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평점 8.42
원래는 제임수 추천 영화에 포스팅하려 했는데, 이번에도
너무나도 엉성한 네이버 베스트 리뷰 보고 안되겠다싶어서 직접 포스팅합니다.
꿈보다 해몽식의 해석이나 주관적이고 근거 없는 해석이 너무 많습니다.
‘케빈에 대하여’ 결말 제대로 해석해드리겠습니다.
영화 해석을 위한 포스팅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만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 싸움의 시작.
그림1-산모들 사이에서 자신의 배를 찝집하게 쳐다보는 장면.
그림2-케빈을 낳기 싫어서 힘주며 버티는 장면. (영어대사로 의사가 “stop resisting” 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엄마는 케빈이 뱃속에 있을 때 태교는 커녕 짐으로 여겼습니다. 케빈이 태어나는 순간까지
낳기 싫어합니다. 이러한 엄마의 감정은 뱃속에 있는 케빈에게 무의식적으로 전달되었다고 해석하는게 맞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엄마의 증오를 받고자란 케빈은
태어나 갓난아기가 되서도 본능적으로 엄마를 싫어하는겁니다.
그런 케빈을 성가시게 여기는 엄마.
공사장 소음을 통해 케빈의 울음소리에서 벗어난 엄마의 편안한 표정이 보이시나요.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엄마를 싫어하는건 케빈의 정당한 본능인 점을 강조해줍니다.
아빠가 안아도 울지 않는 케빈의 모습을 통해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가 사람을 구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케빈이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신에 대한 엄마의 부정적 감정’을 느꼈다고 해석하는게 맞습니다.
# 유아기로 번진 싸움
케빈은 태아와 영아기적 얻은 무의식적 악감정으로 인해 유아기가 되서도 엄마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그런 케빈에게 엄마는 또 막말을 합니다.
이는 마치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했어”처럼 들립니다.
당연히 케빈은 이 말은 기억못하겠지만, 무의식적으로 엄마에 대한 증오는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고 이 둘의 서로에 대한 증오는 악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 어린이 시절
그리고 당연히 그 악감정은 케빈이 어린이가 되면서도 이어집니다.
케빈이 듣는 곳에서 아빠와 엄마는 말싸움을 하는데, 아빠가 아이를 위해 이사를 가자고
설득하고 케빈을 위한 우선순위를 고려해보라고 합니다. 케빈이 듣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는 절대 못간다며 케빈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버리는 엄마. 그런 엄마를 증오하는 어린이 케빈이
장난을 치자 엄마는 그만하라며 케빈의 손등을 때려버립니다.
#케빈의 본격적인 반격
엄마방에 물감 뿌리기, 엄마 굴욕주기, 일부러 똥 싸기 등
유아기까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하던 케빈은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엄마에게 반.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이상하다 싶을정도로 케빈이 갑작스럽게
착한 아이로 변한 순간들이 있었죠?
#갑작스레 착해진 케빈의 계기
케빈의 집요한 괴롭힘에 화를 참지 못한 엄마는 케빈을 거칠게 넘어뜨리고 결국 케빈은 팔이 부러지는데
케빈은 혼자 진찰실에 들거가겠다며, 엄마를 더욱 불안에 떨게합니다.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케빈이
의사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요.
근데 의사는 케빈이 용감하게 잘 치료받았다는 말만하고 가버립니다.
뒤이어 케빈의 팔을 보고 놀란 아빠에게도 단순 사고로 팔이 부러졌다고 말하며 엄마의 잘못을 감싸줍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던 날 저녁. ‘쪼르르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케빈이 스스로 오줌 누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매우 놀라는 엄마아빠. 늦은 나이까지 기저귀 차던 케빈이 드디어 스스로 용변을 가리기 시작했다며
아빠가 매우 좋아합니다. 하필 기저귀를 떼는 타이밍이 너무 적절하죠? 이는 늦은 나이까지 기저귀를 차던
케빈은 대소변을 가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 그동안 못가리는 척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후 엄마의 품에 안겨 동화책을 읽어달라는 케빈.
엄마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케빈이 갑작스럽게 착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케빈이 착해졌던 이유
자신을 집어던진 행동이, 엄마가 자신에게 한 짓 중 제일 솔직한 것이였다고 말하는 케빈.
케빈의 이 말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 케빈은 엄마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장면
같이 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니? 라고 물으며 케빈에게 동생을 임신했다고 알리는 엄마.
익숙해지라는 엄마의 말에, 케빈은 익숙한것과 좋아하는 것은 달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엄만 나에게 익숙해졌잖아. 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대한 속뜻은
“엄만 나에게 익숙하지만 나를 좋아하진않잖아?” 입니다.
동작을 멈추고 엄마의 대답을 기다리는 케빈..
근데…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었으면서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돌리는 엄마…엄마 맞음?
케빈이 기대한 대답은 아마 “무슨소리니 난 케빈을 사랑해” 이였을겁니다.
엄마가 여기서 케빈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만 했어도 케빈은 정상적인 아이로 자라났을겁니다.
이를 통해 케빈은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젠 의.식.적.으로 확.신을 하게됩니다.
이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영화는 케빈이 크레파스를 강하게 던지는 장면을
클로즈샷으로 땡겨 잡으며 케빈의 실망과 분노를 보여줍니다.
#케빈이 착해졌던 이유
다시 이 장면으로 되돌아오겠습니다.
이제 케빈이 말한 이 솔직함이 케빈의 입장에서 공감이 가시나요?
그동안 엄마가 말한 ‘사랑한다 케빈’이란 말은 솔직하지 못한 표현이고 전부 거짓입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솔직했던 순간인 폭력에 대해 순간적으로 엄마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입니다.
#막장 갈등의 청소년기
엄마와 케빈의 서로에 대한 증오는 청소년기로 오며 막장으로 치닫습니다.
엄마는 실리아의 애완동물 기니피그를 케빈이 죽였다고 의심하고
엄마는 사고로 딸의 눈을 실명하게 한 주범이 케빈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아들 케빈이 열대과일 리치를 까먹는 장면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아들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합니다. (실제로 케빈이 한건지 안한건지는 영화해석에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아들을 의심하는 엄마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막장이 중요)
케빈이 실리아에게 놀자는 것을 듣고 본능적으로 No! 라고 크게 소리칩니다.
이 정도면 자신의 아들 케빈이 범인이라 확신한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더이상 막장이 없을 것 같은 막장에서 다음 장면은 막장의 끝을 달립니다.
#갈등의 절정, 아빠와 여동생 살해 & 묻지마 살인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듭니다.
케빈은 왜 묻지마 살인을 저질렀을까?
가족까지 살해한 케빈이 왜 엄마는 살려두었을까?
여기에 대해 케빈이 직접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케빈이 말하는 사람들을 살해한 이유
살해를 하면 수많은 사람들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하는 케빈.
이 장면은 케빈이 살해 후 TV인터뷰를 통해 나온 장면이고, 그 장면을 엄마가 보고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묻지마 살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상상을하는 케빈
여기서 네이버 베스트 리뷰는 다음과 잘못된 해석을 합니다.
(사람들을 죽인 이유): 엄마의 관심을 받지 못한 케빈은 애정결핍에 걸렸고, 사람들을 죽임으로서 미디어의 관심을 받길 원한 것이다’
(엄마를 살린 이유): ‘엄마를 생존자로 남겨서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살인자의 엄마로서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받게 하는 것이
엄마를 더 괴롭게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해석은 틀렸습니다.
이 장면들은 관심받고 싶어하는 케빈을 표현하는 장면이 아니라
관심 받고 싶어한줄 착.각.한 케빈을 표현한 장면입니다.
즉, 사람들을 죽인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볼까요?
#케빈이 사람들을 죽인 진짜 이유
케빈은 사람을 죽인 직후, TV인터뷰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기 위해 살인을 했다고하는데요.
엄마가 케빈에게 직접 듣고 싶다며, 왜 죽였는지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케빈의 대답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내가 아는 줄 알았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즉,
(TV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처음엔 내가 아는 줄 알았었는데 =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살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 “막상 주목을 받고보니 이 욕구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였어”
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말의 속뜻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게 아니라 엄마, 당신의 관심을 받고 싶은거였어요”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케빈도 이제서야 깨달은거구요.
이 장면을 보고 글자 그대로 ‘응. 케빈도 잘 모르는구나’ 라고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특히 수백명에게 당당히 잘못된 해석을 전달하시는 블로거분들!
# 드디어 화해하는 케빈과 엄마
케빈의 그 속뜻을 알아 들은 엄마가 일어나, 케빈과 포옹하는 거구요.
엄마가 케빈의 그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속 대사에도 나오지만
엄마도 현실속에서도 과거를 오가며 2년 동안 생각을 해온 끝에 케빈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겁니다.
이러한 이해없이 이 포옹의 엔딩장면을 접했다면, ‘잉?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여?’ 하는 반응이 나올겁니다.
영화해석에 대한 제 개인적인 Tip을 소개하자면
영화해석에 대한 근거는 철저하게 작품 안에서 찾아야하며,
영화해석에 대한 힌트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편이며
종종 OST의 가사를 활용하는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케빈에 대하여가 특히 그렇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OST 가사를 볼까요?
# 엄마가 케빈 면회 전날, 케빈의 방을 치우면서 나오는 노래
(가사) “어느날 고아의 집 옆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네~
소년 하나가 혼자 서있었네~
내가 왜 그러냐고있냐고 물었을 때
소년은 울며 대답했네~
나는 그 누구의 아이도 아니에요~
나는 엄마의 키스를 받지 못했어요~
오~아무도 날 원치 않아요~”
노래 가사를 들으면 정말 노골적으로 영화의 결말에 대해 해석해줍니다.
저 노래가사는 케빈의 마음을 알려주는 노래 가사나 마찬가지이고, 이 장면을 통해서
엄마가 깨닫게 되고 케빈의 옷에 얼굴을 파묻고 그리워하다가 울음을 터트리고
케빈방을 정리하는겁니다. 케빈방을 정리하는거에 대해서 이상한 해석이 많은데
케빈 방을 정리하는건 케빈을 용서했으며, 케빈이 출소를 했을 때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면회장서 만나자마자 모범수로 2년 후 가석방으로 나올 수 있다는 대화를 나눕니다.
다음은 엔딩에 나오는 노래를 들어볼까요?
# 엄마가 케빈과 부둥껴안은 후 나오는 노래
(가사) 이제 엄마를 떠올리때면~
얼마나 자주 그녀가 그랬는지~
그녀의 cheer를 느꼈었네
내 이상한 마음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있었네~
여담이지만 최근 한국영화 ‘사도’를 보았는데요. 자식의 잘못을 말하기에 앞서
양육자의 잘못을 집중 조명한다는 점에서 케빈에대하여가 떠오르더군요.
영화 ‘사도’는 ‘한국판 케빈에 대하여’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ㅎㅎ
암튼 영화 파일을 안지우고 가지고 계신분은 빠르게 돌려보시거나
마지막부분 OST가사라도 음미하시는거 추천드립니다.
‘We need to talk about Kevin’ 해석 마치겠습니다.
P.S
‘싸이코패스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란 논쟁이 많은데 이는 ‘케빈에대하여’영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전혀 무관한 논쟁입니다. 싸이코패스가 실제로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케빈은 엄마에 의해 후천적으로 형성된 인격’ 이라는 감독의 의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엄마만의 잘못이 아니고 그녀를 방치한 사회시스템과 가사일에 소홀한 아빠의 잘못이다’라는
의견도 보이는데, 이 부분은 영화에서 조금도 다루지 않습니다. 영화 해석과는 전혀 관련없는
의견입니다. 영화 해석은 감독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감독의 의도를 반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나를 닮은 타인이 태어난다는 것은 두렵고도 신기한 일이다. 나를 닮는다면 어떤 부분을 닮게될까? 내 테두리를 벗어난 전혀 낯선 아이가 태어나면 어떡해야 할까? 생명이 태어난다는건 축복할 일이지만 아직까지의 나는 경외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누군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를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지, 정말 나에게도 다른 위대한 엄마들처럼 모성애라는게 있긴 한건지 궁금하고도 의문스럽다. 이 모든 두려움을 담은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봤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넷플릭스에서 예전부터 찜해두었지만 왠지 보기가 두려웠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 아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 그런 아이에 대해서도 끝없는 모성애를 지녀야하는 것이 엄마라는 사실이 무섭고 두려웠다. 줄곧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사랑이라는게 어쩌면 당연한게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 행동에 문제가 있는 아이는 오롯이 엄마의 책임일까? 아닐까? 여러 불편한 질문과 의문들이 뒤엉킨 불편하고도 무서운 영화였다.
케빈에 대하여 줄거리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케빈에 대하여는 주인공 에바(틸다 스윈튼)의 비참해보이는 생활로 시작한다. 낡은 집에서 혼자 일어난 에바가 집밖으로 나오자 바깥 벽이 온통 빨간 페인트로 엉망진창이고, 자동차에도 피로 보이는 붉은 액체가 잔뜩이다. 하지만 그녀는 묵묵히 자동차의 피를 닦아내고 동네의 초라한 여행사에 사무직 면접을 보러간다. 그녀는 아주 큰 죄를 지은듯 움츠려있고, 길가다 동네여자가 이유없이 뺨을 날리는 상황에서도 괜찮다며 급하게 자리를 피할 뿐이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길래 그녀의 삶은 이렇게 되었는가? 영화는 그녀의 현재 삶과 과거의 삶을 크로스하며 보여준다.
그녀는 사실 잘나가는 여행작가였다. 자유를 추구하며 프리하게 살던 그녀가 어느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의도치않게 아이를 가지게 된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임신과 출산, 누군가에게는 축복이고 행복일 순간이 그녀에게는 족쇄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케빈이다. 케빈은 태어났을때부터 무척 예민하여 밤낮없이 울었고, 그런 아기를 정성껏 돌보려 해보지만 하는 수 없이 에바는 점점 지쳐간다. 에바는 아이에게 ‘니가 태어나기 전이 훨씬 행복했다’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너무나 심하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싫어 유모차를 끌고 공사장의 시끄러운 소음 옆에 일부러 서있기도 한다. 아이는 커가면서 무엇 때문인지 유독 에바에게만 못되게 군다. 아빠에게는 세상 다정한 모습으로 대하면서 엄마인 에바에게만 자신의 진짜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자면 아이가 못되게 구는건 엄마의 모성애가 부족해서인 것 처럼 보인다. ‘아이에게 좀 더 다정했어야지’, ‘엄마가 그런 소릴 하면 안되지’, 모든걸 엄마탓으로 돌리는건 참 쉬운 일이다. 아빠에겐 그토록 다정한 아이가 아무도 모르게 엄마에게만 자신의 악의를 드러낸다. 에바는 남편에게 케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만 아이탓을 하는거냐고 화만 돌아온다.
지금부터 스포있습니다.. !!
부부는 아이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엔 이혼을 결정한다. 아빠가 케빈을, 엄마가 여동생을 맡기로 결정한 날 케빈은 모든 것을 끝내버리기로 결정한다. 지금까지 쓰고 있던 모든 가면을 이제 그만 벗어버리기로…
그는 아마도 사이코패스였던 듯 하다.
그렇게 에바의 모든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내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사람들은 자식을 잘못키운 어미의 탓이라며 모두들 에바를 손가락질 했다. 에바 또한 케빈에게 가족을 잃은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케빈의 엄마라는 이유로 피의자였다. 그래서 에바는 속죄하는 의미로 마을에 남아 케빈이 출소할 때까지 사람들의 원망과 비난의 눈초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 같다.
에바도 케빈이 분명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가족인 아버지(남편)와 여동생(딸)을 죽인 것도 모자라 수많은 학생과 선생님을 하룻밤 사이에 학살해버린 아들을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을까. 케빈을 낳은 자신이 저주스러웠을 것도 같다. 하지만 에바는 포기하지 않고 2년동안 끈질기게 케빈을 면회한다. 서로 할말을 잃은 채 매번 마주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답답하고 위태로워보였다. 그리고 2년째 되던 날, 드디어 에바가 묻는다.
“도대체 왜 그랬어?”
“몰라, 그땐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네. ”
아이에게 무척 화가 났을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에바는 케빈을 꼭 끌어안아준다. 언젠가 감옥에서 나오게 될 아이의 새출발을 위해 케빈의 방을 파란 페인트로 칠하고 깔끔하게 준비해둔다. 케빈을 다시 이해해보리라 노력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한번쯤 영화의 제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케빈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고,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이다. “우리는 케빈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한번도 케빈이 왜그럴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케빈의 이상한 행동과 엄마와의 느슨하고 미적지근한 애정관계를 보여줄 뿐이다. 아빠와는 살갑게 잘 지내면서 엄마에게만 악의를 드러내는 아이, 그 이유를 모르는 엄마. 그 불편한 줄다리기를 관객도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봤을 뿐이다.
케빈은 어쩌면 엄마에게만 솔직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악의와 폭력적 성향을 유일하게 엄마에게만 마음놓고 보여줄 수 있었던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의 이상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냈던 것일수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세상의 단 한사람 엄마와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엄마 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아닐지.
영화는 모성애가 문제인지 아닌지를 따지는듯 보이다가 결국엔 무엇이 문제인지 똑바로 봐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이의 상태를 똑바로 보려고 노력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아빠는 아이와 잘 놀아주긴 했지만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엄마는 아이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긴 했지만 결국은 이혼함으로서 포기하려 했다. 그게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덮어두고 보려하지 않을때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비극. 영화 제목에서부터 너무나 노골적으로 케빈에 대해서 얘기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를 자꾸만 찾고 있었다.
너무 어렵고도 암울한 영화였다. 정해진 답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는 영화인듯 하다. 이런 영화는 여럿이서 보고 토론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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