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란 무엇 인가 | 존 파이퍼, 예배란 무엇인가? 최근 답변 15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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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예배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린다’는 표현부터 각종 찬양에 이르기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는 경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말하기 때문에 예배라는 단어가 가진 진정한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질문, “예배란 무엇인가?”에 존 파이퍼가 답합니다.
짧은 영상이지만 이를 통해 참된 예배가 무엇이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떤 모습을 띄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r
원제: What is Worship?\r
원본 링크: https://youtu.be/pn69quaqW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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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 뉴스앤조이

구약과 신약에서 말하는 예배의 용어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런 신학적인 용어는 접어 버리고, 간단히 말하면 예배란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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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3/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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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 오피니언·칼럼 – 기독일보

예배란 무엇인가? …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교회를 비롯한 예배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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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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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예배란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그 정확한 개념은 “존경을 나타내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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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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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 달라스 드림교회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행위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헌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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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llasdream.org

Date Published: 1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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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배는 무엇인가? : 기독교 – 기독일보

2 예배 – 원어적 고찰 원래 영어 단어 예배 (worship)는 앵글로 색슨 (Anglo-Saxon)족의 단에에서 온 것으로서 worth 와 ship 의 합성어 입니다. 그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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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8/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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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 최주훈 – Daum 블로그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보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예배’는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며 말씀이 선포되던 공동체 모임’을 뜻한다. 이 모임을 정의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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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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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학 연구] 예배란 무엇인가 ? – 두란노 서원

예배는 신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응답함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생각에 관심과 마음의 사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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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rn153.tistory.com

Date Published: 5/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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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최주훈 | 비아토르- 교보문고

예배란 무엇인가 예전에 담긴 의미와 역사 탐구. klover9.3 (8건). 최주훈. 비아토르. 2021.09.17. 17,000원. 10% 15,300원 적립 85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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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4/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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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 YES24

예배란 무엇인가. : 예전에 담긴 의미와 역사 탐구. 최주훈 저 | 비아토르 | 2021년 09월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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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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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예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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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배 란 무엇 인가

  • Author: 베뢰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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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2.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AjgTiSI-e8

예배란 무엇인가?

기독일보

트윗하기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 교회를 비롯한 예배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은혜를 경험한다.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은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과 성령님을 통한 능력이 소생한다. 예배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체 구성원의 50% 이상이 주일에 단 한번 1시간 정도의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에 더해 젊은 청년과 학생, 주일학교 어린이를 포함한 다음세대의 예배 출석률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예배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매력적인 시간이 아닌 것이다. 나는 한국 교회의 예배가 ‘예배’의 본래 모습을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한국 교회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배를 갱신하고 변화시킬 방법들을 찾고 다음 세대를 위한 구체적인 예배의 강화를 제고해야 한다. 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예배회복과 갱신에 대한 다음 두 가지 방법을 제언하고 싶다. 우선, 예배의 균형을 찾는 일이다. 예배의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성경적인 예배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교 중심의 예배는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수동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예배는 설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라는 말은 더욱이 성경적이 아니다. 예배에서의 설교 중심주의 지향은 초대 교회 예배의 2중 구조인 설교와 성찬과 초기 기독교 교회의 4중 구조인 모임, 말씀, 성찬, 파송, 즉 예배의 중요한 다른 요소들을 급격히 약화시켜버렸다. 초대 교회 예배의 역동성과 기쁨, 소망 등이 예배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성찬의 예배 예식과 더불어 역동성 있는 ‘축제’가 중요한 요소인데, 지금은 예식만 남아있고, 감사와 축제의 기쁨은 사라져 성찬식이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출애굽기 24:1-8에는 예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구조가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전하며 언약을 맺는 장면은 성경 최초의 예배 모티브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모습은 몇 가지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만남과 대화, 말씀과 파송이다. 이사야 6장을 비롯해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의 패턴은 네 가지 구조의 형식이 담겨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우리는 감사로 응답한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영적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버트 웨버(Robert E. Webber)는 이 네 가지 예배의 요소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예배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말씀 예전에만 치우치는 대다수의 현재 우리의 예배는 성경적이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예배의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지 못하고 균형 잡히지 못한 불완전한 예배의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최근 성장하고 있는 예배들을 보면 말씀과 더불어 찬양과 성찬 등이 강화되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하고 있으며, 다음세대들의 참여가 점점 늘어나는 현상을 보인다. 두 번째, 예배의 성경적인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가 늘 드리는 예배이지만 우리는 예배에 대해 잘 알지 못함을 인정해야 한다.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가 정말 성경적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지 등 너무 많은 예배의 본질적인 질문들이 우리 앞에 있다. 예배가 정말 중요하다고 느껴진다면 우리는 제대로 알고 목적이 분명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를 잘 모르고 예배 드린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 예배의 초점이 명확해질 때 우리는 예배에서 보다 깊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넘어 하나님이 어떤 것을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지, 나아가 왜 우리가 그 분을 경배할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질 수밖에 없으며 깊은 교제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넘쳐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원천인 예배에 대해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뛰어 넘는 위대한 사랑의 전주곡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중요하다. A. W. 토저(Aiden Wilson Tozer)는 우리의 존재 가치와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인간의 존재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계속 역설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태어났고 예배를 위해 거듭났다. 우리가 창조되고 또한 재창조되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다. 예배를 위해 최초의 시작이 있었고 또한 예배를 위해 ‘중생’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 교회의 존재 목적도 예배이다. 우리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한다. 예배는 교회의 이차적 목적이 아니며 교회의 액세서리도 아니다. 예배가 교회의 일차적 목적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이차, 삼차 또는 사차 목적이다.” (A. W. 토저, 이것이 예배이다(Worshp The Missing Jewel) 이용복 역, (서울: 규장, 2010), 55-56p.) 예배가 중요하다고 인식될수록 우리는 예배의 본질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배는 교회의 본질이자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믿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출발점인 예배에 대해 명확히 깨달을수록 이 땅에서의 우리의 분명한 존재가치를 알 수 있으며 이는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의 요체가 된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의 요소들에 대한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찬양의 본질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다. 최근 20여년 가까이 서구의 많은 교회들은 찬양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예배 인도자와 사역자, 예배 팀들을 훈련해왔으며, 설교와 함께 유기적인 예배의 좋은 모습을 만들어나갔다. 그로 인해 예배는 더욱 풍부해지고 깊이 있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되면서 예배가 더욱 역동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는 예배에 대한 성경적 본질 회복과 훈련,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 예를 들면 한국 교회의 대다수는 예배에서의 찬양의 중요성을 깊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일 공예배(Corporate Worship)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살아계심을 찬양하는 수직적인(Vertical) 찬양이, 그리고 수요일과 금요기도회 등에는 개인적인 고백과 간증 등의 공동체적 교제의 찬양인 수평적(Horizontal) 찬양이 적용되어야 함에도 이러한 성경적이고 기초적인 찬양의 개념조차 미약하다. 이 같은 찬양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부족은 하나님께 집중되지 못하는 예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말씀의 선포는 성경적인 말씀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하며, 점점 사라지고 약해져 가는 성찬의 회복은 시급하다. 성찬은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강력하게 기억하고 기념하는 상징성이 강한 중요한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마침인 ‘파송’은 또 다른 ‘삶의 예배’의 시작이므로 단지 ‘축복(Blessing)’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강한 역동성의 찬양과 결단과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의 고백이다. 우리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에서의 승리를 위해 영적으로 담대히 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배에서의 말씀 위에 찬양과 성찬의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성경적인 예배의 회복이 예배 갱신의 중요한 시작점이다. 지금 겪고 있는 한국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본질 회복과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통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 모든 예배의 준비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목숨 건 헌신’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예배자들,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만남을 통해 강력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교회의 지도자와 담임목사는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예배의 전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모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예배를 마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며, 깊은 은혜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예배의 무한 책임선언이 있는지 묻고 싶다. 예배는 우리 인생의 부차적인 목적이나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하는 예배자로 창조하셨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릴까?’라는 질문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교회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다. 우리의 모든 사역들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남으로 시작되며, 예배를 등한시하거나 주일의 예식적인 관례로만 끝나서는 미래가 없다. 지금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예배 공동체와 다음세대를 영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의 모습이 무엇인지 상상해보라. 우리의 예배가 과연 그런가? <가진수 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프로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목회학박사(DMin.)

미국 로버트 웨버 예배 대학원(The Robert E. Webber Institute for Worship Studies, IWS) 예배학박사(DWS)

현재, 미국 월드미션대학교(World Mission University) 예배학과 교수 겸 학과장

현재, 글로벌워십미니스트리(Global Worship Ministry) 설립자

현재, 워십리더코리아(Worship Leader Korea) 설립자

현재, 국민일보 등 예배 칼럼니스트

현재, 예배 찬양 인도자

『성경적 하나님의 임재 연습』 『예배 찬양 인도』(상,하권) 『예배 성경(신,구약)』 『예배, 패러다임 시프트』 등 다수 저술

『예배의 흐름』 『예배의 고대와 미래』 『예배란 무엇인가?』 『하늘의 예배를 회복하라』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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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예배란 무엇인가?

●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그 정확한 개념은 “존경을 나타내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경건과 의식을 뜻하며,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라는 곳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사마리아사람들은 예배의 장소를 그리심산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직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으로 알았으므로,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얼핏 보면, 여인과 예수님이 서로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리심 산이 옳은가(신11:29) 혹은 선택한 장소, 예루살렘이 옳은가(신12:5)에 대해서 여인은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소에 대해서 전혀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라고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이다.

그러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즉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방법이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은 예배란 것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물론 구약에게 참예배의 실상이 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그림자적인 예표로서 예배의 형식과 패턴을 주셨다. 다시 말하여 구약의 성전예배는 우리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그 여인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았더라면, 이젠 신령과 진정의 참 예배를 드릴 때가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여야만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성전이라는 건물에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곧 예배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일에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는 삶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기에, 우리의 예배도 곧 우리의 전인적인 몸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삶 전체가 예배의 장(章)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롬12:1-5에서 언급되는 “영적(靈的) 예배”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경건적이며 의식적(儀式的)인 것을 포함하는 행위가 예배일까? 언어적으로 살펴보면 “영적”이란 말은 헬라어 “로기코스”라는 말인데 “합리적인, 논리적인, 이성적인”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로는 ‘Reasonable’이란 말로 사용된다.

롬12:1의 본문에서 “예배”란 헬라어로 “라트레이아”라는 용단어인데 이것은 조금 의미를 달리 해서 “봉사”(to serv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킹제임스영어성경은 직역하여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하였고, NIV 영어성경은 의역하여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번역하였다.

어원적으로도 예배란 “이성적 봉사”를 가르킨다.

즉 헬라어적인 “영적 예배”란 성도들의 합리적인 봉사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 인격을 다한 희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2:1)고 권면 하는 것이다.

혹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을 할 것이다

우리가 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예배라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儀式)적인 예배의 필요가 없다는 소위 예배무용론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초대교회부터 성도들은 정해진 날에 모여 예배를 드려왔으며, 공식예배란 중요한 것으로서 기독교인은 함께 모여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만 한다.

본인이 이곳에서 이야기하려는 주제를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예배란 개념은 주일에 교회에서 드리는 개념에서 더욱 확장 내지는 연장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예배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고 꾸짖었으며, 사무엘 선지자는 성경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로 꾸짖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구약에서 하나님은 결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신 적은 없다.

하나님은 그 제사의 형식과 외면적인 형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인 자세와 마음을 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시51:17)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장소적이며 외면적인 의식으로만 치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자를 찾지 아니하실 것이 분명하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5:1)

예배란 무엇인가? – 달라스 드림교회

예배란 무엇인가? 뉴스코리아 기고글 기영렬 목사

3월부터 불어닥친 코로나 폭풍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 벌써 5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코로나는 잠잠해 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업하는 사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 학생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답답함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다. 교회가 잠시 실시간 예배를 드리자고 했던 시간도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나가 버렸다. 실시간 예배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었던 몇 달 전과 비교해 보면 지금은 실시간 예배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축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실시간 예배는 우려했던 대로 많은 문제점을 가져오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American Bible Society)에서 신앙생활에 관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코로나 이전에 매일 성경을 읽는다는 사람이 약 14퍼센트였는데 몇 개월이 지난 후 비율이 9%로 떨어졌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헌신 되었고 활동적인 그리스도인 가운데 1/3이 온라인 예배조차 드리지 않게 되었다는 통계이다. 코로나로 인해 삶이 어렵고 마음이 곤고하니 더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찾을 것 같지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였다. 사람들은 상당수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믿음 생활을 한다. 좋지 않다고 비난할 수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서 제대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필자는 이런 일련의 상황들 속에서 예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예배란 과연 무엇인가? 예배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많은 성도가 정말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지만, 예배가 무엇인지 왜 드려야 하는지 왜 중요한지 구체적인 이유를 잘 모른다. 이번 글을 통해 코로나로 인해 더 희미해져만 가는 예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새겨보자.

예배란 무엇인가? 매주 드리지만, 예배의 구체적 의미를 정의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개역 한글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니 36개가 나온다. 구약에서 예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샤하’를 사용했다. 이것은 머리를 숙인다는 의미다. ‘아바드’라는 단어도 쓰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이 두 단어를 종합해 보면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절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예배는 자주 제사로 표현되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예배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22:5)”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을 예배로 표현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제사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약에는 희생제사가 포함되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친히 대속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약에서 예배라는 단어는 ‘프로스퀴네오’이다. 이 단어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신 말씀에서 ‘섬긴다’는 단어다. 예배라는 단어가 섬긴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강변교회를 은퇴하신 김명혁 목사님은 예배를 문안 인사에 비유했다.

“예배를 쉽게 설명하면 효자 효녀들이 아침저녁마다 부모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는 효심이 많은 신자가 주일 아침과 저녁마다 또는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문안 인사에는 고마움을 아뢰는 ‘감사’의 인사와 잘못을 고하는 ‘회개’의 인사와 감사를 표하는 ‘드림’의 인사와 바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다짐’의 인사와 무엇을 좀 도와 달라는 ‘요청’의 인사가 포함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종합해 보면 예배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의식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이다. 시편 96편 8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라고 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고, 예배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이시다. 세상의 많은 종교에도 예배의 의식이 있다. 이들 종교의식 대부분은 신을 달래어 저주나 재앙을 피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복을 받는 데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복을 빌거나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행위이다. 예배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된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예배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셨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예배를 통해 그들과 교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사 구원하신 이유도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엡1:6). 쉽게 말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관심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과하게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저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돌의 입을 열어서도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 표현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겼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예배였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일 뿐 아니라 구원하신 목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예배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 다워 진다. 예배하는 존재일 때 가장 가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예배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을 섬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제사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 하지만 제사는 그들의 삶의 향방을 갈라놓고 말았다. 제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되었고, 가인은 거부되었다. 예배가 인생의 방향을 가른 것이다. 모두가 어려운 때이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도 예배하는 그곳에 임재하고 계신다. 예배하는 곳이 천국이다.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한국 다리놓는 사람들의 박정관 목사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 당신은 예배에 참석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그 예배 모임 가운데서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간혹 지역봉사를 하지 않거나 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심지어 전도나 선교를 게을리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라는 이름을 단 이상 예배하지 않는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배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잘 모르고 있거나,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종교적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모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예배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계시와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응답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접근해 보겠습니다. 자매들이 어느날 갑자기 예뻐지면 연애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형제들이 갑자기 멋을 내고 차를 청소하면 틀림없이 연애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선물도 주고 편지도 쓰고 시를 써서 읽어주기도 합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집앞을 찾아가기도하고,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데이트를 하고자 힙씁니다. 이제는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비로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셨으며,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이 되어 살아가는 그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2 예배 – 원어적 고찰 원래 영어 단어 예배 (worship)는 앵글로 색슨 (Anglo-Saxon)족의 단에에서 온 것으로서 worth 와 ship 의 합성어 입니다. 그 의미는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사용할 때는 “최상의 가치를 최고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1) 예배는 하나님께 대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샤하(shachah), 하와(chawah)” (창 18:2, 시 99:5), 헬라어 동사 “프로스퀴네오 (proskuneo)” (요 4:23)는 절하다,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 혹은 입을 맟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엎드려 절하고 입을 맟추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반응인 것입니다.

2)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abad), 샤라트(sharat)” (신 10:12, 대상 16:4)와 헬라어 동사 “라트류오(latreuo) 라트레이아(latreia)” (마 4:10, 롬 12:1, 행 13:2)는 “노예나 종이 주인을 섬긴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그분을 섬겨야 합니다.

3)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야레(yare)” (렘 32:38-40, 신 6:13)와 헬라어 동사 “세보마이 (sebomai)” (마 15:8)는 “경외함,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위엄 앞에 한없는 존경의 마음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의 어원과, 성서적 정의를 살펴보면 우리는 예배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 예배는 동사이다. (로버트 웨버 Robert Webber) 성서적 예배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예식을 드리는 것을 뛰어 넘어, 예배자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예배는 인간 창조와 구원의 목적입니다 (Dr. David H Jung – Liberty University).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26-27). 많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막힘없이 소통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에게 손수 지으신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28). 이를 위해 하나님과의 막힘 없는 교제와 소통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모두 이루어 드려 그 마음을 시원케 할 자들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명령을 받고 수행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고 깊이 교제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Erickson, Millard. Christian Theology. The image of God 참고).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그분과 교제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예배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여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였습니다 (창세기 3: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종살이 에서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파라오 앞에 목숨을 걸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였습니다. 내보내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출 3:12; 7:16; 8:1,20; 9:1,13; 10:3)

[출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선지자들의 피를 아낌없이 이땅에 흘리신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깨어진 관계, 즉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여 예배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시작으로 구원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이땅에 보내어 죽이셔서 이루고자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찾아 드리셨습니다.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먼 곳에서 방관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 오시는 분이십니다. 99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버려두고 잃어진 한 마리 양을 찾고자 온 산을 헤메이는 목자이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땅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예배자들)를 애타게 찾으시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을 위해서만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배가 예배로서의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예배의 두 요소인 성령과 진리를 제공하시어 예배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주도하시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인 것이며, 다만 인간은 거기에 반응하고, 섬기고, 경외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 (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이라고 인간 존재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하였습니다.

5.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만약 인간 중심이 될 때 예배는 무속행위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하나의 종교행사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팽배한 인간 중심의 예배의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자신의 물질 축복을 구하기 위한 예배

– 정신적, 정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배

– 영적 자기 만족이나 신비한 체험을 얻기 위한 예배

–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한 방편으로 드리는 예배

– 다른 사람들과의 사교를 위해 드리는 예배

– 자신의 병고침을 위해 드리는 예배

– 교회의 음악과 분위기가 좋아서 드리는 예배

A. W. Tozer 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그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김진호 목사: 숨겨진 보물 예배: 예수 전도단)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기 욕심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예배가 세속화되고 일종의 쇼와 같은 것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배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도 못하며, 자기 중심성위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자신의 편협한 잣대를 가지고 예배의 형식과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논쟁이나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6. 공중예배 (Corporate worship)는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기초가되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자녀들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정해신 시간과 장소에 모여 성령안에서 함께 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공중 예배’ 혹은 ‘예배 모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성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공중예배는 예배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가운데도 모든 연령의 모든 성도들이 한 믿음을 고백하는 축제로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과 성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예배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락한 집을 포기하고 지하무덤 (카타콤)에서 예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발각되어 잡혀가서 사나운 동물들에 뜯어먹혀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결코 모이기를 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드리는 예배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떨어질 수 없듯이,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공동체적 교회는 반드시 함께 모여 예배해야만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우리가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신의 선입견과 좁은 지식으로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의 틀에 가두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새롭게 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성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들은 말씀에 합당하고 정직하게 반응하여 한주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공중예배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구경꾼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우리의 생각을 운동경기에 비교하면 목회자(순서의 담당자)는 선수로, 성령은 코치로, 성도들은 관중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팀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입니다. 목회자들은 코치로써 성도들이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Dr. Vernon Whaley – Liberty University). 공중 예배 가운데 우리는 각각의 은사대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성가대와 찬양단으로, 안내와 헌금위원으로, 그리고 식사준비와 섬김을 통해서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들을 섬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것으로 준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갈고 다듬고 재발견하여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7.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공중예배의 결과입니다. 공중 예배를 통해 받은 말씀, 그리고 주신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고백한 찬송과 기도와 결단은 삶 가운데서 반드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배를 “어떠한 지정된 공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의식적 행위”라고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좋은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는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위의 정의는 두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배의 공간은 온세상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하나님께서는 온땅에 충만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그 어떤 공간도 인간이 예배 할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3:24).

우리의 일터도, 학교도, 퇴근 길도, 차동차도, 가정도, 바다와 산과 들과 우주도 예배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배는 의식적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 자체가 예배(Life style worship)입니다. 이것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이벤트나 콘서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공중예배 시간에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행동하고 일주일 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간다면 그 예배가 아무리 완성도를 가지고 있고, 감동적인 의식이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이중적인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 앞에, 잘 차려진 종교 예식을 드림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위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잘 차려진 제사상을 찾는 귀신이 아니라 그의 온 삶을 통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영광과 존귀와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공중 예배(Corporate worship)와 삶의 예배(Life style worship)는 반드시 병행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이전에 온전한 예배 자체가 지니는 특성입니다. 공중 예배와 일주일 동안의 삶의 예배가 합쳐져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8.예배와 선교 (전도) 미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설교가 존 파이퍼(John Piper)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Mission exists because worship doesn’t). 즉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선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배가 선교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선교는 임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는 선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예배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 예배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분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와 공중예배가 균형잡혀서 우리 삶과 교회 가운데서 실현될 때 우리는 선교(전도) 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비로서 예수께서 “천국은 누룩넣은 반죽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21-24 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유일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산은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드리던 그리심산 입니다. 저 산은 시온산의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합니다. 공간과 전통에 구애 받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 절에서 ‘너희’는 사마리아인들을 의미하고, ‘우리’는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왜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 즉 유대인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을까요?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읽었고,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포함하여 시편과 선지서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 됩니다. 즉 사마리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정보가 충분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가 이른다고 주님은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려면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배의 원리입니다.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고, 예수님님께서 그 모든 말씀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려면 성령안에서 성령의 주도하심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려면 말씀에 근거하여 예배 해야 합니다. ‘영’에 지나치게 치우치면 맹신적이고 광란적인 예배를 하게 되고, ‘진리’에만 치우치면 머리로만 드리는 형식적 예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의 아름다운 조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예배 드린다”고 하지 않으시고 “예배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통적으로 쓰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은 경외심을 나타내는 공손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예배가 ‘동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특정 시간에 특정 예식을 올려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예배를 제한하는 오해를 일으킵니다. 마귀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으로 바꾸어갈 이 엄청난 특권인 예배를 그저 일주일에 한시간 교회에서만 드리는 것, 그것도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로, 우리가 살아 숨쉬는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바울은 강력하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에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내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예배한다고 하면, 우리 삶을 주도하도록 내어 드리지 않고,특정한 시간에, 예식과 제물만 올려드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전혀 무시한 채 이교도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 절에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샘물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끊이지 않고 솟구치는 샘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 형식적 예배만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특권, 결코 목마르지 않는 신비한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죄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는데 곧 지금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절대로 부족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께서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성령과 진리로 영원토록 끊임 없이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예배 모임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주일 동안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는지, 오늘 하나님의 임재안으로 나가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했는지, 죽을 죄인인 나를 살려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는지, 그분의 사랑안에 빠쳐 안식을 누리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는지, 그 음성을 듣고 어떻게 살기로 응답했는지를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창조되어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한 삶, 이 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대견한 자녀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가복음 12:3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중 예배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런 예배자들이 되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한인철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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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자의 기도

예배?(1)

신학교 시절이었다. 목사인 아버지가 대뜸 물으셨다. “예배는 드리는거냐, 아니면 보는거냐?” 난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배 드리는 거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넌 국어공부 좀 더 해야겠다. 시장 보러가서 물건 눈으로 보고만 오냐?” 그러고 보니 ‘장 보러간다’는 말 속엔 눈으로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 행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따져보니 ‘예배 보러 간다’는 말도 그리 경박한 말이 아니겠구나라는 어렴풋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을 다시 ‘예배’에 적용시켜보니 뭔지 모르겠지만 2% 부족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예배에 관해 생각거리를 남겨 놓은 적이 있다. 보는 것일까? 아니면 드리는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어떤 서술어를 붙이는 것이 옳을까? 페친들이 댓글로 남겨놓은 제안들을 살펴보면, ‘참여하다’, 또는 ‘하다’가 가장 많았고, 간혹 ‘드리다’, 또는 ‘보다’라는 견해를 남긴 분들도 있었다. 특이하게 ‘때우다’도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댓글을 종합하자면, 그 어떤 서술어도 지배적인 용어도 찾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똑 부러지게 들어맞는 서술어가 없는 것일까? 여기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한자어, 신약성서에 번역된 ‘예배’, 주일 교회 공동체 모임에서 행해지는 말씀 중심의 ‘예식’(마땅한 용어를 찾지 못해 임시적으로 사용했으니 양해바랍니다), 이 세 가지가 엇비슷하기는 해도 정확히 동일한 곳을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술어를 한 가지만 제한하자니 이래저래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단적으로 몇 가지 용례만 들어보자.

한자어 예배(禮拜)는 ‘예를 갖춰 절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배’보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뜻의 ‘경배’라는 용어에 더욱 어울린다. 경배가 예배는 아니다. 일부일 뿐이지. 신약성서에서 번역된 용어는 어떨까? 가장 흔하고 대표적인 구절은 누가 뭐래도 요4:24에 나오는 경구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교회 주보나 현수막에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제발 딴 짓 하지 말고 예배에 집중 좀 하라’는 목사님의 설교에 애용되는 18번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 예배라고 번역된 단어 ‘프로스쿠네인'(προσκυνειν)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배’가 아니라 ‘기도’를 뜻한다. 그래서 요4:24절의 적절한 번역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의역하자면, ‘온 힘을 다해’, 또는 ‘진심으로’도 가능하다) 기도해야 한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 이 구절로 설교시간에 졸지 말라는 식의 목사훈시는 하시지 말길 바란다.

성경에서 예배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들은 한 단어에 국한된 1:1 번역이 아니다. 이것은 예배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상식에 속한다.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 투시아, 프로스쿠네인, 트레스케이아, 유카리스티아, 수타키스 등등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교회라고 번역되는 에클레시아까지)

이 중에서도 우리가 ‘예배’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헬라어가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이다. 예배학자들도 이 용어를 가장 대표용어로 사용한다.(사실 이 부분도 난 미심쩍다) 이 단어는 ‘레이토스’(민중, 평민)+‘에르곤’(행동, 섬김)의 합성어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가장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하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좀 멀리 간 것 같다. 원래 이 용어는 로마시대에 ‘로마시민의 의무’를 규정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민전체 모임이나 종교행사 참여에 관한 시민법뿐만 아니라 국가 행사 참여규정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법적 용어를 기독교적 의미에 그대로 접목 시킨다는 게 나에겐 그리 적절치 않게 보인다. 헬라어 용어와 용법에 관한 것은 각자 예배학 사전이나 용례를 찾아보면 쉽게 찾을 수 있기에 여기서 줄여야겠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 있을까?

보통 ‘예배’라고 정의되는 본질을 짚어보자. 우리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선포되고 떡을 떼어 나누던 초대교회 공동체 모임’에서 유래했다. 이 모습은 구약에선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형태였다. 구약에서는 ‘제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만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태동한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제사’라는 개념으로 제한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약성서에서도 당시 모임을 우리가 하듯 ‘예배’라는 한 단어에 고정시키지 않고 다양한 용어로 표현했다. 전에 없던 것이니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후로 교회는 이 모임의 성격(말씀선포+떡을 뗌)을 규정하는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와 정교회는 일반적으로 ‘유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감사)를 사용했고, 때로는 ‘유로기아’(ευλογια축복)도 사용했다. 라틴어권 교회(로마-가톨릭)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미사’(missa: 원래는 예배 의식문 마지막에 나오는 ‘가라’는 파송명령이지만 중세교회에서는 성체성사에 사용했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시대와 교파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전에 없던 용어이기 때문에 생겨난 용어의 다양성이 뜻하는 바가 있다. 공통점과 특수성을 함께 의미하는데, 공통성(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모두가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대와 교파를 넘어 모두가 인정하는 공통분모다. 특수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각 시대와 교파별로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용어만 무조건 옳고 다른 용어는 무조건 틀리다는 식의 흑백논리는 여기서 아무 의미도 없다. 단지 신학적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보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예배’는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며 말씀이 선포되던 공동체 모임’을 뜻한다. 이 모임을 정의하는 용어는 시대와 교파에 따라 다양하다.

계속 헬라어나 라틴어가 나와서 머리에 쥐가 나는가? 그렇다면 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초간단 영어단어 하나 던져 놓고 오늘은 여기서 사라져야겠다.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 두들기다보니 손가락도 아프고 팔뚝도 아프니까…..

질문:

영어로 예배를 번역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경배와 찬양’ 덕택에 워십(worship) 일 것이다. 이것만큼 일반적인 단어가 하나 더 있다. 서비스(service)다.

이 두 용어의 차이가 무엇일까?

이 두 가지 용어의 차이를 바로 알면 루터로 시작된 개신교 예배론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예배?(2)

I.

“…. 이 죄인 아무 공로 없사오나 예수그리스도 의지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우리교회 머리 하얀 권사님들 기도 관용구다. 예전엔 이 기도에 숨겨진 가치가 무엇이지 잘 몰랐다. 그저 의례껏 하는 기도 끝말잇기 정도로 알았다. 그런데 신학을 깊이 공부하면서 이 짧은 말에 개신교 신학의 정수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말씀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 이 네 가지 SOLA는 종교개혁신학의 핵심가치다.

이 말을 풀어 살을 붙여보자. ‘나는 구원받을 가치(공로) 없는 자(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를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의롭다고) 선언해주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칭의론이고 종교개혁의 핵심주제였던 루터의 칭의론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그저 신학생들의 조직신학개론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개신교인의 모든 삶의 영역까지 아우른다. 그러고 보니 우리교회 권사님들은 신학을 모른다고 손사래치시지만 알고 봤더니 고수들이었다.

복잡한 신학 용어와 설교체 수식문장을 모두 접어놓고 개신교 신학에 ‘옥캄의 면도날’을 사용해보자. 그러면 이 문장만 남는다. “주체는 하나님이다.” 은총의 주체도 하나님, 믿음의 주체도 하나님, 말씀의 주체도 하나님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간명한 문장이 개신교 신학의 핵심가치다.

방향으로 따져보면 ‘하늘에서 땅으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이 은총, 믿음, 말씀, 그리스도다. 이 문장에 여러 살이 붙어서 소위 ‘신학’이라고 부르는 여러 단층들이 등장한다.(예: 신론, 기독론, 성령론, 창조론, 예배론, 조직신학, 기독교윤리 등등)

II.

자, 이제 이 내용 – “주체는 하나님이다.” – 을 지난 번 포스팅과 잇대어 엮어보자. <예배1>의 내용을 간추리면, 우리(기독교)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의 모형은 ‘말씀이 선포되고 떡을 뗌’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 권사님들 기도 정형구대로 “아무 공로 없사오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은총의 사건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은총이다. 이 방향성이 중요하다.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을 “성례전적 요소”(sacramentum: 솔직히 이 용어의 번역도 못마땅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라하고, 아래서 위로 올리는 것을 “제사적 요소”(sacrificium)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제사는 아래서 위로 올리는 것이고, 신약에서 나온 말씀과 떡은 위에서 아래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개신교 신학에선 언제나 이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것을 ‘은총’(혜)이라 부르고, 아래서 위로 가는 것을 ‘공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을 중시한다. 그래서 ‘아무 공로 없사오나 그리스도 의지하여 기도한다’는 머리 하얀 우리 권사님의 기도는 가장 개신교적인 훌륭한 기도다.

이것은 개신교 예배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이미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했다시피, 시대와 교파에 따라 예배의 용어는 강조점을 달리했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언제나 ‘말씀선포와 떡을 뗌(성만찬)’이라는 두 기둥을 유지했다.

이 대목에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중세 말기 상황을 짚어보자. 이 때 로마교회는 예배를 ‘미사’라고 부르면서, 말씀 강론보다 희생제사의 성격을 강조하는 미사(성체성사)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중세 신학에서 성찬은 곧 예수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행위로 이해되고 있었다.(로마교회, 루터, 쯔빙글리, 칼뱅 성찬이해 비교는 이전 7.16-17 포스팅을 참조하라)

(여담이지만 개신교에서는 소위 ‘강대권’(?)이라고 하여 주일 ‘대예배'(? ‘대’자가 꼭 들어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때 담임 목사 외에 다른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그런데 로마-가톨릭에선 미사 때 설교를 개신교 목사에게도 아주 쉽게 맡길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를 몇번 보았다. 그러나 성찬집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

이것을 방향성으로 따져보면, ‘아래서 위로’ 향한다. 아래서 위로 향하는 것은 이 뿐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상징인 ‘면죄(벌)부’(가톨릭에선 ‘대사’라고 부른다) 역시 ‘아래서 위로’ 올리는 제사적 기능을 스행한다. 소위 ‘공로’로 부르는 모든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세 신학은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루터는 이 방향을 역전시킨다. 이것이 종교개혁이고 개신교 신학이다.

그럼 어떻게? 오늘 이야기는 ‘예배’이니, 여기에만 초점을 두고 말해보자.

III.

루터는 라틴어 ‘미사’를 독일어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 영어로 바꾸면 Divine Service다)로 바꾸어 놓았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여기엔 매우 심오한 뜻을 담았다. 이는 두 단어의 합성어(Gott+Dienst)인데, Gott은 ‘하나님’(God), Dienst는 ‘봉사, 섬김, 일하다,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합쳐 놓으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섬기신다. 봉사하신다’라는 뜻이 된다. 누구를 위한 행동이고 일일까? 바로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고 일이다. 이게 종교개혁신학이 담고 있는 예배다.

물론 독일어 특성상 다른 번역도 가능하다. 주격인 하나님을 목적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 봉사한다”라는 뜻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루터가 분명히 강조하는 있는 것은 미사와 대립된 성격의 의미다. ‘아래(인간)서 위(하나님)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의 신학적 의미다.

다시 말해 루터에게 예배(Gottesdienst)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행동’에 방점이 있다. 다시 말해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은총의 사건’이 개신교 예배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하나님은 일하실까? 바로 말씀과 성례전(성만찬)이다. 루터는 이것을 회복시킨 것이다. ‘말씀 선포와 떡을 뗌’

그래서 루터에게 예배는 곧 죄인을 불러, 은총(말씀과 성찬)으로 위로하고, 먹이고, 힘을 주어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는 복음의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경배와 찬양’ 과 질적으로 다르다. 콘티 만들고, 기도로 준비하고, 땀과 물질로 제단 앞에 희생하는 것들은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예배는 자격이 없는 자들, 힘없고 연약하며, 울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초대하여 기쁜 소식으로 누리게 하는 것이 개신교 예배다. 그러나 ‘예배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힘 빼며 서로 맘 상하지 말고 외려 주님이 주실 은총이 무엇인지 기대하는게 어떨까?

이제 지난 번 포스팅 말미에서 고민거리로 던진 것을 이쯤에서 풀어도 될 것 같다. SERVICE와 WORSHIP의 차이 문제였다.

절대로 엉뚱하지 않은 질문 하나, 다시 투척한다. 당신이 신발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그렇다면 누가 서비스의 주체고 누가 대상일까? 물어보나마나 서비스의 주체는 백화점이고, 대상은 물건 사러 간 당신이다. 영어로 예배를 서비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서비스의 주체를 하나님이고 서비스 받는 대상을 사람이라고 하면 무리일까? 앞서 루터가 예배를 고테스딘스트라고 번역했다고 언급하면서, 나는 ‘매우 친절하게’(실제로 난 매우 친절하다) divine service라는 영어 번역도 곁들여 놓았다. 하나님의 서비스라는 뜻이다. 조금 감이 잡히시는지?

개신교 예배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불러 은총으로 일하신다. 방향으로 따지면 ‘위에서 아래로’, 신학용어로는 ‘은총’의 사건이 예배다.

그럼 Worship과 차이가 있을까? 있다! 그것도 하늘만큼 땅 만큼!

WORSHIP의 원형적 단어는 weorthscip-worthship-worship이다. 풀어 설명하면, ‘가치를 위로 올려드린다’는 의미가 강하다. 아래서 위로 올리는 제사적 의미다. 냉정히 따져보면 Divine Service와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worship이라는 용어에 담긴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worshipservice라는 말도 생겼다. 자동차에 부동액 보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예배에서 은총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행동을 인식하고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IV.

“예배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렇게 해 놓고도 뭔가 2% 부족하게 느껴지는 게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예배의 형식에는 기도도 있고, 찬송도 있고, 봉헌도 있는데, 하나님이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헌금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기도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루터의 말로 풀어보자. 루터가 자신의 종교개혁신학을 머리에 담아 스스로 설계해서 세운 교회가 있다. Torgau교회인데, 1544년 교회를 다 지은 다음 입당 예배 때 이런 설교를 하게 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말한다”(Gott redet mit uns durch sein Wort, und wir reden mit ihm durch Gebet und Lob)

간단한 문장이지만 여기에 개신교 예배의 핵심이 담겨 있다. 우선 순서를 보자.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선포된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전’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고 채우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은총의 사건에 반응한다. 무엇으로? 기도와 찬양, 감사, 봉헌 등이다.

다시 말해 예배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거룩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은총으로 죄인을 불러 힘을 주신다. 그리고 인간은 그에 감사함으로 반응한다. 여기서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예배는 첫째로 하나님의 일이고, 두번째로 인간의 반응이다. 이 둘은 예배 시간에 끊임없이 교차하며 소통한다.

개신교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은총의 사건이다. 이게 흔들리면 곤란하다.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다. 은총을 주시는 분(구원의 주체)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루터)

V.

종교개혁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감초처럼 등장하는 독일 Augsburg교회 본당 대문 위에 이런 명패가 달려 있다. ‘Bedenke, wem du vor stehst!’ 번역해보면 이렇다. ‘잘 고민해봐라, 너는 누구 앞에 서 있는가?’

나는 어떤 교회라도 본당에 들어갈 때 문앞에서 이 문구를 항상 생각한다. 그리고 본당 문을 열며 하나님 앞에 선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다. 왜냐하면 ‘아무 공로 없지만 나를 불러 말씀과 성찬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시는 은총의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오라! 돈 없는 자도 나오고, 병든 자도 나오고, 슬픈 자도 다 오라. 주님이 모두 마시게 하고, 위로하며, 고치실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예배학 연구] 예배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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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두란노 서원을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기독교 예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1. 언어적인 의미

1) 영어

Worship(위쉽)은 고대 앵그로색손 어의 위스쉽(Worth 가치+ Ship신분)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가치가 있는 존재에게 그의 합당한 신분을 고백하고 표현하는 것이 예배다(계 5:12-14).

2) 구약 성경

히브리어(샤하)라는 단어로 이 말은 “엎드린다, 절한다”의뜻으로 굴복, 순종과 복종을 표시하는 것으로 예배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는 뜻이다.

3) 신약 성경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의 뜻으로 사람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다.

4) Liturgy(리터지 – 예배의식)

원 의미는 신자들이 바치는 섬김, 봉사의 뜻이다. 이것이 발전하여 개신교는 예배 순서로 가톨릭은 의식으로 변했다.

◈ 정리하면 예배란 존경과 존귀를 받으시기 합당한 하나님 그 앞에 엎드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굴복하고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고 정해진 의식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표현한 것이 바로 예배이다.

2. 학자의 정의

1) Gibbs(깁스)

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

②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쉼.

③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자체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

2) Paul Hoon(풀 훈)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응답이다.

3) Brunner(부루너)

예배는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봉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회중의 봉사이다.

4) Huxtable(헉스터블)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다.

5) Martin(마틴)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갖는 영적인 축제이다.

3. 예배의 정의

1) 최고의 가치 – 하나님이 가장 귀한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

2) 최고의 사랑 – 최고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3) 최고의 헌신 – 최고의 헌신을 하나님께 드림.

◈ 예배는 최고의 가치, 사랑, 헌신을 하나님 앞에서 드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 정의 ▣

예배는 신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응답함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생각에 관심과 마음의 사랑을 주님께 집중함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 하는 것이다.

4. 예배의 성경적 특성(이해)

1) 예배는 하나님에 의하여 주도된다 – 예배지를 찾으시고 감동하시어 예배를 받으심.

2) 예배는 하나님께로 향해진다 –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다.

3) 하나님께 집중된다 – 예배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 향하여 행하여야 한다.

4) 예배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사다 – 엄숙하고 형식이 있어야 한다.

5) 예배는 하나님에 의하여 규정된다 – 예배의 모든 순서는 하나님이 규정하여 주신다.

Ⅱ. 예배 역사와 성서적 모델

1. 예배의 역사

1) 족장 시대의 예배

①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함께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고 제사드리는 일을 하였다( 창 12:7-8, 13:18, 35:1-8,수24: ).

②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중심이었다(창 15:9-10, 22:5-8 ).

2) 율법 시대의 예배

① 성전에서의 예배

② 규정된 예배 – 세부 사항까지 규정(성전을 시설하는 방법, 내용, 제사장의 예복, 희생 제물의 종류와 방법)

③ 위탁적 예배 – 매년 3회의 예배는 위탁하지 아니하고 12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림.

◈ 3회( 무교절, 맥추절, 장막절 – 출 2:14-17 )

④ 의식적 예배

⑤ 상징적 예배

3) 포로 이후 시대의 예배

① 회당 예배의 실시(겔 8:1).

②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 존속( 느 8:1-6 )

③ 어느 곳에서나 설립( 행 6:9, 13:5, 14;1, 17:1)

4) 예수 시대의 예배 : 회당과 성전에서 동시에 거행됨.

5) 신약 시대의 예배 : 성전의 희생제물 중심의 예배와 회당에서의 말씀 중심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합쳐짐 그것이 성찬이다.

6) 초대교회의 예배 : 말씀 예배와 만찬 예배로 나누어져 있었다.

7) 속 사도 시대의 예배

① 주의 만찬과 말씀(강론)이 나누어짐.

② 주일날로 예배를 옮김.

③ 찬송가를 사용.

④ 수요일, 금요일은 오후 3시까지 금식을 경건으로 생각.

8) 중세 시대의 예배 : 말씀 예배가 없어지고 성례전만 남게 됨.

9) 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 : 말씀 예배가 회복되고, 자국어로 예배함.

10) 오늘날의 예배

① 예배 형태면에서 고정적이다.

② 예배를 난발하고 있다.

③ 음악의 사용 관심이 높아짐.

④ 설교 중심의 예배가 이루어짐.

2. 성경적 예배의 모델

1) 예배의 모형( 이사야 6 : 1 – 9 )

계시와 인식(사 6 : 1 – “내가 본즉……”)

① 예배의 출발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있어야 한다.

② 계시된 하나님을 인식하여 인식된 하나님께 예배한다.

③ 예배의 책임자는 하나님을 계시하여 주어야 한다.

영광(사 6 : 3 – “서로 창화하여……”)

① 영광과 찬양과 경배의 단계.

② 하나님을 뵈었을 때 찬양이 절로 나옴.

죄의 자백(사 6 : 5 – “그 때에 내가 말하여 ……”)/(요 1서 5:17)

①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

② 자백의 방법 :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사죄와 감사(사 6 : 7 – “그것을 네 입에 대며 가로되……”)

① 사죄 없는 자백은 의미가 없다.

② 사죄의 확신이 중요함.

말씀 선포 사(6 : 8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① 깨끗해진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② 설교는 예배의 한 요소이다.

헌신 (사 6 : 8 – “……내가 여기 있나이다……”)

① 말씀을 듣고 나면 응답이 필요하다.

② 헌신과 응답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파송 (사 6 : 9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① 하나님께 우리를 파송시키는 것이다.

② 축복이 있다.

Ⅲ. 예배의 원리와 교회음악

1. 예배의 원리

1) 예배 진행의 원리

① 다양성의 원리 : 고정된 예배의 형식에서 탈피하여 새롭고 창조적이며 풍성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시도하면 좋다.

ⓐ 여려가지 다양한 순서를 연결하여 진행한다.

ⓑ 말하기, 노래하는 것을 다양하게 한다.

② 주제의 원리

예배의 모든 행위가 하나의 주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 회중의 입장에서 계획하라.

③ 교대의 원리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이 한 번씩 교대되는 것

◈ 하나님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끝남.

④ 대화의 원리

소그룹에서 효과적임.

◈ 예배자들의 교제를 중요시함.

2) 순서 작성 시 주의 사항

① 성경적 모델 7가지 순서에 의하여 계획하라.

②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하라.

③ 회중의 참여를 극대화하라.

④ 예배에 적합한 자료와 용어를 선정하라.

⑤ 다양한 표현형태를 사용하라.

⑥ 계획된 순서와 즉흥적인 변화를 균형 잡히게 하라.

⑦ 앞뒤의 순서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맺도록 계획하라.

⑧ 수평적인 요인을 극대화시켜라

2. 교회음악과 기도

1) 예배에서의 음악의 역할

① 예배에 영감을 준다.

② 예배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③ 예배를 인도한다.

④ 예배의 정보를 전달하여 준다.

⑤ 예배를 풍성하게 한다.

⑥ 예배에 참여하게 한다.

⑦ 음악 자체가 예배 행위다.

2) 교회 음악의 종류

① 교육하는 음악 ex) 성경 목록가, 요 3:16

② 전도하는 음악 ex) 예수 믿으세요

③ 친교 하는 음악 ex) 우리는 사랑에 띠로

④ 예배용 음악

3) 주의 사항

① 음악을 연주로만 여기는 것

② 문화적 가치로만 생각하는 것

③ 경건한 오락으로 여기는 것

4) 기 도

① 기도의 중요성 : 기도는 예배의 호흡이다.

② 종 류 : 찬양, 고백, 기원, 중보, 감사, 목회, 공헌, 축도의 기도가 있다.

③ 방 법 : 묵도, 감사기도, 연도(돌아가면서 기도), 찬양 기도, 합심기도, 대표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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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예전에 담긴 의미와 역사 탐구

예배는 드리는 걸까, 보는 걸까?주보에 실린 이런저런 순서는 대체 왜 필요한 걸까?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교회에 가면 자리에 앉아 기도한 뒤 입구에서 받은 주보를 펼치고 그날 설교 본문을 미리 읽어 본다. 장로교회든, 감리교회든, 침례교회든, 순복음교회든 한 교단 또는 한 교회에서 죽 신앙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은 굳이 주보를 보지 않아도 예배 순서가 눈에 선하다. 그렇게 너무 익숙한 까닭일까?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예배 순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넘게 주일이 되면 으레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주보에 실린 이런저런 순서가 왜 필요한지, 설교와 성가대 찬양은 왜 꼭 그 순서에 해야 하는지,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한다는데 우리 교회는 왜 일 년에 서너 번밖에 안 하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몸에 익은 대로 순서에 따라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축도가 끝나면 무사히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예배당을 나선다.평소 ‘루터의 신앙은 질문하는 신앙’이라고 강조해 온 저자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예배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로 질문을 던진다. 각자 자기가 속한 교회의 주보를 펼쳐 놓고 각각의 순서가 어디에서 유래했고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자고 권한다. 이 책은 루터교회 목회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저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자, 개신교 한구석에 자리한 루터교회 예배에 관한 사례 연구인 동시에, 개인으로 출발하여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독교 예배의 본질에 관한 치열한 탐구의 기록이다.예배의 개념부터 예배 순서에 담긴 의미까지 한눈에 보는 예배의 역사예배란 무엇일까? 우리가 단순하게 ‘예배’라고 번역하는 ‘레이투르기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예배의 주체는 누구일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걸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은총의 사건일까? 마음 맞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진지하게 옛날이야기하고, 같이 밥 나누어 먹고, 서로 다독이며 미래를 도모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어쩌다 제국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화의 길을 걸으며 기독교 예배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한때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했던 일반 신자들이 다시 예배의 ‘참여자’가 된 계기는 무엇이고 그 과정은 어떠했을까?예배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여 ‘예배’의 개념과 정의를 살피고 예배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주일 예배 순서의 유래와 의미, 거기에 담긴 신학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모든 교회는 각자의 교회론에 기초한 예배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 예배가 곧 그들에게 ‘정통’이다. 그 모습을 귀히 여기고 자신의 교회론을 예배에 담아내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각자가 속한 교회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자기가 속한 교회와 예배의 토대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얼마가 가치 있는 일인지를 보여 준다. 닫기

예배란 무엇인가

출판사 리뷰

예배는 드리는 걸까, 보는 걸까?

주보에 실린 이런저런 순서는 대체 왜 필요한 걸까?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교회에 가면 자리에 앉아 기도한 뒤 입구에서 받은 주보를 펼치고 그날 설교 본문을 미리 읽어 본다. 장로교회든, 감리교회든, 침례교회든, 순복음교회든 한 교단 또는 한 교회에서 죽 신앙생활을 이어 온 사람들은 굳이 주보를 보지 않아도 예배 순서가 눈에 선하다. 그렇게 너무 익숙한 까닭일까?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예배 순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넘게 주일이 되면 으레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주보에 실린 이런저런 순서가 왜 필요한지, 설교와 성가대 찬양은 왜 꼭 그 순서에 해야 하는지,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 때마다 성찬식을 한다는데 우리 교회는 왜 일 년에 서너 번밖에 안 하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몸에 익은 대로 순서에 따라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축도가 끝나면 무사히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홀가분하게 예배당을 나선다.

평소 ‘루터의 신앙은 질문하는 신앙’이라고 강조해 온 저자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예배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로 질문을 던진다. 각자 자기가 속한 교회의 주보를 펼쳐 놓고 각각의 순서가 어디에서 유래했고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자고 권한다. 이 책은 루터교회 목회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저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자, 개신교 한구석에 자리한 루터교회 예배에 관한 사례 연구인 동시에, 개인으로 출발하여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독교 예배의 본질에 관한 치열한 탐구의 기록이다.

예배의 개념부터 예배 순서에 담긴 의미까지 한눈에 보는 예배의 역사

예배란 무엇일까? 우리가 단순하게 ‘예배’라고 번역하는 ‘레이투르기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예배의 주체는 누구일까?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걸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은총의 사건일까? 마음 맞는 사람들 몇몇이 모여 진지하게 옛날이야기하고, 같이 밥 나누어 먹고, 서로 다독이며 미래를 도모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어쩌다 제국의 종교가 되었고, 제국화의 길을 걸으며 기독교 예배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한때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했던 일반 신자들이 다시 예배의 ‘참여자’가 된 계기는 무엇이고 그 과정은 어떠했을까?

예배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여 ‘예배’의 개념과 정의를 살피고 예배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주일 예배 순서의 유래와 의미, 거기에 담긴 신학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모든 교회는 각자의 교회론에 기초한 예배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 예배가 곧 그들에게 ‘정통’이다. 그 모습을 귀히 여기고 자신의 교회론을 예배에 담아내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각자가 속한 교회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자기가 속한 교회와 예배의 토대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얼마가 가치 있는 일인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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