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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인목사 고린도전서21강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본문 – 고린도전서 1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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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The Gifts of the Spirit)

성령의 9가지 은사는 현대에 와서 사람들에 의해 세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1) 말하는 은사, 즉 각종 방언을 말함, 방언의 통역, 예언; (2) 계시의 은사: 지혜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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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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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갖고 있지만(벧전 4:10), 사람에 따라 다른 종류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고전 12:30). 또한 이런 은사들을 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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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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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9가지 은사(고린도전서 12:8-11) – 타이슨77

바울은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말함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 등으로 나열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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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yson77.tistory.com

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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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 다음블로그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 1) 기적적인 것 -신유, 방언 · 2) 자연스러운 것 -가르침, 섬김 · 3) 언어와 관련된 것 -예언, 방언, 통역 · 4) 정신적인 것- 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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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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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9가지 은사 – LAMP

9가지 성령의 은사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는 것 혹은 깨닫는 것과 관련된 은사들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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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vkimgl.tistory.com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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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요? – 묵상노트

은사를 가리키는 헬라어 ‘카리스마’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란 말그대로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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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ybiblenotes.tistory.com

Date Published: 11/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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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와 열매 – 늘푸른교회

지금부터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5장 22절과 23절에 성령의 열매로 사랑, 희락(기쁨), 화평(평화), 오래 참음, 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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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vergreenpromising.org

Date Published: 5/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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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주시는 9가지은사

성령이 주시는 9가지 은사. 고린도전서 12:4-11. 2 은혜의 선물은 여러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가지지만, 같은 주님을 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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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ology.ac.kr

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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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2) – 바른믿음

또 성령의 은사는 신적인 능력이다. 이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 은사는 처음부터 완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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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od-faith.net

Date Published: 9/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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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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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8.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K3J9hbznGa4

성령의 은사(The Gifts of the Spirit)

성경에는 남자와 여자가 성령님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신약 성경에서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은 “성령의 은사”라고 불린다. 이런 은사들은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뢰성을 입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예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초자연적으로 사용하실 가능성이 더 크므로 온전히 성별 되고 성령님께 복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은 어느 한 번 당나귀를 예언자로 사용하셨는데 그분은 원하시면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가 완벽하게 되어야만 사용하실 수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사용하실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열되어 있는데 모두 9가지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각각의 은사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 성령의 은사로 쓰임 받는 것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구약의 선지자, 제사장, 왕, 그리고 초대 신약 교회의 목회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분류하거나 정의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모두 성령의 은사대로 쓰임 받았다. 그럼에도, 신약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를 분류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썼다.

9가지 은사에 대한 분류(The Nine Gifts Categorized)

성령의 9가지 은사는 현대에 와서 사람들에 의해 세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1) 말하는 은사, 즉 각종 방언을 말함, 방언의 통역, 예언; (2) 계시의 은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그리고 (3) 능력의 은사: 기적을 행함, 특별한 믿음, 치유의 은사이다. 그 중 세 가지 은사는 뭔가를 말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계시하는 것이고; 세 가지는 뭔가를 행하는 것이다. 이 은사 중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와 통역하는 은사를 제외한 모든 은사는 구약에서 볼 수 있다. 그 두 가지는 신약에만 있는 독특한 은사이다.

신약 성경에는 “능력의 은사”를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할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며 “계시의 은사”를 어떻게 적절할지에 대한 가르침도 아주 적다. 그러나 “말함의 은사”의 적절한 사용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양의 가르침이 바울을 통하여 주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교회 모임에서 “말함의 은사”가 가장 많이 나타나고, “계시의 은사”는 적게 나타나며, “능력의 은사”는 가장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모임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제일 많이 필요로 할 것이다.

둘째로, “말함의 은사”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에 대한 요구가 가장 높아 보이기 때문에 잘못 다뤄지기 가장 쉽다. 치유의 은사를 파괴하기보다는 예언을 파괴하기가 훨씬 쉽다.

성령님의 뜻을 따라 (As the Spirit Wills)

성령의 은사가 사람이 아닌 성령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강조 추가).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4 강조 추가).

사람이 특정 은사로 자주 쓰임 받을 수는 있으나 어떤 은사도 소유할 수는 없다. 당신이 어느 한 번 기적을 행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여 당신이 원할 때마다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당신이 앞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은사에 대한 성경의 몇 가지 예를 간단히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무한한 방법으로 그분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은사가 매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이 9가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정의 내린 적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그것들의 명칭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성경의 예를 살펴보고 각각의 은사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결정함으로써 표면적인 차이에 의해 그것들을 정의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초자연적인 은사를 통하여 그분 자신을 나태내는데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기에 우리가 내린 정의에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 은사들은 실제로 몇 가지 은사들의 조합과 같을 수도 있다.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강조 추가).

능력의 은사(The Power Gifts)

1) 치유의 은사: 치유의 은사는 분명히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것과 관계된다. 그들은 종종 갑작스럽게 육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으며, 나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이전 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 가의 앉은뱅이를 치유할 때 그분을 통해 치유의 은사가 나타난 예를 살펴본 적이 있다(요 5:2-17을 보라).

하나님은 엘리사를 사용하셔서 우상 숭배자인 나병 환자 나아만을 치유하셨다(왕하 5:1-14을 보라). 우리가 누가복음 4장 27절에서 나아만이 치유받은 것에 관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엘리사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떤 나병환자든지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갑자기 초자연적인 영감을 받아 나아만에게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지시했던 것이며 나아만은 결과적으로 순종함으로 인해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졌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하셨다(행 3:1-10). 이 초자연적인 기적은 앉은뱅이를 치유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을 듣도록 인도하였으며, 그날 약 오천 명의 사람이나 교회에 추가되었다. 치유의 은사는 종종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된다.

베드로는 그날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 앉은뱅이를 치유하신 이유가 그의 개인적인 권능이나 경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 기적을 행하기 두 달 전만 하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백했었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원하시면 우리도 사용하실 것이라는 신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베드로가 그 사람이 치유받은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그것을 “치유의 은사”로 분류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베드로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와 요한이 앉은뱅이 곁을 걸어 지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자신한테 그 사람이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앉은뱅이는 곧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베드로는 이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 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그가 걷기를 기대하는 것에는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다! 이런 특별한 치유의 은사와 함께 믿음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치유의 은사가 복수인 것은(치유의 “은사들”을 가리킴) 다른 병을 치유하는 은사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치유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은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사역 속에서 특정한 병을 다른 병보다 더 자주 치유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도자 빌립은 특별히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행 8:7)을 치유하는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 몇 세기 동안, 어떤 복음 전도자들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실명과 난청, 그리고 심장 질환과 같은 병을 고치는 데에 가장 자주 나타났다.

2) 믿음과 기적을 행하는 은사: 믿음과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매우 유사해 보일 것이다. 이 두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갑자기 불가능한 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 두 은사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지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적을 베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믿음의 은사를 때로는 “특별한 믿음”이라고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인 믿음을 뛰어넘은 갑작스럽게 받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음에서 생기지만, 특별한 믿음은 성령님에 의한 갑작스러운 전이에서 생긴다. 특별한 믿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한 일들이 갑자기 가능해 보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그들은 의심 자체를 할 수가 없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기적을 행하는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는 “특별한 믿음”이 어떻게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들이 왕의 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불타는 풀무불에 던져질 때, 그들은 모두 특별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풀무불에 던져져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을 초월한 것이다! 이 세 젊은이가 왕 앞에서 보여준 믿음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강조 추가).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지기 전에 믿음의 은사를 받았음을 주목하라.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내실 것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엘리야가 아합 왕의 통치 시절 3년 반 동안의 기근 속에서 날마다 까마귀들이 날라온 음식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왕상 17:1-6). 하나님께서 새를 사용하셔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날라오게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을 초월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까마귀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날라다 줄 것이라고 말씀으로 약속하신 적은 없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약속이기 때문이다(마 6:25-34을 보라).

기적을 행하는 믿음은 모세의 사역 속에 꽤 자주 나타났다. 모세는 애굽 홍해를 가를 때(출 14:13-31을 보라)와 애굽에 여러 재앙을 내릴 때 이 은사를 사용하였다.

예수님은 물고기 몇 마리와 떡 몇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사용하셨다(마 14:15-21을 보라).

바울이 실루기아 섬에서 사역을 방해하는 엘루마라 하는 마술사를 얼마 동안 맹인이 되게 한 것도 기적을 행하는 믿음의 예이다(행 13:4-12을 보라)

계시의 은사(The Revelation Gifts)

1).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종종 과거 또는 현재의 특정 정보에 대한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전이로 정의된다. 모든 지식을 소유하신 하나님은 어떤 때에 사람에게 지식의 작은 부분을 나누어 주시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그것을 지식의 말씀이라고 부를 것이다. 한 단어가 문장의 단편적인 부분인 것 처럼, 지식의 말씀도 하나님의 지식의 단편적인 부분일 것이다.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과 매우 비슷하지만, 그것은 종종 미래의 사건에 대한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전이로 정의된다. 지혜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관한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다소 추측 적이다.

지식의 말씀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를 살펴보자. 엘리사가 시리아인 나병환자 나아만을 치유한 후, 나아만은 그를 치유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엘리사에게 큰 금액의 돈을 주었다. 엘리사는 그 예물을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샀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개인적인 재물을 얻을 기회를 엿보았고 비밀리에 나아만의 의도된 돈을 받았다. 게하시가 자신의 거짓 획득은 숨겨둔 후, 엘리사 앞에 나타나며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게 된다.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왕하 5:25하-26상).

게하시의 추한 행위를 다 아시는 하나님은 그 사실을 엘리사에게 초자연적으로 드러내셨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엘리사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가지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그가 항상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경우였다면, 게하시가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에게 그런 일들을 계시하실 때에만 알 수 있었다. 그 은사는 성령님의 의지대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으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자에게 그녀가 다섯 남편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17-18을 보라).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판 돈 전부를 교회에 바쳤다고 회중들에게 거짓말한 것을 알았던 것도 이 은사로 쓰임 받은 것이다(행 5:1-11을 보라).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관해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이 은사가 자주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미래의 사건을 예측할 때마다 지혜의 말씀으로 한 것이다. 예수님도 꽤 자주 이 은사를 받으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 땅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셨다(눅 17:22-36, 21:6-28을 보라).

사도 요한은 환난의 심판을 계시받을 때 이 은사로 쓰임받았다. 그는 요한 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2).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종종 영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거나 분별하는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정의된다.

신자가 눈과 마음을 통해 본 비전도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은사는 바울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경험한 것처럼(행 18:9-10; 22:17-21; 23:11을 보라) 신자로 하여금 천사, 마귀,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볼 수 있게 해준다.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아람 군대에 쫓겨 도단에 갇혀있을 때, 그의 사환이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음을 보고 근심에 잠겼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6-17).

당신은 천사가 영적인 말과 영적인 병거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언젠가는 천국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사의 사환은 그것을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이 은사를 통하여, 신자는 사람을 억압하는 악령을 분별할 수 있으며 그 영이 어떤 종류의 영인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 은사는 영적인 영역의 일들을 볼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을 분별할 수도 있게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영적 영역에서 무언가를 듣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은사는 “분별의 은사”가 아니다. 이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동기를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의 은사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판의 은사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은사”이다. 사실은, 구원받기 전에 당신은 그 “은사”를 가졌을 수 있지만, 구원받은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건져내고 싶어하신다.

말함의 은사(The Utterance Gifts)

1).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는 말하는 자가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말하는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로 자주 시작한다.

이 은사는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영감을 받은 설교와 가르침은 성령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에 예언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예언은 아니다. 많은 경우, 기름 부음을 받은 설교자나 교사는 그들이 계획하지 않은 말을 갑작스러운 영감에 의해 말하게 되는데 그것은 예언이 아니다. 비록 나는 그것을 예언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예언의 은사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고전 14:3).

따라서 예언의 은사 그 자체에는 어떠한 계시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과 달리 과거, 현재, 또는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의 은사는 서로 함께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은 예언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가 집회에서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것을 들었을 때, 예언만을 들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통해 지혜의 말씀을 들었다. 예언의 은사는 마치 사람이 “너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라는 성경 속의 권면을 읽는 것처럼 들려진다.

일부 사람들은 신약 성경의 예언은 “부정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여야 한다는 특성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하시려는 말씀을 제한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책망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것만 말씀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는 것이다. 책망은 확실히 덕을 세우고 권면하는 범주에 속한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 속에 확실히 책망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책망들을 버려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 각종 방언과 통역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란 갑자기 초자연적으로 자신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은사에는 일반적으로 통역의 은사가 동반되는데 통역의 은사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한 것을 갑자기 통역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한다.

이 은사는 방언의 번역이 아닌 방언의 해석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의 메시지를 단어마다 번역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 때문에 짧은 “방언의 메시지”와 긴 통역이 있을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역의 은사는 예언과 매우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도 계시를 포함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4장 5절에 따라 방언에 통역의 은사를 더하면 예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에는 능력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며 계시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도 매우 적으나 말함의 은사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많다. 왜냐하면, 말함의 은사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에 약간의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해서 거의 고린도전서14장 전부를 할애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방언의 적절한 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 세례에 대한 장에서 배운 것처럼,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원하면 언제든지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 예배 중에 방언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질서가 없었다.

방언의 다른 용도(The Different Uses of Other Tongues)

우리가 알 수 없는 방언에 대한 공용 사용과 개인 사용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비록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가 언제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는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중적인 방언의 은사로 사용하시리라는 것은 의미하지 않는다. 방언의 기본 용도는 각 신자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이다. 그러나 고린도인들은 함께 모여 통역이 없이 동시에 방언을 말하였다. 물론, 아무도 그것을 통하여 도움을 받거나 덕을 세우지 못했다(고전 14:6-12, 16-19, 23, 26-28을 보라).

방언의 공용 사용과 개인 사용을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는 개인 사용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공용 사용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두 가지 사용에 대해 모두 언급하고 있다. 차이점이 무엇일까?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2, 14을 보라). 그러나 누군가가 각종 방언의 은사를 갑자기 받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이며 일단 통역이 주어지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전 14:5을 보라).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원하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고전 14:15을 보라), 각종 방언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신다(고전 12:11을 보라).

각종 방언의 은사에는 일반적으로 통역의 은사가 동반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는 방언 기도는 일반적으로 통역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그의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했다(고전 14:14).

한 개인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단지 그만이 덕을 세우게 된다(고전 14:4을 보라). 그러나 각종 방언의 은사가 통역과 동반하여 나타날 때에는 전체 회중이 덕을 세우게 된다(고전 14:4후-5을 보라).

모든 신자는 주님과의 일상적인 교제의 일환으로 매일 방언으로 기도해야 한다. 방언기도에 대한 놀라운 것들 중 하나는 그것이 당신이 마음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당신의 마음이 직장이나 다른 것들에 점유되어 있을 때에도 방언으로 기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강조 추가)라고 말했다. 그가 방언을 말하는데 보낸 시간이 전체 고린도 교회를 능가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또한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종종 “주님을 축복하게 된다”(고전 14:16-17)라고 썼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이 내가 “기도하는 언어”를 이해했던 적이 세 번 있었다. 나는 세 번 모두 일본어로 말하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일본어로 주님께 “당신은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한 번은 “매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번은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랍지 않은가? 나는 일본어를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적어도 세 번이나 일본어로 “주님을 축복하였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Paul’s Instructions for Speaking in Tongues)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어떠한 모임에서든지 대중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된 사람의 인수는 두 명 또는 세 명에 국한되었으며 방언을 할 때 모두 한 번에 말하지 말고 차례를 따라 기다렸다가 말해야 한다(고전 14:27을 보라).

바울은 단지 세 “방언의 메시지”만 허용된다고 의미한 것이 아니라 세 명 이상의 사람이 특정 예배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을 의미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사람이 세 명 이상이라면, 그 중의 누구라도 성령님께 순복하여 성령님이 교회에 나타내고자 하는 “방언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가르침은 실제로 특정 모임에 나타날 수 있는 방언의 메시지를 제한함으로써 성령님을 제한하게 된다. 만일 성령님이 한 모임에서 세 명 이상에게 각종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면, 바울이 이런 가르침을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방언의 통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회중 중에 아마도 한 명 이상은 성령님께 순복하고 “방언의 메시지”를 통역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통역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기 때문에 “통역하는 자”로 간주된다(고전 14:28을 보라).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라고 가르칠 때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단지 한 사람만이 모든 방언의 메시지를 통역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같은 메시지에 대해 “경쟁적인 통역”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만일 한 통역하는 자가 하나의 방언의 메시지를 해석했으면, 다른 통역하는 자는 자기가 더 나은 통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같은 메시지를 통역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교회 모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적절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하며 동시적이고 혼란스럽고, 심지어 경쟁적인 발언으로 뒤죽박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신자들은 바울이 쓴 것처럼, 그들의 모임에 함께 있을 수 있는 모든 불신자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3).

그것은 정확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었다 – 사람마다 동시에 방언을 하였으며 거기에는 종종 어떠한 통역도 없었다.

계시의 은사에 관한 몇 가지 지침(Some Instruction Concerning Revelation Gifts)

바울은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는 “계시의 은사”에 관해 몇 가지 지침을 주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29-33).

고린도 교회의 지체 중에 통역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통역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듯이, 거기에는 예언과 계시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선지자”로 여겨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구약 성경의 선지자거나 신약 성경의 아가보(행 11:28; 21:10을 보라)와 같은 선지자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사역은 지역 교회의 지체들에게 국한되었을 것이다.

비록 교회 모임에 이 같은 선지자가 세 명 이상 있을 수 있지만, 바울은 예언 사역을 하는 인수를 “둘이나 셋”으로 제한하였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성령님이 모임에서 성령의 은사를 주실 때,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순복함으로써 그런 은사들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지침은 어떤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나 많은 선지자가 말할 수 있는지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만일 모임에 세 명 이상의 선지자가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비록 말하는 것으로부터 억제당했지만, 말해지는 내용을 분별함으로 도울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성령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며 어쩌면 그들이 다른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는 예언의 은사에 쓰임을 받도록 성령님께 순복했음을 암시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성숙한 신자가 할 수 있듯이, 단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이미 보여주신 계시와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예언과 계시를 분별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선지자들이 차례대로 모두 예언할 수 있으며(고전 14:31을 보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전 14:32)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각 선지자가 성령님으로부터 회중들과 함께 나눠야 할 예언과 계시를 받았을 때에도 다른 선지자를 방해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령님이 모임 중에 있는 여러 선지자에게 동시에 은사를 주실 수 있으며 각 선지자가 이런 계시거나 예언을 지체들과 나눌 때에는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말하는 은사가 어느 신자를 통해 나타나든지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다. 만일 한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방언이나 예언의 메시지를 받았다면, 그는 모임에서 말하기 적절한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예언이나 가르침을 방해하면서 자신의 예언을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이 “너희는 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라고 주장할 때, 그는 예언을 받은 선지자의 맥락에서 말한 것임을 기억하라. 일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문맥을 무시하고 바울의 말이 모든 신자는 신자들의 모든 모임에서 다 예언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예언의 은사는 성령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다.

오늘날, 교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임재와 은사가 필요하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우리의 사모하는 정도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은 이러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께 쓰임 받기를 사모하며, 진심으로 영적인 은사를 사모할 것이며 그들의 제자들도 똑같이 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성령의 사역이 신자들의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란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령이 어떠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느냐 에 대한 견해는 서로 같지 않다. 특히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 보수주의자와 은사주의자 간에 아직도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들)란 말을 광범위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 믿음, 사람의 자연적인 재능 등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사(선물)이다.

성령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선물)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여기서는 성령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의 선물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선물(gift) 또는 은사(들)(gifts)란?

성경에서 선물 또는 은사를 의미하는 단어는 많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도 그저 준다는 의미에서 넓은 의미에서는 은사이고 선물이다. 신약에만 해도 9 가지의 단어가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사 또는 선물에 국한시켜 이해하기로 한다.

신약의 대표적인 단어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한 단어는 헬라어 도레아인데 신약에서 11번 사용되며,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 또는 선물을 말한다. 도레아는 무료 또는 하사금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구원(롬 5:15, 17), 선물(고후 9:15), 성령의 선물(행 2:38), 온전한 선물(약 1:17)을 말한다.

또 다른 단어는 헬라어 카리스마(복수는 카리스마타)이다. 이 말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을 나타내는데도 사용되지만(롬 6:23), 대부분의 경우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성령의 은사(들)로 사용된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갖고 있지만(벧전 4:10), 사람에 따라 다른 종류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고전 12:30). 또한 이런 은사들을 가진 개인들 자체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시는 ‘선물들’이다(엡 4:7 이하). 구원과 성령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값진 선물이며 개별적인 은사들은 이를 그거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때의 은사(들)의 좁은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은사들”로 규정할 수 있다 (*이때는 하나님의 은사, 또는 선물인 구원이나 성령 자체와는 구분되게 주로 복수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말은 때로는 단수와 복수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분명한 구분이 필요하다).

이 은사들은 성령이 그 뜻대로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 은사들은 고전 12장8-10절 및 28-31절, 로마서 1장 3-8절, 에베소서 4장 11절 및 베드로전서 4장 10-11절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런 것들을 성령의 은사(들)라고 부르지만 성령의 은사라고 구체적으로 부른 곳은 고린도전서 12장* 뿐이고 로마서 12장의 은사들은 하나님이 주셨고, 에베소서 4장의 은사들― 또는 직분― 들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사들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고전 12:1은 단지 “신령한 것들”으로 표현하며, 다만 9절에 “신유의 은사들,” 또한 31절에 “더욱 큰 은사들”을 기록하고 있다).

은사의 동의어들

다른 단어들도 그렇지만 성경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기 위해 한 가지 단어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여 은사(들)의 다양한 측면을 제시한다.

• 직임.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디아코니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고전 12:4-5).

여기서 말하는 직임은 직분, 섬김 또는 사역이란 뜻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직분은 여러 가지가 있음을 말해준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보아도 사도, 선지자, 전도사 목사, 교사, 감독, 장로, 집사가 있다.

• 역사.

“또 역사(에네르게마, 명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에네르게오, 동사)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

여기서 말하는 역사(役使)는 작동, 운행, 활동 또는 운영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역사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현상이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냐를 분변할 때 겉 모습만 보지 말고 그로 인한 열매가 어떤 것인가를 통해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마 7:17-20).

• 나타나심.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파네로스)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헬라어 파네로스는 드러내다, 계시하다 는 뜻이다. 같은 문맥에서 성령의 은사, 주가 주시는 직임, 하나님의 역사 및 성령의 나타남은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밝혀준다. 성경은 또한 성령의 나타남(maifestation)을 증거, 과시(demonstrion)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고전 2:4). 이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 따르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선물(도마, 복수 도마타).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도마타)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8, 11-12).

이처럼 성경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성령의 은사를 의미하는 말들이 다양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성령의 ‘은사(들)’란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은사의 종류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간단한 표를 통해 살펴보자.

이 표에 의한 은사는 18개이다. 에베소서 4장의 ‘목사-교사’는 분리된 은사가 아니라 헬라어에 보면 한 단어로 묶어져 있으므로 한 가지 은사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고 나누어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목사는 곧 가르치는 자”이기 때문이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그 외에도 찬양이나 음악의 은사(삼상 16:14-23), 공예와 기술의 은사(출 35:30-36:1) 등을 합쳐 사람에 따라 30여 가지의 은사를 제시하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9가지 은사를 기적 행하는 은사(들)(miraculous gifts)라고 부르고 자연적 재능이 변하여 은사가 된 것을 생활의 은사(들)(주로 롬 12:3-8에 기록됨)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서 독신(고전 7:32-35), 중보기도(눅 2:37; 11:1-13), 자발적 가난(행 4:32-37; 고전 13:3), 순교(행 7:54-60; 고전 13:3), 전도(막 1:38; 고전 2:4; 엡 4:11)를 은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에베소서 4장11절의 은사는 오중 사역 은사(들)(five-fold ministry gifts)라고 부른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오늘날에는 에베소서에 기록된 사도와 선지자 은사(직분)가 회복되어 교회를 갱신시킨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신자라면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은사는 있으며, 그에 만족하지 말고 더 좋고 더 많은 은사를 사모하고(고전 12:31), 이미 받은 은사를 불일듯할 때(딤후 1:6), 은사의 정도가 더욱 깊어진다.

자연적인 재능과 성령의 은사(natural talents & spiritual gifts)

자연적인 재능과 성령의 은사는 구분된다. 자연적인 재능은 성령의 일반은혜의 산물이며 출생과 더불어 타고나는 것이지만 성령의 은사는 거듭날 때 성령에 의해 받는다. 특히 기적 행하는 은사들은 거듭난 사람만이 받지만 로마서 12장의 생활의 은사들은 자연적인 재능과 합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같은 자연적인 재능이라도 거듭나기 전에는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했지만 거듭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의무 또는 역할과 은사(roll and gifts)

많은 사람들은 신자로서의 의무와 은사를 구분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전도해야 하지만 특별히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고, 신자라면 누구나 봉사하고 섬겨야 하지만 특별히 잘 섬기고 봉사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점에서 의무와 은사는 구분된다. 특히 생활의 은사가 이 범주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은사군 또는 복합은사(gifts mix)

우리가 이해와 분석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은사를 나열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한 가지 은사만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대개는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나지만 그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은사가 있다. 이런 경우에도 어느 한 가지만 나타나기 보다는 몇 가지가 동시에 나타난다.

은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역에 필요한 은사가 동시에 나타난다.

특히 기적행하는 은사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신유의 은가 있다고 할 때 신유의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병의 원인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의 은사 등이 동시에 작동한다. 또한 예언을 할 때도 그 사람의 과거의 일을 알려주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 앞날을 말해주는 예언의 은사, 그 말씀을 지혜롭게 전달하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 등이 동시에 작동한다.

은사의 분류

은사는 일반적으로 기적행하는 은사와 생활의 은사로 나누어 진다.

기적행하는 은사는 주로 고린도전서 12장8~10절에 기록된 9가지 은사를 말하고 생활의 은사는 로마서 12장6~13절에 기록된 은사를 말한다. 생활의 은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또한 논란의 여지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고린도전서 12장이 말하는 기적 행하는 은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기적행하는 은사를 분류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분류법은 계시의 은사(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발성의 은사(방언의 은사, 방언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및 권능의 은사(믿음의 은사,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이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은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은 “어떤이”(8절), “다른이”(9절), “다른이”(10절하)에 의해 2개ㆍ5개ㆍ2개의 은사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8절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절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절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다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은사를 구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2개),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의 은사(5개) 및 방언 말함과 방언 통역(2개)으로 구분한다

(J. Rodman Williams, Renewal Theology ,Zondervan, 1990, p. 347·『갱신 신학』; 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s to the Corinthians, NICNT, Eerdmans, 1987, 584-85; God’s Empowering Presence, Hendrickson, 1994, 158-59;『성령: 하나님의 능력주시는 임재』).

은사는 태생적인가 상황적인가?

은사는 태생적(constitutional) 즉 영원한(permanent) 것인가, 상황적(situational) 즉 임시적인(temporary)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전통적인 견해인 태생적 견해(constitutional view)는 사람은 누구나 은사(들)를 부여받고 태어나므로 내재된 은사를 개발하여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에게 은사(들)를 주셨으며(벧전 4:10), 우리는 그 은사를 개발하여 잘 활용해야 한다(롬 12:4).

한편, 상황적 견해(situational view)는 하나님이 특정한 은사를 특정한 사람에게 영구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은사를 행하게 하신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특정한 사람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병을 고치게 하신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이 모든 은사를 갖고 계시다가 필요에 따라 교회에 은사를 나누어주시므로 늘 은사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고전 14:1).

은사는 은사자 개인의 명예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인데(고전 12:7), 태생적 견해에 의하면 은사의 활용이 은사자 개인의 자의나 영광을 위해 오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상황적 견해는 하나님이 상황을 통제하시면서 그때그때 특정인에게 은사를 행하게 하시므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활용될 가능성이 크고, 특정한 상황에서 성령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 견해(Combinational view)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은사를 주셨으므로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들)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분이므로 은사 활용의 여부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견해이다. 즉 신자는 누구나 몇 가지 태생적 은사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필요나 상황에 따라 기대치 않았던 은사도 발휘하게 하신다는 주장이다.

은사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든 중요한 것은 은사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특정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하고 교만하여 교회를 혼란과 갈등 속으로 몰아가거나(고전 14장),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하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수 있으므로(마 7:22-23), 늘 은사 사용의 동기나 목적을 점검하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

성령의 9가지 은사(고린도전서 12:8-11)

성령의 9가지 은사(고린도전서 12:8-11)

사도 바울은 8절부터 성령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의 종류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성령의 은사를 아홉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틀에 메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믿는 성도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혹은 이렇게도 주시고 혹은 저런 양상으로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에는 어떤 우열의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성도들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모든 은사를 다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각자이 필요에 따라 성령이 나눠주시기 때문에 성령이 주실때 비로소 나는 그 은사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뜻에 따라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필요한 대로 주시기 때문에 전적으로 성령께 의존하며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1. 성령의 아홉가지 은사

바울은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말함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 등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1) 지혜의 말씀 : 여기서 지혜는 소피아로 지식과 구별짓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내재해 있는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은사로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은 성령의 지혜로 주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은사를 받으면 그리스도를 아는 깊은 지혜를 가질 수 있으며 은혜로 주신 것들을 지혜로 깨닫게 되어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을 전하므로 신앙적인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2) 지식의 말씀 : 지식이란 그노시스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이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필수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지식의 말씀은 특별히 신학자들이나 말씀을 증거 하는 목회자들에게 주시는 은사가 되겠습니다. 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은혜롭게 전달할 수 있는 교사직에서 봉사할 수 있을것입니다.

(3) 믿음 :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은사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으며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의 은사로 언급되고 있는 믿음은 이 같은 일반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특별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은사를 받으면 말씀에 대한 믿음이 남달리 강하기 때문에 그의 신앙 생활이 대단히 능력이 있으며 구하는 기도에도능력이 따르는 것입니다.

(4) 병 고치는 은사 : 다음에 병고치는 은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물론 병 고치는 능력도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능력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서의 신유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에 게는 이런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이런 은사는 즉각적이며 온전한 것으로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경우는 드물고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권능의 나타나심을 보여주시면서 치료해 주십니다.

(5) 능력 행함의 은사 : 10절에서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은사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권능이나 능력이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남다른 능력을 받아 기적적인 역사도 일으키며 하나님의 권능 행하심을 보여 주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사가 지금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잘 알 수 없는 것입니다.

(6) 예언의 은사 : 다음에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은사는 프로페테이아로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입니다. 그 당시 이 예언의 은사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시기 위해 주신 큰 은사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은사가 성경이 없었을 당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역할로서의 은사인지 다른 사람의 장래에 관한 어떤 계시를 전달하는 은사인지 분명한 구분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은사에 많은 혼돈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의 은사는 개인적인 신상의 길흉을 예고해 주는 그런 의미에서의 은사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7) 영들 분별함의 은사 : 다음에 언급된 은사가 영들 분별의 은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분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초대 교회 시대에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은사가 필요로 했습니다. 지금은 이 은사가 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기준에 의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8) 각종 방언 말함 : 다음에 방언의 말함의 은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각종 방언이란 방언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말씀하시게 됨을 따라 내 영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9) 방언들 통역함의 은사 : 방언은 통역되어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은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육신의 귀로는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해석해 주어야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개인이나 교회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서로간 유익함이 되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 ?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크리스찬 각자에게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일할 수있도록 주어진 성령의 능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명백한 이해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다룬 바울의 서신에서 (롬 12장,고전 12-14장, 엡 4장)

항상 교회와의 연관성 속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영적 은사와 교회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은사는 자신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적은사를 올바로 사용해야 하겠으며, 이를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12장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 구제, 다스림, 긍휼

1) 성령이 사람에게 임하거나,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을 때 받는 아홉가지 은사

고린도전서 12장 8-10절

1) 지혜의 말씀, 2) 지식의 말씀, 3)믿음, 4)병고침, 5)능력,

6) 예언, 7) 영분별, 8) 방언, 9)통역

사도, 교사, 돕는자, 다스리는 자

2) 삶 가운데 드러나는 열매로서의 은사 갈라디아 5장 22-24절

1) 사랑 2)희락 3)화평 4)오래참음 5) 자비

6) 양선 7)충성 8)온유 9)절제

첫째로, 성령의 은사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로마서 12장 6-8절

예언, 섬김, 가르침, 권위, 구제, 다스림, 긍휼

고린도전서 12장 8-10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고린도전서 12장 28절

사도, 교사, 능력자, 병고치는 자, 돕는자, 다스리는 자

에베소서 4장 11-16절

직무에 대해서 사도, 선지자, 복음전파자, 목사, 교사

여러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1) 기적적인 것 -신유, 방언

2) 자연스러운 것 -가르침, 섬김

3) 언어와 관련된 것 -예언, 방언, 통역

4) 정신적인 것- 지식, 지혜, 영분별

이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사역 즉 성령의 활동하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은사를 받은 개개인이 스스로가 행하는 능력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성령의 은사는 왜 주시는가?

첫째로, 이 세대가 악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보다 더욱 더 영적은 은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 이단과 불완전한 진리와 인간의 교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어지럽힐 때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엡 4:14-15).

둘째로, 코이노니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25).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에게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독특하고 특별한 속성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 은사들은 교회의 친교를 강화시킨다.

세째로,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또 은사는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베푸는 일을 위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베푸는 일을 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베푸는 일을 위해서 있다.

사도 바울은 은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형제들아 신령한 은사에 대해서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치 아니하노라”(고전 12:1) 고 말하였습니

네째로, 성령의 은사들은 증언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사명인 말씀전파를 가능케 해주며,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바울은 엡 4장에서 은사가 성도의 직무를 위하여, 그리고 말씀전파의 사역을 위하여 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몸 즉 보이는 몸인 교회는 성령님께서 부여한 특별한 은사를 갖춘 신앙인들이 들어서게 될 때에 더욱 더 강하고 조화롭게 됩니다.

세째로,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자세는 ?

은사는 잘못 활용할 때에 오히려 교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렇기 에 은사 관리를 잘해야 하겠습니다.

1) 간구해야 한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 이리라

회심할 때 우리는 한 두가지 은사를 갖고 있을 지 모르지만 그의 영광을 위해 계속 더 구해야 한다.

2)그 사람에게 주어진다.

고전 7:7-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성령님께서 기능에 따라 적절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3)사용해야만 합니다.

딤전 4:14-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없이 말며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은사만큼 못하다고 자신들의 은사를 감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은사는 썩게 되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항상 사용하고, 활용해야 더욱 강하게 해야 합니다.

딤후 1:6-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네째로, 잘못된 성령의 은사는 무엇인가?

은사는 잘못 활용할 때에 오히려 교회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은사 관리를 잘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가 주이심을 나타내지 않는 은사활동은 거짓된 것이라고 단정해야 합니다. (고전 12:3-“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둘째로, 이기적인 생각과 교만이 있으며,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은 거짓 은사이다.

내것 아닌 것은 다 가짜라는 식의 교만과 이기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고전 14:33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그렇습니다. 은사는 질서대로 행해져야 하며 교회를 화목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될때에 거기에는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갈라디아서 5:22-23에서는 성령의 열매로 사랑,기쁨, 평화, 오래참음, 착함, 온유, 자비, 충성, 절제를 말합니다.

또한 벧후 1:4-8에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위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고 하고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벧후 1:4-8).

여기서 은사 주시는 이는 성령(퓨뉴마)이며 , 신령한 은사는 성령의 은사(롬12:6)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인사말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함은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성령의 9가지 은사

성령의 9가지 은사들 The 9 gifts of the Holy Spirit

영성학교School of Spirituality에서 반드시 공부해야할 필수과목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입니다.

먼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이 잘 균형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직분, 은사, 사역의 상호관계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하시고 하시는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에게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은사). 그리고 부르심에 순종하여 받은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게 하십니다(=사역). 그와 같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권위를 부여하십니다.(=직분) 사람을 불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하실 때에는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동역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란?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고전12:7)

그러면 성령의 은사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은사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재능도, 건강도, 재물도, 직분도 다 은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때는 좁은 의미에서 ‘성령의 나타남’을 뜻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할 때 사실은 ‘성령의 나타나심’을 경험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11)

엄밀히 말해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은사를 내려주신다고 할 때 그 은사를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용하듯이 임의대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혹은 받는다고 말을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가 받는 물건이나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어주시는 활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할 수는 있어도 받으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을 주시는 이유는?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자신을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내시는 것을 우리는 ‘성령의 은사’라고 부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사람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려고 하실 때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익’common good을 위해서입니다. 첫째는 개인의 유익personal good입니다. 둘째는 공동의 유익public good, 즉 교회의 유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유익’이란 말은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도록 세운다’ ‘견고하게 한다’ ‘강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은 증거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증거가 되어주심으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가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우리와 함께 증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은사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9가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9가지 성령의 은사들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는 것 혹은 깨닫는 것과 관련된 은사들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그리고 영들 분별함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은사들이 있습니다.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그리고 예언입니다. 셋째는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은사들입니다. 믿음, 병 고치는 은사, 그리고 능력 행함입니다. 편의상 이렇게 나누었지만 어떤 은사들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도 하고 종종 두 가지 이상 함께 역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지혜의 말씀과 예언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식의 말씀과 병을 고치는 은사 역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는 것(1)-지혜의 말씀

이것은 특정 상황 속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를 초자연적으로 깨닫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보내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 ‘특별한 상황’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상황,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해야 하는 상황, 내가 증인이 되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알게 하여 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십니다. 이 은사는 구변(speaking)과 관련이 있으나 ‘깨달음’의 측면이 강조된 것입니다.

아는 것(2)-지식의 말씀

이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본질을 초자연적으로 깨닫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종종 병자들을 대하시거나 혹은 사람들을 대하실 때 그들이 가진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기도 하셨고 또는 사람들의 생각을 희한하게 읽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웃고 있을 때 사실 그 마음에는 깊은 슬픔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그도 모르는 병의 원인을 갑자기 깨닫게 되기도 하며 때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 느껴지면서 알 수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어떤 것의 본질, 즉 숨겨진 원인이나 은밀하게 감추어진 부분을 초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능력이 곧 지식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은사는 병들 고치는 은사와 영들 분별함의 은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은사입니다.

아는 것(3)-영들 분별함

지식의 말씀이 병의 원인과 같이 보통 사람의 관찰에는 알 수 없는 것을 초자연적으로 아는 능력이라면 영들 분별함은 특히 근본적인 동기나 의도를 파악한다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인지 아니면 어둠에 속한 영인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단번에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서로 비슷한 점이 있으나 영에 관련된 초자연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아니면 어둠에게 속하였는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요일2:27참조)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어떤 교리가 성경적인지 아니면 이단적인지 기본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 특별한 가르침과 훈련을 받지 않고서도 가능합니다. 지식적이고 교리적인 부분에 관해서 분별하기 위해 신학적인 훈련을 받을 필요는 있습니다. 이 분별은 마치 ‘보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시력이 나쁜 편인데(0.2 정도) 안경을 쓰지 않으면 사물과 사람이 뿌옇게 보입니다. 그런데 안경을 쓰면 환하게 잘 보입니다. 분별도 그와 같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눈을 비추어주시면 보통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들이 희한하게도 잘 보입니다. 특히 영들을 분별하는 문제에 있어서, 즉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어둠에 속하였는지, 어떤 심령의 깊은 동기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이 서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어떻게 분별할까요? 직접 열왕기상 제일 마지막 장을 살펴보면서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직접 찾아보십시오.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행하는 것(1)-믿음

행동과 관련된 성령의 은사들 중에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이르는’ 그런 일반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경험하는 성령의 은사로서 ‘초자연적인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며 구속의 완성을 위하여 일을 행하실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순종하려는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참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고 순종하려고 하고 헌신하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믿음을 나누어주십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초자연적인 확신을 갖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을 하나님의 확신수준으로 믿는 것이고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그 일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이 ‘믿음의 은사’ ‘초자연적인 확신의 은사’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는 것’을 경험하려면 우선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람의 일과 다른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그 일에 전폭적으로 뛰어들어야 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해야 성령의 도우심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올린 [믿음학교]에 관한 시리즈 글을 참조해보시기 바랍니다.

행하는 것(2)-병들 고침

성령의 은사들 중에 유일하게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병들을 고치는 은사를 주신다고 해서 모든 병을 다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같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시는 사람은 대부분 긍휼의 성품이 많은 사람입니다. 병자와 약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기꺼이 함께 나눠 지려고 할 때 성령께서 이와 같은 은사들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고 믿음의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행하는 것(3)-능력 행함

이것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물위를 걸으시거나 혹은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과 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행하게 하시는 은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코흘리게 시절부터 이러한 현상을 수없이 보고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쌀 한 되로 몇 달을 지낸다든지, 한 겨울에 얼어붙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장면이나, 가뭄에 말라붙은 시내물에서 물이 흘러나온다든지..제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믿음의 선배들은 고상한 신학적인 지식이 없었고 변변한 학위조차 없었지만 그 누구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그 누구보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한 믿음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믿음에 비하면 저는 벌레수준이지만 그럼에도 그분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을 보고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려는 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은 능력을 행하게 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말하는 것(1)-방언 말함

말하는 것과 관련된 은사로서 대표적인 은사가 방언을 말하는 능력입니다. 방언은 민족들과 종족들의 언어로 말하는 지상방언이 있고, 천사들의 언어를 말하는 천상방언이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특히 개인에게 유익합니다. 기도할 때나 찬양할 때 방어을 말함으로써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게 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적 저의 신앙의 멘토이셨던 외할머니께서 기도하실 때 항상 일본어로 기도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자랐습니다. 일본에는 산 적도, 여행한 적도 전혀 없으신 분이고 심지어 초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시지만 방언으로 기도하는 일이 거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는 어릴 적 어머니께서 잠꼬대를 방언으로 하시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선교단체에서 사역할 때에는 방언을 곧 잘 하곤 했는데요..선교지에 와서는 개인기도생활에 문제가 있는지 어찌된 일인지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흑인 목사들 앞에서 영어로 기도를 할 줄은 압니다만 그것은 방언기도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말하는 것(2)-방언들 통역함

방언들 통역함이란 방언을 들을 때 그것이 모국어를 듣는 것처럼 들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것은 해석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통역을 한다고 하면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통역은 할 줄은 몰라고 통역이 올바른 통역인지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는 것인지 정도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요? 천만에요!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고전 14장을 잘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방언의 참된 특징과 예언의 참된 특징에 대해 각각 잘 비교하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방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이 사람에게 설교하듯이 나오는 것은 올바른 통역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분별의 원리들을 우리는 다른 데서가 아닌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말하는 것(3)-예언함

교회 사람들이 가장 잘 오해하는 은사 중에 하나가 성령께서 주시는 예언의 은사입니다. 특히 아프리카 흑인들이 그렇습니다. 원수의 속임수가 가장 잘 통하고 모조품이 가장 많이 활개를 치는 부분입니다. 위조지폐를 만드는 지능범은 5만원권이나 10만권을 위조하는 것이 아니라 5천원권을 위조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받기 때문에 분별해보아야겠다고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은사에 관해 할 말이 참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고린도전서 14장을 잘 읽고 묵상해보고 구약의 선지서들을 잘 읽고 연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점만 말하자면 예언이란 ‘권면과 위로의 은사’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예언의 은사에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돕는 것’이고 둘째, 진리를 깨닫고 믿음이 강해지도록 돕는 것이고, 셋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소망을 가지고 환난 가운데 인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다른 모든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올바로 예언의 은사가 사용될 때 믿음의 공동체는 더욱 견고해지고 성장해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14:1)

칼은 좋은 것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임으로 행복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역시 받는 것보다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받긴 했는데 잘 사용하지 못함으로 은사가 소멸되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일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단회적 경험으로 끝나버리느냐, 아니면 지속적으로 성령의 나타내심을 경험하면서 지속적으로 유익을 누리느냐? 이것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사랑을 추구해야 합니다.

은사를 사모하되 은사만 사모하면 안 됩니다. 사랑을 따라 사용되지 않는 은사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자신과 예배공동체 모두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보다 더 높은 은사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교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덕을 세우는데 유익하지만 그 외 모든 은사들은 다 개인보다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들입니다. 방언의 은사라 할지라도 개인의 유익을 교회의 유익을 해치는 방식으로 남용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영적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특히 예언의 은사가 그렇고 병고치는 은사들도 그렇습니다. 내게 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은사를 무질서하게, 남용하기 시작하면 성령의 은사는 더 이상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교회에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고, 은사를 집행하고 실행하는 데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있습니다. 이러한 질서를 잘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은사를 경험하고 실행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다섯째,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위험할지라도 그것을 사모하며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추구한다고 은사를 사모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릇이요 은사는 그릇에 담는 내용입니다. 은사 없는 사랑은 무기력하고, 사랑 없는 은사는 위험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 주시기 전에 가르쳐주실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할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삶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뚜렷하게 나타나서 내 삶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있게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열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시든 안 내려주시든 언제나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여섯째, 지체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은사를 경험할 때 내가 경험한, 혹은 내가 받은 그 은사가 최고인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다른 은사들을 우리는 또한 사모해야 하며, 내가 갖지 못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잘 섬기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축복해야 하며, 나와 다른 은사를 가진 이들과 협력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길 줄 알아야 하고, 나와 다른 은사를 진심으로 존중히 여기며 그들과 연합하여 사역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곱째,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은 교만해지기 쉽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사가 나타나고 경험이 되어지면 순간적으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같은 착각이 듭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아니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이요 벌레보다 못한 비참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사를 허락하시는 것은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은사를 가진 사람은 은사를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여서는 안 되며 그들을 섬기라고 이러한 은사를 내려주셨음을 깨닫고 그들의 아래로 내려가서 그들을 우러러보며 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며 섬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서로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지체임을 확인하면서 은사를 사용할 때 은사를 남용함으로 자신과 공동체에 상처를 입히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오래 동안 은사를 누릴 수 있고 은사를 가지고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성령의 은사들이 우리 삶속에 풍성히 나타남으로

세상 속에서 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담대히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하소서!!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성령의 9가지 은사들을 한 눈에 보기 쉽도록 만든 도표입니다..^^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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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영적인 선물(은사)에 대하여 모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은사를 가리키는 헬라어 ‘카리스마’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란 말그대로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십니다. 이 은사는 다양하지만 한 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같은 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이런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 주십니다.”(고린도전서 12:11)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다른 지체를 유익하게 하며 결국 성도를 온전케 하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님이 계시는 증거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고린도전서 12:7)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자랑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선물로 받은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취득한 것처럼 여기거나 말한다면 선물을 준 분에 대한 무례입니다.

바울은 자주 교회를 사람의 몸인 신체에 비유하였습니다(골로새서 1:18, 에베소서 4장, 5장). 몸에는 다양한 기관과 지체가 있습니다. 어떤 것도 필요치 않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몸의 어떤 지체는 없어도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필요 없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지체들을 서로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각기 맡은 역할이 다르고 또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함께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체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모든 성도와 모든 성도의 은사는 서로를 위해 다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더욱 큰 은혜의 선물을 사모하십시오.” 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고린도전서 12:31). 더 큰 선물(은사)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3증). 바울이 사랑의 은사를 “가장 좋은 길”로 제시하며 사모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사랑이 없다면 다른 은사들은 모퉁이 돌이 없는 건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를 더욱 더 잘 세우고 다른 사람에게 더욱 더 큰 유익을 주는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조건적 사랑을 표현할 때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아가페의 동사형이 ‘아가파오’인데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참 사랑은 그 대상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아가파오의 뜻은 ‘잘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잘 되길 원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습니다. 누군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그를 저주하거나 악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합니다. 원수가 잘되기를 바라고 위하여 복을 빌 수 있는 마음은 성령의 은사란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세 번째, 아가파오라는 동사에는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물건, 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 그 사람의 계획이나 스케줄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합니다. 속담에 ‘아내를 사랑하면 처갓집 말뚝까지도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면 나와 다른 부분도 틀림이 아닌 조화와 협력을 위한 소중한 요인으로 여깁니다.

기뻐하고 잘 되기를 바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교회를 기뻐하고 잘되기를 바라며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실천의 시작은 가정 공동체에서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뻐하고 잘 되기를 바라며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돕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로새서 3:14)라고 바울사도가 말한 이유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님이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같은 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은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이런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 주십니다(고린도전서 12:8-11).

•} 기도:

나의 하나님, 성령께서 제 안에 계셔서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주셔서 사랑하며 사는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주변에 두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불만은 물 전체를 검게 만드는 부어진 잉크와 같습니다.”- 오웬 펠덤/ Discontent is like ink poured into water, which fills the whole fountain full of blackness.- Owen Felt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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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성령의 은사”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2)

이창모 목사의 (26회)

성령의 은사는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능력이다

성령의 은사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오순절 날 방언으로 말했던 제자들은 외국어를 배운 적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성령이 임하셨을 때 이들은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를 갑자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제자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외국어를 아무런 배움이나 훈련 없이도 구사할 수 있도록 성령이 이들에게 초자연적인 외국어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오늘날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언어를 배워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초대 교회의 방언의 은사처럼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능력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은 외국어 능력일 뿐이다.

또 성령의 은사는 신적인 능력이다. 이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 은사는 처음부터 완전하여 주의 사명을 모자람이나 실패 없이 완벽하게 수행하게 한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방언으로 말했던 제자들은, 오늘날 오순절주의들처럼 방언을 간절하게 사모하지 않았으며 할렐루야를 빨리 반복하는 따위의 요령으로 연습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제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그러나 성령은 제자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의 뜻대로” 제자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

또 성령이 제자들에게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처음에는 미숙하게 아기방언을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능숙하게 방언을 한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각국에서 온 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데 부족함이 없는 방언(외국어)을 구사했다. 만약 제자들이 처음에는 아주 서툴게 아기방언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능숙하게 방언을 구사했다면, 첫째 날에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부터 방언으로 완벽하게 외국어를 구사함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의도하신 대로 많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한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행2:41).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예언의 은사자가 예언을 할 때, 처음에는 서툴러서 성령이 주시는 계시를 제대로 예언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능숙해지면 제대로 예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완벽하게 예언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의 은사자가 처음 예언할 때는 상당 부분 하나님의 계시를 엉터리로 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서툰 엉터리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차라리 듣지 않은 것이 더 나을 만큼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신유의 은사는 또 어떤가?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서툴러서 감기 정도나 겨우 치료하다가, 시간이 지나 능숙해지면 불치의 병까지 깨끗하게 치료할 수 있게 되는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사건들을 보면, 어떤 경우에도 환자들은 처음부터 실패 없이 온전히 치료되었다. 왜냐하면 신유의 은사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능력이므로 처음부터 완전한 능력으로 병자들을 치료하기 때문이다.1)

이에 비해 현대 교회의 은사자들이 시행하는 은사들은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능력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인 기술과 속임수에 불과하다. 먼저 방언의 은사를 보자. 방옹자들은 은사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여러 가지 방언 받는 요령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피방언자(방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요령대로 잘 따라 하면 원하는 방언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방언 받는 요령들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동소이하다.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 받는 요령들 중 대표적인 것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방언을 받고자 하는 성도(후보자)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들은 이미 주어졌으므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것을 받는 것뿐’ 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한다.

2. 후보자에게 세례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알려준다.

3. 후보자의 머리에 안수할 때 그는 성령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4. 후보자에게 성령께서 그의 성대를 움직일 것을 기대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후보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5. 후보자에게 이런 경험이 혹시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버리라고 말한다.

6. 후보자에게 입을 크게 벌리고 가능한 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 순간 자신에게 “지금 나는 성령을 받고 있다”고 말하게 한다.

7. 하지만 이상의 지시사항으로 인해 지나치게 머리를 복잡하게 하지는 말고 성령과 하나됨, 헌신 그리고 침묵하는 분위기를 가지도록 한다.2)

이렇게 하면 방언을 받을 수 있는가? 물론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방언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인간이 만든 요령대로 성실히 따라 하기만 하면 대부분 방언을 받을 수 있다.3) 생각해 보라! 은사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로 주어지는 은혜요 선물이다.

그런데 인간의 간절함과 노력, 그리고 어떤 기발한 요령과 조건으로 자신이 원하는 은사를 받을 수 있다거나 운 좋게 신령한 고수(高手)라도 만나면, 더욱 손쉽게 은사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일 수 없다. 그러므로 방옹자들이 방언을 더 잘 받을 수 있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희롱하는 죄이며, 성령의 은사를 모독하는 악이다(고전14:20 참고). 놀라운 것은 방옹자들의 세계에는 방언의 은사를 잘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고수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4)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고수들에게 찾아가서 이들이 가르치는 요령대로 열심히 따라하면 대부분 방언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5)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주권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인간의 선택과 노력으로 할 수 있다. 또 방언기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어서 처음보다는 시간이 좀 지나면 더욱 능숙하게 방언을 구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방언기도의 세계에서는 하수와 고수가 있게 마련이다. 1971년에 방언을 시작했던 필자도 오랜 경력을 쌓은 만큼 방언에 관한 한 상당한 고수 축에 속했다. 김우현 PD도 “나의 경우 이제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깊은 임재로 들어간다. 그동안 방언의 양이 그만큼 쌓였기 때문이다.”6)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상당한 방언의 고수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말한다. 방언을 받으면, 처음에는 서툴러서 갓난아이처럼 옹알이 같은 아기방언을 하다가, 자꾸 방언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점점 말을 잘하게 되듯이7), 나중에는 유창하게 방언을 할 수 있고,8) 그런데 갓난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할 옹알이를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데, 방언하는 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알아듣지 못할 옹알이를 더욱 능숙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기묘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명백한 증거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은 처음 체험한 이후 계속 변하며, 한 가지 방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언을 하게 된다”9)라고 말한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가 설명한 일련의 현상들이야말로 자신이 하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들이기 때문이다. 방옹자들이 받았다고 하는 방언의 은사는 인간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기묘한 소리내기’로서 인간의 노력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또 개인의 창의력에 따라서 여러 가지 소리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날 기분에 따라 소리가 들쭉날쭉 변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방언에는 고수도 있고 하수도 있으며, 상황에 따라 방언이 녹슬었다고 여기기도 하고 성령이 방언을 거두어 가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10) 앞의 책, p.75.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하수나 고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이것은 예언의 은사나 신유의 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누구든지 처음부터 성령이 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완벽하게 외국인에게 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방언을 말할 때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방언은 인위적인 거짓 방언이기 때문에, 방언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들(요령, 분위기 등)이 제공되면 대부분 할 수 있게 된다. 또 누구든지 방언을 열심히 갈고 닦으면 방언의 고수가 될 수도 있다. 왜 그럴까? 현대 교회의 방언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성령의 은사는 비상시(일시, 단회)적인 능력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나 인위적으로 터득한 능력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시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만 사용할 수 있는 비상시적인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성령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표현 때문에 은사를 마치 선물 꾸러미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은사가 한 번 주어지면 주머니에 물건을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다시 꺼내어 사용하는 것처럼, 은사자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은사를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성능 좋은 물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은사를 사용하다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은사가 녹슬었다고 생각하거나(이런 생각은 성령의 은사를 녹슬지 않는 플라스틱 물건보다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코미디다) 성령이 은사를 거두어 가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11)(이것은 성령 하나님을, 선물을 주었다 빼앗았다 하는 변덕스러운 분으로 여기는 코미디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비상시적인 능력이다. 비상시적이라는 말은 교회에 은사가 주어졌을 때 교회가 그 은사로 어떤 일을 수행해 그 일을 마치면 은사도 자연히 사라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에 그 은사가 또 필요해지면, 성령은 교회에 그 은사를 또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은사의 소멸(고전13:11)과도 일맥상통한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교회는 완성될 것이므로 더 이상 은사가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완성된 교회에는 어떤 은사도 다시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령의 은사는 완전히 소멸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은사 목록에 나오는 사도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며,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일시적인 은사이며 직분(이것을 신학 용어로 비상직원이라고 한다)이다. 그러므로 이 은사의 목적이 달성된 후 사도의 은사는 교회에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교회에 성령의 은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그의 뜻대로” 교회에 필요한 은사를 그때그때 가장 적절한 사람을 선택해서 주신다.12) 초대 교회 당시에는 교회가 소규모여서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을 만한 사람도 소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같은 사람에게 같은 은사를 반복적으로 주셨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어떤 은사가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필요할 때마다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능력이 아님을 놓쳐서는 안 된다.(밑줄 친 부분을 비교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신약 성경에서 기적을 베푸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할 때마다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물론 전혀 없다.13) 사도행전을 살펴보라. 사도들은 기적이 일어날지 않을지 염려하면서 누군가를 고치려고 시도하거나 실험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어떤 기적을 행하겠다고 공포한 적도 없었다. 사도들은 결코 “제가 오늘 모인 여러분 모두에게 방언을 받게 해 주겠습니다.”라고 말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성령이 기적을 언제 일으키실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때에 성령이 “그의 뜻대로” 사도들에게 기적의 은사를 주심으로 그들에게 그때그때 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을 뿐이다.14)

사도행전에서 기적을 여러 번 일으켰던 사도들의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세우는 초대 교회 최초의 신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어떤 이들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였다(행3:2).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날마다 정해진 기도 시간이 되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어제도 그저께도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어제도 그저께도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그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만약 신유의 은사자가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신유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행전 3장의 치유 사건 이전 어느 날에 벌써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날마다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면서, 날마다 그 사람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성령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신유의 은사를, 그날 이전에는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 주는 사건이 나온다. 귀신들린 여종 하나가 여러 날을 바울과 그 무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혔고, 그 때문에 바울은 심히 괴로워했다. 드디어 사도행전 16장 18절의 그날에 바울은 여종 안에 있는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하므로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 만약 바울에게 오늘날 아주 용한 신유의 은사자나 신사도라 자칭하는 자들처럼 언제든지 귀신을 쫓아 낼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바울은 귀신들린 여종 때문에 여러 날 괴로움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러 날 괴로움을 당한 것은 사도행전 16장 18절의 그날 이전에는 축귀 능력(신유의 은사)이 바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5)

바울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일으켰다(행14:10). 귀신들린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행16:18).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사람의 병이 떠나고 악귀가 나갔다(행19:12). 심지어 그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행했다(행20:10). 바울은 많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 행하며 사역했다(롬15:19; 고후12:12). 그러나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를 낫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죽을까봐 근심까지 했다(빌2:27). 디모데의 위장병에 대해서도 바울은 ‘신유의 은사자’를 불러다가 기도하라거나, 내가 나중에 가서 기도해서 낫게 해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거나 하지 않고 단지 디모데에게 포도주(포도주는 당시 소금, 올리브유와 함께 가장 보편적인 치료약이었다)를 조금씩 쓰라고 권했을 뿐이다(딤전5:23).16) 뿐만 아니라 바울은 병든 드로비모를 낫게 하기는커녕 밀레도에 그냥 두고 떠나가기도 했다(딤후4:20).

바울은 죽은 자를 살릴 만큼 능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자들에게는 병조차 낫게 해주지 못했을까? 특별히 자신의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었던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 드로비모에게마저도 신유의 역사를 베풀지 못했을까? 심지어 선교 사역에 지장을 줄 만큼 병약했던 바울(고후12:12; 갈4:12-13)은 자신의 병 때문에 세 번씩이나 주께 기도했음(고후12:8)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까?(고후12:9-10). 바울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신유의 은사가 녹슬었거나 성령이 은사를 거두어 가셨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울이 아무 때나 신유의 역사를 행할 수 없었던 까닭은 은사의 비상시성 때문이었다. 성령의 은사는 한 번 받으면,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내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성령이 신유의 은사를 주실 때만 병자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병자들을 100%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유의 은사자의 치료율은 거의 자연 치료율 수준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이들은 성령이 반복적으로 주시는 신유의 은사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기도하기 때문이다.17) 이런 자들의 기도는 성령의 은사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자의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신적인 치유의 능력은 없고, 단지 심리적인 효과와 기도하지 않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낫는 자연 치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사역 거의 끝부분에, 로마로 가는 여정의 멜리데 섬에서 열병과 이질에 걸린 보블리오의 부친을 안수하여 낫게 했다(행28:8). 성령은 한 동안 바울을 통해서 신유의 역사를 베풀지 않으셨지만, 멜리데 섬에서는 특별히 바울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셔서 보블리오의 부친을 치료하게 하신 것이다. 이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은사의 비상시성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은사와 관련해서 사용된 ‘주다’라는 동사는 모두 다 현재 시제이다.18)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의 동사는 현재 시점에서 어떤 행동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낸다.19) 즉, ‘은사를 주다’에서 ‘주다’라는 동사의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주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성령은 교회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은사를 필요로 할 때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은사를 반복적으로 주셨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령이 반복적으로 주시는 은사의 횟수가 아주 빈번했기 때문에 교회에 은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어 오늘날 어떤 은사(예를 들면 방언이나 예언)는 교회에 거의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소멸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런 현상은 고린도전서 13장 10절 이하에서 말하는 은사의 소멸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은사의 소멸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은사의 능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주의 재림 때는 교회가 완성될 것이므로 완전히 멈추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어떤 은사를 막론하고 성령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역사가 없으면, 사람이 결코 시행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 본 신유의 은사가 그러하며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위대한 예언의 은사자라 할지라도 오직 성령이 계시하실 때만 예언할 수 있다(고전14:30; 행11:27-28; 13:1-2; 21:10-11 등 참고).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이 계시를 주실 때만 예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방언의 은사에서만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없다. 그럼에도 방옹자들은 방언의 은사만은 예외라고 말한다. 방언만은 언제든지 원할 때 할 수 있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은사라고 말한다. 그런데 방언중지자들 중에서도 방언의 은사를 이렇게 이해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20) 그러나 이런 이해는 자신이 하는 방언을 스스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제임스 페커도 현대 교회의 방언은 인위적으로 습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21)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했던 제자들이 그 후에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도 은사의 비상시성 때문이다. 성령이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역사할 때는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지만, 그 사역이 끝난 뒤 일상에서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지 않았고, 또 말할 수도 없었다.22)

— 각 주 —

1) 현대 교회의 신유의 은사자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신유를 위해 기도하기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병자 한 사람을 놓고 신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다. 그 이유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신유를 시도하면 한 두 명이라도 나았다는 자들이 생기지만(어떤 집회에서든지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한 두 명은 꼭 있게 마련이다) 개인을 대상으로 안수했다가 낫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또 중한 병일수록(보통 이런 자들이 안수받기를 원한다) 낫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이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유의 은사자들은 다수를 대상으로 기도했을 때에도 병이 치유되지 않은 자들은 병자들의 믿음 탓으로 돌려 버린다. 현대 교회의 신유의 은사자들의 신유 행위가 정말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믿음이 없는 환자들이라 할지라도 100% 치유되어야 어야 한다(죽은 나사로에게 ‘예수님이시라면 내가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환자의 심리나 우연을 빙자한 사기 행각에 불과한 것이다.

2) 김동찬, 위로와 회복의 방언(서울: 돋을새김, 2007), pp.133-134.

3) 여기서 ‘방언을 받는다’는 말은 바른 표현이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성실히 노력하면 누구든지 ‘방언을 할 수 있다’가 바른 표현이다.

4) 김우현, 손기철 등이 이런 고수에 속하는 자들일 것이다. 로버츠 리어든의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p.138, 142, 144, 147을 참고하라.

5) 이때 방언을 하는 자들은 대체로 방언 선생의 방언 소리와 같은 유형의 소리를 낸다. 루크 티모시 존슨, 초기 기독교 신앙 체험, 손혜숙 옮김(서울: CLC, 2010), p.131.

6)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167. 김우현 PD는 어떤 여전도사에게 실제로 ‘방언의 고수’라는 호칭을 붙인다. 앞의 책, p.166.

7) 로버츠 리어든,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83.

8) 리어든은 사28:11의 “더듬거리는 입술”이 방언이 아직 영적으로 완전히 유창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방언을 계속 말하고 사용하면 더듬거리는 방언이 유창하게 된다고도 말한다. 앞의 책, pp84-75.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의 주의 제자들은 처음 방언을 했을 때는 틀림없이 방언이 서툴렀을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날 옹알이 수준의 아기방언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런 옹알이 같은 아기방언을 듣고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될 수 있었을까?

9)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56.

10) 앞의 책, p.75.

11)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pp.103-104.

12) 고전14:27에서 바울이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방언의 은사자가 따로 없음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방언의 은사자가 교회에 따로 있었다면 바울은 “만일 누가” 대신에 “만일 방언의 은사자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예배의 현장에서 누구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바울도 “만약 누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3) 로이드 존즈, 성령의 주권적 사역, 정원태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188.

14) 앞의 책, p.189.

15) 앞의 책, p.191.

16) 김세윤,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pp.38-39.

17) 옥성호, 방언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210 각주 106 참고할 것.

18) 고전12:7, 10, 28, 29, 30 등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와 관련된 동사는 모두 현재 시제다. 엡5:8과 살전5:19에서도 역시 현재 시제다.

19) 권성수, 헬라어 구문론(서울: 선교횃불, 2001), p.40.

20)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194.

21) 제임스 페커, 성령을 아는 지식, 홍종락 옮김(서울: 홍성사, 2003), p.299.

22) 중세 때 성 프란시스 싸비어(St. Francis Xavier, 1506-1552)는 놀라운 방언의 은사로 인하여 그가 전에 배워본 적이 없는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언어로 그곳 사람들에게 선교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싸비어는 일본어를 배우느라고 굉장히 고생했으며 다른 언어들도 공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토니 훼케마, 방언 연구, 정정숙 옮김(서울: 신망애출판사, 1972), p.32. 이것이 사실이라면 싸비어가 받은 방언의 은사가 비상시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피터 와그너의 책에서도 발견된다. 아르헨티나 선교사였던 제임스에게서 현지인들의 언어가 저절로 구사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제임스 선교사는 아르헨티나에서 선교하면서 현지어를 배웠다고 한다.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66 에서 재인용. 로버트 파함도 방언을 외국어로 이해했다. 배덕만, 성령을 받으라(서울: 대장간, 2012), p.64 각주 3 재인용.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함은 방언의 은사를 상시적인 능력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그는 선교사들에게 이제 더 이상은 언어 교육을 받지 않고 선교지로 가도 된다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따랐던 자들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행크 헤너그라프,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이선숙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9), p.204; 정이철,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서울: 새물결플러스, 2013), p.167.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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