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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9 (토) [하루 한 장]“장막 집이 무너지면” (고후5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고린도후서 5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과의
숨 가쁜 싸움 속에서 지치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무너지고 말
이 땅의 장막집인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얻기를 사모하고
부활한 후에 믿음으로 주 안에
교제하며 영원한 삶을 꿈꾸는
영생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이 땅의 작은 승리나
나의 별 것 아닌 이익에
눈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이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보증으로 주시는 성령님을
내 맘의 주인으로 모셔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승리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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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고린도후서 5장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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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12/10/2022

View: 4873

새 사람이 되는 길.. (고린도후서 5장 17절 ~ 21절) > 은혜로운 말씀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기 때문에 새 것이 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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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gyega.com

Date Published: 12/15/2021

View: 3532

고린도후서 5:17,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소고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구원받은 존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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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5/24/2022

View: 1628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 복음뉴스

새로운 한 해를 기대합니까? (고린도후서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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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8/29/2022

View: 5436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ion)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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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8/3/2022

View: 9766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 (고후 5:17) – 기멀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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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9/14/2021

View: 4182

우리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고후 5:14~17) – 유평교회

제목: 우리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4~17절 설교자: 최종혁. 한 가지 질문을 먼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4/3/2022

View: 9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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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고린도후서5장_장막집이 무너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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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후 5 17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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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GtDQuQcwKx0

새 사람이 되는 길.. (고린도후서 5장 17절 ~ 21절) > 은혜로운 말씀

서 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짐승들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유일하게 변하는 피조물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 론

1.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바깥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3절은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구원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된 새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 밖에 살게 된다면 변함이 없는 짐승들과 같습니다. 쾌락과 정욕을 쫓아 살게 되며 죄를 짓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빛 되신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나를 새롭게 비치게 되고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삶 보다 더 빛이 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과거의 삶을 정리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기 때문에 새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전 것을 지나지 못한다면, 새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정리해야 할 부분과 변화 되어야 할 부분이 정리 되지 않는다면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우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과감하게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나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화목하며 살아야 새 사람이 됩니다.

미련한 사람의 대표적인 현상은 싸움입니다.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잠언 18장 6절은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싸움 자체가 목적이 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화목을 이루셨듯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는 길은 십자가 희생과 같은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고후 5:19).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우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고후 5:20).

결 론

새 사람이 되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 사람이 됩니다. 둘째, 과거의 삶을 정리해야 새 사람이 됩니다. 셋째, 화목하며 살아야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함으로,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이 되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17,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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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죄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는 영원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 구원받은 존재,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멸망의 모습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하였다고 바울은 말하지만, 그 뜻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이 듭니다. 과연 바울이 고린도후서 5:17의 ‘새로운 피조물’을 언급한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자연도 신비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의 신비함에 비할 수는 없다

목차

1. ‘새로운 피조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피조물’이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인간을 나타내는 좁은 의미의 피조물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동물들을 보살폈던 피조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부끄러움과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땅의 모든 것을 돌보는 특별한 피조물로서 인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 고후 5:17의 앞뒤 문맥

고린도후서 5장의 1절부터 10절까지에서 바울은 ‘이 땅에 있는 장막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간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하여 좁혀졌음을 설명합니다.

죄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살아가던 과거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절부터 21절까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셨고, 새로운 피조물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거주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까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2)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과거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새롭다는 말 자체가 이전의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형상(쩰렘, צלם)으로 혹은 그림자로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인간이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히 다른 존재(아나카이노시스, ἀνακαίνωσις)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곳에 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가까워진 천국(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거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피조물이 구원 받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과 예수 그리스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첫 번째 아담을 창조하셨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적인 것이 아닌 ‘성령’과 ‘능력’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엔 크리스토, ἐν Χριστῷ)에 있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녹아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강물이 바닷물로 흘러 들어가면, 바닷물의 속성인 짠맛을 가지게 되고 강물의 모습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예수 안에 있을 때, 더 이상 인간의 속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녹아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2) 또한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안으로 녹아 들어갔기에,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은 단순히 육체 속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은, 죄나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놓임을 받아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힌 생명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곧 ‘성령 안’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로마서 9:1-2, 개역개정 성경)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 εν χριστω ) 참말을 하며, ‘성령 안’에서 양심이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은 곧 ‘성령 안'(엔 프뉴마티, εν πνευματι )이며,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곧 성령과의 연합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곧 성령께서 증인이 되시는 사역임을 바울은 위의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이끄시는 복된 삶, 새로운 피조물의 삶

3. 새로운 피조물의 삶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곧 성령과의 연합의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녹아 들어가서 성령과 연합하게 된 성도의 삶은 어떤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1) 날마다 죽는 삶

사도 바울은 고전 15:3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개역개정 성경)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말은 세상과 자기 자랑에서 날마다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나의 모습은 모두 배설물처럼 여기고 죽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2) 영성의 삶

날마다 죽음으로서 얻는 결과가 무엇일까요? 나의 과거 모습들이 죽음으로써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녹아 들어가게 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더 이상 나의 욕심이나 교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전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영성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4. 나가면서

사도 바울은, 고후 5:17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과거의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하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영원한 하늘의 집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 화해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리는 과거의 욕망과 죄의 본성에서 날마다 죽으며 매일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 또한 성령 안에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성화의 삶입니다.

5. 더 읽으면 유용한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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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새로운 한 해를 기대합니까?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입니다. 이 말은 “나중에”를 의미하는 ‘메타’와 “지각하다, 분별하다, 혹은 의식하다”를 의미하는 ‘노에오’로 구성된 말입니다. 따라서 ‘메타노에오’는 나중에 잘못을 알아 고치는 행동 양식 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이미 깊이 깨달아 알아버린 마음의 상태에 기인하는 것에 따른 생각이나 태도 혹은 방향, 목적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되며는 예전 보다는 더 나은 삶과 미래의 희망을 위하여 새롭게 하고자 하는 많은 계획들과 구상들을 세웁니다. 주변 분위기를 바꾸어 보는 것도, 의상을 바꾸는 것도, 이사를 하는 것도, 계획을 새롭게 세우는 것도….. 특히 올해는 이 땅 모든 사람들이 함께 꾸는 소원이 있습니다. 온 세상을 떨게하는 코로나가 종식되고 평범한 일상을 찾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원합니다.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 안정과 평안을 바라는 새로운 미래를 기대해 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야 한다고…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회개하라~”고…그래야 만이 하늘로 부터 내리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덧입어 이 땅의 공포와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환난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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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은 내 자신의 주변 환경이나 이웃이 아닙니다. 내 생각, 내 태도, 내 삶의 목적이 바꾸어져야 합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생각과 태도와 삶의 가치관과 목적이 바뀌어지길 원합니다. 힘으로 능으로 안되기에 겸손히 주께 나아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구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시며,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것을 채우실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며, 우리 모두가 은혜의 주님을 경험하는 올 한 해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 (고후 5:17)

설교제목 :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

성경말씀 : 고후 5:17

우리는 한 평생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것은 정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필수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사회를 이루어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교회 역시 일반사회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동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려면 좋은 인간관계가 필수적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다윗은 요나단을 친구로 만났기에 사울 왕의 손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데는 신실한 친구 빌립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로 유명한 관중과 포숙의 우정에 관해서 아실 것입니다. 관중은 포숙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기도 하고 나중에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관중은 말하기를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한 평생 갈릴리 어부로 살다가 갔을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동족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세리 노릇을 하면서 살다가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자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4절에 보면,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 말씀하기를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고 하셨습니다. 주의 제자들의 신분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결과가 이와 같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보세요. 그는 일곱 귀신 들려서 인격이 파탄 나고 가족과 이웃에게 버림 받은 비참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로잡은 일곱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는 생명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여성은 드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거룩할 성(聖) 자를 붙여서 성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에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죄인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죄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범죄로 인해 아담 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으므로 그의 자손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환경이 나빠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는 환경의 영향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사회의 불합리한 환경 역시 타락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다 준 불행은 한둘이 아니지만 핵심적인 것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는 죄의 본질을 이해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말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의 금하신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지만, 간교한 뱀이 다가와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고 하였을 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또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헛된 욕망을 품었습니다.

지음 받은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생각은 이만 저만한 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너희도 신이 될 수 있다”는 헛된 꿈을 넣어주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평생 이마에 땀을 흘려 수고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미움과 반목과 살인과 전쟁으로 얼룩진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장 18절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 57장 21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불화하여 그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둘째로, 죄로 인해 인간은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도 죽음의 세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22절에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묘지의 수는 약 2천만 기가 되며 이는 전국토의 약 1%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는 서울과 인천을 합친 면적과 같고, 또 매년 20만기씩 새로운 무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이 같은 현실은 사망의 세력이 그만큼 막강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사람치고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인다는 말은 가장 무서운 위협입니다.

성경은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들을 일컬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히 2:15)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비참한 것은 육신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악인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죄로 인해 인간은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꾀어 범죄케 한 뱀은 곧 마귀를 상징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0장 1절로 2절에 보면 “1)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마귀의 말을 들은 것은 곧 마귀의 지배 아래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2:31).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 되어 타락한 인생들을 종으로 부립니다. 마귀에게는 자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귀는 인간들의 생명을 노략질하고 파멸시키기 위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 믿기를 거부할까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전력을 다해서 행하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영과 육을 끝까지 파멸시키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죄의 결과는 이처럼 끔찍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해결하려면 먼저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한 인간이 무슨 수로 자기의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마귀의 종된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얻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통해서 또는 수양을 통해서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써 우리를 위한 속죄를 완성하셨기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신 로마서 8장 1절로 2절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답게 언제나 승리를 구가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일어난

두 번째 변화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의 영적 실상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절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이는 죄인은 영적으로 볼 때 죽은 상태에 처해 있다는 뜻입니다. 육신은 살아서 활동하고 있지만, 영은 죽은 상태입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의 역할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두뇌가 명석해서 석박사가 된 사람이라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의 관심은 단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이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남은 곧 영적 신생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고, 요한일서 5장 1절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출생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지 무슨 느낌을 통해서 알 수는 없습니다.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고 오직 부모의 뜻에 의한 것이듯이, 영적 출생인 거듭남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치상으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먼저이고 믿는 것이 그 다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것이 먼저냐,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먼저냐 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점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데 장애가 되지 않으므로 어느 편이 옳은지를 놓고 지나치게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바로는 성경 말씀과 같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믿는 것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명목상으로만 법적으로만 자기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로 16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종의 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바’란 말은 우리말의 ‘아빠’라는 호칭과 같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와 계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자녀들만이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7절에 보니 하나님의 후사라고 했습니다. 후사란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동생들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이 보다 더 확실하게 표현할 수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천사들보다 더 고귀한 신분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6장 3절에는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 때 성도들은 주님과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계시록 22장 5절에 보니 “…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은 말할 수 없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 시련을 당하고 핍박을 받더라도 낙심하거나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이 있고 믿는 배경이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시험이 다가올지라도 담대히 외칠 수 있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라고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위대한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란 곧 성전의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차례 그릇에 제물의 피를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지성소는 엄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제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늘 자각해서 언제 어디서나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일어난

세 번째 변화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기 전과는 귀하게 여기는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팔일만에 할례 받은 것을 내세웠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내세웠습니다. 이만한 조건이면 유대 사회 어딜 가더라도 대접 받고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가치관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자랑하던 것들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까 과거의 것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 즐거움을 위해서 살았으나 이제는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세상 즐거움은 싱거워서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자족하면서 삽니다. 이전에는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일에 바빴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데 열심 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에 대하여 성경적인 기준을 갖고 삽니다.

그 다음, 사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목숨에 연연해서 몸을 아끼고 불의와 타협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이와 같은 사생관을 갖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영생과 부활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데 힘씁니다. 그것은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이해타산에 의해서 행동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에 마음 쓸 것 없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성도들은 천국의 시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일꾼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다니엘서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추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주님 앞에 설 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써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땅바닥에서 하늘까지 상승했습니다. 비천한 땅에서 육의 것을 바라고 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죄인이 의인 되었고,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육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님 각자에게 주어진 영적인 변화와 새로운 신분을 늘 자각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고후 5:14~17)

제목: 우리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4~17절

설교자: 최종혁

한 가지 질문을 먼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살면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아침에 일어나게 하고, 직장에 가게 하고, 학교에 가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교회에 나오게 하는가? 우리는 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가? 왜 같은 시간에 주일에 봉사하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하기도 하고, 하지 않게 하기도 하는가? 그렇게 나를 이끌어가고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동기’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사람마다 다른 동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인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교회에 좋아하는 이성이 있어서, 설교나 다른 성도들이 위로가 돼서, 교회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부모님이 열심히 나가시니까,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뻐서 등의 동기가 있습니다.

꼭 단 하나의 동기만으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있는 가장 근본이 되는 동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복 받는 것이 교회에 나가는 근본 동기라면 집에 지속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되면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좋아하는 이성이 동기라면 그 이성이 다른 곳으로 가면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 똑같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그 동기에 따라 미래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다른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기라는 것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움직이고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쟁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동기가 경쟁심이라면 그가 어떤 삶을 살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명성이나 인기를 동기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남겨지는 것,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을 마음의 동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우리 삶의 근본 동기로 삼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7)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에 쓴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다른 서신들도 썼지만, 성경에 포함된 것은 고린도전서와 후서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면서 교리적으로 가르치는데 초점을 주어서 논리적이고 정돈된 서신이라면, 고린도 후서는 개인적인 서신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변호하는데 많은 지면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성도 개인을 무너뜨리는데 핵심 타깃으로 삼는 것이 개인의 마음이라면,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핵심 타깃은 교회의 가르침과 인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서신서들을 보면 이런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경고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들에 대한 공격을 보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복음과 구원에 대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종말(세상의 끝)에 대한 거짓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성경의 진리에 대한 공격을 한 번에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 진리를 가르치는 인도자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성도들이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들이 하는 말에 대한 신뢰는 당연히 같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인도자들의 자격에 대해서 성경은 잘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든 밖에서든 영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좋은 평판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변호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싫고 거슬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교회를 지키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런 어려움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귀한 일꾼의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의 동기를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맥도날드는 <신자주석>에서, ‘본서를 통하여 바울은 우리를 자신의 영혼 깊숙한 비밀스러운 곳까지 안내하는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바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동기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는 부분입니다.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아마 바울일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1. 사랑의 방법(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4절). ‘강권한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도록 억지로 권한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적으로는 그런 ‘억지’가 꼭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강한 힘입니다. 같은 단어가 사도행전에서 ‘붙잡혔다’로 번역되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또는 ‘휘어잡다. 지배하고 있다. 사로잡고 있다.’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한 영어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다른 선택도 할 수 없게 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즉,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바울의 삶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가 살았던 삶은 그저 그냥 그렇게 살 수 있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묘사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했다고 말하고(1:5) 환난을 당했다고 말하며(1:6)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하고(1:8)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1:9).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습니다. 박해를 받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았습니다(4:8-10).

우리는 그냥 “배고파 죽겠어”, “졸려 죽겠어”와 같은 표현을 쓰는데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의 삶은 사망이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삶이었습니다(4:11).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았고 더 그렇게 살고 싶어 했고,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 바울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살았을까요?(4:18; 5:7) 왜 바울은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그렇게 살았을까요?(5:13)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 이유 혹은 동기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주의 두려우심”(5:11)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5:14)입니다. 주의 두려우심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 둘이 바울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두려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삶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움직이지 않고 다른 무엇이 동기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 될 수도 있고, 그저 하나의 동호회 같은 취미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나의 명성을 얻기 위한 도구로 교회에 나와 성도들과 지낼 수 있습니다. 결국 나를 위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말합니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그는 그의 적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이 나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정신이 온전하다고 해도 그 역시 자신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그런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정신이 나갔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고 온전할 때는 성도들을 위해 그렇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태이든지, 자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를 공격하던 자들이 그렇게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그는 감옥에 있었는데, 그를 시기한 어떤 사람들은 그 기회를 틈타서 복음 전도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바울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효과가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저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대적들이 했던 것은 오히려 바울에게 또 다른 기쁨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도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불의를 행하고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았다고 모함했습니다(고후 7:2). 바울이 하는 일의 동기, 그 마음에는 ‘자기 자신’이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나한테 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의 논리를 가진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그렇게 공격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왜 저렇게 죽을 고생을 자처하겠는가? 다 자기 잘 되려고 하는 것일 거다. 그러니까 그 사람 말 들을 필요 없다. 그렇게 사도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이끌었던 것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이끌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랑의 방법과 목적, 그리고 사랑의 결과에 대해 말합니다. 그 사랑이 자신을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최종 결론은(“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궁극적인 방법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대신하여”라는 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가장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바로 “대신한 죽음”입니다. “대신했다”는 말은 우리가 죽어야 했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 지위나 나이가 고려되어 돈을 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가서 돈을 냅니다. 나의 숙제를 대신해주거나 해야 할 일을 해주면 그것으로부터 오는 유익을 우리가 누립니다. 대신이라는 의미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죽어야 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죄로 인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고 영원히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것이 죄인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대신하셨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요한 훨씬 전에 이사야가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우리에게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담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을 지켜보았던 베드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대가로 사망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사람이 죄의 대가로서 사망을 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실제 사망에서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실제의 죽음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분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다른 희생은 불필요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고도 남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많아도 유한하지만 그리스도는 한 분이셔도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속의 은혜를 직접 맛보고 누리는 것은 그 예수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두는 사람에게 제한됩니다.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억울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랑은 희생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포기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창조의 하나님으로서 굳이 이런 희생을 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구원할 자들의 어떠함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능력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구원 받고 나서 얼마나 잘 살 수 있는 사람인지도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조건을 따지셨다면 우리 중에 선택을 받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보다 뛰어난 사람은 세상에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쪽에서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쪽에서 찾아야 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은 조건에 없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입니다. 먼저 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베풀어 준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사랑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도와달라고 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던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런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며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서 누구도 무엇도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1~39).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강력한 힘,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영원한 곳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때로 바울은 자신이 얻을 상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장 궁극적으로 그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성적으로 수고에 대한 보상이 우리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뛰어 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을 우리가 받았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랑을 하셨을까요? 역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에 올바르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이끕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우리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까요?

2. 사랑의 목적(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15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목적을 죽음 이후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지옥에 가지 않는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에서 바울은 그 목적을 지금의 삶에서 찾습니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의 사는 목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과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은 모두가 하는 일입니다. 누가 말해주거나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삽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결국 내가 우선이고 때로는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내가 피해를 입거나 권리에 침해를 당하면 분노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복잡한 세상의 제도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만 동시에 함께 살기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궁극적인 이유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가 앉은 결과인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데, 죄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자리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그리스도의 사랑이 조건이 없다고 하면서 왜 이런 목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요? 결국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뭔가 우리를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죄인인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이 원리를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싫어하는 훈육을 하고 싫어하는 채소를 먹게 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때로 우리는 완벽하지 못해서 잘못 알고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우리 최고의 만족, 최고의 기쁨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은 분명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데서 우리의 생각이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의 목적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위해 죽으셨고 우리가 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3. 사랑의 결과(16~17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16절) 두 번 동일하게 반복되는 “이제부터는”이라는 말입니다. 과거와 무엇이 달라져야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이제’입니까? 지금입니다. 구원받고 난 후 매 순간이 이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삶이 나의 삶이 된 순간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 없이 함을 받은 그 순간이 ‘이제’입니다. 내가 원수에서 자녀가 된 그 순간부터 매 순간이 ‘이제’입니다. 과거와 지금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그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육신을 따라 알았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기준을 가지고 가치를 발견하고 사람을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4-6). 바울은 이런 것들을 신뢰하고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랍비가 가르쳐준 율법을 잘 지키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에 기초한 전통을 칼같이 지키는 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직 참된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은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안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고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무엇이 그 사람에게 있으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배척합니다. 나를 좋게 봐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싫어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렇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우합니다. 나의 이익에 내가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육신으로 알았으나” 바울에게 있어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하며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전통을 무너뜨리는 이단 중의 이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견고히 지켜오던 율법을 무너뜨리는 자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알았을 때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삽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 결과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7절)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전의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 사랑하던 것,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은 지나갔습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내 삶의 방향을 이끌던 모든 동기들은 지나갔습니다. 그것들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자리에서 대신 죽으신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자리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도전

무엇이 당신을 움직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삶을 이곳으로 저곳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고 그 사랑이 우리를 우리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합니다. 그 사랑이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가치, 기준, 동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나의 선택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나보다도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이 다투고 갈등이 생길까요? 왜 교회를 사랑해서 하는 일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어려움을 줄까요? 왜 성도가 미울까요? 왜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까요? 왜 다른 사람에게 실망할까요? 왜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 마음이 불편할까요?

다른 사람에게서 답을 찾지 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들은 당연한 일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야 맞습니다. 말처럼 쉽고 단순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의 의미가 나에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옛 방식은 과감히 버리고, 내가 인생에 행하는 모든 일을 네가 포용하기를, 그리고 오직 내 안에서만 안전함으르 누리기를 원한다.

삶 주변에 경계를 쳐두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찾으면서 일상을 우상으로 만들기는 쉽단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매일매일의 24시간은 일련의 독특한 환경으로 이루어지지. 어제의 틀에 오늘을 끼워 맞추려고 애쓰지 마라. 대신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함으로 귀한 하루인 오늘,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모든 일들을 발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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