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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목사 누가복음 42강 \”불의한 청지기의 두 가지 지혜\”
본문 – 누가복음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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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관해서 – 뉴스앤조이
본문: 누가복음 16장 1~13절. 이번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해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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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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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풍자적 해석에 대한 재연구
1) 비유 해석의 개요: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비유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이해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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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질문] 목사님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13절 말씀을 해석해주세요. 전에도 난해하게 여겨지던 말씀으로 새벽 기도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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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않았으나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 – 네이버 블로그
이 구절을 예수님의 본 뜻이라기보다는 역설적 반어법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9-10절에 대한 현대어 성경 번역입니다. [눅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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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 (누가복음 16:1-15)
누가복음 16:1-15 ·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청지기의 행동에 대한 주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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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불의한 청지기의 변화/누가복음 16:1-13 … 여기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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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본문 및 주석 정리, 불의한 청지기 그리고 부자와 …
정직하지 않은 종의 비유.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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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헬라어 주석강해]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 … 1절은 엘레겐 데 카이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안드로포스 티스 엔 플루시오스 호스 에이켄 오이코노몬 카이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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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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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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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6장 1~13절
이번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해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이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개의치 말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이야기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주인을 속인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체 본문의 구성도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비상시를 대비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작은 일에 충실해야 큰일에도 충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서학자들도 이 구절을 신약성서에서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소위 ‘난해구절’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문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어떤 부자와 청지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이 부자는 부재지주입니다. 부재지주는 모든 행정적인 일을 청지기에게 일임하고, 청지기가 지주와 똑같은 권위로 땅을 관리했습니다. 지주는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또는 한 번도 오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의 지주는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나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지주는 이 청지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런 결정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나쁜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를 더 알아봐야 하고요.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더 좋은 청지기를 구할 수 없다면 함부로 해고할 수도 없습니다. 성서는 이에 관해서 별로 자세한 언급 없이 지주가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청지기는 사정이 아주 딱하게 되었습니다. 실직자는 우선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렇지만 나쁜 소문으로 해고당한 청지기를 다른 부자가 불러줄 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전공을 살릴 수 없다면 이제 막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본문에 보면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옵니다. 청지기 생활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이미 늙은 탓인지 이 청지기는 막노동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방법은 빌어먹는 것이지만 이 청지기는 창피해서 그 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지기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자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을 미리 만들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기름 백말을 빚졌습니다. 청지기는 그 사람에게 계약문서에 오십 말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밀 백 섬을 빚졌습니다. 문서에 팔십 섬으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주인을 속인 겁니다. 그런데 청지기의 이런 행동을 보고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에 해고당한 청지기가 또 다시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는데 주인은 그를 칭찬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예수님은 이 비유 끝에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b절) 이런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도 세상에서 손해 일절 보지 않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잔머리를 얄팍하게 굴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 살아서 되느냐, 믿는 집 아이들이 믿지 않는 집 아이들보다 공부를 못해서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도록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설교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주문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저의 두 딸이 공부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곧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는 합니다. 여러분들도 비슷하게 생각한 생각으로 사시겠지요.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사는 게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인지 늘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우리도 이 세상의 이기적인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지 모릅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청지기를 칭찬하는 본문을 근거로 자신의 그런 삶을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청지기의 행동
이 본문은 난해구절이래서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2000년 당시에는 당연했던 상거래 관습들이 이 이야기 안에 들어오기도 했고, 누가복음 공동체만의 어떤 특별한 신앙적인 문제가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 본문을 기록한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을 속인 청지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어떤 속사정이 있는 건 아닐는지요.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를 자세하게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원칙대로, 또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본문을 원칙대로, 단순하게 보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있게 읽어야겠지요.
계약문서를 새로 작성한 청지기의 행동에서 어떤 윤리적 기준을 찾으려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신앙적인 원칙을 제공합니다. 문서를 위조한 것은 분명히 비윤리적인 행동이지만 그게 본문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따지고 들어가면 그의 문서위조는 범죄행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는 지주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래의 이자가 통상 50~100%나 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고리대금이지요. 그건 유대교의 율법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죄입니다. 청지기는 그 당시에 관행처럼 시행된 과도한 이자를 제자리로 돌린 것뿐입니다. 주인에게 이익이 줄어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법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청지기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청지기 자리를 쫓겨나게 될 경우에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자기를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형편에서 최선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는 9절 이하에 나오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설명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비유와 설명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약간 다릅니다. 겉으로는 약간이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비유에서 청지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를 집으로 맞아줄 것만을 기대했지만, 이 설명에서는 영원한 집으로 맞아준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집은 일상이지만 영원한 집은 종교적 차원입니다.
재물에 관한 설명에서도 역시 이런 차이가 드러납니다. 청지기는 세속적인 재물을 이용해서 자기의 미래를 준비했는데, 예수님은 여기에 덧붙여 참된 재물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루터 성서번역을 따르면 이 두 재물이 극과 극으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재물은 ‘불의한 맘몬’(ungerechte Mammon)으로, 참된 재물은 ‘진정한 것’(das wahre Gut)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세술을 말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청지기가 모든 걸 잃었을 때에 자기를 맞아줄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한 것처럼 제자들도 모든 걸 잃었을 때에 받아주실 분에게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잃는 것은 곧 제자들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죽음에서 우리는 모든 걸 잃습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노력한 모든 대상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이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줄 분은 오직 그분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가 뭐 그리 중요하냐, 살아있을 때 멋지게 사는 게 중요하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 원하신다면 그렇게 멋지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곧 놓아야하듯이 우리도 삶 자체를 곧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리가 곧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젊음과 건강은 우리가 이 세상을 멋지게 사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지만 그게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는 생각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에 모든 걸 걸어두는 사람은 결국 훨씬 큰 절망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성서는 자기집중, 자기연민, 업적주의를 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된 생명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
최소한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저의 설명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러나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거나(9절) 세속의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구절(11절)은 동의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제가 앞에서 루터 번역을 인용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재물을 불의한 맘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은 맘몬이고, 맘몬은 불의합니다. 재물이 사람보다 높이 평가되는 세상이 어떻게 불의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지나가야 할 재물이 군주처럼 받들림 받는 세상이 어떻게 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악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재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재물은 소비될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은 곧 재물을 재물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나가야할 재물을 영원한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재물을 충실하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이 재물은 단지 돈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건강과 외모도 역시 영원한 게 아니라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그것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돈도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에 잠시 머물면서 수단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 목적으로 둔갑되었다는 사실이 심각한 거지요. 성서는 그런 것을 가리켜 우상숭배이며, 바알숭배이고,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것들은 제 위치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 비유에서 가리키고 있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를 영접할 친구,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부자에게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처럼 온전히 거기에 투자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에 집중한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은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을 잘 읽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경건한 생활은 아주 소중하지만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결과이며 태도입니다.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청지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지켜주거나 맞아주지 못할 바로 그 순간에 관한 생각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그 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모든 영혼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그런 자세로 예배도 드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맺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이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잃게 될 순간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비교적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좀 모자라면 가족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취미생활도 있습니다. 나름으로 이 세상에서 즐거운 일들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그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그 순간을 우리가 준비하고 있나요? 우리의 영혼을 바로 그 순간으로 채우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영성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그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고 말입니다. 여기서 재물을 단순히 돈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하려는 모든 열망을 가리킵니다. 그런 열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될 순간에 우리를 맞아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열망을 멋진 삶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를 놓아야 할 오늘 본문의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걸 잃을 때 맞아줄 친구에게 온 영혼을 기울였습니다. 그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분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풍자적 해석에 대한 재연구
본 연구의 목적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해석 방법들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헌학적 연구를 통하여 풍자적 해석방법이 가장 타당성 있는 해석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1) 비유 해석의 개요: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
본 연구의 목적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해석 방법들을 소개하고 평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헌학적 연구를 통하여 풍자적 해석방법이 가장 타당성 있는 해석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1) 비유 해석의 개요: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불의한 청지기’비유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인정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공관복음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J.A. Fitzmyer, “The Story of the Dishonest Manager,” TS 25 [1964], 23-45).
이렇게 복잡한 비유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끊임없이 제시되어 왔다는 사실은 이 주제에 대해서 수많은 저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입증해 준다. 그렇게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도 이 주제에 대한 글들이 여러 개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이 비유의 이해에 대한 학자들의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2) 주요 해석 방법에 대한 평가:
그렇다면, 왜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는 것일까? 이 비유를 해석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4가지 주요 주장을 제시해 보자면, ‘전통적 해석’(Traditional Interpreation) ‘사회 경제적 해석’(Socioeconomic Interpretation) ‘사회학적 해석’(Sociological Interpretation) ‘풍자적 해석’(Ironical Interpretation)을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 해석 방법은 각기 강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약점도 가지고 있어서 쉽게 비판에 노출된다. 그 결과 어떠한 견해도 설득력 있게 학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다수의 학자들이 지지하는 전통적 해석의 결정적 문제점은 점증적(a fortiori argument) 논법이 이 비유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또 다른 예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데 있다. 결국은 그 당시 다른 문헌에서 이 같은 주장을 입증해 주는 경우를 발견하지 않는 한 어려워 보인다. 사회 경제적 해석의 경우에는 그 당시 풍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자료의 발견이 절실하며, 사회학적 해석의 경우에는 사회-경제적 해석이 갖는 어려움과 더불어 1-2절의 행위를 불의한 행위로 규정하는데서 난점이 발견된다. 이상의 세 가지 견해의 약점을 해결될 방안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풍자적 해석의 경우에는, 복음서의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흐름-불의를 용납지 않고 결코 칭찬할 수 없는 흐름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며, 5-7절의 행위를 불의한 행위로 보면서도 점증적 논법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확실치 않은 당대의 관습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 다만, 결정적 약점으로 지적된 풍자적 요소의 결여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다.
3) 풍자적 해석의 근거 제시- 문헌학적, 언어학적 연구:
풍자적 해석의 문제점은 ‘천막’과 ‘영원한 천막’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을 통해 가능하다. 위에서 ‘영원한 천막’과 관련하여 풍자적 뉘앙스를 제기한 학자들은 헬라어 단어 ‘천막’과 희랍어 표현 ‘영원한 천막’에 대한 문헌학적, 언어학적 고찰을 시도하지 않는다. 이제 문제는 ‘영원한 천막’이라는 표현이 문헌학적, 언어학적으로 볼 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가에 맞추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천막’이 ‘전정한 불멸의 거처’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풍자적 해석은 폐기 되어야 한다. 반대로, ‘영원한 천막’이 ‘사라져 버릴 천막’을 나타낸다면, 풍자적 해석은 힘을 얻는다.
따라서 본 연구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통하여 풍자적 해석이 과연 최상의 해결책인지 밝혀보고자 한다.
눅16:1-13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뜻은?
[질문]목사님 누가복음 16장 1절에서 13절 말씀을 해석해주세요. 전에도 난해하게 여겨지던 말씀으로 새벽 기도 기간 중에 다시 듣게 되었는데 제가 기대했던 말씀들을 듣지 못해서 여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사이트에서 말씀별로 나와 있는 곳에도 그 장은 없기에 꼭 여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눅16:1-8a)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8b-13)
[답변]이 기사는 대표적으로 난해한 구절로 꼽힙니다. 그 이유는 언뜻 보면 예수님이 누가 봐도 도덕적으로 분명히 악한 행위를 지혜롭다고 칭찬하고 또 신자들도 그런 점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성경을 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본문(text) 안에서의 문법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문자적 의미는 무시하고 곧바로 윤리적 영적 의미만 유추, 적용하려 드는데 잘못입니다. 문법적 분석이라고 해서 문자적 해석에 억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해석된 바탕 위에서라야 나머지 도덕적 영적 의미의 유추도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 해석이 정확하게 파악된 연후라야 문맥상에 연관된(contextual) 의미의 도출도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비유
본문은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어떤 사안을 설명한 후에 그 비유를 풀어서 해석 적용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비유 부분과 그것을 해석 적용한 부분으로 나눠야만 문법적 해석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대개 1-8절과 9-13절의 둘로 나누는데 저는 특별히 8절 한절을 중간에서 반으로 나눴습니다.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으로 비유는 끝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는 구절은 주인이 그 종을 칭찬한 내용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비유의 내용을 한 마디로 결론내린 말씀으로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단지 설명의 방편으로만 사용합니다. 그런 칭찬을 행한 주체가 문법적으로 누구인지는 사실상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칭찬의 내용이 “이 세대의 아들과 빛의 아들”로 대비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 주인보다는,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 안에 이미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단락의 구체적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성경의 비유, 특별히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의 역할과 해석법등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比喩, parables)란 단어 뜻 그대로 어떤 사안에다 그와 비슷한 사안을 평행으로 대비해 원래 사안의 의미를 더 명료하게 전하고자 하는 문학적 기법입니다. 화자(話者)가 강조하려는 요점을 일상생활에서 익숙한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함으로써 이해에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를 통해선 무엇보다 화자가 강조하려는 초점을 건져내어야하지 비유 자체의 의미에 집착해선 안 됩니다.
또 비유에는 필연적으로 몇 가지 특성이 나타나는데 해석도 그 특성에 맞추어 행해져야 합니다. 첫째 단순성(單純性)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강조하려는 요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 그 메시지가 간결하고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오묘한 천국 복음을 모든 세대에 걸쳐 쉽고도 정확하게 전달해 주어서 오래 기억에 남도록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친밀성(親密性)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생활이나 환경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예로 삼기에 현장에서 그 비유를 듣는 자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후대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심오한 내용과 진리를 구체적인 현실사안에 빗댐으로써 구상성(具象性)이 나타납니다. 이해를 돕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되 무엇보다 자신이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에도 구체적인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 특성은 모든 문학적 비유에 다 해당되지만, 예수님의 비유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중성(二重星)입니다. 전하는 의미가 아주 심오해서 영적으로 이중적,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비유의 기본적 특성인 단순성과 배치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비유를 자주 사용한 목적과도 위배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0-13)
단순하고 친밀하며 구체적인 비유임에도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는 제자들처럼 듣고 깨닫는 자가 있는가 하면 끝까지 그렇지 못한 자도 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의미는 알아들었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궁극적으로는 천국 비밀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성령의 감화로 예수님에 대해 마음이 열린 자는 순수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렇지 못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자들은 완악하게 거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래서 비유를 더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
예수님이 보이신 권능과 이적에는 환호하며 따랐던 수많은 자들이 막상 당신의 복음 전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종교 특권층들은 드러내놓고 반발, 비방, 멸시하며 일관되게 대적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태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의 선지자가 이미 다 예언한 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시고 복음을 인간적 사상과 철학으로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로 성령의 조명으로만 이해할 수 있게 더욱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원칙 몇 가지가 드러났습니다. 우선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일이라 쉽게 알아들었던 현장에 있던 청자(聽者)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미 말한 대로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을 간단명료하게 추출해내어야 합니다. 비유 전체를 일일이 축자적(逐字的)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강조점이 천국 비밀을 가르친다는 관점에서 재검증하되 앞뒤 문맥과도 연결하여 주님의 진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은?
당시의 청지기는 단순히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도맡아서 실제로 투자 운영하는 일까지 맡았습니다. 주인의 도장도 지니고 있으면서 모든 계약을 주인의 이름으로 맺을 정도였습니다. 지혜롭고 성실하며 충성된 종을 둔 주인은 오히려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며 자식 이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 그런 직분을 맡겼습니다. 물론 맡은 권한이 많은 만큼 조금만 마음을 잘못 먹으면 부정을 저지를 소지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재산을 도맡아 관리 운용하는 그런 청지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1절)고 합니다. 주인이 시킨 대로 한다면 허비를 해도 주인의 잘못이기에 그를 해고하기는커녕 탓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또 채권증서를 본인이 소지하고 있으면서 자기 임의로 고칠 즉, 상거래 계약을 갱신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단순히 재산을 운영하여 증식함에 정세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손해를 봤다면 주인에게 이실직고를 했을 것입니다. 또 사전에 위험 부담이 있는 계획이었다면 주인과 상의 내지 통보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말이 어찜이뇨”라고 따진 것을 보면 이미 청지기가 자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유용, 횡령, 착복한다는 사실을 주위에선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주인은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명했습니다. 관리하던 재산을 전부 공정하게 계산해서 되돌려 주고 청지기 직분을 그만두라는 해고명령이었습니다. 청지기란 자식보다 더 믿는 자라야 맡기는데 해고할 정도라면 그가 상당한 부정을 저지른 것이 확실합니다.
졸지에 해고를 당한 청지기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육체노동을 할 계제가 안 되고 특별한 기술도 없으며 거지 노릇은 더더욱 할 수 없어서 자기 살 길을 궁리했습니다. 채무자를 일일이 불러서 소지하고 있던 채권증서에서 채권금액을 까주기로 했습니다. 그럼 신세를 진 채무자들이 자신이 퇴직한 후에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거나, 혹은 그 활인금액을 서로 나눠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다 재산과 장부 일체를 되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동안 자기가 허비한, 사실은 착복한 만큼을 감해서 장부상으로도 부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금액을 끼워 맞추는 작업을 했습니다. 횡령에 대한 물적 증거를 없앤 것입니다. 채권증서를 자기가 변조 수정하지 않고 채무자더러 자필로 다시 쓰라고 한 까닭입니다. 주인의 인감도 맡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산과 장부를 되돌려 받은 주인으로선 시중에 떠도는 루머와 자기 짐작에 따른 심증은 분명 있지만 물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지기가 지혜 있게 일을 처리했다고 칭찬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행이나 업적을 높여주는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성경도 “이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 청지기이지만 자기 앞날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영악하게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비유 자체가 의미하는 바에 관심을 두어선 안 됩니다. 비유란 정작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명료하게 이해시키는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더러 그런 행동까지 본받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후반부에서 정작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을 이 비유에 비추어서 진지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해석하는 기본 관점은 오히려 청지기의 잘못을 세밀히 잘 파악하여서 절대 그대로 따르지 말라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주인이 분명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설마 이런 청지기를 닮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단연코 아닐 것 아닙니까? 주인을 우습게 알고 무시한 청지기가 오직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만 재물을 잘못 사용했기에 충성된 청지기는 재물을 맡긴 주인을 위해서만 재물을 운용해야 한다는 비유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신 뜻이 애매한 것입니다. 우선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니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도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친구를 사귀라고 했으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번 돈이라도 장래를 대비해 주변 사람들을 잘 대접하라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나중에 그 보상으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라고 하니까 더욱 모호해집니다.
이런 오해들은 성경본문을 건성으로 읽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서두에 가장 먼저 문법적 분석부터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문법적 분석이라는 것이 다른 것 아닙니다. 문장의 정확한 뜻부터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앞뒤 문장과 연결된 자연스런 흐름도 추적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문장이 스스로 표명하고 있는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성경을 읽고 치웁니다.
나아가 문법적 해석은 생략한 채 무조건 윤리적 영적 교훈만 찾으려 듭니다. 마치 도덕적 영적 해석이 더 우월하고 정확한 해석인양 착각합니다. 그러니 본문의 경우도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걸려서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자증(自證)하는 정확한 의미를 벗어난 채 도덕적 영적 교훈을 먼저 세운 것이 이단의 오류인데도 말입니다.
바로 앞 문장 즉, 예수님이 비유의 결론으로 내린 말씀부터 다시 봅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은 불신자와 신자를 대비하는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수식어로서 더 지혜로운 요소가 작동되는 영역에 어떤 제한을 두었습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불신자들이 이 땅에서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법에선 신자들보다 아주 영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수로 지칭했습니다. 청지기뿐만 아니라 그의 부정에 기꺼이 동참한 채무자들도 함께 포함시킨 표현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안일과 풍요만을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쓴다는 것입니다.
또 비유에서 부자는 하나님을, 청지기와 채무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그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함도 분명합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뜻대로 살려는 신자들은 청지기와 그 공범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물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쓰라고 일시적으로 맡겨주신 것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번 돈이라고 해도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여건 전부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이 땅을 전부로 보는 사상입니다. 자기 안일과 풍요만을 목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만 사랑하여 모으고 씁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인식이 전혀 없기에 자기 능력이 뛰어나 번 것으로 착각합니다. 자기를 위해 이 땅에만 쌓아놓은 재물이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도적과 동록이 번창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 자신의 생명마저 앗아갈지 모릅니다.
그럼 신자는 무엇보다도 “자기 시대가 아닌 하나님의 시대에서” 사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며 영원한 세계가 있으며 오히려 그곳을 더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성실하게 모으고 정직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또 재물은 어제 있다가도 내일 없어질 것이며 영원한 것이 절대 되지 못합니다. 재물 그 차제로는 절대로 하늘의 보물로 쌓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자기 안일과 풍요가 아닌 하나님이 쓰시라고 하는 곳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이처럼 마지막 문장을 포함한 비유만 조금 더 정확히 살펴봐도 예수님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거의 다 나온 셈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자주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뜻도 자동적으로 명확해집니다.
재물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쓰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불의한 재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시대만 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의 재물은 불의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시대를 사는 빛의 아들들은 그 불의한 재물을 의롭게 사용하여 의로운 재물로 바꿀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번 재물로만 꼭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비유의 청지기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이해타산에 맞는 상거래를 한 것뿐입니다. 서로 진심을 주고받으며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재물을 사용하면 의의 재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청지기인 빛의 아들들에 돈을 맡기신 뜻입니다.
친구라고 해서 단순히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에 항상 천국의 비밀을 담았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말씀들 안에도 서로 연관되는 뜻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이웃 즉, 친구의 범위를 예수님이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사회적 신분, 위치, 권세, 재물, 계급 등에 전혀 차별대우를 두지 말고 누구라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자들을 자기 가진 소유를 사용해 성심껏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영원한 처소는 당연히 천국입니다. 없어질 때라는 표현에는 무엇이 없어지는지 그 주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물(의 효능과 의미가)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생명이 없어질 때라고 하든지 간에 어쨌든 신자가 죽어 천국 갈 때인데 이어지는 말씀과도 뜻이 자연스레 연결됩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사귄 친구들이 신자를 천국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표현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신자가 그렇게 섬긴 일로 인해서 천국가게 되거나, 그렇게 섬김으로써 도움 받은 자도 빛의 자녀가 되어서 함께 천국에 가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선행이 조건이 되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빛의 아들들 즉, 구원 받은 자들이 재물을 어떻게 운용해야할 지에 관해서 가르치는 중이지 않습니까?
바로 앞장에서 예수님은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의 하나님의 기쁨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되찾은 열 드라크마와 돌아온 탕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6장에선 재물에 관한 세 가지 강화를,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말씀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하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전체 문맥상의 의미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후로 지녀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으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는 물론, 정말 당신의 은혜를 아는 참 신자라면 자연히 그런 물질관(物質觀)을 갖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고 참된 것에 충성하라.
그런데 예수님의 재물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빛의 아들들에게 정작 가르치고 싶은 내용은 지금부터입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사실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문장이 스스로 나타내는 의미만 살펴도 그런 뜻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맡기겠느냐고 합니다. 그럼 논리적 흐름 상 재물은 참된 것이 당연히 아니며 동시에 참된 것을 맡아 충성하는 것이 큰 것에 충성하는 일이 됩니다. 역으로 따지면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 됩니다. 그럼 크고 참된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정작 충성해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다시 문장의 의미를 순서대로 추적해 들어가 봅시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지금 예수님이 처음 비유를 들 때부터 지금까지 또 마지막 결론격인 13절에 이르도록 의도적으로 두 가지 사물을 일관되게 대조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까?
한쪽은 남의 것에 충성하는 일인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또 그것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다는 의미입니다. 비유에서 청지기가 부자 주인이 맡긴 재산을 주인 뜻대로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부정하게 관리함으로써 하나님을 외면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를 지혜롭게 사는 방안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맡기신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하지 못한 실패를 범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조되는 다른 쪽은 크고 참된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은 영원한 시대를 살기에 남이 맡긴 지극히 작은 재물에도 당연히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크고 참된 것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크고 참된 것을 지금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재물은 결코 너희의 것이 아니며 진짜 충성해야 할 너희의 것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결론을 보십시오. 집 하인이 두 주인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짜 너희의 것이자, 크고 참된 것이자,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자, 없어지지 않을 것이자, 영원한 처소의 주인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그런 주인으로 확고히 모시고 있는 자에게 재물은 지극히 작은 것이자, 나의 것이 아닌 맡긴 것이자, 그것으로 이웃을 섬겨야 할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이 말씀도 당시의 사정을 알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귀신들려 점치는 여종에게 복수의 주인들이 있었듯이, 하인이 때로는 실제로 두 주인을 섬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다른 한 주인에게는 여전히 종으로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복수의 주인을 섬기다 보면 아무래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주인을 더 성의껏 섬기려 들게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려 해도 동일한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재물이 하나님보다 현실에선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안락에 유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잘 인도해주실 때는 몰라도 환난이 조금만 닥쳐도 그분을 의심 불신합니다. 그러나 돈에 대해서 비굴하게 굴종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도 솔직한 그 속내를 따지면 재물을 더 얻고자 하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를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어떻게 밝혔습니까?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마6:24) 반드시 자기가 더 좋아하는 쪽으로 쏠리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했지 않습니까?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보물이라고 즉,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와 그 해석과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결론까지 다 듣고 난 바리새인들이 보인 반응을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3:14)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과 경건에선 당대 최고였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합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이중성이 여실히 입증된 사례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고 들으면 그 뜻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오히려 복음의 비밀이 그들에게 가려진 것입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예수님의 초대의 손길을 거절, 아니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음이 완악해져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절)
그들 마음의 보물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받는 것은 뒷전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게 된 종교적 권세를 이용해 역으로 사람들로부터 교묘하게 돈을 긁어내어서 모으기에 바빴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처럼 자기 시대에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를 위해 돈을 쌓아가는 이 세대의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무보다 숲을 먼저 보라.
마지막으로 첨언할 것이, 사실은 재차 강조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 원리 중의 하나는 반드시 숲을 먼저 본 후에 나무를 보라는 것입니다. 먼저 숲을 보면 나무도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지만, 나무에만 시야를 한정시키면 전체 숲이 어떤 것이지 종잡을 수조차 없습니다. 전체 대의를 먼저 파악한 후에 세부적인 구절의 개별적 의미를 따져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함에선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본 사안이 아닙니다. 본건의 의미를 명료하게 단순화시켜서 강조하기 위한 보조 사안입니다. 또 모든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천국 복음이라는 일관된 주제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그것도 일부 부분만 붙들어서 영적으로 해석하려 시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청지기가 불시에 닥친 환난을 자신의 지혜를 전부 동원해서 잘 이겨내었기에 우리도 어떤 환난이 닥쳐도 절대 당황하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피할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권하는 것입니다. 환난 때에 당황하지 말고 지혜를 동원해 이겨내라는 권고 자체는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아주 좋은 충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몰라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아니 상식적으로 아는 내용입니다. 구태여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질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고 본문 비유를 두고 환난이 닥치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 이겨내라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도 나무를 보는 해석일 뿐입니다. 전체 대의는 신자가 지녀야할 물질관에 관한 것이지 환난을 이겨내는 방법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또 지극히 적은 것에도 충성해야 더 큰 것을 맡긴다는 구절만 인용하여서 흔히들 교회에 물질로 잘 봉사하면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축복한다는 식으로도 해석합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해석으로 절대 금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의 복음을 물질로 잘 섬겨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는 물질 복음으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교회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또 더 큰 것이 문법적 해석만으로도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큰 복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라는 것이 밝혀졌지 않습니까?
심지어 불의한 재물이라는 한 구절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은 불의한 것이고 악의 근원이므로 신자는 아예 멀리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돈 자체에는 선악간의 의미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재물 자체는 결코 불의한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질 뿐입니다. 빛의 아들이 정직하게 재물을 벌어 그분 뜻대로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하면 의로운 재물이 되지만 옳지 않는 청지기 식으로 운용하면 불의의 재물이 됩니다.
나아가 기독교는 재물을 아예 부인하는 염세적 가치관은 완전히 배격합니다. 하나님은 물질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구현할 영육간의 삶 양쪽을 다 귀중히 여깁니다. 인간에게 고급한 지정의를 부여해서 당신 대신에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게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육체적 물질적인 것은 천하고 더러운 반면에 정신적 영적인 것만 선하고 귀하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잘 운용하여서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그분의 공동체를 이루면 그에 사용된 물질은 너무나 선한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위의 몇 가지 해석 예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자, 비유라는 특성을 무시한 해석입니다. 본문 기사의 요체는 마지막 결론 즉, 신자는 절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한 말씀에 다 모여 있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신자가 세상에서 빼앗기지 않고 영원토록 섬길 수 있는 신자의 절대적 소유입니다. 재물은 오직 그 주인을 충성되게 섬길 수 있는 수단으로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지극히 작은 것일 뿐입니다.
재물이 커져 보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작아 보이거나, 하나님을 재물을 얻는데 도움 얻는 종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비유에 나타난 청지기와는 재물에 대한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서 정반대의 방식으로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이 뜻하는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 안에 든 자에게는 그 아들과 함께 하늘에 속한 모든 좋은 것으로 풍성히 주십니다. 이제 빛의 아들이 된 신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해야합니다. 그럼 나머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지는 그분께서 다 아시기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다 채워주십니다. 정말로 그분께서 우리 것으로 주신, 바로 그분 당신만을 평생토록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11/9/2009
옳지 않았으나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
옳지 않았으나 칭찬받은 불의한 청지기
흔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알려진 이 비유는 해석하기 어렵고 적용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비유입니다. 내용이 반전 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절마다 주제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중과 적용점을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는데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니 주인이 그에게 해고를 명합니다.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즉 퇴직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눅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 눅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 눅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청지기는 자신의 주제를 아는 정도의 지혜는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리고 한 가지 결단을 내립니다.
이 비유의 가장 큰 강조점은 옳지 않은 청지기도 이 정도는 깨달을 줄 알고 결단을 내릴 줄 알았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바로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눅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해고선언을 받은 청지기는 살 길을 찾아 고민하다가 한가지 방법을 찾아냅니다.
[ 눅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청지기는 빚진 자들을 불러 제멋대로 빚을 탕감해줍니다. 문서 변조를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문서 위조요 법적인 문제가 생길 일인데 청지기는 작심을 하고 빚진 자들의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 눅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 눅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눅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기름 백 말은 오십으로 변조하고 밀 백 석은 팔십으로 변조해주었습니다. 이렇게 빚을 탕감해주면 나중 이 사람들이 자신을 잘 돌보아줄 것을 기대하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기름 백말은 당시 단위로 보면 천데나리온 쯤이고 밀 백석은 2천 5백 데나리온 정도라고 계산합니다. 상당히 거액입니다. 기름은 반으로 깎아주었고 밀백석은 팔십으로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이 예상을 벗어납니다.
주인이 이 청지기를 법정에 고소하거나 끌고 가지 않고 오히려 그를 칭찬합니다.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분명히 성경은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말합니다.
청지기가 한 일은 분명히 ‘옳지 않습니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칭찬합니다. 지혜롭다고 칭찬합니다. 옳지 않는 지혜를 칭찬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빚진 자들, 혹시 그중에서 억울하게 빚진 자들도 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뒷 부분에서는 불의의 재물, 불의한 재물이라는 말이 계속 나타납니다. 주인의 돈도 사실은 불의하게 착취한 돈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시각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 주인 자체가 고리대금업으로 사람들을 착취해서 원성이 높았던 사람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과감하게 그 빚을 탕감해주므로서 주인이 칭찬받고 인기가 올라가고 빚진 자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기에 주인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칭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마도 청지기가 그동안 빚진 자들을 괴롭히며 중간이익을 착취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받을 마진margin을 다 없애고 자기 몫으로 돌아올 몫을 탕감해주지 않았을까, 그러니 아마도 주인이 법적으로 고발하지 않고 칭찬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비유의 주제 자체가 ‘옳지 않은 청지기’가 아니라 그런 것을 용납하는 주인의 은혜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15-16장을 관통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즉 돌아온 탕자의 비유도 사실은 ‘돌아온 탕자’가 핵심이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가 주인공이듯이 이 비유의 주제도 ‘옳지 않는 청지기’가 아니라 ‘은혜로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청지기는 오히려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9절부터는 이 불의한 청지기와 주인 이야기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이신데 내용이 뜻밖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그 ‘옳지 않은 청지기’를 잘했다고 하시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원칙이라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안되고 자기 재물이나 의로운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과연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는 길이 될까요?
지난번 개역성경은 그것을 ‘영원한 처소’로 번역했기에 이 구절은 불의한 재물로라도 친구를 많이 사귀고 많이 베풀면 ‘천국- 영원한 처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근거구절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눅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개역성경)개정성경은 그래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 부분을 ‘영주할 처소’로 바꾸었습니다.
영원한 처소 αἰωνίους σκηνάς 아니오니우스 스케나스 Eternal Dwellings 영주할 처소
천국이 아니라 청지기에게 덕을 본 사람들이 제공하는 처소라고 해석했습니다. 천국은 재물로 가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예수님의 전체적인 말씀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나무를 볼 것이 아니라 숲으로 보면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은 이것을 반어법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구절을 예수님의 본 뜻이라기보다는 역설적 반어법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9-10절에 대한 현대어 성경 번역입니다.
[눅16:9] 그래, 그 더러운 돈으로라도 한번 친구를 얻어 보아라. 돈이 다 떨어지면 그 친구들이 정말 너희를 잘 대접하겠지.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눅16:10] 정말 그럴 성싶으냐? 너희가 작은 일에 정직하지 못하면 큰일에도 정직해질 수가 없다. 만일 너희가 사소한 것을 속여 빼앗으면 더 큰 책임을 졌을 때 정직하게 해나가지 못한다.반어법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데 개정성경 10절부터는 다시 청지기의 행위자체가 바른 것은 아니라는 원칙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10절부터 12절은 ‘아, 저런 청지기처럼해도 구원을 받는구나’하고 오해하지 않도록 다시 원칙을 강조하는 부분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어야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구절로 봅니다. 지금 이 비유를 들어야할 사람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 눅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 눅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청지기는 분명히 불의한 자입니다.
칭찬은 들었지만 흉내내거나 배울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비유의 핵심은 불의한 청지기라도,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은 청지기라도 나름대로 깨닫고 결단을 내리고 변화하고 이웃들의 어려움을 덜어준 행동의 결단을 칭찬하는 것이지 불의한 청지기의 문서변조 행위 자체가 옳다는 것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과 율법을 맡고 관리하는 자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게으른 청지기였습니다. 문제는 그것도 깨닫지 못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도 나름대로 깨달을 줄 알아 결단을 내릴 줄 아는데 정작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맡고 관리해야할 바리새인들은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말씀대로 충성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재물을 나누지도 않음을 꾸짖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반응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의 반응에서 예수님의 비유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어야할 대상들이 바리새인이었음을 문맥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눅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 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그러고보면 바리새인들은 불의한 청지기와 같았습니다.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잘 관리해야할 청지기와 같은 입장이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추상같은 심판의 선포를 듣고 회개해야할텐데 그런 정도의 깨달음도 없었던 것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차라리 이 세대의 아들들은 깨달음이라도 있는데, 먼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본인들이 이런 불의한 청지기인줄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재물을 쓸 줄은 더욱 몰랐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은 비웃음으로 반발합니다.
재물을 좋아하는 그들은 이렇게 나눔의 가르침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청지기가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깨닫고 나름대로 베풀고 살길을 찾을 줄 아는 정도의 지혜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빚진 자들에게는 아주 실제적인 도움이요 은혜가 되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못하니 그런 깨달음과 결단과 실천만은 배우도록 하거라! 특히 재물을 바로 사용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거라!
성경말씀을 읽으면 내게 적용할 것을 찾아내고 결단하는 영적 지혜가 중요합니다.
베델 바이블 하우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
누가복음 16:1-15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 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이 비유는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합니다 . 우리가 이제 읽은 바대로 이 비유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 어느 날 이 부자는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 이에 청지기를 불러서 그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이제 곧 직업을 잃게 된 청지기는 실직 후의 삶을 대비하여 한 가지 계책을 마련했습니다 . 그것은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삭감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 그는 채무자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그들의 빚을 상당액씩 심지어는 절반까지 줄여주었습니다 .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직업을 잃고 갈 데가 없을 때 이 빚진 자들이 그들의 집으로 자신을 들여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있을 수 있는 일이며 , 따라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어려운 부분은 8 절 말씀입니다 . 이 청지기의 주인은 그가 한 일을 알고는 오히려 이 “ 불의한 ” 청지기를 칭찬했습니다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미래의 삶을 대비해야 한다며 주인의 재산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인은 그의 행동을 “ 지혜롭다 ” 고 여기며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
청지기의 행동에 대한 주인의 칭찬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 우선 이 비유는 재산이나 소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 이것은 금전적인 이득이나 손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 9 절에 이 비유를 적용함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 친구 ” 와 “ 영원한 처소 ” 를 우리가 추구할 궁극적인 목표로 언급하시는 반면 , “ 불의의 재물 ” 곧 세상의 재산을 “ 일시적인 수단 ” 으로 취급하십니다 . 이것은 13 절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14 절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 이 말씀 또한 이 비유가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됩니다 . 곧 우리는 이 비유의 초점이 돈이나 부유함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이 비유는 또한 도덕성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 사람들은 이 주인이 어떻게 자신의 재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 이 청지기의 행동을 칭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합니다 . 비록 돈이나 재산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더라도 , 불의함은 불의함일 뿐입니다 . 또한 이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이유로 이 청지기를 해고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주인의 소유물을 허비한 청지기의 허물은 이 청지기의 지혜로운 행동에 대한 주인의 칭찬과 모순될 만큼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 심지어 이 청지기의 도덕적 결함이 이 비유의 중요한 요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훌륭한 배경을 제공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 그 요점이란 청지기의 지혜와 그 지혜로움에 대한 주인의 인정입니다 . 제가 아는 한 , 놀랍게도 , 복음서에서는 “ 도덕성 ” 이 중요한 문제로 다뤄진 적은 없습니다 . 오히려 우리는 그 정반대의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 예를 들어 , 누가복음 15 장에 나오는 바 유명한 “ 탕자의 비유 ” 에서 , 둘째 아들은 그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 허비 ” 하였습니다 ( 누가복음 15:13). 이 이야기에서 비슷한 습관을 가진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 이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 아버지는 그처럼 부도덕한 삶을 살다가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 쓸모 없는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열고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 이로 인해 첫째 아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들과 함께 먹어버린 동생에 대해서 화가 났으며 , 또한 그런 몹쓸 녀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 이 첫째 아들이야말로 그의 높은 도덕성을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 이 얼마나 훌륭한 아들입니까 ?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이 큰 아들의 착함을 칭찬하시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의 15 절에서 ,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 “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이 비유의 요점은 청지기의 지혜와 또 주인이 이 지혜를 인정하고 칭찬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이 청지기는 지혜로웠을까요 ? 간단히 말해서 그는 미래를 예측하고 또 그것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 이것이 그의 지혜였습니다 . 이 지혜를 가지고 그는 현명하게 행동하였으며 , 또 그 열매를 수확했습니다 . 성경에서 지혜란 “ 앞날을 예측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 ” 입니다 .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며 , 요셉은 7 년의 풍작과 7 년의 대기근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그것을 준비하였습니다 . 선지자 다니엘 또한 느부갓네살 왕의 불가사의한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미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 이들은 모두 높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자들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 이에 반해 ,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지혜와 분별력이 없음을 인하여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 “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더라면 ……” ( 신명기 32:28-29).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면 외치셨던 최초의 말씀 안에 다 요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 “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 마가복음 1:15). 참된 지혜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이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에는 무엇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지혜들로 가득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내일을 준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 지혜란 오늘을 희생하여 미래를 준비하며 영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가까워오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 충성됨 (being faithful)” 입니다 .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떤 청지기입니다 . 옛날에 청지기라는 직책은 매우 양면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 어떤 집의 살림을 맡고 있는 청지기는 그 집의 식솔들에게는 “ 왕 ” 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 동시에 그는 주인에 대해서 “ 노예 ” 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 이런 청지기의 지위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입니다 . 요셉은 애굽왕 바로의 신하 보디발에게 노예로 팔렸습니다 . 하나님께서 요셉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심을 본 보디발은 요셉에게 자신의 집과 모든 소유물을 통째로 다 맡겼습니다 ( 창세기 39:4). 그는 모든 일들을 요셉에게 일임하고 간섭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 요셉은 여전히 노예들 중 하나였지만 , 그는 사실상 보디발 집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 애굽왕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할 때에도 똑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 바로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 ( 창세기 41:40-44). 어떻게 해서 요셉은 노예로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 이는 그가 주인의 “ 이익 ” 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 그는 심지어 주인 자신보다도 더 주인의 이익에 충실했습니다 . 다시 말해서 주인의 “ 관심사 ” 에 대한 요셉의 충성됨이 그를 왕과 같은 권세를 가진 총리의 자리까지 높인 것입니다 . 이와 관련하여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라는 신학자의 말을 한 마디 인용하겠습니다 : “ 권세란 왕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 권세란 어떤 명문 (cause) 을 위해 모든 것 ,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적 결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Authority does not mean to be a king, but by a firm and conscious resolution to be willing to sacrifice everything, one’s very life, for a cause.”) 맞습니다 . 청지기의 권세란 주인의 이익을 위해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겠다는 견고하고 자발적인 헌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로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시라 ” ( 창세기 1:28). 이것은 특히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진리입니다 . 누가복음 12:42-43 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 주인의 청지기가 된 우리의 삶은 결코 주인의 관심사와 분리되어 살 수 없습니다 . 그 반대로 우리의 삶은 생명을 버리는 데까지 주인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 우리는 오늘 이야기의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을 통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하나씩 불러서 그들의 빚을 상당량 삭감해 주었습니다 . 성경에서 “ 빚진 자 (debtor)” 는 자주 “ 죄인 (sinner)” 을 , 그리고 “ 빚 (debt)” 은 “ 죄 (sin)” 를 의미합니다 . 여기서 “ 주인 ” 이 예수님을 의미한다면 , 이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은 주인의 관심사와 매우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는 빚진 자들에게 주인의 “ 용서의 은혜 ” 를 나누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우리 크리스천 청지기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 우리는 집안의 식구들에게 천국의 음식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의 집을 맡은 자들입니다 . 그리고 천국의 음식이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 Henry Hon 이라는 크리스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예수님을 사람들 속에 심음으로써 그 예수님께서 사람들 속에 다시 나시며 자라시는 것입니다 .”
세상을 살면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관심사들을 갖고 있습니다 .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 그것은 아마도 경제적인 부와 도덕적인 선함일 것입니다 . 이것들이 우리의 가장 우선되는 이익입니다 . 이 둘을 모두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까 ?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 이들은 돈을 사랑했으며 , 동시에 “ 의 (righteousness)” 를 구했습니다 . 하지만 이들이 구한 “ 의 ” 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위선적인 “ 자기의 (self-righteousness)” 였습니다 . 흥미롭게도 이 불의한 청지기는 바리새인들의 재물 사랑 및 위선적 자기의와 반대가 되는 방식으로 행동했습니다 . 그는 빚진 자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 주인의 재물을 허비하였습니다 .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바리새인들의 가장 우선되는 관심사를 무시했습니다 . 오히려 그는 빚진 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재물을 아끼지 않았으며 “ 불의한 자 ” 라는 오명을 감수했습니다 .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 누가 채무자들의 안녕에 관심을 보이며 , 누가 채무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까 ?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보면 , 이 불의한 청지기는 불의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 하지만 이 불의한 청지기는 빚진 자들에 모든 것을 퍼부으며 , 그들의 호의를 기대했습니다 . 이것이 그의 관심사였으며 , 사실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 하나님의 유일한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은 모든 희생을 감내하시며 ,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고 그를 죄인으로 만들기까지 ( 고린도후서 5:21) 하시면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 이것은 충격적으로 “ 불의한 허비 ” 입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이렇게 “ 불의한 허비 ” 를 무릅쓰셨습니다 . 하나님의 이와 같은 유일한 관심은 누가복음 15:3-7 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 잃어버린 양의 비유 ” 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 어떤 사람이 100 마리의 양을 갖고 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렸을 때 , 그는 남은 99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남겨두고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다녔습니다 .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그는 99 마리의 다른 양들을 맹수들이 들끓는 벌판에 버려두었습니다 . 하나님께는 “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 ” 이 “ 그 외 다른 모든 것들을 합한 것 ” 보다 더 중요합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서 ,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 그 영혼이 아무리 작은 자일지라도 , “ 불의한 허비 ” 를 정당화시킵니다 . 심지어 그 허비가 매우 클지라도 말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를 섬기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 그 유일한 관심사란 한 명의 잃어버린 영혼에게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도덕성에 있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경제적 부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관심은 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있으며 , 이를 위해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 “ 그리스도 ” 는 결코 다함이 없는 재산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엄청난 보화를 준비하셨습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에 동참할 충성스러운 청지기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에 온전히 그리고 간절히 헌신하는 한 , 우리는 이 재물을 허비할 권리를 가진 세상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 반대로 우리가 이 재산을 가지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주인의 소중한 재산을 쓸데 없게 만드는 불의한 청지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에 드릴 때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한 부유함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 썩지 않는 영원한 부유함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이러한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우리가 영원한 집에 들어가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충성스러운 청지기들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리”(눅 16:9).
오늘 저와 함께 예배드리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삼위의 은총이 같이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지금 봉독하여 드린 이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불의한 청지기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첫째 대지 (大旨)에서는 불의한 청지기의 불행한 오늘의 삶을 본문에서 살펴보고, 둘째 대지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부자(富者)주인의 은혜를 입은 청지기의 내일의 큰 변화와 희망과 축복을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한편으로는 매우 흥미를 느끼게 하고, 한편으로는 매우 당혹감을 가지게 하는, 약간 해석이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조금만 유의해서 살펴보면 본문 속에서 바른 해석의 열쇠를 찾을 수 있고, 따라서 좀 어려운 말씀인 그만큼 더욱 큰 은혜와 진리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1. 불의한 청지기의 불행한 오늘
먼저 본문의 뜻을 대략 살펴봅시다. 여기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이 교훈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주인의 소유를 다 맡아서 관리하는 중책을 받은 청지기가 있었는데, 이 청지기가 몰래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사실이 주인에게 알려졌습니다. 주인은 그 청지기를 이상 더 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파면을 통고한 다음, 회계 장부를 정리한 후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그 짧은 기회를 악용해서 주인의 장부를 처리하여, 전보다 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세히 말씀하신대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가 자기 뜻대로 그 채무자들의 채무 얼마씩을 감면해주고, 그 대가로 자신이 받을 사례를 가지고 여생을 편안히 살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의 죄악도 우리에겐 놀랍게 보이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8절에 보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하시기를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에’ 그 지혜를 예수님도 칭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불신자를 의미하며, ‘빛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불신자들로부터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삶만이 아니라, 내일의 삶, 더 나가서 현세뿐 아니라, 영원한미래, 즉 내세의 삶을 예비하는 지혜를 배우라는 것이 예수님의 이 비유의 목적입니다. 9절의 이수님 말씀이 이 해석을 잘 뒷받침해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내세의 천국)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사기죄를 칭찬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모든 죄인들은, 그들의 참되고 영원한 친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는 믿음의 지혜를 배우라는 것이 예수님의 이 비유의 목적입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작은 것에 충성하라, 남의 것에 충성하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 등의 윤리적 교훈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거듭난 인간의 새생활과 열매 있는 삶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빛의 자녀들의 그와 같은 윤리적 변화는 예수님이 앞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믿음의 지혜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뜻을 파악한 우리는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두 대지로 나누어 불의한 청지기의 불행했던 오늘과, 그와는 정반대인 희망찬 그의 내일의 삶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제가 이 설교의 첫 대지에서 사용한 청지기의 ‘불행한 오늘‘ 이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우리 인간의 생활은 백년이 하루 같은 죄악의 연속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이 청지기는 부자 주인의 용서를 받기 이전까지, 첫째로 그의 죄악으로 인한 극도의 불행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고, 둘째로, 그의 죄악과 불행은 하루, 이틀만이 아닌, 끝없이 계속되는 죄와 불행, 따리서 생애의 매일 매일이 변함없이 죄와 불행으로만 이어져왔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의 생활은 일생이 하루같이 변함없는 죄와 벌고(罰苦)의 일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본문의 전반부가 보여줍니다.
그러면 먼저 이 청지기가 불의한 생활을 할 때의 그의 불행한 삶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2절에서는 이 청지기가 직업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부끄러운 사기죄로 징계를 받고 파면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사기죄 짓고 들키는 불행과 수치, 거기에다가 직업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수치와 불행이 아닙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청지기의 그 큰 불행은 계속 더해진다는 점입니다. 이 청지기는 자신을 그토록 수치와 고통으로 몰아 넣은 그 죄를 다음날 또 짓습니다. 아니 더 짓습니다. 그는 전보다 더 크게 재물을 ‘허비’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전보다 더 큰 죄는 어느새 주인에게 또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청지기의 박탈된 참상(3절, “내 직분을 빼앗으니”)과 전도(前途)의 막연함(3절, “내가 무엇을 할꼬”), 수치 (3절,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는 더욱 가중되어만 갑니다.
성도여러분, 이 비참한 상태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우리 모두의 실상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보다도 더 놀라운 말씀은 8절의 예수님의 해설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반어법(反語法 irony)과 해학법(譜讓法, satire)의 극치가 구비된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깊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교훈의 핵심에는 첫째로 ‘어둠의 아들들의 어리석은 지혜’ 라는 아이러니와, 그 지혜의 열매는 쓰디쓴 불행뿐이라는 하나님의 진리가 번득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러나 이 극도의 죄벌의 불행 중에 있는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는 그 힘을 나타낼 수 있다는 복음의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문장법(文章法 )에서 말하는 복선법 (伏線法 ,underplot, forestalls)과 반전법 (反轉法 ,revers turn)의 극치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우리는 그 표현에 걸맞는 심오한 복음의 계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의 불행하던 나날을 전혀 새로운 희망의 미래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의 구윈의 은혜를 여기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나타냅니다. ‘친구’의 원어 ‘필루스‘는(친구)의 복수형 목적격인데, 그 뜻은 하나님의 삼위 (三位)와 하늘의 성도들과 천사들을 포함하는 복수명사인 듯합니다. 즉 죄악의 불행과 고독에 갇혀서 살아온 청지기도 천국의 천만 성도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과 우리들 모든 인간은 예수님뜻 – 좋으시고 부자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신 예수님을 믿음 안에서 만나기 이전까지는 한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두 다 이 불의했던 청지기와 꼭 같이, 죄를 죄인 줄 알면서도, 그리고 그 보은은 말할 수 없는 박탈감과 앞날의 막연함과 수치감 뿐인 줄을 알면서도, 동일한 죄를 날마다 계속 짓는, 지혜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오늘 이 시간 즉시 순종하여, 참 지혜로운 빛의 자녀들이 다 됩시다! 우리 모두, 누구든지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바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복된 기회를 우리는 계속해서 본문을 통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2. 사함 받은 청지기의 희망찬 내일
날마다 죄와 불행 속에 살아오던 청지기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9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이 청지기가 ‘영원한 안식의 처소‘(9절)에까지 들어가게 되는 갑작스럽고 크나큰 변화의 원인을 이 청지기 자신에게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의 결과가 수치와 고통뿐인 줄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그 죄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더 큰 죄를 계속 지었습니다. 칼 스킬더 (Karl Schilder)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내일의 죄는 언제나 오늘의 죄보다 더 악하다”고 단언했는데, 이 말은 우리 모두의 개인적 체험을 보든지, 인류의 역사 전체를 보든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일에 저 천국의 친구들과의 기쁘고 화창한 만남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의 용서와 보증(保證)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용서와 보증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의의 재물로 사귀는 친구’이신 예수 자신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은혜를 바울 사도는 “적 많은 곳에 더 풍성히 주시는 은혜”(롬 5:20)라고 불렀고,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는 은혜”(사 40: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부자 주인의 은혜에 의하여 희망찬 내일을 맞이하게 된 이 청지기가 영원히(9절)누리게 된 축복 세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는 이 청지기에게 영원한 친구가 생겼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하늘의 ‘친구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귀한 친구는 청지기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청지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나의 친구’ 라고 불러주실 뿐 아니라(눅 12:4)자신을 ‘죄인의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마 11:19).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가장 자비로우신 자기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이나 욥의 벗이라고 소개하신 말씀에 나타났습니다(대하 20:7; 사 41:8; 약 2:23; 욥 29:4). 아브라함이나 욥이 누렸던 최고의 축복은 그들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우정(友情)이 그들의 장막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렇게 악하고 불행하고 고독했던 청지기가 이제는 갑자기, 오직 주님의 은혜만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과 천사들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속죄와 그의 부활의 권능 때문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영국의 시인 토마스 그레이 (T. Gray, 1716-1771)의 ‘시골교회 묘지에서 쓴 만가(輓歌)‘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 Yard)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시인데, 그 시의 종구(終句)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성실하게 살았던 한 농부가 인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는 날 ’하늘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사령관이던 로버트 리(Robert Lee 1722-1794)장군은 비록 북군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그 고매한 인격 때문에 역시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는 토마스 그레이의 ‘만가’ 에 심취 (心醉)해서말하기를 “내가 만일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만가’의 작가가 되고 싶다”고했답니다. 그리고 로버트 리 장군에게도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아마 정직하고 소박했던 한 농부가 세상을 떠나는 날 하늘에서 한 친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그 시의 종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헨델(G. F. Handel 1685-1759)의 불후(不朽)의 명곡 메시아의 절구(絶句).“내 주는 살아계시고 장차 땅에 오셔서 나를 안다고 하시리라”는 가사는 욥기 19장 25절에서 취했는데, 옛날의 욥이나 헨델이 모두 가장 감격스럽게 간직하고 있었던 소망은 저 영원한 천국에서 그들의 구세주께서 그들의 친구처럼 그들을안다고 하시고 영접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욥과 이사야와 역대기의 기자와 그리고 토마스 그레이나 로버트 리 장군 같은 많은 고결한 정신의 인물들이 다 같이 사모하던 하늘의 친구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이 불의하고 불쌍했던 청지기에게도 약속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지기의 주인을 부자(富者)라고 말씀하셨는데 (1절), 그 주인의 부함은 많은 재물보다도 그가 상징하는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의 부요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 불의했던 청지기에게 예수님이 주셨던 축복은 10절과 11절에 기록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고’ ‘남의 것에도 충성하는’ 새로운 윤리적 능력입니다. 이 청지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작은 것에나 큰 것에나’ ’남의 것에나 내것에게나’ 충성을 할 수가 도저히 없었기에 그는 그렇게 무절제한 범죄를 연속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예수넘의 속죄를 받고 중생하므로써 그는 새 피조물의 새 윤리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모세가 다른 점은, 모세는 십계명을 전하여 주었으나 그 계명을 지킬 힘을 사람들에게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윤리적 힘이 주어겼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12절에 기록된 대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신 뜻이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크게 행할 수 있는 일들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새로운 윤리적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범죄하고 죽었던 이유가 우리의 윤리적 무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의 말씀대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뿐 아니라 지극히 큰 것에도 충성하고, ‘남의 것에 충성할 뿐 아니라 내 것에도 충성할 수 있는’ 완전한 윤리자(倫理者),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후사(後訓)’가 된 것입니다(롬 8:17). 아멘! 할렐루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이만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손해본 장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삼위는 결단코 손해볼 일을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나타날 하나님의 유익은 먼 미래, 우리의 사후에만 있을 일이 아니고, 지금 여기, 이곳에서 곧 이뤄진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쓰기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말을 현재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R. B. 개핀(Gaffin)교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는 바울 사도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하면서 아담은 한낱 ‘산 영’ (a living spirit), 즉 하나의 생영(生靈)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는 사단 앞에 힘 없이 굴복했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속량하실 능력이 있어서 십자가를 자진하여 지셨고, 삼일 만에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승천까지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을 바울이 ‘살려주는 영’ (e quickening Spirit)(또는 the life-giving spirit, 또는 the enlivening spirit)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R. B. 개핀 교수는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 이 되신 결과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든 새 피조물도 다 같이 예수님처럼 죽은 이웃들을 살려주는 영이 되어서, 성령의 도구들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개핀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지금도 추앙하는 C.핫지 (Hodge, 1789-1878)나 B. B. 워필드(Warfield, 1851-1921)박사 등이 예수를 믿은 후의 신자의 생활을 중생. 회개, 신앙, 칭의, 입양(入養), 견인, 성화, 영화 등 구원의 체험을 여러 시간대(時間帶)로 나눠서 설명한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개핀 교수의 견해는 중생, 회개, 신앙, 칭의, 입양, 견인, 성화, 영화는 신자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에 일시에 다 완성되는 변화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정당하다고 제가 보는 이유는 이만한 큰 은혜, 이만한 큰 변화가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신자 앞의 임재가 균형이 안 맞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차대조표(貸借對熊表)가 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이 불의한 청지기의 첫날 생활-죄를 죄로 알면서도 그 죄를 계속 또 짓고, 그 ‘빼앗기고, 힘 없고 부끄러운 생활(3절)을 그대로 무한정 계속한다면, 하나님은 손해보신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손해보실 일을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이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에도 충성하고 남의 일에 충성하면 내 일에도 충성한다’ 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 율법의 반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새 생명의 법의 선포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이 청지기에게 주신 축복은 두 번째 축복을 더 명료하게 이해시키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청지기에게 주신 세 번째 축복은 본문 13절에 기록됐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U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이 청지기 – 우리모두 – 에게 주신 최후의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는 축복 –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가졌던 축복, 또는 그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심기지 말라” – 예수님의 이 계명들은 모세율법의 반복이 결코 아닙니다. 모세도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명했으나, 그의 계명에는 그것을 행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율법은 폐지되었고, 예수님의 새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와 성령으로 그의 새 계명을 실천할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13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내용이 하나도 없는, 모세율법의 반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이 말씀대로 하나님과 사단을 두 주인으로, 또는 하나님과 재물을 두 우상처럼 섬기지 않게 됐다는 확실한 보증(earnest)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진리는 사실 구약시대에도 이미 다니엘 같은 선지자들은 체험했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사도들과 많은 충성된 성도들과 순교자들이 다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 풍성한 축복을 위해서 ‘부자’ 주인이신 하나님의 삼위는 그 크신 일(행 2:11)을 완성하셨고, 지금도 계속 최후 완성을 향해 힘쓰시고 계십니다(빌 1:6).
이것 때문에 우리 본문의 청지기는 무한히 밝은 희망찬 내일을 이미 지금도 누리고 있으며, 미래의 천국에서는 더 영광스럽게 그 희망이 달성될 것입니다. 그날까지 우리 모두의 친구이며 부자이신 우리의 주인 하나님은 끝까지, 계속 우리를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믿고 찬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삼위는 참으로 은혜가 많으시며 ‘부자‘이신 우리의 주인입니다.
우리 모두 그의 부요하신 은혜를 힘입어서 이 영광된 변화의 길을 끝까지 전진합시다. 아멘.
누가복음 16장 본문 및 주석 정리, 불의한 청지기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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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개역개정성경 본문 및 주석
정직하지 않은 종의 비유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청지기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지를 관리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청지기는 무능력하였고 정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 부자는 청지기를 해고함으로써 그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그가 일한 것에 대한 기록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6절 : 그의 주인이 소유한 양 대신에 청지기가 쓰라고 말한 세 가지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청지기는 자신이 가진 권위로 가격을 더 낮추었습니다. 둘째, 청지기는 율법에 따라서 빚에서 이자를 제거하였습니다(레 25:36-37, 신 15:7-8, 23:20-21). 셋째, 청지기는 주인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돈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수고비를 제하였습니다.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절 : 주인은 청지기가 관대하게 행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청지기가 실제보다 적게 쓰게 함으로써 주인의 것을 도둑질하고 정직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물건의 숫자를 세는데 있어서 청지기가 매우 영리했다는 사실을 놓고서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6-7절). 그리고 주인이 실제로 청지기를 칭찬했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주인이 실제로 도둑질 당한 것이 없었고, 청지기가 빚진 자들에게 실제보다 줄여 주었다는 것은 율법에 따른 행동이었고 청지기 자신의 수수료를 낮추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0절 : 작은 이기심은 결국 큰 이기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관대함은 타인의 큰 관대함을 받게 합니다.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재물(맘몬), 참된 것 : 11절은 10절의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히 더 가치 있는 영적 문제들을 다루지 못합니다.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6절 :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계획의 기초적인 경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약속된 시간은 율법과 선지자에서 세례요한까지 연장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 전파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 “는 말은 또한 “모든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올 수 있도록 요구된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긴급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7절 :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내용은, 율법의 모든 계명들이 영원토록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의 약속의 목표는 실현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간음함 :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신성함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의 율법의 도덕적인 요구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부자와 거지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자색 옷 : 자색 옷은 달팽이에게서 추출한 특수한 염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당시에는 매우 비싼 제품이었습니다.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0-21절 : 개들은 죽은 동물을 비롯하여 쓰레기를 먹었기 때문에, 개들이 나사로의 상처를 핥아서 나사로를 감영시키고 율법적으로 부정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아브라함의 품 : 죽은 자들에게 있어서 축복된 장소였습니다. 유대교에서도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천사들이 호위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죽은 자들이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3절 : 19-21절의 운명의 반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자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나사로는 평안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 음부 “가 죽은 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16편 10절이나 시편 86편 13절에서는 음부를 “스올”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신약에서는 부정적인 문맥에서 하데스가 언급되어지곤 합니다(눅 10:15, 마 11:23, 16:18). 음부는 불의하게 살다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게헨나’는 최후의 심판이 있는 곳입니다(마 5:22, 눅 12:5 참조).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괴로워하나이다 : 부자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심판에 대한 경험을 표현하는 ‘갈증’이라는 이미지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사 5:13, 65:13, 호 2:3).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살았을 때 : 부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한 기준이 이제 죽어서 자신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그는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연민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 그에게도 누군가가 연민을 주지 않습니다.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텅이 : 이처럼 세부적으로 묘사한 것은 불의한 사람이 일단 죽으면 결코 의인들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7-28절 : 부자는 형제들이 자신과 같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늘로부터 사절단(천사)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 말은, 자신의 형제들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의 표현인지 혹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표현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 아브라함은 부자의 형제들이 이전부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구약성경에서는 재물을 나누어 주고 가난한 자를 돌봐야만 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신 14:28-29, 사 3:14-15, 미6:10-11).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듣지 아니하면 :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부활을 목격하여도 결코 듣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의 사절단(천사)을 요청한 것이 이 비유에서는 거부되었지만, 실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부활하신 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통해서, 31절의 내용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NKJV Study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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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헬라어 주석강해]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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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6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리게 됩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자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가지고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명예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은 명예를 중요시하던 시대입니다. 명예를 돈과 바꿀 수가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에게 명예가 없으면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가지고 탕감해 줌으로써 주인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님도 이 세대들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세상의 사람들이 영광을 올리게 하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
1절은 엘레겐 데 카이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안드로포스 티스 엔 플루시오스 호스 에이켄 오이코노몬 카이 후토스 디에블레데 아우토 호스 디아스코르피존 타 휘파르콘타 아우투입니다.
눅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6:1
어떤 부자 – 현장에 관리를 둔 대지주(大地主)이거나 (Jeremias) 혹은 당시 갈릴리에 흔하였던 부자 지주(Grundmann)를 가리킨다고 본다. 아무튼 사람들이 그에게 빚진 정도를 보아 그는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 한편 부자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에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그 부자’는 이 세상의 아들을, 메이어(Meyer)는 맘몬(돈의 신)을, 올스하우젠(Olshausen)은 마귀를,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로마인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든 간에, 본 비유의 초점은 위기의 때를 맞아 지혜롭게 재물을 융통한 청지기에 맞춰져 있다.
청지기 – 이 말은 맡은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탁을 받은 ‘고용인’이나 ‘대리인’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말이다. KJV에는 ‘간사’ 혹은 ‘급사’, ‘집사’의 뜻인 ‘스튜어드'(steward)로 번역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종일 수도 있으며(창 39:4-6) 또한 자유인으로서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은 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와 같이 그들은 맡은 일의 성격상 재산을 관리하는 동안 부정(不正)을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있었다. 한편 이 청지기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도 그의 주인인 ‘어떤 부자’에 관한 의견과도 같이 다양하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청지기는 모든 제자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한편 바리새인 혹은 가룟 유다 심지어는 본디오 빌라도를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떤 부자’와 마찬가지로 이’청지기’ 또한 개별적으로 특정 사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다만 예수는 당시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본 비유와 같은 전체적 상황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교훈하고자 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비한다 –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는 돈이나 재물 등을 마구 탕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 청지기는 횡령 혹은 부실 경영을 통해 주인의 재산을 축내었으리라 보인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고대 근동 사람들은 부기(簿記)나, 규정된 회계 감사 등을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셈(account), 증서(statements) 등의 용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도 이미 장부(帳簿)등은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디아스코르피조는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을 사용했다. 주인의 돈을 자기의 돈처럼 마구 썼다는 것을 말한다.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인 척 생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절은 카이 포네사스 아우톤 에이펜 아우토 티 투토 아쿠오 페리 수 아포도스 톤 로곤 테스 오이코노미아스 수 우 가르 뒤네세 에티 오이코노메인입니다.
눅 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16:2
이 말이 어찜이뇨 – 헬라어 ‘티 투토’에 대해서는 (1) ‘이것이 무슨 말인가?’, (2)’ 왜 내가 이것을 듣게 되었는가?’등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단순히 주인이 듣게 된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들은 내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사실로 여기고 ‘왜 그러한 잘못을 행했는가’라고 질책하는 말이기 때문에 (2)의 해석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 ‘보던 일’의 헬라어는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말씀’, ‘이성’, ‘사건’ 등의 뜻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계산'(account)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재산 목록과 장부 및 각종 문서를 작성, 보관하는 일까지 책임 맡고 있는 관리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셈하다’의 뜻인 ‘아포디도미’는 단순히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산해서) ‘넘겨주다’, (증서를) ‘양도하다'(render,KJV)는 의미까지도 내포된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 전체는 ‘네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사무를 청산(淸算)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는 의미가 된다. 아포디도미의 문법은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이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모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명령하여 보고하라는 의미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마지막 때가 되면 셈을 하라고 명령하실 것이다.
3절은 에이펜 데 엔 헤아우토 호 오이코노모스 티 포이에소 호티 호 퀴리오스 무 아파이레이타이 텐 오이코노미안 아프 에무 스카프테인 우크 이스퀴오 에파이테인 아이스퀴노마이입니다.
눅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16:3
땅을 파자니 – ‘파다’의 원어 ‘스카프토’는 일반적으로 정신노동과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육체노동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육체노동 중에서도 농사짓는 것을 의미한다.
빌어 먹자니 – ‘에피이테오’는 ‘위를(위에)’이라는 뜻의 ‘에피’와 ‘요청하다’는 뜻의 ‘아이테오’의 합성어로서 ‘구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삶의 위기의식을 느낀 청지기의 독백은 무엇을 해도 절망적이기만 한 급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한편 그 청지기는 비록 부정을 저질렀지만 신속한 판단과 빈틈없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즉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파악하고 즉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결단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결단은 곧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회피하거나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 있고 결단력 있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사실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결단(決斷)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고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4절은 에그논 티 포이에소 히나 호탄 메타스타도 테스 오이코노미아스 덱손타이 메 에이스 투스 오이쿠스 아우톤입니다.
눅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16:4
직분을 빼앗긴 후에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흥청망청 써 버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해고하게 되고 그는 난처한 상황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빼앗긴 단어가 메티스테미 동사다. 가정법 과거 수동태 단수 1인칭이다. 가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주인에게 청지기 직분을 빼앗길 수도 있고 빼앗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자기 것인 양 주인의 것을 함부로 사용했기 때문에 해고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수동태는 자신이 청지기로 누리고 있는 것은 주인의 은혜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남용하였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지식과 지혜와 재물과 재능을 자신의 것인 양 남용하고 교만하면 결국 빼앗기게 된다.
즉 우리는 자신이 부여받은 힘과 지혜와 재물 등 모든 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능력에 의해 스스로 획득한 것인양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하며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창 1:28-31; 욥 1:21).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낭비라는 삶은 곧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교만한 소행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 의식(stewardship)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19:13; 마 25:14, 15; 고전 6:20; 벧전 4:10).
5절은 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헤나 헤카스톤 톤 크레오데일레톤 투 퀴리우 헤아우투 엘레겐 토 프로토 포손 오페일레이스 토 퀴리오 무입니다.
눅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16:5
빚진 자 – 여기서 주인과 빚진 자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빚진 자들은 아마도 토지 수확의 일정량을 소작료로서 지불해야 될 소작인들이거나 또는 채무 증서를 쓰고 곡물을 받은 도매상인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청지기나 빚진 자들이 이미 전에 서명한 ‘증서’를 위조(僞造)할 수 있었다고(6, 7절)한다면 아마도 이 빚진 자들은 청지기와만 계약을 맺은 것 같다.
6절은 호 데 에이펜 헤카톤 바투스 엘라이우 카이 에이펜 아우토 덱사이 수 토 그람마 카이 카디사스 타케오스 그라프손 펜테콘타입니다.
눅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6:6
기름 백 말 – 빚을 기록한 증서는 헌금이 아닌 물품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자의 실제적인 양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W.L.Liefeld). 본문에서 빚진 자들의 빚진 수량은 대단히 많았는데 예컨대, 밀 백말은 약 백 에이커(acre)의 땅에서 산출되는 양이라고 한다.
요세푸스(Josphus)에 의하면 ‘말’의 뜻인 헬라어 ‘바토스’는 대략 23리터에 해당된다. 따라서 기름 백 말은 약 2,300 리터에 달한다. 팔레스틴에서 감람나무 한그루의 평균 수확량은 올리브 열매로 120Kg, 기름으로는 25리터가 된다.
그러므로 기름 백말은 감람나무 약 92그루의 소산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에는 천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증서를 가지고…쓰라 – ‘증서’의 뜻인 헬라어 ‘그람마는 ‘문서’, ‘글’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 절에서는 ‘채무 증서’를 가리킨다. 본문의 청지기는 채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임대차 계약서나 채무 증서 또는 약정서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증서를 채무자들로 하여금 자필로 다시 고쳐 쓰게 하거나, 새로 쓰게 함으로써 속임수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한편, 율법에 의하면 이자로 받는 행위가 불법으로 되어 있으나(출 22:25; 25:36, 37; 신 15:7, 8; 23:19, 20)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본문의 청지기 또한 주인 몰래 이자를 착복해 오다가 궁지에 몰리자 그 이자 부분만큼 탕감해줌으로써, 빚진 자에게 선심을 쓰는 한편 주인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7절은 에페이타 헤테로 에이펜 수 데 포손 오페일레이스 호 데 에이펜 헤카톤 코루스 시투 카이 레게이 아우토 덱사이 수 토 그람마 카이 그라프손 오그도에콘타입니다.
눅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16:7
밀 백 석 – ‘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로스'(히브리어 ‘코르’에서 온 마른 곡식을 재는 단위)는 약 27,500Kg으로 42헥타르 정도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밀 1 코르의 표준 가격은 금 25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따라서 밀 백석은 2,500 데나리온에 해당된다.
팔십 – 기름을 백 말 정도 빌린 자에게 그 절반인 오십 말로 공재(控除) 해 준 것에 비해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5분의 1 정도인 20석 만을 공제해 주었는데 이는 두 물품의 상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밀이 기름보다 훨씬 비쌌다. 빚진 자들이 각각 삭감받은 수량 즉 기름 50말, 밀 20석을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각각 5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금액은 1 데나리온이 임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노동자 한 사람이 약 16개월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네 증서를 가지고 – 청지기는 주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채무자들이 직접 자필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은 청지기가 임대차 계약이나 채무자들과의 계약을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각각 절반에서 1/5 정도로 부채를 탕감(蕩減) 해 주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빚을 탕감해준 데에는 그 채무자들이 청지기가 쫓겨난 후 그에게 받은 은혜로 인하여 그의 생계(livelihood)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저의가 숨어 있다.
8절은 카이 에페네센 호 퀴리오스 톤 오이코노몬 테스 아디키아스 호티 프로니모스 에포이에센 호티 호이 휘오이 투 아이오노스 투투 프로니모테로이 휘페르 투스 휘우스 투 포토스 에이스 텐 게네안 텐 헤아우톤 에이신입니다.
눅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16:8
이 세대의… 더 지혜로움이니라 –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혜롭다는 뜻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처리 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고, 단결이 잘 되며, 열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때때로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유대(紐帶) 관계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
즉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反目) 하며 자신들만이 진리에 선 것 것처럼 타인을 멸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절의 목적은 불신자들이 지혜롭게 행한 것보다 성도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하여야 한다는 데 있지 결코 불신자들의 부정직과 사기술을 칭찬한 데 있지 않다(롬 2:6-8).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지혜롭게 주인의 명예와 이름을 높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재물과 재능을 가지고 세상에서 주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할 것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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