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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3장
- 1절: – crafty: 술수가 뛰어난, 교활한 …
- 2~3절: 여자의 답변
- –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뱀은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
- 5절: – 이것도 뱀의 말이 맞다. …
- 6절: …
- 7절: …
-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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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
성경구절 듣기(창세기 1:26-3:24)
[구약] 창세기 (Genesis) 전체듣기, CBS 박명규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성경
https://youtube.com/watch?v=bQVGohpTBJQ\u0026feature=share\u0026t=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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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선악과와 생명과를 먹지 말라 | 성경과 교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한 번 먹지 말라고 했으면 끝까지 먹지 말아야지 뒤에 가서(창3:2~3) 살짝 감추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
Source: bibleandchurch.kr
Date Published: 9/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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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 나무위키:대문
즉 선악과 사건은 성경에서 반복되는 테마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건인 것이다. … 을 적절하게 지었다는 구절 등에서도 이러한 점들을 엿볼 수 있다.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17/2021
View: 9221
[히브리어 성경]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3:3) – 복음 빵집
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어 성경 중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바람에 원죄가 들어 …
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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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창 3:1~13) – 창세기 큐티(수정)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사하고 교활하였습니다. ·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습니다. · 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1/16/2021
View: 5092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에덴 동산 한가운데 두셨는가
뜻밖의 질문에 여러 말이 오간 후 혼자 남았을 때 ‘생명 나무’가 나오는 구절들을 성경에서 모두 찾아 읽어 보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
Source: gloryb2lord.org
Date Published: 11/3/2021
View: 3244
난해구절 –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박윤선 목사, ‘성경주석 창세기 출애굽기’ p.95). 이상의 “그에게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선을 파수하는 생활이 필요하였다”는 해석은 선악과를 이해하는데 전혀 불충분 …
Source: usabiblestudy.com
Date Published: 5/11/2022
View: 603
창 3:1-5 선악과의 유혹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성경 구절들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을 두고 하는 말이며, 이 뱀을 사탄으로 전제하고 있다.8) 그렇다면 …
Source: peterjoy.tistory.com
Date Published: 7/23/2021
View: 2374
생명나무와 선악과(창세2:4 -17) – 가톨릭정보 – 굿뉴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두 구절을 결합시켜서 인용 하심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이 … 성경은 그러한 ‘생명의 기운’을 소유했던 아담이 어떻게 ‘영원한 …
Source: maria.catholic.or.kr
Date Published: 3/29/2022
View: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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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선악과 성경 구절
- Author: 알럽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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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7.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GGPgpOCoiM
[Into the Bible] 창세기 3장 : Genesis 3 – 선악과
창세기 3장
1절:
– crafty: 술수가 뛰어난, 교활한
–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뱀이 처음 등장했다. 이를 두고 뱀이 어떻게 말을 하나, 하며 마귀를 뱀이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참 뒤에는 당나귀가 말을 했다는 장면도 나오는데 그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경에서 뱀이 말을 했다면 한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추측이지만 어쩌면 에덴동산의 모든 동물이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또 흥미로운 점은 뱀이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접근했다는 점이다. 선악과의 경고를 직접 들은 아담 대신 경고를 전해 듣기만 한 여자에게 접근했다.
– NIV는 snake(그냥 뱀)가 아닌 serpent (아주 큰 뱀)라 하였다.
– 뱀의 질문 방법은 매우 영리하다. 거짓 유언비어를 들은 것처럼 질문한다. 이해가 쉽게 풀어 해석하면 이러하다.
뱀: 내가 전해 듣기로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동산의 어떤 나무 열매도 먹지 말라 하셨다 들었는데 그게 정말이야?
‘No’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뱀의 신뢰를 높이려는 목적의 질문이다.
동시에 뱀의 주된 목적인 ‘선악과’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여자가 말하도록 유도한다. 천재이다.
2~3절: 여자의 답변
4절:
–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뱀은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이 바로 죽었는가?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틀렸고 뱀의 말이 맞은 것인가? 또 그렇지도 않다. 당장 죽지는 않지만 유한한 삶을 살게 되어 언젠가는 죽어 원자재였던 흙으로 돌아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 것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처음에는 마귀의 길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무당이 점을 치거나 분신사바를 하거나 처음에는 곧잘 맞출지 모르나 끝은 어긋나게 되어있다.
5절:
– 이것도 뱀의 말이 맞다. 선악과를 먹은 후 실제로 눈이 밝아졌고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되었다.
– 인본주의는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이다. 신본주의 와 반대되는 사상이다. 마귀는 항상 ‘너희가 하나님이 되라’고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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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교회가 승리하는 듯 하였으나 마귀는 초대교회의 기독교 교리를 비틀어 가톨릭으로 변질시켰다. 이후 수백 년간 부패한 가톨릭에 반발하여 마틴 루터, 존 칼빈 등이 이끈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7~18세기에 결쳐 인본주의, 르네상스, 유물론 등의 인간 중심 사상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진화론은 인간이 스스로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스스로 존재하신 분은 하나님이다. 너희가 스스로 존재하신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마귀의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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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 둘 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열매를 먹는 장면이다. 아담 조차 먹을까 말까 고민했다는 얘기도 없다. 어쩌면 부모의 훈육, 학교의 교육, 조상들의 교훈 중 어느 것도 배워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고 신생아로 태어나 성장한 과정도 없는 ‘아기’나 마찬가지인 그들이었기에 별생각 없이 열매를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 어린 시절에는 아담, 하와 둘 다 무책임하고 개념 없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반드시 하고야 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아담, 하와가 아닌 그 누구였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7절:
– 일단 4~5절에서 말한 뱀의 말이 맞다. 죽지 않았고 눈이 밝아졌다.
– sew(sewed): 바느질하다
8절: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다
10절:
– 아담은 두려워서 숨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려운 이유가 벗었기 때문일까 명령을 어겼기 때문일까?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선악과에 대한 경고를 어겼기 때문이다. 아담은 핵심을 피하려 한다.
12절:
– 타락한 인간의 특징 중 하나인 변명이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열매를 먹게 되었으므로 하나님 책임이라는 변명이다.
– ‘The woman you put here with me’ gave도 아닌 put이다.
– 처음에는 여자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 했으나 이제는 내가 원한 적도 없는 여자를 괜히 나한테 주셔서 이러한 일이 생겨버렸다는 식의 변명을 한다.
13절:
–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이 아담의 변명을 들으신 후 “네 이놈~ 변명 따위나 하다니~” 하면서 혼 내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와에게 잘못을 물으신 것이다.
– 여자 또한 변명을 한다. 뱀이 자기를 deceive 했으므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변명이다.
– deceive: 속이다, 기만하다
14절:
– 그렇다면 뱀이 이 저주를 받기 전에는 기어 다닌 것이 아니라 서서 다녔을 것이다.
15절:
– 창 3:15는 ‘원시 복음’이라 말한다. 은유적, 비유적 표현이 많다.
– ‘원수’를 NIV는 enmity라 하였다. enmity의 뜻은 원한, 증오, 적대감이다.
– ‘여자의 후손’은 ‘인류’를 뜻하는 것 같다. 남자의 씨를 통한 자연적 잉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동정녀 탄생을 암시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은유적, 비유적 표현은 성경 본문에 명확한 해석이 없다면 굳이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하셨다.
– ‘네 후손’your offspring은 뱀의 후손을 말한다. 여기서의 ‘뱀’이 사단 혹은 마귀라면 이 사건 이후로 인간과 마귀의 적대관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머리’와 ‘발꿈치’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성경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16절:
– 어린 시절에는 하와의 죄 때문에 여자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게 되었다고 배웠다. 하지만 본문은 죄 때문에 임신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임신의 고통을 크게 더하셨다고 greatly increase your pains in childbearing 말한다. 남자는 임신하지 않고 여자만 임신하는 이유가 하와의 죄 때문이었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단지 자식을 낳을 때 고통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와의 죄가 아니었다면 여자는 고통 없이 숨풍숨풍 자식을 낳았을 지도 모르겠다.
– 너는 남편을 원하고 Your desire will be for your husband : 본문 만으로는 명확한 해석이 어렵다.
17절:
– ‘아담’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히브리어로 ‘인간’이라는 뜻이다.
–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죄를 물으신 순서이다. 뱀, 하와, 아담 순서이다.
–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 vs 여자의 말] 중에서 여자의 말을 선택한 것이다.
– which I commanded you라고 직접 명하셨다는 점을 강조하신다. 하와에게는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다.
– 그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점은 의외이다.
18절:
– 엉겅퀴 thistle는 무엇인가? 국화과의 식물이라고 하며 근래에는 약으로도 쓰인다 한다. 이것이 농사를 방해하는지는 모르겠다.
20절:
–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으로 히브리어를 음역 한 것이다. 어떤 경위로 Eve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21절:
– 이 말씀인즉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 안에서 살 동안 마음만 먹으면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나무 열매에 대해서는 언급하신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 22장에 다시 언급된다. 구원받은 우리가 먹게 될 열매이다.
– ‘우리 중 하나같이’에서도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하셨다.
–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를 읽으면 혹시라도 따먹을까 염려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NIV는 He must not be allowed to 라 하여 따먹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금지되었다고 표현한다.
23절: 에덴동산에서 추방됨
24절:
– 참 안타까운 구절이다. 대체 ‘그룹’이 무엇인가? group의 그룹인가? 그룹이라 써 놓으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NIV는 cherubim이라 하였다. 우리말 음역은 ‘케루빔’으로 천사의 이름이다.
대략 이렇게 생겼다고 추정한 그림이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케루빔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자주 등장한다. 에스겔서와 예레미야 애가 에서는 하나님께서 cherubim을 타고 다니시는 장면이 나온다.
– ‘두루 도는 불 칼’은 무엇일까? NIV는 a flaming sword flashing back and fourth라 하였다. flaming은 ‘격렬한’, ‘불타는’이다. 해석하면 ‘앞뒤로 번쩍이는 불타는 칼’이다. 현재는 생명나무를 어디에 옮겨 두셨는지 모르지만 이때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뜻이겠다.
–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자 –
15. 선악과와 생명과를 먹지 말라
본문말씀 : 창세기 3장 1~7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의 기록은 모세 선지자가 기록을 했습니다. 기록할 때에 어느 때의 사건을 기록하였는가 하면 모세가 노아 홍수 심판 때를 거쳐 출애굽하여 생존 시까지 약 이천오백 년 전에 되어진 사건을 아주 세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이천오백 년 전에 살아 있었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이 말씀의 기록을 시작할 때에 나이가 약 팔십 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광야 사십 년 동안의 행적을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천오백년 전에 되어진 사건은 어떻게 알았냐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사건에 대하여 뱀과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 마치 곁에서 보고 직접 들은 것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 모세 오경은 마치 대화 하는 것 같은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사람의 수명까지 아주 정확하게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수많은 선지자들의 출생과 나이를 그토록 자세하게 알고 기록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에덴시대에 있어서 보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모세가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 이천오백 년 전에 되어진 사건을 환상으로 보고 에덴시대에 천오백 년의 역사와 인물들의 나이와 모세가 죽기까지의 역사 이천오백 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주의 환상으로 기록을 했는데, 마치 없는 것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을 환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마약을 먹은 사람이 환각 상태에 빠져서 물에 빠져 죽을 때, 사랑하는 애인을 환상 중에서 보고 물에서 오라고 하니까 환상이 실상인 줄 알고 물에 뛰어 들어 죽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환상, 환각 이런 것은 실상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여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기 위해서 미래에 되어질 사건을 예언한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지나간 역사설로만 알고 있는데 지나간 역사설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말세에 되어질 종말을 처음 창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알려 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창세기는 미래의 예언적인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닫기를 원합니다.
마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고 말한 것은 창세기에는 무엇인가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창세부터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약 사천년, 예수 때부터 지금까지 이천 년, 도합 약 육천 년 동안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내용을 오늘 여러분들이 눈으로 보고 성경으로 확인하게 되고 귀로 확인하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사48: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옛적에 장래사를 고하였고 내 입에서 내어 보였고 내가 홀연히 그 일을 행하여 이루었느니라
옛적에, 바로 창세 때 장래사를 알려주고 하나님의 입에서 내어 보였고 홀연히 그 일을 이루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한 알의 밀알을 땅에 묻어서 심습니다. 심는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면 한 알의 밀알이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나중에는 백오십 개 내지 이백 개의 열매가 달릴 것을 생각하고 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심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알파의 시작, 창세기이고 열리는 것은 오메가 곧 끝, 계시록입니다. 처음 심은 것의 밀알이 마지막 밀알의 열매로 오는 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것이 농부의 마음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려서 시작하는 것은 끝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시작하는 것입니다. 처음 심었던 것이 끝에 가서 달리게 됩니다. 중간에는 밀알이 보이지 않습니다. 밀의 대를 베어 속을 아무리 쪼개어 보아도 밀알이 들어있지 않으나 분명히 그 속에 밀이 있습니다. 불과 두 달만 가면 여름에 밀 알맹이가 밀대 끝에 달리게 됩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농부가 심은 것입니다.
오메가가 이루어지기 전에 중간에는 밀알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밀알의 실상을 알 수도 없고 증거 할 수도 없었습니다. 씨앗을 심을 때는 싹을 보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지만 열매가 달리기 전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밀의 열매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밀대 속에 숨겨지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이제 여러분들이 보게 되는 것과 같이, 때가 됨으로서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며 에덴동산에 숨겨져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에 관련된 창세기의 비밀을 깨닫게 되실 줄 믿습니다.
창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에 기록된 뱀에 대해서는 파충류에 속한 비늘 있는 뱀, 꼬불꼬불하게 다니는 뱀, 땅에 배를 붙이고 다니는 실상의 파충류 뱀으로 알아 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부터 예수를 믿어왔는데 제가 논이나 밭에 가서 뱀을 보면 “이놈! 아담 하와를 꼬인 이놈” 하고 제가 끝까지 따라가서 막대기나 돌멩이를 가지고 뱀을 쫓았던 생각이 납니다. 배우기를 어떻게 배워왔는가? 이 뱀이 지금은 땅에 기어 다니지만 옛날에는 뱀이 사람하고 말을 해서 하와를 꾀었다고 알아왔습니다. 과연 에덴동산의 뱀이 하와를 꾈 수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한 다음에 나온 최초의 예언입니다. 지금 어떤 여자를 보고 당신의 원수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뱀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뱀하고 원수 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뱀이 이 세상 끝날까지 여자와 원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으니 이것이 실상의 뱀이겠냐는 것입니다. 이 뱀의 정체에 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계12:7~8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기록된 말씀에서 용과 천사장 미가엘이 전쟁에서 붙었습니다.
계12: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실상의 뱀이 어떻게 사람을 꾈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에서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옛날 에덴동산의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사람)라고 했습니다.
계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사람이 마귀와 사단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 중 한 제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요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한 사람이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뱀이 마귀라면 뱀이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뱀이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직접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3:32~33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율법사, 바리새인들을 보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본다면 성경에 비유된 뱀은 실상의 미물인 파충류 뱀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뱀이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는데 오늘날 이 시대에 실상의 뱀이 온 천하에 있는 육십오 억이나 되는 사람들을 꾈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뱀과 대화를 하는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창3:1~4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실상의 뱀은 귀머거리입니다. 뱀은 들을 수 있는 귀라는 기관 자체가 없습니다. 귀 조직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물체를 어떻게 감지를 하는가 하면 온 몸을 땅에 붙이고 다니기 때문에 진동에 의해서 뱀은 먼 곳 가까이 있는 물체를 감지를 하는 것이지 실상의 뱀은 귀머거리입니다. 독을 쏘는 독사는 더 말할 것 없는 귀머거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뱀, 독사가 귀머거리라고 써 놨습니다.
시58:4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독사가 바로 귀머거리입니다. 에덴시대에 뱀과 여자가 대화하였다면 귀머거리가 된 뱀이 여자의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는 실상의 뱀이 아니라 사람 뱀을 비유한 것입니다.
전술한 말씀과 같이 실상의 뱀이 아니고 사람을 뱀으로 비유했다면 오늘날도 성경 말씀을 들어도 알 수 없는 영(靈)적인 귀가 먹은 가증한 자들이 바로 뱀입니다. 귀머거리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귓구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뱀입니다.
마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으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니까 옳은데 듣다보면 넘어져서 이 교회로 옮길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교회 안 나오려고 “한 번만 더 들어보면 넘어갈 것 같아, 나 안 갈래.”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귀머거리의 귀를 뚫어 주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영적 귀먹은 귀머거리의 귀를 뚫어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고는 이 깊은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은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성령의 귀가 없는 영적 귀머거리들로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신랄하게 비판한줄 믿습니다(마23:33).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진리가 없고 진리에 서 있지 못한 자가 뱀이요 독사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진리가 없으므로 거짓말 할 수밖에 더 있겠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들음으로 깨달아 복 받는 자 되시기를 원합니다.
마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했던 것,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했던 말씀을 오늘 듣고 깨달아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축복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기로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다 따 먹어도 좋은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 먹지 말라’(창2:16~17) 이렇게만 알아 왔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 실과는 따 먹을 수 있는 과일이며 생명나무 실과를 먼저 따 먹으면 모든 사람이 영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먼저 따 먹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알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며 오늘날 통일되고 현실화 된 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창3: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무슨 나무가 있었는가 하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으니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생명나무도 먹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명령한 것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둘 다 먹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방에 기어 다니는데 방 가운데 독극물이 담긴 물그릇을 갖다 놓고 “아가야 이거 먹으면 죽는다. 만져도 안 된다. 그리고 이거 쏟으면 절대 안 된다” 하고 나오면 독극물 그릇은 언젠가는 먹을 수도 있으며 쏟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방 가운데 있는 독극물은 어린아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함정인 것입니다. 그것도 한 쪽 구석에 물을 잘 둔다면 안 쏟을 수 있지만 방 가운데 놨다면 언젠가는 쏟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한 쪽 구석에 두지 하필 동산 중앙에 두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동산 중앙에 갖다 두었으니 당연히 잘 보일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가족이 죽기로 작정된 함정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으니까 아담 하와가 오죽 잘 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볼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도록 하여 놓고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라고 하였으니 사형 선고가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 과일이 모양새가 없으면 징그러워서 만지지도 못할 것인데, 보기에 좋고 먹기에도 좋으며 또 만지기에도 좋도록 만들어 놓고, 더군다나 지혜가 탐나도록 만들어 놓고(창3:6)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들길을 지나가다가 꽃에서 악취가 나고 흉측스럽게 생겼으면 누가 그 꽃을 좋아하고 꺾겠습니까. 아름다운 장미는 한 번 만져보고 지나가고 남의 아기도 예쁘면 볼이라도 한 번 만져보고 지나가지만 흉측스럽게 생겼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보기에 아주 아름답고 지혜가 탐이 나는 좋은 나무로(창3:6) 만들어 놓고 동산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따 먹도록 즉 범죄 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략적인 사실인 것을 오늘 여러분들이 듣고 깨닫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마치 쥐덫을 놓을 때에 쥐가 좋아하는 멸치 같은 것을 놓고 쥐가 냄새를 맡고 찾아오게 한 덫에 쥐가 걸려들어 잡혀 죽는 것과 같이 에덴동산에 범죄의 유혹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하의 사기꾼, 온 천하를 꾀는 뱀이(계12:9) 똬리를 틀고 아담 하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에덴동산이 낙원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으면 그날 바로 죽어야 하는데 먹는 날에 안 죽었습니다. 구백삼십 세나 살았습니다(창5:4~5).
영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먹는 그날에 이미 영은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둘째 아담 예수님이 삼십삼 세에 죽었으므로(고전15:45) 첫째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그날의 나이가 삼십삼 세로 추정되며 영적으로 그 때 죽었으나 육신으로는 구백삼십 세를 향수한 것입니다.
창5: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일백삼십 세에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이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낳은 아들로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날에 죽으리라 했는데 그날 죽지 않고 팔백년을 지내면서 자녀를 낳았으니 얼마나 많은 자녀를 낳았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연수를 계산해 보니까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면서 노아의 아버지인 9대손 라멕 때까지 아담이 살았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첫 아들을 아담과 쏙 닮은 아들을 낳았으면 둘째 아들도 아담을 쏙 닮은 아들을 낳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잘생기면 아담하게 잘 생겼다고 합니다. 그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한국말은 의미적으로 성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모세란 이름도 물에서 건졌다고 하여 모세라고 하였습니다. 한국말로 물에서 모래를 건지면 경상도에서는 모세라고 말합니다. 영성으로 볼 때 성경의 상당부분이 한국말에 기준을 둔 것 같습니다. 노아라는 이름도 놓아 준다.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다. 많은 이름들을 살펴볼 때 지명이나 이름의 발음이 한국 발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그날에 죽으리라고 했는데 그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930세나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비밀은 세계 중에서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풀려집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한 번 먹지 말라고 했으면 끝까지 먹지 말아야지 뒤에 가서(창3:2~3) 살짝 감추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창3:3). 이것은 은유(隱喩)를 사용하여 숨겨두신 말씀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2:16~17)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으므로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창3:3)는 말씀에는 집중이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뿐만 아니라 생명나무 실과도 먹지 못하도록 이미 창세 때부터 작정되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인간은 곧 창조 때부터 영생할 수 없도록 지어진 것으로써 이는 처음부터 종말을 고한(사 46:10)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더라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었을 텐데 아이고! 억울해라” 하며 쫓겨난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생명나무 실과도 선악과처럼 따 먹지 못하도록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야(창3:5) 생명나무를 발견하고 따 먹도록(창3:2~3)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 실과는 언제 따 먹을 수 있는가? 시기가 언제인지 처음부터 종말을 고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사46:10) 종말에 가서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을 수 있도록 계시록 전체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따서 먹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 먹게 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따서 먹는 것과 주어서 먹는 것은 다릅니다. 주어서 먹는 것은 주는 사람이 일단은 따 가지고 와서 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을 때 여자 하와는 따서 먹었고 아담은 여자가 따 가지고 와서 주니까 아담이 받아먹었습니다.
이기는 자는 생명과를 따지 아니하여도 주니까 받아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생명과를 따지 아니하여도 주는 자가 있으므로 자동으로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가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어떤 자인가? 세상을 이기는 자로서(요일5:5) 현재 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완료형으로 다 이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기신 분은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보시면 예수님만이 세상을 이기신 분입니다(계5:5).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기는 자가 아니고 완전히 세상을 ‘이긴 자’ 입니다. 세상을 이긴 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다 덤벼도 죽음까지도 만민의 죄를 위하여 예수 한 사람을 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고 말했을 때 “나는 유대 왕이 아닙니다.” 라고 했으면 십자가에 달리지도 않고 살았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네가 말하였도다” 라고 하니까 재판장이 얼마나 약이 올랐겠냐는 것입니다. “너의 나라와 권세는 땅에 있지만 나의 나라와 나의 권세는 하늘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이긴 자이고, 종말에 생명나무 실과를 받아먹을 수 있는 사람은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는 예수 믿는 자입니다(요일5:4~5). 계시록 2장 7절에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 실과를 주어 먹게 한다 했고 또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된다 하였으며(계3:12) 성경에는 이기는 자에 관해서 일곱 번이 나옵니다만 이기는 자를 가리켜서 이긴 자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재림 주나 감람나무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성경을 변조하고 더하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로 나온 박태선이 이긴 자라고 말합니다. 찬송 부를 때도 “이긴 자 오셨네, 이긴 자 오셨네” 라고 부르고 박태선 밑에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나왔던 조희성도 계2장, 3장 말씀에 나오는 이기는 자를 이긴 자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2장 7절 뿐만 아니라 계시록 2장 26절에 이긴 자가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이긴 자라고 기록된 성경 구절이 없습니다.
에덴성회 교주 이영수와 자칭 재림 주 이만희도 이기는 자로 기록된 성구(계2, 3장)를 이긴 자라고 고쳐서 주장합니다. 이는 성경을 변질시키는 천하의 대적자 마귀입니다. 에덴성회 이영수라는 감람나무로 나온 자는 박태선 밑에 있던 자인데 자기가 이긴 자이라 하고, 이만희도 이긴 자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긴 자라고 하는 성경 구절을 보면 전부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를 이긴 자로 성경을 바꾸어 버리면 천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계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성경에 기록을 더하는 자는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를 이긴 자라고 하는 것은 더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이기는 자는 앞으로 이길 것이 백분의 일이라도 이길 것이 남아 있을 때에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요일5:3~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자에게 생명나무 실과를 주어 먹게 한다는 것은 예수 믿는 자 중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하게 될 줄 믿습니다.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것은 신앙의 두루마기 즉 양심의 옷을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두루마기가 더러워지면 세탁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였을 때는 우리의 두루마기가 더러운 두루마기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니까 마음의 어두움이 없어지고 찬란한 빛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말씀, 한 말씀 깨닫는 것이 내 속에 입었던 믿음의 두루마기가 나날이 빛나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성경 전체는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예언의 말씀을 제한다는 것은 성경을 뜯어내면 제하는 것이 되겠지만, 실상으로 제하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모르면 아는 것 말고 나머지는 몽땅 제하는 것이 됩니다.
제한다는 것은 뺀다는 것이고 뺀다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제하는 것이 됩니다. 예언의 말씀을 ‘제하면’ 하는 것은 ‘모르면’ 하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찢어버려서 모르는 것이나 성경을 붙여 놓고 모르는 것은 마찬 가지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제하는 자 곧 알지 못하는 자는 생명나무가 있는 거룩한 성에 못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였습니다(창3:22). 종말의 구원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을 하나하나 듣고 깨달아 지키는 자들은 복 받을 줄 믿습니다.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부분은 제하는 자가 되지만 듣고 깨달아서 알고 있는 부분은 지킬 수가 있으므로(계1:3) 제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생명나무가 있는 거룩한 성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생명나무는 지혜의 나무입니다.
잠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오래 사는 것이 장수입니다. 부도 있고 벼슬도 있습니다.
잠3: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오래 살고 부자 되고 귀인 되고 얼마나 즐겁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잠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그러므로 종말의 생명나무 구원의 역사는 오래 살고, 부자 되고, 벼슬 얻고 이것이 생명나무의 구원의 길입니다.
잠3:1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런 지혜와 모략과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잠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종말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는 의인들만이 영생에 들어갑니다. 의인의 열매가 생명나무입니다.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고 죄인들은 영벌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잠13:12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무엇이든지 소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고 구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생명나무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사65:17) 부르기 전에 응답한다고 하였습니다(사65:24).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 가서 영생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창세 때에 영생이 이루어졌다면 그 때 천국이 다 이루어지고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롬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영생이 마지막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에덴동산 처음에 나타났던 생명나무 실과는 못 따먹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보시면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리라고 했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받는 자들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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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어 성경 중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바람에 원죄가 들어왔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나갈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히브리어의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창세기 3:3)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뱀은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던 이 실과를 따 먹어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사탄은 사람에게 다가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사탄의 계략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미혹되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처럼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אמר(아마르 559 동사, 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이야기하다, 생각하다, 선언하다, 명령하다, 약속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셨고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선언하셨으며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인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고 먹지 않으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와가 준 선악의 열매를 먹고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파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약속을 파기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능동형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선악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고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심사숙고하여 아담에게 선언하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인간에게 선언하시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 결국 아담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죽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온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뱀의 미혹에 의해서 끝나는 것처럼 되었지만 하나님은 후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에덴동산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두 죽었던 인생을 예수님의 보혈로 살리셨습니다.
완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건은 완벽하며 더 이상 빼거나 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은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남성을 쓴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근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3인칭을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아담과 하와뿐만 아니라 그 자손까지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이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통한 모든 자손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온 인류가 죽게 된 것입니다. 단수는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먹지도’ אכל(아칼 398 동사, 능동, 미완료, 남성, 2인칭, 복수) 먹다, 삼키다, 소비하다.
여자는 뱀에게 말하기를 먹지도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때에 먹지도 말라고 했던 이 단어는 능동형으로 단순 능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뜻은 바로 인간들이 직접 먹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칼형은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따먹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 내가 먹음으로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문맥을 통해 보면 뱀과 하와의 대화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능동형의 주체는 하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와가 이 열매를 따먹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의 열매를 먹어 삼켜 소화시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원히 죽게 됩니다.
미완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현재 하와의 행동이 끝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고 관심을 갖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고 마음속에 관심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분명 아담으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뱀의 말에 마음이 요동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와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요동치고 있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뱀의 말에 마음이 많이 선악의 열매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담에게 명령하셨고 아담은 하와에게 명령하여 먹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복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많은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만 있던 것이 아니라 많이 달려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칼형은 너희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너희 것으로 먹어서 삼켜 소비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칼형은 행위 하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와도 반드시 아담에게서 선악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혹시 먹어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자유의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영원히 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믿지 말고 내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렇게 구원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죄 씻음 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이 방법 외에는 절대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지금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마음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미혹된 교리에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와가 선악의 열매를 먹어도 혹시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지지도’ נגע(나가 5060 동사, 능동, 미완료, 남성, 2인칭, 복수) 닿다, 대다, ~에 이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만지지 말라고는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덧붙여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 성입니다. 자신의 합리화를 시켜 선악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도 단순능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선악과에 네가 직접 손을 대지 말고 선악과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자가 임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쳐다봐도 되고 만져도 됩니다. 단 먹지만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자는 가까이 가서 손을 대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금하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 자체가 선악과에 손을 대지 말라는 주체로서의 행위를 능동형을 써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완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도 않은 말을 삽입하여 계속적으로 선악의 열매에 다가가서 만지지 말라고 자신들이 경고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행동하면서 결국에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미완료는 행동 자체가 끝이 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없었지만 인간들이 스스로 만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남성을 쓰고 있는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는다고 했으니 겁이 나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만지지 말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인간들이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인칭은 바로 네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아담에게 지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많은 실과를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을까 하노라’ מות(무트 4191 동사, 능동, 미완료, 남성, 2인칭, 복수) 죽다, 죽이다, 살해하다.
이 열매를 따먹은 자는 죽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먹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는데 이 열매를 따먹은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이 열매는 따먹어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능동형의 해석은 반드시 자신이 행동하는 행위자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능동형은 자신이 선악의 열매를 따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고 자신의 권한을 따먹는 것에 사용했습니다. 선악의 열매를 따먹는 순간 즉시 죽어버렸습니다.
미완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어기고 선악의 열매를 따먹으면 계속적으로 영원히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후로 즉시 죽어버렸고 영원히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영원히 죽었고 후손들도 모두 죽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죽었던 자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남성을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악의 열매를 따먹은 자들은 절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완전히 죽어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하나님께서 살리지 않으면 자신 스스로는 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완전 부패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성은 근원을 말하는데 인간의 완전한 부패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복수는 아담과 하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후손들까지 완전 부패되어 죽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없이는 절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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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창 3:1~13)
* 오늘의 말씀 :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창세기 3:1~13)
* 본문요약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짐승들 가운데 뱀이 가장 간사하고 교활하였습니다. 어느 날 뱀이 여자에게 다가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바라보다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따먹고는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추궁하시자 그들은 서로의 탓으로 돌리며 핑계를 댑니다.
찬 양 : 395장(새 342) 너 시험을 당해
397장(새 357) 주 믿는 사람 일어나
* 본문해설
1. 뱀이 하와를 유혹함(1~5절)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사하고 교활 하였습니다.
어느 날 뱀이 여자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어떤 나무의 열매도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들을 먹을 수 있으나
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눈이 열려서) 하나님처럼 되어
너희도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먹지 못하게 한 것이라.
– 교활(1절) : ‘아롬’으로 간교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약삭빠른 것을 뜻함.
–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절) : 펜 테무툰
‘펜 테무툰’의 정확한 번역은 ‘죽지 않으려거든’입니다.
동산 가운데 있는 그 나무의 열매만 먹지 않으면 최소한 죽지는 않는다는 것으로,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보다 훨씬 약하게 말한 것입니다.
마귀는 이 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유혹합니다.
– 밝아져(5절) : 웨니프케후
뱀이 하와에게 말한 ‘밝아지다(웨니프케후)’는 ‘눈이 열리다’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2.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6~7절)
6) (뱀의 말을 듣고)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습니다.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렸습니다.
– 눈이 밝아져(7절) : 파카흐
5절과는 달리 여기에서의 ‘밝아지다(파카흐)’는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았다, 감각의 눈이 열리다’라는 뜻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죄의 감각, 욕망의 감각, 육체의 쾌락의 감각이 열린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추궁(8~13절)
8)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9)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10) 아담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서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제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 ”
11)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네게 벌거벗었다고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그 여자가 저에게 그 나무 열매를 주므로, 제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그 열매를 먹었나이다.”
– 벌거벗었으므로(10절) :
죄의 감각이 열려졌으므로, 서로의 육체를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 :
죄와 욕망의 감각이 열려 서로를 욕망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생겼고,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 묵상 point
1.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과정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이 세상을 만들어주시고, 이어서 에덴동산까지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아름답고 복된 삶을 그리 오래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단 하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사람은 죽게 되었고, 온 세상 만물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죄를 범하게 되므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주목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질문 : 질문 속에 담긴 흉계와 올가미
사탄은 세상의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교활한 뱀을 이용하여 하와를 유혹합니다. 뱀은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속셈을 감추고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말을 한마디 툭 던지며 그 사람이 자기가 던진 올가미에 걸려들기를 기다립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드는 악한 질문 :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께서 정말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뱀이 던진 이 질문 속에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강력한 도전이 담겨 있습니다. “너는 아직도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믿고 있느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질문입니다.
• 이처럼 악한 영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합니다. 말씀과 멀어지게 합니다. 신실한 삶을 귀찮은 일로 여기게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신실한 삶이 귀찮아지는 바로 이 순간부터 대단히 위험한 응급상황이라 여기고 서둘러 대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귀찮아지는 이 상황을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 여기고 서둘러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2) 하와의 실수 : 마귀에게 속마음을 들킴
① 하와의 과장된 대답 :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은 말까지 덧붙여 말함(3절)
하와는 일단 하나님께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허락하셨다는 것과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와는 “만지기만 해도 죽으리라고 하셨다”는 말을 한 마디를 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까지 강조하여 말함으로써, 자기는 하나님께서 금지한 이 열매를 먹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② 하와의 자신 없는 대답 : 죽을까 하노라(3절)
‘만지기만 해도 죽으리라’라고 한 과장된 말에서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불만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뱀은 이어서 ‘죽을까 하노라’라고 한 하와의 말에서 결정적으로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파악합니다.
‘죽을까 하노라’하는 이 말도 직역을 하면 ‘죽지 않으려면’이라는 말이어서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분명히 하기는 했습니다만, ‘정녕 죽으리라’(창 2:17)의 말씀보다는 훨씬 약한 말입니다. ‘그것을 먹는다고 정말 죽이시기야 하겠는가’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 말로 마귀에게 들킨 것입니다.
➠ 뱀의 질문에 숨겨진 흉악한 음모가 있더라도 그것은 그저 질문에 불과했습니다.
뱀이 던진 질문 속에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흉악한 음모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단지 질문일 뿐입니다. 의심을 품도록 하는 흉악한 의도를 숨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질문을 했을 뿐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하와가 단호하게 선을 긋는 말을 했다면
유혹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만 뱀이 던진 올가미에 걸려들고 맙니다.
➠ 마귀는 그저 유혹의 질문과 말을 툭 던졌을 뿐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를 꼼짝 못하게 꽁꽁 묶어서 악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질문을 하고 미끼를 던져 그것을 물도록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보고 듣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바른 길로 간다면 마귀는 결단코 우리를 악의 자리로 이끌지 못하는 것입니다.
3) 뱀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반대로 왜곡함
하와가 뱀이 던진 미끼를 물자 뱀은 이제 그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뱀은 사실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사람도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뱀의 속임수는 개역성경에‘눈이 밝아져’라고 번역된 5절과 7절의 단어의 차이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① 눈이 밝아져(5절) :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
사탄이 뱀을 통해 말한 5절의 ‘너희 눈이 밝아져서’는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의로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하나님처럼 되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셔서(혹은 질투하셔서) 숨기셨다는 것입니다.
② 눈이 밝아져(7절) :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아는 것, 욕망의 감각의 눈이 열리는 것
그러나 하와가 그것을 따 먹고 난 후에 상황인 7절의 ‘눈이 밝아져’는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각의 눈이 열리다’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욕망, 죄의 즐거움의 감각이 열린 것입니다. 욕망은 생겼는데 그 욕망을 해결할 방법은 없으니 이것을 먹으면 정말로 죽게 되는 것이었는데 마귀는 그것을 숨겼스비다.
➠ 만일 하와가 처음부터 단호하게 말씀으로 뱀을 물리쳤더라면~
만일 하와가 말씀에 분명히 서 있는 사람이었다면,
예수께서 마귀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신 것처럼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단호하게 뱀의 유혹을 물리쳤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와는 뱀이 던진 유혹의 질문과 말을 묵상하다 의심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하와는 뱀이 하는 말을 계속 마음에 담고 묵상합니다. 뱀의 말을 계속 생각하는 동안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 자라납니다. 뱀이 던진 유혹의 독이 하와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의심에서 불신으로 서서히 자라납니다.
4) 그 유혹의 자리에서 머물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음(6절)
하와는 그 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이 복음처럼 달게 들립니다. 그런 상태에서 선악과의 열매를 보니 과연 먹음직스럽게도 보이고, 자신을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할 것만 같은 열매로 보입니다. 하와는 그 나무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따먹고, 자기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결국 이 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모든 아름다운 선물들이 다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 묵상 :
① 죄를 이기려면 먼저 그 유혹의 자리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죄를 이기기 위해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먼저 죄의 유혹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면서 죄를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죄를 이길 마음이 없는 거짓 기도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나를 넘어지게 할 만한 것들을 내 눈과 귀에서 멀어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께 도움을 청해야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② 뱀은 그저 말을 툭 던졌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하와가 다 했습니다.
뱀은 한 번도 완력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단지 의심을 품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의심과 원망의 마음을 품게 하는 것으로부터 이겨야 합니다. 말씀에 굳게 서서 세상의 혼란에게 믿음을 바로 지켜 승리하는 자가 됩시다.
2. 죄의 결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다음과 같은 심판이 내려집니다.
그 죄의 결과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의 죄를 가리켜 ‘원죄(原罪)’라고 말합니다.
1) 죄와 욕망이 들어온 결과 : 욕망의 부끄러움에 빠진 사람들(10절)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뱀의 말대로 눈이 열려지기는 했으나, 그 결과 그들이 본 것은 욕망을 가지고 상대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보장되는 안전한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죄의 욕망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은 죄의 욕망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첫 번째 감정입니다.
어린아이는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욕망과 죄를 알게 될수록 벌거벗음에 대한 수치를 알게 됩니다. 이들이 벌거벗은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이미 그들에게 죄와 욕망이 들어왔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죄의 결과 사람은 죽고 또 죽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육체가 죽으니 첫 번째 죽음이고, 다시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자들이 되었으니 두 번째 죽음입니다.
2) 지배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됨 : 서로 책임 전가(12~13절)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하와가 먹으라 해서 먹었다고 변명했고, 하와는 뱀이 꼬여서 먹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죄의 욕망이 들어오자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는 본래의 아름다운 마음은 사라지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고발자들이 되고 맙니다. 아담은 자기가 살기 위해 하와를 고발했고, 하와 역시 자기가 살기 위해 뱀을 죽음의 자리로 고발하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지배하는 자와 지배를 당하는 자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음(10절)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하나님과 함께 손을 잡고 에덴동산을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두려운 마음이 생겨 나무들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숨었느냐고 물으시자 아담은 자기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에 죄와 욕망을 품었으므로 두려운 것입니다. 죄의 결과 사람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데,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으니 사람이 죽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 묵상 :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죄의 욕망이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운명처럼 얽혀있는 죄의 욕망과 그 결과인 죽음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양합시다.
3. 인간의 원죄 :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의미는?
아담과 하와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왜 그렇게 큰 죄가 된다는 말인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1)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 : 교만(5절)
첫째 선악과를 따먹은 동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뱀은 이 열매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하와는 그 열매를 볼 때 과연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할 것 같은 욕망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짐승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는데, 사람은 그 이상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죄의 근본인 교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실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그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2)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넘어선 것 : 탈선, 허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알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면 사람이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먹지 말라 한 것인데 사람은 단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그것을 따먹어 죄의 유혹에 노출되고 맙니다.
➠ 마귀는 죄의 후유증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연 뱀의 말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뱀은 선과 악을 알고 난 후의 후유증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면 본능적으로 죄를 즐거워하는 저주받은 욕망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뱀의 말을 더 믿은 두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던 그 계명을 범하여 영원히 저주를 받는 탈선과 허물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 묵상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계를 정해 주셨다면, 그 한계를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선하신 뜻을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으려 힘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넘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선하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바른 믿음의 길입니다.
* 기도제목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게 하옵소서.
2.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넘지 말게 하옵소서.
3. 이미 버릇이 되어
고치기 어렵게 된 죄의 습관으로부터
속히 벗어나게 하옵소서.
4.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자가 되기에 힘쓰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에덴 동산 한가운데 두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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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email protected]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View more posts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석원태 목사의 교회
선악을 알게 하는 말 그대로 선과 악을 구분 짓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음(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이 선이고 선악과를 따먹음(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이 바로 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뜻)에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원래 사람은 에덴에서 하나님과 영생할 존재였습니다. 생명나무를 두어 인생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해주었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어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가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립니다. (석원태 목사 서울 경향교회 2008년 11월 19일 인터넷 신앙상담게시판의 글 중에서 발췌)
이상에서 “생명나무를 두어 인생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해 주었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어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가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알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라는 주장이 맞다고 할 경우에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었다. 다시 말하여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인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것은 모순이 되어 버린다. 왜 이러한 커다란 모순이 생기게 되었느냐 하면 선악과의 뜻을 전혀 잘못 알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김세화의 주장
창세기에는 ‘선악과’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생명나무까지 허락하셨지만 유독 선악과에 대해서는 엄중한 경고를 내리신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세화, LA 밀알장애인선교단 간사, 2003년 12월 11일 LA 중앙일보)
이상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분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고 하였는데, 선악을 아는 것은 좋은 것인데 좋은 것으로 인도하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시었다면 이는 모순이다. 왜 모순이 생기게 된 것일까?
박윤선 목사의 주장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사람을 시험하기 위한 시련수(시련의 나무)였다. 그 때에 사람은 아직 범죄하지 않았으나 시련을 통과하기 전이었다. 그 에게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선을 파수하는 생활이 필요하였다. (박윤선 목사, ‘성경주석 창세기 출애굽기’ p.95)
이상의 “그에게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선을 파수하는 생활이 필요하였다”는 해석은 선악과를 이해하는데 전혀 불충분한 설명으로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는 설명이다.
매튜 헨리의 주장
거기에는 ‘선과 악을 아는 나무’도 있었다. 이 나무를 통해서 도덕적인 선악을 알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적극적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어졌다.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나무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다른 모든 도덕적인 선과 악의 분별은 원래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법의 결과로 생기는 선악의 분별은 이 나무 위에 새겨져 있다. ‘너희는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유혹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탄은 이 나무에게 주어진 이름까지도 악용하였다. 이 나무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 다시 말하면, 책임과 불충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세워진 나무였다. (매튜 헨리, ‘성서주석 창세기’ [상] p.75,101)
이상에서 보이는 창세기 2장과 3장에 기록된 선악과에 대한 해석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3:1-5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22-2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고 계시면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었다. 선악을 아는 일은 좋은 일인데 하나님은 선악을 아시면서 왜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을 알지 못하게 하시었을까? 이상의 문자적인 기록에 의하 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선악과 아담이 알게 될 선악은 같은 의미로 되어 있는데, 과연 같은 의미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창세기 3:5-13을 연구하면 자세히 밝혀진다.
창 3:5-13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 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선악을 아는 일은 좋은 일인데 하나님은 선악을 아시면서 왜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을 알지 못하게 하시었을까? 창세기 3:5-13에 기록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의 결과를 살펴보면 질문에 대한 해답이 간결하게 밝혀진다.
첫째,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 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선악과를 먹고 난 후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 이는 선악과를 먹기 전과 먹은 후 사물을 보는 그들의 눈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창 1:31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상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였다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의 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좋은 상태 그대로의 눈이었으나, 선악과를 먹고 난 후의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좋은 상태가 아니라 나쁘게 보였기에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과 먹은 후의 눈이 같지 않고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둘째로,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내가 동산에서 하나님 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지 아니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여 숨게 되었다.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선악과를 먹기 전과 먹은 후에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셋째로,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는 기록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책임이 아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와에게 있다고 하여 책임을 전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넷째로,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는 기록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손종한 원인이 하와 자신에게 있지 않고 뱀에게 있다는 책임을 전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중요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이유 는 이상의 기록이 밝히는 데로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선악의 판단의 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이유는 이 선악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 된 모든 인간은 선악의 판단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처럼 사단 중심, 인간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한다. 즉 선악의 판단 기준은 사단과 인간의 생각이다. 하나님 중심의 선악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자세히 모르면 하나님 중심의 선악의 판단 기준을 절대로 모르게 되어 있다.
창세기 3:22-23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의 문자적인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과 아담과 하와의 선악의 기준이 동일한 것으로 생각 되어지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선악의 기준과 선악과를 먹은 후의 아담과 하와의 선악의 기준은 같지 않고 전혀 상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악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것이다.
베이커 성경주석: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노력을 하다가 죽게 되었다.”
유혹자는 아담과 이브가 지혜로 와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실은 어리석어져 벌거벗게 되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소한 노력을 하다가 그들은 죽어야 할 운명이 되었다. (베이커 성경주석, ‘창세기’ [상] p.132,145)
매튜 헨리: “사단은 너희는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는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 너희는 엘로힘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아지며 전지자가 될 뿐 아니라 전능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 자신과 같아질 것이며, 그와 같아지고, 그의 상대가 될 것이다. 너희는 또 다스리는 자가 되고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되며 누구에게 예속된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터무니 없는 제안이다. (매튜 헨리, ‘성서주석 창세기’ [상] p.101)
조용기 목사: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조용기 목사, 2006년 7월 23일 여의도순복음방송국 FGTV Internet 설교 중에서 발췌)
창 2:17의 말을 바꿔 얘기하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모든 과실을 먹을 수 있으되 선악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느니라. 그 지식은 나의 것이니라. 그것은 내 권위의 상징이니라.” 금단의 나무는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 ‘4차원의 영적 세계’ 1997, p.231)
김세윤 목사: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였다.”
태초에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창 3:5)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낙원의 평화를 잃고 카오스와 고난의 세상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김세윤 목사, ‘예수와 바 울’ p.322)
이상에서 베이커, 매튜 헨리, 조용기 목사, 김세윤 목사는 창 3:5의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에 근거하여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창 3:5의 기록이 전혀 잘못된 해석에서 온 것으로 이러한 해석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NIV For God knows that when you eat of it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good and evil.
창 3:22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NIV The LORD God said, The man has now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창 3:5의 구절을 문자적으로 얼핏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창세기 3:22를 같이 놓고 해석해야 한다. 창세기 3:5의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 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의 기록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라고 해석한다면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난 후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결코 되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라는 것은 전혀 그릇된 해석이다. 창세기 3:5은 창세기 3:22에서 해석되고 있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세기 3:5의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는 뜻은 그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은 것이 결코 아니라 그들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것과 같이 그들도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한글성경의 창세기 3:5의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의 번역은 해석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것과 같이 너희도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상의 연구를 통하여 베이커 성경주석, 매튜 헨리, 조용기 목사, 김세윤 목사의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황당한 것임이 밝혀졌다.
하나님나라를 꿈꾸며(Kingdom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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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Now uthe serpent was more crafty than any other beast of the field that the Lord God had made.
He said to the woman, “Did God actually say, ‘You1 shall not eat of any tree in the garden’?” 2 And the woman said 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s in the garden, 3 but God said, v‘You shall not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that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neither shall you touch it, lest you die.’ ” 4 wBut the serpent said to the woman, “You will not surely die. 5 For God knows that when you eat of it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good and evil.”
u Matt. 10:16; 2 Cor. 11:3; Rev. 12:9; 20:2
1 In Hebrew you is plural in verses 1–5
v ch. 2:17
w ver. 13; John 8:44; [2 Cor. 1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1–5.
1절)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다. 이 뱀이 여자에게 질문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성경은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된 세상가운데 악한 존재인 뱀이 어떻게 들어왔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뱀의 질문은 매우 교활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선 2장 16-17절에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지금 뱀은 이 명령을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라고 묻는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것을 누릴 자유와 권한을 주시되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차별성을 알게 하시기위해서 오직 선악과만을 먹지 말라고, 그리고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뱀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것 아닌가라며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시키고 있다. 본문에서 뱀은 하나님을 지칭하면서 하나님의 고유한, 개인적인 이름인 ‘여호와(야훼)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엘로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 뱀은 신비로운 지혜를 소유한 존재로, 그리고 마력과 악의를 가진 피조물로 간주되었다. 당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신들중에 코브라나 뱀의 형태를 한 신들이 존재했다.
이 뱀의 특성은 간교함(아룸)이었다. 이는 약삭빠른, 교묘한 이라는 중립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고 본문속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뱀의 간교함은 남자와 여자의 벌거벗음(아루맘 2:25)과 대조를 이룬다.(언어 유희)
창세기 3장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에는 뱀이 있다. 창세기 1–2장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던 뱀이 갑자기 등장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뱀이란 표현 ‘나하시’(הַנָּחָשׁ֙)에 정관사 ‘하’(הַ)를 붙여 독자들이 알고 있는 그 뱀이란 점을 드러내고 있다.2) 텍스트 자체는 이 뱀이 어떤 뱀인지 밝히지 않지만,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아롬’(עָרוֹם)과 동음이의어인 뱀의 성격으로 제시된 “간교한” 이란 말의 히브리어 ‘아룸’(עָרוּם)을 통해 뱀과 창세기 2장을 연결시키고 있다.3) 그렇다면 이 뱀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뱀은 경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악의세력을 대표하였다. 에뉴마 엘리쉬에서 마르둑의 원수였던 티아매트는 바다의 신이지만 그 형상은 뱀이었다.4) 바알 서사시에서 바다의 신 얌은 바알의 원수이며 그 형상도 역시 뱀 또는 용이다.5) 고대 이집트에서도 뱀은 악의 화신이었다. 비록 바로의 머리에 독사의 형상을 장식하여 태양신의 레의 불타는 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지만, 뱀은 주로 악의 신 아포피스를 상징하였다. 창조와 용의 추방에서 아포피스는 하늘 신 눈의 물 또는 천상의 나일 강물에 사는 거대한 뱀이다. 아포피스는 태양신 레가 매일 갈대배를 타고 항해할 때 방해하려고 시도한다. 항해 방해를 성공하면 폭풍이 일어나고 태양신의 갈대배를 삼키면 일식이 일어났다. 바로와 인간에게 악을 행하는 뱀 아포피스를 바로는 마술 주문으로 퇴치시켰다.6)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뱀은 길가메쉬가 고생 끝에 간신히 손에 넣으려고 하는 생명 나무를 순식간에 나타나 물고 가버린다. 그 자리에 뱀은 허물을 벗어 남겨 회춘하였음을 나타내 보인다.7)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뱀은 어떨까? 뱀 또는 리워야단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바다에 존재하는 생명체이다(시 104:26). 이 뱀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이고(욥 41:1), 리워야단을 자극하는 것은 저주를 자처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욥 3:8). 이사야에서 리워야단은 악의 세력으로서 하나님이 멸망시킬 대상이다(사 27:1, 시 74:13–14). 신약 성경은 리워야단으로 생각되는 뱀을 사탄이라고 한다.
롬 16: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계 12:9“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계 20: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의심의 여지 없이 이 성경 구절들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을 두고 하는 말이며, 이 뱀을 사탄으로 전제하고 있다.8) 그렇다면 창세기 3장에는 이 뱀을 사탄으로 여길만한 근거가 있는가? 평범한 뱀으로만 볼 수 없는 특징을 창세기 3장의 뱀이 가지고 있다.
2) 느헤미야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 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3)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232. T. Stordalen, Echoes of Eden: Genesis 2–3 and Symbolism of the Eden Garden in Biblical Hebrew Literature (Leuven, Belgium: Peeters, 2000), 199–200.
4) ANET, 60–72.
5) ANET, 129–134.
6) ANET, 6–7.
7) ANET, 96.
8) Wisdom 2:23–24 “23for God created us for incorruption, and made us in the image of his own eternity, 24but through the devil’s envy death entered the world, and those who belong to his company experience it.”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16–118.
– 뱀의 특징을 나타내는 아룸(עָרוּם)은 지혜와 관련된 말이다. 잠언에서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신중하고 지혜로운 행동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지만(잠 1:4; 12:23; 13:16; 14:8), 그 외에서는 부정적인 지혜 또는 간교함을 나타낸다(욥 5:12, 15:5, 출 21:14). 창세기 3:1의 아룸(עָרוּם)은 창세기 3장의 배경에서 볼 때 부정적인 지혜로 사용되었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19–120.
2-3절) 이 뱀의 질문에 대해서 여자가 뱀에게 대답한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대답한다. 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뱀의 질문이 뭔가는 다른데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한채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먹으면 죽을지도 몰라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실과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만을 금하셨고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지지 않으셨다. 또한 죽을까 하노라가 아니라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여자는 죽을지도 몰라라고 한발짝 물러선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변경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여자는 이것이 인간에 의해서 변경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하다.
4-5절) 이 여자의 대답에 대해서 뱀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에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시기에 이를 금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죽을찌도 몰라라고 약화시키고 이제 더 한걸음 나아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질 것이다라고 여자를 유혹하고 있다.
뱀은 이미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아질 것을 미끼로 그를 유혹하고 있다.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할 인간은 모든 동물(뱀을 포함하여)을 다스려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뱀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된 것이고 이 반역의 행위가 바로 죄의 본질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동산을 관리하고 보호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하나님의 피조물중 하나인 뱀의 말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었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한글 성경 5절에서 첫번째 하나님은 복수 엘로힘으로 천사를 비롯한 신적 존재들이며, 두번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 말은 뱀의 미혹으로 하와는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으로 여겼지만 천사를 비롯한 신적 존재들과 같이 되어서 간교한 지혜를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첫 번째 엘로힘은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두 번째 엘로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킹 제임스 역과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인 타낙(Tanak)도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KJV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
TNK “but God knows that as soon as you eat of it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you will be like divine beings who know good and bad.”
사탄은 엘로힘 뒤에 나오는 동사의 단수형과 복수형의 차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선과 악을 아는 일에 마치 첫 번째 엘로힘처럼 되는 것으로 속였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창세기 2–3장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이름 야웨 엘로힘(אלהים יהוה)을 사용하다가, 창세기 3:1–5에서 뱀과 하와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뱀이 하나님의 이름 야웨(יהוה)를 사용하지 않고 엘로힘(אלהים)만 사용하고 하와도 엘로힘을 사용하여 응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22) 비평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E자료가 J자료에 삽입된 증거일까? 뱀이 하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엘로힘이라는 모호한 호칭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하와가 뱀에게 속았다고 한 것은 장엄복수의 야웨 하나님처럼 될 줄 알았는데, 복수 엘로힘(천사를 비롯한 신적 존재들) 중에 하나인 뱀 즉 사탄처럼 간교한 지혜를 가지고 선과 악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되었음을 깨달은 것일게다.
22) T. Stordalen, Echoes of Eden: Genesis 2–3 and Symbolism of the Eden Garden in Biblical Hebrew Literature, 200–20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26–127.
말하는 뱀 이야기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탄의 존재, 말하는 뱀의 존재와 만나게 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 속에서 동물은 말하지 못하는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이 내용을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 신화로 치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들에게 ‘아기 돼지 삼형제’이야기를 읽어주고 있다. 첫째 아기 돼지가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건축 재료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대목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기 돼지는 짚이 가득 실려있는 손수레를 가진 사람에게로 올라갔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저, 죄송한데요..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 짚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거기까지 읽고 나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럼 과연 이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는사람’?’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아이구머니나 돼지가 말을 하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How do we respond to the talking serpent of Genesis 3? There is an exercise that I conduct with my sixth-grade Sunday school class on doctrine when I am trying to explain to them what we mean when we say the Bible is true. I read several stories to them from various sources (Aesop’s fables, odd newspaper stories about animals behaving in strange ways, etc.), asking after each one whether they would consider the story true or not. Then we talk about their reasons for their conclusions as well as discussing what they think the author wanted us to believe. Invariably one of the conclusions they draw is that the examples from Aesop cannot be true because they feature animals talking, and we all know animals cannot talk. I then read the narrative of Genesis 3 to my sixth graders and ask them whether it is a true story. Their confusion and uncertainty creates a wonderfully teachable moment.
How do I work through this with the kids? One of the stories I read them concerns a dog who regularly gets into the refrigerator while his master is gone, takes out the catsup, squeezes the contents out all over the floor, licks it up, and drops the empty bottle in the trash can. The owner thinks he is losing his mind when he can never find the catsup that he is sure he just bought. The mystery is finally solved when one day the dog misses the trash can with the empty bottle and the evidence leads to discovery. When the sixth graders respond to this story, they initially indicate that it is not true because animals do not act this way. Their answers change immediately when I tell them the source: The story came from a news item in the local paper. It wasn’t on the comics page but was reported as news. This information changes their answer immediately, and they accept the story as unusual but factual. Even sixth graders have learned to be students of genre, and, as we all do, they judge the story by its source.
This is exactly the point as we come to the narrative about the serpent and the Fall. The larger methodological issues have already been discussed in the introduction under the heading, “Genesis and History.” Regarding this passage in particular, unless one is willing to consider the whole of Genesis 1–11 as myth (which I am not), the face value of the text suggests that the author wants us to believe that this event really happened. Moreover, the reality of the Fall is an essential foundation to Pauline theology, and the New Testament consistently shows it considers the events of Genesis 3 to be true, as historical realities. Thus, as students of genre and considering the source, we must discount the unnatural behavior attributed to the serpent and accept the story at face value.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12.
트루먼 쇼 이야기
주인공 트루먼은 30년동안 자신의 삶이 24시간 내내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5000대의 카메라가 그 거대한 스튜디오안에, 출연배우들의 겉옷단추 속에, 거리의 가로등속에, 그가 일하는 책상에 모두 설치되어 있었다. 날씨와 심지어 일출과 일몰까지도 모두 컴퓨터로 조작되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스케일의 일일 연속극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매력은 그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쇼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상한 일들이 자꾸 발생하게 되면서 트루먼은 뭔가 인위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카메라들을 속이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바다를 가로질러 가기에 이른다 그를 가로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폭풍을 헤치고 결국 지평선에 배가 부딪치면서 무대 세트의 가장자리에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이 마지막 극적인 장면에서 이 쇼의 감독이자 트루먼을 만들어낸 창조자인 크리스토프가 트루먼과 마지막대화를 시도하면서 트루먼을 위해 만든 세상 속에 남아 달라고 설득한다. 그 영화의 초반부에서 크리스토프는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했다. ‘난 트루먼에게 정상적인 삶을 살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 세상,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공간은 병든 곳입니다. 씨 해븐(트루먼이 시는 동네 이름)은 정상적인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트루먼을 향한 크리스토프의 자비로운 의도들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트루먼은 자율성을 얻기 위해 돔으로된 거대한 스튜디오 밖에 있는 불확실한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 영화의 관객들, 아마도 그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틀림없이 트루먼의 영웅적인 선택에 힘찬 갈채를 보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엄청난대가를 치렀지만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다.
하나님은 트루먼쇼의 크리스토프 감독처럼 자비로운 조종자에 불과할 까? 그 차이점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지배권은 아담과 하와의 선택에 의해 소멸될 수 없었다. 트루먼은 그 무대를 떠났을 때 크리스토프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러나 아담과 하와 그리고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지배권에서 벗어날수 있는 선택권을가질 수 없다. 의존 대상상들은 바뀌고 변할 수 있지만, 의존관계자체는 결단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은 조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주권은 어떤 위험에서 보호되어야 할 필요가가 전혀 없으시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의 조종은 자신이 소유한 지배력의 한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고, 따라서 트루먼이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게 될 경우 연기처럼 사라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3. 하나님의 행동들은 이기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럴 필요가가 전혀 없으시다. 반면에 크리스토프는 자비롭기는 하지만 트루먼을 위한 순수한 이타심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심리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이루어 야 할 것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룰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기적이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냐 이기 심이란 자기 자신을 부각해서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는 욕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는 부각되실수 없는 경지에 이미 올라 계신 분이다.
4.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더 많은 자율성과 자유를 포함하고 있
었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시행될 자율성과 자유를.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그와 같은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어떤 지식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재 그 상태를유지하는 것만을 지향했다.
5. 크리스토프스토프의 경우 어떤 선택들은 조종하고 어떤 선택들은 막았다.. 사실 트루먼은 자신이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영화 전반에 걸쳐서, 특히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이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그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가 트루먼에게 선택권을 주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트루먼을 막을 힘이 없어졌을 바로 그때였다. 반면에 하나님은 순종과 불순종 간의 선택 권을 분명히 제시해 주셨다.
6. ‘트루먼쇼’에서 아담과 하와와 비교해 볼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싶다면, 남녀 배우들의 상황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비록 그들은 크리스토프의 통제를 받고는 있었지만 대개는 자기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그런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크리스토프가 만든 세계에서 살기 위해 자신들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이외는 대조적으로 여배우 실비아는 트루먼이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그 세계에 침투하여 그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감독의 명령에 불순종하기로 선택하였고, 그 결과 씨 해븐이라는 인공 세계의 혜택을상실한채 배역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뱀에 비유하기에 가장 알맞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 영화에서는 영웅들 가운데 한 명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 영화의 마지막은 자유의 몸이 된 트루먼을 찾아서 진짜 세계에 첫 발을 디딘 그를 환영하러 가기 위해 실비아가 자신의 아파트를 박차고 나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다.
– It is a hallmark of our society that personal freedom and the right to liberty are values above all others. Even eternal life is dispensable. Is God really nothing more than a benevolent manipulator like Director Christoph in The Truman Show? It will be instructive for our view of God to observe some important differences.
1. God’s control was not diminished by Adam and Eve’s choice. When Truman left the set, he walked totally out of reach of Christoph. Neither Adam and Eve, nor any of us, has the choice to remove ourselves entirely from God’s control. Dependencies may shift and transform, but dependency will never go away. Without God we do not exist.
2. God does not manipulate, because his sovereignty never needs to be protected from jeopardy. Christoph’s manipulation was designed to maintain the margin of control that he had and that was constantly in danger of evaporating if Truman became aware of his situation.
3. God’s actions are not selfishly driven. He has no needs. Christoph, though benevolent, did not act out of pure altruism for Truman’s sake. He had much to gain both psychologically and professionally. God has nothing to gain. In fact, we can say that God cannot be selfish, because selfishness results from a desire to elevate oneself and meet one’s own needs. God cannot be elevated any more than he already is.
4. God’s plan for Adam and Eve included more autonomy and wisdom—in the right way at the right time. Christoph could take no such risks. Any knowledge was dangerous. He intended only to maintain the status quo.
5. Christoph controlled choices and prevented choices. In fact, Truman never knew he had a choice. All through the film but especially in the end, Christoph plays an active role in trying to prevent Truman from learning the truth and escaping. It was only when he was powerless to stop Truman that he offers him a choice. In contrast, God made the choice between obedience and disobedience clear.
6. If one is looking for a comparison to Adam and Eve in The Truman Show, it would be better to consider the situations of the actors and actresses. Though they were controlled by Christoph, that was mostly through their own choice. They gave up their freedom in order to live in his created world. In contrast, one of the actresses, Sylvia, who longed for Truman’s release, attempted to invade that world and give Truman understanding. She chose to disobey the director and was cast out, losing the benefits of the artificial world of Sea Haven. She is the figure most comparable to the serpent, but in the movie she is one of the heroes. The film ends with her running out of her apartment to go find the liberated Truman and welcome him to the real world.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219–220.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순종하면 영생을 얻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요구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마음대로 수정을 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그대로의 순종을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명령을 상황화한다. 물론 성경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나의 상황에 맞게 하향평준화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의 열매에 대해서 만지지 말라거나, 먹으면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맞게 왜곡시킨다. 이니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로 존귀하고 모든 피조물위에 뛰어난 존재이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욕망이 우리의 눈을 가린것이다. 문제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7절을 보면 그들의 문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을 줄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뱀은 유혹을 통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지만 결과는 눈이 밝아져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하게 된 것 뿐이었다.
GoodNews 가톨릭정보
공동번역성서 사용 생명나무와 선악과
(창세2:4‐17)
4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5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 6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자 7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8 야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9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1 0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 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 졌다. 1 1 첫째 강줄기의 이름은 비손이라 하는데, 은과 금이 나는 하윌라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1 2 그 땅은 좋은 금뿐 아니라 브돌라라는 향료와 홍옥수 같은 보석이 나는 곳이었다. 1 3 둘째 강줄기의 이름은 기혼이라 하는데, 구스 온 땅을 돌아 흐르고 있었다. 1 4 셋째 강줄기의 이름은 티그리스라 하는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고, 넷째 강줄기의 이름은 유프라테스라 하였다. 1 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하시며 1 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1 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야훼 하느님’ 히브리어로는 ‘엘로힘 야훼’입니다. 2장 3절까지 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그냥 ‘엘로힘‘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능력의 하느님‘’전지전능한 하느님‘입니다.그런데 오늘 본문부터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의 ‘엘로힘 야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엘로힘 야훼’라는 단어가 무려 6,800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엘로힘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단어인지 아시겠지요?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의 주제가 바로 그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 안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이름의 의미는 중요한 것입니다. ‘야훼’라는 이름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출애굽기로 가보겠습니다. (출애3:14‐15)
1 4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1 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소개하시면서 그 이름의 의미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혀 주지요? (출애6:2‐5)
2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야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 4 또 나는 그들이 유랑민으로 몸붙여 살던 가나안 땅을 주기로 그들과 계약을 세웠다. 5 나는 에집트인들에게 혹사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 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계약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의 창조에 대해 반복 설명이 시작되는 2장 4절에서 ‘야훼 하느님’ 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각기 다른 창조기사가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앞부분의 내용과 모순이 되는듯한 내용도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창세기 2장 3절까지의 창조와 이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 나오는 창조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창조로 봅니다. 첫 창조가 실패를 했기에 또 다른 창조가 있었던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실패도 하실 수 있으신 분인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2장 4절 이하의 창조가 2장3절까지의 창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창조의 순서가 1장의 것과 틀리는 것을 보아서 이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설화들을 짜집기 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러한 주장들이 일리가 있는 것들인지 보겠습니다.
먼저 2장 4절을 보시면 거기에 ‘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때’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톨르도트’입니다. 그 ‘톨르도트’라는 단어는 ‘역사’ ‘기원’(record), ‘기원에 관한 기록’ (record of the origin)이라 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던 때‘라는 구절이 의미는 2장 4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2장 3절까지의 내용이 다른 관점에서 재 묘사되는 기록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2장 4절 이하가 첫 번째 창조가 아니라 두 번 째 창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어 연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얼치기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5절을 보시면 아담이 창조되기 직전의 천지의 묘사가 조금 이상합니다. 분명 셋째 날 창조 때 초목과 채소들이 창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섯째 날에 창조된 아담이 창조될 때 초목도 없었고 채소도 없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창세기 2장3절까지의 창조기사는 천지 창조의 전체를 개괄적으로 기록을 한 것이지만 2장 4절부터는 하느님과 직접 계약을 맺는 당사자인 ‘사람’에 초점을 두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장 4절 이하는 창세기 여섯째 날의 창조를 ‘사람’이라는 존재에 더욱 초점을 두어 부연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모세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느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강조하는 단어와 문투(文套)를 사용해서 2장 4절 이하를 기록하는 것입니다.5절을 잘 보시면 그 문장의 강세(强勢)는 ‘들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밭에 채소가 없었다는 것’에 있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에 있습니다. (창세2:5) 5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던 것이다. ’땅‘에 나무와 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경작하고 다스릴 땅에 초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천지 만물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스리고 경작해서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경작지(밭과 들)에 초목과 채소가 존재치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에서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는 것과 나무와 풀은 사람에 의해 다스려지고 경작되어 질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나무와 풀이 있었다 없었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땅‘에 나무와 풀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땅(경작지)’에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19절에 보면 마치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이 창조된 후에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구절도 얼치기 신학자들에 의해 자주 회자되곤 합니다. (창세2:19) 1 9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하나하나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다 주시고는 그가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보고 계셨다. 아담이 동물 하나하나에게 붙여 준 것이 그대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되었다.
그렇지요? 분명 1장에서는 짐승과 새들이 각기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아담보다 먼저 창조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마치 아담이 먼저 창조가 되고 그 후에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기 위해 짐승들과 새들을 창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법의 시제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그렇게 까다로운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정확한 시제는 문맥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나오는 ‘지으시고‘ ‘ had formed’나 ‘having formed’로 해석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이 흙으로 지으셨던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러면 1장의 창조와 전혀 문제가 될게 없지요?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1장의 창조와 창세기 2장의 창조를 하나로 이야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태19:3‐4) 3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5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하고 대답하셨다.
4절은 창세기 1장 27절을 인용한 것이고 5절은 창세기 2장 24절(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를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그 두 구절을 결합시켜서 인용 하심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분리된, 그리고 서로 모순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5절과 6절은 천지 만물 가운데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구절로 이해를 하면 됩니다. 계속해서 7절을 보시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흙’이라고 번역이 된 ‘아파르 민 하아다마’ 는 ‘땅의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티끌로 지어졌다는 것을 밝힘으로 해서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력이 끊기고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자가 될 때 그저 티끌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티끌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를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창18:27) 2 7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다.
(1사무2:8) 8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딩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야훼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여기서는 티끌과 잿더미를 동격으로 놓고 있지요? 그러니까 티끌인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질 때는 똥 더미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티끌은 ‘저주와 심판, 그리고 완전한 패배’를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합니다. (왕상16:2‐4) 2 ‘나는 잿더미에서 딩굴던 너를 뽑아 높이 세우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영도자로 삼았다. 그런데 너는 여로보암과 같은 길을 걸어 같은 죄를 짓고 내 백성을 죄의 길로 이끌어 나의 분노를 사는구나. 3 보아라, 내가 바아사와 그의 가문을 모조리 쓸어 버리리니, 네 가문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과 같은 운명에 떨어지리라. 4 바아사 가문의 사람이 성 안에서 죽으면 그 시체를 개가 뜯어 먹겠고 들에서 죽으면 새가 쪼아 먹으리라.’ 하느님께서 바아사를 티끌에서 들어서 세웠는데 그 바아사가 하느님의 목적에 맞지 않게 되자 다시 티끌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와 그에게 속한자의 시체를 개와 새들이 먹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묵시록의 언어가 등장하지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마치 창세기 3장 19 절의 저주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 같지요? 아담이 죄를 짓자 하느님은 ‘네가 흙이니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티끌인 인간이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에 있을 때는 살아있지만 하느님의 생명력이 떠나버린 인간은 그저 티끌인 것입니다. 피조물에게서 하느님이 떠나시는 것 그 자체가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불신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서는 ‘믿지 않 는 자들은 벌써 심판을 받았다’라고 명기를 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지옥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地獄)이 뭐죠?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할 하늘의 복과 차단되어 땅에 갇혀버린 상태를 지옥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사람들이 그 지옥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달콤하고 짜릿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바쁘게 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어느날 사람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추구하던 그 달콤한 신기루들이 쑥 빠져 버렸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느님과 관계없는 상태인 지옥(地獄)이 실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이 땅에서 하느님과 관계없는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삶인지를 알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믿음 안에 거하려 힘을 쓰는 것입니다. (여호7:6) 6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쓴 채 저물 때까지 야훼의 궤 앞에 엎드려 있었다. 아이城에서 패배한 여호수아의 모습입니다. 티끌이지요? 이렇게 성경에서 ‘티끌‘’아파르‘는 저주요 심판이요 패배요 보잘것없음의 상징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富를 쌓고 명예와 인기를 누린다 해도 하느님과 관계없는 자가 될 때 그 사람은 저주와 심판과 패배의 보잘것없는 티끌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부러운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확인했듯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만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그 외양이 화려해도 죽은사람, 티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냐 아니냐‘ 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지 그 가 가진 재산이나 외모나 재력 같은 것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과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부자와 가난 한 자, 잘 생긴 자와 못 생긴 자, 똑똑한 자와 어리석은 자 와 같은 그런 모든 분류는 다 잊어버리세요. 이 지구상에 인간은 딱 두 부류밖에 없어요.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영생을 소유한 자라는 관점에서 평등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은 그저 티끌이라는면에서 역시 평등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티끌들에게 서로 경쟁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올림픽이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다 별 걸 다 만들어놓고 모든 인간들을 경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티끌들은 그 경쟁의 재미 속에서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절대 경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기기 위해 남을 밟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티끌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이렇게 생명 있는 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그 복음이 너무나 감사해서 사소한 것들로 경쟁하지 않고 세상이 추구하는 그 ‘힘’이 없다고 풀 죽어 하지도 않습니다. (야고1:9‐11) 9 가난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을 기뻐하고 1 0 부요한 형제는 하느님께서 낮추어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아무리 부요한 사람이라도 들에 핀 꽃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1 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려 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움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사업에 골몰하는 동안에 죽어 버리고 맙니다. (야고2:1‐4)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떠나서는 티끌에 불과한 사람임’을 아는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 되고 그들을 경쟁상대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이사2:22) 2 2 다시는 사람을 믿지 말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아무 보잘 것 없느니. 하느님과 관계없는 인간들은 코에서 숨이 멎는 순간 순식간에 허망한 티끌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부를 쌓고 어마 어마한 명성과 인기를 누렸어도 그 코에서 숨만 멎으면 그 사람은 며칠 안가서 티끌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지요. 그래서 욥기4장에 보면 인간을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도 눌려 죽을 자’라고 묘사를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자기부인)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며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없는 우리는 그저 티끌이니까.
하느님께서 그렇게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쓰인 ‘생기‘’네솨마 ‘는 ’생명의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인간에게 부어졌던 ’생기’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었지 생 명 자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생명의 기운’을 소유했던 아담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지를 기록해 놓은 책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기희생,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백성 안에 영원히 내주 하시는 방법으로 그 백성들을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닌 ‘생명’으로 만들어내실 것임을 성경 전체에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8절부터는 에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따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인간을 그 곳에 두셨습니다. ‘에덴’은 ‘garden of joy’ ‘기쁨의 동산’ 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동산’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간’은 ‘울 타리를 치다’라는 의미의 단어인 ‘가난’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울타리가 있는, 다른 말로 외부와 차단된 그 런 곳이었습니다. 그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백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울타리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덴을 창설하셨다’에서 ‘창설하다’로 번역이 된 ‘와이잇타’라는 단어는 원래 ‘심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에덴은 ‘어떤 특별한 것이 심겨진 곳‘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것들이 심겨져 있었나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울타리가 쳐진 동산과 두 나무’의 그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완성이 될 것이며 어떤 원리로 움직이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잘 보이는 동산 중앙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으셨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는 그 두 나무의 상호 관계를 통해 완성될 것이고 통치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처럼 보이는 나무의 상호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통합된 하나의 원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선악과나무는 하느님의 계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인 선악과는 단순히 먹어서는 안 되는 금 단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었다면 동산 중앙이 아니라 동산 구석에 심어 놓으셨겠지요?) 그리고 생명나무는 말 그대로 생명의 발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최초의 하느님의 백성에게 하느님의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창2:17) 1 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느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계명을 주시고 그 계명을 어길시 는 죽이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서만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살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명을 상징하고 있는 선악과나무를 통과하지 않고는 생명나무로 나아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묵시2:7) 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나는 승리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 여기 분명 생명나무의 열매(果實)를 먹을 수 있는 자는 ‘승리하는는 자’ 라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이긴 자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둘 다 좋은 나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 이 그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안 따먹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선악과의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수 없으신 분이 하느님일 수 는 없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복잡하게 선악과나무를 에덴에 두신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설명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티끌에 불과한 인간은 도저히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 생명을 얻고 영원히 살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하느님은 하느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드셔서 반드시 안식을 주시고야 마시겠다는 복음을 그 두 나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를 동산 중앙에 심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선악과나무를 통해 너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티끌인지를 만 천하에 폭로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는지를 인격과 오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성경을 통해 보여주시면서 하느님께 자발적인 항복과 순종을 할 수 있는 자로 설복시키시기 위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라는 소품을 에덴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산중앙에 함께 심겨져 있었는지 조금만 더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 생명나무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인간이 언제 그 생명나무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됩니까? 인간이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결과로 발생하게 되는 ‘죽음’이라는 것이 등장했을 때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도래했을 때 생명나무는 드디어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생명은 누군가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은혜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주기를 은근 히 기대를 하셨던 것이 아니라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체를 그냥 폭로시키신 것입니다.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조차 지켜낼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임을 선악과를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 런데 거룩하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티끌들(성경은 그들은 죄인이라 부른다)은 절대 함께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티끌에 불과한 자들이 어떻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함께할 수 있지요? ‘은혜’입니다. 티끌인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저 똥 덩어리, 거름더미일 수밖에 없음을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티끌들을 어떻게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아들로 만드시는 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과 두 나무 의 이야기를 통해 흙은 흙일 수밖에 없음을 폭로하시고 그 땅(흙)이 어떻게 하늘을 덧입게 되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해 주시 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해 줍니다. (고전15:48‐49) 4 8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4 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로마4:7‐8) 7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8 주께서 죄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이렇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이 두 그루의 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죽음 속에 숨겨진 생명’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창조주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살해하는 피조물을 보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 과 하와에게 하느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명령을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살해했을 것입니다. 아니라고 요? 실제로 이 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생명나무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티끌로 살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힘과 열심으로 선악과를 안 먹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를 통해 티끌인 인간의 실체를 폭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너희들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티끌이니까 그런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노력일랑 집어치우고 하느님의 은혜 를 받으라’고 복음을 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아담들이 하느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애초에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티끌인 자기 주제를 모르고 하느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주제넘은 티끌들에게 살해를 당하심으로 자신을 살해한 티끌들에게 생명을 부어주시는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통치하실 것이라는 것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속에 들어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잘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실 십자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나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매달아 버리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를 따 먹어버린 지워지지 않는 주홍 같은 인간의 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안에는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죄를 하얗게 사함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의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티끌이라 절대 그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품고 그 선악과나무의 시험을 통과하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티끌이었던 아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 생명을 가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 앞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또 무엇을 더 달라고 요구 하시겠습니까? 그 엄청난 선물 앞에서 이 땅에서 잠깐 주어지는 우리의 처지나 상황으로 절망하며 낙담하겠습니까? 신앙인은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게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 안에서 그 처지를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내 소원이 들어지지 않아서 울고불고 하는자들이 아니라 왜 그 놀라운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있는데도 이처럼 작은 고난에도 일엽편주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가를 고민하시면서 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상황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사건에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에게 허락 된 상황과 사건과 조건 속에서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에게 보내신 나를 괴롭히는 저 원수를 어서 없애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저 원수의 핍박을 내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세요.’그리고 저 악당도 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실력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실력자들에게 더 나은 성숙을 위해 감당할 능력과 함께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모든 세상의 힘들이 그저 티끌임을 경험케 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내가 의지할 힘임을 깨닫게 해 주 십니다. 그걸 믿음의 성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육신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세상의 티끌들에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보여주고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그 자리에서 겸손함을 보여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자리에서 당당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자리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병약한 사람은 병약한 자리에서 하느님 백성 됨의 행복과 기쁨을 뿜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게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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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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