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젊은 시절 | 롯데 창업주 신격호 회장의 인생/생애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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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 나무위키:대문

실제로 롯데의 각종 건물, 브랜드, 온갖 서비스 명칭엔 늘 샤롯데가 붙는다. 각종 언론에서는 첩 서미경 씨를 신격호 회장의 샤롯데라 불렀다. 젊은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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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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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를 만든 남자] 시모노세키의 18세 도망자, 화공학 지식으로 …

… 신격호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샤롯데'(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를 과연 붙잡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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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journal.com

Date Published: 3/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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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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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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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를 만든 남자] 시모노세키의 18세 도망자, 화공학 지식으로 일본 껌 시장 제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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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 창업주 고 신격호 총괄회장 1주기

고독과 연구, 열정의 경영인

1월19일은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1921~2020)의 1주기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이었다. 1948년 롯데라는 기업을 만들어 껌으로 일본 열도를 제패했고,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은행에 예치해 1950년 6·25전쟁 전까지 국익을 챙겼다. 1960년대에는 한·일 관계 복원의 막후 실력자로 활약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에 원동력을 제공했다. 1989년 건립한 롯데월드와 2016년 완공된 세계 5위 높이의 롯데타워(2017년 개장)는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일제 문화통치 시대에 태어나 총력전 시기(194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응용화학을 배우고, 전후(戰後) 소매업과 유통업으로 거대 사업 제국을 일군 신격호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자신의 ‘샤롯데’(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여주인공)를 과연 붙잡을 수 있었을까. 혹자는 그가 자신이 일군 제국을 떠나야 했던 ‘리어 왕’(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한 작품의 주인공)과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간 신격호 총괄회장의 일대기를 다룬 책은 10여 권 있었다. 2015년에는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나의 아버지 신격호》라는 책을 발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적도 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평생 동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고, 스스로 성공한 기업인으로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지난해 11월, 신격호가 롯데 제국의 건설자로서 느꼈던 고독과 연구, 치열하게 세계를 일궈낸 열정을 담은 《롯데를 만든 남자 신격호론》(일본 다이아몬드 출판사, 마쓰자키 다카시 지음)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저자 마쓰자키는 “롯데와의 교감 없이 철저한 조사와 인터뷰만으로 구축한 평전”이라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 신 총괄회장의 생전 언론 인터뷰 이외에 10여 개의 서적과 동생 신춘호 농심 회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기록을 교차 검증했다고 한다. 시사저널은 총 4회에 걸쳐 ‘신격호론’의 내용을 소개, 분석하고 저자 인터뷰를 연재한다.

1990년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개장식. 왼쪽 네 번째부터 박태준·김종필 전 총리, 신격호 총괄회장,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나카소네 쓰타코 여사, 김대중 전 대통령 ⓒ뉴스뱅크이미지

보통학교 시절 신격호의 성적은 ‘평균 이하’

신격호는 1921년(호적상으로는 1922년) 11월3일 경남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의 영산 신씨 세거지(世居地)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씨(辛鎭洙)는 빈한한 선비였다. 어머니 김필순 여사는 5남 5녀를 부양하기 위해 논밭을 일구고 장날에 읍내로 나갔던 농촌 여성이었다. 가난과 편견은 큰 장애물이었다. 부친은 신격호에게 근대 교육을 받게 할 의지가 별로 없었으나 재력가였던 큰아버지 신진걸씨(신동인 전 롯데쇼핑 대표의 조부)의 도움으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 시절 신격호의 성적은 ‘평균 이하’거나 ‘보통’ 수준이었다. 언양공립보통학교 시절에는 집에서 20km를 2시간씩 걸어 등교하고 다시 2시간 걸려 하교했다. 점심을 거의 먹을 수 없어 “어떻게 하면 허기를 속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다 보니 공부보다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과정 자체가 고역이었다. 농업학교(울산공립농업실수학교)에 진학해서도 학업에 별 흥미는 못 느꼈지만, 고독과 사색을 즐기게 되었다. 이 시절 자주 읽은 소설과 영화는 청소년 신격호의 성장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학교를 마친 이후에는 백두산 근처의 함경북도 명천 종양장에서 양을 키우는 연수생으로 일했다. 이때 만난 기사(技師) 오쓰 다카아키(大津隆紹)와 평생의 인연을 맺는다. 그는 일본 농림성 출신의 공무원이자 수의사였다. 오쓰는 신격호가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꿈을 밝히자 그를 크게 격려하고 제자로 키운다. 훗날 그의 조카 아카바네 시게코(赤羽根子)는 롯데의 경리직원 겸 비서로 근무했고, ‘추잉 껌’ 열풍의 주역 데즈카 시치고로(手塚七五) 박사와 결혼했다. 연수생 과정을 거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신격호는 아버지의 요구로 부농 노(盧)씨 집안의 비슷한 연배 여성(노순화 여사)과 혼례를 올린다. 하지만 1940년대의 경남 농촌은 처참할 정도로 빈곤했고 마을 원로들이 지역 분위기를 통제하는 권위적인 곳이었다. 더 이상 고향에 머물러서는 답이 없겠다고 판단한 신격호는 83엔(당시 면 공무원의 월급 2개월 치)을 들고 울산경찰서장에게 추천장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간다. 18세 때의 일이었다. 이때 쓴 이름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였다. 한때 신격호가 2차대전 전범 중 한 사람인 외상(外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의 먼 친척이 아니냐고 오해받게 한 계기였다. 당시 영산 신씨는 중국 고전 이아(爾雅)의 한 구절(在辛曰重光)을 따 ‘시게미쓰(重光)라는 성씨를 설정창씨(設定創氏) 방식으로 바꿔 썼다.

장남 동주, 차남 동빈과 함께한 30대 중반의 신격호 ⓒ시사저널 포토

화공학을 전공…《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롯데 이름 탄생

밀항이 아니었다. 엄연히 합법적인 자격을 얻어 도일(渡日)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지 사정은 만만치 않았다. 당장 시모노세키(下關)항에 내린 후 특별고등경찰에게 붙잡혀 중국에서 건너온 간첩이 아닌지 심문을 받았다. 장시간 고문까지 당한 끝에 풀려난 신격호는 지인이 사는 도쿄(東京)의 스기나미로 가서 우유 배달, 신문 배달, 공장 아르바이트 같은 허드렛일을 하며 몸을 숨겼다. 경찰의 송환 압력을 겨우 따돌린 이후 그가 선택한 것은 와세다실업학교 야간부 4학년생으로 편입하는 일이었다. 주경야독 생활을 통해 실업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와세다 고등공학교(早田高等工校·야간 3년제)에서 응용화학을 공부했다.

먹고살기 위해 이공계 실업 코스를 선택했지만, 꿈은 작가나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간다 진보초 서점가에서 책을 읽었다. 174cm의 큰 키와 잘생긴 마스크 덕에 “서점에 이케베 료(池部良·당시 청춘 영화의 단골 주연)가 나타났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신격호가 이때 인상 깊게 읽은 서적 중 하나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훗날 롯데 창업의 계기를 제공한 작품이다.

학교를 다니며 주간에는 선반용 커팅오일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촉탁으로 일하던 신격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군수공장에서 노심초사하던 시절이었다. 전당포 겸 고물상 하나미쓰 핫타로(花光八太)는 신격호에게 5만 엔(현재 가치로 약 수억 엔)의 투자 의사를 밝히며 “선반용 커팅오일 공장을 만들라. 수익의 3분의 2는 내가, 3분의 1은 자네가 갖는다”고 제안했다. 작가에서 기업가로 꿈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타구 오오모리(大森) 지역에 피마자 기름으로 커팅오일을 만드는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다음 해 4월 ‘조난 게이힌 대공습’으로 오오모리 공장이 완전히 불탔다. 신격호는 폭격이 없었던 하치오지(八王子)로 옮겨 다시 공장을 열었지만 종전 직전인 8월1일 하치오지 대공습으로 전소되었다.

출자자인 하나미쓰는 “이제 포기하자. 나는 시골로 내려간다”고 했지만 신격호는 비극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8·15 해방 이후 많은 한국인이 고향으로 돌아갔음에도 일본 현지에 남았다. 종전 후 닥친 하이퍼 인플레와 예금봉쇄, 물자 부족 사태로 인해 시장에서 소비재 수요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전쟁 배상금을 감당하기 위해 대량의 화폐를 찍어내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비누, 우유, 쌀과 같은 생필품이 귀해졌다.

이때 신격호가 선반용 커팅오일에 사용했던 피마자 기름이 ‘효자상품’의 원재료가 됐다. 신격호는 응용화학 지식을 바탕으로 피마자를 이용해 비누와 함께 머리에 바르는 포마드 오일을 생산했다. 처음에는 하치오지의 농가를 빌려 가내수공업에 가깝게 했지만, 나중에는 스기나미구 오키쿠보(荻窪)에 100평 규모의 공장을 세웠다. 건물에는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ひかり特殊化究所·1946년 창립)라는 간판이 붙었다. 포마드와 비누 이외에 여성용 화장품까지 만들어 팔았다. 물건 1개당 3~5엔짜리가 10엔 넘게 소매상들에게 팔렸다. 회사원 평균 월급이 200엔가량 하던 시절이었다. 10명 안 되는 직원이 화장품 사업으로 매월 4만~5만 엔가량의 이익을 냈다. 이때 거금을 벌어들인 신격호는 하나미쓰에게 투자금과 함께 집 한 채 정도의 이자를 붙여 돌려줬다. 물론 하이퍼 인플레 시기였기 때문에 ‘5만 엔+알파’의 실질가치는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격호가 평생 동안 강조했던 신용과 열정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왼쪽부터 나가타 마사카즈 롯데 오리온스 초대 단장,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 신격호 롯데 회장 ⓒ시사저널 포토

추잉껌의 시초인 리글리사 벤치마킹해 롯데껌 론칭

화장품 열풍 이후 주목한 상품이 껌이다. 일설에 따르면 신격호와 함께 껌 사업을 하던 재일동포들이 배신한 후 “저놈들을 응징하고야 말겠다”는 일념하에 껌 생산에 주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련 에피소드가 없다 하더라도 신격호는 꽤 오래전부터 껌 생산 역사에 대해 읽고 있었고, 화학 지식을 응용해 대량 생산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추잉껌의 시초인 리글리사(Wrigley Jr. Company)가 비누를 생산하다가 베이킹파우더 한 캔에 끼워팔던 풍선껌 두 개가 더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리글리는 도매점이 아니라 잡화점과 소매점을 직접 공략해 자사 제품인 ‘주시푸르츠’, ‘스피아민트’(모두 롯데껌에 있는 브랜드명)를 계산대 옆에 진열하게 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역발상 투자 전략까지 감행했다. 1907년 공황 당시 다른 사람들이 비용을 줄일 때 과감한 프로모션과 광고 비용으로 상품의 인지도를 높였다. 그 덕분에 1차 세계대전(1914~1918) 참전 용사들에게 껌은 핵심 소비 품목이 됐다.

신격호 자신도 리글리와 마찬가지로 비누로 큰 히트를 친 경영자였다. 또 일본 경제가 황폐화 시대를 딛고 재건될 경우 큰 수요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도 비슷한 지점이었다. 전환기를 준비하려면 조직의 성격도 바뀌어야 했다. 1948년 6월, 신격호는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 간판을 내리고 롯데라는 간판으로 회사를 다시 출발시켰다. 사업목적에는 과자류 생산 이외에 낙농, 농산식품 제조, 화학약품 및 의약품 가공, 합성수지 제조·가공 품목이 추가됐다. 핵심 역량을 전환할 뜻을 확고히 한 것이다. 롯데는 같은 해 10월에 신주쿠구 하쿠닌초(新宿區百人町)에 2000평 규모의 토지를 매입한 뒤 1950년에 본사와 공장을 이 지역으로 옮겼다. 하쿠닌초는 2차세계대전 전에는 학자와 군인이 많이 살던 부유층 주거지였다. 이곳은 이후 야마노테선 오쿠보역이 들어서고, 와세다대학이 가까이 있는 도쿄 중심 상권으로 바뀐다. 롯데의 토지 투자 실력이 처음 빛을 발한 계기였다.

(왼쪽)일본에서 출판된 《롯데를 만든 남자 신격호론》, 동아일보 1972년 2월10일자 광고ⓒ시사저널 포토

경쟁 세계를 흔든 대담한 홍보 전략 ‘미스 롯데’ 미인대회 창안

‘롯데껌’의 첫 과제는 원료 차별화였다. 당시 일본에서 생산되던 껌들은 대부분 초산 비닐수지를 이용한 제품이었다. 품질은 좋지 않았고 껌을 씹다 식중독을 경험한 소비자도 있었다. 신격호도 당시 생산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 무직자들과 함께 리어카로 초산 비닐수지를 모아 인공감미료인 사카린, 둘신을 섞어 껌을 만드는 일을 반복했다. 하지만 미군부대에서 나온 천연수지를 이용한 껌의 감촉을 당해 낼 수 있어야만 ‘일본의 리글리’라고 할 수 있었다. 신격호는 공업재료로 수입되던 천연수지 입수에 전력투구하는 한편, 와세다대 이공학부 출신 기술자를 영입해 추잉껌 품질 개선에 매진했다. 롯데 초창기의 원훈(元勳)인 데즈카 시치고로 박사는 합성 접착제 기술 전문가를 비롯해 천연고무 전문가 등을 찾아다니며 하루에 30종 이상의 껌을 시식했다. 천연수지를 사용한 롯데껌은 경쟁 브랜드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금세 전략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5엔짜리로 롯데의 첫 ‘100억 매출 상품’인 카우보이 껌, 최초로 엽록소를 넣은 그린 껌이 히트를 쳤다. 그린 껌의 경우에는 입냄새 제거 효과와 함께 혈류량 증가, 외상 치유와 같은 효능을 프린트해 제품 안에 삽입했고 ‘그린 전성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기술 연구 이상으로 롯데껌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은 공급망 관리(SCM) 실력과 마케팅 역량이다. 신격호는 우선 전국 유통망을 갖기 위해 오래된 과자점인 오사카야(大阪屋)를 인수하고 전(前) 오너였던 이노우에 나가하루(井上長治)를 판매 담당 부사장으로 임명했다. 오사카를 넘어 규슈까지 커버하게 하려는 포석이었다. 또 하리스, 모리나가 제과 등이 갖고 있는 3단계 유통망 구조(제조사·지점·대리점→특약점·중도매상→지방도매상·소매상)의 맹점을 노려 소매점 중심의 직판 체제를 기획했다. 1951년 4월에 만들어진 자전거직판부대는 하루에 60군데씩 소매상을 돌며 롯데껌을 공급했다. 처음에는 중도매상 위주로 저항이 심했고 전통 브랜드들의 공격도 상당했다. 하지만 1955년 무렵이 되자 특약점과 중도매상들 위주로 ‘롯데회’가 결성되었고 1956년에는 후쿠오카 롯데회, 홋카이도 롯데회, 도호쿠 롯데회 등 지역 유통 플랫폼이 구축되었다. 신격호는 원도매상들은 ‘프렌드회’로, 중도매상과 소매상은 ‘패밀리회’로 묶어 관리하고 판촉사원이 돌면서 이들의 의견을 수집해 신문 ‘롯데 뉴스’도 발행했다.

롯데의 또 다른 마케팅 역량은 화제를 만드는 홍보력에 있다. 풍선껌 시장을 제패한 이후 경쟁 브랜드였던 하리스와 판껌 시장에서 격돌하면서 승기를 잡으려면 언론과 방송을 이용한 전략이 필요했다. 하리스는 아사히방송의 라디오 채널에서 ‘하리스 퀴즈’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송출하며 전국적인 선전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에 신격호는 분카방송(이후 닛폰방송과 공동으로 후지TV 설립)과 손을 잡고 ‘미스 롯데’라는 미인대회를 만들었다. 콘테스트 1위부터 3위까지는 오픈카에 태워 긴자, 신주쿠를 돌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캠페인을 내놓기도 했다. 이토록 대담한 선전의 배경에는 “공격이야말로 최대의 방어”라는 신격호의 홍보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1958년에는 TBS 라디오를 통해 ‘롯데 노래 앨범’을 방송하게 했다. 진행자 다마오키 히로시(玉置宏)가 “입안의 연인, 롯데가 제공하는 노래 앨범”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매주 일요일 정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롯데 노래 앨범은 1979년까지 이어지며 이브 몽탕, 알랑 들롱과 같은 세계적인 배우들까지 출연해 신격호의 브랜드 홍보 전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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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회장 어린시절

한국의 유통거인, 롯데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의 특별한 고향 사랑

울산 둔기리 마을 소년에서 롯데그룹을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일궈낸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시다면 글을 통해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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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辛格浩, 1921년 양력 11월 3일 (1921년 음력 10월 4일)[1] ~ 2020년 양력 1월 19일)는 롯데그룹을 창업한 일본,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었다.[2]

생애 [ 편집 ]

유년기 [ 편집 ]

1921년 경상남도 울산군 삼동면 둔기리의 영산 신씨 집성촌에서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필순의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진수는 재력이 있었으나 그의 친척에 의하면 신 회장의 선친은 절대 돈 자랑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3]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거들다가 면장을 지낸 백부의 도움으로 2년제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1년간 백두산 밑에 있는 ‘명천 국립 종양장’의 연수생으로 지냈다.

일본에서 기업 활동 [ 편집 ]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선반(절삭공구)용 기름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우면서 사업을 시작했으나 2차 대전 때 공장이 전소하였다. 1946년 와세다 고공(高工) 야간부 화학과를 졸업한 뒤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돈을 벌 작정으로 일본에 가기로 결심하고 부관연락선의 밀항선으로 몸을 싣는다.[4]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한 뒤 껌 사업에 뛰어들었고 1948년 ㈜롯데를 설립했다.[4]

1950년 재일한국인이 많은 신주쿠구 신오쿠보에 껌공장인 롯데 신주쿠공장을 설립하였다.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애드, 1968년 롯데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으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되었다. 1972년 사이타마 현 우라와 시에 롯데의 제과공장단지인 우라와공장을 설립하고, 1973년 니시신주쿠에 롯데본사빌딩을 건립하였다.

1988년 일본의 부동산버블로 포브스가 선정한 억만장자 순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아버지 신진수는 1968년경 고향을 떠나 1973년 사망할 때까지 서울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3]

1968년-1969년 사이 울산국가산업단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대암댐(69년 12월 준공)을 건설하면서 마을이 수몰, 신씨 일가 40여 가구가 이주하면서 대부분 흩어졌고 이때 신진수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3] 마을이 수몰되자 그의 친ㆍ인척과 고향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5] 이를 아쉬워한 신격호는 1971년부터 `둔기회`를 만들어 매년 5월 첫째 주말에 마을잔치를 열고 있다.[5] 이후 그는 매년 고향인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마을 잔치를 열었다.[6]

일본에서 계속 기업 활동을 하며 유통업 외에도 다른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 1969년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의 도쿄 오리온스 구단을 보유하고 있던 나가타 마사이치 구단주의 요청에 따라 롯데와의 업무 제휴 관계를 체결하며 롯데 오리온스로 개칭했고 1970년 롯데회관을 설립한 뒤, 같은 해에 나가타가 롯데의 구단주에서 사임했다.

1971년에는 나가타가 전직 총리 기시 노부스케(나가타의 친구) 수상과의 관계를 통해 나카무라 나가요시(기시 前 총리의 비서관)를 구단주로 취임시켰으나, 나카무라는 그 해 시즌 이후에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이후로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동시에 구매하다가 한 사람이 두 구단의 소유주가 될 수 없다는 일본 프로 야구의 규정 때문에 롯데의 주주를 롯데의 구단으로 바로 반납하며 롯데의 구단주를 사임하였고,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롯데 오리온스를 인수해서 현재까지 3대 구단주로 취임하며 재직하였다.[7] 1991년 11월(1992년)부터 그의 차남 신동빈이 지바 롯데 마린스라는 구단명으로 개칭하였다. 1972년 롯데리아, 1978년 롯데 리스 등을 세웠다. 또한 전자 쪽으로도 진출하여 1971년 롯데전자를 세웠고, 1985년 롯데 데이타 센타를, 1987년 롯데 엔지니어링 등을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으며, 일본의 10대 재벌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한국 진출 [ 편집 ]

1966년부터 대한민국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롯데알루미늄에 이어 1967년에 롯데제과를 설립하였다. 그 뒤 한국에서도 다른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하여 1973년 호텔 롯데·롯데 전자·롯데 기공하였다.

1974년 롯데 산업·롯데 상사·롯데 칠성 음료 등을 설립했고, 1975년 롯데 자이언츠를 설립, 1978년 롯데삼강(현 롯데푸드), 롯데건설, 롯데햄, 롯데우유(현 푸르밀), 1979년 롯데쇼핑, 1980년 한국후지필름, 1982년 롯데캐논(현 캐논코리아비즈니스솔루션)·대홍기획 등을 설립했으며 1978년에는 롯데크리스탈호텔을 건설하였다.

관광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관광산업 분야에서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하였다. 2006년 포브스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격호 회장 일가의 재산은 약 45억달러로 세계 136위이었다.

2015년 장남인 신동주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이 터졌을 때 신동주 편에 섰으나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물러났고 한국 계열사 이사직에서도 퇴임하였다. 두 아들과 함께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 및 벌금 3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

2020년 1월 19일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중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했다. 향년 97세[8]

논란과 의혹 [ 편집 ]

조세 포탈·횡령·배임 의혹 [ 편집 ]

2016년 10월 19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신격호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조세),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배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9]

2006년 7월 신격호는 차명보유한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3%를 홍콩, 미국 페이퍼컴퍼니와의 매매거래로 가장해 장녀 신영자에게 증여하면서 증여세 560억원을 포탈(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조세))하였고, 차명보유한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1.6%를 홍콩, 싱가포르 페이퍼컴퍼니와의 매매거래로 가장해 중혼적 사실혼 배우자 서미경에게 증여하면서 증여세 298억원을 포탈(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조세))하였다. 또한 신유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신유미에게 같은 방법으로 롯데홀딩스 지분 1.6%를 증여하여 증여세 298억원을 포탈(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조세))하였다. 롯데그룹 관계자, 회계사 등의 조사시 진술, 롯데 내부보고서 등에 따르면 신영자, 서미경, 신유미의 포탈 세액은 약 2,857억원으로 추정되나, 롯데가 자료 제출에 협조하지 않아 검찰은 서미경 등이 변호인을 통해 인정하고 자료를 제출한 최소 금액으로 기소하였다. 신유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어 여권무효화조치와 기소중지하였으며, 신격호가 신유미에게 증여하여 증여세를 포탈한 부분도 기소중지하였다.[9]

2003년 11월 ~ 2013년 2월에는 롯데시네마 영화관 매점 운영권을 신영자, 서미경, 신유미가 운영하는 회사인 유원실업, 시네마통상, 시네마푸드에 헐값으로 넘겨주어 롯데쇼핑에 778억원의 재산상 손해(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배임))를 가하였다. 신유미에게 매점 임대로 452억원의 손해를 가한 부분(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배임))에 대해서는 기소중지하였다.[9]

2009년 12월에는 자신이 보유한 비상장주식을 호텔롯데 등 롯데 3개 계열사에 매수하였는데, 경영권 양도와 무관한 거래임에도 경영권 프리미엄 30%(94억원)가 할증된 가격으로 매수하도록 해 94억원 손해를 끼쳤다(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배임)). 신격호는 매도대금 408억원을 신영자, 서미경, 신유미에게 현금 600억원을 지원하는데 사용하였다.[9]

허위 급여지급 논란 [ 편집 ]

2005년 ~ 2015년 10월에는 실제 근무한 적이 없는데도 장남 신동주에게 대한민국 내 롯데 12개 계열사에 대한 급여 명목으로 391억원을 지급(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하였다. 신동주는 일본 롯데 부회장으로 대부분 일본에 체류하였으며, 스스로 한국 계열사를 위해 일한 적이 없으며 어느 계열사에서 급여를 주는지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였다.[9]

2005년 ~ 2016년 5월에는 실제 근무한 적이 없는데도 롯데 10개 계열사에 대한 고문료 및 급여 명목으로 서미경, 신유미에게 117억원을 지급(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하였다. 롯데는 신동주, 서미경, 신유미와 계약 없이 이사나 고문으로 등재하여 급여를 지급했고, 이들은 회사에 출근한 적이 없으며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또한 지급받은 급여를 주식매수 대금, 카드대금 등 생활비, 세금납부 등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였다.[9]

지분 허위 공시 논란 [ 편집 ]

2018년 1월 신격호는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벌금 1억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신격호는 대한민국 내 롯데 11개 계열사의 기업집단 현황·비상장사 공시, 주식소유현황 신고에서 고준샤(광윤사) 등 16개 롯데 해외 계열사가 소유한 지분을 ‘동일인 관련자’가 아닌 ‘기타주주’로 허위로 기재하였다.[10]

일화 [ 편집 ]

둔기회 [ 편집 ]

영산 신씨 집성촌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는 1969년 울산공단 공업용수를 위한 댐 건설로 일부 지역이 수몰되자 신격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이를 안타까워 한 신격호는 1971년부터 ‘둔기회’를 만들어 매년 5월 첫째 주말에 마을잔치를 열고 있다. 첫해 수십 명에 불과했던 둔기회 회원 수도 자손들이 늘면서 지금은 1100여 세대가 됐다.

형제간 다툼 [ 편집 ]

롯데가는 유난히 형제간 다툼이 심해 신 총괄회장은 ‘비운의 빅 브라더’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 12월 16일, 서울지방검찰청의 문상익 부장 검사는 롯데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지내고 있던 첫째동생 고 신철호가 롯데 화학공사를 설립하기 위해 형 신격호와 셋째 동생 신춘호의 도장을 위조하고 회사공금 4억 2천여 만원을 횡령하는 논란 사태를 들으면서 구속기소 하였으며,[11] 1973년에는 신춘호와 법정 소송을, 1996년에는 막내 신준호와 땅문제로 법정 소송을 벌였다.[12]

아버지 유골 도난 사건 [ 편집 ]

1999년 3월에 울산에 있던 아버지 신진수의 묘소 유골이 절도범에 의해 도난당했다. 3월 4일 오전 8시 35분에 한 남자가 서울 소공동 롯데빌딩 26층에 있는 신격호의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 회장 부친의 묘소를 확인해보라고 해 롯데그룹 관계자들이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암리 선산으로 급히 내려가 확인한 결과 아버지의 묘소가 도굴되고 유골이 없어졌다.[13] 이어 범인은 같은날 오후 4시 35분과 40분에 비서실로 다시 전화를 걸어 “묘소를 확인해봤느냐?”고 묻고 “경찰과 언론에 알리지 말라.”고 협박한 뒤 전화를 끊었다.

범인은 또 3월 5일 오전 11시께 2차례 전화를 걸어 “유골을 돌려줄테니 회사 직원 2명이 승용차 트렁크에 8억원을 넣어 5일 밤 8시까지 부산에 내려와 돈을 넘겨줘라.”고 요구하였다. 경찰은 훼손된 묘지 주변에서 곡괭이 1개와 관 뚜껑을 열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장도리 2개를 발견했으며 서울경찰청 감식반 요원들이 현장에 파견돼 지문채취 등 정밀감식 작업을 벌였다. 경찰은 4일과 5일 신격호 비서실에 5차례 협박전화를 걸어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며 8억 원을 요구한 4남자를 추적하였다.

1999년 3월 7일에 범인 정금용, 임종순 등이 모두 경찰에 검거되었다. 경찰에 붙잡힌 용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임종순은 “롯데와는 관련이 없고 원한도 없다.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일을 저질렀다.”라고 진술하였다.[14]롯데그룹 관계자들은 그 동안 이 사건이 롯데그룹이나 그룹 총수에 대한 원한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밝혀질 경우 그룹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으나 원한관계는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수사는 종결되었다.

1999년 3월 9일 실시된 현장 검증에서 신격호 회장의 조카 고 신동학(신준호 푸르밀 회장 장남)은 유골을 훼손하는 장면을 재연하는 것을 보고 분개해 범인들을 폭행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방송사 인터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저 두 사람 죽여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15]

고향 [ 편집 ]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대암댐 근처, 그가 살았던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그의 별장이 있으며, 신격호는 매년 한 두차례 이곳에 와서 쉬며 선친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3]고 한다.

친척이며 신격호 회장과 8촌인 신정호는 그에 대해 “서울로 간 후에도 이곳에 있는 가까운 친척들에게 논을 사주는 등 친인척들을 많이 보살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또 “신 회장의 선친은 절대 돈 자랑 하지 않았다.”면서 “가난한 친인척들에게는 먹을 양식까지 보내주었다.”고 회고했다.[3]

재산 [ 편집 ]

1988년 당시 신격호의 재산은 대한민국에서 1위였으며 세계에서 4위였다.

상훈 [ 편집 ]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가족 [ 편집 ]

아버지 : 신진수(辛鎭洙, 1900년 ~ 1973년)

어머니 : 김필순(金弼順) 배우자 : 노순화(盧順和, 1922년 ~ 1951년) 장녀 : 신영자(辛英子, 1942년 ~ ,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前 롯데쇼핑 사장) 전 사위 : 장오식(張五植, 前 선학알미늄 회장) 외손자 : 장재영(張在永, 유니엘 운영자, 부인 류주영) 외손녀 : 장혜선(張惠善), 前 롯데백화점 해외명품팀장) 외손녀 : 장선윤(張善允, 블리스 대표, 롯데호텔 전무, 남편 양성욱 브이엔에스 대표) 외손녀 : 장정안(張政安, 시네마통상 주주, 前 롯데백화점 잡화팀장, 남편 이승환 변호사) 배우자(사실혼) : 시게미쓰 하쓰코 (1927년 ~ , 일본어: 重光 初子 , 일본어: 竹森 初子 다케모리 하쓰코 (결혼전) [*] ) 장남 : 신동주(辛東主, 1954년 ~ , SDJ코퍼레이션 회장) 자부 : 조은주(趙銀柱, 1963년 ~ ) 손자 : 신정훈(1993년 ~ ) 차남 : 신동빈(辛東彬, 1955년 ~ , 롯데그룹 회장) 자부 : 시게미쓰 마나미 ( 일본어: 重光 真奈美 , 일본어: 淡河 真奈美 오고 마나미 (결혼전) [*] ) 손자 : 신유열(辛裕烈/辛愉悅), 일본명: 시게미쓰 사토시( 일본어: 重光 聡 ), 1986년 ~ ) 손녀 : 신규미(辛圭美, 1988년 ~ ) 손녀 : 신승은(辛承殷, 1992년 ~ ) 배우자(첩) : 서미경(徐美敬, 첩형 서진석 前 유원실업 대표, 유니플렉스 대표) 차녀 : 신유미 (辛由美, 1983년 ~ , 롯데호텔 고문) [16] 남동생 : 신철호(辛哲浩, 1923년 ~ 1999년) – 전 롯데제과 사장 제수 : 송수영 조카 : 신혜경 – 신철호의 장녀, 롯데그룹 전무 질서 : 조용원 – 변호사 조카 : 신미진 질서 : 장태규 – 변호사 조카 : 신혜승 질서 : 정경언 – 변호사 조카 : 신동림 질부 : 정승원 – 수원지방법원 부장 판사 조카 : 신동훈 – 제이텔 창업자, 사이드웨이 파트너스 대표이사. 여동생 : 신소하 (1926년 ~ 2005년) 매제 : 서병택 여동생 : 신경애 매제 : 우용조 조카 : 우락 – 휴네시스 사장 남동생 : 신춘호(辛春浩) – 농심 회장. 제수 : 김낙양 조카 : 신현주 – 농심기획 부사장 질서 : 박재준 – 전 조양상선그룹 부회장 조카 : 신동원(辛東原) – 신춘호의 장남. 농심홀딩스 대표이사 사장, 농심 대표이사 부회장 질부 : 민선영(민철호 전 동양창업투자 사장 딸) 조카 : 신동윤 – 신춘호의 차남 율촌화학 부회장. 질부 : 김희선(김진만 전 국회 부의장 차녀) 조카 : 신동익 – 신춘호의 삼남 메가마트 부회장. 질부 : 노재경(노홍희 전 신명전기 사장 딸) 조카 : 신윤경 질서 : 서경배 – 아모레퍼시픽 회장 여동생 : 신경숙 매제 : 박성황 – 전 한일향료 사장 조카 : 박기택 – 국민대학교 교수 남동생 : 신선호(辛宣浩, 일본명: 시게미쓰 노부히로, 일본어: 重光 宣浩 ) – 일본 산사스 사장 제수 : 심정자(심정섭 전 민국일보 편집장 딸) 조카 : 신유나 – 신선호의 장녀 질서 : 이호진 – 태광그룹 회장 조카 : 신동우 – 신선호의 장남, 일본 산사스 전무 조카 : 신이나 조카 : 신동준 여동생 : 신정숙 매제 : 최현열 – NK 그룹 회장 조카 : 최은영 질서 : 조수호 – 전 한진해운 회장 조카 : 최은정 질서 : 정몽익 – KCC 사장. 조카 : 최강용 조카 : 최은진 남동생 : 신준호(辛俊浩, 1941년 ~ ) – 푸르밀 회장 제수 : 한일랑(한순용 전 롯데칠성음료 감사의 딸) 조카 : 신동학(1968년 ~ 2005년) 조카 : 신동환 질부 : 최윤숙(최병석 전 대선주조 회장의 딸) 종손 : 신재열 종손 : 신찬열 조카 : 신경아 – 대선건설 상무 질서 : 윤상현 – 국회의원 여동생 : 신정희(辛貞姬) – 동화면세점 사장 매제 : 김기병(金基丙) – 롯데관광 회장

큰아버지 : 신진걸(辛鎭杰) 사촌형 : 신병호(辛炳浩, 1916년 ~ 2005년) – 前 롯데제과 고문 사촌동생:신동옥 당조카(5촌 조카) : 신동인(辛東仁) – 前 한국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 대행 당조카 : 신동립 – 전 롯데호텔 대표 [17] [18] 당조카 : 신영우 당조카 : 신복남 당조카 : 신지현 당조카 : 신주현

기타 [ 편집 ]

신격호 회장 사망 시점과 관련하여 롯데건설은 청량리 588 재개발 갈취 사건과 관련하여 연루 의혹이 있었다.[19]

각주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제1대 롯데그룹 총수/총괄회장

1948년 6월 28일 ~ 2017년 6월 후임

신동주

신동빈

서미경 누구? 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샤롯데…38살차 셋째 부인

문 대통령 조화 보내…정세균 총리·이낙연 전 총리 등 조문20일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의 빈소에는 각계 인사들의 본격적인 조문이 이어졌다.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이날 오전 가족들이 먼저 자리했다.오전 7시 50분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가장 먼저 빈소에 도착했고, 8시 26분께 장남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도 와서 상주 역할을 하며 함께 조문객을 맞았다.신 명예회장의 부인인 시게미츠 하츠코 여사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등 가족들도 빈소를 지켰다.오전 9시 37분께 재계 인사 중 처음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이 부회장은 10여분 정도 빈소에 머물면서 유가족을 위로했다.오후 2시께 빈소를 찾은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고인의 생애와 한국 경제가 같은 궤적을 그렸던 시기가 있다.빈손으로 일어나서 고도성장을 이루고 기적 같은 성취를 했다”며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주역 가운데 한 분이셨는데 떠나시게 돼 애도를 표하러 왔다”고 말했다.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현대사의 곡절 속에서 신화적인 성공을 이룬 기업인”이라고 고인을 기리면서 “(부산) 영도다리 복구 때 많은 부담을 드렸다.마음의 빚이 많다”고 말하기도 했다.롯데는 2009년 1천100억원을 투입해 영도다리를 영도대교로 재개통하고 이를 부산시에 기부채납했는데 이런 조치가 신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손경식 CJ그룹 회장 겸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신동빈 회장과) 지난 1, 2년간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지났으니 롯데가 발전할 일만 남은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소개했다.이외에도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등 재계 인사들과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오거돈 부산시장 등 정계 인사들도 잇따라 빈소를 찾았다.박용만 회장은 “자수성가의 지난한 과정을 아는 창업 세대의 거의 마지막 분”이라고 고인을 추모하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롯데를 이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재계 인사들은 이날 상당수 스위스 다보스 포럼 출장이 예정돼 있어 빈소를 방문한 뒤 출장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와 하임 호센 주한 이스라엘 대사, 브루노 피게로아 주한 멕시코 대사 등 주한 외교 사절들의 걸음도 이어졌다.오후 3시부터는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불교 형식으로 입관식이 진행됐다.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오후 5시 40분께 함께 빈소를 찾았다.김 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고인에 대해 “‘식품에서 유통, 석유화학에 이르기까지 한국 경제 토대를 쌓으신 창업 세대’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문 대통령은 앞서 전날 조화를 보내 유족들을 위로하기도 했다.저녁에는 정세균 국무총리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함께 빈소를 찾았다.정 총리는 “과거 산업자원부 장관을 할 때 고인과 어떻게 기업을 일궜는지 대화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고 회고하면서 “불굴의 의지로 기업을 일군 고인처럼 젊은 세대도 그런 의지로 미래 산업을 가꾸고 그 유지를 받들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황 대표는 “고인은 경제가 어려울 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나라를 위해 큰 노력을 하신 분”이라고 애도했다.빈소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보낸 조화도 자리했고,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근조기를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당초 롯데그룹 측은 “평소 거화취실(去華就實.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을 실천한 고인의 뜻에 따라 조의금과 조화는 사양하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조화와 조기를 돌려보내지는 않았다.다만 빈소 입구에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합니다’는 안내 푯말을 배치했다.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지고 발인은 22일 오전이다.유언장은 별도로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신 명예회장은 고향인 울산 울주군 선영에 안치될 예정이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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