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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폭군으로 기록된 비운의 왕 15대 ‘광해군’ 굴욕의 왕 16대 ‘인조’ l 15분 순삭 조선 역사이야기 8편
[조선왕조실록] 폭군으로 기록된 비운의 왕 15대 ‘광해군’ 굴욕의 왕 16대 ‘인조’ l 15분 순삭 조선 역사이야기 8편


광해군 가계도│왕위 계승과 폐위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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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가계도│왕위 계승과 폐위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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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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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생애[편집]

시조[편집]

기타[편집]

가족 관계[편집]

광해군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조선 광해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 광해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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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가계도,화인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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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가계도 화인 옹주

광해군 가계도,화인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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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왕 광해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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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왕 광해군 가계도 본문

조선 15대 왕 광해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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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가계도 폐위이유,연산군 가계도 폐위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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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가계도 폐위 이유 연산군 가계도 폐위 이유

광해군 가계도 폐위이유,연산군 가계도 폐위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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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계보/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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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계보 가계도

광해군 계보/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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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16대 왕 선조, 광해군, 인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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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16대 왕 선조 광해군 인조 가계도 본문

조선 14대~16대 왕 선조, 광해군, 인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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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다식 백과사전 :: 선조 가계도 광해군 공빈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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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 광해군 공빈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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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다식 백과사전 :: 선조 가계도 광해군 공빈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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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who? 한국사 광해군: 후 who? 한국사-29 – 박현비 – Google Sá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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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st searched keywords: Whether you are looking for 후 who? 한국사 광해군: 후 who? 한국사-29 – 박현비 – Google Sách Updating “명나라를 섬기던 사대주의를 버리고 과감히 실리 외교를 추진한 군주, 광해군을 만나다” 1592년(선조 25년), 일본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세자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명을 받아 전쟁터를 누비며 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며 활약했습니다. 또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하면서 다시는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 받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어요. 어렵게 전쟁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전쟁으로 무너진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상황에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명과 후금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도 지혜로운 외교를 펼쳐 조선의 피해를 최소화하였지요. 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선과 조선 백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습니다. 임진왜란 전후의 조선 사회와 조선의 국제 관계 광해군이 즉위하기 전인 선조 때부터 조선의 조정은 붕당 정치의 폐단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사림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다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으며, 또 북인들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익과 명분을 가지고 대립했어요.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각 당파에 골고루 관직을 내리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도 뿌리 깊은 당파 간의 갈등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당파들 간의 갈등과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던 조선 관료들에 의해 광해군을 왕위에서 쫓아 낸 ‘인조반정’이 일어납니다. 그 이후의 역사는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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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who? 한국사 광해군: 후 who? 한국사-29 - 박현비 - Google Sá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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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가계도│왕위 계승과 폐위

​광해군 가계도│왕위 계승과 폐위

광해군은 선조(제14대 왕, 1552~1608, 재위 1567~1608)와 후궁 공빈 김씨(1553~1577)의 둘째 아들입니다. 선조는 정비인 의인왕후(1555~1600)와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빈 김씨와의 소생인 임해군(1574~1609)을 세자로 삼으려 했지만 성격이 포악하다 하여 보류됩니다.

선조는 총애하던 후궁 인빈 김씨(1555~1613)의 아들 신성군(1579~1592, 본명 이후)을 임해군과 광해군을 뒤로하고 세자로 책봉하려 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광해군(제15대 왕, 1575~1641, 재위 1608~1623, 본명 이혼)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신성군은 선조와 의주로 피난을 가다 사망합니다. ​

임진왜란이라는 혼란 속에 왕세자가 된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의병들을 격려하고 전쟁 물자를 모아 민심을 수습하는 등 활약을 펼칩니다. 백성들은 광해군을 따랐으나 선조는 광해군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세자를 결정하는 데는 명나라의 허락이 있어야 했는데 명은 서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51세에 서른두 살 어린 19세의 인목왕후 김씨(1584~1632)를 계비로 들이고, 2년 후에 영창대군(1606~1614)을 얻습니다. 영창대군은 적자인데 광해군은 후궁의 아들인 서자로 정통성에 차이가 있습니다.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놓고 선조 말에 이이첨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의정 유영경을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뉩니다. 선조는 어린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대북의 주요 인사들을 유배형에 처합니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를 합니다. 영의정 유영경은 인목왕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설득하나 현실성이 없다하여 거절합니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두 살이었습니다. 소북의 우두머리였던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가 죽으면서 광해군에 내린 선위 교서를 광해군의 계승을 방해할 목적으로 공포하지 않고 감추었던 것이 알려져 죽임을 당하고 소북은 몰락합니다. 그리고 이이첨의 대북파는 권력을 잡게 됩니다. 1592년 세자가 된 광해군은 1608년 16년 만에 왕위 계승을 합니다. ​

광해군은 1608년 즉위 후에 편이 되어주었던 정인홍, 이이첨, 허균 등의 대북파를 등용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 전란 극복을 위한 합심이 필요한 상황이라 이조판서, 이조전랑, 승지는 대북에게 주고, 남인이였던 이원익에게 영의정 자리를 주고 서인 이항복을 좌우정으로 발탁합니다. 남인, 서인, 북인의 연립 정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전란 복구에 성과를 거둡니다.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 지역에 실시된 대동법, 토지조사사업인 양전 사업, 동의보감 편찬 등 광해군의 업적은 즉위 초에 집중됩니다.

하지만 문묘 종사로 당파간 충돌이 발생하며 연합정권은 흔들립니다. 대북 정인홍이 북인의 영수 조식을 문묘에 종사하려는 것이 실패합니다. 그러자 서인 이언적과 동인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함으로써 서인과 동인 모두 적이 됩니다. 소수였던 대북은 고립이 됩니다. 여기에 광해군은 이이첨 등 대북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유패합니다. 아버지 김제남도 반역죄로 죽입니다. 이복동생 영창대군도 역모 연루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1613) 시키고 이듬해 귀향지 관리인 강화 부사 정항에 의해 아궁이에 불을 지펴 뜨거운 증기로 쪄 죽이는 증살을 당합니다.

효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폐륜을 저지른 대북의 적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습니다. 서인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1623)하고 인조(제16대 왕, 1595~1649, 재위1623~1649)를 추대합니다. 이것이 인조반정 입니다. 이이첨은 인조 대에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서인에 의해 제거됩니다. 인조반정으로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됩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해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영화에 대해서는 광해, 왕이 된 남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 )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재위: 1608년 ~ 1623년)이다.

임진왜란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분조[1]하여 의병을 이끌었다. 즉위 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취하였으며 전후 복구와 대동법의 실시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잦은 옥사와 중립외교,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한 일로 인해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2] 연산군에 이어 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세 번째 왕이기도 하다.

개요 [ 편집 ]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 때에는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왕의 견제로 호성원종공신이나 선무원종공신에도 책록되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3]

생전에 폐위되었기에 사후 시호는 없으며, 임금이었을 때 신하들이 올린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다.[4]

생애 [ 편집 ]

초기 생애 [ 편집 ]

출생과 성장 [ 편집 ]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김희철의 딸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光海君)에 봉해졌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하였지만,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기뻐했던 부왕 선조는 왕자들도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하여 원종공신록에 넣는다. 광해군도 이때 친형 임해군 진, 이복동생 신성군 후, 정원군 부, 순화군 보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세자 건저의 문제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건저의 문제 입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는 후궁 인빈 김씨를 총애했기에 그녀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5]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으나, 서얼이라는 열등감이 있었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1591년,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자 대신들은 더 이상 후계문제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자첵봉 문제를 논의했다. 논의 끝에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죄의정 정철 등은 함께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하기로 결정했다.[6] 그러나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이를 이용해 계략을 꾸몄다.[7] 선조가 신성군을 영두에 두고 있음을 알았던 이산해는 이번기회에 지난번 기축옥사(1589)로 동인들이 당한것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정철과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산해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동의 한 뒤,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에게는 서인들이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은밀히 전했다.[8] 이런 사실을 선조는 인빈 김씨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다. 또한 이산해는 병을 핑계삼아 주청을 하기로한 날에 경연에 불참하였다.[5]

이산해가 계략을 꾸미는 줄도 모르고 정철은 경연중에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했다. 선조는 진노하며 정철을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버렸다.[9][10] 이후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다. 선조가 정철과 서인의 처결문제를 동인들과 의논을 할때에 동인들은 의견이 갈려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11] 남인들은 온건한 처결을 주장했으나, 북인들은 강경한 입장을 표방했다. 지난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때 정철 등 서인들에게 크게 화를 입은 동인들이 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이번 기회에 복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기축옥사때 서인들이 동인을 누르고 집권했었으나 이번 일로 인해 동인들이 다시 득세하였다. 이후 세자책봉 문제는 거론할 수 없는 금기 사항이 되었다.[12]

세자 시절 [ 편집 ]

임진왜란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임진왜란 입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 1598년 임진왜란이 종전되었지만,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없다.

왕위 계승 [ 편집 ]

1600년에 의인왕후가 죽은후 1602년에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었다. 1606년, 그녀가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부왕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13] 선조 자신이 서얼에다가 방계승통을 했다는 열등감으로 인해 정국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애 18세 나이로 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고군분투하여 내외의 신망을 쌓은 광해군을 폐하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었다.[14] 임진왜란을 거치며 정권을 잡은 북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유영경 등은 적통론과 광해군이 명나라의 고명(誥命)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을 지지하며 소북(小北)파를 이루었고, 정인홍 등을 중심으로한 대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였다.[15]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영창대군이 너무 어린점을 들어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유영경이 이 교서를 자기집에 감추었다가 후에 발각되었다.[16][17] 대신들이 유영경의 처벌을 주청하였으나 미처 처결을 결정하지 못한채로 선조가 갑자기 사망해버렸다. 독살설이 나돌기는 했지만 이는 인조반정후 반정세력이 퍼뜨린 것으로[18] 독살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선조가 죽자 왕위계승 결정권은 인목왕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이 영창대군을 즉위시킨후 수렴청정 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목왕후는 현실성이 없다는 판단하에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한글교서를 내렸다.[17][19] 1608년 음력 2월 2일, 광해군은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이후 [ 편집 ]

즉위 초기 [ 편집 ]

1608년 천신만고 끝에 즉위한 광해군은 이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광해군을 정통으로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 하였다.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포함하여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들과 서인계 인사들을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초기에는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대북파의 반발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잇단 탄핵으로 처형되고, 소북파는 대북파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으며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20]

산림 숭용 정책을 추진하고 재야의 선비들을 채용하려 하였으나 곽재우, 정인홍 모두 고사하거나 취임 후 사직 상소를 한 후 내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은 뒤에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관직에 올라 북인 정권의 막후 실력자가 된다.

일본과 수교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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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에 일본과 수교를 단행하여 국교정상화 조치를 취했다.[21]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선조 31)에 죽은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은 임진왜란에 반대하여 군사를 파병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수교를 요청하했다.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를 내세워 159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끈질기게 요청해왔다. 조정 대신들간에 찬 ·반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측이 매우 적극적으로 나오자 일본의 진의 파악하고자 노력한후 조선에게 유리한 조건 아래 허용하는 안을 추진하였다.[22] 광해군은 수교의 선행조건으로 국서를 일본이 정식으로 먼저 보낼것과 임진왜란 중에 성종, 정현왕후, 중종의 무덤 훼손한 범인 인도 등을 요청했는데, 일본이 이를 충실히 이행하자 교섭에 임하여 수교하였다.[23]

국방과 외교정책 [ 편집 ]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 강홍립은 명나라군이 사르후,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였다. 부차 전투(이상 3월)에서 조선군의 주요 지휘관이 전사하고 병력의 2/3가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를 후금에 전달하여 본의 아닌 출병 이었음과 전쟁을 원치 않는 다는 점을 후금에 알렸다. 이와 같은 실리외교를 펼쳐 후금과의 갈등을 피해갔다.[24]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펼치자 서인세력들은 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점을 망각하는 배은망덕한 일이라며 크게 반발하였다. 1622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의 주둔하자, 긴장감이 갈수록 높아졌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현재 사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편이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은 혼군(昏君), 즉 판단이 흐리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평가되었었다.[25] 그러던것이 1933년에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시대의 만선관계》라는 저술에서 광해군이 실용적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긍정적 평가를 한이후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만큼은 대체적으로 후하게 바뀌었다.[25] 물론 내치의 붕괴로 인해 소극적인 외교를 펼친 결과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민생과 문화 [ 편집 ]

임금이 된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을 지어 경제가 파탄났고, 이 점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명기 교수 조차도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 정책을 궁궐 공사로 모두 말아 먹었다” 라며 비판한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서 쌀로 조세를 내도록 함으로써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는 조세개혁인 대동법을 시행했다.[26] 1611년 양전 사업을 벌였다고 하나 선조 대의 계묘양전, 인조 대의 갑술양전 이외에는 양전을 시행한 기록이 없다. 이어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고 인경궁을 설치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한의학책인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왕권 강화책 [ 편집 ]

정적 숙청 [ 편집 ]

1609년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과 1613년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과 북인은 인목왕후의 의인왕후 능(陵) 저주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김제남은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는 하나, 광해군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였고, 투명하지 못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주기도 하였다.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방바닥을 매우 뜨겁게 만들어 열기 때문에 죽었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런 처결은 훗날 서인에게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과 이이첨 일당은 영창대군 살해 시점 직후부터, 각종 조작설과 허균 등을 비롯한 강경파 관료,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릴레이를 펼치며 끊임없이 인목대비 폐비 공작을 전개하였다. 결국 인목대비를 1618년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궁궐 복원 공사 [ 편집 ]

무리한 토목 공사를 연이어 강행하여 궁궐 복원 등으로 백성들의 민심도 이반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광해군은 그동안 자신이 임진왜란 때부터 쌓아왔던 일반 백성의 민심을 점차 잃게 되었다.[27] 또한, 측근들의 월권과 부패가 문제시 되었으며, 궁궐 복원 과정에서의 자금 문제도 민심이반의 원인이 되었다. 광해군 집권 당시의 실권자 이이첨, 유희분, 박승종은 부원군 칭호의 ‘창’자를 따 3창 부원군이라 일컬어졌다. 일부 신하들과 후궁들 사이에서는 뇌물로 벼슬을 팔고 사는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서 서인과 반정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명분을 주게 되었다.

측근들의 권력 남용 [ 편집 ]

광해군 재위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 허균 등은 무수한 옥사를 일으켜 반대파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28] 이같은 행위들은 성리학의 도덕주의, 도의 정치, 왕도 정치를 기본 이념으로 삼던 조선 사대부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이첨과 정인홍이 무리하게 능창군의 역모와 영창대군의 옥사를 주관하고, 1617년부터 인목왕후의 폐모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사림의 반발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옥사를 일으킨 또 다른 주역인 허균 역시 다른 주역인 이이첨, 김개시 등에게 처형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광해군은 처음 반정을 접하고 이이첨의 반역으로 오해하였으며, 한편 김개시는 인조반정 직전 정보가 누설되어 반정 세력들을 검거할 수 있었음에도 반정 세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등 광해군 정권에 결정적인 위해를 끼쳤다.

폐위 이후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인조반정 입니다.

1623년 3월 14일 새벽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서인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을 받들어 ‘반정’을 단행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이들은 광해군을 인목왕후 앞으로 끌고 가 정죄한 뒤 유배시켰다. 인목왕후는 광해군과 폐세자에 대한 처형을 주장하였으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廢母殺弟)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반정을 마무리 짓게 된다.[29] 곧 반정군에게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은 죽고, 40여 명의 관리가 구금된다.

광해군은 폐위 후 폐비 유씨, 그리고 폐세자 지와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29] 울타리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 후인 5월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탈출에 실패하고 자결하게 된다. 그때 폐세자는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고, 인조는 그 소식을 듣고 한 달 뒤인 6월 사촌동생인 폐세자에게 자진을 명하고, 폐세자 질은 그 명에 따라 자진한다. 한편 폐세자빈 박씨는 남편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나무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가 사흘 뒤에 깨어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29] 그해 10월에 부인 유씨와도 사별하는데, 유배 생활 중의 화병이 원인이었다.[30]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해 그를 충청도 태안으로 옮겼다가 강화로 다시 옮겼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 옆 교동도에 유배되었다.[29]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인조 15년) 6월 6일, 광해군은 제주 어등포(魚登浦 : 현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다음날 6월 7일 광해는 제주 주성 망경루(望京樓 : 구 제주세무서) 서쪽 또는 제주 서성(西城) 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31][29]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都事)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束伍)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광해군은 제주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외부 출입이 차단된 채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하였다.[29][31]

후금(청나라)측에서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거론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역모 사건에 거론되었는데, 심지어는 광해군 스스로 친필 밀서를 역모 세력에게 전달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와 집권 서인은 그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도록 하였다. 한편 유배지에서는 상궁과 포졸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모욕적인 호칭을 듣기도 했다.

유배 생활을 지내던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편 그가 죽은 시기인 음력 7월 1일 무렵에 제주도에 비가 자주 오는데, 이를 “광해우”라 칭하기도 한다.[32][33]

사망 이후 [ 편집 ]

사후 장례는 박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봉사하게 되었으며, 광해군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공빈 김씨의 아래에 묻혔다. 공빈 김씨의 무덤 옆에는 임해군이 묻혀 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반기 내내 친형 임해군을 죽인 패륜사건과 폐모살제(영창대군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는 사건)를 이유로 연산군에 이어 패륜의 군주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 중 강홍립을 파견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 역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배신하고 사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조선 시대 내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광해군 대의 외교를 중립 외교 혹은 실리 외교로 보는 시각이 등장하면서 여러모로 재평가, 현재는 폭군으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희석이 됐다. 그의 묘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광해군묘는 문화재보호에 따라 여행관광 및 방문이 제한된 곳으로 광해군 제향식날에만 한시 개방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방문을 원하면 문화재청 사릉 관리사무소에 사전문의나 출입신청을 해야 한다.

시조 [ 편집 ]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34]

風吹飛雨過城頭 (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 (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 (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 (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 (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 (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 (연파강상와고주)

궂은 비바람이 성머리에 불고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가득한데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 근심어린 기운이 맑은 가을을 둘러싸네

돌아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의 꿈에는 제자주(서울)가 자주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자욱한 강 위에 외딴 배 누웠구나

풍취비우과성두 장기훈음백척루는 비바람이 치는 척박하고 초라한 귀양생활을, 창해노도래박막 벽산수색대청추는 그러한 척박함과 비교되는, 노도처럼 치는 푸른바닷물과 가을빛이 든 푸른 산 등의 자연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척박함과 푸름의 대비는 화자의 마음을 자연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며 화자내면 속에서는 푸른 자연과 같이 아름다운 도읍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타 [ 편집 ]

2002년 11월 15일에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사이버 조선왕조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 유씨를 “혜장왕후(惠章王后)”, 능호를 열릉(烈陵)으로하여 추숭하였으나, 이는 사시(私諡)로서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받지는 않는다.[35] 일부 한자문화권 사이트에서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 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36][37]

가족 관계 [ 편집 ]

광해군이 등장하는 작품 [ 편집 ]

관련 문화재 [ 편집 ]

광해군 내외 및 상궁 옷 (중요민속문화재 제3호, 해인사 소장)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광해군 가계도,화인옹주

광해군 가계도, 화인 옹주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서 쫓겨난 임금이다. 잊힌 임금이었으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백성을 생각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한 임금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국익에 우선되는 외교를 펼친 나름 능력 있는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광해군 가계도

광해군은 왕이 될 순서에서 멀리 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서 태자로 책봉되었고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면서 가족 모두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같은 어머니 소생으로 형인 임해군이 있다. 광해군은 2명의 부인에게서 1남 1녀를 두었다. 선조(공빈 김 씨) —-> 광해군(형 임해군)—–> 문성 부대부인 유 씨(폐세자) ——-> 숙의 윤 씨(옹주) 광해군은 10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단 2명의 자식만 있다. 정비인 문성 군부인 유 씨가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는 인조반정 이후 자결한다. 숙의 윤 씨에게서 한 명의 딸이 있었고 인조반정 이후 폐서인 되었다. 숙의 윤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화인 옹주”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화인 옹주는 박장원과 결혼해 2남 3녀를 두었다. 화인 옹주의 후손이 이후 광해군의 묘를 돌보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광해군 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버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총 10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1남 1녀가 전부이고 아들인 세자는 자결하고 딸인 옹주는 폐서인 되었고 그 후손들이 광해군 제사를 지낸다.

요즘 드라마 보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화인 옹주”가 광해군의 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에 역사를 일부 빌려온 것이다.

광해군 아들이자 세자인 이지는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광해군을 이어서 다음 보위에 올랐겠지만 인조반정 이후 폐세자 되어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강화도에서 부인가 함께 위리안치되었는데 영화 쇼생크의 탈출처럼 땅굴을 파서 탈출을 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붙잡혀왔다.

인조는 이러한 폐세자에게 자결을 명했고 결국은 자결을 했다. 폐세자가 자결한 후 3일 후에 부인(빈)도 자결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광해군의 정비이자 폐세자의 어머니인 유 씨도 죽었다.

광해군의 후궁 중에 정확한 생몰에 관한 기록이 있는 사람은 소의 윤 씨(인조반정 때 처형됨), 소용 정 씨(인조 방정 때 자살함)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인조반정 이후 생활에 대해서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광해군은 인조반정 이후 무려 18년간 더 살았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의해서 광해군이 다시 즉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정묘호란 때 광해군이 다시 거론되었고 인조 때 몇 차례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광해군이 역모 세력에게 직접 밀서를 전하는 과감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아주 비참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에서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광해군이 죽은 때인 7월 초에 제주도에 비가 자주 내리는데 제주 사람은 이비를 “광해우”라고 한다.

광해군 아들(폐세자)이 자결을 하고 유일한 자식은 옹주 한 명이라 광해군 제사는 옹주가 지냈다고 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옹주 시 가인 박 씨 집안에서 광해군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광해군 가계도를 보면 유난히 자식 복이 없는 것 같다. 유일한 후손인 화인 옹주가 있어 그나마 제삿밥은 먹을 수 있는 아주 비극적인 조선왕이다.

2022.06.01 – [분류 전체보기] – 광해군,연산군 폐위 이유와 가계도

2022.05.12 – [분류 전체보기] – 철종_철종 가계도와 철인왕후

2021.06.07 – [분류 전체보기] – 이이첨,김개시,정인홍_광해군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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