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 [성경난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시점은 언제인가? 222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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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에 내 이름이 (빌 1:1-12, 4:1-3, 계 20:12-15) – 구속사시리즈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각자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 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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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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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 되었나요 – 한밭교회

[설교요약] <요한계시록 강해 24>(계 20:1-15)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나요? … 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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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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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2014 –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17-20]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믿는 그 믿음을 통하여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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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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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마 07:21-23, 눅 10 …

천국에 갈 때에도 무슨 직분을 가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 들어갑니다. 2)상을 받게 되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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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책… – 성경의 진리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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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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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 : 17 – 20) –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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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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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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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난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시점은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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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 Author: 여호와로이2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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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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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됨을 기뻐하라

제목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됨을 기뻐하라

본문 누가복음 10:17-20

지난 주 화요일 밀정이란 방송을 통해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의 정보를 일본에게 제공해준 밀정혐의가 있는 895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너무도 불명예스러운 사람들이다. 반면 동료들로부터 배신당한 아픔과 대적자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버린 명예로운 사람들의 이름도 있다. 마지막 심판 날에도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별될 것이다. 하늘나라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자들과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다.

1. 하늘에 기록된 이름을 인하여 기뻐하라

성경에는 생명책에 관한 가르침이 있다. 계시록 3:5 13:8 17:8 20:12-15 21:27 빌4:2-4 등이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책이 있음을 암시하셨다. 17절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우리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 18-20절이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 귀신을 제어하는 일이 큰일이다. 그리고 기쁘게 여길 만하고 자랑할 만하다. 놀라운 은혜의 역사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쁘게 여길 일이 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핵심을 찌르는 말씀이다. 가장 기쁘게 여길 일은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기록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계21:27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천국은 어떤 곳인가? 계21:9-26 새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묘사하고 있다. 11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8절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며 둘째는 남보석 셋째는 옥수, 넷째는 녹보석….. 21절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이렇게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할 수 있다.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된 것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면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빌4:2~4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권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실을 깨우쳐줌으로 분쟁을 수습하고 있다. 생명책에 기록됨이 분명하면 아무 것도 문제가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도 귀신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도 통쾌한 일이지만 하늘에 너의 이름이 기록된 것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2. 그러면 어떻게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하늘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을까? 부모에게서 태어나면 호적에 올린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면 생명책에 기록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해야 한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 되고, 그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된다. 우리의 선한 행위를 가지고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다. 독립운동 했다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부자라고 해서 기록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비록 부족함이 있고 허물도 있고 똑똑하지 못하고 배움이 적고 가진 것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으면 확실하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다. 예수님을 믿음이 생명 얻음이다. 생명을 얻은 자는 생명책에 기록한다. 죄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깨끗케 하신다. 그리고 영생을 주신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일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계20:1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음을 말한다. 둘째 사망이 없다는 것은 심판이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생명을 얻고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가?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믿는 자라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줄 믿기 바란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고백할 때 생명을 얻고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함이 중요하다. 우리가 숨 쉬는 만큼 매일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라. 주 예수님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아멘 그렇다면 여러분의 이름이 확실하게 천국에 기록된 것을 믿기 바란다.

3. 다른 사람의 이름도 기록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딤전2:4) 마18:13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은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생명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이 한 명도 없기를 바라신다. 우리도 그런 소원을 품어야 한다.

아직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도 함께 기록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했다.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심판이다. 불 못에 들어가게 된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해도 심판 날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 영원한 지옥 불에서 천년만년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이 지옥은 어떤 곳인가.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계시록에 보면 “유황불 붙는 못”(계19:20) 힌놈의 골짜기 곧 게헨나라고 한다. 그곳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 있다. 쓰레기장이어서 더럽고 냄새가 난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는 곳이며, 기쁨도 없고, 소망도 없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는 말씀 그대로 저주를 받은 곳이다. 큰 구렁이 있어 다시는 천국으로 건너올 수도 없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분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방관할 수 없다. 그들은 구원해야 한다.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준비는 하나님께서 다 해두셨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내게 오는 자를 내어 쫓지 않으실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다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초청하신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알고 믿고 있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던 안드레처럼 말이다. 그리고 생명책에 기록될 후보자 이름을 기록하여 하나님께 올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평소 마음에 둔 사람, 가장 가까운 사람, 내게 고맙게 하는 사람, 함께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서 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자. 내가 적은 사람이 하늘에 기록된 이름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하고 기도하기 바란다.

결론

세상 어떤 것을 얻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나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진 자를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주심을 감사하고 기뻐하기 바란다.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사람까지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생명책에 내 이름이 (빌 1:1-12, 4:1-3, 계 20:12-15)

최후심판 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불못에 던지움을 당하기 때문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만큼 큰 축복은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와 같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기까지 참 목자로서 그들에게 쏟은 사도 바울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순종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이름도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는 큰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각자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하신 면류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에서도 경기 결과에 따라 다양한 메달이 있듯이, 성도들 또한 각자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양한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약 1:12에서는 시험을 참아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자에게는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벧전 5:4에는 ‘영광의 면류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살전 2:19에는 ‘자랑의 면류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딤후 4:8에서는 ‘의의 면류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입니다. 한마디로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을 뜻합니다. 이는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끝까지 용서를 간구함으로써 선으로 모든 악과 싸워 승리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받은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면류관입니다.

고전 9:25에서는 ‘썩을 면류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면류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사 28:5에서는 남은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 24:13 말씀대로 끝까지 견딤으로 예비된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역사가 있어야겠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참된 사랑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의 관계를 통해서 빌립보 교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참 목자 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도록 생명을 바쳐 목회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하나님께 호소했던 모세와 같이,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또한 참 양된 자로서 목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피차에 다투고 등지고 살았으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바울의 권면의 편지를 보고 하나가 되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과 함께 멍에를 메고 복음을 위해 힘쓰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자신들 때문임을 깨닫고, 어려운 생활 가운데 십시일반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정성스럽게 예물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편에 전달하였고, 이것이 또한 사도 바울뿐 아니라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 4:10-18).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을 위해 그와 함께 멍에를 메고 힘쓰는 교인들이었기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빌 4:1).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눅 10:17-20 말씀에서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기사이적을 행한 후 기뻐하며 돌아와서 보고하는 70문도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오직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믿고 그로 인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빌 3:20)는 말씀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부여하신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이 바로 그 나라의 주인 되십니다.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됐다는 것은 ‘구원의 옷을 입고 긍휼의 반열에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139:16에서는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이미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믿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양육하되 참 사랑과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눈물로 양육한 결과, 성도들의 이름이 벌써 생명책에 기록돼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빌립보 교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기쁨의 열매가 되어야겠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 되었나요

[설교요약]

<요한계시록 강해 24>

(계 20:1-15)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나요?

1. 들어가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천년왕국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2-7절). 우리는 이를 억지로 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벧후 1:20-21).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합당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해석할 때 먼저. “성령님.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제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십니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분명한 뜻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이 비록 난해한 구절일지라도 주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2. 종말의 때에 성도가 가져야 할 믿음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는 악한 세력들이 성도와 교회를 파괴하려고 온갖 간계로 위협하고 유혹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간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악한 세력들의 간계가 왜 성공을 거두지 못할까요??

왜냐하면 첫째. 사탄이 쇠사슬로 결박당했기 때문입니다(1절). 즉 하나님께서 사탄의 능력이나 활동을 제한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도와 교회가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사탄이 사로잡고 있던 영역들이 차례로 하나님의 나라에 복속되기 때문입니다(2절). 셋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을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참고 요일 3:8; 골 2:15).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가 부활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부어주셨는데 그 성령님의 권능을 받은 성도와 교회는 종말의 때에 예수님과 함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복음을 들고 전진하면 사탄은 자기의 영토를 내놓고 도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기간이 천년왕국의 기간인데 상당히 긴 기간으로서 지금 우리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3. 성도가 붙잡아야 할 메시지

1)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첫째 메시지는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와 교회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참고 벧전 5:9; 약 4:7). 그래서 교회의 승리가 보장된 이 기간 동안에 우리는 마귀와 싸워 승리를 쟁취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승리하는 이 기간이 성도와 교회에게 전혀 고통이 없는 지상 낙원의 시대는 아닙니다. 여전히 성도와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핍박과 환난을 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순교까지 불사해야 합니다.

2)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래서 복음이 승리하는 기간 동안 환난 받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둘째 메시지가 있습니다(4-6절). 그것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다가 죽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최고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은 모든 성도들은 하늘 보좌에 앉아서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4절). 그 기간이 천 년입니다. 즉 천국에서 그들의 영혼이 살아서 천 년 동안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부활입니다(5절). 성도는 죽어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6절). 그래서 이들은 둘째 사망(불신자들이 지옥에 떨어져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받는 것)에 이르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부활입니다.

이 같은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멋진 승리를 세상에 자랑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종말의 마지막 시점에 사탄을 잠깐 풀어줍니다(7절). 그래서 풀려난 사탄이 마지막 세계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예언한 아마겟돈 전쟁입니다(8절; 참고 겔 38장). 이 전쟁은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이 총집결하여 일으키는 최후의 영적 전투입니다. 이로써 성도와 교회는 큰 곤경을 당할 것이지만 이미 죽기로 각오한 성도들은 의연한 자세로 대처할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환난의 날을 감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재림하셔서 악한 자들을 모두 징벌하실 것입니다(9-10. 14-15절). 그래서 그들이 불 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형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맞을 최후의 운명입니다.

3)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점검하라.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크고 흰 보좌(재판석)에 앉아 온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11절). 신자와 불신자 할 것 없이 모두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12절). 심판의 정당한 근거가 기록된 책들을 주께서 갖고 계십니다. 그 책들의 이름은 이른 바 ‘행위의 책’입니다. 이 책에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서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공정한 심판을 따라 불신자들이 둘째 사망인 불못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형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다른 책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셋째 메시지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신하십니까? 우리는 다음의 사실로부터 우리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입니다(요일 1:9-10). 여러분이 아직까지 한 번도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진실되게 회개한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의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회개한 자는 더 이상 행위를 따라 심판 받지 않습니다.

둘째.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하는 자입니다(마 10:32-33). 만약 여러분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다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죄와 죽음 가운데서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자랑하십니까?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합니까?

셋째.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마귀와 죽음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삽니다.

넷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영원한 승리를 확신하며 삽니다. 주님이 갖고 계시는 생명책이 성도의 영원한 호적입니다. 그 하늘 명부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한 우리는 최후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영원히 보호하십니다(요 10:28-29).

4. 결론

성도 여러분.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 즉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천국 시민들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복된 자들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최고의 복을 누릴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슨 일을 당해도 우울하거나 절망할 수 없습니다. 최후 승리의 날을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천국의 백성답게 힘차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종말의 때에 성도와 교회가 신뢰해야 하는 믿음은 무엇인지 말해보세요.

2.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말해보세요.

3. 자신은 정말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면서. 목원들과 함께 나누어봅시다.

[설교전문]

<요한계시록 강해 24>

(계 20:1-15)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나요?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을 가끔씩 만납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소위 천년왕국설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7절까지 읽어보면 매절마다 ‘천 년’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두 여섯 번 등장합니다. 특히 4절과 6절에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구절 때문에 천년왕국이라고 부릅니다.

천년왕국설 가운데 대표적으로 세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 전천년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즉시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되는데 그 왕국이 문자적으로 천 년 동안 지속된다는 학설이다.

 후천년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 지상에 문자적으로 천 년 동안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된다는 학설이다.

 무천년설: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된다는 학설인데 여기서 천 년이란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 상징적인 기간을 뜻한다.

각 학설마다 나름대로의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 가지 학설 중에 어느 하나만 진리라고 단정하기가 곤란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 우선 겸손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경 해석의 원리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벧후 1:20-21)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3:15-16) 『[15]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다시 말해서 성경 가운데 난해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억지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 난해한 구절들도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쓰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항상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합당한 태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읽으면 난해한 구절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단 난해한 구절만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차례로 읽거나 어느 한 부분을 가지고 QT를 할 때도 먼저 ‘성령님.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제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십니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읽으면 성경 말씀이 생각보다는 쉽게 이해될 것이며 그 가운데서 오늘 적용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자신의 분명한 뜻을 가르쳐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계시록 17장부터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망하게 하는 악한 세력들이 영원히 멸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 17-18장: 바벨론으로 묘사된 세상과 세속문화의 패망

 19장: 종말에 최종적으로 등장할 적그리스도(사악한 정치권력)와 거짓 선지자(사악한 종교권력)의 패망

오늘 본문인 20장에 와서는 모든 악의 근원인 사탄이 패망합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력들의 패망이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차례로 일어나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종말에 관한 여러 성경구절들과 요한계시록을 연구해보면 사악한 세력들의 패망이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이유는 이들의 패망이 모두 예수님의 재림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았듯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는 악한 세력들이 성도와 교회를 파괴하려고 온갖 간계로 위협하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간계가 최절정에 달했을 때 홀연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그들을 일시에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세력들의 간계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교묘하고 사악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간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사탄의 간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 1절: 무저갱(지옥)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진 천사가 등장합니다.

 2절: 그 천사가 사탄(용. 옛 뱀. 마귀)을 잡아서 결박합니다.

 3절: 사탄을 무저갱(지옥)에 던져 넣어 천 년 동안 감금합니다. 천 년이 차면 사탄이 반드시 잠깐 풀려날 것입니다.

사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쇠사슬로 결박했다는 것은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능력이나 활동을 제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는 사탄의 간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활동을 제한하는 기간이 천 년인데 이 기간도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낫습니다. 복음주의 성경학자들 가운데 이 천 년을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기간으로 보는 자들이 많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도와 교회가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사탄이 사로잡고 있던 영역들이 차례로 하나님의 나라에 복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천 년의 기간은 신약의 교회시대를 통칭하는 기간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물론 사탄이 시대시대마다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동원하여 자기 수중에 있는 영역들과 사람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갖가지 간계를 부리지만 복음으로 무장한 성도들과 교회에게 이미 포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마치 튼튼한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포위되어 일주일 만에 무너진 것처럼 악한 세력들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해오던 세상 나라들이 전진하는 하나님의 군사들에게 하나 둘씩 패망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지금 복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데 이 시대를 복음이 땅 끝까지 퍼지는 복음의 시대. 선교 시대. 교회 시대. 성령의 시대. 은혜의 때. 구원의 때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말씀 드렸듯이 이 천 년의 기간이 문자적으로 천 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진하는 시기요 교회가 부흥하는 신약의 전시대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하기에 성도와 교회는 사탄의 간계를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벧전 5:8에서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마귀의 능력과 활동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마귀를 보면 그 마귀가 지금 쇠사슬에 포박되어 있습니다. 즉 마귀가 하나님에 의해 그 활동이 억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전 5:9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와 교회를 향해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하나님의 군사들인 성도와 교회에게 강하게 명령했습니다.

성경은 마귀를 두려워해야 할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마귀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귀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에서 마귀를 두려워하라고 한 적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하나님)를 두려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 사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탄(마귀)이 아무리 간계를 꾸미고 우리를 향해 우는 사자처럼 덤벼들어도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을 결코 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탄의 권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탄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만 제한적인 권세를 일시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금식하신 다음 가장 연약한 때에도 사탄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공사역 기간 동안에는 많은 귀신(사탄의 졸개)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사탄을 못박으셨습니다.

(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여기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사악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을 뜻합니다. 즉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마귀는 물론 이들도 함께 못박혀 그 권세가 박탈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가 부활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부어주셨는데 그 성령님의 권능을 받은 성도와 교회는 종말의 때에 예수님과 함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복음을 들고 전진하면 사탄은 자기의 영토를 내놓고 도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교회의 승리가 지구촌에서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이 기간이 천년왕국의 기간인데 상당히 긴 기간으로서 지금 우리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첫째 메시지는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교회의 승리가 보장된 이 기간 동안에 우리는 마귀와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운동이며 선교 운동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영혼들을 마귀에게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복속시키는 그 위대한 일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복음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승리하는 이 기간이 성도와 교회에게 전혀 고통이 없는 지상 낙원의 시대는 아닙니다. 여전히 성도와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핍박과 환난을 받아야 합니다. 심지어 순교까지 불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4절에서 6절까지를 보면 복음이 승리하는 기간 동안 환난 받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둘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복음을 위해 살다가 죽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최고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세요. 사도 요한이 하늘의 보좌들을 보았는데 그 보좌들에 앉아있는 자들이 심판의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순교했거나 우상숭배를 거절한 성도들입니다. 즉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은 모든 성도들인데 그들이 하늘 보좌에 앉아서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기 기간이 천 년입니다. 즉 천국에서 그들의 영혼이 살아서 천 년 동안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5절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죽어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였던 D L Moody가 청중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어느 날 아침에 신문을 보고 나 Moody가 죽었다는 보도를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보도를 여러분들이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저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게 살아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사후 상태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사후에 티끌로 돌아가 부패한다. 그러나 성도의 영혼은 즉시 천국에 들어간다. 이때 성도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해지며 영광스럽게 된다. 그 천국에서 성도의 영혼이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몸이 온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6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사망이란 부활한 불신자들이 지옥에 떨어져 하나님의 최종적인 진노의 심판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대신에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부활입니다.

 첫째 부활: 영혼의 영광스러운 부활

 둘째 부활: 몸의 영광스러운 부활

6절 하반절에서는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살아서 천 년 동안 천국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며 지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제사장으로 봉사한다는 뜻은 아직 지상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과 교회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의로운 심판을 탄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죽음은 단지 천국으로 옮겨가는 통과의례일 따름입니다. 성도의 육체적인 죽음은 첫째 부활을 통과하는 관문이며 그리던 주님을 대면하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 외에 다른 길이 없을 때는 구차하게 살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그냥 생명을 내어놓습니다. 이유는 죽는 순간에 즉시 자기의 영혼이 승리와 부활과 영광의 나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확신을 가진 성도들의 멋진 승리를 세상에 자랑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종말의 마지막 시점에 사탄을 잠깐 풀어줍니다(7절). 그래서 풀려난 사탄이 마지막 세계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예언한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는 곡과 마곡에 의해 땅의 사방 백성들이 이 세계 전쟁에 참전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겔 38장 참고).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군사적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이 총집결하여 일으키는 최후의 영적 전투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로써 성도와 교회는 큰 곤경을 당할 것이지만 이미 죽기로 각오한 성도들은 의연한 자세로 대처할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환난의 날을 감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갑자기 재림하셔서 악한 자들을 모두 징벌하실 것입니다(9-10. 14-15절). 그래서 그들이 불못에 던져져 영원토록 형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맞을 최후의 운명입니다.

11절에 보면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크고 흰 보좌(재판석)에 앉아 온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광경을 묘사합니다. 12절에서는 신자와 불신자 할 것 없이 모두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아무렇게나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정당한 근거가 기록된 책들을 주께서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책들의 이름이 이른 바 ‘행위의 책’입니다. 이 책에 모든 사람들의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서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공정한 심판을 따라 불신자들이 둘째 사망인 불못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형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다른 책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큰 상을 받습니다. 이유는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셋째 메시지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는지 스스로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러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누구일까요?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요일 1:9-10)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러분이 아직까지 한 번도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진실되게 회개한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대신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죄를 예수님께 회개한 자는 더 이상 행위를 따라 심판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회개함으로써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확실합니다.

2)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하는 자입니다.

(마 10:32-3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만약 여러분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계속 숨기고 있다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의심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주 중요한 시험에 합격하여 여러분의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올랐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을 자랑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 때문에 죄와 죽음 가운데서 여러분이 구원 받았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자랑하십니까?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합니까? 하늘 백성이 된 것을 기뻐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확실합니다.

3)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대로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마귀와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마을로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결과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와 그 놀라운 성과들을 자랑스럽게 보고했습니다. “주여. 주님의 이름 앞에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눅 10:18-20) 『[18]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성도 여러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사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이나 지옥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4)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영원한 승리를 확신하며 삽니다.

주님이 갖고 계시는 생명책이 성도의 영원한 호적입니다. 그 하늘 명부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한 우리는 최후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영원히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요 10:28-29)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성도 여러분.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즉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천국 시민들은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복된 자들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 최고의 복을 누릴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슨 일을 당해도 우울하거나 절망할 수 없습니다. 최고로 행복한 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말연시입니다. 최후 승리의 날을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천국의 백성답게 힘차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 찬송가 180장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17-20]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기 주일마다 우리는 제단에 있는 초를 하나씩 켜면서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신 분인지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첫번째 주일에는 소망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주일에는 평화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오늘 밝혀진 세번째 초는 기쁨을 의미하는 촛불입니다. 사람들마다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기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수고하고 투자를 합니다. 취미생활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좋은 물건을 사기도 합니다. 자신의 성향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중국에는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술을 마시고, 일주일이 행복하려면 돼지를 잡고, 한 달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평생이 행복하려면 정원사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격언이 영국에도 있습니다. “하루를 행복하려면 이발소를 가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일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짓고, 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직한 인간이 되어라” 생각보다 행복하려고 투자하는 것에 비해서 그 행복의 시간은 짧다고 여겨집니다. 결혼이 고작 일주일이나 한 달의 행복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참 충격적이네요. 사람들이 이러한 막대한 투자를 통해 행복의 순간을 맛보려고 하는데, 그 기뻐하는 순간은 잠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잠깐 기뻐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라”고 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빌립보서 4:4절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준으로 우리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삶을 본다면, 예수님은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말하기가 힘이 듭니다. 예수님은 사실 결혼의 달콤한 기쁨도 경험하지 못한 총각이셨습니다. 더군다나 집을 사서 행복해 하신 경험도 없으십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셨습니다. 세상에 가치로 따진다면 예수님처럼 재미없게 사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자 하는 기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안에서 누리는 항상 기쁨은 감정적으로 항상 기뻐하는 그러한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슬퍼하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채찍을 만들어 쫓아내시면서 화를 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실 때에는 하늘을 바라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면서 절망해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쁜 일도 있고, 화낼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깨닫는 것은 희로애락의 순간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만한 내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기쁜 모습을 하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며칠 전에 제자 칠십명을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각 마을로 둘씩 짝지어서 보내셨는데, 그들이 그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기쁨 충만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쁨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된 성도들이 주안에서 누릴 수 있는 변함없는 기쁨은 무엇인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기쁨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감당할 권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받는 기쁨입니다. 사역의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아무리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 땅을 떠나게 되면 그만입니다. 그 삶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수고하고 애쓴 삶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주님이 계시고, 우리는 그 앞에서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보고할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시기 전에,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각 마을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 길에서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병도 고치고 심지어 귀신도 쫓아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이제 예수님 앞에 다시 돌아 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주님의 일들을 하면서 경험했던 놀라운 경험들을 예수님 앞에 나와서 보고하면서 기뻐했던 것입니다. 흥분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쁨은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보고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주신 명령대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해 지며, 또한 죽은 영혼들을 구원할 전도의 사명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사역들을 보고하면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그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이 땅의 사람들과 만나서 기뻐하고 즐거웠는데, 이제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어느 것 하나 주님께서 기뻐할 만한 내용이 없고, 걱정만 된다면 주안에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쁨은,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보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돌아와서 최고로 기뻐하며 보고한 내용은 그들에게 믿음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나아가니까 귀신들도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그 악하고 더러운 존재가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권세를 주시고,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싸워서 승리의 기쁨을 누릴 만한 위치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에게 굴복해야 할 형편이지, 누구를 굴복시켜서 항복을 받아낼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적인 권세를 주셔서, 악한 귀신의 권세를 이길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9절에 보면,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누렸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였습니다. 영적으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는 영적인 권세 안에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누리게 되는 기쁨은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이 있고, 또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영적인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맡겨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쉬운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명 감당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성향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면서 얻는 기쁨을 많이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지 하나님의 일들을 하는 것에 대해서 소중하고 기쁘게 여겼습니다. 좀 불편하고 힘들어도 주님의 맡겨주신 일들을 힘쓰는 것에 대해서 기쁘게 여겼고, 또한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영적인 권세를 사모하며, 그것을 누리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수고하기 보다는 편안하게 잘 짜여진 환경에서 잘 정착하고 싶어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복이고 기쁨이지만,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수고하고 땀 흘렸던 사역을 보고하는 것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권세가 또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쁨은, 예수를 믿는 자들의 이름이 구원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전도하러 갔을 때에,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이 하는 사역은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사단의 하늘에서 떨어질 정도로, 악한 권세에 맞서는 강력한 힘이 그들의 전도 사역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영적인 권세로 귀신을 항복케 한 것이 기뻐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더 기뻐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여라개의 책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명책입니다. 그 생명책에 기록될 때에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15절에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며 영적인 권세를 체험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귀신을 좇아내라고 주신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주신 유일한 이름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영적인 기적을 체험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믿는 그 믿음을 통하여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자신의 이름이 어디에 새겨지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을 합니까? 좋은 대학의 졸업장이나 좋은 회사의 명단에 들어가면 참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요즘과 같이 취직하기가 쉽지 않은 때에, 자신의 이름이 합격 명단에 들어간다면 정말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서 우리가 구원함을 받고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것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물질로, 명예와 권세로는 하늘나라의 조그마한 구석도 차지할 수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 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장수하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욱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을 채워주시려고 오셨다거나, 감정적인 기쁨의 상태를 유지시켜 주시려고 오셨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일들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음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어서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때로 주님의 일들을 감당하는데 결코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어하는 순간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는 기쁨으로 변하고 상급이 됨으로 인하여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다가 핍박을 당했던 선지자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풍요하고 잘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뻐할 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사명을 주신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상이 크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고 힘이 들수록 더욱 상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음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가기 위해 애를 써도 하늘나라 문턱에도 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고, 그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림절 기간에 예수님을 기억하며 회복해야 할 기쁨인 것입니다. 이 대림절을 지내면서,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쁨을 삼으려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기쁘게 여기며, 그 사명을 감당할 만한 영적인 권세를 주심을 감사드리며, 우리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그 날에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설 것을 기대하며 기뻐할 수 있는 기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마 07:21-23, 눅 10,17-28)

오늘의 말씀의 개요를 말씀드리면 마태복음 7:21이하에서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서 “주여 주여 주의 이름을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쫑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 하였나이다”하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듣고 계시다가 “내가 도 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10:17이하에서는 70인의 전도대원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 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네 이름이 하늘에 기 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의 성경 마태복음 7:21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세계적으로 주여! 주 여! 잘하는 사람은 우리 한국 성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호세아서 8:2에 보면 율법을 어긴 자라도 주를 안다고 했습니다. 또 성경은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0:13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 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어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 르리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을 의미없이 부른 것이 아니요, 잘 믿고서 부르게 된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주여! 주여! 하며 부르는 사람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1)주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대신 죽어주신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 되시고 나를 죄에서 피로 값주고 사주신 중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지옥형벌에서 건저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믿거나 입으로만 믿거나 입으로만 시인하는 것이 아니요 마음으로 믿고 심장 깊은 곳에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2)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에서 주님은 마지막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라가라”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주여 주여 불 러야지 늘 주님의 뜻을 어기고 불순종하면서 주여!를 백번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3)청지기의식이 철저해야 합니다. 내것은 내것이요 주님의 것도 내것이라 고 생각하면서 주여 주여를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학개서 2:8에 서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로 “금도 내것이요 은도 내것이다”고 했습니 다. 누가복음 12″20에서는 많이 가졌다고 교만한 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2.어느 직분을 맡았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22절에서 말씀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했습니다. 여기서 ‘노릇’이라고 하는 말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적용시켜 보면 “주여! 주여! 라는 말이 될수 있습니다. 또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장로 노릇하며” 내가 주의 이름으로 목사 노릇 하며 “또는 “주의 이름으로 권사노룻하며” “주의 이름으로 집사 노릇하며” 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참다운 목사가 되어야지 목사노룻하는 것은 슬 픈 일입니다. 참다운 장로가 되어야지 장로노릇하는 것은 슬픈일입니다.

“노릇”이 무엇입니까 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광대”노릇 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리도 양의 가족을 입고 양의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 다. 성경적으로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 노릇을 하다가 멸 망당했습니다. 어떤 직분을 맡아서 노릇을 하는 사람보다는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쫑아낸다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또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고 했습니 다. 아무리 능력을 받아서 병고치는 은사가 있고 또 기적을 많이 행하고 다녔다고 할지라도 구원 얻을 믿음이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사단도 기적을 베풀어서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3:13에서는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 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하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도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자 하더라”고 했습니다.

3.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 다. 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1)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5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 을 생명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계에서 북한땅 다음으로 가기 어려운 곳이 미국땅입니다. 설령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하였다 할지라도 출입국 관리 심사대에서 줄을 서서 입국 수속을 밟아야 합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균등한 심사를 받게 됩니 다. 어떤 신분증보다도 오직 미국 대사관에서 발행하는 비자를 내밀고 신 분조회가 끝나야만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갈 때에도 무슨 직분을 가져야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야 들어갑니다.

2)상을 받게 되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말라기 3;16이하에서 그 이름을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여호와 앞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했다가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천 국에는 범죄 사실이 기록된 사람은 도말되어지지 아니한 사람은 결코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만약 그곳에 상받을 자의 명단에 들어있는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고 시들지 않는 면류관도 씌워질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에 서 주님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기뻐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이름이 하 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궁극적인 기쁨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논리적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은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실패를 하여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가는 것 이 최고의 복락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불만족하고 모든 것이 부족해 도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으면 감사하고 만족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

생명책…

생명책은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특정 장소나 국가에 법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기록한 두꺼운 공문서이다. 주민등록번호, 여권 번호 또는 공적인 모든 거래에 필요한 VAT 번호와 같은 번호는 관련 공문서에 기록으로 남는다. 마지막에 한 국가의 국민으로 우리의 존재유무에 관계 없이 우리 이름은 그 기록에 남아있게 된다.

지상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왕국에서도 일어난다. 즉, 하나님 왕국의 시민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서 이 책은 생명책으로 부른다.

요한계시록 20: 12, 15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다니엘 12:1-2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빌립보서 4:2-3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구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구청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우리 집이 등록되었는지, 결혼 신고가 되었는지 등에 대해 아주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그렇다면 생명책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여러분의 이름이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3:16-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책이 펼쳐지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우리 이름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말한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보다 더 확실한 설명이 더 필요한가? 우리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하면, 우리가 고백한 대로 삶에 적용하고(야고보서 2:14) 우리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며, 이를 믿지 않으면 우리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과 이 세상에 사는 모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앞서 읽었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라는 구절을 기억하라. 하나님 말씀의 다른 구절들도 읽어보자.

디모데전서 2: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여러분도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믿고 하나님께서 그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리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사실을 믿는가? 예전에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한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물었다.

사도행전 16:30-32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간수는 믿었다. 여러분도 믿는가?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후서 3:9-10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릴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주의 날은 결국 온다. 그 날은 밤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주의 날을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 생명책을 열어도 되도록 준비해 두었는가? 그곳에 가서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없으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고린도후서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자,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Tassos Kioulachoglou)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 : 17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 10 : 17 – 20)

프랑스 사이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랜드 암스트롱이라고 하는 청년입니다. 경기에는 언제나 그 누군가가 금메달을 얻겠지요마는 이 이야기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3기 암 환자로서 많은 고생을 하면서 이 엄청난 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25세에 고환암이라고 하는 사형선고같은 진단을 받았습니다. 생존 가능성까지도 희박했습니다. 폐와 뇌에까지 전이되어서 너무나 쑤시고 아파서 식사도 잘 못하고 신문은 물론 텔레비젼도 마음대로 볼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머리가 터지게 아프고 괴로웠답니다.

그러나 그는 사이클 경기에 나갔습니다. 물론 실패했죠.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My son, you never quit” 내 아들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권면했습니다. 열심히 사이클을 훈련을 했습니다.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있었던 세계선수권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했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 왕을 알현하는 그런 기쁨도, 영광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너무 힘이 들어서 선수생활을 접어 두었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는데 자기가 가는 길에 환한 빛이 나타나면서 길에 글이 쓰여졌습니다. 그 글은 역시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입니다. “My son, never quit.”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뒤에 이어서 “장애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되라.” 장애를 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되라.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시 자전거를 열심히 탔습니다.

그리고 1999년 프랑스에서 금메달을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환영했고 그리고 2001년 5월호 가이드포스트에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발표해서 모두가 다 같이, 세계사람이 축하했습니다마는 본인은 1등이냐 2등이냐 금메달이냐 그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 그는 암투병에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 불행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그 사실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만이 가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만이 가지는 나만이 아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참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흔히들 ‘참 기쁨’ 하면 소유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무언가를 많이 가졌고 많이 알고……. 소유가 나를 정말 기쁘게 합니까? 그렇게도 소중한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건 근심만 더할 따름입니다. 또한 충족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가지는 욕구 충족,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욕구 충족할때에 그 충족되는 기쁨을 누립니다마는 그야말로 허무한 것이올시다. 또 하나는 정신적으로 성취감이라는 게 있습니다. 뭐 하나를 만들어 낼 때, 뭐 하나를 이루었을 때, 스스로 성취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그것 또한 무상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말씀은 성경이 그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들을 열거해보면 여러 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는 농부의 추수의 기쁨을 대표적인 기쁨으로 말합니다. 한 여름동안 땀 흘려 일하고 가을에 추수할 때, 그 추수할때는 남의 밭에 가서 추수하면서도 축제의 기분입니다. 어쨌든 가을 추수는 온 동네가 그렇게 큰 축제처럼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땀 흘려 얻은 결과를 놓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런 순간입니다. 농부의 추수의 기쁨, 그것이 대표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데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에다 가득 채워놓고 한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쓸 것이 있으니깐 오랫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 사람은 그것 밖에 몰라요.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런 수준 이하의 동물적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마는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전쟁 상황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전쟁이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살아 남기가 어려워요. 많이 죽고 그런 것입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살았어요, 승리했어요, 이겼어요, 그리고 전리품을 나누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누리는 극치적인 기쁨에 하나다. 그래서 전리품을, 탈취물을 나누는 기쁨, 이렇게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쁨으로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기쁨. 의를 위하여 고난당할 때, 뭐 이런 비방 저런 오해 이런 많은 핍박이 있어도 잘 참고 견딥니다. 말 없이 견딜 때 나만이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나만이 누리는 신비로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말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의 기쁨,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기쁨은 또 다른 의미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파송해서 주님의 역사를 대행하려고 했던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병고치는 능력,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주어서 파송해서 두사람 두사람씩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런 때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은 70명 정도입니다. 좀 더 확대해서 70명을 보냈습니다.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고 병자는 고치고 귀신은 내쫓고 능력을 나타내면서 역사하라” 그랬어요. 주님이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귀신보고 “나가라!” 그러니까 다 나가주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자기들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이런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자기들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이 쫒겨나고 희한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돌아와서 지금 보고대회하는 것입니다. 그 성과를 놓고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희한한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 일을 자랑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면서 “그거 별로 기뻐할거 없네. 참으로 기뻐할 것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 외에는 그리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주 신중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인의 가치평가 기준이 몇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애리히 프롬의 말입니다. The Revolution of Hope 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가치 기준은 첫째, 시장성이라는 거죠. 상품화되고 있다는 거죠. 목적은 돈입니다. 그래서 물건만 시장성이 있는게 아니라 상품화 되는 것이 아니고 기술도 지식도 노력도 젊음도 정보도 다 돈으로 환산합니다. 다 상품화 되고 있다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인생을 가장 유리한데 투자하겠다고 듭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 투자하고 있습니다. 궁극 목적은 무엇입니까? 돈이었더라구요. 자본주의 사랑. 돈에 미쳐가지고 거기다가 몽땅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일은 없어요. 그래서 시장성 혹은 상품화 이것이 현대인의 가치관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적응성입니다. 얼마나 이 사회와 공동체 속에 내가 적응되고 있느냐. 적용되고 있느냐하는 평가에 기준하는 것입니다. 창조나 자율이 아니라 얼마나 쓰여지느냐 얼마나 바로 쓰여지느냐 거기에 있다는 것이죠. 요새 우리 아이들이 수능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아이는 자기가 본래 생각했던 기준이 있어요. 이만큼 성적이 나올 거라고 생각을 하고 이 재수생이 일년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스스로 평가해보니까 생각했던 거 보다 20점이 떨어졌어요. 요 20점 떨어졌다고 해서 아파트에 올라가서 투신자살했습니다. 아직 발표도 안 나왔는데 왜 이랬을 것 같습니까? 문제는 사회와 부모님의 교육에 문제가 있어요. 인생을 질적으로 인도하지 않고 양적으로 인도했기 때문이요. 그래서 보세요. 옛날 어른들은 가르킬 때 “착한사람이 되라. 정직한 사람이 되라” 이랬어요. 그 두마디 밖에 없었어요. 착한 사람이 되라. 요새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 유능한 사람이 되라.” 유능하지 못하니까 죽어야지. 않그렇습니까? 아무리 봐도 유능하지 못해. 그래 우리 어머니들이 참 조심해야 됩니다. 그저 유능한 사람이 되라, 까지만 말해도 좋은데 못할바엔 죽어라, 그러니까 죽지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유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사회에 적용되는 그 가치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 유능해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 교인 가운데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주 일류대학을 나온 분이 고등고시 시험을 보다가 몇번 보고도 잘안되서 국민학교 선생을 했어요. 그렇게 지내는 분이 있어요. 아이가 둘 있는데 국민학교 지금 1학년, 3학년인데 아 전부 100점 맞아야 되요. 99점만 맞아도 회초리를 들고 때리는 거예요. “그것도 틀렸냐!” 또 때려요. 그리고 하는 그 다음 말은 “나는 너희 때 100점만 맞았다” 이러고서 때렸다구요. 어머니가 말리면은 “당신은 삼류대학을 나와가지고 워낙 무식하니까. 난 어디가서 당신 내 아내가 대학 나왔다는 말도 못해요 챙피해서.” 아, 이러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머니가 아무말도 못하지. 또 어느날도 또 90점 맞았다고 때리는거야. 그러니까 애가 “다음에는 꼭 100점 맞을께요” 하고 우는 겁니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어머니가 그만 이성을 잃었어요. 벌떡 나와가지고 문을 확 열고 “그래 100점 맞은 네가 잘된 게 뭐냐?” 한바탕 내 쐈는데요 벌벌벌벌 떨더랍니다. 새파랗게 돼서 말도 못하고 엉엉 울더랍니다, 남편이. 그 다음부터 안 때린답니다. 여러분 다시 물어보세요. 뭘 했다는 얘기요? 그래 똑똑해서 뭘 한거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하세요.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경쟁성입니다. 아, 경쟁 무섭습니다. 지식에서 경쟁하죠, 체육에서 경쟁하죠, 자본에서 경쟁하죠, 사업에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 이거야. 그 그 싸움이란 정말 처절합니다. 그 경쟁속에 우리는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국엔 궁극적 가치나 절대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말씀하십니다. 귀신이 나갔다고 병자를 고쳤다고 자랑할 거 없다. 왜요? 그 후속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이 있어요. 그 속에는 예수님께서 병고친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됐을까? 뭐 그것에 대한 그저 생각으로 만든 좀 우스꽝스러운 소설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보니까 알콜 중독자가 있더래요. 술이 만취돼가지고 돌아다녀요. “너는 왜 어떻게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알콜중독자가 됬냐” 그러니깐 “내가 본래 절름발이였는데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절름발이 때 내가 거지로 살았는데 하도 오랫동안 거지생활을 해서 뭘 할수 있는 일이 있어야지요. 기술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직업이 없어서 내가 그만 자포자기 해서 알콜중독자가 됬습니다.” 또 가다보니까 창녀가 하나 있더래요. “너는 어떻게 창녀가 됬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나를 귀신 내쫓아서 맑은 정신을 만들어준 건 사실인데 귀신들렸던 사람이라고 누가 거들떠 보질 않아서 아 그만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창녀가 됬습니다.” 아 그거 말이 되더라고요. 또 그런가 하면요 또 한사람은 조폭이 됐어요. 그리고 “넌 어떻게 조폭이 됬냐?”하고 물었더니 “저는 본래 시각장애자였는데 주님께서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건 좋았는데 눈감을 때는 몰랐는데 뜨고 보니까 보기 싫은게 너무 많아요.

세상에 못볼 게 많더라고요. 그래 화가 나서 조폭이 됬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말이 되잖아요. 여러분 가끔 이런 말 들으시죠?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달라 그런다고. 사실이죠, 보따리 있어야 살잖아요? 건져주는 것만 가지고 삽니까? 자, 예수님 많은 병자를 고쳤어요. 많은 좋은 일 했지마는 그거 별 거 아니다. 여러분 또 구제생활 한다죠? 구제, 구제 다합니까? 아무리 구제한들 그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게. 우리가 늘 북한을 위해서 전국 고아들을 지금 5백명을 지금 기르고 있습니다마는 식량은 3천명분을 보냅니다. 3천명의 고아를 지금 먹이고 있는데 그래봤자 나라를 상대로 하는 겁니다. 그렇치 않아요? 그래 3천명 먹인다고 문제가 해결이 되느냐 이거예요. 아 그거 낙심스럽죠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거 뿐입니까.

우리가 한계가 있어요. 우리의 선행이나 봉사라는 것이 사실 생각하면 맹랑한 겁니다. 그러나 의미가 다릅니다. 또 하나는 이런 선한 일이라는 것이 오해 받을 때도 많아요. 무슨 딴 목적이 있지 않나 오해를 당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고 별별 오해와 비난도 있기 마련이에요. 예수님의 선행은 더더욱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래가지고 혁명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냐하는 오해도 사실로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합니다. 오늘 병 낳았다고 뭐 좋은 일 한번 했다고 해서 좋아할거 없네. 자, 성취도 인기도 능력도 자기 과시도 아니요. 오로지 기뻐할 것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하늘나라 사업에 내가 협력을 했어요. 여러분,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아무것도 없답니다. 아무것도 없답니다.

제가 직접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 한사람, 오늘 내일 합니다. 그 순간에 절더러 그러대요. “목사님, 제가 교회 봉사한 게 하나도 없어요.” 너무 마음이 괴로운데 자기 아내보고 “여보, 그 통장에 얼마있소?” “3천만원 있습니다.” 그거 찾아다가 몽땅 갖다 드리라고.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래저래 뭐 장학금이다 뭐다 해서 좋은 일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 사업을 한 일이 없어.”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니까 딱 걸린다는 거예요. 사실이죠.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 그것만을 기뻐해야 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되는 그 일로 인해서 기뻐하라’ 라고 말합니다.

빅토 프랭클(Victor E. Frankl)이라고 하는 심리학자의 The Doctor and the Soul 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에서 인간 실존의 필수조건을 말합니다. 현대인으로서 인간실존의 필수조건 세가지 잘 기억하십시오. 첫째가 Spirituality, 영성입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되요. 이 세대 이 순간만 가지고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영원지향적으로 살 것이고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살아야됩니다. 둘째가 Freedom 입니다. 자, 여러분 내 마음을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얼마나 자유하십니까? 물질로 욕심으로 명예로 시기 질투로 우리 마음은 얼룩져 있어요. 자유가 없어요. 무엇엔가 매여있어요. 게다가 교만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내 영혼이 완전히 자유한 만큼 높은 가치의 생을 사는 것이요.

또 하나는 Responsibility, 책임성있게 살아야 합니다.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도 내가 지고, Responsible member 모든 것에서 책임을 지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야 그것이 실존가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것으로 저것으로 기뻐할 것 없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나님이 나를 쓰셨어요. 하나님이 나를 고용하셨어요. 나를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어요. 그 거룩한 역사에 내가 조금이나마 보태며 살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그걸 기뻐하라 라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 업적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 내 앞에 면류관이 보인다. 그런고로 기뻐한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 줄리아 카메론이라는 사람의 ‘아주 특별한 즐거움’이라는 재미있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말이 있어요. 완벽주의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뭘 완벽하게 하려고 할 때 오히려 더 안되는 것이죠. 전체 시를 망칠 때까지 한 줄을 고치고 또 고치는 사람이 있다. 시 한편을 쓰는데 한 줄을 또 지우고 또 지우고 하루종일 고쳐요. 그림을 그리는데 한 획이 마음에 안들어서 종이가 찢어질 때까지 다시 그려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 글을 써야겠는데 한페이지 첫장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걸 고치고 고치니까 다음 장을 못쓰고 죽는대요.

여러분 얼마나 완벽하려고 하십니까? 잊어버리세요. 오직 초점을 분명히 하세요. 초점을 하늘나라에 맞추고 그리고 불완전한 가운데에 그대로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세요. 내 삶의 의미의 근거가 어딨습니까? 내 일의 참 가치는 어디두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겁니까?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나게 마련이에요. 생수를 마셔야 됩니다.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 그것으로 기뻐하라. 그러한 가치 그러한 영원한 것. 그리고 오늘을 살 때 그에게 능력과 감사와 지혜가 함께하는 것이 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온 정력 다 기울이며 힘써 살아왔습니다마는 별로 얻은 것도 없고 되었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주시사 이제부터 남은 생이라도 하늘에 기록될 수 있는 그러한 일들을 하며 조용히 주님을 향하여 살게 하옵소서. 주의 음성에 응답하며 살게 하시고 주님의 손에 들려진 주님의 손에 의해서 쓰여지는 영광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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