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의 구조 | 성막의 구조와 의미 [성경 공부 일독 프로젝트 #13] 20262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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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상은 서광 전도사님이 제작했습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성막을 만드는 과정을 시각화하면 읽으실 때 좀 더 쉽게 이해 되실 것입니다. 읽기 쉽지 않은 부분이지만 이 영상을 참고하셔서 열심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Music: https://www.bensou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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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와 비밀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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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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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와 구속사적 의미 – 열린문교회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한 것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게 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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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와 의미 [성경 공부 일독 프로젝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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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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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와 비밀

성막의 비밀본문

[출 25:1-출 25:9]

(1)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나에게 예물을 바치게 하여라. 누가 바치든지, 마음에서 우러나와 나에게 바치는 예물이면 받아라.

(3)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곧 금과 은과 동과

(4)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는 모시 실과 염소 털과

(5)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과 돌고래 가죽과 아카시아 나무와

(6)등잔용 기름과 예식용 기름을 넣는 향품과 분향할 향에 넣는 향품과

(7)에봇과 가슴받이에 박을 홍옥수와 그 밖의 보석들이다.

(8)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9)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모양과 똑같은 모양으로, 성막과 거기에서 쓸 모든 기구를 만들어라.

[요 1:14-요 1:14]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자료1) 오늘은 성경공부 4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달에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는 장면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이 시내산 사건으로 이제 공식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자료2)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민수기와 신명기를 선생님들과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자료3)

그에 앞서 이 시간에 저는 여러분들과 성막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눌려고 합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성막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무척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성막은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약의 성막을 신약의 복음에 비추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출애굽후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십계명과 율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오늘 본문 8-9절 말씀처럼 성소에 있는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십니다.(자료4)

(8)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고 하여라.

(9)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모양과 똑같은 모양으로, 성막과 거기에서 쓸 모든 기구를 만들어라.

(자료5) 다시 말해 성막 안에 성소에 있는 것인데, 그 성소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인 것입니다. 신약에 사는 우리야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지만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아무 때나 경험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소에만 계셨는데 그 성소가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에는 성막에 있었고, 후에는 성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성막의 구조와 의미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울타리와 성막문

우선 성막은 길이 100규빗(50미터), 폭이 50규빗(25미터), 높이가 5규빗(2.5미터)인 하얀 세마포 울타리로 내부가 가려져 있습니다. 이 울타리를 기준으로 성막안을 성막뜰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성막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지성소인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굳이 울타리가 없이 지성소만 하나 있었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표시가 충분히 될 것같은데 하나님은 굳이 성막 안과 밖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울타리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자와 불신자는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울타리를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신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이 울타리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자료6)

반드시 동쪽에 있는 유일한 성막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도가 되는 문,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문, 구원의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자료7)

[요 10:9-요 10:9]

(9)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요 14:6-요 14:6]

(6)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행 4:12-행 4:12]

(12)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모두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독교를 독단적이라고 비판할지라도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진리는 독단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만이 성막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사실이 우리가 믿는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싸우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습니다. 성막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 문을 모르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신앙과 진리를 핑계로 독선적인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 번제단(자료8)

성막문을 통해 뜰안에 들어가면 제일먼저 마주치는 것이 바로 9미터 폭의 번제단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사를 통해 죄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희생제사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을 희생시켜 죄용서를 받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이 제사에 받쳐지는 짐승에는 기준이 있습니다.(자료9)

[레 1:3-레 1:3]

(3)드리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드리되, 주께서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게 하여라.

[레 3:1-레 3:1]

(1)화목제사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소를 잡아서 드릴 때에는, 누구든지, 수컷이거나 암컷이거나, 흠이 없는 것을 골라서 주 앞에 드려야 한다.

바로 흠없는 짐승입니다. 이것은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깊이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에 굶주려 계신 분이 아닙니다. 제물을 받치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1시간 드리는데 정성껏 드리십시오. 겨우 1시간 예배드리는 동안 핸드폰좀 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1시간 동안만은 예배에 집중하십시다. 이것이 흠없이 드리는 제물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자료10)

[롬 12:1-롬 12:1]

(1)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흠없는 짐승으로 희생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희생제사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 짐승처럼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자료11)

[요 1:29-요 1:29]

(29)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엡 5:2-엡 5:2]

(2)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주신 것 같이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히 9:28-히 9:28]

(28)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한 번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 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3. 물두멍(자료12)

번제단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출 30:17-출 30:21](자료13)

(17)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8)”너는 물두멍과 그 받침을 놋쇠로 만들어서, 씻는 데 쓰게 하여라. 너는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놓고, 거기에 물을 담아라.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로 그들의 손과 발을 씻을 것이다.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물로 씻어야 죽지 않는다. 그들이 나 주에게 제물을 살라 바치려고 제단으로 가까이 갈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21)이와 같이 그들은 그들의 손과 발을 씻어야 죽지 않는다. 이것은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이다.”

(자료14) 일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인생을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됩니다. 기독교인은 구원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구원받은 이후의 삶입니다. 물두멍이 이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물론 번제를 통해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계속해서 죄를 짓고, 실수를 합니다. 이랬을 때 ‘나는 구원은 이미 받았으니까 상관없지’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엉터리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일한 문이 되시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의 은혜밖에 의지할 것이 없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써 자신을 성결케하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제사를 지낸 이후에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함부로 성소에 들어오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은 죄에서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구원받은 이후의 성화의 삶도 중요합니다.

4. 성소의 덮개(자료15)

이제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에 들어갈 차례입니다. 그런데 성소를 덮고 있는 네 개의 장덮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소는 밖에서부터 해달가죽, 붉은 물 들인 수양가죽, 염소털, 앙장을 덮여 있습니다.

(자료16) 그러기에 성소를 보면 거무튀튀한 해달 껍데기만 보입니다. 사실 성소 안에 들어가면 전체가 순금입니다.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겉모습은 왜 하필 해달 가죽일까요?

(자료17) 그 아래 덮개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붉은 물 들인 수양가죽이 있고, 그 아래에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광야에서 죽는 아사셀(레16:6-10) 염소를 뜻하는 염소털로 만든 덮개가 있습니다. 이 염소 역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자료18)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색, 자색, 홍색, 흰색의 실로 수놓은 앙장이 덮여 있는데 이 네가지 색깔 역시 청색은 하나님의 아들, 자색은 왕, 홍색은 피, 흰색은 완전한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 즉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인데 그 성소가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초라한 해달 가죽이라는데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자료19)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입니까? 그런데 많은 비기독교인들, 특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비웃는지 모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도 안된다면 얼마나 비웃습니까? 이 사실이 왜 그 분들을 그렇게 불쾌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들을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저주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소는 직접 들어온 사람들만이 그 귀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들어오지 못해본 사람은 평생 성소의 해달가죽밖에 보지 못합니다.

가끔 인터넷이나 기사를 통해 기독교를 비판하는 글들을 보면 일면 공감이 가면서도 안타까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분들이 제대로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없이 TV나 기사에서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교회의 모습을 마치 ‘교회 전체의 모습’인양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성소 안에 들어와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지 성소에는 들어온적도 없으면서 해달 가죽만 쳐다보며 이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성소에 직접 들어와서 은혜를 경험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5. 성소(자료20)

이제 성소를 들어갈 차례인데 이 성소도 휘장을 경계로 안쪽에 있는 지성소와 바깥에 있는 성소로 구별이 됩니다. 우선 성소에 들어가면 성소를 밝히는 등대와 12개의 떡이 올려 있는 떡상과 분향단이 있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가리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자료21)

[요 6:51-요 6:51]

(51)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 8:12-요 8:12]

(12)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성소 안에 있는 등대와 떡은 구약 백성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분향단은 무엇입니까?

분향단 뒤에는 대제사장이 1년 한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이 있습니다. 대제사사장은 1년 한번 이 분향단에서 속죄예식을 치룬 후에서 휘장을 지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자료22)

[마 27:50-마 27:51]

(50)예수께서는 다시 큰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자료23)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 막고 있던, 사람들이 절대로 지나갈 수 없던 그 경계선이 갈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지나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막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았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고, 그 분의 십자가만이 우리가 얻은 구원의 근거입니다. 주님의 부활만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근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신앙인이 되십다. 밖에서 해달가죽만 보고 있지 마시고 이제는 여러분이 직접 기도하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해 보십시오. 삶은 달걀만 먹고, 달걀로 2부 순서만 한다고 부활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부활절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이 날을 계기로 삼아 내가 직접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동신교회 중등부가 됩시다. (자료23)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멈추어 있을 때는 모든 지파의 중심에 성막이 있었고, 행군할 때는 언약궤를 따라 길을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의 삶은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을 이 성막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의 삶을 경험하십시오.

coram Deo

성막의 구조

1) 성막의 기구들(출 25:10-40).

(1) 법궤(Ark,출25:10-16)

법궤는 히브리어로 아론이다. 이것은 네모지게 만들어진 것으로 그 길이는 2규빗 반(112cm),넓이와 높이는 각각 1규빗반(68cm)이였다. 이 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다.

“이 아카시아 나무는 에집트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자라는 것이라8)”고 한다. 그 안, 팍을 순금으로 입혔다. 윗 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저편에 두 고리였고,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에 메게했다. 그 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출 16:33)와 십계명의 두 돌비를 넣어 두었다(출25:16.40:20).그 두 돌비를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출 24:12)인데, 언약의 말씀(출 34:27-28,신4:13.10:1-2),언약의 비석(신9:9.15)라고도 한다9). 또 그후에는 그 궤속에 아론의 싹난지팡이를 넣어 두었다(민17:10)10).

(2) 속죄소(출25:17-22).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카포이다.

그 말은 히브리어 동사 에서 온 것인데 그 근본 뜻은 “덮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벗은 몸을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덮어 주었다. 스가리아서에 대제시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는데 그것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가리워 주었다. 그와같이 덮거나, 가리운다는 그 말이 후에는 “속죄한다”로 되었다. 즉 죄를 가리우고 제한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70인경에는 “Hilasterion”(힐라스테리온)으고 되었고, 미국 표준역 성경(A.S.V)에서는 “Mecrcy Seat”(시은소)로11),우리 한글 성경에는 속죄소로 되었다. 이 속죄소는 순금으로 만들었고 길이가 2규빗 반(3휘트 9인치),넓이는 1규빗 반(2휘트 3인치)이었다.

속죄소의 두 끝에는 순금으로 두 그룹을 만들어 한 그룹은 이끝에, 또 한 그룹은 저끝에 연하여 있게 했다. 그 그룹들은 두 날개들을 펴서 속죄소를 덮게 하였다. 그 그룹들은 얼굴을 속죄소를 향하게 하였다. 그 그룹의 형상은 사람,사자,송아지,그리고 독수리의 모양이었고(겔1:6,계4:7-8),서 있는 높이와 두 날개의 넓이가 약 15피트였다. 한다. 그 그룹은 천사들 중의 한 종류였다(창3:24).이상의 것들은 지성소의 기구들이다.

(3) 진설병 상(출25:23-30).

이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2규빗(90cm),높이가 1규빗 반(68cm),너비가 1규빗(45cm)이고 순금으로 싸았으며, 그 위에는 항상 12덩어리의 떡이 놓여 있었다. 그 떡, 즉 진설병은 좋은 밀가구로 만들어 구운 것으로, 매 안식일에 새것으로 갈아놓았다. 그 떡은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다(단 누룩과 꿀은 전혀 넣지 않고 반드시 기름과 소금을 넣게 되어 있다).

그 상의 특징을 든다면 사면에 손바닥 넓이 만큼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두르고, 그것을 위하여 금 고리 넷을 만들어 네 모퉁이에 달고, 금으로 싼 조각목 채로 꿰어 메게 했다(출 25:24-28). 또 정금으로 대접, 숟가락, 병과 붓는 잔을 만들었다(출25:29-30).

(4)촛대(출25:31-40).

촛대는 정금으로 만들었는데 밑판에 줄기가 있었고 그 줄기에는 가지 여섯이 나 있었다. 각 가지 끝에는 꽃 형상이다. 셋은 이편으로 셋은 저편으로 향하여 총 일곱 가지의 촛대였다. 스가랴서 4장2-3절을 보면 등대 좌우에 감람나무가 있어 그 기름을 공급했다. 즉 감람유로 불을 밝히여 비취게 했다.

또 불 집게와 불똥 그릇도 있었는데 다 정금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만드는데 소요된 금은 한달란트였다. 그 금의 싯가는 현재로 약 35,000$의 값어치가 되었다13)고 한다.

그 촛대에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고 했다(출27:21). 이것은 등불을 황혼부터 아침까지의 어두운 동안 밟힐 것을 말한다. 곧 낮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 등불은 앞을 비추게 하였다(출25:37). 그 앞은 두가지 면으로 볼 수 있는데 성소의 입구를 중심하면 출입구 쪽을 비추이게 한 것이고, 성소 내에서 앞쪽이면 진설병 상 쪽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 등불이 비취는 방향이 문제가 안되는 것은 성소 내부를 전체 밝혔기 때문이다.

(5) 향단(출37:25-29.30:1-3)

향단도 역시 조각목으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모두 1규빗(46cm)으로 네모 반듯하고, 높이가 2규빗이었다. 향단은 위와 전후 좌위와 네 뿔을 금으로 싸고,주위에 금테를 둘렀고, 고리 네개를 만들어 채에 꿰게 했다. 그 채는 금으로 싸고 향단에는 관유와 향품을 드렸다.

그 향을 제조하는 법은 출애굽기 30장22-25절에 기록이 되었다.

이 향단은 성소에 있어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와 또 저녁에 등불을 켤때에 향을 사르게 했다.

그러나 그 향단에는 다른 향을 사르지 못하게 되었고, 번제, 소제와 전제의 술을 붓지 못하게 하였고, 아론이 1년에 1차례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속죄하게 되었다9출30:1-5).

이상의 것들은 성소의 기구들이다.

(6)놋단 (출38:1-7.27:1-8)

이 단은 다른 단과 특이하다. 다른 단과 특이한 것은 놋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 명칭을 놋단이라고 한다.그것은 물론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놋으로 쌌다. 길이와 너비가 5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고, 높이는 3규빗으로 그 위 네 모퉁이에 각각 뿔이 있다. 또 그 단에 부속된 기구들인 통,부삽,대야,고기 갈구리,불 옮기는 그릇 등을 놋으로 만들었고, 단 중앙에 그물을 만들되 고리 넷을 만들어 불쳐서 채로 꿰게 하였다. 그 채는 조각목을 놋으로 쌌다. 이 단은 제단에 드릴 짐승을 잡아서 제사장에게 주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희생 제단이다.

(7) 세수대야(출30:17-21.40:30-32).

세수대야는 놋으로 만들어 회막과 단 사이에 두었던 것으로 전체가 놋일뿐 아니라 밭침과 그릇도 다 놋이었다. 그곳에 물을 담아서 성소 앞에 놓아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이 성소의 지성소를 출입하기 전후에 수족을 씻게 하였다. 만약에 여기서 수족을 씻지 않고 출입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8) 거울(출 38:8.31:9).

거울은 출애굽기 38장 8절에 물두멍으로 나왔다. 그 물두멍은 세수대야와 연결되어 있음이 나타나 있다.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들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민수기 4장 23절에 보면 레위 자손이 25세에서 50세까지가 회막에서 봉사하게 했음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 라고도 하겠다(민8:23-36 참고).

2) 성막의 모형(출26:1-27:21)

성막의 크기는 길이가 45휘트,너비가 15휘트,높이가 25휘트인데 이동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구조를 보면 아래와 같다.

(1) 휘장(출26:1-6)

휘장은 전체를 10폭으로 만들었다. 그 10폭은 각각 5폭을 연하여 한 막이 되게 하여 두 막이 한 휘장이 된다. 그 각 막은 길이가 28규빗 너비는 4규빗이였고, 그 막 위에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자색,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 그 마지막 폭 가에 청색 고리 50을 만들어 달고, 또 금 갈고리 50을 만들어 달아 서로 연결되어 한 휘장이 되게 했다.

(2) 덮은 막(출 26:7-14).

덮는 막은 성막을 덮는 막이다. 이 막은 지성소와 성소를 동일하게 덮게 된 것 같다. 그것은 염소털로 만들되 11폭으로 만들었다. 각 폭의 길이는 45휘트에, 넓이는 6휘트였다. 여섯 폭을 연결하되 여섯째 폭의 절반은 성막이 전면에 접어 드리우게 했다. 마지막 폭 가에 고리 50을 달고,놋으로 갈고리 50을 만들어 그것으로 고리를 꿰어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했다. 나머지 좌우편은 성막 뒤에 드리우게 했다. 그 다음 나머지는 성막지 반 막에 각각 15휘트(1규빗)씩 드리웠다. 또 붉은 물드린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어 덮고,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옷덮개를 만들어 씨웠다.고로 덮막은 3중으로 되어 있었다.

(3) 널판(출26:15-30).

널판은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순금으로 쌌다. 그 널판의 길이는 10규빗,넓이는 1규빗으로 하고, 각 판에 두 장부(구멍)을 내어 서로 연결되게 하였다.성막 남편을 위하여 20을 만들고, 그 널판 아래 은으로 만든 받침 40을 만들어 각 널판 아래 두 장부를 내어 끼워 바치게 했다. 북편에도 남편과 동일하게 했다. 성막 서편을 위하여 널판 여섯을 만들고, 또 성막 뒷 두 모퉁이를 위하여 널판들을 만들어 아래에서 위까지 각각 두겹 두께로 만들어 윗 고리에 이루게 했다.

그러므로 은 받침은 12개이다. 또 조각목으로 성막 띠를 만들되 금으로 쌀 것이다. 그 성막 이편 널판을 위하여 5개,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5개이다. 성막 뒤 서편 널판을 위하여 5개를 만들었다. 성막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그 널판들을 꿸 금 고리를 만들고, 띠를 꿰여 널판을 연결했다(사진8참조).

(4) 안 휘장(출26:31-37).

안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여 막는 휘장으로 청색, 자색,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고 그 위에 그룹을 수놓아 만들게 했다. 그 안 휘장은 조각목으로 만든 네 기둥에 금갈고리에 꿰어 드리우게 했다. 그 네 기둥은 네 은 받침 위에 두게 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게 위하여 들어 갔음으로 이 안에 휘장은 1년에 한번씩 그 때에만 대제사장에 의하여 걷히웠다가 다시 닫힌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때 그 안 휘장이 위에서 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고 갈라져서 지성소와 성소가 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안 휘장이 제거된 것이다.

(5) 안 마당(뜰)(출27:9-19).

이것은 성막 안에 있는 마당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 뜰의 남편 길이가 100규빗(45미터)으로 그 길이의 세마포 포장을 치게했다. 그 포장의 기둥이 20이요. 놋 받침이 20이였다.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었다. 북편도 남편과 동일하였다. 서편에는 길이가 50규빗의 포장을 치게 하되 기둥이 10이고, 놋 받침도 10이었으며 동편도 마찬가지로 50규빗의 포장이 기둥 셋과 놋받침에 걸쳐 있었고,뜰 문 이편에 15규빗의 포장이 기둥 셋과 놋받침에 걸쳐 있었고, 뜰 문 저편에도 이편과 같이 되어 있었다. 뜰 문을 위해서 청색,자색,홍색과 가는 베실로 수 놓아 짠 휘장으로 길이가 20규빗이고,기둥이 4,놋받침이 4이었다.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었다.

세마포 포장의 높이는 5규빗이었다. 그리고 이 안 마당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은 다 놋으로 만들어졌다. 이 안 마당은 이스라엘인의 마당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마당에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외에는 절대로 출입하지 못하였으며, 또 제물을 가지고 들어와 제사드릴 자도 이스라엘 백성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6) 바깥마당

이곳은 소위 이방인의 마당으로 이 마당은 매우 넓다.성막 밖의 전지역이 이방인의 마당이다. 그 이유는 이방인이 이곳까지는 접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도둑질,여러가지 불의와 악이 행해지는 죄의 처소이다. 사죄의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버린자의 거처요, 장망성이 이방인의 마당이다.

3) 성막 봉사자의 의상

그림 : 정장한 대제사장의 모형(암스텔담 성경박물관) : 가장자리로 둘려가며 금방울과 석류 모형을 교대 로 단 청색의 예봇받침 겉옷과, 그 보다 짧은 에봇과 그 위에 매ㅐㄴ 에봇띠 그리고 열 두 지파 를 각각 대표하는 열 두 보석이 달린 흉패가 보인다. 손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쥐어져 있다 (민17장).

제사직을 행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제복으로 이 제복을 입지 않고는 제사를 드리려고 성막에 들어 가지를 못했고 제사도 드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엄히 명하셨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반드시 제복을 입고야 백성을 위한 제사나, 백성의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다른 제사도 마찬가지로 제사장들에게 제복은 귀중하고 큰 뜻이 있다. 그 뜻에 대하여는 후에 생각하겠다.

먼저 대제사장의 제복은 “대제사장이 입고 있던 것과 머리에 쓰고 있던 것들을 모두 합하여 일곱가지이다. 7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 수이다. 일곱가지 중에서

a) 속옷(고의-하체를 가리우는 것)(출28:4).

출애굽기 39장 27절에도 “그들이 또 직조한 가는 베로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짓고”라고 하였다. 이 속옷은 대제사장만 입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들도 입었다. 그 재료는 직조한 가는 베이다(출28:39). 그 베 속옷을 입고 허리에 띠를 띠게 되어 있다.

b) 긴 옷(겉옷)

“그가 에봇 받침 긴 옷을 전부 청색으로 짜서 만들었다(출39:22)라고 하였고,또 “두 어깨 사이에 머리 들어갈 구멍을 내고 그 주위에 갑옷 깃같이 짓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하고 그 옷 가장 자리로 돌아가며, 청색,자색, 홍색실로 석류를 수 놓아 간격하여 금장울을 달되 그 옷 가장 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한석류…”(출28:32-34).

c) 에봇

에봇은 긴 앞치마와 같이 생겼는데 대제사장이 흉패 밑에 입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제복의 특징으로 금실,자색,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그 두 끝을 연하게 하고, 에봇 위에 매는 띠는 에봇의 재료들과 같은 것으로 에봇에 붙여 짜며 호마노 두 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겨 금 테에 물리고, 에봇 견대에 달게 하였다.

d) 흉패

금실,청색,자식,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되 장광이 한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박되 각 줄에 세 보석씩, 합계 열두 보석을 물리체 하였다. 이것은 열두지파(야곱의 열두 아들들과 그 후손들을 의미함)의 이름대로 이다. 정금으로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두 고리에 매어 에봇 앞 두 견대의 금테를 매고, 또 두 고리를 만들어 에봇에 닿은 곳에 매게했다. 그리고 그 흉패를 가슴에 부치고 그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게 했다(출 39:8.28:15-29).

e) 허리띠

이 띠는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수놓아 띠를 만들었다. 이 띠는 허리에 띠는 것으로 에봇 속에 맨 것이다(출28:39-40.39:39-).

f) 금패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그 패를 청색끈으로 대제사장의 관 전면에 맨 것이다(레8:9).

g) 성관

이것은 대제사장이 쓰는 관이다(출28:40)15).

이상의 일곱가지는 대제사장과 또는 제사장에게 속한 제복의 용품들이다. 물론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제복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것에 대하여는 후에 기록하겠다.

4) 성막에 대한 반 성서적 사상

이제까지는 성서적 입장에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고 나서는 반 성서적 사상을 가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성경 주석가들은 모세 오경의 저작자와 저작 연대를 파괴, 또는 부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성을 흐리게 한다. 그들은 오경의 문서설을 주장한다. 즉 오경은 J.E.C.P라는 단편 문서들을 모아 어떤이가 편집하였을 뿐,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경의 저작 또는 편집 연대를 포로시대 이후로 잡는다16). 그 자유주의자들은 웰하우젠(Wellhausen) 드라이버(Driver)와 파이퍼(Preiffer)…등이다

그들의 사상은 한국 기독교계에도 침투하여 자유주의 누룩이 부식되어 그 독소가 풍기고 있음은 통찬할 일이다.

그들은 오경 뿐만 아니라 기타 성경의 여러 부분들을 파괴하려 한다. 그들은 모세오경에 있는 성막에 대하여서도 성막의 제조와 제사장들과 제사의식에 관하여 P문서설을 내세운다. 즉 J.E.D에다가 제사법전을 추가한 과정이다. J.E.D.에 P.를 결합한 편잡자를 R피 라 부른다. R피가 편집한 장소는 바벨론(Babylon)이라고”한다. 또 그 편집 연대는 주전(B.C) 43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19). 그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출애굽기의 성막에 대하여서도 파괴하려 한다.

케일(Kyle)의 그의 책에서 “성막과 그것의 기구와 제사장의 옷들에 대한 근원지에 대하여 아무 이야기도 말하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지역적이고, 시대적으로 보아 그것은 바벨론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애굽적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 자체를 나타내는 그 시대 성막문화가 증명한다. 애굽의 건축 안 마당이.. 현대에 증거가 된다. 고고학의 발굴자들에 의하여 잘보여 준다.”20)고 했다. 또 그는 계속해서 “그것들은 애굽의 것과 같다. 즉 성막의 기구들과 제사장의 의상이 같다”21)고 했다. “그러나 이것들의 그 확실한 애굽의 특성은 바벨론(Babylon)의 영향 밑에서 성막의 기원을 만들어 후대에 출애굽기의 성막을 낳았다.”22)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이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25장에서 40장이 잘 말씀하고 있고, 또 선민 의식이 강하고 배외사상이 강한 그들이 애굽이나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모방할리 없으며 하필 신광야에서 나와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동안 있으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모세가 시내산에 있을 때에 산 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금송아지를 섬기지 않았는가? 그들에게는 구태여 애굽의 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변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상황으로 보아 애굽이나 바벨론의 영향이 아님이 확실하다.또 그것들이 애굽과 바벨론의 것과 대동소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동소이 하다거나 같은 것으로 이야기함은 큰 잘못이 아닐까?

또 자유주의 사상의 주류인 진화를 믿고, 초자연성과 계시성을 인정하지 안는 비신앙성에서 나온 오류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5)성막의 역사적 변화

성막의 이동 상황과 그 성막의 외형적인 변화와 성막의 기구들의 변화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학설들이 있으나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특별히 취급할 문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이다. 이 출애굽 시기에 따라 성막의 건조 시기가 크게 차이가 있다. 이 출애굽 연대에 대하여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니

할레이(Henry H.Halley)씨는 그의 “성경 핸드북”에서 두가지의 학설을 제시하고 독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긴다. 즉 “아멘호텝 2세(Aamenhotep II.1450-1420 B.C)와 메렌프다(Melenphtah,1235-1220년 B.C)로 만약 출애굽이 아멘호텝 2세의 치하에서 행하여 졌다고 하면 토트메스 3세(Thotmese III)는 이스라엘을 중압한 자로되고 그의 자매는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 자매가 유명한 할셉서트(Hatshepsut)여왕이다…. 만약 출애굽이 메렌프다의 치하이었다고 하면 이스라엘 사람의 대 압박자는 람세스 2세(Ramses II)로 그의 딸이 모세를 양육한 것이 된다. 이와같이 모세는 도드메스 3세의 치하, 또는 람세스 2세의 치하나 그 어느 사람에게 양육이 되었다”23)고 했다. 이에 대한 결판을 나린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Dictionary”와 Bible Dictionary는 “성막의 소개 날자는 1220 B.C경이라”24)고 했다. 즉 할레이씨가 내세운 두 학설 중에 후자를 택했다. 이에 반하여 “구약사기를 쓴 소안론 박사는 전자를 택하여 주전 1491-1451로 보았다”25).그러나 전자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연대의 차이가 있다. 김윤국 박사는 “구약 세계 역사”에서 주전 약 1450-1400년으로 잡고 있으며, 그에 대한 논증을 제시했다”26) 본인도 위의 연대가 합리적이고 실제의 연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고고학적인 증거는 본인의 “구약고고학”을 참고 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를 주전 1450년을 기준으로 하여 이하의 문제를 생각하기로 한다.

(1) 시내산에서의 성막

그림 : 시내산 출애굽기 40장 2.17절에 의하면 제2년 1월 1일에 시내산밑에서 성막을 건조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오랜시일을 소비하여 성막을 제조하여 세웠는지에 대하여는 밝히지 않았으므로 잘 알 수 없다. 물론 솔로몬왕이 세운 성전에 대하여는 제조 연대와 기한이 나타나 있다(왕상5장.6장).그러나 이 광야에서 제조한 성막의 연대는 미지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행할 때는 법궤와 모든 성막과 그것에 속한 부속품들과 기구들을 정리하여 레위인이 메고 여행하게 했다(레4:5).이때 마다 레위인들은 레위인이 메고 여행하게 했다(레 4:5).이때 마다 레위인들은 각각 맡은 부분이 있어서 그것을 분해하여 가지고 운반했다(민 3:31-32.4:15).그 외에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옮기는 부분도 있었다(민 7:1-11).

우리는 성막 제조의 시간을 알 수는 없으나 그 성막이 제조된 후에 시내산 밑에 정주한 기간은 알 수 있다고 본다. 민수기 10장 11절에 의하면 제2년 2월 20일에 이동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막은 제2년 2월 20일에 이동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성막은 제2년 1월 1일에 제조되었으니, 약 50일간 정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여행은 거기에서 시작되어 “아라비아 중심지인 호렙과 유다의 네게브(Negeb)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를 사이에 두고 무섭고 험한 광야를 따라 나아갔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의 세월이 요했다. 그들이 여행때 통과한 지명과 기한은 민수기 33장16-49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는 약 38년간의 세월이 요했다. 그때 성막은 37년간 여기에서 배회했다. 이 기간에 하나님께 정규적인 희생 제사를 드리지 못했다(암5:25).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하여 몇가지 밖에는 알수가 없다(민 10:33-36)27). 즉

첫째,하나님께서 행진케 하였고,

둘째, 대적들과 전쟁중에 있었고,

끝으로, 성막을 정상적으로 세울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2) 가나안 정착

그림 : 가나안의 성소 / 므겟도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제단으로 현재의 지층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

이스라엘 마침내 요르단을 건넜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성막 안치의 장소이다. 그 장소는 (1) 사람들이 살지 않고,(2) 가능한 한 사람의 무덤들로 더럽힘이 없는 곳이라야 하는데 이런 곳은 여리고 근처였다. 그곳은 길갈로 알려진 곳이다(수4:19.5:10.9:6.10:6.43).길갈은 임시 장소였다. 그래서 마침내 성막의 이동을 단행했는데 에브라임 영지에 있는 실로로 정하여 졌다. 성막이 그곳에 정주하게 된 때는 여호수아 당시에 된 것으로 아는데 길갈에서 약 32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즉 길갈에서 실로로 이동한 것이다(수18:1.19:51).이 실로에 있을 때 성전(Temple)으로 되었다(삼상1:9-,수1:9.3;3).28)

이때까지 성막의 구조와 성막의 기구는 별 변동이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성막이 분해되고, 제단이 새로 건립이 되었다. 그 이유는 레위 자손이 분산되고, 그들로 인하여 새 제단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제단 분립의 시작이다(삿 19:1-31).벧엘에 언약궤가 이동하게 되었다(삿20:29-). 이때에 실로에는 성막이 있었다(삿21:19-).

(3) 실로의 멸망

이스라엘은 사사시대 초기에 가졌던 명성을 잃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했다. 사무엘서 초기의 블레셋과의 전쟁은 심히 파격적이었다. 실로에서 언약궤를 옮겨다 놓게 되었고(삼상 4:1-),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법궤와 같이 전장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상은 하나님이 법궤와 같이 계시고, 법궤가 움직이는 곳으로 하나님도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법궤를 전장에 나가고 제사장들이 전쟁에 나간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군사들의 신앙무장과 정신적인 사기의 진작을 위한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법궤에서 떠났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사기는 무용했고 그들의 기대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언약궤, 즉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고, 그 궤를 섬기던 두 제사장들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앞에서 아무 도움이 없이 패하고 말았다.. 실로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의 장중에서 망한 것이 확실하다.

실로의 파괴는 역사들이 암시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시78:60)라 하였으며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렘 7:12)고 함은 의심없이 실로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성막 자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 같으며 법궤와 성막이 놉에서 다시 만난다 29).

(4) 비지역적 예배

실로의 멸망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변혁을 가져와, 시간적인 신앙으로 돌아 간 것 같다. 즉 가견적인 유형 신앙에서 불가견적인 정신과 영적인 신앙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 섰으며, 인위적인 면에서 신본주의로 돌아간것 같다. 그 증거는 대제사장의 성격이 상실된 것이다. 사무엘은 대제사장이나 제사장이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와 정치적인 지도자의 역활을 겸하여 행하였다.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반환되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명성과 영광을 위하여 행하신 것으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나타내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것 같다.

법궤는 벳세메스에 잠간 머물렀다가(삼상 6:19-) 기럇여아림으로 옮겨서 약 20여년간 있었다(삼상 7:1.2). 그런데 사무엘은 벧엘.미스바,라마와 길갈 등을 순회하며 그 뜰(안 마당)에서 예식과 공중생활과 형사상의 관리 등을 장악하여 시행하였다(삼상 7:15-17). 즉 이것은 지성소가 비 지역화됨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앙 생활에 큰 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이었으며 완전히 비 지역화 되기는 다윗왕 때가 분명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는 지역을 초월하신 신임을 직접 말씀하셨다(대상 17:1-15).

(5)놉과 기브온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요나단의 도움으로 망명해 온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자로(삼상 21:1-6) 아히멜렉은 사무엘 상 14장 3절에 나오는 아히야가 아닌가 생각된다. 놉은 예루스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나 떨어진 높은 곳으로 시온보다 90미터나 높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사울왕에 의하여 모든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아비아달 하나만이 (삼상 22:1)구원 받을 때까지 몇년간 있었다. 그후에 사울왕은 성막을 기브온(대상 16:39.21:29)으로 옮긴 것 같다. 기브온은 예루스에서 10킬로미터,벧엘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6) 법궤의 복귀

사울왕이 법궤를 옮긴 후에 다윗왕에 의하여 한 가지 일이 행해진 것이 있다(대상 16:40). 다윗이 노획한 여부스(후에 예루스)의 요새에 그 자신을 위하여 집을 지었다. 또 다윗은 법궤를 위하여 한 곳을 택했고, 기브온에 있던 성막의 모형인 장막을 시온에 쳤다(삼하 6:17,대상 16:1). 그는 제단도 준비했다. 그후에 그는 법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이곳으로 가져왔다(삼하6:11).그때 웃시아의 일로 예루스 가까운 레위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놓았다가 거기서 3개월 후에 다시 다윗성에 봉안하게 되었다.

(7) 두 성막

이렇게 해서 기브온과 예루살렘 두 곳에 성막이 있게 되었는데 기브온에 제단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는 법궤가 있어 성막에 안치 된 것 같다(왕상 3:1-4). 그 법궤와 제단은 성전이 건축되므로 하나로 통합이 된 것 같다. 그전까지는 기브온에 있던 제단이 솔로몬왕 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것 같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분실된 것이 많았으나, 그런대로 남은 기구들을 가지고 분산되어 있는 곳에서 제사드렸다(대상 2:19,대하 1:5-).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 분산된 유품들을 모아 그 성전에 안치하고 보존하게 되었다(왕상 8:4).

그러므로 성막은 가나안 입주 후 약 200년후에 역사에 나타나 기를 그쳤다30).이때는 모세의 성막과 성막의 기구와 부속품들이 사라지고, 변형되고 개조된 것 같다. 그 예로 성막이 두 곳에 있은 것이나,솔로몬이 성전의 모든 것을 금으로 제조한 것이라 하겠다. 위 두 성막 중에 어느 것이 모세 시대의 성막과 그 기구에 가까우냐?하는 것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브온의 것이라 한다. 그 이유는 기브온의 것은 큰 것이었고,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었으나, 예루살렘것은 솔로몬에 의하여 신축된 것이기 때문이다(왕상 3:1-). 또 성경에 보면 솔ㄹ오몬이 기구들을 만들어 두었다(대하 4:19-) 고 했다.

위의 성구는 솔로몬이 새로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 기구들을 새로 만들어 둔 것도 되지만 옛날 성막과 그 속의 기구들이 없어진 증거도 된다고 하겠다. 오랜동안에 여러가지 재난과 혼란으로 없으진 것도 같다. 처음에 법궤에는 두 돌비,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지팡이가 있었으나 후에는 두 돌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왕상 8:9,대하 5:2-10참조).이 때는 솔로몬, 시대였다.

[성막의 구조와 상징] 2. 성막의 기본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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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기능과 상징] 2. 성막의 기본 구조

이제 성막의 기본 구조를 알아보자. 성막은 성막의 뜰과 성막으로 구분된다. 성막은 다시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된다. 성막을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입구도 동쪽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동쪽은 앞쪽이다. 오른쪽은 남편이며, 왼쪽은 북쪽이다. 서쪽은 뒤편이며 망각의 장소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동쪽은 죽음의 땅이며, 서쪽은 생명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동쪽은 저주받은 곳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장소이다.[이 부분에서 대해서는 필자의 <성경의 동서남북>을 참고 바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성막뜰의 앞 자리에는 번제단이 자리한다. 번제단 뒤로는 물두멍이 있고, 그 뒤로 성막이 자리한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뉜다. 지성소는 촛대, 떡상, 향단이 있다.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고, 지성소는 법궤가 있다. 지성소는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만 대제사장이 들어간다. 그 외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성막의 외곽은 천으로 둘러 싸여있고, 성막의 천장 역시 천이다. 천장 천은 네 종류이다. 가장 안쪽은 케루빔을 수놓은 베실 10장이 겹쳐 있다. 두 번째는 염소털로 짠 천이 11장 겹쳐 있다. 숫양 가죽이 있고, 가장 바깥쪽은 해달 가죽이다.

지성소는 정방형이다. 10규빗 × 10규빗이다. 1규빗을 45cm로 계산하면 4.5m의 정사각형이다. 성소는 너비는 10규빗이고 길이는 20규빗(9m)이다. 지성소와 성소를 합한 성막의 총 길이는 너비 4.5m 길이 13.5m이다.

성막 외곽벽은 직사각형이다. 너비는 50규빗(22.5m)이고, 길이는 100규빗(45m)이다. 동쪽에 자리한 문은 20규빗(9m)로 성소의 길이와 동일하다. 성막문은 동쪽에 오직 하나이다. 지성소의 북쪽 길이는 성막 울타리 외곽의 정확의 1/10이다. 또한 성막 울타리 동과 서는 지성소의 5배이다.

성막뜰에 있는 기구들

성막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자리한다. 번제단은 정방향으로 가로 세로 모두 5규빗(2.25m)이다.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북쪽에 진설병이 있고, 남쪽(왼쪽)으로 촛대가 있다. 앞에는 향단이 자리한다. 떡은 이스라엘을 먹이시는 양식을 뜻한다. 열두 지파를 뜻하는 열두 개의 떡이 매일 진열된다. 촛대는 진리의 말씀을 뜻하며, 일곱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다. 향은 기도를 의미한다.

지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

지성소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족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간다. 들어갈 때는 향을 가지고 들어가 향으로 지성소를 어둡게 한 다음 피를 뿌려 정결케 한다. 법궤는 뚜껑에 케루빔이 서로 마주보며 있고, 날개 아래를 시은소라 한다. 뚜껑을 열면 그 안에 만나 항하리, 십계며의 두 돌판,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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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성막의 모형도와 그 의미 – 성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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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성막의 모형도와 그 의미 – 성경사전

성막의 모형도와 그 의미

성막은 하나님의 지상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처소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거룩한 장소요,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에 의해 제작된 하나님 중심의 유일 신앙관을 대변해 주는 한시적인 지상 경배 처소였다. 이 성막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해내신 때로부터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선민 이스라엘은 솔로몬 성전이 완공되기까지 약 400여년 간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각종 제사를 드린 것이다. 한편, 구약 시대의 이 성막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이 땅에 성육신하여 죄인들 가운데 거하신 임마누엘(마 1:23)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즉, 성막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할 뿐만 아니라 성막에 속한 모든 기물들과 그 성막을 통해 이뤄지는 모든 예전들이 예수의 거룩한 신분과 성품과 사역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같은 사실을 생생히 묘사해 준다(히 9장).

성막(거룩할 聖, 장막 幕; tabernacle)

1. 거룩한 장막 / 이동식 성소.

광야 생활부터 솔로몬 성전이 완성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거룩한 처소. 동시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곳이다(출25:8). 애굽을 출발한 지 2년째 되던 해에 시내 산 아래서 세워진 후(출40:2,17)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었고 그들이 진행할 때마다 항상 선행(先行)했다(민10:33–36). 가나안 정착 후에는 세겜(수8:30), 길갈(수9:6), 벧엘(삿20:27), 실로(삼상3:3)에 성막이 세워졌다. 그후 다윗은 이 성막을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솔로몬 성전의 완성과 함께 성전 건물로 대체되었다.

2. 성막의 구조

① 길이는 약 45.6m(100규빗), 폭은 약 22.8m (50규빗)로 뜰 가운데 세워졌다. 뜰(마당) 사면은 휘장으로 가렸으며, 휘장은 청동 기둥 60개로 지탱되었다(출27:9–19). 뜰 안에는 번제를 위한 큰 제단과(출27:1–8) 제사장이 제물과 자기 몸을 씻는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출30:17–21).

② 성막 본체는 목재 구조로 길이 약 14m(너비 1규빗 반의 판자 20개) 너비 약 4m(1규빗 반 되는 판자 6개를 나란히 놓은 폭)였으며, 두꺼운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해 두었다(출26:15–30).

③ 성소 지붕은 제일 안쪽(덮개)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모양의 자수를 놓은 휘장으로 덮혀 있었고(출26:1–6), 그 바로 위에는 보온을 위해 염소털 휘장이(출26:7–13), 또 그 위에는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이(출26:14), 그리고 제일 바깥에는 방수를 위해 해달의 가죽(출26:14)이 덮힌 4중 구조를 하고 있었다.

④ 성소 내부에는 휘장 앞 오른편에 진설병상, 왼편에 금등대, 휘장 바로 앞 가운데 분향단이 있었다(출25장). 또 휘장 안은 지성소인데, 거기에는 법궤(언약궤, 증거궤)가 있었다. 법궤는 나무로 만들어 금박을 입힌 상자 모양인데 십계명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등 세 성물이 있었다. 또 언약궤 위에는 두 그룹이 마주보며 날개를 펴서 덮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속죄소’(贖罪所)라 불렀다. 이는 죄를 속하는 처소라는 의미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임재하셔서 인간의 죄를 가려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처소이다. 그래서 속죄소는 일명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라고도 한다(출25:16,22; 히9:4).

참조

라이프 성경사전(가스펠 서브)

라이프 성경단어사전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판매가 : 37,000원 → 33,300원 (10.0%, 3,700↓) 16,000여 개의 최대 핵심단어 수록!개역개정판 성경단어를 기본으로 개역한글판, 찬송가, 성경 난외주를 포함한 유일한 단어사전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수록된 단어들과 표현들은 원어가 지닌 깊은 의미는 물론이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함부로 해석할 수 없고, 그럼으로써 쉽게 읽거나 이해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성경이 어렵다는 말은 아마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라이프 성경단어사전」은 이런 어려움에 직면한 분들에게 성경을 쉽게 이해하면서도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라이프 성경단어사전」은 성경에 제시된 명사형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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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스라엘 팀나 벨리 공원에 있는 성막 모델

성막 (tabernacle, Hebrew: מִשְׁכַּן, mishkan, meaning “residence” or “dwelling place”, 거주)은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복시기까지 이스라엘인 (고대)들과 함께 하나님이 거주한 장소였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성막을 건설하도록 명령을 받았다.약속의 땅을 정복한 후에 하나님의 거주하는 장소로서 솔로문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440년 후에 건설되었다.[1]

성막의 구조 [ 편집 ]

성막은 길이가 약 45.6m(100규빗), 폭이 약 22.8m(50규빗)인 뜰 가운데 세워졌고, 뜰 사면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이 휘장은 청동으로 만든 기둥 60개로 지탱되었다(출 27:9-19). 뜰(마당) 안에는 번제를 위한 큰 제단이 있었고(출 27:1-8), 제사장들이 제사를 위하여 자기 몸과 제물을 씻는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출 30:17-21). 뜰의 서쪽 끝에 세워진 성막의 성소는 목재 구조로 길이 약 14m(너비 1규빗 반의 판자 20개) 너비 약 4m(1규빗 반 되는 판자 6개를 나란히 놓은 폭)였으며, 두꺼운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였다(출 26:15-30). 성소 지붕은 제일 안쪽(덮개)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모양의 자수를 놓은 휘장으로 덮혀 있었고(출 26:1-6), 그 바로 위에는 보온을 위해 염소털 휘장이(출 26:7-13), 또 그 위에는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이(출 26:14), 그리고 제일 바깥에는 방수를 위해 해달의 가죽(출 26:14)이 덮힌 4중 지붕 구조를 하고 있었다. 또 성소 내부에는 휘장 오른편에 진설병상, 휘장 왼편에 금등대, 그리고 휘장 바로 앞 가운데 분향단이 놓여 있었다(출 25장). 또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직 언약궤만 있었다.[2]

성막 미시칸 텐트

실로에 있는 유대인 사원

1964년에 완공된 하노바에 있는 회당

같이 보기 [ 편집 ]

감실 (기독교)

제사장의 언약

의 복제본 유대인 사원

장막(성)

Tabernacle(Methodist)

각주 [ 편집 ]

성막의 구조와 구속사적 의미 차용철 2009-08-23 19:56:52 4535  ※ 성막의 구조와 구속사적 의미 <성막의 출처>

성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양식을 받아 지은 성전입니다 (출24:18, 25:1-9). 당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한 것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막의 정확한 칫수와 무게와 재료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여러 장(章)을 할애한 것은 단순히 성막의 건축 내용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의 성품과 천국의 실체와 성도의 생활 모범을 제시하기 위한 모형(표호)입니다 (히8:5, 9:23-24).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알게 하고 그와 영적 교제를 하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기위해 주신 표징입니다. <성막의 위치>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은 구름기둥(하나님의 임재)의 인도를 따라가다가 구름기둥이 멈추면 그 곳에서 멈추고 진(陣)을 칩니다(야영). 맨 중앙에는 성막을 치고 성막을 중심으로 한 주위는 레위 자손이 진을 치고 동쪽에는 유다에 속한 지파들이(유다,잇사갈,스블론), 남쪽에는 르우벤에 속한 지파들이(르우벤,시므온,갓), 서쪽에는 에브라임에 속한 지파들이(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 북쪽에는 단에 속한 지파들이(단,아셀,납달리) 진을 칩니다(민2:3-35, 계21:12).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다시 진행을 하는데, 그 때는 ①유다 진기(陣旗) ②르우벤 진기 ③성막과 레위 진기 ④에브라임 진기 ⑤단 진기 순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러다가 구름기둥이 멈출 때는 다시 그 곳에 진을 치는데 그 때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성막을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로 진을 칩니다. <성막의 제원>

성막 외부를 두룬 세마포 휘장의 전체 길이는 출애굽기27:18에 보면 장(長)과 광(廣)과 고(高)가 각각 100×50×5규빗 (50×25×2.5m)입니다. 참고로 1규빗은 45.6㎝인데 편의상 50㎝로 계산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출27:17에 보면 휘장을 세우는 기둥은 남쪽(좌)과 북쪽(우)이 각각 20개씩이고 서쪽(뒤)과 동쪽(앞)이 각각 10개로 되어 있습니다(성막은 동쪽을 향하고 있음- 계7:2 참조). 거기에 은으로 만든 가름대와 갈고리 그리고 놋으로 만든 받침으로 휘장을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동쪽(앞)에는 50규빗(25m) 너비의 10개 기둥 중 중간부분 20규빗(10m) 너비의 4개 기둥에는 출입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A. 출입문 (출27:16-19)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는 짐승(생축)을 이 곳으로 끌고 들어가 제사를 드리므로 죄 사(赦)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히9:22). 그러기에 성막 동편 끝에 있는 이 출입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죄사함을 받을 수도 없고 영적 자유함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출입문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오늘날 이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4:6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고, 10:9에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했고, 사도행전4:12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했고, 로마서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막은 흰 세마포로 둘러져 있기 때문에 사방 어느 곳에서도 눈에 띄며 다른 천막들과 대조를 느끼게 합니다. 이는 그 내부의 순결과 거룩함을 암시해 줍니다. 성막 전체를 두르고 있는 휘장(세마포장)과 출입문 휘장의 높이는 2.5m입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이 휘장들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들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모릅니다. 성막 안에 있는 진귀한 성구들과 제사하는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 백성이 죄용서 받음을 모릅니다.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거룩과 순결과 평안을 느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둘려진 세마포장과 출입문에 수놓아진 색과 문양을 보고 느낄 뿐입니다. 그런데 출입문의 4색깔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내용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입문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위한 문이기는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존재와 언행과 삶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게 하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이 문은 어느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도록 20규빗(10m)이나 되게 넓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은 항상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곳으로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 지위고저, 학식유무를 무론하고 누구든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합니다. 이는 기본회개의 의미든 중복회개의 의미든 모두에 다 적용됩니다. 요한복음7:37-38에는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라고 했고 (사55:1), 누가복음14:21에는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잠1:20-21, 계22:17). 고린도전서1:26에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이든, 병든 자이든, 괴로운 자이든, 외로운 자이든, 번뇌하는 자이든, 근심하는 자이든, 불화한 자이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아무리 보리 떡 같고 막대기 같고 고자와 같은 자라도, 소를 몰던 자요 뽕나무를 기르던 자요 고기를 잡던 자라도 쓰임 받게 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보여 줍니다.

출입문은 4기둥에 휘장을 가로질렀는데 그 휘장은 청색과 홍색과 자색과 가늘게 꼰 베실(흰색)로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 색깔들은 한결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줍니다.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요3:13,31, 고전15:47). 이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λογοs)로서 육신(σαρξ)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을 생각게 합니다 (요1:1,14, 마27:43, 빌2:6).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와 존귀를 나타냅니다 (삿8:26).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악령과 죽음과 질병을 물리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마27:38, 28:18).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계7:14). 이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모습과 죽기가지 복종했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11:29, 빌2:8).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계19:8, 20:11). 이는 그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일3:5). 이 4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핵심은 같지만)에서 기록한 4복음서와 잘 대조되기도 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사자복음)에, ‘홍색’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제시해 주는 마가복음(송아지복음)에, ‘흰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사람복음)에,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독수리복음)에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도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4:7). B. 번제단 (출27:1-8) 번제단은 5×5×3규빗(2.5×2.5×1.5m)의 크기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을 상자처럼 짜서 그 겉에 놋으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 단 가운데는 제물을 잘 타게 하고 타고난 재가 아래로 잘 빠지게 하기 위해 그물처럼 생긴 놋 망을 가로질러 넣었습니다. 그리고 단 양편에는 놋 망을 반 중간에 고정시킬 뿐아니라, 단을 이동시킬 때 안전하고도 손쉽게 메고 갈 채(봉,pole)를 끼울 수 있도록 놋 고리를 만들어 달았습니다(25:13, 38:5). 그래서 이 번제단을 토단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20:24) a.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줍니다. 번제단은 우선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공의’는 죄에 대해 벌하고 의에 대해 상을 주는 것입니다. 번제단은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생축(짐승)을 데리고 와서 머리에 안수를 통해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전가시킨 다음, 제사장들이 생축을 잡아 번제(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때에 사용되는 단입니다. 이때 번제로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이 죄값을 치루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생축을 사람 대신 죽게 한 것입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고, 히브리서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레17:14). 하나님께서 이런 율법을 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해 미워하시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곧 공의로운 성품을 알게 합니다. 그 공의의 법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벧전2:24, 롬6:10). 번제단은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랑의 성품도 함께 보여 줍니다. ‘사랑’은 죄행대로 갚지 않고 긍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 드려지는 생축은 사람의 죄를 대신 전가받아 죽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사람이 죽어야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대신에 짐승으로 죽게 하고 사람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법을 내신 것은 그가 얼마나 택한 백성을 사랑하는지 알게 해줍니다. 그 사랑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게 한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영 단번에 속죄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히10:4, 9:11-12). b.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시도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임을 나타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이 번제단에서 드려지는 생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속죄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므로 우리 죄값으로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만족시켜 줄 것을 예표하는 표징입니다 (히9:11-12, 22, 10:4,11). 번제단의 재료와 모양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되어 있습니다(1절). ‘조각목'( 아체이 싯딤, שטים עצי – BHS, shittim wood -KJV , acacia wood -NASB, NIV, RSV) 은 단단하고 내구력이 강한 나무로서, 광야의 혹독한 역경 가운데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와 비슷해서 좋은 목재로는 쓸 수 없고 화목(火木)으로나 쓸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인성(人性)을 가지셨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사53:3). 시편 기자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라고 예언했습니다 (시118: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나사렛의 한 촌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사셨으며 침 뱉음과 능욕을 당하고 가시관과 창과 못에 찔려 그의 생명을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the son of man).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체휼하시기 위함입니다 (히4:15). c.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번제단은 조각목으로 짠 다음 불에 타지 않도록 놋을 입혔습니다 (2절). 그리고 번제단에는 부속 기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물에서 떨어지는 통, 제물의 재를 통에 담는 부삽, 제물에서 떨어진 피를 담는 대야 (24:6), 번제단에서 취한 불씨를 분향단에 옮기는데 사용하는 불 옮기는 그릇 (30:7-8, 37:23, 레16:12, 민16:46, 4:9), 잘려진 제물(고기)를 단 위에 골고루 펴는데 사용하는 고기 갈고리 (상상2:13) 등이 있습니다. 그 부속물들도 모두 불에 타지 않도록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3-7절). 민수기16:35-39에 보면, 향로를 가지고 불의의 제물을 드리려 했던 고라당 250인이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불에 타 죽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향로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지만 향로는 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향로가 놋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타지 않고 뜨거운 열도를 통과한 향로를 두둘겨 쳐서 번제단을 싸게 했습니다. ‘놋’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상징합니다. 특히 그의 죄없으신 의를 상징합니다. 진노의 심판의 불에 견디려면 신성 특히 죄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죄가 있어서 죄값으로 내려진 형벌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법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 천사라도 그 진노의 벌을 이겨낼 자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심판을 견디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만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4:15, 요일3:5). d.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번제단 네 귀퉁이에는 제물(생축)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묶는데 사용하기 위해 뿔을 만들었습니다 (2절, 시118:27). 열왕기상1:50-53에 보면 솔로몬이 아도니아를 죽이려 하다가 그가 이 제단의 뿔을 잡는 것을 보고 살려 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이 제단의 상징 의미를 알고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뿔’은 권세와 능력의 상징입니다 (단8:3-20, 삼상2:10). 번제단의 뿔은 죄로 인해 죽게 된 자를 살리는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죄로 죽을 자를 살리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과 보혈을 믿는 자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구원의 뿔”이라고 했고 (시18:2), 사가랴도 예수님을 “구원의 뿔”이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눅1:69). 우리는 그 구원의 뿔을 붙잡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권세가 삶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적용해야 합니다. C. 물두멍 (출30:17-21)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맨 먼저 번제단이 있고 그 다음에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은 다른 기구들과 달리 유일하게 크기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물두멍은 제사를 위한 제물을 씻거나 제사장들이 성소 봉사의 직분을 수행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근동지방은 건조한데다가 바닥이 사막 모래 땅이므로 먼지가 많기 때문에 손과 발이 더럽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성소 사역을 하기 전에 매 순간 더럽혀진 수족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a.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상징합니다. 한편 물두멍은 성막 기구 중 유일하게 그 규격과 물의 양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른 기구에서 규격과 양을 기록한 것 만큼이나 물두멍에서 그것들을 기록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주신 죄가 한없다는 것을 생각게 합니다.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죄를 나눌 때 원죄와 본죄로 나눕니다. 원죄에는 정죄(죄책)와 유전죄(오염)가 있고 본죄는 자범죄와 요구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지은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시103:12, 사1:18). 하나님의 용서가 한이 없으십니다. 매일 삶 속에서 지은 죄가 어떤 죄이든, 얼마나 큰 죄이든 상관없이 그 죄를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해 주셨음을 확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에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용서를 나타내십니다 (마18:24-35). 큰 마태복음18:22에서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가르치신 주님의 한없는 용서의 마음이 느껴지게 합니다. b. 성도에게 성결을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물두멍은 제사장의 수족을 씻고 제물을 씻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사역을 하는 제사장도 거룩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물두멍의 물의 양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씻어야 할 일이 많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불가불 매 순간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단의 역사가 맹렬하고 세속 문화와 문명이 유혹하고 육체의 부패한 성품이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육체의 연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항상 불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날마다 씻는 일이 필요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결케 해 나가야 합니다. 에베소서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요15:3, 17:17, 딛3:5). 말씀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 계명 어긴 자범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요구죄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롬14:23, 약4:17, 삼상12:23, 요일1:8). 물론 타인의 죄에 대한 정죄가 아닌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마7:1-5, 약2:13). 그럴 때 우리에게는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됩니다 (롬5:20, 6:1). c. 성도에게 변화와 헌신을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물두멍은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출애굽기38:8에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고 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놋(구리)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애굽할 때에 가지고 나왔던 거울을 물두멍 만드는 데에 바친 것입니다. 그 거울이 전에는 자신들의 육신의 더러워진 모습을 보여 주고 멋을 내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옛 성품 곧 허영과 욕심과 교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울을 바친 것은 옛 성품과 습관과 풍습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여인들은 성막에서 봉사를 하면서 성막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전무하는 제사장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을 것이고 자신들이 제사장 사역을 도와 봉사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의 수족을 씻는 기구를 만들기 위해 놋(구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놋 거울을 기꺼이 바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상과 풍습과 습관과 욕망을 버립니다 (엡2:1-3). 물욕과 정욕과 사욕을 버립니다 (요일2:16).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빌3:8). 외모를 꾸미지 않고 속 사람을 단장합니다. 곧 온유하고 안정된 심정을 가지려 합니다 (벧전3:3-4).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게 되면, 그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면,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중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들을 하나님의 구원 운동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고후8:1-3). 특히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영육 간에 도와주는 일에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갈4:15). D. 등대 (출25:31-40, 37:17-24) 성막의 출입문을 지나 뜰로 들어가면 번제단과 물두멍을 맞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성소가 있는데 그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있는 것이 등대(燈臺)입니다. 등대는 밤에(저녁부터 아침까지) 등잔불을 켜서 성소 안을 밝히 비추는 역할을 하는 기구입니다(레24:3). 등대는 한달란트(34kg: 약 100근)되는 정금으로 쳐서 만들되, 밑판에 가운데 줄기를 세우고 거기에 4마디로 구분하고 꽃과 꽃받침과 살구꽃 형상의 잔을 각 마디마다 장식하고, 맨 위에 기름을 담을 등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개의 가지를 만들어 거기에도 꽃과 꽃받침과 살구꽃 형상의 잔을 3개씩 달고 그 끝에도 등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운데 원 줄기에 가지가 좌우로 3개씩 연하게 하였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합니다. 이 등대에는 인칭대명사(His- KJV)가 적용되었습니다. 곧 등대가 인격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인격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등대와 같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12:46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등대는 정금 한달란트(34kg: 약 100근)로 만들어졌는데 (39절), 주조가 아닌 단조로 만들어졌습니다 (36절). 곧 금물을 주형에 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공교한 금세공 기술로 쳐서(두둘겨서) 만든 것입니다. 한달란트의 정금 자체가 귀하기도 하지만 침을 받으므로 더욱 값진 기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연상케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값에 대한 진노의 형벌을 받으시므로 택한 백성을 구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교회를 탄생된 것입니다. b.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등대의 원줄기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등대의 가지들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1:20에 “~일곱 금촛대는 일곱교회니라”고 했습니다. 이 가지들이 원 줄기에 붙어 있듯이 교회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고 했고, 에베소서5:31-32에는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지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고, 요한복음10:28에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실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로마서8:35-39에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했습니다. c. 성령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등대의 등잔(燈盞)은 매 줄기 끝마다 하나씩 달렸으므로 모두 7개가 됩니다. 그 등잔에는 순결한 감람유 기름을 두게 했고 저녁에서 아침까지 항상 불을 밝혀 놓게 했습니다 (레24:2-3, 27:21, 슥4:1-6).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靈)이신 성령께서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에 대해 상징으로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요한계시록4:5에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계3:1참조). 첫째, 등잔은 등대의 모습을 비춰 주어 등대를 보게 해줍니다. 등잔이 상징하는 성령께서는 등대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해줍니다.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παρακλητοs)는 대언자, 변호자, 증거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름처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 주고 변호해 주는 사역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과 사역을 알게 하고 그가 말한 모든 진귀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마16:16-17참조). 고린도전서12:3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등잔은 등대의 맞은 편에 있는 진설병상(陳說餠床)과 그 위에 있는 진설병(차려놓은 떡)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진설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진설병을 응식으로 먹는 일을 도와줍니다. 이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요14:6)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4:4).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요14:16). 그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진리되는 모든 말씀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요6:48-59, 14:26, 16:13). 요한복음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진리 안에서(εν τη αληδεια)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진리 안으로(ειs την αληδεια) 인도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λογs)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말씀을 적용(ρημα)하도록 도와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의지와 그 말씀을 지킬 때에 은혜를 느끼도록 감동시키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적인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벧후1:19-21, 계2:7 참조). 셋째, 등잔은 등대의 좌편(지성소 휘장 앞)에 위치한 분향단(焚香壇)을 비춥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분향단 사역을 할 때 도움을 받습니다.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동시에 (롬8:34)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시141:2). 요한계시록5:8에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기도하고자 하는 열의를 갖도록 감동시키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에 대한 감동과 확신을 얻도록 도와주십니다. 로마서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벧전2:9, 계5:10).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기도를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 전도, 봉사, 교제 등 모든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십니다 (요4:24, 행1:8).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무 사역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전 생활에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 분이 역사하실 수있도록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제사장이 금집게로 불똥을 떼어 내듯이, 성령을 근심케 하고 거역하고 소멸하던 불순종의 죄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뜻과 의지와 행동과 육체의 모든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 진설병상 (출25:23-30, 37:10-16) 진설병상(陳設餠床)은 떡을 차려 놓는 상입니다. 크기는 2×1×1.5규빗(1×0.5×0.75m)이고 재료는 번제단이나 분향단이나 법궤와 동일하게 조각목으로 만든 후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상 사면에 테를 두루고 상 위에 놓은 떡이 떨어지지 않도록 상 언저리를 돌아가면서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었습니다. 또 이동시키기에 편리하도록 금고리 넷을 양 면에 부착하고 채(봉,장대)를 꿰어 두게 했습니다. 물론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금을 입힌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담을 수 있는 대접과 분향하는데 사용하는 숟가락과 떡에 바르는 유향을 담을 병(甁)과(레24:7) 전제를 드릴 때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잔을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성소의 모든 기구와 그 부속물을 모두 정금으로 만들었고, 성소 사면을 모두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a. 예수님께서 영적 양식의 제공자임을 상징합니다. 진설병상 위에는 항상 진설병을 두었습니다. 진설병(떡,陳設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 생명의 제공자가 되실 것을 예표합니다. 요한복음6:35,48,58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떡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대표적 단어입니다. 그 떡을 먹는 자는 생명을 부여받게 되고 생명을 유지하므로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주리고 죽었지만, 그것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먹은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요6:48-51, 고전10:1-5). 신약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이것을 알게 해주기 위한 표적이었습니다 (요6:1-35). 그 떡을 먹는 방법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요6:53-58). 예수님이 구원과 영생을 주기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진설병은 곱게 간 고운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발라 익힌 것입니다. 익히는 방법은 화덕에 굽기도 하고 번철에 부치기도 하고 솥에 삼기도 합니다 (레2:1-10). 이 고운 가루는 곡식 열매가 찧음을 받으면서 빻아지고 부서져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의 제물로 바쳐질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큰 고난으로 제물로 올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에 노출되어 잘 구워진 떡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거절과 핍박을 통해 제물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부서지는 듯한 경험과 갈보리 산상에서의 타는 듯한 경험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과 영생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b.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로서 내린 양식 곧 만나를 먹게 한 것은 사람이 육신의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3).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제공받아야 합니다. 첫째, 누룩과 꿀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떡에는 누룩과 꿀이 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레2:11, 6:16). 누룩과 꿀은 죄성과 외식 곧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갈5:9, 고전5:6, 눅12:1, 막8:15, 마16:12).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인본주의가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고전1;17, 렘6:16, 출20:25, 요4:24). 순수한 복음을 받기를 원하며 순수한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고전5:7-8). 둘째,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아야 합니다. 진설병(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 갈고 물리게 했는데, 그 물린 떡은 제사장과 그의 후손들이 거룩한 회막 뜰에서 먹었습니다 (레24:8-9). 우리는 매 주일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특히 죄성과 인본주의가 섞이지 않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갓난 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얻어 먹으려 해야 합니다 (벧전2:2). 셋째, 회막 뜰에서 먹어야 합니다.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회막뜰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레24:9, 6:16). 그 시간은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교제하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설병이야말로 교제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교제의 기초는 진설병이어야 합니다. 모든 교제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희생과 고난이 화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로 인한 은혜를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교제만이 참된 교회(εκκλησια)를 이룰 것입니다. c. 성도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진설병은 2줄로 6개씩 12개가 올려졌습니다 (레24:6). 그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거둔 곡식을 모두 바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므로 생명의 떡이 되어줄 것처럼 이스라엘도 자신들을 온전히 바치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 속에서 연단받은 인격과 변화된 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한 쪽은 익지 않은 제물을 원치 않습니다 (호7:8). 연단된 인격과 변화된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고운가루처럼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떡이 되는 것입니다. F. 분향단 (출30:1-10, 37:25-29) 분향단의 재료는 조각목으로 만들어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크기는 1×1×2규빗(0.5×0.5×1m)으로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졌으며 사면에 뿔을 연하게 하고 금테를 두르고 양편에 두 고리를 만들어 조각목에 정금을 입힌 채(봉)를 꿸 수 있게 했습니다. 위치는 성소에서 제일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진설병상과 금촛대 사이에 있는 동시에 언약궤와 속죄소의 바로 맞은편 휘장 앞에 있습니다. a. 예수님의 중보사역를 예표합니다. 분향단은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등불을 끌 때와 켤 때에 향을 사르는 곳입니다 (7-8절). 그 향연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언약궤와 속죄소 앞에서 올라갑니다. 이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치르므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했습니다 (행9:14). 그리고 우리를 위해 매일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행7:55). 또한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34에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롬8:26).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못했을지라도 우리를 변호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요일2:1). b. 성도에게 기도를 요구하는 표징입니다. 분향단 향연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5:8에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시편141:2에도 “나의 기도가 주의 분향함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보좌에 향처럼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듣는 것처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잡혀 간 이방에서도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한 것처럼 (겔11:16), 어느 곳에서 어떤 형편에서 기도하든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분향단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언약궤와 속죄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25:22, 30:6), 성도의 기도 생활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생활입니다. 첫째, 향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릴 향을 자기가 냄새를 맡을 목적으로 만들면 백성 중에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37~38절). 우리의 기도 목적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의 목적을 알게 합니다. 자기를 많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기 위해 하는 외식하는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또한 구하는 내용이 자기를 위한 것이어도 안됩니다.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마6:25-33, 약4:3). 둘째, 향을 사를 때는 하나님이 지시한 재료와 방법대로 만든 향만 사용해야 합니다. 다른 향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9절). 34~36절에 보면,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을 동일한 중수로 달아 거기에 소금을 치고 곱게 찧어 만들도록 했습니다. 소합향은 눈꽃 모양의 꽃이 피는 키가 작은 나무 껍질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나감향은 바닷 속의 연체 동물 덮개 딱지에서 만든 향품이고, 풍자향은 지중해 연안의 다년생 초본 식물의 줄기에서 채취한 향품이고, 유향은 감람나무과에 속한 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으로 만든 향기로운 향품입니다. 이러한 향기로운 향품으로 향을 만들게 한 것은 아마 성막에서의 희생 제물로부터 나오는 여러 냄새와 주위에 뿌린 피 냄새를 제거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넣은 것은 향품을 굳게 하는 역할을 하거나 위생적 목적을 위해 넣게 한 것 같습니다. 기도의 방법을 알게 합니다. 모든 기도의 기초와 근거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구약에 나답과 아비후가 번제단(구속의 기초)에서 취한 불이 아닌, 여호와께서 취하지 아니한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 당한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레9:24~,10:1-2). 그리고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구하는 근거를 말씀의 약속에 두어야 하며 말씀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에 맞지 않는 것은 구해도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주술적 의미를 가진 습관적인 기도도 옳지 못합니다 (마6:5-7). 셋째, 향은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 살라야 합니다. 향은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 사릅니다 (7-8절). 이는 아침과 저녁을 가리킵니다 (27:20-21). 기도의 시기를 알게 합니다. 기도할 때 만물을 접하기 전 새벽에 기도로 시작하여 일을 마친 후 저녁에 기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꼭 아침 저녁 하루에 두번 하라는 의미보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3번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단6:10). 넷째, 향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피워야 합니다. 향은 아침 저녁으로 매일 피워서 향불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8절下). 기도의 기간을 알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문제 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신자된 의무입니다 (삼상12:23). 그런 다음에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 특별 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기도도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정한 때까지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눅18:1-8, 겔36:37). 우리에게 기도할 제목이 있다면 항상, 그리고 그 내용이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 10:12-14에 보면, 다니엘이 21일 동안 작정기도를 했을 때 21일째 되는 날에 기도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향단은 1년에 1차씩 아론이 속죄피를 뿔에 바르므로 정결케 했습니다(10절). 성도는 가끔씩 특별기도 기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상적인 기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속죄를 생각하며 자신의 본질적인 죄를 깊이 회개하는 특별기도 기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나 국가적으로도 특별기도가 필요합니다. 미스바 부흥 운동과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 운동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개인의 중대한 문제를 두고도 특별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는 핍박 문제를 두고 히스기야는 국가적 위기와 질병 문제를 두고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21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 느헤미야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모르드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금식하며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성역을 앞두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특별기도를 했고,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특별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호흡입니다. 잠시라도 중단하면 우리 영혼은 생명력을 잃고 마귀에게 지게 됩니다. 한시도 깨어 기도하지도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26:40). 그리고 항상 깨어 기도하라 베드로를 통해 주신 권면을 깊이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벧전5:8). 기도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력이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막9:29). G. 휘장 (출26:31-33)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습니다. 그 두 방을 나누기 위해 휘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휘장은 흰색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 형상의 수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조각목으로 입힌 네 기둥의 갈고리에 늘어뜨렸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 휘장은 4지 폭의 두께로서, 말 10필로 양쪽에서 동시에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휘장이라고 합니다. a. 하나님의 거룩성 수호를 상징합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이 휘장은 성소 뒤에 있는 지성소를 가리기 위함이요 누구든지 지성소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속죄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히9:7). 일반 제사장들까지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들어가면 즉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이라도 하나님이 명한 규례를 지키지 않은 채 들어갈 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사역을 위해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죽어도 그 시체를 가지고 나오기 위해 다른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이 그 곳에 들어갈 때는 발에 끈을 묶고 들어갔습니다. 그가 죽을 경우 들어가지 않고 줄을 당기기 위함이었습니다. 레위기16:2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 곳에는 하나님 자신이 임재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인들과 교제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보면 죽였습니다 (출19:24).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그 지성소를 지키게 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 휘장에 그룹을 수놓게 했습니다. 그룹은 천사를 가리킵니다. 천사는 직책에 따라 4 종류로 나뉩니다. 첫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수호하는 천사이고 (창3:23-24), 줄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수종드는 천사이고,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이고, 넷째, 미가엘은 영적 전투를 맡은 천사입니다. 하나님이 이 휘장에 그룹은 수놓게 한 것은 지성소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천사로 지키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사무엘상6:19-20에 보면, 바벨론에 빼앗겼던 법궤(안약궤)가 유다 땅 벧세메스에 도착했을 때 유다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 보다가 70명(5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법궤가 온전한지 그 안에 들어있는 율법판이 제대로 있는지 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법궤는 하나님 임재의 표상으로서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한 성구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안전을 확인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침범한 죄가 되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수3:4, 민4;15, 출19:24). 하나님은 스스로 당신의 성성(聖性)을 지켜 나가십니다. 사무엘하6:6-7에 법궤가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쯤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상15:13). 법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도 잘못이나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당신이 친히 책임지시는데 붙잡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친히 세워 나가시고 지켜 나가십니다 (계2:1). 우리는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3:4, 민4:15 참조).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다스리는 곳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합니다. 휘장 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속죄피를 가지고 1년에 1차씩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히9:7).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적 상징입니다 (히9:11-12). 이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표징입니다 (히10:19-20). 그래서 이 휘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마27:50-52, 막15;37-38, 눅23:45). 우리는 다 본질적으로 죄인들입니다 (롬3:10). 하나님께 나아갈 수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려 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고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3:12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성격을 믿는 자는 사죄와 칭의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하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c.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31절에 보면 휘장은 가늘게 꼰 베실(흰 세마포)에 로 짜서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를 놓은 것입니다. 그 색깔들은 전에 출입문을 강해할 때 이미 말씀 드린 대로 한결같이 오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 줍니다. 첫째,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성품인 생명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요3:13,31, 고전15:47). 이는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λογοs)로서 육신(σαρξ)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을 생각게 합니다 (요1:1,14, 마27:43, 빌2:6). 둘째, 자색은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세와 존귀를 나타냅니다 (삿8:26).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악령과 죽음과 질병을 물리치신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마27:38, 28:18). 셋째,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순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계7:14). 이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모습과 죽기가지 복종했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마11:29, 빌2:8). 넷째, 흰색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결과 순결을 나타냅니다 (계19:8, 20:11). 이는 그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일3:5). 이 4가지 색깔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각 다른 시각(핵심은 같지만)에서 기록한 4복음서와 잘 대조되기도 합니다. 자색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제시하는 마태복음(사자복음)에, 홍색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종으로 제시해 주는 마가복음(송아지복음)에, 홍색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제시해주는 누가복음(사람복음)에, 청색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는 요한복음(독수리복음)에 잘 어울리는 색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돕는 하늘의 천사들도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4:7에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했습니다(겔1:10참조).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우리도 이 4가지 색깔이 의미하는 성품을 점점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합니다. H. 언약궤 (출25:10-16) 언약궤는 증거궤, 법궤라고도 합니다. 언약궤는 2.5×1.5×1.5규빗(1.2×0.7×0.7m)의 크기로 조각목으로 만들어 정금을 입혔습니다. 위로 돌아가면서 금테를 둘렸고 양편에 두 금고리를 만들어 채(봉)를 꿰어두게 했습니다. 물론 이동할 때 쓰는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성경에는 성막기구 중 언약궤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언약궤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열왕기상8:9과 역대하5:10에 보면 언약궤 안에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9:4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모세의 두 돌 비석(율법판)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들은 원래 세가지 물건이 다 들어있었는데 이스라엘이 언약궤(법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삼상4:17), 두가지 물건은 없어지고 두 돌판만 남았다고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궤 안에는 처음부터 두 돌판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에 하나님은 그 법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법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또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도 그 법궤를 열어 보다가 적어도 70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5:1-8, 6:19). 그런 정황을 볼 때 만일 법궤 안에 세가지 물건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물건을 잃어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율법판만 언약궤 안에 두게 했고 (출25:21)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궤 안에 두라 하지 않고 궤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출16:33-34, 민17:10). 그런데도 히브리서에서 세 종류가 다 안에 있었다고 한 것은 사실 여부에 관심보다는 언약궤와 관련하여 표징으로 보관되었던 물건들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들이 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대로 그 세 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있고, 그것들이 예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직분된 표호들입니다. a. 예수님의 본질을 알게 하는 표징입니다. 첫째,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 (10절). “조각목”(히. 싯딤 아체이, shittim wood -KJV)은 단단하고 내구력이 강한 나무로서, 광야의 혹독한 역경 가운데서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나무는 아카시아 나무와 비슷해서 좋은 목재로는 쓸 수 없고 화목(火木)으로나 쓸 수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무입니다 (신10:3).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인성(人性)을 가지셨음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사53:2-3). 시편 기자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시118:22).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애굽의 망명생활을 했으며 나사렛의 한 촌에서 살았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사셨으며 침 뱉음과 능욕을 당하고 가시관과 창과 못에 찔려 그의 생명을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체휼하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라고 했습니다. 둘째, 언약궤는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11절).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짠 다음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정금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그의 출처와 본질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으나 근본적인 본질은 하나님이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근본은 태초에 만고에니라”고 했습니다 (미5: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1:2-3). 바울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했고 (빌2: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했습니다 (골1:15-16).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대인들과의 자기 증명에 관한 변론에서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던 자라고 선언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요8:51-58). b. 예수님의 직임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왕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16절에서 말한대로 두 돌판(율법판,증거판)이 있었습니다. 이 두 율법판은 모세가 두번째 받은 돌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율법판을 받아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던져서 깨트렸습니다(출32:19). 그리고 다시 산에 올라가 전과 같은 내용의 두 율법판을 다시 받아 안약궤 안에 넣은 것입니다 (신10:2). 율법은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율법의 정죄에 의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의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율법의 정죄와 그 형벌을 이기시고,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민수기17:8-11에 보면, 고라당을 중심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며 쳤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위해 12지파의 족장들의 지팡이를 언약궤 앞에 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아론의 이름이 적힌 지팡이에만 싹이 났습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의 족장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은 백성들이 죄를 지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므로 백성이 죄사함을 얻도록 중보 역할을 하는 직분입니다. 7월 15일 대 속죄일에 속죄 피를 가지고 지성소 언약궤 뚜껑의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화목케 합니다. 그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히6:20).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없이할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시킬 수 있습니다 (요14:6, 행4:12, 고후5:18). 셋째, 예수님의 선지자직을 상징하는 표호입니다. 출애굽기16:33-3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슬같이 만나를 내려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표징을 삼게 하려고 항아리에 한 오멜의 만나를 담아 언약궤 앞에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고전10:3-4).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 (요6:35).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로서 내린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요6:49-50). 예수님은 하늘로서 와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었습니다. 또한 자신과 말씀과 표적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 관한 모든 진리를 나타내어 우리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합니다. c. 복음 사역 방법을 제시해주는 표징입니다. 이스라엘이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었던 이 언약궤가 가장 중심에서 갔듯이, 우리의 생활 중심이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의 현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전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출3:2-3, 고전1:27-2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생활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생활을 할 때 존귀해집니다. 진정한 존재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첫째, 언약궤는 채(봉)로 메고 가야 합니다 (13-14절). 언약궤는 레위 자손중 고핫 자손으로 하여금 어깨에 메고 가도록 했습니다 (민4:15). 수레에 싣거나 짐승으로 끌고 가게하면 안됩니다. 힘들어도 사람이 메고 가야 합니다. 사무엘하6:6-7에 보면 언약궤(법궤)를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아비나답 집에 20년 동안 있다가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새수레에 싣고 소로하여금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 마당쯤 왔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대상15:13). 웃사가 법궤를 붙잡으려는 것이 큰 잘못이지만,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소로 끌게 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식이 없는 수레나 이성과 영혼이 없는 소에 의해 섬김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으로서는 복음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과 영혼이 있는 인간에게 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직분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인격입니다. 바른 관계성입니다. 우리의 물질, 건강, 지식, 명예, 은사가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둘째, 채는 언약궤의 고리에서 빼지 않아야 합니다 (15절). 채를 언약궤에서 빼지 말고 항상 꿰어 두게 한 것은 하나님이 언제 이동을 명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동하면 즉시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군사로 말하면 항재전장의 정신, 임전태세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적은 무리라도 기드온 300명 용사와 같은 항재전쟁의 정신을 가진 정예군이 필요합니다 (삿7:4-6). 신명기20:5-6에는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치 않은 자,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여자와 결혼하고 그 여자를 취하지 못한 자, 두려워 하는 마음에 겁내는 자는 돌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후서 2:4에서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대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는 전투 정신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5;8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I. 속죄소 (출25:17-22) 시은소(施恩所)라고도 하는 속죄소(贖罪所)는 정금으로 2.5×1.5규빗 (1.2×0.7m)의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 역할을 하도록 언약궤 위에 올려 놓았는데, 그 위에는 정금으로 그룹을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a.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21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율법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언약궤의 사역만 있고 속죄소의 사역이 없었다면 이 은혜의 보좌는 한낱 소름기치는 무서운 심판의 보좌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율법판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율법판은 죄를 드러내어 정죄합니다. 죄성을 들춰 내어 더욱 반항심을 갖게 하여 죄를 더하게 하기도 합니다. 율법은 그것을 어기는 자에게 죽음을 선고합니다. 로마서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가 사람에게서 제거되고 사망의 법인 율법의 심판과 정죄에서 피할 수 있는 방도로 속죄소로 언약궤를 덮게 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게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죄값으로 이 율법의 선고에 의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9:22).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무시무시한 공의의 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덮게 한 것입니다. b.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결과를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년에 1번 있는 대속되일이 되면 대제사장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해 휘장 안 지성소로 들어 갔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번제단에서 취한 속죄제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위에 1번 뿌리고 그 앞에 7번 뿌렸습니다. 번제단에서 죽은 흠없는 생축의 피가 속죄소에 뿌려지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사(赦)해졌습니다. 히브리서9:7에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 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죄사(罪赦)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어 그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를 흘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게 했습니다. 에베소서1:7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눈 같이 희어졌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도말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과가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겨졌습니다. 둘째,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갈3:13) 다시는 그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권세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롬8:33-34). 셋째,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요한일서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3:12에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마27:51). 그래서 22절의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된 것입니다. c. 구속사역에 대한 천사들의 경탄을 보여 주는 표징입니다. 18-20절에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속죄소 위에는 그룹 천사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직책에 따라 스랍, 그룹, 가브리엘, 미가엘이 나옵니다. 그 중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천사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룹이 하나님의 위엄을 수호하는 직책을 갖고 있지만 (창3:24), 속죄소 위의 그룹은 속죄소 사역에 수종 드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은 빈속한 순종을 위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사6:2). 또한 서로 유기적 협력을 위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겔1;11-). 그리고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보좌에 있지만 (마18:10),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직접 도왔습니다 (마4:11, 28:2). 천사는 오늘날 성도의 구원 사역을 돕기도 합니다. 히브리서1;14에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고 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수종 들면서 예수님의 구속과 성도의 구원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합니다. 베드로전서1:12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43:19-20). 주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고 하나님과 화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5:18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직책 곧 복음 전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고후9:16, 롬1:14, 행20:23-24). 또한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는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엡4:32, 마18:33, 마7:1-5, 6:14-15, 18:21, 약2:13).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J. 지붕 (출26:1-14)

성막의 지붕은 4겹의 덮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덮개들은 안쪽에서부터 세마포 덮개(1-6절), 염소털 덮개(7-13절), 수양가죽 덮개(14절上), 해달가죽 덮개(14절下) 순으로 덮여 있습니다. a. 예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지붕의 가장 안쪽에는 세마포 덮개로 덮었습니다 (1절). 28×4규빗(14×2m) 크기의 세마포를 10폭으로 만들어 서로 이어서 지붕으로 덮었습니다. 그 덮개는 가늘게 꼰 베실 (흰색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 형상의 수(繡)를 놓았습니다. 이 4가지 색깔과 그룹 천사의 형상은 출입문과 휘장에서도 살펴본 내용입니다. 첫째, 흰색은 그리스도의 무죄함과 순결하심과 의로움의 성품을 상징하고, 둘째, 청색은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기원의 성품을 상징하고, 셋째, 자색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권위와 영광의 성품을 상징하고, 넷째, 홍색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의 성품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사람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누가복음에, 청색은 독수리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에, 자색은 사자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마태복음에, 홍색은 송아지 복음으로 일컬어지는 마가복음에서 각각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수종드는 천사의 성품에서도 나타나는 색깔들이기도 합니다 (겔1:10, 계4:7). 4가지 색깔들로 공교하게 수놓아진 그룹들은 항상 성소와 지성소를 내려다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천사는 사역적 직책에 따라 4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스랍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수종들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사3:6,6:2). 둘째, 그룹은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수호하며 낙원 입구를 수호하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창3:24, 출25:18). 셋째,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직책을 가졌고 (단8:16, 9:21, 눅1:19,26, 행7:53, 갈3:19), 넷째,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대적과 악령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직책을 가졌습니다 (단10:13,21,유9, 계12:7). 그런데 그룹 천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성소와 지성소에서 사역(봉사)하는 제사장 위로 날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사장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자세입니다. 동시에 보호하려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뿐아니라 성도의 구원 운동도 도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1:14에는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했고, 베드로전서1:12에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라고 했고, 시편34:6-7에는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2-3절에 보면 10폭의 세마포 앙장이 서로 연(連)하여 한 지붕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이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구원 운동을 돕기 위해 서로 연합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1:9,11-12에 ”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또한 세마포 앙장이 서로 연(連)연한 것은 성도의 연합과 교회의 연합을 상징합니다. 에베소서2:21-22에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고, 4:16에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連絡)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은사를 서로 연합하여 구원 사역을 이루어야 하고 (고전12:4-30참조), 교회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속죄를 타나내는 표징입니다. 두번째로 덮는 덮개는 30×4규빗 (15×4m) 크기의 염소털 덮개입니다. 첫번째 덮은 세마포 덮개 보다 길이가 1m 정도 더 깁니다. 이 앙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러 오심에 대한 예언적 상징입니다. 레위기16:18-22에 보면, 아사셀의 염소에 대해 나옵니다. 대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이 염소 2마리를 잡아 한 마리는 제단에서 잡아 그 피를 제단 기초에 뿌렸으며 (요1:29), 한 마리는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한 다음 무인지경에서 광야로 돌려 보냈습니다. 그 염소는 다시 찾지도 않으며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과 그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도말해짐에 대한 완전한 상징적 의식이었습니다. 이사야1:18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라고 하였고, 시편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였고, 예레미야31:34에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씻을 수 없는 많은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원죄(정죄,유전죄)이든 본죄(자범죄,요구죄)이든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셔서 모든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과 그 증후군들이 각종 결핍과 고난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죄와 고난을 주님께서 법적인 의미를 뛰어 넘어 실제로 정복케 해주실 것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c. 예수님의 대형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지붕의 세번째로 덮는 수양가죽 덮개는 붉은 물을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서 비록 보이지는 않는 앙장이나 성막을 좀더 보호하기 위해 덮은 가죽이었습니다.

이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셔서 대신 형벌받으신 면을 예표합니다. 창세기3: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무화과 잎으로 엮어서 수치를 가리려 했으나,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을 입혔습니다. 그 짐승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가리기 위해 대신 죽은 대속물(代贖物)이 된 것입니다. 아담이 죄로 죽어야 할 자리에 그 짐승이 죽어 아담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롬6:23, 히9:22). 이 짐승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실 것을 예표합니다 (행4:12, 요14:6).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오실 그리스도의 대형대속(代刑代贖)하실 것을 바라보게 하려고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창세기4:3-5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 곧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첫태생 수양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안받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로 제사하는 것이 오실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속의 음영(그림자)이기 때문이요, 짐승으로 제사하는 것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은 것은 그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가인의 제사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안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레위기 2장에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2장에 나오는 소제(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항상 번제(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29:40, 민15:1-10). 소제는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를 근거할 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열납 여부를 제물의 차이에 두지 않고 죄행에 두고 있습니다. 가인은 생활 가운데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서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3:12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인은 악한 자로서 행위가 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본문 다음 구절들에 보면 가인이 제사가 열납되지 못한 것을 보고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창4:6-7). 그래서 가인이 평소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들은 가인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아니라 결과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곧 가인이 시기 분노하여 살인한 내용을 두고 한 말이지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22:13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은 이삭 대신 수풀에 걸린 수양을 잡아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수양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을 잡아 제사하면서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서 한 수양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죽음(피흘림) 대신 짐승의 죽음(피흘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 수양이 대신 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실 대석자에 대한 음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53:5-6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신 대형대속(代刑代贖)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d. 예수님의 인성를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성막 지붕의 맨 마지막 덮개는 해달의 가죽 덮개입니다. ‘해달'(海獺)은 각주에 물돼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일강이나 홍해에서 떼를 지어 서식하고 있는 해양동물 곧 수달입니다. 이 동물은 광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물입니다. 아마 이 가죽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신발을 만들 구실로 가지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해달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보여 주는 완전한 그림자입니다. 해달 가죽은 색상이 없고 약간 붉으스레한 회색의 우중충한 덮개입니다. 이 덮개는 매혹을 줄만한 가치나 볼품이 전혀 없었습니다. 덮개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맨 위에 덮여져 있기 때문에 해와 비와 폭풍의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외부 요인들로 인하여 혹독함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면 사방이 정금으로 싸였고 베실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정교하게 수(繡)놓은 찬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출입문을 지나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하여 성소로 들어간 자만이 볼 수 있는 진귀함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음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는 해달가죽 같습니다. 이사야53:2-3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고, 마태복음13:55-57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 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유가 그의 외부적인 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요1;10-11).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서 미련하게 보일 뿐이요 거리끼는 것일 뿐입니다 (고전1:18,23). 하나님이 하시는 우리를 통해서 해 나가시는 진리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말씀을 공급받고 기도의 교통을 하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자는 그 보배로움을 압니다. 그 영적 아름다움은 받는 자만 아는 세계입니다 (계2:17). 그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삽니다 (마13:44). 우리는 성막의 지붕 덮개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며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막의 구조와 영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음영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과 헌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두멍의 놋도 여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거울로 만들어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특히 본문에 나왔던 해달 가죽은 백성들이 신발을 만들어 신기 위해 가지고 나왔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성막을 이루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섭리해 주셨습니다. 신명기8:4에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고 (29:5), 느헤미야 9:21에도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물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알게 해 줍니다.

속죄일에 대한 규례 차용철 2009.09.26 고통관에 대한 제언 지팡이 200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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