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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9.06.23)] / 요한복음 강해(25); ‘나는 양의 문이라'(송태근 목사)[고화질영상녹화](요 10:1-7)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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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
그리고 목자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목자가 늘 자기들 곁을 지키며 보살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 …
Source: www.prok.org
Date Published: 10/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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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그 세 번째 – 양의 문이신 예수 – 뉴스앤조이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6/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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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0장7절-8절 “나는 양의 문이라” 2021년 3월25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
Source: ebctl.org
Date Published: 9/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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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의 문이다 (렘 37:2~5, 요 10:7~10) – 목회자료 – 기멀전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원문의 뜻은 양들을 위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문이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0/25/2022
View: 5878
양의 문 되신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10장 1-10절
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5/2021
View: 9357
“나는 양의 문이다” : 기독교 – 기독일보
“나는 양의 문이다” … 성막 문을 양의 문이라고 합니다. 양문이란 양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성막에 들어갈 때 혼자들어가는 것은 …
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12/2022
View: 490
요한복음 10:7-10 나는 양의 문이다 – 월산교회
나는 양의 문이다 / 요10:7-10양은 나약하고, 미련한 가축입니다.양은! 삼키려는 맹수 앞에서, 공격을 하거나 방어할 수 없고, 빨리 도망할 수도 없고 …
Source: wsch.or.kr
Date Published: 1/22/2022
View: 4673
설교모음 –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양의 문이나 선한 목자나 의미는 같습니다. 양들은 문을 통해서만 우리에 들어갈 수 있고, 선한 목자를 만나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
Source: dabia.net
Date Published: 7/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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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는 양의 문이다
- Author: S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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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6.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E0rdVq9iq5s
뉴스앤조이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저는 새해를 맞이하여 일월에는 문을 주제로 하여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묵상한 첫 번째 문은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 사도가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된 사건을 통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과 걱정 근심 등 그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벗어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여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래야 주님이 들어오셔서 우리와 같이 거하시며 먹고 마시는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묵상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두 가지 문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는데, 오늘은 그래서 세 번째 문입니다.
문이 많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문을 자주 사용하니까, 그런 문쯤은 이제 들고 나고 하는데 이골이 났으니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벌써 1절에 문이 등장하지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문이 등장하는데, 어떤 문이냐? 양의 우리, 그러니까 양을 가두어 두고 보호하는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1절부터 5절에 걸쳐 예수님이 말씀을 끝냈는데,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5절까지 기록한 다음에, 이어서 재미있는 말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6절).”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이 우리 지금 듣기로는 어려운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이해가 잘되는데, 그 당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듣던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친절한 우리 예수님, 그것을 다시 설명해 주실 수밖에요….
그렇게 7절 이하에서는 1절에서 5절까지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살펴보면 그 내용이 약간 달라집니다. 뭐가 달라졌을까요? 앞에서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목자’라 하셔서 은근히 예수님이 목자인 것을 드러내고 있는데 또한, 이것은 11절, 14절에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11절).”
“나는 선한 목자라…(14절).”
그런데 유독 7절 이하에서는 다른 말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앞에서는 예수님은 양 우리를 문을 통하여 들어가고 나오는 목자인 데 비하여, 뒤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양의 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바로 오늘 본문, 즉 10장의 키포인트라 생각합니다. 자, 이제 그 키포인트를 말씀드릴 터인데, 그전에 이것 하나 생각하고 넘어갑시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1절).”
이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데 드나드는 문이 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다른 데로, 그러니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다.
그 말은 양을 가두어 놓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는 사람이 쉽게 넘어갈 정도로 낮다는 말이 되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면 그 우리는, 그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는 양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사람이 넘어가는 데까지는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 일어나게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양의 우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지 않는 목자 아닌 다른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울타리를 넘어다닐 수 없고, 오직 문으로만 다닐 수 있다. 자, 이런 기초 지식을 가지고 그다음을 읽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7절).”
1절에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을 언급하시고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목자다, 라고 말씀하시더니 7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 직접 밝혀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니요? 양의 문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개념이 바로 떠오르십니까? 문이란, 우리가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어느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에 거쳐 가는 장치, 시설을 말하니까 양의 문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동물인 양으로 들어가는 문,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문이라는 말을 쓸 때에는 우리 흔히 이렇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의 문, 차의 문….병원의 문…. 그래서 우리가 흔히 그것을 말할 때엔, 집 문, 차 문, 병원 문, 이런 식으로 줄여 말하는데 양의 문이라면 무슨 뜻일까요? 물론 양의 문을 병원의 문을 병원 문이라고 줄여 말하는 것처럼, 양 문이라 줄여 말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을 지을 때에 양문 교회, 이런 식으로 짓습니다. 아마 전주에도 양문교회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 양의 문이라 할까요? 양이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데, 또 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다, 하셨으니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데…. 그래서 우리 성경으로는 양의 문이라,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을 찾아보면 무언가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먼저 영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양의 문이란 말에, gate for the sheep이라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양을 위한 문이지요. 양을 위한 문이라 함은, 양의 문,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양이 들어갈 수 있게 하여 놓은 문, 양을 위하여 만들어 놓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곧 1절에 나오는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강도요 절도이지만, 우리의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목자라 했는데, 바로 그 문, 목자가 드나드는 문, 그 문을 7절에서는 예수님이 그 문의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문은 목자만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양도 드나드는데, 내가 바로 그렇게 양이 드나드는 양의 문이다, 그것을 표준 새번역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따라서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양이 안전한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양이 드나드는 문, 그렇다면 양이 드나드는 문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 문을 통하여 양이 들어가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양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당연히 양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곳은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제 양이 양 문을 통하여 들어간 곳,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바로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게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실제적인 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을 열고 들어가 양 우리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생명을 얻게 되며, 두 번째로 풍성히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니다.
우리를 벗어난 양은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겨우 목자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양의 우리로 돌아온 사건… 그때 돌아온 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밖을 나가서 맨 처음에는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자와 늑대의 호시탐탐 노리는 죽음의 위협에 어찌 한순간인들 편할 때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다가 겨우 살아나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 양의 목숨은 이제 부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목숨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양이 다시 우리에 돌아온 사건, 그것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풍성하다는 말을 다 아실 줄 믿습니다.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이지만, 풍성하다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지난번 묵상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묵상에서 계시록 3장 20절을 본문으로 하였는데, 계시록 3장 17절에 의미 있는 말이 등장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들, 곤고하다 가련하다, 벌거벗었다, 가난하다, 그런 말들이 바로 풍성하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다음에 지난주 본문 말씀인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면서 하시는 말씀, 계시록 3장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들어가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을 저는 해석하기를 기쁨에 겨워, 그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해 잔치를 벌이는 그러한 장면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잔치를 벌일 만큼 기쁨이 충만했으며 또한 그래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니만큼 음식이 얼마나 풍성했겠습니까? 그 풍성함이 바로 오늘 본문인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 내가 온 것은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비교급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급이니까 단순히 ‘풍성히’가 아니라 ‘더 풍성히’가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더, 지금까지 얻었던 것보다 더, 양들이 지금까지 우리 안에 있어서 먹고 있던 꼴 그것보다 더, 더 많이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는 양의 우리에 들어가면 생명을 얻게 되며, 꼴 또한 더 많이 더 많이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우리를 뛰쳐나갔다 다시 우리에 돌아온 양을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처럼 그리고 그 양을 애지중지 거두며 보살피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목자로서 양들에게 어떠한 것이 유익한 것인지, 어떻게 해야 양이 생명을 얻고, 어떻게 해야 풍성한 꼴을 먹일 수 있는지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양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양의 문이란 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1절을 해석하면서,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지만, 양은 그렇지 못하고 오직 우리에 있는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오직 양의 문을 통해서만 우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이 그래서 우리가 양의 우리에 들어가 푸른 초장을 만끽하며 더 풍성한 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지난번에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문이라는 것은 여닫는 데 소용되는 것이지, 만일에 그것이 결코 열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문이 아니라, 벽에 불과한 것이다. 문이란 말 자체에 이미 여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 앞에 보이는 문은 열려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이 마련해 놓으신 푸른 초장, 풍성한 꼴이 넘치는 그곳으로 들어가십시다.
지난 두 주간, 이번까지 세 번에 걸쳐서 우리 앞에 놓인 문을 보면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을 열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보여 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해, 또한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도록, 우리 곳곳에 문을 마련해 놓으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문을 여닫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렘 37:2~5, 요 10:7~10)
– 설교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한국인은 귀소본능이 가장 발달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어디엘 갔다가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본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본능 때문에 우리 민족은 유난히 고향을 찾고, 죽어서는 조상의 묘에 묻혀야 하고, 명절 때는 고향에 가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도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말들입니다.
영어로는 올라가는 기계라는 뜻의 ‘엘리베이터’(elevator)를 우리는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기계라는 뜻으로 ‘승강기’라고 합니다. 서랍을 빼낸다는 뜻으로 ‘드로어’(drawer)라고 하지만 우리는 빼냈다가 다시 닫는 의미로 ‘빼닫이’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이 분명하여 들어가는 쪽에서는 입구(entrance), 나오는 쪽에서는 출구(exit)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의미로 양쪽을 ‘출입구’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들어갈 때는 입구, 나올 때는 출구의 기능이지만 우리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출입구의 통합적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승강기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도 전에 탑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문의 역할도 복잡합니다. 인터넷에 찾은 우리나라 문을 기능 별로 찾아 봤습니다. 문은 기능에 따라 성문(城門), 궐문(闕門), 아문(衙門), 객사문(客舍門), 정려문(旌閭門), 홍살문(紅箭門), 대문(大門), 중문(中門), 정문(正門), 후문(後門), 샛문(夾門;側門),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또는 仁王門), 암문(暗門), 수구문(水口門) 등으로 나뉩니다. 이 문들이 뭔지 알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문이 복잡합디다.
문의 역할은 들어가고 나오게 하는 통로입니다. 들어오게 하고 나가게 하는 것이 문의 역할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들어가며 나오며”라고 하는데 이런 성경적 의미로 볼 때에 출입구라고 하는 우리의 말이 더 정확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또 다른 자기 증거는 “나는 양의 문이다”…(I am the gate)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문이신 예수님께로 들어가면(enter) 구원을 받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come in and go out) 꼴을 얻습니다.
목장의 하루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아침에 목자가 양을 불러내고, 양이 목자를 신뢰하여 그 음성을 듣고 따라 나섭니다. 목자와 양과의 삶을 묘사한 목장의 삶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웨스트콧이라는 주경가는 “목장 생활의 요소는 첫째 안전, 둘째 자유, 셋째 보급 즉 먹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전과 자유와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목장에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삶을 얻습니다.
문이란 헬라어의 ‘투라’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의 문이란 정상적인 통로를 의미합니다. 넘어다니는 곳이 아니라 정상적이며, 안전하고, 평안한 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문입니다. 양이 들어가고 사람이 정상적으로 양에게 나아가는 유일한 통로가 ‘투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나오며 풍성한 꼴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내가 양의 문이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예수님은 양을 위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원문의 뜻은 양들을 위한 문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문이 되십니다. 문이 되는 것은 환영하는 것입니다. 문이 되는 것은 복잡하지만 꼭 있어야 하고 평안케 하는 도구입니다.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양들만의 문입니다. 양이 아니면 환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이 아니면 아예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양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리는 아무대로나 들어갑니다.
성경의 양은 선한 동물입니다. 거룩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반면에 이리는 악한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양과 이리를 대비하여 말씀하신 적이 많이 있습니다.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예수님을 “고난의 양”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29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세례 요한이 증언합니다. 그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대해 성경은 우리를 황송하게도 예수님처럼 양이라 부르십니다. 놀라운 은혜이고 크나 큰 영광이지요.
이 문이 양에게는 열려 있습니다. 이리에게는 닫혀 있습니다. 양에게 그 문은 들어오게 하고, 보호하고, 소유합니다. 그 문은 좁으나 들어가면 엄청나게 넓은 목장이 있습니다. 그 목장에서 양은 쉼을 얻고, 꼴을 얻고, 평안을 얻습니다.
1800년대 미국의 대초원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 어느 잡화점 주인에게 목장 주인이 들어와 양해를 구합니다. 울타리를 쳐야 하겠는데 외상으로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은 말합니다. “제이크씨, 이번 여름에 울타리를 칠겁니까?” “물론입니다.” “넓힐 겁니까, 아니면 줄일 겁니까?” “넓힐 겁니다. 강 건너까지 백만 평방미터 정도 확충할 계획입니다.” “좋은 계획이군요. 외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외상 거래를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때 주인은 말합니다. “울타리를 줄이는 사람은 소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것을 고수하는 것이지요. 넓히는 사람은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지요. 저는 항상 울타리를 넓히는 사람에게만 외상을 줍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믿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울타리를 넓혀야 합니다. 좁은 문이지만 이 문을 넓혀야 합니다. 이 문에 믿고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시온의 대로가 있고, 넓은 세상의 복이 있습니다.
양의 문이란 양이면 누구에게나 열리는 문입니다. 양이 두드리면 양에게 열리는 문입니다. 그런데 양이기를 거절하고, 두드리기를 주저합니다. 그래서 열리지 않고, 들어가지 못하고, 닫힌 채로 두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양이 되세요. 양에게 예수님은 열립니다. 이리가 되지 마세요. 두드리세요. 양이 두드리면 기쁘게 열어주시고 받아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문이신 것은 구원을 얻게 하시는 문입니다. “말미암아”라는 말은 “통하여”( through)라는 말입니다.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그를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습니다. 통하여 들어가야 구원을 받지, 비껴가거나, 넘어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비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비껴가는 것입니다.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예수다 라고 하는 사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비껴가는 사람과 넘어가는 사람에게 구원과는 멉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하여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나를 통하지 않고는”(except through me)라는 뜻입니다. 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문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에 이미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그 이름도 구원자이십니다. 그 외에 구원자가 없습니다.
그 구원자가 왜 문입니까? 예수님은 구원의 통로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싫어하고, 힘들어 하는 문입니다. 넓은 문은 세상으로 향한 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좋아하고 쉬운 문입니다.
어떤 분은 재미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지옥문은 넓게 열려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옥에서 곧바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께서 본향에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앞문을 계속 열어놓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지금도 열려 있고, 앞으로도 열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모든 세상의 끝이 올 때는 닫힙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미국 동부의 밀레니엄 극장에서 본 ‘노아’ 뮤지컬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방주를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동물들이 각각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모든 동물들이 다 들어가자 방주의 문이 닫힙니다. 문은 하나님이 직접 닫으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창 7:16). 그 뮤지컬에서도 문은 사람이 닫지 않고 서서히 저절로 닫혔습니다.
구원의 문은 열려 있을 동안에만 기회가 있습니다. 닫힌 후에는 열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는 “한번 닫힌 구원의 문 또 열려지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그 방주 안에는 온갖 꼴이 있습니다. 밖에는 홍수가 있지만 안에는 극도의 평안이 있습니다. 갇힌 것 같지만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간 것만 하더라도 무한한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열처녀의 비유를 보세요. 기름을 예배하지 못한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갔다가 돌아와서 문이 닫힌 다음에 열어달라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10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모든 상황이 끝난 것입니다. 그 때 다섯 쳐녀들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라고 애원했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였습니다. 무서운 상황이 아닙니까?
찬송가 257장 2절입니다. “오는 사람들은 지체말고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우리 행할 길은 구주 예수니 어느 누구나 오라”. 예수님은 문입니다. 지금도 열고 기다리십니다. 문이 열렸을 때에 들어와야 합니다. 문이 열렸을 대에 아무쪼록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문 밖에서 있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문 안에 들어오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꼴을 얻게 하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꼴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무엇이다”고 하신 많은 말씀 가운데 첫째가 “내가 생명의 떡이다”고 하신 것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떡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물며 양에게도 말할 필요 없이 꼴이 제일 중요합니다.
문 안에는 끝없는 초장이 펼쳐집니다. 양들이 좋아하는 온갖 푸른 풀이 있습니다. 양들이 마실 수 있는 맑은 시냇물이 있습니다. 그 문안에는 이리가 없는 안전 지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합니다. 꼴이 풍성하여 양들은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꼴이 얼마나 풍성한지 보세요.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문이 되신 이유입니다.
꼴은 생명의 풍성을 줍니다. 문 안의 꼴은 풍성한 생명을 주는 꼴입니다. 빈약한 꼴이 아닙니다. 병원에서 주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요. 겨우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식사입니다. 병상에서 겨우 호흡하며, 손가락을 힘들게 까딱거리게 하며, 말도 억지로 한 마디하는 빈약한 상태가 아니라 에너지가 넘치는 발랄한 젊은 생명이 풍성한 이런 은총을 문 안에서는 얻습니다.
풍성한 꼴을 주시기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 꼴은 부족함이 없는 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계셔서 꼴을 만드시고, 공급하시고, 먹이십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제2부 후반에 보면 절망거인(Giant Despair)으로부터 구출되는 낙심씨(Mr. Despondency)와 그의 딸 질겁(Much-afraid),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들의 순례길을 힘들게 만든 심약씨(Mr. Feeble mind)와 그의 삼촌 두려움씨(Mr. Fearing), 지팡이 없이는 조금도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 주저씨(Mr. Ready-to-halt)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유약한 인간의 모습, 인생의 여정이 아닙니다. 풍성한 꼴을 공급받고, 힘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양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꼴입니다. 힘입니다. 낙심을 없이 합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프랑스의 노틀담 성당은 유명한 이유가 있답니다.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곱추’ 소설 때문에 유명해졌습니다. 이곳에서 드골대통령의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잔 다르크의 복권식을 이곳에서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복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도 이곳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면 성당에 예수님의 가시관과 십자가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고 자랑합니다.
노틀담 성당의 전면 조각에는 천당문이 있고, 28 유대왕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후대에 조각하였다는 노틀담의 곱추와 노동자의 임금을 주지 않고 잘난 척 하는 신부는 기둥을 바치고 힘겹게 서 있습니다.
한 때에 교회는 천당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이나 십자가의 일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되심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유일한 문입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양으로 이 문으로 들어가 구원을 맛보며,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에 매일매일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꼴을 얻고 사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의 문 되신 예수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요한복음10장 1-10절
양의 문 되신 예수/ 요 10: 1-10
유대나라 하면 우리는 양들이 초원에서 뛰놀고 목자들이 양을 이끌면서 이 언덕
저 언덕을 넘어 다니는 그런 목가적인 분위기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목
자와 양이 어울려 다니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하면서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것과 같은 그런
정경을 보고 싶어서 유심히 살펴보았는데도 차가 다니는 길가가 되어서 그런지 모
르지만 그런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상이 하도 많이 변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고 계실 당시에는 예루살렘 주변과 갈릴리 일부 지역이 목초
지로서 유명했습니다. 많은 목자들이 자기 양을 끌고 유유히 걸어다니면서 풀을 뜯
기고 물을 먹이는 그런 평화로운 모습들을 어디서든지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에 왜 저런 말씀
을 하실까 하고 그들이 의아해 했을 정도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루종일 양을 먹이고 나서는 해가 기울고 어두움의 그림자가 다가오면
자기 양들을 몰고 공동 우리로 온다고 합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자기 개인 우
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목자들은 여러 가정이 합해서 공동 우리를 만
들어놓고 양들을 그 우리 속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돌담을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 만드는데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떼들을 문으로
다 들이고 나면 그 문 옆에는 문지기가 있어 밤새도록 그 양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하나 둘 나와서 문지기의 확인을 받고 우리
안에 들어가서 자기 양을 부릅니다. 수십 혹은 수백 마리 양 가운데서 눈으로 자기
양을 구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자기 양들만 알아들을 수 있
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그 목자가 자기 목자라는 것을 아는 양들은 전부 그 목
자 앞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참 멋있는 풍경입니다. 자기 양의 수가 조금 적은 경
우에는 가끔 양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목자의 소리를 듣
고 그 목자의 양들은 전부 모인다고 합니다. 이제 목자가 문을 나와서 초원을 향해
가면 그 목자의 양들만 우르르 따라 나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불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배경을 알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에다 비
유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은 막연히 짐작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기독
교의 가장 본질적인 진리가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왜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를 다시 한번
맛보기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
왜 예수님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 하실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생
명을 주시는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9절로 넘어가 봅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
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기만 하면 구
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10절은 그 의미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
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왔다.”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은 쉽게 말해 ‘생명
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는 구원자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
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
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칠 팔십 년이면 다 소진해서 없어지고 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명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보장
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육
신의 생명은 왜 영적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영생으로 이어지지를
못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이 진리를 간결하고 또 확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
하였느니라.” 한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사람 위에 죽음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
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서울 장안에만 해도 하루에 463명의 어린애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매일 500여명
의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
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태어
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
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속이
지 못 합니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있다고 해도, 성자나 위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 가운데서 갑자기 인물이 예뻐지고 맵시가 나는 사람을 보면
다들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아, 성형수술 받았구나.” 주저앉은 콧대가 우뚝 솟
고, 옆으로 찢어진 실눈에 쌍꺼풀이 예쁘게 드리워진 것을 보면 “성형수술 받았구
나. 어디서 받았니?”하면서 다들 부러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참 좋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다 아름답게 보이면 그것도 천국의 일면이겠지요.
그러나 이 다음에 태어날 자식이 문제입니다. 자기는 성형수술을 해서 코를 높이고
눈을 똥그랗게 만들고 광대뼈를 깎아내고 해서 아름답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식
만큼은 어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아기가 배속에서
성형수술을 받고 태어날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의 원래 모양을 닮아
납작한 코나 실눈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형수술로 흉한
모습을 감추려해도 자식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배속에서 교양을 배워서 나올 리도 만무하고,
죄인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옷을 입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못 속입니다. 자녀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나쁜 생각들이 그 아이들을 지배하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
까? 그리고 그들 역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
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단순
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서 받
아야 되는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필요
합니다. 여러분의 연세가 얼마인지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
관이 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못 받으면 망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천
만의 말씀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의 불꽃을 훔쳐
올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엡2:5).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납니까? 우리가 시체에게 기대할 수 유일한 것이 있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천만
에요. 우리가 노력한다고 영적 생명을 얻습니까? 천만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찾아와야 됩니다. 구원의 문이 되신 예수님 앞으로 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 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고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심어 주십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우리 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드디어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
듣게 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너무나 고귀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실 때 이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
다. 할렐루야!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서 오늘 귀한 말씀을
바로 여러분에게 들려주셨다고 봅니다.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나에게 오면
내가 영생을 주겠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
다.”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시는데 여러분이 돌아서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 다 구원
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 주
변 서초동 일대만 해도 90 퍼센트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 필요한데도 예수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들
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그들도 값없이 얻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이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만이 세상의 구
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
도밖에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는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
지 아니하고 담을 넘어가면 그는 강도요 절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보다 앞에 온
모든 사람은 강도요 절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오해하면 안됩니다. 구약 시대에 온 모든 선지자들을 두고 절도
와 강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눈을 뜨고, 하나님의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귀한 형제를 유대
나라 사회에서 축출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강도요 절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자칭 ‘메시야’ 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던 사
람들을 두고 강도요 절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 우리의 문은 하나 뿐입니다. 누구든지, 심지어 목자라 해도 그 문으로 들어와
야 됩니다. 양이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문 말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담을 넘어가는 자는 참 목자가 아니라 강도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
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 세상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독선주의니 배타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욕하고 비방합니다. 그들 생각에는 다원주의
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따
라서 어느 종교를 믿든, 그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좋겠
는데, 기독교는 유달리 타종교를 배척하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주장
하니 독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인들 중에는 이런 독선이 싫어서 예수를 믿
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이만재 씨가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한 것을 토대로 <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가 다 아는 상식적인 것들인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소개해 드리
겠습니다. 교회 가기 싫은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인 것 같다. 타종교, 타 종파를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 내 종파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말씀에서 그 이웃
은 이웃 종교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이기주의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교회 안 간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한다는 것과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사랑한
다는 것과 진리를 혼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타종교의 지도자들도 존경합니다. 우
리는 불교 믿는 사람들도 사랑합니다. 또 나름대로 각 종교에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수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은 하
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억지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존경하느니, 사랑하느니 하는 이런 값싼 이론 때문에 진주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돼지에게 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 아내가 내 아내이고, 내 아내가 당신 아내이니, 기분 좋은 대로 삽
시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을 존경한다, 사랑한다, 관
용한다 하는 말 때문에 뒤섞어 놓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아무도 안 합니다. 진리
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
니다.
지난 성탄절에 불교 방송에서 머리를 깨끗이 깎은 스님 아나운서가 “세계의 성인
중의 하나인 예수가 탄생한 것을 축하합니다.” 하고 축하 방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 흥분해 가지고 카톨릭의 어떤 얼빠진 신부는 감사의 답례를 한다고 요란을
떨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또 어떤 뉴스 앵커는 “드디어 모든 종교의 벽이 무너지
고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시발점이 시작되었습니다.”하고 흥분해서 소개를 했습니
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말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창시
자들을 보십시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은 분이 예수님 외에 누
가 있습니까? 날 위해서 피 흘려 죽었다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당당하게 인도할 권한을
가진 권한을 가진 구원자가 예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말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독선이
아닙니다. 바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말하는 것이 바른 진리
라면 설혹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는다 해도, 심지어 순교
를 당하게 된다 해도 우리의 주장을 굽히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훌륭한 장로였
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
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가 자기를 양의 문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솔직하게 말하라.” 이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 뜻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못된 놈, 참
람하고 건방진 놈.” 하고는 야고보를 끌어다가 저 높은 벼랑에서 집어 던졌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 할 지라도 굽혀서는 안될 진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
히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말만 들으면 비위가 상하는
분이 계십니까? 관용이 많고, 너그러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
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당신 손에 있는 보석은 가짜요.”라고 말하면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내 것은 진짜”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주장해도 지나친
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고 우리가 주장한다
고 해서 속이 좁은 것도 아니고, 배타적인 것도 아닙니다. 바른 것을 말할 뿐인 것
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인류의 구원자
입니다.
풍성한 생명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구원 곧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들어가며 나오
며 꼴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꼴을 얻는다”는 말은 쉽게 말해 초장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로 출입하는 자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좀더 다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10절입니다. 10절 중간을 보십시오. “내
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
리를 구원시켜 줍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놓고 손을 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당신 맘대로 하시오.”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
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 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 지 보여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두들겨 맞고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집으로 돌
아가시오.”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내팽개치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대에다가 그 환자를 싣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간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공무상 부득불 떠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어 자기
대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간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 사
마리아인은 곧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는 손을 털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십
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성하도록 계
속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속에 양의 문을 드나들면서 목자를 따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는 양의 행
복한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나를 초
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2). 날마다 목자를 따라 푸
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생명이 터질 것 같이 풍성해지는 것
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는 말을 오해하고는 예수님께서 만사
형통케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단보다도 더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그런 해석입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
십시오. 예수를 믿었다고 만사 형통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예
수님을 믿고 만사 형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은
절대 안 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만사 형통하게 되
면 영적인 생명이 건강해 지기보다 병들어 버릴 가능성이 십중팔구로 큽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사 형통하게 해 주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어떤 분은 이런 찬송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 지도 모릅니
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
라.”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찬송의 원래 가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 찬송가
를 작사한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라는 부인은 맹인으로 일생 동안 수천 개의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자라고 칭송을 받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사를 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문을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잘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바꾸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번역
하는 사람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교에서 자주 말하는 식으로 “만사
형통 하리라”하고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가사는 빨리 고쳐야 됩니다.
고쳐야 되는데 안 고치니까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예수 믿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기만을 바라는 허황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
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세상에서 만사 형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병원에 가서 보면 오랫동안 병상에서 고
생하는 환자는 숨만 빨딱빨딱 쉬고 있습니다. 분명히 생명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
들에게서 생명의 활력이나 풍성함, 능력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칠 줄 모르고 뛰는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생명은 숨
만 빨딱빨딱 하는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일하고, 창조하는
모습 속에서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십시오. 엄마가 주는 대로 잘 먹고, 또 힘있게 뛰놀고 하니까
그 애가 자라면서 생명이 터질 것처럼 풍성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이런 생명입니다. 그저 숨만 발딱발딱 쉬다가 천당이나 들어갔으
면 좋겠다 하는 그런 빈약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주신 생명이 그런
정도밖에 안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을
때 잠깐 기도하는 것 말고는 생명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주님
은 우리가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얻으면 그 생명의 풍성함을 맛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손에서 은혜의 말씀을 열심히 받아먹고 성령의 생수
를 맘껏 들이키며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숨만 빨딱빨딱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과연 풍성한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
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까? “주여 믿
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이 떠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의 마음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번번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 죄에게 끌려 다닙니까?
그런 대로 살고 있는데도 만족함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명은 아직 어린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이 어리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얻어야만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명이 더 풍성해지면 우리는 이팔 청춘의
젊은이들과 같이 약동하는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생명과 더불어 우리의 믿음 역시
매우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설혹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도 우리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족합니다.
어느 제자 반에서 저에게 카드 한 장을 보내왔습니다. 제자 반을 대표해서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들 모두의 생각을 담은 것 같습니다. 그 카드에 이런 글
귀가 있어서 제가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목사님, 아직도 많이 부족하
지만 이제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생겼어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
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하루하루를 살게 되었답니다.
한 때 가시로 생각되었던 고통까지도 이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영적 생명이 풍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것이
손에 다 들어오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
이 떠나지 않아도 그것이 그 사람을 억압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불을 끄지 못합
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는 늘 불안이 없습니다. 주님이 잘해 주실 것이라고 믿으니
까 마음이 평안해합니다. 절대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서 모자라는 것도 많지만 자족합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그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명이 풍성해져서 사십대의 성인처럼 믿음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가진 것을 예수님을 위해서 몽땅 내어놓아도 평안과 자유와 만족을 느
끼게 됩니다. 무엇을 얻어서가 아니라 내 것을 다 주님께 드리고도 오히려 더 기쁨
이 충만하고 평안하고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믿음의 최고 경지라고
할 것입니다.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라고요? 옥 목사님도 그러지 못하면서 왜 그러세요?” 그
말이 옳습니다. 저의 믿음도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의 수준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습니
다.
저는 요즈음 저를 방문하는 선교사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분들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다 배울 만큼 배운 지라 이 사회의 어느 분야에 가서도 제 몫을 할만한 사람
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위 말하는 세상에서의 출세도, 자녀를 공부 잘 시켜
일류대학에 들여보내겠다는 꿈도, 자가용도 굴리며 온 가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다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혹은 동남아 오지
로 가서 말라리아와 모기와 싸우면 서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며 하나님의 말씀
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아직 30대 중반밖에 안된 사람
인데도 그 얼굴에 내가 아직 모르는 세계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 가지고 안식년을
하면서 살집이 없어서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이나 말에 범할 수 없
는 기쁨의 광채가 서려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너무나
크게 때문에 자기 것을 다 주님 위해서 포기 한 다음에 누리게 된 마음의 평안이
요, 자유함이요, 만족이었습니다.
우리의 찡그린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주여 주옵소서. 주옵소서.” 하다가 보니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안 준다고 조르고 있으니 그 마음이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
까? 그 마음이 무슨 자유함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먹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생수를 밤낮 없이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매일매일
받다보면 주님이 나에게 심어주신 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
에는 내가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도 “할렐루야” 하고 춤추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
다. 그 사람을 누가 범하겠습니까? 그 사람을 누가 꺾어 놓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
는데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유 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습
니까?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으로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
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풍성함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좀더 멋지게 한해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나는 양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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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문을 양의 문이라고 합니다. 양문이란 양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성막에 들어갈 때 혼자들어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죄사함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으려면, 나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될 속죄양이 있어야 합니다. 성막문은 희생양과 함께 들어가는 곳이라고 해서 양문이라고 합니다.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올 때 양을 끌고 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들어올 때 나 혼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나를 위해서 친히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피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값은 피로 갚아야 하는데, 내 죄를 내 피로 갚으면, 나는 죽고맙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인간 죄를 희생제물 피로 대신 갚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희생제사입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친히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임금이 47년간 공사를 통해 크게 증축하였습니다. 이방인 뜰을 포함한 성전 전체 규모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1.5배, 런던 성 바오로 성당 2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습니다. 이방인 뜰로 들어오는 북쪽 문 중에 “양문”이라는 문이 있었습니다.예루살렘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온 백성들이 이곳에서 제사장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해 갖고 온 양을 검사받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차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양들이 더러워지기도 하고, 길에서 넘어지거나 가시에 찔려 상처가 나기도 했을 것입니다.양의 주인은 제사장에게 검사받기 전에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연못에서 먼저 양을 깨끗하게 씻고, 상처난 곳이 있으면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 연못이 연못입니다. 연못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양을 씻는 곳이라고 해서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베데스다 연못이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제물을 씻는 물이니까 치료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못에는 다섯 개의 행각(정자)가 있고, 그곳에는 온갖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연못 이름을 , 즉 이라고 불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을 때 시골에서 올라온 제자는 성전의 화려함을 구경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홀로 양문으로 나가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만났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고침을 받았는데, 이 병자는 물이 동할 때마다 항상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38년 동안이나 고침받지 못하고 그곳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예수님이 계신 곳이 참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로 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온갖 병자들이 모인 연못에 계셨습니다. 주의 교회가 말씀의 물이 동하는 곳, 하나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모인 연못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 10:1-10, 부활절 넷째 주일, 2014년 5월11일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우리는 왜 교회에 다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며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편하고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 고독이 두려워서, 또는 죽어 천당에 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요소들입니다. 핵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전체 운명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왜 옳은지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합니다. 즉 진리논쟁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우리가 옳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우기면 신앙이 아니라 광신에 떨어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진리논쟁을 벌였고, 그런 진리논쟁의 과정에서 출현한 게 신약성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3독서로 읽은 요 10:1-10절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10절까지이지만 그 내용은 18절까지 이어집니다. 전반부인 1-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고, 후반부인 11-18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문이나 선한 목자나 의미는 같습니다. 양들은 문을 통해서만 우리에 들어갈 수 있고, 선한 목자를 만나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고 생명의 인도자라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양을 도적질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넘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양을 지키는 게 아니라 도적질하려는 삯군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이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설교 본문에 앞서 나오는 요 9장은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두고 논란이 이어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과 그의 부모를 불러다가 달래기도 하고 협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범법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안식일 법을 수호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발끈해서 ‘우리도 맹인인가?’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어서 오늘 설교 본문인 ‘양의 문’과 이어서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요 10:19절 이하에서 또다시 논란이 벌어집니다. 예수가 귀신에 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면 분명하게 대답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리스도다.’하고 직접 대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발언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전도관의 박태선과 통일교의 문선명을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주변에 선포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보라고 하며, 돌을 들어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이비 그리스도를 도둑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본문 10절은 그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이 하는 일은 도둑질과 살해와 멸망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대상을 파괴합니다. 문제는 이게 겉으로 확연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도둑이 표시를 내면 도둑도 아닙니다. 작은 도둑은 표시가 나지만 큰 도둑은 아주 은밀해서 웬만하면 눈치를 챌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율법은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전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그들은 확 드러날 정도로 틀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행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안식일이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을 매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도 장애 치유를 좋은 것으로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 장애를 고쳤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를 깊이 생각했을 겁니다. 장애를 고친 게 좋은 일이니 안식일 문제는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예외를 허락하면 또 그런 일이 반복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일벌백계로 처리하는 게 옳은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이런 판단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태를 아주 엄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태도를 도둑놈의 그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으로 예수라는 존재와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합리성이 있더라도 근본이 잘못되었다면 결국 생명을 파괴합니다.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맙니다.
세월호 여객선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대한민국은 지금 총체적인 난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객들을 선실에 남아 있게 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은 불가사의입니다. 사고 직후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에 나서지 못하고 며칠을 허송함으로써 삼백 여명의 실종자들 중에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해경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의 종합세트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세월호와 다를 게 없습니다. 입만 열면 경제발전, 경쟁력 제고, 수출, 한류 등을 외칠 뿐이지 생명 존중, 생태 윤리, 정의와 평화, 노동해방, 남북화해, 전인교육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입니다.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교회 성장에만 투입한 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국교회도 역시 비슷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돌로 치려한 바리새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세련된 복장과 언어구사 능력을 지닌 도둑입니다. 도둑은 은밀하게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양들이 구원받고 꼴을 얻으려면 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곳곳에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서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둑은 양을 훔치지만 예수님은 양에게 풍성한 꼴을 줍니다. 삯꾼은 위험이 처했을 때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도둑과 삯꾼이 어떻다는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배고픈 거보다는 배부른 게 좋습니다. 아픈 거보다는 건강한 게 좋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면 나름으로 만족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즉 도둑질을 통해서라도 그런 조건들을 획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습니다. 이 시대가 그걸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음은 무엇인가요? 그 모든 것의 마지막은 무엇인가요? 죽음입니다. 죽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게 우리의 실존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인생이 뭔지를 아는 척하면서 고상한 인생론을 펼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생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하려는 하는 것뿐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생명에 대한 성경의 설명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걸 단순히 공자 왈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즉 인생을 자기의 소유로 여깁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정로도, 또는 넘치거나 모자라는 정도로 진행될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생명이라고, 즉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 설명이 너무 막연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거는 좋은데, 그 다음에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할 분들도 있겠지요. 설명한다고 해도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유에서만 삶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존재라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마음이 꽉 묶여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수능시험에만 영혼을 맡긴 입시생에게는 바람이 흔들리거나 햇살이 반사되는 참나무 잎을 보라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디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있는지를, 그리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귀가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풍성하게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노력과 업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물을 받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힘이 들어가면 갈수록 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삶, 생명, 인생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왔는지를 생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되어 배아가 되고, 그것이 자라서 태아가 되고, 때가 되어 어머니의 몸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 우리 자신의 노력과 의도가 개입되어 있을까요? 이 위대한 생명 사건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삶도 사실은 다 주어진 것입니다.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더 근원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이런 생명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서 더 근원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죽음 이전의 생명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생명과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 이전인 지금 여기서의 삶에 종말의 궁극적인 생명이 숨어 있습니다. 마치 화려한 꽃이 씨앗 안에 숨겨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화려한 꽃과 같은 생명이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근원적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하고 인식했습니다. 이 생명은 곧 부활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방식으로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행하시는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부활생명을 요한복음의 다른 말로 바꾸면 영생입니다(요 11:25,26). 그것을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받는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풍성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조건들은 늘 부족합니다. 돈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합니다. 친구와 가족이 우리를 실제로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런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외로워도, 병들어도 하나님의 생명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풍성한 생명을 알고 계신가요? 경험하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의 문입니다. 선한 목자이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이 엄청나게 놀랍고 새로운, 그래서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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