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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최고의 영화 BEST 10편 – 브런치

오늘은 ‘1980년대의 영화 10편’을 선정했습니다. 리스트를 보기 전에 한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총 80편중에 동일한 감독이 연출한 작품의 경우는 대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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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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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문화영화의 제작 환경 및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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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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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영화가 장악한 영화계, 아날로그 감성 영화도 등장 – 채널예스

1980년대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여러 감독이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고, 수많은 배우가 작품에 등장했다. 세월이 변하고 유행도 바뀌지만 변하지 않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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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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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1980 년대 영화

  • Author: 무비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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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5.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_03qTI37BE

1980년대 최고의 영화 BEST 10편

제가 본 ‘최고의 영화 시리즈’ 입니다. 오늘은 ‘1980년대의 영화 10편’을 선정했습니다. 리스트를 보기 전에 한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총 80편중에 동일한 감독이 연출한 작품의 경우는 대표작 하나만 소개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편중되지 않게 최대한 다양한 여러 작가들을 소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천국의 문’이 흥행에서 실패해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헐리우드 영화사들은 감독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경향을 띄게된다. 자본의 논리가 깊숙히 개입하자, 헐리우드는 <스타워즈>이후 SF, 액션, 코미디, 프랜차이즈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10 : 다이 하드 (Die Hard·1988) 존 맥티어난

액션 장르는 어떻게하면 관객을 시선을 끌 수 있을까에 대한 연구서와 같다. 한마디로 아이디어 싸움 이라는 뜻이다. [다이하드]의 창의적인 비전은 이후의 액션장르에 활용된다.

여담으로 한스가 존 웨인이라고하자 맥클레인이 ‘게리 쿠퍼’라고 정정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는《하이 눈》의 주인공 게리 쿠퍼처럼 주변 사람들의 도움없이 혼자서 악당을 처치함을 암시한다.

#9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 세르지오 레오네

영화란 다른 예술형식과 달리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이탈리안 웨스턴 거장 레오네는 뉴욕 빈민가를 배경으로 유태인 갱스터들의 일생을 20년대 초, 30년대 초, 68년이라는 3가지 시간대를 교란시켜 연대기적 서술을 피했다.

신화적인 [대부], 다큐멘터리적인 [좋은 친구들]들과 달리 서부극을 직접적으로 끌어와 만들었다.

#8 :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1988) 주세페 토르나토레

칸 심사위원대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텔레비전(TV)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 영화가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다. 이를 통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의 전통을 복원하는 걸로 화답한다. 그와 동시에, “만일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회한에 젖게 만든다.

#7 :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 리들리 스콧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와 존재론을 탐구하던 실존주의 철학을 영상으로 옮겼다.

기계도 인간처럼 숭고한 희생과 이타심을 보여줄 수 있음을 필립 K. 딕은 역설한다. 거기에더해 사이버펑크 장르의 비주얼을 정립한 선구적인 영화로 평가되고 있다.

#6 : 아마데우스 (Amadeus·1984) 밀로스 포먼

아카데미 작품· 감독· 남우주연·각색·음향·미술·의상·음향효과상

도대체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왜 낮을까? 하고 궁금해질때가 있다. 아무래도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남과 비교해서 행복의 질량을 판정해버리고, 타인을 자신의 기준으로 제멋대로 판단하며 참견하며 남을 의식하게 조장한다.

[아마데우스]는 자격지심이 자기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불행하게 느끼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5 : 란 (活·1985) 구로사와 아키라

아카데미 의상상

한때 일본영화도 스펙타클한 대작을 걸출하게 뽑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은, 극장외의 수익 대부분을 ‘영화 제작위원회(투자자)’가 가져가 버리는 통에 감독 등 제작진에게 돌아가는 수익이 없다는 고레에다 감독이 밝히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일본문화의 급격한 쇠락에는 이런 부조리한 관행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탓인거 같다.

#4 :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 (The Empire Strikes Back·1980) 어빈 커쉬너

아카데미 음향효과·특별공로상, 엠파이어 매거진 선정 100대 영화 역대 2위

최종적으로 거악이 승리하고 정의가 패배하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의 감독인 루소 형제가 타노스가 ‘마블의 다스 베이더’가 될 것이라고 미리 공언했었다. 그 연유는 대체 무엇이였을까?

[제국의 역습]은 속편이면서 완전한 결말을 내지 않고 끝을 낸 전례없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모든 스토리가 관객의 예상을 빗나가며, 상업영화로써 전례를 모조리 부정했다.

#3 : 비정성시(悲情城市·1989) 허우 샤오시엔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 대만에 살고있던 본성인을 학살한 ‘2.28사건’이 발단이다. 또다른 걸작,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도 2.28사건의 사회분위기를 다루고 있다. 아니면,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한 가족의 ‘붕괴’를 통해 대만 사회의 상흔을 드러낸다. 대만처럼 우리도 제주 4.3사건, 대구 10.1 사건, 5.18 민주화운동처럼 정권이 국민을 무참히 살육한 바있기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묵직한 주제도 좋지만, ‘오즈 야스지로’와 더불어 동양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서구 롱테이크 대가들 타르코프스키 나 앙겔로풀로스 등이 기독교와 신화에 기반을 뒀다면, 허우 샤오시엔의 롱샷과 롱테이크는 동양사상에 기반을 두고, 서구영화의 편집구조를 거절한다. 쉽게 풀자면, 컷과 컷이 어떻게 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컷과 컷이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자기가 인식하는 공간 뿐 아니라 세계와 역사와 연결하며 포용하고 조화를 추구한다. 이런 사색가를 본적 있는가?

#2 : 백 투더 퓨처 3부작 (Back To The Future Trilogy·1985~1990) 로버트 저멕키스

아카데미 음향효과상

애초부터 3부작이 기획되어있었다. 실은 1편에 장난스럽게 끼운 문구 “To Be Continued” 때문이지만 , 후속편에 대한 대략적인 밑그림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3부작 모두 하나로 이어지는 스토리로 속편에서 전편들의 상황과 사건들을 암시하거나 다양한 변주를 통해 비트는 잔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2편과 3편을 동시 제작하여 설정 구멍을 최소화하고 제작비를 줄이려는 전략은 지금도 쓰인다.

요즘같이 트릴로즈가 보편화된 시대에는 유기적인 프랜차이즈를 구축하는데 있어 좋은 선례로 남아있다.

아차상 (Honorable Mentions)

샤이닝 (The Shining·1980) 스탠리 큐브릭

매드 맥스 2 (Mad Max 2: The Road Warrior·1981) 조지 밀러

괴물 (THE THING·1982) 존 카펜터

브라질 (Brazil·1985) 테리 길리엄

컴 앤 씨 (Иди и смотри·1985) 엘렘 클리모프

영웅본색 (英雄本色·1986) 오우삼

에이리언 2 (Aliens·1986) 제임스 카메론

프린세스 브라이드 (The Princess Bride·1987) 롭 라이너

베를린 천사의 시 (DER HIMMEL UBER BERLIN·1987) 빔 벤더스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1988) 미야자키 하야오

아키라 (AKIRA·1988) 오오토모 카츠히로

똑바로 살아라 (Do The Right Thing·1989) 스파이크 리

인디아나 존스 3부작 (Indiana Jones Trilogy·1981-89) 스티븐 스필버그

#1 : 분노의 주먹 (Raging Bull·1980) 마틴 스콜세지

아카데미 남우주연·편집상, 미국 영화연구소 선정 100대영화 4위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실존 권투선수 제이크 라모타의 일대기를 그렸다. 폭력으로 이룬 영욕은 자연스레 감독 자신과 미국으로 확장시킨다. 그와중에 스콜세지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전기영화로써 혁신을 이뤄내며, 〈분노의 주먹〉은 어떤 교과서와도 같은 지위를 획득했다.

심지어 로저 에버트는 ‘우리시대의 오셀로’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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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로 보는 대한민국

1980년대 문화영화의 제작 환경 및 경향

한국현대사에서 1980년대는 자유화와 개방화를 향한 움직임으로 점철된 시기였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영화 분야까지도 비껴가지 않았다. 우선, 1980년대 초부터 영화계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각종 통제 및 규제의 완화와 합리적 정책 수립 및 제도 보완 등에 대한 요청의 목소리가 커졌으며, 그 영향으로 관계자들 사이의 여러 논의를 거친 뒤 1984년 제5차 영화법 개정이 단행되었다. 이어,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통상 압력이 거세져가던 형국 속에서 진행된 한미 당사자들 간 영화 협상의 결과로, 1986년 제6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에 1980년 12월부터 컬러TV 방송이 개시되고 1980년대 내내 가정용 VTR 보급률이 상승하면서, 영화 산업의 근간은 더욱 위축되었고 한국영화의 제작 여건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이러한 배경 하, 동시기 한국 문화영화의 제작 환경에 있어서도 대체로 1970년대의 흐름이 지속되는 한편 일부 변화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 법제 상 문화영화에 관한 공식적인 정의와 범주에는 특별한 변동 사항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도래에 따라 그 개념적 범위는 확대되는 모양새를 띠었다. 둘째, 독립적인 영화상이 신설되고 소재 공모 사업이 마련되는 등의 부분적인 진흥책을 제외하곤, 문화영화에 대한 당국의 정책 기조와 제도적 기반 역시 1970년대의 틀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셋째, 극장에서의 의무상영과 텔레비전의 정규방송을 위한 문화영화 생산의 주체가 국립영화제작소와 국군홍보관리소로 대변되는 국가적 기구로 지정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도 크게 달라진 바는 없었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민간 업체의 수가 증가세를 보이고 관련 협회의 활동 또한 활성화되었다.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1980년대 한국 문화영화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먼저, 제작 목적에 있어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국내 홍보와 해외 홍보를, 국군홍보관리소에서는 국민 계도와 장병 교육을 기본 목표로 설정하였다. 민간 영화사의 경우, 상업성에 기반을 두면서도 미학적, 예술적 지향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당시 문화영화는 대개 35mm 컬러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10분대를 기준으로 이에 부합하거나 그 언저리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시청각적 해설이 첨가된 기록영화 풍의 단편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아울러 내용 상으로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분야의 다채로운 이야기 거리가 화면 속에 다양하게 담겨졌다.

문화영화의 개념과 범주

개정 영화법 상의 정의

1981년 3월 3일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을 수반으로 하는 민주정의당은 3월 25일 제11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과반 의석을 확보한 뒤 9월 26일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공약으로 내걸었던 여러 법안들을 상정하였는데, 여기에는 공연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었다.1) 이로 인해 1982년 3월 1일 개정 공연법이 시행됨으로써 “300석이하거나 바닥면적 300제곱미터 이하의 소극장이 자유롭게 설치될 수 있는 법적인 보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문화·예술 활동의 자율성 보장을 둘러싼 극장업계의 요청이 수용된 것이라 할 만한데, 한편으로 영화계에서는 10.26사건(1979) 이후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법령 개정을 요구 사항으로 제시하곤 하였다.

국무회의 부의안건 제출-영화법 개정 법률(안)(제325호), 1984,

총무처, BA0085046(15-1)

그리하여, 여러 차례의 공청회와 수많은 논의들을 거쳐 1984년 12월 31일 제5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법률 제3776호로 공포된 5차 개정 영화법은, 영화사 설립을 통한 영화업자의 자격 취득 방식을 4차 개정 영화법(1973.2.16) 상의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환원하고(제4조) 연간 1편에 한해 영화의 ‘독립제작’을 허용하며(제5조의 2) “극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업자가 아니면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외국영화의 수입추천을 받을 수 없다.”라는 조항을 삭제하여 영화 제작업과 외화 수입업을 분리하는 한편(제10조 ② 삭제) 문화공보부 장관 권한의 ‘영화검열’에 관한 항목을 공연윤리위원회 또는 방송심의위원회 주관의 ‘영화심의’ 관련 항목으로 대체하는(제12조, 제13조) 것을 내용 변경의 골자로 둠으로써 영화 행정의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였다. 하지만 “5.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경제·문화등 제분야에 있어서 교육적, 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 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라는 이미 2차 개정 영화법(1966.8.3)에서부터 이어져 오던 관련 문구가 동일 조항에 존치됨에 따라,(제2조) 문화영화에 대한 법률 상의 정의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아울러, 1985년 7월 3일 대통령령 제11720호로 개정·공포된 영화법 시행령에서도 4차 개정 영화법 시행령(1976.9.1) 상에 외화 수입 추천 불가 조건으로 명시되어 있던 문화영화에 대한 범주 규정 문구 또한 같은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2)

영화법중 개정법률(안)(제215호), 1986,

총무처, BA0085083(35-1)

한편, “197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시장 개방을 요구해오던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가 “1985년 6월 21일 16개항에 걸친 불공정 교역행위시정을 미 무역대표부(USTR)에 청원한” 일을 계기로 동년 10월부터 마련된 ‘제1차 한미 영화 협상’의 결과,3) 1986년 12월 31일 제6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법률 제3915호로 공포된 6차 개정 영화법은 ‘영화업자의 결격사유’에 관한 조항의 내용 중 기존의 “1.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지 아니한 자”와 “2. 외국의 법인 또는 단체”를 삭제하고 다른 조항을 신설하여 외국인과 외국 소재 영화사의 국내 영화업 진출을 허용하는 한편,(제4조의 2) “외국영화의 수입추천을 받고자 하는 자중 영화업자는 문화공보부장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산영화의 진흥을 위한 자금을 영화진흥공사에 납부하여야 한다.”라는 조항의 내용을 삭제하는 대신(제10조 ③) 기존의 ‘보조금’에 관한 항목을 ‘국산영화 진흥기금’ 관련 항목으로 변경함으로써(제23조) 한국 영화 시장의 해외 개방을 법제적으로 공시하였다. 게다가 1987년 6월 12일 대통령령 제12179호로 개정·공포된 영화법 시행령에서는 “1. 자본금이 5천만원이상인 법인일 것. 다만, 외국법인(국내지사)인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문구를 통해 외국 영화사의 영화업 등록 요건을 오히려 완화하기도 하였다.(제2조 ③) 그러나 이때에도 문화영화에 관한 정의와 범주에는 일절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이후에도 영화법은 1987년 11월 28일과 1989년 12월 30일에 각각 제7차와 제8차로 두 차례 더 개정되었다. 그렇지만 전자는 언론기본법 폐지와 방송법 제정에 따라 ‘텔레비전 영화’의 심의 기능이 기존의 방송심의위원회에서 방송위원회로 이관된다는 정도를,(제12조 ④) 후자는 정부의 조직 개편에 따라 기존의 문화공보부라는 명칭이 문화부로 대체된다는 정도를 변경 사항으로 담는 수준에 머물렀기에,4) 문화영화 관련 내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요컨대, 1980년대에 영화법 개정은 모두 4회에 걸쳐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법 상의 문화영화에 대한 정의 및 범주는 1970년대의 그것이 존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상 매체 변화에 따른 외적 범위의 확대

197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중 영상 매체로서 영화가 확보해 오던 절대적인 비중과 위상은 상당부분 텔레비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1980년 12월 1일 KBS1 채널을 시작으로 컬러TV 방송 시대가 개막된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5) 여기에 1980년대 내내 가정용 비디오 재생기(VTR)가 꾸준히 보급됨으로써, 영화의 입지는 계속해서 좁아져만 갔다.6) 하지만 역으로, 이와 같은 추세 속에서도 문화영화의 범위는 외적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바탕에는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이 가속화된 1970년대부터 신문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인쇄 매체를 대신하여 ‘광고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광의의 개념적 틀에서 문화영화의 한 부분을 채우고 있었다는 점이 자리한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하에, 이미 1977년 6월 17일 사단법인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가 창립되어 기존의 한국문화영화제작자협회를 대신해 왔던 것이다.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는 1980년대에도 존속하며 관련 업계에서 커다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이에 따라 적어도 제작 부문에서만큼은 문화영화와 광고영화가 포함 관계에 놓여 있거나 동류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통용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5차 개정 영화법 상의 ‘정의’ 부분에서 기존의 광고영화 관련 문구가 삭제되는 등의 변화가 일기도 하였다.7) 물론, 어떻게 보면 적지 않은 이질성을 내포하고 있던 문화영화와 광고영화가 별 무리 없이 그 내면적 속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였음은 당연히 아니었다. 가령, 영화진흥공사에서 매년 발행되던 『한국영화연감』 속 해당 연도의 ‘문화영화계’ 전체 상황을 일괄하고 발전 방안을 제시하는 글에서는 복수의 기준에 의해 일반적인 문화영화와 상업적인 광고영화, 극장 상영용 영화와 텔레비전 방영용 영화, 필름에 촬영한 것과 비디오 혹은 슬라이드 등으로 만든 것, 국가 기관 제작 영화와 민간 업체 제작 영화, 자주 제작에 의한 작품과 외부 수주에 의한 작품, 홍보 및 계몽을 위한 것과 순수 문화영화에 속한 것 등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게 나뉘어졌으며,8) 『1986년도판 한국영화연감』에서는 “국내 통용되는 문화영화를 분류한 내용”에 대해 순수문화영화, 기록영화, 교육영화, 과학영화, 군사교육영화, 홍보·계몽영화, 상업광고영화 등으로 “총망라”되기도 하였다.9) 결론적으로, 1980년대 한국에서 문화영화를 둘러싼 제도 상의 범위는 외적으로 광고영화를 비롯한 비(非)극영화 전반을 포괄함으로써 저변을 확대해 가며 제시되었던 반면, 내적 측면에서 그 개념적 범위는 관련 업계에서조차 다분히 모호하고 무질서한, 때로는 오히려 ‘순수 문화영화’만을 인정하는 폐쇄적인 경향을 띠며 다각적으로 상정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문화영화를 둘러싼 정책적, 제도적 답보 및 일부 개선 양상

문화영화 제작 활성화 및 수준 향상을 위한 업계의 요구

정책적 측면에서 1980년대는, 영화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부분적인 행정 조치가 취해진 전반기와 영화법 개정을 통해 자유화와 개방화가 제도화된 후반기로 양분된다. 즉, 1980년대 전반기까지는 외국영화에 대한 한국영화의 스크린쿼터제 및 외국영화와 한국영화의 교호상영제 강화, 그리고 공연법 개정을 통한 극장 규제의 완화 등을 통해 “70년대의 영화에 대한 정책적 통제에서”10) 벗어나기 시작하였다면, 1980년대 후반기부터는 영화업의 등록제, 제작업과 수입업의 분리, 독립적 영화 제작의 허용, 검열 제도의 완화, 영화 시장의 개방 등 다양한 변화를 통해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실현될 민주화와 세계화를 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행정적 조치와 제도적 변화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고, 국산 영화의 발전책 마련과 현행 영화법에 대한 개정 등을 둘러싼 영화계와 사회 각 분야에서의 부단한 문제 제기와 해결 방안이 반영된 결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문화영화 제작업계에서도 시대착오적인 불합리한 행정 관행을 바로잡는 동시에 보다 효율적인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제작 활성화 및 수준 향상을 도모할 것을 정책 당국에 요구하였다. 예컨대, 영화 감독 출신으로 세종문화 회장으로 있던 박상호는 영화진흥공사가 매년 발행하는 『1981년도판 한국영화연감』 내 「’81문화영화계」 지면을 통해 81년도 대종상 문화영화 부문에 출품된 작품이 3편뿐이었음을 상기시키며 “문화영화육성을 목적한 현행영화법 제27조의 동시상영 문화영화 제작을 1975년부터 전량 국립영화제작소로 넘겨버림으로서 민간문화영화업자의 시장을 봉쇄한 것”과 “동법 제10조 2항에 극영화업자에게만 외화수입자격을 부여하므로서 문화영화를 차별하여 문화영화업계가 기업화될 여지를 없애버린 것”을 문화영화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으로 지목하였다.11)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건의 사항들을 제시하였다. 첫째, 극영화 제작업자에게로 편중되어 있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문화영화 제작업자에게도 분배할 것. 둘째, 대종상이나 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우수 문화영화’에 대해 극영화의 경우와 차별 없이 보상할 것. 셋째, 국립영화제작소 작품으로만 한정하고 있는 ‘극장 동시상영(의무상영)’ 문화영화 제작 자격을 예전처럼 민간 업체에도 개방할 것. 넷째, ‘순수 문화영화’ 제작 시에는 스폰서를 허용할 것. 다섯째, 관공서의 공개 입찰 방법을 시정할 것.12) 이후에도 문화영화의 진흥책 강구, 소극장에서의 문화영화 상영, 영화진흥공사의 설비 확충,13) 한국방송공사 방송사업단 광고영화에 대한 제작 규제, 국립영화제작소의 사업 제한, 올림픽 기록영화 제작을 위한 전담 기구의 설치,14) 민간 제작 문화영화의 텔레비전 정규 방영15) 등의 요구 사항들이 덧붙여져 문화영화의 제작 활성화 및 수준 향상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편, 1980년 1월에는 “국산 과학영화의 기획, 제작, 계몽 및 보급을 통하여 전국민 과학화운동을 촉진하고 나아가 국제과학영화협회에 가입하여 각종 국제영화제에 적극 참여”한다는 취지로 사단법인 한국과학협회가 결성되어 문화공보부의 설립 허가를 받았다.16)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1981년 6월 27일 “문화영화인 상호간의 협동과 친목을 도모하고 문화영화인의 권익과 자질을 향상하여 전통문화 창달과 건전영화 풍토조성 및 문화영화 예술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 하에17) 기존의 문화영화제작자협회와는 다르게 “문화영화의 촬영, 제작에 종사하는 스태프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을 띤18) ‘한국문화영화협회’가 창립됨으로써,19) 문화영화 제작 현장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릴 만한 여론 환경이 조성되기도 하였다.20)

영화상 신설 및 소재 공모를 통한 당국의 대응

1980년대 들어 1970년대에 비해 영화계의 요구 사항이 반영된 행정 조치가 취해지고 영화법 및 그 시행령이 개정되는 일련의 추세 속에서도, 문화영화에서만큼은 정책적, 제도적 변화에 별다른 가시성이 드러나지 않았다. 일례로, 문화공보부에서 매년 발표되어 오던 ‘영화시책’에는 외국 극영화뿐 아니라 문화영화에 관한 수입 규정도 포함되었으며, 그 연간 수입 배정 편수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매년 ‘10편 이내’로 유지되어 있었다.21) 그런데, 1977년 영화시책에 명시되기 시작한 외국 극영화뿐 아니라 문화영화에 대한 수입권까지도 “극영화 제작업 중 신청자에 배정”한다는 방침마저 변경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외국영화의 수입권이 극영화 제작업자들에게 집중되는 독과점 현상이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1986년 기존의 영화시책을 대체하여 ‘한국영화발전시책’이 발표되고 이후에는 특별한 정부 시책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서,22) 문화영화에 대한 당국의 정책적, 제도적 조치도 특별히 취해진 바 없었다. 한편, 업계의 요구에 대한 당국의 반응이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영화상(映畫賞)과 관련해서였다. “문화공보부와 영화진흥공사에서 획기적인 단안(斷案)으로 금관상(金冠賞) 영화제를 대종상(大鐘賞)에서 분리”한 것인데,23) 이는 당시 “문화영화에 대한 유일한 진흥책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녔다.24) 1984년 12월 14일 서울 필동에 위치한 ‘한국의 집’에서 거행된 제1회 행사에서는 최우수작품상(상금 700만원), 우수작품상(2편, 편당 500만원), 기획상(200만원), 감독상(200만원), 촬영상(150만원), 편집상(150만원), 녹음상(100만원), 조명상(100만원), 특별상(100만원) 등 총 9개 부문에 대한 시상 및 상금 수여가 있었다.25) 이후에도 영화진흥공사의 주최로26) 1990년대까지 이어진 금관상 영화제는 유일한 “독자적인 개별의 문화영화제로” 자리하며27) 민간 영화사의 ‘순수 문화영화’ 제작을 독려하는 정책적 기제로 작용하였고, 이듬해부터는 상금 액수가 다소 증가하였다.28) 그리고 1988년에는 그 대상이 크게 문화영화, 홍보영화 등 2개 부문으로,29) 1989년에는 문화영화, 홍보영화, 청소년영화 등 3개 부문으로30) 세분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관상 이전에도 대종상31) 이나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32) 등을 통해 문화영화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져 왔었으며, 금관상의 경우 어디까지나 ‘순수 문화영화’ 제작에 대한 사후 지원의 성격이 강하였기에, 그 실질적인 효과는 별로 크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33) 이에, 영화진흥공사에서는 “순수문화영화의 진흥과 발전을 위한 지원사업의 하나로” 1983년 ‘영화 소재 공모’를 실시하여,34) 극영화 부문 당선작 4편(고료(稿料) 각 100만원) 및 가작 4편(각 50만원)뿐 아니라 문화영화 부문의 당선작 2편(각 50만원)과 가작 2편(각 25만원)을 선정하였다.35) 영화진흥공사의 영화 소재 공모는 대상작 편수와 원고료 액수에 미미한 변경 사항이 생기기는 하였으나 계속해서 이어졌고, 1986년에는 기존의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와 통합되어 ‘영화 소재 및 시나리오 공모’라는 이름으로 극영화 4편(고료 각 150만원)과 함께 문화영화 4편(각 70만원)이 배정되었으며36) 대상작의 편수 등에 약간의 변동을 동반한 채 이후로도 지속되었다.37) 이처럼, 1980년대 문화영화에 대한 당국의 정책적, 제도적 대응은 주로 독립적인 영화상 신설 및 소재 공모 사업 마련을 통해 다소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문화영화 제작 활성화 및 수준 향상을 위한 업계의 요구가 충분히 수용되지는 못하였으나 일부 개선 양상이 보였다고 할 만하다.38) 이와 같은 여건 하에서 문화영화 제작업계는 회원사들의 조직체인 한국문화광고영화제작자협회를 중심으로39) 자생방안 및 자구책을 강구하며 지속적으로 관련 사업을 진행해 갔다.40)

애로영화가 장악한 영화계, 아날로그 감성 영화도 등장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는 가운데 한국프로야구가 출범되고 출판, 대중음악,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가 양적으로 팽창하던 그 시절. 부동산 투기 열풍과 본격적 강남 개발로 사회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사회 모든 분야갸 격하게 요동치던 시대였습니다. <채널예스>는 1990년대를 탐험하는 기획을 거쳐 이제는 1980년대를 호출해봅니다.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이제는 마음껏 누려볼 수 있을까요?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계는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였다. 소수 제작사가 과점 체제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1984년 12월 31일에 공포된 5차 개정 영화법은 영화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꾸고, 독립영화 제작 제도를 만들어 영화업 등록을 하지 않아도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명시했다. 이러한 법적 개선 외에도 영화진흥공사에서 설립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한국영화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데 기여한다. 한편, 1970년대 말부터 한국영화 시장 개방을 요구하던 미국의 압력에 1986년 ‘6차 영화 개정 영화법’이 공포된다. 6차 개정 영화법은 외국인의 영화업 허용, 수입 편수 쿼터제 및 수입가격 상한제 폐지, 영화업 등록 예탁금 인하 등을 담았다. 외국 영화가 한국 영화 시장에 보다 쉽게 접근하도록 한 조치였다.

이런 와중에 1980년대 영화계는 애로영화가 상영관을 장악한 시대였다. 수많은 ‘부인’ 시리즈를 양성한 <애마부인>이 1982년 개봉했다. 서울 관객 기준으로 31만 5천 명을 동원해 한국영화 중에서는 흥행순위 1위를 기록했다. 애마부인의 성공은 당시 전두환 정권이 추구한 3S정책과 맞아떨어지며, 90년대까지 13편까지 시리즈물로 제작되었다. 한편, 외국 영화 중에서는 , <킬링 필드>, <다이하드> 등이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대표 영화 vs 2010년대 대표 영화 <트랜스포머>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vs <트랜스포머>

80년대 인기 있었던 영화 BEST 10

사형도수

1980년대 초반은 성룡의 해였다. <취권>으로 한국에 이름을 알린 성룡은 1979년 작 <사형도수>, <사제출마>가 연달아 흥행했다. 당시 흥행순위 1위, 2위가 각각 <사형도수>, <사제출마>였으니, 당시 성룡을 향한 한국 영화 팬의 사랑을 짐작할 만하다. 이 밖에도 그의 작품 중 <베틀 크리크>, <용소아>, <프로젝트A>, <복성고조>, <쾌찬차>, <오복성>, <미라클>, <비도권운산> 등 8작품이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화려한 액션과 유머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성룡 영화는 8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이소룡의 액션이 진지하다면 성룡의 그것은 가볍고 발랄하다. <사형도수>는 우연히 알게 된 노인이 무술 고수였고 그에게 무술을 전수받은 주인공이 악당과 싸운다는 내용이다.

애마부인

1982년 개봉작으로 그 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관객수: 31만 5천 명)를 기록했다. ‘젖소’, ‘만두’, ‘연필’ 등 수많은 부인을 등장하게 한 작품. 정인엽 감독의 대표작으로, 오수비라는 여성의 성애를 다루었다. 유부녀가 다양한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소재를 그렸다. 이 작품에 출연한 여배우 안소영은 <애마부인>으로 단번에 스타 대열에 올랐지만 최근 MBC <토크클럽 배우들>에 출연해, 에로배우라는 타이틀 때문에 겪은 힘들었던 사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사관과 신사

83년 개봉작으로 그 해 외국영화 흥행 순위 1위(관객 수 56만 명)을 기록했다. 해군사관생도와 여공의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다. 이 작품 덕택에 리차드 기어는 존 트라볼타를 능가하는 최고 인기 배우로 성장한다. 요즘 만들어지는 3D영화나 액션영화와 같은 화려한 장면은 없지만 드라마적인 요소와 두 배우의 연기력으로 명작 대열에 오른 작품이다.

고래사냥

84년 개봉작으로 김수철, 이미숙, 안성기, 이대근 등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최인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84년 한국영화 흥행 1위(관객수: 42만 6천 명)을 기록했다. 소심한 대학생 병태(김수철), 고학력 거지 민우(안성기)가 벙어리 윤락녀 춘자(이미숙)의 홍등가 탈출을 돕는다는 내용이다.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주연이자 가수였던 김수철이 부른 주제곡 ‘나도야 간다’도 인기를 끌었다.

E.T.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로, 원래 1982년작이지만 한국에는 1984년에 상영관에 걸렸다. 외국영화 흥행 순위 1위(관객수: 55만 명)를 기록했다. E.T는 The Extra Terrestrial의 줄임말로, 외계인이라는 뜻이다. 외계에서 온 생물 ET가 지구에 홀로 남으면서 소년과 소녀와 우정을 키워간다는 줄거리를 담았다. 한국에서는 어린이, 청소년으로부터 호응을 이끌어냈다.

깊고 푸른 밤

85년에 개봉했으며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49만 5천 명), 상영관을 옮긴 뒤에 최종 60만 명 정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래사냥>을 제작한 배창호 감독의 다른 히트작이다. 안성기, 장미희가 출연했고 시나리오는 최인호 작가가 맡았다. 미국으로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과정에서 몰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았다. 불법체류자에서 벗어나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사기 결혼을 계획하는 남자. 사기 결혼에서라도 남자의 애정을 얻으려는 여성. 그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다.

킬링필드

85년에 개봉, 외국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다. <킬링 필드>가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 흥행 기록은 성룡의 <취권(89만 명)>이었다. 캄보디아 내전이라는 다소 대중의 기호와는 무관할 법한 소재를 다뤘지만 이 영화는 관객 92만 명을 동원했다. 1990년 <사랑과 영혼>이 등장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반공영화라는 점, 캄보디아 내전의 복잡한 사정은 생략한 채 미국 입장만 대변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지만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었다.

어우동

86년 개봉작으로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한 작품. 1980년대는 안성기의 시대였다.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에 이어 그가 출연한 작품이 3년 연속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어우동>에서 그는 희대의 명기 어우동을 죽이기 위해 파견한 자객 역할을 맡았다. 어우동을 연기한 이보희는 ‘제2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87년 개봉작으로 26만 명의 관객수를 달성하며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했다. 대학생을 그린 청춘물이다. 박중훈, 강수연 등이 출연하여 1980년대 후반 캠퍼스 분위기를 묘사한다. 신문방송학도인 철수, 영문학도 미미, 보물섬이라 불리는 법대생이 캠퍼스를 누비며 즐거운 청춘을 보낸다. 그러던 와중에 보물섬이 시한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다이하드

88년 개봉작으로 그 해 외국영화 흥행 순위 1위, 관객수 70만 명을 기록했다. 최근 5편이 나온 인기 액션 영화 시리즈 <다이하드>가 탄생한 해가 1988년이었다. 뉴역 경찰 역을 연기한 브루스 윌리스는 <다이하드> 시리즈를 계기로 대표적인 액션 영화 배우의 반열에 접어든다. 테러리스트에 맞서는 과정에서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는 이 작품은 시리즈가 계속되는 동안 꾸준히 사랑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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