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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한국사 I 050 조선시대의 외사고(外史庫: 지방에 있는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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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史庫)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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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史庫)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는 고려의 사관(史官)주 01)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內史庫)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1429년(세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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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史庫)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는 고려의 사관(史官)주 01)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內史庫)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1429년(세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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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史庫)


	
    사고(史庫)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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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이 우리들의 손에 있기까지에는 선조들의 피나는 노력과 기록물을 후대에까지 전하겠다는 의지와 산간 지역에 사고를 설치한 혜안이 있었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봉안(奉安)하는 의식을 치룬 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ㆍ전주ㆍ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실록을 보관하였지만, 당시에도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의 분실 위험이 적지 않게 존재했다. 실제로 중종 때는 관청의 노비들이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사고에 화재를 일으킨 적도 있다. 2008년 숭례문이 화재를 당한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조선전기까지 사고는 여전히 지방의 중심지에 있었다. 조정의 안일한 대응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실록의 소실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금 힘을 얻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된 읍치에 자리를 잡은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왜적들의 주요 침입 경로였던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고 사라졌다. 다행히 전주사고에 소장된 실록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전주 지역 유생 손홍록, 안의 같은 이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내장산까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현재에도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의 원본은 오직 1부만이 존재하는 것은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는 지방의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옮겨졌다. 실록을 여러 곳에 분산 보관했기에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이다. 결국 당대인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만 후대에까지 길이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험준한 산지만을 골라 사고를 설치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지역별 안배를 고려하여 험준한 산지에 사고를 배치했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정족산성으로 둘러싸여 보다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사고의 안전한 관리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수호사찰이었다. 험준한 산지 근처에 있는 큰 사찰로 하여금 사고를 관리하게 하 고 이들 사찰에는 특별한 혜택을 부여한 것이다. 강화도의 전등사(정족산사고), 무주의 안국사(적상산사고), 봉화의 각화사(태백산사고), 평창의 월정사(오대산사고)가 이러한 기능을 담당 하였다.

사고는 기본적으로 2개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실록이나 의궤 등 국가의 주요 기록물을 보관하는 실록각(實錄閣) 또는 사각(史閣)과 왕실의 족보류를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의 2개 건물이 그것이다. 또한 사고와 함께 실록을 정기적으로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일을 추진하는 포쇄각과, 실록을 관리하는 건물인 참봉청(參奉廳), 군기시(軍器寺) 등의 건물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사고 주변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여 화재에 대비하였다. 실록각은 2층의 건물로서, 실록은 주로 2층에 보관하였는데, 정족산사고의 경우에는 해풍(海風)을 고려하여 1층의 건물로 만들었다.

일제 점령기 때 4대 사고의 실록들이 모두 조선총독부에 의해 접수되었다가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적상산 사고본은 이왕직 소속의 도서관인 창경궁 장서각에,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1913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 이후 정족산에 보관된 실록은 현재의 서울대 규장각으로 이어졌고,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정부기록보존소(현재의 국가기록원) 부산지소에 보관되었다. 적상산본 실록은 6.25전쟁시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후에 북한에서 이책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이 나온 것으로 보아 전쟁의 혼란기 때 북한에서 가져갔다. 현재는 평양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본 실록은 일본 동경제대에 보관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74책의 실록은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중 27책이 경성제대를 거쳐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고, 2006년 7월에는 동경대에 있던 47책이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조선시대에 사고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방 지도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사고가 설치된 지역의 경우 사고가 그 지방 지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있게 그려져 있다. 이들 지도는 1990년대 이후 사고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 오대산사고, 정족산사고, 적상산고가 원래 사고가 설치된 현장에 복원되었다. 복원된 사고의 현장과 사고 건물을 보면서 우리 선인들이 목숨을 걸며 지켰던 기록 보존의 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 (사진 3점 첨부: 오대산사고, 정족산사고, 무주 지도에 나타난 적상산 사고)

글 : 사진 = 신병주/현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석사, 박사).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의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한국사 전] 과 교육방송의 어린이 역사드라마 [점프]의 자문을 맡았다. 조선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조선시대사학회 연구이사,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사고(史庫)는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초부터 실록(實錄)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고종은 1227년(고종 14)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완성하여 한 질은 개경의 사관(史館)에 보관하고 다른 한 질은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하였다. 고려 조정은 1270년(원종 11) 강화도에서 환도한 뒤에 실록을 일시적으로 불당고(佛堂庫)에 보관하다가 1274년(충렬왕 즉위) 9월, 중서성(中書省)에 사관을 두고 실록을 옮겨 보관하였다.

주 01)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內史庫)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1429년(세종 10)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장의궤(喪葬儀軌)를 충주 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한 것으로 보아 충주 사고가 외사고(外史庫)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고려의 사관(史官) 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內史庫)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1429년(세종 10)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장의궤(喪葬儀軌)를 충주 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한 것으로 보아 충주 사고가 외사고(外史庫)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 계획에 따라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더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이로써 내사고인 춘추관 실록각(春秋館實錄閣)과 외사고인 충주·전주·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史庫)가 운영되었다. 이렇게 정비되어 내려온 4사고는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춘추관·충주·성주의 사고가 불타 버리고 전주 사고본(全州史庫本)만 병화를 면하였다.

전주 사고본 실록은 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 등의 노력으로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해로(海路)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普賢寺別殿)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보현사의 실록을 다시 영변 객사(寧邊客舍)로 옮겨 두었고, 1603년(선조 36) 5월에는 등서(謄書)의 편의를 위하여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실록의 재인(再印)은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이었으나 1603년(선조 36) 7월에 인쇄에 들어가 1606년(선조 39) 4월에 인쇄가 모두 끝났다. 본래 남아 있던 전주 사고본 1질(秩)과 재인본 3질 및 교정본 1질 등 모두 5질이었으므로 이들 실록 5질에 대한 소장처가 논의되었다. 결국 새로이 선정된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을 비롯하여 외사고인 강화·묘향산·태백산·오대산의 5사고가 마련되었다.

내사고인 춘추관 사고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화재로 일부가 불탔고,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 때는 일부가 강화도로 소개(疎開)되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소개되면서 산실(散失)되었다. 외사고는 4사고로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 속으로 옮겨 병화에 의한 소실을 방지하는 데 진력하였다.

강화 사고는 본래 부내(府內)의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있다가 1606년(선조 39)에 마니산으로 옮겨 신설되었고, 1660년(현종 1)에는 다시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사고를 새로 마련하였다. 묘향산 사고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일어나 1633년(인조 11) 정월에 적상산성 안에 사고를 마련하고 수호사찰(守護寺刹)을 지었다.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覺華寺)가 근처에 있었고, 오대산 사고는 상원사(上院寺)와 월정사(月精寺)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다른 외사고들과 마찬가지로 수호사찰을 두고 승려들을 머물게 해서 지키게 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에는 실록을 모두 본래의 사고에서 옮겼다.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종친부(宗親府) 자리에 새로 세워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分室)에 옮겨졌다가,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져 규장각 도서에 있다. 적상산 사고본은 구황실 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보관되어 내려오지만, 산질(散秩)이 많고 6·25 전쟁 중에 분실되었다. 현재는 북한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 사고본은 1910년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1923년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 불타 없어졌다.

조선 후기 사고들의 경우, 그 건축 양식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쪽에 2층 누각식(樓閣式)의 기와집 건물 2동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보(璿源譜) 등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이었다. 사고의 수직(守直)은 조선 전기의 경우 충주 사고에 수호관(守護官) 5인, 별색호장(別色戶長) 1인, 기관(記官) 1인, 고직(庫直) 1인이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외사고들이 산중에 설치되어 불사(佛寺)를 사고의 수호에 정역(定役)시키는 조처가 행해졌다. 그리하여 적상산 사고에는 승군(僧軍)이 20인 내외, 정족산 사고에는 50인, 오대산 사고에는 20인 등이 배속되었으나 시기와 사고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따라서 사고 수호는 수호사찰의 주지(住持)를 예조에서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임명하여 수호 책임을 맡겼다. 조선 후기 사고들의 수호 책임을 맡은 절들을 보면, 정족산 사고는 전등사(傳燈寺), 적상산 사고는 안국사(安國寺),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가 수호사찰이었고, 이곳에 위전(位田)을 주어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경우 외사고의 전반적인 관리 책임은 각 사고마다 참봉(參奉) 2인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하였다.

실록 등의 서책을 꺼내어 말리는 포쇄(曝曬)는 3년 1차의 규식이 있었으나 시기에 따라 기간의 장단이 있었다. 그 밖에 실록의 봉안(奉安)·고출(考出)에도 까다로운 의식 절차가 행해졌으나, 일반적으로 외사고 실록들을 포쇄할 때는 춘추관의 기사관급(記事官級)이 파견되었다. 외사고에 이르면 반드시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사각 앞에서 네 번 절한 다음에 사고문을 열었고, 포쇄가 끝나서 봉인(封印)을 한 뒤에는 사배(四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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