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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은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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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여 신발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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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 표제어 –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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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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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특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고, ‘화’를 제외한 신발을 총칭하는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 … (1) 전통시대의 신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신의 기원은 조선 정조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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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특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고, ‘화’를 제외한 신발을 총칭하는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 … (1) 전통시대의 신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신의 기원은 조선 정조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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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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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鞋履 — Google Arts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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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화혜장<소중한 기억 속 푸짐한 情, 시장<지역N문화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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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화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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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은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지저고리와 치마, 배자와 두루마기 같은 한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무얼 신었을까요? 물론 백성이야 짚신과 마로 삼은 미투리(麻鞋)를 신었지만, 양반들이 신는 신으로는 목이 긴 ‘화(靴)’와 목이 짧은 ‘이(履)’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보다 더 많이 신었던 ‘이(履)’에는 태사혜, 당혜, 운혜, 흑피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그 가운데 먼저 태사혜(太史鞋)는 코와 뒤에 태사라 하는 흰 줄무늬를 새긴 남자용 신입니다. 흔히 사대부나 양반계급의 나이 많은 사람이 평상시에 신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종이 신었다는 태사혜 한 켤레가 있지요. 조선 말기에 와서는 임금도 웅피혜(熊皮鞋, 곰가죽 신)나 녹피혜(鹿皮鞋, 사슴가죽 신) 아닌 태사혜를 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백관들이 조정에 나갈 때는 검정 가죽으로 지은 흑피혜(黑皮鞋)를 신었지요.
또 당혜(唐鞋)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신던 갖신을 이릅니다. 코와 뒤꿈치에 당초(唐草) 무니를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지요. 이 밖에 부녀자들은 구름무늬가 수놓아진 운혜(雲醯)도 신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어떤 이들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습니다. 그러면서 고무신이 한복의 기본인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무신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것으로 전통한복의 격에 맞는 것은 아니며, 태사혜를 개량한 갖신을 신어야 한복과 어울릴 것입니다.
조선시대 남.여 신발
조선시대 신
조선시대에 나타난 신을 크게 나누어 보면
장화처럼 목이 있는 것이 화(靴)요, 목 없이 고무신 형태를 띤 운두가 낮은 것이 혜(鞋)다.
화는 옛날 문무대관들이 관복을 입을 때나 각종 예복과 함께 신던 신발이다.
혜는 여자 신발이 많은데, 당혜(唐鞋) 운혜(雲鞋) 온혜(溫鞋) 등이 그것이다.
이를 재료면에서 보면 피혁제, 초 ·마제(草麻製), 포백제(布帛製), 유제(鍮製:놋쇠 제품), 지제(紙製), 목제(木製) 등을 들 수 있다.
궁혜는 궁중용이고, 앞코에 당초문이 있는 당혜는 양가집 부녀자들이 신었으며, 구름 문양의 운혜는 여염집 부녀자들이 신었다.
궁중이나 양가에서는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흑피혜나 당혜 등을 신었고, 평민들은 짚신이나 나막신 등을 신었다.
갑오개혁이후 서양의 구두가 등장했고, 1920년대부터는 고무신과 운동화를 주로 신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 다양한 형태의 구두가 생겼다.
여자의 신
당혜(唐鞋).궁혜(宮鞋).운혜(雲鞋, 溫鞋). 징신. 미투리. 짚신.나막신
수혜=꽃신
광복이후(光復以後)
수를 놓은 신. 수혜(繡鞋)는 신 전체에 아름다운 무늬로 수놓은 신목이 짧은 신의 하나로 꽃신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 색복조(色服條)에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를 보면, 계수·금라(錦羅)·세라로 만든 신을 금한다는 기록이 있어 수를 놓은 신발이 신라시대에 이미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혜는 고려시대를 걸쳐 조선시대까지 애용되었으며 사대부가의 젊은 부녀자들이 주로 신었다.
개화기 이후에도 일반 부녀자들이 혼인할 때 시댁에서 반드시 장만해 주었다고 한다. 꽃신은 신행을 가거나, 외출할 때 잠깐씩 신는 신발로 아껴두었던 것이다.
수혜는 베를 여러 겹 붙인 위에 청홍색의 무늬 있는 비단을 두르고 다시 바탕색과 반대되는 색실로 국화·송죽(松竹)·당초(唐草) 등의 무늬를 주로 수놓았다.
화문(花紋)에는 여러 가지 있었는데 수혜를 만드는 장(匠)에게 부탁하여 자기 취향에 맞는 꽃무늬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꽃신 가죽신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가죽신은 겉모양을 보아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버선같이 목이 달려있고 하나는 목이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죽신을 화(靴)라고 하지만 전래의 가죽신 중에는 높이가 짚신 높이만 한 것이 있고 부녀자의 신에는 목이 없는 것이 있다. 버선 위에 신는 탓으로 외모는 버선과 비슷하여 신코가 버선코 모양으로 코끝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관원들의 관복차림에는 반드시 검은 가죽신을 신도록 규제했었다. 가죽신은 북방지방에서 일찍 발달하였다.
이 꽃신은 가죽위에 무늬가 염색된 초록빛 비단을 덧대고 신 안쪽에는 편안한 질감의 깔창을 깔아 놓았다. 코끝은 버선코 모양으로 뾰족하고 바느질의 성실함이 돋보인다. 남.여구분
당혜(唐鞋)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신는 가죽신으로서, 통일신라시대에 중국 당(唐)에서 전해진 뒤 조선 말엽까지 신었다.
당혜는 울이 깊고 앞 코가 작은 가죽신으로 흔히 앞 코와 뒤꿈치 부분에 꼬부라진 눈을 붙이고 그 위에 덩굴무늬를 새겼으며 남녀가 다 신었다.
밤색 비단을 덧댔고 앞코와 뒷축에는 하얀 가죽을 댔다. 밑부분의 징 부분은 녹이 슬었으나 각진 원 모양이 잘 남아있다.
안에는 푹신한 감을 대고 겉은 비단으로 가죽을 싸서 만들었으며 코와 뒤꿈치에 당초무늬가 있다. 형태는 지금의 고무신과 비슷하며 오른쪽 왼쪽 구별이 없어 오랜 시간 동안 걷기는 불편하였다.
당혜(唐鞋)는 여자들의 갖신으로 코와 뒤꿈치에 당초문(唐草紋)을 장식하여 만들었다.
가죽 위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기 때문에 당혜라고 불렀고, 주로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신었다. 신코와 뒤축에 눈을 새겨 붙이며 흰색 선을 두르고, 울타리와 눈의 배색은 정해진 것을 따랐는데, 연분홍 바탕에 초록색 눈, 노란 색 바탕에 남색 눈, 남색 바탕에 다홍 눈등으로 하여 색상 조화를 이루었다.
홍색 바탕에 청색 무늬를 놓은 것은 ‘청목댕이’라고 하여 조금 나이든 여성들이 신었고, 청색 바탕에 홍색 무늬를 놓은 것은 ‘홍목댕이’라 하여 젊은 층에서 주로 착용하였다.
온혜=운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운혜 (雲鞋)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무늬를 장식한 여자의 신.
홍색의 화문단(花紋緞)으로 만든 운혜(雲鞋)이다.
운혜는 구름무늬를 장식한 여성용 신의 하나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부녀자가 신었다.
온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겉은 보통 홍색 비단으로 하고 안은 융으로 한다.
신코와 뒤축에 녹색비단을 대고 그 위에 남색 비단으로 구름무늬를 장식한다.
제비부리 같이 생겨서 ‘제비부리신’ 또는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신코와 뒤꿈치에 삼각형의 붉은 비단을 대고 구름무늬를 수놓아 장식하기도 한다.이 운혜는 밑바닥은 가죽을, 앞볼과 뒤축에 징을 박아 놓았다. 코와 뒤축의 장식단은 색이 너무 바래서 판별 할 수가 없다.
짙은 분홍색 비단으로 만들고 안은 융(絨)으로 만들었다. 홍색의 화문단(花紋緞)으로 만든 운혜(雲鞋)이다.
이 운혜는 진분홍법단眞粉紅法緞으로 만든 왕실이나 반가班家 여인들의 신발이다. 신발의 코와 뒷꿈치에 녹綠색으로 봉의 눈 모양을 장식했다. 바닥에 징이 있으며 길이가 22.5cm이다.
재료:가죽 조선시대
여성용 신의 하나이다. 마른신의 일종으로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무늬가 있다. 일명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남.여구분
진신(油鞋) =징신
들기름에 절여 만든 진땅에 신는 가죽신.
바닥에 징을 달아서 징신이라 하기도 하며, 비오는 날에 신는 신이라 하여 진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죽에 들기름을 입혀 방수가 되게 했고 바닥에 있는 징은 진흙이 신발에 묻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사용되는 가죽은 탄탄한 소가죽·말가죽·개가죽 등을 사용했다.
밑창에 박은 징은 가장자리에만 두 줄로 박은 것이 있고 중간 부분까지 촘촘히 박은 것도 있다. 징은 방침(防浸)과 신 수명을 길게 하고 진흙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진신은 진 땅에 신는 가죽신이다. 진신은 생가죽을 기름에 절여서 만든 신으로서 유혜(油鞋), 이혜(泥鞋)라 하기도 했고 징을 박았다 하여 `징신`이라 하기도 했다.
만드는 방법은 생가죽을 들기름에 절여 물이 스며들지 않고 오래 견디도록 여러 겹을 겹쳐서 바닥을 만든다. 신등의 가장자리는 역시 가죽으로 백비(가죽신의 창이나 울 속에 넣는, 넝마 따위를 여러 겹으로 두껍게 붙인 것)를 쳐서 안으로 감쳤으며, 봉임법은 청올치실로 견고한 박음질법을 쓰고 있다.
밑창에 징을 박기도 하였는데, 가장자리에만 두 줄로 박은 것이 있고, 중간 부분까지 촘촘히 박은 것도 있다. 징은 지름 0.7cm 정도의 원형 돌기로 만들어 밑창의 둘레에 촘촘히 박고, 앞바닥 가운데와 뒤꿈치 중간에는 세로 1cm, 가로 2cm 정도의 반원형이나 사분원 모양의 얇은 쇠붙이 징을 박았다. 이 징은 방침(防浸)이 잘되어 신의 수명을 길게 하고, 진흙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진신은 조선시대 양반 계층에서 비가 올 때나 땅이 젖었을 때 신었다. 신발 모양은 남자신은 태사혜(太史鞋) 모양이며, 여자신은 당혜(唐鞋)나 운혜(雲鞋)와 같았다.
진신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중(雨中)에 신는 신발로 일반화되었는데, 1920년경부터는 값싸고 경제적인 고무신의 등장으로 진신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유혜(油鞋)
유혜는 진 땅에서 신도록 만든 신으로 물이 배지 않게 들기름에 절인 가죽으로 만들었다.
신발의 표면, 특히 코부분은 가죽이 떨어져 나가 얼룩져 있다. 신발의 내부, 가장자리도 때가 많이 타있고 얼룩져있고 신발바닥의 징 역시 마모 정도가 심하다.
남.여구분
나막신
비가 올 때 신던 나무로 만든 신.
중국에서는 극(솔)이라 하였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부터 나막신이라 하였는데 최남선(崔南善)은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편편한 나무바닥에 끈을 매어 발가락이나 발끝에 걸고 다녀 일본의 게다(下蝕)와 비슷하였으나, 차차 발달하여 다른 신 모양과 같아지고 다시 여러 가지 맵시를 내게 되었다. 일본의 게다는 한국의 나막신, 중국의 극이 원류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개 소나무·오리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는데, 남자용은 좀더 투박하였으며, 여자용은 측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그리거나 코를 맵시있게 팠다. 굽 끝에는 중국의 극처럼 쇠로 된 발을 붙여 닳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재료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나무의 속성이 마르면 터지기 쉬우므로 밀을 녹여 겉에다 칠해서 납극을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 못되어 말을 탈 때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특히 어린 남자아이가 신었던 채극은 진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마른신으로도 신었다.
나막신의 종류에는 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었는데 굽이 있는 것은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 신는다. 이 나막신은 굽이 없다.
나무로 파서 만들고 굽을 달아 비오는 날 신게 된 신.
보통은 높은 굽을 달아 진땅에 다니기 좋게 하였다. 그것이 닳으면 다시 새 굽을 바꿔 달아서 오래오래 신었다.
재료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나무의 속성이 마르면 터지기 쉬우므로 밀을 녹여 겉에다 칠해서 납극을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 못되어 말을 탈 때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다. 이렇듯 널리 신겨지다가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고 질긴 고무신을 신게 되어 차츰 쇠퇴하여 194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남.여공용
미투리
미투리는 삼이나 모시 또는 노끈(실·삼껍질·헝겊·종이따위로 가늘게 꼰 줄)따위로 삼은 신을 말하며 짚신보다는 정교하게 짜여진 고급품이나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신들이 출현하면서 점차 천시되었다.
재료로는 삼·왕골·청올치·백지·면사·견사 등이 사용되었다. 6날∼8날에 총을 50∼60개 세워 바닥이나 총이 아주 정교하고 날씬한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서민층의 남녀가 사용하였고, 섬세한 제품만이 다소 양반계층에서 편복에 사용되었다.
남자의 신
흑피혜(黑皮鞋).목화(木靴).태사혜(太史鞋).발막신. 짚신
목화(木靴)
목화는 원래 왕(王)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목이 긴 신이다.
반장화(半長靴)와 비슷하며 목이 길고 넓다. 장화 모양을 내기 위하여 발목까지 나무를 대었다.
바닥은 나무이고, 목은 전(氈)·가죽·융·금단(錦緞) 등으로 겉을 싸고 솔기에는 붉은빛의 선을 둘렀다.
비슷한 모양의 신으로는 조선시대 무관들이 신었던 수화자(水靴子), 흑피화(黑皮靴), 고려 초기 악공들이 신은 적피화(赤皮靴), 무용인들이 신은 오피화(烏皮靴) 등이 있다.
흰 천으로 겉을 싼 것은 백화(白靴)라고 하는데, 고려시대는 고분벽화에 말을 탄 사람과 춤추는 사람, 음식을 나르는 여인 등이 신고 있어서 천인계급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 세종 때는 왕족과 벼슬아치들이 신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목화를 일정한 신분계급만 신도록 하였으며,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상복(常服), 말기에는 공복(公服) 차림에 신었다. 혼례 때는 서민들도 신었다.
남.여구분
목화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왕과 문무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목이 긴 마른신으로, 신 목이 길어 반장화 같이 생겼다. 이를 우리말 식으로 표현하고자 ‘목화’라 하기도 하였고, 바닥을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다시 가죽으로 감싸는 데서 ‘목화(木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조(太祖)원년(1302)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관복을 입도록 상계(上界)하여 품계에 따라 포(袍)의 색, 대(帶)의 종류, 홀(笏)등에 차등을 두어 제정하고 화(靴)만은 모두 검은색 화를 신도록 하였다.
백관의 신은 관복과 함께 『경국대전』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다. 백관들의 조복과 제복에는 흑피혜를 신었고, 이 제도는 국말 『대전회통』에도 그대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국말에 와서 조복에는 목화를 착용한 사진이 많이 있는데, 이 목화는 공복의 흑피화, 상복의 협금화 대신으로 착용되었다.
제복의 신발인 흑피화(祭靴, 祭鞋)는 국말까지 계속 신었는데, 형태는 일반 혜와 같으며 운두가 낮고 가장자리에 흰 선을 둘렀고, 신코가 넓적하며, 한가운데에 너비 약 3cm 정도의 흰 선을 대었고, 벗겨지지 않게 양쪽에서 끈이 달려 있다.
이 목화는 임진왜란 이후 철릭이 융복(戎服)으로 입혀지면서부터는 철릭에도 갓과 함께 착용되었다.
목화는 그 형태나 장식에 일정한 규정이 없어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검은 녹피(鹿皮)나 아청(鴉靑)공단(貢緞) 또는 융(絨)으로 만들고 안은 백공단으로 하며 가장자리에는 홍색 선을 둘렀다. 후에는 전(氈)으로 내장하고 외부는 청금(靑錦)선으로 둘러 화자(靴子)의 밖으로 보이게 하였고 고급품은 금단(錦緞)으로 꾸몄다.
조선 중·후기 관복에 신던 신의 하나로 수화자(水靴子)라고도 한다.
바닥은 나무나 가죽이고 신목은 천으로서 전(氈)이나 가죽·융 또는 금단(錦緞)으로 겉을 씌우고 솔기에는 선을 둘렀으며, 모양은 반장화와 비슷하여 목이 길고 넓적하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완전히 가죽으로 만들던 것을 뒤에 전으로 내장하고 청금선을 둘러 밖에 보이게 하고 고급품은 금단으로 꾸미며 장화의 모양을 유지하기 위하여 발목까지 나무를 대어 목화라고 불렀으며 상복에 신었다고 하였다. 또한 흰색 천으로 겉을 싼 백화(白靴)를 백목화라고 하는데, 상대(上代)의 백화 착용은 벽화에 나타난 기마인(騎馬人)과 무용도(舞踊圖)중 여인이 백화를 신은 것을 볼 수 있다.
또 음식을 나르는 여인이 백화를 신고 있어 수렵 때 외에는 천인계급에서 신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세종 때 태상왕상에 문무백관·종친·부마가 백화를 사용한 기록이 있고 상중(喪中)에 목화를 대신하여 백목화를 사용하였다.
외피(外皮)는 짙은 청색의 무명이며 내피(內皮)는 굵은 베로 되어 있다. 혜 부분은 4조각으로 된 4합(四合) 목화이다.
신목 부분 상단 4.5cm 내려온 부분에 백피(白皮) 선을 넣어 주어 금(衿)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신목 입구에 갈색 가죽으로 선[도리]을 둘러 주었다. 창이 얇게 되어 있으며 가죽으로 된 밀창이 앞 코까지 올라와 굽어져 있다.
이러한 모양은 국말 사진 자료에서 착장 모습이 관찰된다. 만듦새가 정교하지 않으며 재질로 미루어 하급관리용으로 보인다.
태사혜(太史鞋)
주로 남자들이 신던 운두가 낮은 신의 하나.
우리나라 신발의 종류는 신발의 형태에 따라 크게 운두가 낮은 신인 이(履)와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화(靴)로 나뉜다. 혜(鞋)는 운두가 낮은 신의 한 종류로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신발이었다.
혜(鞋)는 재료와 문양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지어졌는데 태사혜(太史鞋), 운혜(雲鞋) 등은 문양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고 녹피혜(鹿皮鞋는) 재료에 따라, 궁혜(宮鞋)는 용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태사혜는 신의 코 끝 부분에 태사문(太史紋)이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항상 신의 앞부분과 뒤축에 대칭이 되도록 넣었다.
남자용 신에는 선이 크고 대담하게 들어가고 여자용에는 작고 아담하게 넣었다. 태사혜 뿐 아니라 당혜와 바닥에 징이 박힌 진신(징신), 나막신 등에도 태사문을 넣었다.
신목이 있는 화(靴)에 대하여 혜(鞋)는 목이 없고 운두만 있는 신으로, 조선시대에는 리(履)에 속하는 혜가 대표적인 신발이었다.
남자 마른신의 일종이며, 사대부나 양반계급의 나이든 사람이 편복에 신었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왕도 평상복에 착용하였다.
신은 날씨에 따라 진신과 마른신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비가 오거나 땅이 진 곳에 신으면 진신이고, 맑은날 마른땅에 신는 신은 마른신이라고 한다. 태사혜는 신울(발을 감싸는 부분)은 비단이나 가죽으로 하고 밑둘레는 밀랍을 칠한 굵은 실로 꿰맸으며 신코와 뒤축 부분에 흰 줄무늬[太史紋]를 새겼다. 바닥에 잔 징을 박은 것도 있다.
어린이들의 태사혜는 일명 ‘초립동’이라고도 하였는데, 연두빛 바탕에 당홍 당수복문돠 태사문을, 아니면 당홍 바탕에 연두문을 놓기도 하였다.
화려한 꾸밈새와 정교한 형태로 보아 새신랑이나 초립동이가 편복(便服)에 신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녹색의 모본단으로 만들었고, 코와 뒤꿈치에 남색의 회장이 둘러져 있으며, 바닥에 징을 박았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남자들이 신던 가죽신으로 위에 비단을 붙이고 신코와 뒷축에 줄무늬를 새겼다.
소아혜
상류층 갓난 아이들이 신었던 신발로 몸체는 가죽으로 만들고, 겉에는 비단을 씌웠다.
신코와 뒤축에는 태사문(太史文)을 새겨 넣었다. 조선시대에는 혜(鞋)가 대표적인 신이 되었다.
아기태사혜
이 태사혜는 어린이용으로 진옥색 문단(紋鍛)에 황색으로 태사문을 장식하였다. 안에는 융을 대고 바닥은 가죽으로 하였다.
흑혜(黑鞋)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제복에 신었던 신발이다.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융을 주재료로 했기 때문에 푹신한 것이 특징이며 밑바닥은 단창이고 형태는 포혜(布鞋)와 비슷했다.
운두가 낮은 마른신(乾鞋)의 하나로 표면에는 문양 장식이 없다. 가장자리를 옷감이나 가죽으로 대고 밑둘레는 밀랍으로 칠한 굵은 실로 꿰맨다. 또한 가죽으로 된 밑창에 촘촘하게 징을 박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신은 조선시대 사대부나 양반 계급의 고령자가 편복(便服)에 신었으며, 한말에는 왕도 평상복에 착용하였다.
흑혜는 검은 가죽으로 만든 마른신으로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조복과 제복에 신었던 신발이며 흑피혜(黑皮鞋)라고도 한다.
백관(百官)이 착용한 신은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나타나 있는데 조복과 제복에는 각 품이 동일하게 흑피혜를 신도록 하였다. 이는 『대전회통 大典會通』에도 그대로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제복에는 그대로 흑피화(祭靴)를 신었으나 조복에는 화자(靴子)를 착용한 사진이 남아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초상화를 보면 유학자(儒學者)들이 편복(便服)과 함께 흑혜를 신기도 하였다.
흑혜의 형태는 일반 혜(鞋)와 같으며, 운두가 낮고 신코가 넓적하며 가장자리에 흰색 선을 둘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신이 벗겨지지 않게 양쪽에 끈을 달기도 하였다.
흑혜는 모양이 태사혜(太史鞋)와 같으나 태사문(太史紋)이 없다.
이 흑혜는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볼 부분과 발바닥 부분에 둥근 징들이 박혀 있다.
소가죽과 흑색 우단(羽緞)으로 울을 만들었고, 앞 뒤 축 중심선에 흰색 선을 쳤다.
녹피혜(鹿皮鞋)
사슴가죽으로 만든 신으로, 이 유물은 주로 편복(便服) 차림에 신던 마른신의 하나로, 모양은 태사혜(太史鞋)와 같으나 특별한 장식이 없다. 사슴의 가죽을 사용해서 만들었기에 녹비혜(鹿皮鞋)로 불리웠다.
운두가 낮은 신발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착용하였던 고급신이다. 흰 가죽부분이 그대로 깨끗하게 남아있다. 밑바닥의 징을 박은 구멍이 신발 위에까지 뚫려있으며 녹이 슬어있고 밑바닥의 징에는 별모양의 무늬가 찍혀있다.
마른신의 한 종류. 발막신은 맑은날 마른땅에 신는 마른신으로, 운두가 낮은 신인 ‘혜(鞋)’이다. 상류계급의 사대부 남자들 특히 노인들이 신었던 신발 중 하나인데, 노인들이 신어 ‘발막’이라고 하였다.
발막신은 조선후기에 뾰족했던 신코가 넓적해지면서 운두가 낮아 코에서 운두에 이르는 부분이 각이 지는 형태로 정착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형태는 뒤축과 코에 꿰맨 솔기가 없고, 코끝이 뾰족하지 않고 넓적하다.
신의 바닥이 정면에서 보일 정도로 위로 올라갔고, 신 울타리 부분은 거의 직선에 가까운 형태이다. 또한 표면에는 경분(輕粉)을 칠해 내구성을 높였다. 발막신의 재료는 사슴가죽, 노루가죽, 양가죽 등이 사용되었으며, 회색이나 검정색으로 무늬는 거의 없었다.
발막신
운두가 낮은 신발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착용하였던 고급신 이다. 남자용이며 신발바닥 앞과 뒤에 징이 박혀 있다.
백피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사람들이 상중(喪中)에 신던 신발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여자용으로 남자의 앞코는 편평한테 비해 여자의 앞코는 위로 올라가 있다. 상중에 신던 신발이어서 특별한 무늬는 나타나 있지 않는다.
남.여공용
짚신
볏짚으로 삼은 신발로 짚신은 우리나라 고유의 대중적, 실용적 신발로 미투리, 초혜(草鞋),망리(芒履)등으로 불린다.
짚신의 재료는 짚이 일반적이었으나 삼,왕골,부들등도 사용되었다. 만드는 방법은 우선 짚으로 새끼를 한 발정도 꼬아 4줄로 발바닥 크기 정도로 날을 한다. 다음으로 양쪽을 다시 짚으로 꼬아 총을 꿰어 두르면 신기에 알맞은 짚신이 된다.
짚신은 만드는 방법과 재료에 따라 짚신,고운짚신,엄짚신,부들집신,왕골짚신, 미투리,삼신,절치,탑골치 등으로 불린다.
짚신의 역사는 약 2천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신라시대의 유물인 짚신 모양의 이형토기(異形土器)는 오늘날의 짚신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짚신은 가는 새끼를 꼬아 날을 삼고, 총과 돌기총으로 올을 삼아서 만드는데 여자용은 총을 가늘고 곱게 하고, 엄지총은 물들인 짚을 섞어 만들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짚신이 평상화로 사용되어 농가에서는 농한기에 머슴들이 사랑방에 앉아 몇 십 켤레씩 짚신을 삼아 식구들의 수요에 충당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으로 썼다. 지금도 초상집 상제들은 짚신을 신는 풍습이 있다.
갖신
대한제국(大韓帝國)
갖신은 신발의 재료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가죽으로 만든 신의 통칭이다.
신분에 따라 쓰이는 재료로 귀천을 구분하였다. 천한 사람은 소가죽신을 신고 귀한 사람은 사슴가죽신을 신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갖신이 이전(履廛), 화전(靴廛), 종루(鐘樓)나 소가죽의 창을 파는 이저전(履低廛)을 통하여 일반에 널리 유통되면서 가죽이 품귀현상을 빚자 일반인의 갖신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착용되었던 갖신에는 기름을 들이지 않고 마른 땅에서 신는 ‘마른신’과 가죽에 기름을 먹여 만든 ‘진신’이 있다. 진신은 주로 비가 올 때 사용되었으며 유혜(油鞋)라고도 하고 바닥에 징이 박혀 있어 징신이라고도 한다. 마른 신은 태사혜, 당혜, 운혜, 온혜 등이 있는데 그 무늬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물론 이러한 신발은 겉을 가죽이 아닌 헝겊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가죽신의 주된 재료는 쇠가죽, 말가죽, 사슴가죽, 당나귀가죽 등의 가죽과 부속으로 삼베, 헝겊, 밀을 먹인 면사와 명주실, 징 등을 사용한다.
가죽제의 단화형태인 혜(鞋)와 함께 발목이 높은 신발인 화(靴)가 있다. 화(靴)는 주로 의례적인 차림에 사용되었으며 후대에 오면 화(靴)보다 혜(鞋)를 일반적으로 신게 되었다. 혜(鞋)는 앞코가 둥글고 대부분 가선이 되어있으며 오늘날의 고무신과 유사한 형태이다. 이 갖신은 바닥을 고무로 대고 뒤축에 낮은 굽을 덧대었다.
종이신
종이로 노를 꼬아 만든 신.
둥구니신
산간지방에서 눈오는 날 미끄럼방지를 위해 나무덩굴, 짚 등으로 만든 신발
설피
산간 지대에서, 눈에 빠지지 않도록 신 바닥에 대는 넓적한 덧신. 칡, 노, 새끼 따위로 얽어서 만든다.
역사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과 『남사南史』 동이전東夷傳의 신라조에 ‘화靴’를 ‘신侁’이라 한 기록을 통해 ‘신’의 어원을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신은 목이 있는 화靴와 목이 없으며 둘레가 낮은 혜鞋와 리履로 분류할 수 있다. 화는 습기와 추위를 막아 주어 주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북방민족이 많이 신었고, 리는 농사를 짓는 남방민족이 흔히 신었다고 이여성李如星의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에서 설명하였다. 생태 환경적 측면에서 보면, 농경 문화권의 남방 지역에서는 혜와 리가, 북방의 기마유목 문화권에서는 화가 공존하면서 착용되었다.
상고시대 부여에서는 가죽신[革履]을, 마한에서는 풀을 재료로 한 초리草履와 혁교답革蹻蹋을 신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가죽과 풀을 재료로 하여 신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풀을 재료로 한 초기의 신발은 처음에는 발을 보호하는 뜻에서 신바닥을 엮은 데에 몇 개의 날을 세워 겨우 발에서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조잡하였던 것이 점차 짚신, 부들신, 지초혜紙草鞋, 마혜麻鞋, 갈피혜葛皮鞋, 세초혜細草鞋, 분혜粉鞋로 발전되었다.
고구려 때는 누런 가죽신인 황혁리黃革履, 검은 가죽신[烏皮靴], 붉은 가죽신[赤皮靴]을 신었으며, 여기에 의복과 관冠, 신을 모두 금과 비단으로 장식하였음을 기록과 고분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인은 화려한 재료의 의복에 목이 길거나 짧은 형태의 신을 함께 착용하였다. 백제의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 볼 수 있는 화와 오혁리烏革履의 기록을 통해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리金銅履는 삼국시대 지배계층이 신었던 특수한 신이다. 옆에 장식이나 구슬이 달려 있고 바닥에 스파이크 형태의 못이 박혀 있는 신이다. 이와 같은 금동리는 제전이나 의식 때 착용하여 지배자의 위엄을 나타내거나 부장 시 함께 신겨져 신분을 표현하는 등 상징적인 신이다. 그런데 통구通溝지역 삼실총 제2실 서벽 무사도武士圖의 무사를 보면 운두가 얕고 앞의 코가 뾰족하여 전형적인 리 형태에 바닥에는 스파이크 형태 못이 박혀 있는 신을 신고 있다. 고구려는 산과 나무가 많은 지역인 데다 겨울에는 빙설로 덮이고 산길이 미끄러워 이와 같은 쇠못이 달린 신은 실용적인 용도로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는 화에 화대靴帶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의 기록을 보면 화대의 재료는 은문백옥隱文白玉, 뿔[犀], 놋[鍮], 철鐵, 동銅 등이었다. 신목에 다양한 금속장식이 있는 화대를 달아 신을 고정하였는데 귀인부터 서민까지 규제를 두었다. 이밖에 리履는 남녀 공용으로 착용했는데 비단, 가죽, 삼 등으로 만들되, 역시 제한을 두어 착용토록 하였다. 신라는 이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당唐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외래적인 요소가 유입되었고, 이러한 개방적인 미적 풍조가 복식에 표현되면서 한층 화려하고 다양한 형태의 신이 착용되었을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제도에 따랐다.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절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진사, 산원, 인리, 방자 등의 하급 관리는 가죽신 또는 가죽으로 만든 구리句履을 신었다고 한다. 또 고려 서민들의 신은 혁리革履, 오혁구리烏革句履, 조구皁屨, 초구草屨(짚신)를 신었는데, 초구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괴이하나, 전국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신는다고 되어 있어 고려인은 주로 네모난 형태의 짚신 또는 가죽신을 신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백관의 공복제도가 공표되어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에 흑피혜黑皮鞋를 착용하고, 공복公服에는 1~9품까지 흑피화黑皮靴를 신고, 상복常服에는 1~3품 당상관만 협금화挾金靴를 신도록 하였다. 흑색의 가죽으로 된 화는 공적 용무에 사용되었고, 혜는 평상시와 공무에 신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죽으로 된 화는 관리들의 관복에 사용되었고, 혜는 공석과 평상시에 공용으로 신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말기에는 목화木靴가 관복용으로 통일 대체되었다. 이 목화는 19세기에 등장하는 명칭으로 목이 있는 신의 표음 용어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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