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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 자르기, 두 번째 에피소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숨겨진 의미, Part 1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언어/인종/문화의 장벽을 넘어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이 너희의 이웃이니 그들을 도와 주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비유의 유일한 교훈이라면 우리는 교회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도 모두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꼭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우리의 그을린 심지를 자릅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의비유 #강도만나죽게된유대인 #복음의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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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 – 국민일보
[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 … 레위인, 제사장은 본 척도 안 하고 지나갔는데 착한 사마리아인은 지나치지 않고 그를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8/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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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눅 10: 25-37> The Way of Discipleship(IV)―Becoming a Good Samaritan 플로리다의 한 신문이 최근에 일어난 웃지 못할 이야기를 보도하고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8/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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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와같이 하라 선한사마리아인 설교 누가복음 10장 25-37 …
너도 이와같이 하라 선한사마리아인 설교 누가복음 10장 25-37절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프로필. 엔젤로테. 2016. 11. 5. 14:13.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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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장 하나님 말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 …
… 사람의 비유의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본문 눅 10:25-37 설교 내용 지난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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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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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이웃은 만드는 …
이웃은 만드는 것이다 (눅 10:36-37)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번쯤을 들어 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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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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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5-37 (9.27.2009)
한국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보다 더욱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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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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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성경 –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 …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이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 …
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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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나무위키
이 실험이 민간 설교에 크게 퍼진 이유는 이 실험의 피험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크게 부끄러워하거나 결과를 보고 인상깊게 여겼는지, 후일 정식으로 목사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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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선한 사마리아인 설교
- Author: 이이레의 예수쪼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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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5.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iNhc0TCoME
[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
이 비유는 피상적으로 보면 너무 간단하고 쉽다. 비유 내용은 이렇다. 어느 길에 죽어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레위인, 제사장은 본 척도 안 하고 지나갔는데 착한 사마리아인은 지나치지 않고 그를 극진히 보살펴주고 고쳐 주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너도 그렇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선행을 베풀고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많은 경우에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 이유로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호는 착한 일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그러나 이 비유는 우리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먼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대상이 누구인가. 율법학자이다. 즉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 예수님에게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29절)‘내가 누구를 도와야 합니까’라고 물어서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나는 도울 의지가 충분히 있는 의로운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놀라운 말로 그에게 역질문하셨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것이다.(36절)왜 이 질문이 놀라운가. 우리는 율법학자가 도와야 할 대상, 그 불쌍한 사람이 당연히 ‘강도 만난 자’로 생각한다. 아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으셨다. 율법학자의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되물어서 율법학자를 의미하는 ‘나’에 ‘강도 만난 자’를 대입시켰다.무슨 뜻인가. 율법학자, 그가 곧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율법학자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네가 지금 누구를 돕겠다는 것이냐. 내가 보기에는 네가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구원이 필요한, 치유가 필요한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율법학자는 자신을 누구든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의로운 자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나는 이런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고, 언제든 남을 도울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선한 사람임을 증명하려 했다.그 의도 앞에 예수님은 ‘네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너는 네가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지 마. 너는 너 혼자 스스로 구원할 수도, 일어나 걸어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 라고 그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오히려 본인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이것은 비단 율법학자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많은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갑의 위치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해냄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한다.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주관하여 주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나의 가장 정확한 정체성이다.우리는 모두 다 강도 만나 피 흘리고 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은 자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임을 알 때 참 복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
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 설교자료실
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The Way of Discipleship(IV)―Becoming a Good Samaritan플로리다의 한 신문이 최근에 일어난 웃지 못할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집 안뜰(patio)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타려다가 기어를 잘못 밟아서 자기 집의 식당에 처박게 되었습니다.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는 남편을 발견한 아내는 급히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병원에서 상처부위를 치료하는 동안 부인은 다시 집에 돌아와 집안으로 들어온 오토바이를 원래 있었던 곳으로 옮기고 바닥에 가득 고여 있는 오토바이 기름, 즉 개솔린을 휴지로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름이 묻은 휴지를 화장실 변기통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집안 청소를 마친 부인은 병원에서 간단한 수술을 받은 자기 남편을 집에 다시 데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오토바이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 부엌문과 파손된 오토바이를 바라볼 때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래서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 화장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담배를 다 피운 뒤 남은 꽁초를 이 남자는 변기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자기 부인이 오토바이 기름 닦은 휴지가 들어 있어서 갑자기 불이 났습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엉덩이 밑에 불길이 솟아 이 남자는 바지를 다 태우고 엉덩이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기겁을 한 아내가 다시 구급차를 불렀는데 공교롭게도 그 구급차의 직원들은 처음에 자기 남편을 병원에 후송해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남편을 들것에 싣고 가던 구급차 직원 한 사람이 부인에게 어떻게 자기 남편이 엉덩이에 화상을 입게 되었는가를 물어서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심하게 웃다 보니까 이 구급차 직원이 잡고 있던 들것을 놓쳐버려서 이 남자는 땅바닥에 떨어져 이번에는 팔목을 다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설상가상, 혹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표현이 이 남자를 두고 생겨난 말 같습니다.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강도 만난 나그네처럼, 그리고 플로리다 신문에 난 이 남자처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어떤 사람은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상처 입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도대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선한 이웃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일러주십니다.어떤 나그네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입은 옷을 다 빼앗기고 심하게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는 약 20마일 정도거리의 가파른 내리막길로 곳곳에 널려있는 바윗돌 때문에 강도들이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도 만나 만신창이가 된 나그네 곁을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한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면 종교지도자 혹은 성직자가 그냥 못본채하고 지나갔습니다. 둘째로, 레위인, 즉 성전에 있는 예물들을 관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던 사람도 이 나그네를 피하여 그냥 지났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번에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강도 만난 나그네를 못본채 지나갔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나그네를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응급처치를 해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계속해서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두 데나리온의 돈까지 주었다고 했습니다. 두 데나리온은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여관에서 숙식을 함께 할 수 있는 분량의 돈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데나리온의 돈을 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치료비가 더 들면 자기가 다시 돌아와 나머지 액수까지 다 갚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주막 주인에게 백지수표를 건네 준 것처럼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사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착한 이웃으로 표현되지 않고 천대받고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722년경에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패망 당한 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유대주의자들은 유대민족의 순수성과 유대교의 정통성을 사마리아인들이 훼손시켰다는 사실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전 109년경에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라는 유대왕이 그리심산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한 다음부터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이 깊은 증오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 보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길거리에 만나서 인사도 하지 않고 아예 서로 상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을 선한 이웃으로 부각시켰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첫째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한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에서 나온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 혹은 성경을 열심히 기록하고 연구하던 서기관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적어도 율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알고 있던 율법 지식을 자랑하기 위하여 자기가 어떻게 해야지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숨겨진 의도를 아시고 율법사의 지식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도록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26절)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명기 6: 5에 있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과 레위기 19: 18의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율법사는 구약에 나와있는 613가지 율법 조항의 진수가 바로 이 두 계명에 집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시고 이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더욱더 자기 자신의 율법 지식을 자랑하기 위하여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절)하고 예수님께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율법사는 “내가 어떻게 선한 이웃으로 살아갈까?” 하는 실천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이웃인가?” 하는 지식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뒤 다시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도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 즉 사마리아인”(37절)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옳게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율법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그리고 누가 내 이웃인지에 대해서는 율법사나 예수님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의견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한 가지가 차이가 있다면 율법사는 구약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영생을 얻기 위한 지식과 세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상처 입은 나그네의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해서는 바로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둘째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도대체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나그네를 그냥 스쳐 지나갔던 것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죽은 시체를 만져서 안된다는 율법 때문에, 즉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던 율법 지식과 종교적 책임 때문에 거의 죽게된 사람을 만져서도 안되고 돌보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질문을 던졌던 율법사와도 관계됩니다. 바로 율법적인 족쇄에 매달려 선을 분명히 실천해야 할 자리를 피하는 율법사 자신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역사적으로나 민족적인 감정으로 볼 때 도저히 강도 만난 나그네를 도와줄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보건대 사마리아인은 수중에 돈도 있었고 나귀와 같은 짐승도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강도 만난 나그네를 돕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신도 강도를 만날 위험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런 모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깊은 곳에 강도 만난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선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는 어떤 장벽도――예컨대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계층적 장벽을――모두 뛰어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불교 신자인데다가 과거에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어떤 일본 사람이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비록 우리가 기독교인이고 한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셋째로, 우리는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주인공 중에 누구에 속합니까? 제사장입니까? 레위인입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입니까? 교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연극을 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이나 레위인 역보다는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만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조건 없이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에 매력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강도 만난 나그네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기 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자비와 사랑과 긍휼로 상처 입은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상처 부위를 싸매 주시고 치료하시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셔서 오늘도 상처 입은 우리를 도와주실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똑같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아무리 고상해도 그것을 시간과 물질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기 전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다음과 같은 예화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림으로서 저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두 사람의 수도사가 살을 찢는 듯한 추위 속에서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널 때 다리 밑 협곡에서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멈추어서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해가 지기 전에 수도원에 도착해야지만 얼어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수도사는 갈 길이 멀지만 다리 밑 계곡에 빠진 사람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건져내어 그를 부축하고 천천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수도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지기 전에 수도원에 도착 해야지만 얼어죽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만 한 채 계속해서 빠른 걸음으로 자기 길을 걸어갔습니다. 드디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자 날씨는 살을 에듯이 더욱더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수도사가 목적지인 수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웬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넘어지게 한 장애물을 만져 보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수도원에 도착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자기 형제 수도사의 시체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목숨만 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리 밑에 떨어진 불쌍한 사람의 아픔은 외면한 채 수도원으로 돌아오다가 얼어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도와준 수도사는 날씨가 추워져도 옆에 부축하고 있는 사람의 체온이 따뜻하게 전해져와 결국은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 16: 25)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우리가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만 있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II세가 자주 인용했다는 조지스 버나노스(Georges Bernanos)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귀한 교훈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숫자의 교회 개혁자들이 아니라 더 많은 성자(聖者)들이다.” (What the church needs is not more reformers, but more saints.) 아멘.김흥규목사
너도 이와같이 하라 선한사마리아인 설교 누가복음 10장 25-37절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너도 이와같이 하라 선한사마리아인 설교 누가복음 10장 25-37절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눅10:25-37
우리가 서로 얼굴은 잘 모르지만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찬양
하는 우리 성도들과 함께 아름다운 예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지요. 지금 동남아에서는 매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또 동남아
로부터 중국과 북한까지 이어지는 가뭄 대에 해당하는 지역은 가물어서 곡식이 흉
작으로 걱정들이 태산인데, 금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맑은 가을 하늘을 주시
고, 또 풍년을 주시고 이런 저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주일마다 이렇게
나와서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셔서 여러분이 ‘주여 나에게 이와 같은 많
은 은혜를 주시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주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십니
까?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음성 듣게 하옵소서.’ 하는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
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율법사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이라면 그가 누군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직 자세
히 모르시는 분은 이 단어 자체가 요즘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에 율법사
가 뭐냐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사이 우리 현대말로 하면 ‘율사(律師)’
라고 할 것입니다. 법을 전공한 사람, 또는 법 쪽에서 일을 하는 전문가라고 보시
면 됩니다. 당시 유대 나라의 법이라는 것은 전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전공하고 율법에 대해서 유권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가
지고 있고, 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을 일컬어서 율
법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서기관들도 상당수가 이 율법사의
그룹에 속한 자들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대 나라의 엘리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해서 좀 알다 보니까 예수님을 평생 못살게 굴었던 사람
들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에게서 어떤 티를 잡아내어 법망에 걸어 넣
으려고 매일 강아지 따라다니듯이 따라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이런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약점을 찾아보려고 질
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기가 막힌 질문을 했습니다. 비록 좋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
이지만, 질문 하나만은 끝내주는 질문을 했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제일 먼저 물어야 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면, 그
정확한 대답을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그런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 질문이기 때문입
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혹은,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말로 바꾸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좀 더 쉽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천국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아직도 이런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는 캄캄한
흑암 속에서 헤매는 사람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좀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
만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다 이 질문을 했고, 이 질문에 대한 대
답을 얻었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을 예
배하는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율법사가 누군가 하는
것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물으나 마나지요. 다 알고 계
십니다. 그가 좋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그에
게 거꾸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이 말씀을 바꾸
면 “너 율법사가 아니냐? 몰라서 묻니? 너 율법에 정통한 사람인데 네가 한번 대답
해 봐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이 율법사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27절
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
이다.”
예수 믿으면서 이 구절 못 외우시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구구단 못 외우는
학생하고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본문을 일컬어 모든 율법을 전부 요약해서 표현
한 말씀, 율법의 대강령, 율법의 주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모든
율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27절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
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전인격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 범할 리가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되이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에, 다 팽개치고 제
맘대로 놀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면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다
지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웃을 내 몸처럼만 사랑할 수 있다면 부모 공경하
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를 범할 리가 없습니
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죄를 범합니까? 그러니까 모든 율법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율법 하면 보통 구약 성경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이야기합니까? 창세기
부터 신명기까지 소위 모세 오경이라고 하는 부분을 들지 않습니까? 결코 만만한
분량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 끝까지 읽으려면 아마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 이 율법사가 그런 모세 오
경에서 영생 얻는 방법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뽑아냈으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
합니까? 백 점 짜리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율법사가 대답은 그렇게 빈틈없이 했지만, 그가 어떤 사
람인가 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아는 것만큼 살지 않는 사람
이었습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는 가르칠 줄 모르는 위선자였습니다. 자기 이웃
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인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는 그대
로 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
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이 율법사들은, 예수님이 표현한 것처럼 “자기
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문에서 막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11장 46절에서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을 하셨는지요. “화 있을진
저.” 현대말로 바꾸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이
정도의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보면 소름 끼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 다음 말씀을 보
십시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바로 이게 율법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져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사람이 힘이 세어 금방 일어나서 가볍게 지고 가면 간단하지만, 힘이 부쳐 일어나
다가 주저앉고 일어나다가 주저앉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옆에 가서 좀 도와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어나 걸어갈 수 있도록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저는 초등
학교 시절에 많이 해 봤습니다. 어머니께서 무거운 짐을 이고 끙끙 앓으면서 일어
나다가 푹 주저앉으면 일어날 수 있도록 해드리느라고 거들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게를 지고 일어나다가 푹 쓰러지면 아버지가 와서 일으켜주시면서 그것도
못 지냐고 하시지요. 못 지는 걸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남에게
짐을 지운 사람은 옆에서 도와줘야 됩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해라. 어느 계명
지켜라. 어느 율법을 지켜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잔뜩 지워주고는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옳도다. 네 말대로 가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이 율법사가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서
“선생님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갔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자기의 악한 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저, 선생님, 이웃이 누
구입니까?” 하고 말꼬리를 잡고 나왔습니다. 이웃에 대한 논쟁을 한번 해보자는 것
입니다. “도대체 누굴 가지고 이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내 몸처럼 사랑할 이웃
이 도대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한번 우리 논쟁 좀 해봅시다.” 하는 식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랑이라는 것은
실천이 중요한 것이지 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사랑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론을 가
지고 따지기 보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이 사랑인데, “도대체 이웃
이 누구입니까? 정의 좀 내려봅시다. 이웃의 개념이 뭡니까?”하고 대들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굳어있는 사람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자기는 제대로 살지 않으면서
성경 이야기만 가지고 나오면 그 말의 의미가 어떻고, 개념이 어떻고, 오늘날 이런
시대에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 한다면서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들이 많습
니다. 목사가 그렇게 떠들면 그게 자기 전공이니까 밉지라도 않을텐데 평신도들이
그렇게 요란을 떨면 정말 밉습니다. 꼴 보기가 싫어요. 그 말씀대로 사는 것만 해
도 벅찬데, 언제 그걸 가지고 말장난 할 수 있습니까?
누가 네 이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그의 악한 의도를 아시면서도 친절하게 이웃이
누군가를 이야기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도상에서
강도 만난 어떤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도망간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도와서 생명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
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이야기를 잘못 보면 비유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
해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군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적당히 꾸며서 한 이야기로 듣기
쉽다는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것을 단순한 비유정도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네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네 사람 중에 세 명이 유대인이고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입
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앙숙의 관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더러운 피가 섞였
다고 해서 완전히 인간 이하로 다루면서 멸시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서러움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 하면 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자다가도 생각하면 울화통
이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종족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기나긴 세월을
원수지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유대인이요, 율법사도 유대 사람이요, 예수님을 둘러서서 예수
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다 유대인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유대인
틈바구니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미화하고 유대인들은 전부 다 악역으로 몰아붙이
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그 자리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갈까요? 속된
말로 뼈도 못 추릴 수 있는 분위기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그런
데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고 난 다음에도 예수님에게 대항한다든지 트집을
잡는다든지 공격한다든지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이것은 뭔가 이유
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때 유
대 나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실제로 있었던 어떤 이야기를 들고 나오셨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혹 그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환히 들여
다보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질문을 던진 율법사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서있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언젠가 저질렀던 일을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다시 말하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이 바로 너 아니냐? 너도 한때 그
런 짓을 하지 않았냐?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냐?” 하는 식으로
그들의 양심을 찔러서 변명을 못하도록 이야기를 끌고 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기가 질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이야기
를 단순히 만들어낸 비유 정도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 정도 되는 높은 언덕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여리
고는 해저 400미터 가까이 저 아래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여러분이 성지순례를 가
셔서 여리고와 예루살렘 사이를 한번 여행해 보십시오. 거리는 얼마 안됩니다. 기
껏해야 여기서 수원 정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짧은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거리에 전체 1200-1300미터의 높이 차가 있는 그런 지형이면 그 비탈을 내려가는
길이 험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험하니까 자연히 도둑놈이 끓고, 강도들
이 가끔 설치던 그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혼자서 그 길을 가지 않으려
고 했고, 할 수 있으면 몇 사람들이 모여서 그 길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이 급한 일이 있었는지 혼자서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
니다. 그 당시에는 입고 있는 옷도 강도들이 탐을 내던 물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옷이 귀한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강도들이 이 사람을 완전히 홀딱 벗겼습니다.
그리고 아마 저항을 했는지 죽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빈사상태에 빠져서 쓰
러졌습니다. 그리고 강도들이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죽습니다.
그때 마침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다가 신음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벌거벗겨져 누워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가다가 이런 일을 당하면 충격을 보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당해보지는 않았
지만, 상상만 해도 이건 보통 심각한 도전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이
지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피하여 도망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
고로 내려가는 길인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지 잘 모릅니다. 하
나지만 성경에 보니 그가 길로 내려갔다고 되어 있으니까, 내려갔다면 틀림없이 예
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지방에 갈 때 내려간다고
하지 올라간다고는 안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여리고로 가
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었습니다. 한편 자기 집은 분명히 여리고에 있었
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일을 전부 총지휘하고, 그 제사 일
을 실제적으로 지도하기 위해서 자기가 맡은 당번이 있습니다. 어느 달은 어느 제
사장, 어느 제사장, 이런 식으로 당번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이 이런 당
번이 되어 여리고의 집에 가족을 두고 예루살렘에 가서 한 달 정도 제사장으로서의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여리고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한 달 동안 떨어져 있
던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발걸음을 재촉하며 내려갔겠습니까? 가족이 보고
싶었고 더욱이 내려가는 길은 강도가 가끔 출몰하는 곳이기 때문에 은근히 불안해
서 걸음을 더 빨리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
았으니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이 사람 건드렸다가는 오늘밤에 내가 집에도 못
갈지 모르겠다. 강도가 또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내가 제사장인데 이 피 묻은 사람
건드렸다가 내가 부정해지면 어떻게 하냐? 아무도 보는 사람 없지 않아? 모르겠다.
가자.” 하고는 그냥 가버린 겁니다.
얼마 후에 레위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레위
사람이 누굽니까? 제사장 밑에서 제사의 실제적인 모든 일을 총괄하는 사람입니다.
성직자예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아마 집이 여리고
에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어떤 사람이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
다. 가서 보니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
이 와서 보고는 피하는 대신에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역시 33절 끝 부분을 보십
시오. “그를 불쌍히 여겨.” 불쌍히 여겼다는 것은 wcka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이미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앙숙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누워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이고, 자기는 사마리아인이니
까, ‘잘됐다. 꼴 좋다.’ 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처지입니다. 좀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 같으면 돌멩이를 들고 한 방 치고 갈지도 모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를 보자마자 마음에 불쌍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불쌍하다는 감정이 드
니까 지나갈 수가 없지요. 나귀를 세우고 짐을 풀어서 포도주와 기름을 내 가지고
는 상처에 바르고 피를 닦고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나귀 위에
억지로 끙끙거리면서 싣고는 천천히, 천천히 조심해서 가장 가까운 동네 여관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찜질을 하면서 아마 밤새도록 간호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는 다음날 아침에 자기 갈 길이 바빠 떠나면서, 여관 주인을 불러 우리 나라 돈으
로 한 20십만 원 정도, 이틀 일하면 벌 수 있는 돈을 주면서 “이 환자를 좀 봐 주
십시오. 제 대신 좀 봐주십시오. 제가 며칠 후에 또 오겠습니다. 만약 돈이 부족하
면 그때 와서 계산할 테니까 정성껏 봐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고는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자,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냐?”
그러니까 율법사는 대답은 찰떡같이 잘합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지
요.”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무관심의 악
이 이야기가 주는 핵심적인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첫
째는, 내 이웃이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느냐가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
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보고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감정이 있다면 미운 감정이고, 가급적이면 멀리 가고 싶은 감정이지, 무슨 감정이
따로 있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와, 내 마음이 막 끌린다. 그립다. 보기만 해
도 반갑다.’ 하는 감정이 생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
다.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은 감정을 떠나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이 없
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셋째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민족
간의 감정이나 개인의 감정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적인 모
든 여건을 극복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넷째는,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사람이 보지 않아도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
다. 아무도 없는 심심산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섯째는,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찾으려고 멀리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내 주변에 나가면 얼
마든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사랑하려면 말부
터 앞세우지 말고 명령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교훈들이 이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과연 누구의 자화상을 많이 닮아 있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입니까? 아니면 제사장입니까? 레위 인입니까? 누가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더 잘 그리고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는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알고 있어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저보다
도 훨씬 앞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평신도들 많습니다. 반면에 불행하게도, 제사장이
나 레위인과 비슷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는 사람들도 상당
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사장과 레위 인은 지금 성전에 가서 한 달 동
안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얼
마나 많은 시편의 말씀과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었습니까? 예복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며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을 찬송했습니까? 쉽게 말하면 은
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많이 받고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막
상 사랑을 주어야 할 대상을 보았을 때 그들은 슬금슬금 피하고 도망갔습니다. 그
렇다면 그들이 받은 은혜란 도대체 무슨 은혜입니까? 그 은혜가 그들에게 무슨 도
움이 됩니까? 오늘 우리도 잘못하면 그들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
나님 앞에 와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돌아가지만,
막상 가정에 돌아가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서 우리 자신이 정말 사마리아 사람
처럼 사랑을 실천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다는 것
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관심
입니다. 어찌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까? 아무리 보는 사람
이 없고 아무리 으슥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강아지 새끼라도 죽어 가는 것을 보면
측은해서 뭔가 좀 도와주고 싶을 텐데,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그대로 지나갈
수 있습니까? 놀랍게도 냉담한 가슴에서 나오는 이런 무관심이 오늘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아는 냉혹한 이기주의가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
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가 점점 무서운 무관심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무관심이 제
사장의 마음에 있었고 레위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을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헷셀이라고 하는 성경학자가 구약에 있는 선지서들을 연구한 다음 참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움직였던 히브리 예언자들이 남긴
위대한 공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관심의 죄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인
간에 대해 가지는 무관심에 하나님은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외친 사람들이 선지
자들이다.” 그는 이어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무관심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옳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들의 제사는 받지 않겠다. 너희들 손에 묻
은 피부터 씻으라. 나는 너희들이 저울추를 속여 가며 거짓말하면서 장사하여 떼돈
벌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제사 지내고 헌물 바치고 십일조 바치는 것, 원치 않는
다. 너희들 손에 있는 더러운 죄를 씻으라. 만약에 씻지 아니하면 너희들 두 손을
들고 기도해도 내가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피묻은 손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해친 손이 아닙니까? 거짓말한 손과 남의 것을 착취한 손은 또 무엇입니까?
사랑을 베풀지 않고 자기만 아는 사람으로 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거룩한 제물을 드리는 것, 하나님은 이런 것을 싫어하
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하나님은 긍
휼을 원하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이웃에 대한 관
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희생을 베푸는 사랑이 긍휼입니다. 그런 일을 실제로 하
지 않으면서 교회에 나와서는 거룩한 체하고 예배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을 모르는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무엇입
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의식 아닙니까? 요즈음 말로 하면 우리가 위선적으로
드리는 그런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위즐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
니라 무관심입니다. 교육의 반대는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아름다움의 반대
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 모두에 대
한 무관심입니다.” 우리의 자화상이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거의 비슷하게 닮았다면
“하나님, 나의 무관심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는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
는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씀을 명령으로 받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딱 닫아걸고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옆집
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든, 불이 나든,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며 벽을 쌓아 놓고 나
만 아는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이 무관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적용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도
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를 보고 무관심하면 안됩니
다. 생활이 궁핍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나 병이 들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밤낮 없이 시달리는 사람들, 곁에 앉아서 그 고
통을 함께 나누는 그런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피하면 안됩니다. 요한1서 3장 18
절,19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행동할 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적으로 강도 만나서 죽어 가는 우리 이웃을 보고 무관심하면 안 된다
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힘들 때 위로해 주는 이런 자선에서
만 끝나면 그것은 반쪽 사랑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데까지 가야 온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참 이웃이 되기를 원하면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염려
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보십시
오. 영적으로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붙들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매일매일 끌려가는 사람들이 얼마
나 많습니까? 서초 지역 전부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통계상으로는 20여 퍼센트가 크리스천이
라고 하지만 문에 교패를 붙여 놓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형식적으로 교회만 다닐
뿐, 그 마음이 세상에 팔려 성령의 다스림을 받기 보다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
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영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
들에게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어제 능인선원 앞을 지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서초동에 있는 능인선원 말고 개포
동에 새로 지은 능인선원 말입니다. 제가 지나가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대형 버스
여러 대가 길가에 서있고,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지나가면서 자세히 봤습니다. 큰 플래카드가 걸려 있기에 뭐라고 쓰여있는가 하고
보았더니 ‘제24기 불교대학 입학생 모집 정원 5000명’ 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
다. 우리 교회 평신도 성경대학과 비슷한 것을 하나 봅니다. 그런데 정원이 5000명
이랍니다. 그것도 벌써 24기 째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도대체 거
기서 뭘 배우고 가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숫자를 모집한다는 것을 보고 ‘야, 이거
큰일났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저 눈앞에 보이는 우상, 눈앞에 보이는
미신에 혹해서, 진리가 아닌 것을 배우느라고 밤낮없이 저렇게 야단들이구나. 왜
저 모양이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무관심했다는 말입니다. 교회 와서 열심히 기도해
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경제적인 축복을 주셨습니까? 그 경제적인 축복을 받자마
자, 내가 즐기고 우리 집 크게 늘리고 내 자식 치장하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웠
지,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와 같은 물질적인 축복을 주셨는가를 놓고 ‘이것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고 깊
이 생각해 본 일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크게 받으면 받을수록 더
이기주의자가 되고 더 무관심한 사람이 되어, 우리만 은혜 충만한 것처럼 돌아다니
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 채 지금 가서는 안될 길로 가고 있는 것 아닙니
까? 여러분 이런 사람들을 가만히 두고도 마음이 편합니까?
저는 종종 예배시간에 나와 앉아있으면서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내가 비
정한 예배자가 아닌가, 내가 정말 하나님이 미워하는 예배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 안 믿는 식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
서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이웃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놔두고 나 혼자 와서 두 손들고 찬송하고 하
나님 앞에 소리내어 기도하고 할렐루야 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얼마나 받으실까
요?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웃을 불
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고 예수 안 믿는 사람에 대해서 안타까와 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우리만 좋아라고 즐겁게 예배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받으실까요?
물론 가족전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붙들고 교회 가
자고 해서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우리의 마음 자
세가 중요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와서
앉아있어도 마음은 안 믿는 내 남편, 안 믿는 내 자식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
을 두고 나 혼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이 너무나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
을 흘리면서 ‘주여, 어떻게 하든지 그 영혼을 구원하게 해 주옵소서.’하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여
보, 교회 갔다 올게요.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요. 밥은 저 식탁에 다 준비해 놨어
요. 알겠어요? 저 갔다 와요.” 하고는 혼자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은혜 받고
돌아가서 “여보, 나 교회 갔다 왔어요. 식사 잘 했어요? 자, 오늘 2시부터 축구 대
회 있다지요? 우리 같이 봅시다.”하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야 없으리 믿습
니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그런 식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 믿는 분이 있다면
제사장이나 레위 인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죽어 가는 사람을 내버리고 혼자 도
망가는 사람이나 뭐가 다르냐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그런 확률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대형 여객기 사고를 보아도 그렇고, 하루에 40-50명이 죽어 가는
우리 나라의 교통사고 현장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또 우리 주변에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강도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중도금 주려고 갔다가 끌려가서 죽었지 않습
니까?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예상하지도 않았던 급성 질병이 나를 아예 사
지로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게 세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장 복음 전해서 구원하지 아니하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사람들
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가족 중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을 보고 무관심하고, 믿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제사
장이나 레위 인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오늘 당장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불러
가신다면 그 사람들이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저는 입에 올리기가 싫어서 말을 잘
안 합니다만 그들이 갈 곳이 지옥밖에 더 있습니까?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이 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었습니
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참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양계장을 하고 있었는데, 양계장에 피워둔 연탄 난로에서 불이 나서 삭풍이 불어닥
치는 12월 한밤중에 대화재가 났습니다. 난데없는 불길에 휩쓸리게 되자 거기서 기
르던 닭 500마리와 앙고라토끼 200마리가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다가
전부 내의 바람으로 뛰어나왔지요. 거기에 와서 교육을 받던 생도들 몇십 명도 정
신없이 뛰어나왔습니다. 나와 보니까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모피용 앙고라
토끼의 털에 불이 옮겨 붙으니까 완전히 새빨간 폭탄이 되어버렸습니다. 닭은 닭대
로, 토끼는 토끼대로 막 날뛰니까 이건 생지옥입니다.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아무
리 애를 써도 불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김 장로님이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우리 이 자리에 조용히
앉아서 저 광경을 보면서 살아있는 교육을 받읍시다.” 이젠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지라 전부 멀찌감치 앉아서 닭들과 토끼들이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불에 타
죽어 재가 되는 그런 끔찍한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이미 때가 늦었는데도 살아보려
고 아우성을 치는 닭이나 토끼들을 보면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육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날, 그 영
혼은 속절없이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 떨어져 울부짖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을 하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불길이 다 사그라진 후에 김 장로님은 교육생들을 이끌고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을 통해서 그때 교육생으로 와 있던 사람 중에 자기 손으로 1천 명 이상 되는 깡패
를 길러내고 경찰관까지도 폭행을 한 전력이 있는, 대전에서 왔다는 깡패 두목이
그 불타는 양계장의 현장을 지켜보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회개하고 목사가 되
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교육생 중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임영철이라는 청년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법관 되는 것
을 포기하고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와서 농군이 되었고 나중에는 김용기 장로님의
첫째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게 되면
그들이 가게될 곳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강도 만난 사람하고는 비교가 안 되
는 것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을 당해야 하고 영원한 저주
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이웃을 보고 우리가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힘들
고 귀찮고 돈이 들어도 그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
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
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습니
까? 시간도 내 드리고 물질로도 도와주시고 마음도 서로 나누시면서 그들을 사랑하
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영적으로 강도 만난 가족이 있습니까? 이웃이 있습니까? 여
러분 가만히 계시면 안됩니다.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
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서 “너도 그렇게 하
라.” 하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명령대로 우
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주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0장 하나님 말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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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0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본문 눅 10:25-37
설교 내용
지난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성경에 나타난 비유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졌고, 많은 영향을 끼친 비유 가운데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심지어 이 비유는 불신자들까지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그의 물건을 강탈당하고 상해를 당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고 어떤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예를 들어 말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뜻은 아주 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결론에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것처럼 행하면 되고,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필라델피아 제10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성경학자이기도 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이 비유는 대단히 어려운 비유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 비유는 많이 왜곡하여 해석해 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고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예수님으로, 강도 만난 자는 여행자로서의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풍유적인 해석 방법으로 사마리아 사람이 상처에 부은 기름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 주막은 교회로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 성경말씀은 한 본문은 한 개의 메시지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9항). 만약에 성경말씀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본래의 의미를 버리고 상징으로만 이해한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의 관점과 주관에 따라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경향으로 빠지는 경우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이 중세 교회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교회가 성경 해석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요인도 많이 있었지만 교회의 결정이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이 점이 교회의 부패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이해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영생을 얻은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한 질문, 두 번째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내용, 세 번째로는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동기 :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한 질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 비유 자체적으로만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대부분 그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주셨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역시 문맥에서 볼 때 한 가지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은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한 내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이러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이 율법사는 문자 그대로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내용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영생을 얻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이라는 말을 미래적인 의미로만 이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헬라어 성경에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는 영생의 개념을 이해할 때 생명을 수식하고 있는 “영원한”이라는 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생명”에 더 강조점이 있습니다. 생명의 특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생명은 미래적이면서도 현재적입니다. 생명을 정의할 때 세상의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여러 가지로 정의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자는 성경이 생명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생명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영생을 아주 분명하게 정의하셨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이라고 할 때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존재,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전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존재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게 된 인간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인생의 행복과 의미는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 율법학자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습니까?”라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믿는 신자조차도 우선적인 관심사는 돈과 지위입니다. 돈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생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특히 신자는 이 문제가 그 삶의 기초로 놓이지 않는다면 언제 그가 얻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는다면 주안에서 모든 것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나온 율법사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율법에 대하여 질문함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 이 질문에 대하여 율법사는 율법에 익숙한 자답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눅10:27) 이 말씀은 율법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의 말씀의 인용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사의 대답을 듣고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해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율법을 지켜 행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 문제의 본질을 확인해 봅시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나온 율법사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 율법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행하면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비유의 내용 :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그러나 율법사는 그 자신을 의롭게 보이기 위하여 한 가지 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눅10:29) 이 질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네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강도와 강도 만난 자, 제사장이나 레위인같이 강도 만난 자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강도 만나 자를 보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등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도 제사장처럼 그곳에 이르러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제사장은 당시에 백성의 지도자였고, 제사의 직무와 함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던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인 역시 성전을 중심으로 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는 특권계층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 지식과는 반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 곳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도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이요 천한 사람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하여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전 약 750년 전에 북쪽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들의 일부는 자기 나라로 이주시키고 또한 앗수르인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북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수르인들과 통혼하면서 소위 말하는 혼혈족들을 낳았습니다. 이 일은 유대인들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방인이었고 율법을 모른다고 생각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나 위급한 지경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며,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오늘날처럼 치료약이 많거나 의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처에 기름을 바르거나 포도주를 붓는 일은 치료의 방법 가운데 한 가지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즉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응급처치를 한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잘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치료하고 돌보는데 비용이 더 필요하면 돌아오는 길에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율법사에게 개인적으로 이 비유를 적용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이 비유에 나오는 율법학자처럼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의 의미는 사랑해야 할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주체자에 초점을 맞추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사랑해야 할 대상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면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주체자에게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내가 자비를 베풀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랑의 의무의 한계를 긋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즉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시는 참된 이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단순히 가족이나 친척, 또한 자신의 유익과 관계된 사람에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때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은 구호나 슬로건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돈과 시간 그리고 희생적인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세상은 이와 같은 사랑을 보이는 사람을 이해해 주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에도 아주 인색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도움을 받아도 감사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참된 이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3. 비유의 결론 :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결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앞에서 연구한 바와 같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질문 때문에 이 비유를 주셨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하고 중심 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하여 이미 예수님은 답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키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계명을 알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 그가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산 사람 가운데 이 계명을 완전하게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계명을 완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사람은 없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특히 이 비유에서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성경의 교리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자랑으로 삼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탁상공론만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연구를 통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를 제한하거나 왜곡시켰습니다. 아마 이들은 율법에 “길가에 거반 죽게 된 사람이 있으면 도우라”는 말씀이 있으면 도왔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토론이나 하며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은 가리켜 종종 외식하는 자(위선자)나 회칠한 무덤 같은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을 가지고 있고 이 말씀대로 살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나 누가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0에서 아주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그러면 아무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자신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다시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얻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4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얻은 자는 율법의 모든 요구,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는 이 내용만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까요? 이 비유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찾아온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내용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문제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이 비유는 바로 이 점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 비유에서의 율법사처럼 이웃의 범위를 정하려고 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생명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은 자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희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구원받은 증거들이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제목은 누가 천국에서 이웃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어떤 사람이 이웃일까요?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배운 학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자에게도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 가게 될 천국에 가게 될 것인지의 문제와 누가 이웃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몇 달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왔습니다. “너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이웃은 푸줏간 주인이다.” 학자는 기가 막혀서 말이 다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았는데, 그 이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같이 위대한 학자가 어떻게 푸줏간 주인과 같은 하찮은 사람과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야 하나님이 실수하셨을 거야. 내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아야 되겠다.” 그는 푸줏간에서 멀지 않은 여관에서 묵으며 푸줏간 주인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푸줏간 주인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고기를 썰어서 주면서 아이들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느 날 노예를 가득 실은 배가 도착하자 그 주인은 그 노예를 사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떤 청년과 결혼을 약속한 처녀가 가난하여 하녀로 그 푸줏간 주인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푸줏간 주인은 가난하여 결혼하지 못하여 하녀로 팔리게 된 것을 알고 모든 결혼비용을 들여서 결혼시켜 주었습니다. 학자는 이 푸줏간 주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을까요?
여러분! 천국에서의 이웃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영생을 얻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도 시간과 돈과 희생적인 수고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러한 사람이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사가 질문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시간과 돈과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사랑을 보이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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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이웃은 만드는 것이다 (눅 10: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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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은 만드는 것이다 (눅 10:36-37)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번쯤을 들어 봤을 것이다. 이 비유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흔히 사용된다. “손해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아낌없이 친절을 베푼 사람”을 두고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이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힘써 선행을 베풀라“는게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게 뭔지 함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한참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어떤 율법 교사가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 영생-구원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는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다. 율법학자이면서 동시에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의도가 뻔하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려고, 망신 주고, 뭔가 꼬투리를 잡을 만한 빌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순한 의도가 뻔히 보이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만약 예수님이 대답을 피한다면 그걸 가지고 또 꼬투리를 잡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답을 하든 안하든, 심지어 어떤 대답을 하든 빌미를 잡힐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빌미를 잡으려고 작정하고 질문을 하는데 무슨 수로 피할 수 있겠는가?
이건 마치 “오빤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수준의 난이도였다. 안다고 대답하면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냐?”고 뭐라고 하고, 모른다고 하면 “어쩜 그렇게 내 맘을 모르냐”고 또 뭐라고 하고, 안되겠다 싶어서 무조건 미안하다고하면 “미안하다면 다야? 내가 지금 미안하다는 말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아?”하면서 따지고. 도저히 출구를 찾을 수가 없다.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일단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을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과 율법교사 사이에 흐르는 이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가? 어떻게든 덫을 놓으려고 하는 율법교사와 그 덫을 유유히 스쳐 지나가시는 예수님. 그야말로 장군멍군,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어쨌든 예수님이 질문을 던졌으니 이제는 율법교사가 답해야 할 차례다. 여기서 또 한 번 율법교사가 되 물을 수는 없다. 그러면 논쟁이 아니라 유치한 말싸움이 되 버리고 만다. 명색이 율법교사가 “내가 먼저 물었잖아? 니가 먼저 답해라“ 이럴 순 없지 않은가? 이러면 더 이상 얘기가 진전이 안 된다.
아쉬운건 율법교사 쪽이지 예수님이 아니다. 율법교사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말꼬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 교사는 한수 접어주는 셈 치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 지식도 과시할 겸 예수님의 질문에 제법 상세하게 답했다.
(눅 10:26-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교사의 답변은 신명기 6장 4-5절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었다. 이 대답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완벽한 정답이었다. 영생-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율법교사의 답변에 동의하시면서, 이제 가서 그대로 행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로서 율법 교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율법에 해박하다는 것을 새삼 과시할 수 있었고, 예수님도 별다른 타격 없이 율법교사가 쳐놓은 덫을 피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마무리 했으면 서로 좋았을 텐데, 율법교사는 굳이 승부수를 띄웠다.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이 “당신이 말한 대로 이웃 사랑을 행하라”고 하니까, 율법교사는 이게 신경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율법 교사는 자신이 이웃사랑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다. 아마 율법교사의 예상 시나리오는 이랬을 것이다.
예수님이 “가깝게는 가족과 친구들, 좀 멀게는 동네 사람들, 더 멀게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이웃이다”라고 말씀 하시면 “그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충분히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답하고, 그러면 예수님이 “역시 당신은 율법 교사답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군요. 과연 영생을 얻은 자답습니다” 이렇게 칭송할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뜬금없이 비유를 들기 시작하셨다. 이때 사용하신 비유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비유를 읽으면서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기서 ‘어떤 사람’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일단 율법 교사를 비롯해서 이 비유를 듣고 있는 거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비유를 든다고 하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이겠는가? 외국인이겠는가? 당연히 한국 사람이다. 이게 자연스럽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라고 보는게 마땅하다.
아무튼 어떤 유대인이, 유대인이 자주 다니는 길에서, 유대인 강도를 만나서 죽도록 얻어맞고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다 빼앗겼다. 돈도 돈이지만 여차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저 멀리서 희망의 빛이 비춰왔다.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사장이 어떤 사람인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오고 있으니, 그것도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기 까지 했으니 얼마나 천만다행인가?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은 목숨을 건질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다.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뜻이다. 제사장의 이러한 모습은 비록 비유일지언정 듣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실망스럽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렇게 제사장이 지나간 다음에 얼마 후에 레위인이 다가왔는데, 레위인도 똑같이 행동했다.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세 번째로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갔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고, 사마리아인 역시 유대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둘이 얼마나 앙숙이었냐면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가까운 길을 놔두고 굳이 먼 길로 빙 둘러갈 정도였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제사장도 일부러 피해가고, 레위인도 그렇게 한 마당에 사마리아인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사마리아인 역시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거나 아니면 이때다 하면서 더 심한 해코지를 할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또 한 번 반전이 일어났다.
(눅 10:33-35)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이건 제사장이 일부러 피해갔을 때 보다 더 충격적이고 불쾌한 전개였다. 이걸 우리에게 와 닿게 변환해 보겠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한국인에게 강도를 당했다. 마침 한국의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그 자리를 지나가는데, 뻔히 봐놓고는 못 본 척 피해갔다. 심지어 우리 교회 목사님도 똑같이 행동했다. 그런데 반일 감정이 한창 고조되어 있는 이때에 일본 사람이, 그것도 동성애자가 강도 만난 한국 사람을 보살펴줬다. 어떤가? 감동적인가? 솔직히 영 찜찜하고 떨떠름한 마음이 들지 않는가?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신다.
(눅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여러분이 강도 만난 사람이라면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중에서 누구를 이웃으로 여기겠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마리아인이다. 하지만 율법 교사는 차마 그렇게 답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사마리아인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은 이걸 가지고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다만, 이제 답을 알았으니 그대로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눅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이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된다” 정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대화의 시작이 ‘선행’ ‘구제’ 이런 문제가 아니라 ‘영생’ ‘구원’과 관련된 문제를 놓고 시작되기 때문이다. 본문의 흐름을 눈여겨보라. 율법 교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고,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제가 “누가 내 이웃인가?”였다. 이 말은 내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 하셨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 비유는 ‘선행’에 초점을 맞춘게 아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크게 3가지이다.
1. 율법 교사의 위선을 꼬집는 것이다.
율법교사는 자기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는 실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이웃은 너무나도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었다. 이방인들도 이웃이 아니었고,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들도 이웃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자기 마음에 들면 이웃이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잘 해 주는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어차피 이웃이 아니니까 사랑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당신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율법 교사들은 자신 만만하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율법 교사들은 ‘이웃사랑’을 이런 식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위선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라.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다 배제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잘해 주는게 그게 무슨 이웃사랑인가?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이러한 위선을 꼬집기 위해서 비유 속에 극명하게 대조 되는 두 사람을 등장 시키셨다. 하나는 같은 유대인조차도 돕지 않은 제사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원수 같은 유대인에게도 선을 베푼 사마리아인이다. 제사장은 율법교사의 현주소를 상징하고, 사마리아인은 율법교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이 비유의 핵심 두 번째는
2. 이웃 사랑의 본질을 되새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영생을 얻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 말은 이웃 사랑이 구원의 조건(공로)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모름지기 구원 받은 자라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웃사랑은 실천하기 어렵기도 하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쉽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이웃’이 누구인지를 율법 교사처럼 정의한다면 이웃사랑은 실천하기 쉬운 명령이 된다. 마음 가는 사람에게 마음 가는 만큼 잘해주면 되니까.
하지만 이웃 사랑을 사마리아인처럼 실천하려고 하면 결코 쉽지 않은 명령이 된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은 원수 같은 유대인에게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뭘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웃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눅 6:32,35)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이웃 사랑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잘 해주는게 아니다. 이건 아무나 다 하는 일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도저히 사랑을 베풀고 싶지 않은 사람, 원수와도 같은 사람에게까지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게 구원 받은 자 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원수마저도 이웃이 된다.
(눅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3. 아는 것 보다 실제로 행하는게 더 중요하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행하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셨다.
(눅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37)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게 예수님의 결론이다. 아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행하는게 더 중요하다. 이웃사랑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아는 대로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신앙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믿는 대로,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다. 행하지 않으면 더 이상 신앙생활이 아니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가 몰라서 못 하는게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알면서도 안 하는게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좋다. 아는게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하자. 그럼 많이 알든 적게 알든, 일단 아는 것만큼이라도 행하라.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다.
말씀을 맺겠다. 누가 여러분의 이웃인가? 여러분은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가? 이웃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사랑과 선행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사랑을 베푸는 바로 그 사람이 여러분의 이웃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 사랑에는 제한이 없다. 누구에게든 가리지 말고 사랑을 베풀라. 이 진리를 그저 지식으로 알고만 있지 말고 힘써 행하기 바란다. 율법 교사처럼 위선자로 남느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느냐는 실천에 달려 있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원수 같은 사람에게까지 사랑을 베푸는 여러분들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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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5-37 (9.27.2009)
한국 속담에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있는 사람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친구보다 더욱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웃이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에서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시끄럽다고 신고를 하고 서로 싸운다.
한국의 대도시에서는 자기 집 앞에 옆 집사람이 주차하면 반드시 욕을 하며 싸우게 된다.
이웃집에서 누군가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 etc.
우리 사회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저 연말에 불우이웃돕기 기부를 하는 것이나 사회 봉사활동으로 이웃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돈으로 이웃 사랑을 한다면 돈 많은 사람이 가장 이웃 사랑을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이 이웃 사랑의 전부라면 몸이 불편하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이웃 사랑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이 시간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 지를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사랑하라는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성경 전체의 주제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11: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수 23: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시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잠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 4: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마 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아도 흔히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실제적으로도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 13:34)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이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must should ought to has to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아무나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랑이 아닙니다.
명확히 사랑할 대상이 있습니다.
27절과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8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답을 율법사가 27절에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에 있는 말씀을 같이 대답한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을 줄여서 대답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십계명의 전반부 5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고,
후반부 5계명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입니다. 두 관계가 모두 사랑으로 이어져야 정상적인 관계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의 사랑의 대상도 바로 하나님과 다른 이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동시에 기독교인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웃도 사랑하십니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저의 이웃이 누구인지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옆집에 사는 사람,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 아는 사람, 직장 동료 등등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이야기 속에서 이웃은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가끔 저는 성경을 볼 때, 널리 알려진 부분이나, 제가 이미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더욱 정신을 집중해서 읽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은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유명한 이야기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도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이 부분을 세밀하게 읽어보니, 우리 성도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구절 속에서 이웃과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잘난 척 하고 싶어 하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 질문이 29절에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 율법사의 질문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입니다.
이 간단한 질문에 예수님은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어떤 유대사람이 한적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그 강도가 그냥 깔끔하게 돈만 훔쳐가면 오히려 괜찮았을 텐데, 그 강도는 아마도 그 유대인을 죽일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죽을 정도로 폭행을 당한 유대인은 길가에 그냥 버려졌습니다. (30)
그 유대인을 당연히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모른 척 지나칩니다. (31-32절)
그런데, 천대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내용입니다.
그냥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친절을 베푸는 이야기입니다. (33-35절)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누가 이웃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답한 이야기이므로, 당연히 누가 이웃인지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누가 이 강도당한 유대인의 이웃입니까? 누구나 짐작하시겠지만 사마리아인입니다. 36절과 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앙숙관계입니다.
다윗이 통일한 통일 이스라엘 나라는 그 다음 왕인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두 나라로 갈라집니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갈라집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남북한처럼 그렇게 앙숙은 아니었습니다. 서로 미워하기도 했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북쪽 나라가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해 버립니다. (앗수르 -721) 그리고 그 국가는 민족 융합 정책을 펴서 마구 강제로 이주시키고 이주해 옵니다. 그렇게 민족이 섞이게 됩니다. (당시 유행)
남쪽 나라는 그 때 멸망하지 않고, 130년 후에 (바벨론) 멸망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강제 이주당하고 이주해 옵니다. 그런데, 유다국의 사람들은 강제 이주 당했지만, 그 곳에서 이방인과 섞이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삽니다. 이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입니다.
약 50년 후에 유대인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성전을 세우고 이방인과 섞이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이것에 관한 기록이 에스라 느헤미야서입니다.
정리하면, 통일 이스라엘국이 불행한 일로 남북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다가 북쪽 왕국은 다른 강한 나라에 멸망당하고 그만 신앙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섞이게 됩니다. 북쪽 왕국의 사람들은 이민족과 약 180년 간 섞여서 사는 동안에 신앙도 잃고 정체성도 잃었던 것입니다.
남쪽 왕국도 다른 강한 나라에 멸망당했지만, 신앙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까지 주어집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 돌아와 보니, 가관도 아닙니다. 북쪽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섞이고 섞여서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고향에도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남쪽 유다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위해서 이방인과 그들과 결혼한 사람과 그 자식들까지 배척합니다. 그냥 배척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배척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냥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 이름이 사마리아이기 때문입니다. (배톤루지사람
자신들이 이유 없이 미움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밉기 마련입니다.
결국에는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섞이고 신앙과 정체성도 없는 사마리아인과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들을 미워하는 유대인들을 따라서 미워하게 됩니다.
제가 좀 길게 말씀드렸는데, 유태인과 사마리아인이 미워하는 정도를 예를 들면, 남한 사람들이 빨갱이를 미워하는 정도라면 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비유로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너무나 쉬운 질문입니다. 율법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 같은 동네의 사람, 아는 사람, 등등이 그 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정답이라면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들려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36절과 37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거리나, 친분관계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이웃입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증오와 미움의 벽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 이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사랑을 베푸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회복했고, 지키며 산다고 자신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이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알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편의에 맞게 이웃의 범위를 각자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만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부자의 이웃은 부자만 되고, 가난한 자의 이웃은 가난한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젊은 사람의 이웃은 젊은 사람만 되고, 나이든 사람의 이웃은 나이든 사람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 사람의 이웃은 한국 사람만 되고, 백인의 이웃은 백인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만드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이웃이 아니었던 사람을 이웃이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이웃이 아니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하면 서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노인)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의 이웃은 기독교인만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할 대상을 알게 모르게 기독교인이라고 경계를 그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웃의 경계를 그어놓고 그 안에서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합니다. 생각해보면 조폭들이 이런 사랑은 정말 잘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조직 안에서 의리를 위해서 감옥도 가고 위험한 곳에도 뛰어들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조폭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면 정말 부담스러울 만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계를 그어놓고 사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가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렇게 바꿔보겠습니다.
한 한국 사람이 차가 없어서 LSU까지 풋볼 경기를 보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체모를 괴한이 그 사람을 총으로 위협하고 돈을 빼앗습니다. 그 한국 사람이 반항하자 총을 쏘고는 멀리 도망갔습니다.
그 사람이 길 가에 쓰러져서 고통스러워 하는데, 차를 운전하며 지나가던 다른 한국 사람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에 러닝을 하던 한 백인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차에서 힙합음악을 크게 틀고 지나가던 한 흑인 남자가 그 사람을 보고 급히 내려서 응급처치를 하고 경찰을 부르고 병원까지 함께 갑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누가 그 한국 사람의 이웃입니까?
우리 기독교인은 사랑함에 있어서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해서 이웃을 만드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앞 뒤, 옆에 앉아 있는 분들이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저기 다른 곳에서 예배드리는 아이들과 학생들이 여러분의 이웃으로 느껴지십니까?
여기 서있는 제가 여러분의 이웃으로 느껴지십니까?
혹시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바로 이웃으로 만들어보십시오.
이웃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 사랑할 마음만 있다면, 이웃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반드시 물질로만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잠시 후에 점심 식사할 때에, 그 사람에게 음료수라도 한 컵 웃으며 가져다주면 됩니다.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만났을 때, 멀리 있더라도 가까이 가서 인사만 하고 다시 오면 됩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이번 주일에 교회에서 보지 못했다면 교회에서 보자고 e-메일을 한 번 써보고, 아니면 전화 한 번 해보는 겁니다.
그것도 정말 쑥스럽고 낯을 가려서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다른 비결을 알려드립니다. 그 비결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혹시 그 사람이 영적으로 강도만난 사람처럼 힘든 와중에 있을 지도 모릅니
그 사람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부르며 그 사람이 시험에 들지 않고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 뒤에 앉아서 통역기를 귀에 끼우고 설교를 듣는 분의 성함을 아십니까? 우리 집사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이쪽에서 예배 드리는 청년의 이름을 아십니까?
어쩌면 우리 교회 안에서 이웃이 아닌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 이웃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스타일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사랑하지 못할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5:43절과 44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함으로 새로운 이웃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중에 누가복음 10장 36-37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이다.(눅10:25-37)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이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10:25-29)
제사를 중지하더라도 형제와 화해부터 하라.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눅10:25-37)는 너무나 유명해서 불신자들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는데 모든 이가 보고도 피하여 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끝까지 도와주었다는 비유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마저 외면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자기 돈을 써가며 도와주었다. 오늘 날로 치면 목사나 예수 믿는 신자도 외면한 길거리에 쓰려져 있는 홈리스를 불신자가 병원에 데려가 자기 돈으로 치료해주었다는 뜻이다.
많은 신자들이, 아니 솔직히 목사인 저도 이 비유를 들으면 양심에 많이 찔린다. 실제로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자들이 많은데도 자기 일이 바쁘고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모른 체 넘어가기 일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구차한 변명도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침 성전제사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했다. 제사 중에라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사람이 죽어가는 일도 아닌데도 제사를 그만두고 가서 먼저 화해하라고 하셨지 않는가?
시편 기자도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라고 선언하고 있다. 제사를 드리는 근본 목적은 먼저 자신의 죄를 씻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또 그 회복된 관계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하는 것이다.
죄를 지은 채로는 아무리 율법의 규정대로 경건하게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고 한다. 상한 심령은 고난으로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죄 지은 것을 참회하는 마음이다. 그렇다고 동일한 죄를 반복해 짓고도 단순히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 후에 혹은 빌면서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말하자면 오던 길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지만 예배시간에 맞추느라 지나치고 온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위선이자 핑계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제사를 중지하더라도 돌아가서 화해부터 하라고 하셨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은 하나님과 멀어진 자기 자신 전부에 대해 처절하게 통분하면서, 쉽게 말해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등을 짐으로써 의의 길에서 벗어나 죄를 지었고 또 영적으로도 너무나 갈급하고 피폐했음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철저하게 깨어지는 것이다. 또 그런 자신의 더럽고 추한 내면을 보고 세상의 어떤 슬프고 힘든 일보다도 더 애통해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한두 개의 잘못된 행위를 반성하는 것, 그것도 단지 입술로만 양해를 구하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뜻은 예배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었으면 단순히 예배에서 하나님께 용서만 빌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잘못을 바로 잡으라는 데에 초점이 모여 있다. 또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는 임하기는커녕 자신의 정신적 평강과 안식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회개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 평소에도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영혼을 벌거벗기는 살아 역사하는 말씀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게 된 계기는 구제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인지 질문한 것에 대해 대답한 것이다. 그 질문을 한 까닭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시행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 물은 것이다.
그 율법사는 그 두 계명을 다 잘 지켰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즉 그가 교제하는 자기 이웃은 바로 율법사, 제사장, 레위인 같은 자기와 동류(同類) 그룹이었고, 또 그들을 정말로 자기 몸처럼 사랑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계명을 지켜 영생을 얻는다면 자기가 일등이라는 교만에 가득 찬 질문, 아니 질문이라기보다 예수 같이 이름 없는 랍비라면 당연히 자기의 의로움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은연중의 채근이자 협박이었다.
항상 그러하듯이, 예수님은 그의 치사하고도 음흉한 의도를 꿰뚫어 아시고 그의 가장 추한 치부를 찔러 드러내었다. 그 율법사가 자신의 친한 이웃이라고 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길에서 강도 만나 죽어가는 불쌍한 자를 외면하고 지나쳤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그 율법사의 이웃들인 유대 종교지도자가 정죄한 자다. 앗시리아인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배반했고 또 영적으로 간음했으니 유대인더러 교제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과 거리가 가장 가깝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불쌍한 자를 보고도 외면했지만 하나님과 가장 멀어 보이는 사마리아인은 오히려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 비유를 말씀한 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예리하게 반문했다. “너의 이웃”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고 말이다. 율법사로선 그동안 자기가 하나님께 완전히 저주 받은 자로 취급했던 사마리아 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외에 다른 대답은 있을 수 없었고, 어린이도 쉽게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가장 잘 지켜 천국에 일등으로 갈 것이라고 자부한 자에게 그렇게 경멸했던 사마리아인보다 율법을 더 못 지켰다고 견책한 것이다. (실제로 사마리아인은 모세오경만 구약경전으로 인정했으니 율법을 더 엄격히 준행했을 수 있다.)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의 정의(定意)는 율법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신분, 지위, 가문, 학벌, 재력, 취미, 기호, 종교 등이 같은 자들만 이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주위에 붙여 준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배려와 도움과 기도가 필요한 자들은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아니 신자더러 그렇게 섬기라고 하나님이 붙여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과연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여부를 이웃 사랑으로 증험하시겠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자기 입장에서 마음에 드는 자를 골랐다고 이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고르면 아무래도 그에게서 유익을 얻으려고 이해타산을 따지기에 현실적 지위와 외모를 보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 상대방이 나를 필요로 하면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한다. 요컨대 이웃이 신자를 그들의 이웃으로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자기가 이웃을 고를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신자는 대신에 이웃들에게 항상 진정한 사랑을 베풀고 살아서 이웃들로 언제든 신자를 의지하며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결국 그 율법사는 이웃을 사랑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했는데 그렇게 못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 일은 어린아이들이 가장 잘한다. 말도 못하는 유아라도 자기에게 사탕을 주거나 칭찬을 하거나 귀여워하는 사람을 정확히 골라내어 그 사람만 좋아 한다. 자기 동료 그룹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교제나 취미 활동한 것에 불과하다. 불신자들도 아주 잘 하는 일이다. 그런 인간관계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사랑이 개입할 필요도 여지도 없다.
예수님더러 반 협박조로 질문했던, 최대한 양보해서 작은 꼬투리라도 잡으려 왔던 그 율법사는 얼굴도 못 들 정도로 창피만 당했다. 이 비유를 결론지은 성경 구절을 보라.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37) 틀림없이 그는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간 곳도 없고 완전히 꼬리를 내리며 도망치듯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훨씬 더 차원 높은 구약의 계명
율법에는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이 또 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출23:4) 자세히 살피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보다도 이웃사랑의 차원이 훨씬 더 높다. 길을 가다 원수의 가축이 길을 잃은 것을 보거든 그 원수에게 데려다 주라고 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짐승에 불과한데다 맹수에 물려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 원수의 소유다. 도무지 도와줄 필요가 없다. 아니 그럴 기분이 전혀 내키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원수에게 돌려주려면 다시 먼 길을 가야한다. 시간적 금전적으로 큰 손해다. 그리고 돌아가면 어쩔 수 없이 다시는 상대도 하기 싫었던 원수와 상면해야 한다. 자기 짐승을 돌려주었다고 원수가 보상할 리도 없지만, 설령 보상을 해주어도 받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도무지 귀찮기만 하는 일이다.
인간적 기준으로 따지면 이 경우야말로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쳐도 될 것이다. 아니 안 그래도 원수에게 피해 청구할 것도 많은데 일일이 따지기 싫으니 그 가축을 챙겨서 배상 받은 것으로 쳐도 된다. 솔직히 우리가 그런 경우에 맞닥트리면 어떻게 하겠는지 따져보라. 이 계명대로 준행할 자신이 있는가? 아니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축을 죽이거나 자기 소유로 취득하지 않은 것만도 의롭다고 칭찬 받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거룩하고 온전하시다. 또 그러하기에 당신의 백성도 거룩하고 온전하길 바라신다. 그분은 영원토록 단 한 치의 부족함 없이 항상 거룩하고 온전하시다. 그 점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신자더러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신의 거룩하고 온전하심이 당신의 자녀들이 거룩하고 온전해짐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 전에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의 의미와 가치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거룩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그분의 마음에 흡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는 아무리 작아도 언제나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 계명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 예수님의 사마리아 인의 비유보다 더 고급한 차원의 의와 거룩을 요구하고 있다. 율법이 유대 민족 고유의 오래된 관습과 제도가 결코 아니다. 율법에는 영원토록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드러나 있다. 하나님만의 의다. 세상에는 없는 의다. 인간이 고안해낸 상식, 도덕, 사상, 철학, 종교로는 다룰 수 없고, 아니 이해도 안 되는 그분만의 의와 거룩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더러 그런 자리에 이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종교적 멍에를 짊어지게 해서 당신의 종으로 얽어매려는 뜻은 전혀 없다. 그렇게 한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율법사와 제사장들이었다. 종교 권력을 이용해 자기들만 치부하고 연약한 대중들은 자기들 영향력 아래 두려고 인간 상식에만 합당한 계명과 유전들을 양산(量産)해내었던 것이다.
만약 언뜻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 계명을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승복하고 기쁨과 감사로 순종한다고 가정해보라. 원수끼리 금방 용서와 화해가 되지 않겠는가? 아니 원수질 일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설령 진심으로 승복하지는 않지만 의지적으로 일단 지키기만 해도, 가축을 원수에게 몰아가고 있는 동안에 서로 미워하게 된 사연과 과정과 차후 일어날 상황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원수와 다시 대화의 물꼬를 여는 계기는 되지 않겠는가? 그럼 아무래도 인간관계에서의 용서와 긍휼이 훨씬 더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영적으로 훨씬 저급한(?) 차원의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었을 리 없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었을 것 아닌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틀림없이 유대인일 것이다. 성경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라고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유대경내라고 말하고 있기에 명시적 언급은 없어도 유대인으로 봐야 한다. 만약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났다면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유대인에게 같이 멸시 받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주었다는 일반적인 뜻이 된다.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의미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 예수님은 같은 동족이 죽어 가는데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 본 척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동족의 영적, 육적 안위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직무태만의 죄를 범한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미워해도 마땅한 유대인을 끝까지 보살펴주었다는 것이다.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한 그 율법사에게 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가 율법을, 그것도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데 과연 그럴까? 율법은 동족은커녕 원수의 가축이 길에서 다친 것도 아니고 헤매고 있어도 끝까지 도와주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너희는 지금 동족이 죽어 가는데도 외면하고선 도대체 무슨 계명을 어떻게 지켰다는 것인가? 율법의 참 뜻은 물론이고 어떤 율법이 있는지도 다 모르고 있지 않느냐? 그러고도 네가 율법사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감히 나에게 영생의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성경은 너무나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눅10:31),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32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둘 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30절) 중이었다. 성전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혹은 어디론가 가는 중이라는 뜻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구차한 변명 즉, 그들이 성선제사에 늦었을 것이라는 변증은 아예 성립 되지 않는다. 그런 변명을 한 기독교인도 이 율법사와 똑같이 인간의 심령을 찔러 쪼개어 드러내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분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우리 속내를 완전히 까뒤집으면 우리 모두가 치사하기까지 한 그 변명에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어쉬었는가 말이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우리 모두의 심령이 예수님의 비유 앞에서, 그것도 이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완전히 벌거벗겼지 않는가?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9-12)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는 단순히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 주제가 아니다.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밝히는 차원만도 아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살펴본 대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규정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것도 율법을 풀어 가르쳐야 할 율법사가 말이다.
더 본질적인 의미는 모든 인간은 인간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더더욱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죽어가는 동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그것도 당신의 종들이 그러한데, 어찌 원수의 가축까지 사랑할 수 있느냐고 따진 것이다. 아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이웃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죄악에 대해 격분한 요나만큼 신실한 주의 종조차, 최소한 예수님께 찾아온 율법사보다는 훨씬 의로웠을 텐데도, 니느웨의 육축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 않는가? 요나보다 더 큰 표적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보지 않고는 요나서 결론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았을 것이다. 사악한 도성의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은 물론 그 가축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말씀은 십자가 대속의 사랑이라는 열쇠가 없었다면 영원한 미궁으로 빠졌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비로소 사람들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또 그에 대조해 인간의 비참한 실패와 무능력을 알게 되었다. 출애굽기의 계명보다 영적으로 훨씬 차원이 낮은 사마리아인의 비유 앞에서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는 물론, 오늘 날의 저를 비롯한 모든 목사들도 감히 떳떳하다고 자부하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0-24)
모든 인간에게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소망이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새로운 의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절대 의인으로 서지 못한다. 모든 이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모르고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 또 예수님께 찾아 와서 자기 자랑을 일삼은 율법사의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물론 간혹 불신자들 가운데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원수마저 내 몸 같이 사랑하고 또 자기를 핍박하는 그 원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자는 절대 없다. 길가다 우연히 만난 원수의 가축까지 끝까지 돌보며 원수에게 돌려주는 바보는 인간 사회에선 없다. 그 진리를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으로 알게 해주셨다.
더 중요하게는 당신께서 실제로 그 진리 됨을 온몸으로 실현해 보였다. 율법의 선행은 인간을 결코 의롭게 하지 못한다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선포하셨다. 율법이 부족하고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말이다.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처참한 영적 실패에서 회복될 수 있을 뿐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왔기에 알게 모르게 짓고 있는 죄를 회개만 하면 된다고 안심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 비유를 접하면서 그러지 못한 것을 반성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증명한 인간의 무능력만 핑계되어선 안 된다. 그럼 서두에 언급한 치사한 변명과 다를 바 없다.
바꿔 말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으로 신자 된 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면 사람도 아니다. 비록 현실에서 보기 힘들어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엄밀히 말해 사람이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뜻일 뿐이다. 신자가 그런 칭찬을 들었다고 기뻐할 일이 결코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도리어 불신자만의 몫이다.
신자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다반사, 아니 일상사여야 한다. 신자는 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출애굽기의 계명으로 말이다. 원수까지 살리는, 나아가 원수의 재산까지 보살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자신은 아무 빛도 이름도 없이 땅에 떨어져 썩어버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죽어 마땅한 자를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맞바꾸어 의롭다 칭해주신 뜻도 신자더러 바로 그런 자리에까지 이르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잠시 하나님께 “미안합니다.”라고 말로만 때우지 말라는 것이다. 반성하고 회개한 것이 장래의 바뀐 행동과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야말로 하나님에게까지 립서비스 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겠는가? 골고다 십자가가 신자에게 아무런 은혜와 권능이 되지 못하니, 인간적 표현으로 말해 당신께서 땅을 치고 한탄할 일이지 않겠는가?
율법을 자기 의지와 능력으로 완전히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자에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나는 순간 성령이 내주하여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 보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이 함께 하고 있다. 정말로 자신을 완전히 깨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성령의 법, 생명의 법에 의지해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신뢰하고서 그 권능을 견고히 붙들고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온전하신 하나님은 그런 신자는 반드시 온전하게 해주신다. 성경이 너무나 무리해 보이는, 때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계명으로 우리를 권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믿음으로 기꺼이 순종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은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은 신자의 순종으로 완성된다.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은 창조 때부터 당신을 따르는 당신의 백성에게 맡겨졌지 않은가?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뜻은 바로 그 일에 남은 평생 동안에 자기 모든 힘을 다해 충성하겠다는 결단, 헌신, 아니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또 하나님을 모든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참된 뜻이다. 종교적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참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절대 신자더러 바치라고만 하지 않는다. 진짜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이 신자의 의와 거룩으로 완성된다는 진리를 말이다. 그분의 의와 거룩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 너무나 거룩하고 의로운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영광을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믿은 진짜 보상이자, 축복이자, 특권이지 않는가? 어찌 그 좋은 것들을 마다할, 아니 주저할 수 있는가? 그럴수록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손해가 아닌가?
10/22/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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