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이유 | 본디오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한 진짜 이유 (12분 순삭Ver.) #효기심94 상위 190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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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을까? – 브런치

특히 기독교에서는 사도신앙 고백에 따라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 된 존재로 보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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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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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께서 다 잊어버렸다고 하시던데요”. 주님의 죄 사함이란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옛 사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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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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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는가 – 크리스천투데이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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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2/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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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유에 관한 질문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확히 저희의 어떤 죄를 사하여 주신거고 죄를 사하여 주신것에 믿음이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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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6/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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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 JW.ORG

예수가 죽은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사람이 하느님께 충성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사람의 죽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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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w.org

Date Published: 9/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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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미 – 하나님의 약속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항상 관념이 있어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구속하실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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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light-of-truth.org

Date Published: 12/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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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몇 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 성경의 오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책 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으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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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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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5) – 선악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인 것이다. 그 이유나,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양이나 이유가 같은 것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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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6/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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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0.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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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을까?

기원전 7년 경부터 서기 36년 경까지 살았던 예수(Jesus, Yeshua)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사도신앙 고백에 따라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 된 존재로 보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태어난 완전한 사람으로 여긴다.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부르는데, 그리스도는 메시아를 뜻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Christos)’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구세주)로 여기고,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에 앞선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기며, 유대교에서는 예언자나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어느 정도 성장하여 출가를 한 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후 복음을 위한 길을 나섰다. 예수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고, 물고기가 없는 바다에서 그물 가득 물고기가 잡히게 만들었으며, 중풍에 걸린 환자를 일으켜 세웠고, 빈 바구니에 생선과 빵을 가득 채우게 만들었으며, 죽어서 동굴에 묻혀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등 수많은 기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명했다.

유월절을 맞아 예수가 예수살렘에 입성하자 민중들은 ‘메시아’라고 외치며 환대했다. 하지만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인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보고 가리옷 사람 유다와 결탁해 예수를 체포했다. 공식적인 예수의 죄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죄를 사하는 일’을 한 신성모독죄와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한 협박죄였다. 하지만 간음한 여자를 앞에 두고 ‘죄 없는 자만 돌로 쳐라’고 말하는 등 기존의 율법과 전통을 조롱하고 모욕한 죄, 신앙과 공동체를 파괴한 죄도 컸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자치기구인 산헤드린 의회에서의 재판을 거쳐 로마 제국의 유대 지방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빌라도가 유월절을 맞아 가이사의 선의로 죄수 한 명을 풀어준다고 하자, 재판장에 모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왕이라 자처하는 설교자 예수가 아니라 살인죄를 범한 선동가 바라바를 선택했다. 예수를 벌하라는 유대인들과 제사장들의 압력에 영향을 받은 빌라도는 자신의 지위도 지켜야 했기에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해 죽게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압력을 가했을까?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기존의 유대교 사상과 충돌되는 점이 많았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고, 병들거나 가난한 사람은 죄를 지어 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유대인이든 환자든, 빈자든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교리도 뒤집어서 죄를 지은 사람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정의보다는 은총을 먼저 생각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랍비 예수는 유대인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비판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이웃도 똑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즉, 유대인의 정해진 율법을 초월하는 ‘사랑과 믿음, 소망’을 전파했던 것이다. 예수는 율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등지는 것보다 무한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율법과 할례 없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종교를 넘어 정체성이자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물고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복음을 전파하자 유대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예수는 토라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응답을 부른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토라의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다가올 최후의 심판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히 구원이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부정하고, 선택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하나님을 함께 모셔야 한다고 말하는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다.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메시아’라고 불렀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무시하며 유대인들을 분열과 혼란에 빠뜨린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과 관습을 지키고,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예수를 배척하고 박해하며 십자가로 내몰고 말았다.

참고> 진북 하브루타 연구소 추천 <하브루타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유대인 랍비) 관련 영화 리스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 말 씀 : 예레미야 39:17-18, 로마서 6:6-10

서론

유명한 유대인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는 ‘죄로 인한 결과(Whatever Become of Sin?)’라는 책에서 현대인에게 죄의 개념이 사라진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그는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다”, “다 그럴 수 있지”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죄의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 무뎌진 우리의 사고를 반성하고 죄에 대하여 더 민감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죄란 어떤 것입니까? 작지만 큰 죄도 많고, 사람들이 악해지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탈법이나 편법을 너무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도 매일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도 예사로 여겨 안전을 위협합니다. 최근 불거진 원자력발전소 불순부품 문제를 보세요. 그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악한 일을 했는지 ‘원전 마피아’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런 악을 조장하는 일이 이제는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회도 깨끗하고 안전한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하여 무딜 때에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단 선지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듣고 그는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되어 회개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는지 베벼개를 적시며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죄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 죄의 짐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너무 고통스럽고 죄의 압박 때문에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죄에 대한 민감성이 모두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편 78:38에는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긍휼하심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이셨고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는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조문은 사람에 대한 두 번째 조문이기도 합니다. 이 기도는 누구에게나 가장 절실한 기도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암송문이 아니라 실천문입니다. 암송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실천해야 참 기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죄’라는 말을 마태는 ‘빚’으로, 누가는 ‘죄’로 표현하였습니다. 마태의 표현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고”라는 말입니다. 죄란 빚입니다. 내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갚아줘야 하는 큰 빚입니다. 이 빚을 예수님은 갚을 수 있고, 십자가에서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에게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가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이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조 원 정도 됩니다. 일백 데나리온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요즘 돈으로는 500만 원 정도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용서받고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 전역에서 로마에 낸 세금이 일 년에 800달란트라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죄 사함이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십자가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필연입니다. 누구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묵상하는 이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죄의 몸이 죽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6절에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비결은 십자가에서 옛 사람인 죄의 몸이 죽어 죄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옛 사람이 죽습니다. ‘십자가’에 박혀야 죄의 몸이 죽어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으로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십자가 사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죄 사함의 사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 삶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며 자유입니다.

에베소서 4:22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어야 새 사람을 입습니다.

파충류나 곤충을 보면 허물을 벗고 새 단장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허물을 벗어야 비로소 새로운 것으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허물을 벗는 것은 아니지만 헌 옷을 벗어야 새 옷을 입습니다. 밤에 잘 때 입는 잠옷을 벗어야 아침에 일하는 새 옷을 입습니다. 헌 옷을 그대로 입고 새 옷을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하여 헌 옷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4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바로 십자가상에서 만들어집니다. 무엇으로 만들어집니까?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집니다.

죄란 히브리어로 ‘아본’입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법에 대한 위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입니다.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사야 53: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가지 못하고 각자 자기 길로 갑니다. 과녁에서 한참 빗나가 살고 있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아직 죄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아직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던 경우입니다. 세상에는 죄와 무관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죄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죄인이라고 인정해야 사함도 받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말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말하는 의인이 있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최대 역설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죄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치유 받지도 못합니다.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도 받지 못합니다. 용서함을 받는 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죄를 알고 용서함을 받아야 진정한 자유도 있습니다.

어떤 소녀가 자신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회는 술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살아 있는 성자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면담이 끝나자 주교는 진짜 소녀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는지 검사해보자고 하였습니다. “네가 다음번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 내가 지난번 고해성사에서 무엇을 고백했는지 그분께 물어봐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주교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얘야, 예수님을 만나서 내가 뭐라고 고해성사를 했는지 여쭤봤니?”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잊어버렸다고 하시던데요”. 주님의 죄 사함이란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다 용서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7절에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면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의입니다. 이것이 죄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의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은 아담 이후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보다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니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특별한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죄의식과 죄의 고백은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죄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죄의식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죄의식을 많이 가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의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전투기의 항법사 폴 버거만은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유의 죄의식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유대교는 죄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님에 대한 죄와 인간에 대한 죄입니다. 성경의 율법인 토라에는 56종류의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여러 종류로 나누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죄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무슨 죄든 다 범할 수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인격적 세력이 있습니다. 틈새를 만드는 재주꾼인 마귀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틈새를 벌어지게 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틈새를 다시 없애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인간 사회는 개선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재창조하십니다. 이 재창조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로를 잇는 긴 막대기와 가로를 잇는 막대기가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주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유에 관한 질문

저희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것이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확히 저희의 어떤 죄를 사하여 주신거고

죄를 사하여 주신것에 믿음이 왜 필요한지(마치 무언가를 과거했던것이 현재와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없었던일이 되는건 아니니까요)

또한 저희가 죄사함을 받았다면 회개는 왜 필요한것인가요

알려주세요.

항상 질문에 답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며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가 죽은 이유는 인류가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6:23; 에베소서 1:7) 또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사람이 극심한 시험을 받더라도 하느님께 충성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습니다.—히브리서 4:15.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그처럼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가 죽은 이유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골로새서 1:14. 첫 인간 아담은 죄 없이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고의로 하느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즉 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로마서 5:19. 예수 역시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죄를 지은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 희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한 1서 2:2, 각주)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인류 가족이 죄에 오염되었다면, 예수의 죽음 덕분에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이 죄에서 깨끗해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담은 인류를 죄에 팔아넘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희생함으로 인류를 자신의 소유로 도로 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돕는 이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한 1서 2:1.

예수가 죽은 이유는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3:16. 아담은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죄를 짓고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으며, 이와 같이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로마서 5:12. 반면, 예수의 죽음은 죄의 흔적을 없애 주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그 점을 이렇게 간략히 설명합니다. “죄가 죽음과 더불어 왕으로 다스린 것과 같이, 과분한 친절도 의를 통해 왕으로 다스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서 5:21. 물론, 오늘날 사람들의 수명은 여전히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며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켜 그들 역시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부터 유익을 얻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편 37:29; 고린도 전서 15:2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미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 저는 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이 성경 구절을 종종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보혈로 온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저도 그 덕분에 하나님 앞으로 와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가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면 전 벅찬 감동을 느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굴욕과 고통을 참으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이 사랑하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감동하면서도 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고 모든 일을 이뤄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천지가 개벽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사탄의 권세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해 내실 수 있으실 텐데 왜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방법으로 인류를 구속하신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형제자매와 목사, 장로님께 답을 구했지만 제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 안에 있는 자매님과 깨달음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교제 중에 저는 마음속에 갖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고 자매님과 함께 답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자매님은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진리의 기묘함이 숨어 있답니다! 예전에 저도 그런 고민에 휩싸인 적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 책에서 이것과 관련된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제 고민은 해결되었답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구속하신 건지 같이 보도록 할까요?” 그러면서 자매님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항상 관념이 있어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구속하실 때, 사탄에게 ‘나는 전능하다. 네가 감히 인류를 나에게 안 주겠다고? 반드시 나에게 줘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기만 하면 해결됩니다. 하나님께는 권병(역주: 권세)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 준다고 말씀하시기만 하면 사람에게는 죄가 없게 될 텐데, 이런 일은 하나님의 한마디 말씀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마디 말씀을 하시니 천지 만물도 다 생겼는데, 이 일은 왜 해결하시지 못합니까? 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까?”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한 면도 있고, 실제적인 면도 있다. 실제적인 면은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하여 땅에서 33년 반 동안 거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피를 흘리며 가장 심한 고통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죽음에서 부활하였는데, 부활은 전능한 면이다. 하나님은 어떤 예시로, 또는 피를 좀 흘리거나 비를 좀 내리는 것으로 그것이 곧 속죄제라고 말씀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친히 말씀이 육신 되어 온 인류와 접촉하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류에게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하였다. 그 사실로 인류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구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였는데, 하나님이 확실히 사람을 구원한 그런 증거가 있게 하였다. …영은 피를 흘릴 수 없고 육신만이 피를 흘릴 수 있는데, 그 보혈이 바로 속죄제의 증거이다. 하나님의 육신이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어 인류를 대신해 고통을 담당했다. 영은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기에 인류를 대신해 고통을 받을 수 없고, 사람의 죄를 속량할 수 없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한 것으로, 실제적인 그 일면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이다. 왜 그를 하나님이라고 하고, 전능한 면이 있다고 말하겠느냐? 일을 할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한 면이 있고, 실제적인 면도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바로 그의 실질이며, 그의 실제적인 면에도 그의 실질적인 면이 있다. 이 두 방면은 서로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은 후 자매님은 제게 이렇게 교제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는 건 하나님의 전능함과 실제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천지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는 관념이 없지만 하나님의 실제에 대해서는 관념이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실제는 항상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고자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사역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가 애굽을 떠나려는 이스라엘 백성을 막아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와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셨을 땐 요나에게 니느웨 성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실제 사역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분부를 듣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쳐 여호와로부터 숨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선 파도를 일으키시어 요나는 배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졌고, 물고기에게 잡아 먹힌 후에도 사흘간 살아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율법시대 말기,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굴레를 쓰고 매일 죄 속에서 살아가 율법으로 정죄 되고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졌습니다. 그때 그들에겐 영원한 속죄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선 성육신하시어 직접 인간 세상으로 오셨고 실제로 고통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류를 죄에서 구속해주셨고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을 향해 40일동안 나타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사역 중 어느 단계의 사역을 하시든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확실한 증거이자 사탄의 권세를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증거로 사탄이 고개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매님이 읽어주는 구절을 듣고 자매님과 나누고 나니 마음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전능하심뿐만 아니라 실제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줄만 알았지 하나님께서 왜 성육신하시어 친히 인간 세상에 오시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는 몰랐어요. 이제야 하나님의 사역에서 전능하심과 실제가 공존하는 것이고 뗄래야 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늘 교제가 빛비춤이 정말 크네요.” 자매님은 웃으면서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실제적이신 것이라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도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몇 년 동안 갖고 있던 의문이 드디어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몇 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 성경의 오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책 입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으시자 마자 여자의 자손과 뱀의 자손이 다툴 것이며, 뱀의 자손이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물지만, 여자의 자손은 그 머리통을 부술것이라는 복음을 아담과 하와에게 전해주십니다.

이런 중요한 사건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류를 지적하며 조롱 합니다. 무슬림 신학자 Ally Shabir을 비롯 성경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으로 유명한 비평적 신약 학자 Bart Ehrman 등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오류를 지적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실제로 그런 오류들이 존재하는 듯 합니다.

3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 6시에 재판을 받으셨다고?

때가 세 시가 되매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마가복음 15:25>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끌고 나가서 돌로 포장한 곳이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갑바다라고 하는 곳에 있던 재판석에 앉으니라. 그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여섯 시쯤이더라. 그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왕을 보라! 하거늘 <요한 복음 19:13~14>

마가 복음에는 예수님이 3 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하고, 요한 복음에는 6시인데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고문을 받고 계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모순일까요?

이제 세계화로 인해 외국에 있는 사람들과 많은 교류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깨어 있는 시간이 아님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시차라고 얘기합니다. 즉 분명히 동시이지만 한 나라에서 12시가 다른 나라에선 5시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해가 시작되는 날 즉 1월 1일을 우리는 설날이라고 부르고, 설날 동안 우리는 가족을 찾아 갑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구정을 세는데, 보통 구정은 2월 초에 있지만, 우리는 음력으로 1월 1일인 그 날을 설날 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유대땅에 있었던 두개의 시계

예수님이 있던 당시 예루살렘에도 이런 비슷한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유대식 시간과 로마식 시간 입니다. 당시 로마식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동일 합니다. 한 밤중에 0시가 시작이 되어, 한 시간씩 흐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르게 시간을 계산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6시가 하루의 시작 즉 0시가 되었고, 그 이후 부터 한 시간씩 흐르다가 밤 즉 저녁 6시 부터는 시가 아닌 경으로 바뀝니다. 원래는 밤 12시간을 4 시간씩 나눠서 3경으로 나눴는데,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파수병들의 근무 교대 시간에 맞추어 세 시간씩 4 경으로 나눕니다.

주인이 만일 이경에 오거나 삼경에 왔을 때에 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음 12:38>

즉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아침 9시는 이스라엘로 치면 3시이며, 저녁 6시에서 9시까지 1 경, 9시 부터 12시 까지 2경 이렇게 계산 합니다.

성경 기록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한 밤중에 잡아 간 후 대제사장의 집, 헤롯에게 끌고 갔다가 빌라도에게 데려 왔으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자신을 3번 부인할 것이라고, 즉 이른 새벽에 그런 일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었을 때에는 너희가 나를 치려고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시간이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2:53>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던 3 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밤에 잡아서 대제사장의 집, 헤롯 궁전, 빌라도에게 와서 수 많은 군중들의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소리를 들으며 재판을 받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 있었을까요? 그 새벽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서 재판 받는 것을 구경했을까요?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 3시는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새벽 3시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식 시간과 로마식 시간

그렇다면 가장 최선의 추론은 마가 복음에서 얘기하는 3시는 이스라엘 식 즉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라는 것 입니다.

또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간 것이 새벽 닭이 울고 거의 바로라는 사실을 통해 요한 복음에서 얘기하는 6시가 로마식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당일 동선을 이렇게 그려보면 정확할 것 입니다.

밤 새 괴로워 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새벽에 유다와 함께 온 군병들에 의해 잡혀가시고, 대제사장의 집, 헤롯 또 총독 사령부를 수 시간 동안 왔다 갔다 하시다가, 닭이 울고 곧 새벽 6시 경에 빌라도의 재판정에 도착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바라바를 풀어주라는 사람들의 외침에 아무 죄도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9시쯤 이스라엘 시간으로 3시쯤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리고 정오 즉 이스라엘 시간으로 6시 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시 이스라엘 시간으로 9시까지 계속 되고(마가 복음 15:33), 예수님은 6 시간 만에 숨을 거두십니다.(마가 복음 15:34)

이렇게 이해하고 설명하면, 아무런 모순이나 오류도 없으며, 다만 다른 시간 방식으로 기록을 한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타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AD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후 10~20년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유대인식 시간을 사용하지 않고 로마식 시간을 사용해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배경을 생각하고 이해하면 우리는 왜 복음서에 서로 다른 시간제를 사용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간 계산을 하라고 주어진 책은 아닙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구속의 죽음의 장면 속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순과 조롱거리를 찾는 모습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의 덕분에 풀려난 가장 극악 무도한 죄인 바라바가 바로 나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악과 (15) – 선악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

이유와 과정이 어떠하든지 결국은 이 선악과의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규정하는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악한 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수도하고 법을 만들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가 하면, 반대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을 죽이는 것 까지 서슴치 않는 그런 사람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사람의 모습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누는 기준은 역사 이래 한번도 통일된 적이 없기에, 사람이 사는 세상은 늘 분쟁과 다툼과 같은 혼돈이 있고, 또 자기만의 선을 추구하는 결과로 남의 피해를 무시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 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사람마다 무엇을 선한 것이라 하고 무엇을 악한 것이라 하는지, 그 기준이 제 각각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사람의 무엇을 선한 것으로, 또 무엇을 악한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이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악하고 버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아담이 벗었음으로 부끄러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버리려 하는 문제는, 어쩌면 작은 문제일 것 같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라는 것을 알면 놀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로마 속국의 국민으로서 자신이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런데 핵심적인 문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럴 만 했다면 아마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나, 또는 로마황제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다. 게다가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을 경건한 종교적 공로로 감추려 한 것을 악한 것으로, 또 성전의 기물을 파손하고,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 그 모습은 사람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는 눈을 가진 이들이 볼 때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 메시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던……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왕이라고 하니,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종교적인 율법을 지키며, 연약한 모습을 버리면 버릴수록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었던 유대교인들에게 이는 신성모독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인 것이다. 그 이유나,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양이나 이유가 같은 것이기에 그 가죽 옷이 예수님을 의미하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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