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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식사 #2_ 통일신라 ~ 고려시대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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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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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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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 복식 – 이경선 — Google Arts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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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하여 당시의 화려한 귀족 여성의 모습을 연출했다. 두께와 투명도가 다른 두 가지 실크에 문양을 날염하고 이를 겹쳐 저고리를
    제작했고, 치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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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 복식 - 이경선 — Google Arts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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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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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일신라시대부터 남녀관리와 부인은 모두 중국제를 받아들여 우리 나라의 복식이 이중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영역닫기 영역열기 고려시대의 옷. 고려의 복식 변천을 보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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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일신라시대부터 남녀관리와 부인은 모두 중국제를 받아들여 우리 나라의 복식이 이중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영역닫기 영역열기 고려시대의 옷. 고려의 복식 변천을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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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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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금제 – 표제어 – 한국의식주생활사전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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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금제(服飾禁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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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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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묘의 신라 사신도>

당나라 고종의 여섯째 아들인 이현의 묘에 그려진 예빈도(禮賓圖) 가운데 신라 사신도이다. 조우관을 쓰고 소매통이 넓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화를 신었다.

당나라 장회 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의 묘에 그려진 벽화 가운데 신라 사신도(新羅使臣圖)를 통해 통일신라시대 남자의 옷차림을 살필 수 있다. 이 벽화는 신라가 당나라의 공복 제도를 채택한 648년에서 50여 년이 지난 후에 그려졌는데, 당나라의 일반적인 양식과도 조금 다르고 다른 주변 국가의 옷과도 상당히 달라서 신라인 특유의 복장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깃과 도련에 선(襈)이 둘러진 넓은 소매의 저고리와 통 넓은 바지를 착용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조우관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있어 우리 고유 복장인 바지·저고리 복장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복두를 쓴 토용>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인물상이다. 중국식 복두를 쓰고 깃이 둥근 단령포를 입고 있다.

<홀을 든 토용>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인물상이다. 이국적 풍모에 복두를 쓰고 단령포를 입었으며 손에는 홀을 들고 있다.

<쪽진 머리를 한 토용>

경주 황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여인상이다. 쪽진 머리를 하고 있으며, 소매가 긴 포를 입고 있다.

<높은 머리를 한 토용>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여인상이다. 중국식의 높은 머리를 하였으며,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고 어깨 위로 표를 두른 차림이다.

후수가 늘어진 복두(幞頭)를 착용하고 있는 용강동 고분 출토 남자상은 당나라 초기의 복두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선이 둘러진 둥근 깃 옷, 곧 단령(團領)을 입고 있는데 길이는 발목을 덮고 있으며 허리에는 대를 매고 있다. 같은 고분에서 출토된 또 다른 남자상은 복두를 쓰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난이 있는 단령을 착용하고 있는데 홀(笏)을 들고 있다.

겉옷으로는 바지 위에 내의(內衣)를 입고 그 위에 표의(表衣)를 입는 것이 보통이지만 귀족 계급은 그 위에 소매를 짧게 한 당제(唐制)인 반비(半臂)를 착용하였다. 귀족층은 관복으로 중국제 단령포를 착용했지만, 평상복으로는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양식인 곧게 여미는 긴 저고리형 겉옷을 착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황성동 출토 여자상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 여성의 차림새를 살펴보면, 머리는 쪽진 머리(北髻)를 하고 있다. 게다가 둥근 깃의 의복을 입고 가슴 높이에 대를 매고 있다. 의복의 폭이 좁고 소매통도 좁으나 의복 전체에 비해서는 넓은 편이다. 저고리 위에 치마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며 가슴 높이의 대는 앞에서 매어 늘어뜨린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용강동 출토 여자상은 둥글게 두른형의 높은 머리(高髻)를 하고 있고,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었으며 가슴 위에 대를 매고 어깨 위로 숄(shawl)과 같은 형태인 표(裱)를 두르고 있다.

<장식빗>

슬슬전을 장식한 통일신라시대의 빗이다. 머리를 빗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빗 부위를 머리에 꽂아 아래 달린 부분이 밖으로 나와 장식하기 위하여 썼다.

두 고분에서 출토된 여인상에는 우리 고유의 쪽진 머리와 당나라풍의 높은 머리가 함께 나타난다. 머리 위에는 슬슬전(瑟瑟鈿) 이나 당관(唐冠)을 모방한 비단 화관(花冠)을 썼다. 머리 장식으로는 소(梳)와 채(釵)가 있다. 소는 빗으로 사용할 뿐 아니라 장식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재료에는 슬슬전이나 대모(玳瑁, 거북 껍질) 등을 사용하였다. 채는 비녀로서 주로 머리 뒤에 꽂아 장식하며 금은 등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여성은 내의(內衣) 위에 저고리인 단의(短衣)를 입고 의례적인 경우에만 표의를 덧입었으며 허리에는 천으로 만든 대를 띠었다. 표의 위에는 배자(褙子)의 일종인 배당(褙襠)을 입었는데, 반비와 달리 소매가 없는 옷으로 여인들만 입었다. 그러나 평민 여성에게는 착용이 허용되지 않았다.

여자도 평상시에는 바지만을 입었고, 치마는 의례용으로 바지 위에 덧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마(裳)는 표상(表裳)과 내상(內裳)이 있는데, 표상은 겉에 입는 치마로 치마말기(치마의 맨 위 허리에 둘러서 댄 부분)가 있다. 삼국시대의 치마와 다른 점은 주름이 치맛단까지 잡히지 않고 현대의 치마와 같이 위에만 잡혀 있다. 내상은 항상 속에만 입는 치마가 아니고 두 개의 치 마를 입을 경우 속에 입었기 때문에 내상이라 한다. 5두품 이상의 특수층만이 입을 수 있었는데, 고급 옷감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마허리를 가리키는 말로 치마 위에 따로 두르는 요반(䙅襻)은 평민 여성에게도 비단의 사용을 허용했을 정도로 사치했음을 알 수 있다. 어깨 위에는 영포(領布)라고도 불리는 표를 목 뒤에서 가슴 앞으로 길게 드리운다.

[필자] 김문자

여자의 기본구조는 삼국시대 이래 변함이 없다. 다만 둔부를 내려가던 저고리 그리고 허리에 띠를 띠던 것이 몽고의 영향으로 길이가 짧아지고 띠가 없어지며 고름을 매게 되었다. 이 구조는 국속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외에 존자 의복으로 말군이 있었다. 통 넓은 바지같이 생겼고 뒤가 터져 치마 위에 입을 수 있었다. 외출시 말을 탈 때 입었다.

① 반가(班家)예복 : 원삼·활옷·당의에다 치마에는 스란 장식이 있고 속에는 무지기를 입었다. 원삼은 녹색원삼에 화문을 금직 또는 금박하였고 긴 띠를 매어 뒤에 늘였다. 활옷은 공주·옹주의 예복으로 상류층에서 혼례예복으로 사용하였으며 대홍색 바탕에 장수와 길복을 기원하는 무늬를 수놓은 것이다. 또 당의는 소례복으로 좁은 소매에 거들지를 달고 왕족 이하 모두 입었다. 녹색당의가 보통이나 자색, 백색도 있었다.

② 스란치마·대란치마·웃치마 : 스란치마나 대란치마는 단을 따로 만들어서 금직이나 금박을 하여 덧대는데, 한줄을 대면 스란치마라 하고 두줄을 대면 대란이라 하였다. 전행웃치마는 궁중에서 쓰던 것으로 세가닥으로 주름을 끝까지 잡아서 한 허리에 달아서 예복용으로 치마위에 입었다.

사대부가에서는 계급에 따라 자색이나 또는 청색으로 지금의 앞치마 같이 뒤는 여며지지 않는 웃치마를 만들고 화문의 금박을 한 단을 무릎 높이에 댄다. 예복의 상(裳)이다.

치마 밑에는 옷맵시를 부풀리기 위하여 무지기를 입는다. 이는 모시 12폭으로 삼합(三合) 또는 오합으로 층층으로 주름을 각기 잡아서 한허리에 단다.

③ 평상복 : 평상복은 예복 밑에도 입었고 일상 생활에서도 입어 왔던 저고리·치마이다.

㉮ 저고리의 변천 : 조선조 초기의 유물로 1560년(명종 15) 경의 것이 있는데 특색을 보면 저고리 길이가 매우 길며(58㎝), 따라서 옆이 아래로 퍼져 곁막이가 달려 있다. 화장도 매우 길며 통수이며 깃은 겉깃과 안깃이 모두 지금의 안깃과 같다. 도련도 매우 둥글다. 깃과 끝동, 섶, 곁대가 모두 길색과 다른데 아마도 고름은 없었으나 같은 색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중기의 것으로 영조 8년(1732)에 죽은 완산(完山) 최씨(崔氏)의 저고리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고리 길이는 47.5㎝로 많이 짧아졌다. 깃은 목판깃이되 당코깃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고름은 깃과 같은 감으로 좁고 짧다(2-37.5㎝).

조선조 후기의 저고리로서 청연군주(淸衍郡主)의 것이 있는데, 저고리 길이가 많이 짧아졌다(25㎝). 화장은 여전한데 배래선이 수구를 약간 좁힌 곡선이 되었다. 품도 꼭 맞도록 되었다. 깃·섶·고대 모두 좁아졌으나 곁마기는 다소 커졌다. 동정나비도 좁아졌고 고름은 너비는 전대와 같으나 고름길이는 늘어났다.

조선말기의 것으로 양헌수(粱憲洙) 장군 부인 저고리를 보면 노년기의 것임에도 저고리 길이는 같다. 적어도 50년 후의 것으로 보이며, 그러고 보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깃이 둥근깃으로 바뀌었다. 고름은(2.5-40㎝) 길어졌다. 조선조는 저고리가 단소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 치마의 변천 : 우리 나라의 치마는 큰 변동이 없었다. 유물을 통하여 검토해 보면 초기것으로 1560년경의 유물로 치마 길이가 90㎝의 누비치마인데, 길이는 워낙 사람이 작았고(미이라로 봄) 더욱이 저고리 길이가 길었음으로 가슴까지 치켜 입지는 않았음으로 보통이라고 본다.

치마감 1폭이 약 32㎝정도로 12폭으로 전폭이 362㎝이다. 치마의 형태는 별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누비솜씨로 사람손으로 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곱고 정교하다.

16세기 연간의 청주(淸州) 한씨(韓氏)의 대란 치마가 있다. 길이는 127㎝로 의례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란은 직금으로 되어 있으며 포도동자무늬이고 치마단 가에는 금직이지만 좁은 약 4㎝ 정도의 단이 있다.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 소장이다.

또 16세기의 것으로 은진(恩津) 송씨(宋氏) 치마와 원주(原州) 원씨(元氏) 치마가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홑치마이고 9폭 정도로 앞 3폭은 덧주름으로 발등까지 내려오게 하고 뒤는 길게 끌리게 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디자인을 할 수 있는지 놀랍다.

중기에는 남이흥(南以興) 장군 부인 치마가 있는데 92㎝ 길이에 1폭 너비 33㎝로 11폭 치마를 하고 있다.

또 완산 최씨 치마가 있는데 이 치마 단처리가 특이하다. 즉 치마단을 같은 감으로 곧은 올로 겉은 0.2∼0.3㎝ 남기고 안으로 넘겨 감쳤다. 후기에는 청연군주의 치마가 많이 있는데 길이는 113∼135㎝, 폭은 325∼398㎝로 다소 좁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 치마길이가 길어진 것은 저고리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 속옷 : 속옷으로는 저고리속에 입는 속적삼 속저고리가 있고, 치마속에 입는 단속곳·바지·속속곳·다리속곳이 있고, 외출용의 너른바지가 있다.

ㄱ. 속적삼 : 여름것은 여름감으로, 겨울에는 겨울감으로 입고, 겨울에는 그 위에 속저고리로서 약간 작게 하여 입었다.

ㄴ. 속곳 : 바지 위에 입는 것으로 그 위에 치마를 입는데 양가랭이로 되어 넓으며 밑이 막혀있다. 옷감은 고급으로 했다.

ㄷ. 바지 : 밑이 터지고 바지 부리는 좁은 것이다. 여름에는 홑으로 하며 고쟁이라고 하였으며 또 고쟁이에 하반신만 고운 감을 덧대어 모양을 낸 중두리라는 것도 있다.

ㄹ. 속속곳 : 바지 밑에 입는 것으로 명주로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목면으로 많이 했는데 형태는 단속곳과 같고 다만 약간 길이가 짧다. 속속곳에 넓은 가랭이를 바지 가랭이 속에 넣어서 빵빵하여 옷입은 모습이 푸하게 되었다.

ㅁ. 다리속곳 : 가장 밑에 입었으며 홑겹으로 허리를 달아 입었다. 매일 갈아 입는 것으로 지금의 팬티이다.

ㅂ. 너른바지 : 상류층에서 개화기 때 외출할 때 단속곳 대신 입는 겹으로 된 단속곳형인데 여밈이 뒤로 되어 있다. 입은 모습이 풍신하고 부드러워서 맵시 있어 보인다.

ㅅ. 허리띠 : 가장 밑에 입는 것으로 저고리 길이가 짧아졌을 때 허리가 미끄러 내려오지 않도록 그리고 살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허리에 감 아 맨 것이다.

내용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복식금제를 정리하면 금령의 대상이 된 품목은 22항목인데, 이것을 진골대등眞骨大等·6두품六頭品·5두품五頭品·4두품四頭品·평인의 다섯 단계로 구별하고 남녀별로 그 재료의 직물·문양·장식· 색채·포량布量 등에 관하여 상세하게 규제하였다.

고려시대 복식금제는 1389년(공양왕 1) 허응許應 등이 올린 상소문에서도 대소신료大小臣僚의 의복에 사라단자紗羅段子를 금하고, 사치품 거래를 금하며, 이를 어기고 몰래 매매하는 자를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그 재물로써 상줄 것을 건의하였다.

조선시대 복식금제는 1394년(태조 3)에 내린 금제의 내용을 보면 1. 양부의 관원 외에는 사라능기紗羅綾綺의 의복을 입을 수 없다. 2. 서인, 공상천례工商賤隷는 직품이 있더라도 은과 명주, 사피斜皮를 사용할 수 없으며, 혼인할 때도 직품에 따라서 사용해야지 분수에 넘치게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1429년(세종 11)에는 1. 본래 은대를 띨 수 없는 사람은 혼인할 때도 시산時散의 직품에 따라 각대와 실띠[條兒]를 한다. 2. 대소 부녀를 수종하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게 하고 입모도 모시만 허용하며, 모첨帽襜의 길이도 주부 것 절반이 되도록 한다. 3. 신분의 상하에 따른 의복 승수의 구분은 없으나, 모시·베·무명·명주·무명과 무늬를 놓아 섞어 짠 비단은 1품부터 양반 자제에 이르기까지는 12승 이하로 하고, 공상인과 천노는 8승 이하로 한다. 초구貂裘는 양반 자제 이외는 입지 못한다. 4. 각 품계의 관리는 금대와 은대에 홍색 가죽으로 장식함을 금한다. 5. 서인·공상인·예비隷婢는 사피로 된 신과 초자硝子로 된 의복을 금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은 지켜지지 않아서 구체적인 금제령을 다시 내리기도 하였다. 1637년(인조 15)에는 당상관은 단령團領과 융복戎服 외에는 필단匹段과 팽단彭段은 착용하지 말며, 당하관은 방사주方絲紬·화사주花絲紬·면주綿紬의 표의表衣를 착용하지 말며, 유생은 모의毛衣를 착용하지 말며, 삼의사三醫司는 유생과 동일하며, 사족의 부녀는 수의상繡衣裳과 문채 있는 필단을 착용하지 말고 장식은 금봉차金鳳釵·주전珠鈿·원가환圓假寰을 사용하지 말며, 서인은 면주綿紬 및 모의毛衣를 착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수교집록受敎輯錄』(1698)에서는 1. 당상관은 공복 이외에 금단을 입지 못하며, 당하관은 초견 및 자적의를 입지 못한다. 2. 유생은 모의와 자적의 및 허리띠를 사용하지 못한다. 삼의사도 동일하다. 3. 사족 부녀는 모두 남편의 작품爵品에 따르나, 대단면수大段綿繡를 입지 못하고 봉채·금옥채·주전·가환을 사용하지 못한다. 다만 신부는 금하지 않는다. 4. 서인은 사립斜笠·면주·백저포·모로 된 옷을 입지 못한다. 5. 사족 부녀가 수繡의 의상을 입으면 그 가장도 또한 죄를 논한다. 6. 서인으로서 도포·모의·저포를 입는 것, 7새[七升] 이상의 세포의·자적대紫的帶·흑염호피黑染狐皮·당담포堂儋甫·이엄耳掩·모단帽段·운두화雲頭靴·대소분토大小分土를 입는 것을 금한다. 7. 사족의 첩 및 얼속孼屬, 의역醫譯 등의 잡직을 가진 자의 처·여로서 초피여모를 쓰는 것을 금한다. 8. 상녀常女로서 너울모[羅兀帽], 단緞의 족두리를 쓰는 것, 주옥의 지환을 쓰는 것, 사라능단紗羅綾緞을 입는 것을 금한다(기생·의녀는 금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추관지秋官志』(1781)에 1. 주의紬衣는 겉에 입는 무늬가 있는 상복上服이었다. 그런데 귀천·노소가 섞여 입으니 구별되지 않으므로 법률을 만들어 장복章服 외에 사서士庶의 나이 50세 이하는 일절 금하라고 하였다. 2. 조신의 장복·융복은 모두 운문을 사용한다. 3. 장군 이하의 군복은 운문과 왕이 상으로 내린 단사대접문緞紗大楪文 외에는 제반 문품은 사용하지 못한다. 4. 주우사注雨紗·항라抗羅·지주只紬·소능 중의 유문은 금한다. 5. 사족 부녀는 가체를 폐지하고 족두리를 대용하게 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1871)에 의하면, 1. 당상관의 장복章服 외에는 무늬가 있는 단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2. 당상관의 장의障衣에 무늬 있는 단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3. 사족의 남부男婦는 단지 면주를 입고, 견단絹段은 입지 못하며, 시정市井의 남부는 단지 목면을 입으며 면주는 입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음양오행설이나 사대의 예로서 염색에 대한 금지가 많았다. 1449년(세종 31) 대홍大紅으로 물들인 외의外衣는 대소 조사大小朝士들이 이미 입지 못하니, 이 뒤로는 양반 부녀의 외의와 서인庶人과 천인賤人 남녀의 안팎 의복은 모두 대홍색帶紅色을 쓰지 말고, 도홍색桃紅色과 분홍색만 쓰게 한다는 금제가 있었다. 이외 금제에 나타난 복색은 황색·백색·홍색·자색·회색·옥색·녹색 등이다. 황색은 중국 황제의 색이므로 금하였다. 백색은 동방지인이 서방의 색을 숭상함은 옳지 못하며 상복과 다를 바 없어 망국의 징조가 있는 색이라 하여 금하였다. 홍색은 중국의 천자색인 황색과 가깝다는 데서 금령을 내렸다. 또한 자색은 우리나라 임금의 색인 동시에 원료가 왜倭에서 들여오는 단목丹木· 소목蘇木이었기 때문에 금하였다. 회색·옥색도 길조가 못 되고 망국의 징험이 있다 하여 금하였다. 녹색은 궁 안에서 즐겨 입으므로 아래에서도 따르니 상하가 무별하다 하여 금령을 내렸다.

조선시대의 금·은·주옥의 금제는 전술한 직물금제처럼 제도의 통제력이 강하지 않아서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가체 금지령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1757년 교지에 보면 그 뒤부터 체계는 예복에만 쓰이고 대신 족두리를 쓰고, 왕손 외에는 용봉채를 금지하게 되었다. 1788년(정조 12) 10월에 절목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1. 사족의 처첩과, 여항의 부녀로 무릇 ‘다래’를 땋아 머리에 얹거나, 본발로 머리에 얹는 제도는 일절 금한다. 2. 체계에 대신하는 낭자의 쌍계雙髻와 사양계絲陽髻는 출가 전에 쓰는 것이므로 써서는 아니 되고 대신 머리를 땋고 ‘쪽’으로 대신하라. 머리에 쓰는 것은 전과 같이 족두리로 하되 면서綿絮·양죽凉竹은 밖과 안 모두 흑색으로 한다. 3. 상천常賤의 여인으로 거리에서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것과 공사천公私賤이 본발을 가지고 머리 얹는 것은 허용하되 ‘다래’를 드리거나 더 얹는 것을 금한다. 효종 때에는 양태[凉臺]가 넓은 것은 문을 드나드는 데 방해가 되므로 금지하라고 하였다. 이도 잘 이행되지 않아 1430년에 다시 똑같은 금령을 내렸다.

신발에 대한 금제는 1449년(세종 31)에는 양반의 부녀와 여기女妓 외에는 사라·능단혜紗羅綾段鞋를 쓰지 못하게 하고, 남자의 피초혜皮草鞋는 높고 낮은 이를 막론하고 신는 것을 금지한다. 악공에 대한 착화의 금제, 성종 때 승려의 피혜皮鞋 착용의 금지, 숙종 때 지혜紙鞋 금지, 정조 때는 백화白靴 착용의 금지 등이 있었다.

혼례에 대한 금제도 신부의 복식도 비단 대신 굵은 명주·모시·면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1520년(중종 5) 혼인의 사치는 오랑캐의 습속이니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1516년 11월에는 혼인 때 사라능단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교지로 전하였다. 이상의 금제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금제가 내려졌다. 특히 『대전속록大典續錄』을 보면 신부가 청선의·홍선의·금선의를 입으면 수모手母도 같이 벌하였다. 대군·제군·공주·옹주의 가례 때에는 『오례의五禮儀』에 따른다고 되어 있다. 또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는 납채 때 채단 혹은 백금으로 함을 채우는 것을 금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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