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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세례는 나의 옛사람을 죽이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을 공중 앞에서 행하는 예식입니다. 성령 세례는, 방언을 한다든가 무슨 특별한 체험과 연계시켜 훈련까지 행하고 있어서 왜곡된 점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의 본질을 알려면 먼저 성령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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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 –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 – USA Bible Study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실체이다”라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
Source: usabiblestudy.com
Date Published: 5/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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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물 세례와 성령 세례)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한다. 즉, 요한의 물세례(회개)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령세례(복음)가 모두 함께 이루어져야 진정한 세례라고 할 …
Source: patrischurchleegmailcom.posthaven.com
Date Published: 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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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물 세례와 성령세례(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또 한 가지 차이는, 물 세례는 사람이 주고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 증표로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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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세례 와 성령 세례 > 큐티 나눔터 | 서문교회
그렇다면 초대교회에서는 왜 이렇게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했는가? 오늘의 본문에서 이 답에 대한 단초 (端初, 실마리, 힌트, hint)를 얻을 수가 있다. 즉 ‘물 …
Source: www.seomoon.org
Date Published: 1/15/2022
View: 663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세례 – 나의 묵상노트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 …
Source: biblenotes.tistory.com
Date Published: 6/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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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세례, 성령세례 (행 19:1-7) – 생명샘교회
세례 요한의 세례 역시 죄를 씻는 정결 예식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은 결코 사람의 죄악을 씻어내지 못합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것을 공표하는 의식이었을 뿐입니다.
Source: livingspring.net
Date Published: 9/13/2022
View: 2937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를 알아보자 성령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
물세레와 성령 세례는 다르다. 물세례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 반면 성령 세례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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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물 세례 와 성령 세례
- Author: 이영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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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6.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rq6XQ1qR3A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
성결교단의 박명수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박명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결운동가 William Godbey는 세례는 근본적으로 정결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 세례(baptizoo)는 정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결국 세례는 성화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성화는 우리를 죄에서 정결케 하는 세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정결케 하는 것이다. 갓비는 이런 전제 아래서 성령세례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유전 죄를 성령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씻어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명수 목사는 “성령의 역사의 핵심은 인간의 성화라고 보는 성결운동의 견해는 옳은 것이다”고 주장한다. 또한 박명수 목사는 “토레이는 성령세례를 섬김을 위한 능력 받음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죄에서의 씻음으로 보는 웨슬리안 성결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이다. 토레이는 웨슬리안 성결론은 거부했지만 케직 성결론(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수용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박명수 목사, 1997년 11월 한국오순절학회 발행 ‘오순절운동과 한국교회의 비전’에서 발췌, p.16,18-19.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Ph.D.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이상의 “토레이는 성령세례를 섬김을 위한 능력 받음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죄에서의 씻음으로 보는 웨슬리안 성결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이다”라는 글 중에서 “토레이는 성령세례를 섬김을 위한 능력 받음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거의 바른 해석이다. 행 1:5, 행 1:8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령세례란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역을 위한 성령(님)의 권능을 받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성결운동가 William Godbey는 세례는 근본적으로 정결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 세례(baptizoo)는 정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물세례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성령세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위시한 세계의 성결운동가들은 죄를 정결케 하는 물세례의 개념을 성령세례에 그대로 도입하여 성령세례의 뜻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행 1:5, 행 1:8의 그릇된 해석에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성령세례를 죄에서의 씻음으로 보는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성경에 그 근거가 한 구절도 없는 전혀 비 성경적인 그릇된 운동이다.
성결교단의 성기호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물세례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사람에게 거듭나 새 사람이 된 것을 증명하는 예식인데, 중생함으로 자기가 지은 죄, 즉 자범죄에서 용서 받는다. 그러나 타락한 성품, 즉 죄성은 여전히 신자 안에 남아 있다. 이것을 원죄라고 부른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에서 깨끗함을 받는 단계가 있는데, 신자가 거듭난 후에 믿음을 따라 순간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때이다. 이를 온전한 성결이라고 부르는데 이 단계에서 사람은 원죄로부터 정결함을 받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게 되어 능력있는 봉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성기호 목사, ‘이야기 신학’ 1997, p.226-227)
박형룡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신약에서 물세례가 죄를 씻어 깨끗케 하는 정화의 이미를 가지느니 만큼 성령의 세례는 죄를 제거하는 정화하는 사역인 것이다. 개혁신학은 세례의 본질적인 이념은 죄를 씻어 깨끗케 하는 정화라고 솔직히 주장한다. 이 정화의 이념은 구약의 모든 씻어 깨끗케 하는 의식들에 내재하였으며 요한의 세례도 그러하였다(시 51:7; 겔 36:25; 요 3:25-26). 이점에서 예수의 세례는 이전 세례와 전연 동열에 있었다고 추상할 수 있다. 그가 만일 자기의 제정하시는 세례를 전연 다른 무엇의 상징으로 의도하셨다면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그것을 명시하셨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은 세례가 영적으로 씻어 깨끗케 하는 정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매우 명백하게 가르쳐 준다(행 2:38; 22:16; 고전 6:11; 딛 3:5; 히 10:22; 벧전 3:21). 물세례의 의미가 씻어 깨끗케 함이니 만큼 성령세례의 그것도 죄를 씻어 제거함으로 속사람을 정화함이다. 물세례가 중생을 상징한다고 보면, 중생에도 죄를 정화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리하여 성령의 세례는 죄인의 정화를 목적한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상징하는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들어가는 최초 의식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보편한 것이다. (박형룡 목사, ‘교의신학 구원론’ p.51-53)
성기호 목사는 한국의 성결운동주의자이며, 박형룡 목사는 한국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성기호 목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에서 깨끗함을 받는 단계가 있는데 이것이 성령세례이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박형룡 목사는 “물세례의 의미가 씻어 깨끗케 함이니 만큼 성령세례의 그것도 죄를 씻어 제거함으로 속사람을 정화함”이라고 주장한다. 성결교단과 장로교단을 이끄는 성기호 목사와 박형룡 목사는 죄를 씻는 물세례의 개념을 가지고 성령세례를 정의하고 있는데 위에서 살펴 본대로 이는 성경에 근거가 일체 없는 것으로 그릇된 것이다. 행 1:5, 행 1:8의 바른 번역과 해석이 없이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구분은 불가능하다. 행 1:5, 행 1:8에 기록된 성령세례는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것으로 죄를 씻는 물세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John Stott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물세례는 죄의 씻음(행 22:16)과 성령 주심이라는 두 가지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행 2:38은 구원의 두 가지의 측면이 세례와 연관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실체이다. 물세례는 죄의 용서함을 가져오는 성령세례의 외적 표적이며 확증이다. 성령세례(Spirit-baptism)는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경험이기 때문에 물세례(water-baptism)는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의식이다. (John R.W. Stott, ‘Baptism & Fullness-the work of the Holy Spirit Today’ p.36,43)
박형용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세례 요한은 외적이며 상징적인 물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내적인 참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박형용 목사, 논문제목 ‘구속사적 입장에서 본 오순절 성령세례사건’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논문집 제16권 1994, p.15)
물세례는 성령세례(중생)를 받았다는 외적 확증이다. 세례 요한은 외적이며 상징적인 물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내적인 참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내적인 정화와 재생을 가져오는 진정한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것은 그가 ‘메시아 왕’이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상징과 실재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말은 자신은 선구자로서 물세례가 자신의 역할의 초점이 되지만 예수님은 성취자로서 성령과 불세례가 그의 역할의 초점이 된다는 뜻이다. (박형용 목사, ‘사도행전 주해’ p.130,316)
레마 성경주석에서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성령세례를 가시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 물세례인데 이는 세례 요한의 경우에서 잘 증명된다. 즉 그는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했는데(막 1:8), 이는 그가 세례의 표징(sign)을 행하는 이요, 그리스도는 세례의 실체를 행하시는 분임을 단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같은 관계를 설명하신 적이 있다. 주님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말씀하시어 오순절 날에 있을 성령강림을 예언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상징과 실체라는 관점에 대조하여 풀이하신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레마 성경주석 ‘사도행전’ p.278)
고신대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성령세례는 기독교 교회에의 입교의식인 물세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 받음 곧 성령세례가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내용이라면 물세례는 그 사실의 외적 표현이요 공적 고백이다. (고신대학원 교수회, ‘성령론 연구보고서’ p.51)
김영한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중생과 구원과 성령의 세례는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반드시 물세례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신앙고백이 있는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표징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이 단지 의식적으로만 그칠 때 그렇다고 볼 수 없다. (김영한 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논문집 ‘성경과 신학’ 제20권에서 발췌 1996, p.632-3)
이영훈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 있는 세례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뜻이 세례가 아니고 침례인 것을 알 수 있다. 침례라는 것은 완전히 잠겨서 자아가 죽어지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물의 침례가 구원받는 이들의 외적 상징으로서의 의식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침례는 구원받는 이들의 영적 변화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훈 목사, 1998년 10월 11일 ‘신학칼럼’ 기고문에서 발췌)
이상의 이영훈 목사는 “물의 침례가 구원받는 이들의 외적 상징으로서의 의식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침례는 구원받는 이들의 영적 변화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의 “물의 침례가 구원받는 이들의 외적 상징으로서의 의식”이라는 말과 “성령의 침례는 구원받는 이들의 영적 변화의 체험이다”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물의 침례는 구원 받는 이들의 외적인 상징이지만 성령의 침례는 구원 받는 이들의 영적 변화 즉 내적인 실체라는 말이다. 물세례 즉 물침례는 외적인 상징이며 성령세례 즉 성령침례는 내적인 실체라는 주장인데 이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이상에 열거한 신학자들은 John Stott가 말하는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실체이다. 물세례는 죄의 용서함을 가져오는 성령세례의 외적 표적이며 확증이다. 즉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다”라는 주장과 전혀 같은 논리를 가지고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물세례는 죄의 씻음에 대한 상징적인 의식이다. 즉 내적인 죄의 씻음 곧 죄의 용사함 받음이 물세례의 실체이며 물세례 자체는 내적인 죄 씻음의 외적인 의식이다. 따라서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실체이다”라는 주장은 외적 의식의 물세례 받을 때 내적으로 실제적인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주장인데 이는 성경에서 일체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마 3:11; 눅 3:16; 행 1:5)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베푸신 물세례(눅 3:22-23; 요 4:1-2)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세례는 죄의 씻음 곧 죄의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의식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성령세례 곧 성령님의 권능을 받는 것이다(행 1:5,8). 따라서 이상의 성경의 기록은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 결코 아님을 확증한다.
이종성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는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9:1-19에서 물세례와 성령과는 인과관계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성령을 받은 후에 또 다시 물세례를 받았다. (이종성 목사, ‘성령론’ 1992, p.326-7)
이상에서 이종성 목사는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라고 하여 물세례는 성령에 의한 세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물세례와 성령과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한편으로 “물세례와 성령과는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 앞뒤의 주장이 횡설수설한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이종성 목사는 “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라는 뜻이다”라고 하여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동일한 세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또한 이종성 목사는 “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를 영어로 표현하면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is administered by the Holy Spirit’이며, 성령 안에서 세례를 영어로 표현하면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is administered in the Holy Spirit’가 되어 서로 전혀 다른 뜻이 된다. 따라서 “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바른 주장은 “성령세례라 함은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며, 성령 안에서 성령(님)의 불로 세례를 받는다는 뜻이 있다”이어야 한다.
차영배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그리스도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 이름으로 받는 세례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요한의 세례나 예수 이름으로 받는 세례나 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이므로(막 1:4; 행 2:38)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차영배 목사, ‘성령론’ p.148,151,158)
성령세례에 관한 말씀은 요한의 세례를 다룰 때 이미 언급했지만(마 3:11; 요 1:33) 요한의 세례와는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령의 세례도 물세례와 같이 제자됨, 옛 사람의 죽음, 죄사함, 성결의 역사 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줄 수 없고, 예수님께서 직접 기름 붓듯 부으신다. 이점이 물세례와 다르다. (차영배 목사, ‘성령론’ p.159-160)
이상에서 차영배 목사는 ‘그리스도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면서 ‘요한의 세례와는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여 앞뒤의 말이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두 가지를 포함한 세례이지만 요한의 세례는 오직 물세례만이기 때문이다. “성령세례도 물세례와 같이 제자됨, 옛 사람의 죽음, 죄사함, 성결의 역사 등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김의환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행 1:5 ‘성령으로 세례를,’ 요한의 물세례(눅 3:3 참조)와는 다른 것이지만(11:16),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며 보충하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요 3:5). 행 19:3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구분 짓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다. 행 19:5 ‘예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로서(마 3:11) 이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김의환 목사 편찬대표, ‘큰 성경’ 1995)
이상에서 “성령으로 세례는 요한의 물세례와는 다른 것이지만,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며 보충하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결론적으로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님의 성령세례는 다른 것이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또한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구분 짓는 가장 확실한 표현이다”라고 하여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님의 성령세례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상의 글에서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같은 것이라고 했다가 또한 다른 것이라고 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이상의 주장 가운데 “예수 이름으로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로서”라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행 19:5의 예수 이름으로의 세례는 물세례이며 성령의 세례가 결코 아니다. 행 19:5-7에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는 오직 물세례만이며,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라는 기록은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먼저 물세례를 베풀었고 곧 이어서 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한 것을 의미한다. 예수 이름으로의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두 종류의 세례를 포함하는 세례이다. 따라서 ‘큰 성경’의 ‘예수 이름으로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라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김명용 목사가 말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하나로 존재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성령으로 받은 세례이지 예수의 세례가 따로 있고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김명용 목사, 장로회신학대학 논문집 제22집 1990. 논문 제목: ‘오순절운동의 성령론의 특징과 문제점’ p.190)
이상의 “예수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는 성령으로 받은 세례이지 예수의 세례가 따로 있고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는 주장은 눅 3:16, 요 4:1, 행 8:14-19, 행 9:17-18, 행 10:44-48, 행 19:2-6에 기록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그릇 연구한 데서 온 것이다.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실체이다”라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눅 3:22-23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눅 4:1-2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물세례는 외적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라는 주장은 이상의 성경에 기록된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생긴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라는 주장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물세례를 받을 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인 성령세례를 자동적으로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를 해석할 경우에 이상의 성경기록의 해석은 절대로 불가능 하다. 만약에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라는 주장이 맞는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에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베푼 외적인 물세례를 받을 때 내적인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물세례를 받았다면 별도로 성령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그들은 장차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고,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물세례를 베푸신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 후 부활승천 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베푸신 물세례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을 분석하면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절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 8장의 사마리아 교인들과 행 19장의 에베소교인들은 물세례를 받고 난 후에 별도로 사도들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이다.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다”라는 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황당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김세윤 목사가 말하는 예수님이 받으신 물세례
복음서의 기사에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내리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명을 부여받은 것이 나와 있다(막 1:10). 예수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권위와 사명을 부여받았으므로, 다시 말해 어떤 의미로는 예수의 권위와 사명은 요한의 세례(혹은 요한)를 통해 부여되었다. (김세윤 목사, ‘예수와 바울’ 2001 p.154,155)
이상의 김세윤 목사의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내리시며, 예수의 권위와 사명은 요한의 세례(혹은 요한)를 통해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막 1:10의 그릇된 연구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리시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성경의 근거는 일체 없다.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에게 성령이 내리시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요단강의 물속에 계시어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내리시었는 말인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물 속에서 물세례를 받으신 후 요단강 물속에서 강 밖으로 나오셔서 강 뚝에서 기도하실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물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경우에 많은 신학자들이 이를 기반으로 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예수님이 요단강 속에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 곧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은 마 3:16, 막 1:9-10, 눅 3:21의 기록을 통하여 확증된다.
서철원 목사의 주장: “예수님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 받아 메시야로 임직되었으므로 메시야 시대 곧 구원의 시대가 열려졌다.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주기 위하여 먼저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했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 의해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였다. 여기서 복음서 저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에게 임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령세례는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음이라고 해야 더 타당하다. (서철원 목사, ‘성령신학’ p.63,108-109)
서철원 목사는 이상에서 “예수는 세례 요한에 의해 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였다. 여기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물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에게 임하였다고 기록한다”고 하여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세윤 목사와 서철원 목사가 “요한에게서 물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말은 예수께서 요단강의 물속에 머물러 계시면서 물속에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즉 요단강의 물 안에 계실 때 성령이 강림했다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예수님의 물세례와 성령강림은 장소와 시간이 일치한 사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복음서의 어디에도 요한에게서 물세례 받을 때, 요단강 안에 계실 때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기록은 일체 없다. 사복음서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고 나신 후, 강에서 올라오신 후, 즉 요단강의 물속에 계시지 않고 요단강의 물 밖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실 때 성령이 강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물세례와 성령강림은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진 사건이 절대로 아니었다. 김세윤 목사의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내리시며, 예수의 권위와 사명은 요한의 세례(혹은 요한)를 통해 부여되었다”는 주장과 서철원 목사의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물세례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주장은 사복음서의 기록을 자세히 읽어 보지 않고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말로서 황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여 예수님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하셨고, 또한 예수님의 권위와 사명은 요한의 세례(혹은 요한)를 통해 부여되지도 아니하였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하셨다.
120명의 제자들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했다.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는 예수님께서 삼여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시고 난 후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은 세례 요한에게 삼년 전에 물세례를 받고 아직까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음이 확증된다. 120명의 제자들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했다. 따라서 행 1:5의 해석에서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이다”라고 주장은 그릇된 것이며,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사마리아 신자들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했다.
행 8:12-15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2-15의 해석을 위해서는 먼저 이 구절들에 나오는 “성령 받음”(to receive the Holy Spirit)에 대한 바른 번역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모든 한글성경과 모든 영어 성경의 번역은 완전한 오역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들이 성령님을 ‘lambano’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한글로 “그들이 성령의 권능충만(성령충만)을 받았다”로, 영어로는 ‘They were filled wit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로 번역되어야 한다. 또한 성령충만과 성령세례와 동의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행 8:12-15의 해석은 가능하다. 행 8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이와 같이 물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세례는 받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베드로와 요한이 파견되어 그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하므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사마리아 신자들은 결코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하였다. 행 8:12-15은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지만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가 아니며,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기록이다.
바울은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시차를 두고 물세례를 받았다.
행 9:17-20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사울)은 3일 동안 눈먼 봉사였었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눈을 다시 뜨게 되었고, 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충만(성령세례)을 받고, 일어나서 곧 바로 물세례를 받았다. 여기의 세례는 행 10:47-48에 근거하여 물세례를 의미한다.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와 물세례를 각각 다른 시간에 별도로 받았다. 그는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절대로 받지 아니하였다. 바울의 경우에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가 아니며,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기록이다.
고넬료는 성령세례를 먼저 받고 나서 시차를 두고 물세례 받았다.
행 10:44-48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행 10의 고넬료의 해석을 위해서는 행 8:12-15에 나오는 “성령 받음”과 같이 행 10:47에 나오는 “성령 받음”을 바르게 번역해야 한다. 헬라어에는 “그들이 성령님을 ‘lambano’했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한글로 반드시 “그들이 성령의 권능충만(성령충만)을 받았다”로, 영어로는 ‘They were filled wit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로 번역되어야 한다. 또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동의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행 10의 해석은 가능하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지들의 경우에 그들은 베드로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성령세례를 받았고, 성령세례를 받은 후 곧 이어서 물세례를 받았다. 물세례 받을 때 성령이 임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든지, 성령이 임하여 성령세례를 받을 때 같은 시간에 물세례를 결코 받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지 아니했다. 행 10장의 고넬료도 행 8장의 사마리아교인들과 같이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가 아니며,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에베소 교인들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했다.
행 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후에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베풀었고, 그리고 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함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방언과 예언 곧 성령세례를 받게 하였다. 에베소 교인들의 경우도 행 10장의 고넬료와 행 8장의 사마리아교인들과 같이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하였다. 행 19:1-7에 “물세례는 외적인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외적 씻음의 실체가 아니며,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 한 구절도 없다.
John Stott를 위시하여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에 근거가 일체 없는 “물세례는 외적 씻음이며 성령세례는 내적 씻음이다. 물세례는 성령세례의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실체이다”라고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세례라는 말이 물세례와 성령세례에서 같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마 3:11, 눅 3:16, 막 1:8, 요 1:33, 행 1:5, 고전 12:13에 기록된 성령세례의 요소(수단, 도구)를 해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특별히 행 1:5, 행 1:8, 행 2:3-4에 기록된 성령세례의 뜻과 성령충만과의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영혼사랑 갈렙처럼
:+: 물 세례와 성령세례 :+:
이제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차이를 알아보겠습니다. 물 세례는 성령 세례와 다릅니다. 물 세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성령 세례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곧 성령 세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2:3 참조).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있을 때, 그 성령의 인치심이 있을 때 구원의 역사와 확신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 구원의 확신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분의 변화, 위치의 변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 자식에서 천국 자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세 가지 패턴으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함께 임하는 것입니다. 둘째, 먼저 물 세례가 있고 성령 세례가 나중에 오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 세례가 먼저 오고 물 세례가 나중에 오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이 세 번째 경우입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또 한 가지 차이는, 물 세례는 사람이 주고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 증표로 물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더욱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합니다. 믿음이 생기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을 합니다. 사랑의 은사, 섬기는 은사, 상담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행정을 잘하는 은사 등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주어지는 은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눈만 감으면 나쁜 생각이 나서, 운동을 해도, 책을 읽어도, 텔레비전을 봐도 나쁜 생각이 없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한 생각이 늘 그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악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나쁜 생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님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로 둔다면 우리는 변합니다. 세상도 변합니다.
실제로 오순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성령의 역사가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언어가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말할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의 언어, 용서의 언어가 생깁니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앞부분을 보면, 홀연히 성령이 임하셔서 성도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땅에 조용히 오셨던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성령님은 공개적으로, 시끄럽게, 강렬하게 임하셨던 겁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 마음을 주셔서 강퍅했던 마음을 깨뜨리셨습니다. 그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사도행전 2장 6-7절을 보면,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놀라며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에 비추어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친구들이 놀랍니까? 친척들이 놀랍니까? 혹시 직장 동료들이 여러분이 교회 다니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조용할 수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알게 마련입니다.
성령 받은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 2:7). 이 말은 곧 ?저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한바탕 소동한 후에 또 말합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행 2:12). 이는 조롱하는 말이었습니다. 성령 받은 이들에게 비판과 조롱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베드로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십시오.
겁쟁이 베드로, 비겁한 베드로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 인간?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성령 인간으로 변신한 그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 3,000명이 회개했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도 일으켰습니다(사도행전 3장 참조). 그뿐 아닙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 후에는 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많은 숫자입니다. 성령님으로 인한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 도서출판 두란노 , 바람처럼 불처럼 중에서 –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영심이 원글보기 : 영심이
메모 :
물 세례 와 성령 세례 > 큐티 나눔터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HRV)
1:5 For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in a few days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NIV)
본문에서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나온다. 세례는 교회에 편입되는 의식이다. 그렇다면 ‘물 세례’와 ‘성령 세례’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는 물 세례 인가? 아니면 성령 세례인가?
초대 교회에서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했다. 이 두 세례의 차이는 성령님의 이적(異蹟, 奇蹟, miracle)을 동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이 이를 가시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에서는 왜 이렇게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했는가? 오늘의 본문에서 이 답에 대한 단초 (端初, 실마리, 힌트, hint)를 얻을 수가 있다. 즉 ‘물 세례’는 세례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이고 ‘성령 세례’는 주님이 베풀었던 세례라고 한다.
공동체는 계통(系統)이 있다. 계통이란 “누가 혹은 어떤 복수의 주체(主體)가 이 공동체를 시작했고 전승(傳乘)되면서 성장하여 현재에 이르렀는가?” 이다. 가문으로 치면 족보가 계통이 된다. ‘이스라엘’ 혹은 ‘유다’로 표현되는 구약교회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면 신약교회는 누구로부터 비롯되는가?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신약교회의 시발점은 ‘세례 요한’이다. 왜냐? 세례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세례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2개의 교회가 있었다. 주님 이전에 있던 ‘세례 요한의 교회’와 주님 이후 ‘주님의 교회’였다. ‘세례 요한의 교회’는 ‘주님의 교회’를 준비하는 교회였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교회’는 요한의 순직 이후 그 사명을 다했지만 주님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례 요한의 교회’를 ‘주님의 교회’에 편입시켜야만 했다. 이것이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구분했던 이유이고, 이후 ‘물 세례’는 ‘성령 세례’로 대체가 되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통합되었다.
‘성령 세례’는 성령님의 이적이 가시적으로 표현되는 세례이다. 이렇듯 주님이 초자연적으로 ‘성령 세례’을 베푸신 이유는 (1)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과, (2)‘물 세례’를 ‘성령 세례’로 통합시켜 교회의 계통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함이었다.
현재는 어떠한가? 더 이상 ‘요한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 주님의 교회는 모두가 한 계통이요 또한 세례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주님이 더 이상 이적이 나타나는 세례를 베푸실 필요가 없다. 이제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가 통합되어 그냥 하나의 ‘세례(洗禮)’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는 말씀과 일치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역사는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고 이들이 바로 세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HRV)
12:3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NIV)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성령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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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권위의 본질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즉 요한은 외적이며 성례전적 측면에서 그리고 성령 세례의 예비적 단계로서 물을 통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는 내적이며 본질적 측면에서,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정결과 중생과사죄의 은총을 가능케하는 구속의 완성적 측면에서 성령을 통해 각자의 심령에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다.
한편 물과 불, 이 두 단어 바로 앞에 나와 있는 ‘엔(ἐν)’은 도구격 조사’…로서’로 번역되지만 분명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성령은 마치 물과 같이 세례에 대한 방편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엔’을 사용한 것은 두 종류의 세례가 지니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와 그 각각의 효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세례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태는 여기에다가 흔히 성경 문학적으로 볼 때 정화, 정결, 심판 등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불’이란 대칭 용어를 사용함으로 성령 그 자체보다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본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실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불과 같은 뜨겁고 강렬한 역사로서 믿는 자들에게는 내적인 성결과 열정을 제공하였고 불신자들에게는 종말적으로 임할 심판을 예고하였다(행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3)
어쨌든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은 단순히 거룩한 예식의 측면에서 물을 통한 세례를 집례(執禮)했지만 신적 권위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는 성령을 통해 각 심령에 당신의 내밀하고도 뜨거운 불 세례를 집례하셨다. 이 같은 성령 세례는 예수의 승천 이후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공적으로 활발히 시행되어 오고 있다.
한편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를 성령 세례와는 완전히 관계없는 단순히 물로써만의 형식적 예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하나의 형식적 예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 요한의 세례는 예수의 불 세례를 준비케 하는 예비적 단계로서, 이 역시 성령의 확실한 조명과 후원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과 그에 따른 불 세례가 있기 전에도 성령께서는 인간 구원과 진리 전파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그 일에 부름받은 사역자들의 활동에 깊이 개입하셨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또한 한 가지 사실은 요한이 무리들에게 표현한 바 자신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시제와 관계된 부분이다. 요한 자신의 세례에 대해 ‘세례를 주었거니와’인 부정과거형으로 언급한 데 비해,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는 ‘세례를 주시리라'(밥티세이, βαπτίσει)인 미래형으로 언급하였다. 이말에 대해 예수께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재차 확증해 주셨다(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이로써 우리는 인간 세례 요한의 단회성과 불완전성 및 한시성(限時性)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세례의 완전성과 영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예수의 이와 같은 신령한 세례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모든 심령들에게 성령을 끊임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요 16:7; 행 2장).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LIST
물세례, 성령세례 (행 19:1-7) — 생명샘교회
* 물세례, 성령세례
* 사도행전 19:1-7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 본문해설 및 적용
1. 에베소에 당도한 바울
제 2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1년이 채 못되는 시간동안 쉬면서 힘을 충전하고 다음 선교 계획을 구상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드디어 제 3차 전도여행의 장도에 올랐습니다. 제 3차 전도여행은 제 1차, 2차 전도여행 때에 세웠던 교회들을 방문하여 교회들을 든든하게 하는 목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우선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돌면서 교회들을 방문한 바울은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제 2차 전도여행시 잠시 머물며 세웠던 교회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보살피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가 다녀가 예수를 전한 곳이기도 합니다. 아볼로의 복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고 세례요한의 세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온전한 복음을 일러준 바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전한 복음을 갖게 된 아볼로는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 교회에 가서 그 탁월한 언변과 방대한 성경지식으로 유대인들의 반론을 물리치고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2.믿었는데 성령을 못 받을 수 있나?
아볼로가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 교회를 보살피고 있는 상황가운데, 바울이 에베소에 당도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런데 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 구절은 적지 않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게 시도되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믿었는데 성령을 받지 못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성령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됩니다. 고린도전서 12:3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믿기만 하면 그는 성령을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었다는 얘기는 이미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뜻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만 받았으므로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이 틀림없이 믿는 사람들임을 명시하고 있고, 또한 제자들이라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믿는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제자란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들을 의미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은 것이 틀림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성령을 받은 것임에도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들에게 성령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질문을 했을까요?
그것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성령세례에 두 가지의 종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구원성령세례와 능력을 얻게 하는 능력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믿었으므로 구원을 얻게 하는 구원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고, 또한 예수님의 제자였지요. 구원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구원성령세례는 한번 부어지면 또 다시 부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능력성령세례는 구원성령세례과는 별개로 부어지는 성령세례입니다. 구원과 능력이 같이 임하기도 하지만, 구원은 바람과도 같아서 언제 임하는지 알 수 없게 임한다면, 능력은 명확한 현상을 가지고 임합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성도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었지만, 뜨겁게 예수님을 체험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 역시 그렇게 이해하면 쉬울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 체험 전에도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더욱 강렬하게 체험한 것이지요.
3. 성령세례를 받았으나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고?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에베소의 제자들이 믿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에 대해 듣지도 못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성령님을 모를 수 있을까요? 성령님이 임해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을 설명하실 때에 성령님을 바람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언제 임한지도 모르게 성령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그 순간에 성령님은 불현듯 우리 내면에 들어 오시기에 얼마든지 우리가 인지를 못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구원성령세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성령님에 대해서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예수님을 주인으로 맞아 들일 수 있듯, 성령님에 대해서도 지식이 있어야 성령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일하시고 역사하시는지를 모르는데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님에 대한 바르고 온전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님을 무시해서도 등한시해서도 안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불릴만큼 온통 성령님의 이야기로 가득하고 성경 이곳 저곳에 성령님은 또렷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 역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이루어 진 것이고, 예수님의 천상사역은 주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해 무지하면 우리는 온전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4. 세례에도 종류가 있다고?
바울은 그들에게 어떠한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어봅니다. 세례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의 세례였습니다. 즉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는 세례였지요.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기 이전에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세례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을 할 때에 그들은 세례를 주어 이방인들의 부정함을 씻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 역시 죄를 씻는 정결 예식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은 결코 사람의 죄악을 씻어내지 못합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것을 공표하는 의식이었을 뿐입니다.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만 씻겨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음을 일러 줍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들이 이때에야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이들은 이미 믿는 제자들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그들의 믿음을 공표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세례는 불세례요, 성령의 세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포함합니다. 성령님은 불로 표현되시기도 하지만 물로 표현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불처럼 임하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정함을 태워 버립니다. 성령님은 또한 물처럼 임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이 주는 물세례가 아닌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물세례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는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표하는 의식이며, 또한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왔음을 고백하고 인정받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로만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그것에 대한 표징으로 물세례를 받을 때에 비로소 의미 있어 지는 것입니다.
5.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보인다고?
바울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 그들에게 안수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고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성령님은 영이시므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에 입각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현상과 은사는 본질적인 것은 아니며,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과 은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임하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가시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할 경우 구원의 확신이 더욱 공고해질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도 더욱 구체화됩니다. 사람은 감각적이어서 만져지지 않는 것을 개념적으로만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현상을 체험하는 것은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여 사랑이 구체화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 현상이 나타나게 하기도 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의 은사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은사가 필요치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은사를 허락하셔서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는 권능을 얻으며, 악한 영들을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 바로 은사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현상과 은사에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활용하여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욱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6.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구원을 얻게 하는 성령세례와는 별개로 더욱 감각적으로 성령님을 체험하고 은사와 능력을 받는 체험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경험해 왔습니다. 그것을 굳이 용어로 개념화한다면 능력성령세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성령충만으로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즉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으로 구별을 하는 것이지요.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고 성령충만은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용어만 다를 뿐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다만 성령충만에 해당할 만한 것을 성경에서는 성령이 임하는 것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저는 능력성령세례라고 하는 표현을 선호할 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혹은 그 이전에 믿을 때에 이미 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시 성령이 임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원성령세례와 능력성령세례로 표현하면 훨씬 이해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용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념입니다. 우리는 믿을 때에 이미 성령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님이 완전히 우리를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것을 갈망하며 체험하며 누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를 알아보자 성령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차이를 알아보자 성령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
물세레와 성령 세례는 다르다.
물세례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
반면 성령 세례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곧 성령 세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영접했다 할지라도
성령님을 지식이나 생각이나 관념으로 믿는 것과 성령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체험한 것과는 다르다.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있을 때 구원의 역사와 확신이 생긴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 구원의 확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 신분의 변화와 위치의 변화에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 자식에서 천국 자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물세례와 성령 세례가 함께 임하는 것이다.
둘째 물세례가 먼저 있고 성령 세례가 나중에 오는 것이다.
셋째 성령 세례가 먼저 오고 물세례가 나중에 오는 것이다.
고넬료가 세 번째의 경우이다.
물세례와 성령 세례의 또 한 가지 차이는 물세례는 사람이 주고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주신다는 것이다.
구원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그 증표로 물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으면 더욱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난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다.
믿음이 생기고 지혜의 말 지식의 말을 한다.
사랑의 은사 섬기는 은사 행정을 잘하는 은사 등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특별히 주어지는 은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사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눈만 감으면 나쁜 생각이 나서 운동을 해도 책을 읽어도 텔레비전을 봐도
나쁜 생각이 없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악한 생각이 늘 그 안에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 해도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면 악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나쁜 생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다.
성령님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둔다면 우리는 변한다. 세상도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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