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 [Live] 본받을 신앙 공동체 (데살로니가전서 1:1-10)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01031 141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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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10절 큐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10절 말씀묵상. ​오늘부터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묵상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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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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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말씀 묵상 – 복음뉴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말씀 묵상 · 1) 바울의 인사(1) ·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과 수고(2-4) · 3) 성령과 능력으로 증거된 복음(5)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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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8/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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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데살로니가전서 1장

데살로니가전서 1장 · (살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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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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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3(월) “데살로니가전서 1:1-10” / 작성: 이대은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1-10 [찬송가]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 서신서는 특히 바울의 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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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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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설교(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 …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사랑,소망.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사도 바울이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꼭 들렸던 곳이 마케도니아 지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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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s333.tistory.com

Date Published: 9/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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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데살로니가로부터 들려온 소식”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데살로니가로부터 들려온 소식”. 오순절 후 다섯 번째 주일, 2016년 6월 19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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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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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1장1절~10절 주해.

참 지금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유익이 된다… 2학기과제로 살전1:1절~10절 주석을 올려본다. 교역자 수련회가 갑자기 제출시기와 겹치는 바람에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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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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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1장 1-10절 – 다음블로그

본문(本文) : 데살로니가 전서 1장 1-10절 주제(主題) : 너희 믿음의 역사(役事)와 소문 요해(要解) : 데살로니가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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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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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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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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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10절 큐티: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10절 본문

인사

(살전 1:1) 바울 과 실루아노 와 디모데 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 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본

(살전 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 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 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 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 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 와 아가야 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 와 아가야 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장 1절-10절 말씀묵상

​오늘부터는 데살로니가전서를 묵상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믿음, 소망, 사랑에 각각 역사, 인내, 수고를 붙인 것에 주목하게 된다.

믿음은 역사를 만들어 내고,

사랑은 자발적으로 수고하게 하며,

소망은 인내할 수 있게 한다는 진리를 알려주신다.(3절)

하나님께서는 교인들을 택하셨고 (4절),

환난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기억하신다. (6절)

바울은 이렇게 믿음, 소망, 사랑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칭찬하며 격려한다.(7절~10절)

적용

세상에 역사를 만들어내는 믿음, 기꺼이 수고할 수 있는 사랑,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소망을 달라고 기도하기

하나님, 택하신 백성 삼아 주심에 감사합니다.

주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냥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굳은 믿음으로 세상에 없던 역사를 만들어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과 관계에 있어 사랑으로 임함으로 기꺼이 수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낙관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악하고 잔인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믿음, 사랑, 소망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기도의 자리로 불러 주시고, 기도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말씀 묵상

데살로니가전서 1:1-10 말씀 묵상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데살로니가전서 1:10).

“And to wait for his Son from heaven, whom he raised from the dead—Jesus, who rescues us from the coming wrath.”(1 Thessalonians 1:10).

1) 바울의 인사(1)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사랑의 편지를 보내며 인사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며 근본이시며 성도의 머리이십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축원했습니다. 죄로 인해 평강을 얻지 못하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입은 결과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평강인 것입니다.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과 수고(2-4)

바울은 자신과 함께 동역하는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항상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며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러한 신앙을 쉬지 않고 기억하며 기도 할 때마다 그들의 신앙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바울에게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했던 것입니다.

3) 성령과 능력으로 증거된 복음(5)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아 택함을 입었음을 말씀했습니다. 모든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택하신 예정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증거하실 때에도 나타났습니다.

4) 환난 가운데서 복음을 받음(6)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복음을 받음으로써 바울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5) 각처에 퍼진 믿음의 소문(7-10)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 나갔음을 증거하며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된 하나님을 섬긴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께서 주신 주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신앙 생활함으로 본이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2021/05/03(월) “데살로니가전서 1:1-10” / 작성: 이대은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1-10

[찬송가]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 서신서는 특히 바울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하며 은혜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입니다. 성경에서는 현재 그리스의 북부 지역을 마게도냐라 하고, 그리스 남부 지역을 아가야라고 하는데,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천혜의 항구이자 로마와 동방을 잇는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하며 이곳을 방문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게도냐 지역에 온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여기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는데,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많은 회심자를 얻었지만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혐의를 쓰고 곧 쫓겨납니다. 이후 베뢰아와 아덴을 거쳐 고린도에 간 바울은 일년 육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데살로니가 교회에 디모데를 보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신들의 본을 따라 믿음 가운데 행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신이 미처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정확하게 전하고, 그에 따른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담아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의 인사(1-4) ]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이 초기 편지에서 여타 서신서와 달리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도인지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데,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가 굉장히 돈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두 인물도 같이 소개합니다. 2차 전도 여행의 신실한 동역자인 실라가 실루아노로 기록되어 있으며, 루스드라에서부터 전도 여행에 동참했고 데살로니가를 오가며 소식을 전한 디모데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를 설명하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하며,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집회를 뜻하는 단어로서, 당시에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두고 사용한 말은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원을 두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곧 특유의 인사를 전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는 말인데, 바울은 여러 서신서에서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평강은 샬롬에 해당하는 말로서 유대인의 일반적인 인사였습니다. 또 은혜란 카리스라고 하는데 당시 헬라식 인사를 변형하여 사용한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인사말을 건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복음에 따르는 환난 가운데도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2-3)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감사와 기도와 기억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며 기억하는 일이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감사가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행하신 일과 그들의 반응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특히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믿음 소망 사랑이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인 안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행했던 여러 가지 일을 기억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감내했던 온갖 수고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소망하며 인내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른 이에게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어떤 존재로 다른 믿는 자의 기도에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부와 명예, 또는 세련되고 교양 있는 언행을 자랑삼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난을 당해도 믿음으로 반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예수님의 약속을 기대하며 인내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할 삶입니다. 내 삶에 그러한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지, 또 다른 이를 어떤 기준에 따라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바울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택하심을 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택하심이라는 주제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이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서 멈춰야 합니다. 성경이 그 이상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를 안다고 한 표현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택하셨는지 택하지 않으셨는지를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앞뒤 구절을 살펴볼 때 데살로니가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선택된 존재에 합당한 믿음과 삶을 견지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바라보며 저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선택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저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감사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의 경과(5-10)]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복음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입만 살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말의 사람이 아니라 삶의 사람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하는 큰 이유는 말을 잘하지 못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말은 너무 잘하는데 그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은 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해질 때 거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능력이 나타나며, 큰 확신이 있습니다. 이는 결국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은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은 우리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힘을 주셔서 그 말과 행동에 능력이 나타나게 하시고 큰 확신을 주셔서 지금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덧붙여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직접 우리 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경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직접 우리 가운데 살아가심으로써 자신의 말씀을 다 실천하셨습니다. 인간 가운데서, 인간과 살을 맞대고, 혐오스러운 인간을 위하여 같은 모습을 취하신 것은 참으로 위대한 겸손의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도, 시혜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제공해 주겠다는 식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본받은 선교사님들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한국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같이 되기 위해 힘쓰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놓았던 그 마음과 삶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삶의 영역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감사하고 감격한 바는 그들이 많은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시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 따르는 기쁨과 박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 역시 바울이 떠난 이후에도 줄곧 박해를 받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박해를 극복할 만한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바울 일행을 본받아 그 모습대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주를 본받고, 그리스도인을 본받으며, 또 나를 본받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계속하게 됩니다. 본받다는 말은 모범을 따라 흉내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작이시고 주님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본받는 일과 그 본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7-8)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마게도냐와 아가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그리스 전체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그리스 반도의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온 세상에 그들의 믿음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하여 믿음의 반응을 일으키고, 그 신선한 반향을 목격한 사람들의 연쇄적인 결단을 낳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국가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복음을 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가 증가했고 그리스도인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여 모든 믿는 나라의 본이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들렸고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감사합니다. 다음 말씀을 살펴보고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9-10)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새번역 성경은 9절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부분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라고 옮깁니다.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인들이 바울 일행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우상을 버리며 하나님께 돌아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9절과 10절은 복음의 핵심 주제를 다룹니다. 복음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또 복음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또 복음은 예수님을 기다리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소망의 인내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복음을 받들어 이 세 가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더 좋은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것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완전히 임하지는 않은 현시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긴장 관계를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한국교회와 우리는 특별히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행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오히려 장래의 노하심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찬양하는 믿음의 소문은 사라지고 흉문만 넘쳐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노하심으로 인해 멸망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의식하며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소망의 인내란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세상을 바라며 이 세상의 핍박을 견디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피해 이 세상의 유혹을 절제하는 것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복음의 본을 보여주신 선교사님들의 흔적을 지근거리에 간직하고 있다는 특권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이어온 이 본을 따라 믿음의 사역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감내하는 모든 주님의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쓰는 애정어린 편지를 봅니다. 이 편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편지임을 또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가게 하옵소서. 나와 한국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일을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말이 아닌 삶으로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뻐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 또 나는 다른 이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2. 내게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3. 나에게 복음이 말뿐만이 아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하였던 기억을 살려 보십시오. 나는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있습니까?

4. 나와 한국교회의 상황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이킬 것이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십시오.

(작성 : 이대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설교(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 소망 사랑)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사랑,소망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사도 바울이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꼭 들렸던 곳이 마케도니아 지방의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책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 지방의 수도이고, 해안가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과 종교가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17장 1~2절 찾기)

사도행전 17장 1~2절 에 보면, 거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유대인 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3주 동안 성경을 강론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밤에 도망치듯 베뢰아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머문 시간은 얼마 안됐지만,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 기쁨을 담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교회가 생겨나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 교인들 한 사람 한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1장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쉬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역사란 단어의 어원을 보면 “에르곤”이란 말입니다. 그 뜻은 ‘일’, 또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선언했는데, 여기에서 ‘행함’으로 번역된 단어가 오늘 본문과 같은 ‘에르곤’을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얼마나 믿음 안에서 행동했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우상이 판치는 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갖은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 시대에는 핍박과 시기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갔다면, 우리의 시대에는 세상의 유혹과 물질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고백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행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을 많이 강조하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함은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확실한 증거는 행함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는 이렇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 지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바로 2장에 나오는데요. 2장 6절, 9절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복음 전도할 때에 능히 존중받을 수 있지만, 너희든 다른 사람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말로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밤낮 수고함으로 복음을 증거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25년 넘도록 목회를 하고 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큰 교회를 목회하고 세웠지만, 설교를 통해서 사람의 인격이 변화 된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잠시 잠깐 감동과 은혜를 줄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인격까지는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죠. 사람의 인격이 변하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행함을 통한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다닌다고 나 예수 믿는 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신앙생활이 아니라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강조했던 생활신앙으로서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행위요,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났던 믿음의 역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7절~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로 인해서 사도 바울이 다른 지역에 가서 아무 말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전도 안해도 믿음의 소문만 듣고도, 교회 나오고, 예수님 믿는 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의 수고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필리아도 아니고 에로스도 아니고, 아가페의 사랑을 뜻합니다. 필리아가 우정과도 같은 사랑, 에로스가 이성간의 사랑을 뜻한다면, 아가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랑의 수고를 할 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어떠한 사랑의 수고를 했는 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수고와 애씀을 누구를 통해 배웠는지는 나와 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의 사랑의 수고와 애씀을 보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사랑의 수고를 보고 그대로 배웠습니다. 그 사랑의 수고를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그러한 사랑의 수고를 배웠을까요?

스데반을 통해서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스데반은 열두사도들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대청교회 안에서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 오늘도 세워져 갑니다.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우리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얼굴이 아무리 개성있게 생겼어도, 성격이 삐뚤어졌어도, 가난하고 남루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주십니다. 이 십자가 사랑의 수고를 통해 오늘도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칭찬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의 종교입니다. 초대교회의 생명력있는 복음 증거가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활신앙과 종말론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본문 1장 9절~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린느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이단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모든 일이 다 끝나니 재산이고, 가족이고 뭐고 다 필요없이 바치고, 기도만해라! 신천지처럼 14만4천명만 구원해주니까 그 안에 들려면 기존교회 성도들을 끌어다가 채워라!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님 오실 때만 바라보면서 그냥 현실을 무시하고, 살기 보다는 늘 깨어서 정신 차리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8절 말씀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현실가운데서도 깨어 정신을 차리며 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현실 속에서도 철저히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예수님께서 구원해주심을 믿고 소망의 투구를 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권리를 누리려면, 늘 책임이 따르듯이, 주님을 향한 소망에는 인내가 늘 따라다닙니다. 인내가 없는 소망은 그냥 한순간의 꿈일 뿐입니다. 이 소망의 인내가 없이는 믿음을 져버리기가 쉽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오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라는 사람은 소망의 인내가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주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을 져버리고, 교회를 떠납니까?! 주님 오실 때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인내하지 못하고 실수하는 이들이 나옵니다. 에서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야곱에게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팔아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 전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손으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립니다. 그로 인해 사울왕의 나라가 길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래 참으십시요! 인내는 믿음 안에서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도 정말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 지를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의 무지와 믿음 없음 속에서도 참아주셨고,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도,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했을 때에도,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해서도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빵을 먹여주고, 병을 고쳐줄 때는 주님이라고 따르던 이들이, 십자가를 매고 죄인처럼 끌려가자 도망치고 나 몰라라 하였을 때도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참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낱낱이 다 보고계시면서도 오래 참아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증거를 하면서 얼마나 참았습니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잠 못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기를 또 얼마나 했습니까?”

이 모든 고난과 위험을 참고 인내했기에 복음 증거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동족 유대인에 위험 속에서 복음을 증거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혹시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고, 상처입고, 생활이 어려우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망의 인내를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릴지 모릅니다. 부모도 그렇고 자식들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 기억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관해서 나눴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났던 그 믿음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수고가 우리 교인들의 삶 속에서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우리의 중심에 있어서 늘 깨어 근신하며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1절~10절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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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도 끝남과 더불어 신대원의 1년이 지났다..이번에 들은 최고의 수업이라 생각되는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수업은참 지금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유익이 된다… 2학기과제로 살전1:1절~10절 주석을 올려본다.교역자 수련회가 갑자기 제출시기와 겹치는 바람에 좀 어설프고 급하게 해서 제출했다..좀 수정해야할 필요를 느끼지만 올려본다.블로그에 각주를 올리는 방법이 참 힘들당…ㅋ 그래서 각주는 생략하고참고한 책들만 올려보겠다^^기왕에 시작한거….데살로니가 전체를 주석해볼까ㅋㅋㅋㅋ

데살로니가 전서 1장1절~10절 주해.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1:1상)”

(Pau/loj kai. Silouano.j kai. Timo,qeoj th/| evkklhsi,a| Qessalonike,wn evn qew/| patri. kai. kuri,w| VIhsou/ Cristw/|( ca,rij u`mi/n kai. eivrh,nh)

고대세계에서는 모든 편지의 시작은 똑같이 시작하는데 바로 편지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 밝히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고 나서 인사말을 전하거나 하고 싶은 말을 썼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바울과 실루아노(사도행전에서는 실라라고 불리나 여기에 나오는 헬라어는 라틴어 형태인 실바누스이다.)와 디모데가 공동저자로써 인사를 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 사람의 이름으로 편지가 보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울의 서신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 데살로니가전서에 왜 바울혼자가 아닌 이 세명의 이름으로 서신이 보내지게 된것일까? 그러나 바울의 서신의 인사말에서 바울의 이름이 다른 사람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였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각 서신마다 강조하고 있는 바울의 사도의 호칭은 없어지고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자신과 구별하여 놓지 않음을 볼수 있는데, (참고: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1:1;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 고전1:1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 고후1:1)이는 먼저 사도성을 구분하며 변호하는 다른 서신과는 구분됨으로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아무런 문제 삼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추측은 실로아노와 디모데와 데살로니가교회의 개척 배경에 관한 것이다. 단지 이름들이 나오는 순서는 연령에 따른 것 같다. 그렇다면 왜 공동발신자로 서신을 보내었는지 그 이유와 각 발신자들이 누구인가를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개척할 때 대부분의 경우 그의 곁에는 동역자들이 있었다.

아마 이들의 이름이 데살로니가 전서의 공동발신자(공동저자)인 것은 일반적으로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이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며 이를 미루어 볼 때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운 이들의 수고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서신서 전체적으로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형을 쓰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운 것은 바울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실라(Sil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행 15:22, 27, 32, 40; 16:19, 25, 29; 17:4, 10, 14, 15; 18:5)은 바울서신 (살전 1:1’; 살후1:1; 고후1:19)과 베드로전서 5:12에서 ‘실루아노(Silouano.j)’라고 불리는 사람과 동일인물로 본다. 특별히 사도행전 15:22절에 보면 실라에 대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는 유다와 함께 사도와 온 교회가 택함을 받은 자(a;ndraj h`goume,nouj evn toi/j avdelfoi/j ; NIV: leaders among the brothers. ‘형제가운데 지도자들’)이었으며, 그의 직무로서 예루살렘의 공의회의 결정 즉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위한 회의의 내용문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전달할 인물중에 하나였다.(행15:23)

또한 그는 유다와 함께 선지자로서 교회를 권면하고 위로하는 직분을 가졌다.(행15:32) 종합해보면 실라는 사도행전의 저자의 표현대로 에루살렘교회의 대표자로서 편지를 전달하는 것뿐만아니라 (행15:30) 그내용을 ‘직접말로’ 해석해주는 것이었다.(행15:27)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의 위치(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동역자의 관계)로서 훗날 전도여행에 동행하게 된다.

실라의 사회적 위치는 어떠했는가? 바울은 사도행전16:37에서 자신이 실라와 함께 로마사람(Rwmai,ouj)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된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자였음을 알수있다. 종합해보면 김철홍교수의 논문 『바울의 동역자 실루아노』에서 찾아볼수 있듯이 “실라는 사도적 권위와 소명을 가지고 있던 바울의 동역자 였다. 그는 바울에게 초대교회의 예수전승을 전달해 준 사람중 한명이었으며, 바울과 함께 선교팀을 이루어 고린도와 에베소에 이르기 까지 그와 함께 선교팀을 이루어 고린도와 에베소서에 이르기 까지 그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전승을 전해주는 등 교회개척에 공헌을 했다. 또한 바울과 헤어진 뒤에도 벧전 5:12절에 실라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음으로 추측하여 마가와 더불어 벧전1:1절에 언급된 지명을 두루 다니며 교회를 세우며 선교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명의 공동 발신자로 디모데가 있다. 디모데는 바울서신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바울이 완전히 신뢰한 동역자로서 데살로니가(3:2,6), 고린도(고전4:17; 16:10), 빌립보(빌2:19)에서 독립적으로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디모데는 남부 갈라디아 성(아마도 루스드라) 출신이었고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에게서 출생한 아들이었으며, 바나바와 바울이 이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 기독교로 개종했다. 디모데는 바울과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동행했고(행16:1~10; 17:14,15), 후에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있었다.(행 18:5)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1:1하)

바울은 수신자를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라고 정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묘사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th/| evkklhsi,a| tou/ qeou/ 고전1:2),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자'(롬1:7),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자들'(엡1:1)등 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살후1:1에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 눈여겨 볼만하다

이것은 무엇인가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진 특징을 다른 교회들과 구분지어 놓는 역할을 함이 분명하다. 특별히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살전2:14),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살후1:4)”라고 말한 부분에서 사도바울은 여러 다른 교회를 데살로니가교회와 특별히 구분지어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준다. 하나님의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었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안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분명 안에(evn)라는 두 진술에서 서로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나님 ‘안에’있다는 것은 그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인 반면에 그것이 데살로니가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거하는 영역이 세상 안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또한 세상 안에서 산다.”(참고 빌1:1; 골1:2등)

교회라는 단어의 헬라어 에클레시아(evkklhsi,a)는 “교회, 모임, 총회”였으며, 당시 고대 헬라사회에서 이 단어는 거룩한 의미로써 사용되지 않은 듯하다. 이교에서 회심한 헬라인들 조차도 이 단어의 거룩함과 관련된 의미를 조금도 연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신속에 등장한 에클레시아(evkklhsi,a)는 신자들의 무리라는 의미로 재빨리 변화되었다. 특별히 바울은 ‘안에’라는 의미를 통하여 교회는 하나님아버지와 주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함으로써 분명한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어떤 역할로서 작용했을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도 아닌 ‘하나님안에 있는 교회’였다. 이것은 바울서신에서는 드문표현이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안에 있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안에서 자랑함(롬2:17; 5:11)이나 하나님안에 감추어짐(엡3:9; 골3:3)이란 용례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안에서”,”그리스도 예수안에서”,혹은 “주안에서”는 바울이 사용하는 특징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요15장의 예수께서 하신 ‘포도나무 가지 비유’를 연상케한다. 그것은 일종의 ‘연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있듯이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엡1장 과 고전12장 전체에서 살펴볼수 있는 바와 같이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몸이라는 유기체적인 관점으로 보고 있다.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도바울의 이런 표현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또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세상과 또는 유대공동체와 엄격하게 구분되는 표현이었다. 또한 박해와 환란의 시기를 통해서 불안해 하고 있는 교회에 그들이 하나님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은 바울의 심정이 깊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즉 세상이 주는 시련속에서 교회의 평화와 안정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아들로부터 모든 교회의 생명과 힘과 안정됨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희모두로 말미암아…..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1:2)

(Euvcaristou/men tw/| qew/| pa,ntote peri. pa,ntwn u`mw/n mnei,an poiou,menoi evpi. tw/n proseucw/n h`mw/n( avdialei,ptwj)

우리가……감사하고 (Euvcaristou/men)이 복수형의 세 명의 선교사들 이미 앞서 살펴본 대로 모두가 실제로 이서신의 공동저자였음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바울서신에서 인사말이 끝나고 나면 바울은 바로 감사기도(thanksgiving)에 대해 말한다(갈라디아서는 제외, 감사기도가 없음). 수신자 교회의 어떤 측면들 때문에 자신이 항상 하나님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할 때 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한다고 하고 있다. ‘항상’이라는 의미로 쓰인 avdialei,ptwj는 기도를 할 때, 끊임없이 쉬지 않고 그 주제에 대해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고, 기도하기로 정해진 시간에 그들에 대한 기도와 감사를 빼먹지 않고 포함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살전 2:13; 5:17).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1:3)

(mnhmoneu,ontej u`mw/n tou/ e;rgou th/j pi,stewj kai. tou/ ko,pou th/j avga,phj kai. th/j u`pomonh/j th/j evlpi,doj tou/ kuri,ou h`mw/n VIhsou/ Cristou/ e;mprosqen tou/ qeou/ kai. patro.j h`mw/n()

기억하다로 쓰인 므네모뉴온테스(mnhmoneu,ontej)는 “철저하게 기억하다”라는 의미이다(참고: 2:9; 살후2:5; 갈2:10; 엡2:11; 골4:18; 딤후2:8)게다가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기억(mnhmoneu,ontej)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삼중의 은혜, (곧”믿음, 사랑, 소망”- “pi,stewj avga,phj evlpi,doj”에 대해서는 유명한 고전 13:13과 함께 살전 5:8; 갈5:5,6; 롬 5:1~5; 골1:4,5를 참고하라.)에 관한 것으로 저자들은 이 은혜들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삶과 행위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Bornkamm은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본질이다.”라고 하였으며 Hunter와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용어가 바울 이전의 기독교 어휘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셨다는 확신에 기초하며 사랑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의 관계이며 소망은 그들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것(빌1:6)과 밀접하게 관련 된다”

이를 John Stott는 보다 짧게 요약하기를 “각각의 요소는 외향적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고 소망은 미래 특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강림을 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각각의 세 가지 기본요소들은 F.F.부르스의 표현대로 신자들의 삶과 행위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것들이었다. “믿음의 역사”(work of faith)는 “율법의 행위”(the work of the law)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이 뜻하는 바는 교인들이 개종 후에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이웃들로부터 자신들이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구분된 새로운 삶은 살면서 하는 모든 행동들을 다 종합한 것을 가리킨다.

사랑은 수고가운데서 나타난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로 이끈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단지 감정으로 끝나버린다. (갈5:6에서 등장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pi,stij diV avga,phj evnergoume,nh의 표현을 보라.) 특별히 수고 ko,pou 를 뜻하는 단어로써 해석한 ‘labor’는 ‘육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수고의 가장 알맞은 예를 어디서 찾아볼수 있을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이다. 이는 요15:13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큰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신 말씀을 통해서이다. 예수그리스도역시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수고를 하셨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부터 기억한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형제들을 위한 사랑이었을 것이다(그것이 구제하는 것이었든지 간에 ‘실제로 5:14 살후 3:6-12의 언급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랑의 나눔과 구제에 앞장선 교회임을 알수있다.) 그것이야 말로 주님의 지상명령인 ‘서로 사랑하라’를 통해 주님을 본받는 행동이 아닐까? 그리고 주안에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소망의 인내는 소망은 인내(u`pomonh/j 로서 ‘endurance’ 혹은 ‘steadfastness’로 해석)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필자는 인내의 의미가 단지 ‘참다’라기보다는 ‘steadfastness’의 의미인 ‘확고부동한’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환난과 역경 반대에 부딪혀도 단지 참는다 라는 의미보다는 ‘확고부동한’ 자세로 인내한다는 의미가 더 다가온다. 소망의 인내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동료 시민들로부터 핍박을 당함에도 불구하고(2:14), 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3:6), 장래의 소망을 갖고 ‘확고부동한 자세’로 핍박을 견디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소망은 곧 종말의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다(1:10; 살후 1:3-10) 우리 안에 소망이 없다면 인내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며 기다리게 한다. 이 기다림은 이 세상에서 신자를 활발하게 활동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1:4)

(eivdo,tej( avdelfoi. hvgaphme,noi u`po. Îtou/Ð qeou/( th.n evklogh.n u`mw/n()

살전 1: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택하심을 한데 묶어 놓는다. 살후 2:13절에서는 약간다른 형태로 반복되었는데 즉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엡1:4절에도 “그리스도안에서 택하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신33:12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 시락서45:1 “모세 곧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입은자를 참조하라.) 그렇다면 왜 바울은 사랑하심과 선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가? 그것은 데살로니가교회의 어떤 상황적인 배경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곧 이스라엘백성을 택하셔서(신 4:37; 왕상3:8; 사41:8,9 43:10; 44:1,2; 45:4; 49:7)이들을 통해 나머지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신약에서 선택된 백성들은 민족적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안에서”-곧 하나님의 탁월하신 선택 자이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함으로써- 선택된다. 이스라엘백서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11:5)가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과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함이나 노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닥치는 여러 환란과 박해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고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김철홍교수는 이것을 선민용어(election language)라고 하였으며, 주석하기를 ” Meeks는 이 표현들은 language of belonging이라고 부른다(Meeks, First Urban Christians, 85.) 이 표현들은 자신들이 누구이며(group identity), 자신들이 우월한 존재임(superiority)을 나타내어 그 그룹의 내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개인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self-esteem을 높여준다.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 밖의 사람들과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받은 그룹 vs. 받지 못한 그룹), 이것은 강력한 공동체감(sense of community)을 형성하게 했다.”하며 이것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든든하게 잘 버티며 성장한 공동체 가된 이유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희들을 택함을 아노라(eivdo,tej()라고 함으로써 교회가 복음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비밀이 교회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음을 알게한다.

이는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1:5) (o[ti to. euvagge,lion h`mw/n ouvk evgenh,qh eivj u`ma/j evn lo,gw| mo,non avlla. kai. evn duna,mei kai. evn pneu,mati a`gi,w| kai. ÎevnÐ plhrofori,a| pollh/|( kaqw.j oi;date oi-oi evgenh,qhmen ÎevnÐ u`mi/n diV u`ma/jÅ)

우리의 복음은 (euvagge,lion h`mw/n) 우리가 전한 복음을 말한다.(참조 살후2:14; 고후4:3’ 또한 ‘나의 복음’,’내가전한 복음’ 롬2:16; 16:25; 딤후2:8) 바울이 전한 복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복음'(2:2,8,9)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살후 1:8; 갈1:7)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복음의 창시자이시며 그리스도는 복음의 실체시고 사도들은 복음의 일차적 대행자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가 잘 견딘 것은 바울이 전한(세 명의 발신자들과 함께 전한)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후반부에 다루겠지만, 몇몇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은 데살로니가서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굉장히 자리를 잘 잡고 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가 바울의 가장초기 서신이라는 주장을 당연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우리의 복음’이 신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의 완전한 형태가 아니 란 말인가? 이 부분은 살전 9절~10을 주해하면서 다루고자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duna,mei) 여기서 ‘말로만’은 성령의 감동시키는 능력이 수반되지 않은 연설을 의미한다. 분명 바울은 그들에게 말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2:4,5에서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아무리 훌륭한 선포이며 설교라 할지라도 말의 지혜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십자가의 능력”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것은 듣는 자들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토대를 두지 않고 안전하게 하나님의 능력에 토대를 두도록 해주었다.

성령과(evn pneu,mati a`gi,w|) 성령이라는 단어를 바울이 능력과 큰 확신의 가운데에 둔 것은 성령은 그의 사역 중에 복음을 듣는 자들의 마음속에 능력과 큰 확신으로 사역하시기 때문이다. 즉 능력(duna,mei)은 성령의 능력을 말하며, 큰 확신(plhrofori,a|)는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주시는 내적인 깊은 확신이다.

큰 확신으로 (ÎevnÐ plhrofori,a| pollh)이는 “충만함” 충분한 확신, 충분한 보증을 뜻한다. 이것은 복음 지리에 대한 데살로니가 인들의 깊은내적 확신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성령의 사역의 증표를 가리킨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비록 말로 전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한다. 복음은 능력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말로전하지만 듣는 이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위대하시다. 이것이 복음전도의 능력이다.

너희는 많은 환란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 되었으니(1:6)

(Kai. u`mei/j mimhtai. h`mw/n evgenh,qhte kai. tou/ kuri,ou( dexa,menoi to.n lo,gon evn qli,yei pollh/| meta. cara/j pneu,matoj a`gi,ou()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란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롬 5:3,5에서 바울은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음 바 됨이니”라고 한다. 기쁨은 또한 갈5:22에서 성령의 열매이다. 많은 환란 속에서 기뻐함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란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정당한 몫이라고 당연시했다.(요16:33 예수님의 메시지) 또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누가는 바울이 이 교훈을 루스드라에서도 했다고 증언한다.(행14:22) 살전 3:4의 proele,gomen은 그 시제가 Imperfect로서 이것은 바울이 이 경고를 계속 반복해서 주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것을 일종의 운명으로 간주하며 이 박해를 받도록 운명 지우신 것은 하나님이다 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는 의미의 지적인 동의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이 변하여 사도들처럼 그리고 주님과 같이 환란을 당하나 기꺼이 참아내고 기쁨으로 사는 삶을 사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더 마음으로 다가오는 표현인것 같다. 이것은 십자가의 길을 연상케한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 자 되었다는 것은 바로 주와 함께 그들처럼 똑같이 고난당함을 의미한다. 그들의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1:7)

(ste gene,sqai u`ma/j tu,pon pa/sin toi/j pisteu,ousin evn th/| Makedoni,a| kai. evn th/| VAcai

데살로니가 전서 1장 1-10절

본문(本文) : 데살로니가 전서 1장 1-10절

주제(主題) : 너희 믿음의 역사(役事)와 소문

요해(要解) : 데살로니가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약 24년경에 기록하였으며,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처해있는 신앙과 생활의 어려움들에 대하여 바른 신학적 주제와 신앙관을 제시하여 해결해 나가도록 편지하고 있다.

데살로니가는 살로니가만(Gulf of Salonica)의 위에 위치한 온천지대로 필립보성을 건설한 마케도니아 왕 필립 2세의 양자 카산더(Cassander)에 의해 BC. 315년에 건설되었으며 카산더 부인(알렉산더대왕 이복누이)의 이름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지배하게 되면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바울 당시에는 행정장관들에 의해 자치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대부분 그리스인과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행17:6).

마케도니아의 첫 성(城)인 필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며 가르쳤으며 복음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섬기는 역사가 일어났다. ‘야손’은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내어 놓았으며 데살로니가 교회의 설립에는 먼저 세워진 교회들 특히 빌립보 교회의 도움이 컸다(행17:1-5).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견제와 핍박을 받고 있었지만, 이러한 핍박을 잘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신학과 신앙이 정립되지 않은 그들에게 잘못된 종말관이 침투하여 신앙을 흔들고 때문에 생활이 극단적 종말론으로 치우친 사람들이 생겨났으며(4:11),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문제로 혼란을 빚었으며(4:13-18), 재림이 더디 이루어지자 돌아서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디모데’와 ‘실라’의 보고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맹렬한 핍박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대체적으로 잘하고 있다(3:6-10). ②그러나 교회 내에 바울의 사도권과 열심과 성실을 부정하고 훼손하며 의심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2:1-12, 17-20). ③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4:13-5:11).

이에 대하여 바울은 ❶데살로니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음을 하나님과 및 교인들에게 감사하고(1:2-10). ❷바울 자신과 및 동역자들에 대하여 바르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경고와 함께 본을 세우고자 하였으며(2:1-3;13) ❸잘못된 종말관을 시정하고 바른 신학과 신앙에 기초한 신앙생활을 촉구하여 교회를 굳게 세우고자 하였다(4:1-5:24).

본 서신에는 신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그리고 종말론의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되신 분이시다(1:9 神論).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3:11 神論).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1:1 基督論). 환난 중에도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다(1:6 聖靈論).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성도들이 구원 받음이 잘 나타나 있다(5:10 救援論). 그리고 본서의 주제인 종말론(終末論)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재림(다시 오심)을 말씀하고 있다.

재림 하실 때 Ⓐ 먼저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4;1). Ⓑ 살 아있는 성도들도 공중으로 올라가서 주를 영접하여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살게 된다 (4:17). Ⓒ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 그러나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갑자기 임한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5:5-3). Ⓓ 주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는 불신자는 멸망을 당하지만 (5:3),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5:10).

本文 註解

데살로니가 교회가 짧은 역사에 비해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켜간다는 기쁜 소식을 사도 바울은 전해 들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인들 사이에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전파됨으로 신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접하게 된다. 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더욱 진실 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함과 동시에 재림과 종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줌으로서 그들이 보다 건전한 신앙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본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신실한 신앙이란 결코 연륜에만 좌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와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과 성실한 삶에 있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절 실루아노(Siluanus)는 실라의 로마식이름이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으로(행16:20,37)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최초의 이방 교회인 안디옥으로 파송된 신실한 주의 사역자였다(행15:22,32).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의 2차전도 여행 때 동반자로 참여했으며(행15:40 고후1:19), 후일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으며(벧전5:12), 주께서 맡기신 일에 신실했던 사람이었다.

2-4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受苦)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所望)의 인내(忍耐)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택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믿음의 역사’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받은 새 생명과 능력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며 임시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수고’란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 주며, 믿음과 마찬가지로 속사람에서 나오는 사랑이 실천적 행위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긍휼과 자비의 사랑으로 병든 자와 굶주린 자들을 돕는 헌신을 다했다. Erich Fromm은 책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에서 1.관심 2.책임을 느끼는 것 3.존중하는 것. 4.이해하는 것 5.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망의 인내’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다가오는 어떤 환난이라도 참고 견딜 때 비로소 구원에 대한 산 소망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벧전1:3-9). 공부는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에 빗대어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궁뎅이로 간다’는 말이 있다 즉 기도하며 인내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택하심(ἐκλογη)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절대적인 선택이란 의미를 지닌 말로서(행9:15 롬9:11 벧후1:10)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준다(엡2:8,9).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성도들은 택하심을 입은 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깨달아(롬3:24; 5:15 딛2:11)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한 태도록 섬기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절 바울은 자신들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들이 창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여받은 소식이며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복음 전함에 있어서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έν λογω μονον)고 말한 뜻은 성령의 감화 감동의 능력을 동반하지 않는 설교를 의미한다. 이런 설교는 아무리 웅변적이고 수사학적이라 할지라도 그자체가 지적인 의사 전달에 그치게 된다. 바울은 아덴에서 이런 경험을 한 후 인간의 지식이 아닌 전적인 성령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다. 성령의 능력과 믿음의 확신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속사람과 겉 사람까지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한다.

6-8절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도(道)를 받아들이고 주님과 및 사도들을 본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고 있다. 그들이 당한 환난의 하나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성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추종하는 것을 시기하여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던 사건(행17:1-10)과 이를 계기로 유대인들이 계속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박해했던 일을 가리킨다(살전2:14).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 성령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에 미치는 결과이다.

9-10절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한 자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는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따르지 않고) 새로 지으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서 성령을 좇아 살겠다는 결단이다(엡4:22-24). 그런데 우상 숭배와 및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아왔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습관과 삶)이 그리 쉽게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와 성령으로 된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입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거듭 당부하고 있다(살전5:17). 로마서 12장 19절은 원수 갚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시면 잠시 기쁠지 모르나 우리 마음에서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10절의 “장래 노하심”이란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말한다(습1:14 요3:36 롬9:22 엡5:6 골3:6 계11:18). 여기에 언급된 진노는 범죄한 인간들에 대한 보응으로서(렘14:10 암3:2 롬1:18) 결코 어긋남이 없는 필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노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죄와 악으로부터 떠나 살아야할 것이며 불가피하게 범죄 했을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회개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小 考

ㅇ 믿음의 역사 – 믿음에는 반드시 역사(役事)가 일어난다. 믿음이란 거짓이나 신비적인 현상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을 믿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신비적인 것만을 좇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形影不离(형상형 그림자영 아닐불 떠날리) 형상과 그림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우리말 속담으로 해석하면 ‘바늘 가는데 실 간다’는 말이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고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즉 거짓된 믿음이라고 야고보서 2장 17절은 말씀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뒤이어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미지의 땅으로 갔으며,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에 행함으로 순종했으며 그 순종의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로 인하여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결국에는 믿음의 조상이라 칭함을 받게 된 것이다.

ㅇ 사랑의 수고- 출처는 생각나지 않지만 ‘운명은 친척을 만들어주지만, 선택은 동반자와 친구를 만들어준다’ 말이 있다. 사랑의 수고란 속사람에게서 나오는 자발적인 수고를 말한다. Thomas à Kempis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에서 ‘수고가 없는 사랑에는 열매가 없다’ ‘고통이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사랑의 수고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와 갈보리산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랑하는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셨다.

ㅇ 소망의 인내- 소망은 반드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요즘에는 과학이 발달하여 사시사철 뿌리고 거두고 하지만, 보편적 농부는 가을에 씨뿌리고 봄에 거두고,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둔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 또한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졌고 또 반드시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언약하셨으니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에 필라델피아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ㅇ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면서 절실하게 깨닫는 것은 설교를 준비 할 때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되지 않으며, 준비한 원고를 강설할 때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소리 나는 구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범사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君子懷德(군자회덕)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한다’는 말인데, 군자는 법을 생각하고 소인은 혜택만을 생각한다는 논어 이인(里仁)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육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 의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구하라는 말씀이다. 당연히 개인의 영혼 몸과 삶을 위해서도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변화되는 것도, 사랑의 수고도, 믿음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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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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