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48 정소녀 가봉 대통령 The 200 Correct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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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정애정
출생 1954년 1월 21일 (68세)
학력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중퇴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종교 개신교
데뷔 1973년 MBC 공채 6기 탤런트
8 thg 4, 2022

배우 정소녀 근황 전 시누이가 결국 직접입열었다.. 여태껏 속아온 잘못된 인생? 화가나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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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고백 “가봉 대통령의 아이 낳았다 그 남편과 이혼했다…인생 다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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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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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100’ 정소녀 “가봉 대통령 아기 낳았다고? 대통령 아이가 100명”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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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100' 정소녀
‘1대100’ 정소녀 “가봉 대통령 아기 낳았다고? 대통령 아이가 100명”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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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남편 이혼이유와 가봉대통령 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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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남편 이혼이유와 가봉대통령 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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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가봉대통령, 정소녀 전남편 이혼사유와 간통죄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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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가봉대통령, 정소녀 전남편 이혼사유와 간통죄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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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전남편 딸 과거사진 성형 몸매 가봉대통령 루머 이혼이유 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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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전남편 딸 과거사진 성형 몸매 가봉대통령 루머 이혼이유 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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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전남편 딸 과거사진 성형 몸매 가봉대통령 루머 이혼이유 인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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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고백 “가봉 대통령의 아이 낳았다 그 남편과 이혼했다…인생 다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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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소녀가 과거 자신이 흑인 아이를 임신했었다는 루머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방송에서 정소녀는 “정말 말도 안되는 루머 때문에 하차하게 됐다”며 “방송국에서 ‘왜 저런 여자를 MC로 쓰느냐’고 항의전화가 왔고 하루아침에 MC 교체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알고보니 내가 대통령의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었다. 가봉 대통령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에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며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이에 허참은 “내가 항상 같이 방송을 했는데 배부른 적도 없이 어떻게 낳을 수 있나”라며 거들었습니다.

참고로 정소녀 루머에 연루된 가봉대통령 봉고는 1975년 7월 처음 방한합니다.

(박정희가 봉고를 국빈으로 초대함)(참고로 봉고는 가봉 대통령에 40년 이상 집권했고, 150명이 넘는 자녀들을 가지고 있는 독재자임)

이후 봉고는 3번 더 한국에 오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제 3세력(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국가들)과 외교적으로 가깝게 지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죠.

그 소문이 사실인지, 또 어떻게 해서 그런 악성 루머가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정소녀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세상 사람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너무나 두려웠었다”면서 “누가 던진지도 모르는 이유없는 돌팔매에 맞아 상당히 힘들게 살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었다”며 힘들었던 속내를 털어놨습니다.

한편 정소녀는 7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로 7년간 ‘가족오락관’의 MC 자리를 지키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루머 의혹으로 인해 자리를 하차한 바 있습니다.

정소녀: “해명을 했지만, 그래도 (루머를) 믿으려고 안하는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붙잡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가면 어떤 사람들은 ‘깜둥이 엄마’라고 그랬다. 너무 화가 나서 죽을 거 같았다.”

현재까지도 정소녀 루머의 출처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이나 가봉에서도 정소녀의 핏줄이 나타나지 않고요.

가봉 교민들이나 혹은 가봉 권력층에 가까운 사람들(예를 들어서 1986년부터 가봉 봉고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역임한 박상철) 등은 정소녀의 흑인 아이 출산설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가봉에서도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죠.

사실 정소녀 전남편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죠.

또한 정소녀를 둘러싼 다른 사건 역시 궁금하네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소녀 집안은 보수적이었습니다.

정소녀 어머니: “돌아가신 남편이 헌병 대장 출신인데 얼마나 엄했는지 아는가. 애정(정소녀의 본명)이는 이 소문을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연예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갑자기 심장병도 생기고 얼굴에 심하게 부기가 오르는 등 병도 많이 얻었다.”

정소녀: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었다. 헌병 대장이었던 아버지가 굉장히 무서웠다. 내가 큰 딸이었는데 엄한 아버지 밑에서 예절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회초리로 많이 맞았고 부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혼난 적도 많았다.”

정소녀: “내가 연예인이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무용가였던 어머니의 끼를 물려받았다. 전역 후 아버지가 스웨덴 대사관 근무로 외국 생활을 했는데 사고방식이 많이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정소녀: “나같은 행운아도 없을 것다. 데뷔 이래 탄탄대로를 걸었고 CF 출연 후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몸값도 다른 연예인들과 몇 배 차가 났다.”

정소녀: “전성기 시절 CF 1회 출연료로 2~3천만원을 받았다. 다른 연예인들이 몇 십만원을 받은 것에 비하며 엄청나게 많은 액수였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집 10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한 편의 드라마 출연료가 겨우 몇 십만원하던 시절이었죠.

정소녀: “저도 정확하게 광고 출연료를 따져보지는 않았어요. 한 해 동안 CF 출연료로 3천7백만원 정도 받았던 거 같아요.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한 80억~90억원이나 된다고 하네요. 덕분에 기네스북에 올랐고 피어리스 화장품 등의 광고도 ‘대박’이 났죠.”

확실히 정소녀의 광고 출연료는 그 당시 여자 연예인들의 몇배가 넘었습니다.

정소녀는 왜 이렇게 높은 출연료를 받았을까요?

바로 정소녀가 연기자 출신 최초의 여자 전문 MC 영역을 개척하면서,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소녀: “당시 오락 프로그램 대명사였던 ‘쇼쇼쇼’로 진행자 데뷔를 했어요. 제가 자리를 잡은 몇 년 후부터 여성 MC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죠. 저한테는 큰 행운이었어요. 연기도 그렇지만, 진행이 적성에 더 잘 맞았거든요.”

여자 MC가 되면서 정소녀는 사실상 만능 엔터테이너의 원조가 됩니다.

연기자, MC는 물론 1977년 최병걸과 함께 ‘그 사람’을 불러서 가수로도 활동을 했지만, 정소녀가 가장 각광을 받는 분야는 진행이었습니다.

정소녀: “당시는 사회자는 무조건 아나운서가 하는 줄 알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겁 없는 20대 초반이었으니까 MC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했어요. 일이 좋아서 마냥 행복했지요. 세상에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던 때였어요.”

정소녀: “전성기 시절 바쁜 스케줄 탓에 이성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당시 몇 년 만에 찾아온 학교 동창과 만나게 됐고 2,3 번 만난 동창에게 프러포즈를 받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결혼을 하게 됐다.”

정소녀 전남편 직업은 사업가(여의도에서 의류수출업체를 경영)였고, 고향은 제주도였습니다. 원래 제주도 병원 원장의 아들이었죠.

정소녀는 결혼 이후 잠정 은퇴를 합니다.

이 기간중 약 4개월간 제주도에서 시집살이도 하고, 이후 서울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되죠.

하지만 5년 후 정소녀는 이혼을 하게 됩니다.

정소녀: “남편이 빚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게 됐고 5년 동안 방송 활동을 하며 남편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 서류였다.”

정소녀: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결국 돌아오지 않았어요. 버림받은 거죠. 많이 힘들었어요.”

이후 정소녀는 딸을 키우며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됩니다.

“세간에는 아직까지 ‘정소녀가 흑인을 출산해 그 남편과 이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정소녀는 흑인을 낳지 않았다.”

또한 한국에서는 정소녀의 전 시누이가 인터뷰를 하기도 합니다.

A씨: “난 정소녀가 흑인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의 시기에 같이 살았다. 정소녀가 흑인을 낳았다면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정소녀가 오빠와 이혼했기에 이제 나와는 남이다. 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30년 넘게 악소문에 시달려온 정소녀가 너무 불쌍하다.”

A씨: “우리 집안과 연관된 것이라 나도 그런 소문 때문에 힘들었다. 정소녀는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제 실체도 없는 그 쾨쾨 묵은 소문은 자취를 감춰야 한다.”

확실히 이제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전 시누이가 이런 인터뷰를 할 정도라면, 정소녀의 결백을 믿어야 할 것 같네요.

그렇다면, 정소녀에게 왜 이런 악성 루머가 생긴 걸까요?

아마도 정소녀의 경쟁자쪽에서 정소녀가 차지했던 ‘여성 전문 MC’를 노렸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다른 연예인들에 비해 출연료가 수배, 수십배를 더 받을 수 있는 좋은 이미지 메이킹 자리였기 때문이죠.

당시 정소녀 후임 MC로 들어가기 위하여 굉장한 경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연예계의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 당시 권력층의 부패와 ‘성 접대 문화’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일반 대중들이 ‘정소녀 루머’를 너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아닐까 하네요.

결국,

-> 루머를 믿은 일부 대중이 방송국에 대한 항의 전화

“가족들이 다같이 보는 가족오락관에서 왜 그런 여자를 MC로 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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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녀 남편 이혼이유와 가봉대통령 루머

정소녀 남편 이혼이유와 가봉대통령 루머

정소녀는 70년대에 TV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였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봐도 당시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배우로서 큰 성공을 했지만, 결혼에 실패를 했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현재는 엄지의 제왕에서 고정게스트로 출연을 하며 대중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정소녀 나이는 1954년 1월 21일생입니다. 정소녀 본명은 정애정이며, 종교는 개신교입니다. 키는 163cm이며, 소속사는 연예상회이지요. 학력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이며, 정소녀 데뷔는 1973년 MBC 6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를 했지요. 정소녀는 1974년 이두용 감독의 영화 <똘아온 외다리>에서 조연을 맡으며 영화계에 데뷔를 했고, 이후 작품에서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큰 인기를 끌었지요.

정소녀 과거 사진

정소녀 당시의 인기

정소녀는 CF 출연료로 한국 기네스에 오를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출연료를 받았습니다. 당시 집값이 100만원이었을 때에 광고 출연료가 2~3천만원 정도 받았다고 하지요. 현재로 따지면 30~40억원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차가 있는 여배우였기 때문에 같이 일하는 배우들을 많이 태워줬다고 하지요. 한해 CF출연료를 4천만원까지 받았다고 하니 당시의 인기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소녀 남편 이혼이유

정소녀 결혼은 1979년 4월에 하게 됩니다. 정소녀의 대학동문과 결혼을 했다고 하는데요. 정소녀 남편 직업은 사업가로 제주도의 병원장 아들이었을 정도로 재력가 집안이었지요. 정소녀는 결혼 후에 은퇴를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사업실패로 빚을 지게 되었고, 이것이 이혼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지요. 당시 정소녀 딸이 한 명 있었는데요. 정소녀를 닮아서 예쁜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연예계 진출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딸의 꿈과 거리가 멀어 데뷔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소녀 가봉대통령 루머

정소녀의 연관검색어에 정소녀 가봉대통령, 정소녀 흑인 아이 출산설 등과 같은 루머가 있었습니다. 가봉대통령과 염문설 이후 딸을 낳았다는 어이없는 루머였지요. 1975년 7월 가봉대통령 봉고가 방한을 했고, 여기서 이상한 루머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소녀도 극구부인을 했고, 출처나 사실여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루머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정소녀는 이 때문에 큰 곤혹을 겪게 되었는데요. 진행하던 가족오락관에서도 하차를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사실이 아닌 루머가 연예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네요.

정소녀는 허참과 명콤비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가족오락관이 폐지가 되었지만, 허참과의 인연은 계속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엄지의 제왕을 함께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소녀는 허참과 기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고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엔 허참과 기싸움을 했다. 어느 날은 녹화가 끝나고 허참이 나를 부르더니 내 멘트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정소녀가 중간에 잊으신 것 같길래 내가 했다>고 말을 했더니 대본을 던지며 못해먹겠다고 화를 냈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 때 정소녀가 놀라서 울었더니 허참이 미안하다고 말을 하며 짜장면을 사줬다. 이후 절친이 됐다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배우의 경우 결혼을 하고 활동을 하기가 많이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소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정소녀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정소녀가 앞으로도 건강하게 좋은 활동을 많이 해주길 바라며, 가족오락관처럼 허참과의 명콤비를 기대해보겠습니다. 가족오락관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면 허참과 정소녀는 절대로 빠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소녀 가봉대통령, 정소녀 전남편 이혼사유와 간통죄

정소녀 인생 이야기 탤런트 정소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무시무시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또 어떻게 해서 그런 악성 루머가 생겼는지 궁금하네요.

사실 정소녀 전남편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죠. 또한 정소녀를 둘러싼 다른 사건 역시 궁금하네요.

정소녀 사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정소녀(본명 정애정)은 1954년 1월 21일 태어납니다. 올해 62살이죠(정소녀 나이). (정소녀 키 몸무게) 163cm, 51kg (정소녀 학력 학벌) 수도사대부속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정소녀 프로필 및 경력) 1973년 MBC 6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

영화 돌아온 외다리, 이름모를 소녀 등에 출연했으며 1975년 TBC 연기대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또한 1976년 TBC의 쇼쇼쇼 메인 MC를 맡으며 뛰어난 진행 솜씨를 보여줍니다.

# 목차 * 정소녀 아버지 직업 * 정소녀 과거 색달랐던 * 정소녀 전남편 이혼사유 * 정소녀 가봉대통령 루머 * 정소녀 흑인 아이 출산설 * 정소녀 루머의 진실 * 정소녀 재혼에 대한 생각 * 정소녀 간통죄 * 새로운 각오

* 정소녀 아버지 직업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소녀 집안은 보수적이었습니다.

정소녀 어머니: “돌아가신 남편이 헌병 대장 출신인데 얼마나 엄했는지 아는가. 애정(정소녀의 본명)이는 이 소문(밑에서 언급)을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연예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갑자기 심장병도 생기고 얼굴에 심하게 부기가 오르는 등 병도 많이 얻었다.”

정소녀: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었다. 헌병 대장이었던 아버지가 굉장히 무서웠다. 내가 큰 딸이었는데 엄한 아버지 밑에서 예절교육을 철저하게 받았다. 회초리로 많이 맞았고 부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혼난 적도 많았다.”

정소녀: “내가 연예인이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무용가였던 어머니의 끼를 물려받았다. 전역 후 아버지가 스웨덴 대사관 근무로 외국 생활을 했는데 사고방식이 많이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정소녀 젊은시절 사진 정소녀 과거 사진

참고로 정소녀 어머니는 현대 무용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해외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것 같은데, 헌병대 장교 출신이었던 모양이네요.

정소녀: “나같은 행운아도 없을 것다. 데뷔 이래 탄탄대로를 걸었고 CF 출연 후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몸값도 다른 연예인들과 몇 배 차가 났다.”

정소녀: “전성기 시절 CF 1회 출연료로 2~3천만원을 받았다. 다른 연예인들이 몇 십만원을 받은 것에 비하며 엄청나게 많은 액수였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집 10채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한 편의 드라마 출연료가 겨우 몇 십만원하던 시절이었죠.

정소녀 리즈시절 사진

* 정소녀 과거 색달랐던

정소녀: “저도 정확하게 광고 출연료를 따져보지는 않았어요. 한 해 동안 CF 출연료로 3천7백만원 정도 받았던 거 같아요. 요즘 화폐가치로 따지면 한 80억~90억원이나 된다고 하네요. 덕분에 기네스북에 올랐고 피어리스 화장품 등의 광고도 ‘대박’이 났죠.”

확실히 정소녀의 광고 출연료는 그 당시 여자 연예인들의 몇배가 넘었습니다. 정소녀는 왜 이렇게 높은 출연료를 받았을까요?

바로 정소녀가 연기자 출신 최초의 여자 전문 MC 영역을 개척하면서, 여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소녀: “당시 오락 프로그램 대명사였던 ‘쇼쇼쇼’로 진행자 데뷔를 했어요. 제가 자리를 잡은 몇 년 후부터 여성 MC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죠. 저한테는 큰 행운이었어요. 연기도 그렇지만, 진행이 적성에 더 잘 맞았거든요.”

여자 MC가 되면서 정소녀는 사실상 만능 엔터테이너의 원조가 됩니다. 연기자, MC는 물론 1977년 최병걸과 함께 ‘그 사람’을 불러서 가수로도 활동을 했지만, 정소녀가 가장 각광을 받는 분야는 진행이었습니다.

정소녀: “당시는 사회자는 무조건 아나운서가 하는 줄 알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겁 없는 20대 초반이었으니까 MC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했어요. 일이 좋아서 마냥 행복했지요. 세상에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던 때였어요. ”

허참 정소녀 사진

* 정소녀 전남편 이혼사유

그러다가 정소녀는 1979년 4월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정소녀 남편은 정소녀의 대학 동문 문 모씨였습니다. (정소녀 배우자 신랑)

정소녀: “전성기 시절 바쁜 스케줄 탓에 이성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당시 몇 년 만에 찾아온 학교 동창과 만나게 됐고 2,3 번 만난 동창에게 프러포즈를 받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결혼을 하게 됐다.”

정소녀 전남편 직업은 사업가(여의도에서 의류수출업체를 경영)였고, 고향은 제주도였습니다. 원래 제주도 병원 원장의 아들이었죠(정소녀 남편 집안).

정소녀는 딸을 낳게 됩니다 (정소녀 자녀 자식)(정소녀 가족관계)(정소녀 아들은 없음)

정소녀는 결혼 이후 잠정 은퇴를 합니다. 이 기간중 약 4개월간 제주도에서 시집살이도 하고, 이후 서울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되죠. 하지만 5년 후 정소녀는 이혼을 하게 됩니다.

정소녀: “남편이 빚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게 됐고 5년 동안 방송 활동을 하며 남편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 서류였다.”(정소녀 이혼사유, 정소녀 이혼이유)

정소녀: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결국 돌아오지 않았어요. 버림받은 거죠. 많이 힘들었어요.”

이후 정소녀는 딸을 키우며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됩니다.

정소녀 딸은 외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정소녀: “연예인을 시키려고 딸에게 발레 등을 가르쳐보았지만 본인이 흥미를 갖지 않아 포기했다.”

* 정소녀 가봉대통령 루머

이런 가정사와 별개로 정소녀는 루머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정소녀 루머 내용 – 정소녀가 흑인 아이를 낳았다(정소녀 흑인 아이 출산설). 정소녀가 가봉대통령의 딸을 낳았다(이름, 봉고 대통령).

이에 정소녀는 소문을 부인합니다.

정소녀: “본의 아니게 ‘가족오락관’에서 갑자기 하차했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공격하고 댓글이 올라오지만, 당시에는 방송국으로 전화를 많이 했다. ‘왜 저런 여자를 가족들이 다같이 보는 가족오락관에서 MC로 쓰냐’고 항의했다더라.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제작진으로부터 여자 MC가 바뀌게 됐다고 들었다. ”

허참: “나와 함께 ‘가족오락관’을 7년이나 진행했던 정소녀가 갑자기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된 이유는 악성 루머 때문이었다.”

정소녀 가봉대통령 봉고 사진

정소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나쁜 소문이 나 있었다. 흑인 아이를 낳았다는, 그것도 가봉 대통령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었다.”

참고로 정소녀 루머에 연루된 가봉대통령 봉고는 1975년 7월 처음 방한합니다. (박정희가 봉고를 국빈으로 초대함)(참고로 봉고는 가봉 대통령에 40년 이상 집권했고, 150명이 넘는 자녀들을 가지고 있는 독재자임)

* 정소녀 흑인 아이 출산설

이후 봉고는 3번 더 한국에 오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제 3세력(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국가들)과 외교적으로 가깝게 지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죠.

이런 루머 뒤 정소녀는 거의 연예계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정소녀: “‘가족오락관’은 본의 아니게 그렇게 하차했고, 다른 드라마도 하고 있었는데 다 제가 그만 두겠다고 했다. 출연할 수가 없었다. 당시 의욕이 없어졌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세상 사람들이 절 보는 눈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니 힘들었다.”

정소녀: ” 해명을 했지만, 그래도 (루머를) 믿으려고 안하는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붙잡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가면 어떤 사람들은 ‘깜둥이 엄마’라고 그랬다. 너무 화가 나서 죽을 거 같았다.”

현재까지도 정소녀 루머의 출처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이나 가봉에서도 정소녀의 핏줄이 나타나지 않고요.

가봉 교민들이나 혹은 가봉 권력층에 가까운 사람들(예를 들어서 1986년부터 가봉 봉고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역임한 박상철) 등은 정소녀의 흑인 아이 출산설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가봉에서도 증거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죠.

* 정소녀 루머의 진실

또한 한국에서는 정소녀의 전 시누이가 인터뷰를 하기도 합니다.

정소녀 전 시누이(정소녀 시아버지인 병원장의 딸) A씨: “내가 인터뷰하는 이유는 정소녀 가족 때문이다. 내가 해명해 줘야만 그 가족도 악몽 같은 소문에서 벗어나지 않겠느냐.”

A씨: “세간에는 아직까지 ‘정소녀가 흑인을 출산해 그 남편(인터뷰하는 사람의 오빠)과 이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정소녀는 흑인을 낳지 않았다.”(정소녀 시댁 집안)

A씨: “난 정소녀가 흑인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의 시기에 같이 살았다. 정소녀가 흑인을 낳았다면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개인적으로 정소녀가 오빠와 이혼했기에 이제 나와는 남이다. 하지만 같은 여자로서 30년 넘게 악소문에 시달려온 정소녀가 너무 불쌍하다.”

A씨: “우리 집안과 연관된 것이라 나도 그런 소문 때문에 힘들었다. 정소녀는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이제 실체도 없는 그 쾨쾨 묵은 소문은 자취를 감춰야 한다.”

확실히 이제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전 시누이가 이런 인터뷰를 할 정도라면, 정소녀의 결백을 믿어야 할 것 같네요.

그렇다면, 정소녀에게 왜 이런 악성 루머가 생긴 걸까요? 아마도 정소녀의 경쟁자쪽에서 정소녀가 차지했던 ‘여성 전문 MC’를 노렸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다른 연예인들에 비해 출연료가 수배, 수십배를 더 받을 수 있는 좋은 이미지 메이킹 자리였기 때문이죠.

당시 정소녀 후임 MC로 들어가기 위하여 굉장한 경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연예계의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 정소녀 재혼에 대한 생각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 당시 권력층의 부패와 ‘성 접대 문화’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일반 대중들이 ‘정소녀 루머’를 너무나 쉽게 믿었던 것이 아닐까 하네요.

결국, -> 루머를 믿은 일부 대중이 방송국에 대한 항의 전화 “가족들이 다같이 보는 가족오락관에서 왜 그런 여자를 MC로 쓰냐?”

-> 방송 제작진의 정소녀 외면 -> 정소녀 하차 -> ‘이유없는 하차’에 대하여 대중들은 정소녀 루머를 사실로 받아들임

이런 프로세스로 진행된 것이 아닐까 하네요.

정소녀: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돼 화가 많이 났었다. 연예인이 돼 부모님을 기쁘게 해줬지만 루머 때문에 가슴을 아프게 했다.”

당시 정소녀의 하차가 얼마나 갑자기 결정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소녀: “방송을 떠난 후 경기도 장흥유원지에 레스토랑을 차려 운영하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쉬고 있다. 남편과 서른두살에 이혼한 뒤 딸을 키우며 살았다.”

정소녀: “혼자 사는 게 너무 좋고,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살 생각이다.”

* 정소녀 간통죄

참고로 정소녀가 남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살게된 데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죠.

1989년 1월 정소녀가 이혼한지 4~5년이 되었을 때, 정소녀는 간통사건으로 피소가 됩니다.

고소인 김씨: “정소녀가 지난해(1988년) 8월부터 10월말까지 남편 오 모씨가 경영하는 일본 동경 소재 한국 클럽에 찬조출연하면서 남편과 육체관계를 맺고, 한달뒤인 9월 22일 서울 강남구 ㅍ호텔에서 양가 부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약혼식까지 올렸다. ”

이에 대해 정소녀는 반박합니다. 정소녀: “오 모씨가 부인과 합의 이혼이 이루어졌다고 해 결혼하기로 했었으나, 지난해(1988년) 11월 초 오모씨가 거짓말한 것을 알게 돼 파혼을 하고 예물로 받은 시계도 돌려주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영장을 기각합니다.

서울지검특수 1부 안대희 검사: “정소녀가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염려가 없고, 약혼을 했다 스스로 파혼한 점으로 미루어 삳대방이 유부남이었던 점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다.”

확실히 외국 국적의 사람들과 결혼은 신중해야 합니다. 한국과 달리 쉽게 확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참고로 이렇게 거짓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농락하는 사람들은 좀 강력하게 처벌을 했으면 하네요.

* 새로운 각오

최근에 정소녀는 가끔씩 방송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정소녀: “거짓된 루머는 살인이나 마찬가지다.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하는데, (실제로) 그렇지도 않다.”

정소녀: “이제는 예전 같은 일이 생겨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거예요. 더 이상 물러날 필요도 없고 피할 데도 없으니까요. 예전에는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도망쳤는지. 앞으로는 악플이나 악의적인 기사 등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거예요.”

정소녀: “제가 좀 말이 없는 편이라 가족이나 친척들조차 연예인 될 줄은 꿈에도 몰랐대요. 그런데 이 일(연예인)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밝아졌어요. 그래도 꽤나 얌전한 편이었는데 이제는(나이가 먹은 후에는) ‘대한민국 아줌마 스타일’로 변했어요(웃음). 어렸을 때는 모든 걸 참아야 되는 줄만 알았는데, 살다 보니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군요. ‘참는 게 능사가 아니구나, 인생을 살아 내야 변화란 게 있는 거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확실히 악성 루머에는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대하는 것이 필요하죠. 정소녀가 과거의 루머에서 벗어나서 다시 자신의 인생을 찾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별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하하와 별이 결혼해서 행복한 부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기까지 사연이 많죠.

하하가 방송과 관련하여 사고를 치기도 하고, 전여친 안혜경과 관련하여 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하하를 보면서 유재석이나 별은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할 것 같네요.

하하 별 사진

가수 하하(본명 하동훈)은 1979년 8월 20일 서독 베를린에서 태어납니다(하하 고향). 올해 37살이죠(하하 나이).

(하하 종교) 개신교(기독교)

(하하 키 몸무게) 71.4cm, 60kg

(하하 학력 학벌) 토월중학교, 오산고등학교 졸업, 대진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부 학사, 대진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과 석사

(하하 프로필 및 경력) 2001년 지키리 1집 앨범 [지키리 (Z-Kiri)]로 데뷔

이후 가수 활동 겸 영화 연애술사, 누가 그녀와 잤을까? 원탁의 기사 등에 출연하지만 하하가 두각을 나타낸 곳은 시트콤 논스톱3와 무한도전, X맨, 하하의 19금 TV 하극상 등의 예능 프로그램이었고, 후에 런닝맨으로도 큰 인기를 끕니다.

# 목차

* 어린 시절 출생의 비밀

* 문제아 시절 고백

* 하하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

* 하하 유재석의 인연의 시작

* 하하의 문제점과 시름이 큰 유재석

* 하하 안혜경 공개연애

* 하하 안혜경 결별이유

* 하하 별 결혼

* 하하는 무개념일까?

* 어린 시절 출생의 비밀

하하의 출생지는 좀 특이하게 독일 베를린입니다.

(당시 통일 이전의 서독)

하하: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세 살까지 독일에서 살았다. 당시 어머니는 피아노를 전공했고, 아버지는 공학도였는데, 독일 유학 중 서로 만나 독일에서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하하: “그런데 내가 태어났을 당시 독일 지역 신문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때 내가 4.9kg로 태어났다. 엄마가 갓 태어난 나를 보고 ‘이 아이는 거인이 되겠구나’라고 생각을 하셨을 정도였다.”

하하: “태어났을 때 이미 앞니 두개가 나있었고, 머리에 가르마도 타고 나올 정도로 다 커있었다. 사실 내가 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10개월 반 만에 나왔기 때문이다. 엄마 말로는 ‘나를 뽑았다’고 표현하시더라. 그리고 엄마가 아기의 건강에 좋다고 4.9kg인 나를 자연분만으로 낳으면서 고통이 너무 심해 눈에 실핏줄이 다 터지기도 하셨다. ”

현재 좀 작은 하하가 신생아였을 때 거인(?)이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하하 어머니 김옥정의 아들 사랑이 정말 대단하네요.

눈에 실핏줄이 터질 정도의 고통을 참으면서도 자연분만을 고집했다니…

* 문제아 시절 고백

하지만 하하는 한국에 돌아온 뒤 문제아가 됩니다.

하하: “내가 공부 쪽으로 재능이 없는데, 부모님의 기대가 높았다. 사실 누나가 공부를 잘 했다. 우등생에 전교 회장이었다. 나는 안 되는 공부를 해서 뭐하나 싶었다. 내겐 고등학교 타이틀도 대학교 타이틀도 중요하지 않았다.”

하하: “그리고 수업도중 한강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에 책상을 박차고 나선 적도 있었다. 선생님에게 한강에 가겠다고 말을 하니 날 따로 불러선 정신과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꾀를 부려서 아픈 척을 하기도 했었다.”

하하: “그 외에도 교내 블랙리스트 0순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첫 날부터 (선생님들로부터) 맞았다. 중요한 건 내가 문제아라 해서 나쁜 짓을 했다는 건 아니다. 그냥 집, 한강, 집 한강 이러다 가끔 친구들에게 100원 빌려서 노래방에 간 게 전부였다.”

하하가 어렸을 때 공부에 소질이 없었던 것 같네요.

사실 이 부분은 하하의 잘못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기성 세대의 문제가 더 큽니다.

인생에는 공부외에도 여러가지 길이 있지만, 사회와 대부분의 부모들은 공부만을 강요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하 부모님은 하하에게,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경제관념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하하: ”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용돈을 거의 주시지 않아서 이태원에서 호객행위를 하며 가방, 운동화 등을 팔았다. 브랜드 물품은 호객꾼은 부르는 것이 가격이다. 특히 강남에서는 더 비싸게 팔아서 수익을 많이 남겼다.”

하하: “당시 HOT로 활동 중이던 문희준 씨한테도 두건 2개와 일본 나이키 운동화를 비싼 가격에 팔았다. 그외에도 힙합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호객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부가킹즈의 주비 트레인 역시 뽀빠이 골목 매상 1위였다.”

* 하하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

이렇게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하하는 가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하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를 도와준 것이 바로 어머니 김옥정이었습니다.

김옥정: “아들(하하)이 가수를 너무 하고 싶어 했다. 서울 강남의 기획사를 찾아갔는데 관계자가 하하에게 ‘발라드 시키면 물건이 되겠다’고 하더라. 그러나 알고보니 그곳에서 청소나 심부름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돈까지 요구해 사기를 당했다. ”

김옥정: “결국 구청에 가서 사업자를 등록하고 OJ(옥정) 기획사를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직접 외국인도 섭외하고 엠넷에 전화해 장비도 빌려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그리고 이건 아들도 모르는 일인데, 매니저가 따로 없어서 내가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아들 앨범을 홍보했다. OJ기획이라고 분홍색 명함도 직접 만들어서 PD들에게 돌렸다.”

보통 예전에는 자식이 가수를 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부모가 많았는데,

하하 어머니의 경우는 직접 회사까지 차려서 아들을 지원했네요.

어머니의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하는 가수로서는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고, 2002년 논스톱3로 주목을 받았고, 예능 무한도전과 X맨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 하하 유재석의 인연의 시작

그런데 이 전에 사실 하하는 크게 방황하기도 합니다.

하하: “살면서 방황을 하기도 했어요. 당시 절친인 MC몽과 노홍철은 점점 더 인기를 얻으며 승승장구했고, 나는 주변의 부추김 등으로 인해 점점 더 궁지에 몰렸죠. 결국 내 자신이 불쌍하고 초라했어요. 누가 나를 좋게 봐주겠냐는 반항심과 패배주의에 삭발을 하고 1년 6개월가량 폐인처럼 살았어요. ”

하하: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잘할 수 있는게 뭔가? 그런데 없더라구요. 섭외는 들어왔지만 제가 두려워서 나가지 못했어요. 어차피 내가 머리 이쁘게 해도 누가 나를 좋게 봐주겠어. 이런 괜한 반항심 있잖아요. 심각했어요.”(하하 방황 고백)

하하: “이 원망은 내 탓인데 남한테 돌리기 시작한 거예요. 모든건 다 똑같은것 같아요. 제가 필요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대중의 외면은) 당연한 것 같아요. 그런데 심지어 그런 상황에도 어떤분께서는 또 저에게 하나의 희망을 주신 분이 또 계세요.”

이때의 은인이 바로 유재석입니다.

하하: “그 당시 제 친구들이랑 같이 압구정 가서 소주 한잔 하고 나왔는데 유재석씨랑 누구랑 이렇게 온거예요. (그때까지) 제가 재석이형을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마주친 적도 없었죠. 그런데 재석이 형이 나한테 “하하야” 이렇게 말을 하는 거예요. 순간 갖고 싶다. 이 사람. 제가 이 사람이랑은 꼭 친해져야겠다는 목표가 생긴 거예요. 제가 힘든지 아닌지 그 사람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말 한마디에 같은 희망을 얻고 다시 무대 위에서 함께 뛰어 놀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 거예요. ”

아마 하하도 유재석의 따뜻한 인간미에 반한 것 같네요.

유재석의 섬세함도 돋보입니다.

당시 이름이 조금 알려진 신인인 하하의 얼굴과 이름을 방송으로 보고 기억해뒀다가 아는 척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죠.

* 하하의 문제점과 시름이 큰 유재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하는 방송 생활에 문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박명수 폭로: “방송할 때 술 먹고 녹화장에 오는 후배가 있다. 누군지 말할 수는 없지만 공익근무중이고 이름은 2자다.”

이름을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하하’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명수: “한 두 번은 참다가 유재석이 나중에 조리 있게 타일렀다.”

성격 좋기로 유명한 유재석 역시 ‘술 마시고 녹화장에 오는 행동’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에 대하여 하하가 스스로 자백을 합니다.

하하: “사실 재석이 형은 나와 형돈이 형이 같이 다니는 걸 안 좋아한다. 무한도전 멤버들 중 우리 둘만 술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하: “게다가 과거 녹화 전날 과음을 해 크게 혼난 적이 있다. 과음하고 다음날 녹화를 가면 굉장히 싫어하신다. 그래서 재석 형한테 들킬까봐 사우나하고 향수 뿌리고 간적도 있다.”

하하: “한번은 크리스마스 촬영날은 한 시간을 지각한 적이 있다. 그때 오프닝 때 재석이 형이 나에게 ‘하동훈 너 다섯 번 이상 못 웃기면 죽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날 (죽을 힘을 다해) 여섯 번을 웃겼다.”

방송인뿐만 아니라 직장인들 역시 술이 덜 깬 상태로 술냄새 풀풀 풍기면서 회사에 출근하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하물며 높은 보수를 받고,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는 방송인들은 더더욱 자기 관리에 엄격해야 하죠.

하하: “한번은 형(유재석)을 집 앞에 데려다주고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어요. 뒤에서 안을 뻔했어요.”

하하: “(유재석은) 저를 사람 만들어준 사람입니다.”

유재석에 대한 하하의 감정은 사랑과 존경이 섞인 것 같네요.

아무튼 유재석은 이렇게 젊은 시절 잘 놀던 하하가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의 잔소리와 훈계가 무한도전내에서 가장 술을 좋아하는 정형돈과 하하를 향해서였을까요?

결국은 술로 길과 노홍철이 사고를 쳤네요.

이쪽을 경계하다가 다른쪽에서 허무하게 허물어질 때의 허망함은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입니다.

아마 유재석 역시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네요.

사실 하하나 정형돈, 길, 노홍철 등은 미성년자가 아닙니다.

스스로 앞가림을 해야 하는 성인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을 좋은 길로 이끌려는 유재석의 노력이 인상적임과 동시에, 말을 잘 안 듣는 동생들로 유재석의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 하하 안혜경 공개연애

하하는 오랜 방송인 생활을 하면서 공개 연애를 하기도 합니다.

바로 기상캐스터 출신 안혜경이 하하의 전 여자친구(여친)였죠.

두 사람은 약 2006년 7월경 열애설이 불거졌을 때 이를 인정합니다.

하하가 안혜경을 위한 노래 ‘너는 내 운명’을 만들어서 크게 히트치기도 했죠.

(사실 이 노래가 하하의 거의 유일한 대표곡임)

당시 이 뮤직비디오에는 하하와 안혜경이 동반 출연해서 이슈가 되기도 합니다.

(뮤비 내용- 달에 사는 어린왕자(하하)가 지구에서 날씨를 소개하는 안혜경을 보고 반해서, 꽃 등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

하하 안혜경 사진

그리고 하하가 이 노래로 상을 수상할때마다 안혜경을 언급합니다.

(너는 내 운명 2008년 1월 18일 KBS 《뮤직뱅크》 K-Chart 1위

1월 27일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

하하: “함께 해준 스탭들께 감사한다, 또한 소녀시대와 빅뱅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안혜경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마 하하는 누구보다도 안혜경에 대한 고마움이 컸을 것 같네요.

그런데 하하는 이 노래를 나중에 별과 결혼할 때 다시 이용합니다.

(밑에서 설명)

* 하하 안혜경 결별이유

아무튼 하하와 안혜경은 2009년 11월 경에 하하가 군대에 있을 때 이별하게 됩니다.

(당시 하하는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고 있었음)

하하와 안혜경이 헤어진 이유는 두 사람이 자주 만나지 못하면서 서서히 멀어졌고, 또한 성격차이 역시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별 당시 측근의 말

“현재 두사람 모두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전에도 자주 싸우기도 하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적도 있지만, 이번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결별 이후 안혜경이 언급한 이상형은 그런 의미에서 좀 의미심장합니다.

안혜경: “(결혼 상대는) 매달 월급이 들어오는 공무원, 선생님 등 안정적인 직업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

안혜경: “또한 해외에 사는 한국 남자였으면 좋겠다. 교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난 강원도 시골 출신이다보니 예전부터 미국에 이모가 산다, 캐나다에 친척이 있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안혜경: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던 친구가 대학에 간 뒤 처음 간 나이트에서 처음 부킹한 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사는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집 안에 종업원만 아홉 명을 두고 잘 사는 모습을 보니 부럽더라.”

안혜경의 이상형이 거의 모든 면에서 하하와는 정반대인 점이 흥미롭네요.

어쨌든 옛 연인에 대하여 안혜경은 좀 복잡미묘한 심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밑에서 추가 설명)

* 하하 별 결혼

이후 하하는 별을 만나서 결혼하게 됩니다.

원래 둘은 결혼 전 7~8년 정도 아는 사이였고, 2012년 3월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기 시작했죠.

하하: “(별은) 저한테 없는 걸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예요. 조신하고 귀엽고 청순한데 섹시한(웃음), 노래도 굉장히 잘하고요. 무엇보다 효심이 지극해요. 고은이(별)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어요. ‘저런 여자면 결혼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독실한 신앙심도 빼놓을 수 없고요.”

하하: “김옥정 여사님(하하 어머니)의 지원이 없었다면 결혼이 이렇게 빨리 성사되지 못했을 거예요. 어머니가 고은이를 정말 예뻐하세요. 또 양가 어머니가 다 사역자의 길을 걷고 계셔서 마음이 잘 통하시는 것 같아요. 특히 고은이가 아담한 사이즈라 좋아하세요(웃음). 힐을 신어도 제 품에 쏙 들어가거든요.”

별의 성격과 효심, 그리고 종교에 하하가 반한 것 같네요.

별: “(결혼식 당시)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남자(하하)를 만나 정신을 차려보니 드레스를 입고 이 자리에 있다.”

하하: “고은이한테 이미 오래전부터 장난 삼아 ‘결혼하자, 너는 나와 결혼하게 될 거야’ 하면서 세뇌를 시켰어요. 사귀자는 얘기도 없이 결혼하자로 시작한 거죠(웃음). 결국 제 소원을 이뤘어요.”

하하가 오랫동안 장난식으로 말한 ‘결혼하자’에 별도 은연중에 넘어간 것 같네요.

그런데 일부에서는 공개연인이었던 안혜경을 놔두고 하하가 이런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탐탁치 않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 하하의 난봉꾼 기질(?)이 이때도 발현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하네요.

별: “내가 3집 앨범 재킷에서 노출을 좀 했더니 가슴 성형설이 나돌았다. 그런데 그게 궁금했는지 (하하가) 전화로 물어보더라.”

별: “(내 가슴이) 자연산이라고 말했더니 하하가 ‘우와’라며 탄성을 지르더라.”

하하: “별의 사진을 검색했는데 19금이 쭉 나오더라. 가슴을 집중적으로 봤다. 이게 수술이 아니라면, (별을)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 하하는 무개념일까?

이후 하하와 별은 2012년 8월 14일 결혼식을 발표하고, 동년 11월 30일 결혼하게 됩니다.

(하하 배우자 와이프 별)(하하 아내(부인) 별)

그리고 하하와 별은 아들을 낳게 됩니다.

(하하 별 자녀 자식)(하하 별 가족관계)

하하 별 아들 하드림 사진(돌잔치에 유재석도 참석)

그런데 하하와 별이 결혼 발표를 할때 안혜경 역시 이를 축하해줍니다.

먼저 8월 14일 하하는 자신의 트위터에

“재석이 형의 생일을 진심 축하드립니다. 생일에도 촬영 열중하시는 예능신”이라는 글을 습니다.

(참고로 결혼 발표일 8월 14일은 유재석의 생일이기도 함)

이에 안혜경이 하하의 글에 댓글을 달아 화답을 했죠.

– 와 진심으로 축하해요. 오늘은 유느님도 하로로도 축하!

안혜경이 참 쿨한 것 같네요.

그런데 이런 전 여친의 쿨함이 부러웠을까요?

하하는 자신의 결혼식 자축곡으로 ‘너는 내 운명’을 사용합니다.

노래야 워낙 좋았기에 별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노래에 대한 히스토리가 있었기에 새신부인 별의 심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네요.

어떻게 보면 하하는 철이 없고 생각이 짧은 반면에, 별이 사려깊게 그것을 이해하는 편이 아닌가 합니다.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참으로 ‘큰 복’이 아닌가 합니다.

하하에게 유재석이나 별은 그의 인생을 바꾼, 그리고 그가 사람답게 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네요.

.. ..

백지연 인생 이야기

백지연 아나운서에 대한 루머와 스캔들이 퍼지고 있네요.

이런 부분은 제대로 진실을 밝혀서, 잘못된 오해를 피해야 할 것 같네요.

백지연이 과거에 재판에 연루되었던 부분, 그리고 그녀의 결혼 생활들의 실패가 좀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백지연 사진

현재 MC 겸 대학교수 백지연는 1964년 8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백지연 고향). 올해 52살이죠(백지연 나이).

(백지연 키 몸무게 혈액형) 173cm, 50kg, AB형

(백지연 학력 학벌) 인왕초등학교, 풍문여자중학교, 창원 명지여자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과 석사

(백지연 프로필 및 경력) 1987년 MBC 15기 공채 아나운서로 데뷔

1988년 5월부터 1996년 8월까지 여성 앵커로서 최장 기간동안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합니다.

이후 아나운서에서 보도국 국제부 기자로 전직했고, MBC 퇴사 이후에 프리랜서 여성 앵커로, YTN 백지연의 뉴스Q,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 백지연의 끝장토론 등을 진행합니다.

그 외에 수필집 9권과 소설 물구나무 등,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활약합니다.

# 목차

* 어린 시절

* 백지연 아나운서 합격 이유

* 백지연 방송사고

* 백지연 강형구 결혼

* 백지연 친자확인소송 결과(백지연 찌라시 내용)

* 백지연 사표 이유

* 백지연 두번째 남편 송경준(백지연 재혼)

* 백지연 이혼 이유

* 백지연 연기

* 백지연 성형 루머 해명

* 백지연 세번째 남편 생각

아마 유명 여성중에서 백지연만큼 많은 루머에 시달린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현재도 백지연의 연관 검색어로 ‘백지연 친자확인소송’과 ‘백지연 간통피소’ 등이 있습니다.

왜 그런 루머가 도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네요.

* 어린 시절

백지연은 4자매중에서 막내로 태어납니다.

어렸을 때부터 막내로 귀여움을 많이 받았는데, 중학교때까지는 성적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백지연: “자기 설득 기제는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중학교 때까지 나의 학교 성적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 성적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자 내 마음엔 ‘작심’이 생겼다.”

이 ‘자기 설득 기제’라는 ‘긍정의 힘’ 혹은 ‘말이 씨가 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밑에서 추가 설명).

백지연: “고등학교 1학년 가을, 나는 지금 생각해도 참 대견하게 무척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을 마감하는 학기말 고사의 결과엔 나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반에서 몇 등이 전교에서 몇 등으로 바뀐 것이었다. 공부를 해보자는 내 안의 설득은 열매 하나를 맺었고, 난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 하나를 새로 기록하면서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

백지연은 대학교에서 ‘연대 브룩쉴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외모로 유명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4학년때 아나운서로 지원합니다.

백지연: “(그 당시에는) 뉴스 리딩이 뭔지도 몰랐어요. 제가 시험 볼 때 족히 2천 명은 왔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몰랐어요. 노메이크업으로 입던 옷 입고 시험장에 갔죠.”

백지연이 87년 입사를 했는데, 당시에는 아나운서 학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죠.

백지연: “학교 4학년 때 시험을 봤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는데, 시험생들이 전부 신부 화장을 하고 왔더라고요. 저처럼 청바지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순간 생각했죠. ‘떨어졌구나, 경험 삼아 시험을 보자.’라고요.”

그런데 의외로 백지연은 MBC와 KBS에 모두 합격하게 됩니다.

* 백지연 아나운서 합격 이유

백지연: “MBC 실기 시험 당시 조명이 터졌다.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었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카메라를 보면서 아나운싱을 했다.”

백지연: “그러자 면접관들이 ‘백지연 씨는 안웃었네?’라 묻길래 ‘방송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놀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겨우 23살의 어린 나이에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네요.

아마 이런 이유가 백지연의 가장 큰 합격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백지연은 MBC 입사 이후 5개월째인 수습사원 시절에, 일약 메인 뉴스인 뉴스데스크의 여자 앵커로 발탁이 됩니다(백지연 앵커).

전무후무한 일이었죠.

백지연 과거 사진

백지연: “앵커 선발을 위하여 앵커 선발을 위하여 오디션을 치를 무렵이었다. 선배들로부터 ‘네 인상이 너무 차갑다’는 말을 들었다. 또 선배들이 ‘옷을 부드러운 색으로 입어봐라’ ‘미소를 머금어라’ 등의 조언을 해주었다.”

(백지연 뉴스데스크 발탁 이유)

백지연: “그런데 차갑다는 말에 신경 쓰다 보니 다음 오디션을 더욱 망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차가운 인상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오히려 그것을 당당함으로 발산시켜 내 자신감을 살리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9시 뉴스 앵커로 발탁되는 파격을 만들 만큼 오디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결국 백지연은 입사 5개월만에 9시 뉴스 앵커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상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백지연이 빽을 썼다’, 혹은 ‘백지연 집안이 대단하다’ 등의 루머를 만들어 냅니다.

백지연의 실제 노력과 재능이 어떤지 모르는 사람들의 시샘이었죠.

* 백지연 방송사고

9시 뉴스를 진행하면서, 백지연은 여러가지 사건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백지연: “강성구 앵커가 아나운싱을 하는데 누군가가 뚜벅뚜벅 오더니 카메라 선을 넘었다. 원래 속보가 있을 때 가끔 기자들이 들어온다. 그런데 약간 기분이 이상했다. 그 사람이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왔다. 그러더니 앵커마이크를 뺏더니 ‘제 귀에 도청장치가 있습니다’는 말을 하더라. 강성구 앵커의 놀란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백지연: “결국 강성구 앵커의 놀란 얼굴이 전세계에 나갔다. 스태프의 육두문자가 들렸다. 그리고 카메라 감독과의 육탄전 끝에 마무리 됐다. 카메라 감독님들이 뛰어와 괴한을 제압했다. 내 인이어에서는 제작진들의 육두문자가 들리더라. 그 뒤로 강성구 앵커가 살이 쪽 빠졌던 것 같다.”

백지연: “용납될 수 없는 방송사고에 회사도 난리가 났다. 그 뒤부터 뉴스 스튜디오에 들어갈 때 앵커도 카드를 찍어야 하는 보안 시스템이 가동됐다.”

사실 이 정도의 대형사고라면 백지연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 같네요.

아무튼 방송이란 한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기에, 백지영의 배짱과 담대함이 더욱 빛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 백지연 강형구 결혼

이후 백지연은 약 8년동안 뉴스데스크를 별탈없이 진행했고, 96년 로이터 통신 장학금으로 영국 연수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당시 유학생이었던 강형구를 만나게 되었죠.

백지연 첫번째 남편 강형구 직업은 옥스퍼드대 공학박사였고, 나이는 백지연보다 1살 연하였습니다(97년, 백지연 첫번째 결혼).

백지연은 아들을 출산했지만, 둘은 1999년 1월 합의 이혼을 하게 됩니다.

(백지연 이혼이유, 백지연 이혼사유 – 성격차이)(백지연 전남편 강형구)

그런데 미국 LA의 모 교포신문의 고위인사가 PC통신에 ‘모 유명 여성앵커가 이혼한 이유는 아이가 모방송국 고위층과의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소문 때문이다.’라는 글을 썼고, 백지연 간통 루머가 일파만파 퍼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백지연 간통피소’라는 루머도 퍼지게 됨.)

* 백지연 친자확인소송 결과(백지연 찌라시 내용)

결국 백지연은 상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합니다.

재판과정이 매우 긴데 간략화하면…

백지연은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전남편 강씨를 증인으로 채택하지만, 강씨는 재판에 출석하지 않습니다.

백지연 주장: “재판에 출석하지 않은 전 남편 강모씨를 이해할 수 없다. 전 시아버지 강씨를 증인으로 채택해 진실을 들어봐야 한다.”

이에 열받았는지(?), 백지연은 ‘전남편에 대한 친권상실소송’을 계속 진행합니다.

아무튼 재판중 백지연은 친자확인까지 제안했고, 결국 그 검사가 나오게 됩니다.

(이 부분 역시 루머 혹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음.

전남편에 의해서 친자확인 소송이 제기되었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실은 백지연의 명예훼손 사건에서 백지연이 직접 제안한 일임)

서울지방법원 형상 13단독 이상주 판사 8차 공판

(백씨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기소된 미주통일 신문 발행인 배부전 피고인)

“유전자 감식 결과 피고인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

사실 유전자 감식은 100%의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대략 95%의 일치점이 나오면, 친자로 인정을 하는 것이죠.

즉, 재판부의 ‘피고인에게 불리한 결과’란, 바로 백지연 아들이 백지연 전남편 강형구의 친자임이 확실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백지연: “재판결과는 당연한 결과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악몽을 떨쳐낼 수 있게 됐다.”

* 백지연 사표 이유

그리고 이 사건과 별개로, 백지연은 1999년 3월 MBC에 사표를 제출하게 됩니다.

백지연: “MBC 앵커라는 자리는 매우 안정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동안 여성 앵커만큼은 백지영의 MBC라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조직에 묶여 있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됐다.”

(백지연 사퇴 이유)

백지연: “아직까지 프리랜서 앵커라는 개념은 생소하다. 사표를 던진 것은 앵커로서만이 아닌 방송인으로서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다. 기회가 닿는다면 고급 시사토크쇼의 진행을 맡고 싶다.”

이렇게 백지연은 이혼과 친자확인 소송이라는 난관전후에도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네요.

당시 MBC는 발칵 뒤집혔고 백지연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백지연의 뜻이 워낙 완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백지연을 프리랜서로 풀어주게 됩니다.

사실 한국에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지만,

백지연처럼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면,

누구도 여성이라는 이유으로 함부로 비하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이후 백지연은 여러가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본인의 영역을 더욱더 넓힙니다.

* 백지연 두번째 남편 송경준(백지연 재혼)

그러다가 백지연은 2001년 국제금융인 송경준을 만나게 됩니다.

(백지연 두번째 남편 직업)

당시 송경준은 백지연보다 13살 연상이었고, 미국 펜실베니아 와튼스쿨에서 MBA를 취득했으며,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부총재 자문역을 맡기도 했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국제금융 박사학위를 딴 뒤 일본 노무라그룹 프로젝트 금융사의 수석부사장을 맡기도 하는 등의 국제적인 금융인이었습니다(송경준 프로필).

백지연은 송경준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는데,

돌연 2007년 5월 이혼을 하게 됩니다.

(백지연 이혼이유, 이혼사유 성격차이)

* 백지연 이혼 이유

두번째 이혼에 대하여 백지연은 이례적으로 공식적인 보도를 합니다.

법무법인 화우(백지연 법률 대리인): “백지연과 송모씨는 2007년 5월 이호에 합의, 6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했다. 2009년 초 미국에서 모든 법적 절차를 마무리했다.”

법무법인 화우(백지연 대리인): “백지연씨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조용히 이혼 절차를 밟았으며 두 사람은 각자 일과 생활을 성실히 하면서 서로의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법무법인 화우(백지연 대리인): “백지연씨는 많은 국민의 성원과 사랑을 받아온 방송인으로서 본인의 신상에 관한 내용을 직접 알려드리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혼에 관한 사항은 당사자 이외에는 누구도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는 만큼 근거 없는 보도가 나갈 수 있음을 우려해 이혼 사실을 밝히기로 했다.”

즉, 백지연은 위에서 언급했던 ‘친자확인 소송’등의 트라우마 때문에,

두번째 이혼에 대해서는 일부러 보도까지 한 것이 아닌가 하네요.

* 백지연 연기

백지연은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자기 설득 기제를 잘 활용한 사람이죠.

백지연: “말이 씨앗이 된다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어요. 말을 하면 꼭 (실행)하게 되거든요. 저는 ‘언젠간 소설을 쓸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열 권의 책을 쓰겠다’는 말이 이루어졌듯, 말로 뿌린 씨앗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즉, 백지연은 수필 9권과 소설 1권을 쓰기 전부터,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다녔네요.

물론 백지연은 살면서 후회하는 일도 합니다.

백지연: “미국에 있을 때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화 괴물 출연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 오면 만나자고 했다.”

백지연: “영화 내용을 물었더니 서울에 괴물이 출몰하는 영화인데,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 역할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멈칫 멈칫했고 결국 다른 분이 하게 됐다. 이건 내가 태어나서 가장 심하게 후회한 것 중에 하나이다.”

이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요,

요즘 백지연은 풍문으로 들었소에 출연하여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판석(풍문으로 들었소의 PD): “사실 백지연과 나는 MBC 입사동기다. 항상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연기를 하면서 이야기해 주는데 ‘재주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보고나서부터 농담처럼 자신도 연기를 시켜 달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백지연 드라마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

안판석: “그런데 이번에 상류사회의 여자들을 캐스팅하는데 갑자기 백지연이 떠올랐고, 우연히 만나 역할을 제안했다. 막상 제안했더니 가슴이 철렁했는지 출연 결정을 여러 번 번복하더라. 그래서 결국 ‘다들 한다고 알고 있으니 안할 수 없다’고 족새를 채워 결국 하게 만들었다.”

안판석: “그런데 (백지연이) 연기를 정말 잘한다. 출연자들 속에 잘 섞여 백지연인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다.”

* 백지연 성형 루머 해명

한때 백지연에게 성형설이 돌기도 합니다.

백지연: ” (하루에도) 일정이 서너 번이 녹화라 시술할 시간이 없다. 대신 잠이 많아 잠을 많이 자는 편이다. 어려서부터 일찍 자고 숙면을 취해왔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잔다. 뉴스데스크를 진행할 때도 가족들이 ‘너 그 때 자잖아?’라 말할 정도였다. 정말 많이 잤다.”

그런데 얼굴이 탱탱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목주름이 하나도 없는 점은 정말 신기하네요.

백지연이 주사나 필러 등을 맞은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것들은 성형에 포함되지는 않죠.

아무튼 백지영이 오십대치고는 정말 동안인 것 같습니다.

* 백지연 세번째 남편 생각

백지연은 초혼과 재혼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을 믿는 것 같네요.

백지연: “나는 사랑은 F학점이었다. 이성 보는 눈이 없었다.”

백지연: “내가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소설 쓰기인데, 소설에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있겠느냐. 언제든 (내 인생에) 아름다운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름다운 일이 생겨, 다시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죠.

비록 백지연이 두번의 실패를 했지만, 다시 좋은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도 좋고, 혹은 현재처럼 당당하게 혼자 살아도 좋은 것 같습니다.

주영훈 이윤미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대중이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기본적인 도덕심에 연연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은연중에 이를 매우 중요시여기는데, 여전회 회자되는 주영훈 손태영 신현준 삼각관계사건을 보더라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영훈 손태영의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주영훈의 어린 시절을 통한 그의 성격을 알아야지 당시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주영훈 아내 사진 가수 겸 작곡가 주영훈은 1969년 11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주영훈 고향). 올해 47살이죠(주영훈 나이). (주영훈 종교) 개신교(기독교) (주영훈 학력 학벌) 경기고등학교 졸업, 노던버지니아커뮤니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참고로 주영훈 강용석 구준엽(클론)과 강원래(클론)가 경기고 동기입니다. 당시 경기고를 추첨으로 들어가던 세대였죠.)

(주영훈 프로필 및 경력) 1993년 나를 위한 일 1집 – 조나단의 꿈으로 작곡가로 데뷔

엄정화, 코요태, 터보 등의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 작곡합니다. 본인 역시 1997년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곡으로 가수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 주영훈 * 어린 시절과 성격 * 주영훈 손태영 신현준 사건 * 주영훈에 대한 손태영의 입장 * 주영훈 군대 문제 * 주영훈 마약 사건 루머 * 주영훈 학력위조 사건 * 주영훈 이윤미 임신과 주영훈 딸 * 주영훈 부인 이윤미에 대한 평가 * 주영훈 이윤미 이혼 거리먼 이유

* 어린 시절과 성격

주영훈은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만, 곧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하게 됩니다. 주영훈 아버지가 미국의 한인 교회의 목사였는데, 이때문에 큰 마찰을 빚고 다시 혼자 한국으로 왔죠.

주영훈: “제가 목사님 아들이고 경기고등학교 나오고 강남에서 자랐다고 하니까, 굉장히 큰 재벌 목사님 아들인 줄 알아요(웃음). 저 미국에서 27만원 들고 한국에 와서 자수성가했거든요.”

주영훈은 음악가를 하고 싶은데, 주영훈 아버지는 주영훈을 신학대학에 진학시켜서 목사를 만들려고 합니다.

주영훈: “그래서 한국으로 도망왔어요. 악기 사고, 비행기 표 사고 수중에 남은 돈이 3백불이었어요. 그런데 공항 세관에 악기가 걸린 거예요. 전 재산이 27만원인데 세금을 78만원 내라기에 한 시간을 울면서 빌었어요.”

당시 꽤 비싼 악기를 산 모양이네요.

주영훈: “세관에서 울면서 ‘제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음악을 하러 왔는데 돈이 27만원밖에 없다. 성공하면 이 은혜 잊지 않겠다’고 사정했더니, 안 돼 보였던지 봐주시더군요. 그때부터 2년 동안 아는 선배 집을 전전하면서 데모 테이프 들고 기획사 찾아다니고, 맨땅에 헤딩한 거죠.”

이후 주영훈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곡가로 크게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인 스스로 고백하는 본인의 성격이 흥미롭네요.

주영훈: “주변에 (이경규를 비롯한) 독한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저랑 맞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다 저랑 맞는다고 생각해요. 어떤 형들은 자기랑 성격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이 영훈이라고 하는데, 저는 안 맞으니까 너무 피곤한 거예요. 혼자 꾹꾹 삼키는 편이니까 그 스트레스가 저한테만 생기는 거죠. ”

주영훈: “저는 닭고기, 돼지고기를 못 먹어요. 근데 그렇게 말하면 ‘무슨 남자가 못 먹는 것도 많으냐’ 그렇게 볼까 봐 사람들이 삼겹살 먹으러 가자고 하면 못 먹어도 그냥 따라가요.”

주영훈은 본인이 싫어도 일단은 그냥 참는 성격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주영훈의 성격이 부드러우면서 약한 것 같은데, 이 부분을 감안하고 밑의 사건을 바라봐야겠네요.

* 주영훈 손태영 신현준 사건

(주영훈 손태영 신현준 삼각관계 간략 정리

2000년 6월부터 주영훈과 손태영이 약 1년 이상 열애 (서로의 집안에도 인사를 한 사이였음) (당시 주영훈은 32살, 손태영은 21살)

2001년 7월 손태영이 가수 김정민의 새앨범 <러브 인 모스크바>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상대 배우는 신현준이었음 (뮤직비디오는 캐나다에서 촬영되었는데, 이 기간에도 손태영과 주영훈은 연인다운 전화통화를 했다고 함 )

2001년 8월 손태영과 신현준은 (공식적으로)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서 급격하게 가까줘졌다고 함. 귀국 직후 크게 다투고 헤어졌지만, 8월 초부터 다시 사귀게 되었다고 함 (9월 20일 지방의 놀이공원에서 데이트 장면 목격되었고, 10월 11일 과천 서울랜드에서도 데이트 장면이 목격됨)

2001년 10월 12일 주영훈 실연 기사가 터짐 처음 대상은 여대생 김모양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주인공이 손태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짐

주영훈: “8월초 손태영으로부터 ‘성격이 안 맞는다’며 일방적인 결별을 통보받았다. 캐나다에 있을 때도 손태영과 다정하게 전화 통화를 했던 터라 이해할 수 없가 없었다.”

한때 주영훈 자살설까지 보도될 정도로 주영훈의 타격이 컸습니다.

주영훈 공식 입장: “손태영이 결별을 선언해 한동안 어리둥절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손태영과 신현준의 열애설이 보도된 뒤에는 홀가분하게 털어냈다. 또한 자살에 대한 언급은 한 적이 없는데 (기사가) 잘못 보도된 것 같다.”

당시 주영훈은 실연의 아픔으로 15kg이나 살이 빠졌고 심정적으로 무척 괴로운 상태였기에, 기사가 약간 앞서나갔던 것 같습니다.

주영훈: “(손태영은) 순진하고 착한 여자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인사를 시켰고 결혼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손태영은 아직 어리다. 그에겐 잘못이 없으며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점 원망도 없다.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 미워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주영훈: “(신현준과는) 서로 눈인사는 한 적 있지만 말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캐나다로 뮤직비디오 촬영을 떠나기 전 나와 손태영이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런 점에서 화가 난다. 남자라면 누구나 똑같은 심정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후 주영훈은 엄정화의 새 노래 ‘다 가라’를 만듭니다. – 이제 맘 편해졌어.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한 거야. 항상 상처뿐인데. 구속 따윈 필요 없어. 이제부터 늦더라도 아무 부담 없어. 애써 전화 보고할 일도 없잖아. 누굴 만나든지 어디로 가든지 이젠 내 맘대로야….

가사에 주영훈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네요.

* 주영훈에 대한 손태영의 입장

이에 대한 손태영의 공식 입장은 무엇일까요? 손태영은 주영훈과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약 2년 후 신현준과의 결별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언급합니다.

손태영: “처음 (신현준과의) 결별 사실이 일제히 보도되며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2년전 악몽(주영훈 손태영 신현준 삼각 스캔들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아무리 사람들에게 항변해도 사람들은 그저그런 삼각 스캔들로 치부해버릴 때 그 비참했던 기분이 다시 생각났죠. 이번에도 내가 아무리 얘기를 해봤자 결국 사람들은 나의 얘기에 귀기울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두려웠어요.”

즉, 손태영은 삼각관계가 아니었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손태영의 입장을 감안하면, 뮤직비디오 촬영때 신현준과 썸을 탔고, 이후 귀국해서 주영훈과 깨끗하게 정리를 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삼각관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이 너무 짧았던 점과, 1년 이상 사랑했던 남자에 대하여 사랑이 식는 과정이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점이 문제가 되겠죠.

이 사건에 대하여 신현준 역시 공식입장을 나타냅니다.

신현준: “삼각관계라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그리고 주영훈으로부터 손태영을 ‘빼앗았다’는 세간의 시선은‘오해’이다.”

신현준: “당시 영화촬영 때문에 부산의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2년이라 기억이 나는데,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했어도 기쁘지 않았다. 좋아하고 나서 기사가 났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다치는 것 보다 내가 다치는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신현준: “무척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성숙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분들(주영훈과 손태영)과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모두 편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연애는 본인의 자유입니다. 마음이 식은 상태에서 전 남자친구(혹은 전 여자친구)와 억지로 사귈 수는 없죠. 다만,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무우 자르듯이 단칼에 자르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네요.

특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영훈이 손태영을 자기 부모님에게 인사까지 시킬 정도였다면, 둘만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과의 관계도 문제가 되니까요.

어쨌든 이때 타격이 컸는지, 주영훈은 묘한 이상형을 갖게 됩니다. (밑에서 추가 설명)

주영훈 과거 사진

* 주영훈 군대 문제

주영훈 병역면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조기흥분증후군’때문입니다. 좀 이상한 이름 때문에 ‘성적인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사실 심장 질환과 관련된 질병입니다.

주영훈: “제가 군대를 안 가서 안티가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그것도 유독 저만 시끄러웠던 이유가, 심장내과에서 부르는 병 이름이 WPW증후군(심실조기흥분증후군)이에요. 정상인과 다르게 심장에 혈관 하나가 더 있는 거죠. 심한 운동을 하거나 긴장하면 그 작은 혈관으로 피가 새요. 그러면 나머지 심장이 말라서 심장 박동수가 빨라져요.”

이때문에 주영훈은 신검도 받고 검찰청 조사도 받게 되지만, 주영훈의 질병은 확실히 확인됩니다.

주영훈: “제 심장이 그냥 빨리 뛰는 정도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빨라요. 병역 조사가 2년 주기인데. 2년마다 기사가 나요. 사유 문구가 바뀌지도 않아요. ‘조기흥분증후군’이라는 다소 희한한(?) 이름으로 빠졌다는. 기사 읽는 20대 초반, 10대 후반의 남성들은 또 발끈하시고. 네티즌들은 “‘조루’로 군대를 뺐다, 왜 성(性)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을 군대 안 보내느냐” 고 하세요.”

주영훈의 경우는 ‘병 이름’때문에, 더 큰 오해를 받은 경우죠.

주영훈: “징병 검사도 다 합쳐 네 번을 받았어요. ‘이럴 바엔 아예 입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확실히 주영훈은 고의적으로 병역을 면탈한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경우입니다. 이렇게 질병때문에 군대를 가지 못한 사람들에까지 비난하는 것은, 정도가 지난친 것 같네요.

* 주영훈 마약 사건 루머

주영훈: “방송을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게 된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억울하고 힘든일을 많이 당했다. 연예인중에 나만큼 자주 검찰청에 불려 간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번은 다이어트를 심하게 해 24킬로그램을 뺀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마약을 한다고 소문이 나 공항에서 10여명의 수사관들에게 붙잡혀 검찰청으로 직행한 적이 있다. ”

주영훈: “검찰청에서 모발 수십개를 뽑고 소변 검사를 하는데 당시에는 정말 만감이 교차했었다.”

이외에도 주영훈은 검찰청에서 두번 더 검사를 받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병역비리 때문이었고, 확실한 무혐의 처리를 받게 됩니다.

* 주영훈 학력위조 사건

주영훈은 학력 위조 사건에도 휘말립니다. 처음 주영훈은 조지메이슨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대해 주영훈은 이렇게 해명합니다. “포털사이트에 기재된 학력은 제가 의도적으로 위조한 것이 아닌 동생의 것이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저는 몰랐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영훈은 포털사이트 업체의 잘못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후에 주영훈이 박명수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직접 학력 위조를 했다는 사실이 들통났죠.

주영훈: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경제학과 음악을 전공했습니다. 그 학교는 정확히 얘기하면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습니다.”

즉, 주영훈이 거짓말을 한 것이 들통났고, 한동안 주영훈은 방송에서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영훈이 손태영 사건때의 충격이 컸기 때문인지, 좀 독특한 이상형을 갖게 됩니다.

주영훈: ” 저는 원래 독신주의자였어요. 결혼에 대한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한 후에 결국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결론지었던 거죠.”

그런데 독신주의자였던 주영훈이 이윤미를 만나게 되면서 마음을 바꾸게 됩니다.

(탤런트 이윤미는 1981년 생, 주영훈보다 12살 연하)

* 주영훈 이윤미 임신과 주영훈 딸

주영훈: “(기독교에)‘배우자 기도’라는 게 있어요.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기도인데, 저는 여덟 가지를 기도했는데 아내가 그걸 다 갖고 있어요(웃음). 첫 번째가 ‘잘 웃는 여자’였어요. 윤미는 심하게 잘 웃어요. 그게 굉장히 중요했어요.”

주영훈: “또 하나는 ‘야망이 크지 않은 여자’였어요. 야망이 큰 사람은 가정이나 남편보단 일이 먼저니까. 이윤미씨 본인은 일이 주어지면 열심히 하지만 크게 고집 부리진 않아요.”

야망이 크지 않은 여자라… 주영훈은 보다 가정적인 여자를 원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사실은 좀 더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확실한 여자’를 원했던 것이죠. (밑에서 추가 설명)

주영훈은 2006년 이윤미와 결혼하게 됩니다. (주영훈 배우자 와이프 이윤미)

주영훈 이윤미는 딸 주아라를 놓고, 또 이윤미가 둘째 임신을 했네요(2015년 3월 12일 현재). (주영훈 이윤미 자녀 자식)(주영훈 이윤미 가족 관계)

주영훈 이윤미 가족 사진

* 주영훈 부인 이윤미에 대한 평가

결혼 후 주영훈은 아내 이윤미에 대하여 이렇게 평합니다.

주영훈: “결혼 후 아내 덕분에 제 신앙이 더 깊어졌어요. 보통 다른 사람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 잘 모르잖아요. 저는 우연한 기회에 (아내의 기도를) 알게 됐는데, 아내가 항상 ‘남편을 위한 기도’만 한대요. 그래서 대부분이 저를 위한 기도라는 걸 알았어요.”

주영훈: “어느 날 (우연히) 수첩을 봤더니 ‘남편이 잘되게 하는 기도 방법’이 적혀 있고, 주로 읽는 책도 ‘남편을 위한’이 들어가는 책을 많이 읽어요(웃음). 항상 자기 기도보다는 ‘우리 오빠 기도’를 먼저 한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감사하죠.”

* 주영훈 이윤미 이혼 거리먼 이유

주영훈: “사실 (결혼 전에) 연애할 때부터, 본인은 ‘탤런트 안 해도 좋다, 한 남자의 아내가 더 좋다’고 했어요.”

이렇게 주영훈은 좋은 와이프를 만나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이는 이윤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윤미: “저는 이상형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아버지가 지금도 어머니와 손잡고 다닐 정도로 굉장히 가정적인 분이에요. 아빠 같은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죠. 같이 있으면 항상 유쾌한 사람. 그런데 오빠와 같이 있으면 늘 행복한 거예요. 항상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데 많이 끌렸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게 이상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때 주영훈 이윤미 이혼 루머가 떠돌기도 했지만, 전부 사실무근이었죠. 아마 주영훈과 이윤미의 이런 성격때문에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네요.

에전에 주영훈은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이런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주영훈: “함께 일하는 PD나 작가들에게는 인기가 최고지만 유독 TV에만 비춰지면 비호감이 된다. 내 기사 밑에는 악성 댓글이 굉장히 많이 달린다.”

주영훈은 사람들에게 호감이 되고 싶다는 바램을 나타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했던 ‘주영훈 군대’나 ‘주영훈 마약 사건’ 등은 확실히 대중이나 검찰의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들입니다.

반면에 학력위조처럼 주영훈이 거짓말을 했던 과거도 있고, 또 베이징 올림픽 연예인 응원단에 참여했다가 비용문제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대중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싶다면,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김승우 김남주 부부를 보면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본인들과 연관된 루머가 많이 떠돌았는데, 사실 본의 아니게 그런 소문들이 증폭된 것도 없지 않아 있었죠.

사실 여러가지 사건에 대해서 그 원인이 있었고, 그것에 대하여 대중들이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는 것 같네요.

영화배우 겸 탤런트 김승우는 1969년 2월 24일 서울에서 태어납니다(김승우 고향). 올해 46살이죠(김승우 나이). (김승우 학력 학벌) 경서고등학교 졸업, 수원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학사, 수원대학교 경영대학원 스포츠경영학 석사 (김승우 종교) 로마 가톨릭 (김승우 프로필 및 경력)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로 데뷔

이후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 고스트 맘마, 찜, 비밀, 역전에 산다, 포화 속으로, 아이리스 등과 드라마 연애의 기초, 추억, 미스 리플리, 제3병원 등에 출연합니다.

이런 연기자의 모습외에도 예능 김승우의 승승장구, 1박 2일 등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높입니다.

# 목차 * 김승우 이미연 이혼사유 * 자기 책임으로… * 김승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 김승우 아내(부인)김남주와의 러브스토리 * 김승우 김남주에 대한 여러가지 루머들 * 김승우 집안 루머 * 김승우 김남주 과거 어려움 * 김승우 김남주 불화설의 이면

김승우 이미연 사진

* 김승우 이미연 이혼사유

김승우는 이미연과 1995년 결혼했다가 2000년에 이혼합니다. 당시 김승우가 미국에 간 사이에, 이미연이 홀로 기자회견을 열었죠.

이미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기사화가 되어 조금은 당혹스럽습니다. 그 동안 서로 많이 힘들었고, 서로 감정적으로 자주 부딪히면서 많이 안 좋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연의 말처럼 당시 모 일간지에서 이미연 김승우의 이혼이 특종 보도되는 바람에 이미연이 서둘러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죠.

이미연: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성격 때문에도 싸웠고, 생활방식의 차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차이 때문에도 싸우고 화내고 그리고 또 화해하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지쳐가는 것을 느꼈고, 서로에게 실망을 하고, 오해도 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더군요.”(김승우 이미연 이혼사유)

이미연: “이런 결정(이혼)을 하기까지 서로 많이 힘들었고, 많이 아파했습니다. 힘든 결정이었기 때문에 승우씨가 혼자서 마음을 정리하고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미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고요.”

이미연: “촬영장에서 이혼 합의 기사가 나간 걸 알았습니다. 승우씨가 지금 미국에 가 있는 상황이라 저 혼자 이런 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보도가 나간 이상, 어떻게든 입장을 밝혀야겠다고 판단했어요. ”

확실히 이미연의 빠른 대처로 둘의 이혼에 대한 파문은 더 이상 번지지 않습니다. 평소 이미연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이미연: “승우씨에게도 (기자회견 사실을) 알렸어요. 승우씨는 이런 짐을 혼자 지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괜찮다고 했어요. 비록 이혼은 하지만 친구사이로는 남기로 했거든요.”

* 자기 책임으로…

이미연의 기자회견에 김승우 역시 동의합니다. 며칠뒤 미국에서 급히 귀국한 김승우의 입장입니다.

김승우: “미연이 말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더 할 말이 없었을 뿐이다. 이혼을 결정하고 미국으로 갔고, 미연이의 기자회견 전에 어떤 내용으로 말 할 것인지 다 상의가 되었던 것이다. 부연하거나 반증할 얘기란 게 없다.”

김승우: “갈등이 조금씩 쌓이면서 미묘한 말다툼이 이어졌지만 기억에 남을만큼 크게 싸운 적은 없었다. 다만 말다툼하면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는 게 나빴다. 특히 내가 미연이에게 상처주는 말을 더 많이 했다.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김승우는 이혼에 대하여 자기 책임이 더 크다는 죄책감을 드러냅니다.

김승우: “사실 난 일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가정은 자연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라 여겼다. 그게 미연이와의 생각차이였다. 열심히 노력하고 가꾸려는 미연이와 달리 별다른 노력 없이 편안하게만 생각했던 내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사실 결혼생활에 대해 너무 몰라 미연이를 힘들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혼후에도 둘 사이에 대한 루머가 끊이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미연 황신혜에 의한 김승우 미용실사건’이었죠.

루머 간략 내용 김승우가 김하늘과 불륜(외도)를 저질렀고, 황신혜와 이미연이 미용실로 김하늘을 찾아가서 김하늘의 뺨을 때렸다.

김승우: “(이미연과 이혼한 것이 ‘미용실 격투사건’과 연관된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일에 대해선 하늘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 이미연도 오해 하지 않고 있다.”

김승우: “지금은 해명할 타이밍을 놓쳤지만, 당시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발가벗고 있는 듯한 느낌과 남자로서 인륜지대사를 지키지 못 했다는 죄책감으로 버텨냈다.”

사실 이혼후에도 이미연은 김승우의 촬영장에 격려차 방문하거나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등, 여전히 ‘좋은 친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미연: “할리우드의 니콜 키드먼과 톰 크루즈와 같이 (이혼 후에도 전남편 김승우와) 좋은 친구사이로 지내고 싶다.”

정말로 김승우가 불륜이나 외도를 저질렀다면, 이미연 성격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 같네요.

(참고로 이미연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글) 2013/11/29 – 이미연 남편 김승우와의 이혼사유, 이른 결혼을 후회

* 김승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그런데 이 이혼 사건으로 김승우는 대중들로부터 ‘여자를 이용한 남자’라는 안좋은 이미지가 생기게 됩니다. 결혼 초에 이미연은 톱스타였고, 김승우는 무명배우였다가 결혼 이후에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이죠.

한때 김승우는 이미연의 남자라는 말로 불릴 정도로, 이미연의 인기에 힘입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이 부분에서 대중들은 김승우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것이죠.

다만 결혼 후 이혼에 대해서는 김승우나 이미연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연: “당시 안정되게 살고 싶어 빨리 결혼을 했다. 23세에 김승우와 결혼을 발표한 뒤 25세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공주병에 걸린 연기자나 평범한 여자가 돼 있을 것 같다. ”

어쩌면 둘은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했기 때문에 실패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이미연도 어서 빨리 재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면 합니다.

어쨌든 이후에도 김승우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닙니다.

김승우는 2003년 유호정의 소개로 김남주를 만나서 2005년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김승우 재혼, 김남주 초혼이기 때문에 김남주 전남편은 없음 ).

유호정: “KBS 미니시리즈 ‘로즈마리’에서 김승우와 부부로 호흡을 맞추며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같은 미용실에 다니는 연예인들의 모임에 그를 초대했고, 김승우와 김남주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참고로 유호정의 미용실 모임은 김남주외에도 신애라, 이혜영, 오연수, 최지우 등이 속해 있습니다.

둘의 첫만남에서 김남주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갑니다.

김승우: “제가 무언가를 찾고 있는데, 김남주가 냉큼 선배님 여기요”라며 담배를 건네줬고, 전 (김남주의) 마음을 눈치챘어요.”

김승우: “담배를 건네받으면서 ‘어, 나를 좋아하나?’싶은 게 설레더라고요. 그래서 금연 한 달째였음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웠고 그 후론 제가 물불 안 가리고 덤볐죠. ”

김남주는 김승우의 인간적인 면에 먼저 반합니다. 김남주: “김승우씨와 만나면서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한 믿음직한 남자로 느껴졌다. 김승우씨가 오랜 고민 끝에 ‘남주, 오빠랑 결혼할래?’ 하고 청혼했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 그래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 김승우 아내(부인)김남주와의 러브스토리

김승우: “바에서 단둘이 술 마시기 내기를 했어요. 사실 술은 저보다 김남주씨가 더 잘 마시는데 일부러 제가 흑기사를 자청했죠. 술을 대신 마셔주는 조건으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뽀뽀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김승우: “사실 김남주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에 많이 끌렸어요. 마음 가는 대로 표현했더라면 좀 더 이 순간이 빨리 왔겠지만 둘다 적지 않은 나이라 조심스러웠어요. 그래서 청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이게 과연 올바른 판단인지 저 자신에게 물어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조언을 구하면서 이성으로 통제하려고 노력했고요.”

김남주: “오빠는 굉장히 믿음직한 남자지만 굉장히 마음이 여려 옆에서 내가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일적인 문제, 사적인 일로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오빠가 옆에서 큰 힘이 되어주었다.”

김승우: “무엇보다도 결혼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보이는 이미지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말 (김남주가) 순박하다. (김남주의)이미지가 화려하고 멋있어서 도도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성격이 겸손하다. 생활이 소박하고 커피 한 잔도 항상 두 손으로 갖다 줄 정도다.”

결국 둘은 2005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됩니다. (김승우 배우자 와이프 김남주)

김승우 김남주 결혼식 사진

둘은 딸 김라희(이름)와 아들 김찬희를 낳게 됩니다 (김승우 김남주 자녀 자식)(김남주 김승우 가족관계)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김승우는 전부인인 이미연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김승우 측근: “김승우가 지난해 연말쯤 이미연에게 안부전화를 걸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축복해달라’고 말했고, 이에 이미연도 흔쾌히 ‘진심으로 축하한다. 두 사람이 잘 되면 좋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고 있다.”

뭐, 반드시 이런 말을 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김승우의 처신이 옳은 것 같네요.

* 김승우 김남주에 대한 여러가지 루머들

그런데 결혼 이후에 또다른 루머가 이들 부부를 괴롭힙니다. 바로 첫째 딸 김라희가 흑인 혼혈이라는 루머였죠.

김남주: “첫째는 태어날 때부터 세간의 관심을 받았어요. 그래서 낳자마자 양말을 신기고 원피스를 입혔죠. 여름에도 예쁘게 보이려고 모시 모자를 씌우고 다녔고요. 그랬더니 인터넷에선 ‘아빠를 안 닮아서 김남주가 아이를 가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

김승우: “김남주의 아이가 스폰서의 아이라는 설도 있었다. 내 딸의 친부가 흑인이라는 루머를 들었을 때는 정말 황당했다. 나를 닮아 피부가 까만 편인데 심지어 내 아이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억장이 무너졌다.”

김승우: “김남주는 13시간의 진통 끝에 아이를 낳았다. 딸 아이가 나를 닮아 머리와 코가 커서 낳기 힘들었을 것이다. 흑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나를 닮아서 ‘까맣다’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김승우: “아이가 커갈수록 저와 붕어빵처럼 닮아가요. 이렇게 예쁜 아이를 두고 입에 담기도 싫은 소문이 나돌았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 아프고 어이가 없죠. ”

* 김승우 집안 루머

사실 흑인 혼혈 루머외에도 김승우와 김남주의 계약 결혼설도 있었습니다.

김승우: “‘내가 김남주와 살면 이후 작품 출연 보장을 받는다”는 계약 결혼설도 있었고, ‘김남주의 아이는 스폰서의 아이’라는 설도 있었다.”

김승우: “하지만 아이의 사진은 방송에서 공개하지 않겠다.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아이가 유명세 치르게 되는게 싫기 때문이다.”

이상은 김승우가 직접 방송에서 해명을 했던 내용들인데, 이런 황당한 루머들은 위에서 언급한 ‘김승우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생겼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미연이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는 점이, 김승우가 재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대칭이 되면서, 대중들의 악감정이 더 커졌던 것 같네요.

이런 악감정 때문에, 김승우에 대한 루머는 하나 더 있습니다.

김승우 재벌설 해명: “내가 영화사, 방송사 등과 커넥션이 있어서 계속 캐스팅이 되는 것이란 소문도 있는데, 나는 아무런 학연 지연도 없다.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신 분이고, 네 식구가 13평 아파트에 살 정도로 평범한 가정이다. ”

아마 이미연에 대하여 동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TV나 영화에서 김승우를 보는 것이 불편했을 것 같네요.

이와 관련해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 김승우 김남주 과거 어려움

김남주: “둘째를 낳고 오빠도 저도 일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힘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제게 충격발언을 하더라고요. ‘다 포기하고 다 정리해서 이민 갈까’하고요. 그래서 그때 굳이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결혼하자고 해서 힘든 상황을 만든 걸까 싶은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이렇게 김승우나 김남주는 알게 모르게 연기 공백이 있었습니다.

김승우: “사실 남주도 아이를 낳고 나서 배우로서의 입지가 흔들렸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저희 결혼에 대한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고 루머도 많았잖아요. 그래서 굳이 이곳에서 살아야 하나 생각했죠. 결혼한 걸 힘들어한 게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우리끼리,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살까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결국 김승우는 고민을 하다가 2009년 스스로 조연 자리로 내려갑니다.

김승우: “드라마 ‘아이리스’의 조연을 택했고 이것이 연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출연 배우 이름 중 네 번째에 자리 잡은 제 이름을 본 순간 착잡하기도 했죠.”

김승우: “‘큰 배역, 작은 배역은 있어도 큰 배우, 작은 배우는 없다’는 연기 개론서에 적힌 말의 의미를 마흔 넘어 뒤늦게 깨달았어요. 캐릭터가 매력이 있고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열심히만 연기한다면 굳이 주연이 아니더라도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나니 일하는 자세도 달라지더라고요.”

이후 연기에 대한 김승우의 자세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혼으로 이미연이 상처를 많이 받았고, 또 현재도 혼자 살고 있지만, 이것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김승우에게 지는 것을 불합리한 것 같습니다. 그 역시도 많은 고통을 받았으니까요.

앞으로 이미연도 행복해지고, 김승우와 김남주 부부도 루머에서 벗어났으면 하네요.

* 김승우 김남주 불화설의 이면

참고로 김승우 김남주 불화설도 떠돌고 있는데, 현재의 결혼 생활 소감은 좀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김승우: “아내는 나를 하늘처럼 생각한다. 다른 집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김남주: “오빠(김승우)가 워낙 훌륭하니까 맞춰주는 거예요. 달수(내조의 여왕 캐릭터) 같았더라면 저라도 발 벗고 나서서 출세를 도왔을 거예요.”

사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성격이 잘 맞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혹은 여자)는 부드러운 성격의 여자(혹은 남자)와 잘 어울리고, 또 어떤이는 화끈한 성격의 이성과 잘 어울리 듯이, 사람에게는 제각각 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돈이나 집안 배경을 보는 것보다 배우자가 될 사람의 성격을 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결혼을 앞둔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잘 통하지 않죠.

화끈한 성격의 여자보다 부드러운 성격의 여자와 잘 살고 있는 김승우를 보면, 새삼 그런 ‘진리’가 떠오르네요.

​ 서우림 김무영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사랑은 국경과 나이를 초월한다고 합니다. 이때의 나이는 나이 차이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사람 개인의 나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탤런트 서우림은 거의 환갑의 나이에 새로운 사랑을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인생에서 나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죠.

서우림 남편 사진(김무영 부사장)

탤런트 겸 영화배우 서우림은 1942년 7월 23일 태어납니다. 올해 73살이죠(서우림 나이). (서우림 종교) 불교 (서우림 학력 학벌) 서라벌예술대학 무용과 (서우림 프로필 및 경력) 1963년 드라마 ‘어머니의 마음’으로 데뷔

이후 1965년 TBS 2기 공채 탤런트가 되었고, 드라마 사모곡, 큰 언니, 내 사랑 내 곁에, 태조 왕건, 보석비빔밥, 신기생뎐, 무자식 상팔자, 오로라 공주, 사랑만 할래와 영화 시비 시비, 손톱, 카루나 등에 출연합니다.

서우림은 첫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두명 둡니다(서우림 자녀 자식). 그러다가 약 10년의 별거를 거쳐 합의 이혼을 하게 됩니다(서우림 전남편).

서우림: “아이들 아빠와 여러가지 이유로 별거를 시작한 뒤 제가 두 아이의 유학비를 다 댔는데, IMF가 터지면서 환율은 환율대로 오르고 수입은 점점 줄어들었죠. 어떻게든 아이들 공부는 마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버티고 버텼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어요. 매일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께 ‘제발 일 좀 많이 하게 도와달라’고 빌 정도였죠.”

이렇게 서우림은 두 아들을 미국 유학을 보낸 상태에서 경제적인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서우림 젊은 시절 과거 사진

서우림: “저뿐 아니라 아이들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고생이 많았어요. 엄마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걸 알고 자기들이 알아서 아르바이트를 했더라고요. 유학생은 정식으로 일을 할 수 없으니까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면서 힘들게 공부를 한 거죠. 두 아이 모두 10년 넘게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한국에 나오지 않았을 정도로 독하게 살았어요.”

이렇게 경제적으로 힘들때 서우림은 현재의 남편을 만나고, 또 프러포즈를 받게 됩니다. 서우림 남편 김무영(재미교포, 미국명 마이클김)은 서우림보다 7살 연상이고,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인입니다(서우림 남편 직업)

김무영(이름)은 1953년 고등학교 3년 때 국비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LA 옥시덴털 칼리지로 유학했고, 이후 핵 물리학을 전공한 후 유니언 뱅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1962년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으로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날린 것을 계기로 라스베이거스 카지노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호텔 전문경영인으로 성장했고 1981년부터 버버리 코스트 호텔 부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호텔들을 맡게 됩니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많은데, 김무영은 자신의 실수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었네요.

서우림 남편 김무영 사진

김무영은 1998년 국내 카지노 개설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귀국했고, 이때 우연히 서우림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둘은 2001년 4월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서우림이 60살, 김무영이 67살일 때였죠. 김무영 역시 초혼에 실패한뒤의 재혼이었죠. (서우림 배우자 김무영)(서우림 재혼 남편 김무영).

서우림: “결혼하기 3년 전부터 알고 지내긴 했지만 따로 데이트를 하지는 않았어요. 그저 모임에서 가끔 만나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였죠. 사실 재혼은 갑작스레 결정한 일이에요. 제가 여러모로 힘들 때 남편이 옆에서 큰 힘이 돼줬거든요. 사실 전남편과 오랫동안 별거를 하면서도 재혼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인연은 따로 있나봐요.”

서우림: “남편이 호텔 사장인 건 맞지만 ‘백만장자’라는 소문은 과장된 거예요. 평범한 월급쟁이 사장이죠. 남편이 운영하는 호텔이 몇 개가 되죠. 그래서 그냥 호텔에서 아무거나 먹고 사인만 하면 돼요. 집에서 찌개 같은 걸 해도 남편이 잘 먹지 않아서 맛이 없는지 걱정했는데, 알고보니 밖에서 먹는 게 습관이더라구요.”

서우림: “무엇보다 남편이 제가 집에서 밥하는 걸 싫어해요. 부엌에서 뭐라도 할라치면 ‘밥하려고 시집왔냐’며 못하게 하거든요. 남편은 50년 넘게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입맛이 서양식으로 길들여졌지만 저는 가끔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남편 몰래 김치찌개나 김치볶음 등을 만들어 먹죠.”

서우림의 아이들 역시 엄마의 재혼에 적극 찬성합니다.

서우림: “큰아이를 만나고 둘째를 만나러 갔는데 두 아이 모두 그동안 자기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면서 결혼해서 잘 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재혼 후에 서우림은 한동안 미국 생활을 하다가, 2004년부터 다시 국내 드라마계로 컴백을 합니다. 특이하게 김수현 작가와 임성한 작가 드라마에 동시에 출연하는 거의 유일한 배우이죠. 아마 서우림의 연기가 두 작가의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서우림 아들 사진

서우림: “결혼하고 경기도 분당에 있는 큰아들 집에서 잠깐 지냈는데 오랜만에 함께 생활하니까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고 싶더라고요.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싶었는데 촬영 스케줄 때문에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어요. 더군다나 한동안 부엌일에서 손을 떼서인지 음식 솜씨가 예전만 못한가봐요. 큰아들 말이 제가 끓인 찌개가 맛이 달라졌다고 하는 거 있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가 정말 편하게 사시나봐요’ 하더라고요.”

서우림은 60살이 되던 해에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예전같으면 반송장으로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의 노인으로 취급받을 나이죠. 하지만 현재는 새로운 행복을 찾기에 늦지 않은 나이입니다.

아니, 행복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구하고자 하는 바로 지금이, 행복해질 시간이 아닌가 하네요. It’s time to be happy.

강부자 이묵원 러브스토리와 인생이야기

연예인들중에서 강부자는 루머가 많습니다. 일명 ‘마담뚜’ 루머로, 여자 연예계인들을 재벌 회장에게 소개시켜주어서 소개비를 받는다는 소문이죠.

여기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지만, 사실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죠.

또한 강부자와 남편 이묵원간의 결혼 생활도 흥미롭습니다.

강부자 이묵원 사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강부자는 1941년 2월 8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납니다(강부자 고향). 올해 74살이죠(강부자 나이).

(강부자 종교 불교)

(강부자 학력 학벌) 강경여자고등학교, 충남대학교 국문학과(중퇴)

(강부자 프로필 및 경력) 1962년 KBS 탤런트 2기생에 합격

그리고 구두창과 트위스트라는 드라마로 데뷔하는데, 여기서 맡은 역할이 바로 ‘중매쟁이’ 역할이었습니다. 이후 다모기담, 연화, 야망의 세월, 배반의 장미, 넝쿨째 굴러온 당신, 세번 결혼하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좋은 연기력을 선보입니다.

특이한 것은 위에서도 ‘중매쟁이’로 언급했지만, 데뷔초부터 강부자는 중년 부인 역할을 맡습니다 . 그래서 당시 PD들이 좋아하는 연기자 중의 한명이었죠. 당시 대부분의 여배우들은 예쁘고 좋은 역할만 하려고 했기에, 강부자같은 연기자가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부자 경력중에 굉장히 특이한 것이 바로 1971년도에 지냈던 한국방송연기자협회 부회장 직책이었죠. 이후 약 12년동안 맡는데, 당시 31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직책이었습니다.

강부자 젊은시절 과거 사진

강부자의 연기자 경력외에 특이한 점으로 정치인생이 있습니다.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소속 제14대 국회의원이 된 것이죠(1992년 6월 ~ 1996년 5월, 여자연예인 최초의 국회의원, 실제적으로는 지역구 선거에서 떨어지고, 정주영의 대통령 출마로 공석이 된 전국구 자리를 이어받음.)

아무튼 강부자는 남편 이묵원과 4년간 비밀연애 끝에 1967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강부자 배우자 이묵원, 강부자 남편 직업).

이묵원은 1938년 4월 26일생으로, 1962년 KBS 2기 공채탤런트로 데뷔합니다(원래 1961년 MBC 라디오 방송 특채 성우 연기자로 데뷔했다가, KBS로 옮김. 이묵원이 강부자보다 3살 연상이지만, 데뷔 동기임)

강부자 이묵원 부부는 아들과 딸 한명씩을 낳습니다(강부자 자녀 자식)(강부자 아들 이름은 이헌주, 딸은 이승하)(강부자 가족 관계 1남 1녀).

(이묵원 프로필 및 경력)

수사반장과 제1공화국 등에 출연했지만, 별다른 빛은 보지 못합니다.

강부자 결혼 사진

강부자: “당시 그 사람이 너무 가난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끌렸다. 나보다 3살 윈데 해군 의장대 출신이라 몸도 반듯했다.”

강부자: “항상 ‘강부자 남편’으로 불리는 남편에게, 아내로서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강부자: “내가 7남매 중 맏며느린데 물론 고부갈등을 겪을 시간도 없었지만 우리 어머님은 한번도 내게 거슬리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이 며느리보다 활동이 적었기에 늘 그거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에미야 너 볼 면목이 없다’ 그러셨지.”

강부자: “그리고 내가 뭘 해다 드리면 “에미야 너 잠도 잘 못 잘 텐데 이런 거 해오지 마라” 그러시구. 남편이랑 4년간 연애하다 결혼했는데 결혼 전에도 내 생일 때 꼭 동대문 시장에서 천 떠다가 잠옷 만들어서 보내시곤 했어. 84세에 돌아가셨는데 돋보기 한번 안쓰시고 바느질을 하셨는데 드라마에 필요한 의상도 어머니가 다 만들어주셨지.”

강부자: “돌아가실 때 유서를 써놓았는데, ‘제사를 절대 큰형수한테 맡기지 말라’고 하신 거야. 내가 바쁘고 힘든 걸 아니시까 마지막 가시는 순간에도 그렇게 배려를 하신 거지 . 어떤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왔을 때 그 며느리로 인해서 집안이 평화롭게 되느냐 아니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 아니겠어? 그렇기 때문에 난 고부간의 관계는 특히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잘 다독거리면서 내 집안 사람으로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옛날에 고부간의 갈등은 결국 일종의 헤게모니 쟁탈이었지 뭐. 광 열쇠를 누가 쥐느냐 하는 거….”

확실히 강부자의 말처럼 예전에는 고부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광 열쇠 쟁탈(헤게모니 쟁탈)이었죠. 요즘은 같이 살게 되면, 아들의 월급 봉투가 누구에게 가느냐로 신경전을 많이 펼치는 것 같습니다.

강부자 가족 사진

어쨌든 이렇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 강부자는 곧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됩니다.

강부자: “나는 남편이 나가서 사흘씩이나 어떤 여자하고 호텔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 때가 우리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다. 근데 남편은 사흘을 나가 지금의 S 호텔에 있었다. 그 여자가 누군지 난 다 안다.”(강부자 남편 외도 불륜)

강부자: “남편이 방송국에 와서 저녁 5시만 되면 그 여자와 사라지고 그러는데도, ‘난 이 남자하고 끝까지 살아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참았다.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겐 또 아이가 있었다. 남자가 정말 바람둥이로 도저히 구제불능이면 헤어져야겠지만, 어쩌다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호적의 자기 이름 옆에 엄연히 내 이름이 있고 그 밑에 아들도 있는데, 그래봤자 다시 돌아오지 뭐하겠나. 난 그렇게 생각했다.”

강부자: “(바람피운 남자가) 불결하긴 뭐가 불결하겠나? 씻으면 되지. 사실 쥐를 쫓아갈 때 막다른 골목에 쥐가 부딪치면 노려보며 뒤돌아선다. 쥐도 도망갈 구멍을 줘야 하는데 남편이 바람피운대서 바람 피웠냐고 몰아세우면 안된다.”

강부자 젊었을 때 사진

강부자 여고생 사진

오늘날의 세태와는 맞지 않은 말이네요. 어쨌든 강부자 본인의 입장에서는 당시에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사는 것에 행복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사고방식은 강부자 세대때는 흔했습니다. 이혼하는 과정이 본인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큰 괴로움이 되었고, 재혼 역시 쉽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람피운 남편에 대해서 토로하면, “자식 생각해서라도 그냥 참고 살아.”라는 충고를 많이 듣게 되죠.

강부자: ” 난 남자가 부엌에 들어와서 얼쩡거리는 게 아주 꼴보기 싫어 . 우리 남편은 지금껏 물 한잔도 자기 손으로 떠먹어 본 적이 없어. 지금은 아이들이 다 결혼해서 우리 둘만 있잖아. 그래서 가끔 녹화 끝나고 나면 피곤하니까 그냥 밖에서 사 먹고 들어가자고 할 때 남편이 ‘아니 나는 집에서 먹는 게 좋아’ 그러면 아무 소리 않고 집으로 가. 근데 자기는 앉아서 신문 보고 있지만 난 들어가자마자 부엌에서 밥해. 그래도 설거지까지 다 내가 하지, 안 시켜.”

그러면서 노년의 부부애를 과시합니다.

강부자: “남편이 화백(화려한 백수) 노릇을 했지만, 너무 건강하게 자기 건강을 체크해 전혀 내 속을 안썩인다.”

강부자: “아직도 남편은 나를 아기같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한날 죽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죽음을 준비할 나이잖아? 우리가 따로, 아빠 엄마가 따로 죽으면 남겨진 애들이 얼마나 힘들겠어. 그러니 같이 죽으면 좋을 것 같다. 난 남편 없으면 꼼짝을 못한다. 남편 없이는 이날 이때껏 아무 것도 못했어. 퓨즈가 나가도 이묵원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지. 부엌에서 하는 일은 잘 해도 바깥일은 그렇지가 않잖아. 생의 마지막을 남편과 함께 보내고 싶은 게 내 꿈이다.”

강부자 남편 사진

뭐, 남편에 대한 강부자의 생각은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것으로 강부자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구세대의 사랑 방식중의 하나일 뿐이니까요.

그외에 강부자는 대단한 루머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자 연예인들과 재벌 총수를 연결시키는 ‘마담뚜’였다는 소문이었죠. 여기에는 정주영 회장이 자주 나오는데, 원래 그전부터 둘의 친분이 막역했고, 게다가 강부자가 국민당의 국회의원까지 되었기 때문에 그 소문이 더 증폭되었죠.

여기에 대해 강부자는 이렇게 해명합니다.

강부자: “예전부터 내가 여자 후배들을 재벌 총수에게 소개시켜주고 돈을 챙긴다는 소문이 돌더라. 이런 악성루머가 도는 것은 아마 내 생김새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강부자: “겉으로는 웃었지만 뒤에서 많이 울었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가 어떻게 했기에 그런 소문이 돌까 생각하며 얼굴도 못 들고 다니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과연 강부자의 말이 사실일까요?

대부분의 대중들은 강부자의 말이 거짓말이고, 막연하게나마 루머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강부자: “나와 비슷한 연배에 비슷한 캐릭터를 가진 연기자가 나를 매장시키려고 루머를 만들어 낸 것 같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랬다는 증언이 나와야 할 텐데, 한 사람도 없지 않느냐.”

보통의 사건인 경우는 강부자의 말처럼 증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상납의 경우는 양쪽 모두 끝까지 비밀을 지키죠.

사실 연예계의 루머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 진실이 루머로 퍼진 경우입니다. 오늘날 휴대폰에 카메라와 동영상 기능이 첨가되고 sns가 발달하면서 루머가 사실로 판명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두번째, 강부자의 말처럼, 라이벌의 이미지를 더럽히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사고를 쳤을 경우에 다른 사람에게 덤터기를 씌우기 위하여 일부러 악성 루머를 만드는 경우입니다. 경쟁이 심한 연예계에 특히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세번째, 연예계 기자들이 접대(?)를 시원찮게 받을 경우, 앙심을 품고 보복성 루머 기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때는 진실을 가지고 기사를 쓸 수도 있고, 기자 마음대로 소설을 쓸 수도 있죠.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예전에 기자들의 수준은 정말 한심할 정도였죠.)

어쨌든 강부자의 루머에 대하여 강부자의 해명을 더 들어보죠.

강부자: “나는 강남에 땅 한 평도 없고, 증권, 펀드, 주식 그런 걸 해본 적도 없고, 은행에서 돈 찾는 법을 몰라 남편이 찾아다준 돈을 쓰고 있다. 28년 전에 1억500만 원을 주고 (강남에)빌라를 구입한 이후 땅값이 올랐을 뿐 부동산 투기는 한 적도 없고, 그후로 한번도 이사간 적도, 부풀린 적도 없다. (내가)증권가의 큰손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것도 루머다.”

강부자: “돈 요만큼 벌어서 그거 불리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파트를 샀다 팔았다 하면서 돈 버는 거 난 너무 싫어. 내가 복부인도 아니고 누가 뭐래도 난 예술가고 문화인인데 내가 왜 부동산 투기, 땅투기를 해야 돼, 하는 생각이 들어 .”

이렇게 강부자는 문화 예술인에 대한 자긍심을 내보이면서, 부동산 투기나 뚜쟁이 역할은 하지 않는다고 항변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거짓말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강부자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고급 아파트라고 불렸던 ‘한강맨션’아파트의 계약 1호자이자, 입주 1호자였습니다. 60년대에 아파트붐이 생겼고, 69년, 70년에 한강맨션이 분양이 되었는데, 당시 최초로 관리비 수납 제도를 도입해서 여기에는 고소득자와 고학력자들만이 입주할 수 있게 됩니다(역으로 이런 부자들만 입주하게 되자, 아파트값이 더 뛰게 됩니다.)

그리고 강부자가 1993년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마침 우리나라는 공직자들의 재산을 공개하는 제도가 도입됩니다.

당시 강부자가 신고한 재산은 총 12억 92백만원이었는데(배우자와 아들, 딸까지 포함), 상당수 부동산이 포함되어 있었죠.

(본인)

임야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산 6-5(3306제곱미터)외 3건, 5천 49만원

점포 영등포구 여의도동 36-2 여의도백화점지하(7.8평) 6천 2백만원

예금 3천만원

회원권 6천 9백 4십만원

그외 귀금속과 자동차

배우자(이재호) 강남구 청담동 102-1 효성빌라 (건물 231제곱미터) (대지 201제곱미터) 5억 12백만원

대지 인천시 남구 만수동 888-3 (3992제곱미터) 4억 4천만원

임야 경기도 광주읍목리 산29-1 (1055제곱미터) 3백 49만원

그외 약간의 부동산과 예금, 미술품, 회원권, 자동차 등

아들 이헌주, 예금 5천 6백만원

딸 이승하 예금 4천 9백만원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하면, 강부자는 경기도 성남과 가평, 제주도 북제주군과 남제주군 등 총 4곳에 5천 9백여평의 임야를 가지고 있고, 그외에 남편의 이름으로 인천시 남구 만수동의 4억 4천만원(공시지가)짜리 대지와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의 임야 3백여평 등을 분산 소유하고 있었죠.

강부자 역시 상당수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 위의 변명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설령 남편이 전적으로 부동산 투자를 했다고 하더라도, 강부자 본인이 부동산 투자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죠.

다만, 강부자가 했다는 ‘뚜쟁이 루머’와는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루머가 강부자 정주영 신애라 사건이었죠.

– 강부자가 정주영에게 신애라를 소개시켜주고, 신애라는 정주영으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음. 이에 신애라가 비서실장에 얼마를 쓰냐고 물어서 3억원을 씀. 하지만 나중에 입금된 돈은 1억원이었고, 신애라는 비서실장으로부터 강부자가 소개비(수수료)로 2억원을 뗐다는 걸 들음.

나중에 신애라는 정주영과의 식사 자리에서 1억원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고, 연유를 알게 된 정주영이 열 받아서 MBC로 찾아가서 강부자를 재떨이로 때리고 관계를 끊었음(정주영 신애라 백지수표 사건).

차인표 신애라 부부의 봉사 모습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강부자 인생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강부자 정주영 신애라 루머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루머에는 헛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강부자가 이렇게 한건에 2억원씩 벌었다면, 그녀의 재산은 이것보다 몇십배는 더 많아야 합니다.

게다가 신애라는 1989년에 데뷔하고(실질적인 데뷔는 1987년), 1995년 차인표와 결혼합니다. 만약 위의 루머가 사실이라면 1990년대 초반에 일이 벌어졌어야 하죠.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강부자는 정주영의 구애로 통일국민당에 입당했고, 후에 정주영의 전국구 의원 자리를 물려받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당시 국회의원들의 재산 신고에 대해서 좀 더 언급하면, 제도의 초창기 시절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고, 대부분이 축소신고를 하려고 합니다(이 모습은 지금도 비슷합니다만).

그런 와중에도 강부자는 귀금속(다이어반지와 비취브로치)까지 일일이 신고하는 등의 성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

사실 정주영이라면 그 성향상 여자들과 질퍽하게 놀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죽은 이후에 연예인 출신의 모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낸 적도 있죠.

다만, 후일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애라의 경우는 그 가치관이 돈에 매몰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 루머의 가장 큰 피해자는 신애라와 차인표 부부가 아닌가 하네요.

어쨌든 이 루머로 고통 당한 강부자가 이렇게 주장합니다.

강부자: “마담뚜라는 소문에 사실이 아니라 말해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근거 없는 소문들은 생사람을 죽이는 행위다.”

강부자: “어쨌든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 존엄하고 경건한 일인데, 고 최진실은 너무 어리석은 죽음을 선택했다. 아무리 악성 루머가 있더라도 꿋꿋하게 이겨나가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위의 두 말들은 서로 별개의 말 같지만, 사실 하나입니다.

대중들에게는 근거없는 루머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고, 또 그 루머의 대상자가 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세상을 살라는 뜻이죠.

강부자의 인간성이나 결혼 생활에 대한 가치관을 떠나서, 이 말만은 맞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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