓히는 안목을 통해 여러분의 신앙이 매일매일 새롭게 성장해 가시길 축원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행 10:24-38)

베드로와 고넬료 (행 10:24-38)

오늘 말씀 가운데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입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나라 공안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갈릴리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으로 현역 장교로 유대 나라에 파병된 군인 신분입니다. 유대 나라 중에 가이사랴 지방은 지역적으로 지중해 해변가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로마에서 군인들이 배를 타고 유대 나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닿는 장소입니다.

이곳에 로마 군 부대 본부가 있어서 유대 나라 전역을 감시, 감독하는 지휘권이 있는 유대 나라 사람들이 생각할 때 기분이 좋지 아니한 장소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두 사람은 국적상 원수가 됩니다. 하나는 지배자 중의 한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식민지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현역 장교로서 유대 백성을 감시하는 직분이요 베드로는 평민으로서 감시를 받는 소시민적 사람의 시민입니다. 국적이 다른 원수 관계요 직업의 차이가 큰 두 사람은 거주지도 하나는 북쪽 지역인 가이사랴요 하나는 남쪽 지역인 욥바에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만나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관계이며 만나봤자 피차 감정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하나님의 소개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은 기독교 역사를 새롭게 하는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게 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만나게 했으며 무슨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겠습니다.

먼저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공통점을 소유하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공통점은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이요 직업 군인으로서 유대 나라에 와서 살다가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 생활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했는지 하나님이 감동하셨다고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이라는 성경은 각 장마다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때마다 인물이 하나씩 소개됩니다.

7장에서는 전체가 스데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8장에는 빌립 집사의 전도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9장에는 사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성경 기록이 되고 오늘 10장에는 전체가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 장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 시간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시간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평소에 아주 잘하는 사람들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낮과 밤의 차이가 없어지는 요즘 같은 문화에서는 따로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 늘 기도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새벽기도 인구도 전체의 5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고넬료는 직업 군인이라서 항상 비상근무를 해야 되는 직업의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개 옛날 군대 사회는 무지스럽고 거칠고 잔인한 것이 통하는 사회가 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고요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분위기가 잡혀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로마 사람으로 식민지 백성을 향해 무력행사를 하기 위해서 현역의 몸으로 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식민지 백성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보통 이상의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똑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사람을 기도 속에서 연결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각자 환상을 보게 됩니다. 고넬료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노라.” 이런 말을 했는데 이 기도와 구제에서 기도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구제는 돈이 필요합니다. 아마 우리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내고 돈을 쓰는 일은 누구나 쉽지 않은 제목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아주 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나도 감동하셔서 지금 이 고넬료에게 큰 축복을 하나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상급으로 고넬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베드로의 심방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시간을 많이 써서 날마다 그 시간에 기도를 하고 돈을 많이 써서 구제를 했는데 어찌나 잘하고 많이 했는지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큼 잘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주 큼직할 상급을 내려주실 만합니다. “너 어려운 사람들 구제하느라고 참 돈 많이 썼다.

이제 내가 너에게 큰 재물을 선물해 주겠노라.” 하시든가 고넬로가 군인이니까 “너는 이제 진급을 해서 별을 달고 그 지휘관 생활을 훨씬 잘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이래야 좋을 것 같은데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베드로에게 심방을 오라고 청하라.” 이런 상급을 주었습니다. 심방 한번 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해서 그런 일을 지금 시키고 계신 것인가? 베드로는 사실 그것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기 보면 베드로가 좀 배가 고팠다고 했습니다. 뭐 먹고 싶은 상태에서 기도를 하니까 무엇을 잡아먹으라고 하늘에서 보따리 하나가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어보니까 자기가 일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유대인의 부정한 동물이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런 것은 내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나이다.” 여러분! 예루살렘에 한국 식당이 없습니다. 허가를 안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 이후에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에 한국 식당이 지금 어디나 있기 때문에 음식 불편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없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을까봐 허가를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먹는 종류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들만 가득했는데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하니까 “나는 이런 부정한 동물을 한 번도 잡아먹은 일이 없나이다. 깨끗하게 살았나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두 사람의 기도 중에 환상을 보여주셔서 연결을 시켜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두 사람이 만날 수 없는 상황을 말해줍니다. 로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인은 당시 세계 정복자의 권위가 있습니다. 그들의 우월감은 유대 민족 같은 사람들은 형편없는 노예 취급을 합니다. 로마 군인 장교는 정복자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으며 명령할 수 있으며 때로는 약탈도 하고 어떤 때는 부녀자 강탈을 하고 수틀리면 죽여 버립니다. 옛날은 그러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식민지 백성에게 자기 집에 심방 한번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켰습니다. 고넬료는 즉시 하인을 불러서 그가 있는 욥바로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계신 베드로 선생을 빨리 모시고 와라.” 베드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유대 사람들을 멸시 취급한다면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로마인들을 멸시합니다.

“너희들은 다 부정한 사람들이야.” 유대인들은 다른 종족과 교제를 하는 그 자체가 죄라고 오늘 성경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로마인은 부정한 동물에 속합니다. 멸시 취급합니다. 그런데 ‘내 입안에 넣으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런 신학적인 의문을 생각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전부 고넬료 이야기를 설명하니까 ‘아! 하나님이 나를 로마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그렇게 환상을 해석하고 따라 나서서 가이사랴 고넬료 로마인의 집을 심방 온 것입니다.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35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먼 길로 심방을 갔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심방을 맞이하기 위해서 일가친척, 친구들을 자기 집에 다 모아들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도착하니까 베드로를 보고 하나님을 만난 듯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당신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가 듣고자 모였나이다.” 행동은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가 들어오는데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려 절하니” 로마 군대 지휘관이 식민지 백성 앞에 발까지 엎드려 절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 점령군의 군대 지휘관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부하 다루듯 합니다.

직업에서 굳어진 행동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친척 사람들을 다 모아둔 그런 자리에서 갈릴리 어부 출신 유대 식민지인에게 발까지 엎드려 절을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완전히 평가 절하했습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여기 말합니까?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사람 취급을 안 하고 하나님 취급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넬료가 초청자로서 이렇게 오시게 된 동기를 전부 설명했습니다. “사실 내가 이 나라에 와서 당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살다가 감동을 받아서 그동안 기도를 열심히 했고 나름대로 구제활동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서 복을 주셨는데 바로 베드로 사도의 심방을 받으라는 축복을 주셔서 오늘 이렇게 오시게 되었나이다.”

베드로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34절에 보면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실 베드로는 유대니즘이나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아브라함의 혈통 후손에게만 전해야지 이방 사람에게는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아! 로마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비로소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일장 설교를 했더니 설교 도중에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서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그 시간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무슨 역사 창출을 해냈는가? 유대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이 8장에 에티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이고 10장에 와서 고넬료가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유대인의 국수주의 민족관에 사로잡혀서 타민족에게 복음 전할 생각을 절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베드로는 선교 사명을 깨닫고 로마를 향한 눈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로마 백부장으로서 세 사람이 예수님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발견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하인이 병들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 길에서 만나 간구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내가 만나보지 못했다.” 이렇게 칭찬하시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현장 지휘하던 백부장 지휘관이 그 변하는 초자연적 내용을 보고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성경말씀 고넬료 백부장과 베드로의 만남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환상이 보입니다. 반드시 베드로나 고넬료같이 똑같지 아니하여도 영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장래 일에 대한 역사 비전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전을 보십시오. “나는 꿈이 있다.” 그 꿈이 얼마 안가서 이루어집니다. 이게 기도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도적 관찰입니다. 그 다음에 구제는 하나님의 기억에 남을 만큼 상달되는 힘이 있다는 것이 여기 나타납니다.

어떤 청년 하나가 이민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방송을 들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신장 이식이 필요한데 기증자가 필요하다.” 이 청년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왜 이 방송을 듣게 되었는가 나도 선한 일을 한번 해야지.’ 그리고는 병원으로 달려가서 종합 검사를 하고 가능했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자기 배를 열고 하나를 떼어서 환자에게 주어서 그 환자는 아주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수술비로 190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가족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사람을 찾아야지요. 찾아보니까 주유소에서 종업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어휴! 어떻게 알았습니까?” “네! 잠간 계세요. 지금은 제가 일이 바쁩니다.” 그리고 그 주유소 가스통에다 “알 필요 없음.” 그리고 어디론가 살아져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 하나님 기억에 남았으면 됐음.” 이게 구제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제일 큰 상급은 무엇인가? 영적 은혜입니다.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돈 많이 쓴 것에 대한 상급이 베드로 사도 심방 와서 설교 한번 듣는 것인가?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가? 대단합니다. 만약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런 것은 안주셔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대로마의 지휘관이라는 권세도 내게 있고 돈도 내게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적 은혜를 고귀하게 내려주신 것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 가족들은 로마 사람으로 최초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넬료는 자기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자기 고국인 로마로 돌아갔고 베드로는 땅 끝까지 전도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역시 로마로 갔습니다. 역사가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유대 땅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은 로마 땅에서 같이 활동하다가 주어진 자기들의 생을 거기서 둘이 마감했습니다.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자라고 또 자라서 마침내 고넬료의 집안 세례로부터 시작한 복음의 전파는 로마를 세계 복음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세계 교회 중심의 대성당을 건축하고 지하에 자기 무덤을 만들고 안장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은 가난한 약소민족 노예 신분들이야! 나는 대로마 점령군의 지방 사령관이다.”

하고 베드로를 보지 않고 하나님같이 보았던 한 이방인의 신앙이 그렇게 잔인하게 핍박을 가하던 대로마를 뒤집어엎는 기초 공사가 되었고, “너희는 부정한 동물이야. 영적으로 야만 족속이야.” 하고 무시하던 베드로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절대 금물인 이방인에게 과감하게 세례를 준 것이 세계 교회 역사의 변화 지점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매동 갈보리교회가 바로 욥바의 기도실이 되고 가이사랴 기도 장소가 되어서 우리 모두의 만남이 세계 복음화의 기초 역할이 되는 축복이 계속되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통해서 세계 역사의 전환점을 삼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교회와 일꾼들을 선택하여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중심에 서서 하나님의 역사 진행에 쓰임을 받는 주의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행 10:1-16) * 땅 끝까지 이르러

2018년 9월 30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1 ✦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사도행전 10장 1~16절)

[ 들어가는 말 ]

어떤 사람이 동부에서 서부로 출장을 가게 되어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어느 정도 되었을 때 그는 지난 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피곤하고 졸려서 잠시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한지 2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뭔가 큰일이 난 것처럼 자기 주머니를 막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어서 물었습니다.

“이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괜찮으세요?”

“예, 괜찮습니다. 제가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깜빡 잊고 약을 안 먹었지 뭡니까.”

“그래요? 굉장히 중요한 약인가 보군요.”

“그럼요, 너무 중요한 약이죠. 수면제에요. 어휴, 하마터면 안 먹고 잘 뻔했네. 다행이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은 다음 잤다고 합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수면제 없이 잠을 자면 더 좋은 일인데, 습관이 들어서 안 먹으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습관 하나를 바꾸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우스갯소리겠지만, 우리가 가진 많은 습관이 있는데 하나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습관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관습이나 전통을 바꾼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조건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자기가 그 동안 해오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즉시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유익하고 자신이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베드로가 그런 모습의 시작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사울이 자기가 믿어 오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완전히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더욱더 큰 변화,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1. 고넬료에게 임한 환상

1) 고넬료는 누구인가?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1절)

저번 이스라엘에 갔을 때 가이사랴에 가보았는데, 지금은 유적들의 터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아주 웅장한 도시였습니다. 바다에도 건물을 많이 지었었고,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도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이달리야 군대”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로마 군대라고 하지만 이달리야 군인들로 구성된 본부대가 있고 또 현지인들로 구성되는 보조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보조부대 백부장이 아니라 정규 로마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으로서 로마에서 파견되어 여기 나와 있었던 엘리트 군인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해 놀라운 것을 또 알려줍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2절)

여기에 보면 그는 또한 경건했고, 자기만 아니라 온 집안, 즉 가족들과 종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는 것은, 로마 사람을 구제한 게 아니라 자기가 주둔하고 있는 유대 지역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선을 많이 베푼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입니까? 그가 베드로에게 보낸 부하들이 나중에 베드로 앞에서 고넬료에 대해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22)이라고 증언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33). 그러니까 그는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거의 개종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 중에서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어도 거의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난 8장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됩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었기 때문에 황제에 대한 충성을 1년에 한 번씩 맹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조차 우상숭배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록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또 구제도 많이 하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신앙이 아직 온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봅니다. 구약만 어느 정도 알뿐,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결국 그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할 점입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은 이방인입니다.

본문을 우리가 제대로 읽지 않으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환상 중에 귀한 말씀을 주시는데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와 경건함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이 잘 봐주셔서 인정을 받고 그런 점 때문에 고넬료가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환상에서 강하게 말씀해주시는 것처럼, 고넬료에게 구원이 이른 사건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심으로 일어난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은 속되고 깨끗하지 못한 이방인인데, 그 이방인을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언해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셨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9장에서 살펴보았지만, 사울이 복음을 대적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처럼, 그가 극렬하게 교회를 반대했으니까 그것을 복음을 위해 바꾸면 된다는 식으로 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택한 나의 그릇”(9:15)이라고 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사울이 구원받고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과 똑같은 원리로, 고넬료도 그의 경건함이 근거가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깨끗케 하심”이 근거가 되어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고넬료 사건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구나’ 하는 것이 고넬료 사건을 보여주는 의도이지, ‘고넬료가 훌륭하게 기도하고 구제하고 경건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 메시지의 초점이 아닌 것입니다.

2) 환상을 본 고넬료

그러나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로마 사람으로서 이렇게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경건한 이방인 장교인 고넬료에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환상이 임합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3절)

유대인의 시간은 항상 6을 더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 9시는 우리의 오후 3시이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것은 제9시, 즉 오후 3시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이었는데, 그러니까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역시 고넬료가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으니까 우리도 기도를 정기적으로 많이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적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천사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정확히 “고넬료야” 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잘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전해준 말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고넬료가 하고 있는 경건 생활을 인정해줍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4절)

하나님도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고넬료가 잘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도 인정해주십니다.

둘째로,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5-6절)

천사는 베드로가 있는 집과 장소까지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원래 이름이 시몬이니까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가 지금 욥바에 머물고 있습니다. 욥바는 가이사랴로부터 해변 길을 따라 남쪽에 있습니다. 욥바는 지금의 텔아비브(Tel Aviv)라고 했습니다. 약 50km, 즉 30마일 조금 안 되는 거리입니다. 거기서도 해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무두장이로서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그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해변에 산 것은, 그가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 수밖에 없는 부정한 무두장이라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알고 계시니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시는데,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청하라고 하십니까?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그냥 청하라고 하십니다. 뭔가 고넬료의 경건생활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는 합니다. 베드로를 청하여 그가 오면 뭘 하겠습니까? 뭔가 베드로를 통해 말씀해주실 것이 있다고 고넬료가 이해했음에 틀림없습니다.

3) 고넬료의 순종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는 즉시 자기 종들을 보냅니다.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7-8절)

이것을 보면 고넬료는 개인적으로 자기 집안 하인 2명과 자기 부하 군인들 중 경건한 병사 1명을 뽑습니다. 그리고 이 3명에게 모든 일을 이야기해주고 욥바로 보냅니다. 이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 집안”이 주님을 경외했다고 했으니 거기에 속하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왜 베드로를 청하라고 이야기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임을 직감하고 아무나 보내거나 평소에 그냥 인격이 좋은 사람들을 뽑은 게 아니라, 베드로를 청하기 위해서 영적인 사람들을 뽑아서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즉시 순종한 것입니다. 청하라고 하셨으니까 즉시 순종을 했습니다. 사실 고넬료는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계획을 갖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천사까지 보내셔서 환상 중에 알려주실 정도라면 뭔가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이 있으니까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하신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2.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1) 한편 베드로는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수많은 장면들에서 생각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한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한 곳에서만 일하지 않으시고 동시에 일하실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고넬료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베드로는…’이라는 식입니다. 부정한 자로 낙인이 찍혀 있는 무두장이의 집에 정통 유대인 사도 베드로가 여러 날을 머물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던 ‘한편’ 여기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9-10절)

‘한편’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중보기도실에서도 기도하고, 목장에서도 서로 기도하고, 개인적으로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아는 사람끼리 기도하고, 가족들끼리도 기도합니다. 특히 어떤 일이 잘 되어야 할 때(학교, 사업, 직장 등) 그것을 놓고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만 다른 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이쪽에서 기도하는 것과 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서로 연결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있을 바로 그때 한편 이쪽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연결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본문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나고 보면 ‘아, 내가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는 이미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하나님은 이미 저쪽에서 다 준비해놓고 계셨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 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걱정이 되시거나 두려움이 생기실 때 ‘한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한편’ 저쪽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묵고 있는 무두장이의 집에 가까이 이르렀는데, 가는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고 베드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제 6시, 즉 낮 12시에 정오 기도를 위하여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이때가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은 아니었지만, 베드로는 이 시간에 기도를 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낮 12시면 얼마나 덥습니까? 제가 그곳에 갔을 때가 5월 말이었는데, 낮 12시는 정말 뜨겁습니다. 그 뜨거운 시간에 왜 지붕에 올라가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통 유대인 사도 베드로가, 이때 가장 더럽고 부정한 곳으로 여겨지는 무두장이의 집 가장 높은 곳에 가서 가장 거룩한 기도행위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부정한 곳에서 가장 경건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가장 더러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경건한 행위인 것입니다.

2) 베드로가 본 환상

본문의 아이러니는 계속됩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황홀한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봅니다. 가장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곳에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환상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나오면서 성경이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절정에 이르는데, 베드로도 한 가지 환상을 봅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1-12절)

하늘이 열리면서 각종 짐승을 담은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여 내려오는 환상이 베드로에게 임합니다. 네모나고 평평한 그릇 위에 짐승들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직전에 시장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미 12시가 되어 배가 고파서 뭔가를 먹었으면 하는 상태였습니다(10). 그런데 그에게 환상이 임하면서 한 음성이 들립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13절)

굉장히 배고 고플 때이니까 잡아먹으라고 하는 소리는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 알겠습니다’ 하고 먹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4절)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말은 같이 쓸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주여, 안 됩니다. Lord, no!’는 말이 안 됩니다. ‘주여’라고 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자기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을 절대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히 종이 주인한테 ‘No’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Lord’라고 했으면 ‘yes’라고 하든지, ‘no’라고 하려면 주인이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안 된다며 아주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속되고 부정한(깨끗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굉장히 잘하고 있는 것처럼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베드로가 어디 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가장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무두장이의 집에 있습니다. 가죽을 만들기 위해 죽은 짐승을 만져야 하는 부정한 무두장이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먹고 마시며 머물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주제에, 부정한 것으로 여겨온 짐승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이것은 마치 진흙탕에 들어가서 마구 놀던 사람이 옷이 다 진흙투성이에다 모두 젖어서 감기에 걸릴까 봐 “일단 이거라도 걸치세요.” 하고 낡은 재킷을 주었더니, “어허,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런 더러운 것을 주나?” 하며 화를 버럭 내는 것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자기도 더렵혀진 주제에 더 깨끗한 것을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정함은 직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몸으로 선포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부정한 짐승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부정한 사람 집에는 머물 수 있지만, 부정한 짐승은 먹지 않겠다? 뭐가 다릅니까? 아직 그가 완전히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여줍니다. 갈 길이 멉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야, 내가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닌가?’ 지금 남들이 다 부정하다고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 괜찮다고 하며 일부러 찾아와서 머물고 교제하고 먹고 마시고 여러 날을 지내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굉장히 훌륭한 일을 했다고 만족해할 그때에, 하나님은 ‘너는 아직 멀었다.’ 하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자신의 기도로 살아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도, 또 부정한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며 그 장벽을 깼으면서도, 아직 이방인에게 갈 준비는 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게 참 힘든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한 가지 장벽을 넘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가 싶은데, 그 다음 순간 또 다시 옛날 기준에 묶여버리는 이런 모습이 사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나누는 담은 정말 두꺼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 담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엡 4:14-16, 새)

이것은 나와 조금 코드가 안 맞거나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다가 ‘그래도 하나가 되어야지’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비슷한 사람들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는 절대 경계를 넘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옛날 양반과 천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장벽을 무너뜨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이때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5절)

베드로가 본 환상(11-12)과 잡아먹으라는 명령(13)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14), 그리고 베드로의 그러한 거부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15)은 고넬료 사건을 이해하는 핵심 키(key)가 됩니다.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겨 내려온 짐승들은 베드로의 관습과 전통으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입니다(14).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릴 때 안 된다고 단호하게 자기주장을 펴면서 거부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말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아주 강한 거부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걸 먹으라고 하십니까? 나는 부정하고 더러운 것들은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때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것 역시 마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먹으라면 먹어! 그것이 깨끗한지 속된지를 결정하는 게 너야, 나야? 하나님인 내가 깨끗하다고 하는데 네가 뭔데 안 된다고 해?”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6절)

이렇게 먹으라는 주님의 명령과 베드로의 거부가 세 번씩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며 속으로 어리둥절하게 생각합니다(17). 그러나 그의 의아함과 상관없이 여기서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면 깨끗한 것이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단순히 먹는가 안 먹는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누구냐? 아직도 네 생각이냐, 네 관습이냐, 네 전통이냐? 아니면 너는 정말 내 말을 들을 거냐?’ 하나님이 그것을 여기서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런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그런데 그때 우리의 판단 기준이 뭡니까?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진로를 결정하는 것도 그렇고, 교회에서 회의를 하여 뭔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렇고, 내 생각만 주장하다 보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 생각대로 가면 안 좋은 길이 될 때가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베드로의 고정관념과 전통과 관습을 깨뜨리십니다. 왜 깨뜨리려고 하십니까? 그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교회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가게 하시려고 그렇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하나님이 거기서 역사하시며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서야 이 환상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3. 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

이 일 이후로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거듭 성경이 제기해주는 근본 문제는 바로 이 점이 될 것임을 암시해줍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과 고정관념과 전통이 이방인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문제를 베드로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 사도 베드로가 그것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놀랍게도 11장과 15장에 가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미리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는 그의 과거 경력이 어떠했든지, 그가 무슨 일을 했든지, 얼마나 악독한 일을 많이 하며 교회를 핍박했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복음으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울 같은 사람이 악독하게 핍박하며 엄청나게 잘못된 사람이었는데도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도로 부르셔서 사용하신다면,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고넬료 사건은 그가 이방인이라는 넘을 수 없는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저 이방인인 로마 사람 고넬료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왔다면, 어떤 신분이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출신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무두장이 시몬은 아무리 부정한 사람이라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가 부정하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그를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방인도 그렇게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이 이방인이니까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도 믿었어? 아니,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내려?’ 하며 깜짝 놀랄 일이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방인도 너희가 품을 수 있겠느냐?’ 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 사건과 고넬료 사건은 단순히 사울 한 개인이나 고넬료 한 개인이 구원받았다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주 중대한 사건입니다. 복음이 정말로 땅 끝까지 나아가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어떤 것일지를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사건도 사도행전에 세 번 나옵니다(9, 22, 26장). 9장에서는 그 사건이 일어났고, 22장과 26장에서는 사울(사도 바울)이 그 사건에 대해 돌아보며 증언합니다. 고넬료 사건도 세 번 언급됩니다(10, 11, 15장). 10장에서 그 사건이 나오고, 11장에서 베드로를 통해 그 사건이 언급되고, 15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그 사건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은 사울처럼 인간이 아무리 악독한 짓을 하고 죽을죄를 지었어도 당신의 목적을 위해 불러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사울이 그 길을 선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처럼 아무리 경건하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해도 결국은 이방인으로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또한 뒤집으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는데 인간이 뭐라고 부정하다 하겠습니까?

내 삶에서도 하나님이 된다고 하시는데 왜 내가 안 된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왜 내가 그러면 안 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고넬료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넬료를 깨끗하다고 하시며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대가 아니라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모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이상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 뜻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신분의 장벽을 극복한 한국 초대 교회의 교훈

우리 한민족이 세계 역사에 공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특히 초창기에 자랑스러운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이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3년 전 제가 안식월로 한국에 갔을 때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갔습니다. 한국에 가시는 분들은 좋은 곳들에 여행도 가시지만, 특히 자녀들과 같이 갈 때 양화진에 꼭 한 번은 가보시기 바랍니다. 영어로도 가이드를 해줍니다. 가 보면 인생에 도움이 됩니다.

양화진에 묻혀 있는 분들 가운데 새뮤얼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가 있습니다. 1892년 32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무어 선교사는, 현재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곤당골에 새문안교회 다음으로 두 번째 장로교회인 곤당골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예수학당을 열어서 조선사람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수학당 학생들 가운데 봉주리라고 불리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백정 박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백정에게는 이름이 없고 그저 성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봉주리로부터 아버지가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무어 선교사는 백정 박 씨를 문병했습니다. 그리고 의사였던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를 데리고 가서 백정 박 씨를 치료하게 했습니다. 후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에비슨 선교사는, 바로 이 근처 델러웨어(First Presbyterian Church of Delaware)에서 파송된 알렌(Horace Allen) 선교사에 이어 당시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에비슨의 왕진으로 백정 박 씨는 깨끗하게 완쾌되었습니다.

그 후 박 씨는 사람들이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자기를 위해서 외국인인 무어 선교사가 찾아와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왕의 주치의가 자기를 몇 주 동안 정성으로 치료해 준 데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곤당골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물론 백정 박 씨를 열렬하게 환영했음은 물론이고, 그에게 박성춘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으며 세례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백정 박성춘으로 인해 곤당골교회에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양반 교인들이 백정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무어 선교사에게 백정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저 백정들을 내보내라. 안 그러면 우리가 안 나간다.’ 하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사실 이해는 됩니다. 어떻게 양반들이 백정들과 같은 건물 안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출석 거부를 하다가 한 달 뒤에 양반 교인 대표가 무어 선교사를 찾아와서, 양반들의 자리를 예배당 앞쪽에 별도로 마련해 주고 그 뒤로 백정을 앉게 하면 교회에 다시 나오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교회에서 그런 차별은 있을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이제 출석 거부가 아니라 아예 곤당골교회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양반을 위한 홍문동교회를 따로 세워 나갔습니다.

그 일로 가장 난처해진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바로 백정 박 씨, 박성춘이었습니다. 자기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선교사님에게 죄송했겠습니까? 그래서 박성춘은 교회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무어 선교사의 도움 속에서 자기와 같은 백정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정을 사람 취급해 주는 교회가 있다. 우리도 사람 취급을 받는다.”라고 하면서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수원에 있는 백정들에게까지 전도하였고, 그 결과 사람들은 양반 교회였던 곤당골교회를 백정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에 곤당골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홍문동교회의 양반 교인들이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그리고 무어 선교사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양반 교회인 홍문동교회와 백정 교회인 곤당골교회가 합쳐져서 당시 홍문섯골교회라고 이름하여 통합해서 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의 전신입니다. 그때가 1898년이었는데, 당시 100여 명의 교인 가운데 백정이 30여 명이었습니다.

몇 년 후 박성춘은 홍문섯골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그 뒤에 왕손이었던 이재형이라는 사람도 장로가 됩니다. 그러니까 백정과 양반과 왕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주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 하셨던 바로 그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무어 선교사의 용기와 성경에 기초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성춘을 포함한 백정들은 무어 선교사의 후원과 지도하에 백정 해방을 위해서 수차례에 걸쳐 조선 정부에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의 백정들은 해방의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백정들이 국민의 자격을 얻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호적에 오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양반들처럼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법률적으로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20년 전 조선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로서, 무어 선교사와 그 동역자들이 없었던들 불가능했을 일이었습니다.

마르다 헌틀리(Martha Huntley)라는 분이 나중에 자신의 저서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A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 in Korea)>에서 무어 선교사의 백정 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turning the world upside down)”이라고 부르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 선교사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서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바로 그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가 조선 땅을 밟은 지 겨우 1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14년은 아주 짧지는 않지만 또 길지도 않은 기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과 마음을 고친 한 사람에 의해 사회의 한 부분이 새로워지는 데에 14년은 충분한 세월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시 백정들의 세계에만 국한된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봉주리로 불리던 백정 박성춘의 아들 역시 박서양이란 어엿한 이름을 얻었고, 세브란스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 되어서 그 후 10년 동안 모교에서 설립자인 애비슨 선교사와 함께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인간이 아닌 백정의 자식 역시 인간일 수 없었는데, 인간이 아닌 백정의 아들이 사회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무어 선교사에 의한 백정 해방이 그 당시 조선 사회와 조선 사람들의 의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어 선교사의 묘는 양화진묘역 A구역에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총탄을 맞아서 약간 훼손되었는데, 그 무어 선교사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Dedicated Servant of Jesus Christ).” 그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거나 명목상으로만 주님의 종이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충성하는, 헌신된 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예수님 안에서 그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힘입어 생각과 마음을 바꾼 그리스도인이었고, 주님 안에서 변화시킨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평생 주님을 위한 삶으로 일관했던 주님의 진정한 제자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나 감정을 넘어, 주님이 원하신다면 내 생각을 얼마든지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신분, 직책, 직업, 학력, 경력, 연령, 국적, 재산 등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병든 세상을 고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까? 그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능력보다 자신을 더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기가 막히게 놀라운지 아는 사람, 미천한 자신을 통해 주님께서 얼마나 오묘하게 역사하시는지 깨달은 사람은,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 안에서 생각과 마음을 고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막히게 놀라운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인간의 생각과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이 최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 그분을 따라 산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생각을 주님의 생각대로 고치고, 또 그 바꾼 생각과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병든 곳을 고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충복이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충복이 되어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행10:34-43) 20180121 > 설교문

고넬료와 베드로(행10:34-43) 2018. 1. 21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좋은 영향이 나의 삶에 미치게 마련이다.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사업의 동료를 만나고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나고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성경의 인물들로 하면 모세와 여호수아의 만남, 엘리야와 엘리사의 만남처럼 말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을 보라. 베드로나 안드레 형제, 요한과 야고보 형제들과 같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예수 만나서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나는 사도의 반열에 세움 받고 쓰임 받지 않았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 성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 만나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이방 선교의 중심에 세움 받는 사도가 되지 않았나. 사도 바울의 13편의 편지가 성경에 기록될 정도이니 그만한 복을 받은 인물이 신약 시대에 그 어느 누가 또 있나.

로마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는 욥바에 선교 방문 중이던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면서 삶이 한 차원 달라졌다. 예전에 경험한 적이 없던 성령을 받게 되었다. 그 동안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 오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러나 성령을 모르던 저들 가족과 친척들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던 중에 성령을 받았다.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게 되었다. 성령을 먼저 받고 나중에 물로 세례 받는 새로운 영적 경험을 모두가 다 같이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말씀하신 예언이 점점 성취되어 가는 장면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스라엘 밖의 주변 도시와 주변 나라들에 이르기 까지 점점 부활의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이 역사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욥바의 베드로는 자기를 찾아 온 고넬료의 부하들을 집안에 들였다. 하루를 묵게 한 후에 다음 날 욥바를 출발해서 가이사랴 까지 갔다. 드디어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모여 겸손히 기다림.

우리가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기다릴 때에는 잠깐 만 늦어도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진다. 요즘도 그러한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도착하기 전 까지는 전혀 연락할 수단이 없던 시절이니 말이다. 도착해야 도착하는 것이고 도착할 날짜에 도착이 안 되면 별의 별 상상을 다하게 되는 것이 그 당시의 형편이었을 것이다.

하인들과 경건한 부하를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심부름 보내 놓은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아 놓고 베드로 사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누구를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그 기다림이란 것이 주는 느낌이 어떠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인 곳에 마침 베드로가 도착하였다. 고넬료는 기쁜 마음으로 베드로 사도를 맞아 들였다. 고넬료는 베드로 사도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맞아 들였다. 그 때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나도 사람이라.”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렇지 않나. 당시의 로마 백부장이면 군대의 낮지 않은 지위를 가진 고급 장교이다. 그런 저가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베드로 사도를 정중하게 맞아 드렸다. 태도는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태도나 인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히려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백부장 고넬료는 진심으로 사도 베드로를 존중하고 환영하는 뜻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맞아 드린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요.”라고 대답하므로 인간미가 훈훈하게 풍기는 장면을 보였다. 생각해 보라. “그럼 나는 주님의 사도이고 당신은 일개 로마 군대의 장교일 뿐이지.”, “절할 마음이 있으면 더 정중하게 땅에 엎드려 절하게…” 뭐 베드로 사도가 이런 자세로 백부장 고넬료의 엎드려 절하는 절을 받았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겠나.

백부장 고넬료는 예절이 정중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주변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할 줄 아는 겸양한 모습이 일상의 예절에 배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 서로에게 보인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벤살렘 교회를 섬길 때에 과거에 대한민국해병대 부 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소장 김기홍 장군을 교회의 간증 예배에 모신 적이 있다. 그는 그 당시 해군 교회 소식의 장로였다. 그는 화기 소대장 시절 월남전의 짜빈동 전투 승리 신화의 주인공이다. 1967년 2월 14일부터 그 다음 날까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 대한민국 해병대와 월맹군의 격전이 벌어졌다. 월맹군의 수는 2,400명 이상이었다. 우리나라의 해병대는 장교 10명 사병 284명 다 해서 294명이었다. 그런데 십대 일의 전쟁에서 우리 군대가 크게 이겼다. 이 전쟁 기록은 위키백과 사전에도 나온다. 우리 군대는 15명이 전사하고 33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월맹군은 234명이 전사하였다. 불가능할 것 같던 전쟁은 우리 해병대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월남전의 전사에 기록된 ‘짜빈동 전투’이다. 이 전쟁으로 그 당시의 소대장이었던 김기홍은 일 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경상도 시골 두메산골 마을에서 자라난 그는 1960년에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경사였다. 군대에는 그의 고등학교 선배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두메산골 시골 고등학교의 영광이었다. 그런 그가 장군이 되고 해병대 부사령관 까지 지냈다. 그 모든 간증의 바탕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었다. 얼마나 겸손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구수한 경상도 매너를 지녔던지 20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면 “그는 장군 출신이지만 참으로 겸손한 분이셨다.”는 기억이 새롭다. 그의 간증은 나라 안팎에 수 백 번의 초청을 받고 또 받았다. 이제는 연세가 꽤 많을 것이다.

김기홍 장로는 간증집회 중간에 찬양을 불러 은혜를 더 한다. 김 장로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 태어나 절망, 좌절, 배고픔으로 생활하다 13살 때 예수를 믿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간증했다.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군 장로가 된 이야기, 월남전에서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전쟁을 치룬 이야기, 군대 내에서의 확고한 믿음생활, 상관의 압력에도 해병교회를 건축한 이야기, 예수의 증인이 되어 간증하는 삶이 된 이야기”등을 들은 기억이 요즘도 생생하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고 하였다. 이는 잠언 3장 34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 주변의 그 누가 교만하게 행동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나. 그러나 겸손하고 부드럽고 온유하면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나. 예수는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으로 소개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생활 하는 중에도 매사에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모습을 배우고 실천하는 성숙한 성도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매주 좋은 읽을거리와 은혜로운 볼거리를 카톡으로 보내 주는 남자 권사가 있다. 그는 지난 주중에는 이런 글을 보내 주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한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을 내려지길 기다린다. 또 새날이 시작되면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잔등에 실리길 기다린다.

주인은 낙타의 건강상태와 기운과 체력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준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지 않나. 나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 형편에 적합한 인생길의 짐을 실어 주신다. 하나님은 나의 체질과 형편을 잘 아신다. 그리고 내가 감당할 만한 짐을 지고 가게 해 주신다. 넘어지고 쓰러지면 손 붙잡아 일으켜 세워 주신다. 한 낮의 뙤약볕 아래서는 쉴만한 물가와 그늘을 찾아 안식하게 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신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나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 꿇는 삶을 시시 때때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새에게는 날개가 무거운 짐일 수 있으나 새는 그 날개로 인해서 원하는 창공을 훨훨 날아서 원하는 곳으로 날아다닐 수 있고 날아 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고통이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으로 인하여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주의 모든 말씀을 듣기 원하는 이들.

유대인인 사도 베드로가 이방 사람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유대의 율법으로 하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용감하게 먼 길을 찾아 가서 가이사랴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은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행동이 가능하였던 것은 욥바에서 정오기도 시간에 기도하던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차근차근 자신의 경험을 그들에게 이야기 하였다. 세 번이나 똑 같은 환상이 반복되었다. 그러한 체험 이후에 베드로는 결심하였다. 베드로는“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천사를 통한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이 땅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피부색이나 언어나 인종이나 문화나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 어떤 종교에 사로 잡혀 있었든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평등하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들은 고넬료는 정중하게 베드로를 환영하는 인사말을 하였다. 며칠 전에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체험한 내용과 천사의 가르침에 대한 간증도 하였다. 고넬료는 인사말의 끝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였어도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늘 그냥 그런 상태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서 내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레마’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시작할 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예배의 매 시간 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길 축원한다.

예배 시간의 말씀 선포를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넬료의 고백을 보라. 사도행전 10장 33절에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 앞에” 라는 이 태도가 얼마나 소중한가.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그 멀리 욥바에서 자신들의 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정중한 예절로 맞아들이고 베드로를 통하여 선포될 주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0장 34절부터 43절까지의 말씀이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다.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셨고 물로 세례를 베풀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

예수는 온 갈릴리와 유대의 마을을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

예수는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그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예수께서 유대 땅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나무 십자가에 못 박고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흘 만에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그러나 부활 하신 예수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택하신 증인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나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은 갈릴리 해변에서 부활 하신 주님을 모시고 조반을 먹은 적도 있다.

부활하신 예수는 우리에게 명하셔서 백성들에게 전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셨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증언한 이들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누구나 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게 된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다. 어떤가.

우리가 이런 설교 말씀을 대할 때에 성령이 임재하실 만한가.

우리 다 같이 542장 찬송, “구주 예수 의지함이”를 부르자.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영생 허락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주를 믿는 나의 맘을 그의 피에 적시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악 벗어버리네

안위받고 영생함을 주께 모두 얻었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구주 예수 의지하여 구원함을 얻었네

영원무궁 지나도록 주여 함께 하소서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믿음 더욱 주소서

성령의 강림.

이와 같은 베드로 사도의 설교 말씀을 경청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였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임하시는 주의 영이시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보면,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 오셨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문을 열고 들으면 누구나 다 성령 받고 방언하고 하나님을 높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면 성령이 임하고 인생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삶의 우선순위가 달리지게 된다.

지난 월 화 수, 삼일 간 50여명의 목회자들과 함께 시간을 가졌다. 어떤 목사는 자신은 20대 때부터 밤무대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며 세상의 한 가운데서 살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졌다. 성령을 받았다. 막내 동생 같은 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지금은 부부 목사로 아내와 함께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며 산다고 했다. 그는 그의 과거 경력처럼 구수한 입담을 갖고 있었다. “저 쪽 동네에서 이 쪽 동네로 전향했지만 아직도 어색하고 부족한 것이 많다”고 고백하며 겸손하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달라진다. 늘 교회에는 다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큰 은혜를 받을까봐 마음 문을 꼭 닫고 있으면 하나님의 살아 역사는 말씀이 내 심령에 들어 와서 은혜를 끼칠 수가 없다. 길가와 가시밭과 돌짝밭의 마음 상태로는 성령이 임하기 어렵다. 좋은 땅이 되어야 100배로 결실하게 되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임해야 성령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하나이다. 분리해서 설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나면 그보다 더 기쁘고, 그보다 더 신나고, 그 보다 더 흥분되고, 그 보다 더 좋은 경우란 없다.

성령이 임하고 나면 생각이 바뀌고, 취미가 바뀌고, 습관이 바뀌고, 관심사가 바뀌고, 말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뀐다. 성령 받고 나면 옛 사람이 사라지고 새 사람이 된다. 우리가 새 옷 사면 옛날 땀내 나는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나. 이처럼 성령이 임하고 나면 이전의 내 모습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올 1월 새해맞이 축복기도 성회로 첫 주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 모였다. 그 시간에 선교 간증한 몽골의 김석환 선교사의 이야기 중에 “참새는 자기 날개 힘으로 날아 보려 하기 때문에 멀리 날지 못하지만 독수리는 날개의 힘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기류를 타고 날아가기 때문에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높게도 날 수 있고 멀리도 날수 있다”는 설명이 은혜가 되었다. 그렇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그런 상태이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성령이 내려 오셨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 시간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 위에 내려와 임하였다. 하늘 위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나니 이렇게 좋고, 이렇게 변하고 이렇게 기쁘다고 고백한 찬송 가사가 있다. 감리교 목사요 신학자요 교육가였던 이호운(1911-1969) 목사의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다. 436장 찬송이다. 그가 작사한 또 다른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 따라 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노인 청년 구분 없이 누구나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고 성령 받아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가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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