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의 섬김 |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169 개의 정답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 의 섬김 –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https://chewathai27.com/you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chewathai27.com/you/blog/.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3분의기적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6,763회 및 좋아요 297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의 섬김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 예수님 의 섬김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섬김, #워싱턴어머니, #마가복음_10:45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과연 나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섬김을 기쁨으로 할 수 있을까요? 
섬김을 받고 싶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있는 건 아닌가요?
진정한 섬김이란 어떤 것인지 워싱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좋아요’와 ‘구독’ ‘알림 설정’은 큰 힘이 됩니다.
[3분의기적]은 2012년부터 예화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글입니다. 매일 아침 묵상글을 만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입하시면 됩니다.
🦅[3분의 기적] 밴드로 초대합니다.
https://band.us/n/a5ae284f0d8aV

예수님 의 섬김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닮자 < 오늘의 말씀 < 말씀 < 기사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유월절 절기에 유월절을 지키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 …

+ 여기를 클릭

Source: www.ingn.net

Date Published: 12/24/2022

View: 3865

섬김 : 예수님의 마음으로 – Daum 블로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보여 주는 섬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인간은 그 죄 값 …

+ 여기에 보기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4/7/2022

View: 5291

예수님 따라가기(3) ? 섬김의 본

그러나 예수님은 성자형의 지도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아브라함 링컨, 성 프랜시스, 테레샤, 간디 같은 분들이 이런 유형에 속할 것 …

+ 여기를 클릭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11/21/2022

View: 2963

[김명혁 칼럼] 섬김의 삶과 사역 – 크리스천투데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나타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

+ 여기에 보기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2/18/2021

View: 3508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 마 20:28 – 기멀전

섬기는 삶은 교만을 버린 겸손한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형제와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

+ 여기에 표시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3/17/2022

View: 884

Sermon –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섬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긴 후에 그 밤의 사역에서의 교훈을 정리해주십니다. “새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palomarkc.org

Date Published: 4/12/2022

View: 3070

예수님의 섬김의 본

제목 : 예수님의 섬김의 본본문 : 요한복음 13장 1-20절설교 : 고택원 목사.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2/23/2022

View: 1427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본 요한복음 13장 1-17절 옥한흠목사 …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본/ 요13: 1-17. 2년 전에 제가 오사카 지역의 일본인 교회 500개 교회가 가입되어 있는 연합회의 초.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4/2021

View: 790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예수님 의 섬김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수님 의 섬김

  • Author: 3분의기적
  • Views: 조회수 6,763회
  • Likes: 좋아요 297개
  • Date Published: 2020. 6.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eYnANfzgJ8

[가정예배 365-4월 9일] 예수님의 섬김

말씀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겪기 전 목요일에 제자들과 만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생으로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한 것은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하십니다.(요 13:12~15) 예수님은 왜 이런 본을 보이셨을까요.제자들의 마음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을 들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 권력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왼쪽 또는 오른쪽에 서게 될 것을 다투며 지냈습니다.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섬김입니다. 하나님 나라 왕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섬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전에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고 전했습니다.사랑하시니 섬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만찬에서 떡과 잔을 갖고 그것이 자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받아먹으라 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이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처럼 죽을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섬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막 10:45)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복종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낮아지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섬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섬김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높아지려 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하나님의 나라의 섬김이 무엇인지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또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섬김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방식처럼 크고 높은 자로서의 삶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지극히 작은 사람까지 섬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기도 : 사랑의 아버지, 이 고난주간에 이기적이고 높아지려 하던 우리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배우게 하시고 그분이 살아간 삶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주기도문김치성 목사(대구영안교회)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닮자

▲ 고병수 목사/창곡교회 담임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유월절 절기에 유월절을 지키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3년간의 전도사역은 참으로 놀라운 기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백성들의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으며(마 3:23),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는 것에 권위가 있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였습니다(마 7:29~). 예수님의 인기는 이스라엘에서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람들은 이분은 우리가 고대하던 메시아 즉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구세주는 자기들을 지배하는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이 온 만국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게하고, 온 천하만국을 다스릴 왕이 되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국을 다니면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넉넉히 그런 일을 하실 메시아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공생애 3년을 마치고 맞이하는 유월절 절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자기 때가 되었다 하시니 제자들 생각에는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로마제국을 그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천하를 다스릴 왕이 되시려나 하고 생각하고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형제간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서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주님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라고 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다른 열 제자가 지켜보고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서로 누가 더 높으냐 하고 분쟁이 일어났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2제자를 불러 놓고 42~45절에 교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인간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사시고 그를 따르는 제자 된 자들에게 너희도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삶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고 교훈하시고 섬김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까?

# 진정한 인간 사랑의 삶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우리가 다 잘 알듯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보여 주러 오신 것입니다(요일 4:16, 요 3:16, 빌 2:5).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그를 평생 섬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군림하지 않고 그의 종이 되어 섬기는 것입니다. 군대 사단장이 호령하다가도 집에 가서 손자와 놀면서 손자가 “할아버지 말 타고 싶어” 하면 할아버지가 손자의 말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가장 선한 역사 이뤄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훌륭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죽을 형편에 있는 자들을 살려 내는 일입니다. 병들어 죽을 자를 살려 내는 일, 절망에 처한 자를 소망으로 살려 내는 일, 죄에 빠져 영원한 지옥 갈 자를 구원하는 일 이 모든 일이 가장 선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말의 뜻은 보살핀다. 도와준다. 필요를 공급하여준다는 뜻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잘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이런 제도가 이루어져 가고 있지만 이런 정신이 성경에서 온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인 것입니다.

# 존경 받고 높임 받는 길

주님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43)고 교훈하십니다. 역사 속의 훌륭한 인물로 존경받는 모든 자는 다 인류를 섬긴 자들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독재자, 폭군, 나뿐 놈으로 평가 받는 자들은 권세를 가지고 백성 위에 군림하며 탄압하고 탈취하고 억압하는 자들입니다.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가 있어야 그 나라는 복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백성을 섬기려는 자세로 정치해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기업인들이 자기의 이익을 가지고 백성을 섬기려는 철학으로 살아가야 살기 좋은 나라가 됩니다. 권력, 지식, 재물 등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에 쓰지 말고 모든 자를 섬기는 일에 쓰는 것이 온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항상 섬기는 자로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섬김 :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김 : 예수님의 마음으로

본문: 마 20:25~28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우리에게는 섬김에 대한 두 마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식탁에 앉아서 먹는 자가 큰 자냐 아니면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가 큰 자냐?” 물론 앉아서 먹는 자입니다. “너희는 둘 중 무엇을 원하느냐?” 제자들에게는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제자들과 다릅니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앉아서 먹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긴다’는 말이 좋은 말이어도, ‘그것은 약자나 낮은 자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기피하며 싫어하기까지 하는 표현이 ‘섬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섬김’이라는 말은 매우 소중한 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되려고 하면, “나라를 위해서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기업인들도 “고객들을 섬기겠다”고 말하고, 동사무소나 구청 등의 창구에도 곳곳에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왜 곳곳에서 이 말을 애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이면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심리를 거꾸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성에 따른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 말에 대해 나누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입니다.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이자 특성입니다.

첫 인간 아담에게서부터 이런 삶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 내가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세기 3:11)

아담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는 “제가 먹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첫 인간 아담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공격적이 되어 싸우고 다투는 이유는 바로 ‘나는 살고 너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이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삶의 방식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태도로 살아가는 죄인 된 인간에게 열 가지 계명,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를 보면 모두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래서 가정을 깨지 말라.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남을 속이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살면 너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핵심은 상생(相生), 즉 서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최고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네가 살기 위해 내가 죽겠다’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보여 주는 섬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인간은 그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어야 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마음을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낳게 되면 처녀 때 가졌던 꿈을 모두 내려놓고 자녀를 키우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바로 어머니들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섬김은 한 사람에게 제한되어 있고, 그 사랑과 헌신도 왜곡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어떻습니까? 온 인류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삶에 있어 방향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방향성은 무엇입니까? 곧 삶의 태도입니다.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넘어서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로 향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살기 위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 삶의 자리에는 항상 생명이 시작되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쉽지가 않음을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을 보면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친구나 이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각자는 늘 혼자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잘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큰 명예와 존경,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변화되었습니다.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이 시작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고 그들의 꿈이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묻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던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땅에 선한 영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복음서와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의 삶의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의 영적인 혁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오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교회에 가라고 하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혁명입니다. 보통의 용기와 결단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30대, 40대가 들면 우리의 인생을 한 번씩 흔드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반을 뒤흔들어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이 바로 첫 번째 혁명입니다.

두 번째 영적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깨닫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불교처럼 무아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지상에서도 ‘나’라는 자아가 있고, 천국에 가서도 ‘나’라는 자아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면, 주님의 일을 한다고 우쭐거리며 내 이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주님을 높이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더 큰지 네가 더 큰지 한번 해 보자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은,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쳐 줄 때 변화됩니다. 제자와 아들과 딸은 다릅니다. 아들과 딸에게는 자율성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헌신할 때에도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내 속에 충만한 기쁨을 넣어 줍니다. 그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이런 때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통해서 예수 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섬김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섬김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섬김의 길을 가로막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경쟁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승리주의입니다. 승리주의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승부이며, 승부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실천하는 자리에서도 승리주의에 붙들려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인생은 승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겨야 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배구나 탁구, 테니스 경기를 보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서브’입니다. 공격하는 쪽이 상대편 코트에 공을 쳐 넣어 상대방이 받아치게 하는 것입니다. 단어로만 보면 ‘서비스’, 곧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승리주의와 함께 묶이니 상대가 수월하게 공을 받기 힘들도록 서브를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서브를 보며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저 서브 참 멋있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못된 서비스인데 말입니다.

테니스 프로 선수들은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공을 칩니다. 서브를 할 때도 그러합니다. 이 공은 상대 선수가 라켓을 갖다 대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서브나 그렇게 하여 득점하는 일을 ‘서비스에이스’라고 부릅니다. 일등 서비스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치지도 못하게 하는 서브가 왜 일등 서비스입니까? 서브가 승리주의와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높아지고 이겨야 된다는 것이 정치·경제·사회의 경쟁원리 속에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국민들을 위해서 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자주 국민을 입에 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결국엔 자기 구미에 맞게 움직이고 따라오는 국민들만 그들의 국민입니다. 처음에는 섬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권력을 잡으면 섬기겠다던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을 파괴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천박한 자본주의입니다. 기업은 ‘고객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객을 섬긴다면서 기업들이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고객의 돈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섬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기업’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놓는 것도 고객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돈 버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서비스에는 요금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서비스 개념입니다. 때로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산업을 ‘서비스 산업’이라고 부르면서, 그 유혹의 서비스가 사람들의 영혼을 돈과 맞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섬기는 일과 돈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자녀들이 어렸을 때, 구두를 닦는 일이나 설거지를 부탁하면 아이들이 곧잘 합니다. 그런데 다 끝내고 나서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했으니 돈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조차 섬김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반대급부를 요구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섬김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온 것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파송의식이 명백히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파송하셨다. 나의 건강, 나의 직업, 나의 사회적 직분, 나의 돈, 나의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겠다. 내가 이것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에게서 진정한 섬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파송의식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3년의 공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었겠습니까?

성품이 좋아서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파송의식이 있어야,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전문가로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의식이 있어야 섬김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멈추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지도자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지도력은 섬길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이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다른 말로 ‘에너자이저’가 됩니다. 에너지를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일이 잘되고, 그 사람을 보면 밝은 미래가 그려질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낮은 자가 되라. 네가 크고자 하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섬김이 진정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직분을 주시면, 권력을 가지게 허락하시면 그때 잘 섬기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바르게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자리를 사모합시다.

우리 소망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서 또 교회 밖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섬김 그 자체의 기쁨으로 애써 왔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잠시 보겠습니다.

– 영 상- (영상 글귀)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웃을 섬길 때 더욱 겸손하기 원합니다. 나의 섬김이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의 희생이 공로가 되지 않게 하소서.

힘 있는 자보다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게 하시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에 가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곳에 가게 하시고 내가 빛나는 자리가 아닌 주님을 빛나게 하는 자리에 있게 하소서. 소망교회는 18개의 제직부서, 권사회, 남선교회, 여전도회, 24개의 공동체, 모든 교육부서가 한마음이 되어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낙심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줄 알고,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내놓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게 하시옵소서.

소망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선교와 봉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의료, 장학, 군/경찰, 문화 선교와 탈북자 자녀를 위한 미래소망스쿨, 서부노인요양센터와 베데스다, 그리고 재난지역 긴급구조 등을 통해 하나님이 맡기신 섬김과 나눔의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섬길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내 속에 보람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다면, 내 주위의 삶이 바뀌고 우리 사회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이 섬김의 모임에 참여해 주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슴에 품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섬기려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파송하셨음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땅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워 나가는 주님의 아들들 딸들이 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 갈릴리공동체 성경공부 모임 안내

1. 일시: 매주 일요일(주일) 17:00- 18:30

2. 교육목적: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쓰임받는 일꾼 양성(제자훈련)

3. 강사: 한태완 목사 외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마3:17, 습3:17)

당신을 초대합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 나라와 의(義), 그리고 우리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갈릴리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평생 마음껏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봉사할 기회를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4. 후원 – 연혼 결혼사 (連婚 結婚社) 전화: 010- 2234- 8521,

대표번호: 1600-9578 이메일: [email protected]

홈페이지: http://yeonhon.com

집을 구입할 때 중개인이 한 집만 보여주고서 집을 사라고 하면 그 집을 결정하실 것입니까?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면 꼭 연혼결혼사를 찾으세요

헌신도 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생배필(天生配匹)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꿈과 희망과 기쁨의 다리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5. 기타: 남녀노소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신천지,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 등 이단 사절)

1) 문의: 02- 959- 3049

2) 후원계좌: 국민은행 083702- 04- 169089(갈릴리 공동체)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 http://blog.naver.com/jesuskorea , http://blog.naver.com/allcome )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 마 20:28

제 목 :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본 문 : 마 20:28

이 름 : 강성찬 목사 (전주동부교회)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기를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하시고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라는 목표아래 담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를 정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달로 정하였습니다. 생활 목표는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입니다. 이 시간 생활 목표인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여 받드시는 섬김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순종하며 부모를 받드러 섬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섬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순종하면서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효도는 순종하는 일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일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합니다.

옛날 농촌에 한 가정이 사는데, 부인은 교회를 잘나가는 집사님이고, 그 교회 여전도회 회장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자기 아내가 교회만 갔다 오면 때리고, 난리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는 자녀도 5남매나 있었지만, 남편은 노름하고, 사람 때리고, 주색잡기나 하고, 가정 살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여 집사님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며 아이들을 키워나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는데, 그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책을 잡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때리고, 핍박하여 교회도 못나갈 정도로 괴롭게 했답니다. 그렇게 매일 맞아가면서도 불평하나 하지 않고, 신앙 생활하면서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집사님이 40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때 남편이 정신이 번쩍 납니다. 집안 살림을 보니 막막합니다. 장례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그때, 목사님께서 광고하셔서 먹고 살수 있도록, 양식과 연탄도 도와 주고 장례를 인도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결국 미안한 마음에 “이제부터 교회를 나가야겠다!” 결심하고 예배라는 예배는 다 참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아내 죽더니 정신 차리고 하나님 믿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믿고 교회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으면 지옥 가는 문제 때문에 교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내와 목사님, 그리고 교회에 감동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안 믿는 친척이나 가족에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라고 전도해도 나오지 아니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삶에 감동을 받을 때 나오는 일들도 있습니다.

일군을 세울 때에도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딤전 3:7)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9,11)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거듭나 빛과 소금의 사역을 감당 하며 섬김의 사역을 다 할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의 섬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그 거룩한 손으로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들도 이와 같이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하시고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5,16)고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 사람을 섬기고, 상전이 종을 섬기면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내가 영생을 얻었는지 못얻었는지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요한서신에서 형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같은 생명을 받은 성도들은 믿지 않는 형제, 친척들 보다 더 반갑고 사랑스러워야 정상입니다. 이유는 육신의 형제는 육신의 피가 같지만 믿음의 형제는 예수님의 피가 성도들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들이 밉고 꼴 보기 싫다면 진정 거듭났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끌어당겨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얼싸안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 섬기지 않는 곳은 지옥이요 서로 섬기는 곳은 천국이 됩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알베르 까뮤는 모두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박사 학위만도 네다섯 가지나 되는 사람인데 아프리카 람바레나에 가서 흑인 문둥병자들을 치료해 주며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적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었습니다. 그는 노벨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고 흑인들을 치료해 주며 생애를 보냈는데, 사람들은 오늘날 그를 20C의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까뮤는 상금을 가지고 한적한 교외에다 멋있는 별장을 짓고 신나게 승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전주를 들이받고 직사해서 그의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남을 섬기는 생활이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밑지는 생활 같아도 이것이 보람 있는 생활이요 복된 생활입니다. 남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섬김의 삶을 위해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2:3)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곳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앞서 일하는 일군들은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섬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섬김을 받으면 교만해져서 패망하고 맙니다. 섬기는 삶은 교만을 버린 겸손한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형제와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 권력이 많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을 섬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체면과 자존심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발을 닦아주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곳에서 행해야 합니다. ‘낮아져라, 겸손하라, 버려라, 종이 되라……’. 이런 말들은 기득권을 가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선생과 주가 된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더 이상 낮아 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배웠기 때문에,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더 힘이 세기 때문에, 섬김에 장애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선행이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선행을 남들에게 선전함으로 자신들의 경건성과 의를 과시하려 했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낮은 자리 남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자리,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서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참 제자들이 됩시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섬김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영광 중에 왕 노릇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계시면서 한번도 그 능력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능력이 입 소문으로 전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피하셔서 산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잘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은 이기심이, 알량한 자존심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포기해야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2:7,8)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을 동일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공감한다는 말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고난도 당하시고,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고 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땅 끝 오지에 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음식들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습관을 따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오는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것처럼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남을 섬기기 위해 우리는 섬기려고 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저서인 ‘아프리카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읽으면 마음이 괴로운 사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산중에서 맹수에 쫓기고 있는 토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것을 본 같은 아프리카인은 그 쫓기고 있는 사람이 어느 부족에 속한 종족인가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부족의 한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다른 종족으로 인식이 되면 전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은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엄격히 보면 <나>이외에는 모두 타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타인에 불과합니다. 오직 나는 나 하나만의 생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행복이 있으리라고 믿어도 좋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실이겠습니다.

너 없는 나 그리고 나 없는 너. 이것은 외롭고 무기력합니다. 우주의 광대무변한 그 속에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이 지구에 살면서 우리가 세계가족을 형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너만의 불행도, 나만의 불행도 아닌 우리의 공통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슈바이처의 아프리카 관찰 중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쫓기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데까지 부족의 구별부터 한다는 그것만으로도 미개한 민족이라는 치욕스러운 낙인을 받아 마땅하다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그 아프리카의 미개한 토인과 같은 생각으로 지나왔던 길목은 없었던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수롭지도 않게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애의 애끓는 가슴도 없이 그냥 어떤 비극 앞을 지나쳐 버린 그런 무감각한 우리의 발길이 어느 길목에 남지 않았던가 하고 말입니다.(슈퍼 바이블-너와 나)

신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칼빈은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진정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섬기는 자가 됩시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합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시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요 13:1-17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서점에 나오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할 때 종교서적이든 일반서적이든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은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리더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맡은 그룹이나 조직을 세울 수도 있고 허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리더가 리더 되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믿는 자로서 리더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해야겠고 믿는 자로서 따르는 자들도 올바른 따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분의 실천은 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나 삶이 현장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분주하지만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고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맡겨진 일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섬김의 리더십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본받고 실행해야 할 제자도를 보여주십니다.

세족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

요한복음이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장까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개의 표적이 언급됩니다. 13장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일곱 개의 표적을 본 제자들을 믿음으로 확실히 세우기 원하셔서 말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위로 제자들을 양육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 12:2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의 행함을 본받으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것을 아셨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그 밤이 예수님에게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다락방에서 있던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종합해보면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시고,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하속들에 의하여 체포되고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고 아침에는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루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과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삼 년을 한솥밥을 먹고 지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들도 보아왔지만 아직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누가복음 22:24를 보면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 하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서로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심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식사 중에 왜 일어나시는지 궁금해 하며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께로 쏠립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예수님은 직접 물을 떠다가 대야에 담으시고 가까이 앉아 있던 제자들부터 발을 씻기시고 씻긴 발을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기의 발을 내맡기며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도,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할 일, 곧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광야인지라 먼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길을 걷고 나면 샌들을 신고 있는 발에 흙먼지가 덮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의 종이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종이 하는 일을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침묵과 충격 속에 바라보던 베드로는 그 손길이 자신에게 이르자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손까지 붙잡고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높으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아는 자들이 가지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씻어주심이 없이는 소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곧 당하실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그 죄 씻음을 통하여 온전한 영적 연합이 이루어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는 가운데 보여주는 사양은 겸손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이 됩니다. 주의 일을 맡겨도 부족함을 이유로 습관적으로 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일을 맡겨도 같은 이유로 사양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자꾸 사양만 한다면 도리어 불순종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베드로의 만류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문자적으로 ‘너는 일부분도 나와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 즉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 말합니다.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옵소서” 하면서 손과 머리를 예수님께 내밀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의 대답이나 요청이 멋있어 보이지만 그의 반응은 충동적입니다.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겸손한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은혜를 거절했던 것이며, 손과 머리를 씻겨 달라는 것은 적극적인 신앙 같으나 이기적인 욕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당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옵니다. 그러니 몸은 이미 깨끗한 것이요 오는 동안에 발에 묻은 먼지만 잔치 집에서 씻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구속의 피로 목욕을 했지만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의 흙을 묻히며 살아갑니다. 마음으로 (시기, 질투, 욕심), 말로 (혈기, 비방, 거짓말), 행동으로 (폭력) 짓는 죄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의로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로서 날마다 발 씻음, 곧 성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부분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더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사랑

세족을 통해 선생이 제자를 섬기는 겸손한 사랑,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끝까지의 사랑’을 방해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자기 오빠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격하며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향유에 젖은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최상의 헌신의 행위를 보여주는데도 가룟 유다는 옆에서 못 마땅해 합니다.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마리아에게 면박을 줍니다. 유다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회계를 맡았기에 마리아가 향유 판돈을 드렸다면 그 중의 얼마를 자기 수중에 넣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마리아에게 엉뚱하게 분풀이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도 정성껏 씻고 닦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를 지목하지 않고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유다의 양심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유다는 사탄의 충동질을 따라 예수님을 팔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6절에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유다에게 주시니”를 보면 예수님께서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제공하신 포도주에 적신 한 조각의 떡은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와 찢기실 살을 상징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주신 한 조각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습니다. 유다는 이를 받아들고 배반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심령이 “괴로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에도 “비통히 여기시고” 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표현 속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 인간으로서 느끼신 배신감과 연민의 정을 모두 드러내십니다. 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로서 생을 마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면목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랑에 대해 무지한 것은 유다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이 이룰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마땅히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셨지만 베드로가 실패할 것도 예고하십니다. 이곳에서 예고된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요한복음 후반부를 엮어가는 중요한 맥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도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실패는 21장의 디베랴 바닷가의 회복(21:15-19)을 통해 반전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사랑에로의 초정에 베드로가 응함으로 회복을 경험하며 주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수행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합니까?

1) 주님처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은 말이 아닌 행위로 예수님의 깊은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중생의 죄 씻음 후에도 매일매일 저지르는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세족에는 “내가 죄를 씻어주는 사람이다, 죄를 씻기 위해 세상에 왔다, 너희의 어떤 허물도 용서하고 씻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발을 씻는 제자들과 깊은 사귐을 가지시려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족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까지 하며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름다운 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보며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2)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절). 섬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긴 후에 그 밤의 사역에서의 교훈을 정리해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은 ‘디아코노스’ 곧 ‘섬기는 자’로서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닦는 행위를 통하여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4절의 겉옷을 ‘벗고’에 쓰인 단어와 10:11절에 선한 목자가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세족의 행위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족 사건은 예수님의 살과 제자들의 살이 맞닿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며 깨끗함과 회복됨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기억하며 더 겸손히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전도도 말로만 하고, 사랑도 말로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말로만 가르치게 됩니다. 자기 몸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믿음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채 행하는 겸손이나 섬김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온갖 죄와 허물을 정결케 하셨다는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인 섬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제자들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광 받는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예비하신 상급을 받게 됩니다.

3) 주님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이 힘써 행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제자의 사랑이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사랑의 모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은 이런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고, 섬겨야 섬김을 받고,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 사랑입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 주고도 아쉬워하는 사랑입니다. 머리로만 사랑이 아니라 허리를 수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자기의 지갑을 여는 사랑입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할 것이고, 그 때 예수님도 우리를 자신의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 속에서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섬김의 현장(가정, 이웃, 학교, 직장 등)으로 부르십니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많은 상처들이 생깁니다. 가정에서, 이웃에게서, 사업하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로는 남들에게 털어놓기 거북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몸까지 쇠약해집니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픈 상처가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위로와 치료함을 받았다면 우리들은 “상처받은 치료자”(wounded healer) 들이 되어 상처를 가진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진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은 후 물동이를 던져두고 동네 사람들에 전도하러 뛰어갔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고 주변의 핍박 속에서도 주여 내가 믿나이다 담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거지가 주님의 능력으로 치료함 받고 걸으며, 뛰며 하나님의 찬송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 상처받은 자들이 팔로마 한인 교우들의 간증과 섬김을 통하여 치료함 받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예수님의 권면을 좇아 서로의 발을 닦아주는 섬김의 자세를 가질 때 저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도 제자들에게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의 절정은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끝까지 언약을 지키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세족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시고 삶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함을 교훈하십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알고 행하는 자의 복’을 소개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을 알고 행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곧 겸손한 섬김이 복이란 뜻입니다. 복이 되는 겸손은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인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성숙된 제자들이라면 서로 발을 씻기며 남들을 섬겨야 합니다. 앞에서 이끄는 자나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섬기며 나아가는 그룹이나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 섬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들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축복들이 삶의 현장에서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본 요한복음 13장 1-17절 옥한흠목사 시리즈설교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본/ 요13: 1-17

2년 전에 제가 오사카 지역의 일본인 교회 500개 교회가 가입되어 있는 연합회의 초

청을 받아서 3일 동안 가서 집회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초청을 받

아 교역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또 평신도들과 교역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도 말씀을

전하고 왔습니다. 일본 목회자들에게 소원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언제 우리 교회는 수

백 명이 모이고 수천 명이 모여서 한 마음,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멋진

목회를 한번 해볼까?’ 이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왜냐하면 일본 교회는 일반적

으로 30명 내지 40명, 그리고 조금 많이 모인다는 교회가 100명에서 200명 정도이기 때

문에 목사님들이 매우 지쳐 있습니다. 오랫동안 몇십 명을 데리고 씨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전도는 잘 안되고 생활은 어렵고 이런 와중에서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

고 목회를 하고 계시니까 그분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순교자들입니다.

공항에서 저를 전송하러 나온 연합회 회장이 되시는 시미즈 목사님이 저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옥 목사님, 지금은 한국 교회가 저 앞에 뛰

어가는 토끼처럼 보이고 일본 교회는 느릿느릿 뒤따라가는 거북이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토끼보다 거북이가 앞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솝 우화를 들어서 그렇게 이

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그럴 때가 오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기억하세요. 만약 앞서 가던 토끼가 중간에서 잠을 자고

있으면 거북이는 와서 혼자 가면 안돼요. 깨워서 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언젠가 잠자는 토끼처럼 될 때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일본 교회가 깨워줘야 됩니

다 하는 의미로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튼 우리처럼 이렇게 수천 명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야말로 우리의 마음

을 주님께 담아드리는 이런 영광스러운 예배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막상 이런 예배를 매주마다 드리는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어떤 면에

는 감동이 없지 않습니까? 귀한 교회 주시고 귀한 예배 주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예배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상처받았습니까? 싸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염려와 근심의 짐이 있습니까?

주님이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이 모르는 슬픔이 있습니까? 주님이 함께 울어주신다

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하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주셔서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험하고 힘들어도 찬송하면서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자녀로 다시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즈음에는 어떻게 보면 이기주의가 정상적인 덕처럼 인정되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기주의가 행복을 보장받는 수단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종

종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싫으면 안 한다.” “내가 싫다는데 왜 그래?” 철저한 이기주의

를 증명하는 하나의 표현이 아닙니까? 어린이로부터 어른까지 “내가 싫다는데 왜 그래>”

“내가 싫으면 안 해.” 이런 말들을 조금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뱉고 그 말대로 행동하

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정에도 그렇고 사회에도 그렇습니

다.

결혼 생활을 예로 들면 ‘나 싫으면 안 산다’ 하는 생각이 너나 할 것 없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은근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혼이 자꾸 늘어나나 봅니다. 일단 결혼

했으면 남편과 아내로서 책임져야 할 일이 있고 희생을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결

혼 생활이란 책임과 희생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것인데 책임과 희생은 안중에도 없고,

‘내가 싫으면 안 살아도 된다’ 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식을 낳았으

면 부모는 좋든 싫든 그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

즘에는 그런 책임과 희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병들

면 아내가 도망을 가버리고, 부부가 말다툼 한번 했다고 쉽게 갈라서고, 자식을 떠맡기

싫다고 고아원에 갖다 맡기고는 가버리는 것입니다.

에릭 프롬이라고 하는 심리학자를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서를 조금 하

시는 분들은 이 에릭 프롬이라는 저자의 책을 아마 한 권 정도는 손에 들어보았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워낙 탁월한 분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알 것입니다. 그는 이

기주의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관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이나 인격에 대한 존경 따위는 아

예 안중에 없다.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자기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으며 모든 사

람과 모든 것을 자기에게 얼마나 쓸모가 있느냐 하는 것으로만 판단하려 든다.” 옳은 말

입니다.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근본적으로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

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기

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회는 이기주의가 마치

세상을 사는 처세술인 것처럼, 덕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떠받드는 참으로 무서운 사

회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듣기에 조금 거북하고 어색한 교훈을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

고 계십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

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예수를 몇십 년을 믿어든, 아니면 불과

몇 년밖에 못 믿었든 간에 요한복음 13장을 10번 이상 보신 분들이 꽤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발을 씻으라

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하려고 애를 쓰셨습니까? 이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놓고 고뇌하며 고통하며 주님 앞에 부끄러워한 일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 중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나 “서

로 발을 씻기라”고 하신 말씀을 기독교의 상투적인 표현으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경

향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듣기 좋은 설교 제목 하나 정도로만 기억을 하려고 합니다.

남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만약 우리 마음속에 이와 같은 생

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성령께서 그 생각을 모두 쓸어내 주시고 예수님처럼 나도

발을 씻기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새롭게 다짐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대 나라는 원래 건조한 땅입니다. 요즘처럼 아주 잘 만든 구두를 신고 다니면 걱정

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1 킬로미터만 걸어도 온 발에 먼지가

수북히 쌓일 정도로 발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의 문간에는

반드시 물을 담아 놓은 항아리가 있고 그 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발을 씻도록 준비가 되

어 있습니다. 종이 있는 가정은 종이 나와서 손님들의 발을 씻겨 줍니다. 만약에 씻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자기가 발을 씻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 나라에서는 발을

씻고 드나드는 것이 아예 하나의 습관이 되었고 전통이 되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시고 유월절이라는 대명절을 맞게 되었습니

다.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이나, 예수를 갓 믿으신 분들은 유월절이 무슨 명절인지 얼

른 와 닿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유월절을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나라의 8.15 해방 기념

일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명절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유월절에는 식구들이 둘러앉아 양

을 잡아 놓고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그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면

서 고기를 먹고, 또 누룩이 들지 아니한 빵을 먹고,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를 기억하는 귀한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 유월절을 마지막으로 보내게 되어 있었습니

다.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기 위해서 미리 준비된 다락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 가셨습

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걸어 다니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발이 온통 더러워져 있었습니

다. 그런데 그들이 유월절 만찬을 먹을 다락방에는 호스트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식사

준비만 되어 있었을 뿐 예수님과 제자들을 접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러워

진 발을 씻어야 하는데 씻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서로

씻어 주던지 아니면 자기가 자기 발을 씻어야 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 일어나서 예수님의 발

을 씻겨줄 줄로 아셨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게 기다리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고 음식을 다 먹어 가는데도 제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일어나서 발을 씻

어 줄 엄두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가관이었던 것은,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그

만찬 석에서 제자들끼리 눈에 보이지 않는 파워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하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하루만 지나면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말씀을 수없이 하셨습

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심각한 어떤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고 무거웠습니다. 어떤 면에는 예루살렘 전체의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무슨 일이 터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을 만

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처지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파워 게임을 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예수님과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슨 생각에 사로 잡혔는지, 누가 예

수님에게 제일 인정받고 있느냐? 또 성만찬 자리에 앉으면서 누가 예수님 제일 가까운

오른쪽에 앉느냐? 하는 것 가지고 아마 서로 마음으로 씨름을 했나 봅니다. 참 가관이

아닙니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

니다.

이렇게 파워 게임을 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고 계셨던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다

말고 일어나시더니 겉옷을 벗어 옆에다 놓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매시고 문간에 가셔서

대야에 물을 부어 가지고 돌아 와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느 제자

를 제일 먼저 씻기셨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처음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누군가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제자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일어나서 여러분의 발을 씻으려고 대야에 물을 떠오면 적어도 예의가 있고 상

식이 있는 사람 같으면 가만히 앉아있겠습니까?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제자들은 전부

다 멍청하게 발을 내밀었습니다. 겨우 베드로 한사람만 ‘아이고 주님 안됩니다. 내 발은

못 씻깁니다.’하고 조금 염치가 있는 몸짓을 했지 다른 제자들은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발만 내놓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몰염치한 인간들입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의 발을 다 씻기셨습

니다. 그리고 더러운 물을 갖다 버리고 그 다음에 손을 닦고 겉옷을 입고 제자리에 앉으

셨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 있는 열세 사람 중 발이 더러운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다 씻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일어나서

“예수님, 죄송합니다. 예수님 발 주세요. 제가 씻겨 드리겠습니다.” 하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는 분위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 예수님의 발을 씻기려 일어산 사람

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그런 사건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3년을 배워도 영적으로 캄캄하고 멍청해지면 이런 꼴이 됩니다. 예수 10년

믿어도 영적으로 어두우면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시 자리에 앉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 중요한 교훈을 들려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

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

다. 내가 그러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여, 랍비여”하고 부르며 3년 동안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선생님이라면 자기들은 제자라는 말입니다. 제자는 곧 배우는 자

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하고 불렀습니다. “주여” 하는 말은 “하나님” 하고 부르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뭐라고 그러십니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선생이요 주다.”

그 다음에 이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

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요 선생인 내가 제자요 종인 너희의 발

을 씻겼다면 너희끼리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

음에 주님은 일반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

니.” 그렇죠? 심부름 가는 사람이 높습니까? 심부름 보내는 사람이 높습니까? 심부름 보

내는 사람이 높죠? 이건 상식입니다. 이건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또 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 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

희들이 선생이다 하나님이다 하고 부르는 내가 낮아져서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면 나의

종이요 나의 제자가 된 너희들이야말로 당연히 발을 씻겨야 된다. 선생이 발을 씻기는데

제자가 발을 씻기지 않고 뻣뻣하게 서 있으면 그것은 자기가 선생보다 높다는 이야기밖

에 더 되느냐? 제자는 선생이 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한다. 너희들이 이것을 잘 알고 행하

면 복이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잘 모르고 행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에게 화가 있다” 하

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소중한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당

시의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저를 위시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남의 발을 씻

겨 주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신앙 생활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발을 씻겨 주셨는데

나는 발 씻기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그렇지 않느냐 그 말입니

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입으로 예수님을 향해서 “선생님”, “주님” 하고 쉽게 떠듭니다.

어떻게 선생님과 닮지 아니하는 제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부르면

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그의 자녀가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모순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담고 ‘야, 내가 뭔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고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는 예수님보다 높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도 더 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낮은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발을 씻기셨다면 당연히 서로 발을 씻겨

야 합니다.

겸손하라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이 행동에 내포되어 있는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두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발을 씻어주는 행동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우리가 대충 감은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

에 옮기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윌리엄 버클리라고 하는 유명한 주석가가 이 본문을 가

지고 참 깊이 있는 설명을 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

로 말하면 겸손할 필요가 없는 시간에 겸손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않아도 될 때에 예수님

은 겸손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겸손해지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때에 예수

님은 오히려 더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 사실을 보게 됩니다.

먼저 3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는 중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

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나면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는 영광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보

좌에 계시던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겉옷을 벗으신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기의 영광의 옷을 벗어서 보좌에 내려놓으시고 낮아지셔

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보고 하나님인 줄 몰랐습니다.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감히 저 사람

이 하나님이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사렛 목수, 아니면 나사렛 촌놈, 아니

면 그저 조금 똑똑한 촌놈, 선지자 중의 하나, 그 정도만 생각했지 그 분이 하나님이라

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만큼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셔서

스스로 낮아지신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영광도 다 벗어놓고 오셨

고 권세도 다 내려놓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죽으실 것

입니다. 그리고 사흘만 지나면 죄와 사망을 깨뜨리고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

나님 나라에 벗어 놓았던 영광의 옷을 하나님이 다시 입혀 주시게 되어 있고 하나님 나

라에 두었던 그 권세,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 모든 인류를 심판하시는 영광스러운

그 권세를 주님이 다시 손에 쥐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벌써 아셨습니다. 때

가 다 된 것을 아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굉장히 우쭐해질 수 있는 순간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특히 제자들로부터는 경배를 받으셔야 될

자리에 지금 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영광과 권세가 자

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을 아는 그 순간에 오히려 그는 제자들 앞에 엎드려 대야에 물

을 떠 와서 발을 씻겨 주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의 극치입니다.

제자들을 항해서 “나는 이제 하나님 나라로 가노라. 신발을 벗고 내 앞에 엎드려라.”라

고 명령해도 괜찮을 그런 자리에서 오히려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가끔 보면 평범하게 신앙 생활 할 때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남을

섬기는 일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을 내더니 권사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고, 장로

가 되고, 순장이 되고나서는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섬기는 일은 도대체 않으려는 사람들

이 가끔 있습니다. ‘아이고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합니까?’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이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제 후배 목사님이 목회 하는 교회의 장로님들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그 교회에

부임해 가신 지가 한 2년 되는데 그전까지 그 교회는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장로님들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자리에 장로님이 계시면 양해하시기 바랍니

다. 왜냐하면 장로님은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장로님들이 바로 하지 못하면 교회가

전부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막 휘저었습

니다. 그리고 교인들보고는 거룩하게 살라고 해 놓고는 자기들은 당회실에 앉아 가지고

예배 시간에 예배 드리러 가지고 않고 조선 일보를 펴놓고 읽느라고 정신이 없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교회가 크게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

니다. 이런 어려운 교회에 그 목사님이 가셨는데, 한 반년 지난 다음에 제자 훈련을 시

작했습니다. 장로님들이 평생 받아보지 못한 제자 훈련을 그 목사님 앞에서 받으면서 서

서히 자기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게 되었고 마음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장로

님들끼리 모여 가지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높아졌다.

예수님은 높아질수록 낮아지셨는데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 살아왔다. 이제부터라도 고치

자.” 그래서 토요일마다 장로님들이 모여서 그 교회 화장실 청소를 전담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화장실 청소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상입니다.

사람이 높아질수록 낮아져야 되는 것이 주님의 교훈이고,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가까

이 다가갈수록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본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자기를 팔려는 무서운 계략을 품고

있는 가룟 유다의 발도 서슴지 않고 씻겨 주실 수 있었고, 높아지기 위해서 서로가 도토

리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발을 씻어 줄 수가 있었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님의 발을 씻겨줄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몰염치한 제

자들의 발을 씻겨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을 닮고 싶지 않습니까? 저

나 여러분이나 이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은근히 한 가지 걱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제자들과는

작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50일만 지나면 이 제자들은 신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하

신 주님과 40일 동안 만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사진을 듣고 나서 그 다음에 한 열흘

동안 다락방에서 성령을 기다리다가 성령을 받게 되는 50일 후에는 이 열두 제자의 신분

이나 역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

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3년 동안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

시고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3천명, 5천명, 수만 명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

에 두손들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 부흥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당

연히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비롯한 제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높이

들어 사용하시는지 그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그들이 용서하면 용서를 받고, 그들이

저주하면 죽음을 당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그들은 이제 50일 후면 그만큼

굉장한 영적 권위를 가지고 일하는 사도들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가서 제자들

이 너무 교만해진 나머지 서로 싸우고 헐뜯고 갈라지는 일이 일어나지 아니할까 은근히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7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17장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기도해 주신 내용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

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하나

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

약간 염려하시는 바가 있었나 봅니다. 사람이 비천할 때는 그렇게 싸우고 경쟁하고 교만

하지 않지만 신분이 높아지고 사람들로부터 굉장한 존경을 받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쉬운 것이 인간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제자들이

수천 명 수만 명의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들의 손에서 이적 기사가 나고 엄청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큰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면 자연히 우쭐해 가지고 잘못하면

서로 질시하고 서로 교만하면서 헐뜯고 비판하고 나중에는 갈라서고 하는 일들이 얼마든

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마 이것을 염두에 두셨나 봅니다. 그래

서 주님은 특별히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라. 겸손

해라.”하고 교훈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될 때 가장 위험한 시험이 있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

에 장로교라는 이름을 붙인 교단이 제가 듣기로 한 300개나 된다고 합니다. 무슨 교단이

300개나 됩니까? 장로교가 무슨 300개나 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다. 어

떤 데는 보면 교회 한 50개를 놓고 교단을 만들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총회장이 되고 노회장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지도자들이 교만해

가지고 서로 발을 씻겨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해칩니다. 그러나 겸손은 사람은 치유합니다. 서로 발을 씻기기를 원

하는 정신을 가진 자들이 모인 곳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거기에는 사람을 치유하는 능

력이 나타납니다. 가정에서 발을 씻깁니까? 거기에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나타나고 천

국을 이루게 됩니다. 교회 안에 발을 씻기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모입니까? 그곳이야말로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

게 겸손해 지기만 한다면 가룟 유다와 같이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사람의 발도 씻겨줄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의 발도 씻겨줄 수도 있습니다. 염치없는 사람

의 발도 씻겨줄 수 있습니다. 진짜 겸손은 교만한 자의 발을 씻길 수 있는 겸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섬기라

둘째는, 섬김의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오면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몸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몸이지만 예수님의 손일 수도 있고 예

수님의 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의 심장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지체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을 한번 보십시오. 지체 중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지체는 하나

도 없습니다. 심장이 심장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파가 허파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허파는 몸을 위하고, 심장은 몸을 위합니다. 모두가 몸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일단 신앙 생활을 하면 우리는 다 예수님의 몸을

위하는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섬기지 아니하면 내가 죽습니다. 내가 섬기지는 않고

섬김만 받으려고 하다가는 결과적으로는 내가 병들어버립니다. 심장이 자기만을 위하고

있으면 자기 자신이 죽어버립니다. 몸이 죽는데 자기가 왜 안 죽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섬김이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

랑하는 것은 내 몸입니다. 그러나 내 몸만 아끼고 사랑하는 자는 이기주의자입니다. 내

가 내 몸을 사랑하고 아끼고 섬기는 그 정신을 다른 사람에게 연장시킬 때 비로소 이기

주의가 이타주의로 바뀝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네 몸을 아끼고 섬기지 않느냐? 그

정신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 주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것은 예

수 믿는 사람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요, 반드시 해야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안 되는 것이 있다면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중생 받

았다고 하면서 너무 뻣뻣합니다. 너무 교만합니다. 학력이 좋으면 뭐합니까? 조금 쌓아

놓고 살면 뭐합니까? 인물이 잘 났으면 뭐합니까? 큰집에 살면 뭐합니까? 주안에서 볼

때 다 죄인이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똑같은 처지인데 거기

에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더 낮아져서 형제의 발을 씻

겨 주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근본적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으면서

그렇게 안 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 주보에 보면 우리 교회 이번에 대각성 전도 집회 때 결신 한 형제들 중에

서 300명이 등록을 한 것을 여러분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 아니면 이제 갓 예수 믿기로 시작하신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예수님께서 섬기는 것처럼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예수 믿는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여러분에

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먼저 믿

은 그 사람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것을 본 받으면 안됩니다. 낮아져서 섬겨야 됩니다.

이럴 때 자기도 살고 형제도 삽니다. 서로 섬김으로 서로가 건강해지고, 서로가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반에 들어가면 남편이나 아내의 발을 씻겨주고 감상문을 써오게 하는 숙제

를 꼭 한번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가운데서 해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

서 그저 습관처럼 남편의 발을 씻어 주는 부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뭐 감정이

있든 없든 그저 씻어줘야 되는 줄 알고 씻어 주면 끝나니까요. 그러나 결혼을 하고 10년

을 살아도 생전 그렇게 해 본 일이 없는 부인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안 하던 일

을 갑자기 하려면 부부 사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느 자매 이야기입니다. 이제 숙제를 받아갔습니다. 남편의 발을 씻어 주고 그 감상

문을 써오라는 것이었습니다. 1주일 동안 어느 날인가 택해서 한번은 씻어줘야 되겠는데

도무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해야지 하다가는 넘어가 버리고 내일 해야지 하

고는 또 넘어가 버리고 자꾸 넘어가다가 이제 내일 제자 반에 나가야 되는데 하루밖에

안 남았습니다. ‘오늘은 꼭 해야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야 돼.’ 아침부터 마음에 다

짐하고는 저녁에 남편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늘은 눈 딱 감고 해야 된다.’ 이렇

게 생각하고는 기다리는데 드디어 남편이 벨을 누르고 들어왔습니다. “여보, 빨리 와요.

빨리 따라 와요.” 하고는 손을 잡고 끌고 갔습니다. “어디로 간다는 거야?” “아이. 글쎄

오라니까요.” 그래서 끌고는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변기 위에 뚜

껑을 딱 닫아 놓고는 그 위에 앉혔습니다. “여보, 여기 앉아요. 내가 보니까 당신이 회

사에서 너무 시달리는 것 같고 얼굴에 피곤이 가득한데 내가 좀 어떻게 위로를 해 주지

못해서 늘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 내가 당신 발을 씻어 줄게요. 자 앉아요.” 그리고 양말

을 싹 벗기고는 따뜻한 물을 가지고 발을 씻겨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남자는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도대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습니다. 발을

씻어 주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서먹서먹한 일이라도 그런 처지가 되면 생각이 달

라집니다. 묵묵히 앉아서 자기 발을 씻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는 남편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부드러운 손으로 씻어주는

아내를 쳐다보면서 그 동안 아내에게 잘못했던 여러 가지 생각도 나게 될 것이고 미안하

다는 생각도 나게 될 것이고 ‘참 사랑스런 아내다’ 하는 그런 마음도 생길 것이고 여러

가지 감정이 생길 수 있겠지요. 또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의 발을 묵묵히 씻어 주면서 처

자 먹여 살리려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뛰고 밖에 나가서 상처 입은 것, 안 들어

도 될 말 다 듣고 들어오지만 가족들에게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항상 껄껄 웃으면서

가족들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남편의 그 여러 가지를 마음씀씀이를 생각하면서 아마 눈시

울이 뜨거워졌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그 부부가 뿅 가버렸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출근을 하면서 그날 따라 봉투를 하나 건네주면서 “여보, 내가

그 동안 당신에게 옷 한번 제대로 사준 일이 없는데 오늘 이것 가지고 가서 쇼핑이나 하

라고.” 그래서 너무 고맙다고 그러고 남편을 보낸 후에 봉투를 열어 보니까 50만원이 들

어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 부인이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나봅니다. 감상문을 쓰라니까 이제 감상문을 써야 되지 않습니까? 감상문을 쓰다가 눈

물 콧물도 흘리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좋은 남편 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 기도를 했

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음속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남편

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내가 이것을 들고 가서 쇼핑하면 좀 문제가 있다.’ 그

래 가지고 50만원을 그대로 들고 와서 헌금을 해버렸습니다. 발을 씻겨 주면 거기에 기

적이 일어납니다.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랑이 회복됩니다. 마음의 여러 가지 고통이 사

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씻겨 주면서 조심을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따뜻한 물을 가지고

가서 씻어 줘야지 얼음물을 담아와서 씻어준다거나 80도나 되는 뜨거운 물을 들고 와서

씻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은 떠오지 않고 마른 떼만 벗기려고 애를 써

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남의 발을 씻겨 주고 섬기는 것

도 중요하지만 자세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세, 부드러운 자세가 중요합니다.

따뜻한 물이라야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형제를 섬기고 형제 앞에 겸손한 모

습을 보일 때 온유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발을 씻어주면서 무뚝뚝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너무 흥분해 가지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

을 씻길 때 자세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섬김으로 얻는 축복

예수님은 이와 같이 남의 발을 씻겨주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복이 있다고 했습니

다. 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무슨 복이 있을까

요? 제가 볼 때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사라

졌습니까? 다른 사람을 섬겨 보십시오. 그러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또 어떤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마음의 병이 치유 받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애들러 박사라는 분은 자기를 찾아

오는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때 이런 처방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가서 2주일 동

안 매일마다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까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고 한번 실

천해 보세요. 2주일 동안만 그렇게 살면 당신 병은 깨끗이 낫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렇게 해서 나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마음에 왜 병이 생깁니까? 왜 짜증스럽고 왜 불만이 쌓이고, 왜

원망스럽고 남이 미워지고 왜 용서가 안됩니까? 왜 그렇습니까?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만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기주의가 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 얻어서 불만이 아닙니다. 없어서 불만이 아닙니다. 자기만 생

각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에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 보

십시오. 길에 나가 보십시오. 가정에 가 보십시오. 마음에 병을 가지고 그야 말로 우울

해 있는 사람, 잠을 못 자는 사람, 고통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자기만 생

각하니까 자기 마음의 불만을 누가 다 채워줄 수 있습니까? 천하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자기만 골똘히 위하려고 하니까 그 사람을 위해줄 사람이 천하에 누가 있습니

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병을 치료하려면 무조건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의 병이 치유 받습니다.

우리 교회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분들, 시한부 생명을 가지고 다 죽어 가는 바짝 마른

환자를 데리고 씨름하는 성도들을 한번 보십시오. 마음의 병이 있나 한번 물어 보세요.

행복한 모임에 가서 걸인들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앉아서 식사 대접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마음의 병이 있습니까? 미용 도구 들고 다니

면서 가난한 사람들 머리 손질해 주는 우리 미용 선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난곡의 빈민촌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일주일의 한번씩, 아니면 한

달에 한번씩 봉사하는 사람들을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장애인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형

제 자매들을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남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마음을 쏟고 그들을 위해

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병이 있나 한번 찾아보십시오. 마음의 병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발을 씻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합시다.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셨듯

이 우리 모두 발을 씻기는 삶을 삽시다. 우리가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살 때 우

리 마음속에 기쁨의 샘이 솟아납니다. 우리 마음에 있던 병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습니

다. 마음의 병을 고치고 기쁨을 회복하는 길은 ‘다오 다오’하면서 자기 욕구나 소원만을

채우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많은 것들을 이미 받아 누리고 있습니

다. 이것을 가지고 남의 발을 씻겨줄 때만이 이와 같은 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발을 씻김으로 인해서 하나님 주시는 놀라운 복을 가득가득 받아 누리

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교회가 이런 복을 받아 누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직

장, 일터가 이와 같은 복을 누리는 아름다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예수님 의 섬김

다음은 Bing에서 예수님 의 섬김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 #그리스도_제자의_자격
  • #섬김
  • # 마가복음_10:45
  • # 인자가_온_이유
  • #대속물
  • #섬김의_리더십
  • #진정한_리더십
  • #겸손
  • #세족식
  • #워싱턴_어머니
  • #3분
  • #말씀묵상
  • #삶에_기적을_체험
  • #믿음의_4대를_세우는 #성경암송_72구절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YouTube에서 예수님 의 섬김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분의기적] 진정한 섬김이란 | 예수님 의 섬김,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Leave a Comment