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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s-역사-0001] 조선왕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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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조 가계도 :: 후르츠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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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조 가계도 :: 후르츠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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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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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생애[편집]

생부 덕흥대원군의 추존 여부[편집]

가족 관계[편집]

선조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각주[편집]

참고 자료[편집]

조선 선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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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_광해군,영창대군,인목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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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_광해군 영창대군 인목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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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 & 선조(하성군 이균) 왕위등극 배경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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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 왕 선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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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 왕 선조 가계도 본문

조선 14대 왕 선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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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가계도 – 부인 8명, 아들 14명, 딸 1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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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가계도 - 부인 8명, 아들 14명, 딸 1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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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 선조 계보_덕흥대원군,영창군,인목대비,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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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 선조 계보_덕흥대원군 영창 군 인목대비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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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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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 음력 11월 11일 ) ~ 1608년 3월 16일 ( 음력 2월 1일 ))는 조선의 제14대 국왕(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1608년 음력 2월 1일)이다.

개요 [ 편집 ]

휘는 연(昖), 초명은 균(鈞),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즉위전의 작호는 하성군(河城君)이었다.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이복 숙부인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의 양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모가 왕과 왕비가 아닌 최초의 서자 출신의 왕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왕이기도 하다.

재위기간 중, 사림의 정계 장악이 확고해지고 동서 분당으로 인해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국토가 황폐화되고 전국이 전장터가 되어 개국 이래 내외적으로 가장 혼란한 상황을 맞았다.

생애 [ 편집 ]

즉위 전 [ 편집 ]

잠저 시절 [ 편집 ]

선조의 서예 유묵

선조는 1552년 음력 11월 11일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 초(岹)와 하동부대부인의 셋째 아들로 한성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균이었으나 이연으로 바꾸었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순회세자가 요절한 뒤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곧 후사로 낙점되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이 1565년(명종 20년)에 병석에서 밝힌 바에 따라, 16살의 어린 하성군 이연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성군이 왕이 된 이유가 담겨있다. 어느날,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두 형(하원군, 하릉군)들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은 현직 왕의 익선관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삼가 물러났고, 이러한 하성군의 겸손한 태도는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전해진다. 선조의 즉위는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가 즉위한 첫 사례였다. 그러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였다는 사실은 평생 선조를 따라다니며 일종의 콤플렉스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이는 계속되었는데, 훗날 1578년(선조 11) 5월 11일에는 덕흥대원군사당의 이름을 정하는 것을 놓고 토의하던 중, 경연관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칭했다가 선조는 크게 분노하였다.

강관(講官) 허봉(許篈)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하지 않습니다. 요즘 대원군 사당을 일컬어 ‘가묘(家廟)’라 하고 있는데 국가에 어찌 가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원묘(大院廟)’라고 하거나, 아니면 ‘사친묘(私親廟)’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안빈(安嬪)을 우리 조모라고 하시는 것도 역시 매우 잘못입니다. 비록 대원군이 계시더라도 적모(嫡母)에 압존(壓尊)되어 감히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는 법인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대궐에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받으셨으니 어찌 감히 조모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원군은 제후의 별자(別子)로서 백세토록 옮기지 않는 사당이 되었으나 안빈은 바로 첩모이기 때문에 시조의 사당에 들어 갈 수가 없고 다만 사실(私室)에서 제사해야 합니다.(名不正則言不順。 今者稱大院君廟曰家廟, 國家安有家廟乎? 只稱大院廟, 或稱私親廟, 可也。 殿下稱安嬪爲我祖, 亦甚非也。 雖大院君在, 亦壓於嫡, 而不敢母其母, 況殿下入承大統, 安敢稱祖乎? 大院君以諸侯別子, 爲百世不遷之廟, 安嬪是妾母, 不可入始祖之廟, 只合祭之私室。)” 하니, 상이 성난 음성으로 이르기를, “허봉이 감히 이런 허다한 이야기를 하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말로써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안빈은 실지로 조모인데 우리 할머니라고 한다 해서 무엇이 해롭단 말인가. 그리고 가묘라고 한다 해서 또한 무슨 방해가 되기에 허봉이 감히 비교하면서 말을 하여 함부로 의논을 만들어 내는가.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자, 좌상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라 옛글만을 읽었을 뿐, 실지로 일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지나친 논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상께서는 모두 포용하셔야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기를 꺾으신다면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선조는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대놓고 지적하자(安嬪是妾母) 불같이 화를 냈는데, 좌의정 홍섬이 겨우 변호하여 선조의 진노를 가라앉힌 일도 있다. 그러나 이후로도 허봉은 창빈 안씨를 가리킬 때 첩, 첩부인이라는 표현을 썼고, 선조는 노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선조는 허봉을 처벌하려 하지는 않았다. 선조는 재위 도중 여러 번에 걸쳐서 생부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사림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즉위 과정 [ 편집 ]

명종은 순회세자 사후 자신의 잠재적 후계자로 덕흥군의 3자 하성군을 지목했고, 이를 받아 적은 이들은 후일 누군가 글자의 위조할 것을 염려하여 三이 아닌 參자를 썼다. 하성군 외에도 선왕의 자손은 존재했으나 해안군과 덕양군은 모두 전왕 명종의 이복 형이었다.

명종 22년 (1567년) 음력 6월 28일에 명종이 평소 앓고 있던 병이 위독해졌으므로, 대신들이 입시하였으나 명종이 말을 할 수 없었고, 2년 전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은 일이 있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1] 인순왕후는 왕의 유지를 받들어 하성군의 입궐과 어보 전달을 지시한다.

명종은 생전 그가 총명하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정승 이준경은 ‘그가 명철하기는 하지만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다. 예의가 바르기는 해도 절대 겸손한 성품은 아니다[2]’라는 평을 남겼다.

즉위 초반 [ 편집 ]

수렴청정과 친정 [ 편집 ]

1567년(선조 즉위년) 선조는 음력 6월에 즉위하였다. 그렇지만, 명나라는 바로 선조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는 칙서를 내려주지 않았으며, 그동안 선조의 지위는 조선국 권서 국사(朝鮮國權署國事)였다. 그해 11월에 명나라는 드디어 책봉고명을 내려, 선조는 정식으로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3]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였다. 즉위 초반에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여러번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사림파 선비들이 송나라의 복안의왕과 안희수왕, 전한의 정도공왕에 대한 고사를 들며 이를 반대하여 성사시키지 못했다.

즉위 직후부터 인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의 영향권 안에 머물렀으나, 선조는 사림 출신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고, 또한 그들을 통해 친정을 유도하게 함으로써, 인순왕후를 일선에서 물렸다. 인순왕후 퇴진 직후, 이이 등이 부패한 재상 심통원[4]을 탄핵하자 선조는 그를 바로 숙청했다. 나아가 이러한 선조의 즉각적인 행동은 심통원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데 대한 감정도 또한 작용했다. 이어 선조는 김효원 일파가 심의겸을 공격하자 심의겸을 외직으로 축출해버렸다. 대비의 친정 일족을 제거한 소년왕의 의외의 거친 면모에, 어린 왕이라는 이유로 선조를 깔보던 신하들은 경악하였다.

사림정치의 확립 [ 편집 ]

선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 사회는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는 주자학의 보급을 장려하였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講筵)에서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인사들을 신원복구하였고, 을사사화로 귀양가 있던 노수신·유희춘 등을 석방하여 기용하는 한편, 훈신세력인 남곤·윤원형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거나 삭훈(削勳)했다. 또한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성운 등을 등용했다. 이황을 신뢰하고 그의 정치철학을 적극적으로 따르다가, 퇴계가 죽자 이이를 신임하였는데, 율곡에 대한 정치적 지원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잠저시절부터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선조는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였고, 1585년에는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해 경서의 훈해(訓解)를 교정하게 했다. 1588년 사서삼경의 음석언해(音釋諺解)를 완성하고 〈소학언해〉를 간행했다.

한편 조선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 등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 주청사를 거듭 파견했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했고, 1589년 성절사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서분당과 붕당정치의 성립 [ 편집 ]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정철·윤두수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이산해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건저 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다시 나뉘었다.

선조는 정철을 처벌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동인 내에서도 정철을 죽이자는 주장과 정철을 죽이는 데 반대하는 의견이 서로 나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철을 죽이자는 강경파는 북인, 정철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는 온건파는 남인으로 분리된다. 남인은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동인의 분당에는 우성전의 기생에 대한 파격적인 총애 역시 작용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5]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평소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5]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5] 선조는 우성전의 상중에 기생이 출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한편 정철과 서인 관련 문제를 선조는 어떻게 처리할지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동인 내에서도 논란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 안건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었다.

동인의 분열과 환국의 시초 [ 편집 ]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5] 이발은 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5]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5]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5]

동인의 내분과 파벌 대립이 강화되자 선조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그 뒤 선조 집권 후반의 정국은 류성룡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복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인계열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쏟아져나옴으로서 전란 직후 북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선조대에는 집권당이 서인-동인-남인-서인-북인으로 집권세력을 교체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는데, 이는 후일 환국정치의 모범이 된다.

기타 [ 편집 ]

이와는 별개로 선대 임금이 숙청시켰던 윤임의 5남인 윤흥신을 사면 및 복권시켜줬다. 그 윤흥신은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을 막기 위해 목숨바쳐 싸웠다.

또한 선조는 신립을 매우 우대했으며 되려 신립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신립이 자신의 용맹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자 선조는 신립에게 먼저 찾아가서 자신의 곤룡포를 봇어서 신립에게 입힌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선조는 신립을 지나치게 편애했으며 신립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는 훗날 녹둔도 전투에도 큰 영향을 끼쳐 패장인 이일이 신립과 같은 파벌이라는 이유로 처벌하지 못하고 그 대신 군공을 세운 이경록과 이순신을 처벌하는 어이없는 일을 벌이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 편집 ]

임진왜란 초기 [ 편집 ]

피란길에 오르는 선조의 어가행렬

대내적으로 붕당간의 권력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는 여진족과 일본의 외침이 있었다. 1583년 니탕개를 중심으로 회령지방에 살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경기감사 정언신을 도순찰사로 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했다. 또한 1587년에도 니응개(尼應介)가 이끄는 여진족이 대거 침입하자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이 이를 격퇴했으며, 이듬해 북병사(北兵使) 이일을 시켜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족 근거지를 소탕했다.

한편 선조는 1590년 황윤길·김성일·허성 등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자신의 천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사신이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假道入明)”이라고 통고하자 조선 정부는 크게 놀라 뒤늦게 경상도·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鎭營)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어가 몽진(파천) [ 편집 ]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이곳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상황에 대해 비어있는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주가 성을 버리고 도망친 행동에 대해 매우 어이없어했다. 센고쿠 시대당시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했는데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게 선조였기 때문이었다.

피난하는 임금 일행에게 돌을 던지거나 외면하는 백성이 나타났다. 개성에 체류 중 한 백성이 선조를 향해 상감은 그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의 배 불리기에만 열중했고, 후궁의 오라비 김공량만 사랑하는 것을 제일 계책으로 삼다가 오늘 이런 일을 당했으니,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느냐고 아우성치기도 했다. 전승에 의하면 선조 일행을 본 어느 지역의 백성은 너 같은 것도 임금이냐라며 돌팔매질을 날렸다 한다.

이 사이 이순신·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힘썼다.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관점 [ 편집 ]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는 류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류성룡이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다.[6] 그러나 선조는 류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6]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6]”라고 언급한 바 있다.[6]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병력이 고갈되자 그 대책으로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6]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다가 그와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6]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7]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7]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은 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7]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원균 총애와 이순신에 대한 불신 [ 편집 ]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7]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7]

그러나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은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7]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선조였다.[7]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수 있겠는가?”라고 했다.[7]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7]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7] 동인 중에서는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 반면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은 광해군이 무군사(撫軍司)에서 이순신을 불렀을 때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선조의 명령에 대한 불복을 의미한다.[7] 이순신을 불신한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후 성실하지 않았다.[8]”라고 평가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9]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9]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9]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위에 적힌 원균의 10살 아들의 모함에 관한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먼저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내용이다.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당초 원균을 모함하면서 말하기를 ‘원균은 조정을 속였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멋대로 군공(軍功)에올렸다.’라고 했는데, 원균은 말하기를 ‘나의 자식은 나이가 이미 18세로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서로 대질했는데, 원균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군색하였습니다.”[10]

하지만 3년 전의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입니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시행하소서.” –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11]

위의 언급과 달리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백호전서를 쓴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2]

이몽학의 난 [ 편집 ]

임진왜란 직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 때를 노리고 왕족 서얼인 이몽학은 의병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장정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김덕령 등이 하옥되는 등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이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병사로 임명했다.[8] 이 반란은 결국 홍주 목사 홍가신에 의해 진압되긴 했으나 선조는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정유재란 [ 편집 ]

선조는 전쟁의 와중에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개탄했고, 동인이 다시 정철의 처벌 문제로 동료끼리 헐뜯고 규탄하자 동인을 불신하고 서인 정철 등을 등용한다.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지원군을 더 파견하자는 조정 중신들의 의견과 달리, 정직과 성실로서 상대해야 된다며 뇌물 제공 거부의사를 명백히 밝힌 역관 홍순언을 신뢰, 총애하기도 하였으나, 홍순언은 중인 출신의 역관이라는 이유로 조신들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후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과 탄환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1597년 일본은 명과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자 다시 침입하였다(정유재란).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때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군이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치세 후반 [ 편집 ]

임진왜란 후의 사회변동과 전후 수습책 [ 편집 ]

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임진왜란 직후 조총과 화승총 기술이 발달했고, 선조는 왜군과 명나라가 남기고 간 군사 무기를 수집을 명하여, 병장기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과 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전쟁중에 명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納粟)을 더욱 확대했다. 납속책의 실시는 부유한 상민·천민의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宮房)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왕자·옹주 23명에게 예빈시(禮賓寺)에 소속되었던 어전(漁箭)·염분(鹽盆)·시전(柴田)을 획급했는데, 이후 궁방전의 시초가 되었다.

1604년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공신 등을 녹훈함으로써 전쟁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을 일본에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었으며, 왜관(倭館)을 열어 개시(開市)하는 것을 허락하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그이전 선조는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게 되는데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7월 5일(임자) 1번째기사 에 의하면 여진족은 함경도를 넘어 수시로 약탈을 감행하여 백성들이 크게 힘들어하는데 선조는 32년(1599년)7월 5일에 여진족 토벌을 추진하게 되고 윤승훈은 크게 반대를 하지만 선조는 끝내 반대의견을 뿌리치고 북벌을 감행함으로써 1600년 4월 기병5천을 중심으로 노토부락 정벌을 감행한다.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4월 14일 초저녁에 좌위, 우위, 중위 3갈래로 나뉘어 좌위는 어유간(魚游澗)에서 중위는 함경북도 무산(豊山)에서 우위는 풍산(茂山)에서 각각 나뉘어 진격한다. 여진족 복병 4~5명이 조선군 척후를 발견했고 이들은 즉시 달아나 온 부락에 침공사실 알렸다. 조선군 기병5천은 적들의 노토부락을 공격하여 여진족들의 집은 흙을 발라 매우 견고해서 지붕의 풀은 타도 벽은 불에 타지 않았는데 조선의 정예병은 도끼로 다 때려부수고 다시 태워서 방한칸 남기지 않았고 무려 1천채가 넘는 집을 한꺼번에 태우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았으며 땅속에 묻어둔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고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밞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도 태워버리니 그때까지 다른 부락과는 비교가 안되는 넉넉함을 누리던 노토부락 예하 6개 마을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고 여진족은 도망가기에 이른다.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으나, 반면에 여진족은 참수된 군사들만 115명에 이르렀다.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선비들은 선조의 이런 면을 두고 이렇게 평하였다.

>선조께선 북로(北虜, 여진) 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생애 후반 및 최후 [ 편집 ]

선조는 생전 초상화 그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런데 전란의 혼란 중, 누군가 전립(戰笠)과 군복을 착용한 선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윤탁연이 발견, 이를 입수하여 비밀리에 보관해왔다. 윤탁연은 자신의 일기인 관북일기 책 속에 선조의 초상화를 보관해두었고, 후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서자의 후손으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라는 두가지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옳다하며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5세부터 18세까지 13년간 섭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도 분조를 경영한 적이 있던 광해군을 결국 왕세자로 승인한다.

중풍으로 인한 증세가 악화되어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고명(顧命)을 남기고, 아침 식사를 겨우 먹은 뒤 55세를 일기로 재위 40년 7개월 간의 치세를 마감하게 된다. 당시 그의 마지막 수라를 준비하던 궁녀 중에 김개시가 있었다. 이후 그가 죽기 전에 먹었다는 음식에 독이 들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생부 덕흥대원군의 추존 여부 [ 편집 ]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끝내 임금으로 추존하려다가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 덕흥대원군을의 묘를 덕릉(德陵)이라 불렀는데, 선조는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대원군 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사후 및 능묘 [ 편집 ]

1608년 3월 16일(음력 2월 1일)에 승하하였다.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를 소경(昭敬)이며,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한 공로가 있다는 점과 새 왕통을 시작하는 군주라는 광해군의 뜻이 감안 되어 1616년(광해군 8년) 8월 4일 선종에서 선조(宣祖)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내 경역에 있는 목릉(穆陵)이며,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다. 목릉은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 있다. 동구릉 중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의 목릉에는 의인 왕후의 유릉(裕陵)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로 능을 건설할 여력이 없었던 탓으로 정자각을 선조의 능침 쪽으로 옮겨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묘호 및 시호 [ 편집 ]

원래 묘호는 선종(宣宗)이었으나 1616년 8월 4일 선조(宣祖)로 개정되었다. 존호는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이고, 시호는 현문의무성예달효(顯文毅武聖睿達孝)이다.

가족 관계 [ 편집 ]

선조가 등장하는 작품 [ 편집 ]

뮤지컬 [ 편집 ]

시사 교양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선조 가계도_광해군, 영창대군, 인목대비

조선 14대 왕 선조는 조선 최초로 왕비가 아닌 후궁의 자식으로 왕이 되었다. 평생 선조는 방계 출신 임금이라는 콤플렉스 가지고 힘들어했다. 이러한 콤플렉스 때문에 다음 왕은 적장자로 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영창대군과 광해군 그리고 인목대비의 갈등과 인조반정이다.

선조는 40년 넘게 조선을 통치했다. 조선 왕 27명 가운데 손꼽히는 보위 기간이 긴 왕이다. 선조가 왕이 된 것은 정말 우연이였다. 명종 외아들인 순회 세자가 요절을 하면서 적장자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궁 소생 왕자들 중 에서 다음 보위를 이어갈 왕을 찾았는데 문정왕후 때문에 힘들어한 왕실은 별다른 세력과 색깔이 없는 선조를 택하게 된 것이다.

정통성도 없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약한 선조는 이황과 조식 같은 사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면서 당쟁과 경쟁이 시작되는 많은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선조 가계도

왕비 : 의인왕후(자식 없음) / 인목왕후 – 영창대군, 정명공주 공빈 김 씨 : 임해군, 광해군(15대) 인빈 김 씨 :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원종 추존), 의창 군, 4명의 옹주 순빈 김씨 : 순환 군 정빈 민 씨 : 인성 군, 인흥 군, 3명의 옹주 정빈 홍 씨 : 경창군, 1명의 옹주 온빈 한 씨 : 홍안군, 경평군, 영성군, 1명의 옹주 부인 8명에서 모두 14남 11녀를 두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조선 16대 왕 인조는 선조의 손자로 후궁 인빈 김 씨의 아들 정원군의 아들이다. 인조 또한 선조처럼 뜻하지 않게 왕이 되었고 이러한 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해서 평생을 힘들어했다.

선조와 인조는 서로 묘하게 닮았다. 왕위 계승 서열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자신의 의지와 능력이 아니 순전히 다른 사람에 의해서 왕이 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겪은 왕이다.

전란과 스스로의 콤플렉스로 인해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를 책봉하는 데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은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거나 자식끼리 죽게 하는 골육상쟁의 원인을 제공한다.

광해군은 선조를 이어서 조선 15대 왕이 되지만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선조는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고 후궁에게서는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의주로 피난을 가는 과정에서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많은 문제가 있어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바로 분조활동을 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원하는 적장자 아들이 생겼다.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다. 영창대군의 탄생은 광해군을 힘들게 했고 언제든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러한 불안감이 결국 광해군이 왕이 된 이후 영창대군을 죽이게 되고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선조가 광해군을 인정하고 왕위를 물려주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극이다.

영창대군은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 태어난 선조의 적장자였지만 아버지 선조는 이미 너무 나이가 많았고 세자는 형 광해군으로 정해져 있었다.

결국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광해군 즉위 후 역모사건에 연루되어서 강화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었는데 겨우 9살에 불과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형이다. 서열로 보아서 임해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다음 왕이 되어야 했지만 성질이 난폭하고 왕이 될 자질이 없다고 신하들이 반대해서 세자가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 중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조선 조정의 짐이 되기도 했다. 이후 사건과 사고를 많이 일으켜서 결구 유배를 가게 되고 죽임을 당했다.

인목왕후는 어린 나이에 선조와 결혼해서 아들인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선조가 죽고 나서 아들도 역모에 연루되어 죽고 본인은 폐비되었다.

인조반정이 발생하자 왕실 최고 어른으로 인조가 왕이 되는 것을 승인하고 다시 복원이 되어서 대비가 된다. 광해군과는 철저한 원수로 지냈다.

정명공주, 인목왕후의 딸이며, 영창대군의 누나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와 같이 강금되었지만 인조반정 이후 풀려난다. 사도세자비 혜경궁 홍씨가 후손이다.

정원군, 선조의 다섯째 서자이고 인빈 김 씨가 어머니이다. 임해군보다 더 망나니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아들이 왕이 되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인조가 정원군 아들이다.

덕흥대원군, 선조는 출신성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조상에 대한 미화 작업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이다.

왕의 아버지는 당연히 왕이 여야 하지만 선조의 아버지는 서자 출신 왕자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하려고 했지만 신하들 반대로 실패했다. 최초로 대원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선조 가계도, 광해군, 영창대군, 인목대비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선조의 콤플렉스가 결국 그의 자식들에게 영향을 주어서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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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 & 선조(하성군 이균) 왕위등극 배경

드라마속 조선역사] <구암 허준> <불의 여신 정이>

선조 가계도 &

선조(하성군 이균) 왕위등극 배경, 선조 치세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는,

선조, 광해군, 임해군,

인빈 김씨(신성군 어머니, 원종[선조 아버지] 어머니)

등이 나오는데,,

드라마 <천명>과 조선왕조 왕의 순서가 정렬이 되네요.

중종 – 인종 – 명종 – 선조 – 광해군

오늘은 <불의 여신, 정이>에서

사기장 백파선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인데,,

정이와 광해군의 사랑(?),,

이건 완전 창작스토리가 될듯 하네요.

선조 가계도와 선조(하성군 이균)의 왕위등극배경,

선조의 치세 에 대해 포스팅하고자 해요.

드라마 <천명>은,,,

중종과 인종,,

꼬마왕자 경원대군(훗날 명종)이 나오죠.

간략히 설명하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으로 옹립된 중종은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린 나약(?)한 왕이었고,

문정왕후와의 정쟁에서 승리한 인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독살(?)로 인종은 일찍 죽게 되었죠.

-드라마 <천명>에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 –

중종반정 자세히 보려면 —> [ 클릭 ]

중종 가계도와 중종과 단경왕후의 차마바위전설에 대해 보려면 —> [ 클릭 ]

-드라마 <천명>에서,,, 문정왕후에게 독살(?)된,, 인종 –

인종 가계도, 인종 죽음은 독살?? 자세히 보려면 —> [ 클릭 ]

-드라마 <천명>에서,,, 좌) 문정왕후 우) 문정왕후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 –

인종 죽음 후, 명종 어머니(문정왕후) 섭정 자세히 보려면 —> [ 클릭 ]

그러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꼬마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경원대군이 바로,,, “명종”이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명종은 문정왕후의 아바타(?)였으니,

국가살림, 국민생활을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고,

지들끼리 박터지게 싸우게 되죠.

-드라마 <천명>에서,,, 문정왕후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 –

그런데,, 문정왕후의 기가 쎄서인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13대)이

후사없이 죽게 되자,,

인순왕후는 후계자로 평소에 귀여워하던

하성군 이균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하성군 이균 이 바로,,, 선조

아래의 중종가계도와

선조의 가계도를 보시면 이해가 빠를 듯 합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

왕위를 이은 선조의 가장 큰 약점은

​적계 승통이 아닌, 방계 승통이었죠.

그래서 그가 그 콤플렉스 때문에

적계승통을 더더욱 원했구요.

또한 다른 왕들보다 더 못되게 굴었는지도 모르죠. ^^;;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참혹한 시기가

근대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인

조일전쟁이 일어났던 선조 재위시절이었죠.

어쩔수 없이(?),

전쟁때문에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조일전쟁이 끝나니, 새 중전에게 얻은 아들인

꼬마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다, 선조는 갑자기 꼴까닥 했죠.

선조는 왕이 되기 전에

세자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글씨나 쓰고 시나 지으면서 세월을 죽이고 있어서 그런지

재위 41년동안 제대로 한 것은

거의 하나도 없을 정도 !! ^^;;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 좌) 선조 우) 광해군-

사견을 덧붙이자면,

선조는 머리가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지만

간교(?)하고 비겁(?)한데다 무능하고 질투와 시기가 많아

군왕 그릇은 커녕 대표적인 소인배(?)였다고 생각되네요.

이런 인간이 조일전쟁 때,

왕노릇을 하고 있었느니, 당시 뭇 백성들의 고난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었겠나?? 싶네요.. ^^;;

또 선조대에는 조일전쟁 말고도

조선역사상 최대의 옥사가 벌어져

아까운 선비 거의 1,000여명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는데,

바로 서인에 의해 조작된 역모인

<기축옥사>,, 즉,, 정여립 역모사건 이죠.

기축옥사에 대해 4부작으로 만든 것을

보기 쉽게 네이버오픈캐스트로 아래와 같이 정리합니다.~ [ 아래 클릭 ]

-드라마 <허준>에서,, 선조-

선조는 자신의 치세때,

시작된 당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향후 조선이 당쟁의 폐해로 쇠퇴하도록 방치했고,

조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도망만 다녔죠.

침입한 왜군에 강력히 맞서는 대신

자신의 안전만 생각하여 도망가는데만 급급했고,

공을 세운 무장들을 시기해서 김덕령을 죽이고

이순신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구요.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선조-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선조를 냉철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강인한 군주로 표현한다는데 ^^;; ..

제 생각에는 좋게 볼래야

좋게 볼 수 없는 왕이네요.

개인적으로 조선의 왕 중에서

싫어하는 왕 중에 하나임. ^^;; ㅎㅎ

다음 포스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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