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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18) – <하나님의 질문에 ...
2019년 11월 27일 수요예배.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3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3~18절). 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
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6/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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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도순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1/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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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증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복음 16:13~15 참조) 베드로는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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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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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국민일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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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복음 16:13-20) : 네이버 블로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내가 이 반석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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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조성훈 목회자의 설교와 글
주 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본 문: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설교자: 조 성 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
Source: www.pastorcho.kr
Date Published: 7/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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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그게 매우 안타까우셨을 겁니다. 그래도 항상 동행하던 제자들은 이제 알겠지 싶어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마16: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3/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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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너희 는 나를 누구 라 하느냐
-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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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18)
2019년 11월 27일 수요예배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3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3~18절)
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이 있다면 바로 “예수는 누구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분을 경배하며, 우리 삶을 그분께 드립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훈련을 시킬 필요를 느끼셔서, 그들을 데리고 갈릴리 북부 산지 쪽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3-14절)
제자들이 알려준 내용은 모두 좋은 대답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보통 사람과는 굉장히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뭐라고 선포했습니까?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 3:1-2)
세례 요한은 이렇게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광야에서 외쳤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서, 회개하며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원래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될 때, 즉 개종할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말은 ‘너희는 유대인이 아니다. 너희는 가짜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니까 빨리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제대로 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라.’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4:17)
이렇게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가운데 세례 요한과 같이 구별된 삶을 사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또 위대한 선지자였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혼자 싸워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 또한 그는 에녹에 이어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엘리야가 살아서 이 땅에 다시 온 것이 아니냐며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애통하는 마음과 열정, 그리고 시대적인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레미야가 아닌가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그런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십니다.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말합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들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예수를 위대한 성자, 4대 성인 중 한 사람, 위대한 철학가, 위대한 교육자, 위대한 인권운동가, 위대한 최고경영자 등으로 고백합니다.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2. 복된 성도의 비결은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결정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5-16절)
‘그리스도’란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즉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그리스도가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계속해서 “내가 친히 기름 부은 메시아를 보내겠다. 그는 세상 모든 죄를 담당할 구세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기름 부음 받은 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위대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자기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시며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구분되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그 본성이 동일하며 하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여기서 “살아 계신”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 인간의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놀랍고도 복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칭찬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절)
‘바요나’에서 ‘바’(정확하게는 ‘바르’)는 아람어 방언으로 ‘아들’이라는 뜻이니까, ‘요나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던 유월절에 같이 잡혀 있던 사람이 강도 바라바인데, 그의 이름이 정확히는 ‘바르아바’, 즉 ‘아바(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시는데, 요나의 헬라식 이름이 요한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복 있는(받은) 사람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에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성공해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믿는 성도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8절)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입니다. ‘베드로야, 네 인생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부족하고, 연약하다. 나는 네가 앞으로 나를 부인할 것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별명을 주셨는데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라는 남성명사이며, 이어서 말씀하신 “이 반석”은 ‘페트라(Petra)’라는 여성명사입니다. 일부러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반석’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 믿음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공격해온다 할지라도 이기지 못합니다. ‘음부의 권세’란 ‘하데스의 문’ 즉 지옥의 권세, 죽음의 권세, 사탄의 세력을 뜻합니다. 아무리 사탄의 세력이 강해 보여도 결코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인간의 조직이 아니며 주님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세상의 단체나 기업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 값으로 친히 세우시고 주인 되신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올바른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당연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 “주님은 성인 중 한 분이십니다.”라고밖에 고백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리스도,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3. 세상 한복판에서 하는 신앙고백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어디서 하셨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인데(13),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한 마게도니아의 도시로 빌립보가 있고, 또 바울이 나중에 갇혀 있던 곳이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빌립보와 가이사랴가 둘 다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도시입니까?
이곳은 대표적인 우상 숭배의 장소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손자 ‘판’(Pan)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곳이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는 ‘판의 도시’라는 뜻으로 ‘파네아스’(Paneas)라고 불렸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바알 신을 섬기는 수많은 신상들과 신전들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알 신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기 때문에 제사의식이 아주 음란하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보면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헤롯대왕의 셋째 아들인 헤롯 빌립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서 로마 황제의 신상을 세워놓고 자기 이름과 가이사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지명을 붙였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은 바알 신과 판이라는 헬라 신을 숭배하는 곳, 음란함이 가득한 곳,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상들이 놓인 장소, 엄청나게 화려하고 웅장한 곳에서 떠돌이 랍비의 초라한 행색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잘 차려 입고서 어디 거룩하고 경건한 곳에 가서 그런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속문화의 첨단을 달리며 음란한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던 곳, 그리고 웅장한 우상 신전들이 가득한 곳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신앙고백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중에, 믿는 성도들 가운데 드려지는 신앙고백이 아주 중요합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뿐 아니라, 이 세상 한복판에서 그 대답을 하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의 인생에서 나는 누구냐? 우상을 숭배하고, 음란이 가득하고, 하나님보다 돈, 자녀, 좋은 학교, 사회적 위치, 건강, 인간관계, 여가 활동 등의 세상 것들을 더 우선시하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세상은 빌립보 가이사랴와 똑같습니다. 여러 가지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우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교회 안에서도 이 질문에 답을 해야겠지만, 밖에서 살아갈 때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지금 듣기 원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말씀, 기도, 예배, 크리스천의 모임에서만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라, 내 삶의 한복판에서도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왕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라는 말입니다.
먼저, 왕은 다스리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은 ‘내 삶을 누가 다스리느냐’입니다. 누가 나를 다스리고 있습니까? 나로 하여금 열심히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십니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십니다.
둘째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셋째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 중재하는 역할을 합니다.
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재자가 되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왕들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점투성이인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다윗과 같이 행했다’는 극찬을 들은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사람들도 다 부족한 점들이 많았고 역부족이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이상적인 왕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다윗도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는 나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주는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죗값을 감당하신 메시아이십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인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해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내 삶의 한복판에서 이 질문에 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말 예수가 나의 왕이십니까? 정말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4. 삶의 신앙고백이 뒤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야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것을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잡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은 주님만 가시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걸어갈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길을 가면 안 된다고 큰소리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고 야단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마 16:24-26, 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는 입술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입술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이런 삶의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 고백의 헬라어 앞글자만 따서 다섯 자로 만든 단어가 바로 ‘익투스’(ΙΧθΥΣ, 물고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물고기 표시를 달고 다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익투스’라는 다섯 글자 단어로 오행시를 지어 암호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그 표시를 해놓으면 크리스천의 집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물고기 붙이면 크리스천인 것을 다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표시가 초대교회 신앙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이 표시로써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랴 빌립보처럼 세속적인 이 땅 한복판에 살고 있기에 도전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에게 예수, 나는 누구냐?”
“예수가 나에게 누구신가?”라는 이 질문에 대한 고백이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은 나의 신앙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천국 백성답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매일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예수님이 나의 왕이신가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왕이시라면 내 삶의 모든 결정권을 주님이 갖고 계셔야 하는데,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가정의 모든 일(자녀,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에서 예수님의 결정을 따르고 있습니까? 내 생업(직장 또는 사업)의 모든 부분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결정합니까? 교회에서의 사역과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결국 ‘누가 내 주인인가’(lordship)의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즉 “내가 정말 너의 주인이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내 가정과 생업과 교회에서 누가 결정을 내립니까?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결정권자가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나 자신입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하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합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외치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마 7:21-23, 새)
여기서 핵심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뭔가 놀라운 일을 행한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는 말씀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와 너희는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과 축사와 기적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주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서,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고,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안 하는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지, 예수님은 원하지 않으시는데 원하실 거라고 하며 엄청난 일을 행하는 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말로만 주님이라고 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정말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라는 단어와 함께 쓸 수 없는 말이 ‘안 됩니다’ 또는 ‘싫어요’ 같은 말입니다. ‘주님, 싫어요.’ ‘주님, 안 됩니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 안 됩니다!”라고 그랬더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싫다고, 안 된다고 하면 누가 주인입니까?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싫고 내가 안 된다고 하니까 내가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안 하든지 ‘주님’이라고 하지 말든지 해야 합니다. 주님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따라야 하고, 내 주장대로 ‘싫어요’, ‘안 돼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할래요’라고 하면 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질문은, “오늘 너의 삶의 진짜 주인은 누구냐?”라고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저와 여러분에게 큰 도전입니다. 바로 이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정말로 삶의 고백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증언
이미지 The Savior Walked on Water 물 위를 걸으시는 구주, 월터 레인
베드로는 믿는 자들에게 사랑받는 사도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매우 진실하며,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와 공감할 수 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자, “곧” 그물을 버리고 모든 것을 뒤로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에 우리는 찬사를 보낸다.(마태복음 4:18~20) 그가 비유의 의미와 메시지를 두고 느꼈을 혼란을 이해하며(마태복음 15:15~16), 그 밤 갈릴리 바다의 격랑 속에 발이 빠지고 신앙이 흔들리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며 소리쳤던 그의 필사적인 마음에 공감한다. 우리는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고 그가 느꼈을 경외심을 이해한다.(마태복음 17:1~13 참조)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정한 후 느꼈을 수치심에 우리는 함께 눈물 흘리고(마태복음 26:69~75 참조), 겟세마네 동산에 있던 그와 함께 슬퍼하며(마태복음 28:36~46 참조), 텅 빈 무덤 앞에 선 그와 더불어 기뻐하고 놀라워한다.(요한복음 20:1~10 참조)
복음서의 저자들은 우리가 베드로와 이렇게 개인적으로 연결되기를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기사에는 다른 초대 십이사도들보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경험하고 대화한 일이 의도적으로 더 많이 보존되어 있는 듯 하다.1 우리 중 많은 사람이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변인이자 선임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관계를 그렇게 자주, 또 상세하게 다뤘던 이유는 아마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우리가 베드로를 사랑하고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특별한 증언을 더욱 잘 받아들이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세심하게 준비된 끝에 얻었을 그 증거를 말이다.
베드로의 사명 베드로가 메시야의 속죄 사명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 시간과 가르침, 경험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가 그리스도의 특별한 증인이 될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했다.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가르치셨을 때, 그는 자신에게 요구되는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한 것 같다. 십자가에 못 박혀 생긴 상처를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서 두 번이나 만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다.(요한복음 21:3)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으므로 베드로는 본래의 생활과 생업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뒤따랐다. 밤새 힘겹게 일을 하였으나 그들은 잡은 것이 없었다. 해변에 이르렀을 때는 몹시 지치고 낙담했을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비슷한 권고를 듣고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았던 지난 일이 떠올랐던지, 그들은 이번에는 아무 저항도 질문도 없이 이 말씀에 따랐다.(누가복음 5:1~9; 요한복음 21:3~6 참조) 그들이 다시 한 번 그물을 끌어 올리자 엄청난 물고기가 쏟아져 나왔고, 이를 본 요한이 베드로에게 외쳤다. “주님이시라.”(요한복음 21:7) 배가 해변에 닿기를 기다릴 수 없었던 베드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께 가고자 “바다로 뛰어 내”렸다.(요한복음 21:7) 나머지 일행이 도착하여 보니, 그들이 먹도록 생선과 떡이 준비되어 있었다.(요한복음 21:9 참조) 이미지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데이비드 린슬리 식사가 끝나고, 예수님은 베드로가 좇고자 선택한 물고기를 가리키시며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분명 베드로는 이 질문을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당연히 베드로는 물고기나 어업보다 구주를 더 사랑했다. 아마도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그의 마음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5) 구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셨고, 베드로는 다시금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맹세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또 한 번 베드로에게 명하셨다. “내 양을 치라.”(요한복음 21:16) 예수께서 세 번이나 제자인 자신에게 사랑을 확인해 보이게 하시자, 베드로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우리는 베드로의 세 번째 대답에서 비애와 열정을 느낀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한복음 21:17)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베드로에게 명하셨다.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7)6 베드로가 진정 주님을 사랑했다면, 그는 어부를 그만두고 목자가 되어 주님의 양 떼를 돌보았을 것이다.7 그때부터 베드로가 행한 일과 성역에서는 마침내 그가 그리스도의 특별한 종이요 증인으로서 자신이 위임받은 일과 사명을 이해했음이 드러난다.
[오늘의 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3∼20절
오늘날 이 세상에는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소위 ‘짝퉁’이 판을 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를 보여줘도 진짜로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변의 진리가 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도 의심하며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이었고, 두 번째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은 보편적인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물으신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14절).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위대한 설교가나 사상가, 선구자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으시고 난 다음 제자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물으셨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지가 어언 2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늘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셨고 많은 말씀과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많은 능력과 기사를 행하실 때 바로 가까이에서 그 일을 똑똑히 목격하고, 체험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으셨습니다.
“그동안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났고, 나를 따르고 배웠던 너희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내 자녀들아. 지난 몇 년 동안 수십 년 동안 네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나를 어떻게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과연 여기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른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너무나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1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른 신앙의 고백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베드로처럼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고 고백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이유가 되셨음을 고백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동락 목사(영주신광교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태복음 16:13-20)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빌립보 가이사랴(13) 헤롯 왕이 주전 20년경에 로마의 초대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로부터 하사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의 신전을 지어 바치고, 그 뒤를 이은 헤롯 빌립이 황제를 뜻하는 ‘가이사랴’와 자기 이름을 이어 부른 데서 도시 이름이 비롯되었다.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of Philippi)’는
/ 팔레스틴의 최북단에 위치한 지방으로서 갈릴리 바다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점, 헤르몬 산 기슭의 해발 약 345m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을로 요단강의 주요 근원지이다.
/ 이곳은 구약 시대에는 ‘행운의 바알’이란 뜻을 지닌 ‘바알갓’으로 불리워졌었다(수 11:17 ; 12:7 ; 13:5). 바알은 구약 시대에 그곳에서 예배되었던 신이었으나 후에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신인 판(Pan)으로 대치하여 이곳에서 숭배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따라 이 마을의 이름은 ‘파네아스’(Paneas)로 불리워졌다.
/ 헤롯 대왕(B.C. 4-A.D. 39)은 자신에게 이곳을 준 로마 황제 ‘아구스도’(눅 2:1) 즉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27-A.D.14 년 통치)를 위해 대리석 신전을 지었으며, 분봉왕 빌립(B.C. 4-A.D. 34년 통치)은 후에 ‘디베료’(눅 3:1) 즉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37년 통치) 황제의 통치 시대에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곳의 이름을 ‘가이사랴’로 개명하였다.
/ ‘빌립보(Philippi)’는 욥바와 갈멜 사이에 있던 해안에 위치한 또 다른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이곳의 이름을 지은 ‘빌립’의 이름을 따서 불인 것이다(행 8:40; 23:23).
우리 주님은 요단강에서 게네사렛 호수로 들어가는 입구인 뱃새다에서 배를 내리셨고, 북쪽으로 강을 따라 한참이나 북행하셔서 이곳 ‘가이사랴 빌립보’에 오셨다. 예수께서 굳이 이스라엘 경계 끝까지 가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묻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계시하신 이유에 대해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 첫째, 예수께서 우상의 땅에서 제자들에게 바른 신앙 고백을 요구하심으로, 또한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고자 하셨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alph). 이것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이전 이름이 그리스인들의 신의 이름과 연관된 ‘파네아스’이었을 뿐 아니라 이곳이 황제 숭배의 장소였기 때문에 나온 추정이다.
/ 둘째, 예수께서 방해받으심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위대한 진리를 주의하여 가르치시고자 이스라엘의 경계 끝까지 일부러 가셨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Caffin).
/ 본문은 예수님의 여행 목적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명확한 판단은 하기 어려우나, 예수님의 그 동안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후자가 오히려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예수께서 평소 제자들에게만 어떤 구원의 진리를 전수하시고자 할 때마다 가르침에 방해를 받지 않으시려고 인적이 드문 시간과 장소에서 가르치셨던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24:3-25:46).
/ 본문에서 밝혀질 교훈 역시 그 내용이 상당히 중요할 뿐 아니라 만일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공개될 경우 바라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반발 또한 상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를 미리 예견하시고 자신의 사역에 불필요한 소요나 방해를 받지 않도록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장소를 옮기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 에서 불필요한 분쟁이나 소요를 피하시는 지혜로운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인자’로 표현한 것은
/ 메시야로서 그의 제자들에게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비하(卑下)의 신분,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스스로 낮아져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 그러나 ‘인자’라는 표현 가운데 종말론적인 구원자, 즉 왕적인 ‘메시야’라는 묵시적 의미(마 13:41 ; 16:27, 28 ; 24:30)와 더불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실 ‘고난의 종’이라는 의미도(21절 ; 막 8:31 ; 9:31 ; 10:31) 포함되어 있는 바, 본문을 통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암시하고자 하셨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그들이’에 해당하는 인칭대명사 ‘호이’와 ‘그러나’, ‘그리고’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 ‘데’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말하였다(RSV, And they said)’이다. 이는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평을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평가가 아닌 그중 긍정적인 반웅들만을 요약하여 대답하였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갖고 긍정적으로 그를 평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반감으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 바알세불의 힘을 입은 자”(마 11:19 ; 12:24) 둥 좋지 않게 평하는 자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부활 체로 보았던 이유는
/ 첫째, 당시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멀리 퍼져 있었고
/ 둘째, 당시 사람들의 눈에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그의 능력(눅 1:17,18)이 예수님의 천국 메시지와 그의 능력과(마 4:17) 유사해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난세의 영웅들 같은 인물과 예수님을 동일시한 것은 그 당시에 종말론적 기대들이 매우 고조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즉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 가운데 고통을 겪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인 메시야의 출현을 매우 갈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후에 예수님의 메시야 직의 성격이 정치적이 아닌 인류 구원을 위한 고난의 메시야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과 신앙 고백을 중단하였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그러나’ 혹은 ‘그렇다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접속사 ‘데’가 기록되어 있다.
/ 여기서 사용된 접속사 ‘데’는 이 질문이 앞의 대답과 대조됨을 나타내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 본문은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그들의 소망과 욕구에 따라 그들을 구원할 정치적인 메시야로밖에 보지 않지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의미이다.
/ 이러한 본문은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일반 사람들의 대답보다 나은 대답을 기대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기대 가 엿보이는 표현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여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그의 메시야적 정체성의 명백한 고백을 그의 제자들로부터 도출시키기 위한 질문이었다.
/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계셨던 참 질문이다. 따라서 앞선 질문, 즉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라는 질문은 본문의 질문을 이끌어 오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
/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무리들의 생각과 관심보다 그의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의 생각과 고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20)
홍문수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분이 평소에 부인이 교회에 함께 가자고 권유하면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당신이 우리 집 대표로 교회에 갔다 와. 나는 그냥 집에 있을래.”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에 이르렀습니다. 문지기 천사가 말했습니다. “잠깐만요. 천국은 아무나 들어가는 데가 아닙니다.” 그러자 남편이 자신 있게 말합니다. “우리 집 대표에로 제 아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천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부인만 대표로 들어오십시오.”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앙은 각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들과 더불어 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인생은 각자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단독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각자 태어나고 각자 살다가 각자 세상을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과 약간씩 도움을 주고받을 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믿는 겁니다. 도매금으로 끼어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옆에서 서로 도와줄 수는 있지만 각자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개체성입니다. 성도들끼리 함께하며 서로 돕는 신앙의 공동체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신앙의 개체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어떻게 하죠? 우리말 사도신경은 어순이 다르게 돼 있지만 영문판을 보면 “I believe ~ ”(나는 믿습니다 ~ )로 시작됩니다. 나 자신이 믿고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교회생활을 함께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각자 자신이 예수님을 분명히, 그리고 잘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고 인생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순절을 지키고 있는데 각자의 신앙을 잘 점검하고 확실한 신앙으로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런 취지에서 이 시간 올바른 신앙고백을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한 신앙을 정립함으로 승리의 인생을 꼭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는가?본문은 예수님이 공생애 후반부에 제자들과 대화한 내용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마16: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人子, the Son of Man)를 누구라 하느냐” ‘인자’는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죠. 세상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누구라고 하더냐?
그러자 제자들이 너도 나도 대답합니다. 마16: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증거했던 선지자로 이미 헤롯 왕에게 핍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온 것으로 오해한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니까 엘리야가 나타난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예냐 지금이나 사람들은 여론을 중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면 거기에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론이 항상 맞습니까? 다수결이 항상 맞습니까? 틀릴 때도 많습니다. 진리는 여론 그대로가 아닙니다.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뭐라고 하든 달라지지 않습니다. 진리는 그 자체로서 항상 진리입니다. 예수님에게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참 모습이 중요할 뿐입니다.
[2]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가?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고 이적을 행하셨건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게 매우 안타까우셨을 겁니다. 그래도 항상 동행하던 제자들은 이제 알겠지 싶어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마16: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라는 복수형으로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질문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각자에게 물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앙의 개체성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나를 향한 질문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 하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본문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보건대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척척 대답하던 제자들이 막상 각자 자신의 생각을 물으시니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막연한 지식을 갖고, 때로는 엉뚱한 것을 생각하면서도 마치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리를 깨닫고 내가 그대로 믿고 그대로 고백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베드로가 나섭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유명한 신앙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의 여러 칭호들이 나옵니다. 우선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죠. 마1:21에 그 이름의 뜻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을 때 약혼자 요셉이 오해하며 고민하자 천사가 방문해서 오해를 풀어주면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러니까 ‘예수’는 ‘구원자’(the Savior)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비참해지고 영원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 비참함과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굳이 십자가 사형 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 이름대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주’라는 칭호가 있죠. 헬라어로 ‘퀴리오스’이고 영어로는 ‘Lord’입니다. 일반적으로 윗사람, 상전, 주인 등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지만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만물과 모든 인간의 주인이십니다. 게다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죗값을 치르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속주이십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인생의 생사화복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이래저래 주인이십니다.
그 다음은 ‘그리스도’(the Christ)라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크리스토스)이고 메시야는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세 가지 직분에 임직할 때 감람유(올리브 기름)을 머리에 부었습니다. 직분을 맡기며 성령의 능력을 부어준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절차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직분이 세 가지인데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런 직분의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가리켜 예수님의 3중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밝히 보여주셨습니다(요1:18).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히9:12). 이로써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섬겨주십니다.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으실 때 왕이심을 밝히셨습니다(눅23:3). 물론 빌라도는 세상 나라의 왕이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의미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인생만사를 통치하시고 다스려 주십니다.
또 하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the living God)이란 칭호가 있습니다. 특히 이 말 앞에 정관사(the)가 붙어 있는 게 중요합니다. 다른 칭호들에도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the Savior, the Lord, the Christ), 이는 유일성을 나타내는 정관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어떤 사람은 신(god)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신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본능은 있지만 참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독생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구원받을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다른 데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운운하면서 기독교를 여러 중교 중 하나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분께 나아가는 길도 하나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 자신이 천명하셨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빌립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요14:9~10 “9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I and the Father are one)”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유일하신 그리스도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굽히지 않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
세상 사람들은 흔히 세계 4대 성인을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예수님을 끼워 넣습니다.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소크라테스), 예수! 예수님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엄격하게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앞의 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에 불과합니다. 죽음으로 끝났고 그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무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빈 무덤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 캠브리지대에서 영문학 교수를 지낸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정신 이상자이거나 혹은 사기꾼이지 결코 도덕적인 스승은 될 수 없다. 반대로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누구나 엎드려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된다.” 그는 한때 예수님을 심히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기독교를 증거하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로마 당국의 감시를 피해 은밀한 장소에서 몰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끼리 신분을 확인하면서 소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때 사용한 것이 ‘이크튀스’(ἰχθύς / 대문자 ΙΧΘΥΣ)인데 ‘물고기’란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Ἰησοῦς Χριστὸς Θεοῦ Υἱὸς Σωτήρ.)”라는 신앙고백문을 구성하는 단어들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 표시로 서로의 신분을 확인했고, 흥미로운 것은 화살표와 비슷해서 비밀장소로 인도하는 방향 표시로도 사용됐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베드로처럼 대답하시거나 ‘이크튀스’로 고백하면 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믿는 올바른 고백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예수님이 심히 기뻐하실 겁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하자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계시가 필요합니다(마11:27). 계시는 감추어진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밝히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전12:3 “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리고 엡2:8~9에서 증거하는 대로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 받는데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3] 나의 고백은 무엇인가?여러분, 지금 각자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사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가? 그것을 믿고 고백하는 게 참 신앙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증거합니다. 롬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어느 목사님이 친척 모임에 갔다가 먼 친척 중 연만하신 권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예감이 이상해서 대뜸 물었습니다. “권사님, 실례입니다만 오늘 밤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세요?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제가 뭐 한 일이 있어야죠?” 세상에!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하면서 이게 뭐지? 당황스러워서 다시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신앙 고백을 하게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너무 단순한 진리인데, 무수히 들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데도 아직 뭐가 부족한 것처럼 오해합니다.
여러분,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은 참 믿음과 고백으로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혹시 아직 그러지 못한 분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당장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무쪼록 올바른 신앙 고백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 고백의 진정성 : 입술의 고백을 넘어 삶의 고백으로 증명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신앙고백이 진짜라면 진정성을 보여줘야 합니다. 고백이라고 하면 얼른 입술의 고백만 생각합니다. 그게 기본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고백이 진짜라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언행심사 등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의 베드로를 보십시오. 칭찬받았는데 그 다음 장면이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시니까 펄쩍 뜁니다. 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rebuke him-NIV)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기에 내 뜻대로 사는 게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됐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아직 그게 안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한 말씀은 아니고 그가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 예수님의 길을 막는 것을 책망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윽고 제자들에게 진정한 고백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십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NIV-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자기 부인(self-denial)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 욕심 등을 버리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래야 신앙고백에 진정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자기 생각이나 뜻대로 살아갑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그제야 “주여!” 하며 예수님을 부릅니다. 마치 급할 때 119 구조대원을 부르는 것처럼. 이런 태도는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종 전도(主從顚倒)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면서 예수님을 종처럼 부리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종이고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시며 왕이신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의 영광을 위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전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더 나아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 ‘증인’이란 말은 헬라어로 ‘말튀스’인데 여기서 영어의 ‘martyr’(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바쳤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된 겁니다.
베드로도 나중에는 변화됐습니다. 증인의 삶을 살다가 순교합니다. 요한을 빼고 모든 사도들이 순교했습니다. 의심이 많던 도마조차 그랬습니다. 부활하시 주님을 직접 보고 그가 고백했죠.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My Lord and my God!)” 그는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합니다.
순교 사화 중 서머나 감독 폴리갑(Polycarpus, 80~165)의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로마 당국에 체포됐는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분이라 총독이 그를 처형하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줍니다. 한 번만 황제숭배를 인정하면 풀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지난 86년 동안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 예수를 내가 어찌 배신하겠는가? 속히 처형하라!” 결국 화형에 처해졌는데 아무리 해도 불에 타죽지 않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로마 병사가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서머나는 지금의 터키 이즈미르인데 그곳에 기념교회당이 세워져 있는데 그곳의 한쪽 벽면에 폴리갑의 순교 장면을 그린 성화가 걸려 있습니다.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Charles Péré, 1854~1929)가 그린 그림입니다. 잘 보면 왼쪽 구석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증인으로 살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신앙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3.1 운동 100주년을 지켰습니다만 일본인들이 아직도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진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번 3.1절에 즈음해서 여러 분들이 방한해서 사죄하며 함께 기념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그 중에 타카미츠 무라오카 교수(1938~ )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그의 저서「나의 비아 돌로로사」가 최근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습니다. 그는 유명한 성서언어학자인데 일본이 강점했던 나라들을 순회하면서 회개와 사과를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무료 강의를 통해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그 발자취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의 삶을 보면 이게 진짜 신앙이구나! 진정한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외면하고 있지만 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양심으로 결단하며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잘못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일 당신이 즐거이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가 당신을 질 것이다.”
부디 이 사순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마음으로, 입술로, 삶으로 신실하게 고백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각자 더 풍성한 승리의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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