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40 허난설헌 시 The 97 Latest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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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사전 –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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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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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연보 및 작품[편집]

주요 작품[편집]

작품 세계[편집]

가족 관계[편집]

같이 보기[편집]

기타[편집]

허난설헌을 연기한 배우[편집]

각주[편집]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허난설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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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정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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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정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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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 페미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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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생애

가족 관계

연보 및 작품

부연 설명

출처

허난설헌 - 페미위키
허난설헌 – 페미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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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허씨(蘭雪軒許氏, 1563년 ~ 1589년 3월 19일)는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본명은 초희(楚姬)[1]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2]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그녀의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점차 널리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이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후,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의 시인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蘭雪軒集)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郎)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어 당대의 세계적인 여성 시인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2] 1612년에는 취사원창이란 이름으로 미간행 시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당대에는 고부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초당 허엽의 딸로 허봉의 여동생이자 교산 허균의 친누나이며,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다. 어의 허준은 그의 11촌 숙부뻘이었다. 손곡 이달(李達)의 문인이다. 강원도 출신.

생애 [ 편집 ]

생애 초반 [ 편집 ]

가계(家戒) 배경 [ 편집 ]

강릉 초당동에 취치한 허난설헌 생가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과 그의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허성은 이복 오빠였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許篈)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허성(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다시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그밖에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유년기와 수학 [ 편집 ]

일찍부터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2]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은 서경덕과 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불행한 결혼 생활 [ 편집 ]

결혼 생활 초반 [ 편집 ]

1577년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3]

남편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詩)를 한 구절 써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한번은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

이 편지에서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에 직언했다 한다.

시집살이와 갈등 [ 편집 ]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 哭子 ( 곡자 )

(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 ( 거년상애녀 ) 今年喪愛子 ( 금년상애자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 ( 애애광능토 ) 雙墳相對起 ( 쌍분상대기 )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 ( 소소백양풍 ) 鬼火明松楸 ( 귀화명송추 )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魄 ( 지전소여백 ) 玄酒奠汝丘 ( 현주전여구 )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 ( 응지제형혼 ) 夜夜相追遊 ( 야야상추유 )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縱有腹中孩 ( 종유복중해 ) 安可冀長成 ( 안가기장성 )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 ( 랑음황대사 ) 血泣悲呑聲 ( 혈읍비탄성 )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2]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고 말았다. 시 재주와 문명은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시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받았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되었다.

생애 후반 [ 편집 ]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 今年乃三九之數 /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4]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4]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후일 그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추증 예겸에 따라 증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시문집 간행 [ 편집 ]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등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현재 전한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의 5번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 하남시로 이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1608년 동생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출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알려지면서 격찬을 받았다.[2] 한편 1711년에는 일본에도 소개되어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郎)가 그녀의 시를 간행, 한때 애송되기도 하였다.

고부 갈등과 남편과의 불화로 당대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영조, 정조 이후에 중인과 평민 등도 문학과 시조 작시 등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성과 천재성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후 [ 편집 ]

그 뒤 임진왜란과 허균이 광해군 말년 옥사당하면서 잊혀졌다가, 1940년 무렵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그녀의 시와 작품성을 평가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 9월에는 그의 시작품 168편을 모아 청 만력 40년(1612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 ≪취사원창≫(聚沙元倡)이 새롭게 발굴됐다. ≪취사원창≫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출신 문인인 반지항(潘之恒, 1556~1622)의 문집 『긍사』(亘史)에 1책으로 수록되어 들어있었다. 이 시집에는 허난설헌의 산문 글 1편도 들어있었는데, 당시 중국 난징대학교 박사과정 유학생인 김영숙이 처음 발견했고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문학과 교수 박현규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이던 이 소장품을 정밀분석해 한국 학계에 소개하여 알려졌다. 그동안 취사원창은 중국 학계에서도 호문해(胡文楷)가 1957년 간행한 『역대부녀저작고(歷代婦女著作考』라는 책에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실전된 상태였다.≪취사원창≫에 나타난 난설헌 시는 오언고시 14편, 칠언고시 11편, 오언율시 6편, 칠언율시 14편, 오언절구 20편, 칠언절구 103편이며 산문 1편은 그가 8세 때 지었다는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다.

처음 세운 비석은 실전되었으나 대한제국 멸망 이후 다시 세워졌다. 새 비석은 이숭녕(李崇寧) 등에 의해 오석으로 세웠으며, 전면에는 이숭녕이 지은 ‘증정부인양천허씨지묘'(贈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는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허난설헌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29-5에 있다. 현재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문인석을 제외한 묘비·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상석·망주석·둘레석은 근래에 만들어졌다.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은 것이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詩碑)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연보 및 작품 [ 편집 ]

1563년 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 8세 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

1577년 선조 10년, 15세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1580년 선조 13년, 18세 때 아버지 이준영이 상주에서 객사했다.

1582년 선조 15년, 20세 때 전 해 1579년 딸을 잃고나서 또한 아들 박진우을 잃는다. 곡자를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애닳게 그린 시이다.

1583년 선조 16년,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1588년 선조 21년, 26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1589년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1589년 선조 22년, 남편 김성립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남양 홍씨와 재혼한다.

1590년 선조 23년, 동생 허균이 친정에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류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 선조 25년,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1598년 선조 31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1606년 선조 39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 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간행.[5]

주요 작품 [ 편집 ]

저서 [ 편집 ]

《난설헌집》

《취사원창》

그림 [ 편집 ]

《앙간비금도》

《묵조도》

《작약도》

오언고시에는 소년행(少年行), 감우사수(感遇四首), 곡자(哭子), 견흥팔수(遣興八首), 기하곡(寄荷谷) 등 총 15수의 시가 있다.

칠언고시는 총 여덟 편으로 동선요(洞仙謠), 염지봉선화가(梁指鳳仙花歌), 망선요(望仙謠), 상현요(湘絃謠), 사시사사수(四時詞四首)

오언율시는 총 여덟 편으로 출새곡이수(出塞曲二首), 효이의산체 이수(效李義山體二首), 효심아지체 이수(效沈亞之體 二首), 기녀반(寄女伴),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 등이 있다.

칠언율시는 총 13편으로 춘일유회(春日有懷), 차중씨견성암운 이수( 次仲氏見星庵韻 二首), 숙자수궁증여관(宿慈壽宮贈女冠), 몽작(夢作), 차중씨고원망고대운 사수(次仲氏高原望高臺韻 四首), 송궁인입도(送宮人入道), 제심맹조중연풍우도(題沈孟釣中溟風雨圖), 황제유사천단(皇帝有事天壇), 차손내한북리운(次孫內翰北里韻) 등이 있다.

그 외 오언절구 24수와 칠언절수 총 142구가 있다.[6]

작품 세계 [ 편집 ]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와 친필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오빠의 배려로 글을 배웠다. 어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집 아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서 사회의 불평등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표현,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역사학자 이덕일은 허난설헌의 시를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소유물을 갖지 못한다는 맑스의 《소외론》과 비교할 정도로 허난설헌의 재능을 극찬하였다.물론 허난설헌은 문인으로서의 지성으로,맑스는 사회학자로서의 지성으로 노동자의 소외를 말한 것이다.[7]

하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죽었으며,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는 이유로 귀양 갔다가 유배가 풀린 뒤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죽고, 어머니가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객사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고, 죽기 얼마 전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많은 작품을 생전에 태워버렸으나, 세상을 떠난 후 동생 허균이 이전에 베껴 놓은 것과 기억에 남은 것을 모아 그녀의 시를 《난설헌집》로 펴내 지금까지 전한다.

가족 관계 [ 편집 ]

부친: 허엽

모친: 강릉 김씨(江陵金氏) [8] –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

–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 오빠(이복): 허성

오빠(동복): 허봉

자신: 허난설헌

남편: 김성립 장남: 김희윤 (요절) 장녀: 김씨 (요절)

동생(동복): 허균

같이 보기 [ 편집 ]

기타 [ 편집 ]

여성운동가 김신명숙은 허난설헌을 현대 여성의 모델에 적합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허난설헌은 살려야 할 역사적인 인물이다. 현모양처의 전형 신사임당은 이제 허난설헌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한국적 여성주의자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적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9]”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시대가 바뀌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인 인물도 바뀐다. 조선시대로 국한시켜 보면 여성들의 경우는 신사임당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신사임당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랬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남성들의 역사에서 남성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신사임당이 그 동안 권력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해왔는데, 이제 ‘History’가 아니라 ‘Herstory’를 하겠다는 거죠.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심하게는 조작되고, 은폐되었던 역사를 이제 여성의 시각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여성이라면 현재 우리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신사임당 보다는 허난설헌이라는 것이다.[9]”라는 것이다. “신사임당도 훌륭한 여성입니다. 신사임당을 폄하 하자는게 아니고, 그 사람도 훌륭한 사람인데, 그러나 우리 시각으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히스토리에서 만들어진 그런 모습이 아니라, 신사임당도 재조명해야 되고, 그리고 특히 새롭게 재조명해야 할 여성상의 모델로는 ‘허난설헌이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를 비롯한 여성주의자들의 생각입니다.[10]”라 하였다. 김신명숙은 신사임당을 대신할 여성의 모범으로 허난설헌을 지목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래서 2003년 9월 말에 허난설헌 문화축제도 열구요. 허난설헌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시죠? 조선시대에 아내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나로서 존재하려고 했던 사람이거든요. 나로서 존재하려고 몸부림쳤던 여성인데, 27살에 요절을 했죠. 천재 시인이고, 아주 뛰어난 여성이었는데, 삶도 아주 드라마틱하고, 극적 요소도 갖추고 있어요.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충분히 새로 조명되어야 할, 신사임당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만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봅니다. 단순히 허균의 누이가 아니라[10]’는 것이다.

허난설헌을 연기한 배우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허경진 엮음, 《허난설헌 시선》 (평민사, 1987)

김지용, 《역대여류한시문선》 (김지용 편역, 대양서적, 1975)

문경현, 《허난설헌연구》(도남 조윤제박사고희기념논총, 1976)

김석하, 허초희의 유선사에 나타난 선현상, 단국대학교 《국문학 논총 5·6합집》 (단국대학교, 1972)

성균관대학교, 허균 전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1)

박종화, 〈여류시인 허난설헌고〉 성균관대학교, 《성균 3》 (성균관대학교, 1950)

홍만종, 《해동이적:(증보)》 (신해진, 김석태 공역, 경인문화사, 2011)

외부 링크 [ 편집 ]

허난설헌 시 모음 기하곡(寄何谷) : 오빠 하곡에게 暗窓銀燭低(암창은촉저) : 어두운 창에 은촛불 나직하고 流螢度高閣(유형탁고각) : 반딧불은 높은 누각을 날아다닌다 悄悄深夜寒(초초심야한) : 근심스런 깊은 밤은 차가워지고 蕭蕭秋落葉(소소추낙엽) : 쓸쓸히 가을 낙엽만 지네 關河音信稀(관하음신희) : 오라버니 계신 변방에서 소식 없어 端憂不可釋(단우불가석) : 근심스런 이 마음 풀 수가 없어요 遙想靑運宮(요상청련궁) : 아득히 오라버니 계신 청련궁을 생각하니 山空蘿月白(산공나월백) : 산은 비어있고 담쟁이 덩굴에 달빛만 밝다 고객사(賈客詞) : 바다 상인의 노래 掛席隨風去(괘석수풍거) : 돛을 올리고 바람 따라 가다가 逢灘郞滯留(봉탄랑체류) : 여울 만나면 그곳에 머문다네 西江波浪惡(서강파랑오) : 서강의 풍량이 거세어지니 幾日到荊州(기일도형주) : 몇 일이 지나야 형주 땅에 닿을까 貧女吟(빈녀음) : 가난한 처녀의 노래 手把金剪刀(수파금전도) : 손에 바늘을 잡고 夜寒十指直(야한십지직) : 밤이 차가워 열 손가락 곧아온다 爲人作嫁衣(위인작가의) : 남을 위해 혼수 옷 지을 뿐 年年還獨宿(연년환독숙) : 해마다 독수공방 신세라네. 送荷谷謫甲山 : 갑산으로 귀양가는 오라버니 하곡에게) 遠謫甲山客(원적갑산객) :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우리 오빠 咸原行色忙(함원행색망) : 함경도 고원 길에 행차가 바쁘리라 臣同賈太傅(신동고태부) : 귀양가는 신하는 충신 가태부와 같다지만 主豈楚懷王(주기초회왕) : 귀양보내는 입금이야 어찌 어리석은 초회왕이랴 河水平秋岸(하수평추안) : 강물은 가을 강 언덕에 잔잔하고 關雲欲夕陽(관운욕석양) : 변방 함경도의 산 구름 석양에 물들겠지 霜楓吹雁去(상풍취안거) : 서릿발 찬 바람에 기러기 나는데 中斷不成行(중단불성행) : 중간에서 못가고 돌아 왔으면 閨情(규정) : 여자의 정 妾有黃金釵(첩유황금채) : 제에게 황금 비녀 하나 있는데 嫁時爲首飾(가시위수식) : 시집 올 때 머리에 꽂았던 것입니다 今日贈君行(금일증군행) : 오늘 그대의 행차에 드리오니 千里長相憶(천리장상억) : 천리 먼 길에 오래도록 기억해 주소서 채연곡(采蓮曲): 연꽃을 따며 부르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 가을은 맑고 긴 호수엔 벽옥 같은 물 흐르고 荷花深處繫蘭舟(하화심처계난주) : 연꽃 우거진 곳에 아름다운 목련배 매여 있어요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 임을 만나 물 사이로 연밥을 던지다가 遙被人知半日羞(요피인지반일수) : 멀리 사람들이 알아보아서 반나절이 부끄러웠소 야야곡(夜夜曲): 깊은 밤의 노래 玉淚微微燈耿耿(옥루미미등경경) : 옥 같은 눈물 찌금찌금 , 등잔불 깜박깜박 羅瑋寒幅秋宵永(라위한폭추소영) : 비단 휘장 싸늘하고 가을밤은 길기도 하다 邊衣裁罷剪刀冷(변의재파전도냉) : 변방에 보낼 옷 다 짓고 나니, 싸늘해진 가위 滿窓風動芭蕉影(만창풍동파초영) : 바람 따라 움직이는 파초 그림자만이 창을 채우네 규원( 閨怨) : 여자의 원망 月樓秋盡玉屛空(월루추진옥병공): 달 밝은 누각에 가을이 다 가는데 나 홀로 빈 방에 있고 霜打廬洲下暮鴻(상타여주하모홍): 서리 내린 갈대섬에는 저녁 기러기가 찾아듭니다 瑤琴一彈人不見(요금일탄인부견) : 예쁜 거문고 타보아도 임은 보이지 않고 강남곡(江南曲) : 강남에서 人言江南樂(인언강남낙) : 사람들 강남을 즐거운 곳이라 하지만 我見江南愁(아견강남수) : 나는 강남의 근심을 보았습니다 年年沙浦口(년년사포구) : 해마다 모래벌 포구에서 腸斷望歸舟(장단망귀주) : 단장의 이별하고 고향 가는 배를 보았답니다. 애절한 허난설헌의 시와 그림 그녀는 세 가지의 한을 입버릇 처럼 말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 다른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그녀는 짧은 생에 커다란 아픔 앓이만을 하다가 젊디 젊은 나이에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강릉의 명문가에서 두번째 부인의 둘째 딸로 태어나, 아버지는 경상 감사를 지냈던 동인의 영수이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 큰 오빠 허성은 이조, 병조 판서를, 둘째 오빠 허봉 역시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역시 형조, 예조 판서를 지낸 인물입니다. 임금은 동생 허균을 너무나 아끼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라며 울며 애원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허균은 봉건 사회 타파와,이상 세계 실현에 실패한 것을 슬퍼하며 죽음을 택합니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 별호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라고 합니다. (許蘭雪軒, 1563∼1589: 명종 18∼선조 22). 그녀는 어릴 적부터 놀라운 글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당시의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을 거부할 수 조차 없었던 사회 속에서의 한을 시에 담아 한탄하며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閨怨(규원)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그녀는 미쳐 피지도 않은 나이 15세에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기방 출입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반면 김성립은 늘 재주가 빼어난 자신의 부인 난설헌에게 열등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늘상 허균의 눈에도 그리 보여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은 우수한 자”라고 매형을 평하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할 수 밖에 없었고, 시댁에서는 밖으로만 도는 아들과 아들보다 뛰어난 며느리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설헌에겐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한 해 차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녀는 일찌기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27세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서 “금년이 바로 3·9의 수(3×9=27, 27세를 뜻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 전해집니다 그녀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난설헌의 글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여 동생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가 만일 평범한 가정 속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고 한 집의 며느리로서 대우 받으며 자식들을 그리 떠나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 저미는, 설움 담긴 글들을 우리는 단 한 편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요.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였으나, 아이를 얻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본처가 아닌, 후처와 합장하였다고 합니다.. 숨막히는 당시 유교 사회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희생당한, 빼어난 미모와 재능의 소유자인 허난설헌의 아픔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얼마 전해 지지 않는 몇 편의 시와 그림 속에서 배어 나오는 듯 합니다. 당대의 학자였던 오빠 허봉에게서 ‘두보의 소리를 네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라는 극찬을 받았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천재 허난설헌의 삶은 곧 남존 여비,여필 종부 등의 유교적 사상과 가치관에 희생된, 한 여인의 슬픔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슬픔입니다… 哭子(곡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감우2(感愚2) : 어리석었어

古宅晝無人(고택주무인) : 고택에는 낮에도 사람이 없어

桑樹鳴??(상수명휴류) : 뽕나무에는 부엉이와 올빼미만 우네

寒苔蔓玉?(한태만옥체) : 옥섬돌엔 차가운 이끼와 넝쿨만 무성하고

鳥雀棲空樓(조작서공루) : 빈 누각엔 새들만 깃들이네

向來車馬地(향래거마지) : 지난 날 수레와 마차 오가던 곳인데

今成孤兎丘(금성고토구) : 지금은 토끼 언덕이 되었네

乃知達人言(내지달인언) : 이제야 알겠구나, 선인의 하신 말씀

富貴非吾求(부귀비오구) : 부귀는 내가 구할 바가 아니란 것을

상봉행2(相逢行2) : 만남의 노래

相逢靑樓下(상봉청루하) : 청루에 서로 만나서

繫馬垂楊柳(계마수양류) : 수양버들 아래 말 매놓고

笑脫錦貂?(소탈금초구) : 웃으며 비단옷과 갓옷 벗어

留當新豊酒(유당신풍주) : 신풍주를 사서 같이 마셨다네 상봉행1(相逢行1) : 만남의 노래

相逢長安陌(상봉장안맥) : 장안의 거리서 서로 만나

相向花間語(상향화간어) : 꽃밭 속 찾아가 속삭였다

遺却黃金鞭(유각황금편) : 황금 말채찍질 하지않았는데도

回鞍走馬去(회안주마거) : 돌려세운 말은 그냥달려갔었네

감우1(感愚) : 어리섞었어

盈盈窓下蘭(영영창하란) : 하늘하늘 창 아래 난초잎

枝葉何芬芬(지엽하분분) : 가지와 잎이 어찌 그리도 향기로운가

西風一披拂(서풍일피불) : 하뉘바람이 한번 스치면

零落悲秋霜(영락비추상) : 시들어버리니 가을서리를 슬퍼하노라

秀色縱凋悴(수색종조췌) : 빼어난 고운 빛 시들어 버려도

淸香終不斃(청향종불폐) : 맑은 향기는 끝내 없어지니 않는구나

感物傷我心(감물상아심) : 風物에 감응하는마음이 아파서

涕淚沾衣袂(체루첨의몌) : 눈물은 흘러 옷깃이 젖네 추한(秋恨) : 가을날의 한

縫紗遙隔夜燈紅(봉사요격야등홍) : 비단 창문사이에 두고등 밝은 밤

夢覺羅衾一半空(몽각나금일반공) : 꿈에서 깨어보니 비단 이불 한 곳이 비어있네

霜冷玉籠鸚鵡語(상냉옥롱앵무어) : 서릿발은 차갑고 옥초롱에는 앵무새 저 혼자 지저귀고

滿階梧葉落西風(만계오엽락서풍) : 불어오는 서풍에 섬돌 가득 오동잎은

기하곡(寄何谷) : 오빠 하곡에게

暗窓銀燭低(암창은촉저) : 어두운 창에 은촛불 나직하고

流螢度高閣(유형탁고각) : 흐르는 반딧불은 높은 누각을 재나요

??深夜寒(초초심야한) : 수심이 깊어서인지 밤이 차갑고

蕭蕭秋落葉(소소추낙엽) : 쓸쓸히 가을 잎은 떨어지네요

關河音信稀(관하음신희) : 오라버니 계신 변방에서 소식 없어

端憂不可釋(단우불가석) : 근심겨운 이 마음 풀 수가 없어요

遙想靑運宮(요상청운궁) : 아득히 (오라버님 계신) 청운궁을 생각하노라니

山空蘿月白(산공나월백) : 산이 비어있고 가을 달은 밝아요

허난설헌, 조선의 천재 여류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다

“유성룡 대감! 제 누님이 지은 시들을 시집으로 내려고 하는데, 읽어보시고 시집의 머리글을 지어 주시겠습니까?”

“허균! 진정 이 시들을 자네 누이가 지은 것인가? 정말 훌륭하네. 일반 여성이 지은 시가 아닌 것 같네.”

조선 시대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유성룡이 극찬한 이 시인은 누구였을까요? 그녀가 지은 시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요?

글 한 편으로 여자 신동으로 불리다

허난설헌은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허엽의 3남 3녀 가운데 다섯 번째로 태어났어요. 첫째 오빠는 나중에 이조판서를 지낸 허성이었고, 둘째 오빠는 글을 잘 짓는 문장가로 유명한 허봉이었으며, 남동생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었어요. 이처럼 허엽과 그의 자식들은 뛰어난 글솜씨로 유명해서 ‘허씨 5문장’이라고 불렸어요.

허난설헌이 살았던 조선 시대는 남자들이 우대받는 사회였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유롭게 공부하거나 사회 활동을 하지 못했어요. 또한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들을 잘 키우는 것이 여자들이 해야 할 최고의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였지요. 친구도 마음대로 못 보고, 길거리에 나가서 뛰어놀지도 못했어요. 또, 먼 곳으로 자유롭게 여행도 가지 못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쉽지 않았지요.

그러나 허난설헌은 어릴 때 오빠와 동생과 함께 글을 배웠어요. 그녀는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자주 가족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어요. 특히, 8살 때 지었다고 하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글을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상량문은 집을 지을 때 대들보(건물을 지을 때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지지대)를 올리며 건물이 잘 지어지기를 바라며 쓰는 글이에요. 허난설헌은 신선 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면서 이 글을 지었어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멀리 중국에까지 전해졌어요.

“정말 이 글을 여덟 살짜리 꼬마 아이가 지었단 말인가? 그것도 여자아이가?”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어요. 또한 여동생을 위해 허봉은 자신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유명한 이달을 허난설헌과 허균의 선생님으로 모셨어요. 이달의 가르침 덕분에 그녀의 글솜씨는 나날이 늘었어요. 이처럼 허난설헌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가족들 덕분에 마음껏 재주를 펼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어요.

<강원도 강릉에 있는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

남장하고 남편 될 사람을 직접보다

허난설헌이 열다섯 살 때였어요.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주선했어요. 물론 딸의 의견을 묻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에 여성들은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남자와 결혼해야 했어요. 그러나 허난설헌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버님! 저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습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남편 될 사람을 우리 집에 초대해 주시면, 제가 몰래 훔쳐본 다음에 마음에 들면 결혼을 하겠습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아버지 허엽은 양반 명문가끼리의 결혼이므로 상대방 집안에 예의 없는 행동을 할 수 없다고 했어요. 결국 딸의 간청을 뿌리친 허엽은 혼자서 30리 떨어진 마을까지 가서 예비 사돈집을 찾아갔어요. 그리고 예비 사위인 김성립을 보았어요.

그의 나이는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지요.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 노비가 들어왔어요. 김성립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허엽이 데리고 온 노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허엽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남자 노비는 바로 그녀의 딸 허난설헌이었거든요.

당시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집안의 여성이 예비 시댁을 사전 답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크게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혼도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만큼 문제가 커질 수 있었거든요.

<남장을 한 허난설헌>

허엽은 그날 만난 예비 사위 김성립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허난설헌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어요. 그러나 허엽은 딸의 뜻을 무시하고 결혼을 강하게 추진했고, 결국 허난설헌은 김성립과 결혼하게 되었어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다

열다섯 살에 결혼하여 오빠와 동생 곁을 떠난 허난설헌은 남편 김성립에게서 사랑 대신 질투와 미움을 받았어요. 시를 잘 짓고 아는 것이 많은 아내가 부담스러웠던 거지요. 또한 그녀의 시어머니도 아들이 며느리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며느리를 구박했어요.

김성립은 집 안에 있기 보다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하루는 김성립이 친구들과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김성립의 친구가 허난설헌을 찾아 왔어요. 또 술집에서 김성립이 놀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허난설헌은 친구 편으로 술과 안주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어요.

“낭군님께서는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래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는가.”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각각 한 명씩 두었는데,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자식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이겨냈어요. 또한 시를 짓는 일에 몰두하며 슬픈 마음을 달랬어요.

뿐만 아니라 허난설헌은 세상의 힘들고 외롭게 고통받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시로 나타냈는데, ‘빈녀음(貧女吟, 가난한 여자의 노래)’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에요.

가난한 여자의 노래

얼굴 맵씨는 남들만 못하지 않고

바느질에 길쌈 솜씨 모두 좋건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란 탓으로

중매할미 발을 끊고 몰라라 하네.

춥고 굶주려도 얼굴에 내식치 않고

하루 종일 창가에서 베를 짜나니,

부모님이야 안쓰럽다 여기시지만,

이웃이야 그런 사정 어이 알리요.

밤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짤깍 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

베틀에 짜여 가는 이 비단 한 필 필경

어느 섹시의 옷이 되려나?

가위로 싹둑싹둑 못 마를 제면

추운 밤에 손끝이 호호 불리네,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이 시는 추운 겨울에 손을 곱아가며 옷을 짓는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허난설헌은 이 시를 통해 가난해서 외롭게 살 수 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지요. 이처럼 허난설헌은 서정적인 시풍으로 외로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여성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어요.

그러던 중 불행이 연이어 그녀에게 찾아왔어요. 1580년 그녀의 나이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관찰사로 일하던 중에 병을 얻어 상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애지중지 기르던 그녀의 딸과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고 말았어요. 사랑스런 자식을 하늘나라로 보낸 허난설헌은 다음의 시를 지었어요.

아들딸을 여의고서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소.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의 무덤을 자신이 사는 광릉 땅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만들고 나서 낮은 봉분에 잔디를 심고 어루만졌어요. 훗날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두 아이의 무덤 뒷자리에 묘를 써달라고 했어요.

그녀의 불행은 연이어 찾아왔어요. 임신 중이던 배 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말았어요. 그런데도 남편 김성립은 아내 허난설헌에게 정을 주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녔어요. 허난설헌의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갔어요.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달아 터지면서 그녀를 아프게 했고 힘들게 했어요. 그녀의 어머니가 전라도를 여행하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재능을 끔찍이 아꼈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판하다가 멀리 귀양을 가는 처지가 되었어요.

허봉은 2년 뒤 풀려나 백운산, 금강산 등지로 방랑 생활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어요. 그러다 병이 들어 서울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죽고 말았어요. 친정 집안의 연이은 불행을 바라보는 허난설헌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인 억압과 불행했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 시어머니의 학대와 두 자녀를 잃은 슬픔,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등으로 허난설헌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에 빠졌어요. 한번은 그녀 자신의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고 해요.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이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 때였어요.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유언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해요.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 같은 시를 남긴 허난설헌은 얼마 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우게 했어요. 그리고 친정에 있던 자신의 작품도 모두 불태우라는 유언과 함께 1589년 3월 19일 한양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이렇게 시대를 잘못 만난 조선의 천재 여류 시인은 미처 자신의 재능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어요.

중국과 일본에까지 천재 여류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다

누나의 죽음을 듣게 된 허균은 강릉 집에 있던 허난설헌의 시를 찾았어요. 다시 한번 누나의 시를 읽은 허균은 유언대로 불태우기에는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강릉 집에 있던 허난설헌의 시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허난설헌의 시까지 정리하였어요. 이후 허균은 허난설헌의 시를 모은 『난설헌집』을 펴냈고, 이때 당대 유명한 학자였던 유성룡에게 시집의 머리글을 부탁했어요.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사신이 왔다가 허균을 만나게 되었고, 허균을 통해 허난설헌의 시를 알게 되었어요. 이 사신이 중국에 돌아가서 조선의 시를 소개한 『조선시선』을 펴냈어요. 『조선시선』에 있던 조선의 시들 중에서 특히 허난설헌의 시가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후 1606년 조선을 방문한 명 사신은 허균부터 찾았어요.

“당신의 누나인 허난설헌의 시를 좀 더 볼 수 있습니까?”

“여기 누나의 시를 모은 시집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시를 보신 후에 마음에 드시면 제 누나의 시집을 중국에서 펴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니!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면서도 애틋하게 표현한 시는 난생처음 봤습니다.”

당시 명 사신에 의해 중국에 알려진 『난설헌집』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이후 조선에 온 명 사신들은 앞다투어 허난설헌의 시집을 구해달라고 아우성이었어요. 명을 이어 중국을 차지한 청 때도 허난설헌의 시는 여전히 큰 인기를 끌었어요. 그녀의 시를 암송하는 것이 유행할 정도였어요.

그뿐만 아니라 청 황제까지 허난설헌의 시집을 조선에서 구해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1711년 일본에서도 『난설헌집』이 출판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후 일본의 여성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허난설헌은 조선 시대에 태어난 뛰어난 여류 시인이었어요. 비록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여러 불행을 겪으며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보진 못했지만, 끊임없이 시를 쓰며 이를 극복하고자 했어요. 비록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결국 죽은 뒤에 그의 작품들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지요.

여러분들도 지금의 괴로움에 너무 슬퍼하지 말고, 훗날을 기약하며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길 바라요. 언젠가는 그 노력이 좋은 평가를 받을 날이 올 거예요.

[집필자] 방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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