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장 설교 | [하루 한 장] 사도행전20장_여러 말로 권하고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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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17 (금) [하루 한 장]“여러 말로 권하고” (행20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사도행전 20장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소동을 겪은 후
마게도냐로 건너가기 전
제자들을 모아서 격려하고
가르치고 위로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 것만
기억하지만 그는 양육자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세우는
양육사역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2차 전도여행에서 세웠던 교회를
다 다시 방문하면서 점검하고
믿음을 북돋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모아서 갈 때
일곱 명의 형제들이 동행하여
위험하고 먼 길을 함께했습니다
신앙의 길은 양육하고 세우고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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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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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설교의 마지막은 언제나 비장합니다. 본문 사도행전 20장 22절에 보면,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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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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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

바울이 마게도냐와 헬라를 다니다 · 유두고를 살리다 ·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항해하다 ·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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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0/7/2022

View: 7402

사도행전 20장 바울의 고별설교 – The Shelter for souls

사도행전 20장 바울의 고별설교 17-38 에베소 장로들과 고별설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바울의 설교는 바울이 성도들에게 하는 유일한 설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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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helter4souls.tistory.com

Date Published: 3/20/2021

View: 7150

2010/10/08(금) “사도행전 20:1-12″/ 작성: 백호성

<본문> 사도행전 20장 1-12절 / 찬송 488장 …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바울의 설교를 밤늦게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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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0/4/2022

View: 8779

사도행전 20장 1-38절 말씀 묵상 – 복음뉴스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고별설교와 권면을 하기 위하여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17).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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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4/11/2022

View: 3778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행 20:17-27) * 땅 끝까지 …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사도행전 20장 17~27절) …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의 첫 문장을 다시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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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3/29/2021

View: 9873

[사도행전 20 장 – 문제와 해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제를 집사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증거하는 일에만 … 목사님께서 설교를 마치고 찬송가 몇 장 부릅시다라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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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khong.org

Date Published: 12/3/2021

View: 1942

사도행전 20장. 바울이 가르치는 교회와 목회

사도행전 20장. 바울이 가르치는 교회와 목회. 사도행전 20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2-08-02. 설교본문; 음성설교; 음성다운 · 설교 내용 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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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7/16/2021

View: 9781

(사도행전 20장) 성령에 매여 – 양산중앙교회

(사도행전 20장) 성령에 매여. 2021-03-05 06:50:00. 정지훈. 조회수 440. 1. 말씀묵상. 우리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자유인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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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angsanjungang.or.kr

Date Published: 5/11/2021

View: 7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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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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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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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

바울이 마게도냐와 헬라를 다니다 1 소요가 그치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 거기 석 달 동안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작정하니 4 1)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유두고를 살리다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항해하다 13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2)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14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가서 15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사도행전 20장 바울의 고별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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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장 바울의 고별설교

17-38 에베소 장로들과 고별설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바울의 설교는 바울이 성도들에게 하는 유일한 설교다. 또한 바울의 설교 가운데 3번째 하는 설교다(행 13:16-41/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한 전도설교, 행 17:22-31/ 아덴에서 이방인들에게 한 전도설교).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 기록된 에베소 장로들과의 고별설교는 바울서신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고별설교는 바울의 초점과 관심이 일차적으로 ‘전도’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별설교와 바울 서신과의 유사성

-행 20:19// 롬 1:1; 21:11, 빌 2:22

-행 20:19 // 고후 11:24,26, 살전 2:14-16

-행 20:20// 롬 16:5, 몬 21

-행 20:21// 롬 1:16, 고전 9:20

-행 20:21// 롬 10:9-13

-행 20:22// 롬 15:30-32

-행 20:24 // 고후 4:7-5:10, 6:4-10, 빌 1:19-26, 2:17; 3:8

-행 20:24/갈 1:15-16, 고후 6:1

고별 설교의 구성

17-18a 설교의 배경

18b-21 바울의 과거 회상

22-27 바울의 미래 계획

28-35 바울의 권면

28-31 사나운 이리를 조심하라. 28절 “삼가라”

32-35 은혜의 말씀에 의탁함, 바울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는 권면. 본받아라!

36-38 설교의 결과(반응)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18b-27. 바울의 역할과 관련.

(2) 28-35. 에베소 장로와 에베소 교회와 관련된 이야기.

17-18a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만나기 위해 이들을 오도록 요청한다. 에베소 교회는 장로들이 있을 정도로 바울이 이 교회를 떠나기 전에 조직이 갖추어진 교회이다(행 11:30, 14:23).. 복수 리더십임을 알 수 있다. 장로들의 역할은 교회를 목자처럼 잘 돌보고 인도하는 일이다. 이 역할은 바울의 설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하니’ 사사로운 조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하는 권위 있는 권면을 말함.

복수 리더십: 서로 약점을 보완하도록 공동 리더십을 세운 것이다.

17절 장로, 연장자로 세움.

28절, 감독, 목자(양 떼를 위하여)

목자에서 목사가 왔다. 교회의 리더십을 가리키는 표현 1) 장로: 연장자. 2) 감독과 목자: 장로의 역할과 기능을 소개하는 것. 즉 연장자이면서 돌보고 인도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에 “감독”이라는 단어가 등장. 하지만 여기서 감독은 장로의 또 다른 표현이다.

장로의 역할은 교인을 돌보고, 보호하고(protect) 인도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엄하게 경고하는 것. 치리해야 할 것.

1) 거짓 가르침: 이단 => 갈, 내쫓으라.

2) 성적 타락 => 고전 5, 내어 쫓으라.

3) 완고함. => 마 18. 죄인과 세인 취급.

이 세 가지는 요한일서에서 3가지, 교리적, 윤리적, 사회적 거짓 교사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파급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전체를 어지러 피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느냐,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

고별설교의 처음과 마지막에 바울의 삶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19절 겸손과 눈물, 31절 눈물로

눈물의 이유: 1) 바울의 대적자들 때문에(19절), 2)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도록 성도들을 훈계하는 가운데 흘린 눈물(31절),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연약해서 흔들리는 성도를 향한 눈물.

이런 눈물이 있는가? 사역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20절 바울의 사역 장소: 공중 앞, 집

바울이 전한 내용: 유익한 것.

사역의 대상: 21절,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인종적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했다.

복음의 내용: 회개와 믿음.(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18b- 21

바울은 설교의 시작과 마지막을 바울 자신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모델로 제시함으로 설교를 시작하고 끝낸다(18b-21; 31-35). 바울의 삶이 모델이 되었음을 에베소의 장로들은 “안다.”(18절). 바울은 시험을 경험한다(19절). 여기서 시험을 바울이 경험한 모든 종류의 박해를 의미한다(행 19:9; 20:3; 살전 2:14-15, 고후 2:4; 빌 3:18). 바울의 사역 장소는 공적인 자리와 (“공중 앞에서)와 사적인 자리(“각 집”)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유익한 것은 거리낌 없이 사람들에게 전한다. 여기 ‘유익한 것’은 ‘더 좋은 것’, ‘혜택을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의 사역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은 전하는 사역이었다. 인종적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은 21절에 요약된 것처럼 두 가지 내용이다. (1) 하나님에 대한 회개 (2)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나 이 메시지를 들어야 했다.

바울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 18-19. 충성스러움, 신실함.

(2) 20. 필요한 것은(유익한 것)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선포.

(3) 21. 인종적 차별 없이 복음을 선포했다.

22-24

이제 바울은 자신의 미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한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계획은 “성령에 매여서” 세운 계획이다. 예루살렘 계획이 성령의 지시에 따른 계획(19:21. “:작정하여”: 성령 안에서 계획하여)이다. 예루살렘 방문에는 사람들이 환영이 아닌,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행 21:4,11). 22-23절에는 두 종류의 매임이 대조되고 있다. 하나는 성령에 매이는 것(22절)이고 다른 하나는 핍박으로 인한 매임(23절-결박)이다. 성령에 매인 바울은 어떤 매임도 구애받지 않는다!

23절:사역자는 환영받는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곳에 가는 사람이다.

‘성령에 매여’(22), ‘결박’(23). 성령에 매인 바울은 어떤 매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딤후 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의 인생 목적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달려갈 길’ 즉 경주(race)라는 운동경기의 비유를 사용한다.

누가는 이미 세례 요한의 인생을 언급하면서 ‘경주’(달려갈 길)이라는 비유를 사용했고, 바울도 고전 9:24, 빌 3:14 그리고 딤후 4:7에서 경주라는 운동경기의 비유를 인생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바울이 자기 생명을 조금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대신에 성취하려고 했던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즉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이다(내용의 소유격).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소유격 설명.

소유격의 성격: “가족” “전체”가 “히피” 족이 되어 “묘소” 앞에서 “단비”를 맞으며 춤을 추면서 “설기” 떡을 “주목”하며 “독립”된 “시간”을 갖는다.

주격적 소유격, 목적 격적 소유격, 묘사의 소유격, 단비의 소유격 등.

25-27. 헬라어 원어: “그 나라”,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왕되심이다.

하나님 나라:

1)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내용, 8:12 => 하나님 나라

2)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했던 전도 내용=> 14:2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3)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했던 내용. 19:8 “하나님 나라”

4) 로마 셋방에서, 28장에 두 번 나온다.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 1) 복음(말씀)의 확산: 요약 진술문, 2) 하나님 나라(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주” 기독론, 즉 예수님이 주님이 시다와 함께 소개된다. 초대교회의 선포 내용이 예수의 왕되심이었다. 로마 황제가 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신다.

바울이 전파한 내용이 다시 설명된다. 먼저 바울이 전한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였다(25절). 또한 ‘하나님의 뜻’(27절)이었다. 바울은 24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사용되어 사도행전 전체를 inclusio 기법으로 감싸고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행 1:3; 28:31).

27절의 ‘하나님의 뜻’(th.n boulh.n tou/ qeou/)은 ‘하나님의 계획 전체’이라고 번역할 수 있으며, 복음 선포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뜻’(불레, boulh,) 이이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되며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2:23; 4:28; 5:38; 13:36).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신앙은 공동체적이다. 성령 충만의 결과 공동체가 형성됐다.

28-30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주는 ‘권면’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그 권면의 핵심은 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삼가라’(prose, cete)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주의를 기울이다. 주목하다는 의미가 있다. 삼가야 하는 이유: 자기를 위하여, 양 떼를 위하여. 장로들(교회 리더들)은 ‘성령’이 ‘감독자’(evpisko, pouj)로 세운 사람들이다. 성령이 감독자로 지도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교회를 돌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돌보다(poimai, nein)는 의미는 목자가 양을 돌보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로 인도하다(lead), 지도하다(guide), 돌보다(look afte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장로들을 목자로 비유하는 것은 거짓 교사들을 ‘사나운 이리’(29절)와 비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감독과 목자. 사나운 이리 와 대조하여 목자로 표현함.

장로들이 돌보아야 할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이다. 사본학적으로 이 구절은 난해한 구절이다. 신학적으로 자연스러운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이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난해한 본문이 더 원래의 본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현재의 표현이 원문에 가까운 독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나타내는 표현.

장로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돌보고(28절) 또 온 양 떼(교회)를 돌보아야 할 이유가 29-30절에 제시된다. 바울이 없을 때 “사나운 이리”가 교회를 공격해 올 것이다. 이리가 어디에서 오는가 2가지 경로가 제시된다.

(1) 에베소 교회 밖에서 들어오는 경우(29절), 그리고 (2) 에베소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경우(30절).. 우리들도 사나운 이리가 될 수 있다. 감독자 된 장로들은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양 떼인 교회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거짓 가르침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1) 거짓 가르침을 주는 ‘사람’을 따르게 한다(ovpi, sw auvtw/n)는 점.. 사람을 따르게 하는 것. “우리는 유리창이다. 우리는 프로젝트다.” (2) ‘어그러진’ 말을 한다(lalou/ntej diestramme, na)는 점이다. ‘어그러지게 하다’는 동사의 뜻은 뒤틀다(twist)는 의미가 있다(참고 행 13:10, 빌 2:15).

31-35절. 기억하라: 1) 바울의 삶(31절), 2) 주의 말씀을 기억하라(35절).

이 단락은 ‘기억하다’는 동사로 시작하고 끝난다(31, 35). 먼저, 바울의 삶을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기억하고 모델로 삼아야 한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을 이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지도력, 신앙에 맡기지 않고 대신에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32절)에 부탁한다. 헬라어 성경(NA27판과 NA28판)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되어 있다.

은혜에 관한 말씀(복음)이 성도들을 든든히 세우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떠나고 나면 에베소 장로들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울’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남아 있다!

그=> his. 그 은혜의 말씀=> 그의 은혜의 말씀.

바울은 자신이 직접 일하며 복음을 전한 일을 지적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고린도 교회(. 1년 6개월)에서 직접 일하며 복음을 전했다(고전 4:12; 9:12,15; 살전 2:9). 그리고 여기 에베소 교회(. 3년)에서도 친히 일하며 복음을 전했다(34절).

설교의 시작 부분과 마찬가지로,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신실한 삶을 모범으로 다시 제시하며 장로들을 권면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

1) 예수님의 천상 사역

2) 제자도.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 바울의 삶,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 20장의 말씀을 통해 바울은 “나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이는가?

36-38

바울의 설교를 들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기도, 눈물, 안아줌, 입맞춤이라는 단어들은 우리가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상상할 수 있게 도와준다. 바울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 사이의 영적인 유대감과 감정적 연대감을 보여준다. 신약에서 에베소 교회의 상황은 에베소서, 디모데전, 후서 그리고 계시록 2장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역지를 떠날 때 어떤 반응이 있는가?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에베소서, 디모데 전후서, 계시록에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계시록에서 에베소교회: 첫사랑을 버렸다=> 교회 밖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

적용

1)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모습 적용.

1-2절 권하고,

11절 날이 새기까지 복음을 전함.(유두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의 삶을 모델로 제시한다.

바울의 모습은 연출된 경건이 아니었다. 연출된 모습이 혹시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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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8(금) “사도행전 20:1-12″/ 작성: 백호성

2010년 2월8일(금)

<본문> 사도행전 20장 1-12절 / 찬송 488장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선동한 소동이 있은 후 바울 일행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그리고 헬라에 이릅니다. 헬라에 석 달을 머문 후 배 타고 바로 수리아로 가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고 공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 마게도냐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길이었지만 그 여정에 바울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이렇게 일곱 명이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지금까지 함께 전도여행을 같이하였던 동역자인 실라와 사도행전을 쓰고 있는 누가를 합하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 일행은 바울을 포함하여 적어도 열 명이었습니다. 앞의 일곱 명은 먼저 아시아의 드로아에 가서 실라와 누가를 포함한 바울 일행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드로아는 아시아 지방의 항구 도시로 이전에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사람의 환상을 보았던 곳이었습니다. 바울일행은 무교절 후 빌립보에서 출발하여 5일 만에 드로아에 도착했고 거기서 7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인 주일에 드로아의 성도들은 성찬과 예배를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바울의 설교를 밤늦게까지 듣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말씀강론은 밤이 늦도록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는데 그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윗다락 즉 3층다락의 창문에 걸터앉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졸다가 그만 떨어졌고 사람들이 달려가서 보니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복되다’, ‘다행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당시 사회의 하층민들 가운데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유두고’는 아마 종과 같은 낮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신분 위치상 낮에는 아마 노동을 해야 했었고, 그러나 다음날이면 떠나는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예배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가 길어지고 한밤이 되어가면서 피곤에 못이겨 졸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공적인 집회시간에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참으로 큰일이요 교회에 시험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도 은혜로운 말씀이 강론되는 시간에 말입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집회의 분위기는 한순간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요동함 없이 떨어진 청년에게로 갔고, 그 청년위에 엎드려 그의 몸을 안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떡을 떼고 새벽까지 말씀을 강론하였습니다. 드로아 사람들은 유두고가 살아나는 과정을 보면서 마음에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졸아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통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함을 허락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상과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놀래서 당황하거나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두고 사건을 보면서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때 요동하여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바울처럼 오히려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을 들면 우리의 주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하나님의 위로가 항상 함께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함께하는 동역자들을 붙여주셔서 험난한 전도의 길에 동행케 하셨습니다. 또한 죽었던 청년 유두고를 다시 살리심으로 오히려 그 사건이 바울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또 우리를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당신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이 새벽,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며 말씀 안에서 깨어 기도하는 복된 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20장 1-38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1-38 말씀 묵상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However,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my only aim is to finish the race and complete the task the Lord Jesus has given me—the task of testifying to the good news of God’s grace.”(Acts 20:24).

바울의 계획은 분명히 겐그레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유대로 항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명을 노리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알고서, 그와 누가는 이 항로를 취소하고 다른 항구에서 항해하기로 결정했습니다(3).

바울이 드로아에 머물렀던 마지막 날 저녁 드로아의 교인들과 함께 떡을 떼기 위해 모여 바울에게 긴 강론을 경청했습니다. 그때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졸음 때문에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몸을 끌어안자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넘쳤음은 물론입니다(7-12).

바울은 원래 계획보다 드로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지연됨을 보충하기 위해 그는 나머지 일행들을 미리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통해 앗소, 미둘레네, 기오 그리고 밀레도로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바울은 가능하면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습니다(16). 이처럼 바울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소홀히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고별설교와 권면을 하기 위하여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17).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없이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대적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신변의 위협을 받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그의 자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고 가르쳐 주십니다(20).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권면은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많은 신자들이 장로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장로들 스스로가 언어와 행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이 세상이나 우상 숭배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잘 돌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 안에 흉악한 이리가 나타나 양떼를 아끼지 않으며,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했습니다(28-30). 바울은 장로들에게 지혜와 정성이 필요함을 상기시키며 그들과 교회를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이 근심하며 바울을 전송한 이유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 때문입니다(38). 장로들은 바울의 섬기는 모습, 집회를 주재하는 모습, 따뜻한 충고와 위로를 주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근심하였습니다.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는 일에 전심전력하기를 소원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행 20:17-27) * 땅 끝까지 이르러

2019년 7월 28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7 ✦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사도행전 20장 17~27절)

[ 들어가는 말 ]

여러분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 매일 살아가는 그 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는 지금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

가족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돈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명예를 위해 삽니까? 성공을 위해 삽니까? 출세를 위해서 삽니까? 또는 학생이면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서? 또 그 후에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서? 큰 사업체를 위해서?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 생명을 내던지고 바쳐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생명을 걸 만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을 바친다면,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래도 죽었는데 그 돈을 누가 쓰는 겁니까? 성공을 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 목숨을 내던져 성공하고 죽었다면, 죽었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생명을 바쳐서 내 자녀가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게 해준다면, 내가 죽은 후에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됩니까? 별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끼는 것을 위해 생명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내 목숨을 내던질 수 없는 것을 위해 살고 있다면, 헛것을 위해 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의 목적이고 또 사명입니다. 물론 사명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더라도, 즉 생명을 내어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목숨을 내어주더라도 그것이 소용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살아갈 수 있는 그 소중한 가치와 목적과 사명을 위해 살아갈 때,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커다란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상을 주십니다. 그냥 힘들게 고생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목숨을 던지지도 못할 만한 시시한 것을 위해서 살지 말고,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것을 위해 살다가 최고의 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는 길로 걸어가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비밀을 깨닫고 그 길로 끝까지 달려간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40마일에 이르는 먼 길을 혼자 걸어갔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며 나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독한 길을 통해, 비록 앞으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3차 전도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앗소에서 일행과 다시 합류한 바울이 배를 타고 미둘레네(미틸리니), 기오(키오스), 사모(사모스)를 거쳐 밀레도로 갔습니다. 사모에서 에베소가 바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바울은 3년이나 목회했던 정든 에베소를 그냥 지나쳐서 남쪽에 있는 밀레도로 내려갔습니다. 예루살렘 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한 이상, 조금이라도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전에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일행과 함께 도착한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 30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밀레도가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상 아시아 주, 즉 오늘의 터키 서부 지역을 일컫는 아시아에서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밀레도에는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잘 발굴되어 있는 야외극장이 그 당시 소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처음부터 바둑판 모양으로 계획, 설계, 건축된 아주 훌륭한 도시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을 설계한 천재 물리학자 이시도루스(Isidorus)라는 사람도 바로 이 밀레도 출신이었습니다.

또 밀레도는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막대기 하나로 거대한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고 수학의 기초를 닦은 탈레스(Thales)를 배출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탈레스 하면 생각나는 게, 아주 오래 전 대학교 1학년 때 고대철학을 배웠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철학자가 바로 이 탈레스입니다. 탈레스가 한 말이 유명했는데 “모든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이 기억납니다. “왜 물이라고 했는가? 그가 물가에 살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그 말이 30년이 넘었는데도 기억납니다. 실제로 물가인 밀레도에 살았기 때문에 탈레스는 “모든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당시 상업과 철학뿐 아니라 예술의 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밀레도에서 여러 곳을 가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들로 소문난 훌륭한 도시였지만, 바울은 밀레도에서도 전혀 다른 데로 한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7절)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해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냅니다. 30마일 북쪽으로 떨어진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게 합니다. 자기가 가지 않고 장로들을 오게 합니다. 에베소에 직접 들르게 되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고, 3년이나 정들었던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과 교제하며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자신이 있는 밀레도로 불러 그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게 되면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이 아시아를 떠나면, 앞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에베소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책임져줄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에베소의 장로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장로’는 지금의 장로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오히려 목회자에 더 가까운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장로들에게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하기 위해서 그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소위 바울의 ‘고별 설교’라고 불립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남긴, 사도행전 속의 마지막 유언인 셈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도행전 전체에서 바울이 믿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한 내용으로서 유일합니다. 다른 설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한 내용이었지만, 오늘 본문은 바울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2. 에베소 사역 회상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8절)

바울이 요청해서 급히 달려온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이 에베소가 속해 있는 아시아(터키)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고별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19절)

본문의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유대인들의 온갖 모함으로 인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긴 것’이 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머무는 동안, 특별히 제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3년 동안이나 머물렀는데, 온갖 시련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종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겸손과 눈물로 인내하며 섬겼던 것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0절)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공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거리낌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거리낌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는 것은, ‘내가 혹시 이 말을 했다가 뭔가 손해를 보지 않을까,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했다는 겁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과 아데미 신전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환락과 여러 파티와 광란의 도시였던 동시에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제2의 로마’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에베소에서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 하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을 철이나 은이나 금이나 돌 같은 것의 노예로 살도록, 그런 헛된 것을 섬기며 죽어가도록 방치해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움으로 선포했지만,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쉽습니까?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폭동이 일어나서 심한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에베소 사람들을 살리는 데 꼭 필요한 메시지라는 것을 확신했고 또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개의치 않고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1절)

바울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하면서 선민의식에 젖어 있고,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개다. 지옥 불에서 뗄 감으로나 쓸 것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자살행위였습니다. 예수를 죽였는데 바울 자신을 왜 못 죽이겠습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하고 죽이려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자기도 유대인이면서도 우리 유대교를 부정하는 저런 바울 같은 놈은 죽여야 한다.’라고 하며 사악한 배교자 정도로밖에는 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헬라(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많은 신들을 믿고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헛된 신들을 많이 만들어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수많은 신들이 제각각 영역을 나누어 통치하는 신들의 세상이었는데, 사람과 아주 비슷한 신들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렇게 온갖 신들을 숭배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어라.’ 하고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것은 ‘너희의 신앙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선뜻 누가 따르겠습니까?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누가 와서 ‘그건 틀렸소!’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지, 누가 바로 ‘알겠습니다.’ 하겠습니까?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헬라 사람들이 동조한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라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의 첫 문장을 다시 보십시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십니다.”라고 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가 앞에 나오기 때문에, 바울이 아시아를 방문한 시기와 기간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바울의 고별설교의 이 시작 부분이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항상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고별설교 첫 문장에서부터 강조하려던 것은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희들’, 다시 말해 ‘에베소의 장로들인 여러분도 다 알고 있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온갖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오직 주님을 섬기며 복음을 전한 것, 에베소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까지 거리낌 없이 전하여 가르친 것,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회개하여 돌아서라고 선포한 것은, 다 사람의 입맛에 맞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기가 해를 당할 수도 있는데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그것이 주님의 구원과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자 그리스도인이자 예수님의 제자의 당연한 책임이었기 때문이고, 또 그가 만난 그 사람들을 진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가 그들을 정말 사랑하지 않았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지옥 불에 떨어지게 두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전하는 겁니다.

우리도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자’고 하는데, 뭐 하러 힘든 걸 합니까? 그냥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안 믿는 분들을 위해서 자꾸 기도하고 초청하고 섬기고 자꾸 그러자고 합니까? 그분들도 우리와 같이 천국에 가야 된다는 그 마음 때문입니다. 빚진 자로서의 마음, 그분들을 위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바울도 비록 자기를 해치려 하고 반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천국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있어서 육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지만 조롱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네?”라고 웃으며 조롱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듭니까? 몸의 고통도 힘들지만 그런 조롱은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그때 그냥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그런 자들을 다 쓸어버리신 다음 다시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면 되는데, 왜 그들을 멸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으셨는데도 그냥 두셨습니까? 그들도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 쓸어버리면 원수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도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들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구원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셨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다닐 때 무슨 건강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볼 때 이미 50대 중반에 접어들어 노년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매도 많이 맞고 파선도 여러 번 하면서 몸이 정상이 아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계속 따라다닌 이유 중 하나는 의사로서 바울을 돌봐주려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많은 나이도, 바울을 괴롭히던 육체의 병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데는 장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몸이 노쇠하고 병약했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내가 이렇게 약한데도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니까, 이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능력이다.’라는 것을 매일 체험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아갔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그 바울과 3년 동안 같이 지낸 사람들입니다. 같이 지내다가 바울이 교회의 리더로서 세우고 떠났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같이 지내면서 삶을 통해 온갖 시련과 박해와 도전 속에서도 바울이 주님을 어떻게 섬겼는지, 바울이 자기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또 주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들고 어떻게 나가서 전했는지, 직접 보고 겪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분은 다 아십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나를 보고 겪어서 아는 대로 바울이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치지 말고, 여러분도 복음의 증인으로서 그렇게 사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지금 여기서 전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든 그 삶을 본받아 살았던 자기처럼 그들도 복음을 위해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 중에 그리스 남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던 바울은, 그곳에서도 주님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내가 주님을 본받아 사는 것을 보고 겪어서 아는 대로,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자기 개인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열심히 주님을 본받은 것을 본받아 열심히 주님을 따라 살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멋진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힘듭니다.

자녀들이 사실 무서운(?) 존재입니다. 같이 살면 아이들이 내 약점을 잘 압니다. 아무리 말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해줘도, 내가 한 번 뭘 잘못하면 그게 진짜인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진짜는 저거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녀에게 ‘기도하고 자라. 말씀을 봐라.’라고 해도 자기는 말씀보다 드라마에 빠져 드라마만 보고 있으면, 아이가 보는 것은 말씀을 좋아하는 아빠엄마가 아니라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빠엄마일 뿐입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삶이 보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고 섬김이 중요하다 해도, 그와 반대로 자기 것만 챙기고 뒤에서 슬슬 속이면, 아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진짜인 겁니다.

결국 우리 삶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숨길 수도 없습니다. 삶에서 나옵니다. 특히 바울 같은 사람은 자기의 삶이 다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내가 산 것을 여러분은 아시죠? 여러분도 그렇게 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산대로 너도 이렇게 살아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도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금방 예수 믿은 분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 또는 젊은 분들에게, 교회에서 직분이라는 것은 ‘모범’과 ‘섬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섬기십시오.’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직분자입니다. 매년 공동의회를 통해 직분자들을 세우지만,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진짜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우리 자녀에게도 또 믿음의 후배들에게도, ‘나를 보라. 나를 보고 따르라. 내가 산대로 살아라.’ 하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장차 받을 고난에도 끝까지 다하는 사명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2절)

원래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잠시 들러서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와 남부 아가야의 교회들이 모은 사랑의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주고, 자기가 원래 파송 받았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 머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종목적지가 안디옥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가르쳐주시니까 목적지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간다.’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는 원래 안디옥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성령께서는 거게 아니라 예루살렘이라고 가르쳐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밝힙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23절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자기 영광이나 편안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촉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를 출발하여 마게도냐의 각 성을 죽 거치면서(아테네, 베뢰아, 데살로니가, 빌립보), 성령님이 바울에게 계속하여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말씀해주신 것이라면,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바울은 그 길에서 반드시 투옥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서도 자신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4절)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바울의 신앙고백이자 사명고백입니다.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길을 “내가 달려갈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 할 인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그 길을 가야 하는지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복음 증거의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선포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말 사명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인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고 불러주셨는데, 이처럼 은혜를 주시고 종으로 삼아주셨는데, 바울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또 수시로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인도하고 계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히려 바울은 이때 기대감으로 충만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시지만,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님,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하고 기도하며 갔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무뇌 인간’처럼 뇌가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나 무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뜻보다 훨씬 귀하고 훌륭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내려놓은 그리스도인은,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의지를 다하여 결단할 뿐 아니라 실천하게 됩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을 아무렇게나 취급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시련과 도전도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르는 자신의 거룩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반드시 주님의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 하는 귀한 결단과 헌신입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앞에 두고,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자신은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직접 남기는 마지막 유언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은 알아서 사십시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길로 가십시오. 같이 갑시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개척자들에 의해서 사회와 역사와 미래와 교회가 새로워집니다.

당시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당시의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고, 환락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여기저기서 아데미 신전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대고 관광객이 항상 많았습니다. 요즘 웬만큼 인기 있는 관광지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습니다.

우상과 돈과 향락과 쾌락과 유행과 패션과 온갖 볼거리와 흥밋거리와 서커스와 쇼 같은 것들로 가득한 그 에베소에서,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거룩한 백성을 부르시고 당신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런 우상과 맘몬과 향락과 타락의 도시인 에베소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교회가 섰고, 그들은 주님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부름 받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사실 편안한 길이 아니라 온갖 시련과 도전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그들에게 힘들고 생명을 거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그 길로 인도해내신 주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주님께서 불러내신 이상 반드시 함께해주실 테니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라. 두려움 없이 생명을 걸라.’ 하고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결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early retire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까? 그런데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물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것이 정말 내 생명을 걸 만큼 가치 있고 소중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부자유스럽고 속박당하고 구속받는 삶,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염려가 끊이지 않는 삶이 되고 맙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친 광야와도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생명수의 길을 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여기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4.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이루는 주님의 종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5절)

여기서 “보라”는 말이 진짜로 무엇을 보라는 말이 아니라, 헬라어 원어로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영어의 ‘behold’입니다. ‘자!’라는 뜻입니다. 22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동안 바울이 각 성을 거쳐 올 때마다 성령님께서 그의 예루살렘행이 결박과 환난의 길임을 계속 예고해 주셨지만, 바울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밝히면서, ‘보라’ 하고 말합니다. 자신의 굳은 결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의를 집중시키는 표현입니다.

25절에서는 ‘보라’라고만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리고 이제, 보라’ 하는 말입니다. 자기가 24절에서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라고 한 다음에 ‘자, 보십시오.’라고 하며 뭔가 중요한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한글 성경과는 순서가 다릅니다. 헬라어에는 ‘내가 알고 있다’는 말이 먼저 나와 있습니다. 독일어에는 동사에 따라서 1인칭인지 2인칭인지 3인칭인지, 또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구분됩니다. 헬라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사만 쓰면 누가 하는 말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인칭 단수동사를 쓰면 바울이 ‘내가 이렇게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나’라는 단어를 또 붙입니다. 그러니까 ‘나, 나, 나, 내가 알고 있다’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무엇을 압니까?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을 내가 알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작별, 즉 죽음으로 가는 길을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에 얼굴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다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이 없으면 우리는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종교적인 이유로 얼굴을 뒤집어쓰고 가는 여자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고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다 똑같이 생기기 때문에 구분이 안 되므로 벗고 찍으라고 합니다. 얼굴이 안 보이면 구분이 안 갑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얼굴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한국말로 원래 ‘얼굴’이 뭔지 아십니까? ‘얼굴’은 원래 ‘얼꼴’입니다. 보이지 않는 ‘얼’(영혼, 정신)의 ‘꼴’(모습, 상태)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상태가 ‘얼굴’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라고 하거나 ‘오늘은 왜 이렇게 얼굴이 환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데가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마음 상태가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면서, 다시는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을 의미하며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할 것으로 말한 것은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작별이 반드시 있습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그것을 깊이 느끼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날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으로 이사를 간다면 ‘나중에 한국 가면 봐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 앞에서는 ‘나중에 무덤에서 봐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믿는 분이 돌아가시면 ‘천국에서 다시 봐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이웃 교회 목사님이 돌아가셨는데, 감사하게도 돌아가시기 전날에 가서 방문하여 기도해드리며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기도할 때 말씀을 못하셨지만 중간 중간 “아, 아”라고 하셨습니다. 혼수상태였는데도 분명히 들으신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다시 뵙겠다고 인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슬픈 겁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갈라놓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그토록 강조한 것은, 바울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그 순간만큼은 바울이 금방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당사자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죽어서 장례를 치른 사람의 얼굴을 실물로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돌아가시는 그 순간 얼굴이 바뀝니다. 생명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의 얼굴을 이루었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다시 들을 수 없고, 그 귀에 말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또한 그 눈앞에서 다시는 웃어 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애타게 그리워도, 죽은 사람의 얼굴을 산 사람은 다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살아 있고 다른 사람이 죽었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은 그 반대가 됩니다. 호흡이 멎는다고 당장 내 몸에서 나의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호흡이 멎어도 내게는 여전히 얼굴이 있습니다. 내 몸이 관 속에 뉘어지고 관 뚜껑이 닫혀도, 내 얼굴엔 입과 귀 그리고 눈이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호흡이 멎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시체’ 또는 ‘시신’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내 얼굴에 있는 입과 귀와 눈과 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의 그 작동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정지시켜 버립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여러분이 나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유언을 통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의 마음에 새겨주기 원했던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는 보지 못할 ‘내 얼굴을 똑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분도 앞으로 내 얼굴과 같은 얼굴로 살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6절)

바울은 ‘오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냥 ‘오늘’이 아니라 ‘그 오늘이라는 날’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오늘’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자신의 얼굴을 다시는 못 볼 것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는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7절)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모든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에스겔에 나오는 말씀을 바울이 자기에게 적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에스겔 33장(33:2-6)을 보면, 파수꾼이 있는데, 파수꾼이 나팔을 불며 경고를 했는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여 적군이 들이닥쳐서 죽게 되면 무시한 그 사람들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적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들이 죽게 된다면 그 죽음의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옛날에는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파수꾼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산이 거의 없는 중동에서는 저 멀리 지평선에서 모래바람이 일며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것을 발견한 후에도 한참이 걸려야 성까지 오게 됩니다. 며칠씩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적을 발견한 파수꾼이 즉시 나팔을 불어대면, 성안에 있는 군인들과 백성들은 맞서 싸울 준비를 하거나 도망을 할 여유를 갖게 됩니다.

나팔을 불었는데도 군인들과 백성들이 도망가지 않고 그냥 있다가 다 죽었다면, 그것은 파수꾼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군이 몰려오는 것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망한다면 그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 한 사람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말씀을 맡겨주신 것은, 그 사람을 말씀의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말씀을 전해야 할 책임이 선지자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복음이 있고 자기가 그 복음을 맡은 사람인데, 복음을 전했어도 듣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간다면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가 전하지 않아서 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갔다면 자기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여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복음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는데, 내가 전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내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전했는데도 듣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면 내 책임은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가서 작은 소리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망한대.’라고 하면 안 되고, 크게 잘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을 생각하며 바울은 자신이 책임을 다했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로 이런 복음의 파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잘 생겼느냐 못 생겼느냐가 아닙니다. 파수꾼의 얼굴입니다. 나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살리고 세우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세상의 욕망과 욕심에 짓눌려서 어그러진 얼의 꼴(얼굴)입니까? 아니면 정말로 내 영혼이 복음에 사로잡힌 얼굴,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입니까?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떤 얼굴로 기억하겠습니까? 또 어떤 얼굴로 기억해주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의 순간은 지금 우리에게 1초 1초 다가오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의 파수꾼으로 오신 주님, 그 주님 안에서 또 우리를 그 복음의 파수꾼으로 부르신 그 얼굴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코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 후회 없는 얼굴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잘했다 칭찬받는 주님의 종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양산중앙교회 : 담임목사 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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