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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 설교마당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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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설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 설교마당 < 연재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본문: 누가복음 16장 1~13절. 이번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해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청지기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청지기 자리를 쫓겨나게 될 경우에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자기를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형편에서 최선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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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풍자적 해석에 대한 재연구 :: 기초학문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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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았으나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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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바이블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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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베델 바이블 하우스 누가복음 16:1-15 ·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청지기의 행동에 대한 주인의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 누가복음 16:1-15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전낙무의 성경 공부용 블로그베델 바이블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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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
µÎ¶õ³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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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 (누가복음 16장 1-13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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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6장 1~13절
이번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해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이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개의치 말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이야기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주인을 속인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체 본문의 구성도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비상시를 대비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작은 일에 충실해야 큰일에도 충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서학자들도 이 구절을 신약성서에서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소위 ‘난해구절’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문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어떤 부자와 청지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이 부자는 부재지주입니다. 부재지주는 모든 행정적인 일을 청지기에게 일임하고, 청지기가 지주와 똑같은 권위로 땅을 관리했습니다. 지주는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또는 한 번도 오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의 지주는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나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지주는 이 청지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런 결정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나쁜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를 더 알아봐야 하고요.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더 좋은 청지기를 구할 수 없다면 함부로 해고할 수도 없습니다. 성서는 이에 관해서 별로 자세한 언급 없이 지주가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청지기는 사정이 아주 딱하게 되었습니다. 실직자는 우선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렇지만 나쁜 소문으로 해고당한 청지기를 다른 부자가 불러줄 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전공을 살릴 수 없다면 이제 막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본문에 보면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옵니다. 청지기 생활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이미 늙은 탓인지 이 청지기는 막노동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방법은 빌어먹는 것이지만 이 청지기는 창피해서 그 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지기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자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을 미리 만들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기름 백말을 빚졌습니다. 청지기는 그 사람에게 계약문서에 오십 말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밀 백 섬을 빚졌습니다. 문서에 팔십 섬으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주인을 속인 겁니다. 그런데 청지기의 이런 행동을 보고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에 해고당한 청지기가 또 다시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는데 주인은 그를 칭찬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예수님은 이 비유 끝에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b절) 이런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도 세상에서 손해 일절 보지 않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잔머리를 얄팍하게 굴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 살아서 되느냐, 믿는 집 아이들이 믿지 않는 집 아이들보다 공부를 못해서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도록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설교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주문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저의 두 딸이 공부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곧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는 합니다. 여러분들도 비슷하게 생각한 생각으로 사시겠지요.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사는 게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인지 늘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우리도 이 세상의 이기적인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지 모릅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청지기를 칭찬하는 본문을 근거로 자신의 그런 삶을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청지기의 행동
이 본문은 난해구절이래서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2000년 당시에는 당연했던 상거래 관습들이 이 이야기 안에 들어오기도 했고, 누가복음 공동체만의 어떤 특별한 신앙적인 문제가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 본문을 기록한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을 속인 청지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어떤 속사정이 있는 건 아닐는지요.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를 자세하게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원칙대로, 또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본문을 원칙대로, 단순하게 보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있게 읽어야겠지요.
계약문서를 새로 작성한 청지기의 행동에서 어떤 윤리적 기준을 찾으려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신앙적인 원칙을 제공합니다. 문서를 위조한 것은 분명히 비윤리적인 행동이지만 그게 본문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따지고 들어가면 그의 문서위조는 범죄행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는 지주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래의 이자가 통상 50~100%나 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고리대금이지요. 그건 유대교의 율법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죄입니다. 청지기는 그 당시에 관행처럼 시행된 과도한 이자를 제자리로 돌린 것뿐입니다. 주인에게 이익이 줄어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법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청지기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청지기 자리를 쫓겨나게 될 경우에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자기를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형편에서 최선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는 9절 이하에 나오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설명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비유와 설명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약간 다릅니다. 겉으로는 약간이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비유에서 청지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를 집으로 맞아줄 것만을 기대했지만, 이 설명에서는 영원한 집으로 맞아준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집은 일상이지만 영원한 집은 종교적 차원입니다.
재물에 관한 설명에서도 역시 이런 차이가 드러납니다. 청지기는 세속적인 재물을 이용해서 자기의 미래를 준비했는데, 예수님은 여기에 덧붙여 참된 재물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루터 성서번역을 따르면 이 두 재물이 극과 극으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재물은 ‘불의한 맘몬’(ungerechte Mammon)으로, 참된 재물은 ‘진정한 것’(das wahre Gut)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세술을 말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청지기가 모든 걸 잃었을 때에 자기를 맞아줄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한 것처럼 제자들도 모든 걸 잃었을 때에 받아주실 분에게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잃는 것은 곧 제자들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죽음에서 우리는 모든 걸 잃습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노력한 모든 대상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이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줄 분은 오직 그분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가 뭐 그리 중요하냐, 살아있을 때 멋지게 사는 게 중요하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 원하신다면 그렇게 멋지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곧 놓아야하듯이 우리도 삶 자체를 곧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리가 곧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젊음과 건강은 우리가 이 세상을 멋지게 사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지만 그게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는 생각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에 모든 걸 걸어두는 사람은 결국 훨씬 큰 절망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성서는 자기집중, 자기연민, 업적주의를 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된 생명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
최소한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저의 설명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러나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거나(9절) 세속의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구절(11절)은 동의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제가 앞에서 루터 번역을 인용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재물을 불의한 맘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은 맘몬이고, 맘몬은 불의합니다. 재물이 사람보다 높이 평가되는 세상이 어떻게 불의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지나가야 할 재물이 군주처럼 받들림 받는 세상이 어떻게 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악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재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재물은 소비될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은 곧 재물을 재물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나가야할 재물을 영원한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재물을 충실하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이 재물은 단지 돈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건강과 외모도 역시 영원한 게 아니라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그것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돈도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에 잠시 머물면서 수단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 목적으로 둔갑되었다는 사실이 심각한 거지요. 성서는 그런 것을 가리켜 우상숭배이며, 바알숭배이고,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것들은 제 위치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 비유에서 가리키고 있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를 영접할 친구,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부자에게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처럼 온전히 거기에 투자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에 집중한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은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을 잘 읽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경건한 생활은 아주 소중하지만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결과이며 태도입니다.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청지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지켜주거나 맞아주지 못할 바로 그 순간에 관한 생각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그 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모든 영혼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그런 자세로 예배도 드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맺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이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잃게 될 순간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비교적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좀 모자라면 가족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취미생활도 있습니다. 나름으로 이 세상에서 즐거운 일들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그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그 순간을 우리가 준비하고 있나요? 우리의 영혼을 바로 그 순간으로 채우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영성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그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고 말입니다. 여기서 재물을 단순히 돈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하려는 모든 열망을 가리킵니다. 그런 열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될 순간에 우리를 맞아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열망을 멋진 삶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를 놓아야 할 오늘 본문의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걸 잃을 때 맞아줄 친구에게 온 영혼을 기울였습니다. 그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분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풍자적 해석에 대한 재연구
본 연구의 목적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해석 방법들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헌학적 연구를 통하여 풍자적 해석방법이 가장 타당성 있는 해석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1) 비유 해석의 개요: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
본 연구의 목적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해석 방법들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헌학적 연구를 통하여 풍자적 해석방법이 가장 타당성 있는 해석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1) 비유 해석의 개요: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비유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인정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공관복음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J.A. Fitzmyer, “The Story of the Dishonest Manager,” TS 25 [1964], 23-45).
이렇게 복잡한 비유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끊임없이 제시되어 왔다는 사실은 이 주제에 대해서 수많은 저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입증해 준다. 그렇게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도 이 주제에 대한 글들이 여러 개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이 비유의 이해에 대한 학자들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 주요 해석 방법에 대한 평가:
그렇다면, 왜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는 것일까? 이 비유를 해석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4가지 주요 주장을 제시해 보자면, ‘전통적 해석’(Traditional Interpreation) ‘사회 경제적 해석’(Socioeconomic Interpretation) ‘사회학적 해석’(Sociological Interpretation) ‘풍자적 해석’(Ironical Interpretation)을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 해석 방법은 각기 강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약점도 가지고 있어서 쉽게 비판에 노출된다. 그 결과 어떠한 견해도 설득력 있게 학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다수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전통적 해석의 결정적 문제점은 점증적(a fortiori argument) 논법이 이 비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또 다른 예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데 있다. 결국은 그 당시 다른 문헌에서 이 같은 주장을 입증해 주는 경우를 발견하지 않는 한 어려워 보인다. 사회 경제적 해석의 경우에는 그 당시 풍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자료의 발견이 절실하며, 사회학적 해석의 경우에는 사회-경제적 해석이 갖는 어려움과 더불어 1-2절의 행위를 불의한 행위로 규정하는데서 난점이 발견된다. 이상의 세 가지 견해의 약점을 해결될 방안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풍자적 해석의 경우에는, 복음서의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흐름-불의를 용납지 않고 결코 칭찬할 수 없는 흐름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며, 5-7절의 행위를 불의한 행위로 보면서도 점증적 논법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확실치 않은 당대의 관습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 다만, 결정적 약점으로 지적된 풍자적 요소의 결여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다.
3) 풍자적 해석의 근거 제시- 문헌학적, 언어학적 연구:
풍자적 해석의 문제점은 ‘천막’과 ‘영원한 천막’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을 통해 가능하다. 위에서 ‘영원한 천막’과 관련하여 풍자적 뉘앙스를 제기한 학자들은 헬라어 단어 ‘천막’과 희랍어 표현 ‘영원한 천막’에 대한 문헌학적, 언어학적 고찰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제 문제는 ‘영원한 천막’이라는 표현이 문헌학적, 언어학적으로 볼 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가에 맞추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천막’이 ‘전정한 불멸의 거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풍자적 해석은 폐기 되어야 한다. 반대로, ‘영원한 천막’이 ‘사라져 버릴 천막’을 나타낸다면, 풍자적 해석은 힘을 얻는다.
따라서 본 연구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통하여 풍자적 해석이 과연 최상의 해결책인지 밝혀보고자 한다.
눅16:1-13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질문]목사님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13절 말씀을 해석해주세요. 전에도 난해하게 여겨지던 말씀으로 새벽 기도 기간 중에 다시 듣게 되었는데 제가 기대했던 말씀들을 듣지 못해서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사이트에서 말씀별로 나와 있는 곳에도 그 장은 없기에 꼭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눅16:1-8a)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8b-13)
[답변]이 기사는 대표적으로 난해한 구절로 꼽힙니다. 그 이유는 언뜻 보면 예수님이 누가 봐도 도덕적으로 분명히 악한 행위를 지혜롭다고 칭찬하고 또 신자들도 그런 점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성경을 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문(text) 안에서의 문법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문자적 의미는 무시하고 곧바로 윤리적 영적 의미만 유추, 적용하려 드는데 잘못입니다. 문법적 분석이라고 해서 문자적 해석에 억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해석된 바탕 위에서라야 나머지 도덕적 영적 의미의 유추도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해석이 정확하게 파악된 연후라야 문맥상에 연관된(contextual) 의미의 도출도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비유
본문은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어떤 사안을 설명한 후에 그 비유를 풀어서 해석 적용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비유 부분과 그것을 해석 적용한 부분으로 나눠야만 문법적 해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대개 1-8절과 9-13절의 둘로 나누는데 저는 특별히 8절 한절을 중간에서 반으로 나눴습니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으로 비유는 끝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는 구절은 주인이 그 종을 칭찬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비유의 내용을 한 마디로 결론내린 말씀으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단지 설명의 방편으로만 사용합니다. 그런 칭찬을 행한 주체가 문법적으로 누구인지는 사실상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칭찬의 내용이 “이 세대의 아들과 빛의 아들”로 대비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 주인보다는,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 안에 이미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단락의 구체적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성경의 비유, 특별히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의 역할과 해석법등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比喩, parables)란 단어 뜻 그대로 어떤 사안에다 그와 비슷한 사안을 평행으로 대비해 원래 사안의 의미를 더 명료하게 전하고자 하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화자(話者)가 강조하려는 요점을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함으로써 이해에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를 통해선 무엇보다 화자가 강조하려는 초점을 건져내어야하지 비유 자체의 의미에 집착해선 안 됩니다.
또 비유에는 필연적으로 몇 가지 특성이 나타나는데 해석도 그 특성에 맞추어 행해져야 합니다. 첫째 단순성(單純性)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강조하려는 요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 그 메시지가 간결하고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오묘한 천국 복음을 모든 세대에 걸쳐 쉽고도 정확하게 전달해 주어서 오래 기억에 남도록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친밀성(親密性)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생활이나 환경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예로 삼기에 현장에서 그 비유를 듣는 자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후대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심오한 내용과 진리를 구체적인 현실사안에 빗댐으로써 구상성(具象性)이 나타납니다. 이해를 돕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되 무엇보다 자신이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에도 구체적인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 특성은 모든 문학적 비유에 다 해당되지만, 예수님의 비유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중성(二重星)입니다. 전하는 의미가 아주 심오해서 영적으로 이중적,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비유의 기본적 특성인 단순성과 배치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비유를 자주 사용한 목적과도 위배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0-13)
단순하고 친밀하며 구체적인 비유임에도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는 제자들처럼 듣고 깨닫는 자가 있는가 하면 끝까지 그렇지 못한 자도 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의미는 알아들었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궁극적으로는 천국 비밀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성령의 감화로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열린 자는 순수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렇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자들은 완악하게 거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래서 비유를 더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
예수님이 보이신 권능과 이적에는 환호하며 따랐던 수많은 자들이 막상 당신의 복음 전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종교 특권층들은 드러내놓고 반발, 비방, 멸시하며 일관되게 대적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태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의 선지자가 이미 다 예언한 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시고 복음을 인간적 사상과 철학으로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로 성령의 조명으로만 이해할 수 있게 더욱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원칙 몇 가지가 드러났습니다. 우선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일이라 쉽게 알아들었던 현장에 있던 청자(聽者)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미 말한 대로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을 간단명료하게 추출해내어야 합니다. 비유 전체를 일일이 축자적(逐字的)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강조점이 천국 비밀을 가르친다는 관점에서 재검증하되 앞뒤 문맥과도 연결하여 주님의 진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은?
당시의 청지기는 단순히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도맡아서 실제로 투자 운영하는 일까지 맡았습니다. 주인의 도장도 지니고 있으면서 모든 계약을 주인의 이름으로 맺을 정도였습니다. 지혜롭고 성실하며 충성된 종을 둔 주인은 오히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며 자식 이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 그런 직분을 맡겼습니다. 물론 맡은 권한이 많은 만큼 조금만 마음을 잘못 먹으면 부정을 저지를 소지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재산을 도맡아 관리 운용하는 그런 청지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1절)고 합니다. 주인이 시킨 대로 한다면 허비를 해도 주인의 잘못이기에 그를 해고하기는커녕 탓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또 채권증서를 본인이 소지하고 있으면서 자기 임의로 고칠 즉, 상거래 계약을 갱신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단순히 재산을 운영하여 증식함에 정세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면 주인에게 이실직고를 했을 것입니다. 또 사전에 위험 부담이 있는 계획이었다면 주인과 상의 내지 통보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말이 어찜이뇨”라고 따진 것을 보면 이미 청지기가 자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유용, 횡령, 착복한다는 사실을 주위에선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주인은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명했습니다. 관리하던 재산을 전부 공정하게 계산해서 되돌려 주고 청지기 직분을 그만두라는 해고명령이었습니다. 청지기란 자식보다 더 믿는 자라야 맡기는데 해고할 정도라면 그가 상당한 부정을 저지른 것이 확실합니다.
졸지에 해고를 당한 청지기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육체노동을 할 계제가 안 되고 특별한 기술도 없으며 거지 노릇은 더더욱 할 수 없어서 자기 살 길을 궁리했습니다. 채무자를 일일이 불러서 소지하고 있던 채권증서에서 채권금액을 까주기로 했습니다. 그럼 신세를 진 채무자들이 자신이 퇴직한 후에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거나, 혹은 그 활인금액을 서로 나눠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다 재산과 장부 일체를 되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동안 자기가 허비한, 사실은 착복한 만큼을 감해서 장부상으로도 부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금액을 끼워 맞추는 작업을 했습니다. 횡령에 대한 물적 증거를 없앤 것입니다. 채권증서를 자기가 변조 수정하지 않고 채무자더러 자필로 다시 쓰라고 한 까닭입니다. 주인의 인감도 맡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산과 장부를 되돌려 받은 주인으로선 시중에 떠도는 루머와 자기 짐작에 따른 심증은 분명 있지만 물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가 지혜 있게 일을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행이나 업적을 높여주는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성경도 “이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청지기이지만 자기 앞날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영악하게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비유 자체가 의미하는 바에 관심을 두어선 안 됩니다. 비유란 정작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명료하게 이해시키는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더러 그런 행동까지 본받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후반부에서 정작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을 이 비유에 비추어서 진지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관점은 오히려 청지기의 잘못을 세밀히 잘 파악하여서 절대 그대로 따르지 말라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주인이 분명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설마 이런 청지기를 닮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단연코 아닐 것 아닙니까? 주인을 우습게 알고 무시한 청지기가 오직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만 재물을 잘못 사용했기에 충성된 청지기는 재물을 맡긴 주인을 위해서만 재물을 운용해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신 뜻이 애매한 것입니다. 우선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니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도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친구를 사귀라고 했으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번 돈이라도 장래를 대비해 주변 사람들을 잘 대접하라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나중에 그 보상으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라고 하니까 더욱 모호해집니다.
이런 오해들은 성경본문을 건성으로 읽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서두에 가장 먼저 문법적 분석부터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문법적 분석이라는 것이 다른 것 아닙니다. 문장의 정확한 뜻부터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앞뒤 문장과 연결된 자연스런 흐름도 추적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문장이 스스로 표명하고 있는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성경을 읽고 치웁니다.
나아가 문법적 해석은 생략한 채 무조건 윤리적 영적 교훈만 찾으려 듭니다. 마치 도덕적 영적 해석이 더 우월하고 정확한 해석인양 착각합니다. 그러니 본문의 경우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걸려서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자증(自證)하는 정확한 의미를 벗어난 채 도덕적 영적 교훈을 먼저 세운 것이 이단의 오류인데도 말입니다.
바로 앞 문장 즉, 예수님이 비유의 결론으로 내린 말씀부터 다시 봅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은 불신자와 신자를 대비하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수식어로서 더 지혜로운 요소가 작동되는 영역에 어떤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불신자들이 이 땅에서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법에선 신자들보다 아주 영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수로 지칭했습니다. 청지기뿐만 아니라 그의 부정에 기꺼이 동참한 채무자들도 함께 포함시킨 표현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안일과 풍요만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쓴다는 것입니다.
또 비유에서 부자는 하나님을, 청지기와 채무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그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함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뜻대로 살려는 신자들은 청지기와 그 공범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물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쓰라고 일시적으로 맡겨주신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번 돈이라고 해도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여건 전부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이 땅을 전부로 보는 사상입니다. 자기 안일과 풍요만을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사랑하여 모으고 씁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인식이 전혀 없기에 자기 능력이 뛰어나 번 것으로 착각합니다. 자기를 위해 이 땅에만 쌓아놓은 재물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도적과 동록이 번창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 자신의 생명마저 앗아갈지 모릅니다.
그럼 신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시대가 아닌 하나님의 시대에서” 사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가 있으며 오히려 그곳을 더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성실하게 모으고 정직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또 재물은 어제 있다가도 내일 없어질 것이며 영원한 것이 절대 되지 못합니다. 재물 그 차제로는 절대로 하늘의 보물로 쌓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자기 안일과 풍요가 아닌 하나님이 쓰시라고 하는 곳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처럼 마지막 문장을 포함한 비유만 조금 더 정확히 살펴봐도 예수님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거의 다 나온 셈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뜻도 자동적으로 명확해집니다.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쓰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불의한 재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시대만 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의 재물은 불의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시대를 사는 빛의 아들들은 그 불의한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여 의로운 재물로 바꿀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번 재물로만 꼭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비유의 청지기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이해타산에 맞는 상거래를 한 것뿐입니다. 서로 진심을 주고받으며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재물을 사용하면 의의 재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청지기인 빛의 아들들에 돈을 맡기신 뜻입니다.
친구라고 해서 단순히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에 항상 천국의 비밀을 담았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말씀들 안에도 서로 연관되는 뜻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이웃 즉, 친구의 범위를 예수님이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사회적 신분, 위치, 권세, 재물, 계급 등에 전혀 차별대우를 두지 말고 누구라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자들을 자기 가진 소유를 사용해 성심껏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는 당연히 천국입니다. 없어질 때라는 표현에는 무엇이 없어지는지 그 주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물(의 효능과 의미가)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생명이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간에 어쨌든 신자가 죽어 천국 갈 때인데 이어지는 말씀과도 뜻이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사귄 친구들이 신자를 천국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표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신자가 그렇게 섬긴 일로 인해서 천국가게 되거나, 그렇게 섬김으로써 도움 받은 자도 빛의 자녀가 되어서 함께 천국에 가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행이 조건이 되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빛의 아들들 즉, 구원 받은 자들이 재물을 어떻게 운용해야할 지에 관해서 가르치는 중이지 않습니까?
바로 앞장에서 예수님은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의 하나님의 기쁨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되찾은 열 드라크마와 돌아온 탕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6장에선 재물에 관한 세 가지 강화를,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말씀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하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전체 문맥상의 의미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후로 지녀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물론, 정말 당신의 은혜를 아는 참 신자라면 자연히 그런 물질관(物質觀)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고 참된 것에 충성하라.
그런데 예수님의 재물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빛의 아들들에게 정작 가르치고 싶은 내용은 지금부터입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사실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문장이 스스로 나타내는 의미만 살펴도 그런 뜻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고 합니다. 그럼 논리적 흐름 상 재물은 참된 것이 당연히 아니며 동시에 참된 것을 맡아 충성하는 것이 큰 것에 충성하는 일이 됩니다. 역으로 따지면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럼 크고 참된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정작 충성해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다시 문장의 의미를 순서대로 추적해 들어가 봅시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지금 예수님이 처음 비유를 들 때부터 지금까지 또 마지막 결론격인 13절에 이르도록 의도적으로 두 가지 사물을 일관되게 대조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한쪽은 남의 것에 충성하는 일인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또 그것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유에서 청지기가 부자 주인이 맡긴 재산을 주인 뜻대로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부정하게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외면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를 지혜롭게 사는 방안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하지 못한 실패를 범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조되는 다른 쪽은 크고 참된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은 영원한 시대를 살기에 남이 맡긴 지극히 작은 재물에도 당연히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크고 참된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크고 참된 것을 지금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재물은 결코 너희의 것이 아니며 진짜 충성해야 할 너희의 것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결론을 보십시오. 집 하인이 두 주인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너희의 것이자, 크고 참된 것이자,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자, 없어지지 않을 것이자, 영원한 처소의 주인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그런 주인으로 확고히 모시고 있는 자에게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자, 나의 것이 아닌 맡긴 것이자, 그것으로 이웃을 섬겨야 할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이 말씀도 당시의 사정을 알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에게 복수의 주인들이 있었듯이, 하인이 때로는 실제로 두 주인을 섬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다른 한 주인에게는 여전히 종으로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복수의 주인을 섬기다 보면 아무래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주인을 더 성의껏 섬기려 들게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려 해도 동일한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재물이 하나님보다 현실에선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안락에 유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잘 인도해주실 때는 몰라도 환난이 조금만 닥쳐도 그분을 의심 불신합니다. 그러나 돈에 대해서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도 솔직한 그 속내를 따지면 재물을 더 얻고자 하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어떻게 밝혔습니까?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6:24) 반드시 자기가 더 좋아하는 쪽으로 쏠리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했지 않습니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보물이라고 즉,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와 그 해석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결론까지 다 듣고 난 바리새인들이 보인 반응을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3:14)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과 경건에선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합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이중성이 여실히 입증된 사례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고 들으면 그 뜻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오히려 복음의 비밀이 그들에게 가려진 것입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예수님의 초대의 손길을 거절, 아니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음이 완악해져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절)
그들 마음의 보물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는 것은 뒷전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게 된 종교적 권세를 이용해 역으로 사람들로부터 교묘하게 돈을 긁어내어서 모으기에 바빴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처럼 자기 시대에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를 위해 돈을 쌓아가는 이 세대의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무보다 숲을 먼저 보라.
마지막으로 첨언할 것이, 사실은 재차 강조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 원리 중의 하나는 반드시 숲을 먼저 본 후에 나무를 보라는 것입니다. 먼저 숲을 보면 나무도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지만, 나무에만 시야를 한정시키면 전체 숲이 어떤 것이지 종잡을 수조차 없습니다. 전체 대의를 먼저 파악한 후에 세부적인 구절의 개별적 의미를 따져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함에선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본 사안이 아닙니다. 본건의 의미를 명료하게 단순화시켜서 강조하기 위한 보조 사안입니다. 또 모든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천국 복음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그것도 일부 부분만 붙들어서 영적으로 해석하려 시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청지기가 불시에 닥친 환난을 자신의 지혜를 전부 동원해서 잘 이겨내었기에 우리도 어떤 환난이 닥쳐도 절대 당황하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피할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권하는 것입니다. 환난 때에 당황하지 말고 지혜를 동원해 이겨내라는 권고 자체는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아주 좋은 충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몰라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아니 상식적으로 아는 내용입니다. 구태여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질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본문 비유를 두고 환난이 닥치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 이겨내라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도 나무를 보는 해석일 뿐입니다. 전체 대의는 신자가 지녀야할 물질관에 관한 것이지 환난을 이겨내는 방법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또 지극히 적은 것에도 충성해야 더 큰 것을 맡긴다는 구절만 인용하여서 흔히들 교회에 물질로 잘 봉사하면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축복한다는 식으로도 해석합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해석으로 절대 금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의 복음을 물질로 잘 섬겨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는 물질 복음으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교회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또 더 큰 것이 문법적 해석만으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복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라는 것이 밝혀졌지 않습니까?
심지어 불의한 재물이라는 한 구절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은 불의한 것이고 악의 근원이므로 신자는 아예 멀리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돈 자체에는 선악간의 의미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 자체는 결코 불의한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질 뿐입니다. 빛의 아들이 정직하게 재물을 벌어 그분 뜻대로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하면 의로운 재물이 되지만 옳지 않는 청지기 식으로 운용하면 불의의 재물이 됩니다.
나아가 기독교는 재물을 아예 부인하는 염세적 가치관은 완전히 배격합니다. 하나님은 물질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구현할 영육간의 삶 양쪽을 다 귀중히 여깁니다. 인간에게 고급한 지정의를 부여해서 당신 대신에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게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육체적 물질적인 것은 천하고 더러운 반면에 정신적 영적인 것만 선하고 귀하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잘 운용하여서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그분의 공동체를 이루면 그에 사용된 물질은 너무나 선한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위의 몇 가지 해석 예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자, 비유라는 특성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본문 기사의 요체는 마지막 결론 즉, 신자는 절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한 말씀에 다 모여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신자가 세상에서 빼앗기지 않고 영원토록 섬길 수 있는 신자의 절대적 소유입니다. 재물은 오직 그 주인을 충성되게 섬길 수 있는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지극히 작은 것일 뿐입니다.
재물이 커져 보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작아 보이거나, 하나님을 재물을 얻는데 도움 얻는 종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비유에 나타난 청지기와는 재물에 대한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서 정반대의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이 뜻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 안에 든 자에게는 그 아들과 함께 하늘에 속한 모든 좋은 것으로 풍성히 주십니다. 이제 빛의 아들이 된 신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합니다. 그럼 나머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지는 그분께서 다 아시기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다 채워주십니다. 정말로 그분께서 우리 것으로 주신, 바로 그분 당신만을 평생토록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11/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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