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한국 패션 | 한국 1900년도 ~ 2020년도까지 패션 변화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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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이후 여성복식의 100년 변천사에 관한 연구

그러므로 복식사에 서양패션이 도입된 전환기라 할 수 있는 개화기를 기점으로 그 후 … 1940년대 초반에는 전시 경제체제가 계속되면서 섬유 공업이 군수 공업화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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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reascience.or.kr

Date Published: 8/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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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로 급부상한 1940년대 패션 활용한 NEW 스타일링 제안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여성 의복의 형태가 자유롭고 다양해진 1940년대, 이때 시대를 주름잡았던 디테일과 패션 키워드가 다시 한번 유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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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nnews.co.kr

Date Published: 7/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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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성패션 – 치장과 노출 그리고 검열의 ‘삼중주’

한국 여성 패션의 역사는 생산 시스템과 더불어, 매혹적인 옷을 통해 더 멋진 … 1940년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생산증진을 위한 작업복이 강조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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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han.co.kr

Date Published: 2/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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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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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40, 패션 황금기의 귀환 – SMlounge

디자이너들은 패션 황금기 1940년대의 여인들을 런웨이 위에 소환했다.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강조하는 아워글라스 실루엣의 원피스, 프릴 장식의 셔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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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mlounge.co.kr

Date Published: 11/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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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학 역사공부 1940년대의 패션스타일과 메이크업, 헤어 …

헤어 등의 유행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미래의 패션과 뷰티 흐름을. 예측할 수 있는 법! ​. 오늘은 1920, 1930 년대에 이어. 1940년대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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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bsbeautystyle.com

Date Published: 4/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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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900년도 ~ 2020년도까지 패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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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깡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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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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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 변천사 100년의 시대적 흐름- 1900년대~2000년대

한국 패션 변천사 100년의 시대적 흐름

(1900년대~2000년대)

백의민족으로 불릴 만큼 소박했던 민중들의 패션도 너무나 화려해 졌는데,

대한민국처럼 패션에 민감한 나라가 있을까요? 대한민국 패션은 그동안 변방에 머물렀지만, 한국인의 패션에 대한 열정으로, 최근 많은 디자이너와 모델이 파리와 뉴욕 등 세계적인 패션도시에 진출하고, 한류열풍을 맞아 세계 속으로 한층 더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백의민족이라 불릴 만큼 흰옷을 좋아했던 대한민국의 패션이, 지난 개화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100년을 거쳐 오면서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개화기(1876~1910년)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전 조선의 패션은 전통적인 한복패션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을미사변 등 일련의 개혁.개방을 거치며 관복이 간소화되고, 문관.무관의복이 흑색으로 통일되었다.

‘한복’이라는 이름으로 일관한 우리의 복식문화가 서양복식의 유입으로 이른 바 양장 스타일로 바뀌게 되는 시점이다.

1895년 단발령을 계기로 조정 대신들이 양복을 착용하고, 고종황제가 후록코트에 실크모자 차림의 대례복을 선보이면서, 우리의 복식문화는 일대 변혁기를 맞는다.

또한 군복이 신식화되며, 단발령으로 인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양복을 입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양복을 처음 입은 이는 ‘서광범’으로, 구한말 일본에 수신사로 갔을 때 처음 사서 입었다고 한다.

그 후 양복은 관료와 외교관들의 복장에서 민간으로 전해졌으며, 도시인들 위주로 한복에 비해 활동성이 높았던 양복의 보급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로 양장을 입은 여성은 누구일까? 바로 윤치호의 부인 ‘윤고려’이다.

그녀는 개화기 신여성으로 본디 성 대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빌려 윤으로 고쳤다. 그녀의 이름은 korea를 뜻하였다. 이렇듯 양장은 개화기 신여성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나, 남성의 양복만큼 일반화 되지는 못하였다 대신 통치마에 긴 저고리로 활동성이 개선된 개량한복이 크게 보급되었다. 하지만 농촌의 부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한복을 고수하였다.

☛ 참고

일본 양복회사가 들어오면서 양복이 대량 공급되기 시작했으며, 단추가 4~5개인 색크수트가 여전히 유행했다.

● 일제시대(1910~1945년)

일제시대 일본은 백의로 대표되는 전통한복의 착용을 금지 시키고, 여성들에게 몸빼바지 를 보급 시킨다 몸빼바지는 일바지로써 한민족의 정신말살과 전시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보급되어졌다.

몸빼바지는 여성 최초의 바지패션으로 일제에 의해 보급되었지만, 현재에까지 많은 여성에게 입혀지고 있다. 몸빼바지와 함께 실용성이 향상된 간단복이 보급되었으며, 1920년대는 속옷의 개량이 이루지며, 양말과 고무신이 보급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내외용 쓰개가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1938년 함흥에 대한민국 최초의 양재학원인 함흥양재학원이 ‘ 최경자’ 여사 에 의해 세워진다. 대한민국 패션계에서는 이 해를 대한민국 패션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있다.

☛ 참고

▶ 1910년대

개화의상이 정착되는 시기로, 도시남성들 사이에서 양복차림이 성행하고, 외국유학생 출신 등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늘면서 치마 길이가 짧아졌다.

또 짧아진 치마의 영향으로 속치마나 팬티 같은 서양식 속옷 문화가 전통 속옷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또한 초기의 색크코트와 프록코트는 퇴조하고 칼깃(피크드 라펠 Peaked Lapel)이 나타나면서, 앞단추를 두줄로 하고 V존을 강조한 겹자락 수트가 유행했다.

브리티시 스타일과 함께 조끼를 반드시 착용하며, 상의 단추는 3개로 줄었다. 모자, 넥타이 핀, 커프 링크스, 회중시계 등의 엑세서리가 크게 유행했다.

▶ 1920년대

양복은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화려한 분위기와 남성의 품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유행이 이어졌다. 브리티시 스타일로 몸깃이 좁고 어깨선이 적당히 강조되었다.

대체적으로 사치스러운 양상을 보였는데, 넥타이 핀, 모자 등의 액세서리도 빠짐없이 갖추었으며, 상의, 바지, 조끼를 함께 입는 세트갖춤 수트가 주류를 이뤘다.

▶ 1930년대

일본, 미국 등지의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서양의 멋진 양복이 선보이게 되었고, 중반 이후에는 풍성한 느낌의 볼드룩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군복풍이 등장하면서 액세서리도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한복위에 코트, 구두, 중절모를 착용하는 한,양복 혼용 스타일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여학교 교복의 양장화에 편승하여 양장이 일반여성들에게까지 확산됐다. 고무신이 보편화됐고 구두와 핸드백까지 등장하였으며, 양장에 구두와 핸드백으로 치장한 ‘양장미인’이 각광 받았다.

특히 ‘한국 현대패션의 선구자인 최경자 여사’는 양장점을 운영하고, 최초의 양재학원인 함흥양재학원(후에 국제복장학원으로 개칭.발전)을 설립하여 양장문화를 꽃피우는 단초를 제공했다.

▶ 1940년대

일제하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국민복이 강요된 시기로, 몸뻬바지와 간호사복 같은 간단복이 전형적인 의상이 됐다.

해방직후 미군정 시기엔, 어깨에 솜방석 패드를 높게 넣은 밀리터리 룩과 퍼머넌트 헤어스타일이 유행을 탔고, 영국산 복지로 양복을 지어 입은 ‘마카오 신사’가 첨단패션을 상징하는 멋쟁이로 통했다.

☛ 최경자 여사

한국 패션의 어머니 로 불리며, 그녀가 세운 함흥양재학원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양재학원이었다. 이후 함흥양재학원은 지금의 국제복장학원으로 발전하였으며, 국제복장학원은 앙드레김, 이상봉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들을 배출하였다.

그녀의 삶엔 늘 최초라는 말이 따라 붙었다. 1957년 최초로 국제 패션쇼에 작품을 출품 하였고, 최초의 모델스쿨을 열었으며, 최초의 패션종합잡지 ‘의상’을 창간하였다.

● 해방, 한국전쟁 후(1945~1950년대)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일제에 의해 통제받던 복식제도에 반발하여 한복을 많이 입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국에 의해 들어온 구호품 의복으로 양복이 다시 보급되기 시작한다. 전후혼란 속에 물자부족으로 인하여 미군에서 흘러나오는 군복을 염색한 구제품과 군용담요를 개량해 코트를 만들어 입는 등 일명 KJP(구제품)패션이 인기를 끌었다.

전후에는 빌로드 옷감으로 대표되는 고급원단으로 만든 맞춤옷이 상류층 여성에게 인기를 끌었으며, 남성들은 마카오 신사라 하여 마카오에서 수입된 원단으로 양복을 지어 입으면 최고의 멋쟁이로 통했다.

또한 옷감 부족으로 미군의 낙하산 원단을 이용하여 만든 의상이 당시 패션리더였던 양공주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낙하산 블라우스로 대표되는 낙하산 패션의 유행은 양공주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이어졌다.

1953년에는 나일론이 수입되어져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광범위 하게 사용되어졌다. 나일론은 질기고 빨아 말리면, 별다른 손질없이 입을 수 있었기에 순식간에 일반화 되었다. 나일론의 보급은 한국 섬유산업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전통한복은 명절이나 행사에 특별히 입는 예복으로 변해갔다.

☛ 참고

▶ 1950년대

한국에서도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양복점은 위축되고, 스탠드 칼라의 국민복 스타일이 확산되었는데, 양가슴에 큰 포킷을 달았고 앞단추는 5~6개를 달았다.

색상은 카키색 일색으로 획일적이었으며, 광복이후 해외동포들의 귀국으로 스타일이 다양해지게 되며, 싱글 브레스티스(Single Breasted)와 로마로 불리우던 곁자락 수트도 나타났다.

또한 미군의 영향이 커졌는데, 군복을 염색하거나 발색한 옷이 많이 입혀졌다. 미군이 잔류하면서, 아이비 스타일이 주류를 이뤄 어깨선이 자연스럽고 허리선이 없는 박스형이 유행했다. 사선 줄무늬 넥타이, 이중고리 벨트, 로퍼 구두 등 전체적으로 스포티한 경향이 강했다.

전쟁 직후 디자이너 부띠끄들이 모여든 명동이 패션 1번지로 떠올랐고 이들의 주도로 하이패션이 싹텄다. 타이트한 스커트, 굽 높은 하이힐에 나일론 스타킹, 재건복, 탈색된 바지, 쌕드레스, 패티코우트 스타일 유행 멋쟁이 여성들의 상징이었으며 맘보바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영화 ‘자유부인’의 히트로 외국산 벨벳소재 의상이 날개 돋힌 듯 팔려 여성들의 사치가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 대한민국 최초의 디자이너 단체 결성

1955년 최초의 디자이너 단체인 대한복식연구회(1961년 대한복식 디자이너협회로 개칭)가 조직되고, 1957년 최초의 바자회를 개최하였다..

☛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

1956년 10월 29일 반도호텔에서 디자이너 ‘노라노(노명자) 여사’의 패션쇼가 열렸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모델은 없었으며, 당대의 인기여배우와 미스코리아가 무대에 섰다. 노라노 여사는 미국에서 패션공부를 하였고, 1950년 양장점 ‘노라노 꾸트리에’를 연 대한민국 1세대 패션디자이너이다.

최초의 패션쇼 이후 다양한 패션쇼가 등장(1959년 미국, 프랑스 등 15개국이 참가한 국제패션쇼 개최)했다.

● 1960~70년대

패션의 다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며, 대중문화가 패션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디자이너의 작품을 발표하는 전통적인 패션쇼부터 남성복 패션쇼가 등장하고, 산업화와 군사정권의 영향으로는 간편한 생활복이나 작업복 패션쇼와 방공 패션쇼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고 나왔던 맘보바지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 하였으며, 1967년엔 가수 윤복희가 입은 미니스커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미니스커트는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단속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미니스커트의 등장은 단순한 의복의 변화가 아니라,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패션의식의 대변화였다. 1970년대에는 미니스커트의 유행 속 보다 긴 길이의 맥시, 미디스커트도 유행하였다.

스커트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들어 판탈롱 바지(바지통이 매우 넓은 바지)의 유행과 선글라스와 머리수건등 다양한 패션소품의 등장, 그리고 생맥주와 통기타 청바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하였다. 청바지는 청년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의미와 편한 활동성으로 당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행하였다.

☛ 참고

▶ 1960년대

양복의 전성시대로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로, 봉제품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보세가공 잉여품이 인기품목으로 부상했다. 아이비 스타일의 유행이 지속되었고 자연스럽고 좁은 어깨에 깃은 좁았고 뒤트기(Vent)가 없었다.

바지는 일자형이었고 맘보 스타일도 많이 입었으며 점차 유럽에 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복장의 사회적. 문화적 기능이 삶의 질과 연결되어 의복문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1966년 앙드레 김은 패션의 본 고장인 파리에서 패션쇼를 가지기도 하였다.

한편,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처음 선보였는데,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의 감각에 부합하여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60년대 후반에는 통이 넓은 판탈롱 팬츠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남성양복의 수요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이에 발맞추어 1965년 남성복의 패션쇼도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노슬리브 드레스, 화려한 프린트 셔츠 등이 히트 아이템이었으며, 과장된 형태의 부풀린 헤어스타일과 남성들의 장발이 크게 유행했다.

미니스커트는 무릎 위 얼마 높이까지 치마가 올라갔는 지를 자로 잰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미니스커트가 젊은 여성들로부터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등 사람들의 의상에 대한 개념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된 시점이다.

▶ 1970년대

1972년 10월의 유신에 의해 남성복의 분위기도 경직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초기의 의류업계는 충격을 입었고, TV방송에서는 패션중계가 허용되지 않아 패션쇼가 제한을 받게 되어 원활한 패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장발의 청소년들은 거리에서 삭발을 당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은 경범죄로 처벌되기도 하는 시기였다.

미니스커트와 핫팬츠에 이어, 티셔츠와 진바지가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옷차림이 됐고, 여성들 사이에선 바지통이 넓은 판탈롱과 키를 커보이게 하는 통굽 구두가 유행했다.

젊은층 사이에서는 통바지, 통기타, 생맥주 등이 퍼져 나갔으며, 또한 판타롱, 샤넬라인, 히피스타일, 블루진 등이 유행되었다.

1970년에는 중앙디자인그룹(J.D.G)이 설립되고, 1978년에는 세계패션그룹 한국지부가 설립되기도 했다.

유럽의 콘티넨탈룩이 기조로 상의가 길고 깃의 끝이 뾰족하고 넓어졌으며, 2개의 단추와 홑자락에 양 옆 트기가 유행하다가, 76년을 기점으로 올드룩으로 변화되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깃의 너비도 좁아지며, 어깨선 등의 실루엣이 유연하게 변화되어갔다.

판타롱 스타일의 바지가 등장했고 복고풍의 회색이 주조를 이루었다.

● 1980~90년대

1980년대는 대한민국 패션산업의 도약기로, 그동안 개인이 운영하는 ‘부티크’와 ‘살롱’에서 벗어나 기성복산업 시대가 열렸다.

1983년 발표된 교복자율화를 기점으로 청소년 패션(신세대의 등장)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과 수입의 자유화가 시작되어, 더욱더 감각적이고 개성을 중시한 패션문화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의 여성복은 초기의 매니시 룩을 기조로 한 레이어룩, 패드로 어깨를 강조한 정장 스타일과 캐주얼 스포츠 웨어가 동시에 유행했다. 머메이드, 트럼펫을 비롯한 새로운 실루엣의 스커트가 등장했으며, 특히 바지가 크게 유행해 일명 ‘디스코 바지’에서 통바지에 이르는 다양한 라인이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1983년부터는 ‘펑크룩’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패션이 더욱 다양화 고급화됨에 따라 ‘앤드로지너스’ 감각의 남성복 재킷이나 바지를 여성이 입어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하려 하였다.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컬러TV 시대의 도래와 여성교양지 및 패션잡지의 대거출현이 패션의 멀티화를 도왔다. 90년대 들어와서는 서태지로 대표되는 ‘힙합패션’이 등장하였으며, 복고풍 패션의 유행과 ‘그런지룩’과 란제리 패션 등이 등장했다.

1990년대 들어 많은 디자이너들이 해외컬렉션에 진출하고 있으며, 세계화시대를 맞아 세계의 패션이 곧 대한민국의 패션이고, 대한민국의 패션이 세계의 패션이 되는 날 이 되고있다.

☛ 참고

▶ 1980~90년대

고도성장기로 진입하면서 개인소득이 늘고,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사회진출로 패션의 본격시 되었다.

83년 교복 자율화를 계기로 영 패션문화가 만개하고, 캐주얼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또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 연이은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에 힘입어 스포츠웨어가 일상화됐다.

시장개방에 따라 해외 유명브랜드가 앞다퉈 들어오는 등 글로벌리즘의 영향으로, 세계가 같은 패션을 보고 같은 패션을 소비하는 패션과 유행의 지구화시대에 돌입했다.

패션상품의 질적가치를 인지하기 시작했으나, 직감적인 기획으로 재고가 급증하고

해외여행 자유화로 패션의류 수입 증가했다.

1985년 한국패션협회가 설립되면서 대한민국 패션대전(컨테스트), 서울패션페어(전시회)를 개최하였다.

90년대초부터 일부 패션디자이너들의 해외진출 본격화되었고, 1990년에는 SFAA, 1992년에는 NWS 등 패션그룹을 설립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자연지향의 패션경향을 띄어 빅 실루엣이 유행하였다. 상의는 뒤트기를 하지 않고, 바지는 턱(Tuck)을 넣어 허리와 엉덩이 부분을 편하게 했다.깃은 좁아지고 어깨선을 강조한 스타일이 많았으며 천연섬유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고 패션 코디네이터의 역할도 뚜렸해졌다.

● 2000년대

최근 우리나라 패션은 2000년대에는 동대문 패션타운이 패션산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인터넷 문화의 정착으로 온라인 판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옷은 입어보고 구입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2002년 월드컵 등 세계적으로 굵직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널리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최근에는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한국이 재조명되어, 의상 또한 주목을 받아 세계시장 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 여성복

1993년 유통개방 이후, 기존 잡화명품 부문의 수입브랜드 확대가 가속화 되었으며, 여성캐주얼군에서도 수입브릿지 라인을 형성하고, 메긴나인브릿지, 쿠스토 등이 대거 영업을 전개 중이다.

캐주얼웨어에서도 이지, 심플과 같은 캐주얼의 기본 컨셉에 힙합과 포지티브란 스포츠 라인을 활용하는 캐포츠룩군 형성 등 ‘패션의 혼합’에 대한 시도는 끊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의식주 전반에 걸쳐 자연과 천연을 추구하는 경향 및 2004년 웰빙문화 확산으로 옷에 대한 기능성을 중시하였고, 과거로의 회귀인 복고풍이 트랜드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스타일은 복고풍의 영향으로 로맨틱 감성의 장식적 디테일이 강하고, 색채는 전반적으로 밝고 강렬한 컬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남성복

90년대 중반이후 직수입 남성복의 직진출 러쉬를 이루고난 후, 2000년도에는 고가의 라이센스 정장 브랜드의 신규 런칭이 늘어났고, 20~30대의 젊은 패션 리더층을 겨냥한 캐릭터캐주얼 브랜드가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여가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주 5일제에 대한 시대적 요구로 인해 트래디셔널 캐주얼의 헤지스, 페리엘리스, 타미휠피거와 같은 브랜드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패션트랜드는 점차 Formal함에서 캐주얼 중심으로 이동되고 있다.

또한 고객의 구매 양극화에 따라 백화점 브랜드와 할인점, 로드샵의 브랜드가 확연히 나타남에 따라, 일본과 같은 패션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지며, 캐주얼 시장의 확대가 두드러질 것으로 판단된다.

▶ 아동복

경기침체로 인한 소비자의 가격적 합리성 및 패션성 추구로 블루독, 캔키즈 브랜드의 상승으로 상대적인 수입브랜드가 정체를 보이고 있다. 2001년부터 뉴골든, 엘덴 등 기존 백화점 영업에서 할인점, 아울렛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짐이 두드러졌다.

▶ 액세서리 및 기타

입잡화명품 브랜드 확대에 따라 구두 싸롱화 중심으로 M/S가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90년대 대비 편안함 성향으로 단화가 유행이다.

화장품은 의상이나 신발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추세에 맞추어, 건강하면서도 내추럴하에 표현되는 메이크업이 강조될 전망이다.

※ 참고자료 : 한국 패션의 시대별 흐름, 한국 패션의 변천사, 한국 패션사와 패션 발전전망

[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 (7) 여성패션

한국패션 100년 특별호

옷을 입음으로써 우리의 육체, 몸은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 옷의 흐름을 대변하는 단어인 패션은 변화라는 뜻으로, 이 단어 자체에 이미 옷의 변화, 창조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변화를 거부하는 안티 패션도 있다. 이는 전통사회의 정해진 복장이기도 하고, 변화를 통해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입는 것으로 승복이나 수도사의 옷, 영국 여왕의 대관식복, 유니폼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 패션사는 이런 안티 패션보다는 빠르게 변화하는 여성 패션이 중심이다. 한국 여성 패션의 역사는 생산 시스템과 더불어, 매혹적인 옷을 통해 더 멋진 식탁에 앉고자 하는 여성들의 조바심, 그리고 안티 패션의 검열적 시각이 개입하여 벌이는 ‘치장과 노출, 검열’의 삼중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에의 강요와 검열의 변주들

조선시대 복식은 그 화려함이나 장식과는 별도로 몸을 감추는 디자인이었다. 여염집 여인들은 장옷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다녔다. 이런 감춤에서 드러냄, 즉 신체 노출의 역사가 한국 현대여성 패션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 서양복식을 의미하는 양장(洋裝)은 신여성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면서, 1920~30년대에 확산되었다. 주로 여학생이나 예술가들이었던 신여성들은 단발을 주로 했기에 모단(毛短·modern)걸로 불리며 전통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곤 했다. ‘별건곤’ 등 1930년대 잡지나 신문에는 여우 목도리, 양산, 구두, 모자, 장갑 등과 더불어 100가지가 넘었다는 이들의 패션에 대해 비평과 풍자가 끊임없이 실렸다.

1930~1940년대 일제 강요로 ‘몸뻬’를 입은 여학생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생산증진을 위한 작업복이 강조돼 여성들은 ‘왜 바지’(몸뻬)를 입어야 했다. 헐렁한 바지 밑단을 묶어서 만든 디자인으로, 친일잡지 ‘춘추’에 ‘몸뻬를 생각한다’(1943년 9월)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 논객은 ‘거리의 잘못 입은 몸뻬 괴물을 청소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후, 성전을 위한 작업복에 팔이 드러나는 발랄한 상의를 입거나, 혹은 비싼 천으로 만들어 입기도 하는 여성들을 ‘악질의 양풍환자’로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은 남성이 여성들에게 줄기차게 해 온 ‘아름다워라’라는 주문의 부메랑 효과 아닐까?

해방이 되어서는 미군 담요를 이용한 코트, 낙하산의 나일론 천을 이용한 블라우스 등이 등장했는데, 레이스가 달린 얇은 이 옷은 속이 비치는 선정성으로 당연히 구설에 올랐다. 또 파마가 등장해 거의 모든 중년 여성이 한복에 짧은 파마머리를 했다. 당시 언론에는 ‘괴상한 두발화장을 하는(…) 이런 천박한 여성들은(…) 깨끗한 삼천리 강산으로부터 말소시켜야 한다’라고 격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파마머리는 확산되었다. 1961년 들어선 군사정권은 유니폼식의 재건복 입기 운동을 벌여 농촌 면서기들은 모두 입었고, 이 옷을 입고 결혼하는 커플들이 생기는 등 전 국민에게 안티 패션을 제안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9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왼쪽)과 1980년대초 ‘홈드레스’ 패션 광고

한국 패션사에서 최고의 사건은 역시 미니스커트가 불러왔다. 1967년부터 가수 윤복희가 유행시킨 이 디자인은 무릎 위 30㎝까지 올라간 마이크로 미니가 등장하면서 정부가 개입했고, 무슨 기준인지 무릎 위 15㎝까지만 허용한다는 규제가 나왔다. 거리에는 자를 들고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를 재는 경찰이 나타났고, ‘남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는 아가씨가 있다면 그야말로 민족반역자’라는 언론의 분노에 찬 외침이 또 터져 나왔다. 사실 이런 분노의 소리는 연원이 깊다. ‘우리나라 여자의 저고리란 것은 소매뿐이오 길이가 없어서 붉은 살이 드러나지 않지는 못한즉 사람의 모양 같지 아니한지라’라는 한탄(1905년 제국신문)을 넘어 성호 이익(1681~1763)의 ‘짧은 적삼은 요사스러운 것이니, 마땅히 못 입도록 금하여 아주 없애야 한다’는 호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언니들의 ‘잇 아이템’ 판탈롱과 원피스

이 같은 검열의 시각은 20여년이 지난 1990년 중반 인기그룹 룰라 멤버가 입으면서 퍼져나간 배꼽티, 2010년대의 하의실종 패션에도 똑같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사람 같지 않다거나 반역자까지 불려 나오지는 않았지만, ‘쳐다보다가 교통사고 날 뻔했다’ ‘성범죄를 조장한다’ 등의 갖가지 불평이 제기됐다. 하지만 현재 이 디자인을 스타들은 줄기차게 입고, 언론들은 ‘아찔하다’ 등의 기사로 오히려 대 놓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니 어떤 여성이 이 상찬의 디자인을 포기할 것인가.

이렇게 여성들이 자신의 생물학적 매력을 노출하는 현상은 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모순적인 사회 시스템의 한 현상일 뿐이다. 자신의 매력을 전시하는 것이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미성숙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배꼽티와 하의실종 디자인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한국 패션의 한 흐름은 여성의 전시 욕망과 그에 대한 안티 패션적 검열이 만들어 내는 화음 아닌 화음의 장이기도 하다.

■치장으로써의 디자인 변천사

이런 노출과 검열의 한편에서는 색채와 형태 디자인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1957년에는 노라노가 한국 최초로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는데 남성들이 더 많이 관람했고, 오드리 헵번이 영화를 통해 유행시킨 플레어스커트, 맘보바지가 유행했다. 한국성에 대한 추구도 당연히 일어나서, 1959년에는 최경자의 ‘청자’ 드레스를 비롯해 노라노의 양단 드레스 ‘아리랑’, 72년에는 앙드레 김도 양단 조끼를 디자인했다. 또한 남자 양복에서도 청자선(靑磁線)이 제시되는 등 전통 옷과 양장의 결합이 시도됐다. 하지만 이 시도는 거리 패션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사라지고 한복은 예복으로만 정착되어 갔다.

앙드레 김의 양단 조끼(왼쪽)와 최경자의 ‘청자’ 드레스. 패션디자인에 한국적 미를 접하려는 시도였다

1970년대는 가히 패션의 춘추전국시대로 일컬어진다. 명동 거리는 미니스커트, 핫팬츠, 고고바지, 롱부츠, 각종 길이의 스커트가 휩쓸었고, 히피문화의 영향으로 청바지와 장발, 판탈롱이 활보하면서 ‘명동 바닥에는 청소부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또 1970년대 중반 창립된 반도패션, 논노, 에스에스패션 등 기성복 회사는 각자의 브랜드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색깔도 다양하고 화려했으며, 홈드레스라고 하는 주부 전용 디자인이 등장해 혼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70년대식의 짙은 화장을 한 주부가 발목까지 덮는 홈드레스를 입고 과일이나 커피를 내가는 사진은 그 당시 여성지의 빠지지 않는 광고 중 하나였다.

레깅스(2014년·왼쪽)와 스키니 바지(2013년)

88올림픽 이후에는 스포츠 웨어가 자리 잡았고, 1990년대 후반 기성복 브랜드가 외환금융위기 여파로 사양길로 접어들 즈음 동대문의 밀레오레, 두타 등이 등장해 다양한 취향의 디자인이 선보였다. 2010년 이후에는 레깅스와 스키니 바지로 하체 곡선을 다 드러내면서, 레이어드 룩이나 기하학적 커팅의 상의로 상체를 감추는 패션이 공존했다.

■유행의 하향이론과 창조성

이런 패션의 흐름, 즉 유행은 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지속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최근까지 4가지 학설이 제기되었다. 이 중 근대 초기 게오르그 짐멜이 제시한 유행의 ‘하향이론’을 바탕으로 인류학자 다니엘 밀러는 이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를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밀러의 ‘모방의 과정’(The process of emulation)을 보면, 처음 1단계에서는 상부 계층(가장 오른쪽)이 손잡이가 하나 달린 항아리를 혼자서만 갖고 그 희소성으로 즐거워한다. 손잡이가 없는 항아리의 나머지 사람들은 입술이 삐죽한 채 시무룩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는 점차 2단계, 3단계로 확산되고 사람들도 즐거워한다. 하지만 맨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이제 상부 계층에서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항아리가 나타나 혼자 웃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도식이 보여주는 것은 스타일은 결국 차별 짓기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짧은 저고리를 유행시킨 조선의 기생으로부터, 오드리 헵번, 윤복희, 룰라 등 수많은 스타들이 이러한 스타일의 정점에 서 있고, 현재는 명품룩, ‘청담동 며느리 룩’까지 가세해 있다. 이것이 패션 디자인의 유행을 결정짓는 구조이다.

다니엘 밀러의 ‘모방의 과정’

하지만 창조라는 관점에서 패션계 지존들에게 옷은 다른 의미이다. 요절한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은 “나는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이 직면하기 싫어하는 전쟁, 죽음, 마약, 섹스 등을 디자인을 통해 말하고 싶다”고 했으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 사회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다. 나는 패션으로 영국 사회를 공격하고 싶다”면서 부자유, 금기와 관습을 깨는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철학이 전쟁 후 크리스천 디올이 창안한 뉴룩의 곡선미, 샤넬의 우아미를 지나 현대 여성의 욕망과 맞아 떨어졌고, 그들만의 패션 갈라를 창출하고 있다. 현재 젊은 소비자들 역시 더 이상 패션에서 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움직이는 기호인 패션을 통해 자기 선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소비자들을 탄생시킨 한국의 현대 패션 100년의 역사는 이제 패션 디자인에 감각은 물론 철학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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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패션 변천사 100년의 시대적 흐름 (1900년대~2000년대) 백의민족으로 불릴 만큼 소박했던 민중들의 패션도 너무나 화려해 졌는데, 대한민국처럼 패션에 민감한 나라가 있을까요? 대한민국 패션은 그동안 변방에 머물렀지만, 한국인의 패션에 대한 열정으로, 최근 많은 디자이너와 모델이 파리와 뉴욕 등 세계적인 패션도시에 진출하고, 한류열풍을 맞아 세계 속으로 한층 더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백의민족이라 불릴 만큼 흰옷을 좋아했던 대한민국의 패션이, 지난 개화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100년을 거쳐 오면서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개화기(1876~1910년)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전 조선의 패션은 전통적인 한복패션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을미사변 등 일련의 개혁.개방을 거치며 관복이 간소화되고, 문관.무관의복이 흑색으로 통일되었다. ‘한복’이라는 이름으로 일관한 우리의 복식문화가 서양복식의 유입으로 이른 바 양장 스타일로 바뀌게 되는 시점이다. 1895년 단발령을 계기로 조정 대신들이 양복을 착용하고, 고종황제가 후록코트에 실크모자 차림의 대례복을 선보이면서, 우리의 복식문화는 일대 변혁기를 맞는다. 또한 군복이 신식화되며, 단발령으로 인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양복을 입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양복을 처음 입은 이는 ‘서광범’으로, 구한말 일본에 수신사로 갔을 때 처음 사서 입었다고 한다. 그 후 양복은 관료와 외교관들의 복장에서 민간으로 전해졌으며, 도시인들 위주로 한복에 비해 활동성이 높았던 양복의 보급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로 양장을 입은 여성은 누구일까? 바로 윤치호의 부인 ‘윤고려’이다. 그녀는 개화기 신여성으로 본디 성 대신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빌려 윤으로 고쳤다. 그녀의 이름은 korea를 뜻하였다. 이렇듯 양장은 개화기 신여성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나, 남성의 양복만큼 일반화 되지는 못하였다 대신 통치마에 긴 저고리로 활동성이 개선된 개량한복이 크게 보급되었다. 하지만 농촌의 부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한복을 고수하였다. ☛ 참고 일본 양복회사가 들어오면서 양복이 대량 공급되기 시작했으며, 단추가 4~5개인 색크수트가 여전히 유행했다. ● 일제시대(1910~1945년) 일제시대 일본은 백의로 대표되는 전통한복의 착용을 금지 시키고, 여성들에게 몸빼바지 를 보급 시킨다 몸빼바지는 일바지로써 한민족의 정신말살과 전시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보급되어졌다. 몸빼바지는 여성 최초의 바지패션으로 일제에 의해 보급되었지만, 현재에까지 많은 여성에게 입혀지고 있다. 몸빼바지와 함께 실용성이 향상된 간단복이 보급되었으며, 1920년대는 속옷의 개량이 이루지며, 양말과 고무신이 보급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내외용 쓰개가 완전히 사라졌다. 또한 1938년 함흥에 대한민국 최초의 양재학원인 함흥양재학원이 ‘ 최경자’ 여사 에 의해 세워진다. 대한민국 패션계에서는 이 해를 대한민국 패션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있다. ☛ 참고 ▶ 1910년대 개화의상이 정착되는 시기로, 도시남성들 사이에서 양복차림이 성행하고, 외국유학생 출신 등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늘면서 치마 길이가 짧아졌다. 또 짧아진 치마의 영향으로 속치마나 팬티 같은 서양식 속옷 문화가 전통 속옷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또한 초기의 색크코트와 프록코트는 퇴조하고 칼깃(피크드 라펠 Peaked Lapel)이 나타나면서, 앞단추를 두줄로 하고 V존을 강조한 겹자락 수트가 유행했다. 브리티시 스타일과 함께 조끼를 반드시 착용하며, 상의 단추는 3개로 줄었다. 모자, 넥타이 핀, 커프 링크스, 회중시계 등의 엑세서리가 크게 유행했다. ▶ 1920년대 양복은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화려한 분위기와 남성의 품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유행이 이어졌다. 브리티시 스타일로 몸깃이 좁고 어깨선이 적당히 강조되었다. 대체적으로 사치스러운 양상을 보였는데, 넥타이 핀, 모자 등의 액세서리도 빠짐없이 갖추었으며, 상의, 바지, 조끼를 함께 입는 세트갖춤 수트가 주류를 이뤘다. ▶ 1930년대 일본, 미국 등지의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서양의 멋진 양복이 선보이게 되었고, 중반 이후에는 풍성한 느낌의 볼드룩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군복풍이 등장하면서 액세서리도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한복위에 코트, 구두, 중절모를 착용하는 한,양복 혼용 스타일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여학교 교복의 양장화에 편승하여 양장이 일반여성들에게까지 확산됐다. 고무신이 보편화됐고 구두와 핸드백까지 등장하였으며, 양장에 구두와 핸드백으로 치장한 ‘양장미인’이 각광 받았다. 특히 ‘한국 현대패션의 선구자인 최경자 여사’는 양장점을 운영하고, 최초의 양재학원인 함흥양재학원(후에 국제복장학원으로 개칭.발전)을 설립하여 양장문화를 꽃피우는 단초를 제공했다. ▶ 1940년대 일제하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국민복이 강요된 시기로, 몸뻬바지와 간호사복 같은 간단복이 전형적인 의상이 됐다. 해방직후 미군정 시기엔, 어깨에 솜방석 패드를 높게 넣은 밀리터리 룩과 퍼머넌트 헤어스타일이 유행을 탔고, 영국산 복지로 양복을 지어 입은 ‘마카오 신사’가 첨단패션을 상징하는 멋쟁이로 통했다. ☛ 최경자 여사 한국 패션의 어머니 로 불리며, 그녀가 세운 함흥양재학원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양재학원이었다. 이후 함흥양재학원은 지금의 국제복장학원으로 발전하였으며, 국제복장학원은 앙드레김, 이상봉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들을 배출하였다. 그녀의 삶엔 늘 최초라는 말이 따라 붙었다. 1957년 최초로 국제 패션쇼에 작품을 출품 하였고, 최초의 모델스쿨을 열었으며, 최초의 패션종합잡지 ‘의상’을 창간하였다. ● 해방, 한국전쟁 후(1945~1950년대)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일제에 의해 통제받던 복식제도에 반발하여 한복을 많이 입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국에 의해 들어온 구호품 의복으로 양복이 다시 보급되기 시작한다. 전후혼란 속에 물자부족으로 인하여 미군에서 흘러나오는 군복을 염색한 구제품과 군용담요를 개량해 코트를 만들어 입는 등 일명 KJP(구제품)패션이 인기를 끌었다. 전후에는 빌로드 옷감으로 대표되는 고급원단으로 만든 맞춤옷이 상류층 여성에게 인기를 끌었으며, 남성들은 마카오 신사라 하여 마카오에서 수입된 원단으로 양복을 지어 입으면 최고의 멋쟁이로 통했다. 또한 옷감 부족으로 미군의 낙하산 원단을 이용하여 만든 의상이 당시 패션리더였던 양공주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낙하산 블라우스로 대표되는 낙하산 패션의 유행은 양공주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이어졌다. 1953년에는 나일론이 수입되어져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광범위 하게 사용되어졌다. 나일론은 질기고 빨아 말리면, 별다른 손질없이 입을 수 있었기에 순식간에 일반화 되었다. 나일론의 보급은 한국 섬유산업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전통한복은 명절이나 행사에 특별히 입는 예복으로 변해갔다. ☛ 참고 ▶ 1950년대 한국에서도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양복점은 위축되고, 스탠드 칼라의 국민복 스타일이 확산되었는데, 양가슴에 큰 포킷을 달았고 앞단추는 5~6개를 달았다. 색상은 카키색 일색으로 획일적이었으며, 광복이후 해외동포들의 귀국으로 스타일이 다양해지게 되며, 싱글 브레스티스(Single Breasted)와 로마로 불리우던 곁자락 수트도 나타났다. 또한 미군의 영향이 커졌는데, 군복을 염색하거나 발색한 옷이 많이 입혀졌다. 미군이 잔류하면서, 아이비 스타일이 주류를 이뤄 어깨선이 자연스럽고 허리선이 없는 박스형이 유행했다. 사선 줄무늬 넥타이, 이중고리 벨트, 로퍼 구두 등 전체적으로 스포티한 경향이 강했다. 전쟁 직후 디자이너 부띠끄들이 모여든 명동이 패션 1번지로 떠올랐고 이들의 주도로 하이패션이 싹텄다. 타이트한 스커트, 굽 높은 하이힐에 나일론 스타킹, 재건복, 탈색된 바지, 쌕드레스, 패티코우트 스타일 유행 멋쟁이 여성들의 상징이었으며 맘보바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 영화 ‘자유부인’의 히트로 외국산 벨벳소재 의상이 날개 돋힌 듯 팔려 여성들의 사치가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 대한민국 최초의 디자이너 단체 결성 1955년 최초의 디자이너 단체인 대한복식연구회(1961년 대한복식 디자이너협회로 개칭)가 조직되고, 1957년 최초의 바자회를 개최하였다.. ☛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 1956년 10월 29일 반도호텔에서 디자이너 ‘노라노(노명자) 여사’의 패션쇼가 열렸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모델은 없었으며, 당대의 인기여배우와 미스코리아가 무대에 섰다. 노라노 여사는 미국에서 패션공부를 하였고, 1950년 양장점 ‘노라노 꾸트리에’를 연 대한민국 1세대 패션디자이너이다. 최초의 패션쇼 이후 다양한 패션쇼가 등장(1959년 미국, 프랑스 등 15개국이 참가한 국제패션쇼 개최)했다. ● 1960~70년대 패션의 다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며, 대중문화가 패션에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디자이너의 작품을 발표하는 전통적인 패션쇼부터 남성복 패션쇼가 등장하고, 산업화와 군사정권의 영향으로는 간편한 생활복이나 작업복 패션쇼와 방공 패션쇼 등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오드리 헵번이 입고 나왔던 맘보바지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 하였으며, 1967년엔 가수 윤복희가 입은 미니스커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미니스커트는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단속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미니스커트의 등장은 단순한 의복의 변화가 아니라,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패션의식의 대변화였다. 1970년대에는 미니스커트의 유행 속 보다 긴 길이의 맥시, 미디스커트도 유행하였다. 스커트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들어 판탈롱 바지(바지통이 매우 넓은 바지)의 유행과 선글라스와 머리수건등 다양한 패션소품의 등장, 그리고 생맥주와 통기타 청바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가 등장하였다. 청바지는 청년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의미와 편한 활동성으로 당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행하였다. ☛ 참고 ▶ 1960년대 양복의 전성시대로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로, 봉제품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보세가공 잉여품이 인기품목으로 부상했다. 아이비 스타일의 유행이 지속되었고 자연스럽고 좁은 어깨에 깃은 좁았고 뒤트기(Vent)가 없었다. 바지는 일자형이었고 맘보 스타일도 많이 입었으며 점차 유럽에 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복장의 사회적. 문화적 기능이 삶의 질과 연결되어 의복문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1966년 앙드레 김은 패션의 본 고장인 파리에서 패션쇼를 가지기도 하였다. 한편,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처음 선보였는데,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의 감각에 부합하여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60년대 후반에는 통이 넓은 판탈롱 팬츠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남성양복의 수요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증가하였으며, 이에 발맞추어 1965년 남성복의 패션쇼도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노슬리브 드레스, 화려한 프린트 셔츠 등이 히트 아이템이었으며, 과장된 형태의 부풀린 헤어스타일과 남성들의 장발이 크게 유행했다. 미니스커트는 무릎 위 얼마 높이까지 치마가 올라갔는 지를 자로 잰 정부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미니스커트가 젊은 여성들로부터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등 사람들의 의상에 대한 개념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된 시점이다. ▶ 1970년대 1972년 10월의 유신에 의해 남성복의 분위기도 경직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초기의 의류업계는 충격을 입었고, TV방송에서는 패션중계가 허용되지 않아 패션쇼가 제한을 받게 되어 원활한 패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장발의 청소년들은 거리에서 삭발을 당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은 경범죄로 처벌되기도 하는 시기였다. 미니스커트와 핫팬츠에 이어, 티셔츠와 진바지가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옷차림이 됐고, 여성들 사이에선 바지통이 넓은 판탈롱과 키를 커보이게 하는 통굽 구두가 유행했다. 젊은층 사이에서는 통바지, 통기타, 생맥주 등이 퍼져 나갔으며, 또한 판타롱, 샤넬라인, 히피스타일, 블루진 등이 유행되었다. 1970년에는 중앙디자인그룹(J.D.G)이 설립되고, 1978년에는 세계패션그룹 한국지부가 설립되기도 했다. 유럽의 콘티넨탈룩이 기조로 상의가 길고 깃의 끝이 뾰족하고 넓어졌으며, 2개의 단추와 홑자락에 양 옆 트기가 유행하다가, 76년을 기점으로 올드룩으로 변화되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깃의 너비도 좁아지며, 어깨선 등의 실루엣이 유연하게 변화되어갔다. 판타롱 스타일의 바지가 등장했고 복고풍의 회색이 주조를 이루었다. ● 1980~90년대 1980년대는 대한민국 패션산업의 도약기로, 그동안 개인이 운영하는 ‘부티크’와 ‘살롱’에서 벗어나 기성복산업 시대가 열렸다. 1983년 발표된 교복자율화를 기점으로 청소년 패션(신세대의 등장)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과 수입의 자유화가 시작되어, 더욱더 감각적이고 개성을 중시한 패션문화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의 여성복은 초기의 매니시 룩을 기조로 한 레이어룩, 패드로 어깨를 강조한 정장 스타일과 캐주얼 스포츠 웨어가 동시에 유행했다. 머메이드, 트럼펫을 비롯한 새로운 실루엣의 스커트가 등장했으며, 특히 바지가 크게 유행해 일명 ‘디스코 바지’에서 통바지에 이르는 다양한 라인이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1983년부터는 ‘펑크룩’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패션이 더욱 다양화 고급화됨에 따라 ‘앤드로지너스’ 감각의 남성복 재킷이나 바지를 여성이 입어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하려 하였다.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컬러TV 시대의 도래와 여성교양지 및 패션잡지의 대거출현이 패션의 멀티화를 도왔다. 90년대 들어와서는 서태지로 대표되는 ‘힙합패션’이 등장하였으며, 복고풍 패션의 유행과 ‘그런지룩’과 란제리 패션 등이 등장했다. 1990년대 들어 많은 디자이너들이 해외컬렉션에 진출하고 있으며, 세계화시대를 맞아 세계의 패션이 곧 대한민국의 패션이고, 대한민국의 패션이 세계의 패션이 되는 날 이 되고있다. ☛ 참고 ▶ 1980~90년대 고도성장기로 진입하면서 개인소득이 늘고,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사회진출로 패션의 본격시 되었다. 83년 교복 자율화를 계기로 영 패션문화가 만개하고, 캐주얼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또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 연이은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에 힘입어 스포츠웨어가 일상화됐다. 시장개방에 따라 해외 유명브랜드가 앞다퉈 들어오는 등 글로벌리즘의 영향으로, 세계가 같은 패션을 보고 같은 패션을 소비하는 패션과 유행의 지구화시대에 돌입했다. 패션상품의 질적가치를 인지하기 시작했으나, 직감적인 기획으로 재고가 급증하고 해외여행 자유화로 패션의류 수입 증가했다. 1985년 한국패션협회가 설립되면서 대한민국 패션대전(컨테스트), 서울패션페어(전시회)를 개최하였다. 90년대초부터 일부 패션디자이너들의 해외진출 본격화되었고, 1990년에는 SFAA, 1992년에는 NWS 등 패션그룹을 설립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자연지향의 패션경향을 띄어 빅 실루엣이 유행하였다. 상의는 뒤트기를 하지 않고, 바지는 턱(Tuck)을 넣어 허리와 엉덩이 부분을 편하게 했다.깃은 좁아지고 어깨선을 강조한 스타일이 많았으며 천연섬유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고 패션 코디네이터의 역할도 뚜렸해졌다. ● 2000년대 최근 우리나라 패션은 2000년대에는 동대문 패션타운이 패션산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인터넷 문화의 정착으로 온라인 판매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옷은 입어보고 구입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또, 2002년 월드컵 등 세계적으로 굵직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널리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최근에는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한국이 재조명되어, 의상 또한 주목을 받아 세계시장 속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 여성복 1993년 유통개방 이후, 기존 잡화명품 부문의 수입브랜드 확대가 가속화 되었으며, 여성캐주얼군에서도 수입브릿지 라인을 형성하고, 메긴나인브릿지, 쿠스토 등이 대거 영업을 전개 중이다. 캐주얼웨어에서도 이지, 심플과 같은 캐주얼의 기본 컨셉에 힙합과 포지티브란 스포츠 라인을 활용하는 캐포츠룩군 형성 등 ‘패션의 혼합’에 대한 시도는 끊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의식주 전반에 걸쳐 자연과 천연을 추구하는 경향 및 2004년 웰빙문화 확산으로 옷에 대한 기능성을 중시하였고, 과거로의 회귀인 복고풍이 트랜드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스타일은 복고풍의 영향으로 로맨틱 감성의 장식적 디테일이 강하고, 색채는 전반적으로 밝고 강렬한 컬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남성복 90년대 중반이후 직수입 남성복의 직진출 러쉬를 이루고난 후, 2000년도에는 고가의 라이센스 정장 브랜드의 신규 런칭이 늘어났고, 20~30대의 젊은 패션 리더층을 겨냥한 캐릭터캐주얼 브랜드가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여가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주 5일제에 대한 시대적 요구로 인해 트래디셔널 캐주얼의 헤지스, 페리엘리스, 타미휠피거와 같은 브랜드가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패션트랜드는 점차 Formal함에서 캐주얼 중심으로 이동되고 있다. 또한 고객의 구매 양극화에 따라 백화점 브랜드와 할인점, 로드샵의 브랜드가 확연히 나타남에 따라, 일본과 같은 패션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지며, 캐주얼 시장의 확대가 두드러질 것으로 판단된다. ▶ 아동복 경기침체로 인한 소비자의 가격적 합리성 및 패션성 추구로 블루독, 캔키즈 브랜드의 상승으로 상대적인 수입브랜드가 정체를 보이고 있다. 2001년부터 뉴골든, 엘덴 등 기존 백화점 영업에서 할인점, 아울렛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짐이 두드러졌다. ▶ 액세서리 및 기타 입잡화명품 브랜드 확대에 따라 구두 싸롱화 중심으로 M/S가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90년대 대비 편안함 성향으로 단화가 유행이다. 화장품은 의상이나 신발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추세에 맞추어, 건강하면서도 내추럴하에 표현되는 메이크업이 강조될 전망이다. ※ 참고자료 : 한국 패션의 시대별 흐름, 한국 패션의 변천사, 한국 패션사와 패션 발전전망

[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 (7) 여성패션

한국패션 100년 특별호 옷을 입음으로써 우리의 육체, 몸은 비로소 사회적 존재가 된다. 옷의 흐름을 대변하는 단어인 패션은 변화라는 뜻으로, 이 단어 자체에 이미 옷의 변화, 창조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변화를 거부하는 안티 패션도 있다. 이는 전통사회의 정해진 복장이기도 하고, 변화를 통해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입는 것으로 승복이나 수도사의 옷, 영국 여왕의 대관식복, 유니폼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 패션사는 이런 안티 패션보다는 빠르게 변화하는 여성 패션이 중심이다. 한국 여성 패션의 역사는 생산 시스템과 더불어, 매혹적인 옷을 통해 더 멋진 식탁에 앉고자 하는 여성들의 조바심, 그리고 안티 패션의 검열적 시각이 개입하여 벌이는 ‘치장과 노출, 검열’의 삼중주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에의 강요와 검열의 변주들 조선시대 복식은 그 화려함이나 장식과는 별도로 몸을 감추는 디자인이었다. 여염집 여인들은 장옷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다녔다. 이런 감춤에서 드러냄, 즉 신체 노출의 역사가 한국 현대여성 패션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 서양복식을 의미하는 양장(洋裝)은 신여성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면서, 1920~30년대에 확산되었다. 주로 여학생이나 예술가들이었던 신여성들은 단발을 주로 했기에 모단(毛短·modern)걸로 불리며 전통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곤 했다. ‘별건곤’ 등 1930년대 잡지나 신문에는 여우 목도리, 양산, 구두, 모자, 장갑 등과 더불어 100가지가 넘었다는 이들의 패션에 대해 비평과 풍자가 끊임없이 실렸다. 1930~1940년대 일제 강요로 ‘몸뻬’를 입은 여학생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생산증진을 위한 작업복이 강조돼 여성들은 ‘왜 바지’(몸뻬)를 입어야 했다. 헐렁한 바지 밑단을 묶어서 만든 디자인으로, 친일잡지 ‘춘추’에 ‘몸뻬를 생각한다’(1943년 9월)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 논객은 ‘거리의 잘못 입은 몸뻬 괴물을 청소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후, 성전을 위한 작업복에 팔이 드러나는 발랄한 상의를 입거나, 혹은 비싼 천으로 만들어 입기도 하는 여성들을 ‘악질의 양풍환자’로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은 남성이 여성들에게 줄기차게 해 온 ‘아름다워라’라는 주문의 부메랑 효과 아닐까? 해방이 되어서는 미군 담요를 이용한 코트, 낙하산의 나일론 천을 이용한 블라우스 등이 등장했는데, 레이스가 달린 얇은 이 옷은 속이 비치는 선정성으로 당연히 구설에 올랐다. 또 파마가 등장해 거의 모든 중년 여성이 한복에 짧은 파마머리를 했다. 당시 언론에는 ‘괴상한 두발화장을 하는(…) 이런 천박한 여성들은(…) 깨끗한 삼천리 강산으로부터 말소시켜야 한다’라고 격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파마머리는 확산되었다. 1961년 들어선 군사정권은 유니폼식의 재건복 입기 운동을 벌여 농촌 면서기들은 모두 입었고, 이 옷을 입고 결혼하는 커플들이 생기는 등 전 국민에게 안티 패션을 제안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970년대 미니스커트 단속(왼쪽)과 1980년대초 ‘홈드레스’ 패션 광고 한국 패션사에서 최고의 사건은 역시 미니스커트가 불러왔다. 1967년부터 가수 윤복희가 유행시킨 이 디자인은 무릎 위 30㎝까지 올라간 마이크로 미니가 등장하면서 정부가 개입했고, 무슨 기준인지 무릎 위 15㎝까지만 허용한다는 규제가 나왔다. 거리에는 자를 들고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를 재는 경찰이 나타났고, ‘남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는 아가씨가 있다면 그야말로 민족반역자’라는 언론의 분노에 찬 외침이 또 터져 나왔다. 사실 이런 분노의 소리는 연원이 깊다. ‘우리나라 여자의 저고리란 것은 소매뿐이오 길이가 없어서 붉은 살이 드러나지 않지는 못한즉 사람의 모양 같지 아니한지라’라는 한탄(1905년 제국신문)을 넘어 성호 이익(1681~1763)의 ‘짧은 적삼은 요사스러운 것이니, 마땅히 못 입도록 금하여 아주 없애야 한다’는 호령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언니들의 ‘잇 아이템’ 판탈롱과 원피스 이 같은 검열의 시각은 20여년이 지난 1990년 중반 인기그룹 룰라 멤버가 입으면서 퍼져나간 배꼽티, 2010년대의 하의실종 패션에도 똑같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사람 같지 않다거나 반역자까지 불려 나오지는 않았지만, ‘쳐다보다가 교통사고 날 뻔했다’ ‘성범죄를 조장한다’ 등의 갖가지 불평이 제기됐다. 하지만 현재 이 디자인을 스타들은 줄기차게 입고, 언론들은 ‘아찔하다’ 등의 기사로 오히려 대 놓고 부추기고 있다. 그러니 어떤 여성이 이 상찬의 디자인을 포기할 것인가. 이렇게 여성들이 자신의 생물학적 매력을 노출하는 현상은 개인의 취향이라기보다는 모순적인 사회 시스템의 한 현상일 뿐이다. 자신의 매력을 전시하는 것이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미성숙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배꼽티와 하의실종 디자인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한국 패션의 한 흐름은 여성의 전시 욕망과 그에 대한 안티 패션적 검열이 만들어 내는 화음 아닌 화음의 장이기도 하다. ■치장으로써의 디자인 변천사 이런 노출과 검열의 한편에서는 색채와 형태 디자인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1957년에는 노라노가 한국 최초로 반도호텔에서 패션쇼를 개최했는데 남성들이 더 많이 관람했고, 오드리 헵번이 영화를 통해 유행시킨 플레어스커트, 맘보바지가 유행했다. 한국성에 대한 추구도 당연히 일어나서, 1959년에는 최경자의 ‘청자’ 드레스를 비롯해 노라노의 양단 드레스 ‘아리랑’, 72년에는 앙드레 김도 양단 조끼를 디자인했다. 또한 남자 양복에서도 청자선(靑磁線)이 제시되는 등 전통 옷과 양장의 결합이 시도됐다. 하지만 이 시도는 거리 패션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사라지고 한복은 예복으로만 정착되어 갔다. 앙드레 김의 양단 조끼(왼쪽)와 최경자의 ‘청자’ 드레스. 패션디자인에 한국적 미를 접하려는 시도였다 1970년대는 가히 패션의 춘추전국시대로 일컬어진다. 명동 거리는 미니스커트, 핫팬츠, 고고바지, 롱부츠, 각종 길이의 스커트가 휩쓸었고, 히피문화의 영향으로 청바지와 장발, 판탈롱이 활보하면서 ‘명동 바닥에는 청소부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또 1970년대 중반 창립된 반도패션, 논노, 에스에스패션 등 기성복 회사는 각자의 브랜드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색깔도 다양하고 화려했으며, 홈드레스라고 하는 주부 전용 디자인이 등장해 혼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70년대식의 짙은 화장을 한 주부가 발목까지 덮는 홈드레스를 입고 과일이나 커피를 내가는 사진은 그 당시 여성지의 빠지지 않는 광고 중 하나였다. 레깅스(2014년·왼쪽)와 스키니 바지(2013년) 88올림픽 이후에는 스포츠 웨어가 자리 잡았고, 1990년대 후반 기성복 브랜드가 외환금융위기 여파로 사양길로 접어들 즈음 동대문의 밀레오레, 두타 등이 등장해 다양한 취향의 디자인이 선보였다. 2010년 이후에는 레깅스와 스키니 바지로 하체 곡선을 다 드러내면서, 레이어드 룩이나 기하학적 커팅의 상의로 상체를 감추는 패션이 공존했다. ■유행의 하향이론과 창조성 이런 패션의 흐름, 즉 유행은 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지속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최근까지 4가지 학설이 제기되었다. 이 중 근대 초기 게오르그 짐멜이 제시한 유행의 ‘하향이론’을 바탕으로 인류학자 다니엘 밀러는 이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를 예로 들면서 설명한다. 밀러의 ‘모방의 과정’(The process of emulation)을 보면, 처음 1단계에서는 상부 계층(가장 오른쪽)이 손잡이가 하나 달린 항아리를 혼자서만 갖고 그 희소성으로 즐거워한다. 손잡이가 없는 항아리의 나머지 사람들은 입술이 삐죽한 채 시무룩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는 점차 2단계, 3단계로 확산되고 사람들도 즐거워한다. 하지만 맨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이제 상부 계층에서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항아리가 나타나 혼자 웃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 도식이 보여주는 것은 스타일은 결국 차별 짓기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짧은 저고리를 유행시킨 조선의 기생으로부터, 오드리 헵번, 윤복희, 룰라 등 수많은 스타들이 이러한 스타일의 정점에 서 있고, 현재는 명품룩, ‘청담동 며느리 룩’까지 가세해 있다. 이것이 패션 디자인의 유행을 결정짓는 구조이다. 다니엘 밀러의 ‘모방의 과정’ 하지만 창조라는 관점에서 패션계 지존들에게 옷은 다른 의미이다. 요절한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은 “나는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이 직면하기 싫어하는 전쟁, 죽음, 마약, 섹스 등을 디자인을 통해 말하고 싶다”고 했으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영국 사회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성에 대한 이중적 인식이다. 나는 패션으로 영국 사회를 공격하고 싶다”면서 부자유, 금기와 관습을 깨는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철학이 전쟁 후 크리스천 디올이 창안한 뉴룩의 곡선미, 샤넬의 우아미를 지나 현대 여성의 욕망과 맞아 떨어졌고, 그들만의 패션 갈라를 창출하고 있다. 현재 젊은 소비자들 역시 더 이상 패션에서 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움직이는 기호인 패션을 통해 자기 선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소비자들을 탄생시킨 한국의 현대 패션 100년의 역사는 이제 패션 디자인에 감각은 물론 철학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940년대 패션의 재해석, 2020 F/W 트렌드

글 정세영 기자 입력 2020.09.15 10:30:02 뉴 시즌 패션 트렌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패션과 닮았다. 실용적인 디테일을 찾는 한편 실루엣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젠틀한 스타일에 액세서리를 더해 우아한 룩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military look siren suit scarf curve silhouette 사진 게티이미지 여성동아 2020년 9월 681호 각지고 넓은 어깨와 견장, 납작한 히프 라인, 간결하게 떨어지는 실루엣 등 흔히 떠오르는 밀리터리 룩의 디테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시작됐다. 패션의 중심지였던 파리가 고립되면서 패턴이 단순해지고 직물 사용이 제한되는 등 디자인의 발전이 저해되자, 이를 개선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맞대고 찾은 해결책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군복 디테일을 여성복에 반영한 것이었다. 군더더기 없고 견고한 이 트렌드는 유행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F/W 시즌마다 색다른 변주로 돌고 돌면서 한껏 화려하거나 경쾌한 룩으로 변신해왔다.올해는 초보자가 밀리터리 룩에 도전하기 가장 좋은 시기! 돌체앤가바나의 오버사이즈 코트나 샤넬의 더블브레스트 코트 등 베이식한 실루엣이 눈에 띄는 1940년대 본연의 클래식한 스타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좀 더 유니크하게 즐기고 싶다면 미우미우처럼 발끝까지 오는 롱 밀리터리 코트를 입은 뒤 다이아몬드나 크리스털이 더해진 화려한 액세서리를 매치하거나 레더, 벨벳 등 다양한 소재가 믹스된 아이템을 선택하시길!사이렌 슈트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이 자주 착용했던 상하의가 이어진 커버올 슈트, 즉 점프슈트를 뜻한다. 고립된 동시에 암울하고 위험천만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오히려 여성복을 다양화시킨 아이러니한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여성들의 군 입대와 군수 물자 생산을 위한 공업 활동 등 사회 참여 범위가 늘어나면서 바지 착용이 보편화됐고, 끊임없는 공습 때문에 실용적이면서도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사이렌 슈트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연령과 계층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여성이 착용했으며, 스타킹을 대신하는 아이템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사이렌 슈트의 현대화 버전인 점프슈트는 한 벌로 이어졌지만 드레스는 아닌, 슈트의 젠틀함과 원피스의 활동성을 동시에 담은 아이템으로 소재와 디테일에 따라 다양한 무드로 재해석되고 있다.뉴 시즌에는 보다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넉넉한 실루엣이 인기를 끌 전망. 스텔라매카트니는 좌르르 흐르는 실크 소재에 패턴을 더한 디자인을, 비비안웨스트우드는 어깨를 한껏 드러낸 품이 넉넉한 튜브 톱 스타일을 선보였다. 1940년대 무드를 한껏 반영하고 싶다면, 전체적으로 볼륨감 있는 디자인에 벨트로 허리 라인을 확 줄인 볼드 룩 실루엣에 눈을 돌려볼 것!전쟁 기간에는 노동력, 물자 부족으로 의복의 소재와 디자인이 제한되면서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틸리티 룩이 대두됐다.한편 군수 물자 확보를 위한 소비 제한이 의류 산업에도 영향을 미쳐 단추 개수, 주름 사이즈, 깃의 디테일, 옷감의 양 등 의복 제작에 사용되는 물자를 엄격하게 제한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옷 자체가 간결하고 단조로워지자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이를 보완해줄 액세서리에 눈을 돌렸는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아이템이 스카프라고 알려졌다. 셔츠 깃 아래에 묶거나 헤어밴드로 사용해 스타일링에 재미를 더한 것. 스카프 또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데 올해 런웨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스타일링은 바로 두건이다. 세모 모양으로 한 번 접거나 넓은 타이처럼 이마에 두르면 완성. 힙한 스타일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에르메스 런웨이 모델처럼 스카프를 목에 두른 뒤 리본 모양으로 묶어 클래식한 무드를 자아낼 것. 젠틀한 분위기로 소화하고 싶다면 두 번 두른 뒤 매듭을 목 뒤쪽에 지어 넥 라인을 살짝 드러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인류의 많은 것을 앗아간 전쟁이 끝나자 응축돼 있던 삶의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꽃피우기 시작했다. 패션도 마찬가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샤넬이 패션의 중심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패션의 현대화 과정에서 찾아낸 간결하고 실용적인 라인에 디테일과 실루엣으로 여성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한 디올의 디자인이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여성들은 어깨선이 둥근 드롭 숄더, 잘록한 허리 라인, 아래로 내려갈수록 길고 풍성하게 퍼지는 플레어스커트로 대표되는 디올의 뉴룩을 통해 패션의 해방감을 맛보았다.F/W 시즌에는 1940년대 디올의 뉴룩에 곡선 실루엣을 과감하게 더한 롱 코트와 재킷 등 포멀하면서 모던한 스타일이 주목받을 전망이다. 스타일링 방법 또한 눈에 띄는데 전체적으로 볼륨감 있는 슈트에 벨트를 매치하거나, 라운드 숄더 오버사이즈 코트만 입은 뒤 유니크한 네클리스를 더하는 등 각기 다른 방식으로 브랜드의 개성을 표현했다. 곡선 실루엣이 부담스럽다면 슬릿이나 프린지 등의 디테일을 가미해 완성한 라운드 라인 아이템을 눈여겨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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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40, 패션 황금기의 귀환

빈티지하면서도 규칙적인 패턴, 봉긋하게 부풀린 어깨 라인,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 여기에 룩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주는 베일과 헤드피스까지. 디자이너들은 패션 황금기 1940년대의 여인들을 런웨이 위에 소환했다.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강조하는 아워글라스 실루엣의 원피스, 프릴 장식의 셔츠 등에 다양한 길이의 장갑을 포인트 아이템으로 활용해 우아한 여성미를 강조한 룩을 대거 선보인 것. 지나치게 여성스러운 스타일이 부담스럽다면 피터팬 칼라 블라우스나 퍼프소매 원피스 등 대중적인 아이템으로 1940년대 무드를 즐겨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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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티드 셔츠 드레스 1백90만원대 가브리엘라 허스트 by 매치스패션.

도트 패턴 하이이웨스트 팔라초 팬츠 13만8천6백원 딘트.

체인 프린트의 타이 실크 블라우스 가격미정 구찌.

모노톤 콤비 컬러의 T 스트랩 펌프스 24만8천원 레이첼콕스.

퍼프소매와 버튼 디테일이 인상적인 레트로풍 트렌치코트 32만9천원 랭앤루.

유니크한 패턴의 피터팬 칼라 블라우스 4만9천원 자라.

클래식한 무드의 울 소재 필박스 해트 25만원 브이엘.

블라우스를 겹쳐 입은 것 같은 체크 미니드레스 6만8천8백원 밀크코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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