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온돌 |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누구일까? 255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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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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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온돌 원리가 최초로 적용된 유소니아 주택: 프랭크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20세기 건축’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꼭 일 년 전인 2019년 7월의 일이다. 2016년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여러 건축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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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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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온돌 개발자는 한국인이 아니다 – 땅집고 > 건축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로 일본 임페리얼호텔(오른쪽) 건축과정에서 현대식 온돌난방을 처음으로 적용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오쿠라는 18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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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ealty.chosun.com

Date Published: 12/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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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온돌체험과 그의 건축작품에의 적용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저명한 미국 건축가 중의 한사람이며,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존중되고 있는 건축가이다. 그는 많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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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uric.or.kr

Date Published: 3/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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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자선당의 수난사와 온돌 – 한韓문화타임즈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방식이다”라고 극찬한 이가 있다. 그는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다. 현대 온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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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mhtimes.com

Date Published: 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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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온돌 개발자는 한국인이 아니다 | 한경닷컴 – 한국경제

바로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다. 지금도 도쿄의 최고급 호텔로 건재한 도쿄 임페리얼호텔을 설계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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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kyung.com

Date Published: 6/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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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온돌체험과 그의 건축작품에의 적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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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bpia.co.kr

Date Published: 7/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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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나무위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크게 세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 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온돌 난방을 경험하고 서구식 보일러와 접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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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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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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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아키베어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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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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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온돌 원리가 최초로 적용된 유소니아 주택: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이콥스 주택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20세기 건축’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꼭 일 년 전인 2019년 7월의 일이다. 2016년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의 여러 건축물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화제였던 게 아직 생생한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의 영예로 인해 건축계는 더욱 고무될 만하다. 개별 건축가의 창작물이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음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20세기 건축’에는 오우크 파크 시절의 초기작인 유니티 템플(1906~09)과 로비 하우스(1908~10)로부터 대중에 가장 잘 알려진 낙수장(1936~39)과 말년작인 뉴욕의 구겐하임 박물관(1956~59) 등 모두 여덟 작품이 올랐다. 미국 여섯 개 주에 위치한 이 건물들은 제각각 서로 다른 기능과 규모와 맥락 속에서 20세기 건축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1

그런데 이러한 쟁쟁한 건물들 가운데 필자의 관심은 작은 집 하나에 쏠린다. 위스콘신 주 메디슨에 건축된 제이콥스 주택(Jacobs House I, 1936~37)이 바로 그것이다. 폭포 위에 위풍당당히 세워진 낙수장이나 중상류층을 위한 프레리 주택의 절정인 로비 하우스와 비교할 수 없게 소박하고 단출한 집, 이 역설적 조건이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은 이유이다. 이는 물론 이 집이 이번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경제 대공황을 벗어나던 1930년대 후반, 라이트는 이제 예전과 달리 미국의 보통 가정이 누릴 만한 경제적인 집을 짓는 데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를 ‘유소니아 주택’이라 명명했고 1959년 세상을 뜨기까지 상당수를 완성했는데(혹자는 그 수가 140채에 이른다고까지 주장한다),▼2 이후의 미국 주택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제이콥스 주택이 유소니아 주택의 첫 번째 사례이니, 중요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헌데 여기에서 더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 한국의 온돌을 경험했던 라이트가 미국에서 그 난방 원리를 처음 실현하게 된 건물도 제이콥스 주택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그간 논의가 없지 않았지만▼3 여전히 신화 속에 있는 것 같다. 이번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지고 그 경위와 의미를 재조명해보면 어떨까?​

거리 쪽에서 본 제이콥스 주택 ©The Estate of Pedro E. Guerrero

제이콥스 주택의 거실 ©The Estate of Pedro E. Guerrero

첫 번째 유소니아 주택

라이트의 온돌 경험과 바닥난방 수용을 살피기에 앞서, ‘유소니아 주택 제1호’라는 제이콥스 주택의 역사적 배경과 건축적 특성을 간략히 떠올리자. 무엇보다 우리는 ‘유소니아(Usonia)’가 뜻하는 바를 알아야겠다. 이 말은 ‘아메리카(America)’가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만을 지칭하게 되면서 오는 모호함과 배타성을 극복하고자 라이트가 차용한 대체어이다.▼4 여기에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사회, 다시 말해 민주적으로 개혁된 사회에 대한 그의 열망이 묻어난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의 주택은 새 시대의 삶에 맞는 품격이 있으면서도 모두가 꿈꿀 수 있을 만큼의 경제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것이 유소니아 주택이다. 또한 유소니아 주택은 지난 30년간 그가 추구해온 ‘유기적 건축’, 즉 ‘건물이 자연과 하나로 통합되어 생명력을 발산하는 건축’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이라 하겠다.▼5

경제적 주택에 대한 라이트의 관심은 이전부터도 꾸준했지만 대공황을 겪으며 강화되었다. 그리고 제이콥스 주택을 통해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다. 젊은 건축주인 허버트 제이콥스는 처음부터 예산의 최대치를 분명히 하며 가족(자신과 아내와 딸)을 위한 합리적 주택을 의뢰했고, 라이트는 이를 충분히 존중하며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그 해결책은 집이 완공된 직후 출판된 「아키텍처럴 포럼」(1938. 1)에 명쾌히 서술되었다. 우선 관례적 지붕과 차고와 지하실을 과감히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가급적 미리 재단된 자재로 현장 인건비를 줄이고, 난방・위생・조명의 설비를 통합해 단순화하는 등의 실용적 방안이 뒤따랐다. 이로써 도출된 결과가 124.5m2(37.7평) 면적의 단층집이었다. 평면은 L자형으로 한쪽 날개에 벽난로가 있는 넓은 거실을, 다른 한쪽에는 두 개의 침실과 하나의 서재를 두었다. 그리고 두 날개 교차부에 현관과 욕실과 부엌을 배치했다. 이전의 프레리 주택과 비교컨대, 훨씬 콤팩트한 공간구성이다. 라이트는 이 같은 평면을 2×4피트 모듈의 그리드 속에서 체계화했다. 그러한 시스템이 수직적으로 나타난 것이 ‘보드 앤 바텐(board-andbatten)’ 이라는 목재 샌드위치 판자벽이다. 여기에서 반복되는 나무 널의 수평선은 벽면의 그리드이자 건물 각 부분의 높이 척도로 작동한다. ‘보드 앤 바텐’은 벽돌벽과 달리 공간의 효율을 높이고 공기를 단축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는데, 내력벽과 유리창 및 문 이외의 수직면은 모두 이 판자벽으로 시공되었다.

이러한 제이콥스 주택의 특성은 이후의 유소니아 주택으로 이어지며 더욱 발전한다. 하지만 앞선 서술보다 훨씬 획기적이면서도 유소니아 주택의 핵심 요소로 확립된 것이 있으니, 바로 한국의 온돌에서 영감을 받은 바닥난방이다. “한국 난방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주택에 이런 난방법을 시도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고 싶지 않소?” 제이콥스를 설득하기 위해 라이트가 한 말이다.▼6 그리고 결국 난방용 철제 파이프를 집의 콘크리트 바닥 아래에 설치함으로써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한국의 난방법을 알게 되었을까?​

제이콥스 주택의 바닥난방 시스템을 테스트하는 장면: 좌측 두 번째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Ryerson and Burhnam Archives,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한국 온돌의 경험과 그 원리의 실현

라이트가 한국의 난방법을 알게 된 것은 도쿄 제국호텔 프로젝트(1913~23)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온돌방을 직접 경험하면서였다. 그의 『자서전』(1943)과 『내추럴 하우스』(1954)는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해주는 기사를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때는 1914년 겨울이었다. 프로젝트 관계자인 오쿠라 남작의 도쿄 저택에 초대된 라이트는 저녁식사 후 티타임에 ‘한국 방(Korean room)’이라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그는 추위로 인해 식사 시간이 몹시 불편했었는데, 그제야 온기 속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추장스런 난방장치 없이 바닥으로부터 더워지는 이 방식에 그는 크게 감명을 받았고, 이것을 단지 설비의 문제가 아닌 실내 공간에 ‘기후를 창조하는 일’로 여기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국 방’의 난방 원리, 즉 한쪽에서 불을 때면 열기가 방바닥 밑의 통로를 이리저리 지나며 방을 데우고 반대쪽의 굴뚝으로 빠져나간다는 온돌방의 원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발견’을 즉각 제국호텔의 욕실 바닥에 적용한다. 전열장치를 통해서였다. 미국에 돌아와서도 바닥난방을 시도했는데, 1923년 설계한 나코마 컨트리클럽은 지어지지 않았고, 존슨 왁스 빌딩(1936~39)은 제이콥스 주택보다 먼저 시작되었지만 나중에 완공된다. 결국 제이콥스 주택이 한국 온돌에 영향을 받은 라이트가 미국에서 최초로 바닥난방을 실현한 건물이 된 것이다. 특히 거주의 터전인 ‘집’에 바닥난방을 도입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라이트가 경험한 ‘한국 방’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이는 오쿠라가 일본식 자택의 방 하나를 온돌로 개조한 것일 수도 있고, 자택 경내에 별도로 세워진 한옥의 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러 정황을 고려컨대 후자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먼저, 라이트를 초대한 오쿠라가 재벌 기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1837~1928)임은 분명하다.▼7 그는 당시 일본의 조선 식민지 경영에 적극 가담한 인물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일본이 1915년 경복궁에서 시정 5주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여러 전각을 철거했는데 오쿠라가 자선당(資善堂) 부재를 인수해 1916년 도쿄의 자택으로 이축했다는 점이다.▼8 그렇다면 라이트의 ‘한국 방’은 일본이 경복궁에서 훼철해간 자선당의 온돌방이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이렇게볼 때 라이트가 ‘한국 방’을 경험한 시점을 1914년 겨울로 적은 것은 오류인 듯하다. 몇몇 연구가 말하듯 그가 1914년 일본을 방문했을 가능성이 낮기도 하려니와,▼9 자선당 이축 시점과 함께 따져보면 그가 온돌을 경험한 때는 빨라야 1917년 초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의 일본 체류 시기와 제국호텔 별관 욕실에 전열 난방이 설치된 시점을 고려하면 라이트의 온돌 경험은 1920년 초일 개연성이 크다.)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이 한국의 온돌 문화를 세계에 알리게 된 현상은 아이러니이다. 늘 그렇듯 역사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펼쳐진다.

다시 제이콥스 주택으로 돌아오자. 라이트가 이 집에 바닥난방을 적용한 것은 새로운 실험이었다. 서양에서는 고대 로마시대에 하이포코스트라는 바닥난방법이 있었지만 주로 공중목욕탕에 쓰였고 중세를 지나며 자취를 감춘다. 18세기 말부터는 유럽에서 바닥이나 천장, 벽 등에 다양한 방식으로 열기, 증기, 온수를 사용한 난방법이 간헐적으로 시도되었고, 이후 미국으로도 전파된다.▼10 이러한 방식은 20세기 들어 ‘복사난방(radiant heating)’이라 불렸다. 허나 서양 난방법의 큰 그림에서 볼 때 국지적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더욱이 한국에서처럼 바닥 전면을 데우는 방식은 서양의 전통적 벽난로뿐만 아니라 근대적 라디에이터와 비교할 때도 참신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이콥스 주택에서 도전적이었음은 뉴욕의 대형 설비회사가 이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11 결국 라이트는 지역의 작은 업체와의 실험적 노력을 거쳐 바닥난방을 실현하게 된다. 남겨진 사진 한 장이 그 광경을 보여준다. 지하 보일러실에서 올라온 파이프가 우측(거실 쪽)으로 네 가닥, 좌측(침실 쪽)으로 세 가닥 뻗어나가는데, 우측의 파이프 틈새와 보일러에서 증기가 번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라이트와 인부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에서는 불명확하지만 파이프는 직경 2인치의 연철(wrought iron)로 된 것이며, 그 위에 콘크리트 바닥을 타설했다. 1980년대 이 집의 복원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콘크리트 바닥 아래, 즉 땅 위에 파이프가 놓인 층은 모래로 채워졌다. 자갈이 깔렸을 거라는 일반적 예상이나 나머지 유소니아 주택의 상례와는 다른 점이다. 지면과 파이프 사이에 단열층을 두지 않은 것은 이 공법이 초기 사례여서이기도 할 테지만, 땅으로의 열손실보다 난방 파이프를 통해 겨울철 땅의 동결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훨씬 중요했다. 동결선 아래로 기초를 내려야 하는 값비싼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벽난로의 굴뚝 부분만 제외하면 제이콥스 주택의 기초는 4인치 두께의 콘크리트 바닥판 자체이다. 이 점은 공사비 절감을 위해 지하실을 없앤다는 원칙과 연계되는데, 좀 더 분명히 하자면 부엌과 욕실 아래 공간에 한해 작은 지하실을 두었다. 사진의 보일러실이 그것이다.

이미 자명해졌지만, 우리는 라이트가 한국의 전통 온돌 구조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근대적 방식으로 적용했음을 인지해야 한다. 라디에이터에 사용하던 보일러와 증기 파이프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닥으로부터의 열을 서양에서 인식하던​ ‘복사열(radiant heat)’과 차별화하기 위해 ‘중력열(gravity heat)’이라 고집해 불렀다. ‘한국 방’에서 발견하고 깨달았던 것처럼, 중력에 의해 더운 공기는 위로, 찬 공기는 아래로 흐른다는 이유에서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바닥에서 열이 전해지는 정도는 대류(즉 라이트의 중력)에 의한 것과 복사에 의한 것이 거의 같은 수준이다.▼12​

현재 제이콥스 주택에 보관 중인 ‘보드 앤 바텐’ 목재 판자벽 샘플 ©Hyon-Sob Kim

현재 제이콥스 주택에 보관 중인 원래의 난방용 철제 파이프 샘플​ ©Hyon-Sob Kim

건축주의 회고와 제이콥스 주택의 현재

바닥난방이 제이콥스 주택에서 핵심 사안이었음은 건축주로부터도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이들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함께 한 건축』(1978)이라는 회고록에서 바닥난방의 실현 과정과 이후 상황을 여러 지면으로 무척 생생하고 중요하게 다루었던 까닭이다. 허버트는 자신들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집에 살고 있다”고 인식했음을 밝혔는데, 근거는 물론 난방법의 독창성이었다. 또한 아내 캐서린은 이 ‘급진적 난방’으로부터의 온기를 자기가 경험한 ‘가장 쾌적한 열’이라 말하기도 했다. 거실의 벽난로가 여전히 중요했지만 바닥난방은 훨씬 위생적이었고 새 시대의 민주적 공간에도 잘 부합했다. 그렇다고 당초 시도했던 증기 파이프 방식이 완벽하게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증기 압력을 대폭 높이지 않는 한 열기가 파이프를 지남에 따라 쉽게 식어버린다는 사실을 두어 차례 겨울을 보내며 깨달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라이트는 증기가 아닌 온수 순환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결국 입주한 지 2년여가 지난 1940년 2월, 제이콥스는 라이트의 제안에 따라 증기 시스템을 온수 시스템으로 교체했고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근대화 이후 우리가 보편적으로 채택해온 방식이다. (이와 함께 그간 아무 난방장치가 없던 욕실에 라디에이터를 설치했고, 경제적인 이유로 보일러의 연료를 기름에서 석탄으로 바꾼다.) 제이콥스 부부가 바닥난방에 만족했다는 사실은 라이트에게 의뢰한 두 번째 집(Jacobs House II, 1948~49)에서도 알게 된다. ‘솔라 헤미사이클(Solar Hemicycle)’이라 불린 이 집은 둥근 평면에 돌로 벽을 쌓은 점이 특징인데,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바닥난방을 설치했다.

둘째의 출생과 아이들의 성장 등으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진 제이콥스 가족은 첫 번째 집에서 5년을 살고 1942년 말 이사 나왔다. 그 후 소유자가 여러 번 바뀌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집은 자연히 낙후된다. 현재의 소유자는 1982년 집을 매입한 제임스 데니스라는 인물이다. 위스콘신대학교 예술사학과에서 교수로 있던 그는 이듬해부터 여러 해 동안 복원 및 개선 공사를 진행했는데, 그때 난방설비 또한 개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콘크리트 바닥판도 완전히 새로 했고, 지면과 그 사이에 방습 및 단열 처리도 했다. 하지만 역시 온수 파이프를 교체한 일이 제일 주목할 만하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원래의 철제 파이프는 심하게 부식되었는데, 이를 당시 각광받던 플라스틱 계열의 폴리부틸렌 파이프로 바꾼 것이다.▼13 지난해 가을 이 집을 방문한 필자는 데니스의 안내로 집의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었다. 거장이 창작한 구축물과 공간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게다가 집에 보관 중인 옛 철제 파이프 실물과 도면을 보고, 지하 보일러실에서 온수관이 어떻게 교체되었는지 확인한 일도 큰 수확이었다. 이 집에 대한 현 소유자의 애정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애정은 복원공사 이후 30여 년이 지났음에도 집의 관리가 잘 된 요인인데, 유지 관리에 대한 전망은 건물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한 평가 항목에 속한다. 한편, 필자는 복원공사에 참여했던 건축가인 브래들리 린치를 만나서도 당시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도 자기 디자인에 일종의 바닥난방 유형을 도입할 때가 있는데, 물론 이는 미국의 주택에 보편적이지 않은, 그래서 아직은 고급 이미지와 더 많이 결부되는 방식이다. 라이트의 경제적 의도와 달리 말이다.​

한국의 온돌과 아메리칸 드림

글머리에 언급했지만 제이콥스 주택의 중요성은 단지 집 한 채에 국한된 게 아니다. 이 집은 라이트가 계속해서 발전시킨 유소니아 주택의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크며, 그의 영향하에 전개될 이후의 건축 양상으로 인해 의미가 배가된다. 그런데 거기에 한국의 온돌에서 착안한 바닥난방이 주요 특성으로 자리했던 것이다. 라이트의 유소니아 주택에 고무되어 등장한 건축 사례 가운데, 캘리포니아의 아이클러 주택은 특기할 만하다. 이는 부동산 개발업자인 조셉 아이클러가 라이트의 유소니아 주택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량생산한 주택으로서 1949년부터 1974년까지 1만 1,000호 이상이 건설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바닥난방이 핵심 특성으로 있다. 아이클러 주택보다 먼저 개발된 뉴욕의 레빗타운(1947~51) 역시도 바닥난방을 특성으로 하는데, 포드 시스템을 도입해 단기간에 더 많은 주택을 생산했다. 여기에도 라이트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바닥난방이 비록 미국 주택의 보편적 방식으로 자리 잡지 못했지만 전후의 대표적 대량생산 주택에 도입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보통 사람들이 꿈꾸었던 아메리칸 드림의 재건에 라이트의 유소니아 주택이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첫 사례인 제이콥스 주택이 한국으로부터의 열기로 데워졌기 때문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20세기 건축’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돌아보며 우리가 제이콥스 주택에 다시 한 번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1. The official UNESCO document (The 20th-Century Architecture of Frank Lloyd Wright, 2019) uploaded to the website describes how each building demonstrates ‘an important interchange of human values’ as ‘cultural heritage’ (CRITERION II) and how each satisfies the specific criteria of ‘integrity’, ‘authenticity’ and ‘protection and management requirements’. The eight buildings included are the Unity Temple, Robie House, Taliesin, Hollyhock House, Fallingwater, Jacobs House I, Taliesin West, and the Guggenheim Museum.

2. Donald G. Kalec, ‘The Jacobs House I’, Frank Lloyd Wright and Madison, Paul Sprague (ed), Elvehjem Museum of Art, Madison WI, 1990, pp. 91 – 100.

3. For example, see Nam-Ung Kim, et al., ‘A Study on Frank Lloyd Wright’s Experience of the Korean Traditional Floor Heating System Ondol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온돌체험과 그의 건축 작품에의 적용과정 및 의미에 대한 고찰]’, Journal of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21.9 (September 2005), pp. 155 – 166; Hyon-Sob Kim, ‘The Appearance of Korean Architecture in the Modern West’, Architectural Research Quarterly, 14.4 (December 2010), pp. 349 – 361; and Hyon-Sob Kim, ‘Frank Lloyd Wright’s Jacobs House 1936 – 37 [유소니아의 꿈이 시작된 곳: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이콥스 주택 1936~1937]’, Architecture Class: History of Modern Architecture in the West (Seoul: Zip, 2016), pp. 244 – 255.

4. John Sergeant, Frank Lloyd Wright’s Usonian Houses (New York: Whitney, 1976), p. 16.

5. Hyon-Sob Kim, 2016.

6. Herbert Jacobs, Frank Lloyd Wright: America’s Greatest Architect (New York: Harcourt, Brace & World, 1965), pp. 129 – 130.

7. Masami Tanikawa, ‘On the relationship between Wright and Kihachiro Okura [Wrightと大倉喜八郞の交友について]’, Architectural Institute of Japan: Kanto Branch Research Report (2000), pp. 417 – 420.

8. Okura named it ‘Chosenkan’ (Korean House) and used it as a private art gallery. Chosenkan was destroyed in the 1923 Kanto earthquake. Only some stone structures survived this catastrophe. Now, the remains are preserved at one corner of the Gyeongbokgung Palace, after having been returned to Korea in 1996. Chung-Dong Kim, Walking through Japan [일본을 걷는다] (Seoul: Hanyang, 1997), pp. 14 – 30; Sung-Jin Park and Don-Son Woo, ‘The Disposal and Removal of the Gyeongbokgung Palace’s Buildings during the Japanese Ruling Era [일제강점기 경복궁 전각의 훼철과 이건]’, Journal of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23.5 (May 2007), pp. 133 – 140.

9. Kathryn Smith, ‘Frank Lloyd Wright and the Imperial Hotel: A Postscript’, The Art Bulletin, 67.2 (1985), pp. 296 – 310; Julia Meech, Frank Lloyd Wright and the Art of Japan (New York: Abrams, 2001), pp. 192 – 193.

10. There are several important studies on this subject, but for a comprehensive and concise description, see Kiel Moe, Thermally Active Surfaces in Architecture (New York: Princeton Architectural Press, 2010), pp. 54 – 65.

11. Herbert Jacobs and Katherine Jacobs, Building with Frank Lloyd Wright: An Illustrated Memoir (San Francisco: Chronicle Books, 1978), p. 27.

12. Richard Woolsey Schoemaker, Radiant Heating (New York: McGraw-Hill, 1954), p. 10.

13. John Eifler, ‘Restoring the Jacobs House’, Fine Homebuilding (April/May 1993), pp. 78 – 82.​

▲ SPACE, 스페이스, 공간

현대식 온돌 개발자는 한국인이 아니다

[남자의 집짓기] ⑬ 되돌아본 우리 옛집(하)

어릴 적 시골집에서는 몇 년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방바닥을 모두 들어내고 온돌 구들장을 새로 놓는 대공사가 벌어졌다. 구들장 밑에 붙어 있는 그을음을 정기적으로 긁어내고 새로 놓아야 불기운이 잘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대목장 버금가는 목수였던 부친께서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구들장을 놓을 때는 고래(불기운이 지나가는 길)를 잘 놓아야 하는데, 식구들 잠자리를 훤히 꿰고 있는 부친보다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구들장을 새로 놓은 첫날밤은 청국장 뜨는 것과 같은 황토 내음이 코를 찔러서 자꾸 코를 문질렀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등을 따습게 데워 주었던 온돌이 초고층 아파트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전통 구들의 고래 모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구와 구들장을 깐 모습.

누구였을까? 온수파이프를 방바닥에 까는 간단한 방법으로 구들장의 온기를 지금까지 누릴 수 있도록 해준 그 사람은. 미안하지만, 그 주인공은 2000년이 넘는 온돌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데이고쿠호텔과 자선당, 그리고 온돌

20세기초 미국 건축계를 주름잡던 세계적인 건축가가 있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 마흔을 넘기면서 불륜에 빠진 그는 고향인 위스콘신에 ‘탈리에신’(영국 웨일즈어로 ‘빛나는 이마’를 뜻함)이라는 작업실을 짓고 애인과 함께 정착했다. 그가 유럽에 출장 중이던 어느 날, 고용인이 탈리에신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몰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실의에 빠진 그를 구원해준 것은 일본의 도쿄 호텔 설계였다”(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중에서)

당시 일본 굴지의 거부였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세계적인 건축가였던 그에게 일본 최고의 호텔 설계를 의뢰한 것이다. 지금도 도쿄의 최고급호텔로 남아 있는-본관 로비는 나고야로 이전 복원돼 있음-데이고쿠(帝國·Imperial)호텔이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로 일본 임페리얼호텔(오른쪽) 건축과정에서 현대식 온돌난방을 처음으로 적용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오쿠라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된 부산에 들어와 잡화점을 시작으로 금융(다이이치은행 조선지점), 건설, 압록강 벌목으로 떼돈을 벌어 조선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긁어갔던 인물이다. 덕수궁 석조전도 그의 작품이고, 선린상고도 그가 설립했다. 총독부와 결탁하여 번 돈으로 긁어모은 문화재가 웬만한 박물관 한 개는 채우고도 남는다고 하는 ‘오쿠라컬렉션’(일본의 국립문화재로 지정된 ‘오구라컬렉션’과는 다름)이다. 신라호텔을 지을 때 이병철회장이 모델로 삼았던 도쿄의 오쿠라호텔 앞에 그렇게 긁어모은 문화재를 전시한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이 있다.

오쿠라는 1914년 총독부가 식민통치의 치적을 홍보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궁궐 전각을 헐어낼 때, 테라우치총독을 구워삶아 세자의 동궁(東宮)으로 사용되던 자선당(資善堂)을 뜯어 도쿄의 저택 뜰에 이축했다.

데이고쿠호텔 설계를 의뢰하기 위해 그를 초청한 것은 바로 그 해 겨울이었다. 설계협의가 원만하게 마무리되고 오쿠라가 대접하는 만찬을 들기 위해 다다미방에 들어섰던 그는 너무 추운 날씨에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음식은 입에 대보지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하다 일어섰다. 그 모습이 미안했던지 오쿠라는 ‘코리안 룸(Korean Room)’ 이라는 방으로 그를 안내하여 커피를 대접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런데 기온이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결코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봄이 온 듯 했다. 우리는 곧 몸이 따뜻해지고 다시 즐거워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았다. 눈에 보이는 난방시설도 없었고, 이것으로 난방이 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난방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Gravity Heat. 1943)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중력난방’

그가 커피를 대접받았던 ‘코리안 룸(Korean Room)’은 오쿠라가 조선에서 뜯어갔던 자선당이었다. 통역관으로부터 온돌 난방의 원리를 들은 그는 그날 밤을 새면서 이 신비로운 기술을 설계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짜냈다. 당시 이미 실용화돼 있었던 전기 라디에이터의 파이프를 펴서 바닥에 깔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데이고쿠호텔 욕실에 세계 최초로 적용했다.

원형으로 복원한 자선당과 일본에서 반환받아 건청궁 뒤뜰에 이전, 복원한 자선당 유구

공사가 시작된 1918년부터 4년간 도쿄에 거주하면서 설계·감리를 하던 그는 계속되는 설계 변경과 여섯 배로 올라간 공사비로 건축주와 알력이 심해져 만성위염까지 앓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호텔의 낙성기념 피로연이 막 열리려던 1923년9월1일 오전11시58분, 15만여명이 사망하고 도시의 절반이 폐허가 된 도쿄대지진이 일어났다. 며칠 뒤 겨우 통신이 복구된 도쿄에서 그에게 한 통의 전보가 도착했다. 호텔은 피해 없이 서 있습니다. 당신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기념비로”(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그가 바로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다. 바로 이 사건으로 라이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1937년 펜실베니아주 베어런 숲속, 계곡에 걸쳐 있는 땅에 지은 ‘낙수장(Falling Water)’으로 전설적인 거장이 되었다.

라이트는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는 호텔로 유명해졌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 호텔에 처음으로 적용한 바닥 난방 기술에 무척 애착을 가졌다. 자신이 ‘중력난방(Gravity Heat)’이라고 명명한 이 난방 기술은 바닥을 데워 덥혀진 온기가 대류의 원리에 따라 위로 올라가 방안 전체를 덥힌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그 후 라이트는 자신이 설계한 약 30동(棟)의 단독주택에 이 난방 기술을 적용했다.

라이트가 온돌 난방을 적용하여 건축한 단독주택 작품의 하나인 고든하우스.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 남쪽에 있다.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 남부에 가면 오레곤 가든(Oregon Garden)이라는 식물원이 있는데 이곳에도 고든 하우스(Gordon House)라고 하는 그의 작품이 남아 있다. 이 작은 집을 보기 위해 포틀랜드에서 한 나절이나 걸려서 직접 찾아 갔던 적이 있다. 쭉 뻗은 처마와 길죽하게 낸 창의 모양이 자선당의 곡선을 직선으로 바꿔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도쿄와 미국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온 난방 공법의 발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자선당은 도쿄대지진에 무너져 기단만 남은 것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발견,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반환받아 1995년 삼성문화재단이 무상기증 형식으로 유구를 경복궁 건청궁 뒤뜰(명성황후 조난지)로 이전했다. 원래 자선당 자리에는 2001년 새 건물이 복원됐다. 경복궁을 보러 가면 자선당과 건청궁 뒤뜰에 꼭 들러보길 바란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따뜻한 난방 공법이 가능하기까지 자선당이 겪은 수난과 한 현인의 아이디어에 부디 경의를 표하기를. 집을 짓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복궁 자선당의 수난사와 온돌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방식이다” –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 –

온돌은 한국 고유의 독특한 난방방식이고 온돌문화는 우리 겨레의 삶의 예지와 숨결이 자리잡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보물이자 훌륭한 자산이다.

“한국인의 방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난방방식이다”라고 극찬한 이가 있다. 그는 미국의 유명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다. 현대 온돌의 역사를 논한다면 그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는 어떻게 온돌을 알게 된 것일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916년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 설계를 맡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부호의 집에 머물렀다.

오쿠라 키하치로(1837-1928)

오쿠라 키하치로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개항된 부산에 들어와 잡화점을 시작으로 금융(다이이치은행 조선지점), 건설, 압록강 벌목으로 떼돈을 벌어 조선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긁어갔던 인물이다. 그는 1914년 총독부가 식민통치의 치적을 홍보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궁궐 전각을 헐어낼 때, 테라우치총독을 설득하여 세자의 동궁(東宮)으로 사용되던 자선당(資善堂)을 뜯어가 도쿄의 자신의 집에 다시 세웠다. 감히 세자마마의 동궁을 일본으로 가져가 ‘조선관’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하는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이다.

1914년, 건축가 프랭크 라이트는 마침 제국호텔(Imperial Hotel)을 설계하기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추운 겨울날 마침 신기한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프랭크는 오쿠라가 자선당을 옮겨놓은 조선관의 온돌을 운명처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라이트는 “이 방이 왜 이렇게 안락한가”라고 물었다. 이에 ‘한국식 방(Korean Room)’이라는 답과 함께 그 원리를 설명 듣고 크게 감명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기온이 갑자기 바뀐 것 같았다. 결코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마치 봄이 온 듯 했다. 우리는 곧 몸이 따뜻해지고 다시 즐거워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훈훈함이 감돌았다. 눈에 보이는 난방시설도 없었고, 이것으로 난방이 되는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난방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기후적 사건이었다”(Gravity Heat. 1943)

라이트는 바닥을 데우는 난방방식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방식으로 보고 태양열보다 좋은 난방이라고 극찬했다. 큰 감동과 영감을 받은 프랭크는 미국에 돌아가 1930년대 후반부터 주택을 설계할 때 처음으로 온돌식 난방을 적용했다 미국의 온돌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라이트는 자신이 ‘중력난방(Gravity Heat)’이라고 명명한 이 난방 기술을 자신이 설계한 약 30동(棟)의 단독주택에 적용했다. 온수를 순환시키는 방식의 온돌을 자신의 설계에 적용한 이 방식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미국 건축 틈새시장에 살아남아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일본으로 강제적으로 옮겨진 자선당(資善堂)은 미국의 건축가 한명을 감동시켰고 이는 계량온돌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경복궁 자선당 현재 모습

자선당은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일본에서 조선관으로 불리웠던 자선당(資善堂)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기초석들만 오쿠라 호텔 정원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찾았다. 잊혀질 뻔했지만 김정동 목원대 건축과 교수가 1993년 도쿄 오쿠라 호텔 정원에서 그 유구를 찾아냈다. 오랜 협상 끝에 오쿠라 호텔은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1995년 유구석 288개를 반환했다. 1999년 자선당은 복원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환수된 유구는 건축 자재로 쓰이지는 못했다.

경복궁 자선당 현재 모습

자선당의 수난사는 우리 근현대사를 대변한다. 온돌의 역사에도 남는 건물이 되었다. 경복궁을 가게 되어도 자선당을 놓치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다음에 갈 때에는 꼭 자선당을 들러 보기를 권한다.

박찬화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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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온돌’ 개발자는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음주 습관 중 하나는 폭음이다. 많이도 먹는데 위험하게 마신다. 국내 숙취해소음료 시장이 매년 성장해 1800억원 규모에 이르는 것도, 밀크티슬과 헛개 등 간에 좋다는 천연 원료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에서 기능성 물질에 대해 연구하는 서우덕 농업연구사(사진)가 새싹보리에 주목한 것도 한국인의 음주 습관과 닿아 있다. 새싹보리에서 숙취해소를 돕는 ‘알코올성 간 기능 개선 효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 연구사는 “새싹보리의 알코올성 지방간 경감 효능이 헛개보다 약 1.8배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새싹보리는 새로운 농작물이 아니다. 벼농사가 끝난 뒤 씨앗을 뿌려 키우는 일반 보리다. 싹을 틔우고 15~20㎝ 정도 자랐을 때 베어내는 어린잎을 새싹보리라고 부른다. 일반 보리는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키우지만 새싹보리는 가을에 두 번, 봄에 두 번 1년에 네 번까지 수확할 수 있다.농촌진흥청에 입사해 경남 밀양에 있는 기능성작물부에 배치받은 서 연구사는 2009년 2월 연구용 농장을 견학하다가 겨울인데도 파릇파릇 싹이 돋아난 한 농지를 발견했다.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기능성 물질을 연구하는 천연물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당시만 해도 농업 현장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선배에게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싹이 자랄 수 있냐”고 물었다. 농업 전문가 선배의 대답은 “보리니까 그렇지”였다.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서 연구사는 이듬해부터 보리 연구를 시작했다.“겨울에 싹을 틔운다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물질들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이 물질들은 독성이 있거나 기능성이 있어요. ”그는 새싹보리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중국의 의약 고전서적인 ‘성혜방’에서 새싹보리의 효능에 대한 문구를 찾았다. 국내에서는 예로부터 전라도 지방에서 새싹보리를 먹었다는 기록도 있었다.먹을 수 있는 식품이라는 확신이 든 뒤에는 성분 연구에 들어갔다. 새싹보리엔 간 기능 개선 효과가 있는 사포나린과 나쁜 콜레스테롤을 줄여주는 폴리코사놀이라는 성분이 특히 많이 있다. 서 연구사는 그중에서도 사포나린에 주목했다.“2016년 동물실험에서 사포나린을 투여한 경우 중성지질이 23% 낮아지고 간 손상을 나타내는 효소 분비는 절반 이하로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밀크티슬와 헛개나무 추출물 대비 알코올성 지방간 경감 효능이 각각 1.5배와 1.8배 우수한 것도 발견했고요. 새싹이 많이 열리는 보리 품종 큰알보리1호 개량에 힘을 쏟았습니다.”그의 새싹보리에 대한 연구는 정체된 국내 보리 시장을 되살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5개 식품업체에서 녹즙과 보리환, 보리음료 등을 판매해 1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CJ헬스케어의 새싹보리차, 새뜸원의 보리환 등이 판매되고 있다. 올해 보리 관련 제품의 매출은 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새싹보리는 농가가 쉽게 재배할 수 있어 100% 국산 원료를 쓰는 것이 가능한 품목입니다. 식품업계도 새로운 소재에 목말라하고 있어 시장 전망도 밝습니다.”전주=FARM 강진규 기자전문은 ☞ m.blog.naver.com/nong-up/221403108578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온돌체험과 그의 건축작품에의 적용과정 및 의미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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