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은 어디 있느냐 | [주일말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3/6) – 생명의말씀선교회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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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 오전 11시, 강사 : 이상민목사
– 생명의말씀선교회(대한예수교침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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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당당뉴스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 일-확인받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하실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제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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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1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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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것을 본 예수님께서 서운하신 표현을 하셨습니다. :17-18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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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5/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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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 20190324 – 주일낮 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할렐루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봄비가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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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3/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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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칼럼]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크리스천투데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돌아온 자가 없단 말이냐?” (17:17-19)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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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3/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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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국민일보

누가복음 17장 11∼19절 예수님은 누추한 모습으로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고침 받은 나병환자를 앞에 두고, 나머지 아홉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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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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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코리아월드

[누가복음 17장]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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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reaworld.us

Date Published: 6/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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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 worldchallenge.org

누가복음 17장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쓴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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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worldchallenge.org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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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 기멀전

“너 감사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너는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은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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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3/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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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3/6) - 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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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홉은 어디 있느냐

  • Author: 광주교회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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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2. 3. 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EZcn78xCM_o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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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 2010년 10월 08일 (금) 01:29:56 [조회수 : 4969] 성령강림절 후 제 19 주(20101010)

성서일과/ 시 111; 왕하 5:1-15; 딤후 2:8-15; 눅 17:11-19

본문/ 눅 17:11-19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개정)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이 돌아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했습니다.

나머지 아홉이 어디에 계신지 궁금해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아홉도 너와 같이 깨끗해 졌을 텐데 그 아홉은 왜 오지 않았느냐?’

책망하고 나무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들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차라리 탄식에 가까운 혼잣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쩌면 멀리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홀로 우시던 그 때와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주님은 결코 멸할 수 없는 주님의 도성이 멸망할 운명에 처한 것을 내다보시며 우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당연히 돌아와 감사해야 할 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시며 탄식하십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실 수밖에 없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일이 왜 일어나게 될까요?

단순히 그저 감사를 모르는 인간의 죄악 때문이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끝을 맺는 것은 너무 쉽게 말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될까요?

오늘 본문 그리고 함께 주어진 성서일과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아홉은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주님이 물으셨으나 대답할 사람이 없었던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한번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이 되어서 대답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믿음없이 어떻게 치료를 받아겠느냐?’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이 그들을 어떻게 치료하셨다는 분명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는 절차도 없었습니다.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따름입니다.

14절에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라는 말씀이 있으니 저들이 치료를 받은 것 만큼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깨끗함이 예수님에 의한 것이라는 믿음은 오직 돌아온 한 사람만이 가졌을 것입니다.

19절에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보고 네 믿음이라고 하셨습니까?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천형-하늘이 내린 형벌이라고 불리는 문둥병이 저절로 낫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을 목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하나님을 잘 아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는 말씀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열왕기 하 5장은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나아만이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왕하 5:11]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그 아홉도 나아만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특별한 격식과 절차를 갖추어 자신들의 문둥병을 고치셨다면 주 앞에 무릎을 꿇고 사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차와 형식이 없었습니다.

그 아홉은 십중팔구 나아만과 같은 마음으로 투덜대며 길을 갔을 것입니다.

‘무언가 특별한 말이나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문둥병이라는 큰 병에 어울릴만한 그런 일을 하실 줄 알았는데….’

‘기도라도 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수군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사장에게로 향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나아만이 내 고향에 요단강 보다 크고 깨끗한 물이 없어서 나로 요단강에서 몸을 씻게 하느냐고, 분노하며 고향으로 되돌아가던 일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은 그들이 깨끗함을 입었을 때에 그것이 뉘로 말미암았는지를 잊어버리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 하고 먼저 말씀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탄식하실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믿는 자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 아닙니다.

되어진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되어지는 일의 과정이나 절차가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일의 결과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으로 사람 되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 아홉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너무 좋은 나머지 돌아와 감사할 겨를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열 명의 병자가 주님을 불렀을 때 그들의 생각은 한결 같았을 것입니다.

병만 나을 수 있다면…..

눈 하나를 빼지 못하겠습니까?

아니 소경이 되어도 문둥병을 지니고 사는 괴로움만 하겠습니까?

그저 낫기만 한다면 낫게 해 주신 그 분을 위해 무엇인들 바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부자들의 돈을 탐내는 분도 아니고 오히려 가난한 자를 깊이 사랑하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사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가까이 하시는 온유함과 자상함도 지니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들이나 여자만도 못한 처지였습니다.

문둥병은 그 병이 있는 동안 부정한 몸이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 곁에 가까이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한다는 것이 율법의 규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주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지닌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소리칠 수 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도 그들을 가까이 오라고 하신 것 같지는 앟습니다.

단지 그들의 애절한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바라 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눈에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멀리서 당신을 부르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다 저렇다 하심이 없이 아주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율법이 정한 바에 따르면 문둥병자가 그 병을 고치더라도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하게 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사람들 곁으로 가서 생활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 일-확인받는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고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하실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사람들 속으로 돌아가 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멀리 서서 외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 앞에 가까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그 길로 예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도 되는데 오히려 더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일이 벌어진 곳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였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제사장이 있는 예루살렘까지는 상당히 먼 길입니다.

그들은 가다가 깨끗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아서 이게 어찌된 일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아홉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에 가서 그 지긋지긋하게 아팠던 세월을 청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밖의 일은 모두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 후에 해도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조금 지나서는 이제 깨끗해진 몸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고 분주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 해도 그때에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돌아와 예수님 앞에 서기 위해서 한나절 아니면 길어야 하룻길 정도 되는 길을 되짚어 오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성경에서나 보던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 기쁨을 누리는데 열중했습니다.

뒷간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생각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이 터질 듯한 기쁨이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서 있을 수 있는 족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신다는 믿음이 이스라엘의 터전입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여 이웃에게 행할 바를 결정해야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지금 누리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그들은 옛일을 기억해야만 하는 족속이었습니다.

(시 77:11)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사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그 아홉이 자신의 옛 모습을 기억했다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겠습니까?

멀리서나마 주를 바라보던 그들이 아예 주를 떠나 버린 것은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조금 전의 일,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일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왜 잊었습니까?

지금 누리는 즐거움에 취해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풍요에 취해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잊을까 염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오늘날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교회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믿음을 말하지만 그 믿음이 어떠합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기의 생각을 믿음과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와 다르면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려 볼 겨를도 없이 이방인이라고, 마귀라고, 사탄이라고 저주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말하지만 정작 자신의 옛 모습을 잊고 스스로 의로운 자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온 세상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부흥을 이룬 것이 혹시라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 주신 주께 돌아와 무릎을 꿇을 겨를도 없이 주께서 주신 것을 누리는 데에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믿음과 세상에서 말하는 신념이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념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신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는 자가 신념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를 세습하는 문제가 큰 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는데 그 중에 많은 경우가 세습문제일 정도로 흔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은퇴하는 목사의 아들이 목사라면 반 이상이 세습문제로 몸살을 앓게 되어 버렸습니다.

불과 20년 전의 일을 잊어버리고 크게 부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취해 버린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고생해서 이룬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생각 밖에 없습니다.

주께 무릎을 꿇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나아만의 이야기가 한결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아람 사람입니다.

그것도 군대장관입니다.

그가 문둥병을 고쳤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께 엎드려 사례한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피를 받았으나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어 유대인들로부터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족속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이방인이라고 하셨습니다.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로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편견에 치우친 믿음으로 자칫 주님으로부터 외면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나 같은 죄인을 잊어버리고, 놀라운 은혜에 취해 있으면 교회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아홉에 속하지 마시기를 기원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지니시기를 기원합니다.

죄인인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신 그 은혜를 기억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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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 20190324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1-19)

할렐루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봄비가 내렸습니다.

길가의 목련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상큼한 꽃내음새가 얼어붙었던 우리의 마음을 깨우는 계절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숨어야 했을까요? 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아담처럼 숨으면 안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예배의 자리에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 있습니다.”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는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인 하나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복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복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시편 1: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 있으면 안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과연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예배 드릴 때,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신 28:12)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창고를 열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내게 축복의 단비를 내려 주시고, 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 창고 문이 활짝 열려서, 은혜의 단비, 축복의 단비가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예배에 승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야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이 활동하던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장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나병환자의 이야기입니다.

12-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아멘.

나병은 어떤 병입니까? 우리 몸 속에 나쁜 세균이 들어가, 몸이 썩으면서, 마디마디가 다 떨어져 나가고, 냄새가 나는데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더구나 이 병은 그 당시에는 치료방법이 없어서,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절망적인 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에 걸린 사람은 종교적으로 죄를 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부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냉대와 소외를 받았습니다.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버림받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가난하여, 굶주릴 수밖에 없는 처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열 명의 나병 환자는 그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나병 환자들은 사람이 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가지 아니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라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예수님께 나와서 긍휼을 구했습니다. 치료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을까요? 그들은 왜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을까요?

그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비록 멀리서나마,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여러분!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께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하는 것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의학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 나와서 간구하면,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른 척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으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죄가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절망과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 부르짖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너무너무 벅찬 문제가 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안 될 것 같은 일이라도, 결국 형통하게 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잘 될 것 같은 일이라도, 결국은 안 됩니다. 일이 풀리지를 않습니다. 일이 실타래처럼 점점 더 꼬이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지만, 기도를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온갖 냉대와 멸시 속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외치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병이 낫게 될 것이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의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제사장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의 몸에 있는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음을 제사장으로부터 증명 받기 위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나병이 그대로 있으면, 제사장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장을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을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지금 그들의 몸에는 나병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될 것이라고 믿고,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가는 길에 치료받았습니다.

믿음으로 행동할 때, 불가능한 일도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도, 순종이 없으면,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순종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응답을 받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교회는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순종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1-2)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평생 우상을 숭배하며, 우상을 만드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5)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면서, 깊은 데로 가서, 진짜로 그물을 내렸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리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하지만, 잡지 못하는 그런 어부의 삶을 평생 살았을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것을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이 순종했을 때,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만약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종은 중요합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총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복과 은총은 순종을 타고 내려옵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아멘.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은 괴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하나님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아직도 만나지 못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이리 저리 찾아 헤매고 다니십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축복을 많이 받아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축복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다 사라지고 맙니다.

한때는 축복을 많이 받았다가, 그 축복을 모두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왕년에는 잘 먹고, 잘 살았는데, 왕년에는 믿음이 좋았는데, 왕년에는 열심히 충성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다 놓쳐버린 사람들입니다.

환난과 슬픔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축복의 열쇠를 손에 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도 인색한 사람은 손에 쥔 축복의 열쇠를 깊은 강물에 던져 버린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발로 차 버린 사람과 같습니다.

여러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겠습니까?

아니면, 항상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이 있겠습니까?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행복을 모르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어떤 환경이든,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7-1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육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병들지 않아야 합니다.

육신적인 병이나 영적인 병에 걸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말씀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이 아니라, 우상 앞에, 세상 앞에, 물질 앞에, 권력 앞에, 그런 곳에 있으면 안됩니다. 그런 곳에 기웃거리면 안됩니다.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불순종의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순종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자리에 있으면 안됩니다. 찬양과 감사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하는 사람이 이렇게 적으냐”

여러분! 축복을 받은 사람은 많지마는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아도, 다른 아홉 사람도 고침을 다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주님께 찾아와, 영광을 돌리며 감사드렸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많은 은혜와 복을 받으면서도, 감사를 다 드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열 가지 은혜를 받으면서도, 겨우 한 가지에, 감사를 드릴까 말까 할 때도 있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는 늘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이 자리에 나왔사오니,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사오니,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사오니,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로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은 독자 여러분들과 지난 주일 휴스턴 순복음 사랑의 교회에서

온라인으로 드린 예배의 말씀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누가복음 17장]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10명의 나병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시겠지만 요새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의 현장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집에서 온라인으로 새로운 방식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들은 집에서 숨어서 살며, 바깥 동네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나병(癩病, Leprosy, 오늘날 한센병Hansen’s disease) 환자들은 부정함과 정함의 정결법에 의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도 가서도 되지 않았습니다.(레위기 13장) 질병 가운데 유독 나병은 부모와 자식조차 접촉할 수 없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만약 주변 사람에게 다가 가면, ‘나는 부정하다!’라고 외치며 주위에 알려야 했습니다. 자신의 부정함이 다른 사람에게 병 뿐 아니라, ‘부정함의 죄’가 전염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절대 가까이 다가 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들과 비슷합니다.

10명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됨의 은혜를 입은 본문의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친숙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의 치유 사건입니다.

나병인들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하고 크게 외칩니다. (눅 17:13)

만성 감염병으로 치료 방법이 마땅히 없는 나병은 감염이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거나 떨어져 나가서 해당 부위를 상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체력의 약화와 시력의 악화로 목소리도 가늘어 진다고 합니다. 처절한 절망과 외로움 속에 죽음밖에 달리 기다릴 것이 없는 나병환자 10명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오심을 보고, 예수님만이 자신들이 치료받을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본문 전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처음에 그들이 “예수 선생님”이라고 외쳤던 것은 예수님을 ‘구원주’ 보다는 ‘치료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에 예수님이 치유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었기 때문입니다 (참고: 눅 5장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눅 17: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예수님이 10명의 나병환자 들에게 제사장들에게 가라는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 나병환자들을 직접 만지지 않고 눈으로만 보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부정과 정함의 결정은 당시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레 13장). 치유의 확인이 제사장을 통해 확인 되어야만 그 사람은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제사장에게 가던 중 본문에 나병 환자들은 몸이 깨끗하게 낫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나병환자들 10명의 이야기를 통해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회를 자주 나가 예배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을 목적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통해 얻고자 하는 축복은 보통,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 미국에서 크게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세상의 모든 환난에서 보호받는 것이 태반입니다.

목회자들도 이런 이유에서 기복신앙을 강조하고, 성도들도 “주여! 주여!” 외치는 이유가 자신의 정욕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간청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육체, 비싼 옷, 큰 집, 화려한 차, 배부를 음식, 안정된 사업과 직장이 있기를 원해, 없을 때는 다급하고, 있을 때 조차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안가운데 더 많은 소유를 하나님과 교회를 이용해 받고자 합니다. 본문의 회복된 나병환자들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셔, 이미 다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0명의 나병환자들이 깨끗이 회복되었지만, 회복 후에는 예수님께 돌아와 경배와 감사를 표한자는 단 한 명입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 ’라는 우리 속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인 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인생을 뒤돌아보면, 이러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 이것 저것 부탁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를 위해 열심히 교회도 가고, 봉사도 하고, 새벽기도회도 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신 예수님은 저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현재 저는 건강한 몸, 감사한 자녀, 넉넉한 소유, 사회적 명예 등…주님께서 주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제가 모든 것을 주신 자비하신 예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렸을까요? 혹시, ‘제가 하나님을 이용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10명의 나병환자들을 치유해 주셨는데, 그 중 9명은 예수님의 이 은혜를 받은 후 감사하지 않고 자신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치유함을 받은 후 ‘나 몰라라’ 하는 9명의 나병환자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미국에 사는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에게서 축복을 받고, 기적을 받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축복을 받은 후 하나님에게 받은 복을 세어보며 진심으로 감사한 적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을 경배합니까?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나요? 하나님과 순종의 동행을 하고 있을까요?

저는 45년 동안의 신앙생활을 뒤 볼아 보며, 제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혹시 제가 이용한은 아닌지, 더 편하게 살기위해서 그런 것이 아닐지… 저는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감사치 못한 죄를 고백하며 용서함을 구합니다. 제 자신의 교만함에 반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는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심령에서 우러난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이용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삶을 삽시다. 주께 돌아와 감사와 경배를 돌렸던 이방인 나병환자처럼,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께 기쁨과 감사로 영광 돌립시다!

주님 앞에 나와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감사의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는 주님의 응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날 ‘나의 나됨’은 제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주의 섭리와 주권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감사하며, 교만을 버리고 겸손으로 주께 영광 돌립시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있음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여 삽시다. 아마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주님이 우리를 보시며 탄식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치는 기도문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용서해 주십시요!

지금까지 불쌍한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모든것을 채워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너무 감사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하나님 언제나 우리를 돌 봐주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지켜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코의 호흡을 통해 생명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를 할수있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매일같이 기적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 다시 한번 회개를 합니다.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영생을 위해 부활하신, 우리의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 77편]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안용준 변호사

안용준 변호사는 지난 30년동안 연방 검사와 변호사로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주일 예배에 오신 분들에게 예배 후 무료로 법률 상담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신앙, 직장 커리어, 이민자의 삶 등, 필요한 법률 상담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예배 후에 받으실 수 있습니다.

문의: 832-428-5679

안변호사 법률 경력

※ 미 연방 하원의장 Staff (워싱턴 D.C. 9년)

※ 주검사 3년 / 연방검사 9년 (빌 클린턴, 죠지 부시 대통령)

※ 이후 대형 국제 로펌 변호사와 개인 변호 업무

매주일 순복음사랑교회에 오시면 평신도사역자로 섬기는 안변호사와 함께 예배하며, 교제할수 있습니다.

(Full Gospel Sarang Church, 1241 Blalock (across from H-Mart) at 11am Sunday Morning Service.)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장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쓴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접경지대를 지나실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마을의 옆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마을 밖으로는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 아홉은 분명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같이 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종조차 하지 않았지요. 분명히 이들 열 명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 질병으로부터 오는 아픔이 이들을 한 곳에 모여 의지하며 살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문둥병에 대해서 공부해 본 적이 있으시다면 이들이 살아가는 그 더럽고 지저분한 모습을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뉴욕의 문둥병자들’의 모습을 보아도 혐오스럽게 느끼실 것입니다. 링컨터널 입구 근처의 41번 가에는 임시로 만든 헛간 같은 집들이 도시의 한 블록을 차지하며 뻗어있습니다. 냉장고 박스에 넝마를 올린 – 두터운 종이판지 집들이 대부분이지요. 불결하고 더러운 매트리스들, 남루하다 못해 찢겨진 옷들이 굴러다니고 이들 집들 위로는 쓸모 없는 쓰레기들이 높이 쌓여있습니다. 이 작은 지역은 ‘이’와 ‘바퀴벌레’, ‘쥐’, ‘약물’, ‘알코올’, ‘에이즈’, ‘유행병’ 들이 만연하고 끊임없이 싸움은 계속됩니다.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 이러한 뉴욕의 뒤 구석의 모습들도 예수님 당시의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살던 지저분한 모습과 비교한다면 왕궁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장애 연금도 없었고, 복지금도 없었으며, 무료 식권이나 병원 치료도 없었고 사회적으로 보장받는 것이라곤 사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전적으로 버려진 것이었지요.

이들은 집도 없는 부랑자들이었고, 마을 밖의 고립된 지역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던 것입니다. 문둥병자들은 법적으로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100보 이상 떨어져있어야 했는데, 혹시라도 사람들이 옆으로 지나가게 되면, 그들은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소리질러야 했습니다.

또,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문둥병에 걸렸었는가에 따라, 어떤 이들은 손가락, 발가락, 귀, 치아, 손, 코 등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살은 벗겨져서 썩어 들어가고, 그 악취와 참혹한 광경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구걸하기도 하고 때로는 쓰레기더미를 뒤적이기도 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음식들을 먹었고,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찌꺼기에 의지해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그들이 제사장에 의해 문둥병자로 선언되자마자, 두고 떠나와야 했던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웃음과 그들과 함께 뛰어 놀던 귀여운 아이들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집과 직업과 명예를 잃었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했던 그들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 몇 명은 신실한 유대인으로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준수하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이름도 모를 마을의 외곽에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슬픔에 싸여 처량하고 쓸쓸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언제나 죄의 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문둥병자를 부끄러움 가운데 사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악의 무서운 영향으로 나날이 쇠약해지고 악화된다고 소개되지요.

이곳 타임 스퀘어 교회의 여러 예배 때에 보면, 앞에서 세 줄은 전에 이런 “문둥병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로 채워집니다. 이들은 전에 약물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들을 재활 하는 “디모데의 집” (Timothy House) 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죄악의 문둥병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졌던 것들 중 많은 부분을 잃게 합니다. 아내, 아이들, 직업, 자존심, 건강, 정신을 쉽게 잃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기댈 곳 없는 거지 신세로 전락되기도 합니다.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 듣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떠돌이 문둥병자를 만나 예수님이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 문둥병자들에게 행하신 기적 같은 치유들에 대해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예수님을 보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길과 가까운 곳에 모여 앉았겠지만, 그래도 정결 규정상 정상인들과 6, 7백 미터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자리에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모습들입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지저분하고, 살이 썩어 들어가서 이제 거의 죽게된 열 명의 병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앉아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만 처량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가끔 이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했을까 궁금합니다. 그들의 썩어져 가는 팔을 흔들어 댔을까요? 아니면 이들이 병으로 문드러진 팔다리를 가리켜 보였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더러운 거적때기를 흔들어 댔을까요? 저는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관심을 끌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이들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오셨을 때 “주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구한 것도 아니고, 죽은 후에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불쌍히 여겨 주소서” 소리를 질렀을 뿐입니다. 마치 “예수여, 저희들의 이 불쌍한 모습을 보고 그냥 가시렵니까,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마시옵소서!” 부르짖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처참한 모습에 잠시라도 질겁하시거나, 얼굴을 돌려버리지 않으셨으리 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시고, 이들의 모습에 아픔을 느끼시면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눅17:14) 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들 문둥병자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 제사장에게 다시 가보라고? 제사장은 우리의 몸을 검사해보고 우리에게 “부정하다”고 선언을 내린 사람 아닌가! 그가 우리를 부정하다고 마을에서 쫓아냈었는데… 아마 우리 열 명이 모두 돌아간 다면 보자마자 우리를 무슨 염치로 다시 왔느냐고 박대할게 뻔한데… 문둥병이 나아서 돌아온 사람은 이제껏 없었으니, 우리보고 분명 미쳤다고 할거야”.

그러나 순간적으로 어떤 생명력, 강건함, 그리고 힘의 물결이 이들 열 명 가운데 임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몇 달 동안 못쓰던 팔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몸 안에 다시금 생명이 고동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들은 자신들의 문드러졌던 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딱지 져서 회색 빛이던 살갗이 바뀌기 시작하고, 건강해 보이는 살들이 그들의 팔 다리와 얼굴에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문둥병은 낫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그 순간에 느꼈던 그 정결함과 생동감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깨끗케 하시는 그 능력을 느끼면서 기쁨으로 소리지르지는 않으셨던가요? 새 생명이 여러분 가운데 시작되었음을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이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이 생명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들 가운데 어떤 전율 같은 것이 흘렀으며,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렀을 것이 분명합니다. 껍질이 벗겨져 썩어 들어가던 살들은 아물고, 문드러졌던 자리는 새살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누가복음 5장 1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문둥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자, 위 구절과 같이, 열 명중에 어느 문둥병자도 그냥 그들의 집이나 교회 또는 율법에 명한 권리들로 곧 바로 복귀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해야할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낫게되면, 그는 먼저 제사장으로부터 “정결해졌다”는 선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8 일간의 무척 까다롭고 복잡한 의식을 수반합니다. 먼저 그는 온몸의 털을 깎고 목욕을 한 후에 검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는 희생 제사를 하면서 피를 뿌리고 기름을 몸에 바르는 정결의 과정이 따르고, 이어서 기름 바름과 속죄예물을 드리는 단계가 계속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이 끝나면, 그가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고 일상의 권리들을 되찾기 전에 또 8 일간을 기다리게 됩니다(재발여부 확인). 모두 합하면, 이 엄청난 종교적인 의식에 모두 16일이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종교적인 의식들은 모두 ‘메시아의 영광’에 대해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상징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은 레위기 14장에 잘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곧바로 앞을 다투어 달려갔던 이유였지요.

자, 이들 문둥병자들이 제사장에게 향하고 있을 때,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과 요기를 하시고, 마을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길을 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뒤에서 웬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아까 마을에서 보았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에 하나입니다.” 가까이 온 이 사람은 “영광이 있을 찌어다, 예수에게 영광 있을 찌어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소리질렀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께 나아온 그는, 예수 앞에 굽혀 경배하고, 찬양과 감사를 돌려 드렸습니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찬양이었습니다. “당신은 정녕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7) 예수님은, “왜 너뿐이냐? 나음을 입은 너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느냐” 묻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아직도 묻고 계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깨끗케 하시고, 온전케 하신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몇 명만이 그 분께 돌아옵니다. 자, 그럼 나머지들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지금 그들이 어디 있는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아까 제사장에게 달려갔던 9명의 문둥병자들과 같은 곳에 있습니다. ‘종교의식’에 사로잡혀 교회 안에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온 통계가 정확하다고 믿습니다. 이 누가복음의 통계대로라면, 예수님에 의해서 치유함을 받은 자들 중 90%는 영적으로 죽고 메말라버린 교회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 안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들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그들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자, 나는 나의 아내와 가족에게 돌아갈 꺼야. 나는 나의 자존심을 되찾길 원해. 나는 회당으로 다시 돌아갈 꺼야, 그리고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공부해야지…”

아마,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한 남자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도록 명함 받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들을 묵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리고 여기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대로 바로 제사장에게로 갔지 않습니까?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예, 모두 맞습니다. 그러나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능력에 대한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눅 5:14). 이들 문둥병자들은 이제 몇 년 동안은 그들의 병을 치유 받았다는 능력 있는 간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께서 몇 마디의 말만으로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을 간증하는 것으로 그들의 남은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한때 문둥병자였습니다. 나는 이 병으로부터 낫게 될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더럽고, 불결하고, 버림받은,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더니, 나를 깨끗케 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벌써 25년째 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 이 얼마나 멋진 간증입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전혀 모르는 구세주의 능력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도 그분의 마음을 알 수도 없습니다 !

제가 수년간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슬픔은 무서운 죄와 범법을 행하던 삶에서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약물 중독자들, 알콜 중독자들이 다시 방황에 빠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수가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전 미국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계속해서 그 엄청난 간증들을 듣고자 그들을 모시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그 추하고 무시무시한 과거에 대해 상세하게 간증하도록 부추김을 받고 고무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이들 중에 대부분은 아직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5년 전 저는 창녀촌의 포주였습니다. 나는 창녀들과 어울려 살았고, 그러다가 감옥에도 20번이나 들락날락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예수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깨끗함을 받고, 온전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 돌아온 수백 명의 소중한 영혼들이 지금 힘을 잃었고, 다시 타락하였으며, 삶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삶에 예수를 닮은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의 그 단 한번의 경험에 의존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타임 스퀘어 교회’는 야외 전도 집회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나와서 매주 간증하는 시간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들 중에는 정말 여러분들이 결코 들어보지 못한 엄청난 간증들을 가진 형제, 자매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오래되어 닳아버린 그들의 간증이야기에 의지해 살기보다 더 큰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늘’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매일 매일의 신선한 일들을 간증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삶 가운데 그리스도를 더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수많은 개종자들, 구원받은 영혼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현대 기독교의 과대 선전 안에서 갈 바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죽은 종교를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그 “고등 종교의식”들의 형식주의와 허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아마, 그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그 장기간의 정결 의례를 통과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종교적인가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사실, 그 모든 과정이 얼마나 대단한 의식입니까?

보세요. 먼저, 제사장이 두 마리의 새를 취하여, 흐르는 물위에서 잡고, 피가 물위로 떨어지게 합니다. 그리고는 우슬초를 백향목 패들 (약 40 cm) 에 묶어서 이를 진홍색의 실과 함께 살아있는 새를 향해 흔듭니다. 그리고 이 새의 날개와 꼬리를 피와 물에 담그게 됩니다.

이 피는 깨끗해진 문둥병자의 이마와 손목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살아있는 새는 공중에 날려 보내줍니다. 이제, 문둥병자는 자신의 옷을 빨고, 그의 모든 털을 밀고 몸을 씻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안에 들어 올 수가 있었지만, 아직 7일 동안은 장막 밖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제 팔 일에, 그는 두 마리의 숫양과 한 마리의 흠 없는 암양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돌아옵니다. 그는 또한 2.8 갤론의 밀가루와 반 리터 정도의 기름을 가져와야 합니다. 이들은 속건죄와 속죄죄 또 번제를 위한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 오일을 자신의 손바닥에 붓고, 땅에 일곱 번 뿌립니다. 그리고는 양에서는 피를 취하여 정결하게 된 자의 오른쪽 귓부리와 우편 엄지손가락과 우편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이제 제사장은 오일을 앞에 세 부위에 다시 바르고, 남은 기름을 그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 얼마나 의식적인 행위들입니까? 이 문둥병자들도 자신들이 무척 종교적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름을 바르고 붓고, 피를 뿌리는 정결 의식들은 몇 가지 무척 중요한 것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의 의미를 빼고 나면 이것은 모두 죽은 의식에 불과합니다.

이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에 치유하심을 받고 왔지만, 다시 죽은 의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자존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교회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시 물질적인 기복신앙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이들은 결코 주님을 다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들을 이러한 형식주의로 돌려보냈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돌려보내신 이유는 이 의식들 배후에 있는 실재를 알게 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배고픔을 얻기를 바라셨다고 생각합니다.

정결 의식을 행할 때 그 앞에 “흐르던 물” –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피를 뿌림” – 예수님께서 ‘내가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리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죽임 당한 어린양” –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제의들 각각의 의미들을 이들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에게 설명해주는 제사장은 없었습니다. 결국 문둥병자들은 이 제의들을 기계적으로 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 문둥병자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의를 통해서 그들이 무엇인가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부를 때에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모든 진리를 가지신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것을 갈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은 오늘날 교회에 앉아서 자신들조차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목회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수많은 가난한 영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영혼은 메마름과 지겨움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점점 이런 신앙생활에 싫증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니,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자리에 앉아서 그저 뭔가 아는 것처럼 시늉만 하는 목자 밑에서 메말라 죽으라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인가? 나에게 진실을 보여달라. 나에게 예수를 달라 !”

자 이제 제가 ‘열 명중에 한 명’,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께로 달려왔던 그 남은 한 사람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왜 매 세대마다 열정과 감사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달려오는 한 사람이 있을 까요?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자 돌아오는 자를 주목하시는 걸까요? 나머지 90%는 계속해서 형식과 복잡한 절차를 통과하고 있는데요.

저는 그 사마리아인이 형식과 제의들에 묶여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왔다고 믿습니다. 그는 사실 그 모든 형식을 버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정통’ 유대인으로 자라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린 시절부터 제의와 예식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그 전통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이 이 모든 종교적인 예식을 보았을 때, 그는 소리쳤습니다, “이게 아니야!!”

그는 종교적인 지도자들과 예배 참석자들의 허식을 보았습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과부들에게서 부당하게 돈을 빼앗고, 그들의 집을 가로채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환전상들이 성전에 가득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율법사들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 법을 만들지만 자신들은 조금도 지키지 않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는 위선자들, 겉만 번지러한 철면피들, 이중 인격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리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건 꼭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군! 이건 내게 도움이 안 돼, 내겐 뭔가 진정한 것이 필요해!”

이 사마리아인은 다른 아홉 명과 함께 마을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사장에게로, 교회로, 사회로, 인간의 존엄성으로, 행복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합니다. “잠깐만! 과거에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소유했을 때를 기억해보자. 내가 돈과 명예와 안정을 다 소유했을 때, 내가 행복했던가?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 아끼던 친구들도 ‘내가 문둥병에 걸린 것 같다’는 한마디에 모두 고개를 돌렸지 않은가? 나의 삶은 죄악 된 습성들에 젖어 있었고, 마음속엔 미움과 쓴 뿌리가 가득했어. 나의 삶은 공허했고, 생지옥과 같았어. 왜 내가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는 그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자, 나 자신을 봐. 이젠 난 깨끗해.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어. 교회에 가보는 것, 잠시 늦출 수 있지 않은가? 나의 가족들은 날 언제나 기다려 주었는걸. 그리고 새로운 삶도 좀 미루어 두자. 지금은 예수님께로 가야해. 난 나를 고쳐주신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겠어!” 그는 결국 이제까지 역사 속에서 모든 마지막에 남은 자들이 얻었던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저 쪽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전혀 없어! 그저 허상일 뿐이지! 나는 예수님께로 가겠어. 그분이 바로 나의 실상(reality)이 되실 분이시거든”

이 치유 받은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잠시 예수님께 감사하고자 돌아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마음은 자신을 고쳐주신 바로 그 분, 예수님께 경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온통 가득 찼던 것입니다.

그 남은 한 사람의 문둥병자는, “영광!” 그의 중심에서 솟아나는 찬양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달려와 엎드려, 온 맘과 힘을 다해 소리 높여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만일 누군가 여기 이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 경배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분명 결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작정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간단 말인가? 이 예수님이야말로 나를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이 아니신가!”

저는 이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예수께서 산으로 가시든 해변으로 가시든 거기 모인 무리의 맨 앞에 그 깨끗함을 받은 사마리아인이 앉아있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하나님께 영광을!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는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예수여, 나를 같이 데려가소서!” 그리고, 저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그의 모습 또한 상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 감사로 가득한 문둥병자가 절대 갖지 않았던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류가 알지 못했던 잠재적 능력입니다.

매 4년마다, 1월이 되면, 미국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부의 수장인 미국 대통령의 취임이 있습니다. 그의 서명은 곧 법이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통솔하며, 그가 그저 버튼 하나를 누름으로서 모든 나라들을 파괴시킬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능력도 예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능력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또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절대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1:19-22).

그 한 명의 문둥병자는 이런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능력은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진 후에 온 것이니까요.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나아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의 “담력” 이란 말은 “활짝 열어,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드러냄”은 마귀들의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마귀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또 하나님께서 내게 오시는 특권을 얻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나아오시는’ 이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십니까? 자, 여러분, 이제 믿음의 확신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새나 염소나 황소의 피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2-14).

하나님의 자녀가 겁내지 아니하고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그 순간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감격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아와 “나는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습니다. 만일 나의 마음이 나를 정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보다 크십니다!” (요 3:20 참조).

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두 번째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를 온전케 만드셨다”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9). 이때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병에서의 치유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몸과 마음, 정신과 영혼까지 온전케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도 하나님께서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 온전함!

저는 이 한 명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깨끗함을 입은 아홉 명의 친구들을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그들이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아마 아홉 명은 모여서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이 맞이해야 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아내들은 다른 이와 결혼했고, 아이들은 부끄러움에 이들을 모른척했으며 오랜 친구들은 아직도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였습니다. 다시금 정상인의 생활에 적응하기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막 돌아온 이 사마리아인 친구를 바라봅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네는 우리의 병을 고쳐준 갈리리 사람 예수를 아직 기억하는가? 도대체 그분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거지? 아니, 그리고 자네는 왜 이렇게 행복한가?”

그는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말합니다. “난 예수님과 어제도 같이 있었다네. 난 이제 그분을 따르고 있지. 난 그분의 제자고 그분이 바로 나의 선생님이시라구. 난 자네들처럼 새 삶에 적응하느라 문제를 겪은 적도 없고, 나의 가족들이 나를 모른다해도 또 내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내겐 별 문제가 아니네. 예수님께서 나를 받아 주셨는걸!”

“여보게 형제들, 내가 그 비밀을 알려 줄까? 난 하나님과 동행한다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나에게 할 바를 가르쳐주시지. 난 지금 ‘천막 만드는 사람’이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은 나의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네!”

아마 그는 그 나머지 아홉 명에게 그와 같이 예수님께 가보자고 초청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마 그를 실망시켰을 것입니다. “미안하네, 우리는 요즘 일주일에 3일은 율법공부를 해야해. 아, 요즘 우리는 그 ‘메시아’가 언제쯤 오실지에 대해서 중대한 논의를 하고있는 중이라서 같이 갈 수 없겠는걸.” 그들은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미 그분을 놓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제 그 한 명의 사마리아인은 다시 떠나갑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는 노래를 부르며 갑니다. “내 마음에는 한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는 천사도 부를 수 없는 노래랍니다. 구원받았네! 구원받았네!” 그는 그를 온전케 하고 자유케 하는 구원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이 한 명의 문둥병자 보다도 더 커다란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열린 문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리 오렴, 너는 깨끗케 되었단다. 이것을 믿고, 담대히 살려무나. 이리 와서 그리스도를 만나거라!” 할렐루야!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몇 년전에 브라질에 있는 유명한 아마존 숲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40m나 되는 아주 큰 나무, 꼭대기 나뭇가지 사이에다가 꼭 까치집처럼 지은 방이 있습니다. 그 호텔에서 그 방이 제일 비싼 방입니다. 어쨌든 사다리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되는 그런 방에 또 역사적인 일이었기에 그 방에 들어가서 며칠을 유숙한 일이 있었습니다. 밤에 자는 동안에 지붕 위에 원숭이들이 모여가지고 얼마나 시끄럽게 하는지 정신이 없고요,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문 앞에 원숭이들이 있다가 막 달려듭니다, 뭐,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뭐, 그런 아주 짐승들 속에서 며칠을 지내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 사장님 되시는 분하고 제가 좀 사귀었는데 이 분하고 같이 숲을 지나갈 때 그 사장님이 누군가를 다 아니까, 이 짐승들이, 그래서 바나나를 한바구니 이렇게 들고 가면서 특별히 어린 원숭이들이 올 때 하나씩 주는 거예요, 이렇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을 받아갈 때 탁 잡아가지고 가로채가지고 도망을 가요. 빼앗듯이. 매일같이 그렇게 준다는데도 그렇게 좀 공손하게 받지를 않고 받고 탁 잡아채고는 막 도망을 가요. ‘저것이 왜 저럴까’ 그래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했더니 그 사장님은 전문가거든요. “이것이 동물과 사람이 다른 겁니다.” 아주 인생 철학을 말씀하시더라고요. 동물은 내가 한평생 바나나를 이렇게 주어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이게 특징입니다. 저 ‘왜 저렇게 도망가느냐’ 그것은 불신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주고 자기를 붙잡을까봐 그저 이것만 받아가지고는 도망을 가요. 참 귀중한 진리를 들었습니다.

공산권을 방문해 보면, 하나같이 못삽니다. 그 못사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간단합니다. 공산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공산세계에서 많이 듣는 말이 혁명입니다. 혁명, 투쟁, 쟁취. 지금 북한에 식량이 모자라서 요새 남새 채취 작전을 합니다. 혁명입니다. 그것도 혁명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들판이고, 산이고 먹을만한 풀은 다 뜯어오라 이거야. 온 시민이 다 나서서 지금 풀뜯기 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얘기지요. 여러분, 혁명, 파업, 쟁취 이런 말을 듣는데 쟁취를 통해 얻은 것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건 빼앗은 거니까요. 그래서 이 붉은 띠를 두르고 뭐 ‘결사투쟁’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서글픕니다. 저렇게 얻는 것도 없지만은 얻어도 불행합니다. 왜요 감사가 없잖아요. 이건 빼앗은 것이지 얻은 게 아니거든요. 그 세계에는 감사가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하는 형법은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아주 명언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다시 벌할 것도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보내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그는 벌써 불행이라고 하는 심판을 받고 있더라 그 말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만났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언제 걸리는 지도 모르게 걸려가지고 서서히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참 비참한 병입니다. 손발이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고, 눈알이 빠지고 이러면서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문둥병인데, 이 당시 이것은 난치병이요,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병에 걸렸다 하면 가정에서 격리됩니다. 사회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어느 동굴같은데서 모여 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보내주면 그걸 먹고 살고요,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리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그래서 얻어먹는 그런 집단입니다. 여기 오늘 열명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저주받은 인간들을, 저주받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그랬습니다. 제사장은 당시에 의사입니다. 그런고로 문둥병이 나았는지 문둥병이 아직 있는지는 제사장이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너는 나았다” 라고 인정을 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뭐 안수한 것도 아니고 안찰한 것도 아니고 깨끗케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 말을 듣고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만큼의 믿음이 있었고 이 만큼의 순종이 있었어요. 그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가는 길에 보니 나았어요. 얼마나 희한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 순간 사마리아 사람 하나는 길을 돌려서 예수님께로 와서 발 앞에 꿇어 엎드리고 사례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가 조건은 아닙니다. 감사가 그들의 준 강한 의무가 아니더란 말이에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렇게 와서 감사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고 예수님 돌아오라고 말씀한 바 없어요. 돌아와서 감사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섭섭해하시는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는 의무가 아니더라고요. 감사가 조건도 아니에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와서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마땅하지 않느냐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뭐 그 사람들 감사 안했다고 해서 병이 다시 재발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너 감사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너는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슬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아홉에 대한 이야기가 늘 궁금해요.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겠다’ 해서 갔다는 겁니다.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 그래서 가버렸어요.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이거, 신중론이요. 이거 나았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라서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던가보다.’ 이건 회의론자올시다. 또 그 다음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건 자연현상으로 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일들이 많잖아요. 어떤 병 걸렸다가 나았을 때, “어떻게 나았어” “그저 뭐, 약도 좀 쓰고 병원에도 가긴 했지만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나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또 하나는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이게 궁금해요, 이제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그래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어요. 또 한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가버렸다. 또 한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안찰을 한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아,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밖에 안했는데 아, 뭐 예수님이 별로 해준것도 없는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이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버렸단 말이죠. 또 한사람은 ‘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 그래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한사람은 이 모습 이대로. 이게 중요한 거예요. 문둥병자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요. 그 더러워진 거, 그 붕대감고 있는 거, 이 모습 이대로, 그거라면 어떠냐 ‘예수님이 벌써 우리를 환영해주시고 사랑해 주셨는데 이 모습 이 추한 모습이면 어떠냐’ 이거예요. 이 모습 이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사례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그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한사람은 우선 감사했어요. 최우선적으로 감사했어요. 예수님이 감사를 조건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것이 조건이 될 때는 율법이요. 오직 은혜로 쓰시고, 은혜로 받고, 은혜로 말씀하시고, 은혜로 순종하고, 오직 은혜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고 있어요. 의무적인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이렇게 참 그 추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감사의 사례를 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R. A. Toray 라고 하는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이 되었어요.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어요. 그것이 신문에 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아주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미시간호에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그런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끝났을 때쯤 해서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바로 그 청년입니다” 그랬어요. 예배 후에 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와서 차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노인이 하는 말이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상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입니까 직선적이고 바로 그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 못하게 됩니다. 하루만 지나도 몇시간만 지나도 생각이 바뀝니다. 오늘 이 아홉사람의 변명처럼 말이에요. 감사 못할 이야기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요.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아요. 바로 이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영영 못합니다.

여러분, 슬픈 얘기입니다만은 1980년 아웅산 묘역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들, 무려 방문단 17명이 살해되는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참가했던 분이 마침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지만은 길이 막혀서 조금 늦게 간 것 때문에 그 끔찍한 사건에서 면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대통령과 같이 비상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시간이라서 비행장에 새벽 4시에 내렸는데 다 그냥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뭐 서로 인사도 안하고 흩어졌는데, 이 분도 내리긴 했는데 깜깜한 밤에 이거 어떡하나 그래서 우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물어봅니다. “어디로 갈까요” 그때 그는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꼭 죽어야 할 사람이 지금 살았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소망교회로 갑시다.” 도저히 집으로 먼저 갈 수가 없었더라는 거예요. 그는 새벽기도회에 한번도 안나온 사람입니다. “우선 교회로 갑시다.” 교회 마당에 왔는데 글쎄 대통령 따라간 분이라서 돈을 한푼도 안가지고 갔어요. 택시비를 줄 돈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새벽기도 나오는 분이 있을테니까 아무나 붙들고 부탁을 해서 돈을 꾸어가지고 택시비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잠깐 기다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교인이 오더래요. 그래서 부탁해서 돈을 꾸어서 택시비를 주었대요. 그리고 들어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노라고. 여러분, 가끔 제가 길에 나가면 대낮에, weekday에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을 만나요. 서로 인사하면서 “어떻게 이시간에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 번 같은 얘기를 듣습니다. “제가 지금 중한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퇴원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생명을 다시 찾았는데 내가 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기도하고 가려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잘한 일이올시다. 바로 이 시간, 바로 직설적으로 즉각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전화 받아보셨어요 “가스가 나왔습니다” 그러대요. 저도 한번 맹장 수술을 급히 받아본 적이 있는데 이런 수술을 받은 다음에 의사와 환자가 같이 기다리는 것이 가스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만일 안나오면은 재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가스가 나오면 아, 살았다고, 서로 고맙다고 전화를 겁니다. 가스가 뭡니까 방귀예요, 방귀. 여러분 허구헛날 방귀뀌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죠 이 시간에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이게요. 여러분 환난과 고통, 역경, 그것이 사람의 생각을 깊게 만들고 깨달음을 만듭니다.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있을 때, 행복이 따라오는 것이올시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형통할 때, 평안할 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원망하고요 가장 절박한 어려움에 있을 때 감사할 뿐 아니라 미처 감사하지 못한 것까지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한번 방문에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준 세계가 갈채를 보내는 감동적인 인간승리의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것은 천상의 목소리로 가스펠 송을 부르시고 있는 그런 가스펠 싱어의 수기입니다. 레나 마리아 라고 하는 분의 수기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장애자로 두 발이 없습니다. 다리도 한 다리가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장애를 오늘이 있게 한 본질적 요소였지 이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받을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자체가 레나 마리아의 삶을 태양보다도 더 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잘되고 평안한데서 감사가 우러나오는 줄 알지만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형편에서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깨달음이 없이는 감사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고 감사할 때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관계에 감사가 있고요 직선적 이해에 감사가 있고요 절대적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신앙적 이해 속에서만이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사건의 결과가 아닙니다. 감사는 생의 동기입니다. 행복이 어디 있느냐고요 행복해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행복이 되는 것이올시다. 감사함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감사가 없는 곳은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네 믿는 대로 되리라. 너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축복이 이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은혜, 그리하여 은혜로 은혜되게 하는 은혜, 그리고 범사에 형통한 은혜,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당연히 감사할 일이 있건만,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제서 뉘우치며 감사드립니다. 주여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게 하시고 감사로 우리의 생의 의미를 바꾸어 행복하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기도응답을 받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늘 승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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