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 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성경이야기]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예수님 이야기 시리즈 #2 | 성경 애니메이션 | 나는야 주의 어린이 | 신앙 교육 | 150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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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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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 목회자료 – 기멀전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의 저자인 세리 마태를 부르신 기사인데,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을 불러 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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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4/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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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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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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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정필도목사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20130901 본문 / 마태복음 9:9~13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땅에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들이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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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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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2012년 봄학기 복음서 제 5강. ▣ 말씀 / 마가복음 2:1-22 ▣ 요절 / 마가복음 2:2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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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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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주일예배 20160828) – Daum 블로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주일예배 20160828) …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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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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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설교원고 – 그리스도의교회선교회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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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church.kr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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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눅 5:27-32) – 유평교회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눅 5:27-32) …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는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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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칼럼]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김천우 목사님이 오랜 동안 노숙자 사역을 해 오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병든 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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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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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마가복음 2:13-17 – 네이버 블로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마가복음 2:13-17(279장) 2019. 2. 17, 오전. 본문은 2가지 다른 내용 곧 레위의 소명 이야기(13-14절)와 공동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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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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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죄인 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Author: The Soon Studio [삼순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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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yCk91X_UMI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문제인 죄 문제, 곧 죄를 사해 주는 권능이 자신에게 있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고, 이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침상에 누워 있던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집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의 저자인 세리 마태를 부르신 기사인데,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하여 오심인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마태는 평상시처럼 그의 직장에 출근하여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세리라는 직업으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죄인 취급을 받고 있고, 매국노라며 멸시를 받고 살지만은, 그래도 이 직업 때문에 남보다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자신을 욕하는 많은 사람들도 실상은 자신의 돈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있기 때문에, 마태는 다소의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도 없고,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항상 외롭고 소외된 마음 가운데 살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빨리 목표를 달성하면 이 직업을 거둬 치우고 멀리 이사해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늘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세리 마태를 찾아오는 사람은 대개가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자신에게 돈이나 얻어 쓰려는 사람 이외는 없었는데, 바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평소에 마태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죄인들을 가까이 해주시고, 소외된 자를 위로 해주시는, 다른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자기를 찾아 주셨다는 것은 마태로서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미리 방문할 것이라고 예고를 하고 찾아가셨더라면,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곧 위장되고 가식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뵈올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불쑥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찾아가심으로, 그는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받으십니다. 가난한 모습 그대로를 받으십니다. 모자라는 모습 그대로를 받으십니다. 추한 모습 그대로를 받으십니다. 우리의 병든 모습을 그대로 받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를 찾아 오셔서 부르신 시기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를 부르신 때는 그가 세관에 앉아 있을 때였습니다. 주님은 마태가 회개를 하고, 세리라는 자리에 사표를 던지고 난후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가 세관에 여전히 앉아 있을 때 찾아 오셨습니다. 마태가 죄인의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 섰을 때가 아니라, 죄악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죄악 된 자리에 있을 때 우리를 찾아 주셨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세관에 앉아 일하는 마태를 보시고 아주 단순 명료하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마태도 미련 없이 그 하던 업무를 멈추고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에도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고, 빌립을 선택하실 때에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정체를 아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는 말 속에는 심오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주님을 따른다는 말에는, 주님을 내 삶의 경배자와 인도자로 택한다는 결단과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많지만, 예수님을 나의 가장 귀한 삶의 보물과 가치로 알고 택한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주님께 순종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른다’는 말은 ‘인도 한다’ ‘불복 한다’는 개념과 정반대의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지 않고 불복하며 자기 길로 행하는 사람들이 곧 불신자들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주님을 모방하고 답습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격과 삶의 표준으로 여기고, 그 분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이 성도입니다. 상인을 따르는 자들은 장사꾼이 되고, 정치가를 따르는 이들은 정치인이 됩니다. 강도를 따르는 자는 똑같이 범죄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모방하는 생활을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과 성품을 그 마음과 삶에 열매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그분과 공동 운명체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분이 영광을 받으면 자신들도 영광을 받고, 그분이 고난을 당하면 자신들도 고난당할 것을 각오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성도들인 것입니다. 또 그분이 하신 일을 자기도 하고, 그분이 삶의 목표로 삼으셨던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시키는 일을, 동일하게 자신의 절대 의무로 여기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성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마태는, 주님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식사를 하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시시자 일어나 따랐다고 간단하게 기록되었지만, 마태가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가기까지 많은 고민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고민 끝에 마침내 마태는 예수님을 좇아가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잔치는 자신이 세리라는 이유 때문에 그동안 사회적으로 수 없이 괄시를 받아오던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하여 주님을 초대하고 그 기쁨을 같이 나누는 잔치였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식사의 성격과 규모가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같은 기사를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그가 예수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닌 큰 잔치였던 것 같습니다.

잔치라는 것은 원래 많은 사람에게 개방되는 것입니다. 이 잔치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마태라는 사람의 신분이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잔치에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기사를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많은 세리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이 함께 앉았다고 한 것을 보면, 주로 죄인과 세리들이 그 날 잔치의 손님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세리와 그 밖의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음식 잡수시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따졌습니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유대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공통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교제를 한다, 친구가 된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영어에 친구란 말을 가리키는 단어에 ‘Compan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왔는데 하나는 ‘함께’란 뜻의 ‘Cum’이란 말과, 다른 하나는 ‘먹는다’란 뜻인 ‘Panis’라는 두 단어가 복합된 말입니다. 즉 우정, 친구란 말은 ‘함께 먹는다’ ‘같이 먹는다’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죄인의 친구요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목사가 창녀나 깡패들하고 교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가 안 되겠습니까? 요즈음도 문제가 될 텐데 예수님 당시에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세리는 지금의 세리와는 다릅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사회적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정권에 붙어서 치부를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리를 가리켜 ‘로마의 개’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정복자 로마의 앞잡이로서 허다한 명목의 세금을 헐벗은 유대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세금 명목을 법으로 정해 유대민족으로부터 수많은 세금을 수탈해갔습니다. 인두세는 기본이요, 도로세, 물품세, 수도세 등 백성들은 로마의 세금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 니다. 그래서 당시의 세리에게는 ‘허가된 강도’ 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세리를 매우 증오했습니다. 세리는 매국노 취급을 당하였고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심지어 “산중에는 무서운 사자가 있고 거리에는 포악한 세리가 있다.” 라는 말까지 유행어로 돌아다녔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녀와 사마리아인들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을 안 받았다고 합니다. 모르고 받았다가 저만큼 가는데 “너에게 지금 돈을 준 사람이 세리다.”고 하면 “그래?” 하고 깜짝 놀라며 달려가서 “당신 같은 더러운 사람이 준 돈은 안 받는다.”고 하면서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라고 하면 이런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세리와 함께 앉아서 잔치 상 벌리고 있으니, 이것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또한 세리들뿐만 아니라 많은 죄인들도 함께 참여했다고 했는데,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유대 일반 백성들과 교제가 끊긴 창녀와 각종 범죄자들이 주님과 한 자리에 앉았으니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기피하지도 않으셨고 함께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회에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나의 왕이요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이와 같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풍성한 기독교 구원의 은총의 특징입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전날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던 성도가 있습니까?

그 처지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이제는 깨끗이 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은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의 특권을 지닌 존재가 되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수 믿고 우리 교회에 함께 출석하게 되었나?” 라고 비판하거나 차별하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러한 비판과 차별 의식은 곧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난한 행위와 다를 바 없는 큰 죄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지옥에 갈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결코 우리의 신분이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신분을 자랑하거나 이웃 성도를 업신여기는 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깔보는 행위입니다. 나도 다른 성도도 다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 귀한 존재요, 하늘나라의 유업을 함께 누릴 동등한 가족이라는 의식을 지니고 서로를 귀하게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병원이 아무리 많고 의사들이 아무리 많아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쓸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에게 의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없는 건 아닙니다. 구두 수선 점에 근처 병원의 의사가 구두를 고치러 갔습니다. 워낙 자린고비 의사여서 구두는 심하게 망가져 있었습니다. 구둣방 주인이 이러 저리 살펴보더니 도저히 고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만원을 내라고 했습니다. “뭐 때문에 돈을 받는 거요?” 의사가 따졌습니다.

그러자 구둣방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배운 겁니다. 내가 병원에 갔을 때 내 병은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 진찰비를 받지 않았소.” 또 다른 유머가 있습니다. 엄마를 따라 병원에 온 아들이 갑자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의사들은 수술할 때 왜 마스크를 하는 거야?”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수술이 실패하더라도 환자가 자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 이런 유머도 다 건강할 때 하는 소리이고, 정작 병이 들면 의사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들으시고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도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성경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호세아 6:6절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호세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공의와 사랑은 버리고, 형식적인 제사 행위에만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께서 범죄 한 우리 인생을 죽음의 질병을 가진 자로 환자로 보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다가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이 고해와 같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죄가 문제입니다. 죄 때문에 모든 고통과 환난이 옵니다.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환자인 우리를 부르시고 살리시고 치료하시고 구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이 절대로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생애 속에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날 수 있는 이유와, 선생님이 가지신 성자와 같은 인격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 때 프란시스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거야 간단한 말이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내려다보셨네. 그리고 가장 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불결한 삶으로 고통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으셨네. 하나님의 그 눈길은 나에게 머물렀지. 나를 본 순간 하나님은 박수를 치셨다네.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지!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 이유일세.”

혹시 여러분은 스로를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고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10여일 후면 성탄절입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백화점과 술집에서부터 먼저 성탄절 장식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탄절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하는 것이므로, 성탄의 은혜와 축복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성탄의 목적은 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죄인의 대명사와 같았던 세리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라는 찬송가처럼, 주께서 장차 재림하실 때에 꼭 빼놓지 않고 불러주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설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는 여러분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세리(稅吏)였던 마태를 제자로 부른 내용은 마태복음 외에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다른 점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를 레위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레위가 아닌 마태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세리들은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였습니다.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해 동족의 고혈을 짰습니다. 최대한 많은 세금을 과세해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직하지 못했고 도덕적으로도 흠결이 많은 집단이었습니다.

마태는 가버나움에서 세리로 일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를 연결하는 육상통로이자 갈릴리 호수를 통해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해상통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지역이었죠.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버나움에서도 세리는 회당 출입이 금지된 죄인이었습니다. 세리와는 사업도, 물건 통용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것조차 금지됐습니다. 그런 세리였던 마태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제자로 불렀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말씀에 마태는 어떤 군말도 없이 ‘일어나’ 따랐습니다. 세리 일은 과감히 그만두고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곧이어 마태는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그의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 ‘공동식사’는 세리를 향해 쌓아 올려져 있던 벽을 허무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이 세리 마태를 통해 이뤄진 자리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레위’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마태’로 쓴 것은 세리조차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마태복음 저자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편 스스로 의인이라 여긴 바리새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은 무조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부르는 ‘죄인들’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종교적 규정을 지킬 수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통칭한 용어였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뒤 마태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심으로써 바리새인들이 정한 죄인의 범위를 없애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죄인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엔 ‘긍휼’이라는 단어가 세 번(9장 13절, 12장 7절, 23장 23절)이나 나옵니다. 이 단어는 바리새인과 의(義)를 둘러싼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에서만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며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마태처럼 예수님 부르심에 응답하고 베풂과 나눔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의가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는 긍휼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남상준 목사(대전 소망루터 교회)

2013-09-01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20130901본문 / 마태복음 9:9~13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땅에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들이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 종류는 ‘갑바이(gabbai)’라는 세리인데, 재산세와 같은 일반세를 징수하는 세리입니다. 또 한 종류는 ‘모케즈(mokhes)’라는 세리인데, 이는 수입세, 통행세, 면허세 등을 거둬들이는 세리입니다.이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세금징수의 임무를 띄고,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로마 제국 정부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강력한 권력을 등에 업고 백성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고, 그 중의 일부는 착복하여 자신의 재산을 늘리며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라고 하면, 살인강도범과 똑같은 수준의 죄인으로 여겼습니다.본문에 보면, 주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라고 했으므로 우리는 마태가 모케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리를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고, 세리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갈았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아주 충격적입니다.사실 따지고 보면, 세리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세리 중에도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한두 사람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세리들은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세리들은 도매금으로 욕을 먹게 됩니다.여러분은 세리장 삭개오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리들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욕을 먹으며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오시니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19:8).만일 자신이 나쁜 짓을 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은 자기에게 욕하지만,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삭개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사람들은 세리가 가장 비천하고 가장 못된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사도 바울처럼 그 시대의 최고 학문을 통달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주 부족한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귀하게 쓰셨습니다.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수가 성 사람들을 구원 받게 하실 때, 수가 성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 받는 사람을 택하셔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과거에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여인을 사용하셨습니다.과거에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던 여자이니 너무나 부끄러워서 사람들이 우물가에 모여 있을 때에는 밖에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점심 먹은 후 다들 낮잠 자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에 그 여인은 우물가에 와서 물을 길어 갔습니다.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천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주님은 미리 우물가에 가셔서 그 여인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그 여인은 자신이 메시아를 만난 것을 알게 된 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수가 성에 들어가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후, 이틀을 더 머물게 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히 말씀을 듣고,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잘난 사람만 부르시거나 잘난 사람만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못하도록 약한 자, 세상에서 멸시 받는 자, 천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족들과 의논하지도 않고, 무조건 순종하여 모든 것을 두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비록 사람들로부터 욕을 듣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직장에 계속해서 있으면, 얼마나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월급도 많을 것이고, 수입이 많을 것입니다.그런데 그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 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가난한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무조건 주님을 따랐습니다.마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비천한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 받을 수 있었던 비밀이 있습니다. 이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이들은 주님이 부르셨을 때에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도 없고, 사람과 의논할 필요도 없이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택함 받고, 쓰임 받은 비밀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라고 대답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귀하게 쓰실까요? 하나님은 뛰어난 사람, 잘 난 사람, 똑똑한 사람, 출세한 사람을 들어 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믿음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이라면,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순종으로 나타납니다.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에게 정말 믿음이 있다면, 믿음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나타납니다.그러므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모든 것을 나타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에게 축복하십니다.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축복도 아까워하시지 않으십니다.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읍에 가도 복 받게 하시고, 들에 가도 복 받게 하시고, 들어와도 복 받게 하시고, 나가도 복 받게 하십니다. 자손들이 복 받고, 떡 반죽 그릇까지 복 받고, 그 사람이 사는 하늘이 복을 받아 기후가 좋아집니다. 그 사람이 사는 땅이 복을 받아 농사가 잘 됩니다. 모든 복이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순종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 주시는 것을 아까워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복을 부어주십니다.하나님은 순종의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 사람과 함께해주십니다.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계시고, 그가 가는 곳에 함께 가십니다.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붙잡으세요.그런데 우리가 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까?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까? 순종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지 못합니까? 순종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만일 인간의 노력으로만 성공할 수 있다면, 세상에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절대주권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흥하고 망하는 것,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하나님이 축복해주셔야 우리가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려면,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합니까?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고, 제멋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기분에 따라 헌금하고, 기분에 따라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 줄 믿습니다.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마태와 같이 순종한다면, 분명히 축복 받을 줄 믿습니다.마가복음 10장 28~30절에 보면,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부모 형제도 잘 모시지 못하고, 자식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등 얼마나 희생이 많습니까.이 말씀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람을 주님이 책임져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백 배로 축복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으세요.우리는 천국에 가서 상급 받을 뿐 아니라,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도 주님이 다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복 받은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감사하십니까?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야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고전 12:3).여러분을 예수 믿게 하고, 믿어지게 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보통 복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그런데 이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 복, 이것이 얼마나 귀한 복인지 모릅니다.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복된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솔로몬처럼 출세하고, 왕이 되고, 부자가 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처럼 사는 것, 부자처럼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뜻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 노릇을 하다가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했습니다.이 외에도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왜 그랬을까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은 잠시 동안입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서 받는 영광은 영원합니다.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사람이 가장 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가장 큰 영광을 받게 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해 살다가 주님 앞에 간 사람입니다.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게 하는 일을 하다가 주님 앞에 간 사람이 가장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고, 복을 받으며 살게 될 줄 믿습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순교할 날을 기다리면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본문에 보면, 세리 마태는 자신을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께 기쁨으로 순종했을 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죄인을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친구인 세리들도 초청받아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게 되었습니다.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비난했습니다.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죄는 영적인 병입니다. 지옥에서 멸망하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죄인들이 구원 받으려면, 신령한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마태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 있고, 바리새인처럼 의인인 척하는 죄인이 있습니다.이 두 종류의 죄인 중에 누구의 죄가 더 많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죄인이면서도 의인인 척 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는 보통 사람의 죄보다 더 많습니다.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한 자가 지혜롭고, 복 있는 자입니다.본문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긍휼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긍휼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긍휼입니다.어떤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첫째,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둘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줄 아는 사람입니다.셋째,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이런 사람들이 긍휼을 베풀면서 살게 됩니다.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깁니다.성경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살리기 위해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출 32:32).다니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금식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자신이 범한 죄인 것처럼 생각하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저와 여러분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죄 짓고, 나쁜 짓 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욕하지 마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시기 바랍니다.북한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바리새인이 되지 마시고,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해줄 수 있는, 주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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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학기 복음서 제 5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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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 마가복음 2:1-22

▣ 요절 / 마가복음 2:22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으로 영원 전부터 하늘 보좌 가운데 계신 분이셨습니다. 하늘은 어떤 곳입니까? 하늘은 의와 거룩만 있는 곳입니다. 하늘은 언제나 희락과 화평이 넘치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천당 아래 분당, 곧 깨어진 땅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땅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땅입니다.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깨어진 땅입니다. 이 땅에는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죄가 있고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 높고 높은 하늘을 떠나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땅에 내려 오셨을까요? 하늘이 너무 심심해서 땅 위를 한 번 구경하러 오셨을까요? 천사들의 경배만으로는 부족해서 사람들로부터 경배와 섬김을 받으시려고 오셨을까요? 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세상을 싹 쓸어 엎어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 오셨을까요?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하여 주십니다.

첫째, 죄사함을 주러 오신 예수님 (2:1-12)

갈릴리 가버나움이란 동네에 중풍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온 종일을 침상에 누워 지내야만 했습니다. 등에서는 욕창이 나서 살이 썩어 들어 갔습니다. 제 발로 화장실에 갈 수조차 없었고 제 손으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풍병자에게는 네 명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바라보는 네 명의 친구들의 눈에는 늘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어울려 들로 산으로 뛰어 놀던 벗이 저 지경이 되어 있는데, 멀쩡히 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마을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서야 희망이 생겼습니다. 빛이 보였습니다. 예수님 앞에 이 친구를 데려갈 수 만 있다면, 그 분이시라면 중풍병에서 이 친구를 낫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이고 네 귀퉁이를 끈으로 단단히 묶고 어깨에 매었습니다. 병자를 매단 채로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땀이 주룩주룩 쏟아지고 숨이 턱 밑에까지 차 올랐습니다. ‘친구야!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곧 밟혀 넘어질 것 같은 넘쳐나는 인파를 보았습니다. 쥐 한 마리도 집으로 들어가거나 나올 수조차 없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순간 약속이나 한 듯 털썩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돌아갈래? 여기서 포기할까?” 잠시 짧지만 깊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른 친구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코 앞에 예수님을 두고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그들은 침상을 매고 지붕 위로 올랐습니다. 진흙을 부수고 나뭇가지를 들어 내었습니다. 지붕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생겼습니다. 그 구멍 사이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아래를 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집주인이었습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는 무리들의 찌푸린 얼굴들도 보였습니다. 비난하는 그들의 손가락도 보였습니다. 집주인에게 정말 죄송했습니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꽃다운 나이에 중풍병에 걸린 이 불쌍한 친구를 살려야 했습니다. 이 친구를 살릴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이나 손가락질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고민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예수님마저 우리를 내치시면 어찌할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통합찬송338장)

네 명의 친구들은 떨리는 맘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미소와 눈빛 속에서 ‘너희들의 믿음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소리도 없이 마음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우리의 무례함은 보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의 믿음만을 보시고 영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네 친구들의 감사 또한 소리 없이 예수님께 전달되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전도했는데 사람들이 싫어합니까? 나는 믿음으로 초청했는데 양들이 나를 무시합니까? 나는 믿음으로 살려고 했을 뿐인데 친척들과 가족들이 불효자라고 손가락질합니까? 괜찮습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만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8:13)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5:15)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고양이가 되시겠습니까? 예수님께 믿음으로 인정받는 호랑이가 되시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인정 받았던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11)’ 네 친구들에게 이제는 그 말씀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씀은 치유가 아니라 죄사함의 선포였습니다. 아니! 죄사함이라구요? 이 사람에게 절실한 것은 중풍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아닐까요?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더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치유보다 더 앞 선 것이 죄사함입니다. 질병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병은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세상에 죄가 없었더라면 죽음도 질병도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 온 후 죽음의 저주가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질병은 죽음이 부리는 여러 하수인 중에 하나입니다. 먼저 죄사함을 받아야 병고침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필요합니까? 나만을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까? 건강이 필요합니까?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필요가 채워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마25:38,39). 구원의 방주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나 우리 시대 사람들이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르기를 죄는 빚을 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마6:12).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순종을 그분께 돌려 드리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마18:24) 일만 달란트는 우리가 16만년을 매일 벌어서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액수입니다. 이 빚을 착한 일을 해서 갚을 수 있나요? 테레사 수녀 정도면 다 갚을 수 있었을까요? 천만에요. 갚기는커녕 날마다 빚이 더 늘어만 갈 뿐입니다. 오늘도 나는 선한 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었지만 사람을 미워했고 음란했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죄는 내 영혼에 죄책감과 수치심이란 흔적을 남깁니다. 아무리 양심의 입을 틀어 막아도 가슴에 새겨진 죄의식은 주홍글씨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빚에 눌린 삶이 얼마나 참혹한 지 아십니까? 정선희의 남편 탤런트 안재환씨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었습니까?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떠 안게 된 35억의 빚에 짓눌려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일만 달란트 죄의 짐을 안고 있는 우리 인생에서 이 빚을 해결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해방 선언입니다. “죄짐을 지고 신음하던 내 아들아! 이제 내가 너에게 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노라. 너의 모든 채무가 탕감 받았다. 너는 이제 자유다.” 신용불량자에게는 채무 이행이 면제되었다는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만을 짓다가 죄로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던 우리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기쁜 소식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정말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말 믿을만한 말일까요? 내가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나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갖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이 동일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말이냐? 무슨 권세로 감히 죄를 용서한다고 함부로 말하느냐?(7)’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저라면 쫄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유만만하시며 역으로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 둘 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죄사함을 베푸시는 분은 중풍병자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은 죄사함을 베푸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11)” 그러자 이제껏 누워있던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성큼 성큼 사람들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는지 그 첫 번째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죄에 얽매여 일생을 죄의 종노릇하다 죽을 우리 인생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2:13-22)

세관에 세리가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세리 레위는 모두가 다 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중풍병자만도 못한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중풍병자에게는 네 명의 진짜 친구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한 명의 친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굴 원망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동족에게서 돈을 뜯어내 로마에 바치고 삥땅 친 돈으로 호위 호식해 왔습니다. 가진 것은 돈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도 우정도 진리도 인생의 의미도 목적도 아무 것도 남은 건 없었습니다. 세리 레위도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그가 앉아 있는 이 한 평 남짓한 세관은 이제 그에게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공허한 눈으로 밖을 내다보던 레위에게 예수님이 다가 오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뵙기를 간절히 원한다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당대 누구보다도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선지자로 알려진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레위도 보고 싶었지만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던 그분께서 자신을 향해 오실 때 레위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따르라(14).” 처음에 레위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세상에 도대체 나 같은 자를 제자로 삼으려는 선생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레위는 눈빛으로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제자가 되면 선생님의 명성에 큰 먹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제자가 되면 선생님의 다른 제자들이 싫어할 것입니다. 저는 도저히 자격이 되질 않습니다.” 예수님도 눈빛으로 레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야,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너는 그저 나만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미 너의 지난 모든 과거의 죄들을 용서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이제 너는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내 제자가 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결코 너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반드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는 그 자리에서 세리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 이 한 마디와 레위의 즉각적인 순종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돈만 알던 추한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변했습니다. 고독에 찌든 인생에서 친밀한 사귐이 풍성한 삶으로 변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비자금 장부를 기록하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손으로 변했습니다. 돈을 뜯어 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땅 끝으로 향하는 발로 변했습니다. 죄인 세리 레위가 인류의 스승 성 마태로 변했습니다.

세리 레위는 자신이 거룩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꿈인지 생시인지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동료 세리들에게 소개해 주고자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비스듬히 기대어 누우신 채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친밀한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더니 죄인들이 웃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울고 웃는 죄인들의 천국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못마땅하게 째려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와서 넌지시 따져 물었습니다. “왜 너희 스승은 저런 상종 못할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며 자신을 더럽히고 있느냐?(16)”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중풍병자는 밖으로는 병자였지만 속으로는 죄인이었습니다. 세리 레위는 밖으로는 죄인이었지만 속으로는 병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밖으로는 건강하고 의인이었지만 속으로는 병자이고 죄인이었습니다. 누가 가장 심각합니까?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하나 같이 다 죄인이고 하나 같이 다 죄로 인해 깊이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두 번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가져가셨습니다. 대신 자신의 의와 거룩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상처와 질병을 가져가셨습니다. 대신 자신의 능력과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저주를 받으셨고, 죄 많은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셨고, 죽어야 할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주님이십니다.

저도 예수님에게서 용서받고 고침을 받은 죄인입니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제가 지난 과거에 죄에 깊이 병들어 방황하던 시절을 속속 들이 다 알고 계신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저의 일대일 목자님이셨던 이 에스더 사모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에스더 사모님만 보면 제가 과거 얼마나 뼈 속까지 죄에 물들어 못 쓰게 되었던 죄인이었던가 새록 새록 생각이 납니다. 사모님을 힘들고 마음 아프게 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만든 나의 완악함과 죄악들이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이런 저를 길이 길이 오래 참으시고 또 참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찬304장)

예수님은 이 슬픔 많고 죄 많은 땅에 참 기쁨을 주러 오신 혼인집 새 신랑이 되십니다(19).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뒤 덮은 이 땅에 넘치는 생명의 능력으로 임하신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22). 이런 기쁨과 생명력을 누가 누릴 수 있습니까?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세리 레위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가죽 부대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인을 부르시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죄사함과 치유를 체험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012.4.21 이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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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주일예배 20160828)

성경본문 :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설교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우리가 교회다니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이요? 성경말씀이요? 찬양이요? 아닙니다.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교회 목사님께 실망할 수도 있고, 여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지도자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 나간다고, 혼자 하나님 섬기겠다고, 세상에 나가 더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과 살겠다고 말하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아주 완벽한 거룩한 교회는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굳이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바로, 초대교회 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 중에서도 가장 영적이고 모범적인 교회 중에 하나가 저는 에베소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이상 머물며 개척했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목사님으로 모셨던 교회. 그것도 짧은 기간이 아니라 3년 이상. 바울이 아마 한 장소에 제일 오래 머물러서 집중적 선교를 했던 곳은 이 에베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괜찮은 교회, 좋은 교회 아주 좋은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이런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25.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자 자기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26.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곧 화를 푸십시오.

27.그렇지 않으면 마귀에게 기회를 주게 됩니다.

28.도둑질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도둑질하지 말고 제 손으로 열심히 일하여 선한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9.더러운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말을 하십시오.

거짓을 버리라고 합니다. 도둑질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화내지도 말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성도들 중에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있고, 화를 내는 자들이 있었으며, 도둑질도 하는 자들 뿐 아니라 더러운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거짓말쟁이, 도둑, 사기꾼, 욕쟁이들을 만나도 너무 놀라서는 안됩니다. 이런 일들은 초대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21세기 우리와 함께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났으면 무엇이라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까? 그 답은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의 치유와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해보고 그 안에서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3~1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오늘 본문은 레위라 불리는 마태를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가장 큰 주인공은 바로 세리 마태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꼭 이 이야기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안에서 소개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2장을 보면, 1절부터 중풍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네 사람들이 메고 온 중풍병자가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자 지붕을 뜯어 중풍병자가 누인 상을 매달아 예수님 앞에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만이 중풍병자를 살릴 수 있다고 믿어 이렇게까지 하는 그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기관들이라고 하는 종교지도자들 몇몇이 불행히 살던 중풍병자가 친구들의 따스한 믿음으로 고쳐지는데도 불구하고 의심을 가지고 딴죽을 걸려고 준비하였습니다. 7절을 보면 서기관들이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비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근거로 한 모세의 율법의 관습에 따르면, 병이 있거나 불치병이 있다는 것은 부모나 조상의 죄에 의해서 병이 났거나 아니면 본인의 죄로 인하여 병이 났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병이 낫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함이요, 그 죄사함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의 관습에 의하여 예수님을 이상하고 괴이한 사람으로 율법을 어긴 사람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하며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고, 하나님께 그들 모두가 영광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을 선포하고 다니시던 중에 또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이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을 저술한 세리 마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이 레위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태는 본래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BC 169년 안티오쿠스 4세의 대박해 때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갈릴리로 대거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난 간 레위지파들은 본래 성전을 지키던 자들이라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고기를 잡을 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레위사람들은 관청에 들어가 일자리를 얻기도 하고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걷는 일에도 동원되었습니다. 그래야 먹고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세리는 유대사람들에게 커다란 죄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 식민지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속국의 주민들을 고용하여 해당지역의 세금을 거둬들이게 하거나 통행세를 직접 거두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우리나라 옛날 친일파들처럼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을 뿐 아니라,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을 자기의 몫으로 착복하였습니다. 즉, 당시 세리들은 로마에게 아부하고 자기 동족을 희생시켜 부를 축척한 변절자로서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던 거룩한 지파 레위족속들은 이제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타락해버린 세리가 되어 이제는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동족과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돈을 걷고 있는 세리 일터에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세관에서 돈을 세고 있는 마태를 보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의 반응이 더 놀랍습니다.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아닙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죄를 지으며 돈을 세며 살아가고 있던 마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고, 따라 오라고 했는데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혹시 주님께서 마태와 같이 ‘나를 따라오거라’라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사실 죄인이라면 이러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회를 주셨고, 마태는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축복의 길로 가려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축복이 있습니까?

15절의 말씀입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도 마태의 집에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것입니다. 예수가 마태 자신의 집에 영원히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구제불능이며 대대로 타락해 버릴 데로 타락해버린 세리 마태를 예수님께서는 부르시고 마태의 집에 가서 거하시며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 뿐 만 아니었습니다. 함께 있어주시며 이야기도 나누시고 즐겁게 지내주셨습니다. 이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의 집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위로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16절에 보면, 율법을 잘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구원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와서 이간질을 합니다. “어찌 너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도 먹고 함께 있느냐” 거룩하고 훌륭하다는 너의 선생이 어찌 율법에 어긋난 죄인들과 함께 하며 더럽혀지고 있는가? 진정 너의 선생이 메시아며 구원자인가? 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 혼란스러워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도 함께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능력과 존귀가 가득하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더 가까이 가시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사도 전문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은 특별한 분야의 전문의를 찾아가야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이것과 같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의인이 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움이 필요한데 유일하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이 세상에 바로 딱 한분이십니다. 바로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이름 주 예수 그리스도! 이 예수님께 중풍병자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고 또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인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입술에서 ‘죽겠다죽겠다’라는 말보다 ‘살겠네 살겠네’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내 모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다 싫은 것이 다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내 생각모두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로부터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아 저 천국이 약속되어있으니 행복하다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건강한 사람이 가질 수 없고, 오직 나는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다라고 인정하는 병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심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한 죄인을 예수님께서는 귀히 여기시고 기회를 주시며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겸손하고 가난하며, 이 감당하기도 해결하기도 어려운 죄를 대신 감당하여 용서하여주실 분을 간절히 찾는 애통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3~14)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누구를 기억하고 누구를 바라보며,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가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러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와서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죄인인 우리는 예수님께 그만한 사랑을 받은 존귀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늘 주 예수님의 은총과 축복 아래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주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세상이 알수도 없고 줄수 없는 큰 사랑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믿음으로 나갈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되시고 우리의 든든한 백이 되어주실 것을 압니다. 우리가 늘 믿음으로 그 큰 사랑에 덧입혀져 주님과 함께 동행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눅 5:27-32)

주제 :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본문 : 누가복음 5장 27~32절

설교자 : 조정의

오랜만에 누가복음 공부를 다시 시작합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의 어디쯤 와 있는지 잠시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는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9:10).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로서 참 사람이시고 동시에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누가는 처음 4장의 기록을 통해 그분이 진정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입증하였습니다(가브리엘을 통한 계시와 그 성취, 성령충만을 받은 자들의 증언(엘리사벳, 세례 요한, 시므온과 안나), 세례 요한의 선포,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언, 마귀의 유혹을 이기심) 예수님은 그 이후 유대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사역을 하셨고 오직 요한만 예수님의 일 년여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시작으로 그분의 공적인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그분이 태어나신 동네인 나사렛에서 시작되지만 그곳에서 배척을 받으시고(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함(4:29)) 갈릴리 호수 주변의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4:31). 누가복음 9장 51절에는 예수님이 이 갈릴리를 떠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그 전까지 예수님은 계속해서 갈릴리 지역에서 일년 반의 기간 동안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평일에는 산이나 바다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때론 병을 고치기도 하셨는데 그 능력은 예수님께서 능력과 권능이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었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43 내가…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도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이며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복음을 전하셨던 장면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죄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을 부르고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였지만 또 다른 죄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두 종류의 죄인과 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신 예수님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등장한 죄인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태였고 알패오의 아들이었습니다(마 9:9-13; 막 2:13-17). 마가복음 2장 13-14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갈릴리 호수로 나가셨고 그곳에 큰 무리가 나왔을 때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발견하셨습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금을 거두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세무서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만, 예수님 당시 세리들은 사회적으로 아주 악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에 종속된 나라였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매국노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인을 위해 일하다니 민족적으로도 변절자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에게 돈을 걷어 로마 정부에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일정 지역에 일정한 액수를 할당하고 그 지역에 세금 징수하는 권리를 최고 입찰자에게 팔았습니다. 그 권리를 사는 사람이 세리가 되어 할당된 세금을 연말에 로마 정부에 넘겨주면 되었던 것입니다. 세금징수권을 입찰하기 위해 땅을 팔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의 약속된 땅을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기 위해 판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정확하게 얼마의 세금을 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처럼 세금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고지서로 보내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더 많은 세금을 착취했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세금들이 있었는데 인두세라고 하여 생존한 사람(14-65세 남자, 12-65세 여자)이 무조건 내야하는 세금, 토지세라고 하여 모든 곡물의 1/10, 그리고 포도와 기름의 1/5을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수입의 1%를 내는 소득세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종류의 의무세가 있었는데 주요 도로 사용로, 항만, 시장 사용료, 짐마차의 각 바퀴마다 매기는 세금, 마차를 끄는 동물에 매기는 세금(오늘날로는 자동차세), 구매세(상품 구매시), 수출입세도 있었습니다. 특정 상품에 대한 세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자를 불러 세워 짐을 풀게 하고 원하는 만큼 상품에 대해 세금을 물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세금을 낼 수 없으면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 세금을 내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거의 폭력배와 같죠? 세례요한에게 나온 세리들에게 요한이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세리들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백성들이 가진 것을 갈취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정부에 바칠 일정금액 이외의 많은 것들을 빼앗았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세리만큼 죄인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 친일파를 죄인으로 취급하듯 세리들은 항상 죄인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갈 수 없으며, 법정의 증인으로도 설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어울리는 사람은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 매춘부들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적 가르침 중 하나인 탈무드는 “언제든 원하면 세리를 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있다”고 말하며 유대인 문서에서는 ‘세리가 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오늘도 레위(마태)는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많은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향한 경멸과 분노 비난의 눈길로 그를 봤을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쳐지나가며 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깊게 자세히 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동정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항상 죄인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은 모두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세리 마태를 불쌍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살던 삶에서 돌이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신이 살던 삶의 방식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레위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회당엔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바다에서 산에서 거리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듣거나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로 결단합니다. 기존의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합니다. 그의 회개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28절을 보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세금징수권을 사기 위해 가진 것을 팔았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비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견뎠던 것은 세리로서 그가 누렸던 권력과 특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다시 세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가진 특혜를 다 포기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와 형제들도 배와 그물을 버렸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가서 고기를 잡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한번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세리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잃는다 해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예수님이 제시한 그것을 더 사모하여 그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회개한 레위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29절). 보통 이런 식사를 통하여 교제하면서 영적 대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레위는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과 같은 죄인의 삶을 살고 있는 세리들과 다른 사람을(죄인들-마태,마가) 많이 초대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하늘나라에 홀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영혼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것을 혼자 간직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레위는 자신이 받은 회개의 부르심을 동료들과 나누기 원합니다. 그래서 큰 잔치를 열었고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러한 자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막 2:13-17).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죄인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하였습니다(마 3:7). 예수님은 그 어떤 죄인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강력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라고 꾸짖으시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외식과 탐욕에 대해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가장 심한 말은 거의 이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레위와 그 동료들이 모인 잔치 주변에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차마 그 모임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눅 11:38). 그들 스스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세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건하고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그들은 밖에서 이 잔치를 들여다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마태복음에 따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이라고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따르는 선생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너희가 따르는 선생이냐?”라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학자였던 이들은 전도서 7장 20절의 말씀을 몰랐을까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했던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열왕기상 8:46) 그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종류의 죄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과 자신들을 분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어느 정도 경건하고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절)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다면 의사는 쓸데없습니다. 하지만 병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영적 의사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자, 죄인을 찾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겐 내가 필요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건강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합니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그들이 의인이라서 예수님이 필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탐욕과 외식으로 가득차 나병환자처럼 병의 심각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죄인 중의 죄인이었지만 자신은 아주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대답을 듣고서 “저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저도 의인이 아닙니다. 저를 불러주십시오. 저도 회개하고 싶습니다”라고 해야 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남들에 비하여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저 더러운 세리나 죄인들고 비교해서 말입니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경건한 삶으로 어느 정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종류의 죄인을 만났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한 죄인은 세상의 비난을 받는 죄인 중의 죄인이었습니다. 매국노에 변절자에 탐욕스러운 죄인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비난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불쌍히 바라보시고 부르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떠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였습니다. 또 다른 죄인은 사회적으로는 존경을 받는 무리였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도 하고 종교적으로도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었습니다. 외식과 탐욕으로 가득한 자들이었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그렇게까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여긴 그들은 참된 의사이신 예수가 필요 없었습니다. 한 죄인은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여 따랐습니다. 또 다른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교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의 부르심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쪽은 겸손했고 다른 한 쪽은 교만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앞에 자신의 영적 가난과 비천함을 알아 겸손히 자신을 낮추었지만 다른 한 쪽은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권세를 부리고 영적으로 부하다고 자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겸손한 자에게 임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문안하면서 성령에 감동을 받은 엘리사벳의 찬가를 듣고 이렇게 노래합니다(눅 1:49-53)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하였습니다(잠 18:12).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그분의 의의 기준은 하나님처럼 온전한 것입니다(마 5:48). 그 누구도 하나님처럼 자신이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풍성한 긍휼과 넘치는 자비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주셔서 회개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죄인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 입니다. 겸손히 그 음성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교만하게 나의 의를 내세울 것인지 이 둘 중 하나입니다. 겸손한 자는 죄가 아무리 많아도 죄가 아무리 심각해도 허다한 사랑이 그 죄를 덮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은 강도도 예수님의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하여 성도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일조한 자도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고 백성의 가죽을 벗겨먹던 세리도 자비를 맛보았습니다. 겸손히 죄인임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여 돌이켰을때 그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스스로 죄가 아무리 적다고 느낀다해도 하나님의 용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거스른 죄에 대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는데도 교만하게 그 것을 거절한다면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32절)

아직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삶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자처럼 방황하는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삶에서 돌이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고 계신 분들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내가 의인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것처럼 정치인이나 죄인들, 세상 친구들을 비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마태처럼 내가 만난 자비의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 그들을 초대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바라보고 그들에게 진리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우리가 받은 자비를 그들에게도 전해주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마가복음 2:13-17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마가복음 2:13-17(279장) 2019. 2. 17, 오전

본문은 2가지 다른 내용 곧 레위의 소명 이야기(13-14절)와 공동식사 이야기(15- 17절)가 결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칭 의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죄를 모르기 때문에 사실은 더 큰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죄인들(세리, 창기, 당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 마태를 자기 제자로 부르신 일이나,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함께했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서, 자기 동족의 혈세를 강제로 걷어 로마에 바치는, 동족의 원수였습니다. 공인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선생님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 하면서 공격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절).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의인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자칭 의인이었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자칭 의인이라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솔직히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창기, 세리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들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칭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종교적 지도자들을 회칠한 무덤 같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을 보시고 격노하거나 책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서기관들, 제사장들 등 당시 종교적 지도자들은 항상 예수님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말씀할 때 ‘건강한 자’는 진실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병이 심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스스로 건강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들, 특히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한국의 바리새인들도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성경적 표현들)에게 접근하지 않고, 의인들(자칭)끼리만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생활수준이 높고 문화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교제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한국교회는 어느덧 귀족화가 되어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리, 창기, 죄인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고, 진실한 자신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구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하는 행동입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우리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차별화를 강조하는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구제하는 자이고, 당신들은 구제받는 자라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교훈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예수님 자신보다 종교적 분위기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사랑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가 들리고, 색유리 사이로 들어오는 신비한 광채들, 거룩한(?) 가운을 입은 성직자들, 울듯말듯한 비음섞인 목소리로 회개하는 듯한 기도소리 등, 이런 종교적 분위기를 대단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과 음식을 같이 먹고, 그들과 노래를 같이 부르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은 이미 한국교회의 관심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직접 접촉하시고 관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죄인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실수는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자신들이 개입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할 수 있고, 그것을 죄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오만 불손한 생각입니까?

예수님에게는 당시 종교적 분위기가 전혀 필요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것들이(교회의 귀족화)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마태의 집에 가서 죄인들과 함께 노래부르고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칭 의인이라는 종교적 지도자들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정죄받던 당시 죄인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해가 쨍쨍 비추고 있는데 손전등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 23).

또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절).

예수님은 당시 종교적 지도자에게는 인기가 없었으나, 죄인들에게는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간접적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큰 미움을 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들의 죽음처럼 아름다운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혁명가의 죽음처럼 비장한 영웅적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죽음이었습니다(요 1:36).

의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혹 있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마태)가 근무하는 세관에 찾아 오셔서 “나를 따르라”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무런 질문 없이 결단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레위의 집을 예수께서 방문하셨고 거기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한창 잔치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습니다. 자칭 의인이라던 종교 지도자들이 찾아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은 옳지 않다”며 비방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듯, 구세주는 죄인을 찾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십니다.

부른다는 말은 ‘특별한 자리로 초청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막연히 기다리거나 바라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낙심한 사람을 소망의 자리로, 소외된 사람을 친구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은혜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의 이름을 알아주고 불러 주는 사람이 있으면, 상대방이 내 이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의 질병으로 영혼이 썩어 들어가고 있고 감각이 마비되어 죽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옥의 땔감에 불과한 인생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 여기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평생, 인생 길 다가도록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악 된 자리에서 돌이키고, 낙심한 자리에서 일어나고, 방황하던 마음을 돌이켜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천 년 동안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쳐 주고 또 가르쳐주었습니다. 역사를 통하여 그들을 때리시기도 했고 치료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어루만지시기도 하였습니다. 버렸다가 안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드디어, 직접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품에 안으셨습니다. 머뭇거리고 지쳐있고 죽어 있는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셨습니다.

허준이라고 하는 의사가 진실한 의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스승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스승 유의태는 뛰어난 의술을 가졌으면서도 늘 다 떨어진 옷, 다 떨어진 갓을 쓰고 다니면서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정성스레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의술을 배우던 허준은 ‘의술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여 베푸는 인술(仁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 백년 전 만해도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의학서를 볼 수 있을 만큼 한자에 능통한 사람들만 의사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약재인데 중국에서와 우리나라에서의 이름이 다르고, 또 중국에서는 흔한 약재가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어렵거나, 반대로 우리나라에는 지천으로 널려 있는 좋은 약재가 중국 의학서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의 체질도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과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의 체질에 맞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좋은 약재들을 써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고자 쓴 책이 귀암 허준 선생이 쓴 「동의보감(東醫寶鑑)」입니다.

오래 전 미국 흑인들이 사는 빈민가에 있는 고등학교, 뉴욕 테프트고등학교 선생님이 자기가 가르치고 사랑하는 학생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자기의 봉급을 털어서 점심도 사주고, 또 도움이 필요한 학생에게는 도움을 주면서, 자신도 빈민가의 방을 세내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미국 언론 재벌 타임워너사 회장, 제롤 드레빈(58세)의 외아들 조나단 레빈(31세)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빈민가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부귀와 명예를 얻고 살 수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전혀 의지하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자기 힘으로 살면서, 미국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열심히 그들을 위해 살다가 불량학생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선생님이 죽은 후에야 학생들은 선생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미국 전 국민이 그 선생님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선생님은 진실로 20세기의 작은 예수님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죄인에게 꼭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이 땅에 선생님도 필요합니다. 정치인도 필요합니다. 국회의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분들 가운데 한 두 사람 없어도 이 세상은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돌아가셔도 이 나라는 끄떡없을 것이며, 담임 목사가 없어도 교회는 역시 교회답게 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고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으며 인류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을 ‘필요조건’이라 하고,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을 ‘충분조건’이라고 합니다. TV, 냉장고, 고급승용차, 넓은 아파트, 아름다운 옷 등은 다 충분조건입니다. 그런 것은 없어도 사람의 생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 아내 좋은 가정 등은 반드시 있어야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병자에게 의사가 꼭 필요한 것처럼 죄인 된 인간에게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꼭 필요한 분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족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먹여주고 입혀주고 갖추어주는 것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일생 예수님과 손잡고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은 죄인의 구주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건강을 필요로 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업 자금이 필요하실 때도 있습니다. 외로운 때 친구도 필요합니다. 교양을 높이기 위해서 지식도 필요합니다. 정서를 순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수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이며 예수가 없으면 죽음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과 불안은 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인간은 어디에서 무엇으로도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예수님,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예수님을 목숨 다하여 사랑하고 이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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