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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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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온유 – 벨뷰한인장로교회
이 달에는 ‘온유’에 대해 논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온유’라는 말의 원어는 πραΰς(프라우스)입니다. 이 단어는 meek, mild, humble등으로 번역되며 …
Source: bkpres.org
Date Published: 8/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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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온유의 성경의 원어의 뜻 – 네이버 블로그
즉 한글성경의 겸손이나 온유의 원어성경 해당단어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21:5에서는 겸손이라고 번역된 곳이 있는데 이곳의 영어성경은 meek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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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9): 온유한 자를 원하십니다 – 코넬한인교회
먼저 ‘온유’의 뜻부터 찾아 보고자 합니다. 원어는 πραΰς(프라우스)입니다. 이 단어는 meek, mild, …
Source: www.kccornell.org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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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빔(עֲנָוִ֥ים)과 프라우스(πραεῖς / πραΰς)
개역개정에서 마태복음 5장 5절과 시편 37편 11절에서 모두 ‘온유한 자’로 표현한 단어는, 헬라어 신약성서와 70인역(LXX) 구약성서에서는 프라에이스( …
Source: jeremijeon.tistory.com
Date Published: 3/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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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브미션 – 온유함 히브리어로 하나브 1. 오늘 금요설교주제 …
온유함은 성품, 성경의 부분이 아니라 믿음의 부분임을 이 단어는 말씀해줍니다. … 토다의 삶과 키즈토다(원어와 히브리사고 묵상집) 2022년 1년구독 및 8월호 신청 …
Source: www.facebook.com
Date Published: 8/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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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온유했던 사람 (민 12:1-8) – 기멀전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그 온유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입니까 이는 ‘아바나’ 라고 하는 히브리말인데 원어의 뜻은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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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온유(溫柔), 온유한자(Meekness)의 뜻
[영어] Meekness 자기의 존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을 아는 겸허함, 그런 까닭에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을 일컫는다. [온유한]이라는 헬라어 …Source: bsmilal2.tistory.com
Date Published: 5/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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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주석 – 두란노닷컴
온유(Gentle).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말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와'(anawah)는 자기를 낮춤, 괴롭힘을 당함, 겸손함이란 뜻을 지닌다(민 12:3).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1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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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48 온유 히브리 원어 Best 286 Answer
자료실 > 원어 해설 > 145. 히브리 사람들의 “복,바라크( בּלק)”… [권혁승 칼럼] 모세의 뛰어난 온유함 : 오피니언/칼럼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Source: aodaithanhmai.com.vn
Date Published: 4/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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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 원어 해설 > 145. 히브리 사람들의 “복,바라크( בּלק)”…
사람이 자비하게, 깨끗하게, 청결하게, 온유하게 살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사업을 할 때 온유한 마음으로 사업을 하면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자비를 …
Source: www.njsmyrna.org
Date Published: 5/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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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온유 히브리 원어
- Author: 하나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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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2. 3. 2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651tgqatY6w
겸손과 온유의 성경의 원어의 뜻
한글성경에 온유나 겸손으로 번역된 곳은 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단어가 같은절에 모두 나와있는 곳은 세곳이 있는데요..
윗분이 히브리어로 답해주셨으니 저는 헬라어로 답하겠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 하고 겸손 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of me; for I am meek and lowly in heart :
and ye shall find rest unto your souls.
엡4:2
모든 겸손 과 온유 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With all lowliness and meekness , with longsuffering, forbearing one another in love ;
골3: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 과 온유 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Put on therefore, as the elect of God, holy and beloved, bowels of mercies, kindness,
humbleness of mind , meekness , longsuffering ;
이중에서 마태복음11:29는 영어성경(KJV)과 헬라어성경에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골3:12를 역시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온유를 가르키는 헬라어는 프라우테스(프라오테스)로 영어로는 meekness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여러가지의미가 있지만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 low(낮은)와 humble(비천한, 낮은, 보잘것 없는)의 의미가 있는 것이죠..
즉 한글성경의 겸손이나 온유의 원어성경 해당단어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21:5에서는 겸손이라고 번역된 곳이 있는데 이곳의 영어성경은 meek로 되어있는데요
마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 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Tell ye the daughter of Sion, Behold, thy King cometh unto thee, meek , and sitting upon an ass,
and a colt the foal of an ass
여기서는 온유로 쓰이는 단어가 겸손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겸손이라고 번역되는 곳의 원어성경은 모두가 같지는 않습니다…
아나빔(עֲנָוִ֥ים)과 프라우스(πραεῖς / πραΰς)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 개정개역)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시37:11 새번역)
예수의 설교, 혹은 연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또 사랑 받는 것은 아마도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소위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ain)”일 것이다. 이 산상수훈은 “8복”이라고 불리는, 8차례의 복 선언으로 시작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등으로 시작되는 복 선언은, 복 있는 자는 어떠하다는 통념을 뒤집기 때문에 충격과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런 만큼 여러 학자와 설교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특히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에서 이 “온유한 자”가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온유(溫柔)하다’의 의미는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온유한 사람’이라면 태도가 나긋나긋하고 화를 잘 내지 않으며 유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성격이 온화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온유하다고 표현한 사람은 모세(민12:3)와 예수(마11:29) 두 명이다. 먼저 모세를 온유하다고 표현한 민수기 본문의 경우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해 불평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문장인데, 다소 맥락을 깨뜨리는 돌출적인 문장으로, 화자가 누구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예수의 경우 자신을 가리켜 한 말로(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스스로 유순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다른 본문들을 보면 모세와 예수가 성격이 그리 온순하고 부드러운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온유함’이 어떤 의미인지, 성경의 원문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5장 5절은 신약성경에 속하기 때문에 원문은 헬라어(그리스어)다. 그런데, 이 마태복음 5장 5절은 예수의 독창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구약에서 인용한 표현으로, 출처는 시편 37편 11절로 볼 수 있다(다른 본문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있다). 개역개정에서 마태복음 5장 5절과 시편 37편 11절에서 모두 ‘온유한 자’로 표현한 단어는, 헬라어 신약성서와 70인역(LXX) 구약성서에서는 프라에이스(πραεῖς), 원형으로 프라우스(πραΰς)로 표현했고, 히브리어로는 아나빔(עֲנָוִ֥י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원문에서 사용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야 ‘온유함’의 원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시편 37편 11절의 ‘아나빔’의 의미
먼저 아나빔이라는 단어는 아나브(עָנָו)라는 단어의 복수형으로서, 히브리어 사전 BDB (The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poor), 고통 받는 사람(afflicted), 겸손한 사람(humble), 온순한/온화한 사람(meek)’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히브리어 사전인 HALOT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는 아나빔의 원형이 아나브가 아닌 아니(עָנִי)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때 이 아니 역시 ‘가난한, 고통 받는’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 ‘아’소리가 나는 첫 글자 히브리어 알파벳 ‘아인(עָ)’이 ‘절하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단어가 ‘절하는 자’라는 의미와 관련 있다고 한다. TWOT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T)는 이 두 단어가 흔히 혼용된다고 보고, 특히 이사야는 두 단어의 의미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나빔이라는 단어가 결국 명사로 사용되지만, 어원을 따져보면 동사로 볼 수 있다. 아나빔의 어원이 되는 동사 아나(עָנָה)는 남을 ‘압제하다, 힘들게 하다’는 의미다.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이 자신의 적을 굴복시킨다는 맥락(신26:6)이나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을 때(창16:6)에서 사용된다(TWOT). 하나님은 이러한 징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많은 고통을 겪고 나면 모세처럼 ‘온유한 자’가 된다(민12:3).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통, 즉 연단을 겪고 난 사람은 온유해지고 겸손해 진다. 이는 태생적으로 유순하고 착한 성품을 지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훈련을 받은 결과 성품이 다듬어 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TWOT의 설명은 온유함이 태생적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결과라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인생의 풍파를 겪고 난 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나이 많은 현자의 부드러운 태도를 온유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젊은 예수의 온유함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사야 61장 1절에서도 이 ‘아나빔’이 등장한다. 이 단어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모두 ‘가난한 자’로 번역했고, 영역 가운데 NRSV는 ‘the oppressed(압제 받는 사람들)’로, ESV는 ‘the poor(가난한 사람들)’로, NASB는 the afflicted(고통 받는 사람들)’로 옮겼다. 이사야 본문에서 아나빔에게는 ‘아름다운 소식’ 즉 good news (세 영역 공통)가 전달될 것이다. 시편 37장 11절에서 아나빔은 ‘땅(에레츠)’을 차지(혹은 기업으로 물려 받음)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61장 본문에서의 아나빔에게 전해지는 좋은 소식 역시 땅을 받는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사61:7, 11 참고). 그렇다면 이사야 61장의 아나빔을 ‘온유한 사람들’로 번역해도 될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시편 37장의 아나빔을 ‘가난한 사람들, 압제 받는 사람들’로 번역해도 될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이 논의를 위해 먼저 아나빔에게 가해지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가난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과 고난을 베푼다는 생각은 주위에 매우 흔하고도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징계의 수단, 혹은 심판으로서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먼저 약속하신 것은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형통(prosperity)하기를 바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사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기 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인을 ‘압제’함으로써 ‘고통’을 가하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실제로 시편 37편은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면서 악인의 멸망을 탄원하고 있다. 시편 37편의 아나빔이 겪는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빔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아나빔은 악인의 횡행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아나빔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않는다(시37:1).’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며,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시37:7).’ 왜 그렇게 하는가?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악을 만들기 때문이다(시37:8).’ 아나빔의 믿음은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할 것(시37:9)’이다. 이는 로마서 12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한 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선언과 같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세를 가난한 사람, 압제 당한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하나님과 대면한 선지자가 가난한 사람이었던가? 대답은 그렇다. 모세는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서, 민족이 당한 모든 수난과 압제를 한 몸으로 받아낸 인물이었다. 애굽의 압제에 대항한 모세의 반응은 시편 37편의 그것과 동일하다. 오히려 악을 만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악인을 소멸하실 때까지 압제를 견디며 기다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길을 내어드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할 수 있었다. 광야에서 지내는 40년 동안 모세는 여러차례 백성들의 반란 및 반항에 직면했음에도 한 번도 백성들을 직접 저주하거나 처벌할 것을 탄원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며 중보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시편 37편과 모세의 경우를 볼 때 ‘온유함’의 핵심은 곧 ‘고통과 압제를 당하나 직접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사야 61장에 적용해 보아도 동일하다. 이사야 61장의 아나빔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면서 땅을 잃었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민족의 모든 존엄성과 자부심을 잃었다.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 ‘제국’이라는 거대한 악으로부터 압제를 당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이들이 곧 ‘마음이 상한 자’이며, ‘포로된 자’, ‘갇힌 자’로서, 마태복음 5장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 4절의 ‘애통하는 자’, 그리고 5절의 ‘온유한 자’다. 이들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악인을 물리치려고 하지 않았다. 바벨론의 모든 죄악을 인내하며 기다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고국으로 돌려보내실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들에게 선포된 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식’이었다.
2. 마태복음 5장 5절의 헬라어 해설
3.
가장 온유했던 사람 (민 12:1-8)
우리는 지금 위험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생태계의 질서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가공할 만한 무기가 발명되어 저장되고 보다 더 큰 힘의 균형을 이어가며 살아간다는 그것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은, 소위 위기라고 말하게 되는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 기술과 그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 때문이란 말입니다. 예로부터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해도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밤길을 다녀도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요, 여행 중 어딜 가도 제일 무서운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무서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최근에 와서는 테러(terror)의 시대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폭력의 시대! 사실이 그러합니다. 인간성이 더 없이 포악해지고 있습니다. 그 어떤 포악한 동물보다도 더 잔인한 인간의 포악성을 우리가 압니다. 그 생각이 점점 사악해지고 행동은 날이 갈수록 거칠어만 갑니다. 실로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언어 표현마저 점점 극단적인 말을 사용합니다. 생각해 보면 몸서리가 쳐지는 말들을 평범하고 태연하게 주고받습니다. 날로 거칠어만 가는 세대!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두렵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홍수로 인하여 천하를 다 멸하여야 할 즈음의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간단하게 표현하여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인간 존재는 다 떠났고 죽어 버렸으며 이제는 고깃덩어리인, 아주 잔악한 육체만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산 사람을 심판하여 홍수에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시체를 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홍수의 심판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에 있어서도 사람됨은 사라지고 무서운 악마로, 사나운 짐승으로 화해버린 육체의 인간을 봅니다. 그 인간의 무서운 마음! 그것이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본문 말씀은 난구절입니다. 어렵다는 의미에서의 난구절이 아니라 깊다는 의미에서의 난구절입니다. 해석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석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읽고 보면 도덕이나 규범에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일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 후 읽어보면 그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 진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참으로 깊고 오묘합니다. 이는 특별히 오늘이 세대를 향해서 대단히 소중하게 주어지는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모세는 의인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의 모세는 더더욱 의인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못됩니다. 윤리 규범으로 볼 때에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의 생애에는 실수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셨습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을 보면 언제나 그렇게 완전한 사람을 쓰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 완전한 사람을 찾고 기다리신다면 아무 사람도 쓸 수가 없으시겠지요! 그러기에 부족한 중에 허물 많은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데 그 쓰시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자세히 상고해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 어느 한 부분이 있으면 나머지 다른 부분은 하나님께서 다 채워 주시고 덮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하나님이 봐주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사랑의 매력이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장점을 봅니다. 단점이 보이면 사랑이 아닙니다. 장점이 보이고 그 장점이 크게 보이므로 그것에 가리워서 모든 단점이 보이지 않게 되고 맙니다. 그럴 때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람인데도 오늘에 와서는 단점만으로 꽉 차있고 아무리 찾아도 장점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아주 멀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실 때에는 그 중심에 귀한 점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크게 사랑하시고 다른 것은 다 용서하시며, 용납하시어 덮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어떤 의미에서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믿음직스럽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 중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비실비실한 그야말로 휘청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는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아브라함은 불완전합니다.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좋은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에 성경은 증거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3)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보시고 모든 부족한 것을 다 채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대하시는 자세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은 또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차원에서는 구제 불능한 정도의 어려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겸손이 있습니다. 그 겸손한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내 종 다윗처럼 “내 종 다윗”이라고 들추시며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좌우간 성경에 다윗의 이름이 8백여 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의 온유와 충성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 가지의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실수는 모세가 했습니다. 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의 모세는 나이로 보아서도 무려 백세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 무슨 소실이며 그것도 이방 여자입니까 구스 곧 에디오피아 여자, 피부색도 검은 종을 소실로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의 형님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이 일을 비방하게 됩니다. 사실, 비방할 만한 일이요, 비방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물론 당시의 제도로는 일부다처주의요 더구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 만큼 일반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는 처지입니다만 원체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란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의 지도자가 이게 무슨 만행이란 말입니까 그래서 저들이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사건 하나를 과녁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려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는 비방의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론은 형님이요 미리암은 누나입니다. 더구나 누나 미리암은 모세를 위해 목숨을 건 역사적 모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가 나일 강변의 갈대 사이에 버려졌을 때에 이를 지켜보았고 바로의 딸인 공주가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 속의 어린 동생을 발견하고 측은히 여기는 모습을 보고는 히브리 사람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해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할까요(출 2:7)라며 곧장 어머니를 데리고 간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도와 준 사람입니다.
미리암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동생 모세가 이제 와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을 보자 참을 수가 없어서 마음대로 비난을 합니다. 그 실수 하나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직, 그의 거룩한 역사까지도 비난을 하려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시고 오히려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부분을 보게 되면 미리암을 치시어 문둥병에 걸리게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온유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그 온유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입니까 이는 ‘아바나’ 라고 하는 히브리말인데 원어의 뜻은 굽힌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굽힌다, 굴복한다, 절한다, 구부린다, 낮아진다, 혹은 비천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뜻을 굽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의미에서 겸손과 경건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 이 말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만 불려지는 덕성입니다. 그 때문에 겸손한 사람, 혹은 경건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만 하나님을 가리켜 겸손하다, 경건하다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온유라는 말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쓰여지는 특별한 성격의 말입니다. 이에 사무엘하 22장 36절에 보면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온유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 관계되는 특별한 성격의 묘사입니다. 그런고로 이 온유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인간의 몸은 살아 있는 동안 부드럽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의 몸과 그 살갗은 매우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크게 자라가면서 점점 딱딱해지고 마지막에는 굳어집니다. 굳었다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쉽게 발전할 때에 부드럽습니다. 잘 받아들이며 잘 휘어집니다. 그러나 점점 굳어져서 완고해지면 마지막에는 망하고 맙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굳어진 마음, 완악해진 마음은 결국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온유라고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강하면서도 스스로 약해지는 것이요, 높으면서도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며, 알면서도 스스로 모른 것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주 능력이 없는 자로 허리를 굽히고 뜻을 굽히는 것을 온유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온전한 강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지도력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며 승리가 주어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시 37:11)고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여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포악한 자는 거기에서 끊어지고 말지만 온유한 자는 기업으로 땅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길이길이 이어질 축복이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축복입니다. 기업이 있는 생은 바로 온유한 생입니다.
이제 잠깐 생태학적인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칼 막스(K.Marx)는 여기에서 실수했습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곧 강자는 살아 남고 약자는 없어진다 했습니다만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강한 동물은 다 멸종되거나 쇠퇴했지만 약한 동물은 그대로 남아 번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온유한 동물이 온 지면을 덮고 있습니다. 강한 동물은 살아 남지를 못합니다. 이 중요한 원리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그가 진정 강한 자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온유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거기에는 대단히 신비스러운 의미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자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됨을 잘 지켜나갔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잃어버리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지나친 칭찬을 들을 때이며 나머지 하나는 억울한 말을들을 때입니다. 그 때문에 그 사람을 시험해 보려면 일단 칭찬을 해보면 안다고 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해보아 교만해지면 그 사람은 별 사람이 아닙니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자기 페이스(pace), 자기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억울한 말을 듣고 분한 말을 들었다고 하여 불끈하여 화를 낸다면 이 또한 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는 억울한 말을 들어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습니다. 성공, 실패, 영광, 굴욕, 그 어느 때든지 그는 자기됨을 잘 지켰습니다.
가장 겸손한 선지자 칼빈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이 이태리에서 스트라스버그로 가는 길에 그의 친구 윌리암스 페넬(W. Penel)을 만나기 위해 제네바에서 잠깐 머물게 됩니다. 이때 이 친구 페넬이 말하기를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자고 자꾸만 권합니다. 본래 칼빈은 연구 생활을 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끈질긴 권유를 받은 칼빈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제네바에 머물면서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이 칼빈은 너무나도 엄격하고 철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결국 3년 후에 제네바 시의 시의회의 결의 따라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는 아무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3년 후, 아무래도 칼빈이 있어야 이 일이 바로 되겠다고 생각하여 다시 초청을 합니다. 이 때에도 역시 칼빈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시 돌아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쫓아낼 땐 언제이고 오랄 때는 언제이냐며 역겨워할 것입니다만 그는 가라고 할 때 갔으며 오라고 할 때에 아무 말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무로 미워하지 않는 중에 그대로 돌아와 제네바에서 큰 역사를 이루며 종교 개혁을 성공시켰고 나아가 오늘이 제네바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보세요. 이것이 온유한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고 그로 인해 얼굴에는 광채가 났으며 그 빛난 광채를 두려워하는 백성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우기까지 해야 했습니다.(출 34:29-35) 그는 권능의 사람이요 기적의 지도자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위대한 지도자 모세입니다. 큰소리칠 만도 하고, 대중을 무시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자기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난은 매우 참기 어려운 비난입니다. 이 어려운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는 온유했습니다. 결코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게, 침묵하면서 잘 참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친히 보상하실 만큼, 그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이 참기 힘든 비난을 참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자세입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비난을 듣게 되면 자기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맨 먼저 들추어 나오는 변명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워낙 불가피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모세는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욱 그렇습니다. 모세는 40세에 미디안 광야로 피난을 갑니다. 외롭게, 혼자 쫓기는 도망자로 방랑의 길에 오릅니다. 그러는 중에 미디안에서 이드로의 집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십보라라고 하는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하여 함께 살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할 당시의 모세의 형편이란 참으로 말이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4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합니다. 자고로 처가살이하는 남자는 시원치가 못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40년을 처가살이했으면 이제 볼일 다 보았지 누구에겐들 존경받을 여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세는 이렇게 결혼 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다 모세를 존경하여도 그 아내 십보라는 예외인 것입니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시원치 않은 남자이다! 이렇게 해서 이 억센 아내로부터 이렇다할 위로를 얻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백세가 넘은 피곤한 인생 여정 속에서 그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한 구스 여인을 취했습니다. 이만하면 할 말이 있고 변명의 여지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말이 없습니다.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의 나약함까지 덧붙여 변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인용하는 말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니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변명 끝에 이제는 나를 비난하는 자를 공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 내가 실수했다고 하자 너는 실수없느냐는 것이지요. 다시 이렇게 말하자고 들면 모세 또한 할 말이 많습니다. 아론은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을 때에 금붙이를 모아다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괴수입니다.(출 32:2-6) 그야말로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저를 향해 너는 어떠했느냐고 충분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모세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으며,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온유한 마음으로 참았던지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의 편을 들어 위로하십니다. 실수는 모세가 했습니다만 그의 깨끗이 참는 자세와 온유함을 보시고 오히려 비난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벌하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스러운 엄청난 진리를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온유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일 앞에, 다시 말해 사명과 소명 앞에 온유했습니다. 그는 큰 은혜를 받았으나 자기 존재를 잃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맡은 직분과 자기와를 혼돈치 않았습니다. 큰 일을 한다고 해서 내 자신이 커진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지위가 높아졌다고 내가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해서 내 인격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지위와 내 자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은 일이요, 지위는 지위이며 나는 나입니다. 모세는 엄청난 지위를 얻었고 엄청난 명예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엄청난 높임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보면 다른 모든 선지자와는 이상이나 꿈으로 말하였지만 내 종 모세와는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특별히 뽑아 세웠고, 특별한 일을 맡겼으며, 특별하게 취급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특별한 일을 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생각하기를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곧 온유입니다. 결코 자기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여 자기의 인격, 자기 존재, 뿐만 아니라 자기의 족보까지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자기 착각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는 엄청난 존경을 받으면서도 자기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들어 왕으로 삼으셨으나 왕이 된 후에 교만해지므로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마침내 멸망케 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고 그 크신 은혜로 자기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됨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치자 많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고 놀라며 모여들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며 자신에 대한 칭송을 강력히 부인합니다. 이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랴 예수님이 하신 것이요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노라는 말입니다. 나는 오직 심부름꾼이요, 사환이며 충성된 종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온유하고 충성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나서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합동해서 선을 이룰 것으로 믿으며 매우 온유하게 참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의 이 세대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도 강퍅합니다. 마음도 행위도 포악해만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주님의 뜻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던 그 온유함! 바로 그 온유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며 그가 주인이 될 것입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의 어리석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는 믿음과 겸손의 사람을 원하시며 오늘도 온유한 자를 받으시는 줄을 아옵니다. 모세의 온유함을 귀하게 보시고 크게 들어 쓰시던 주님, 오늘도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온유하게 하시고, 그 온유를 배우게 하셔서 그 온유로 인해 강한 자가 되게 하시고 나아가 승리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성경의 온유(溫柔), 온유한자(Meekness)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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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Meekness자기의 존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을 아는 겸허함,
그런 까닭에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을 일컫는다.
[온유한]이라는 헬라어 [프라우테-스]에 가장 잘 대응하는 히브리어는 [아-나-우 [形]](시 25:9,34:2곤고한 자, 37:11, 69:32, 76:9, 147:6 겸손한 자, 149:4 기타)이다. 이 히브리어는 원래, 비천한, 억압된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거기서 다시 전의(戰義)되어, 자기를 하나님의 비천한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며, 그러므로 또한 이웃 사람에 대하여 노하든가,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씌어져 있다.따라서, 그것은 겸손과 거의 같은 뜻이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는 것으로서, 모세의 온유를 당시의 이스라엘의 이상으로 하여, 그 온유함을 예찬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아,겸허하고, 그렇다고 유약하거나 비겁한 것이 아니면서, 세찬 인내로서, 사람들에게 동정심 많았던 것을 보여준다.
또한 스가랴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이신 왕 역시 온유하신 분으로 그 성격을 규정 짓고 있다(슥 9:9).
구약에도 신약에도, 하나님께서 온유하시다고 말해져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 복음서 중에는, 마태 만이 온유라는 개념을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시 37:11에 기초하여 [온유한 자]를 축복하시고, 땅을 차지할 것을 약속하셨다(마 5:5). 그러나 온유라는 것은 물론 인간의 성격이나 노력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달려있다.
왜냐하며, 예수야말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으로서(마 11:29), 슥 9:9에 약속되고, 대망되어 있던 온유한 그리스도이신 때문이다(마 21:5).
바울도 또한, 온유를 누구보다도 그리스도 자신이 그 역사(일)에 의해 보여주신 인격적 특질이라고 말하고 있다(고후 10:1,빌 21:8참조). 또한,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사로서, [성령의 열매]의 하나인 것이다.(갈 5:22).
온유는, 겸손, 관용, 인내, 사랑 등과 함께, 이미 당시의 헬레니즘세계의 덕목이었는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에 지원( 支援 )되어, 보다 현실적인 형태로, 언제나 끊임없이 추구해야할 구체적인 생활 목표였다(엡 4:2,골 3:12,딤전 6:11,딤후 2:25,벧전3:4),
이처럼 온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사람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로서 요청될 뿐 아니라(갈 6:1,딛 3:2,벧전 3:15,약 3:13,딤후 2:25),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의 태도로서 요청되어 있다(약 1:21). 그것은 온유라는 것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동시에 성립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조건을 그 근거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의 실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단적으로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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